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873/tkl.2015. 70. 333> 한국문학논총 제70집(2015. 8) 333~360쪽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 명랑한 밤길, 영란, 꽃같은 시절 을 중심으로 * 1)이 희 원 ** 1. 들어가며 - 장소의 인간 차 2. 주거지와 소유지 사이의 집/사람 3. 취약함의 나눔으로서의 장소 증여 례 4. 장소 소속감과 미의식의 가능성 5. 나가며 국문초록 근대 이후 세계는 합리적 개인 주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그 과정 에서 장소 는 근대 이성에 의해 조작 관리되는 부수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실상 인간은 장소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고 안정감을 형성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비로소 외부로 나아갈 수 있는 존 재이다. 따라서 장소와 인간은 긴밀한 상호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맥락은 장소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신체에 관한 문제로도 확장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많은 폭력 * 이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 아 연구되었음(NRF-2007-361-AL0001) **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국문과 박사생 연구원
334 한국문학논총 제70집 적 문제들은 합리적 개인 주체를 이와 같은 열린 구조를 통해 재규정함 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선옥의 최근작들 명랑한 밤길, 영란, 꽃같은 시절 에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구체화되고 있다. 공선옥은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신체로 장소를 살아가기에 자신의 주변과 끊임없이 영향관계를 주고받 는 섬세한 존재로 인간을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근본적으로 취 약한 존재로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며 버틀러가 말하는 근본적 사회성 을 품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을 돌보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 지는 방식을 통해야만 인간을 받아들일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공선옥 소설은 이와 같은 인간 이해를 토대 로 자신과 자기 주변을 둘러싼 존재들 간의 취약함을 직시하고, 그것에 공감하는 행위를 통해 장소를 나누는 인물들을 형상화해 보이고 있다. 가진 자들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세상에서, 헐벗 은 이가 내미는 요청에 대해 취약한 존재 그 자체로 응답하면서 만들어 내는 공동체가 공선옥이 형상화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들이 만들어가는 자생적 미의식은 세상의 서열적 위계적 가치체계를 타파하고 새로운 공공성을 만들어간다. 이러한 공동체의 가능성은 가족주의를 넘어서고 지역이기주의와도 다 른 관계 형성의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이것이 매체의 발달과 신자유주의 논리에 의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 삶의 양식들 속에서 인간 의 자유와 평등을 관철할 수 있는 가치의 근간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으로 응집된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연대와 아래로부 터의 정치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공선옥, 장소, 취약함, 명랑한 밤길, 영란, 꽃같은 시절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35 1. 들어가며 - 장소의 인간 근대 이래 인간은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이성 논리를 발전과 진보 의 이름으로 숭상하고 이러한 관점으로 세상을 구획지어 왔다. 이 과정 에서 발전이나 진보와 무관해 보이는 것들, 합리적 이성 논리에 따라 관 리 조작되어야 한다고 상정되는 것들, 근대적 규율로는 통제가 잘 되지 않은 상태의 것들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이에 따라 시간 과 공간,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 정신과 신체, 개인과 공동체 등이 이분화되어, 전자는 근대적이며 긍정적인 것이 되고, 후자는 전근대적 부정적인 것으로 억압되었다. 1) 그러나 이 후자의 것들은 엄연히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작동하면 서 전자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장소 나 공동체, 신체 등 근대적 담론 장에서 외면되어 온 것들은 근대의 폭력성을 폭로 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오늘날 장소론과 공동체론, 신체론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과 연결된다. 이 논의들은 근대의 합리적 개인 즉 코기토 논리에서 눈을 돌려,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근본에 서부터 일신하기 위한 가능성의 장이 된다. 장소 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한다. 어떤 일이 벌어 지고 이루어지는 곳 으로서의 장소는 근대적 진보 논리의 결과물들을 실 현시켜 부려놓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인식되어, 장소 자체에서 형성되는 1)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몇몇 논자들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마르쿠스 슈뢰르는 공간, 장소, 경계 에서 근대 이후 공간 에 대한 논의가 사회학에서 활성화되지 못하고, 시간 관념이 진보적 개념들과 연동하여 많은 논의들을 낳고 있음을 지 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근대적 특성임을 설명해주고 있다.(마르쿠스 슈뢰 르, 정인모 배정희 옮김, 공간, 장소, 경계, 에코리브르, 2010, 20-11쪽) 나카무 라 유지로의 경우에는 토포스 에서 코기토 논리에 의해 숨겨진 존재의 근거로 서의 공동체, 무의식, 그리고 신체를 발견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 근대적 주체가 어떠한 사상적 이분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나카 무라 유지로, 박은철 옮김, 토포스-장소의 철학, 그린비, 2012, 82-90쪽)
336 한국문학논총 제70집 생성의 역량은 셈해지지 않았던 면이 많다. 이 과정에서 구체적 장소와 인간 간의 유대는 점점 파괴되고 무의미화 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소는 인간의 경험과 실천의 동기가 발생하는 근거이자 그것이 구체화 하는 지점이며 그 속에서 인간 의식이 형성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 드워드 랠프는 인간의 모든 의식이나 행위, 경험, 의도의 중심에 장소 가 위치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또는 특히 감동적 인 경험을 가졌던 장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장소를 의식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가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안정감의 근원이자, 우리가 세계 속에서 우리자신을 외부로 지향시키는 출발점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여기서 보듯 인간은 자신이 위치한 장소에서, 그 장소를 구성하는 많 은 요소들과의 관련 속에서 어떤 것을 감각하고 받아들이면서 자기 정 체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자기의 바깥을 상정 하고 외부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개인의식의 형성이 장소와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강력한 상호 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 미한다. 이에 대한 자각 없이 근대적 이성이 제시하는 합리에 따라 수치 와 통계의 추상적 논리로 장소를 관리 조작하는 것은 인간 삶을 구체 적 현실과 타인으로부터는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단절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장소 이해 방식을 토대로 한 인간 이해의 지점은, 인간이 개별 체로서 완결된 이성적 존재가 아님을 인식하는 점과 연결된다. 내적 완 결성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근대적 개인의 상( 像 )은 외 부로 열려있는 인간의 존재조건들을 외면하고 세계를 자기목적에 복속 2)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옮김,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104쪽.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37 시켜 이해하는 자기 동일적 유아적 인간 이해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 다. 이는 개인의 약한 면모는 물론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고 파괴하는 일 에 대한 사람들의 성찰을 마비시킨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주디스 버틀 러의 논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버틀러는 폭력이 만연하는 이 시대 흐름을 비판하며 인간이 기본적으로 취약한 신체를 가진 존재임에 주목 한다. 그리고 신체는 항상 다른 이들의 시선에 노출되고 접촉이 가능하 며 모든 가능성들에 영향 받을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가지기에 항상 공 적인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3) 이 취약성은 한 인간이, 자신이 놓인 장소 의 온갖 구성요소에 대해 열린 존재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랠프의 장소에 대한 관점과 연결될 수 있다. 장소가 강조될 때 기본적으 로 취약한 존재인 인간의 의미 역시 부각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확장된 몸 4) 으로서 장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와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가 없을 때 인간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구성하는 온갖 요소들과의 영향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주변을 수단화하거 나 무시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 적 사태와 재난, 사건과 사고들을 들여다보면 기본적으로 장소의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인간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신 자유주의와 이기적 개인주의 논리의 확산은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그 렇기에 인간에 대해 구체적 장소를 바탕으로 상상하고 그 속에서 끊임 없이 외부와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 면모에 대한 입장을 유지 심화시켜 가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지점에서 유의미한 성찰을 보여주는 작가로 공선옥을 들 수 있다. 공선옥은 1991년 창작과 비평 에 씨앗불 을 발표한 이래 5 18 작가 라고 불릴 만큼 광주항쟁의 기억을 끊임없이 서사화하는 작가이다. 이 작가에게 있어 5 18 은 폭력적 권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시 3)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불확실한 삶, 경성대학교출판부, 2008, 54쪽. 4) 신지은, 사회성의 공간적 상상력: 신체-공간론을 통해 본 공간적 실천, 한국사 회학 제46집 5호, 한국사회학회, 2012, 345쪽.
338 한국문학논총 제70집 나리오로서, 그러한 사태를 일으키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비판의 근거가 되는 사건이다. 그녀가 가부장제와 모성성, 생태주의, 돌봄 공동 체 등을 풀어내는 방식은 이와 같은 폭력적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 하게 작동한 결과물들로서, 이는 많은 논자들이 찬성하고 있는 공선옥 작품의 급진성이다. 5) 일군에서는 사회적 마이너리티들을 바라보는 공선 옥의 입장이 본질주의적인 면이 있고, 고발문학에 그치면서 사회 구조적 인 면을 부각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한다. 6) 그리고 가부장제 의 비판 근거로 모성을 가지고 왔지만 그것이 오히려 가부장제를 승인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7) 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들 은 공선옥의 인물들이 현실적 대책 없이 맹목적으로 모성을 선택하는 여자들인 경우가 많고, 눈물과 동점심이 많으며, 감정에 휘둘려 흘러가 는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지점과 연결된다. 그러나 일견 이성이나 논리를 떠난 것처럼 행동하는 공선옥 작품 속 나약한 인물들의 모습은 인간이 그 시작에서부터 고립된 개체로서는 감 당할 수 없는 외부적 상황들과 깊은 연관 속에 놓여 있는 장소적 존재라 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성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근대 주체 의 한계와 그 한계가 만들어낸 사회적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 장소와 인 간의 의미를 재구축하고자 하는 작가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특히 최근작 5) 한기욱, 우리 시대의 사랑 성 환경 이야기, 창작과비평 26(1), 창비, 2003; 백지연, 페넬로페의 복화술, 창작과비평 30(1), 창비, 2002. 3; 타자의 인식과 공공성의 성찰, 창작과비평 37(4), 창비, 2009. 12; 황도경, 세 개의 불, 두 개의 알리바이-공선옥론, 실천문학 57(1), 실천문학사, 2002. ; 윤경순, 공선옥 소설 에 나타난 일탈적 인물 연구,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김양선, 근대 여성작가의 지식/지성 생산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 여성문학연 구 24호, 한국여성문학학회, 2010. 6) 임규찬, 공선옥 문학은 어느만큼 와 있는가, 창작과비평 32(2), 창비, 2004. 6; 이명원, 야성적 생명력과 인간생태학의 너머-공선옥의 명랑한 밤길 에 대하여, 문화과학 53, 문화과학사, 2008. 3. 7) 이덕화, 공선옥론: 자매애적 유대를 통한 사랑의 실현, 여성문학연구 1, 한국 여성문학학회, 1999.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39 에 이르러 공선옥은 작품에서 눈물과 동정심에 호소하거나 특정 경험을 부각시키는 면을 극복하고 있다. 대신 한 장소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 면서 의미있는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하여 인간 이해의 보편 성을 확보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늘날 사람 들 간의 연대와 사회적 책임의식에 대해 질문하는 쪽으로 소설의 문제 의식은 향하고 있다. 이는 사회에서 배제되는 방식으로 포함되어 있는 헐벗은 존재 8) 로서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옹호와 이들을 향한 구조적 폭력을 비판하는 것과 연동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공 선옥의 최근작인 단편집 명랑한 밤길 의 몇몇 단편들, 장편 영란 과 꽃 같은 시절 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주거지와 소유지 사이의 집/사람 공선옥이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떠안고 있는 얼마만큼의 삶의 고뇌 속에서도 평범한 하루하루 의 일상에 충실하고자 하는 선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우연한 사 고나 천재지변 혹은 폭압적 권력에 의해 급작스럽게 소중한 존재들을 상실하고 평온했던 삶의 자리에서 내쫓기는 사태에 직면한다. 불시에 삶 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이 당면한 상황은, 헐벗은 채 자신의 고유한 장 소로서의 집 에서 추방당하는 사태로 그려지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가을 의 인자 와 석준 부부는 강원도 인제의 한 횟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폭우가 몰아치 8) 이러한 존재들에 대해서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 지칭한 바 있다. 호모 사케르란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 (조르지오 아감벤, 박진우 옮김, 호모 사케르, 새물결, 2008, 45쪽)을 뜻하는 말로, 아감벤은 이와 같이 완전히 사회적으로 그 가치가 배제되는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정치적 주권의 개념이 성 립되는 과정을 밝히면서 그 허위성을 비판한다.
340 한국문학논총 제70집 고 석준이 허망하게 죽는다. 그래서 인자는 갈 곳도 가진 것도 없이 아 기와 함께 거리에 나앉게 된다. 수해로 자기 소유의 집을 잃은 사람의 경우에는 국가로부터 재난 지원금이 주어진다. 봉사단체 사람들의 활기 찬 마을 복구 작업도 집을 가진 사람들의 피해에 한정될 뿐이다. 인자 가족이 살던 장소의 의미는 집 소유주 중심으로 계산될 뿐, 그곳에서 거 주하던 인자네가 삶을 만들어오던 곳을 불시에 잃었다는 지점에 대해서 는 아무런 성찰이 없다. 집을 소유하지 못한 인자와 아기에게는 물난리 를 맞아 문이 떨어지고 유리조각이 널브러져 있으며 쥐, 바퀴벌레, 귀뚜 라미가 날뛰는 버려진 민박집 밖에 있을 곳이 없다. 인자는 반쯤 부서져나간 빈 민박집에서 하루에 열 번 이상씩 그렇게 몸을 말았다. 말고 말고 또 말았다. 몸을 말고 가만히 있으면 방안에 길 게 자동차 불빛이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중략) 사람들은 지난여름 따 위 까맣게 잊어버렸는지도 몰랐다. 아기가 잠들면 인자는 밖으로 나가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들에 대고 악을 썼다. 내가, 내가, 내가, 여기, 있어요오, 여기 내가 있단 말이에요오. 으음, 그리고오, 좆같아요오. 9) 인용문은 인자가 버려진 민박집에 있는 모습이다. 장소에 대한 구체적 감각을 무시한 채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버리는 자동차는, 그녀가 어찌되 든 상관없이 그녀를 두고 가버린 횟집 주인 부부이기도 하고 기쁜 얼굴 로 봉사활동을 하고는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이기도 하며 수해로 집 잃은 사람의 슬픔을 스펙타클한 사진으로 남기려고 애를 쓰다 가버리는 방송국 기자를 은유하기도 한다. 인자는 분명히 거기 있지만 사회적으로 는 완벽하리만치 외면된다. 집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 정체성의 9) 공선옥, 아무도 모르는 가을, 명랑한 밤길, 2007, 창비, 96쪽.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41 토대, 즉 존재의 거주 장소dwelling-place of being이다. 집은 단순히 당 신이 어쩌다 우연히 살게 된 가옥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 거나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인 것이다. 10) 이처럼 집이라는 장소는 사람의 모든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이자 인 간 실존의 중심적 근거점으로서 대체 불가한 거주 의 장소이다. 즉 집은 사람들이 삶을 일구는 최초이자 기본이 되는 관계가 펼쳐지는 장소이기 에 한 개인의 정체성이 안정적으로 형성되는 근원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 사람이 지향하는 삶이 일구어낸 가장 구체적인 결과이자 목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집이 파괴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 는 근거를 잃는 것이고, 지켜내고 도달하고자 하는 꿈의 결정체로서의 장소를 상실한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 이 오직 경제적 논리로밖에 셈해지지 않는 사태는 삶의 의미에 대해 생 각하지 않은 채로 인간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란 은 집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삶의 역동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이 서사 전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 의 집은 어릴 때부터 살던 마당 넓은 곳으로, 부모 형제와 아름다운 추억은 물론 결혼하고 이룬 가족들과의 단란한 삶이 오롯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후 이 집은 행복했던 만큼 의 고통으로 그녀를 압박한다. 게다가 집의 원래 소유주인 이복 오빠는 살기가 힘들어 집을 팔기로 했다며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는 묻지 않은 채 이제 집에서 나가달라고 한다. 이제 내게 집을 주는 사람도, 밥을 주는 사람도, 내가 먹고 살아갈 돈 의 여부를 묻는 사람도, 내게 밥을 달라는 사람도, 내 기분이 어떤지, 몸 상태가 어떤지 묻는 사람도, 그 어떤 사람도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문 10) 에드워드 랠프, 앞의 책, 97쪽.
342 한국문학논총 제70집 의 텅, 소리가 알리고 있었다. 닫힌 대문 안쪽에서 음흉하게 일고 있는 서늘한 바람이 어떤 바람인지를 내가 몰라서, 오빠아, 하고 불러봤던 것 은 아니다. (중략)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움직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11) 인용문은 이제 그녀의 집이 더 이상 거주지가 되지 못하는 점을 인상 적으로 보여준다. 집에서 실제로 오랜 세월을 산 사람은 그녀였지만 집 의 소유주는 이복 오빠였기에, 집에서 나가라는 오빠의 말에 그녀가 저 항할 말은 없다. 집에서 함께 살며 집을 거주의 장소로 만들어주었던 가 족들도 없어졌다. 거주의 의미를 잃은 집을 그녀는 미련없이 나온다. 이 후로 보여주는 그녀의 방랑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근거점을 잃은 자가 곧 거주의 장소를 잃은 자라는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꽃같은 시절 에서는 진평리라는 시골마을에서 마을 주민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순양석재를 상대로 데모를 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원래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던 진평리는 불법으로 가동되는 순양석재에서 뿜 어져 나오는 돌가루에 휩싸여 농사를 지을 수도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마 을이 되는 사태에 직면한다. 구청이나 경찰서는 순양석재와 담합하여 마 을 주민들의 삶은 무시한 채 오직 공장을 가동시킬 궁리에 여념이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은 자기 삶의 역사와 추억이 서린 근거 지로서의 집과 마을을 지키고자 데모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서도 이들이 자신들의 삶의 근거지를 지키고자 하 는 의지는 이해받지 못한다. 엄마, 어차피 우리 집값이 얼마나 하겠어. 나 같으면 공장 들어와, 도 로 놔져, 발전하면 땅값 올라가, 그러면 집 팔아서 그 돈으로 도시에서 편안히 살겄네. 그러니까, 데모하지 말라고요. (중략) 아무리 고향 떠난 지 오래라 하더라도 정말 그 아이들은 자기들이 나 고 자란 이곳을 잊어버린 것일까. 저희들이 물장구치고 놀던 냇물이 돌 11) 공선옥, 영란, 문학에디션 뿔, 2009, 11쪽.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43 가루로 썩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택배로 보내주면 역시 엄마가 만들어준 간장 된장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한 그 간장 된장 만드는 콩밭이 돌가루로 망가져도 괜찮다는 것일까. 그래서는 냇물이 썩고 콩 밭이 망가져도 막내딸 말대로 땅값이 올라가기만 하면 좋다는 것일 까. 12) 인용문 앞부분은 할머니 김공님 의 막내딸 이 하는 말이다. 막내딸의 입장은 돈의 논리로밖에 장소의 의미를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삶을 구 성하는 거주지로서의 마을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인용문 뒷부분 공님의 말에서 보듯 이 딸의 삶에도 고향의 것은 깊이 연루되어 있다. 다만 딸은 그것을 모르거나 외면할 뿐이다. 한 장소에 정체성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그 집, 그 장소 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의 의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장소에 연루된 인간의 삶은 어느 때라도 취약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고 그 속에서 장 소로부터의 뿌리 뽑힐 수도 있고 장소의 변형에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집 과 마을 등의 장소를 잃는 것은 인간을 삶으로부터 후 퇴시키는 가혹한 폭력임에는 분명하다. 한 인간이 뿌리내린 장소의 가치 자체를 도외시하고 제대로 된 성찰 없이 파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 해가 근본에서부터 잘못된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작에서 공선옥은 삶의 거주지로서의 장소로서의 집이나 마을을 중요하게 형상화하고, 인간 삶이 그가 뿌리내리고 있는 장소의 온갖 요소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놓여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을 장소로부터 이탈시키는 논리에 대한 성찰이 없는 오늘날 소유 관념이나 자본 논리, 권력자들의 횡포는 장소에 정체성의 뿌리를 두는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취약함을 돌보지 않는 행위임을 비판적으로 형 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삶의 준거점을 잃거 나 잃을 위기에 처한 자들의 절망을 보여주면서 장소와 인간의 관계가 12) 공선옥, 꽃 같은 시절, 창비, 2011, 112쪽.
344 한국문학논총 제70집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문제의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어 떻게 가능할 것인가. 3. 취약함의 나눔으로서의 장소 증여 앞서 보았듯 공선옥의 인물들이 존재의 뿌리를 내린 거주지로서의 집 을 잃고 정처없이 떠돌거나 그러한 위기에 처하는 모습은 인간의 정체 성과 장소의 맥락이 가진 긴밀함을 보여준다. 외부로 노출될 수밖에 없 고 외부와의 영향 관계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게 되는 존재이기에 인간 은 삶을 자기 뜻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따라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존의 장소적 맥락에서 이탈하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 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방황은 집을 잃은 자의 고통 이 드러나는 것이면서 동시에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소외에서 벗어나 구조의 가능성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버틀러의 관점 에서 볼 때 이들의 이러한 취약한 신체와 혼란스러운 행위는 이들의 존 재 자체가 호소하는 권리이자 의무로서의 근본적인 사회성 13) 이다. 즉 이러한 호소는 삶의 영역 어디에서든 울려나올 수 있는 나의 목소리이 자 타자의 목소리이며,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이든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수밖에 없는 요소인 것이다. 공선옥은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이 인물들과 공명하는 또 다른 취약한 타인들을 호출하고, 이들에 의해 13) 사실로서의 나의 자율성을 반박하지는 않지만, 육화된 삶의 근본적인 사회성 에 호소함으로써 나의 자율성의 요청을 제한한다. 그 방식을 통해 우리는 처음 부터, 그리고 신체적 존재라는 점 덕분에, 이미 우리 너머 우리의 삶이 아닌 다 른 삶에 이양되어 연루된다.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57쪽. 장소와 신체가 한 개인 존재를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들과 연루시키고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유사 한 점을 가지고 있다 할 때, 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공공성이자 사 회성을 근거짓는 토대가 된다.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45 고통당하는 자들이 공감과 애도의 장소를 다시 가지게 되는 모습을 형 상화한다. 영란 에서 삶의 전부였던 가족을 잃고 목포에까지 이른 여자 나 는 영란여관 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여관 사람들 덕분에 목숨을 구한 그녀 는 돌아갈 집도 없고 목포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퇴원 후 다시 영란여관으로 간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채소를 다듬 고 있는 주인 할머니 옆에 앉아 할머니처럼 노래를 흥얼거리며 채소를 다듬는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다 부르고 나서도 가슴이 꽉 막혀서 나는 한동 안 숨을 쉬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할머니가 내 등을 투닥거렸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물었다. 갈 데는 있어? / 없어요. / 나도 소근거렸다. / 그럼 여그서 그냥 우 리랑 살자. 할머니가 조금 전보다 더 은밀하게 속삭였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다. 그냥, 눈물이 핑글 돌았다. / 좋아요. / 이름이 뭐여? / 나는 이름을 말하 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가 말했다. / 누가 물으면 인자부터 영란이라고 해불제 뭘. / 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씨익 웃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남은 파를 마저 다듬기 시작했다. 14) 완벽하게 외부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었던 그 자리에 서 여관 주인 할머니 덕분에 새로운 거처와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할머 니는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얼마나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식 없이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그냥 여자를 받아들 인다. 할머니가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젊은 시절 임자도 간첩단 사건으로 허망하게 남편을 잃은 상실의 기억이 만든 회한으로 영란의 고통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영 란여관을 오가는 목포 사람들 중에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한창이던 시절 14) 공선옥, 앞의 책, 2009, 61쪽.
346 한국문학논총 제70집 고문을 받다가 살기 위해 친구를 거짓 고발 한 죄책감에 평생을 혼자 살 아가는 노인도 있다. 불륜으로 가족에게 큰 상처를 준 변명의 여지가 없 는 자신을 못 참아 하는 소설가도 와 있고,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한 그 리움과 술만 마시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학교도 가지 않는 조숙한 소녀도 있다. 이들은 각자가 가진 삶의 무게만큼 타인의 삶의 무게를 이 해하고 애도하며 상처받은 자가 고통을 이유하고 자신의 길을 가도록 지지해준다. 그 모습이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더라도 말이다. 상실에 빠진 인간에 대한 공감과 애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취약한 누 군가가 손을 뻗어 구조를 요청해왔을 때 그것에 응답하는 것은 또 다른 취약한 존재로서의 내 존재가 훼손될 가능성을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의미로, 모든 사람이 다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구조 요청에 응답한 내가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이 그리 많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구조 요청을 받아들이고서 감당해야 할 일은 의외로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여관 주인 할머니가 여자를 영란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영란에게 너무 나 절실한 구조의 손길이면서 동시에 이다지도 수월해 보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고 살아갈 힘을 주었지만 그것을 손익관계로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의 덕분에 내 가 살았다 하더라도, 또는 내가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그렇게 함께 있으면서 각자 몫의 삶을 살아 내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평등하고, 상대방은 내 몸을 구성하 고 내 집을 존재하게 하면서 동시에 나는 상대방을 그런 식으로 구성하 는 것이다. 이에 취약함은 단지 약함이 아니라 취약함을 감당하고 넘어설 수 있 는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주는 힘이 된다. 영란여관은 이제 영란이 된 그 녀가 마음껏 아파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고, 덕분에 영란은 타인과 자신 의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삶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영란은 영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47 란여관이라는 장소에서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감 각, 즉 삶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희는 언제 우는가 의 나 는 친구 영희 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희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나 는 우연히 영희 남편의 친구와 동행하는데, 젊은 시절의 한 장면을 함께 했던 그 남자를 보며 더 이상은 가 닿을 수 없는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그만큼 의 상실감을 느낀다. 그가 장례식장에서 떠나려 할 때 나 는 그를 간절 히 붙잡고 싶다. 안돼, 영희야. 그 사람 보내지 마. 나, 그 사람 없으면 안돼. 난 그 사람 같 은 사람이 있어야 해. 영희야, 그 사람 보내버리면 나는 어떡하니. 나는 운다. 기가 막혀 운다. 무엇이 기막힌가. 웃기는 내 감정이 기막히다 고 하기가 싫다. 그래서 그냥 운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서럽게. 울면서 나는 내 울음의 이유를 부지런히 찾는다.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중략) 다 갔니? / 다 갔어. / 너는 언제 울래? / 나? 지금부터. 영희가 친친 감기는 소복을 활락활락 벗어젖힌다. 힘차게 벗어젖힌다. 방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드디어 영희가 울기 시작한다. 제 아이들을 굽어보 며 발을 쭉 뻗고 울어젖히기 시작한다. 15) 인용문에서 보듯 이 작품에는 나 가 과거의 남자를 보며 떠올리는 상 실감과 영희가 남편을 잃은 상실감이 병치된다. 종류는 다르지만 이 두 상실은 하나의 공통의 장을 형성한다. 영희가 장례식 내내 마른 울음을 우는 시고모할머니나 영희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농촌파탄정책을 비판하는 남편의 친구들 앞에서가 아니라, 종류는 다르지만 소중한 존재 의 상실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 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취약함 을 나누는 공감의 자리가 어떤 장소인지 보여준다. 우리가 고통을 호소 하고 또 그것에 공감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은 누군가가 상실한 것 이 무엇 인가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상실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15) 공선옥, 영희는 언제 우는가, 앞의 책, 2007, 55-56쪽.
348 한국문학논총 제70집 아는 때인 것이다. 이는 취약함이 취약함으로 공감하는 순간을 의미한 다. 위 인용문에서 영희의 눈물과 나 의 눈물이 한 방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 대상은 다르지만 말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비슷한 상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눈물인 것이다. 꽃같은 시절 은 이러한 지점에서 영희 의 고향만들기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장소와 인간이 그 교감의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 가를 잘 보여준다. 영희네는 도시에서 사기를 당하고 살 곳이 없어 방랑 을 하던 중, 진평리에 이르러 드디어 집을 구하게 된다. 비어 있는 집이 있으니 필요하면 살라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논리였다. 당장에 잠 잘 곳 이 없어 트럭에서 생활을 했던 영희네에게 마을 사람들의 환대는 경험 해 본 적이 없는 감동이다. 그러나 이 마을 역시 영희네 가족만큼이나 곤란한 처지이다. 그들의 삶의 근거지를, 권력자들의 비호 하에 활개치 는 한 돌공장에 의해 잃게 생겼기 때문이다. 삶을 뿌리내릴 장소를 잃거 나 잃을 위기에 처한 두 무리는 서로의 취약함에 마음을 쓰고, 또 서로 를 힘들어하기도 하고 압박하기도 하면서 서서히 진평리를 지키는 쪽으 로 합의해 나아간다. 이 속에서 영희는 마을 사람들과 정이 들고 집과 마을에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들은 영희의 주도로 이루어 지는 데모를 꾸리게 되면서 언제나 자기 할 말 제대로 못하던 습을 벗어 던지고 정치적 주체로 할 말을 하는 경험을 쌓게 된다. 아래 인용문은 영희가 데모대의 대책위원장 이 되고나서 경찰서로부터 출석요구서를 받게 되는데, 그것을 들고 온 이장 할아버지를 배웅하고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는 장면이다. 왠지 모를 낯선 서러움 때문에 방문을 닫고 바람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자니, 속이 상할 때면 늘 그렇듯이 눈물이 나온다. 참 희한한 일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일 말고, 혹은 가족의 일 말고 타인들의 고난 때문에 서럽다거나 눈물이 날 만큼 속이 상한 적은 없다. 그런데 지금, 이장의 땀에 밴 후줄근한 남방이, 휘청거리는 힘없는 걸음걸이가 영희를 울리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49 고 있다. 그것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헛기침을 하는 참인데, 천장에서 거 미가 줄을 타고 주르르 내려오다가 영희 눈앞에서 똑, 하고 멈추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거미를 잡으려다가 문득, 어쩌는가 보려고 내버려두었더니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듯, 대롱대롱 춤을 춘다.거 미 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지붕 밑에서 바스락바스 락, 찌그락찌그락 하는 소리가 난다. 뽀시락 장난을 하는 참새들이다. (중략) 거미를 바라보고 참새 소리를 듣고 벌 춤을 지켜보고 있자니, 눈 물이 시나브로 말랐다. 영희는 말개진 눈을 들어 방안을 한번 둘러보았 다. 어둑신한 방 안에 말할 수 없는 평화의 기운이 가득 서린 것 같았다. 영희는 문득,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16) 타지에서 흘러들어와 갈 곳 없는 가족을 받아준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마을의 데모에까지 가담했다고는 하나 영희가 경찰서에 까지 출석해야 하는 상황은 황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영 희가 서러운 것은 이장 노인의 후줄근한 등 뒤로 땀을 흘리며 걸어가는 모습이다. 그 모습에서 영희는 오합지졸이었던 데모대를 이끌어주는 고 마운 사람에게 경찰 출석요구서를 내밀어야 하는 이장의 편치 않은 마 음을 느낀다. 그리고 살던 대로 살게 해달라는 마음 뿐인 노인들의 고난 에 마음이 아프다. 그렇기에 영희는 자기 신세가 아니라, 가족이 아닌 그 들의 처지에 눈물이 나는 것이다. 그들의 취약함에 공명하는 순간, 이제 마을 사람들의 고난은 영희의 몫이 된다. 그리고 그런 영희가 집 안에서 거미, 참새, 벌 등에게 고요한 위로를 받는 모습은 마을과 집이 단지 사 건의 배경이기보다는 인간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근거지로 작용하 며 인간과 교감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영희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이곳은 영희에게 새로운 고향이 된다.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 정체성을 만드는 요소로 물리적 환경, 인간 활동, 의미, 그리고 장소감을 든다.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를 외부 에 놓인 상태 와 내부 적으로 경험하는 방식 두 가지로 나누고, 장소의 본질을 내부 의 16) 공선옥, 앞의 책, 2011, 61-62쪽.
350 한국문학논총 제70집 경험 속에서 찾는다. 위 인용부는 영희가 자신을 마을 주민으로 받아들이 고,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는 적극 적인 노력 을 통해 기꺼이 장소의 의미에 마음을 열고, 느끼고, 장소의 상 징을 알고 존중하려는 흔쾌한 마음 을 내어 놓으며 감정이입적 내부성 을 획득한 것을 넘어서서 장소 개념의 토대가 되는 그 장소에의 소속인 동 시에, 깊고 완전한 동일시 로서의 실존적 내부성 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17) 공선옥의 최근 작품들이 보여주는 인간과 인간의 의미있는 장소, 즉 집 이나 고향, 마을 등과의 상관관계는 이러한 방식으로 장소와 깊이 연관 관계를 맺으며 사람들 간의 취약함을 나누고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장소에 깊이 소속되는 삶에 대한 지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감은 혈연 이나 지연, 지성이나 사회적 권력 등을 넘어서서, 취약함이라는 존재 자 체에 대한 공감이 가져다 준 단단한 운명공동체적 연대감이다. 4. 장소 소속감과 미의식의 가능성 공선옥이 최근작을 통해 인간과 장소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바 대로이다. 이는 단지 기존의 자기 장소, 자기 집을 무조 건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라도 제 상황에서 장소에 뿌리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즉 단지 취약한 인간이 취약한 인 간을 받아들이면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 놓인 문제의식이 바로 인물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개입해 들어오 는 아름다움, 혹은 미의식의 문제이다. 인간이 어떤 장소에 뿌리내리고 그 곳에서의 삶에 책임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곳에 있기에 비로소 생 기는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미의식이 있기 때 17) 에드워드 렐프, 앞의 책, 126-127쪽.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51 문이다. 이는 인간이 장소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뿌리내릴 수 있는 의지 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연결된다. 그리고 공선옥이 장소를 바탕으로 인 간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전망과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 다. 영란 에서 영란은 가족을 잃고 집에서도 쫓겨나 자살 시도까지 했었 지만 영란여관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조금씩 안정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녀와 아름다운 집을 꾸리고자 하는 완규 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어 목포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영란은 희한하게도 완규의 어린 조카 수한 이가 눈에 밟혀 끝내 목포를 떠나지 않고 수한의 초등학교와 가까운 곳 에 방을 잡는다. 완규에게서 솟아나지 않던 어떤 욕망이 수한이 때문에 피어나고 있었 다. 그것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욕구인지도 모른다. 혹은 본능일까. 아니 면 단순한 연민인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한의 하교 시간에 맞 추어 유달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수한을 마중 나오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골목 안 가게에서 우유를 사면서 물었다. 이 동네에 방 나온 거 없어요? 18) 영란은 목포를 떠나고자 결심했지만, 수한이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 녀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수한이의 요청에 충동적으로 수한의 학교 근처에서 방을 구한다. 이를테면 수한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주는 생생한 아름다움이 그녀를 붙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수한과 가족 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한이는 그녀에게 새로 운 애정을 생성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었고, 그녀가 타인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게 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는 그녀가 인자 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 며 자신도 누군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목포에서 만난 사람들 한 명 한명을 꼽아보는 부분에서 정점에 달한다. 18) 공선옥, 앞의 책, 2009, 163-165쪽.
352 한국문학논총 제70집 그리고 그런 인자를 보는 순간, 나 또한 누군가가 보고 싶어졌다. 아 이도 아니고, 남편도 아닌 누군가가. 그런 적이 없었다. (중략) 그 사람 이 완규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수옥이일 수도 있었다. 수한이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영란여관 할머니, 혹은 비금이댁인지도. (중략) 생각하면 아려서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더 생각나는 남편과 아이와 엄마와 무정하긴 해도 다정했던 의붓아버지, 의붓오빠도 아닌, 그러니까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 마치 부드러 운 융단에 파묻히는 것처럼 아늑해졌다. 그래서 나는 자꾸자꾸 생각했 다. 이 눈 내리는 밤에 또 누가 보고 싶은가. 19) 영란여관에서 시작된 영란의 목포와의 인연은 수한이라는 꼬마에 대 한 애정으로 구체화되었고, 그 욕구와도 같은 애정이 전혀 다른 타인에 대한 애정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 위 인용문에서 보이는 부분이다. 이 러한 애정의 확장은 이후로 영란이 목포에서 장사를 하며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고난을 견디고 목포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 는 내적 동력이 된다. 목포는 그녀 삶의 원래 근거지와는 전혀 다른 곳 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취약한 신체가 취약한 대로의 타인과 교감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근거지,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목포는 이제 영 란의 고향이 된다. 고향은 이러한 식으로 얼마든지 확장 갱신된다. 꽃 같은 시절 의 할머니들은 젊은 시절, 농촌 개조 라는 국가 시책에 대항하여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오명순네 돌담을 지켜낸 투쟁의 기억 이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오명순의 돌담이 우리는 좋았다. 먼 데서 돌아와 마을에 들어서면 맨 먼저 그 오래돼서 이끼 자욱한 돌담이 맞아주는 게 그렇게 푸근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낮은 돌담 너머로 오명순네 밥 짓는 연기가 푸실푸실 새어나오는 것이 좋았고 먹을 것을 넘겨받고 넘 겨주는 것이 우리는 좋았다. 그 좋은 것을 부숴버리는 사나운 마음은 도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 사나운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19) 공선옥, 앞의 책, 2011, 203쪽.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53 없어 무서웠다. 오명순은 서러워 울었다. 서러워 운다고 해서 눈물을 철 철 흘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언제나 그랬듯, 한숨을 쉬듯이, 육자배기 가락에 사설 한 자락을 풀다보면 막힌 가슴이 좀 뚫리는 것이다. 20) 아낙들의 고단한 삶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는 돌담을 마을 남자들이 무단으로 시멘트 블록 담 으로 개량 하였을 때 그녀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온 몸을 던진 호소로 시멘트가 굳어가는 블록 담을 걷어내고 무 너진 돌담을 다시 쌓았다. 이들에게 돌담은 위의 인용문에 보듯 그들의 삶을 포근하게 해주는 좋은 그리고 아름다운 존재였고, 한스러운 삶을 함께 울어주는 이웃들과 교감하던 마음의 증거였다. 이러한 돌담의 의미 를 깡그리 무시하고 함부로 무너뜨리는 것은 그 일이 나라 의 시책이라 도, 남자들의 폭력이 두려워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취약함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의 연대로 드러날 수 있는 경우는, 억압적 힘에 패배하 는 나약함의 묵인이 아니라 취약함을 나눈 속에서 만들어진 공감과 기 억의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돌담의 아름다움은 아 낙들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 자생적인 미의식에 의해 저절로 합의된 것이다. 그녀들이 이와 같이 그들의 삶 속에서 구성된 삶의 아름 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돌담을 지켜냈고, 이후로 당산나무도 구했 으며 지금은 돌공장에 맞서 마을을 지켜내는 의지로 이어지고 있다. 이 와 같이 자신들의 장소 속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의 지는 진평리에서 데모를 하는 영희에게도 전해진다. 초기에 순양석재 사람들한테 욕을 먹을 때마다 영희도 제 마음이 너 덜너덜 찢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찢긴 느낌이 들면 짜증이 나서 저 도 모르게 험한 소리가 나왔다. 복주가 넘어져 울면, 일어나 새끼야, 한 다든가, 무슨 일이 잘 안되면 지랄맞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때, 눈 빛이 유달리 반짝이는 언니 김공님이 그러던 것이었다. 20) 공선옥, 앞의 책, 2011, 138쪽.
354 한국문학논총 제70집 어이, 한사코 모란꽃맹이로 이삐고 존 것만 생각허소이.(하략) 21) 위 인용문은 순양석재와의 싸움 속에서 마음을 다쳐 정서적으로 피폐 해져가는 영희에게 할머니 김공님이 한사코 모란꽃처럼 아름답고 좋 은 것만을 생각하라고 조언하는 장면이다. 아름답고 좋은 것이 취약함을 긍정하는 공동체적 합의라면, 이 한사코 라는 말 속에는 아름다운 것을 자신의 무기이자 방패로 하여 자신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담 겨 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자기 외부의 것들과의 영향 관계 속에서 자신 의 장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때 외부 요소들의 작용은 고통을 주 기도 하지만 또한 삶의 의미와 근거를 주기도 한다. 아름다움은 사람들 이 몸담고 있는 장소 속에서 쌓아온 각자의 가치들이 교류하면서 만들 어낸 공감의 힘을 통해 생성되고 서로에게 각인된다. 그렇기에 어떤 상 황 속에서도 자신의 현실을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지키고자 하는 마 음으로 그 아름다움을 향해 열릴 수 있다. 앞서 본 수한이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돌담의 아름다움은 이데올로기나 선전문구, 또는 다른 누군 가의 이해 관계에 복속되지 않는 자생적인 아름다움이며, 지금 여기에서 능산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유연함이자 강함의 근거이다. 이 가치는 이 데올로기나 권력자들이 내어놓은 가치들의 서열에 앞서, 내부에서 창출 된 가치이며 취약함의 연대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 공선옥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이 한 장소에 뿌리내리고 장소의 온갖 요소들과 소통 하며 공공의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1) 공선옥, 앞의 책, 2011, 146쪽.
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55 5. 나가며 취약한 존재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어떤 장( 場 )을 일구어 살아 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이는 삶이 스스로도 잘 모르는 외부의 존재 들을 포함하고 있고, 바로 그런 것들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 나 오늘날 현실은 이러한 인간 존재 자체가 갖는 취약함에 대해서 정상 에서 미달된 것, 또는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하고 더 나쁘게는 억압을 해 버린다. 세계는 점점, 삶의 구체적 현장과 개인이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 다는 점이나,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지점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랠프가 지적하듯 이러한 무장소성의 흐름 은 분명 우리 시대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그 나름의 의미가 분명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알리바이로 하여 상실과 내쫓김에 처한 존재들에 대해 의식을 기울이지 않거나, 이해( 利 害 )관계에 치중하여 사람들의 구 체적 삶의 장을 훼손하는 것은 스스로를 삶으로부터 고립시킬 뿐이다. 반면 취약함을 직시하는 것은 공감의 행위이며 결과적으로는 장소의 증 여 수수를 통한 공존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인간에 대해 생긴 대로 존중하고 자연스럽게 이합집산 하는 공선옥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양태는 바로 이러한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데올로기적으로 혹은 자본논리로 꽉 짜여진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헐 벗은 이가 내미는 손은 도저히 계산에 들어올 수 없는 요청들이다. 그러 나 이들에게서 자신의 헐벗음과 고통을 본다면 취약한 그 모습 그대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삶 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능상적 기억이 생성된다고 공선옥은 이야기 한다. 이렇게 되면, 취약함은 무능함과 비천함의 신호가 아니라, 이미 그 와 별반 차이 없는 우리 의 장소를 만들 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때 마음의 자리와 구체적 장소를 나누는 것은 보살피는 자와 보살핌을 받 는 자 쌍방이 공생의 고리를 형성하는 중요한 삶의 기제가 된다. 여기서
356 한국문학논총 제70집 가치의 위계는 깨어지고,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는 몸, 그리고 그 몸이 있 는 이 장소가 새롭게 의미화 된다. 이러한 식으로 취약한 개인들 간에 장소를 주고받는 현상이 바로 공공성이자 사회성이며, 개인이 사회를 움 직일 수 있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근대 문명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형태로 변모해오는 과정은 분명 인간을 개인 단위로 하여 그 정치적 의미를 획득해왔고, 특정 장소에 얽 매인 채 변화 불가능한 삶에 갇힌 사람들에게 풍요와 자유, 편리를 주었 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장소에 대한 감각을 상실케 하면서 이 변화들이 기왕에 쌓아온 긍정적인 요소들을 특정 몇몇 권력자들의 삶에 복무하도록 만들어버린 과정은 타파해야 한 다. 우리는 근본에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달리할 필요가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서 현대 문명이 긍정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선옥의 작품들 속 인물들이 유한함과 취약함을 긍정하 고, 그러한 존재들에게 장소를 내어주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노력 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취약하 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취약함을 나누는 신체들로 구성된 장소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장소상실의 상황에 자신의 신체성을 빼앗기지 않고, 내적 으로 구성된 미의식을 지키는 곳이 될 수 있다. 이는 가족주의나 지역이 기주의와 다른 관계 형성의 메커니즘을 가능하게 하고, 오늘날 물리적 장소를 넘나드는 공간적 상상력이 개인의 구체적 삶에 어떤 장소 의식 으로 안착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에 주요한 시사점이 될 것이 다. 물론 공선옥의 작품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이 선의를 가진 몇몇 사람 들의 개인적 특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혐의는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러한 방식으로라도 어떤 새로운 주체의 정체를 상상해 보는 작업을 통 해 우리는 새로운 연대와 정치력의 실현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음은 확 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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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소설 속 장소 의 의미 359 <Abstracts> A Study on the Concept of Place in the Novel of Gong, Seon-ok Lee, Hee-won Since the modern age the world has been developed by rational individuals based on the logic of cogito. In that process, Place is regarded as incidental and passive one which is operated and managed by rational reason. But actually human beings establish their identity and form a sense of security through the place. Based on it they can go forward to the world. Therefore place and human are inseparable from each other in close mutual relationship. From this point of view human body can be understanded as place, too. By redetermination of rational individuals we can find the solution of violent problems in modern society. Novelist Gong Seon-ok s works in recent - The Merry Night Road, Young-ran, and The Flowerlike Days have been embodied this problem. Through the characters in her works Gong Seon-ok forms very delicate side of human being who is related with place and body. In this point human beings are fundamentally vulnerable existence who cannot live alone. This concept is connected to the fundamental sociality of Judith Butler. So, by looking after and answering for people, human beings can hold humanity. Gong Sun-ok's novels are based on this concept. Humans in her works are to face up to the vulnerability of themselves, other people, and
360 한국문학논총 제70집 surroundings and through the empathy they create new relationship. In the world moved by persons with the social influence, as vulnerable ones, face on other weak presence is the core theme of Gong Sun-ok. And in this process people are going to make spontaneous aesthetic to break the sequence of hierarchical value system of the world ever going to create a new public service. The possibility of such a community passes over paternalism or regional self-centerness. And I think it would make the basis of the value that can be pierced man's freedom and equality in the form of life in today's with rapidly changing by the media and the development of neo-liberalism. In the community with this way we will be able to gain political power from below and a new community solidarity. Key Words : Gong Sun-ok, Places, Vulnerability, gay night way, youngran, The Flowerlike Days 논문접수 : 2015년 6월 30일 심사완료 : 2015년 8월 18일 게재확정 : 2015년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