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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이주동안 내리고 있습니다. 아직 2015년 을사년은 남아있습니다만 추수동장 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경북의 중심지 김천에서 이번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에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정근재 김천

Transcription:

104 韓 國 禪 學 제36호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 김상일(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Ⅱ 목 차 Ⅱ Ⅰ. 시작하는 말 Ⅱ.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와 불교 관련 증서류 산문 Ⅲ. 불교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유교 윤리 권면 Ⅳ. 유불 교유론 Ⅴ. 유불 조화론 1. 김수온: 唯 心 一 理 的 儒 佛 融 通 論 2. 성 현: 唯 心 一 理 的 儒 佛 會 通 論 3. 이승소: 선불교적 名 實 論 Ⅵ. 맺음말 국문 초록 조선전기 사대부들의 불교 담론은 上 疏 [ 奏 議 ], 辨 說, 記, 序 跋 형식 등의 한문 양식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이 글은 이 가운데서 주로 序 에 속하는 贈 序 文 에 보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 되었음 (NRF-2011-361-A00008).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05 이는 불교 인식을 살핀 것이다. 특히 당시 집권층에 속하면서 정치와 외교 등 의 국가의 문장을 담당했던 문인사대부 들의 증서류 산문을 고찰하는 데 목적 을 두었다. 그것은 그들의 주의문이 사원 경제의 비대함이나 승려들의 비행을 비판 비난하는 정치적인 주장이 강한 담론이 대부분인데 비해, 증서문은 불교 나 승려의 행실에 대해 근원적으로 고찰한 의론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문인사대부 가운데 건국초의 정도전 권근 등은 승려들의 불교적 세계관과 반 유교적 윤리 행태에 대해서 비판하고, 유교 윤리에 부합된 행실에 대해서는 포 장하고 권면하는 증서문을 남겼다. 하지만 권근은 정도전에 비해 승려들에 대 해 조금 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다. 이후 세종 세조 성종대의 서거정은 儒 佛 交 遊 論 을, 그리고 김수온 성현 이승소 등은 儒 佛 調 和 論 을 펼친 증서문을 남 겼다. 특히 유불조화론은 김수온의 경우 유심일리적 유불융통론, 성현은 유심 일리적 유불회통론을, 이승소는 선불교적 명실론을 보이는 등 조금씩 그 성향 과 내용을 달리하였다. 이처럼 서거정 김수온 성현 이승소 등은 유불관계에 대 해서 저마다 조금씩 다른 주장과 인식을 보이면서도 공통적으로 불교와 승려들 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국문 핵심어 조선전기, 문인사대부, 승려, 불교, 증서문, 유불교유론, 유불조화론.

106 韓 國 禪 學 제36호 Ⅰ. 시작하는 말 고려 말 일군의 개혁적인 신흥사대부들이 문벌화한 권문세족과 권력화한 불 교세력을 누르고 원과 왜구의 침략을 물리쳐 공을 세운 무장 이성계를 추대하 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전기는 이러한 신흥사대부들과 그 후예들이 불교에 대한 강한 비판을 통해서 성리학적 經 世 論 을 펼치며 국정 운영의 기틀을 잡아 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대부들의 불교 비판과 억불숭유 담론은 言 路 를 맡은 사대부들의 上 疏 와 奏 議 文 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주로 비대한 사원의 사회경 제적 폐해와 그에 따른 승려들의 비리와 비행을 고발 비난하고 그 혁파를 주 장하는 날선 발언이 주류를 이룬다. 1) 이러한 담론은 대체로 정책적으로 실행에 옮겨져 불교 교단의 종파와 사찰 수를 대폭 감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태조 는 전국의 절을 242사만 남기고 나머진 폐사시키고 그 소속 토지와 노비도 국 가로 환원하여 대폭 감소시켰으며, 세종대에 이르면 7종의 종파를 禪 敎 양종으 로 통합시키고 사찰 또한 36개사로 한정시켰다. 2) 이에 따라 불교계는 크게 위 축되었고 승려들도 더욱 배척을 당하였다. 한편, 조선전기 사대부들의 문집에는 승려들에게 주는 贈 序 文 양식의 한문산 문이 꽤 실려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사대부의 날선 어조와 배척적인 언급이 넘치는 주의문에 비해 그 어조는 한층 누그러져 있고 상대를 받아들이며 권면 하는 태도로 되어있는 글이 적지 않다. 시대와 사람에 따라 차이를 보이긴 하 지만 文 人 士 大 夫 들이 승려들에게 준 증서문 가운데 어떤 것은 유불교유론 또는 유불조화론을 펴며 승려들을 대화와 교유의 상대로 맞이하고 있는 점이 있어 1)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조선왕조실록 의 불교 관련 기사는 대체로 비대한 사원경제의 폐해나 불교계 의 비행을 고발하는 臺 諫 이나 유생들의 언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김영태, 韓 國 佛 敎 社 槪 說, (서울:경서원, 1993), pp.165~183. 김상현, 한국불교사 산책, (서울:우리출판사, 1995), pp.118~119.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07 주목된다. 본고는 이런 점에 착목하여 조선전기 3) 사대부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의 한 단 면을 밝혀보고자 한다. 특히 당대 사대부로서 불교담론의 중심에 있던 몇몇 문 인사대부의 증서류 산문 4) 을 중심으로 거기에 투영된 불교와 불교인에 대한 인 식을 살펴보는데 중점을 둔다. 5) 따라서 이 작업은 조선전기 집권층 유가사대부 가운데 문인사대부들의 불교관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한편 조선시대 불교문 학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Ⅱ.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와 불교 관련 증서류 산문 주지하듯이 조선은 문장력을 갖춘 사대부가 국정 운영의 중심에 있던 문치주 의 국가였다. 사헌부와 사간원, 집현전[홍문관]과 예문관에서 언로와 문장, 학술 을 담당하던 문신들이 임금의 敎 命 을 대신하거나 임금의 과오를 바로잡고 관리 들의 행위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정치적 언술 행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3) 이 글에서 조선전기 는, 논의의 편의상 조선의 통치적 문물제도가 거의 마련되었던 성종대까지의 약 1백년간으로 한정한다. 4) 贈 序 는 벗이나 동류와 송별할 때 주는 한문학 양식이다. 주로 글을 지어주게 된 동기나 인연, 그리 고 장도에 대한 축하와 격려의 뜻을 담는다. 한편 증서문은 상대와 관련된 것으로 특정한 주제에 대 해 보내는 이의 식견과 의론을 담기도 한다. 따라서 증서문은 문체로서 서사는 물론 議 論 的 성향을 띠기도 한다. 진필상 지음,심경호 옮김, 한문문체론 (서울:이회,1994), 증서체 산문 조 참조. 한편, 이 논문에서는 논의의 편의상 표면적으로 증서 양식으로 된 글은 아니지만 내용상 증서의 성향이 강 할 경우 贈 序 類 에 포함하여 함께 논의하기로 한다. 5) 필자의 과문한 탓이겠으나, 지금까지 조선조 불교사 및 불교사상사 연구에서 조선전기에 쓰인 사대 부들의 승려들에게 주는 증서문이 부분적으로 인용되기는 했으나 하나의 史 料 群 으로서 포착되어 부 각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法 難 의 시대나 다름이 없던 조선전기의 불교사를 다루면서 그 법난의 주요 원인을 제공하였던 사대부층의 불교인식을 살피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일이라면 이 증 서류 산문 또한 마땅히 규모 있게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108 韓 國 禪 學 제36호 특히 이들의 상소나 주의문은 날선 비판으로 정치적 담론을 주도하였다. 한편, 조선전기는 어느 시기보다도 성리학적 통치에 필요한 문헌을 편찬하거나 외교 적 使 命 또는 명나라 사신의 접반을 위해서 시와 문장을 잘하는 사대부들의 역 할이 중요한 때였다. 외적의 침략과 같은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자연 문신이 중 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사대부들의 언술과 시문이 당시 조 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언술과 시문이 뛰어나 당시 정치적 담론을 주도하던 문인 성향의 사대부를 문인사대 부 6) 라 부르고자 한다. 한편, 불교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의 상소문이나 조선조 사대부들의 문집 에 실린 奏 議 文 을 살펴보면 崇 儒 抑 佛 의 불교 비판을 넘어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적 佛 事 와 일부 사대부들의 친불 행위는 물론 임금의 불교 옹호적 태도나 발언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판뿐이다. 7) 그것은 유가사대부 들이 성리학적 통치의 이념화를 위해서 임금을 설득하려는 정치적 주장이 지나 친 표현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승려들의 청으로 그들에게 준 贈 序 類 산문을 보면 불교 또는 승려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비난 일색만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사대부 들의 문집에는 실린 불교관련 증서문엔 불교의 출세간적 속성 또는 반유교적 성향을 비판한 글이 있는가 하면, 승려와의 교유론이나 승려를 칭송 권면하는 글이 실려 있어 사대부들 간에도 불교와 승려에 대한 인식의 편차가 드러나 있 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불교 관련 증서류 산문은 도학자 성향의 사대부보다는 詞 章 을 중시한 문인사대부들의 문집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6) 조선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역임했던 이를 文 臣 이라 한다. 본고에서 사용한 문인사대부 라는 용어는 이런 문신들 가운데 文 翰 職 을 주로 지내며 詞 章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그러한 시 문을 많이 남긴 사대부들을 가리킨다. 물론 이들도 經 學 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7) 이에 대해선 李 朝 實 錄 抄 存 卷 1~10( 中 央 佛 敎 專 門 學 校 編, 서울: 中 央 佛 敎 專 門 學 校, 1935~1937, 태 조부터 성종대[1392~1494]까지의 약1백여 년 간의 불교관련 기사 모음집)을 보면 무려 수천 건에 이 르는 불교 관련기사가 있는데 불사나 승려의 행실에 대해 문제를 삼는 기록이 많다.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09 조선전기 사대부로 불교 관련 산문을 남긴 이들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건 국 초 조선의 제도적 골격을 세운 鄭 道 傳 과, 태조대의 權 近, 태종대의 卞 季 良, 세종대에서 세조대를 거쳐 성종대까지 활약했던 金 守 溫 朴 彭 年 申 叔 舟 徐 居 正 李 承 召 姜 希 孟 金 宗 直 成 俔 洪 貴 達 金 馹 孫 등이 있다. 8) 이들은 거의 관각의 文 翰 職 을 역임하거나 문명이 있던 사대부로 辨 說 記 序 跋 등의 의론 성향의 산 문체로 불교와 불교인에 대해 논하거나 자신들의 견해를 펼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문장에 능했던 문인사대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증서류 산 문을 남긴 사대부들의 명단과 작품 편수, 작품명을 들면 아래 표와 같다. 9) <표> 작자(생몰년) 편수 작 품 鄭 道 傳 (1342~1398) 3 權 近 (1342~1398) 9 送 湖 長 老 詩 序 贈 祖 明 上 人 詩 序 送 華 嚴 宗 師 友 雲 詩 序 *모두 조선 건국 이전 작임. 贈 華 嚴 中 德 義 砧 序 贈 玗 野 雲 上 人 後 序 送 雲 雪 岳 上 人 序 送 嬴 菴 上 人 游 方 詩 序 *상기는 1391년 이전 작임 送 三 與 師 遊 方 序 送 明 上 人 詩 序 送 懶 庵 上 人 遊 金 剛 山 詩 序 達 空 首 座 問 答 法 語 序 澄 心 庵 詩 序 柳 方 善 (1388~1443) 1 送 性 哲 上 人 歸 密 陽 府 拜 掃 詩 序 金 守 溫 (1410~1481) 3 贈 敏 大 選 序 贈 喆 首 座 序 送 法 冏 道 者 序 朴 彭 年 (1417~1456) 4 送 日 本 釋 文 溪 使 還 詩 序 送 雲 谷 遊 香 山 序 送 月 菴 遊 方 序 送 雪 京 遊 方 序 三 笑 圖 序 徐 居 正 (1420~1488) 10 贈 守 伊 上 人 序 送 印 上 人 詩 序 送 日 本 國 藺 上 人 詩 序 送 峻 上 人 遊 妙 香 山 序 送 卞 上 人 詩 序 贈 行 上 人 序 贈 熙 上 人 序 送 郁 上 人 遊 妙 香 山 序 送 連 上 人 覲 親 之 洪 州 詩 序 送 日 本 球 上 人 詩 序 桂 庭 集 序 8) 이들은 모두 문집을 남겼는데 다만 박팽년의 경우는 遺 稿 형식으로 남아있다. 한편 柳 方 善 도 승려에 게 준 증서문 1편을 남겼는데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유배생활로 보냈다. 9) 이 작품들은 해당 작가의 문집(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에 근거하여 뽑은 것이다.

110 韓 國 禪 學 제36호 李 承 召 (1422~1484) 4 送 敏 上 人 還 五 臺 山 序 送 法 冏 上 人 遊 金 剛 山 詩 序 冏 大 禪 名 解 椧 石 寺 萬 景 軒 記 金 宗 直 (1431~1492) 2 送 藺 上 人 還 日 本 序 釋 戒 澄 遊 智 異 山 序 成 俔 (1439~1504) 4 禪 僧 正 堂 詩 卷 序 送 僧 覺 雲 歸 山 序 送 琳 上 人 遊 智 異 山 序 題 一 庵 松 堂 詩 卷 後 洪 貴 達 (1438~1504) 2 送 僧 希 則 遊 香 山 序 僧 淵 鑑 詩 軸 序 金 馹 孫 (1464~1498) 2 贈 上 人 雲 峯 序 贈 山 人 智 楫 序 이상에서 작품의 수로 보아 3편 이상의 증서문을 남긴 이는 정도전 권근 김 수온 박팽년 서거정 이승소 성현 등이다. 이들 가운데 권근과 서거정이 다른 이 들에 비해 압도적인 작품 수를 보이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정도전의 작품은 모 두 조선 건국 이전에 지은 것이다. 그리고 권근의 작품은 조선 건국 이전과 이 후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권근의 증서문에 보이는 불교나 승려에 대 한 인식과 태도는, 내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도 그 골격은 크게 변하지 않 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권근이 태종 9년(1409)에 세상을 뜬 뒤로 30여 년 간은 사대부와 승려 와의 교류가 어려웠던 듯 사대부가 승려들에 준 증서문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세종 말년인 1440년대에 이르러 세종이 卍 雨, 信 眉 와 같은 고승들 을 초대하여 문헌을 편찬하거나 10) 불사를 벌이고, 집현전의 학사들이 賜 暇 讀 書 者 로 선정되어 사찰을 이용하면서 점차 승려들과의 접촉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 다. 이후 성종 때 문형을 잡았던 서거정에 따르면 당시 자신을 포함한 김수온 신숙주 서거정 강희맹 이승소 등이 一 庵 이란 승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상종한다 10) 世 宗 實 錄,세종25년(1443) 4월 27일조 세번째 기사, 命 檜 巖 住 持 僧 卍 雨 移 住 興 天 寺, 仍 賜 衣, 令 禮 賓 供 三 品 之 廩. 卍 雨 及 見 李 穡 李 崇 仁, 得 聞 論 詩, 稍 知 詩 學, 今 註 杜 詩, 是 以 質 疑 也. 위 기사에 보이 듯이 만우는 두보시와 시학에 식견이 많아 두보시집 편찬에 참여하고 사대부들과도 교유하였었다.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11 고 하면서 그것은 여말의 이제현 이색 등이 탄상인 환암 등과 교유하던 유풍을 부활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11) 이들 서거정 그룹은 세조대와 성종대의 훈구사대 부들로 문명을 떨친 이들이다. 이 중의 김수온 서거정 이승소 성현 등은 불교 와 승려와의 교유에 대해 적극적인 논의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글은 의 론적 성향이 강하고 타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따라서 이 들은 선초 사대부들의 불교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고 하겠다. Ⅲ. 불교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유교 윤리 권면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들은 이전의 유교 사대부에 비해 불교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고려 말에 이르면서 번다한 불사와 권승의 발호로 민폐 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12) 따라서 그것은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당시 불교계가 국가와 민중에게 미치는 폐단에 대한 비판이었다. 13) 이러한 불 교계에 대한 비판은 신흥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학습하면서 성리학 적 관점에서 불교 교리를 비판하는 경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당시 불교 비 판의 정점에는 신흥사대부층의 좌장이었던 李 穡 과 조선시대 동방 理 學 의 祖 11) 서거정의 送 卞 上 人 詩 序 ( 四 佳 集 권6)에, 吾 東 方 益, 牧 諸 先 生, 亦 與 坦 上 人, 幻 庵, 龜 谷, 爲 方 外 交, 日 與 之 相 從, 有 韓 柳 歐 蘇 之 風. 寥 寥 數 百 年 之 間, 又 得 一 老, 而 吾 儒 之 申 泛 翁, 金 文 良, 姜 景 醇, 洪 應 之, 李 胤 保, 如 居 正 者, 亦 與 之 相 從, 可 謂 儒 釋 相 從 之 一 中 興 矣. 予 交 庵 將 四 十 年, 庵 之 風 韻 絶 人, 工 於 詞 藻. 然 恂 恂 若 不 能, 不 欲 以 綺 語 動 人. 라 한 것을 통해서 여말선초의 유불교유의 흐름 을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서거정은 이 글의 말미에서 이 글을 쓴 시점(성종9, 1478년)으로부 터 一 庵 을 사귄 것이 40여년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대략 세종 말년부터 유불 교유가 가능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2) 김영태, 한국불교사개설, (서울:경서원, 1993판), pp.156~157. 13) 김상현, 한국불교사 산책, (서울:우리출판사, 1995), pp.129.

112 韓 國 禪 學 제36호 宗 으로 일컬어진 정몽주가 있다. 특히 鄭 夢 周 는 불교의 현실 초월적 경향과 無 父 無 君 에 의한 반윤리성, 그리고 마음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였는데 이런 점은 이후 사대부들의 불교 비판의 방향타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 첨예한 척불론을 전개한 이는 이색의 또 다른 문하인 정도전 (1342~1398)이었다. 그는 건국 전부터 心 氣 理 篇 을 지어 유 불 도 삼교를 비 교한 뒤 유교가 우위에 있음을 밝혔다. 또 佛 氏 雜 辨 15편과 이를 보조하는 4 편의 관련 글을 통해서 불교의 심성론 자비설 윤회설 화복설 지옥설 걸 식설 등과 불교의 초월성, 반인륜성 등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진행했다. 특 히 그는 불교가 인륜의 근거인 부모와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반인륜성을 가장 주목해 비판했다. 그리고 노동을 하지 않고 걸식을 하면서도 호화롭게 사는 불 교인의 몰염치한 행태를 극렬하게 비난하며 불교는 인륜의 해충이오 천지간의 좀 벌레와 같다 14) 고 하였다. 한편, 정도전은 승려에게 준 증서문 3편을 남겼다. 이 가운데 贈 祖 明 上 人 詩 序 에서는 승려들의 무부무군적 행실을 비판하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킨 명상인의 유교 윤리적 행실에 대해서는 칭찬하며 포장하고 있다. 15) 권근(1352~1409)은 성리학자로 經 學 에 힘쓰면서도 詞 章 을 중시했던 문장가였 다. 그는 태조 말년에 정도전을 이어 문형으로서 정치 외교 등에 소용되는 국 가의 문장을 전담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조선전기 사대부 가운데 가장 14) 정도전, 佛 氏 乞 食 之 辨, 三 峰 集 제5권, 假 托 好 事, 種 種 供 養, 饌 食 狼 藉, 壞 裂 綵 帛, 莊 嚴 幢 幡, 蓋 平 民 十 家 之 産, 一 朝 而 費 之. 噫! 廢 棄 義 理, 旣 爲 人 倫 之 蟊 賊, 而 暴 殄 天 物, 實 乃 天 地 之 巨 蠹 也. 15) 그의 贈 祖 明 上 人 詩 序 (앞의 책 제3권)을 보면, 吾 聞 民 生 於 三 事 之 如 一, 惟 其 所 在 則 致 死 焉, 此 儒 者 說 也. 浮 屠 人, 出 家 與 世, 棄 親 如 遺, 其 他 宜 若 無 以 爲 意 也, 而 往 往 於 師 弟 子 間, 恩 義 篤 盡, 其 奔 難 赴 急, 反 出 仁 人 義 士 上. 如 祖 明 者, 是 則 此 心 之 中, 義 理 本 具, 不 可 得 而 泯 滅 矣.-(하략) 정도전은 이 밖에 送 湖 長 老 詩 序 送 華 嚴 宗 師 友 雲 詩 序 등 2편의 증서문을 남겼는데 전자는 호장로의 위의를 칭 찬하면서도 불교의 作 用 是 性 관점을 성리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내용이고, 후자는 화엄종사인 友 雲 이 유교 명문가 출신인 것과 널리 관광하여 식견이 넓은 점을 칭송하고 자신의 화엄경에 대한 식 견을 보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의 증서문 3편은 모두 조선 건국 이전에 지은 것이다.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13 많은 편수의 불교 관련 산문을 남긴 점이다. 16) 그런데 권근의 불교 관련 산문은 대개 성리학적 관점에서 불교적 가치관이나 승려들의 행실을 문제 삼고 있다. 다음의 그의 증서문도 이러한 기조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와 대사는 구름과 진흙처럼 처한 곳이 다르고 취향의 길도 달라 대사의 뜻을 돌릴 수 없고 대사가 가는 길도 만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별에 임하 고 보니 섭섭한 정이 마음에서 일어나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음이 어찌 근본을 둔 데가 없겠습니까? 여기에 나아가 궁구해본다면, 대사와 나는 같 은 마음이요, 사람과 사물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것이) 그 근원에서 시작되고 그 펼쳐지는 순서가 있어, (그것이) 어디서나 모두 갖추어지되 각기 마땅함을 가지 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저 시끄러운 세상에 움직이면서도 항상 고요하고, 더러 운 곳에 처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그 마음을 식어버린 재처럼 가지고 행적을 뜬구름처럼 하면서 스스로 고결하게 여길 것은 없는 일입니다. 한잠 자고 나신 뒤에, 도를 전수 받는 일에 힘씀이 만 약 애달프게도 미매( 迷 昧 )하게 여겨져 왕림해 주신다면, 내가 장차 눈을 비비며 기다렸다가 다시 한 말씀 더 하겠습니다. 17) 이 글은, 삼여라는 승려가 믿고 의지하던 스승이 열반하자 구도를 위해 그곳 을 떠나 諸 方 에 同 參 하러가기에 앞서 격려의 글을 청하므로 권근이 써 준 것이 다. 권근은 삼여와 이별하게 되니 섭섭한 마음이 난다고 하면서 이런 섭섭한 감 정은 삼여도 같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별에 임해 섭섭한 감정이 나는 것은 16) 권근은 불교 소재 산문으로 贈 序 8편 외에도 記 22편, 발 7편, 塔 碑 銘 및 贊 5편 등을 남겼다. 17) 권근, 送 三 與 師 遊 方 序, 陽 村 集 권16,, 吾 與 師 雲 泥 異 處, 趣 向 異 途, 師 之 志, 不 可 得 而 回 矣, 師 之 行, 不 可 得 而 挽 矣. 臨 別 悵 然, 情 發 于 中, 自 有 所 不 能 已 者, 是 豈 無 所 本 歟? 卽 此 求 之, 師 與 吾 一 心 也, 人 與 物 一 理 也. 其 原 有 自, 其 施 有 序, 在 處 皆 具, 各 有 攸 當. 寧 知 夫 動 於 囂 塵 而 常 靜, 處 於 汙 濁 而 不 染 者 不 在 於 玆 乎? 是 不 必 寒 灰 其 心, 浮 雲 其 迹, 而 自 以 爲 高 潔 也. 宿 覺 後, 務 道 之 傳, 儻 哀 迷 昧 而 惠 臨, 予 將 刮 目 而 待, 更 扣 一 說 矣. 이 증서문은 조선 건국 이후에 지은 글이다.

114 韓 國 禪 學 제36호 근본적인 이치가 있을 거라고 하고 그런 이치는 사물에게도 우리와 똑 같이 적 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치가) 만물을 생성하기 시작하면서 만물 중에 내재 되고 펼쳐지게 되어 개체마다 마땅한 바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상대방의 감정도 나와 똑 같고 그것이 일반 사물에게도 똑 같이 적용된다고 하는 관념은 주자 성리학의 우주론적 인성론과 理 一 分 殊 論 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18) 특히 세속에 움직이면서도 늘 고요할 수 있다 는 動 靜 論 도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이 있다[ 靜 中 有 動, 動 中 有 靜 ] 19) 라고 하는 朱 熹 의 동정론 에 그 줄기를 대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권근은 구도에 대한 심리적 태도나 구도 의 공간적 조건에 대해 삼여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속세를 떠나 가슴을 차 가운 재처럼 하고 그 자취를 뜬 구름처럼 한다고 해서 구도에 크게 도움이 되 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고결한 행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이다. 요컨대, 권근은 성리학적 관점에서 삼여의 불교적 가치관과 그 행실을 은 근히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곧 인간적 情 誼 를 억지로 끊거나 세상으로부터 멀 어지려는 행위는 유교 윤리규범에 어긋나는 것임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권근 또한 정도전처럼 불교적 가치관이나 승려들의 반 유교적 행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찾아오는 승려들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상대적으로 승려에게 주는 증서문을 많이 남 긴 것도 그런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그의 다른 증서문도 유교 사상 을 기준으로 불교를 바라보고 불교를 비판하는 한편, 승려들의 孝 親 과 같은 행 18) 朱 熹 는 宇 宙 之 間 一 理 而 已. 天 得 之 而 理 爲 天, 地 得 之 而 爲 地, 而 凡 生 於 天 地 之 間 者, 又 各 得 之 以 爲 性, 其 張 之 爲 三 綱, 其 紀 之 爲 五 常, 蓋 皆 此 理 之 流 行, 無 所 適 而 不 在. ( 吳 乃 恭, 儒 家 思 想 硏 究, 中 國 長 春 : 東 北 師 範 大 學 出 版 社, 1988, pp.255~256에서 재인용)라 하여 우주엔 一 理 만이 있으며 천지간에 생기 는 것이면 어느 것이나 理 로 성품을 삼는다고 했다. 또 一 理 之 實, 而 萬 物 分 之 以 爲 体, 故 萬 物 之 中, 各 有 一 太 極, 而 小 大 之 物, 莫 不 各 有 一 定 之 分 也. ( 吳 乃 恭 의 앞의 책 p.276에서 재인용)라 하여 만물 은 저마다 태극[ 理 ]를 가지고 있어 저마 정해진 분수가 있다고 했다. 권근은 入 學 圖 說 과 三 經 ( 詩 書 易 )과 春 秋, 禮 記 등에 자신의 견해를 붙인 淺 見 錄 을 저술한 성리학자였다. 증서문에도 그의 성 리학적 지식이 자연스럽게 끼어든 것이라 하겠다. 19) 吳 乃 恭, 앞의 책,pp.282~284. 참조.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15 실에 대해서는 포장하며 권면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Ⅳ. 유불 교유론 앞의 정도전과 권근에게서 보았듯이 조선조의 사대부에게 불교와 승려는 배 척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무부무군의 인륜을 저버린 승려들의 행 실은 유교의 윤리적 강령에 어긋나는 것이고 사회적 기강을 흔들게 하는 것이 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대부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승려에 대한 사회적 대우 또한 최하층에 위치하도록 했다. 따라서 사대부가 승려와 내 왕하며 교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대부라고 누구나 그 렇게 강경한 입장만을 가지고 대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집권 관료나 문인사 대부의 한쪽에서는 승려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배척하기보다는 그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포용하려는 입장을 보인다. 불가의 승려일지라도 그들의 행실 이 유가 윤리의 행위규범에 맞는다면 그런 점을 칭찬하고 그들을 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점은 앞서 살펴본 권근에게서도 일부 보이고, 세종 때 과거 에 합격해서 세조 성종대에 관각을 장악했던 서거정에 이르면 이러한 의식은 더욱 확대 심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거정은 동아시아 유가의 불가와의 전 통적 교유방식인 方 外 之 交 를 들어서 승려들과의 교류를 적극 도모하였다. 서거정(1420~1488)은 23년간이나 문형으로 나라의 문장을 관장했던 관각문학 의 대가였다. 자기시대까지의 우리나라의 한시문을 망라한 동문선 편찬을 주 도했고 동국여지승람 과 같은 통치기반 구축과 관련된 여러 가지 관찬 사업에 큰 공적을 남겼다. 한편 불교와 관련해서는 수백 편의 시와 10여 편의 산문을

116 韓 國 禪 學 제36호 남겼다. 그의 시문집을 보면, 그는 앞서 본 권근에 비해 훨씬 더 개방적인 태도 로 儒 佛 交 遊 論 을 펼치고 있고, 시승은 물론 일반 승려들과의 교유도 크게 꺼리 지 않았다. 이처럼 서거정이 승려들과 많이 교유했던 것은 그의 성장 배경이 크 게 작용했던 듯하다. 그는 9세 때부터 승려들에게 기초교육을 받았고, 중간에 10여 년간 절집에 유학하였으며, 벼슬길에 들어선 뒤에도 절에서 賜 暇 讀 書 를 한 적이 있어 날마다 사귀고 종유한 자가 승려뿐이었다고 한다. 서거정이 정면에서 유불교유론을 다룬 증서문엔 送 印 上 人 詩 序 와 贈 守 伊 上 人 序 가 있다. 먼저 송인상인시서 20) 에서는 객이 서거정에게 유가와 불가가 교 유할 수 있는가? 라 묻고 서거정이 그것에 대답하는 형식을 통해 그 교유의 가 능성을 말하고 있다. 서거정은 유가가 교유할만한 불가의 승려를 판단하는 근 거로 사람됨[ 人 ]과 마음[ 心 ], 그리고 도( 道 )를 들고, 1 사람이 괜찮고 그 마음이 괜찮다면 그 도가 옳지 못하다고 해서 교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라 하고, 2 도가 옳지 않고 그 마음도 옳지 않다면 그 사람이 괜찮다고 해서 교제할 수는 없다 라고 했다. 따라서 3 사람이 괜찮고 그 마음이 괜찮다면 그 도가 옳지 않 다고 하여 그와 교유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고 하였다. 말하 자면 사람됨과 그의 마음이 괜찮다면 그가 불교도라 해도 교유할 수 있다는 것 20) 서거정, 送 印 上 人 詩 序, 四 佳 集 四 佳 文 集 卷 之 四, 客 問 於 居 正 曰, 儒 者 之 於 浮 屠 氏, 可 交 遊 乎? 曰 可, 曰 亦 不 可, 曰, 先 生 旣 曰 可. 又 曰 不 可, 何 耶? 曰, 屠 氏 圓 頂 方 趾, 橫 目 監 鼻, 言 人 之 言, 食 人 之 食, 於 交 遊, 何 不 可 乎? 浮 屠 氏 不 耕 不 織, 無 父 無 君, 悖 人 之 倫, 絶 人 之 事, 於 交 遊, 可 乎? 曰, 則 先 生 之 可 之 者, 可 其 人 而 已, 不 及 於 其 道 其 心 也, 不 可 者, 不 可 其 道 而 已, 不 及 於 其 人 其 心 也, 將 何 以 可 不 可 於 浮 屠 之 交 遊 耶? 曰, 當 可 其 可 者, 而 可 之, 不 可 其 不 可 者, 而 不 可 之, 何 難 乎 哉. 今 有 浮 屠 氏 於 此, 其 人 可, 其 心 亦 可, 安 可 以 道 之 不 可 而 不 可 之 乎? 其 道 旣 不 可, 其 心 又 不 可, 安 可 以 人 而 可 之 乎? 古 之 名 賢 大 儒, 有 取 於 浮 屠 氏 而 可 之 者, 唐 曰 韓 退 之, 柳 宗 元. 宋 曰 歐 陽 脩, 蘇 子 瞻, 退 之 之 於 大 顚, 其 可 之 者, 具 寄 宗 元 書, 宗 元 之 於 浩 初, 其 可 之 者, 倍 於 退 之, 歐 之 於 惠 勤, 可 之 之 篤, 子 瞻 序 之 詳, 子 瞻 之 於 佛 印, 可 之 之 深, 雜 出 於 詩 文. 之 四 子 者 之 可 之 者, 可 其 人 也, 可 其 心 也, 不 可 以 道 之 不 可, 而 終 不 可 交 遊 也. 居 正 之 喜 與 浮 屠 氏 遊 者, 盖 取 法 於 四 子 矣. 予 於 印 上 人, 未 嘗 目 其 貌, 耳 其 言, 今 族 子 崔 永 灝 語 予 曰, 上 人 年 芳 學 碩, 喜 與 吾 儒 者 交 遊, 將 省 母 鎭 江, 交 遊 者 皆 詩 之, 求 文 於 叔, 予 曰, 予 於 印, 雖 不 相 識, 聞 永 灝 之 言, 實 僧 名 而 儒 行 者 矣. 又 以 居 正 爲 儒 老 而 納 交 焉, 其 人 也, 其 心 也. 雖 欲 不 可 之, 得 乎, 予 之 可 之 而 文 之, 可 也, 予 欲 可 上 人 以 顚 也 初 也 勤 也 印 也, 上 人 其 可 予 以 之 韓 之 柳 之 歐 之 蘇 者 乎, 上 人 名 釋 印, 號 明 鏡 云. 이하 본문에서 送 印 上 人 詩 序 에서 간접 인용한 부분들은 그 원문을 이 각주에 근거를 두었음을 밝힘. 이하 같은 방식으로 인용함.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17 이다. 서거정은 당대의 韓 愈 와 柳 宗 元, 송대의 歐 陽 脩 와 蘇 軾 이 이러한 교유의 원칙에 따라 각각 太 顚 浩 初 惠 勤 佛 印 등과 깊이 교유했다고 보았다. 다음 서거정이 守 伊 라는 승려에게 준 글도 그의 대표적인 유불교유론의 하나 이다. 한유와 유종원은 모두 이름난 유학자이다. 유종원이 유주에 있을 적에 불교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한유가 편지를 보내 그것을 비난하니, 유종원이 글을 지어 변론하였다. 그 내용은 자기가 불교의 학설에 미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변론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불교에서 취한 말이 있었다. 한유가 앞서 유종원 을 비난하였지만, 그가 조주에 있을 적에 태전이라는 스님과 친하게 지냈다. 어 떤 이가 한유를, 전에 한유가 유종원을 비난했던 것처럼 비난하니, 한유도 글을 지어 변론하였는데, 그 내용은, 자기가 불교의 학설에 미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변론한 것이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불교를 단절하겠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유와 유종원이 어찌 부처가 재앙도 내리고 복도 내린다는 설에 겁을 먹을 사람이었겠는가? 불교는 청정하고 담박하며 명성과 이익을 도외시하여 세 속에 연연하지 아니하니, 욕심을 줄여서 마음을 기른다는 그들의 학설은 우리 유학과 비슷하다. 우리 유학자들은 그 학설에 비록 미혹하지는 않지만, 심하게 배척하지도 않는다. 심하게 배척하지 않으면 그들을 이끌어 나아오게 하고, 이 끌어 나아오게 하면 그들과 어울리게 되고, 어울리게 되면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아한 실상은 마음[ 心 ]이 아니면 자취[ 跡 ]였고, 자취가 아니면 형세[ 勢 ]였다. 한유와 유종원은 유학자 중에서 걸출한 자들이었 는데도 이런 비난을 받았으니, 하물며 이 두 사람에게 못 미치는 사람들인 경우 이랴. 21) 21) 서거정, 贈 守 伊 上 人 序, 四 佳 集 권4, 韓 退 之 柳 宗 元, 皆 名 儒 也. 宗 元 在 柳 州, 嗜 浮 屠 法, 退 之 書 以 訾 之. 宗 元 爲 文 以 辨 之, 其 所 以 辨 之 者, 辨 其 不 惑 於 浮 屠 之 說 耳. 然 尙 有 取 之 之 辭, 退 之 旣 訾 宗 元, 在 潮

118 韓 國 禪 學 제36호 근대 이전의 한문문화권에서 수지한 도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귀는 것을 자신들의 처지에서 方 外 之 交 라 했는데 유가인 한유나 유종원이 太 顚 이나 文 昌 과 같은 승려들과 사귄 것이 그 모범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서거정은 한유 와 유종원이 불교를 즐기고 승려와 교유하였지만 불교의 설법에는 미혹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히려 불교에서 취한 점이 있고, 불교를 단절하겠다 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 했다. 게다가 불교는 청정하고 담박하며 명성과 이익 을 도외시하여 세속에 연연하지 아니하니, 욕심을 줄여서 마음을 기른다는 그 들의 학설은 우리 유학과 비슷하다 는 점을 들어서 꼭 배척할 필요가 없다 고 했다. 여기서 서거정이 한유나 유종원의 불교에 대한 대응 방식과 불교의 성향 에 주목한 것은 그가 제한적이나마 불교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서거 정이 유가의 처지에서 불가와 교유를 애써 피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 으로 그들과 상종할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런 점에 근거하고 있 음을 윗글은 보여준다. 다만, 윗글에서 서거정은 유가가 비난을 받는다 해도 불가와 어울려야 한다는 것은 승려들을 유교로 이끌어서 나아가게 하려는 것 이라 하였다. 그는 한유와 유종원이 태전을 사귄 것은 그를 유교로 교화하기 위 해서였던 것으로 본 것이다. 한편, 서거정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제현과 이색이 禪 坦, 幻 庵, 歸 谷 등의 선 사와 방외지교를 맺었던 유불교유의 전통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여말선초의 백여 년 간 그 전통이 끊겼다가 자기 시대에 이르러 신숙주 김수온 강희맹 홍응 이승소 자기와 같은 사람이 一 菴 이란 승려와 친하게 지내며 유불 간의 교유를 중흥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22) 州, 與 大 顚 相 善, 或 者 之 訾 退 之, 如 退 之 之 訾 宗 元, 退 之 亦 爲 文 以 辨 之, 其 所 以 辨 之 者, 辨 其 不 惑 於 浮 屠 之 說 耳. 末 嘗 有 絶 之 之 辭. 退 之 宗 元, 夫 豈 怵 於 浮 屠 氏 禍 福 之 說 者 哉. 盖 浮 屠 氏, 淸 淨 淡 薄, 遺 外 聲 利, 不 逐 逐 於 世, 拘 拘 於 俗, 其 寡 欲 養 心 之 說, 與 吾 儒 相 似. 吾 儒 者 雖 不 惑 於 其 說, 不 甚 斥 之, 不 甚 斥 之, 則 引 而 進 之, 引 而 進 之, 則 與 之 相 從, 與 之 相 從, 則 雖 訾 曰 嗜 浮 屠, 可 也. 然 其 所 以 嗜 之 者, 非 心 也, 跡 也, 非 跡 也, 勢 也. 退 之 宗 元, 斯 文 之 傑 然 者, 尙 有 是 訾, 况 不 及 二 子 者 乎? 22) 앞의 각주 11번 참조.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19 이상에서 서거정의 유불교유론과 승려들과의 적극적인 교유는 유가의 처지 에서 그들을 유교로 교화시키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 서 서거정이 불교를 얼마간 인정했다 해도 그의 유불교유론은 유가 중심적 교 유론인 것에 그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서거정은 도가 같지 않으면 함 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라는 유가 본래의 교조적인 교유 태도를 넘어서 상대 의 마음과 행실[자취], 그리고 그들이 처한 형편[ 勢 ]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의를 펼치며 많은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이처럼 그의 유불교유론은 승려와의 교유에 대해 교조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탄력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를 지향하고 있는 점 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Ⅴ. 유불 조화론 세종 말년에 이르면 선초 이래 강화된 억불정책이 다소 완화되면서 유불간의 만남이 조금씩 확대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종이 왕실과 국가적 불사 를 위해 만우나 신미와 같은 문식이 있는 고승을 부르면서 유불간의 만남이 부 활되고 점차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장에서 다룰 김수온은 불서의 편찬, 불 경 언해와 같은 국가적 불사에 적극 호응하면서 승려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고 안면이 많은 승려들의 부탁이 있으면 꺼리지 않고 증서문이나 기문 등을 써주 면서 우의를 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현이나 이승소 등도 당대의 대표적인 관각문인으로 여타 사대부들에 비해 증서류 산문이 많고 승려들에게 준 시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보면 이들 또한 당대 사대부들의 불교 담론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이들은 앞서 본 서거정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지만 서거

120 韓 國 禪 學 제36호 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교에 대한 전문적인 논의를 펴고 불교를 인정하는 입 장을 보인다. 따라서 불교와의 조화적 견해를 가졌던 이들을 한 무리로 보아 다 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들의 불교에 대한 입장 또는 인식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김수온: 唯 心 一 理 的 儒 佛 融 通 論 김수온(1410~1481)은 당대의 문장 거벽으로 성리학적 통치기반 구축을 위한 治 平 要 覽 과 같은 관찬 사업에 참여하였고, 釋 迦 譜 와 같은 불서의 편찬과 불 경의 번역[언해] 등 불사에도 공헌한 바가 컸다. 한편, 김수온은 세종대에서 세 조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불사를 주도했던 고승 信 眉 의 동생으로 산문에 노닐 며 불교계의 노숙들과 허물없이 지낸 일이 많았다. 23) 이처럼 불교계의 노숙들 과도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 형의 불교적 배경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 다. 그가 불교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불교적 삶을 지향한 흔적들을 보였기 때 문이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출가를 단행하려고 했던 것도 그런 예의 하나라 할 것이다. 김수온은 동시대의 서거정과 더불어 승려들과의 교류가 가장 빈번했던 사대 부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거정이 방외지교 란 전통적 관념에 기대 승려 들과 교유하면서도 유교적 명분과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김수온은 승려들과 교유에서 유가 중심적 방외지교를 넘어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층의 민중이나 노비들에 대해서도 차별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에 김수 온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그가 궁중의 경찬회에서 工 匠 또는 내시들과 계를 맺 23) 김수온, 贈 喆 首 座 序, 拭 疣 集 ( 拭 疣 集 補 遺 ) 참조.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21 거나, 24) 수륙재에서 음식을 나눌 때 걸식자들에게도 평등하고 풍족하게 나눌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25) 이처럼 신분적 상하를 가리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무 차별적 대우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를 넘어서 존재와 현상에 대한 불교 철학적 통찰에 근원해 있다고 보인다. 김수온은 贈 敏 大 選 序 에서 자신의 행적과 성향을 두고 유가 쪽에서는 불가 와 같은 사람이라 하여 비난하고, 불가 쪽에서는 불가와 같으면서도 유가적 행 동을 일삼는다며 비난한다 고 했다. 하지만 그는 유가와 불가 양쪽의 바람과 는 상관없이 자신은 도를 구해 즐기는 낙도자 라 하였다. 유 불에 대한 맹목적 인 경도를 떠나 참 진리를 찾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수온은 유가와 불가를 막론하고 자신을 찾아오면 똑같이 詩 書 와 仁 義 의 도리를 일러 준다 고 했다. 그런데 이를 두고서 유자는 유학으로 생각하고 불자는 불교라고 생각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유교 성인은 인륜을 버린 적이 없으며 생물의 목 숨을 함부로 죽이는 일이 없었고, 공자도 물고기를 그물로 잡지 않았다고 하여 역시 성현의 마음을 볼 수 있는 행적 이라 했다. 하지만, (유교적) 先 王 의 法 言 이 아닌 것을 말하기 보다는 (불교의) 淸 淨 寂 滅 의 도를 말하여 그 마음을 깨닫게 하 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언행을 두고서 유가와 불가 가 서로 다른 시각과 언어로 평가하여 조소하거나 비판해도 자신은 반복해서 시서와 인의의 설을 반복해 말할 것이다 라고 했다. 26) 이상의 김수온의 담론은 24) 세종실록,세종31년 5월 21일조, 두 번째 기사. 25) 문종실록,문종즉위년 4월 11일조, 네 번째 기사. 26) 김수온, 贈 敏 大 選 序, 拭 疣 集 ( 拭 疣 集 補 遺 ), 儒 者 譏 余 曰, 公 之 善 談 佛 理, 猶 僧 也. 不 網 不 釣, 惡 其 殺 命. 尤 猶 僧 也. 何 不 髡 其 顚 而 緇 其 服 乎. 佛 者 譏 余 曰, 又 公 之 善 談 佛 理, 猶 吾 也, 不 網 不 釣, 惡 其 殺 命, 尤 猶 吾 也, 而 廣 畜 姬 妾, 育 子 與 孫, 貪 嗜 麴 孼, 不 擇 鷄 猪 而 啗 之, 何 行 之 乖 剌 若 是 歟? 噫, 以 余 不 貲 之 身, 儒 佛 兩 毁 之, 信 難 乎 其 爲 人 矣. 雖 然, 余 之 所 樂 者, 道 也, 余 樂 道 也, 之 人 也, 誰 毁 誰 譽? 儒 者 之 徒 至, 則 必 告 之 以 詩 書 仁 義 之 道, 而 從 之 則 悅, 佛 者 之 徒 至, 則 亦 必 告 之 以 詩 書 仁 義 之 道, 而 或 從 焉, 或 否 焉. 之 則 悅, 而 不 從 亦 不 慍 也. 而 儒 以 之 爲 儒, 佛 以 之 爲 佛 矣. 且 古 之 聖 人, 未 嘗 去 人 倫 滅 種 類 以 爲 高, 亦 未 嘗 淫 殺 戮 賤 物 命 以 爲 忍. 又 五 典 之 倫 而 夫 婦 居 一, 高 柴 之 不 折, 夫 子 之 不 網, 聖 賢 之 爲 心, 可 見. 其 道 非 先 王 之 法 言, 不 惟 愈 於 口 淸 淨 寂 滅 之 道, 以 醒 其 心 乎. 然 則 余 之 所 以 犯 侮 笑 於 人 者, 未 始 不 爲 詩 書 仁 義 之 道, 而 余 之 獨 樂 於 心 者, 固 自 若 也, 彼 譏 余 詘 余, 仁 義 詩 書 之 說 而 復 焉. -(하

122 韓 國 禪 學 제36호 자신의 한 가지 언행을 두고 각자의 이념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라 고 할 수 있다. 이는 양쪽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받치고 있는 각각의 언어적 관 습에 매몰되어 그 너머에 있는 인의 의 속뜻(언어적 표현을 넘어서 생명을 중시한다는 뜻 )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풍자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쪽 이념에 대한 편향된 의식과 언어적 관습에 매몰된 행위는 만법 을 꿰뚫고 있는 하나의 이치[ 一 理 ]를 보지 못하는 현상에 대한 同 異 論 的 한계 때 문인 것으로 김수온은 파악한 것 같다. 그는 贈 喆 首 座 序 란 글에서 우리들의 현상적인 동이론적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 불교적 인식 론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승려 喆 로부터 승 려 昭 를 통해 글 청탁을 받는다. 얼마 뒤에 그가 喆 이 있는 절에 갔는데 마침 喆 이 선방에 들어가 만날 수 없었다. 중개자인 昭 에게 喆 의 여러 가지 겉모습 을 추상하여 喆 이 어떠한 모습의 승려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昭 는 그 어느 것도 진짜 喆 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가 진짜 喆 을 알아볼 수 없 었던 것은 진짜 喆 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같은 것[ 同 ]과 다른 것[ 異 ]이라고 하는 相 에 현혹되었기 때문 이라 했다. 그는 이를 다시 풀이하기를, (사람의 얼굴에 대 해) 같은 점에서 말한다면, 눈썹은 가로로 되어 있고 코는 곧으며 머리는 둥글 고 발이 모난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테지만, 다른 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의) 크고 작은 것, 예쁘고 못난 것, 굵고 가는 것, 거칠고 고운 것 등은 사람마다 다 를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곧 그것은 관점과 기준에 따라 인식되는 대상이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김수온은 같은 데에 그 다른 것을 세운 것 은 범부이고 중생이며, 다른 데에 그 다른 것을 세우지 않은 것은 諸 佛 이고 聖 人 이다. 惠 能 이 이른바 항상 육근의 작용에 隨 應 하여도 작용의 相 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일체의 법을 분별하면서도 분별하는 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常 應 諸 根 략) 본 각주와 관련 본문 가운데 贈 敏 大 選 序 에서 인용한 부분을 로 처리하고, 본 각주의 원문 을 문맥상 부분적으로 의역하였음을 밝힌다.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23 用, 而 不 起 用 相, 分 別 一 切 法, 不 起 分 別 相.]라고 한 것이 모두 이런 종류이다 라고 하였 다. 27) 육조혜능이 말한 이 구절은, 깨달은 이는 일상생활 가운데 눈과 귀와 같 은 여섯의 감각기관으로 보고 듣는 것 등의 여섯의 경계를 인식하나 그것으로 인한 또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모든 경계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분별하 나 그것으로 인한 또 다른 분별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수온은 이처럼 우리가 가진 인식기관의 한계, 곧 한번 인식한 것은 상이 되어 다른 것 을 인식할 때 분별을 일으키므로 실체와 거리가 있는 또 다른 인식을 일으키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김수온은 이러한 인식 수단의 한계를 깨닫고 언어 이전 에 존재하는 참된 정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김수온의 이 담론은 유교 또는 불교라는 말을 넘어서 또 그것이 초래한 여러 가지 상[관 념] 너머에 있는 진실을 잡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한편, 김수온은 1 모든 법은 같으나 이를 흩어놓으면 만 가지 법으로 나뉜 다. 따라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일찍이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같다고 하는 것 도 일찍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 28) 라고 했다. 그리고 2 우주를 처음 나눌 때 무 엇이 시작했는가? 시냇물 흐르고 산악이 솟아 절로 구역을 이루었지. 물상이 비록 천 갈래로 차이나고 다르지만,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보면 한 이치에서 안 27) 김수온, 贈 喆 首 座 序, 앞의 책. 余 也 以 和 尙 眉 公 之 弟, 遊 於 山 門, 而 忘 形 於 毳 流 之 老 宿 者 衆 矣. 而 所 謂 喆 首 座, 則 未 嘗 有 半 面 之 知. 壬 辰 春, 適 以 採 薪, 戒 門 辭 客, 名 昭 禪 師 者, 袖 淸 涼 行 法 主, 加 陀 兩 篇, 求 續 於 一 言, 又 以 喆 首 座 之 意 而 幷 請 其 文, 固 思 喆 字 之 奇 而 如 其 見 之, 必 不 忘 之 矣. 去 年 秋, 往 黑 原 道, 出 楊 州 入 檜 岩, 欹 枕 於 淸 風 軒, 以 余 爲 儒 之 老 之 者, 寺 僧 爭 謁, 有 所 謂 哲, 入 禪 而 未 省 其 人, 問 於 昭 曰, 年 可 三 十, 貌 澤 顙 廣, 身 頑 而 晳 者 非 喆 乎, 曰, 非 也, 尨 眉 皓 首, 豐 上 殺 下, 傴 僂 傍 行, 語 輒 喘 發, 非 喆 乎? 曰, 似 矣 而 非 也, 面 黑 頥 方, 深 目 闊 口, 見 人 謾 笑, 言 不 擇 出, 似 眞 喆 矣, 而 未 審 果 是 與 否, 昭 曰, 之 歷 擧, 在 座 之 人 則 可 矣. 言 喆 之 貌, 則 愈 多 而 愈 不 是. 余 曰, 心 不 同, 如 其 面 焉. 雖 擧 天 下 之 人 而 立 之, 求 其 似 焉, 則 無 一 之 可 得, 宜 乎 言 喆 之 貌 而 不 同 如 是 也. 因 思 自 其 同 者 而 言, 眉 廣 鼻 直, 頭 圓 足 方, 人 無 不 同 也. 自 其 異 者 而 言, 則 長 短 美 惡, 洪 纖 麤 軟, 人 各 有 殊, 無 不 異 也. 於 其 同 者 而 立 爲 其 異 者, 凡 夫 也, 衆 生 也. 於 其 異 者 而 不 起 其 異 者, 諸 佛 也, 聖 人 也. 盧 能 所 謂 常 應 諸 根 用 而 不 起 用 相. 分 別 一 切 法, 不 起 分 別 相, 皆 此 類 也. 28) 김수온, 앞의 책, 앞의 글의 바로 뒤, 嗚 呼, 萬 法 雖 異, 融 之, 還 歸 於 一 本. 本 雖 同, 散 之 則 分 爲 萬 法, 是 則 異 未 嘗 異, 而 同 未 嘗 同. 今 衲 子 之 法, 自 謂 得 人 所 不 得, 而 相 與 論 議 者, 不 過 如 是. 吾 於 言 喆 而 各 指 其 人, 未 得 眞 喆 之 貌, 非 惟 未 得 其 同, 而 實 眩 於 同 異 也. 若 得 眞 喆 而 眞 語 之, 以 得 眞 心 眞 性 之 所 在, 則 當 付 之 一 笑, 而 吾 所 言 未 嘗 不 爲 筌 蹄 也.

124 韓 國 禪 學 제36호 정되네. 양가[유가와 불가]의 경계가 평탄하여 아무런 자취가 없으니, 유교도 날 위하고 불교도 날 위하네. 29) 라고 하였다. 이러한 김수온의 언급은 존재와 현상에 대한 그의 견해를 압축해서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1은 현상적인 것 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이치에서 본다면 모두 같은 것에 근거해 있다고 했다. 이처럼 同 異 論 의 한계를 넘어서는 萬 法 歸 一 的 담론은 성리학적 담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理 一 分 殊 論 과 비슷하다 하겠다. 2역시 一 理 論 의 관점에서 현상을 본 것이다. 곧 만상이 모두 다르지만 하나의 이치로 보면 같은 것이라는 견해 다. 다만, 여기서 마음의 근원을 돌이키는 것을 전제한 점에서 이것은 唯 心 的 一 理 論 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의 근원을 돌이킨다[ 反 心 源 ]는 것은 앞서 본 동이론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선불교적 행위가 아닐까? 비약일 수 있 으나 김수온은 이 지점에서 유교와 불교를 융통시키려는 담론을 준비한 것이라 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김수온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唯 心 一 理 的 儒 佛 融 通 論 에 근거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서 이 담론은 유가와 불가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조화 할 수 있다는 유불조화론의 범주 안에 든다고 할 것이다. 30) 2. 성현: 唯 心 一 理 的 儒 佛 會 通 論 성현(1439~1504)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연산군 때 문 형을 잡은 관각문학의 대가였다. 그는 문학은 물론 악학궤범 을 편찬하여 음 29) 김수온, 昨 以 唱 和 之 故, 謁 河 東 府 院 君..., 拭 疣 集 권4, (1) 憑 翼 初 分 孰 肇 夫, 川 流 岳 峙 自 成 區. 縱 然 物 像 千 差 別, 在 反 心 源 一 理 娛. 靜 裏 眇 觀 還 獨 樂, 閑 中 妙 契 與 誰 俱. 兩 家 畦 町 平 無 迹, 儒 亦 爲 吾 佛 亦 吾. 30) 김상일, 김수온시문학의 일국면, 한국문학연구 제29집,(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의 2장 儒 佛 融 通 論 的 세계인식 참조.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25 악 분야에도 큰 공을 쌓았다. 한편 성현은 그의 스승인 김수온처럼 불교 신앙 을 옹호하고 불교적 삶을 지향하지 않았지만, 불교에 대한 식견이 깊고 유자와 불자가 서로 조화하면서 살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런 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유불 관련 논의에서 그 단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방촌 사이에 虛 靈 不 昧 한 것이 마음이고, 일단의 거울 같은 지혜가 妙 湛 不 動 한 것이 마음이다. 뭇 이치를 갖추어 온갖 일에 응하는 것은 마음이 펼치는 것 이고, 정을 경계하여 지혜를 일으켜 깨달음으로 중생을 비추는 것 또한 마음이 펼치는 것이다. 마음이 바르면 만물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고, 중생의 머리털과 피부가 나의 그것이다. 혹여 마음을 잃어 바르지 못하게 되면 나는 나이고 남은 남이 되어 나의 선한 실마리를 확충해서 멀리까지 미루어 채우지 못하고 나의 공덕도 무변( 無 邊 )에 이르기까지 보급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유자들로 하 여금 반드시 삿됨을 제거해 바른 것을 따르게 하고, 불승들도 또한 삿된 것을 버 리고 바름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마음이 바르면 도에 어찌 바르지 않음이 있 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유자와 불승이 모양은 다르나 마음은 같고, 가르침 은 다르나 바름을 좇아 지키는 뜻은 다름이 없다. 31) 윗글은 正 堂 이란 승려가 자신의 시권에 제사를 청하기에 성현이 그의 법호 인 正 자에 착목하여 써 준 글이다. 성현은 이 글의 앞부분에서 자기는 공자를 배우는 유자이기에 불승인 정당에게 하는 말이 들어맞지 않을 수 도 있다 하고, 이어 유교적 어문법과 불교적 어문법을 대응시켜 글을 전개하고 있다. 곧 인용 31) 성현, 禪 僧 正 堂 詩 卷 序, 虛 白 堂 集 虛 白 堂 文 集 卷 之 七, 方 寸 之 間, 虛 靈 不 昧 者 心 也. 一 團 鏡 智, 妙 湛 不 動 者 亦 心 也. 具 衆 理 而 應 萬 事 者, 心 之 發 也. 戒 定 生 慧 而 覺 照 衆 生 者, 亦 心 之 發 也. 心 得 其 正, 則 萬 物 之 性, 卽 吾 之 性, 衆 生 髮 膚, 卽 吾 髮 膚. 苟 或 失 其 心 而 不 得 正 焉, 則 我 自 我 而 人 自 人, 吾 之 善 端, 無 以 擴 充 而 推 遠, 吾 之 功 德, 難 以 普 及 於 無 邊. 必 使 吾 儒 去 邪 而 從 正, 釋 亦 捨 邪 而 歸 正. 心 旣 正, 道 豈 有 不 正 者 乎? 儒 與 釋, 形 不 同 而 心 則 同, 其 爲 敎 雖 異, 而 趨 善 守 正 之 意 則 無 異.

126 韓 國 禪 學 제36호 문 가운데 실선은 성리학적 어구이고 점선은 불교적 어구이다. 먼저 마음[ 心 ]과 그것의 작용을 정의하는 어구를 늘어놓되 유교와 불교에서 쓰는 용어를 나란히 늘어놓았는데 의미상 서로 짝을 이루면서 호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어서 마음이 바름[ 正 ]을 얻었을 때와 잃었을 때의 경우, 그리고 바름을 얻는 방법을 논설하는 어구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늘어놓고 있다. 요컨대 성현은 유교나 불 교에서 마음에 대한 정의, 마음의 작용을 드러내는 모습, 마음을 찾는 방법 등 을 설명하거나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와 어구는 서로 다르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와 승려가 그 겉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그 마음이 같고, 그 가르침의 방법적 성격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을 바르게 지 키는 것이 같다면 결국 유불을 하나로 귀결시켜 회통되게 할 수 있다고 본 것 이다. 따라서 위 논리는 유자와 승려가 그 겉모습을 인정할 수 있다면 조화롭 게 공존할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한편, 성현은 題 一 庵 松 堂 詩 卷 後 에서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道 一 論 을 펼 쳐 유학과 불교, 나아가 도교의 도[ 道 ]가 하나[ 一 ]의 이치[ 理 ]에서 출발하고 있음 을 담론한다. 32) 여기서 성현의 도일론 의 적합성 여부를 따지기 보다는 그가 도 일론을 통해서 유교와 불교를 어떠한 관계로 보고 있는가를 살피도록 한다. 성 현은 도는 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의 이치[ 一 理 ]의 현현인 도는 현상적으로 같게 보이거나 달라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주역의 도를 太 極, 증자의 도를 一 貫, 노자의 도를 玄 牝, 석가의 도를 不 二 法 門 이라고 하여 서로 다른 말로 언명 32) 성현, 題 一 庵 松 堂 詩 卷 後, 虛 白 堂 集 虛 白 堂 文 集 卷 之 九, 夫 道 一 而 已 矣. 如 易 之 太 極, 曾 子 之 一 貫, 老 子 之 玄 牝, 大 雄 氏 之 不 二 法 門. 其 道 雖 殊, 而 其 理 則 未 嘗 不 同, 而 謂 之 不 相 同, 此 至 聖 凡 夫 之 所 以 間 也. 同 者 何? 無 爲 而 無 不 爲 也. 不 同 者 何? 始 於 有 而 終 於 無 也, 其 實 皆 一 也. 其 或 虛 而 能 實, 定 而 能 慧 焉, 則 身 與 道 爲 一, 其 或 我 自 我 物 自 物, 則 身 與 道 爲 二, 道 可 一 而 不 可 二 也. 道 可 純 而 不 可 雜 也. 然 則 其 一 也 一, 其 不 一 也 一, 一 與 不 一, 相 與 爲 一, 則 道 果 有 乎? 道 果 無 乎? 有 無 俱 混, 是 非 偕 寂 則 深 得 一 之 源 也. 一 者 何? 希 夷 也, 眞 如 也, 大 圓 覺 也. 推 之 則 自 一 心 而 廣 被 法 界, 要 之 則 自 衆 流 而 斂 諸 方 寸. 此 釋 迦 千 百 億 化, 而 充 滿 恒 河 沙 也. 自 其 異 者 則 吾 之 肝 膽 卽 楚 越, 自 其 同 者 則 衆 生 髮 膚 卽 吾 體. 此 觀 世 音 三 十 二 相, 而 尋 聲 救 苦 也. 歸 依 者 如 是 求 之, 則 果 能 知 一 之 義 矣. 知 一 之 義, 則 心 則 道 也, 道 卽 心 也. 無 非 徒 無 也, 一 非 徒 一 也 而 自 詣 至 大 之 域 矣.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27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한편, 하나의 이치가 작용되는 것을 둘로 잘못 보는 것 은 우리의 몸을 현상적인 사물과 분리시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사물 의 현상인 도에 몸을 합일케 하면 그 도가 하나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데 몸을 도에 합일시키려면 우리의 마음의 작용인 有 無 나 是 非 를 넘어서야 한 다고 한다. 그것은 곧 하나[ 一 ]의 원천을 深 得 하는 것이라 했다. 이처럼 하나의 원천을 심득하여 하나의 뜻을 알게 되면 마음이 도이고 도가 마음임을 알게 된 다는 것이다. 이 때 그 하나[ 一 ]를 도교에서는 希 夷, 불교에서는 眞 如 또는 大 圓 覺 이란 용어로도 표현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 一 ]의 이치를 미루어 확 장하면 한 마음을 법계에 널리 펼 수 있고, 간요하게 하면 내 심장 안에 수렴할 수 있다 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달리 보면 내 마음이란 것이 한 없이 멀지만, 같은 것으로 보면 중생의 털과 살갗이 곧 나의 몸이라 여기는 것이 나의 마음 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현은 도가 하나인 것이 분명하니 그것의 경지를 다르게 표현한 명 칭이나 다르게 보이는 현상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유무나 시비로 인한 판단이 우리의 바로 보는 마음을 혼란케 하는 것이므로 이 것을 넘어서야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럴 때 하나의 이치가 분명하게 보이게 되 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사물과 소통할 수 있고 하나가 되어서 至 大 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현의 도일론은 唯 心 的 一 理 論 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리론으로 미루어 보면 유학과 도 교 불교가 하나로 회통된다고 한 것이다. 성현의 도일론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볼 수 있다. 산천의 動 과 靜 은 내 마음의 동과 정이고,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지며 새와 물고기가 소리를 지르는 것 모두 우리의 性 命 에서 나온 감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고 정과 동으로 우 리의 性 情 을 다스려 만물의 성정에 미치게 한다면 내가 곧 남과 하나이며 사람

128 韓 國 禪 學 제36호 과 만물 또한 하나 라고 하였다. 33) 이 언급을 보아도 그의 도일론은 유심적 성 향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유불을 회통하는 것도 결국 나 의 성정을 다스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도일론은 唯 心 一 理 的 儒 佛 會 通 論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성현은 유심일리적 유불회통론을 바탕삼아 불교와 불승을 대한 것 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은 김수온의 유심일리적 유불융통론과는 차이를 보이지 만 유심일리적 견지에서 유불을 조화할 수 있다는 입장은 같다고 할 수 있다. 3. 이승소: 선불교적 名 實 論 이승소(1422~1484)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賜 暇 讀 書 를 한 문신이었다. 그 리고 집현전 제학 및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國 朝 五 禮 儀 등의 관찬 사 업에 참여한 바 있는 館 閣 문인이었으나 불교와 관련된 사업에 특별히 참여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세조가 내려 준 불서를 읽었다 는 것으로 보 아 불교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또한 당시 일 반 사대부들처럼 승려의 비행이나 도첩승의 범법에 대해서는 엄히 다스려야 한 다고 하였다. 34) 그리고 승려라 해도 孝 親 은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35) 먼저 이승소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인용해 본다. 내[이승소]가 들으니 불교에서는 금강 을 진여불성 에 비유한다 한다. 이 성 33) 성현, 送 僧 覺 雲 歸 山 序, 虛 白 堂 集 虛 白 堂 文 集 卷 之 七, 夫 山 何 爲 而 深 入, 水 何 爲 而 樂 觀, 山 之 嵬 然 鎭 者, 卽 吾 心 之 靜, 水 之 汨 然 流 者, 卽 吾 心 之 動. 以 至 花 樹 之 芳 蔚, 禽 魚 之 啾 喞, 皆 不 出 吾 性 命 之 情, 靜 以 守 之, 動 以 行 之, 理 吾 性 情, 以 及 萬 物 之 性 情, 然 則 我 與 人 一 也, 人 與 萬 物 亦 一 也, 以 吾 髮 膚 爲 衆 生 髮 膚, 非 所 謂 肝 膽 楚 越 之 不 相 及 也.(후략) 34) 성종실록 성종 6년(1475) 5월 27일조 기사. 35) 이승소도 椧 石 寺 萬 景 軒 記 ( 三 灘 集 권10)에서 불승이라 해도 孝 親 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29 품은 이를 앞에서 찾아보아도 그 처음을 볼 수 없고 이를 뒤로 미루어 보아도 그 끝을 알지 못한다. 산천과 땅은 무너져 없어질 때가 있을지라도 이 성품은 늘 있 는 것이며, 겁화( 劫 火 )로서도 태워버릴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金 剛 山 王 이란 나에게 있는 것이지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것이다. 만일 능히 나의 마음을 밝혀서 그 성품[ 自 性 ]을 깨닫는다면, 모든 현상을 잡아 헤치고 진정한 몸 이 홀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곧 산의 높고 큰 것이며, 8만 4천 법문은 곧 산 의 만학천봉일 것이니, 반드시 멀리 산에서 구하지 아니하더라도 자신에게 스 승이 남아도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아 세상 을 떠나서 홀로 가는 것은 모두가 의혹된 것으로 영가선사가 말한, 산을 보고 그를 잊는다. 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36) 이 글은 법경이란 승려가 금강산에 가면서 글을 청하기에 지어준 것이다. 불 교에서 시공을 초월해서 상존하는 것을 진여불성 이라 하고 이를 금강 에 비유 하는데, 그렇다면 이른바 금강산왕 이란 것은 나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 이승소 의 견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밝혀서 자성을 깨닫는다면 모든 현상을 파헤쳐 서 법신의 참모습인 眞 身 을 드러낼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견해는 내 마음이 곧 부처 라는 卽 心 卽 佛 의 선불교적 불교 인식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37) 그런 데 불성이 내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다면 그 불성을 가린 어둠을 깨치는 것도 내 36) 이승소, 送 法 冏 上 人 遊 金 剛 山 詩 序, 삼탄집 권10, 予 聞, 釋 氏 以 金 剛 喩 眞 如 佛 性. 是 性 也 永 之 於 前, 而 不 見 其 所 始, 推 之 於 後, 而 莫 知 其 所 終. 山 河 大 地, 有 時 毁 滅, 而 此 性 常 存, 非 劫 火 所 能 燒, 則 所 謂 金 剛 山 王 在 我 而 不 在 於 山 也. 苟 能 明 吾 心 而 悟 自 性, 則 披 剔 万 象, 獨 露 眞 身 者, 卽 山 之 高 大, 而 八 万 四 千 法 門 者, 卽 山 之 万 壑 千 峯 也. 不 必 遠 求 諸 山, 而 自 有 餘 師. 反 是 則 厭 喧 求 寂, 離 世 獨 往 者, 無 非 見 惑, 而 未 免 於 永 嘉 見 山 忘 道 之 哨 矣. 37) 佛 光 大 辭 典 ( 臺 灣 :불광출판사,1989)의 卽 心 卽 佛 항목에서 作 是 心 卽 佛 心 卽 是 佛. 無 論 凡 夫 心 佛 心, 其 心 之 體 與 佛 無 異, 此 心 卽 是 佛. 傅 大 士 心 王 銘 ( 卍 續 一 二 一 二 下 ): 了 本 識 心, 識 心 見 佛, 是 心 是 佛, 是 佛 是 心, 念 念 佛 心, 佛 心 念 佛 ( 中 略 ) 自 觀 自 心, 知 佛 在 內, 不 向 外 尋, 卽 心 卽 佛, 卽 佛 卽 心. 自 禪 宗 之 立 場 而 言, 若 不 解 卽 心 卽 佛, 則 猶 如 騎 驢 而 覓 驢. 禪 宗 大 師 馬 祖 道 一 專 用 此 語 接 引 學 人, 後 世 禪 宗 公 案 亦 常 用 此 語. 無 門 關 第 三 十 則 ( 大 四 八 二 九 六 下 ): 馬 祖 因 大 梅 問 : 如 何 是 佛? 祖 云 : 卽 心 是 佛 이라고 한 설명을 참조할 때 이승소는 선불교적 불교관을 가졌다고 판단된다.

130 韓 國 禪 學 제36호 가 해야 하는 것이니 외부에서 스승을 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 도를 명분으로 고요한 곳을 찾고 속세를 떠나 홀로 멀리 금강산을 찾아가는 일 은 의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승소의 이러한 즉심즉불적 불교 인식은 그의 또 다른 증서문인 送 敏 上 人 還 五 臺 山 序 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일종의 오대산론이 그것이다. 그는 깨 달음의 주체가 내 안의 불성을 밝히게 되면 오대산의 오방여래가 내 앞에 그 모 습을 드러내 설법하는 것과 같으므로 불교성지인 오대산이 중국에 있건 우리나 라에 있건 그 위치상의 진위여부는 가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38) 이러한 오대산론은 그의 또 다른 불교 산문인 冏 大 禪 名 解 에 담긴 名 實 論 과 같은 맥락의 의론이라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名 은 임시로 빌려 온 것[ 假 ]이고 實 은 一 乘 이라 한다. 그런데 부처가 평생 설법한 팔만사천법문의 三 藏 이 모두 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우리가 거기에 담긴 일승의 묘리를 깨달아 자신의 무 명을 끊고 정각을 이루면 眞 [ 實 ]과 假 가 성립되지 않고 有 와 無 가 모두 공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이 경지에서는 이름[ 名 ]이 실제[ 實 ]와 부합 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름은 더 이상 수단으로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 이다. 39) 요컨대 이승소는 심적 주체가 실제적으로 체득한 것이라면 그 이름은 38) 이승소, 送 敏 上 人 還 五 臺 山 序, 三 灘 集 권10, 予 聞 五 臺 山 在 中 州 雁 門 郡, 五 峯 聳 出, 象 菩 薩 頂 有 五, 乃 謂 五 方 如 來 之 坐, 學 佛 之 徒 多 歸 焉. 吾 東 方 表 海 爲 邦, 去 中 州 甚 遠, 而 又 有 所 謂 五 臺 山 者, 在 國 之 東 方. 未 知 吾 東 方 之 人 聞 中 州 有 五 臺 山, 欣 慕 而 取 以 爲 名 耶? 抑 山 形 偶 同 而 名 亦 偶 同 耶? 然 吾 東 方 學 佛 之 徒, 亦 相 率 而 歸 之, 與 中 州 無 異, 何 耶? 豈 不 以 名 之 所 存, 實 亦 從 之 耶? 夫 大 雄 氏, 視 曠 劫 如 一 朝, 融 大 千 爲 一 界, 納 須 彌 於 芥 子, 現 刹 土 於 毫 端, 無 彼 無 此, 無 遠 無 邇, 亦 無 無 彼 此, 亦 無 無 遠 邇. 則 又 安 知 此 是 而 彼 非, 彼 是 而 此 非 歟? 上 人 歸 五 臺, 蕭 然 一 室, 澄 神 靜 坐, 塵 囂 永 息, 万 慮 俱 寂, 則 妙 湛 不 動 之 地, 卽 見 五 方 如 來 同 時 現 前, 熾 然 說 法, 如 在 靈 山 會 上, 親 聞 海 潮 之 音 矣. 安 知 東 方 之 五 臺 不 是 中 州 之 五 臺, 又 安 知 五 臺 之 不 爲 靈 山 歟? 此 吾 所 謂 名 之 所 存 實 亦 從 之 者 也. 不 必 論 五 臺 彼 此 之 同 不 同 也. 39) 이승소, 冏 大 禪 名 解,앞의 책 권11, 名 者, 萬 法 之 假, 實 者, 一 乘 之 眞 也. 是 以, 自 三 觀 六 度, 以 至 八 萬 四 千 法 門, 皆 四 十 九 年 間 金 口 所 說, 而 布 在 三 藏 十 二 部, 浩 若 煙 海, 其 名 相 文 句, 不 旣 多 乎? 然 自 萬 而 六, 自 六 而 三, 反 而 約 之, 則 不 過 顯 一 乘 之 妙 而 已. 吾 師 苟 能 因 三 藏 而 求 一 乘, 斷 無 明 而 成 正 覺, 則 眞 假 不 立, 有 無 俱 空, 本 心 之 明, 湛 然 常 圓, 如 朗 月 懸 空 而 衆 星 韜 素, 滄 海 無 波 而 萬 象 涵 影, 庶 幾 不 負 法 冏 之 名, 而 名 亦 復 爲 筌 蹄 矣.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31 그 실제에 융화된 것이므로 이후 겉으로 드러난 이름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불교관은 지역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시간을 넘어서 지금 이 자리에서의 심적 주체의 참된 각 성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상에서 이승소의 증서류 산문은 즉심즉불의 선불교적 불교 인식과 주체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명실론적 불교관 을 보여주고 있음을 보았다. 한편, 이와 함께 그의 승려에게 준 증서문은 아래 와 같은 그의 불교와 승려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그는 불교에 대 한 전문적인 이해를 바탕삼아 일관된 선불교적 불교관으로 승려들에게 권면하 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글에서 유학[성리학]을 내세워 불교 교리를 비판하거나 비 난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이런 점은 그가 유학 이외에도 다른 학문의 특성과 가 치를 인정하고 있는 그의 학문관과도 일치한다. 40) 따라서 이런 점을 본다면 그 가 비록 사대부였지만 당시 이단으로 취급되던 불교와 승려들을 배척하지는 않 았을 것이다. Ⅵ. 맺음말 앞에서 조선전기 정도전 권근 서거정 김수온 성현 이승소 등의 贈 序 文 에 담 긴 불교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정도전을 비롯한 이들 사대부들은 대부분 館 閣 을 담당했던 문인사대부들이었다. 특히 이들의 불교 관련 증서문을 주목하 40) 이승소는 유학이란 修 身 과 治 國 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와 사물의 변화 는 한이 없어 유학 이외의 諸 子 百 家 의 설도 그들이 나름대로 세운 학설이므로 그것이 유학과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해도 그에 대한 지식이 꼭 필요하다고 하였다.( 三 灘 集 권10, 略 太 平 廣 記 序 참조.)

132 韓 國 禪 學 제36호 게 된 것은 당시 정치현장에서 다루어진 上 疏 나 奏 議 文 에 비해 불교와 승려의 행실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이 적지 않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불 교 관련 증서문은 조선전기 사대부층의 불교 인식과 불교사를 심층적으로 인식 하는 데 꽤 가치가 있은 자료로 판단된다. 정도전과 권근은 건국 초기의 창업과 수성 과정에서 필요했던 經 世 的 문장을 거의 전담했던 문인사대부였다. 이처럼 성리학적 이념을 세워 조선의 기틀을 다져야 하는 그들에게 불교는 배척해야할 이단이었다. 이들의 증서문은 주로 불교적 가치관이나 그에 따른 승려들의 행실을 문제 삼고 있다. 특히 승려들의 반 유교적 윤리 행태에 대해서는 유교 윤리 규범과 그것의 성리학적 근거를 들 어 비판하고 유교 윤리적 행실에 대해서는 포장 권면하고 있다. 세종 세조 성종대를 살아가며 문명을 떨친 서거정 김수온 성현 이승소 등 은 정도전과 권근에 비해 불교와 승려들에 대해 훨씬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 고 있다. 서거정은 본격적인 유불교유론을 내세워 승려들과의 교유를 적극 도 모하였다. 하지만 그의 유불교유론은 유교중심적 유불교유론이다. 이에 비해 김수온 성현 이승소 등은 불교에 대한 박식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불조화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조금씩 그 층위를 달리한 불교 인식을 보인다. 김수온이 유 심일리적 유불융통론을, 성현이 유심일리적 유불회통론을, 이승소가 선불교적 명실론을 전개한 것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김수온은 불교에 대한 지식뿐 아 니라, 한 때 출가를 단행했을 정도로 깊은 신앙심을 보였다. 때문에 명색은 유 자이지만 그 속은 승려라는 혹독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불서 편 찬과 불경 언해 등에 남긴 공적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김수온을 비롯한 이들 문인사대부들의 불교와 승려들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세종말년과 세조대의 불서 편찬이나 불경 언해 사업에 협업을 가져온 한 원인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차후의 과제로 넘긴다.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33 Abstract A study of Buddhism in MoonInSaDeaBu( 文 人 士 大 夫 ) s JeungSeuMoon( 贈 序 文 ) in early Chosun dynasty Kim, Sang-Il (Dongguk Univ.) In early Chosun dynasty, SaDeaBu( 士 大 夫 ) s Buddhist discourse is built through SangSoh( 上 疏 ), Gi( 記 ), SeuBal( 序 跋 ) that is written Classical Chinese writing. And this study researches Buddhism in SaDeaBu( 士 大 夫 ) s Jeung SeuMoon( 贈 序 文 ). Especially this writing is purposed to contemplate the text of MoonInSaDeaBu( 文 人 士 大 夫 ) who is belong to ruling clique and charges the writing related politics and diplomacy. Cheong Do-jeon( 鄭 道 傳 ) and Kwon Geun( 權 近 ) etc who is MoonInSaDeaBu criticize Buddhistic view of the world and Buddhist monk s antihuman behavior but composes JeungSeuMoon( 贈 序 文 ) about Buddhist monk's confucian behavior. But Kwon Geun shows more generous attitude to Buddhist monk. After that in the era of king Se-Jong( 世 宗 ), Sejo( 世 祖 ), Songjong( 成 宗 ), Kim SuOn( 金 守 溫 ), Seo GeoJeong( 徐 居 正 ), Yi SeungSo ( 李 承 召 ), Sung Hyon( 成 俔 ) shows Confucian-Oriented Buddhism Theory( 儒 佛 交 遊 論 ), Neo-Confucian-Oriented Buddhism Theory( 儒 佛 一 理 論 ) and Harmonization theory between Buddhism and confucianism( 儒 佛 調 和 論 ) in the text that give to Buddhist monk. Like this they insisted their opinion that shows difference,

134 韓 國 禪 學 제36호 and exposed viewpoint that comprehend Buddhism and Buddhist monk. Key words early Chosun dynasty(조선전기), Buddhism, Buddhist, MoonInSaDeaBu( 文 人 士 大 夫 ), JeungSeuMoon( 贈 序 文 ), Confucian-Oriented Buddhism Theory( 儒 佛 交 遊 論 ), Harmonization theory between Buddhism and confucianism( 儒 佛 調 和 論 ).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135 참고문헌 자료 三 峰 集 ( 鄭 道 傳 ), 陽 村 集 ( 權 近 ), 四 佳 集 ( 徐 居 正 ), 拭 疣 集 ( 金 守 溫 ), 虛 白 堂 集 ( 成 俔 ), 三 灘 集 ( 李 承 召 ) 등의 문집은 韓 國 文 集 叢 刊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본. 朝 鮮 王 朝 實 錄 ( 世 宗 實 錄 世 祖 實 錄, 文 宗 實 錄, 成 宗 實 錄 권),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한국고전종합DB의 해당 원문 및 역주문과 이미지. 李 朝 實 錄 抄 存 卷 1-10, ( 中 央 佛 敎 專 門 學 校 編, 서울: 中 央 佛 敎 專 門 學 校, 1935~1937). 논저 김영태, 韓 國 佛 敎 史 槪 說, (서울: 경서원, 1993). 김상현, 한국불교사 산책, (서울: 우리출판사, 1995), p.129. 진필상, 심경호 옮김, 한문문체론, (서울:이회, 1995), pp.232~242. 김상일, 김수온시문학의일국면, 한국문학연구 제29집, (서울:동국대한국문학연 구소, 2005). 김상일, 조선전기 훈구사대부의 유불교유론과 승려와의 교유시, 우리어문연구 제25집, (서울:우리어문학회, 2005). 吳 乃 恭, 儒 家 思 想 硏 究, ( 中 國 : 東 北 師 範 大 學 出 版 社, 1988). 사전 慈 怡 主 編, 佛 光 大 辭 典, 台 灣 : 佛 光 出 版 社, 1989. 투고일 : 2013. 11. 30. 심사완료일 : 2013. 12. 15. 게재확정일 : 2013.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