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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다. 2) 김종필 오히라 합의에 이르는 청구권 문제의 해결에 관해서는, 한국 측이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한국 측의 요구에 근접한 금액을 일본 정부가 경제 협력 으로서 무상, 유상(정부 차관)의 방식으로 공여하는, 일본 정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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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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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Social Awareness and the Strengthening of Organization by the New faction of Chundogyo in the Early 1930s 1)정 용 서(Jeong, Yong Seo)** Ⅰ. 머리말 Ⅱ. 신간회 해소에 대한 인식 Ⅲ. 반종교운동에 대한 대응 Ⅳ. 부문운동의 확대 강화 Ⅴ. 맺음말 목 차 영문제요 The new and old faction of Chundogyo underwent another divergence in April 1932, slightly over a year after their merging in December 1930. After the split, while the old faction of Chundogyo devoted itself to religious activities conforming to the body of Chundogyo traditions, the new faction openly denounced Shingan-hoe and sought to gain the upper hand in the social movement of the time. With this in mind, it expanded sectoral movements and started to actively engage in a peasant movement, labor movement and youth movement. The new faction of Chundogyo believed that the mission of peasant and labor movements was to organize and train peasants and workers. Rather than being confined to a mere class movement, the social movement was therefore raised to an inclusive level where it aimed to embrace preoccupations and *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일제하 해방후 천도교세력의 정치운동, 연세대, 2010)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연구교수 (seo@yonsei.ac.kr)

8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demands from different strata of society. At the same time, leaders of the new faction valued the role of a single vanguard party, namely the Chundogyo Youth Party, in leading the various sectoral movements and acting as a national control tower. For this purpose, the new faction of Chundogyo sought to organize sectoral groups under the Chundogyo Youth Party with a view to keeping them under control. As evidence of this policy, the Chosun Agrarian Organization was kept directly under the Party, the Chosun Labor Organization was founded, and the Chundogyo Youth Group was renewed. In response to the socialists attacks, leaders of the new faction also advocated the Chosun movement leadership, based on social activities such as the Youth Party s sectoral movements, as well as a strong centralized organizational structure. Key words : Chundogyo, Chundogyo Youth Party, Chosun Agrarian Organization, Chosun Labor Organization, Chundogyo Youth Group Ⅰ. 머리말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 일본제국주의는 극심한 공황으로 인한 미 증유의 체제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를 침략하였고, 점차 전시체 제로 접어들고 있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지배 방침도 일정한 변 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30년 내내 조선사회를 술렁이게 했던 자치 제를 둘러싼 논란이 그해 12월 제2차 지방제도 개정으로 일단락되는 가 운데, 자치 참정과 같은 거시적 지배체제 변화보다는 최소한의 지방참 정권 부여를 통해 조선사회를 포섭해 간다는 정책이 분명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1) 이에 1920년대 중반부터 자치제 실현의 가능성을 염두에 활발한 활 1) 이태훈, 일제하 친일정치운동 연구 (박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0), pp.246-252 참조.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85 동을 벌여나갔던 천도교 신파는 조선사회에서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린에 의하면 독립주의 및 공산주의의 박해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 자치운동 의 정치적 계기가 상실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는 것은 자칫 천도교 신파세력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되 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었다. 1930년 들어 계급 대 계급 노선에 입각하여 민족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을 강화해 가고 있던 사회주의세력이 개량주의 세력의 핵심으로 종교단체를 지목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반종교운동, 반천도교운동 이 일어 난 것이다. 3) 본 연구는 대공황기로 표현되는 극심한 사회모순이 진행되고, 일제의 지배정책에 일정한 변화가 진행되는 당시 조선현실과 제 사회운동 세력 과의 관계 속에서 천도교 신파세력이 취한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자 신들의 조직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지지기반을 사회적으로 넓히기 위해 제기한 신간회 활동 비판과 부문운동 강화 등에 대한 검토를 통해, 조선운동의 영도권 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자임한 천도교 신파세력의 활 동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현실사회 문제에 대한 개혁은 자신 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천도교 신파의 현실인식이 당시 운동계 사상계 의 동향과 관련하여 어떻게 관철되어 나가는가를 확인하고자 한다. 2) 副 島 道 正, 朝 鮮 統 治 に 就 いて- 宇 垣 新 總 督 に 望 む, 外 交 時 報 640(1931.6), pp.45-46 ; 김동명, 지배와 저항, 그리고 협력 (서울: 경인문화사, 2002), p.335 재 인용 3) 사회주의자들의 반천도교운동 에 대해서는 정혜정, 日 帝 下 천도교 수운이즘 과 사회주의의 사상논쟁, 東 學 硏 究 11(2002.2) ; 金 正 仁,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서울: 한울, 2009) ; 허수, 일제하 사상논쟁 에 나타난 종교 개념의 충돌, 개념과 소통 2-2(춘천: 한림과학원, 2009) 등 참고.

8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Ⅱ. 신간회 해소에 대한 인식 자치문제와 관련해 조선총독부측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천도교 신파는 자신들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1920년대 중반 이래 분열 대립하던 구파와의 합동을 모색하였다. 신파에서는 박인호 를 교주로 인정하고, 교권을 교인 수에 상관없이 반분하자며 신 구파 의 합동을 제안하였다. 이에 구파에서는 신간회 운동노선에 일정한 변 화가 나타나고, 4) 신간회 해소가 공론화 되는 상황에서 신파에서 합동조 건을 대거 양보하자 이에 응하였다. 신 구파의 합동은 1930년 10월 16 일과 11월 11일 수뇌부 비공식 회합을 거쳐 1930년 12월 23일 전격적 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5) 천도교단의 합동에 따라 신파의 천도교청년 당과 구파의 천도교청년동맹도 천도교청우당 이라는 이름으로 합동하 4) 특히 천도교 구파에서는 신간회 본부에서 신파의 전위조직인 천도교청년당에 신간 회 가입을 권유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신 간회에서는 1929년 11월 23일-24일에 열린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蔡 圭 恒 의 제의로 청년당에 관한 건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청년당에 신간회 입회를 권유하기 로 결정하고, 그 실행방법은 중앙상무집행위원회에 일임하였다. 당시 신간회 중앙 상무집행위원은 金 恒 圭 朴 文 熺 趙 炳 玉 安 喆 洙 李 周 淵 林 瑞 鳳 金 明 東 金 長 煥 韓 相 駿 蔡 圭 恒 鄭 鍾 鳴 韓 炳 洛 등 12명이었다( 新 幹 會 第 二 回 中 央 執 行 委 員 會 會 錄 (1929), p.37) 5) 朝 鮮 日 報 1930년 11월 13일; 心 耕 學 人, 大 會 以 後 의 天 道 敎 經 論, 三 千 里 12(1931.2), p.45. 한편 1930년 12월 23일 천도교 신 구파 합동대회에서 선임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彙 報, 天 道 敎 會 月 報 (이하 月 報 ) 241(1932.1), pp.71-75). 大 領 司 대령 鄭 廣 朝 (신) 부대령 崔 俊 模 (구) 典 道 李 世 憲 (구) / 誠 道 觀 觀 正 吳 尙 俊 (구) 觀 書 姜 友 (신) 劉 漢 日 (신) / 敬 道 觀 관정 李 鍾 麟 (구) 관서 許 益 煥 (신) 李 團 (신) 韓 龍 淳 (구) / 信 道 觀 관정 崔 碩 連 (신) 관서 崔 丹 鳳 (신) 桂 淵 集 (신) 宋 基 仲 (신) / 法 道 觀 관정 李 君 五 (신) 관서 全 義 贊 (신) 趙 鍾 浯 (신) / 知 道 觀 관정 李 敦 化 (신) 관서 金 秉 濟 (신) 朴 達 成 (신) / 監 査 觀 관정 金 在 桂 (구) 관서 金 景 淵 (신) 朴 漢 珪 (신) / 宗 法 室 종법사장 李 仁 淑 (신) 상무종법사 金 鎭 八 (신) 金 庚 咸 (구) 申 鏞 九 (신) 文 哲 謨 (신) 梁 載 學 (신) / 顧 問 室 고문 權 東 鎭 (구) 吳 世 昌 (구) 崔 麟 (신) 羅 龍 煥 (신) 李 炳 春 (신) 諮 承 金 秉 濬 (신)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87 였다. 청년당과 청년동맹의 양측의 합동위원들은 1931년 2월 16일 합동 대회를 열어 黨 憲 을 제정하고, 黨 간부를 선출하였다. 6) 이러한 천도교의 신 구파의 합동을 당시 사회에서는 구파가 신파에 합병된 것으로 바라보거나, 臨 機 隨 應 의 정치적 타협 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보는 이익 타산의 경제적 타협 등 비정상적 유동성을 가진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있었다. 7)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합동 을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신 구파가 합동한지 1년여가 지난 1932 년 4월 2일 천도교 제2회 대회에서 신파의 白 應 奎 등 90명이 제출한 1 水 月 執 義 春 을 취소할 것 2 婦 人 齋 號 를 취소할 것 이라는 건의안 으로 인해 신 구파가 다시 분열하였다. 8) 천도교 구파에서는 1932년 4월 4일 천도교 제2회 대회를 다시 개최 하였다. 4월 2일에 열린 대회를 일체 부인하고, 신파의 鄭 廣 朝 를 종문 6) 東 亞 日 報 1931년 2월 18일; 黨 彙 報, 月 報 242(1931.2), pp.60-61; 우리 黨 의 새로운 陣 營, 黨 聲 1호(1931.4), p.2. 당대표 孫 在 基 (맹) 부대표 鄭 應 琫 (당) / 중앙집행위원 孫 在 基 朴 斗 燁 朴 浣 金 俊 璜 曹 定 昊 朴 漢 珪 金 相 楫 高 承 京 卓 禹 植 李 炳 憲 公 淳 鏞 吳 一 澈 朴 仁 欽 馬 驥 賞 朴 陽 信 金 章 熙 李 翊 李 元 奎 孫 世 宗 郭 士 律 尹 元 世 申 學 均 姜 世 熙 黃 生 周 朴 來 源 玄 行 黙 姜 善 國 李 春 遇 鄭 用 增 禹 京 國 朴 希 賢 李 光 泌 鄭 煥 奭 (이상 동맹) 李 圭 烈 金 起 田 方 定 煥 鄭 應 琫 林 文 虎 朴 達 成 金 道 賢 金 一 大 趙 基 栞 金 公 善 車 相 瓚 姜 友 金 秉 濬 具 中 會 桂 淵 集 李 炫 載 金 泳 煥 白 世 明 韓 泰 然 全 義 贊 金 秉 濟 金 履 國 李 團 (이상 당) 후보 李 根 燮 朱 羲 洛 (이상 당) / 상무집행위원 기무과 鄭 應 琫 (당) 金 履 國 (당) 朴 來 源 (동맹) / 재무과 李 炫 載 (당) 孫 世 宗 (맹) / 부무과 金 道 賢 (당) 朴 陽 信 (맹) / 부문위원 유소년부 方 定 煥 李 根 培 孔 興 文 청년부 朴 達 成 李 學 中 趙 鳳 昊 학생부 具 中 會 朴 浣 金 秉 濟 여성부 桂 淵 集 全 義 贊 劉 漢 日 농민부 金 秉 濬 金 一 大 李 智 鉉 노동부 姜 友 朴 漢 珪 李 炳 憲 상민부 趙 定 昊 金 玉 斌 / 감사 위원 崔 丹 鳳 金 商 說 趙 鍾 浯 田 畯 成 薛 雲 龍 (이상 당) 韓 順 會 韓 龍 淳 金 德 淵 (이상 동맹) 후보 許 益 煥 宋 基 仲 (이상 당) / 고문 金 起 田 (당) 7) 北 陵 學 人, 커가는 天 道 敎 舊 派 勢 力, 三 千 里 7-3(1935.3), p.60 ; 白 南 煥, 天 道 敎 의 再 分 裂 에 對 한 檢 討, 東 方 評 論 2(1932.5), p.18. 8) 中 央 宗 理 院 彙 報 - 天 道 敎 第 二 回 大 會 會 錄, 新 人 間 55(1932.5), pp.57-69

8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을 분리 시켰다는 이유로 除 譜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교단 의 임원을 선출하였다. 9) 또한 신파에서도 1932년 4월 5일 중앙종리원 간부를 새로 선정하였다. 10) 한편 청우당으로 합동하였던 청년당과 청년동맹도 각기 전당대표대회 를 개최하였다. 먼저 청년동맹측에서는 4월 5일 전당대표대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과 대표 부대표 등을 선임하고, 6일 제1회 중앙집행위원 회를 열어 상무위원을 선출하였다. 11) 청년당측에서는 4월 6일-7일 전당 대표대회를 열고 분열된 당 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포덕, 당세확장, 당 원훈련, 기관지확충, 지도자교양, 특종위원회설치, 부문운동 등에 관련된 제반문제를 논의하고, 신임 위원을 선출하였다. 12) 그리고 4월 8일 제1 회 중앙집행위원회를 각 부문 위원 등을 결정하였다. 13) 9) 天 道 敎 第 二 回 大 會 會 錄, 月 報 256(1932.5), pp.79-80; 中 央 宗 理 院 彙 報, 月 報 256(1932.5), p.86. 구파 교단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대령 權 東 鎭 부대령 崔 俊 模 전도 李 世 憲 誠 道 觀 正 崔 俊 模 관서 孫 在 基 敬 道 觀 正 李 鍾 麟 관서 朴 浣 信 道 觀 正 金 在 桂 관서 韓 龍 淳 金 俊 璜 法 道 觀 正 金 庚 咸 관서 金 淳 五 知 道 觀 正 李 鍾 麟 관서 朴 浣 監 査 觀 正 金 庚 咸 관서 金 淳 五 宗 法 師 長 李 炳 春 10) 中 央 宗 理 院 彙 報, 新 人 間 55(1932.5), pp.57-60. 구파 교단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대령 鄭 廣 朝 부대령 崔 碩 連 전도 趙 鍾 浯 성도관정 吳 尙 俊 관서 劉 漢 日 경도관정 金 秉 濬 관서 李 團 신도관정 崔 丹 鳳 관서 桂 淵 集 全 義 贊 법도관정 李 君 五 관서 金 玉 斌 지도관정 李 敦 化 관서 金 秉 濟 姜 友 감사관정 鄭 瑢 根 관서 薛 麟 종법사장 李 仁 淑 상무종법사 金 鎭 八 申 鏞 九 文 哲 謨 梁 載 學 고문 崔 麟 羅 龍 煥 李 炳 春 洪 秉 箕 諮 承 金 景 淵 11) 靑 友 黨 彙 報, 月 報 256(1932.5), pp.88-90. 중앙집행위원 朴 陽 信 玄 行 黙 金 德 淵 鄭 用 增 高 承 京 金 俊 璜 劉 秉 俊 尹 元 世 朴 泰 遠 馬 驥 賞 金 章 熙 洪 鍾 珏 鄭 煥 奭 李 炳 憲 姜 興 周 孫 世 宗 黃 生 周 朴 來 源 李 翊 金 相 楫 朴 漢 珪 / 중앙감 사위원 孫 在 基 李 春 遇 郭 士 律 趙 雲 學 韓 龍 淳 / 대표 朴 來 源 부대표 朴 漢 珪 상무 朴 陽 信 孫 世 宗 / 기무과 朴 漢 珪 孫 世 宗 재무과 朴 陽 信 (부무과겸임) 선전 과 孫 世 宗 통훈과 朴 來 源 12) 四 月 六 七 兩 日 間 開 催 된 全 黨 代 表 大 會 重 要 議 案 決 定, 黨 聲 11(1932.5), p.2 13)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 黨 聲 11(1932.5), p.2. 중앙집행위원 趙 基 栞 金 秉 濬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89 1930년 말에 이루어진 천도교 신 구파 합동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 를 안고 있었다. 신파에서는 교인을 수습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파에서 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14) 신 구파는 모두 합동을 통해 당시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였던 것이 다. 즉 양측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합동에 임하였던 것이다. 또한 합동이 중앙간부들만의 협의에 의해 진행되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여 전히 신 구파 교인들 사이에 알력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청년당과 청 년동맹의 합동 역시 합동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양 조직의 역량차이에 도 불구하고, 단순히 양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5) 따라서 합 동한지 불과 1년여 만에 다시 분열한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천도교세력이 합동과 분열을 하고 있던 시기에 신간회 해소론 이 본격적으로 공론화 되었으며, 결국 1931년 5월 신간회 전국대표자대 회에서 인천 부산 동경 등 일부지회의 발기로 제기된 해소안을 통과 시켰다. 당시 신간회 본부의 권동진 김병로 허헌 등 주요 간부들은 해소 론에 반대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가 개량주의자 에 의해 장악되었고, 계급운동의 의식을 말살한다 는 비판과 함께 해소론을 제 기했고, 해소냐 해체냐 하는 논쟁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국 신간회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16) 그러나 이후에도 민족단일조직을 성립시키고 鄭 應 琫 金 公 善 李 團 姜 友 具 中 會 金 秉 濟 車 相 瓚 金 亨 俊 金 廷 柱 林 文 虎 金 一 大 李 錫 保 朴 達 成 全 義 贊 金 炳 淳 朱 羲 洛 金 道 賢 金 玉 斌 白 重 彬 金 泳 煥 金 履 國 桂 淵 集 李 應 辰 후보 韓 元 彬 李 智 鉉 趙 鍾 浯 / 중앙감사위원 崔 丹 鳳 金 達 鉉 朴 庸 漢 李 海 錫 金 成 玉 후보 金 敎 欽 李 春 國 / 상무위원 金 履 國 具 中 會 朱 羲 洛 / 각 부문 수석위원 농민부 金 公 善 노동부 金 亨 俊 소년부 全 義 贊 청년 부 具 中 會 학생부 金 炳 淳 여성부 金 秉 濟 상민부 金 玉 斌 14) 李 庸 昌, 1920년대 천도교의 분규와 민족주의운동, 김호일 편, 한국근현대이행 기 사회연구 (서울: 신서원, 2001). 15) 鄭 用 書, 日 帝 下 天 道 敎 靑 年 黨 의 運 動 路 線 과 政 治 思 想, 韓 國 史 硏 究 105(1999.6), p.248

9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자 하는 많은 논의들이 제기되었다. 천도교 신 구파가 재분열 하게 되 는 데는 신간회 해소에 대한 인식의 차이, 즉 당시 정세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천도교 구파는 신간회 해소에 반 대하였고, 신파에서는 이를 찬성하였던 것이다. 먼저 구파의 權 東 鎭 은 신간회 해소에 절대 반대하였다. 그는 신간회 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으므로 이를 유지하기 위한 지 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7) 朴 浣 은 신간회가 창립당시와 如 한 열렬한 의기와 발발한 투쟁심은 없어지고 내부의 통제와 규율은 해이하야 간부는 일반 회원의 신임을 받지 못하게 됨으로 新 幹 會 는 오 직 침체, 정돈상태에 함하야 간부는 내적으로 위신이 없을 뿐 아니라 외 적으로 대중의 지지도 박약하야 전혀 고립무원하게 된 것은 사회주의자 들의 잘못된 현실인식과 전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런 인식에서 제기된 사회주의자들의 해소론은 공상적 독단론 에 불과하다 고 비판하였다. 18) 또한 李 鍾 麟 은 신간회가 형식으로는 해소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해소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어떤 지회의 대표가 해소를 찬동하여 그 편에 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 지회의 회원의 전체의사 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여, 신간회 해소를 일부분의 분화작용으 로 보았다. 다만 신간회 이미 형식적으로 해소되었으므로 신간회 형태 로 계속 진행할 수는 없고, 다른 형태의 民 族 的 團 結 이 반드시 생길 것을 기대하였다. 19) 하지만 이후 민족적 단결 을 추진할 만한 내적 역 16) 이균영, 신간회연구 (서울: 역사비평사, 1993) 참조. 17) 權 東 鎭, 朝 鮮 運 動 은 協 同 乎 對 立 乎, 新 幹 會 解 消 運 動 批 判 - 解 消 에 反 對 하노 라, 三 千 里 12(1931.2), p.15 18) 朴 浣, 合 法 運 動 과 非 合 法 運 動 論 - 朝 鮮 運 動 의 再 吟 味, 三 千 里 4-1(1932.1), pp.7-8 19) 李 鍾 麟, 新 幹 會 解 消 와 朝 鮮 運 動 의 今 後 進 路 - 民 族 的 새 團 結, 彗 星 1-4,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91 량을 갖추진 못한 천도교 구파의 대외적 활동은 위축되고 종교적인 활 동이 주를 이루게 된다. 20) 반면, 천도교 신파에서는 신간회 해소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李 敦 化 는 신간회를 일종의 정치운동, 민족운동의 정당으로 표현된 신 사회 운동의 단결운동, 식민지에 在 한 민족 운동, 식민지에 있어서의 항쟁단체 로 보았다. 그리고 신간회 같은 反 抗 運 動 의 단체가 꾸준히 결합되려면 이상과 현실을 통한 정확한 主 義 가 있어야 하고 그 주의가 민족적 특수 환경과 영합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최종으로 가장 필요한 1931.6, 5쪽. 이러한 이종린의 주장을 일종의 신간회 연장설로 이해한 논자도 있었 다. 黃 崗 은 이종린이 해소에 반대하는 支 會 는 支 會 끼리 解 消 可 決 한 支 會 會 員 中 에도 여기 반대하는 회원은 회원끼리 따로이 자연결성하고야 말 것인즉 解 消 派 만이 新 幹 會 에서 물러나가서 완전히 戰 野 가 분화될 것 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일종 의 신간회 연장설로 보았다( 黃 崗, 新 幹 會 解 消 와 運 動 線 의 望 展, 東 光 23(1931.7), p.18). 그런데 이종린이 생각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적 단결 은 이전에 그가 주장하던 대동단결 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신간회를 대체할 다른 형태의 민족적 단결 은 주의가 같은 사람끼리의 결합이었다. 그는 신간회가 진정한 主 義 의 결합이 아이고는 어떠한 金 간판을 내여 걸고 어떠한 鐵 조직을 행 한다 할지라도 그 간판은 마침내 떨어지고야 말 것 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중심단체의 건설론과 범민족적 표현단체의 재건론이 고조되는 此 際 에 이론일망정 단 두 사람이라도 主 義 같은 그 사람끼리 따로 결합하자는 것은 자칫하면 파쟁을 반발한다는 오해를 사기에 가까운 말 이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민족적 단결 은 단 두 사람이라도 主 義 만 같은 그 사람끼리 따로 결합하야 가지고 무엇을 목적하든지 그 주위에 저것들을 초래할 만한 汚 穢 物 과 臭 腐 性 이 없도록 주 의하는 것이 가장 건전, 적당한 방법 이라고 주장하였다( 李 鍾 麟, 民 族 的 公 敵 인 分 裂 主 義 者 撲 滅, 地 方 熱 과 派 爭 打 破 論, 三 千 里 4-2(1932.2), pp.10-11). 1920년 대 중반 천도교 신파의 주의적 단결 론과 유사한 주장을 한 것이다. 20) 이것은 1934년 12월 최린이 천도교 간부직에서 물러난 것과 신파의 운동노선이 교정분리 될 것인가를 묻는 三 千 里 社 의 설문에 대해, 이종린이 원래 우리 舊 派 는 政 敎 分 立 을 環 境 이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새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라고 답 한 것에서, 천도교 구파가 이미 교단 내적인 종교 활동에 치중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基 督 天 道 敎 兩 大 陣 營 緊 張 - 天 道 敎 의 今 後 進 路 觀, 三 千 里 7-2(1935.2), pp.31-35).

9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것이 주의와 생명이 일치되는 의지력이 절대한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간회는 어떠한 계단적 목적 아래서 各 派 各 類 를 知 誘 하여 모인 단체, 즉 會 의 조직과 단원된 자의 훈련이 그 목적과 융합되지 못한 미숙한 개성의 집단 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다. 그것은 신간회 회원들이 신간회의 목적에 대하여 의지적 신념이 서지 못하였으 며, 또한 신간회가 회원들이 의지적 역량을 집중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 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1) 또한 金 道 賢 은 신간회 해소되던 그 당시까지의 新 幹 支 會 수가 141개소이고, 회원총수가 3만 9천여 명이라 고 하나 누구든지 아무 숨김없이 말한다면 사실에 있어서 빈이름뿐이 아니었든가. 그 자체 그것으로써만 민족적 협동전선을 云 謂 하기에는 너 무 엄청나게 생각키우는 일이었든 만큼 多 部 分 의 주요한 요소( 主 要 素 ) 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협동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어떠한 具 體 的 案 件 에 의지해서 강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 평가 하였다. 22) 여기서 더 나아가 천도교 신파는 민족단일당이란 침략민족에 대항하 는 피지배민족에게 원칙적으로 필요한 존재지만, 신간회는 민족단일당 이 가져야 할 조건들을 하나도 지니지 못했음으로 당연히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천도교 신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李 晶 燮 23)은 신간회를 예로 들어 민족단일당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첫째 일정한 정치운동을 하려는 민족단일당이라면 먼저 그 민족성 21) 李 敦 化, 團 體 生 活 과 意 志 力, 彗 星 2(1931.4), pp.28-31. 22) 석정, 新 幹 會 解 消 可 決 第 二 會 全 體 大 會 의 決 議, 黨 聲 3(1931.6), p.2. 23) 해방 후 崔 麟 은 반민특위 재판을 받는 가운데 李 晶 燮 에 대해 본인이 중학교에 있을 때 가르친 사람이고 본인이 洋 行 할 때에는 같이 미국으로부터 구라파까지 다 녀 온 관계가 있습니다 라고 답하고, 재판장의 그러면 사상이라든지 행동이라든지 가 피고하고는 같은 사람이 아닌가요? 라는 질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반민특위 제3회 공판기, 如 菴 文 集 ( 下 ) (1971), p.308).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93 에 적절한 그 민족현실에 적응한 지도원리 원칙부터 수립되어야 하는데 신간회는 민족현실에 적응한 지도원리가 없다고 보았다. 신간회의 우리 는 단결을 확고히 함 이란 강령은 지도원리가 아니며, 신간회를 구성하 던 구성분자들은 방탄불용의 좌우분자를 망라한 존재들로서 지도원리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민족단일당의 건설에는 인도의 간디와 같은 지도인물이 필요한데 신간회에는 지도인물이 없다고 보았다. 지도 이론이 확립되었더라도 이를 실천할 인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민족단일당을 건설하려면 그 구성분자가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튼 튼해야 하는데 신간회는 조직구성원들의 회비납부실적(4만명 회원이 7 원을 납부)에서 나타나듯 조직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존재였다는 것이 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이정섭은 신간회는 名 實 이 유령단체였고 그 운동은 단지 名 簿 錄 上 의 운동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24) 즉 천도교 신파에서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피차에 주의가 다 르고 정책과 전술이 다른 이상에는 무조건하고 막연하게 합동하여 민족 단일당 같은 것을 조직한다는 것은 사실에 될 수 없는 일이오. 실지에 아무 일도 되지 않을 것 이라고 본 것이다. 25) 대신에 이들은 당시 조선 의 현실에서 무의식한 민중을 운동의 전면에 참가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직업별 성별 연령별로서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하 며, 26) 이들 각 부문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 조정할 수 있는 일종의 민 족적 구심 으로서의 단일당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27) 24) 李 晶 燮, 民 族 單 一 黨 論, 農 民 2-6(1931.6), pp.10-15. 25) 金 秉 濬, 大 協 同 機 關 組 織 의 必 要 와 可 能 如 何, 彗 星 1(1931.3), p.11. 26) 金 亨 俊, 黨 員 이란 무엇인가?, 黨 聲 4(1931.7), p.6. 27) 金 一 大, 機 關 統 制 는 어떠케?, 農 民 3-6(1932.7), p.10.

9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Ⅲ. 반종교운동에 대한 대응 천도교 신 구파의 합동을 전후한 시기, 즉 1930년대 초에 사회주의 자들은 반종교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단체들 을 민족개량주의의 조직적 사상적 중핵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 들을 공격함으로써 개량화를 차단하고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한 논자에 의하면 반종교운동은 개별의 독립된 운 동이 아니라 일정한 정치적 원리 아래서 움직이는 계급투쟁의 일정한 정치적 실천에서만 전개될 無 神 論 운동 으로 정치투쟁의 일부분 이었 다. 28) 요컨대 정치투쟁의 일환으로서 반종교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 다. 또한 이시기 반종교운동은 1920년대 중반의 반기독교운동 29) 의 범 위를 넘어 반천도교운동 으로까지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신 구파가 합동을 한 천도교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 에 맞서 함께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신 구파의 전위단체인 청 년당과 청년동맹이 합동한 천도교청우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930 년대 초의 정세변화와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에 맞서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이념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청우당의 조직체계 를 더욱 강화된 중앙집중체제로 전환하였으며, 부문운동 단체를 재정비 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반 종교운동에 맞서 자신들의 이념 사상을 좀더 체계화 구체화시킬 필요 를 느낀 청우당에서는 천도교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단체 조직, 언 론매체를 통한 대응논리 발표, 당원훈련과 대외선전 강화 등의 방안을 28) 李 甲 基, 宗 敎 批 判 과 反 宗 敎 運 動, 批 判 7(1931.1), p.102. 29)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해서는 이준식, 일제침략기 기독교지 식인의 대외인식과 반기독교운동, 역사와 현실 10(1993.12) ; 김권정, 1920년 대 후반 기독교세력의 반기독교운동 대응과 민족운동의 전개, 한국기독교와 역 사 14(2001.2) 참조.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95 마련하였다. 30) 첫째, 천도교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단체로 1931년 4월 6일 人 乃 天 主 義 硏 究 會 를 조직하였다. 31) 이 단체는 인내천주의의 입장에서 모 든 사상과 모든 학술을 연구하는 동시에 인내천주의로서의 종교 철학 예술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에 대한 이론을 구명 수립 할 목적으로 조 직되었으며, 事 務 局 硏 究 局 編 輯 局 을 두었다. 특히 연구국에는 종 교 철학 예술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6개 연구부를 두고, 회원은 반드시 하나 내지 두개 부문에 관련된 전문연구를 하기로 하였다. 32) 그런데 천도교 사상에 대한 연구와 체계화는 이미 1920년대 후반부 터 청년당 동경지부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동경지부에서는 천도 교 경전을 과학화 상식화하여 학문적으로 세계적인 지위를 점하도록 하는 동시에, 이론투쟁의 무기로 삼을 목적으로 1927년 7월 3일 經 典 硏 究 會 를 조직하였다. 33) 또한 동경지부에서는 오늘날에 있어 모든 운동 형태 또는 학문적 사상형태가 자본주의적이 아니면 공산주의 사회민주 주의 등으로 계선이 명료하여졌음으로 흔히는 자본주의 사상이나 공산 주의 사상을 공식적으로 외워 가지고 조선의 현실적 특수조건을 무시하 고서 공식적으로 실천하려는 경향이 많음에서 그들의 공식주의를 파기 하고 우리 당의 지도이론 밑에 집중시키기 위해서 34) 는 청년당의 이론 30) 이하에서는 당시의 정세변화와 반종교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청년당의 이론 정비와 당원교육, 지지기반 확대를 위한 부문운동 단체의 정비 등을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청우당 조직체계의 정비에 대해서는 鄭 用 書, 앞의 글(1999) 참조. 31) 東 亞 日 報 1931년 4월 11일. 32) 林 然, 人 乃 天 主 義 硏 究 會 創 立, 月 報 247(1931.7), pp.19-21. 인내천주의연구 회의 임원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사무국장 金 司 鏞 서무 趙 鳳 昊 재무 趙 鍾 浯 선전 薛 麟 연구국장 林 然 종교 林 然 철학 金 亨 俊 예술 白 世 哲 정치 韓 正 浩 경제 李 應 辰 사회문화 薛 麟 편집국장 金 秉 濟 위원 金 炳 淳 趙 鍾 浯 金 亨 俊 李 應 辰 白 世 哲 고문 李 敦 化 李 鍾 麟 金 起 田 33) 金 炳 淳, 經 典 經 究, 新 人 間 15(1927.8), pp.26-27.

9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구명과 학문적 체계의 성립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天 道 敎 學 術 硏 究 會 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다. 東 京 部 에서는 청년당의 주의와 천도교리를 선전하고, 당의 사업상황과 학술 등을 소개하기 위하여 東 學 之 光 이 라는 잡지를 1927년 11월부터 발행하였다. 35) 人 乃 天 主 義 硏 究 會 의 결성은 이와 같은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천도 교세력이 자신들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단체를 당지방부에만 둘 것이 아니라 당 중앙에 두고 좀 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천도교리를 연구해 다른 세력의 이론적인 공격에 맞서기로 한 결정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둘째, 천도교의 이론가들은 천도교와 관련된 각종 언론매체에 당시 대두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발 표하였다. 36) 천도교리를 대외적으로 선전하며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정 당성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 중에서 金 亨 俊 의 주장 을 살펴보도록 하자. 김형준은 1931년 7월 5일부터 1주일간 東 京 에서 열린 하기강좌에서도 水 雲 主 義 와 反 宗 敎 論 이라는 제목으로 금일에 소아병적 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소위 반종교운동이라 34) 金 亨 俊, 黨 東 京 部 의 學 術 硏 究 會 에 對 하야, 黨 聲 3(1931.6), p.4. 35) 靑 年 黨 時 報, 新 人 間 18(1927.11), pp.34-39. 36) 천도교 이론가들이 반종교운동과 관련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한 대표적인 글은 다음과 같다. 林 然, 天 道 敎 와 反 宗 敎 運 動, 月 報 248(1931.8); 編 輯 室, 方 向 轉 換 의 朝 鮮 宗 敎 運 動, 月 報 248(1931.8); 金 亨 俊, 水 雲 主 義 立 場 에서 본 反 宗 敎 運 動, 黨 聲 6(1931.10); 金 一 泉, 宗 敎 와 反 宗 敎 運 動 에 對 하야, 農 民 3-1(1932.1); 瀧 霞, 旣 成 宗 敎 와 反 宗 敎 運 動, 新 人 間 57(1932.7);일당, 攻 防 令 은 宣 布 되엿다, 黨 聲 14(1932.8); 金 一 宇, 맑스 主 義 의 反 宗 敎 理 論 批 判, 新 人 間 58(1932.8); 金 一 宇, 맑스 主 義 者 들의 反 宗 敎 鬪 爭 批 判, 新 人 間 59(1932.9); 李 拓, 似 而 非 運 動 理 論 의 批 判 - 領 導 權 問 題 에 對 한 再 論 -, 新 人 間 63(1933.1); 金 一 宇, 似 而 非 的 反 宗 敎 運 動 의 批 判 -맑스 主 義 反 宗 敎 鬪 爭 의 續 -, 新 人 間 63(1933.1); 金 東 俊, 맑스 主 義 基 礎 理 論 의 批 判 -그것 을 爲 한 一 試 論 -, 新 人 間 63(1933.1).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97 는 것이 우리 수운주의의 입지에서 볼 때에 그것이 얼마나 無 意 義 한 無 根 據 의 행동인가를 嚴 評 37) 하는 등 천도교 입장에서 반종교운동에 대응한 대표적 이론가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종교의 본질 을 단순히 물질의 마술성에만 귀착시키는 형이상학적 독단 에 빠지고 있지만, 기성종교의 박멸을 위하여 크게 찬성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론을 공식적으로 번역하여 천도교에 적용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종교는 추상적 인간, 즉 동물과 구별되 는 의식을 가진 類 로서의 인간의 의식적 산물이 아니오 오히려 일정한 역사적 조건 밑에서 사는 인간의 생활의식 이기 때문에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이 다른 계단으로 전환될 때에는 반듯이 전환 되는 것 이라고 하였다. 즉 종교는 물질의 신비적 마술성에 의하여 成 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시대에서 그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한층 완전한 생활의 실현 을 기도하는 현실적 생활의식이라고 본 것이다. 종교를 이렇게 이해한 김형준은 천도교의 人 乃 天 이란 것은 인간의 실천에 의해서만 금일의 현실을 개벽하고 한층 새로운 생활영역 즉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 는 변증법적 개벽적 세계관 이기 때문에, 천도교는 아미늬즘의 미신에 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과학적 철학적 기초 위에서 인간학적 근 저 위에서 성립된 인류의 全 世 界 觀 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종교의 본질을 애니미즘 의 기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며, 생산수단과 생산관 계의 신비성 즉 물질의 마술성 이 제거되면 종교는 소멸될 것이라고 보 는 반종교이론은, 그러한 애니미즘 에서 기원한 기성종교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철저한 인간학적 기초 위에서 출발한 천도교에는 적용할 수 없 37) 白 生, 東 京 에서는 夏 期 講 座 를, 黨 聲 6(1931.10), p.7.

9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는 것이라고 하였다. 38) 이것은 천도교는 다른 기성종교와 그 출발에서부터 다르기 때문에 기 성종교에 대한 비판이론을 가지고 천도교를 비판하는 방식의 반종교운 동은 그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천도교를 종교로 보는 이 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민족주의로 취급하거나 사회주의적 이상과 동일 하다 생각하는 이도 있고, 내용상 성질에서 自 由 主 義 또는 理 想 主 義 로 바라보는 이도 있지만, 천도교 사상을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등과 같 은 어떤 특정한 사상으로 취급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셋째, 천도교 세력은 1931년부터 매년 11월 1일에서 7일까지 1주일간 청우당에서 설정한 黨 化 週 間 을 통해 정기적인 대외선전과 당원훈련 을 강화하였다. 39) 대외선전은 본래 천도교의 주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전위기관을 표방하고 결성된 청년당에서는 창립 이래 순 회강연 강좌 강습과 각 기관지 삐라 포스터 등을 통한 일상적인 선 전활동과 연중에 어린이날 포덕날 당화주간 농민날 청년날 등 특정한 날을 정하여 진행한 정기적인 선전활동을 하고 있었다. 40) 창립 이래 천도교리의 대외 선전과 당원훈련에 힘을 쏟던 청년당에서 1930년 대에 접어들어 기존의 제반 활동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 한 것이 黨 化 週 間 이었다. 청우당에서는 1931년 8월 13일에 열린 확 대중앙집행위원회에서 당본부로부터 지방부, 지방부로부터 접, 접으로 부터 일반당원에 이르기까지 한사람도 빼지 말고 그들(우리 자신들)을 움직여서 일정한 기간을 온전히 당정신과 당행동 속에서 살게 하고, 그 래서 당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모든 것을 全 黨 的 으로 다시한번 인식하 고 음미하고 踐 驗 하여 획시기적의 큰 실천을 기약하는 우리로써의 총 38) 金 亨 俊, 水 雲 主 義 立 場 에서 본 反 宗 敎 運 動, 黨 聲 6(1931.10), p.5. 39) 本 黨 擴 大 中 央 執 行 委 員 會 에서 黨 化 週 間 實 施 決 定, 黨 聲 6(1931.10), p.2. 40) 趙 基 栞, 天 道 敎 靑 年 黨 小 史 (1935), pp.56-57.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99 훈련 대연습을 감행하자 는 의미에서 黨 化 週 間 을 설정하였다. 41) 이처럼 천도교세력은 1930년대 초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에 맞 서 천도교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단체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활동 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론화 작업을 전개하였다. 자신들의 이론 을 좀더 체계화 구체화시키는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에 대 응하였던 것이다. 또한 천도교인과 청년당원에 대한 교육과 대외적인 선전 활동을 강화하였다. Ⅳ. 부문운동의 확대 강화 천도교 신파는 1930년대 초 사회주의세력의 공격이 강화되는 가운데 정치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문운동을 확대하 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당면한 사회주의세력의 공격에 대항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적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인식에 따라 그를 실제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문운동의 확대 강화가 선택된 것이었다. 이는 통한 농민 노동운동 등 부문운동에 대한 적극적 개입 41) 당화주간에 실행할 구체적인 항목으로 1 당의 이론 정책, 포덕, 부문운동, 교양 훈련 등 그 방면에 관한 적절한 표어를 발표하여 일반당원의 신조를 삼게 할 것 2 당의 이론 정책 또는 현하의 시국정형에 관한 연구문제를 반포하여 이 주간 중에 일반이 이를 토론 연구케 할 것 3 당화주간 일주일 전(10월 25일)부터 매 일 삼천독의 주문을 읽어 당화운동의 기본마음을 준비하는 동시에 당화주간 중에 도 매일 삼백독 이상의 주문을 읽어 侍 定 生 活 을 체험하는 길을 열게 할 것 4 이 주간 중에는 특히 以 接 成 黨 以 黨 開 闢 의 黨 心 告 를 勵 行 할 것 5 이 주간 중에는 당지방부나 접에서는 하루 종일 黨 義 講 習 을 실행하여 難 疑 問 答 투로 黨 工 夫 를 하게 할 것 6 당본부 지방부에서는 일반당원이 이 주간에 읽을 만한 책을 지정 하여 이것을 정독케 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기뎐, 黨 化 週 間 設 行 에 對 하야, 黨 聲 6(1931.10), p.1).

10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속에 현실화되었다. 1930년대 초반의 정치적 위기를 각 사회운동 부문에 대한 기반확대로 대처하려 한 것이었다. 이하에서는 천도교 신파의 전위 조직을 표방하고 결성된 천도교청년당에서 전개한 부문운동을 조선농민 사, 조선노동사, 천도교청년회의 정비과정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조선농민사의 직속기관화 1925년 8월 17일에 열린 청년당 임시총회에서는 소년 및 농민을 계 몽하며 집단생활 의식을 훈련키 위하야 당원 있는 곳마다 소년 및 농민 단체를 조직 하기로 결정하였다. 42) 이에 따라 청년당에서는 金 起 田 趙 基 栞 등이 중심이 되어 당시 사회 각계의 인사들과 9월경부터 5차례의 회합을 가진 후, 10월 29일에 崔 斗 先 李 晟 煥 鮮 于 全 李 昌 輝 朴 瓚 熙 金 俊 淵 柳 光 烈 金 顯 哲 등과 함께 조선농민의 교양과 훈련 을 목적으 로 한 조선농민사를 창립하였다. 창립총회에서는 선거된 중앙이사는 鮮 于 全 李 昌 輝 朴 瓚 熙 金 俊 淵 柳 光 烈 金 顯 哲 金 起 田 趙 基 栞 崔 斗 先 李 敦 化 朴 思 稷 金 炅 泰 黃 英 煥 李 晟 煥 (중앙이사장)이었다. 43) 조선농민사는 창립 이후 사무소를 천도교에서 빌려 쓰고 있었고, 이 사 가운데 천도교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등 천도교의 영향력이 크게 작 용하고 있었다. 즉 천도교측에서는 조선농민사의 창립을 주도하였을 뿐 만 아니라 이후에도 직 간접으로 많은 지원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 다. 청년당에서 농민사에 깊숙이 개입한 것은 당시 증가하고 있던 사회 주의자들의 농민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다 다양 42) 趙 基 栞, 天 道 敎 靑 年 黨 小 史 (1935), p.40. 이러한 결의에 따라 黨 地 方 部 에서도 농민단체를 조직하였다. 예를 들어 黨 碧 潼 部 에서는 10월 1일 1농업대중의 互 相 親 善 을 圖 함 2 農 民 啓 蒙 運 動 을 실현함 을 강령으로 한 農 友 會 라는 단체를 조직 하였다( 靑 年 黨 時 報, 新 人 間 8(1926.12), pp.36-37). 43) 全 朝 鮮 農 民 社, 朝 鮮 農 民 社 의 沿 革, 朝 鮮 農 民 6-4(1930.6), pp.27-28.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101 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여 보다 넓은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44) 이것은 또한 당시 천도교 신파가 추진하고 있던 자치운동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45) 이처럼 청년당에서는 기존의 천도교 내부단체는 물론 농민사와 같은 형식의 단체를 설립해 천도교의 주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 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년당에서는 1928년 12월 23일에 열린 제2차 확대중앙집행위원회에서 천도교라는 관사를 加 하였거나 또는 아 니하였거나를 불문하고 우리 당으로 볼 때 現 에 부문운동으로 認 할 수 있는 관계단체(학생회 四 月 會 소년회 농민사 등)에 대하여는 適 宜 有 效 한 법적관계를 맺을 것 을 결정하였다. 46) 각 부문단체를 청년당의 직접 적인 하부조직으로 만들어 당에서 직접 이들 단체를 관리 통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29년 4월 3일에 열린 청년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는 1 농민사는 本 黨 농민부의 지도를 받을 것 2 농민사의 전선대표대회 44) 조선에는 사회주의 계통의 조선농민총동맹이 한창 떠들던 때였다. 그때에 우리 당 에서는 조선에 진실한 농민운동을 일으킴에 있어서는 농민대중의 계몽이 그 기초 공작이라는 견지에서 조선농민사를 창립하고 농민계몽잡지로서 월간잡지 조선농민 을 발행하였다. 당시 조선의 실정을 살피지 못하고 한낱 번역주의의 운동만을 하는 데에 실증을 낸 인사들이 우리당의 이 운동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기대와 환영을 하였는가는 당시 각 신문지를 보면 잘 알 것이다. ( 林 文 虎, 各 部 門 運 動 의 回 顧 와 展 望 - 朝 鮮 農 民 을 總 集 中 旣 成 社 員 이 二 十 萬, 黨 聲 24(1933.9), p.5). 45) 천도교 신파에서는 다른 조직이나 세력과의 연합 협동보다는 개별적인 차원에서 다른 계열의 인사들을 영입하여 조선농민사를 결성하고,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조선농민사를 통해 국제연대의 일환으로 코민테른의 외곽단체인 크레스틴테른 가 입을 시도하였다. 천도교 신파의 이와 같은 행동을 김정인은 자신들이야 말로 조 선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치세력이고, 천도교의 주류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 이라고 평가하였다(김정인,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서울: 한울, 2009), pp.240-241). 46) 黨 第 二 次 擴 大 中 央 執 行 委 員 會 의 重 要 決 議 事 項, 新 人 間 32(1929.2), p.57.

10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및 중앙이사회의 결의는 당본부의 동의를 얻을 것 3 농민사 중앙이사 장은 본당 중앙 농민부의 수석위원으로 當 케 할 것 을 결의하였다. 47) 이러한 결정은 농민사를 청년당의 직접적인 하부조직으로 만들어 농민 사의 운영을 청년당에서 독자적 합법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년 당의 결의에 따라, 그 다음날 열린 조선농민사 제2차 전선대표대회에서 는 위의 법적관계 3개조 가 안건으로 제출되었으나, 격렬한 반대에 부 딪혀 통과되지는 못하였다. 48) 그러나 이 3개조는 이성환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30년 4월 6일에 열린 농민사 제3차 전선대표대회에서 통과 되었다. 49) 그리고 청년당의 중심인물들로 농민사 간부진을 구성함으로 써 50) 농민사는 명실상부한 청년당의 직속기관이 되어 천도교 농민운동 의 실천기관 51) 이 되었다. 이들은 1930년 4월부터 조선농민사의 활동목표를 1 농민의 지식향 상, 2 농민의 복리증진, 3 농민사의 세력 확장으로 잡고, 구체적인 활 동을 전개하였다. 농민사에서는 1930년 4월 12일 농민교양운동, 농민당 면이익획득운동, 社 勢 擴 張 등에 관련된 실행강목을 발표하였다. 첫째 47) 黨 本 部, 天 道 敎 靑 年 黨 第 三 次 全 黨 代 表 大 會 錄, 新 人 間 35(1929.5), pp.51-53. 48) 全 朝 鮮 農 民 社, 朝 鮮 農 民 社 의 沿 革, 朝 鮮 農 民 6-4(1930.6), p.31. 49) 조선농민사 전선대표대회에서 체결된 법적관계 3개조는 韓 元 彬 外 6인의 명의로 제출되었다( 朝 鮮 農 民 社 第 三 回 全 鮮 代 表 大 會, 新 人 間 47(1930.5), pp.60-62). 50) 社 報, 農 民 1-1(1930.5), p.63. 중앙이사 金 秉 濬 鄭 應 琫 朴 達 成 金 道 賢 白 世 明 金 公 善 金 泳 煥 姜 禹 桂 淵 集 金 京 浩 金 秉 濟 夜 星 淑 姜 信 敎 金 洸 趙 鍾 浯 金 玉 斌 중앙이사장 朴 思 稷 (겸 조사출판부장) 부이사장 車 相 瓚 총비서 金 一 大 각부 부장 조사출판부장 朴 思 稷 서무부장 金 一 大 (겸 교양부장) 경리부장 李 智 鉉 (겸 선전조직부장) 알선부장 韓 元 彬 (겸 조사출판부원) 기율심사위원 李 團 (총 간사) 崔 光 模 趙 處 恒 金 履 國 吉 允 箕 후보 廉 碩 凡 고문 鄭 廣 朝 申 鏞 九 李 敦 化 51) 노영택, 천도교농민운동의 전개과정-조선농민사의 성격을 중심으로-, 수촌박영 석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서울: 탐구당, 1992), p.350.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103 농민교양운동으로 농민대중으로서 朝 鮮 文 未 解 者 가 없도록 하기 위하 여 농민사가 있는 곳마다 농민학원을 개설할 것, 郡 面 里 農 民 社 를 통하 여 농한기를 이용하여 농촌마다 농민강좌를 개최할 것, 농민 잡지는 월 간으로 발행하되 純 農 民 層 을 상대로 할 것, 사원에게 무료 배부할 팜 프레트 는 年 2차 이상을 발행하되 농민대중으로서 계통적 지식을 얻도 록 할 것, 농민지도자 참고용으로 단행본은 年 2책 이상 발행할 것, 농 민운동의 이론 또는 농사의 기술적 개발을 圖 키 위하여 단기농민대학을 개설할 것을 제시하였다. 둘째 농민당면이익획득을 위해 농민사 있는 곳마다 생산품 공동판매 및 수요품 공동구입을 장려하여 중간이익을 농 민이 취득케 할 것, 중앙 알선부 사업을 확장하여 각지 농민사 요구에 의한 取 引 에 限 하여는 이익을 圖 得 치 않고 취급할 것, 현하의 春 窮 中 에 빠진 궁농민의 참상을 조사하여 당면의 대응책을 강구할 것을 제시 하였다. 셋째 사세확장을 위해 천도교청년당 원조하에서 유지방침의 확 립 공고한 기초위에서 만반사업을 힘있게 실행할 것, 노동자와 연락을 취하야 근로 대중층의 세력을 확대케 할 것, 사원자격은 농촌 가호를 표 준으로 하여 가가호호마다 입사하도록 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52) 특히 두번째 복리증진책은 당면이익 을 획득해 가자는 것으로서 첫 째와 셋째의 방침을 매개해 주는 중요한 정책부문이었다. 이들이 당면 이익에 주된 관심을 갖은 이유는 농민들의 처해 있는 급격한 몰락상황 을 완화하여 현상유지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이런 과정을 통해 농민 사의 틀에 농민들을 조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53) 이에 따라 천도교에 52) 社 報 農 民 1-1(1930.5), p.62. 53) 근본적 문제의 해결이 아니면 해결을 얻을 수 없다고 하겠지! 그러나 단 하루 단 한 해일지라도 우리 농민대중의 생명을 연장하는 한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농 민대중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논과 밭은 지키고 조석으로 생활이 어려 운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놓게 하자.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농민과 접촉하게 되며 친밀하게 되어 우리 주의 테안으로 끌어 올리는 가장 바른 길이라 하겠다 ( 韓

10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서는 농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당면이익획득의 일환으로 共 生 組 合 運 動 을 전개하였다. 농민공생조합은 조선농민사원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농 민운동의 중심으로서 조선농민사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협동조합운동이란 의식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수 행되어야 조합의 본의를 나타낼 수 있으며, 그런 조선농민사의 사세확 장을 통해서 공생조합운동도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 다. 따라서 훈련받은 농민사원이 중심이 된 공생조합운동을 통해서, 첫 째 많은 일반민중과 접촉하여 자신들의 주의를 선전할 수 있고, 둘째 일 반민중에게 당면이익을 제공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사회의 전 망을 가지게 할 수 있고, 나아가 일반민중 자체로서도 사회경제를 운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54) 또한 공생조합은 단 지 조합원 상호간에 경제적 扶 助 만을 목적하지 않고 청년당이나 농민 사의 모든 일에 대하여 물질적 정신적으로 원조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천도교의 이념을 확산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그 위치를 설 정하였다. 55) 元 彬, 朝 鮮 農 民 當 面 의 急 務, 農 民 1-1, 1930.5, 9쪽). 그런데 이들은 모든 당면문제는 오직 토지문제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할 것이며 토지문제는 오직 당면 한 모든 과제를 해결하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라고 하여, 모든 당면적 과제와 토지문제를 결코 분리시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 고 하였다( 金 亨 俊, 朝 鮮 의 土 地 所 有 關 係, 農 民 4-2(1933.2), p.12). 54) 共 生 組 合 統 制 에 對 한 私 見 一 端, 黨 聲 16(1932.11), p.3. 한편 靑 年 黨 에서는 農 民 共 生 組 合 長 은 반드시 농민사 경제부장이 맡고, 전무는 농민사이사회에서 선 출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공생조합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55) 金 亨 傑 朴 新 德, 共 生 組 合 은 왜 하는가?, 新 人 間 58(1932.8), pp.28-29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105 2. 조선노동사의 창립 농민운동 단체를 가지게 된 청년당에서는 노동운동이 우리 조선에 있어 농민운동과 아울러 일종 중요한 사회운동 이라고 하여, 56) 자신들 의 주의 정책 밑에서 노동운동을 실시할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당시 이들은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사회가 성립될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동일한 시기에 발생된 것이 아니라, 금일의 자본주 의가 성립된 순서에 정비례하여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러한 노동운동이 처음 일어날 때는 그것이 무의식적 무계획적으로 단순 히 자본가 개개인의 착취에 대한 자연발생적 운동에 불과한 것이며, 이 러한 원시적 운동이 자본사회가 발전되면 될수록 그와 비례하여 의식적 계획적으로 발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자본문명이 그 자체안에서 성립되지 못하고, 자본주의적 제 관계가 英 米 佛 등에 비하 여 늦게야 발달한 후진국인 XX의 자본에 의하여 성립 된 조선의 현실 에서 노동운동은 그 역사가 더욱 짧기 때문에, 우선 노동대중의 조직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57) 그리고 이들을 훈련하는 데는 자신 들의 주의가 가장 적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청년당에서는 당시의 노 동문제를 자본주의 대량 기계생산제도의 산물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 고, 58) 우선 노동대중의 생활권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 노동문제 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주의인 事 人 如 天 의 정신 으로써 근본정신을 삼아야 한다 고 주장한 것이다. 59) 이에 따라 1931년 4월 4일에 열린 제1차 전당대표대회에서는 당 노 56) 鄭 應 琫, 勞 動 社 組 織 에 對 하야, 黨 聲 3(1931.6), p.7. 57) 金 亨 傑, 勞 動 運 動 이란 무엇이냐, 新 人 間 59(1932.9), pp.24-28. 58) 趙 鳳 昊, 勞 動 社 에 對 한 私 見 二 三, 黨 聲 6(1931.10), p.4. 59) 具 中 會, 勞 動 社 의 各 重 要 部 務 에 對 하야, 黨 聲 9(1932.2), p.4.

10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동부문 단체로 조선노동사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60) 전당대회의 결의에 따라 당본부에서는 5월 12일에 1노동대중의 현실적 불안에 대한 생활 권확보를 기함 2노동대중의 의식적 훈련을 기함 3노동대중의 공고한 단결로서 전적운동을 지지함 을 강령으로 한 조선노동사를 창립하였다. 창립대회에서는 규약을 통과하고, 중앙위원 姜 友 車 相 瓚 李 炳 憲 金 道 賢 具 中 會 金 起 田 朴 來 源 韓 元 彬 朴 漢 珪 趙 鳳 昊, 중앙감사 趙 鍾 浯 李 團 桂 淵 集, 중앙위원장 姜 禹 부위원장 具 中 會, 서무겸재무부장 朴 來 源 부원 李 炫 載, 교양부장 姜 禹, 조직부장 趙 鳳 昊 부원 朴 浣, 쟁의 부장 李 炳 憲, 경제부장 具 中 會 로 중앙간부를 선출하였다. 61) 그리고 조선노동사는 공장노동자, 해륙교통 및 운수노동자, 광산노동 자, 어업노동자, 자유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하기로 하였다. 또한 비록 육체노동자는 아니더라도 노동운동가라고 인정할 수 있는 자는 노동사 에 입사할 자격을 주었다. 62)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자신들이 인정하는 자 만이 노동사에 입사할 수 있다는 것으로 청년당의 주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펴거나 대립적 행동을 하는 자는 조선노동사에 참가할 수 없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노동사 본부에서는 사원이 20명 이상인 각 府 郡 에는 지방노동 사를 63), 지방노동사 밑에는 區 勞 動 社 (사원 5명 이상)를 조직하기로 하 였다. 그리고 각층 노동사에 상설기관으로 서무부 재무부 조직부 교양 60) 彙 報, 月 報 244(1931.4), pp.40-43. 조선노동사를 조직하기로 한 이 시기는 청 년당과 청년동맹이 靑 友 黨 으로 합동한 시기이다. 그러나 청우당 분열 이후 노동사 는 청년당 소속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청년당과 관련해서 설명하였다. 61) 5월 12일 京 城 에서 朝 鮮 勞 動 社 創 立, 黨 聲 3(1931.6), p.2. 62) 朝 鮮 勞 動 社 規 約, 黨 聲 4(1931.7), p.6. 63) 이에 따라 1931년 5월 28일에 陽 德 勞 動 社, 6월 2일에 平 壤 勞 動 社, 6월 24일에 京 城 勞 動 社 가 창립되었다( 各 地 에 勞 動 社 創 立, 黨 聲 4(1931.7), p.3). 그리고 이어서 1931년 말까지 安 州 孟 山 鎭 南 浦 元 山 下 碣 統 營 朔 州 淸 津 에 노동사 가 설립되었다( 勞 動 社 消 息, 黨 聲 9(1932.2), p.5).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107 부 경제부 쟁의부를 두고, 각각 그 부에 상당하는 사무를 맡기기로 하였 다. 64) 이후 노동사에서는 1932년 4월 4일에 제1차 대표대회를 열어 1 당면이익 옹호운동을 통하여 사세를 확장할 것 2 공생조합 및 상조부 를 설치할 것 3 노동사를 조직할 만한 곳을 선정하여 노동사를 조직할 것 4 각 지방노동사는 사원을 2배 이상 늘릴 것 5 각 지방노동사는 주선단을 두어 실업자의 직업을 주선할 것 6 지방순회를 실시할 것 등 을 결의하여, 노동사의 사세를 확장하려고 노력하였다. 65) 그러나 조선노동사는 자신들이 스스로 평가했듯이, 조선의 특수적 정세와 공장의 집단노동자가 적은 관계, 노동자의 생활의식이 향상되지 못한 관계, 敎 黨 이 농촌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점 등으로 인해, 다 른 부문운동에 비해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못하였다. 66) 3. 천도교청년회의 갱신 청년당에서는 농민 노동운동은 물론 청년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 였다. 청년당의 청년운동단체는 1926년에 평양에서 조직된 四 月 會 에 서 유래한다. 이후 사월회는 1928년 4월 4일에 경성에서 제1차 연합회 를 열어 천도교사월회연합회로 조직을 변경하였으며, 67) 1930년 12월 제 3차 연합대회에서 명칭을 천도교청년회로 변경하였다. 68) 그러나 청년당 의 청년부문단체의 활동은 그다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청년당 창립 초기부터 당에서 직접 청년운동의 대부분을 해결해 왔기 때문이다. 64) 鄭 應 琫, 勞 動 社 組 織 에 對 하야, 黨 聲 3(1931.6), p.7. 65) 朝 鮮 勞 動 社 第 一 次 代 表 大 會 經 過, 黨 聲 11(1932.5), p.2. 66) 趙 基 栞, 天 道 敎 靑 年 黨 小 史 (1935), p.54. 67) 天 道 敎 四 月 會 聯 合 大 會 會 錄, 新 人 間 23(1928.4), pp.72-73. 68) 彙 報, 月 報 244(1931.4), pp.40-43.

10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그런데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청년당 내에서는 全 的 運 動 과 部 門 運 動 의 법적관계 등에 관련된 이론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당 자체는 전 부문운동을 총괄 집중하며 全 的 機 關 을 운영하는 데 최대의 역할이 있 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69) 이에 따라 당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청년운동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청년당에 서는 청년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1932년 8월 15일에 열린 청년회 임 시대회에서 1 청년대중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기함 2 청년대중의 수운 주의적 교양훈련을 기함 3 청년대중의 공고한 단결로서 전적운동을 지 지함 을 천도교청년회의 새로운 강령으로 정하고 조직을 갱신하였다. 70) 청년회의 기본조직을 기존의 군단위에서 촌락단위로 변경하고, 이들 촌락단위 청년회가 3개 이상 만들어지면 천도교 군 청년연합회 라 는 명칭으로 군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또한 천도교인 청년만을 입회시키던 방침을 바꿔 청년이라면 누구나 입회할 수 있도록 하였다. 71) 그리고 이를 위해 촌락청년회의 명칭을 농촌청년회 또는 그 지방명을 붙인 청년회 등 임의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72) 이는 청년당에서 기존에 그 구성원이 천도교인이었던 점에서 단순히 천도교적 교양훈련을 하는 저수지 역할 또는 진정한 천도교인 청우당원을 만들어 내는 기관 73) 이 69) 白 世 哲, 靑 年 運 動 의 諸 問 題, 東 學 之 光 (1930.10), pp.12-18. 70) 組 織 의 一 般 化 새 政 策 의 樹 立 靑 年 運 動 의 一 大 躍 進, 黨 聲 임시호(1932.9), p.2. 71) 이들이 말하는 청년은 17세부터 30세까지를 의미한다( 天 道 敎 靑 年 會 는 엇더한 것인가, 黨 聲 16(1932.11), p.5). 72) 組 織 의 一 般 化 새 政 策 의 樹 立 靑 年 運 動 의 一 大 躍 進, 黨 聲 임시호(1932.9), p.2. 73) 朴 德 曉, 靑 年 運 動 에 對 하야, 新 人 間 59(1932.9), pp.24-29. 그리고 조직이 변 경된 이후의 靑 年 會 는 1 광범한 미조직 청년 전체를 청년운동에 동원시키는 청 년의 대중적 집단으로써 청년의 특수적 요구와 아울러 농민사와 노동사운동과 밀 접한 연락 밑에서 운동하는 기관의 역할을 가질 것 2 광범한 청년을 이와 같이 운동에 동원시키며 조직에 참가시키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원되고 참가된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109 었던 청년회의 조직을 변경해 각지에 산재한 다른 청년단체들을 자신들 의 청년운동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추진한 것이었다. 이처럼 천도교세력은 청년당을 통해 기존의 부문운동 단체를 재정비 하는 한편, 새로운 부문운동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주의 목적을 교 양 훈련하는 가운데, 이들 각 부문의 일반 민중을 자신들의 세력하에 두려고 하였다. 이는 그들 스스로 부문운동 단체를 통해 1 黨 의 정신 과 강령 정책 표어 결의 등을 선전하여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항상 黨 의 존재와 氣 勢, 당과 자기생활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게 하고 2 미조직 민중을 조직하고, 기성단체를 지도함으로써 널리 당적 실세를 부식하고 3 문자계몽과 사상계몽에 주력하여 민중의 기초 적 각성을 촉진시키고 4 민중의 사회 경제적 일반생활상의 당면이익 을 획득 하려고 했다는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74) 그런데 천도교세력은 각각의 부문운동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각각의 개별적인 부문운동은 청년당의 지도 통제 하에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다만 자신들이 다른 부분운동보다 특히 농 민운동에 주력한 것은 당시 조선의 현실이 自 來 로 농업국인 점, 농민이 다대수인 점, 산업별에 있어 역시 농산물이 대부분인 점 등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서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 다른 부문운동보다는 훨씬 중요한 청년을 당원으로 훈련 교양시키는 기관의 역할을 가지는 것이다(이것은 과거의 청 년회도 가지고 있던 역할이다). 3 이러한 것을 실천하는 데서 우리 主 義 의 반대 되는 一 切 의 청년단체를 粉 X하는 역할을 가진다는 것이다. 4 이상의 역할과 아 울러서 旣 成 敎 養 의 浸 息 을 撤 去 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5 그 외에 특히 농 촌에 많이 남아있어 가지고 청년들을 누르고 있는 봉건적 도덕 윤리를 배격하여 신도덕 신윤리를 건설하려는 역할, 청년이라 해서 특히 눌림을 받는 것을 배제하려 는 역할 등을 가져야 한다. 고 하였다. 74) 趙 基 栞, 天 道 敎 靑 年 黨 小 史 (1935), p.43.

11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2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어느 一 派 처럼 조선에서 농업 문제만 해결되면 조선 전체문제를 해결하는 셈이라든가, 농민이 조선의 모든 영도권을 가져야겟다든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농민을 노동 자의 한 종속으로 이용해서 계급문제를 해결하겠다 는 주장은 아니라고 하였다. 75) 이처럼 천도교세력은 부문운동 단체를 정비하면서 일반민중을 자신들 의 지도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으며, 그를 통해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부문운동단체와 당조직을 통한 지지기반의 확대를 도모하는 가운데 당시 朝 鮮 運 動 의 領 導 權 76) 이 자신들에게 있다고까지 주장하면서 다른 제 사회세력과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Ⅴ. 맺음말 1930년대 초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조선에서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 쟁은 한층 치열해지고 운동계 사상계는 민족개량주의가 주도하는 계몽 운동과 사회주의가 주도하는 계급주의적 대중운동의 경향으로 대별되었 다. 천도교 신파는 1930년 자치운동의 정치적 계기가 상실되고 사회주 의세력이 정치투쟁의 일환으로서 반종교운동을 시작하자 자신들의 전열 75) 白 世 明, 朝 鮮 農 民 運 動 의 特 質, 農 民 3-10(1932.11), p.10. 백세명의 주장을 보면, 조선농민사가 분열할 때 청년당과 이성환의 다툼은 농업문제에 대한 인식 혹 은 해결 방안 등 농민운동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운동조직론 때문인 듯하다. 청년 당은 농민운동을 하나의 부문운동 간주하고 각 부문운동을 청년당에서 총괄 조정 하고 지휘하려고 한 반면 이성환은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농민운동에만 전력을 투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76) 趙 基 栞, 朝 鮮 運 動 과 領 導 問 題, 新 人 間 59(1932.9), pp.4-7.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111 을 가다듬기 위한 방편으로 신 구파 합동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합동 한지 1년이 조금 지난 1932년 4월에 다시 분열하였다. 신 구파 분열 이후 천도교 구파가 교단 내적인 종교 활동에 치중하 였던 반면에, 천도교 신파는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여전히 당시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부문운동 확대가 그 방 안으로 선택되어 농민운동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 다. 천도교 신파세력은 당시 농민ㆍ노동운동의 임무는 농민ㆍ노동자를 조직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파악하였고, 사회운동의 단계를 계급운동의 단계가 아니라 각계 각층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단계로 설정 하였다. 그리고 이 각계 각층의 운동을 포괄해서 하나로 이끌 수 있는 민족적 구심 으로서의 단일전위당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주의와 정책 전술이 다른 세력들이 결합한 민족협동전선에 의한 민족단일당 이 아니었다. 천도교 신파세력이 주장한 전위당은 천도교청년당이었다. 사회주의나 민족주의세력은 특정한 이념과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천도교는 기존의 모든 종교와 이념을 포괄하는 유일하는 존재로서 자처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도교 신파세력은 청년당의 하부조직 으로서 각 부문단체를 조직하여 이들을 관리 통제하려고 하였다. 조선 농민사의 직속기관화, 조선노동사의 창립, 천도교청년회의 갱신 등은 그 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천도교 신파세력은 사회주의자들의 천도교 공격에 맞서 대응하며, 청 년당의 부문운동을 비롯한 사회활동과 중앙집중화된 조직체계의 강화를 바탕으로 조선운동의 영도권 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자들과 물리적인 충동까지 빚는 가운데 이를 이용해 자신들 내부 조직과 이념 을 한층 공고히 하는 계기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주제어 : 천도교, 천도교청년당, 조선농민사, 조선노동사, 천도교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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