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 俗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최순권 崔 順 權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1. 머리말 오늘날의 전통적인 유교적 제사는 고려말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 어 중국의 소학 小 學 과 가례 家 禮 가 사대부의 실천규범으로 인식되 면서 우리나라에 점차적으로 보급되었다. 조선 초기에 가례 를 수 용하여 유교식 제사를 법제화 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기제 忌 祭 와 묘제 墓 祭 를 중시하여 가례 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로 여 긴 사시제 四 時 祭 는 잘 이행되지 못했다. 또한 가례 의 제사 절차를 따르기는 했지만, 가례 의 경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례 行 禮 를 해 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195
그리고 가례 를 근본으로 한 국조오례의 國 朝 五 禮 儀 의 경우, 사대 부 및 서인 庶 人 의 제사 내용을 국가제사의 틀에 맞추어 제사 절차 및 행례 내용을 정하였기 때문에 가례 의 내용과 달랐다. 더 나아가 가례 의 제사 내용이 중국의 생활방식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 맞게 재해석하거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용하여 제사를 지내왔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성리학 및 가례 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기호학파 畿 湖 學 派 와 영남학파 嶺 南 學 派 의 예학 禮 學 이 형성되고, 그것은 지역, 문중마다 행례의 근거가 되면서 오늘날까지 그 집안의 전통 이 되었다. 특히 율곡 栗 谷 이이 李 珥, 사계 沙 溪 김장생 金 長 生, 우암 尤 菴 송 시열 宋 時 烈 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와 퇴계 退 溪 이황 李 滉, 학봉 鶴 峯 김성일 金 誠 一, 서애 西 崖 유성룡 柳 成 龍, 한강 寒 岡 정구 鄭 逑 를 중심으로 하 는 영남학파는 학문적이자 지역적으로 제사 행례에 있어 많은 영향 을 미치었다. 이에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종가 宗 家 의 불천위 不 遷 位 제사 조사를 토대로 기제 행례의 차이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가례 를 중심으 로 각종 예서 禮 書 를 살펴보왔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제 행례의 근간 이 되는 가례 의 준용을 통해 나타나는 행례의 차이를 살펴보고, 나아가 가례 를 중심으로 가례의절 家 禮 儀 節, 국조오례의, 격몽 요결 擊 蒙 要 訣, 사례편람 四 禮 便 覽 기제 절차를 비교함으로써 예서에 나타나는 행례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기제 절차에 따른 행례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196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2. 가례 준용과 행례의 차이 조선시대에는 사대부의 실천윤리로서 가례 내용을 수용하면서 학파 또는 지역, 문중에 맞는 가가례 家 家 禮 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가 례 가 중국의 생활방식을 담고 있어서,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행례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국조오례의 라는 예전 禮 典 이 마련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사대부가에서는 가례 와 가례의절 을 그들 의 행례서로 삼아 제사를 행례하거나 권장하였다. 그러나 이현보 李 賢 輔 가 제례의 경우 국가에는 의제 儀 制 가 있고, 집안 마다 행례하는 법도가 있다. 그러나 모두 현실과 거리가 멀고, 또한 절목 節 目 을 행하기가 어려워 올바르게 행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1) 고 한 것처럼, 가례 의 제례 절목 가운데 부인조제 婦 人 助 祭 ) 와 수조 受 胙 등의 번거로운 항목을 없애고 행할 수 있는 조목만 뽑아서 제례법 을 정하기도 하였다. 이이 李 珥 도 지금의 풍속에 대부분 예를 잘 알 지 못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집집마다 같지 않다. 2) 고 하여 격 몽요결 에 가례 제례에서 필요한 내용과 그림을 그린 제의초 祭 儀 抄 를 부록으로 실기도 하였다. 이처럼 제사는 가례 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우선 필요한 항목만을 채택하여 행례하려 고 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가례 의 주석과 언해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1) 농암집 권3 주례조( 酒 禮 條 ): 祭 禮 則 國 有 儀 制 諸 家 有 圖 但 皆 汗 漫 亦 有 難 行 節 目 行 之 得 宜 者 尤 少. 2) 격몽요결 제례장( 祭 禮 章 ) 제7( 율곡전서 권27) : 今 俗 多 不 識 禮 其 行 祭 之 儀 家 家 不 同.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197
가례 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다. 또한 주자서 朱 子 書 와 고례 古 禮 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가례 와 고례와의 차이점이 점차 인식되 었다. 더구나 행례의 모범서로 여기었던 가례 가 중국의 생활방식 이자, 당시 시대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들어 우리나라 실정에 맞 게 제사 절차에 따른 행례를 조정하려 하였다. 상례비요 喪 禮 備 要 발문 跋 文 에도 주자 朱 子 의 가례 가 모두 갖추어 져 있어 예가 禮 家 의 지침서가 되니, 우리 동방에서는 더욱 이를 존숭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금이 이의 異 宜 하니, 손익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나라 풍속도 특별하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 3) 고 하여, 가 례 를 준용하면서도 시대가 다르고 풍속도 다르기 때문에 조선 사 회의 실정에 맞게 변통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조익 趙 翼 도 가례향의 家 禮 鄕 宜 서문에서 대저 예라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중략) 하물며 우리나라의 풍속은 본래 중국과 크게 다르고, 또한 가례 가 나온 지가 500년이나 지났으니, 그 제도가 어찌 다 같을 수 있겠는가? 4) 하여, 조선 사회의 실정과 가례 의 내용이 다 르기 때문에 가례향의 를 저술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시대와 풍속의 차이에 따라 행례의 차이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공례 公 禮 : 五 禮 와 사례 私 禮 : 家 禮 의 성격에 따른 행례의 차이도 지적되고 있었다. 앞서 성종대에 국가적으로 국조오례의 라는 예 전이 마련되었지만, 사대부들은 대부분 가례 와 가례의절 을 그 3) 상례비요 발문 : 朱 夫 子 家 禮 固 備 焉 爲 禮 家 三 尺 我 東 方 尤 尊 而 崇 之 而 顧 古 今 異 宜 則 有 不 得 不 損 益 焉 方 俗 殊 用 則 有 不 得 不 變 通 者 焉. 4) 포저선생집 권26 서( 序 ) 가례향의서( 家 禮 鄕 宜 序 ): 夫 禮 隨 時 隨 地 而 異 ( ) 況 我 國 之 俗 本 與 中 國 大 異 而 又 後 家 禮 五 百 年 其 制 安 可 盡 同 也. 198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들의 행례서로 삼고 있었다. 이에 박세채 朴 世 采 는 지금 세상의 공사의 제례에 있어서, 공례 公 禮 는 옛날에 가깝고, 사례 私 禮 는 세속에 가깝다. 무릇 공례에는 당대 唐 代 의 개원례 開 元 禮 가 있으니, 대개 의례 儀 禮 를 참작하여 만든 것이 다. 사례에는 주자가례 가 있으니, 비록 또한 의례 를 조술 祖 述 하 여 정리하였으나, 그 근본은 대부분 온공서의 溫 公 書 儀 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귀추 歸 趣 는 개원례 와 자연히 구별된다. 만약 왕이 예악 禮 樂 을 제정한다면, 마땅히 고경 古 經 에 따라 지금의 세속을 참고 하여 손익하고 변통하며, 공사의 예에 차이가 없게 함으로써 만세 에 통행하는 법전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대명회전 大 明 會 典 과 국 조오례의 로는 이미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사대부의 의례는 마땅히 주자가례 를 따라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례 私 禮 이니, 더욱 가 례 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5) 고 하였다. 이에 송시열 宋 時 烈 은 (제사를) 이른바 각기 다르게 행례하는 것은 가례 와 국조오례의 및 격몽요결 등의 예서가 같지 않기 때문 이다. 마땅히 한결같이 가례 를 따라야 하나, 혹 의문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다른 예서에서 보충한다면, 일통지의 一 統 之 義 에 합당할 것이 며, 이러한 폐해는 없을 것이다. 6) 고 하여, 행례에 차이가 나는 것은 5) 가례증해 권13 제례조 : 今 世 公 私 祭 禮 公 則 近 於 古 私 則 近 於 俗 盖 以 公 有 唐 開 元 禮 大 槪 斟 酌 儀 禮 以 成 之 私 有 朱 子 家 禮 雖 亦 祖 述 儀 禮 以 整 之 然 其 本 多 出 溫 公 書 儀 故 歸 趣 與 開 元 禮 自 別 也 如 有 王 者 作 則 當 一 依 古 經 參 以 今 俗 損 益 變 通 使 公 私 之 禮 無 所 參 差 以 爲 萬 世 通 行 之 典 而 大 明 會 典 五 禮 儀 旣 不 能 然 顧 曰 士 大 夫 禮 當 從 朱 文 公 家 禮 此 今 日 私 禮 尤 不 得 不 從 家 禮 者 也. 6) 가례증해 권13 제례조 : 尤 庵 曰 所 謂 各 自 異 行 者 有 家 禮 五 禮 儀 及 要 訣 等 書 之 不 同 故 也 當 一 從 家 禮 而 猶 或 有 疑 問 然 後 補 以 他 書 則 合 於 大 一 統 之 義 而 無 此 弊 也.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199
가례 와 이를 바탕으로 편찬된 국조오례의 나 격몽요결 이 같지 않기 때문으로 보았다. 사실상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 도 가례 를 수용하여 국가 적으로 사대부와 서인의 제례를 정한 예서였다. 그리고 가례의 행 례서 역할을 했던 가례의절 이나, 이이가 편찬한 격몽요결 이나 이재李縡의 사례편람 등은 모두 가례 을 근간으로 하여 편찬한 예서였다. 그러나 다음의 표-1 과 같이 기제 절차는 모두 가례 를 따르고 있으나, 행례상에는 차이가 있었다. 표 1 가례 가례의절 국조오례의 격몽요결 사례편람 기제 절차 비교표 家禮 陳設 果,蔬,脯,醢,盞盤,醋 出主 參神 降神 進饌 - 焚香 - 告辭 - 斂櫝 - 奉櫝(正寢) - 啓櫝(卓上) - 出主(交椅) 主人以下 再拜 - 焚香 - 斟酒(執事者) - 灌于茅上 魚,肉,米 麵食,羹,飯 - 斟酒(立,執事者) - 奠爵(主人) - 祭之茅上 初獻 - 進炙肝 - 讀祝 - 徹酒 및 徹肝 - 斟酒 - 奠爵 - 祭之茅上 亞獻 - 進炙肉 - 徹酒 및 徹肝 200 家禮儀節 國朝五禮儀 擊蒙要訣 果,脯,熟菜,淸醬,醢, 沈菜,盞盤,匕,醋菜, 塩,醋,脯,醢,蔬,菜 果蔬, 脯醢, 盞盤 - 啓櫝 - 出主(祠堂) - 焚香 - 告辭 - 奉主(正寢) 主人以下 鞠躬四拜 - 上香 - 斟酒(執事者) - 酹酒(盡傾于茅沙上) 魚,肉,米 麵食 羹,飯 - 斟酒(跪,執事者) - 祭酒(傾少許於茅沙上) - 奠酒(執事者) - 俯伏興平身 - 讀祝(主人以下跪) - 奉饌(奠肝) - 徹酒及饌 - 斟酒 - 祭酒 - 奠酒 - 俯伏興平身 - 奉饌(進炙肉) - 徹酒及饌 - 焚香 - 出主告辭 - 奉櫝(正寢) - 啓櫝(卓子上) - 出主(交椅) 主人以下 再拜 主人以下 再拜 - 焚香再拜 - 焚香(三上香) - 斟酒 - 斟酒(執事者) 灌于茅上(灌盡傾也) - 灌于茅上 -,羹,麵,餠,魚,肉,炙肝 魚,肉,餠,麪,羹,飯 - 揷匙正箸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 啓櫝 - 奉出神主 - 設座 - 斟酒(執事者) - 執盞 - 獻爵 - 奠盞 - 讀祝 - 斟酒 - 執盞 - 獻爵 - 奠盞 四禮便覽 果,蔬,脯,醢,盞盤,醋 - 焚香 - 告辭 - 斂櫝 - 奉櫝(正寢, 廳事) - 啓櫝(卓上) - 出主(交椅) 主人以下 再拜 - 焚香(再拜) - 斟酒(執事者) - 灌于茅上(盡傾) 魚,肉,米 麵食,羹, 飯 - 斟酒(立,執事者) - 斟酒(立,執事者) - 奠爵(主人) - 奠爵(主人) - 祭(三祭/少傾)之茅上 - 祭之茅上(少傾酒也) - 進炙肝 - 進炙肝 (啓飯蓋) - 讀祝 - 讀祝(主人以下跪) - 徹酒 및 徹肝 - 徹酒 및 徹肝 - 斟酒 - 斟酒 - 奠爵 - 奠爵 - 祭之茅上 - 進炙肉 - 進炙肉 - 徹酒 및 徹肝 - 徹酒 및 徹肝
- 斟酒 - 奠爵 終獻 - 祭之茅上 - 進炙肉 - 添酌 侑食 - 揷匙正箸 出,闔門(立,無門處降 闔門 簾) 啓門 - 祝三噫歆 啓門 - 奉茶 辭神 主人以下 再拜 - 奉主納于櫝 納主 - 奉歸祠堂 撤 - 撤饌 - 斟酒 - 祭酒 - 奠酒 - 俯伏興平身 - 奉饌(進炙肉) - 徹酒及饌 - 添酌 - 揷匙 闔門(無門 則垂簾幃 俱少休食頃) - 斟酒 - 執盞 - 獻爵 - 奠爵 奉茶(或代以孰水) - 徹羹 - 合飯蓋 - 祝噫歆(三) - 獻茶(進茶) - 主人以下 再拜 - 焚祝文 - 送主 - 捧主歸祠堂 - 撤饌 - 禮畢 - 斟酒 - 奠爵 - 祭之茅上 - 進炙肉 - 添酌(主人) - 揷匙正箸(主婦) 闔門後立 主人以下 再拜 主人以下 再拜 - 納主(祠堂) - 合櫝 - 合櫝 - 納主(祠堂) 徹祭饌 - 斟酒 - 奠爵 - 祭之茅上 - 進炙肉 (不徹酒 및 徹肝) - 添酌 - 揷匙正箸 闔門(立,無門處降簾 或屛幃) - 祝三噫歆 啓門 (徹羹) - 奉茶(代以水) (下匕箸 合飯蓋) - 主人以下 再拜 (焚祝文) - 奉主納于櫝 - 奉歸祠堂 - 撤饌 기제 절차는 기본적으로 가례 의 절차를 따라 진설陳設, 출주出主, 참신參神, 강신降神, 진찬進饌,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유식侑食, 합문 闔門, 계문啓門, 사신辭神, 납주納主, 철찬撤饌 순이다. 가례의절 은 가 례 에 비해 행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지만, 행례 절차는 간 략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조오례의 는 국가제사와 같이 헌관 의 헌작 후 재배가 없거나, 유식 및 합문과 계문의 절차가 생략되어 있다. 반면에 격몽요결 과 사례편람 은 거의 가례 의 기제 절차 를 따르고 있으나, 이에 구체적인 행례 절차를 포함시켰다. 즉, 강신 의 분향焚香 후 재배, 초헌의 진적進炙 후 계반개啓飯蓋, 종헌의 재배 후 불철주不徹酒 및 불철간不徹肝, 계문의 철갱徹羹, 하시저下匕箸와 합반개 合飯蓋, 사신 재배 후의 분축문焚祝文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행례들은 가례 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들 예서를 편찬할 당시에 우리 나라 유학자들이 우리 실정에 맞게 명시한 제례 내용을 반영하여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201
추가,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예서에서의 차이는 가례 해석 및 예서 연구의 심화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이이, 김장생,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 파와 이황, 김성일, 유성룡, 정구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의 예학 이 형성되면서, 조선후기에 오면 학파간에 기호 및 영남 등으로 지 역적인 제사 행례의 차이가 거론되기도 하였다. 즉 이이명 李 頤 命 이 영남 사람들의 제례는 많이 다르다. 예컨대 묘 제 墓 祭 는 단오 端 午 와 추석 秋 夕 에 거행하지 않고, 오로지 정조 正 朝 와 한 식 寒 食 에만 거행한다. 정조에도 이날을 전후로 5, 6일내에 간격을 두 고서 상묘 上 墓 를 한다. 7) 고 하면서 이러한 토속 土 俗 은 모두 퇴계에게 나왔다고 할 정도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만부 李 萬 敷 도 우리나라에서 사영절( 四 令 節 : 설, 한식, 단오, 추석)에 상묘하는 것은 비록 국조 國 朝 의 제 도이지만, (중략) 영남의 풍속에는 오직 춘추로 택일 擇 日 하여 상묘하며, 사영절 묘제는 없다. 이것은 선배들이 가례 를 따라 강 구하여 정한 것이라 한다. 지금은 비록 택일하지 않지만, 단지 한식 과 중추 中 秋 에 묘사 墓 祀 를 지낸다. 8) 고 한 것처럼, 이 시기에는 이미 가례 의 준용 여부나 선현들의 해석에 따라 사명일 四 名 日 묘제 등이 달리 행해지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었다. 9) 7) 소재집 권20 서독( 書 牘 ) 답이동보별지( 答 李 同 甫 別 紙 ): 嶺 人 祭 禮 多 異 如 墓 祭 端 午 秋 夕 不 擧 獨 行 於 正 朝 寒 食 而 正 朝 則 前 後 五 六 日 內 有 閒 隙 則 上 墓. 8) 식산선생문집 권15 잡저( 雜 著 ) 상제잡록( 喪 祭 雜 錄 ): 我 東 四 令 節 上 墓 雖 國 朝 之 制 ( ) 嶺 俗 獨 於 春 秋 擇 日 上 墓 無 四 令 節 墓 祭 是 乃 先 輩 從 家 禮 講 定 者 云 今 雖 不 擇 日 只 以 寒 食 中 秋. 9) 지금도 기호지역에서는 불천위의 경우, 사당의 예에 준하여 기제 및 사명일에 차례 및 묘제를 지내고 있다. 반면에 영남지역에서는 불천위의 경우, 기제 및 차례를 지 내지만, 사명일 묘제는 지내지 않고, 한식 또는 10월달에 묘제를 지내고 있다. 202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3. 기제 절차에 따른 행례의 차이 1) 출주에서의 단설과 합설 사당에서 안채 또는 사랑채의 대청이나, 별도의 제청으로 신주를 모셔오는 것을 출주라고 한다. 이때 기일 忌 日 에 해당하는 한 신위만 을 모시는 것을 단설 單 設 이라 하고, 기일에 해당하는 사람의 배위 配 位 까지도 함께 모시는 것을 합설 合 設 이라 한다. 제례 행례의 근간이 되는 가례 에는 기일에 해당하는 한 신위만 을 모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국조오례의 에도 기일에 는 단지 제사일에 해당하는 한 신위만을 정침 正 寢 에 모신다. 10) 고 하 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언적 李 彦 迪 의 봉선잡의 奉 先 雜 儀 에서 합설은 인정에 근본하는 것이라 11) 고 한 것처럼 가례 와 달리 대부 분 합설로 기제를 지냈다. 이에 이황도 이를 비례 非 禮 로 여기었지만, 선대부터 그의 집안에 서도 합설을 하였고, 또 그가 종자 宗 子 가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고칠 수가 없어서, 사후에나 단설할 것을 당부하였다. 12) 이이도 젊어서는 선대의 합설을 따랐다가 나이가 든 이후에는 단설을 하였는데, 단 설이 인정상 미안한 것 같아서 합설로 기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13) 10) 국조오례의 권2 대부사서인사중월시향의( 大 夫 士 庶 人 四 仲 月 時 享 儀 ): 忌 日 則 只 設 當 祭 一 位 之 座 於 正 寢. 11) 봉선잡의 권1 제례조. 12) 예의류집 권22 제례조. 이에 퇴계종가, 서애종가 등 일부 영남지역에서는 단설로 기제를 지낸다. 13) 예의류집 권22 제례조.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203
이러한 논의 가운데 이언적과 이이의 사례는 후일에 합설의 근거 가 되었다. 김장생 金 長 生 도 기일에 합설하는 것은 주자의 뜻은 아니 지만, 우리 나라의 선현들이 일찍이 그것을 행하였기 14) 때문에 상 례비요 기제에는 합설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송시열 宋 時 烈 도 합 설의 부당함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행한 지 이미 오래되어서 고 칠 수가 없다 15) 고 하였다. 그리고 조익 趙 翼 도 합설이 비록 예문에는 없지만, 집집마다 모두 이를 행하고, 또한 행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 문에 단설로 바꿀 수가 없다 16) 고 할 정도로, 대부분 가례 와 다르 게 합설로 기제를 지냈다. 합설의 경우에도 독상처럼 제수를 각각 진설할 것인지, 아니면 겸상처럼 제수를 공통적으로 진설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가례 에서는 합설로 하는 사시제의 경우, 각탁 各 卓 으로 제수를 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가례의절 이나 국조오례의 에 서는 공탁 共 卓 으로 제수를 진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제사 를 지낼 공간이 협소하거나, 배위가 여럿이 있는 경우에 각탁으로 진설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에 과 果, 소 蔬, 포 脯, 해 醢, 간 肝 육 적 肉 炙, 어 魚 육탕 肉 湯 은 공통으로 1기 一 器 를 진설하고, 반 飯, 갱 羹, 면 麵, 병 餠 은 신위별로 각각 진설하기도 하였다. 17) 반면에 송시열은 고비 考 妣 를 합설하는 것은 마땅히 사시제에 따 14) 월당선생별집 권2 의례문해 하 제례 기제조. 15) 예의류집 권22 제례조. 16) 가례향의 권1 제례조. 17) 의례문해속 제례 시제 양위공일탁( 兩 位 共 一 卓 ). 기호지역의 사계종가와 동춘당종 가에서는 이와 같이 공탁( 共 卓 )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있다. 204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라야 한다. 무릇 제물은 모두 탁자마다 각각 진설해야 한다. 고비의 제물을 탁자에 각각 진설하는 것은 예에 명문 明 文 이 있는데, 어찌 어 길 수 있겠는가? 18) 고 하여 각탁 各 卓 을 주장하였다. 19) 2) 참신, 강신의 선후와 분향재배 출주 후에 주인 이하가 조상을 맞이하는 의식으로, 참신과 강신 의 절차가 있다. 조상을 맞이하여 주인 이하가 모두 재배하는 것을 참신 參 神 이라 하며, 하늘과 땅에서 조상의 혼백을 인도하는 의식을 강신 降 神 이라 한다. 그런데 가례 에는 시제, 기제, 묘제에는 참신을 하고서 강신을 하는데 先 參 後 降 반해, 사당 祠 堂 에서의 정지 正 至 및 삭망 朔 望 참례 參 禮 에는 강신을 한 후에 참신을 하는 것 先 降 後 參 으로 되어 있다. 제사의 종류에 따라 이러한 순서가 있는 것에 대해 이황은 참례 는 이날의 예로, 본래 참신하기 위해 설한 것이다. 만약 먼저 참신 을 한다면 강신 후에 할 일이 없다. 그 때문에 먼저 강신을 하고 참 례를 하는 것이다. 제사는 강신한 후에 허다한 천헌 薦 獻 등의 예를 행하기 때문에 먼저 참신을 한 이후에 강신을 하는 것이다. 20) 라 하 였다. 반면에 김장생은 무릇 신주 神 主 를 내어 모시지 않고 그 자리에 18) 예의류집 권21 제례조 : 尤 庵 曰 並 祭 考 妣 者 當 依 時 祭 儀 凡 干 祭 物 一 切 各 卓 各 饌 矣 考 妣 各 卓 禮 有 明 文 何 可 違 也. 19) 기호지역의 율곡종가와 우암종가, 영남지역의 학종종가에서 이와 같이 각탁( 各 卓 )에 제물을 진설하고 있다. 20) 예의류집 권20 제례조 : 參 則 是 日 之 禮 本 爲 參 神 而 設 若 先 參 則 降 神 後 都 無 一 事 其 所 以 先 降 神 者 爲 參 故 也 祭 則 降 神 後 有 許 多 薦 獻 等 禮 所 以 先 參 而 後 降.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205
있게 한다면, 먼저 강신을 하고 뒤에 참신을 한다. 삭망 참례와 같 은 예가 그것이다. 신위를 설치하는데 신주가 없으면, 또한 먼저 강 신을 하고 뒤에 참신을 한다. 시조제 始 祖 祭 와 선조제 先 祖 祭 및 지방 紙 榜 과 같은 예가 그것이다. 만약 신주를 밖으로 내어 모신다면 허시 虛 視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절하여 공경을 나타내어야 한다. 시제와 기제 와 같은 예가 그것이다. 21) 고 하였다. 그래서 묘제도 신위를 설치하 는데 신주가 없는 경우이기 때문에 먼저 강신하고 뒤에 참신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례 에는 우선 참신하고 나중에 강신한 다. 고 되어 있어서, 상례비요 묘제에는 격몽요결 의 선강후참 先 降 後 參 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가례 를 바꾸는 것이 미안해서 그대 로 두었다고 하였다. 22) 강신의 절차에 있어서도 강신의 해석에 따라 학파간의 행례의 차 이가 있었다. 가례 에는 정지 삭망 참례에는 강신에 분향 재배를 하고, 뢰주 酹 酒 후에 또 재배를 하는데, 사시제 및 기제에는 분향에 이어 뢰주를 한 후에 재배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가례 의절 에는 사시제와 같이 참례에도 강신에 한번만 재배하는 것으 로 되어 있다. 이에 이황은 대저 우제 虞 祭 나 삭망 등의 참례는 예가 간략하게 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에 도리어 모두 갖추는 것이다. 시 제는 예가 많이 갖추어지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에 도리어 21) 예의류집 권20 제례조 : 凡 神 主 不 出 仍 在 故 處 則 先 降 後 參 如 朔 望 參 禮 之 類 是 也 設 位 而 無 主 則 亦 先 降 後 參 如 祭 始 祖 先 祖 及 紙 榜 之 類 是 也 若 神 主 遷 動 出 外 則 不 可 虛 視 必 拜 而 肅 之 如 時 祭 忌 祭 之 類 是 也. 22) 의례문해 권1 참( 參 ) 선강후참선참후강지별( 先 降 後 參 先 參 後 降 之 別 ). 206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간략하게 한 것이다. 23) 고 하여, 참례는 간략한 예이기 때문에 강신 절차에 분향 후 재배 및 뢰주 후 재배를 하지만, 시제는 절차가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뢰주 후에 재배만 한다고 하였다. 24) 하지만 김장생은 이황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분향 후의 재배는 하늘에서 신을 구하는 것이고, 뢰주 후의 재배는 땅에서 신 을 구하는 것이다. 음양의 유무 사이에서 신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 에 둘 다 재배하는 것이 옳다. 25) 고 하였다. 또한 시제에 한번 재배 하는 것은 아마도 잘못 빠진 것 같다. 그래서 상례비요 에서는 삭 망 참례에 따라 사시제 강신에 두 번의 재배로 보충하였다. 26) 고 하 였다. 송시열도 회재 晦 齋 의 봉선잡의 또한 첨부하였으니, 비단 상례비요 뿐만 아니다. 후인 後 人 이 이를 행하는데, 또한 크게 해될 것은 없다. 27) 고 하여 분향후 재배를 하도록 하였다. 28) 3) 헌작과 좨주, 진적의 유무 강신 이후에 진찬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헌작이 행해진다. 그런데 23) 예의류집 권21 제례조 : 降 神 之 禮 ( ) 夫 虞 朔 之 類 禮 宜 簡 節 而 反 備 時 祭 宜 繁 縟 而 反 略 皆 不 可 曉. 24) 퇴계종가, 학봉종가, 서애종가 등 영남지역에서는 가례 를 따라 분향과 뢰주 후에 강신 재배만 한다. 25) 월당선생별집 권2 의례문해 하 제례 시제조 : 焚 香 再 拜 求 神 於 天 也 酹 酒 再 拜 求 之 於 地 也 在 彼 乎 在 此 乎 求 神 於 陰 陽 有 無 之 間 兩 再 拜 爲 可. 26) 예의류집 권21 제례조 : 時 祭 一 再 拜 恐 闕 誤 備 要 依 朔 望 參 禮 以 兩 再 拜 添 補 未 知 得 否. 27) 예의류집 권21 제례조 : 晦 齋 奉 先 儀 亦 補 入 不 但 備 要 而 已 後 人 行 之 亦 不 至 大 害 否. 28) 율곡종가, 사계종가, 우암종가 등 기호지역에서는 강신에 분향 후 재배 및 뢰주 후 재배를 한다.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207
헌작의 행례도 가례 와 가례의절, 국조오례의 가 다르다. 가례 및 상례비요, 사례편람 등에는 주인이 직접 신위전에서 잔을 내 려 동향하여 서면 집사자가 서향하여 침주 斟 酒 를 하며, 주인이 직접 전작 奠 爵 을 한다. 그리고 집사자가 제상의 잔과 잔 받침을 받들어 주 인에게 주면, 주인은 잔의 술을 모사기 위에 세 번 조금씩 붓는 좨 주를 행한다. 즉 침주, 전작, 좨주 순으로 헌작을 하는데, 침주는 집 사자가, 전작과 좨주는 주인이 직접 행례를 한다. 이와 다르게 국조오례의 및 가례의절 에서는 주인이 신위전에 북향하여 무릎을 꿇으면, 집사자가 잔과 잔 받침을 내려 주인에게 주고, 술을 따른다. 주인이 술잔을 들어 읍하였다가 집사자에게 주 면, 집사자는 술잔을 제자리에 놓는다. 국조오례의 에서는 침주, 전작으로 헌작을 행하는데, 좨주 절차가 없으며, 침주와 전작은 국 가제사와 같이 집사자가 행한다. 가례의절 에서는 침주, 좨주, 전 작의 순서로 하는데, 침주와 전작은 집사자가 행하고, 좨주만 주인 이 행한다. 이러한 국조오례의 및 가례의절 의 헌작 내용은 가례 의 내 용과 비교해서 간략하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식 李 植 도 오직 좨 주를 위해 잔을 올렸다가 다시 내리는 절차가 번거러울 듯하다. 경 산의 瓊 山 儀 ; 家 禮 儀 節 에 따라 단지 헌작에 잔을 일정 정도 들었다가 조금 기운 후에 일정 정도 올렸다가 잔을 올린다. 29) 고 하였고, 가 례향의 에서는 가례의절 이나 국조오례의 에 따라 헌작을 간략 29) 택당선생별집 권16 잡저 제의 시제조 : 唯 祭 酒 進 盞 還 盞 似 煩 用 瓊 山 儀 只 獻 時 擧 盞 加 額 少 傾 後 加 額 而 進. 208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하게 하라고 하였다. 30) 좨주의 행례에 있어서도, 가례 에는 삼헌에 모두 좨주를 하는데, 격몽요결 에서는 초헌에 이미 좨주를 했기 때문에 아헌과 종헌에 는 좨주를 하지 않는다. 31) 한편 초헌과 아헌에 좨주를 하지 않고 침 주, 전작만 한 경우에 있어서, 유식 절차의 첨주 添 酒 를 위해 종헌에 침주를 할 때 고의적으로 가득 채우지 않거나, 32) 전작을 하기 전에 좨주를 하기도 한다. 33) 헌작이 끝나면 안주의 의미로 진적 進 炙 을 한다. 가례 에는 간 肝 이 나 육 肉 을 화로에 구워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34) 헌작마다 간적 이나 육적 1곶을 진열한 적 위에 두기도 하고, 35) 또는 헌작마다 육 적, 계적 鷄 炙, 어적 魚 炙 을 달리 올리기도 한다. 36) 또는 어육 등의 제적 諸 炙 을 만들어 진찬 때에 여러 탕 가운데 진설하기도 한다. 37) 진적에 이어 밥뚜껑을 여는 계반개 啓 飯 蓋 절차는 가례 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상례비요 에는 이 때 밥뚜껑을 열어 그릇 남쪽 에 놓는다고 하였다. 30) 가례향의 제례조. 현재 기호지역에서는 가례 에 따라 헌작을 행하고 있으며, 영 남 지역에서는 가례의절 이나 국조오례의 처럼 헌작을 행하고 있다. 31) 율곡종가에서는 격몽요결 에 따라 초헌에만 삼좨( 三 祭 )를 하고, 아헌 및 종헌에는 좨주를 하지 않는다. 32) 예의류집 권 21 제례조. 33) 영남 지역에서는 이를 제작( 除 酌 )이라고도 한다. 34) 영광 영월신씨 종가에서는 삼헌마다 적을 화로에 구워 올린다. 35) 가례향의 권1 제례조. 36) 추파선생집 권2 유교( 遺 敎 ) 행사의절( 行 祀 儀 節 ). 율곡종가, 사계종가, 우암종가 등에 서는 삼헌마다 진적을 한다. 37) 가례향의 권1 제례조. 영남지역에서는 어적, 육적, 계적을 하나의 적틀에 차례대 로 쌓아 올리는데, 이를 도적( 都 炙 )이라 한다. 주로 진찬 절차에 올리기 때문에 헌작 절차에 진적이 생략된다.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209
이러한 절차가 끝나면 축관이 축판을 들고 주인의 왼쪽에 무릎을 꿇고 축문을 읽는 독축 讀 祝 을 한다. 가례 에는 이 때 구체적으로 주 인 이하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가례의절 에 주인 이하 모두 무릎을 꿇는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독축에 가례 의 해석 여하에 따라 축관과 주인만이 무릎을 꿇고 나머지 참제자 는 서 있기도 하며, 가례의절 에 따라 주인 이하 모두 무릎을 꿇고 독축하기도 한다. 헌작의 절차가 끝나면, 다음의 헌작을 위해 재배 후에 술과 적을 퇴주기에 물리지만, 가례 에는 아헌과 종헌에 구체적인 내용 없이 초헌과 같이 행한다고 하였다. 이에 사례편람 에는 구체적으로 종 헌 후에는 술과 적을 물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38) 그래서 종헌 후에 는 퇴주를 하지 않고 바로 유식례를 행하기도 한다. 4) 유식과 합문에 대한 해석 삼헌이 끝나면, 주인이 식사를 권유하는 의미로 유식례 侑 食 禮 를 행 한다. 가례 의 유식 절차에는 잔에 술을 더 채우는 첨작 添 酌 을 행한 후에 밥에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은 시접 위에 가지런히 놓는 삽시 정저 揷 匙 正 箸 를 행한다. 이와 달리 농암선생문집 聾 巖 先 生 文 集 의 제례 및 점필재집 佔 畢 齋 集 선공제의 先 公 祭 儀 에는 삽시정저 후에 첨작을 하 는 것으로 되어 있다. 39) 38) 이에 가례 에 따라 종헌 이후에 퇴주 및 퇴적( 退 炙 )하는 경우도 있으며, 사례편람 과 같이 퇴주 및 퇴적을 하지 않고 바로 유식례를 행하기도 한다. 210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정저 正 箸 의 경우 이황은 갱기 羹 器 에 바로 놓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 였다. 즉 옛날에 갱에 채소가 있어서,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였다. 그래서 제사에 젓가락을 갱에 올려놓는다. 40) 고 하였다. 그러나 김 장생은 퇴계와 달리 젓가락을 시접 匙 楪 가운데 바로 놓는 것이라 41) 하고, 윤증 尹 拯 은 젓가락을 탁상 위에 바르게 놓는 것이라 42) 고 하였 다. 이와 달리 조익 趙 翼 은 젓가락을 떡 위에 놓는 것이라 43) 고 하였다. 유식의 절차가 끝나면 식사를 하시도록 문을 닫고 나가는 합문례 闔 門 禮 를 행한다. 가례 에는 문을 닫고 나가 서 있는데, 문이 없을 경우 에는 발을 내린다고 하였다. 이황은 고금의 당 堂 이 다르기 때문에 합 문한 후에 부복 俯 伏 을 하는 것이라 44) 하였고, 가례증해 에는 가례 에는 정침 正 寢 의 당 堂 에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당문 堂 門 을 닫고 주인 이하가 계단 아래에 서서 기다린다 45) 고 하였다. 사례편람 에는 만약 문이 없으면 발을 치거나 병풍으로 제상을 가린다 46) 고 하였다. 39) 가례 에는 주인이 주전자로써 직접 첨작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역에 따라 서 주전자 대신에 술병을 쓰며, 또는 첨작용 잔을 마련하여 잔에 따라 잔을 채우기 도 한다. 기호지역에서는 대개 주전자나 술병으로 첨작을 하는데, 영남지역에서는 밥 뚜껑에 술을 따라 잔을 채우기도 한다. 40) 예의류집 권21 제례조 : 古 人 羹 有 菜 者 用 箸 以 食 祭 時 上 箸 于 羹 不 妨. 퇴계종가에서는 이황의 설명처럼 정저의 의미로 젓가락을 갱기 위에 올려놓는다. 41) 가례증해 권9 사시제조. 42) 명재의례문답 권7 제례 시제조. 43) 가례향의 권1 제례조. 44) 가례증해 권9 사시제조. 45) 가례증해 권9 사시제조 : 家 禮 則 祭 於 正 寢 之 堂 故 闔 堂 門 而 主 人 以 下 立 於 階 下 是 只 退 一 位 也 ( ) 門 在 堂 故 無 門 則 設 簾 矣. 46) 오늘날 기호지역에서는 합문의 경우 병풍으로 제사상을 가리고 문을 닫고 나가 밖 에서 기다리는데, 영남지역에서는 병풍으로 제사상을 가리고, 참례자 전원이 한참 동안 엎드리는 것으로 합문례를 행하고 있다.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211
5) 계문 후의 진다와 사신 합문 후에 축관이 세 번 헛기침을 하여 식사가 끝났음을 알리고 문을 여는 계문례 啓 門 禮 를 행한다. 식사 후에 숭늉을 마시는 것처럼, 주인과 주부는 국을 물리고 차를 받들어 올리는데, 이를 진다 進 茶, 헌다 獻 茶 라고 한다. 가례 에는 차를 올리는 예로 되어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차가 귀하였기 때문에 차 대신에 물을 올리었다. 조익 이 속례 俗 例 에 갱을 물리고 숙수 熟 水 를 올리며, 숟가락으로 약간의 밥을 취하여 물에 마는 것은 이내 생시의 진식 進 食 을 상징하는 것이 다. 47) 고 하는 것처럼, 생전의 숭늉과 같은 의미로서 물에 밥을 세 번 떠서 말고 그릇 안에 숟가락을 걸쳐 놓았다. 이에 송시열은 밥을 마는 절차는 가례 에는 없으니, 가례 로서 바로잡아야 한다. 48) 고 하였고, 이재는 중주인 中 州 人 은 차를 중시하 여 식사가 끝날 때마다 차를 두었는데, 이것은 옛날에 식사를 마친 후에 음주 飮 酒, 탕구 蕩 口, 안식 安 食 한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제사 또한 그것을 사용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물로써 차를 대신하여 밥을 마는 것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속례 俗 禮 이다. 이 때문에 예를 행하는 집안에서는 갱을 물리고 물을 올릴 따름이다. 49) 고 하여 단지 물만 올리기도 하였다. 진다 이후에 숭늉 드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서서 조금 기다 47) 가례향의 제례조 : 俗 例 退 羹 進 熟 水 以 匙 取 飯 少 許 澆 於 水 乃 象 生 時 進 食 之 常 也. 48) 가례증해 권9 사시제조 : 抄 飯 一 節 家 禮 無 之 恐 當 以 家 禮 爲 正. 49) 가례증해 권9 사시제조 : 陶 庵 曰 中 州 人 重 茶 每 食 畢 設 若 古 之 食 竟 飮 酒 蕩 口 安 食 之 義 也 祭 祀 亦 用 之 我 國 以 水 代 茶 而 至 於 調 飯 卽 是 俗 禮 故 好 禮 之 家 徹 羹 進 水 而 已. 212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리거나, 또는 몸을 굽히는 국궁 鞠 躬 을 한다. 가례 사시제에는 계문 절차 이후에 수조 受 胙 절차가 있지만, 기제에는 수조 절차가 없이 곧 사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진다 후 사신 전의 행례에 대해, 김장생은 서서 조금 더디게 하는 것이 옳다. 반드시 곧바로 사신해 서는 안 된다. 50) 고 하였다. 하지만, 윤증은 우리나라 예절에는 부복 하는 것을 공경으로 여기니, 진다 후에 부복하는 것이 옳다 51) 고 하 였다. 52) 한편 사례편람 에는 수조 절차에 합반개 合 飯 盖 및 합반개 전에 하시저 下 匙 箸 하는 것으로 행례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면, 제사가 끝나 조상이 떠나시는 것처럼 주인 이하 모두 사신재배를 한다. 사신례 후에는 분축 焚 祝 및 납주 納 主 를 행 례하고 철상 撤 床 을 함으로써 모든 제사 행례를 마친다. 기제에는 사 시제와 달리 음복수조 飮 福 受 胙 절차가 없으나, 제사를 마친 후에 제사 음식으로 음복을 하며, 제사음식을 나누어주는 봉송 奉 送 을 행하기로 한다. 4. 맺음말 이상으로 조선후기에 가례 를 준용하면서 나타난 행례의 차이 50) 월당선생별집 권2 의례문해 하 제례 시제조. 51) 명재의례문답 권7 제례 시제조. 52) 이처럼 진다 후에 부복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율곡종가, 사계종가, 우암종가에 서는 진다 후에 숙사소경( 肅 俟 少 頃 )으로 서서 잠시 동안 기다리며, 퇴계종가, 학봉종 가, 서애종가에서는 진다 후에 잠시 동안 몸을 굽히는 국궁( 鞠 躬 )을 한다.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213
와, 제사 절차에 따른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해석의 차이에 따른 행례의 내용을 종가별로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출주 절차에 퇴계, 서애종가 등의 영남학파 일부에서는 가 례 에 따라 기일에 해당하는 조상의 신위만을 모신다 單 設. 반면에 대 부분의 기호학파 및 영남학파의 종가에서는 이언적의 봉선잡의 및 선대의 관행에 따라 기일에 해당하는 조상의 배위까지 함께 모 신다 合 設. 둘째, 강신 절차로 영남학파에서는 가례 에 따라 분향과 뢰주를 강신의 한 절차로 여겨 한번만 재배 한다. 반면에 기호학파에서는 김장생의 상례비요 에 삭망 참례와 마찬가지로 두 번 재배를 해 야 한다. 고 하여, 강신 절차에 분향 후 재배와 뢰주 후 재배 등 두 번의 재배를 한다. 셋째, 헌작 절차에서 기호학파는 가례 에 따라 침주, 전작, 좨주, 진적 순으로 헌작을 하는데, 헌관이 전작 및 좨주를 행하고, 집사자 는 침주 및 진적을 한다. 반면에 영남학파는 국조오례의 및 가례 의절 과 같이 침주, 좨주, 전작 순으로 헌작을 하는데, 헌관은 좨주 만 하고, 집사자는 침주 및 전작을 한다. 그리고 기호학파에서는 가례 에 따라 헌작마다 진적을 하는데, 영남학파에서는 진찬 때 도 적을 올리기 때문에 진적의 절차가 없다. 넷째, 유식 절차에 있어서도 기호학파에서는 가례 에 따라 주인 이 주전자나 술병으로 직접 술잔을 채우는 첨작을 한다. 반면에 영 남학파에서는 집사자가 밥뚜껑에 술을 따라 술잔을 채우는 첨작을 하는데, 종헌에 첨작을 위해 술을 퇴주기에 조금 붓고 올리는 제작 214 한국민속학 일본민속학 Ⅲ
을 하기도 한다. 다섯째, 합문 절차에 있어서도 기호학파에서는 병풍으로 제상을 가리고 문을 닫고 나가 밖에서 서서 기다린다. 반면에 영남학파에 서는 병풍이나 발을 치고서 그 앞에서 부복하여 기다린다. 여섯째, 진다 절차에 있어서도 기호학파에서는 차 대신에 숙수를 올린 이후에 잠시 동안 서서 기다린다 肅 俟 少 頃. 반면에 영남학파에서 는 숙수를 올리고 밥을 세 번 떠서 만 다음에 몸을 굽히는 국궁을 한다. 이러한 기제 절차에 따른 행례의 차이는 가례 에 대한 선현들의 해석 차이는 물론, 참고서인 가례의절 와 국법인 국조오례의 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학파나 문중내에서도 집안에 전해진 가훈 家 訓 이나 가례서 家 禮 書 에 따라 각각의 가가례를 행하면서 행례에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더구나 집안에서 가장 크게 여기 는 불천위 不 遷 位 제사는 단순히 조상 숭배를 넘어서, 문중의 자랑이 었기 때문에 집안마다의 제사 행례 방식은 곧 전통적인 예법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후기 기제 행례의 차이에 대한 일고찰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