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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1768년 11월 13일: 丁 酉 비가 떨어지다가 맑음. 아침에 가묘( 家 廟 )의 제사( 祭 祀 )에 참여 ( 參 與 )함. 늦게야 별묘( 別 廟 :가묘에서 받들 수 없이 된 신주( 神 主 )를 모시는 사당( 祠 堂 ))의 제사( 祭 祀 )에 參 與 함, 점심때가 될 때 월파( 月 波 )와 형곡( 衡 谷 )의 삼종 대부( 三 從 大 夫 ) 및 백송족숙( 白 松 族 叔 )과 연흥족숙( 延 興 族 叔 )과 산양족형( 山 陽 族 兄 )이 와서 도착함. 백송족숙( 白 松 族 叔 : 澔 )은 내년의 종유사( 宗 有 司 )에 해당( 該 當 )되었기 때문에 와서 잠. 북쪽에 무지개다 나타났다고 하니 이상함. 1778년 2월(444~445)P 13일: 甲 辰 맑음. 문동( 文 洞 )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왔다. 봉증( 鳳 曾 )이도 뒤 따라 내방( 來 訪 ). 월파( 月 波 ) 권형수( 權 衡 秀 )어른이 형곡대부( 衡 谷 大 父 )를 문 후( 問 候 )하고 위로( 慰 勞 )하고는 곧장 돌아갔다. 14일: 乙 巳 맑음. 해무리가 지고 바람이 화창하다. 문동( 文 洞 )의 역군( 役 軍 :일정한 부분에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원단( 元 丹 )을 문 동( 文 洞 )에 보냈다. 16일: 정미 종일 비가 옴. 이날 나의 생일이다. 감회가 그치지 않는다. 박 상택( 朴 相 宅 )씨가 집을 철거( 撤 收 )하고 왔다. 19일: 庚 戌 맑고 점심 때 바람이 차다. 문동( 文 洞 )으로부터 인동( 仁 同 )의 처갓집에 갔더니 평안( 平 安 )하였으나, 내자( 內 子 :아내)의 유종( 乳 腫 )은 완전히 봉합( 封 合 )함에 이르렀으니 가히 아름다웠다. 21일: 壬 子 맑고 바람이 쇠잔함. 양촌( 陽 村 )으로부터 숭암( 崇 巖 )에 도착함 백송족숙( 白 松 族 叔 )을 문후( 問 候 )하였다. 족숙( 族 叔 )의 셋째아들 익양( 益 錫 )이 이름을 상계( 尙 桂 )바꾸었는데, 19일 단천( 舟 川 )의 김윤경( 金 潤 慶 )의 따님에 게 장가들었으니 가히 동내혼인( 洞 內 婚 姻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동상례 ( 東 床 禮 )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고기와 술이 있었다. 신곡( 新 谷 ) 김생원( 金 生 員 ) 복형씨( 復 亨 氏 ) 및 창림( 昌 林 )에 정찬동( 鄭 纘 東 ) 벗이 이곳에 와서 잠시 대화( 對 話 )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더니 노비( 奴 婢 )와 말을 보냈기에 문동 ( 文 洞 )으로 돌아왔다. 22일: 癸 丑 맑고 바람. 이날은 김군( 金 君 : 益 采 )과 더불어 처음으로 공부와 활을 쏘는 연습을 하였다. 23일: 甲 寅 맑고 가랑비. 문동( 文 洞 )에 갔다. 김익채군( 金 益 采 君 )과 더불어 함께하였다. 이날 마을 앞에 방축( 防 築 )의 둑을 쌓느라고 주육( 酒 肉 )을 설치 ( 設 置 )하였다. 초곡( 草 谷 )에 조영우( 趙 榮 遇 )가 와서 잠시 대화( 對 話 )하였다. 오후에 조군( 趙 君 : 榮 遇 )이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24일: 乙 卯 맑고 微. 종일 바람이 차가워 겨울의 추위와 같았다. 종일 활 쏘기 연습을 하였다. 밤의 꿈에 대인( 大 人 )을 보았다. 집일을 중수( 重 修 )하며 정침( 正 寢 )에 기둥과 상량( 上 樑 )을 함. 또 꿈에 내가 직책( 職 責 )의 이름이 있 는 것 같았으며 금상( 今 上 :임금)이 종가( 宗 家 )의 정침( 正 寢 )에 강림( 降 臨 )하셨 고, 나는 융복( 戎 服 :군복의 한 종류)으로 모시고 호위( 護 衛 )하였다. 또 꿈에 금 상( 今 上 )이 미행( 微 行 )하였고 나는 따라서 큰 길거리까지 이르렀다. 상( 上 :임 금)으로부터 푸른 대나무 3개와 화살촉 일부( 一 浮 )를 받았다. 나는 받들어 받았는데 잠깐 있다가 또 종가( 宗 家 )의 청사( 廳 舍 )로 임어( 臨 御 )하셨다. 조금 지나 환궁( 還 宮 )한다고 말씀하시기에 시종( 侍 從 )하여 궁문( 宮 門 ) 밖에까지 이 르렀는데 이에 꿈을 깨었다. 오늘이나 내일 종질부( 從 姪 婦 )가 처음으로 생남 ( 生 男 )을 한다면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문호( 門 戶 )를 크게 할 자이지만 산 기( 産 期 )가 고요하니 고민이고 고민이다. 29일: 庚 申 맑음. 문동군( 文 洞 軍 ) 14명과 우곡( 愚 谷 軍 ) 6명이 벽을 발랐다. 1778년 3월(446)P 초4일: 甲 子 맑음. 내일이 보통 복( 服 )을 마치는 날이기 때문에 박상택( 朴 相 宅 )인보씨( 仁 甫 氏 )와 더불어 강을 건넜다. 전익채( 全 益 采 )도 같이 가서 문 동( 文 洞 )에 들어갔다. 신곡( 新 谷 )에 김생원( 金 生 員 ) 복형씨( 復 亨 氏 )와 정좌랑( 鄭 佐 郞 ) 택동( 宅 東 ) 을 역방( 歷 訪 :차례로 방문함)하고 곧장 돌아왔다. 저녁 무렵에 교동( 校 洞 )을 방 문하여 여러 친구들과 성내( 城 內 )에서 잤다. 초5일: 乙 丑 맑음. 축시( 丑 時 )에 哭 班 (곡반:임금의 상에 멀리서 통곡함)에 들어 가 참여하였다. 변제( 變 制 )였다. 평명( 平 明 :해 뜨는 시각)에 마치고 문동( 文 洞 ) 으로 돌아왔다. 박인보씨( 朴 仁 甫 氏 )가 교동( 校 洞 )으로 향하였다. 김익채( 金 益 采 )는 나를 따라왔다. 점심때에 여울을 건어 집으로 돌아왔다. 1778년 윤6월.(460~462)P 초7일: 구름 우기가 있음. 김익채( 金 益 采 )와 더불어 문동( 文 洞 )에 갔다. 강 물이 점차 떨어져 건너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강창( 江 倉 )나루를 경유하여 대 택( 大 宅 )과 영중( 英 仲 )은 무두 다른 탈이 없었음은 다행이었으나 나루 주변 은 흉년임이 이미 판단이 났으며 도처에 벼가 손실된 바를 보니 진실로 한 심하였다. 소문을 들으니 古 南 에 鄭 氏 의 姻 戚 嗣 卿 이 奴 婢 인 妻 의 일로 꾸짖음이 있 자 그 딸이 大 水 의 입구에 投 身 하여 죽었다고 하나, 이것은 嗣 卿 으로 말미암

아 죽은 것이 아니었다. 鄭 先 達 인척의 兄 노비 奉 伊 라는 이름을 가진 者 가 月 洞 에 남편이 있는 여자를 도적질하여 도망함이 몇 년이었다가 지금 겨우 돌아와 접촉하였는데 그 여자의 본 남편이 지금 바야흐로 大 邱 로부터 돌아 온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여자가 이로 인하여 죽었다. 이것은 이른바 까마 귀 날자 배 떨어짐 이었으며 바야흐로 警 戒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屍 身 은 어느 곳으로 흘러내려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新 浦 의 鄭 和 卿 과 鄭 奉 新 이 古 南 으로부터 돌아가는 길에 文 洞 에 들어와 잠 시 對 話 하였다. 19일: 맑고 훈훈함. 新 浦 의 여러 벗이 明 日 에 길을 出 發 하여 간다. 고 하 였기 때문에 文 洞 으로 갔다. 오후에 新 浦 로 향하였더니 同 行 도 역시 再 明 日 에 길에 오른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日 三 (종) 및 四 足 (말)을 文 洞 으로 보냈다. 나는 新 浦 에 머물렀다. 11월 11일: 乙 酉 맑음. 이날이 文 洞 의 洞 會 라고 하기 때문에 英 仲 과 珽 燁 과 함께 會 議 에 참석하였다. 盧 明 彦 도 와서 도착하였기에 함께 잤다. 12일: 丙 戌 맑음. 盧 明 彦 을 華 林 에 보냈다. 나는 文 洞 으로부터 星 南 으로 가서 李 吉 普 어른을 訪 問 하고 돌아오다가 吾 老 峴 黃 昔 才 의 집에서 잤다. 13일: 丁 亥 맑고 매우 추움. 吾 老 峴 으로부터 文 洞 에 도착하였다. 식사한 후에 竹 岑 英 仲 의 寓 居 하는 곳에 가서 인하여 잤다. 14일: 戊 子 맑음. 竹 岑 으로부터 月 波 나루를 經 由 하여 집에 돌아왔다. 길에 서 盧 明 彦 을 만나 집으로 돌아가며 作 別 하였다. 1781년 10월(590~591)P 초9일: 戊 寅 맑음. 道 開 로 가서 上 舍 인 洪 天 休 와 더불어 對 話 하였다. 나의 旅 次 로 여러 벗이 向 하였다. 가서 文 洞 에 잤다. 地 師 인 李 命 臣 이 이곳에 도 착하여 왔기에 밤에 對 話 함. 초10일; 己 卯 맑음. 이날은 일찍 식사하고 星 南 으로 가서 墓 祀 를 모셨다. 李 院 長 인 吉 普 氏 를 訪 問 하였다. 栗 谷 에 가서 墓 祀 를 모시고 文 洞 으로 돌아 왔다. 祭 官 은 族 叔 湜 氏 인데 함께 더불어 갔다가 왔다. 11일: 맑고 바람이 없음. 이날은 文 洞 墓 祀 를 거행하였다. 崇 巖 에 白 松 族 叔 은 저녁에 돌아갔다. 그 나머지 族 人 은 留 宿 하였다. 저녁에 金 三 鳳 이 伽 倻 琴 을 携 帶 하고 도작하여 함께 자며 함께 對 話 하였다. 12일: 辛 巳 맑음. 문동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왔다. 18일: 丁 巳 맑고 또 바람. 이날은 文 洞 에 洞 會 이기 때문에 英 仲 및 珽 姪.

鄭 汝 益 과 더불어 月 波 나루터를 건너 文 洞 에 도착하여 洞 會 에 참석하였다. 金 三 鳳 이 稽 笛 (악기)을 휴대하고 왔기에 모여서 對 話 하였다. 2권 1791년 9월(310~313)P 25일: 丁 酉 맑음. 文 洞 로부터 呈 議 를 보내려고 나는 大 邱 로 向 하다가 가서 夢 臺 金 佑 宣 친구의 집에서 잤다. 10월 초6일: 丁 未 구름에 바람이 매서우며 비가 뿌림. 崇 巖 에 갔다가 돌아 와 月 波 利 卿 의 집에 도착하여 白 松 族 叔 을 받들어 拜 謁 하고 돌아왔다. 초9일: 庚 戌 맑음. 翼 燁 이 星 南 에 祭 祀 지낼 일로 星 南 에 갔다. 아침 후에 나도 文 洞 으로 가서 인하여 잤다. 초10일: 辛 亥 맑음. 文 洞 에서 각 墓 所 에 墓 祀 를 거행하였다. 소문을 들으 니 文 丹 에 사돈 金 曾 鍊 魯 卿 와서 도착하였다기에 文 洞 에 머물렀다. 11일: 壬 子 맑음. 집으로 돌아왔다. 白 松 族 叔 과 함께 華 林 에 갔다. 12일: 癸 丑 맑음. 白 松 族 叔 이 집으로 돌아가셨다.

13일: 갑인 맑음. 月 項 의 軍 丁 으로 하여금 亭 子 밑에 道 路 를 닦았다. 옛날 에 樵 路 (나무꾼의 길)만 있었기 때문에 지금 비로소 닦았다. 11월 초1일: 壬 申 맑음. 이날은 曾 王 母 忌 辰 이다. 祭 祀 일에 참석하니 追 慕 함이 더욱 倍 나 되었다. 초3일: 甲 戌 맑음. 崇 巖 에 白 松 族 叔 이 枉 臨 하여 오셨다. 인하여 잤다. 文 山 에 先 祖 의 祠 堂 인 世 德 祠 에 享 禮 의 入 享 을 議 論 하여 決 定 하였다. 3권 1799년11월(134~135)P 초10일: 甲 子 구름과 종일 비. 소문을 들으니 府 伯 이 이날 서울로부터 洛 東 을 경유하여 薪 楓 나루를 건너 官 廳 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11일: 乙 丑 맑음. 明 日 이 곧 조카아들인 晟 燁 의 婦 人 이 돌아오는 날이다. 文 洞 으로 가서 곧장 獨 山 으로 向 하였다. 저녁은 從 叔 의 집에서 먹었다. 文 洞 에서 잤다. 12일: 丙 寅 구름이 끼었다 볕이 남. 宗 族 이 와서 對 話 하였다. 繞 客 은 洪 上 舍 인 文 豹 가 와서 도착하였으니, 바로 姪 婦 의 七 寸 조카였다. 新 人 에게 拜 禮 를 받았으나 시아버지는 먼 外 地 에 있고 시어머니의 자리는 이미 비었으니 슬픈 感 懷 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族 叔 澔 氏 가 손님을 접대하였다. 나는 從 叔 및 다른 宗 人 들과 같이 함께 文 山 社 에서 잤다. 13일: 丁 卯 맑음. 洪 上 舍 ( 文 豹 )가 돌아갔다. 새 姪 婦 는 사람됨이 沈 重 하여 가히 아름다웠다. 文 洞 上 鉢 寺 에 머물렀다. 庶 祖 母 에게 拜 謁 하고 龍 燁 의 墓 所 에 통곡하였다. 상대의 案 山 은 바라보니 奴 婢 의 妻 인 卜 丹 의 무덤인데 모두 要 害 處 에 묻었다. 在 玉 을 어찌 충분히 꾸짖으랴! 슬펐다. 저물녘에 府 로 들어가서 府 伯 을 보고 安 穩 하게 敍 懷 하였다. 달밤에 獨 山 으로 돌아와서

잤다. 15일: 己 巳 맑음. 이날은 宗 人 이 와서 모였다. 文 山 別 所 에 債 錢 (빌린 돈) 및 名 下 錢 未 收 한 者 에게 受 納 하였다. 今 年 에 借 用 은 二 十 兩 이라고 報 告 하였 다. 明 年 에 文 山 春 秋 에 使 用 하여 줄 빚 七 十 五 兩 은 제외하였다. 辛 酉 (1801) 년에 이르면 春 秋 로 사용할 바를 다시 宗 中 名 下 錢 을 거두기로 구획하여 처 리하고 完 文 을 작성하였다. 이날 本 面 의 書 記 를 招 請 하여 文 山 의 垈 地 를 측 량하였다. 尙 樸 의 집 지는 垈 地 에 元 집 및 마당은 그의 터가 아니었으며 先 塋 의 남은 산기슭을 侵 犯 하였다. 尙 樸 의 집에 奴 婢 에게 분부하여 賭 地 를 와 서 내고 里 社 에 租 稅 를 내게 하였다. 16일; 庚 午 맑음. 文 山 으로부터 華 林 으로돌아왔다. 23일; 丁 丑 맑음. 文 洞 에 尙 樸 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보았더니 喪 人 의 服 色 인데 布 網 (벼 망건)을 直 領 (곧은 깃)을 입고 麻 鞋 (삼베 신)를 신었으니 이 것은 바로 西 人 의 喪 禮 이었다. 1801년 8월(304~305)P 초8일: 庚 戌 맑음. 일찍 출발하여 金 泉 道 의 馹 馬 를 타고 開 寧 지경 위에 도착하니, 候 吏 가 와서 기다렸다. 砲 도 역시 거행하였다. 縣 의 下 處 軍 官 廳 에 도착하니, 善 山 探 吏 도 와서 나타났다가 돌아간다고 보고하였다. 珽 燁 이 와서 도착하여 잠시 對 話 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가서 善 山 의 지 경에 도착하니 候 校 가 砲 聲 을 例 에 의하여 거행하였다. 板 山 에 도착하니 宗 玉 이 와서 기다렸다. 府 에 도착하니 府 伯 은 巡 營 에 갔다. 잠시 쉬었다가 文 洞 으로 돌아왔다. 先 妣 三 位 의 墳 墓 에 獻 酌 하고 文 洞 길거리를 들어가니 箕 燁 과 在 玉 이 함께 도착하였다. 局 內 에 先 塋 의 省 墓 를 마치고 저녁밥은 庶 嫂 집에서 먹었다. 良 谷 의 姪 婦 는 아이를 밴 지 아홉 달이어서 보니 민망하였 다. 從 叔 의 諱 는 洪 및 그 다른 叔 氏 도 와서 보고 잤다. 文 洞 社 下 人 은 마을 의 閭 閻 집에서 함께 먹었다. 초7일: 辛 亥 맑음. 文 洞 으로부터 와서 水 月 의 先 塋 에 소제하고, 술잔을 올 린 후에 이에 法 華 洞 으로 돌아와서 曾 祖 妣 이신 完 山 李 氏 의 墓 所 에 소제하고 參 拜 하였다. 先 兄 이신 通 德 郞 公 ( 諱 尙 植 ) 墓 所 및 亡 室 淑 夫 人 徐 氏 의 墓 所 에 가서 痛 哭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801년 11월(313~315)P 11일: 甲 午 맑음 오후에 구름. 일기가 매우 훈훈하여 언 곳이 모두 풀렸 다. 이날 卯 時 에 廟 宇 의 立 柱 上 樑 인데 다만 正 間 만 세웠으니 한 칸은 材 木

을 모두 다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翼 燁 아이를 雲 谷 에 보냈다. 인척 趙 㯖 이 門 (집)에 도착하였으니 在 明 때문이었다. 늦게 法 華 에 갔으니 祠 堂 의 재목이 未 備 한 것을 伐 採 하기 위하였으며, 저물게 돌아왔다. 밤에 비 가 쏟아지더니 그쳤다. 12일: 乙 未 맑음. 이날은 珽 燁 조가가 文 洞 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헌 집 12칸을 헐기 위함이었다. 얼음이 얼어붙기 전에 材 木 과 기와를 운반하여 강을 건널 계획이었다. 14일: 丁 亥 맑음. 翼 燁 아들이 長 川 으로부터 大 芚 寺 에 올라가서 자고, 白 蓮 洞 墳 墓 에 省 墓 하고 오다가 草 谷 에서 잤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와서 인사하 였다. 三 從 姪 必 燁 과 族 從 尙 格 이 와서 對 話 하였다. 朴 汝 文 이 왔다가 돌아갔 다. 오후에 내가 문동으로 갔다. 明 日 이 곧 文 山 別 所 錢 收 捧 日 이기 때문이다. 가서 本 所 에 잤더니, 유사는 尙 檀 이 焚 香 하려고 와서 도착하였다. 從 叔 諱 洪 로 와서 잤다. 族 姪 敬 一 도 역시 와서 같이 잤다. 珽 燁 조카도 역시 文 洞 에 머물렀으니, 옛집에 기와와 돌을 어제 내리기를 마쳤단다. 15일: 戊 子 말고 바람이 참. 닭이 울고 나서 府 中 에 들어가니 金 泰 川 이 와 서 掾 吏 房 에 자며 잠시 對 話 하였다. 잠시 후에 府 伯 이 客 舍 로 向 하기에 金 泰 川 과 더불어 같이 哭 班 에 참가하였다. 나는 文 洞 으로 돌아왔더니 해가 아 직 未 明 이었다. 아침에 이르러 廟 庭 을 瞻 謁 하였다. 늦게야 別 所 錢 을 受 納 하 였더니, 모두 숫자가 133 兩 5 錢 이었으며, 下 所 에 使 用 을 除 外 88 兩 本 錢 의 빚을 주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날 省 谷 洞 軍 이 華 林 으로 기와를 운반하였다. 珽 燁 조카는 冬 至 節 日 이 가깝다면서 華 林 으로 돌아가고, 翼 燁 아이와 箕 燁 조가 은 華 林 으로부터 와서 잤다. 文 山 에 敬 一 의 동생인 敬 黙 이도 역시 와서 잤 다. 文 洞 의 宗 族 이 모두 모였으나 尙 柔 의 형제는 오지 않았다. 상박의 종제와 형은 끝내 파면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이제부터 服 從 하지 않으면 영원히 막 는 外 에는 다른 方 道 가 없다. 16일: 己 丑 맑고 바람이 그침. 이날은 文 洞 의 사람과 소가 기와를 운반하 였다. 점심때에 翼 燁 과 그리고 箕 燁 이 華 林 으로 돌아갔으니, 明 日 은 곧 冬 至 哭 班 이기 때문에 나아가 참석할 계획이었다. 종과 말이 와서 告 하기를 如 阿 柳 室 이 病 患 이 危 極 하다고 통보하였다. 부 득이 집으로 돌아갔더니 柳 室 이 11일부터 微 痛 의 症 勢 가 있다가 지금에 이 르러 더욱 危 極 하여 보았더니 苦 悶 되는 생각이었다. 17일: 庚 寅 맑음. 이날은 冬 至 日 이다. 아침에 家 廟 에 가서 祭 祀 에 참여하 고, 늦게 珽 燁 조가가 文 洞 에 갔으니 집의 材 木 을 헐기 위함이었다. 어제 밤

에 비가 내려 아침에 눈을 쓸어내고 祭 祀 를 행하였다. 18일: 辛 卯 맑음. 닭이 운 뒤에 女 阿 (딸)가 진통하는 증세가 徑 産 (달이 차 기 전에 아이를 解 産 함)할 조짐이 있더니, 조금 후에 과연 男 兒 를 半 産 하였 는데 밝음에 이르자 이에 죽었으니 분통함이 그치지 않았다. 목수 吾 希 說 이 文 洞 에 가서 집의 장소를 헐었다. 19일: 壬 辰 맑고 눈이 녹음. 月 項 에 南 太 佑 와 富 倍 등이 와서 보았다. 소문을 들으니 水 月 마을에 수 일곱 마리가 죽었다고 하니, 가히 염려가 된 다. 吳 希 說 이 文 洞 으로부터 水 月 로 가서 기둥과 대들보의 兩 材 木 을 다듬고 돌아왔다. 奴 婢 崔 三 이를 河 上 으로 보내어 産 奇 를 통지하였다. 20일: 癸 巳 말고 오후에 구름. 이날은 藍 山 院 村 에 江 倉 軍 정이 집의 材 木 을 운반하였다. 丹 丘 에 盧 尙 柙 이 와서 보고는 말을 빌려서 갔다. 比 安 興 田 에 族 人 인 渤 이 女 壻 (사위)을 어제 맞이하며 明 日 에 돌려보내려고 말을 요청 한 것이다. 從 叔 諱 洪 과 族 叔 泳, 澔 氏 와 族 從 尙 標 와 庶 族 尙 杰 尙 枉 이 再 昨 日 에 興 田 으로 가서 渤 의 女 壻 를 보고 今 日 에 돌아와 도착하여 거쳐서 訪 問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珽 燁 조카가 文 洞 위로부터 왔다가 저녁에 또 文 洞 으로 갔다. 21일: 甲 午 구름. 이날은 文 洞 과 月 波 軍 丁 이 재목과 기와를 운반하였으나 마치지 못하였다. 늦게야 翼 燁 아이가 月 波 로부터 집으로 돌아와 인사를 하 였다. 柳 自 一 (사위)이 머물렀다. 23일: 丙 申 말고 오후 흐림. 날이 새자 柳 自 一 (사위)이 돌아가겠다고 보고 하였다. 女 阿 의 症 勢 는 별로 저 危 極 함이 없었으니 多 幸 이었다. 省 谷 에 소 20태로 文 洞 의 재목과 기와의 운반을 마쳤다. 箕 燁 조카는 文 洞 으로 갔다. 밤에 눈이 뿌렸다. 24일: 丁 酉 약간 개다 늦게야 가랑비가 저녁에야 그침. 金 汝 成 이 와서 대 화함. 庶 族 人 渤 이 와서 보았다. 月 波 와 文 洞 으로 向 하였다. 翼 燁 아이도 역 시 文 洞 에 갔다. 1803년 2월(393)P 16일: 壬 子 흐리고 참 종일 바람이 어지러움. 안집의 柱 礎 를 나열하여 놓 았다. 木 手 金 達 成 이 어제 점심 때 와서 나타났다. 오늘은 먼저 柱 礎 부터 놓 았다. 이날은 즉 나의 生 日 인데 부모님께서 수고하신 感 懷 가 갈수록 더욱 새 로워진다. 明 日 은 바로 徐 夫 人 의 忌 日 이기 때문에 齋 戒 와 素 食 을 한다. 어제 箕 燁 조카가 돌아와서 인사를 하였다. 17일: 癸 丑 맑고 오후에 바람 조금. 목수가 기둥 네 개와 대들보 하나를

다듬었다. 닭이 울자 祭 祀 를 거행하였는데 슬펐다. 소문을 들으니 豊 川 張 成 漢 令 公 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슬프고 슬펐다. 금년에 78세이니 죽은들 또한 무엇이 한탄되랴! 18일: 甲 寅 맑고 바람이 없다. 이날 巳 時 에 立 柱 를 하고 午 時 에 上 樑 을 하 였으나 다만 한 칸만 세웠다. 朴 汝 文 과 金 性 汝 가 와서 보았다. 20일: 丙 辰 맑고 바람 없음. 늦게야 法 華 洞 에 갔다. 齋 宮 村 놈 8명으로 하 여금 椽 木 (서까래) 24개와 散 子 木 11개를 伐 木 하여 짊어지고 오게 하였다. 崔 君 은 新 谷 으로 향하였다. 箕 燁 조카는 府 中 으로 갔다. 21일: 丁 巳 맑고 종일 土 雨, 珽 燁 조카가 돌아와서 인사를 하였다. 소문을 들으니 今 日 이 文 山 祠 의 享 禮 日 이라고 하였다. 齎 員 은 다만 山 長 進 士 李 榏 이고 有 司 는 盧 尙 格 이며 獻 官 은 權 處 揆 와 尹 衡 老 와 기타 本 孫 6인이기 때문 에 珽 燁 조카도 齋 戒 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金 谷 에 朴 郎 (박서방) 漢 實 이 그의 兄 인 漢?과 더불어 와서 잤는데 곧 科 擧 보려 가는 길이었다. 1803년 5월(419~420)P 30일: 癸 亥 맑음. 나는 宗 宅 의 廳 舍 에 居 處 하였다. 소문을 들으니 文 山 山 長 이 單 子 를 올리고 辭 退 하여 交 替 한다고 하는데 뜻과 理 致 를 가히 알 수가 없었다. 6월 초4일: 丁 卯 맑고 혹 구름 종일 동남풍이 크게 불다. 徐 元 之 및 洤 叔 이 돌아왔다. 珽 燁 존카는 月 波 에 갔다가 저녁에 族 從 尙 檀 과 더불어 와서 도 착함. 族 從 ( 尙 檀 )은 인하여 잤다. 초1일에 金 晶 燦 의 辱 牌 가 文 山 里 社 에 도착하였다. 그 牌 에 말하였기를 너 의 몸을 여러 차례 推 捉 (추달하여 잡음)하였으나 따라서 推 捉 하지 못하였더 니, 本 孫 을 驅 逐 하여 奴 婢 로 差 出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하였구나. 本 社 는 이 미 이것이 學 宮 이니 무슨 體 貌 이더냐? 이것이 무슨 擧 措 이더냐? 또한 堂 의 四 凶 을 씻어내는데 역시 무슨 일인들 가히 참지 못하겠느냐? 너를 위하여 處 身 함은 前 에 이미 分 付 한 일이다. 이 일을 仇 竟 하지 못한 前 에는 儒 生 이라 고 이름을 한 者 가 결단코 任 員 을 履 行 할 수 없다. 비록 혹 本 孫 의 얼굴에 拘 碍 됨이 있더라도 私 的 으로 이행한 것은 크게 孺 宮 의 體 貌 를 失 墜 하였으니 역시 先 賢 을 尊 崇 하여 崇 尙 하는 뜻이 아니로다. 이후로 만약 沒 廉 恥 를 무릅 쓰고 任 員 을 帶 同 하는 者 는 너의 몸이 마땅히 그 任 務 를 帶 同 하며 빨리 笞 罰 을 施 行 하여라. 이러한 뜻으로 上 堂 에 告 하노라 云 云 이라고 하였다. 초5일: 戊 辰 맑고 이날 서풍이 생김. 終 日 蘇 生 할 기운이 있었다. 族 從 尙

檀 이 돌아왔다. 從 叔 이 오셨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晟 燁 조카가 돌아간다고 告 하였다. 초6일: 己 巳 맑음 저녁에는 서풍이 불었다. 일찍 水 橋 에 가서 省 墓 하려고 江 倉 나루를 건너 文 洞 에 도착하여 省 墓 를 하였다. 소문을 들으니 尙 柔 가 堤 防 에 소나무를 백지 切 斷 하여 處 理 하였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이에 꾸짖으 며 말하기를 너의 擔 當 하여 主 張 하던 바의 松 楸 는 모두 尙 樸 에게 委 任 하였 는데 감히 한 번도 辭 讓 함이 없었고, 堤 防 에 소나무는 王 考 께서 손수 심으신 소나무인데 너의 한 일은 사람이 아니로다. 고 하였더니, 尙 柔 가 이에 성을 내며 내가 바야흐로 말에 올라타려고 할 즈음에 고삐를 잡고 돌려서는 인하 여 馬 匹 을 奪 取 하였다. 人 間 의 道 理 가 캄캄하게 막힘이 이 지경에 이르렀구 나. 나는 尙 柔 보다 나이가 17세나 많은데 저의 長 兄 인데 門 中 의 父 兄 과 長 老 를 알지 못하는 者 에게는 사람의 道 理 로써 충분히 꾸짖지 못하기에, 우두 커니 걸어 나와서 獨 山 에서 休 息 하였더니, 族 從 尙 檀 이 校 洞 에 金 泰 川 집으 로부터 와서 도착하였다. 1810년 4월(627~628)P 23일: 丙 戌 맑음. 新 浦 로부터 출발하여 舞 來 로 향하였다. 金 在 汶 喪 人 을 慰 問 하고, 本 府 의 서남들녘을 지나니 십리가 밤나무 숲인데 금년 안에 모두 붉게 되고 남음이 없었다. 또 묵은 곳을 開 墾 하는데 官 廳 에서 一 斗 地 를 개간 하면 五 錢 을 받기로 式 을 定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虐 政 이라고 할 수가 있구나. 山 野 에 樹 木 에 이르기까지 저 官 守 의 책임자가 다만 吏 房 의 말만 듣 고 그 禁 止 함을 게을리 하여 그것이 붉게 되도록 放 任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職 分 안의 일일까? 밤나무 숲이란 것은 이것이 본래 文 簡 公 佔 畢 齋 金 先 生 께서 이 府 에 赴 任 하시어 10 리의 묵은 곳에 이 밤나무를 심은 지 이리 300여 년이 지났으니 先 賢 의 遺 跡 이 比 喩 하면 南 國 의 甘 棠 인데 그 가볍고 무거움이 어떠하겠느 냐? 슬프고 슬프구나. 文 山 에 도착하니 月 波 의 再 卿, 崇 岩 의 敬 一, 敬 勳 및 敬 熙 가 모두 도착하였고, 霶, 鴻, 浩 의 族 丈 三 兄 弟 도 역시 도착하였다. 今 日 의 公 事 는 다름이 아니라 敬 勳 兄 弟 가 이름을 빌려 文 山 別 所 錢 을 내어 사용 한지 45년을 갚지 않아 40 金 을 헛되게 기록함에 이르렀기 때문에 敬 一 로 하 여금 文 書 로 작성하여, 崇 岩 鐵 鉢 洞 文 山 社 中 으로 납부하여 매년 40두로써 賭 地 의 納 稅 를 式 으로 定 하였다. 本 錢 은 준비하여 納 付 한 後 에 내어 주도록 문서를 작성하여 約 定 을 定 하여 주었으며, 今 年 가을부터 시작하기로 하였 다.

盧 氏 로 姓 을 가진 자가 몰래 本 社 別 所 錢 을 侵 犯 한 者 에게는 本 社 ( 文 山 社 ) 에 出 入 할 수 없다는 뜻으로 文 書 를 작성하여 壁 에 걸어두고 그것을 永 久 히 遵 行 할 約 條 로 삼고 罷 會 하였다. 分 配 된 빚은 堂 員 의 會 中 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庫 直 이 기록하여 내어 착실하게 사람에게 빚을 낸 뒤에 비로소 나누어 주자는 뜻으로 式 을 定 하여 庫 直 의 侤 音 을 받았다. 만약 빚을 갚지 않은 자는 庫 直 을 徵 戒 에 處 하여 納 付 하다 云 云 하였다. 珽 燁 조카와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西 山 窩 에서 잤다. 24일: 丁 亥 맑음. 金 達 成 ( 木 手 )이 와서 棣 樂 堂 과 西 山 窩 의 다하지 못한 條 件 을 堂 火 간에 한 개의 地 榜 과 두 개의 中 柱 를 설치하고, 西 山 窩 에 짧은 처 마를 설치하였다. 愚 谷 에 金 亮 采 가 와서 보았다. 25일: 戊 子 맑았다 구름. 文 洞 族 丈 浩 氏 가 仲 兄 인 鴻 氏 를 모시고 訪 問 하 였다. 月 波 에 族 從 尙 檀 과 族 姪 敬 熙 와 坪 松 에 閔 査 丈 東 煥 이 와서 對 話 하였 다. 法 山 崔 柱 河 가 와서 잤다. 金 必 煥 이 와서 보았다. 文 洞 族 丈 兄 弟 는 모 두 돌아가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함께 西 山 窩 에서 잤다. 4권 1814년 8월(176)p 29일: 丁 亥 맑음. 이날은 文 山 社 의 享 禮 日 이다. 일찍 龍 山 나루를 건너 文 山 社 에 가서 廟 宇 를 瞻 拜 하며 拜 謁 하였다. 齋 員 이 겨우 餕 禮 ( 享 禮 )를 하였을 뿐이다. 山 長 인 金 充 鍊 이 交 替 되기를 要 請 하므로 金 馹 燦 을 薦 擧 하여 내어 山 長 을 삼았고, 有 司 金 德 燦 도 交 替 되기를 要 請 하므로 朴 世 龜 을 薦 擧 하여 내어 有 司 를 삼았다. 朴 宣 傳 과 姓 名 이 같아서 鄕 里 의 義 理 上 옳지 않기에 내가 朴 思 儆 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食 事 를 한 後 에 會 員 들 은 모두 돌아갔다. 나는 局 內 에 先 塋 및 佳 佐 山 의 先 親 의 山 所 三 位 에 省 墓 를 하고 돌아와 文 山 社 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가서 松 堂 ( 朴 英 )의 壇 所 에 올라가 神 道 碑 銘 을 구경하고 나루를 건너 집에 돌아왔다.

1814년 12월(191)P 14일: 庚 午 맑고 微 風 이라 차가움. 이날은 別 業 (별장)으로부터 장차 文 山 社 로 向 하려는데 白 雲 洞 門 으로부터 나와 校 洞 에 벗인 金 馹 燦 과 汝 良 이 左 行 으 로부터 나를 訪 問 하여 왔기 때문에 잠시 靑 雲 洞 村 舍 에서 對 話 를하고 함께 葛 峴 을 넘었다. 金 友 ( 馹 燦 )는 곧장 龍 山 의 얼음길을 向 하였으며,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벗 李 士 浣 도 역시 집으로 돌아가던 次 로 나를 기다렸다가 앉아서 잠시 對 話 하였다. 또 안식구의 여러 婦 人 들과도 面 對 하고 因 하여 龍 山 의 氷 路 로 向 하였는데 金 友 ( 馹 燦 )는 이미 건너 浦 口 로 내려가는 中 이었다. 내가 文 山 에 도착하니 金 友 ( 馹 燦 )는 오지 않았기에, 驅 從 을 影 堂 으로 보냈 더니, 金 友 가 과연 아래로 내려왔다. 즉 本 社 ( 文 山 社 )의 山 長 이기 때문이었 다. 잠시 후에 李 士 浣 이 璧 燁 조카와 더불어 牛 峴 을 經 由 하여 月 波 를 건너 나루 로 내려왔다. 얼음길로 文 山 社 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함께 잤다. 손님에 金 馬 山 鄭 佑 東 이란 者 가 있는데 上 衣 를 벗고 와서 앉았으니 모습이 바로 乞 客 이었다. 밤에 有 司 가 떡을 設 置 하여 山 長 을 기다리는데 山 長 이 새 로 選 出 된 자이었다. 鄭 ( 佑 東 )이 떡이 적다면서 有 司 에게 惹 起 하니 배불리 먹는 무리( 乞 客 )가 學 宮 에 出 入 하니 진실로 가히 슬펐다. 鄭 一 默 의 叔 父 라고 하였다. 15일: 辛 未 맑고 바람 없이 날이 화창함. 文 山 으로부터 奴 婢 와 말을 일으 켜 벗 李 士 浣 의 집으로 보냈더니, 奴 婢 와 말이 저물게 돌아왔다. 李 士 浣 이 집으로 돌아감은 不 得 已 함에서 나왔다. 그러나 섭섭하기 그지없 었다. 바야흐로 文 山 에 앉을 즈음에 손님이 한 總 角 을 거느리고 들어왔는데, 貌 狀 이 곧 바로 乞 客 이었다. 그의 居 處 하는 곳을 물었더니, 海 平 의 文 氏 姓 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이러한 무리들도 모두 學 宮 에 들어오며 自 稱 하여 士 林 이라고 하니 매우 가히 痛 歎 스럽다. 이날 아침 祠 堂 을 拜 謁 하였 다. 16일: 壬 申 말고 바람 없이 날이 화창함. 文 山 으로부터 卜 才, 太 得 의 兩 奴 婢 를 거느리고 돌아오며 龍 山 의 얼음길을 건너 蹄 坪 앞에 到 着 하니 守 門 아 들이 府 伯 을 보기 위하여 나왔기 때문에 말 위에 서서 이야기하였다. 나는 이에 곧장 白 雲 別 業 으로 돌아오니, 長 孫 인 虎 玉 이 仁 玉 과 斗 玉 의 兩 人 을 거 느리고 먼저 이곳에 到 着 하였으니 癘 染 病 을 避 하기 위함이었다. 18일: 甲 戌 볕이 미약하고 또 추움. 卜 才 의 아픔은 差 度 가 없다고 하였다. 奴 婢 權 石 이 와서 나타나 轎 子 를 가지고 갔으니, 族 丈 浩 氏 의 女 子 子 의 新 行

이 24일에 있다고 하였다. 長 孫 虎 玉 은 집에 머물렀다. 1815년 正 月 (200~201)P 25일: 辛 亥 맑고 바람 없음. 이날은 柳 熙 睦 과 李 麟 曄 의 二 君 이 河 上 으로 돌아갔다. 璧 燁 조카는 文 洞 으로 돌아갔다. 守 門 兒 愚 谷 의 寓 居 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30일: 丙 辰 흐리고 비가 半 日 내리다 오후에 해가 뚫림. 出 發 하여 葛 峴 을 넘어 곧장 文 山 社 로 向 하면서 石 峴 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月 波 津 에 이르니 저물어 어두웠다. 배를 건너 文 山 社 에 이르니, 山 長 인 벗 金 馹 燦 및 벗 權 思 漢, 昌 林 에 鄭 儀 默 과 族 從 尙 檀 이 와서 모여서 밤에 對 話 하였다. 有 司 는 本 孫 에 盧 浩 氏 뿐이었고 鄕 有 司 는 오지 않았다. 2월 초1일: 흐리고 비가 오지 않음. 아침에 廟 庭 을 瞻 拜 하였다. 山 長 을 分 定 하며, 春 享 獻 官 및 執 事 諸 員 도 받들 것을 要 請 하고 늦게야 모두 돌아갔 다. 이날은 즉 伯 嫂 氏 의 忌 日 이다. 소문을 들으니 珽 燁 조카는 文 洞 에 머문다 는데 어제 新 堂 浦 로 向 하여 轉 轉 하여 耆 洞 으로 향하였다고 하니 甚 하구나 珽 燁 의 사람됨이여! 母 親 의 忌 日 이 하룻밤 남았는데 齋 戒 하는 날에 出 入 함은 본래 禮 가 아니다. 하물며 文 洞 은 본래 이곳이 옛날 살던 洞 里 이고, 또한 箕 燁 과 璧 燁 의 두 조카도 이곳에 와서 머무니 紙 榜 으로 祭 祀 를 擧 行 함은 이에 사람의 자식으로 人 情 과 禮 節 을 펼쳐야 하는데도 예사로 祭 祀 를 빠트리며 人 情 과 義 理 를 돌아보지 않으니, 孝 子 로 稱 頌 함과 主 人 으로 呼 稱 하면 死 亡 하 여 섬기기를 살아서야 같이 섬겨야하는 義 理 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前 에 옛날 文 洞 에 居 住 하던 날 6~7월의 祭 祀 를 華 林 의 寓 居 하던 場 所 에서 擧 行 하다가 이 家 法 을 廢 止 함이 어느 해에 시작되는지 지금에 이르러서는 편안한 듯이 母 親 의 忌 日 에 祭 祀 도 廢 止 하는데 어느 겨를에 祖 父 以 上 에게 정성이 두터우랴! 痛 嘆 스럽고 울고 싶음을 形 狀 하기 어렵구나. 점심때에 華 林 을 지나가니 奴 婢 인 玉 丹 및 卜 占 의 남편인 皇 甫 와 自 明 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가련하였다. 守 門 兒 는 愚 谷 의 손님을 접대할 수가 없어 산 위에 있으며 나무를 伐 採 하기 때문에 곧장 別 業 으로 ㄷ돌아왔다. 1815년 8월(232~236)P 16일: 戊 辰. 맑고 청양함 이날 수문아가 文 山 書 院 4자의 額 을 받기 위하여 義 城 의 官 衙 로 향하였다. 升 燁 도 역시 돌아왔다고 告 하였다.

17일: 己 巳, 구름 어제 밤부터 남풍의 소리가 있었는데 아침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다. 종일 바람과 비가 내렸다. 크게 쏟아짐에 이르지는 않았다. 수문아가 가면서 중간에 비로 지체될 형상 염려되어 가히 가엽다. 19일: 辛 未. 개고 바람이 없다. 이날 장손 必 琥 가 조흘강을 하려고 선산부 의 관아에 갔다가 講 에 응하고 帖 을 받아 저물게 돌아왔다. 점심 때 文 洞 의 族 丈 浩 氏 가 와서 보았다. 소문을 들으니 文 山 을 升 號 할 通 文 이 仁 同 의 東 洛 書 院 으로부터 들어왔다고 하였다. 族 人 敬 一 이 감히 妨 害 할 마음으로 本 所 에 들어와서 一 年 을 기다려야 옳다고 하였다. 本 月 12일이 되어 비가내리는 가운데 그 아들 庭 玉 을 文 洞 으로 보내 族 丈 에게 말하기를 일이 急 하기 때문에 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고 하자, 族 丈 이 말씀하시기를 무슨 급한 일이 있느냐? 고 하였더니, 庭 玉 이 말하기를 文 山 의 享 禮 는 날짜를 물려서는 옳지 않으니 15일에 擧 行 하여야 합니다. 고하자, 族 丈 이 말씀하시기를 비록 진행하여 결정하고자 하여도 이미 升 號 를 議 論 할 日 字 를 定 하였으니 期 限 이 있어 바꾸어 진행하려고 지름길로 享 禮 를 함은 옳지 않음이 하나이고, 祭 需 와 凡 節 이 하나도 措 置 하고 準 備 하지 않음이 둘이니라. 고 하셨다. 庭 玉 이 말하기를 지금 書 院 의 稱 號 를 昇 級 한다고 별로 크게 關 聯 이 있습 니까? 역시 좋은 일을 합니까? 祭 需 는 내일이 장날입니다. 祭 酒 는 庫 直 인 中 三 이가 반드시 저들의 秋 夕 술을 代 身 使 用 하면 됩니다. 고 하자, 族 丈 이 말 씀하시기를 너희들이 힘껏 升 號 를 妨 害 하는 것은 무슨 뜻이며 理 致 인가? 고 하셨다. 庭 玉 이 말하기를 本 所 에는 돈과 財 産 이 없어 後 日 로 물리는 것이 마땅합 니다. 고 하자, 族 丈 이 말씀하시기를 享 禮 의 술은 中 三 이의 秋 夕 에 저들 祭 酒 준비한 것을 使 用 한다고 함은 술이 賤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무슨 禮 儀 이냐? 고 하시자, 庭 玉 물러갔다. 再 昨 日 山 長 이 들어왔기 때문에 首 奴 인 太 才 로 하여금 나의 장소에 通 告 하 게 하였으니, 즉 族 丈 ( 浩 )이 시키신 것이었다. 敬 一 이 海 平 에 有 司 인 朴 世 龜 와 더불어 같이 船 艙 어귀에 도착하여 太 才 를 보고 물으니, 華 林 에 갑니 다. 고 하자, 敬 一 이 말하기를 華 林 에 가야할 일이 없다. 고 하고는 꾸짖어 太 才 를 보내었으니 나에게 通 告 하지 못한 것이었다. 가서 文 山 에 도착하였더니, 尙 檀 이 고향에 내려가서 밥을 求 하려고 가다가 江 亭 나루에 도착하여, 庭 玉 을 만나 文 山 으로 들어와서, 山 長 을 보고 恐 喝 하 며 말하기를 升 號 하려고 論 議 를 發 議 함이 主 人 丈 이 스스로 主 張 하여 發 議 하였습니까? 華 林 에 令 監 이 發 說 하였습니까? 鳴 瑞 및 本 孫 有 司 가 論 議 를

發 議 하였습니까? 하고 하자, 山 長 이 말씀하시기를 여럿의 의논이 순수하게 동일하였다. 고 하였다. 族 丈 ( 浩 )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發 議 한 것을 索 出 하 며 主 人 이 어떻게 하겠느냐? 또 本 社 ( 文 山 社 )만 혼자 社 號 로 있으니 鄕 校 의 文 書 에 오히려 아래에 있으니 이미 慨 歎 되지 않느냐? 네가 일을 沮 止 함은 무슨 까닭이냐? 고 하였더니, 敬 一 과 尙 檀 이 모두 財 力 이 모두 떨어져서 辭 讓 한다고 하였다. 조카 箕 燁 이 말하기를 本 所 에 財 力 이 모두 貧 寒 하고 떨어짐이 이와 같음 에 이르렀는데도 보잘 것 없는 힘으로 도우니 각자의 名 下 錢 의 負 債 가 500 金 이 지남에 이르렀으나 하나도 擧 論 하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이며 힘껏 沮 止 하는 것이 큰일이냐? 라고 말하자, 그제야 尙 檀 이 기가 죽어 말이 없었다. 敬 一 이 말하기를 이미 큰일을 擧 論 하려면 한 고을에 사람들에게 面 面 이 通 告 하고 한 地 境 에 많은 선비들이 일제히 모여 公 議 를 한 後 에 일의 體 面 이 鄭 重 하고 極 力 으로 이미 發 議 하여 각 面 에 通 知 하여야 합니다. 고하였다. 이것은 바로 山 長 이 軟 弱 하여 敬 一 무리들에게 困 辱 의 말에 屈 伏 하며 바람 에 따라 應 答 한 所 致 인데, 어찌 鄕 會 에 무슨 面 面 에게 通 文 을 하지 않아서 일소냐! 이것은 저들이 힘껏 沮 止 하며 펼치지 못하게 함에 지나지 않음이며, 本 所 로 하여금 狼 狽 하게 하여 士 林 을 提 供 함이나 享 禮 를 할 때에 널리 使 用 하려고 計 劃 하고자 함이었다. 대저 沮 止 하여 막음은, 뜻이 그 財 産 이 떨어짐을 가엽게 여긴다면 이미 저 희무리들이 진(빚) 것을 그 꾸짖음이 나올까 그러하였을까? 또한 뜻이 財 物 이 떨어짐에 있지 않고 升 號 의 論 議 가 그들의 입에서 나오 지 않았고 主 張 함도 얻지 못함으로서 큰 論 議 를 猜 忌 함이었고, 또 한 端 緖 는 그들 무리가 先 祖 의 일이 나의 입에서 나왔는지 疑 心 하며 敢 히 武 人 임을 主 張 하며 沮 止 하고 排 斥 하려는 計 劃 으로 期 待 하고 圖 謀 하며 힘껏 沮 止 하였으 니, 그들 무리의 心 跡 은 모두가 本 所 에 財 力 을 모두 삼킬 計 劃 에서 나온 것 이었으니, 슬펐다. 族 丈 ( 浩 )은 저녁에 돌아갔다. 李 士 浣 벗이 와서 잤다. 22일: 甲 戌 맑음. 이날 늦게 升 燁 이 돌아왔다고 告 하였다. 守 門 아들도 돌 아와서 面 對 한다고 하였다. 어제 저녁 白 雲 의 別 業 (별장)에서 지금 葛 峴 에 도착하여 升 燁 과 서로 보았다고 한다. 소문을 들으니 이번의 行 次 에 냇물이 넘쳐서 능히 利 롭게 건널 수 없어 16일에 가서 義 城 의 仇 智 山 任 氏 집에서 자고, 17일에 비를 만나 滯 留 하였으 며, 18일에 가며 義 城 縣 申 冕 周 察 訪 집에 자고, 19일에 가며 一 直 과 龜 尾 에 到 着 하여 원님인 參 判 金 㙆 令 監 에게 留 宿 하며 文 山 書 院 扁 額 네 글자를 받고 壯 紙 20 束 으로서 폐백을 드렸으며, 20일에는 돌아오다가 老 梅 谷 日 福 의 집

에서 자고 21일에 돌아오다 白 雲 別 業 에서 잤다고 하더라. 소문을 들으니 安 東 과 一 直 과 義 城 과 安 平 과 比 安 三 溪 의 사이엔 바람의 재앙이 매우 심하다 고 하였다. 23일: 乙 亥 맑음. 이날 점심 때 나는 文 山 書 院 額 號 를 가지고 文 山 으로 갔 더니 尙 德 祠 라는 세 글자는 옛날에 이미 姜 判 書 世 晃 에세 받았으나 放 置 함이 이미 오래이었다. 지금 板 에 새겨 丹 靑 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에 文 山 書 院 의 扁 額 으로서 板 위에 부쳤으며 해가 저물도록 글자 새기기를 시작하지 못 하였다. 인하여 文 山 에서 잤다. 24일: 丙 子 맑음. 이날은 文 山 에 머물렀다. 山 長 金 汝 良 馹 燦 과 有 司 朴 世 龜 가 들어왔다. 李 士 浣 宗 浣 벗과 都 克 昌 燕 謨 와 宋 應 敬 과 鄭 大 默 이 들어와서 같이 잤다. 族 從 尙 欞 과 尙 檀 과 族 侄 敬 一 이 들어와서 같이 잤다. 山 長 有 司 가 각 書 院 에 支 供 을 발의하며 말하기를 각 書 院 의 有 司 에게 本 所 에 支 供 할 것을 要 請 하여 連 이어 要 請 을 擧 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고 하자, 都 燕 謨 가 말하기를 松 山 ( 書 院 )과 勝 岩 ( 書 院 )과 南 岡 ( 書 院 )을 升 號 할 때 支 供 을 要 請 한 前 例 가 없었으니, 要 請 함은 옳지 않습니다. 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要 請 함과 요청하지 않음은 오히려 社 ( 文 山 )의 貧 寒 함과 富 裕 함에 있다. 그러나 前 後 로 金 烏 ( 書 院 )와 洛 峰 ( 書 院 )과 松 山 ( 書 院 )은 公 的 이 기 때문에 本 社 에서 連 이어 要 請 하면 서로 禮 로 報 答 함이 과연 이와 같을 까? 라고 하였더니, 都 ( 燕 謨 )가 말하기를 重 修 나 白 日 場 이나 延 諡 등의 일 은 學 宮 은 즉 儒 宮 이기 때문에 요청합니다. 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本 所 는 본래 延 諡 의 일이 없으니, 보답을 받을 날은 없겠구나. 빈한한 社 ( 文 山 社 )가 본래 백일장( 白 日 場 )의 일도 없었으니 보답을 받을 날이 없겠으며, 重 修 도 몇 년이 가야 할지 알지 못하겠으니, 다 만 각 서원에 시키는 대로 할 뿐이구나. 라고 하였더니, 有 司 朴 世 龜 가 말하 기를 각 書 院 에 支 供 을 요청함은 和 答 하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서로 돕는 禮 는 지금부터 무너졌습니다. 인하여 中 止 하였음은 勿 論 입니다. 라고 하였다. 소문을 들으니 尙 檀 이 들어올 때에 오히려 沮 止 하고 戱 弄 할 計 劃 을 하였 다. 고 하였음을 尙 欞 이가 미리 나의 귀에 通 知 하였다. 그들의 心 跡 을 究 明 하니 매우 참지 못하겠더라. 25일: 丁 丑 맑음. 이날은 公 會 이었는데, 합하여 30 餘 人 이었다. 金 烏 院 長 金 錞 茂, 洞 前 院 長 李 宗 浣, 校 洞 朴 士 健 天 應 과 西 中 에서도 合 席 하였다. 陞 號 때에 公 員 은 金 上 金 晶 燦, 都 廳 은 尹 衡 老 인데 衡 老 는 초봄에 松 楸 의 일로 尙 柔 와 더불어 서로 訟 事 하여 呈 文 을 올렸으며 司 評 公 의 墳 墓 를 侵 犯

하며 말하기를 하나의 古 塚 을 憑 藉 한다. 云 云 이라고 하였으니 義 理 를 背 反 하였고, 金 晶 燦 도 前 日 에 역시 侵 犯 하여 辱 을 보인 사람이었다. 公 員 은 이에 盧 彦 弼 로써 延 賓 有 司 (손님맞이하는 유사)로 나갔으나 역시 逆 賊 의 子 孫 이다. 이러한 무리들과 가히 함께 일을 할 수가 없었으니, 일을 穩 當 하게 成 事 할런지는 가히 알 수 가 없었다. 會 員 들이 午 後 에 무도 罷 하고 돌아갔다. 벗 朴 春 秀 와 南 岡 書 院 有 司 인 金 振 浩 와 權 上 舍 ( 進 士 )인 雲 度 와 金 希 慶 이 저 물게 들어와 인하여 잤다. 尙 檀 과 敬 一 도 모두 머물다 잤다. 尙 欞 이도 역시 留 宿 하였다. 벗 李 士 浣 도 留 宿 하였다. 26일: 戊 寅 맑고 바람 없음. 留 宿 한 손님이 모두 돌아갔다. 아침에 曾 祖 考 의 墓 所 뒤에 峰 우리 위에 올라갔다. 마을 가운데로 하여금 다듬고 다스리게 하였으니, 北 으로 흐르는 물길은 三 層 의 길을 만들게 하고, 골짝 아래도 역 시 두 개의 水 道 를 만들게 하였다. 이날도 역시 文 山 에 머물며 書 院 ( 文 山 書 院 ) 額 號 의 일을 보았다. 再 昨 日 에 모두 새겼고 昨 日 (어제) 비로소 懸 板 에 丹 靑 을 하였으며, 또 板 을 걸어 둘 鐵 物 도 만들었다. 27일: 己 卯 맑고 바람 없음. 이날 아침 일찍 丹 靑 을 마쳤다. 文 山 에서부터 行 하여 省 谷 에 도착하여 尹 衡 老 任 叔 을 보았고, 趙 命 汝 欽 哉 를 訪 問 하였더니 朴 伯 逢 之 源 을 밖에 나가 보지 못다는 소문을 들었다. 薪 楓 나루를 經 由 하여 西 山 窩 에 도착하였더니, 家 內 가 다른 憂 患 은 없었다. 午 後 에 守 門 將 아들이 葛 峴 을 넘었다. 30일: 壬 午 맑음. 이날은 水 月 에 先 塋 으로 가서 省 墓 하였다. 소문을 들으 니 山 長 이 今 日 은 오지 않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곧장 西 山 窩 로 돌아왔다. 밤 부터 비가 시작하여 밤새도록 가랑비가 내렸다. 1816년 4월(268)p 14일: 癸 亥 맑음. 이날은 族 從 尙 欞 과 더불어 文 山 書 院 에 갔다. 明 日 이 즉 焚 香 日 인데 院 長 李 安 北 載 延 이 들어왔다고 하기에, 對 話 를 하기 위하여 가서 도달하였더니 院 長 은 緣 故 가 있어서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午 後 에 古 南 鄭 惟 儆 姻 戚 에게 가거 對 話 하고 밤에 江 과 山 의 달구경을 하기 위하여 旅 軒 影 堂 에 갔더니, 有 司 金 哲 儒 가 焚 香 次 로 들어왔고, 鄕 員 金 兌 溫, 尹 德 淵, 權 應 範, 權 上 舍 雲 度 는 즉 新 谷 面 의 老 少 이었고, 朴 之 源, 尹 衡 老, 都 克 昌 은 省 谷 사람이었다. 모두가 이미 먼저 到 着 하였다. 저녁 무렵에 鄭 惟 儆 및 族 丈 浩 氏 가 뒤에 到 着 하여 나란히 잠을 잤다.

黃 東 에 魚 膾 를 살고 및 솔잎 떡을 마련하여 提 供 하였는데 자리가 衰 殘 함이 이것이 苦 悶 이었다. 이날 밤에 처마에 비 내리는 소리가 있었다. 1816년 7월(282~283)P 초6일: 癸 丑 볕이 매섭고 바람기 없음. 文 洞 의 族 丈 인 浩 氏 가 그의 조카인 尙 標 를 거느리고 와서 對 話 하가다 저녁에 돌아가셨다. 소문을 들으니 金 希 尹 의 아들이 文 山 書 院 의 院 長 인 上 舍 崔 晋 行 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牌 를 꺼내 어 文 山 의 首 奴 에게 그의 아버지 이름을 行 任 錄 에서 베어내기를 재촉하였 다. 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그 아버지가 비록 生 存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니, 이미 죽은 이름을 그 아들이 베어내야 할까? 義 理 를 헤아릴 수 없구나. 우습고 한탄스러웠다. 우습고 한탄스러웠다. 守 門 兒 가 愚 山 으로부터 와서 人 事 하였다. 소문을 들으니 立 齋 先 生 ( 鄭 宗 魯 ) 의 葬 禮 期 日 은 8월 20일 申 時 로 定 하였다고 하며, 葬 地 는 咸 昌 黃 嶺 山 辛 坐 原 이며, 하루 전에 發 靷 한다고 하였다. 초10일: 丁 巳 맑음. 別 業 에 머물렀다. 奴 婢 崔 三 이 와서 金 希 說 이 家 兄 을 위하여 이름을 만든 呈 單 을 納 入 하였다. 文 山 에서 저희무리들의 行 任 錄 과 諸 般 錄 名 帖 에 이름을 베어내었다고 하였 다. 因 하여 首 奴 等 의 文 字 도 牌 를 꺼내어 베어내었으니 가히 우습고 가히 우습다. 저들은 바로 櫟 亭 先 祖 의 外 孫 이었다. 外 孫 으로서 外 家 先 祖 의 書 院 을 侵 犯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人 倫 이며 義 理 일까? 11일: 戊 午 맑음. 이날 升 燁 을 거느리고 西 山 窩 로 돌아왔다. 13일: 庚 申 맑음. 明 日 이 祖 考 竹 月 軒 公 의 忌 日 이라 齋 戒 하고 素 食 을 하였 다. 午 後 에 文 洞 의 族 丈 이신 浩 氏 및 조카 璧 燁 이 와서 잤다. 14일: 辛 酉 맑음. 닭이 울 때에 紙 榜 을 祭 祀 를 擧 行 하니, 追 慕 함을 견딜 수 없었다. 늦게야 族 丈 인 浩 氏 가 升 燁 과 더불어 文 山 으로 돌아갔다. 族 丈 이 와서 말 씀하시기를 鄕 人 들이 말한 것이 金 希 尹 이 文 山 을 侵 犯 하였다고 함이 비록 義 理 의 밖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시끄러움을 그치게 할 方 法 은 宗 中 으로부터 一 齊 히 모여 文 山 에서 罰 을 施 行 함이다. 고 하니 升 燁 이 希 尹 이 生 梗 함을 沮 止 하였다. 云 云 이라고 하기에, 命 하여 보냄을 許 諾 하였다. 升 燁 이 希 尹 을 詰 責 한 것은 아버지를 위하여 憤 을 雪 恥 한 것이었다. 文 山 을 罰 한 것은 先 祖 의 書 院 을 爲 한 것뿐이고, 希 尹 이 悖 倫 의 거행함은 저절로 남아있을 뿐이니 더욱 우습고 한탄스러웠다.

1816년 10월(291)P 초9일: 甲 申 흐림. 省 谷 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箕 燁 璧 燁 두 조카를 만났 으니, 서울로부터 科 擧 에 失 敗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璧 燁 조카 科 擧 의 일은 武 科 의 技 藝 後 에 講 을 잘하였는데 半 劃 이 不 足 함으 로써 落 榜 하였다고 하였으니, 가히 恨 歎 스러웠다. 함께 가서 文 洞 에서 잤다. 초10일: 乙 酉 맑음. 文 洞 에 머물렀다. 必 琥 가 星 南 에 栗 里 墓 祀 로부터 文 洞 에 돌아와 人 事 하였다. 11일: 丙 戌 흐리고 종일 비가 그치지 않음. 文 洞 에 墓 祀 를 擧 行 할 수 없었 다. 12일: 丁 亥 약간의 볕. 이날은 文 洞 에 墓 祀 를 擧 行 하고 箕 燁 조카의 집에서 머물다 잤다. 늦게 升 燁 이 仁 玉 과 斗 玉 의 兩 人 과 더불어 돌아와서 人 事 하였 다. 墓 祀 에 參 席 한 뒤에 明 琥 와 仁 玉 과 斗 玉 과 더불어 집으로 돌아왔다. 13일: 戊 子 맑고 바람이 일어남. 이날 늦게 明 琥 가 仁 玉 과 斗 玉 의 兩 人 과 더불어 祭 物 을 받들고 와서 人 事 하였다. 曾 祖 考 이신 參 判 公 의 墓 祀 및 先 妣 三 位 와 亡 室 孫 氏 의 墓 祀 를 마쳤다. 아 이들을 거느리고 함께 西 山 窩 로 돌아왔다. 14일: 己 丑 맑고 바람이 참. 밤새도록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매우 추웠다. 이날은 法 華 洞 에 曾 祖 妣 이신 贈 貞 夫 人 完 山 李 氏 의 墓 祀 와 亡 室 淑 夫 人 徐 氏 의 墓 祀 를 擧 行 하였다. 守 門 兒 가 大 邱 로부터 돌아와서 인사하였다. 15일: 庚 寅 볕이 차고 바람이 쇠잔함. 金 谷 에 朴 漢 佐 가 와서 보았는데, 어 제 와서 잤다고 한다. 이날 守 門 兒 必 琥 와 仁 玉 을 거느리고 水 月 에 가서 祖 考 이신 竹 月 公 의 墓 祀 및 五 代 祖 이신 執 義 公 의 墓 祀 와 沃 陽 洞 에 高 祖 考 이신 承 旨 公 의 墓 祀 와 亡 室 淑 夫 人 柳 氏 의 墓 祀 를 擧 行 하였다. 1822년 正 月 (304~309)P 25일: 흐리고 바람기 없음. 次 孫 明 琬 을 거느리고 白 蓮 庵 에 갔다. 洛 東 나 루를 건너니 얼음길이 모래가 차서 雪 馬 를 待 令 하게 하였기 때문에 利 롭게 건너 山 위로 올라갔다. 父 親 의 山 所 에 拜 謁 하고 別 堂 에서 잤다. 華 峰 大 師 및 여러 스님과 對 話 하였다. 大 寺 에는 스님의 무리들이 흩어져 빈곳이라 조용하 였다. 27일: 癸 酉 흐리고 바람 없음. 新 浦 로부터 출발하여 文 洞 佳 佐 山 에 도착하 여 父 親 山 所 三 位 께 拜 謁 하고 文 洞 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月 波 나루를 向 하 여 江 을 건너니, 얼음길이 매우 위험하였다. 水 月 에 竹 月 軒 公 의 墳 墓 및 執

義 公 의 墳 墓 를 拜 謁 하고 인하여 西 山 窩 롤 돌아왔다. 斗 玉 이의 蛔 蟲 은 이미 差 度 가 있었고 感 氣 가 發 生 하여 괴로움이 甚 하니 이 것이 고민이었다. 서울의 書 信 이 驛 站 로부터 들어왔기에 서신을 보았더니, 今 月 초7일 밤에 兵 曹 判 書 韓 大 監 의 집에 불이 나서 임금이 불러서 命 하신 符 信 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지고 廳 直 인 洪 必 升 및 宿 客 이 죽었다고 하였다. 兵 曹 判 書 는 遞 職 을 哀 乞 하니 允 許 가 내려왔으며, 李 肇 源 이 兵 曹 判 書 가 되 었다고 한다. 巡 中 軍 張 羽 成 이 새로 내려오다가 행하여 古 里 谷 店 에 도착하여 母 親 喪 을 만나 喪 家 로 달려갔다고 하니 슬프고 가련하였다. 2월 초4일: 庚 辰 맑음. 바람이 차기는 어제와 같았다. 斗 玉 의 病 은 비록 減 하여가기는 하나, 完 全 히 蘇 生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書 信 을 作 成 하여 奴 婢 인 太 元 을 梧 麓 의 韶 川 에 보내어 다시 涓 吉 ( 結 婚 日 字 )을 要 請 하였으니, 大 事 를 遷 延 하게 됨은 매우 苦 悶 이었다. 明 琬 은 斗 燁 과 더불어 文 洞 으로 갔 다. 초7일: 癸 未 맑고 참. 이날은 文 洞 을 가서 祠 堂 을 拜 謁 하고는 곧장 捧 債 (빚을 냄)하였다. 머물다가 竹 月 軒 에서 잤더니, 栗 里 의 孫 鍾 聞 이 追 後 에 到 着 하여 같이 잤다. 升 燁 이 이곳에 到 着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더불어 相 面 하고 싶어서 追 後 에 到 着 하였다. 초8일: 甲 申 맑고 바람 없음. 이날은 文 洞 에 머물렀다. 文 山 書 院 의 廟 宇 를 重 修 하기위하여 公 債 를 내었다. 古 南 에 鄭 汝 一 인 惟 儆 과 惟 倬 의 兄 弟 가 若 木 에 申 僖 應 과 더불어 來 訪 하였 으니, 申 君 은 즉 鄭 南 海 의 甥 姪 이고, 鄭 惟 倬 의 딸 査 頓 이었다. 모두가 각자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鄭 汝 一 ( 惟 儆 )은 같이 竹 月 軒 에서 잤다. 늦게야 升 燁 이 新 浦 로부터 와서 人 事 하고 잤는데, 길에서 孫 鍾 聞 을 만났다 고 하였다. 庶 從 子 ( 庶 侄 ) 斗 燁 이 木 手 인 金 達 成 과 더불어 와서 잤다. 초9일: 乙 酉 맑고 바람기가 있음. 文 山 의 公 債 를 모두 納 付 하고부터 金 達 成 이 돌아가겠다고 告 하였다. 升 燁, 斗 燁 도 함께 돌아갔다. 나는 水 月 山 에 가서 墓 所 에 拜 謁 하고 西 山 窩 로 돌아왔다. 洪 上 舍 在 學 이 와서 보았다. 族 從 尙 橃 이 와서 울타리에 섶을 取 하여 돌아갔다. 明 日 은 즉 曾 王 考 이신 參 判 公 의 忌 辰 이라 齋 宿 하였다. 18일: 甲 午 맑음. 둘째 孫 子 인 明 琬 이 文 山 에 가서 齋 戒 에 들어갔다. 族 姪 인 尙 棨 도 역시 갔고, 權 誨 도 역시 돌아간다고 告 하였다. 水 月 에 山 直 이인 朴 才 國 이 초9일에 죽었는데, 어제 그의 妻 가 橫 板 木 두

바리를 요청하였으니 明 日 에 묻어서 葬 禮 를 치루야 한다고 하였다. 19일: 乙 未 맑음. 食 後 에 文 山 書 院 으로 갔더니, 齋 戒 하는 儒 林 이 무릇 17 人 이었는데 5 人 은 나가고 12 人 만 齋 戒 에 들어갔다. 獻 官 으로는 初 獻 官 은 院 長 이고, 亞 獻 官 은 上 舍 金 宛 燦 이며, 終 獻 官 은 李 尙 龍 이라고 하였다. 午 後 에 正 堂 에서 廟 宇 를 重 建 할 때에 諸 般 執 事 者 를 薦 擧 하여 내었으니, 公 事 의 道 廳 金 馹 燦, 有 司 는 鄭 惟 儆, 都 監 은 金 行 久, 有 司 는 朴 思 鳳, 日 記 有 司 는 朴 ㅁㅁ과 ㅁㅁㅁ이었다. 21일에 옮겨서 奉 安 할 때 諸 般 執 事 도 역시 薦 擧 하여 내었으니, 首 位 ( 松 庵 公 )의 位 版 을 奉 安 함은 나( 西 山 窩 公 )를 薦 擧 하여 내었고, 東 位 ( 櫟 亭 公 )는 金 宛 燦 이고, 西 位 ( 亦 樂 公 )은 院 長 이었으며, 그 아래로도 역시 正 書 하여 壁 에 부 첬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竹 月 軒 에 가서 잤더니, 金 上 舍 ( 宛 燦 )도 역시 와서 잤다. 20일: 병신 맑음. 아침에 文 山 社 에 들어갔다가 아침을 먹은 후에 竹 月 軒 에 나와서 休 息 하다가 인하여 잤다. 21일: 丁 酉 맑음. 아침에 文 山 社 에 들어가서 享 禮 를 잘 履 行 하였다. 餕 禮 ( 享 禮 )에 參 席 하고 食 事 한 뒤에 三 位 ( 松 庵, 櫟 亭, 亦 樂 )의 位 牌 를 齋 室 북쪽 房 에 옮겨서 奉 安 하였다. 鄭 惟 儆, 朴 世 龜, 金 上 舍 晶 燦 이 와서 도착하여 잠시 對 話 하였다. 가서 璧 燁 이 집을 지으며 벽돌 쌓는 것을 보았다. 因 하여 族 從 인 尙 棨 와 더불어 明 琬 을 거느리고 西 山 窩 로 돌아왔다. 曾 孫 인 山 嶽 이는 다시 크게 아프더니 지금은 조금 差 度 가 있다고 하고, 둘 째 孫 婦 도 역시 5일이나 크게 아팠다고 하였다. 瘟 疫 이 돌아다님이 조심스러 워 진실로 가히 고민이었다. 金 長 赫 이 와서 잤다. 24일: 庚 子 맑음. 今 日 에 木 手 가 文 山 廟 宇 를 重 建 할 나무를 다듬기 시작하 였다. 僧 木 手 인 有 瞻 은 어제저녁 들어왔고, 都 木 手 인 金 達 成 은 今 日 午 後 에 들어왔다. 從 子 (조카)인 璧 燁 은 초가집을 文 洞 옛날집터에 새로 짓는데 금일 서까래를 걸었다. 25일: 신축 맑음. 이날 비로소 나무를 다듬기를 하니, 都 監 有 司 인 鄭 惟 儆 兄 弟 는 午 前 에 들어왔다가 午 後 에 곧장 돌아갔다. 本 所 의 院 長 인 浩 氏 族 丈 과 같이 일하는 것을 보았다. 26일: 壬 寅 맑음. 인하여 文 山 에 머물렀다. 자는 곳은 廟 直 의 집이었다. 木 手 인 月 洞 에 金 三 奉 이 아침 전에 들어왔다. 나는 이리 있어서 집으로 돌아왔 다. 明 日 은 曾 王 考 이신 參 判 公 의 忌 日 인데 집에 有 故 하여 別 業 으로 갔다. 28일: 甲 辰 맑음. 午 前 에 月 洞 의 金 希 慶 이 들어왔다가 곧장 갔다. 三 梅 堂

金 掌 令 을 追 配 한다고 말하기에, 對 答 하기를 우선 後 日 公 論 을 보자 云 云 이 라 하였다. 長 孫 明 琥 가 權 誨 와 더불어 文 山 에 와서 도착하였으니, 明 琥 와 더불어 三 人 짝을 하여 徒 步 로 固 城 의 試 驗 場 所 로 發 行 한다고 告 하고 먼저 갔는데, 璧 燁 조카는 明 日 에 發 行 한다고 나의 場 所 에 와서 잤다. 29일: 乙 巳. 나는 文 山 에 머물렀다. 날이 밝지 않아서 璧 燁 조카가 科 擧 보 려 出 發 하였으니, 먼저 간 者 를 뒤쫓아 갔다. 都 監 有 司 鄭 惟 儆 이 午 後 와 와 서 보고 곧장 갔다. 3월 초1일: 丙 午 맑음. 오후에 흐리고 비가 왔으나 먼지만 젖을 뿐이었다. 이날은 아침에는 院 長 이 焚 香 하였다. 有 司 柳 秉 德 이 名 單 을 올려 龜 坪 에 李 濬 欽 을 薦 擧 하여 냈다. 木 手 鄭 鍾 石 이 들어와 上 樑 때 任 員 으로써 좌석에 차 례대로 앉았다. 首 奴 로 하여금 各 處 에 告 目 하게 하였다. 나는 셋째 孫 子 明 琡 이의 醮 禮 가 초6일에 發 行 하는데 凡 百 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文 山 으로부터 西 山 窩 로 돌아왔다. 초5일: 庚 戌 맑음. 아침 前 에 升 燁 을 鶴 洞 에 보내어 金 潤 根 을 보고 말을 빌려서 왔다. 明 日 ( 來 日 )이 醮 禮 의 發 行 인데 겨우 狼 狽 를 免 하였으나 이번의 말을 빌린 것은 빌림이 아니고 이에 빼앗을 것이니 슬프고 슬펐다. 文 山 庫 直 이 와서 壯 紙 를 一 束 (한 묶음)과 白 紙 三 束 을 바쳤으니, 즉 上 樑 文 의 幣 帛 이었다. 소문을 들으니 어제 옛날의 祠 堂 을 부수었다고 하였다. 醮 禮 發 行 에 納 幣 할 下 人 은 世 元 과 崔 三 인데 어제 發 行 하여 이웃집에 자고 오늘 아침에 보내어 갔다. 소문을 들으니 族 從 常 欞 이 試 驗 場 所 에 달려가서 이름을 바꾸어 龍 을 받고 는 生 員 初 試 에 合 格 하였다고 하니 奇 異 하고 多 幸 함이었다. 1822년 7월(330)P 초1일: 癸 酉 맑고 동풍. 닭이 울기 전에 祭 祀 를 거행하니, 追 慕 함이 倍 가 간절하였다. 明 日 은 즉 先 考 의 忌 辰 이다. 齋 戒 와 素 食 을 하였다. 明 琥 와 明 琬 이 모두 머물렀다. 점심 때 斗 燁 이 돌아와서 인사하였다. 초2일: 甲 戌 맑음. 닭이 울 때 祭 祀 를 거행하였다. 追 慕 함이 罔 極 하였다. 아침에 明 琥 가 먼저 돌아오고 늦게 明 琬 이 斗 燁 과 같이 돌아왔으니, 斗 燁 은 文 洞 을 가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초3일: 乙 亥 볕이 나고 가뭄이 날로 甚 하였다. 일찍 升 燁 을 거느리고 華 林 으로 가서 朝 飯 을 먹었다. 明 琥 와 升 燁 을 거느리고 文 洞 으로 가다가 石 峴 에

가서 닿았다. 斗 燁 이 文 洞 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文 洞 에는 怪 疾 이 멋 대로 돌아다니는데 오늘 아침에 庶 族 이 雇 用 하는 工 人 이 하룻밤에 갑자기 죽었고 아픈 사람도 바야흐로 많다고 하였기 때문에, 升 燁 과 斗 燁 을 보내어 白 雲 洞 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明 琥 와 더불어 別 業 의 집으로 돌아왔다. 庶 孫 斗 石 이 蛔 蟲 으로서 苦 痛 이 甚 하니 보면 苦 悶 이었다. 華 林 에는 明 琬 이 도 역시 蛔 蟲 으로 아파서 누웠다. 1822년 7월(334~337)P 26일: 戊 戌 아침에 구름에 볕 조금 저녁에 또 도리어 흐림. 늦게 明 琥 를 거느리고 龍 山 나루를 건너니 江 의 물이불은 것이 아직 떨어지지 않아서 건 거가기에는 오히려 平 安 하지 않았다. 佳 佐 山 으로 가서 父 親 의 山 所 를 拜 謁 하 고, 文 山 書 院 을 瞻 拜 하며 拜 謁 하고는, 竹 月 軒 에 가서 자니 族 丈 인 浩 氏 도 와 서 같이 잤다. 27일: 己 亥 맑음. 明 琥 로 하여금 族 從 인 尙 枰 과 더불어 廟 宇 役 事 때 下 記 하였던 錢 米 를 計 算 하게 하였더니, 錢 은 215 兩 이고, 糧 米 는 118 斗 8 升 이었 으며, 남은 돈은 40 兩 이었다. 28일: 庚 子 맑고 저녁에 구름. 어제 升 燁 이가 와서 도착하여 文 山 의 會 計 는 이미 바루었다. 因 하여 더불어 돌아가려고 나루를 건너서 蹄 坪 과 新 基 의 앞에 닿자, 升 燁 은 곧장 葛 峴 으로 向 하겠다면서 辭 讓 하고 돌아갔고 明 琥 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金 斗 采 가 와서 對 話 하였다. 서울 편으로 가는 核 心 의 上 京 軍 이 29일에 出 發 하여 간다고 하였기 때문에 書 信 을 作 成 하여 京 館 으로 부쳤다. 蹄 坪 의 李 雲 翼 이 와서 對 話 하였다. 이로부터는 날마다 棣 樂 堂 에 居 處 하였 다. 8월 초3일: 甲 辰 아침에 처마에 비오는 소리가 나더니 늦게 비가 개고 혹 맑음. 文 洞 奴 婢 守 乭 이 海 平 錢 65 錢 2 兩 을 짊어지고 와서 나타났다. 저녁에 新 坪 林 性 得 와 와서 나타났다. 65 兩 은 짊어지고 가고, 2 錢 은 守 乭 이가 차지 하였다. 11일: 壬 子 맑고 여름같이 더움. 이날은 西 廊 3 間 집을 建 立 하였다. 金 性 汝 正 根 이 와서 對 話 하였다. 13일: 甲 寅 맑음. 이날은 明 琬 이를 齋 戒 에 들어가라고 文 山 으로 보냈다. 今 年 末 丁 日 은 國 忌 日 (임금의 죽은 날)과 相 値 하여 鄕 賢 祠 는 모두 中 丁 日 에 享 禮 을 擧 行 한다고 하였다.

16일: 丁 巳 맑음. 아침에 들어가 文 山 의 餕 禮 에 參 與 하였다. 院 長 이 바꾸 어 대신 내어 보냄을 許 諾 한다고 鄭 天 黙 에게 通 文 하였으니, 有 司 한 사람을 대신 냄은, 本 孫 盧 尙 棨 로써 하기로 하였으며, 한 사람은 즉 古 南 에 鄭 瑋 이 나 새로 差 出 함이 한 달이 안 됨으로 因 하여 任 命 하였다. 升 燁 을 보내어 鳳 村 院 沓 의 成 禾 ( 作 況 )를 보게 하였다. 저물게 升 燁 과 斗 燁 을 거느리고 집에 돌아왔다. 明 琥 는 먼저 돌아왔다. 19일: 庚 申 맑음. 新 庵 에서 돌아오던 길에서부터 權 誨 를 歷 訪 하고, 雪 庵 에 닿아서는 竹 月 公 의 外 祖 母 이신 金 氏 의 墓 所 를 瞻 拜 하였으며, 草 谷 에 닿아서 曺 士 安 明 鐸 의 妻 를 訪 問 하여 對 話 하였다. 進 士 ㅁ 欽 이 새로 聖 恩 을 받았다며 이곳에 닿아 서로 만났으니, 즉 琴 川 趙 ㅁ 榮 의 外 舅 ( 外 叔 )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즉 先 達 의 조카가 江 左 로부터 돌 아와서 이곳에 잔다고 하더니 文 洞 의 本 家 로 간다고 告 하였다. 1825년 10월(483)P 초7일: 庚 申 맑음. 이날 華 棣 堂 으로부터 都 事 아이를 거느리고 西 山 窩 로 돌 아왔다. 升 燁 과 斗 石 도 뒤따라 왔다. 升 燁 은 門 中 有 司 에 該 當 되기 때문에 저 녁에 文 洞 으로 갔으니, 明 日 星 南 에 가서 祭 祀 擧 行 할 物 品 을 提 供 할 計 劃 이 었다. 渚 谷 에 査 頓 이 金 永 煥 이 再 昨 日 와서 도착하여 어제 나의 旅 次 로 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저녁에 明 琡 이 韶 川 으로부터 와서 인사하였 다. 11일: 甲 子 맑음. 이날 文 洞 墓 祀 에 參 席 하던 次 에 都 事 아이와 더불어 같 이 龍 山 으로 行 하였는데, 배가 없어서 배를 따라 내려와서 藍 山 모퉁이에 가 서 배로 건넜다. 府 伯 이 巡 營 으로 감이 이리 4 日 인데 官 廳 의 行 次 가 건너갈 때면 내라간다 고 하는데, 龍 山 의 배도 역시 그 때에 아래로 내려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하 다. 文 洞 에 들어가 族 從 인 進 士 가 먼저 도착하였고, 升 燁 은 어제저녁 南 山 으로 부터 庫 直 家 에서 잤다. 祭 祀 物 品 은 이미 갖추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墓 祀 를 擧 行 하려고 올라갔더니 날이 이미 저녁이었다. 해가 거의 저물자 都 事 가 薪 楓 나루를 經 由 하여 먼저 돌아가고 그 나러지 는 모두 잤다. 1826년 正 月 (494~495)p 초1일: 癸 未 맑고 바람 없음. 日 氣 가 어제와 같았으며 어제 늦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종일 밤새도록 내리다가 닭이 운 뒤에야 그쳤다. 아침에 大 小 의 家 廟 에 參 禮 를 擧 行 하였다. 점심 때 進 士 族 從 이 와서 보고 는 인하여 잤다. 從 子 (조카) 先 達 및 斗 燁 도 와서 人 事 하고 인하여 잤다. 升 燁 은 斗 石, 斗 燁 을 거느리고 그들의 집으로 가겼다고 告 하였다. 京 書 (서울의 書 信 )를 보고 平 安 하다는 通 報 임를 알게 되었다. 이날 자시 밤에 雷 聲 이 이 에 發 生 하였다. 초2일: 甲 申 맑고 바람 없음. 日 氣 가 어제와 같다. 升 燁 및 斗 燁 이 와서 面 對 ( 人 事 )하였다. 獨 山 先 達 인 慶 燁 도 와서 보았다. 소문을 들으니 서울로부터 그믐날에 출발하여 집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자상하게 서울의 기별을 들었 다. 族 從 인 尙 柔, 尙 栩 의 兄 弟 및 庶 族 인 尙 杰, 尙 枉 과 族 從 인 尙 橃 이 와서 보 고는 인하여 돌아갔다. 先 達 과 慶 燁 과 尙 橃 은 인하여 잤다. 초3일: 乙 酉 맑고 따스하고 바람 없음 日 氣 는 어제와 같았다. 이날은 尙 橃 과 尙 燁 이 모두 돌아갔다 나는 從 子 先 達 및 明 璹, 明 嶼, 性 玉, 升 燁, 斗 燁 을 거느리고, 水 月 山 沃 陽 洞 先 塋 에 가서 參 拜 하였다. 月 波 나루를 건너 잠시 獨 山 에 들어가 族 從 尙 標 와 對 話 하고, 佳 佐 山 先 親 의 山 所 에 나아가 拜 謁 하였 다. 文 山 書 院 에 들어가 祠 堂 에 拜 謁 하고 因 하여 세 곳의 家 廟 도 參 拜 하고는 竹 月 軒 에서 잤다. 明 璹 은 저물게 집으로 돌아갔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잤다. 밤에 金 上 舍 宛 燦 이 와서 잤다. 초4일: 丙 戌 맑고 약간 北 風 이 있음. 아침에 局 內 에 先 塋 을 參 拜 하였다. 아 침을 먹은 뒤에 여러 무리들을 거느리고 白 蓮 洞 으로 向 하다가 省 谷 마을 앞 에서 權 先 達 誨 를 만나 對 話 하였는데 그 역시 北 熊 谷 의 墓 所 에 參 拜 하려 가 는 걸음이었다. 大 寺 에 닿아서 조금 쉬다가 山 에 올라가 墓 所 를 參 拜 하고 白 蓮 庵 에서 잤 다. 초5일: 丁 亥 밤 자시부터 눈이 시작하다 오후에 그쳤으나 역시 그믐날의 눈보다 많이 내렸다. 靑 蓮 大 師 包 定 및 就 英 이 와서 배알하였다. 宗 玉 은 초7 일이 祭 祀 이기 때문에 눈이 내리는 것을 무릅쓰고 산을 내려갔다. 나는 여러 무리들과 더불어 머물다 잤으니 눈 흙탕물이 걷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소문을 들으니 咸 昌 黃 嶺 寺 에 스님이 몰래 立 齋 鄭 ( 諱 宗 魯 ) 先 生 의 墓 所 를 歲 末 에 盜 掘 하였다고 하였으니, 世 相 의 道 가 凶 險 하여 痛 嘆 無 地 였다. 入 葬 地 가 이미 黃 嶺 寺 의 主 龍 인 靑 龍 白 虎 의 땅이 아니고, 山 主 가 이미 黃 嶺 寺 가 기 르던 樹 木 도 샀는데, 지금 이르러 10년이 된 後 에 값이 그의 뜻보다 못하다

고 일컬었으니 이는 凶 惡 한 일이었다. 또한 先 生 은 또 咸 昌 의 원님을 거쳤으 니 綱 常 이 變 한 것이 아니겠느냐? 1826년 9월(524)P 12일: 庚 寅 맑음. 興 德 아들이 墓 祀 를 받들러 가면서 祭 物 을 받들고 沃 陽 洞 에 가서 墓 祀 를 擧 行 하고, 轉 傳 하여 水 月 에 到 着 하여 墓 祀 를 擧 行 하였으며, 法 華 洞 으로 돌아와 墓 祀 를 擧 行 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달밤에 집으로 돌 아왔다. 13일: 辛 卯 맑음. 奠 掃 ( 墓 祀 )하려고 가면서 祭 物 을 받들고 龍 山 나루를 건너 文 洞 에서 墓 祀 를 擧 行 하니 해가 저물도록 마치지 못하고 竹 月 軒 에 그쳐서 잤다. 관청에 하등의 노예는 마을 사람으로서 공적인 祭 需 를 먹였다. 저녁에 疲 困 함으로 인하여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또 祖 考 竹 月 軒 公 과 先 考 養 失 公 이 堂 中 에 羅 列 하여 앉아 있기에, 내가 이에 飯 饌 을 드리며 竹 月 公 에게 술잔을 드렸고, 興 德 아이는 飯 饌 을 드리며 養 失 公 에게 술잔을 드렸는 데, 깨고 보니 感 懷 가 至 極 하여 慰 安 하는 뜻으로 祭 祀 를 擧 行 할 計 劃 을 하고 는 祭 祀 物 品 을 陳 設 하라고 命 하였다. 14일: 壬 辰 맑음. 이날은 어제 마치지 못한 位 에 墓 祀 를 行 하였다. 어제는 10 代 祖 妣 裵 氏 의 位 와 9 代 祖 이신 部 將 公 과 敎 授 公 과 松 庵 公 의 配 位 張 氏 와 櫟 亭 公 과 鶴 關 公 의 配 位 李 氏 와 櫟 亭 公 의 配 位 張 氏 는 이에 中 止 하 고서 因 하여 曾 祖 參 判 公 의 位 에 擧 行 하였고, 今 日 은 鶴 關 公 의 繼 配 인 金 氏 의 位 와 先 妣 이신 崔 氏, 趙 氏, 李 氏 의 位 와, 亡 室 孫 氏 의 位 와, 庶 祖 母 李 氏 와 庶 叔 인 通 德 郞 公 과 亡 侄 龍 燁, 箕 燁 의 墓 所 와 從 祖 父 母 考 妣 位 와 合 하여 21 位 이었다. 해가 이미 저물어 캄캄하기에 횃불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1828년 2월(584)P 20일: 庚 寅 맑음. 明 琥 와 明 礖 의 두 손자가 출발하여 丹 城 의 武 試 所 로 갔 다. 나는 性 玉 과 外 孫 인 金 震 相 과 庶 子 인 升 燁 과 庶 孫 인 明 龍 을 거느리고 가 서 文 洞 의 墓 祀 를 거행하고 저녁에 돌아왔다. 明 龍 이는 明 日 에 斗 燁 과 함께 곧장 白 蓮 庵 에 올라가 잤다. 文 洞 으로 興 德 아들은 科 擧 의 손님을 接 待 하느라고 집에 머물고 갈 수가 없 었다. 21일: 辛 卯 맑음. 이날은 寒 食 이기 때문에 墓 祀 를 擧 行 할 次 로 洛 東 江 을 經 由 하여 白 蓮 庵 으로 올라갔다. 性 玉 및 外 孫 金 震 相 은 新 楓 나루로부터 白 蓮 庵 으로 올라왔다. 升 燁 은 雪 庵 으로 간 뒤에 曾 外 母 이신 商 山 金 氏 墓 所 에 墓 祀

를 擧 行 하고 追 後 에 와서 到 着 하여 늦게야 墓 祀 를 擧 行 하였다. 庶 侄 인 斗 燁 과 庶 孫 인 明 龍 은 文 洞 으로부터 白 蓮 庵 으로 올라왔다. 27일: 丁 酉 아침에 흐리고 비를 뿌리다가 늦게야 맑음. 今 日 은 高 祖 考 이신 承 旨 公 ( 諱 : 以 元 )의 忌 日 인데, 밖에 있어서 祭 祀 에 參 與 하지 못하니, 追 慕 함 이 옛날보다 倍 나 되었다. 나는 斗 燁 과 더불어 머물렀다. 28일: 戊 戌 맑음. 白 蓮 庵 으로부터 斗 燁 과 더불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은 우선 탈이 없었으므로 이것이 다행이었다. 升 燁 어머니의 病 勢 은 藥 으로 治 療 함을 만나 조금 緩 和 되었다고 하였다. 29일: 己 亥 맑음. 興 德 아들이 鄭 天 黙 喪 人 挽 留 하는 바가 되어 金 山 北 面 釜 谷 上 占 穴 한 곳에 갔다. 明 日 巳 時 에 斬 破 土 (베어내고 흙을 팜)이기 때문 에 獻 官 을 要 請 하였기 때문이다. 文 洞 에 族 丈 이신 浩 氏 가 와서 보고 말씀하기를 崔 益 性 이 너무 醉 하여 亂 動 을 부린다. 고 하였다. 1829년 正 月 (626~629)P 16일: 辛 亥 말고 바람 없음. 明 日 은 즉 伯 氏 의 忌 日 이니 追 慕 함이 옛날보 다 倍 가 된다. 지금에 이르러는 流 浪 하고 빌어먹으며 乞 食 하니 한 마을의 사람들이 群 衆 을 이루었다고 한다. 甲 戌 년보다 甚 하다고 하구나. 17일: 壬 子 흐리고부터 아침에 안개가 늦게야 눈이 내림. 섣달과 冬 至 의 눈으로 因 하여 봄눈이 되어 오히려 그치지 않는다. 눈 속의 屈 에는 땔나무를 잇기가 매우 어려워 房 을 닫고 團 欒 하게 두 개의 房 에 모였으니, 보기에 窘 塞 하였다. 奴 婢 再 乭 은 본래 宗 玉 의 奴 婢 이었다. 今 日 에 가족을 이끌고 桃 開 에 宗 玉 의 집으로 옮겼으니 살아갈 計 劃 의 計 策 이었다. 終 日 눈이 내린다. 20일: 乙 卯 맑고 바람. 늦게야 金 達 成 同 知 가 와서 방문하였다. 勸 農 吳 次 孫 도 와서 나타났다. 興 德 아들의 書 信 이 入 納 하였다. 집은 無 事 하다고 한다. 文 山 書 院 에 쌓인 빚으로 五 斗 落 田 畓 을 放 賣 한다고 한다. 田 畓 을 팔기 시 작하면 享 祀 를 빠트리게 됨이 멀지 않은데, 우러러 恨 歎 스럽다. 京 中 에 從 子 (조카)인 璧 燁 의 書 信 을 보았는데, 都 政 은 歲 前 인 27일에 하였 으며, 崔 柱 悳 이 郭 山 郡 守 가 되었고, 나머지 옮기거나 轉 補 되거나 및 처음 벼 슬한 것은 擧 論 하지 않았다. 官 下 帖 ( 官 報 )을 보았더니, 寶 齡 40 歲 에 登 極 하였음이 30 年 이니, 두 慶 事 가 合 하였으니, 4월 초9일에 庭 試 를 設 行 한다고 하였다. 큰 凶 年 을 만나 嶺 南 의 閑 良 은 스스로 같이 科 擧 가 停 止 되었다.

2월 초7일: 辛 未 맑고 바람 약간 추운 氣 運 이 조금 풀림. 아침에 明 璵 는 左 道 를 向 하여 출발하였다. 가다가 소문을 들으니 族 人 인 尙 權 이 水 月 의 길가에서 죽었다고 하였으니, 슬펐다. 그가 崇 岩 에서 태어나고 살았음이 장차 40 餘 년이 지났으나 사람됨이 밝지 못하여 겨우 形 體 만 갖추었으며 一 子 와 一 女 를 낳으나, 나와 서로 面 對 함은 數 次 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으니, 본래 往 來 하지 않았다. 그러나 今 年 에 凶 年 을 만나 그의 아들 하나는 延 香 에서 工 場 에 품팔이를 하였고, 그는 四 方 을 두루 流 浪 하니 그의 處 와 그의 딸은 집에 있다가 모두 죽었는데, 그는 그들의 죽음도 알지 못하다가 때마침 文 山 에 도착하여 비로 소 알고는 그의 집에 가서 보니 집과 房 에는 이미 개구리가 있었다. 敬 一 이 庭 玉 에게 매를 맞은 것으로써 원망하더니, 抗 拒 하며 나가게 하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도리어 朴 谷 재를 넘어 마을 아래 냇가 周 邊 에 到 着 하 여 누워서 이러나지 못하고 그 곳에서 죽었다고 하였으니, 슬프고 슬펐다. 초9일: 癸 酉 맑음. 明 日 은 曾 祖 考 이신 參 判 公 의 忌 日 이다. 升 燁 과, 明 龍 을 거느리고 華 林 에 가니, 崇 岩 族 孫 00이 와서 잤으니, 즉 敬 熙 의 셋째 아들로 出 系 하여 尙 梧 의 嗣 孫 가 되었다. 13일: 丁 丑 고 따뜻함 午 後 에 西 風. 棣 樂 堂 에 올라가 서성거리며 彷 徨 하다 가 永 懷 堂 에 내려와서 잤다. 14일: 丁 丑 ( 戊 寅 )바람이 화창함. 上 舍 金 基 直 이 와서 보았다. 李 雲 翼 이 손 님으로 왔으니, 즉 입과 배를 채울 계획이었다. 族 從 尙 標 가 와서 보고 곧장 돌아갔다. 金 達 成 이 와서 잤다. 15일: 戊 寅 ( 己 卯 ) 맑고 구름과 아지랑이에 바람이 화창함. 李 雲 翼 과 金 達 成 이 돌아간다고 告 하였다. 族 丈 인 浩 氏 가 와서 잤다. 金 善 汝 希 運 이 와서 잤 다. 金 性 汝 가 와서 對 話 하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升 燁 의 父 子 도 와서 面 對 하 고 인하여 잤다. 16일: 己 卯 ( 庚 辰 ) 어제 밤부터 비가 내리다가 아침까지 그치지 않다가 저 녁이 되자 이에 그쳤다. 와서 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 이날은 나의 生 日 인데 뒤늦게 感 懷 가 옛날보다 倍 나 되었다. 어제 밤의 꿈 에 徐 夫 人 의 動 靜 이 살았을 때와 같았는데, 明 日 이 즉 그가 死 亡 한 날이라 그럴까? 슬픔이 그치지 않았다. 子 孫 이 齋 宿 하였다. 17일: 庚 辰 ( 辛 巳 ) 맑고 바람이 종일 어지럽다. 닭이 울자 祭 祀 를 擧 行 하였 는데 슬픈 感 懷 가 그치지 않았다. 늦게야 棣 樂 堂 에 가서 對 話 하였다. 桃 開 洪 上 舍 在 學 潤 汝 가 와서 보았다. 18일: 辛 巳 ( 壬 午 ) 맑고 바람 없음. 墓 所 에 參 拜 할 次 로 白 蓮 庵 에 가면서 洛 東 나루를 經 由 하였다. 興 德 아이가 뒤따르고 넷째 孫 子 明 琢 과 庶 孫 明 龍 도

같이 山 에 올라가서 墓 所 에 參 拜 하고 내려와서 新 庵 에서 잤다. 19일 辛 巳 ( 癸 未 ) 흐리고 흙비가 終 日 내림 일기가 正 常 을 어긋나고 또 늦 게야 바람이 차가웠다. 興 德 아이가 山 을 내려와서 農 所 로 向 하였으니, 權 先 達 誨 를 보기 위하여서였다. 이 君 ( 權 誨 )은 그의 아버지 令 公 의 謫 所 (귀양살 이)로부터 돌아왔는데 이번에 容 恕 하여주는 恩 典 은 받지 못하여 돌아오지 못 하였다고 하였다. 다만 날자와 달만 計 算 하였기 때문에 容 恕 하는 恩 典 에 들 어가지 못하였다고 하였음. 나는 두 孫 子 를 거느리고 新 庵 으로 돌아왔다. 21일: 癸 未 ( 乙 酉 ) 맑고 바람 없음 점심때가 되자 종일 해무리가 되다. 두 孫 子 를 거느리고 원지나루를 경유하여 생물고개를 나와 백운동 華 棣 堂 으로 돌아왔더니, 明 琢 孫 子 및 奴 婢 와 소를 보냈기에 華 林 으로 돌아왔다. 22일: 甲 申 ( 丙 戌 ) 말고 바람 없음 늦게 흐리고 비올 뜻이 있더니 저물녘 에 비로소 비가 오다. 文 山 에 享 禮 를 이롭게 擧 行 하지 못할 것 같아 苦 悶 과 恨 歎 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