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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 1) 명 경 일 ** 1. 머리말 2. 判 付 의 개념과 구성요소 3. 判 付 의 작성절차에 따른 서식의 변화 4. 맺음말 초록: 조선시대 주요 관아가 각자 맡은 업무에 관하여 국왕에게 아뢸 때 사용한 문서를 계 啓 라고 했다. 그리고 啓 에 대한 국왕의 처결을 判 付 라고 했다. 본 논문은 판부의 작성 절차와 서식을 분석함으로써 국왕의 재결이 어떠한 체계에 따라 진행되었는지 밝히는 내용이다. 판부는 승지가 啓 문서 좌측 여백에 작성하며, 1 啓 字 印 과 2 立 月, 3 啓 자, 4처결내용, 5담 당승지의 직함 및 서명으로 구성된다. 배치방식은 1계자인이 가장 안쪽(우측)에 위치하고 순서 대로 좌측에 위치했다. 계자인은 대개 내관이 답인하며, 판부의 내용을 공증하는 기능을 했다. 입 월과 계자는 모년 모월 모일에 아뢰었음 을 뜻하며, 판부가 담고 있는 국왕의 명령이 발하는 시 점을 표시했다. 처결내용은 啓 문서에서 보고하거나 건의한 사안에 대한 국왕의 답변이다. 그리 고 판부의 작성자인 승지의 직함과 서명을 표기함으로써 작성 내용에 책임을 지고 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대비했다. 다음으로 승정원에서 啓 문서를 출납하는 일체의 과정은 판부의 작성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각 관아에서 접수한 문서를 국왕에게 入 啓 하는 방식은 내관을 통해 대내에 간접적으로 전하는 형식과 승지가 입시하여 직접 전하는 형식이 있었다. 승지가 입시하여 국왕에게 직접 啓 문서를 입계하는 것을 承 旨 親 啓 라 한다. 입계 방식이 승지친계일 경우, 판부의 구성요소 중 3 啓 자는 親 啓 라고 적는다. 판부를 작성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啓 字 印 을 찍어서 승지에게 내려주면, 승지가 2 立 月 에서 부터 5직함 및 서명을 표기하는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러나 형벌을 주거나 상이나 관작을 주는 경우 등 주요한 사안에는 계자인을 찍는 순서가 달라진다. 즉 국왕이 승지가 적은 처결내용 * 이 논문은 2012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연구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191

192 奎 章 閣 43 을 검토한 후 계자인을 찍는데, 이를 還 判 付 라고 했다. 환판부는 구성요소의 배치 방식이 일반적 인 배치와 달랐다. 즉 2 立 月, 3 啓 자, 4처결내용이 계자인 안쪽에 위치하는 것이다. 판부는 啓 문서 여백에 작성되지만 별도의 서식을 갖고 있는 국왕 문서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작성자인 승지가 국왕의 명령을 대신 전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즉 조선시대 국왕의 재결활동 은 승지가 국왕의 명령을 대신 전하는 구조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핵심어 : 조선후기, 국왕, 判 付, 啓, 入 啓, 親 啓, 啓 下, 判 付 規 式, 判 付 笏 記, 裁 決, 承 旨, 啓 字, 立 月 1. 머리말 조선시대 관직 및 관아 조직은 왕의 명령을 조직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 다. 행정은 하부 조직에서 상부 조직까지 각 관아의 업무를 보고하고 지시하는 체 계를 통해 구현되었다. 이러한 명령 보고 체계는 문서의 생산 유통 체계이기도 했 다. 문서들은 상부의 정보를 하부에 전달하거나 또는 하부의 정보를 다시 상부에 전달하기도 하며, 자기 기관의 지시 및 건의 사항을 수취 기관에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생산되었다. 문서의 종류는 발수급기관의 위계에 따라 차등이 있었고, 이 차등은 각 문서의 서식에 반영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국왕의 행정적인 권력 역시 문서를 통해 효력을 발휘하였다. 국왕의 명령을 담은 문서는 국왕이 발급자가 되는 형태와 주요 관아와 관원이 올린 문서 에 답하는 형태가 있었다. 전자는 傳 敎, 榻 敎, 綸 音, 備 忘 記, 敎 書, 諭 書, 頒 敎 文 등 의 문서이다. 후자는 중앙과 지방의 관아와 관원들이 올린 上 疏, 箚 子 에 대한 답변 인 批 答 과 中 外 의 관아가 담당업무 보고에 사용하는 啓 本, 啓 目, 狀 啓 등에 대한 답변인 判 付 가 있다. 각 관아는 국왕에게 업무 부고용 문서를 올리고 判 付 를 내 려 받음으로써, 업무 진행 상황을 국왕에게 보고함과 동시에 개별사안을 추진할 행정적 근거를 얻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국왕이 행정적 권한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생산 유통된 문서의 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당시 국왕 뿐 아니라 행정체계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다.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193 조선시대 국왕의 권력을 문서행정 체계와 연관하여 설명한 사례는 최승희의 연 구가 대표적이다. 최승희는 조선 전기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의 왕권에 대한 일련의 연구에서 국정운영체제를 설명하면서, 국정운영에 사용된 문서의 기능을 중요한 요소로 다룬바 있다. 1) 1) 그러나 이 연구는 다루고 있는 시대가 조선 초기에 한정되어 있고, 당시의 문서체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망하고 있지는 않다. 조선시대 국왕과 관련된 문서의 체계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이유는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료를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經 國 大 典 禮 典 用 文 字 式 이 국왕과 관련된 문서의 행이체계에 대해 규정한 조항이 있긴 하 다. 그러나 여기에는 직계아문의 범위와 큰 사안( 大 事 )에는 啓 本 을 사용하고 작은 사안( 小 事 )에는 啓 目 을 사용하고 외방에서는 啓 目 을 쓰지 않는다. 와 같이 소략한 원칙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2) 2) 법전의 조항은 문서의 기능에 대한 언급이 큰 사 안 - 작은 사안 과 같이 추상적이고, 실제 사용된 문서가 啓 本, 啓 目 외에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한 이 원칙이 조선후기까지 그대로 적용 되는지 여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문서 체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서가 실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사례를 찾아보는 귀납적인 접근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자료 를 찾기 위해 實 錄 에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조선 전기의 경우, 이 방법이 한계 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實 錄 이 여러 관아의 문서를 체계적으로 謄 載 해 놓은 謄 錄 의 성격을 갖는 기록물이긴 하다. 3) 3) 그러나 實 錄 은 국왕에게 정무에 관한 문서 를 文 書 를 등재할 때, 어떤 종류의 문서인지 드러내지 않고 이를 통틀어서 啓 로 1) 최승희, 1994 世 宗 朝 의 王 權 과 國 政 運 營 體 制, 한국사연구 87; 1997 世 祖 代 王 位 의 脆 弱 性 과 王 權 强 化 策, 朝 鮮 時 代 史 學 報 1; 1998 世 祖 代 國 政 運 營 體 制, 朝 鮮 時 代 史 學 報 5; 2001 成 宗 朝 의 國 政 運 營 體 制 와 王 權, 朝 鮮 史 硏 究 10; 2002 朝 鮮 初 期 政 治 史 硏 究, 지식산업사. 2) 經 國 大 典 禮 典 用 文 字 式 에 대한 분석은 본문 1장 1절에서 다루고 있다. 3) 조선시대 문서 보존 체계인 謄 錄 에서 실록의 위상에 관한 사항은 오항녕, 2001 實 錄 : 謄 錄 의 位 階, 기록학연구 3 ; 김현영, 2008 조선시대의 문서와 기록의 위상 : 사초, 시정기에 대한 재검토, 古 文 書 硏 究 32 참조.

194 奎 章 閣 43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문서의 기능과 위상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는 문서체계의 특징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한편 조선후기의 경우, 전기에 비해 문서 체계를 살필 수 있는 사료가 비교적 풍부하다. 우선 각 관아에서 편찬한 관서지 등에서 문서의 종류와 행이체계에 대 한 조항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承 政 院 日 記 를 비롯하여 여러 기관에서 편찬 한 謄 錄 儀 軌 類 는 업무를 진행하면서 주고받은 문서를 등재하고 있다. 특히 문서 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원형을 유지하여 등재했기 때문에 그 서식을 확인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기록을 유지한 자료가 많기 때 문에 문서의 기능을 시계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현전하는 사료를 통해 충분히 구체적인 연구가 가능한 실정 임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국왕과 관련된 행정문서 체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 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개별문서에 대해 접근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마저도 행 정문서 체계에서 중심적 비중을 차지한 啓 本 과 狀 啓 에 대한 연구는 아직 없고, 啓 目, 草 記, 啓 辭, 無 啓 目 單 子 등에 관한 연구가 있을 뿐이다. 4) 4) 한편으로 국왕의 재 결행위에 관련한 연구로 批 答 에 대한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5) 5) 그러나 이 연구는 批 答 과 判 付 를 구별하지 않은 문제점이 있고, 국왕의 재결 활동에 대한 언급도 거 의 없다. 즉 현재의 연구현황은 조선시대 국왕의 문서행정 구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거 나, 나아가서 정치사와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조를 조망하는 시도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 개별 문서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도 밝혀지지 않은 단계에서 문서체계의 전체 적인 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실증을 결여한 시론의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장차 개별 문서에 대한 기초연구가 이루어진 후, 국왕의 권력은 4) 이강욱, 2009 承 政 院 日 記 를 통해 본 草 記 의 전면적 고찰, 민족문화 34; 2010 啓 辭 에 관한 考 察 : 承 政 院 日 記 를 중심으로, 古 文 書 硏 究 37; 명경일, 2010 無 啓 目 單 子 의 형식 과 용례, 古 文 書 硏 究 37; 2011 조선초기 啓 目 연구, 古 文 書 硏 究 39. 5) 심재권, 2008 국왕문서 批 答 의 연구, 古 文 書 硏 究 32.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195 어떤 절차를 거쳐 행정력을 발휘하였는지, 나아가서 조선시대 행정문서 체계가 주 요 정치기구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가 요망된다. 이러한 연구사적 인식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행정문서 유통 체계 가운데 국왕 의 재결방식에 대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 국왕의 재결은 문서상에 判 付 를 작성하 여 내리는 것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判 付 가 어떠한 절차에 따라 작성되었고, 규정 된 서식에 따라 갖추는 요소는 무엇인지 파악함으로서, 국왕의 재결 활동 체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행정문서와 마찬가지로 判 付 에 대한 연구는 이를 유통하는 체계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判 付 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中 外 관아 가 국왕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재결 받는 체계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判 付 의 외적 형태는 작성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국왕이 각 관아에서 올린 문 서를 재결하는 절차에서 생기는 문제점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갖추는 장치가 判 付 의 서식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判 付 에 갖추는 기본적인 외적 요소를 우선 살펴보고, 작성과정의 차이가 判 付 의 서식에 어떠한 변화를 미치는지 설명하 도록 하겠다. 2. 判 付 의 개념과 구성요소 1) 啓 의 유통 체계와 判 付 判 付 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정무 보고 체계에 대해 개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조선시대 啓 의 의미와 직계아문의 문서 보고체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啓 를 經 國 大 典 註 解 에서는 뜻을 상대방에게 통달함 라고 풀이하였다. 6) 6) 즉 啓 는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밝힐 때 아뢰다 라는 동사로 6) 經 國 大 典 註 解 吏 典 啓 本 啓 通 達 其 意 也

196 奎 章 閣 43 사용되는 글자이다. 한편 啓 는 명사로 쓰이기도 했는데, 조선시대 행정 문서 가운 데 특정한 범주의 문서군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즉 조선시대에 국왕에게 정무를 아뢸 때 쓰는 문서를 啓 라고 불렀던 것이다. 7) 7) 한편 조선시대에 啓 자는 국왕에게 한정하여 사용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조선시 대 이전에는 좀 더 넓은 계층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했었다. 8) 8) 厚 齋 先 生 別 集 을 보면, 9) 9) 厚 齋 ( 金 榦 )와 朴 世 采 가 朱 子 家 禮 및 金 長 生 의 疑 禮 問 解 에 실려 있는 여러 투식에 있는 啓 자 사용의 가부를 논의하는 내용이 있다. 박세채의 말 중에 凡 位 卑 者 呈 于 宰 相 及 其 地 主 文 字, 作 爲 四 六 者, 幷 謂 之 啓 라고 하여, 啓 가 군신간의 용어로 자리 잡기 전에는 지위가 낮은 사람이 재상이나 그 지역을 다스리는 자에 게 사륙변려체로 작성하여 올리는 글 을 지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10) 10)또한 朱 子 家 禮 에 등재되어 있는 服 人 이 慰 狀 에 답하는 형식 가운데 某 啓 라고 적는 부분이 있어 啓 가 일반인 사이에서 아뢰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1) 11)이와 같이 啓 자는 원래 그 대상을 국왕에게 한정하거나, 공무에 관한 내용을 기록할 때 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7) 최승희, 1989 增 補 版 韓 國 古 文 書 硏 究, 지식산업사, 1989, 152면. 8) 허흥식, 1988 한국의 古 文 書, 민음사, 36면. 9) 선생(박세채 1631~1695)께서 말하길, 朱 子 家 禮 의 服 人 이 慰 狀 에 답하는 형식 중에 某 啓 의 啓 자를 沙 溪 (김장생)는 국왕에게 아뢸 때 사용하는 文 字 로 여겨 모두 白 자로 바꿨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榦 ( 厚 齋 金 榦 )이 말하길, 예전에 先 輩 의 문집 을 보니, 지위가 낮은 사람이 재상이나 그 지역을 다스리는 자에게 사륙병려체로 작성하 여 올리는 글을 모두 啓 라고 하였습니다. 또 問 解 의 婚 書 式 에도 啓 자를 사용하였습 니다.(후략) 先 生 曰 家 禮 服 人 答 慰 狀 中 某 啓 之 啓 字 沙 溪 以 爲 用 於 奏 御 文 字 幷 改 以 白 字 是 如 何 榦 曰 曾 看 先 輩 文 集 凡 位 卑 者 呈 于 宰 相 及 其 地 主 文 字 作 爲 四 六 者 幷 謂 之 啓 又 見 問 解 婚 書 式 用 啓 字 問 解 亦 沙 溪 書 也 以 此 觀 之 啓 字 恐 無 不 可 用 者 先 生 曰 然 只 當 依 家 禮 用 啓 字 又 曰 祠 后 土 之 后 土 沙 溪 改 作 土 地 之 神 又 與 朱 子 不 同 此 亦 依 家 禮 用 之 爲 可 又 曰 朱 子 於 墓 祭 山 神 祝 曰 后 土 於 家 祭 土 神 祝 曰 土 地 如 此 分 別 必 有 其 意 幷 見 于 大 全 可 考 而 行 也 (민족문화추진 회, 1996 韓 國 文 集 叢 刊 156: 厚 齋 先 生 別 集 권4 雜 著 南 溪 先 生 語 錄 ) 10) 허흥식은 위의 책 36쪽에서 東 文 選 에 실린 啓 는 자신의 뜻을 서술한 내용으로, 조선시 대의 書 와 비슷한 문체로 보인다고 하고 있다. 11) 조선 후기의 김장생은 家 禮 輯 覽 을 엮을 때 朱 子 家 禮 의 啓 자를 白 자로 바꾸었다.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197 조선을 제외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신하가 국왕에게 아뢰는 행위를 표현하 는 용어는 啓 가 아니었다. 秦 의 통일 이후 황제에게 아뢰는 것을 奏 라 부르고, 이 글자의 사용을 일반인에게 금지한 이후 중국에서는 계속 황제 전용 용어로 奏 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에는 元 간섭기 이전까지 奏 를 사용하였고, 이 후에는 申 을 사용하였다. 啓 자를 국왕에게 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實 錄 에 의하면 세종 15년(1433) 이후이다. 그 이전 시기에는 고려왕조가 征 東 行 省 이 설치된 이후에 사용했던 申 자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12) 12) 이조가 아뢰기를, 洪 武 禮 制 에 應 天 府 가 五 軍 都 督 府 에 申 한다, 大 明 律 에 六 部 에 申 한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렇다면 申 자는 신하끼리 서로 높이는 말이지 국왕에게 아뢰는 말은 아닙니다. 국초에 고려의 제도를 따라서 (국왕에게) 아뢰는 말에 모두 申 자 를 사용하였는데,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으니 정말 부당합니다. 바라건대 善 申 을 善 啓 으 로, 申 呈 을 上 言 으로, 謹 申 을 謹 啓 로, 申 聞 을 啓 聞 으로 바꾸고, 知 申 事 를 국초의 제 도에 따라 都 承 旨 로, 代 言 을 承 旨 로 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이에 따랐다. 13) 13) 위 기사에 따르면 조선은 국초에 사용하던 申 자를 啓 자로 바꾼 이유가 申 자가 洪 武 禮 制, 大 明 律 안에서 나타난 것처럼 신하끼리 사용하는 용어였기 때문이 다. 元 간섭기 이후의 고려왕조는 황제에게 해당하는 奏 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따 라서 격이 낮은 申 자를 사용한 것인데, 申 자의 격이 너무 낮아 다른 글자를 택하 고자 했다. 그 중 중국에서 아뢰는 대상이 태자일 때 사용한 용어인 啓 를 14) 14)국왕 12) 世 宗 實 錄 권61, 15년 윤8월 27일(정축) 高 麗 自 中 業 以 前 凡 臣 下 擬 請 謂 之 奏 ; 君 上 諾 可 謂 之 制 可 悉 與 中 國 無 異 及 事 元 以 後 立 鎭 東 省 以 國 王 爲 丞 相 事 皆 貶 降 始 爲 衙 門 之 例 臣 下 所 啓 謂 之 申 君 上 所 可 謂 之 判 13) 世 宗 實 錄 권61, 15년 9월 11일(경인) " 吏 曹 啓 洪 武 禮 制 應 天 府 申 五 軍 都 督 府 大 明 律 申 六 部 則 申 字 臣 下 自 中 相 尊 之 辭 非 啓 達 君 上 之 辭 也 國 初 因 高 麗 之 制 凡 啓 達 之 事 皆 用 申 字 至 今 不 改 誠 爲 未 便 乞 改 善 申 曰 善 啓 申 呈 曰 上 言 謹 申 曰 謹 啓 申 聞 曰 啓 聞 知 申 事 依 國 初 官 制 都 承 旨 諸 代 言 稱 承 旨 何 如 從 之 " 이에 대한 논의는 世 宗 實 錄 권61, 15년 윤8월 27일(정 축) 기사에 좀 더 자세히 나와 있다. 14) 明 會 典 권76 奏 啓 題 本 格 式 에 " 臣 民 具 疏 上 於 朝 廷 者 爲 奏 本 東 宮 者 爲 啓 本 "이라 한 것을 보면 啓 는 태자에게 아뢸 때 사용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元 代 에도 마찬가지였다. 通 制 條 格 을 보면, 李 孟 ( 中 書 省 平 章 政 事 )이 당시 황태자였던 仁 宗 에게 보낸 문서에 啓 자

198 奎 章 閣 43 에게 적용한 것이다. 다음으로 국왕에게 정무를 아뢰는 啓 라는 문서군은 어떠한 체계로 유통되었고, 그 문서의 종류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겠다. 국왕에게 정무를 아뢴다는 것은 국 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국왕이 모든 관사의 업무를 일일이 다 스릴 수 없으므로 정무를 보고 받는 관아를 六 曹 를 비롯한 2품아문으로 한정하고, 나머지 아문은 그 아래의 지휘체계에 둠으로써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택했 다. 정무를 국왕에게 직접 아뢰는 관아를 直 啓 衙 門 이라 하는데, 經 國 大 典 禮 典 用 文 字 式 에는 직계아문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2품 아문은 直 啓 하고,(중앙과 지방의 여러 장수, 승정원, 장예원, 사간원, 종부시도 直 啓 할 수 있다. 各 司 에 긴한 일이 있으면 提 調 가 直 啓 한다. 大 事 는 啓 本 으로 작성하고 小 事 는 啓 目 으로 작성한다. 외방은 啓 目 이 없다.) 直 行 移 하되( 相 考 事 외에는 모두 啓 한 다), 나머지 아문은 모두 소속된 육조에 보고한다. 15) 15) 여기서 2품 아문 은 장관이 종2품 이상인 기관을 뜻한다. 16) 16)즉 모든 啓 의 발급 주체는 원칙적으로 장관이 종2품 이상인 아문이었으며, 특히 啓 目 은 중앙관사에서 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예외적으로 승정원, 장예원, 사간원, 종부시는 長 官 이 정3품이지만 직계할 수 있었는데, 승정원, 사간원이 직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를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 岡 本 敬 二 林 高 四 郞, 1975 通 制 條 格 の 硏 究 譯 註, 國 書 刊 行 會, 131면) 15) 經 國 大 典 禮 典 用 文 字 式 二 品 衙 門 直 啓 中 外 諸 將 承 政 院 掌 隷 院 司 諫 院 宗 簿 寺 亦 得 直 啓 各 司 有 緊 事 則 提 調 直 啓 大 事 啓 本 小 事 啓 目 外 則 無 啓 目 直 行 移 相 考 事 外 皆 啓 其 餘 衙 門 並 報 屬 曹 16) 조선시대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종2품 이상 아문은 다음과 같다. 정1품 宗 親 府. 議 政 府, 忠 勳 府, 儀 賓 府, 敦 寧 府, 中 樞 府, 備 邊 司 ( 續 大 典 ), 宣 惠 廳 ( 續 大 典 ), 濬 川 司 ( 大 典 通 編 ), 京 官 職 종1품 義 禁 府 정2품 六 曹, 五 衛 都 摠 府, 漢 城 府, 水 原 府 ( 大 典 會 通 ), 廣 州 府 ( 大 典 會 通 ), 종2품 司 憲 府, 開 城 府, 忠 翊 府, 江 華 府 ( 續 大 典 ), 奎 章 閣 ( 大 典 通 編 ) 外 官 職 종2품 觀 察 使, 府 尹, 兵 馬 節 度 使, 防 禦 使, 水 軍 統 制 使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199 3품 이하 아문은 모두 六 曹 의 屬 衙 門 이었던 것에 반해, 이 두 아문은 독립아문이 었기 때문이다. 한편 장예원(종3품 아문)은 형조의 속아문이었고, 종부시(종3품 아 문)는 이조의 속아문이었지만 직계할 수 있었는데, 담당업무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장예원은 노비에 관한 분쟁과 사건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刑 政 을 담 당하였고, 종부시는 璿 源 譜 牒 을 편찬하고 종실의 잘못을 규찰하는 일을 관장하고 있어서 특별히 직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중앙의 직계아문 체계를 그림으 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 1> 중앙 직계아문의 체계 직계아문들은 관련 업무를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고, 다른 관아와 직접 논의할 수 있었다( 直 行 移 ). 用 文 字 式 의 相 考 事 는 각 아문간의 업무 연락을 뜻하는 표현 으로, 相 考 事 외에는 모두 啓 한다 는 말은 다른 관아와 협조해야할 때를 제외한 모든 사안은 국왕에게 보고할 것을 강제한다는 뜻이다. 그 밖의 관아는 평소에 업 무를 육조의 감독을 받아 처리하게 규정되었기 때문에 소속된 육조에 보고하면 되 었고, 긴급한 일이 있을 때만 그 아문을 겸임하고 있는 提 調 를 통해서 직계할 수 있다. 즉 啓 의 상달은 강제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국왕에게 재가를 받아서 처리해야

200 奎 章 閣 43 할 사항은 반드시 啓 聞 해야 했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처벌받았다. 다음은 태종 대에 예조참판인 허조와 知 申 事 인 조말생이 소관업무를 제때에 啓 聞 하지 않아 탄 핵 받는 내용이다. 사헌부에서 허조, 조말생, 최한 등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상소의 대략을 말하면, 허조는 적지 않는 君 臣 의 同 宴 을 처음에 啓 聞 하지 않고 行 移 하였으며, 그것을 파할 때에도 啓 聞 하지 않았습니다. 조말생은 사람을 보내 사신의 행차를 탐지해서 바로바로 啓 聞 해야 옳은데 이와 같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시우가 떠날 때에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면 그때그때 啓 聞 하라는 것을 또한 명확히 말해 주지 않아, 초9일에 압 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16일이 되어서도, 와서 고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또한 君 臣 의 同 宴 을 그만두는 일도 啓 하지 않고 허조와 함께 의논하고는 호조가 보낸 關 을 멋대로 회수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왕명을 출납하고 의례를 맡아 관리하는 상식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위의 허조와 조말생을 율에 따라 논죄하여 신하된 자로서 제 마음대로 하는 불경한 죄를 밝히십시오. 최한은 승전색으로서 공경하고 신중히 하지 않아서 국왕의 뜻의 잃어버렸으니, 함께 논죄하게 하여 삼가지 않은 것을 경계하십시오. 라 하였다. 왕이 따르지 않았다. 17) 17) 이 기사에서 보듯이 직계는 주요아문에게 부여하는 권한인 동시에 소관업무를 국왕을 통해 처리하는 것을 강제한 의무 사항이기도 했다. 啓 와 마찬가지로 신하 가 국왕에게 상달하는 문서이면서 기능에 있어서 대비되는 문서가 上 疏 이다. 上 疏 는 위에서 살펴본 직계아문 여부와는 상관없이 개인 차원으로 國 事 전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아뢰는 문서이다. 18) 18) 17) 太 宗 實 錄 권34, 17년 12월 20일 司 憲 府 請 許 稠 趙 末 生 崔 閑 等 罪 疏 略 曰 許 稠 以 不 小 君 臣 同 宴 初 不 啓 聞 行 移 及 其 寢 也 亦 不 啓 聞 趙 末 生 使 臣 行 次 專 人 探 知 隨 卽 啓 聞 可 也 曾 不 慮 此 當 金 時 遇 發 行 之 時 使 臣 過 江 則 及 時 啓 聞 事 亦 不 明 說 使 初 九 日 過 江 聲 息 至 於 十 六 日 未 有 來 告 者 且 君 臣 同 宴 停 寢 之 事 亦 不 以 啓 與 稠 同 議 戶 曹 行 移 關 字 擅 自 還 收 實 皆 違 於 出 納 王 命 掌 治 禮 儀 之 職 上 項 許 稠 末 生 依 律 論 罪 以 明 爲 臣 專 擅 不 敬 之 罪 崔 閑 以 承 傳 色 不 爲 敬 謹 殊 失 旨 意 竝 令 論 罪 以 戒 不 謹 不 聽 이밖에도 實 錄 이나 承 政 院 日 記 를 보면 관원이 啓 聞 해야 할 사항을 소홀히 하여 처벌받는 사건이 종종 발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8) 조선초기에는 上 疏 가 朝 官 만 할 수 있다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성종조에 들어와 유생 의 정치 참여가 두드러지면서, 상소의 公 論 性 이 강화되면서 지배계층에 국한해서 올릴 수 있는 문서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적 송사를 상소로 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朝 官 및 儒 生 이 國 事 에 관련된 공적인 일에만 행할 수 있었다. 설석규, 2002 朝 鮮 時 代 儒 生 上 疏 와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01 <표 1> 上 疏 와 啓 의 성격 啓 上 疏 발급주체 직계아문(관아) 朝 官 및 儒 生 (신하) 상달 내용 관할 업무 國 事 전반 처결 형식 判 付 批 答 강제성 啓 는 아뢰는 관아나 사안에 따라 여러 종류가 사용되었다. 현재 알려진 啓 의 종 류와 기능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 19) 啓 本 : 국왕에게 大 事 를 아뢸 때 사용한 문서. 啓 目 : 국왕에게 小 事 를 아뢸 때 사용한 문서. 20) 20) 狀 啓 : 觀 察 使, 兵 使, 水 使 등 왕명을 받들고 外 方 에 있는 臣 下 가 그 지역의 중요한 일을 국왕에게 보고하거나 청하는 문서. 書 啓 : 暗 行 御 史 와 같은 奉 命 官 의 復 命 書. 草 記 : 중앙관아가 관장하는 사안에 대해서 임금에게 보고, 요청, 문의할 때 사용한 문서. 21) 21) 啓 辭 : 중앙관아의 신하가 임금에게 보고, 요청, 문의할 때 사용한 문서. 22) 22) 이와 같이 啓 는 담고 있는 내용이나 상달하는 주체에 따라 각각 사용할 종류가 따로 있었다. 위에서 제시한 啓 의 종류는 법전에서 문서식이 확인되거나 연대기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 위주로 정리된 것일 뿐,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啓 는 그 밖에도 확인되지 않은 종류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壯 勇 營 大 節 目 권2 文 牒 부분을 보면, 장용영에서 사용할 啓 가 종류별로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는 啓 公 論 政 治, 남명학연구원출판부, 26-29면. 19) 최승희, 1989 앞의 책, 153-170면, 이 책에서는 啓 가 啓 本, 啓 目, 狀 啓, 書 啓, 草 記 이외에 도 直 啓, 臺 啓, 合 啓, 密 啓, 回 啓, 抄 啓, 傳 啓, 啓 覆 등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20) 명경일, 2010 앞의 논문; 2011 앞의 논문. 21) 이강욱, 2009 앞의 논문. 22) 이강욱, 2010 앞의 논문.

202 奎 章 閣 43 本, 啓 目, 草 記 등 이미 위에서 확인한 문서명도 있지만, 粘 目, 別 單, 單 子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종류도 제시되어 있다. 이미 확인된 것 뿐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도 나름의 외형과 양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 양식은 각 문서 고유의 기능 과 행이체제를 반영하고 있다. 이들 啓 의 종류와 기능은 조선시대 국왕의 국가 운 영방식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밝혀야할 사항이지만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 지지 않은 실정이다. 직계아문이 작성한 23) 23) 啓 는 일정한 경로를 거쳐 국왕에게 상달되고, 국왕은 이에 대해 재결하여 관련기관에 하달한다. 일련의 과정 가운데 啓 를 국왕에게 상달하는 것을 入 啓 24) 라 24)하고, 처결한 啓 를 관련 기관에 하달하는 것을 啓 下 25) 라 25)한다. 그 리고 접수한 啓 에 처결을 적는 것을 判 付 라 부른다. 啓 下 와 判 付 는 더 넓은 의 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啓 下 는 경우에 따라 啓 를 국왕에게 상달하고, 처결하 여, 관련기관에 내리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 이는 현대에 우리가 쓰는 표현인 결재를 받다. 의 의미와 비슷하다. 26) 26) 判 付 는 넓게는 국왕에게 아뢴 사안에 대해 23) 啓 는 대부분 아뢰는 관아에서 문서형태로 완성되어 작성이 끝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도 있다. 草 記 의 경우는 작성과정이 아뢰는 관아에서 종결되지 않는다. 직계아문이 초기 로 아뢸 사안이 있으면, 이를 말로 承 旨 에게 전달하였고, 그 다음 注 書 가 글로 번역하여 문서의 형태를 완성한다.( 芝 峰 類 說 雜 事 部 故 實 祖 宗 朝 大 小 公 事 凡 官 必 親 啓 於 榻 前 而 中 世 以 來 此 規 遂 廢 凡 啓 辭 以 言 語 傳 于 承 旨 則 注 書 以 文 字 書 啓 其 後 乃 用 草 記 鋪 張 文 字 略 如 疏 劄 之 爲 今 政 院 日 記 書 曰 某 承 旨 以 某 司 某 官 言 啓 曰 云 云 蓋 存 舊 規 也 ) 24) 承 政 院 日 記 345책, 숙종 17년 6월 17일(신미) 臺 諫 啓 辭 入 啓 之 際 該 房 承 旨 極 其 詳 審 不 使 有 一 字 之 誤 乃 所 以 重 事 體 之 道 (후략) 이 기사에서 啓 辭 를 入 啓 하는 때에 라고 한 것 과 같이 啓 를 국왕에게 상달하는 것을 入 啓 라 한다. 25) 承 政 院 日 記 544책, 경종 3년 5월 29일(정미) 珙 又 持 禮 曹 啓 目 烏 川 君 嫡 庶 分 別 使 其 宗 中 諸 人 擇 定 讓 寧 大 君 禔 奉 祀 事 伏 讀 啓 下 該 曹 이 기사는 (우부승지) 沈 珙 이 또 예조의 啓 目 을 가져와서 에 관한 사안을 읽었다. 그리고 該 曹 에 啓 下 하였다. 로 해석된다. 啓 下 는 啓 下 該 曹 또는 啓 下 某 司 와 같은 표현으로 사용된다. 26) 銀 臺 條 例 禮 房 攷 事 大 請 陳 賀 陳 奏 陳 慰 進 香 卞 誣 等 事 隨 事 差 遣 齎 去 表 咨 自 承 文 院 前 期 啓 下 畢 寫 後 承 文 院 本 院 考 이 조문에서 自 承 文 院 前 期 啓 下 는 승문원에서 기한 전에 啓 下 한다. 로 해석된다. 銀 臺 條 例 나 銀 臺 便 攷 에는 이와 같이 에서 啓 下 한다. 와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표현에서 啓 下 의 주체인 은 예로 든 조문과 같이 승정 원이 아니다. 다른 직계아문이 주체로 적혀있는데, 啓 下 가 관련 관아에 하달하는 과정만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03 처결하여 관련기관에 하달하는 과정을 포괄하여 가리키기도 하고, 27) 27)좁게는 啓 의 여백에 적히는 처결 내용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28) 28)다음 표는 入 啓, 判 付, 啓 下 라는 용어가 啓 의 유통 과정 가운데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지 나타낸 것이다. 29) 29) <표 2> 入 啓, 判 付, 啓 下 의 좁은 의미(1)와 넓은 의미(2) 국왕에게 상달 처결 관련기관에 하달 入 啓 判 付 1 判 付 2 啓 下 1 啓 下 2 2) 判 付 의 구성요소 조선후기 判 付 의 서식을 제시하고 있는 자료는 고종 7년(1870)에 편찬된 승정 원의 관서지인 銀 臺 條 例 附 錄 의 判 付 規 式 (이하 판부규식 )이 있다. 여기에는 判 付 를 작성하는 서식이 체계적이고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승지가 判 付 를 작성할 때 참고하기 위해서 휴대하기 알맞게 만든 笏 記 (이하 판부규식 홀기 )가 있는데,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각각 1건씩 보관하고 있 을 뜻한다고 볼 수 없다. 이때의 啓 下 의 의미는 문서를 상달하고, 처결을 받아, 다시 상 달했던 관아에 전달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에 쓰는 결제를 받다. 라는 표현도 문서를 결재권자에게 올리고, 결재권자가 처결을 하면, 이를 수령하는 행위를 포괄하여 사용된다. 27) 文 宗 實 錄 권9, 1년 9월 17일(신미) 凡 讞 上 裁 決 而 下 謂 之 判 付 이 기사에서 국왕( 上 )에 게 아뢴 것을 재결하여 내리는 것을 判 付 라 한다. 라고 한 것을 보아, 判 付 는 재결하는 행위와 관련 기관에 내리는 과정을 포함한 용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의미를 지 닌 표현으로 判 下 가 있다. 28) 承 政 院 日 記 에는 上 命 書 判 付 曰 依 允. 과 같은 기사가 자주 발견된다. 判 付 를 쓰다 에서 判 付 는 啓 의 여백에 적는 처결 내용을 가리킨다. 29) 判 付, 啓 下 가 경우에 따라 다른 의미를 뜻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서술의 편의상 判 付 1 과 啓 下 1의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204 奎 章 閣 43 다. 30) 30)이 홀기는 정조 3년(1779) 국왕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 휴대하기 시작한 것 으로, 31) 31) 銀 臺 便 攷 에도 승지가 入 侍 할 때 휴대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32) 32)2건의 판 부규식 홀기의 작성된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肇 慶 廟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작성 연대의 상한선은 조경묘를 조성한 영조 47년(1771)이고, 비변사의 업무가 광범위 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 하한선은 비변사의 기능이 약화되어 의정부로 편입된 고종 2년(1865)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영조 51(1775)년 12월 18일에 반포된 왕세 손 대리청정 절목이나, 순조 27년(1827) 2월 9일에 반포된 왕세자 대리청정 절목 에 판부규식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조목이 포함되어 있다. 33) 33) 위와 같이 현재 남아 있는 判 付 의 작성 서식을 보여주는 자료는 18세기 후반에 서 19세기에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判 付 의 서식은 이 시대에 작성된 判 付 를 대상으로 하였다. 물론 承 政 院 日 記 와 조선후기에 각 관아 에서 작성한 謄 錄, 그리고 儀 軌 에 각 관아가 국왕에게 올린 啓 와 이에 대한 判 付 가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자료를 통해 귀납적인 분석을 하는 것보다 명확한 조항을 통해 작성 원칙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판부규식과 판부규식 홀기를 통해 判 付 의 서식을 대략 파악할 수 있지 30)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청구기호 규장각 가람 古 349.102 P192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유물번호 서35178. 두 홀기의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다. 단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은 還 判 付 를 언급한 내용과 경우에 따른 判 付 의 서식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부분이 더 있다. 還 判 付 에 대해서는 본 논문 2장 참조. 31) 承 政 院 日 記 1438책, 정조 3년 3월 27일 신해 命 書 傳 敎 曰 日 前 以 坐 直 承 旨 之 誤 下 判 付 有 飭 敎 矣 其 後 判 下 亦 不 如 式 雖 以 昨 日 事 言 之 各 道 設 賑 狀 啓 之 判 下 做 錯 甚 多 縱 由 一 二 承 宣 新 入 生 疎 之 致 而 不 察 則 非 細 且 聞 判 付 之 違 格 每 在 持 公 事 入 侍 時 云 與 其 未 諳 之 事 例 難 練 熟 毋 寧 叩 問 解 事 院 吏 之 爲 寡 過 此 亦 問 禮 問 官 之 義 固 何 難 哉 以 此 令 新 資 承 旨 知 悉 惕 念 擧 行 因 此 有 定 式 者 今 後 本 院 各 房 集 錄 該 房 合 行 判 下 事 例 作 爲 笏 記 大 小 入 侍 必 皆 持 入 以 爲 審 考 之 地 此 似 無 稽 之 事 然 笏 之 爲 義 所 以 記 忽 備 忘 也 같은 책 동년 동월 28일의 기사에서도 관련 내용을 볼 수 있다. 32) 銀 臺 便 攷 通 攷 承 旨 凡 入 侍 時 判 付 式 笏 記 揷 于 草 紙 軸 入 侍 33) 英 祖 實 錄 권126, 51년 12월 18일 신유; 純 祖 實 錄 권28, 27년 2월 9일 을묘; 承 政 院 日 記 1372책, 영조 51년 12월 18일 신유; 2212책, 순조 27년 2월 9일 을묘.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05 만, 그 규정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원 문서와 대조해 보는 작업도 필요하다. 현재 남아 있는 원 문서는 대부분 규장각한국학연구소에서 보관 중인데, 작성연대가 19세기 후반에 편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발급 관아도 대부분 禮 曹 이기 때문에 判 付 의 다양한 서식을 모두 대조해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 서 대조할 원 문서가 없는 서식은 각 관아의 謄 錄, 承 政 院 日 記 등 判 付 가 전사 되어 있는 자료를 통해 확인하도록 하겠다. 敎 書, 敎 旨, 諭 書 등 다른 국왕문서가 서식이 비교적 일정한 것에 비하여, 判 付 의 서식은 경우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다. 즉 入 啓 된 문서의 종류와 내용 그리고 入 啓 하는 방식에 따라, 특정한 구성요소를 결여하기도 하고 같은 구성요소를 표기 하더라도 규정된 문구가 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각각의 경우에 따른 判 付 의 서 식을 알아보기 위해서 일단 모든 구성요소를 갖춘 判 付 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이 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후기 직계아문이 업무를 처리하는데 주로 사용했던 문서의 종류는 啓 本, 啓 目, 狀 啓 와 草 記, 啓 辭 등이 있다. 초기와 계사는 문서의 처 리과정을 최소화한 형태이므로 判 付 의 기본적인 요소를 파악하는데 적절하지 않 다. 그리고 啓 本, 狀 啓 는 국왕의 최종적인 처결이 바로 적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 다. 34) 34)반면 啓 目 은 대개 국왕의 처결이 최종적으로 내려진 判 付 가 적힌다. 따라서 판부규식과 판부규식 홀기의 규정 역시 계목에 적는 서식을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 다. 여기에서는 계목에 내린 判 付 를 통해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배치방식을 살펴보 도록 하겠다. 다음 문서는 고종 21년 禮 曹 가 작성한 啓 目 이다. 35) 35)우측에는 판부규식 홀기에 그려져 있는 서식을 옮겨 놓은 것이다. 36) 36)우선 判 付 는 入 啓 문서 좌측 여백에 큰 글씨로 작성되었다. 37) 37) 啓 目 의 내용을 우측에 치우치게 작성하여 判 付 를 위한 여백 34) 여기서 국왕의 최종적인 처결이 바로 적히지 않는 경우 란 본 논문 2장 4절에서 설명하 고 있는 啓 下 判 付 를 가리킨다. 35)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문서번호 93369. 36) 현전하는 판부규식 홀기 가운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에만 서식이 그려져 있다. 37) 承 政 院 日 記 정조대 기사에는 승지가 判 付 를 작은 글씨로 적어 추고 받거나 지적당하는 사례가 있다. 承 政 院 日 記 1744책, 정조 19년 5월 25일 계묘 彦 鎬 曰 諸 道 狀 啓 啓 下 判 付

206 奎 章 閣 43 을 남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즉, 모든 入啓하는 문서에는 <그림 2>의 계목과 같 이 判付를 위한 여백을 남겨두어야 했고, 이를 어기면 승지가 작성자의 처벌을 요 38)38) 청했다. <그림 2> 1884년 예조계목(좌)와 판부규식 홀기의 서식(우) 39) 다음으로 각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우측부터 ①은 啓字印 이고, ②는 立月, ③ 39) 은 啓 자, ④는 처결내용, ⑤는 담당승지의 직함과 서명을 표기한 부분이다. 이 가 운데 승지가 작성하는 부분은 ②, ③, ④, ⑤이며, 이를 判付 라 부른다. ① 啓字印 은 엄밀히 말하면 判付는 아니지만, 그 기능이 判付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함 께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각 요소의 기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啓字印은 초서로 啓 자를 務從大書 新有定式 而卽見京畿監司徐有防本月十二日兩度啓本之下本司者 則字劃不大 有違 定式 當該承旨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 ; 1761책, 정조 20년 3월 27일 계묘 上命分書判 付 上曰 判付之大書 曾有申飭 而又復細書 乃爾耶 38) 뺷承政院日記뺸 1605책, 정조 10년 7월 19일 경신, 衍德曰 奏御文字 何等至重 而今此禁府 啓目 初不審愼 致使紙尾 全無餘地 判付之際 不得啓下 事體所在 誠極未安 當該堂上 推考 警責 何如 上曰 依爲之 39) 조선시대에 啓자를 세긴 국왕의 印信을 가리키는 용어는 啓字 였다. 엄격히 말하면 啓字 가 올바른 표현이지만, 뒤에 살펴볼 判付의 구성요소의 하나로 啓 라는 글자를 적는 부분을 가 리키는 것과 혼동될 우려가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啓字印 으로 지칭하도록 하겠다.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07 새긴 銅 印 으로 큰 것 작은 것 각 1개씩 있었는데, 40) 40) 判 付 와 함께 찍히는 것은 그 중 큰 것이다. 啓 字 印 은 符 信 이나 御 寶 와 같이 국왕 고유의 기물이었다. 41) 41) 啓 자는 아뢰다 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글자의 의미만 놓고 생각할 때 아룀을 당하는 국 왕이 啓 字 印 을 찍는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啓 자는 열다, 이해하다 가 원래 뜻이다. 아뢰다 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 에게 알게 해드리다 또는 듣게 해드리다 라는 공손한 표현으로 사용된 경우이다. 즉 국왕이 주체가 될 경우 啓 자는 알았음 또는 이해했음 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국왕이 啓 字 印 을 답인하는 행위는 일차적으로 문서의 내용을 정상적으로 접수하였 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啓 字 印 은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는 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백에 적히는 判 付 의 내용에 공증력을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啓 字 印 을 찍는 주체는 원칙적으로 국왕이었다. 실제 국왕의 성향이나 처리하는 정무의 성격에 따라 啓 字 印 을 국왕이 직접 찍는 경우도 있었다. 42) 42)그러나 대개는 내관이 대신 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찍을 때는 정해진 위치에 바르게 찍어야 했다. 銀 臺 條 例 에 의하면 啓 字 印 을 잘못된 위치에 찍었을 때 승지가 처 벌을 청하는 대상은 내관이었고, 43) 43) 承 政 院 日 記 에 실제 그러한 사례가 종종 등장 한다. 44) 44)이를 통해 볼 때, 啓 字 印 을 정해진 위치에 찍는 책임은 내관에게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 立 月 과 3 啓 자는 啓 자를 擡 頭 하는 바람에 행을 달리했지만, 그 의미는 모년 40) 銀 臺 便 攷 兵 房 攷 標 信, 啓 字 大 小 各 一 下 方 刻 草 書 啓 字 用 於 啓 下 文 書. 啓 字 印 에 관 한 實 錄 의 기사는 세조 9년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世 祖 實 錄 9년 6월 4일 임술) 그리고 啓 자를 초서로 새긴 것은 세조 10년부 터이다.( 世 祖 實 錄 권33, 세조 10년 4월 27일 기유, 命 刻 草 書 啓 字 印 啓 下 文 書 以 爲 標 ) 41) 임천환, 2003 朝 鮮 後 期 承 政 院 注 書 에 대한 硏 究, 국민대학교 석사논문, 35면; 宣 祖 實 錄 권79, 29년 윤8월 13일 계축, 至 於 啓 字 乃 人 君 之 器 其 重 與 符 寶 無 異 42) 承 政 院 日 記 629책, 영조 2년 12월 22일 기묘. 43) 銀 臺 條 例 故 事, 啓 下 公 事 踏 啓 違 式 者 當 該 中 官 請 罪 事 下 敎 44) 承 政 院 日 記 1779책, 정조 21년 7월 7일 갑술 上 曰 中 官 之 踏 啓 違 式 者 承 旨 何 不 請 罪 此 後 啓 下 公 事 如 有 此 等 處 當 該 中 官 隨 卽 請 罪 也

49) 208 奎 章 閣 43 모월 모일에 아뢰었음 으로 연결된다. 45) 45)연월일을 적는 부분을 立 月 로 지칭한 것 은 판부규식 홀기에 제시된 서식의 표현을 따른 것으로, 立 月 은 承 政 院 日 記 에 도 判 付 의 요소 중 하나를 가리키는 용어로 나타난다. 46) 46)3 啓 자가 해석상으로는 물론 승지가 주체가 되는 아뢰다 라는 의미이지만, 立 月 은 실제 국왕의 判 付 가 내 려진 일자 로 기능하였다. 그 이유는 대개 入 啓 한 일자와 국왕의 判 付 가 내려진 일 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밤늦게 入 啓 한 경우 국왕이 다음날 啓 下 하여, 立 月 과 啓 下 일자는 차이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불가피한 경우에 발생 하는 일이었고, 특히 중요한 사안에 대해 처결하는 判 付 일 경우 立 月 은 적은 당일 반드시 써서 처결을 받도록 하였다. 47) 47)즉 立 月 은 국왕의 명령이 발하는 시점을 표 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立 月 에 적힌 일자와 이를 시행할 담당 관아가 계하 받는 시점에 차이가 있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48) 48) 立 月 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여 연도를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皇 壇 이나 宣 武 祠 에 대한 사안을 入 啓 할 때에는 淸 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로 표기하였다. 49) 45) 현재 고전번역원은 承 政 院 日 記 를 번역할 때, 이 啓 자를 일괄적으로 啓 下 하였다 로 번 역하고 있다. 承 政 院 日 記 의 기사는 원 문서에 적힌 判 付 의 立 月 이 생략되어 있다. 즉, 3 啓 자, 4처결내용만 그대로 연결하여 라고 계하하였다 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 러나 이는 현대 우리말로 부드럽게 해석하기 위한 방편일 뿐 명확한 근거가 제시된 지침 이 아니다. 또한 啓 자 자체만으로 啓 下 의 의미를 갖는 용례를 찾아볼 수 없음을 생각할 때 啓 자의 글자의 뜻을 아뢰다 이외의 뜻을 부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46) 承 政 院 日 記 823책, 영조 12년 4월 4일 무진; 1468책 정조 4년 8월 10일 병진; 1743책 정조 19년 4월 19일 기해; 2213책 순조 27년 3월 9일 갑신. 47) 承 政 院 日 記 786책, 영조 10년 9월 1일 계유 傳 于 任 守 迪 曰 凡 公 事 或 至 夜 深 或 至 翌 日 猶 可 啓 下 而 至 於 還 判 付 公 事 異 於 他 公 事 自 有 日 字 雖 夜 深 必 以 當 日 卽 爲 書 入 48) 承 政 院 日 記 129책, 효종 4년 10월 19일 신사 領 議 政 鄭 太 和 所 啓 曺 後 益 戰 船 火 器 改 鑄 事 啓 本 本 月 十 二 日 判 下 公 事 十 三 日 出 給 備 局 問 其 遲 滯 之 由 則 下 人 言 政 院 下 吏 答 以 承 旨 病 臥 就 睡 不 卽 書 判 付 云 殊 甚 怠 慢 矣 上 曰 當 該 承 旨 査 推 事 命 下 矣 取 考 判 付 公 事 則 十 二 日 右 副 承 旨 沈 之 漢 所 書 而 其 日 之 漢 不 爲 直 宿 其 判 付 則 乃 申 時 前 所 書 也 病 臥 就 宿 之 說 實 涉 無 據 不 知 某 處 下 人 中 間 遲 滯 而 有 此 托 稱 也 本 院 下 吏 則 自 本 院 從 重 治 罪 之 意 敢 啓 傳 曰 知 道 ; 142 책, 효종 7년 9월 3일 무신 又 啓 曰 昨 朝 全 南 監 司 趙 啓 遠 狀 啓 粘 目 請 送 宣 諭 御 史 事 至 于 今 朝 未 見 判 付 問 於 政 院 則 答 以 未 下 日 已 抵 午 之 後 始 爲 出 給 乃 是 初 二 日 判 付 也 時 急 擧 行 之 事 淹 置 中 間 政 院 所 爲 殊 甚 可 駭 當 該 承 旨 推 考 何 如 答 曰 允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09 국왕에게 올리는 주요한 문서에 간지를 사용한 이유는 아뢰는 내용이 明 을 기리기 위한 제사를 받드는 사안에 청의의 연호를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그 사례 로 고종 21년(1884) 예조가 발급한 無 啓 目 單 子 이다. 50) 50) 判 付 에 甲 申 二 月 二 十 九 日 啓 라 하여 청나라의 연호인 光 緖 위에 간지인 甲 申 을 덮어쓴 것을 볼 수 있다. 51)51) <그림 3> 1884년 예조 무계목단자 立 月 과 啓 자에 이어서 국왕의 4처결내용을 적고, 가장 바깥 행에는 5담당 승 지의 직함 및 서명을 표기한다. 처결 내용은 문서에서 건의한 사안에 대한 국왕의 가부를 표기한 것이고, 경우에 따라 가부만 정하지 않고 별도의 지시사항을 추가 49) 銀 臺 便 攷 通 攷 通 行 事 例 凡 屬 於 皇 壇 宣 武 祠 文 書 不 書 大 年 號 처음에는 皇 壇 관련 문서 에만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으나, 숙종 43년 이후부터 宣 武 祠 관련 문서도 청의 연호를 쓰지 않기 시작하였다.( 肅 宗 實 錄 권60, 숙종 43년 8월 5일 병술, 鎭 厚 又 言 宣 武 祠 祝 文 書 彼 國 年 號 云 兩 經 理 皆 是 皇 朝 欽 差 若 依 大 報 壇 例 勿 書 彼 國 年 號 外 方 有 天 將 廟 處 亦 爲 勿 書 恐 爲 得 宜 上 可 之 ) 50)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문서번호 93352. 無 啓 目 單 子 의 서식에 관해서는 명경일 2010 앞의 논문 참조. 51)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문서번호 93351의 1884년 禮 曹 無 啓 目 單 子 도 皇 壇 望 拜 禮 에 관한 사안을 아뢰는 내용으로, 判 付 일자를 청나라의 연호 대신 간지 甲 申 으로 표기하였다.

210 奎 章 閣 43 하는 경우도 있다. 승지의 직함을 표기할 때는 短 啣 으로 하기도 하고, 長 啣 으로 하 기도 한다. 승지가 서명을 하는 이유는 判 付 의 작성자이기 때문이다. 判 付 안에 담 당 관원이 서명을 하는 이유는 작성 내용에 책임을 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후 에 문제가 생겼을 때 考 驗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判 付 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 제 判 付 의 작성에 오류가 있거나 전달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직접적인 증거로 이 서명을 활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으로 判 付 를 구성하는 요소와 각 구성요소의 작성주체와 기능을 살펴보았 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判 付 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우선 判 付 는 啓 의 여백에 작성되지만 별도의 기능을 갖고 있는 국왕 문서의 일 종이었다. 왜냐하면 判 付 는 발급처와 수취처가 분명하며, 공증력을 발휘하기 위한 정해진 서식이 있다는 점에서 문서의 성립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 로 判 付 의 발급주체는 승정원의 승지였다. 判 付 에 담기는 내용이 국왕의 명령임에 도 불구하고 승지를 발급주체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작성자가 승지이고, 발급주 체로서 서명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왕의 명령을 전하는 문서는 敎 旨, 敎 書, 諭 書 처럼 국왕이 형식상 발급주체가 되는 종류도 있지만, 有 旨 처럼 승지가 국왕의 명령을 대신 전하는 형태도 있는 것이다. 52) 52)즉 判 付 는 엄밀하게 말하면 후자에 해 당하는 문서이다. 3. 判 付 의 작성절차에 따른 서식의 변화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였다. 따라서 啓 의 유통 도 승정원이 중심이 되었다. 內 侍 府 의 承 傳 色 (정4품 尙 傳 )과 掖 庭 署 의 大 殿 司 謁 (정6품)도 문서의 출납에 관여하지만, 53) 53)이들의 역할은 보조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52) 有 旨 에 대해서는 노인환, 2010 조선시대 임명 관련 上 來 有 旨 연구, 古 文 書 硏 究 36 참조. 53) 經 國 大 典 吏 典 承 政 院 掌 出 納 王 命 ; 內 侍 府 掌 大 內 監 膳 傳 命 守 門 掃 除 之 任 ; 掖 庭 署 掌 傳 謁 及 供 御 筆 硯 闕 門 鎖 鑰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11 문서의 출납에서 승정원과 내관의 비중은 정치적 환경에 따라 약간의 변동은 있었 지만, 54) 54)내관의 발호에 대한 문신들의 견제는 꾸준히 이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로 조선시대에 걸쳐 내수사를 제외한 모든 관아의 啓 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승정 원에서 접수하여 처리하는 원칙이 지켜졌다. 55) 55)즉 승정원의 책임 하에 直 啓 衙 門 으 로부터 문서를 접수하여 국왕에게 入 啓 하고, 승정원이 국왕의 처결에 따라 判 付 를 작성하여, 담당 관아에 啓 下 하는 일체의 과정이 진행된 것이다. 한편 승정원에서 啓 를 출납하는 일체의 과정은 判 付 의 작성 방식에 영향을 미 쳤다. 즉 판부의 서식에는 啓 를 처리하는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대로 드러나는 것 이다. 여기서는 판부의 작성절차를 살펴보고, 동시에 그 절차로 인한 판부의 서식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入 啓 방식과 啓, 親 啓 의 표기 判 付 의 구성요소 가운데 立 月 좌측에 적는 啓 자는 내관을 통해 入 啓 하였을 때에 는 그대로 啓 자만 적지만, 승지가 入 侍 하여 직접 入 啓 하였을 경우에는 親 啓 라고 적는다. 현전 하는 원 문서 가운데는 立 月 좌측에 啓 자 대신 親 啓 라고 적은 사례 는 없다. 그러나 承 政 院 日 記 에 전재되어 있는 형태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원문] 賑 恤 廳 啓 目 粘 全 州 判 官 趙 長 鎭 之 自 備 恰 爲 千 石 勤 勞 最 於 諸 邑 泰 仁 兩 人 之 出 穀 補 賑 竝 足 嘉 奬 而 旣 無 請 賞 俱 不 擧 論 爲 白 乎 旀 光 州 嘉 善 姜 德 輝 等 宜 有 特 異 之 褒 以 示 酬 報 之 道 竝 54) 이동희, 1994 朝 鮮 初 期 宦 官 의 王 命 出 納 活 動, 전북사학 17; 장희흥, 2006 朝 鮮 時 代 政 治 權 力 과 宦 官, 경인문화사, 99-103면. 55) 내수사의 문서는 내관이 접수하고 判 付 까지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행에 대한 논 란이 연산군 2년에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燕 山 君 日 記 18권, 2년 9월 20일; 동년 동 월 24일; 동년 동월 27일) 문신들은 내관이 문서를 접수하고 判 付 하는 것에 비판하였지 만, 국왕은 이전부터 있었던 관례였음을 들어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계속 이어진다. ( 燕 山 君 日 記 28권, 3년 10월 24일) 현재 남아 있는 내수사 관련 문서의 判 付 를 내관이 담당하여 작성 흔적이 있는 것을 볼 때, 내수사에 관한 한 이러한 관행은 조선후기에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212 奎 章 閣 43 令 該 曹 考 例 稟 處 何 如 親 啓 全 州 判 官 趙 長 鎭 之 自 備 穀 數 旣 至 千 包 且 其 賑 政 勤 勞 最 著 云 爾 則 合 有 嘉 奬 之 典 而 論 賞 次 第 加 資 表 裏 雖 曰 爲 最 此 等 守 令 更 試 盤 錯 無 所 不 可 準 職 除 授 泰 仁 閑 良 李 國 茂 李 千 孫 等 道 啓 雖 不 請 賞 法 典 內 五 十 石 猶 給 帖 加 是 隱 則 況 且 倍 是 之 數 乎 令 該 曹 考 例 草 記 論 賞 爲 良 如 敎 [번역문] 진휼청 啓 目. 전주판관 趙 長 鎭 이 스스로 마련 한 것이 꼭 천석이나 되어 노고가 여 러 읍 가운데 최고이고, 태인의 어느 두 사람이 곡식을 내어 진휼에 보태니 모두 칭찬 하여 장려할 만하지만 아직 賞 을 청하지 않으니 거론하지 않으며, 광주의 가선대부 姜 德 輝 등은 마땅히 특별한 포상을 주어 보상해 주는 도리를 보여 주어야 하므로 모두 該 曹 로 하여금 전례를 참고하여 稟 處 하게 함이 어떻습니까. 親 啓 함. 전주 판관 趙 長 鎭 은 스스로 마련한 곡식의 수량이 이미 천 가마니에 이르 고, (중략) 該 曹 로 하여금 전례를 참고하여 草 記 로 論 賞 하라고 하심. 56) 56) 이와 같이 입계 방식을 判 付 의 서식에 반영하여 親 啓 라고 적도록 한시킨 것은 영조 12년(1736) 이후부터이다. 上 이 말하길, 몸소 임하여 啓 覆 할 때에, 문서의 判 付 에 반드시 親 啓 라 쓰는 것은 事 體 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여러 승지들이 公 事 (문서)를 가지고 入 侍 한 자리에 서 榻 前 에서 判 付 하는 것은 몸소 임하여 啓 覆 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후에는 (승 지가) 公 事 를 가지고 入 侍 할 때 문서의 判 付 는 다음과 같이 한다. 啓 下 各 該 司 라고 判 付 를 적는 경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啓, 依 允 또는 奉 敎 可 라 하고 승지의 직함을 적었던 것은 啓 覆 문서의 例 와 같이 親 啓 라고 쓰도록 하라. 이를 定 式 으로 하여 시행 한다. 하였다. 57) 57) 56) 承 政 院 日 記 1510책, 정조 6년 5월 24일 경신. 57) 承 政 院 日 記 827책, 영조 12년 6월 10일 계유, 上 曰 親 臨 啓 覆 時 文 書 判 付 必 書 以 親 啓 者 所 以 重 事 體 也 諸 承 旨 持 公 事 入 侍 時 榻 前 判 付 與 親 臨 啓 覆 無 異 此 後 持 公 事 入 侍 時 文 書 判 付 啓 下 各 該 司 之 外 啓 依 允 奉 敎 可 書 啣 者 依 啓 覆 文 書 例 以 親 啓 書 之 定 式 施 行 可 也 啓 下 各 該 司 라고 判 付 를 적은 경우 란 狀 啓 가 국왕에게 상달되었을 때 바로 재결을 내리지 않고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관사에 내려서 의논한 후 아뢸 것을 지시할 때를 의미한다. 이때 에는 승지의 직함을 적지 않고 啓 下 某 司 라고만 判 付 를 적는다.( 銀 臺 條 例 附 錄 判 付 規 式 各 道 狀 啓 書 啓 下 某 司 ( 隨 所 啓 事 下 各 該 司 而 有 令 廟 堂 稟 處 而 事 屬 於 武 府 者 下 三 軍 府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13 영조 12년(1736) 이전에는 啓 覆 할 때 보고한 문서에만 判 付 에 親 啓 라고 적었 다. 영조는 승지가 各 司 에서 올린 문서를 들고서 便 殿 에 入 侍 하여 入 啓 하는 경우 역시 啓 覆 할 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겨, 이와 같은 지시를 한 것이다. 승지가 입시하여 문서를 入 啓 하는 경우, 승지는 각각 맡은 六 房 의 직무에 따라 문서를 가지고 편전에 입시하였다. 그리고 국왕에게 문서를 읽어주고 국왕의 처결 을 듣고 判 付 로 작성하였다. 승지는 이때 문서에 담긴 사안에 대한 국왕의 처결에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이 방식을 특별히 承 旨 親 啓 라고 불렀다. 58) 58)이는 조선후기 현종부터 숙종대를 거쳐 정착된 관행으로, 왕명 생산과정의 개방성을 높이고자 하 는 신료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承 旨 親 啓 가 정착되고, 나아가서 判 付 의 서식 에도 반영된 것은 조선후기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관행이 정착된 연혁을 당시 入 啓 절차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 入 啓 는 내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방식과 승지가 문서를 가 지고 편전에 입시하여 전달하는 방식이 병행되었다. 먼저 국왕이 大 內 에 있어서 승지와 국왕이 각각 다른 공간에 위치한 상태로 입 계하는 경우, 이때에는 司 謁 또는 승전색을 불러 啓 를 전달하게 하였다. 문서를 전 달받은 국왕은 직접 눈으로 읽는 것이 상례였다. 국왕이 내관에게 문서를 대신 읽 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왕이 눈병이 나서 문서를 읽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경 우가 간혹 있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59) 59) 兵 曹 外 殿 內 各 司 啓 下 者 只 書 啓 字 ) ) 지금까지 啓 依 允 이라 적었던 것은 親 啓 依 允 이 라 적지만, 奉 敎 可 라 적었던 것은 이후 親 奉 敎 可 라고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承 政 院 日 記 1453책, 정조 3년 11월 19일 기해) 58) 承 旨 親 啓 는 조선후기에 편찬된 유서 芝 峯 類 說, 東 典 考, 文 獻 撮 錄, 東 國 文 獻 備 考 등에서 나타나는 용어이다. 實 錄 이나 承 政 院 日 記, 日 省 錄 등의 기사에는 承 旨 持 公 事 入 侍 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59) 承 政 院 日 記 162책, 현종 1년 6월 23일 병오, 殷 相 曰 聖 候 如 是 未 寧 而 緊 急 公 事 則 不 得 停 留 續 續 入 啓 必 妨 於 靜 攝 之 中 矣 姑 限 復 常 間 留 置 以 待 何 如 上 曰 固 知 有 妨 於 調 病 而 時 急 事 何 可 滯 也 殷 相 曰 前 日 持 公 事 入 侍 事 或 命 下 或 取 稟 實 爲 便 好 而 今 則 間 日 受 鍼 不 可 於 間 日 取 稟 故 公 事 到 院 隨 卽 入 啓 添 傷 之 患 固 其 然 也 絳 曰 凡 公 事 不 必 親 覽 使 內 官 奏 達 好 矣 上 曰 或 淸 朝 取 稟 入 侍 可 也 "; 肅 宗 實 錄 권60, 숙종 43년 7월 19일 신미, 上 仍 語 諸 臣 曰

214 奎 章 閣 43 또한 승정원에서는 국왕이 문서를 읽을 때 간편하게 요점을 살필 수 있게 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 수단의 하나가 숙종 40년(1714)부터 시행한 방법으로, 문서의 말단에 요점을 적은 종이를 첨부 하는 것이었다. 60) 60)그리고 영조 47년(1771)에 편찬된 법률서인 攷 事 新 書 를 보면 다른 방식도 언급되어 있는데, 즉 啓 本 의 겉면에는 某 事 라고 요약하는 말을 쓴 노란쪽지를 붙이도록 되어 있었 던 것이다. 61) 61)문서 말단에 요점을 적은 종이를 첨부하는 것과 겉면에 쪽지를 붙이 는 것이 병행된 것인지 어느 시점에 변화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후자의 경우는 1862년 全 羅 道 觀 察 使 鄭 獻 敎 啓 本 이나 1867년 公 忠 道 水 軍 節 度 使 李 志 鼎 啓 本 를 통해 19세기 후반에도 꾸준히 준행된 것이 확인된다. 62) 62) 다음으로 승지가 편전에 입시하여 啓 를 입계하는 경우를 살펴보겠다. 국왕이 승지는 公 事 (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라 는 傳 敎 를 하달하면, 승지는 담당한 六 房 의 업무에 따라 접수해 놓은 문서를 가지고 편전에 입시하였다. 편전에서 국왕을 面 對 한 승지는 榻 前 에 엎드려 문서를 대신 읽어주고, 내관의 손을 거쳐 국왕에게 문 서를 전달한 다음 국왕의 답변을 귀로 들었다. 승지는 이때 문서에 담긴 사안에 대한 국왕의 처결에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특별히 承 旨 親 啓 라고 불렀다. 承 旨 親 啓 란 승지가 국왕에게 직접 아뢰다 라는 의미이다. 芝 峯 類 說, 東 典 考, 左 邊 眼 部 昏 暗 酬 應 文 書 甚 艱 右 邊 又 如 是 目 前 之 憂 不 但 昏 暗 而 止 不 用 眼 力 則 或 有 差 勝 之 道 而 卽 今 文 書 每 每 浩 繁 若 此 不 已 是 促 其 矇 廢 也 必 有 變 通 之 道 然 後 可 無 添 加 之 患 矣 頤 命 曰 下 敎 如 此 變 通 之 道 群 下 孰 不 極 意 思 量 而 自 下 所 可 變 通 者 不 過 減 省 文 書 以 臣 淺 見 凡 入 啓 文 書 使 音 讀 分 明 之 人 讀 之 而 啓 下 或 賜 判 付 不 可 不 命 王 世 子 在 傍 參 見 因 以 明 習 政 務 矣 60) 肅 宗 實 錄 권55, 40년 8월 20일 기축, 昌 集 又 陳 省 事 簡 務 之 說 曰 宣 廟 名 臣 柳 希 春 日 記 有 曰 令 承 旨 看 詳 公 事 抄 記 其 要 粘 於 末 端 使 上 一 覽 瞭 然 庶 幾 精 神 蘇 快 不 至 勞 困 事 柳 希 春 當 宣 廟 嗣 服 初 年 猶 以 此 爲 慮 況 今 上 春 秋 向 衰 天 和 新 復 機 務 酬 應 之 規 一 味 因 循 不 思 變 通 之 道 乎 今 若 如 希 春 之 言 大 小 公 事 及 諸 臣 疏 章 使 政 院 先 抄 要 語 批 旨 中 當 爲 提 論 者 以 別 紙 列 書 數 行 或 數 句 粘 于 上 而 自 上 先 覽 領 會 其 大 意 則 其 枝 辭 浮 語 不 待 勞 神 窮 覽 而 判 付 下 批 之 際 似 爲 簡 便 上 許 之 61) 攷 事 新 書 用 文 字 式 啓 本 式 草 注 紙 作 帖 子 第 一 帖 外 面 當 中 付 黃 籤 書 某 事 要 語 6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全 羅 道 觀 察 使 鄭 獻 敎 啓 本 (1862년, 문서번호 82147), 公 忠 道 水 軍 節 度 使 李 志 鼎 啓 本 (1867년, 문서번호 奎 26227).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15 文 獻 撮 錄 등의 조선후기의 類 書 에는 이 제도가 정착되는 과정을 承 旨 親 啓 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다. 實 錄 이나 承 政 院 日 記, 日 省 錄 등에는 승지가 公 事 를 들 고 입시함( 承 旨 持 公 事 入 侍 ) 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제시한 類 書 에서 정리하고 있는 承 旨 親 啓 의 연혁을 간단히 살펴보자. 經 國 大 典 에서 규정하는 입계방식은 매달 6 衙 日 에 설행하는 朝 參 과 매일 하는 常 參 에 이어지는 朝 啓 를 통하는 것이었다. 법전상에서 朝 會 를 통해 視 事 하는 원칙 을 추구하는 이유는 국왕이 신하와 빈번히 만나 업무를 보고받아 재결하며 정국현 안을 논의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현실에서 그대로 준용되지 않았다. 세종대에는 조참 또는 상참을 통하여 啓 를 처리하는 방 식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지만, 성종대에는 조참은 더 이상 視 事 의 기능을 하지 못 하였고, 상참의 설행 횟수도 줄어들고 있었다. 63) 63) 啓 를 처리함에 있어서 조회의 역할이 줄어들자, 담당관원을 직접 만나는 대신 승 지를 입시하게 하여 처리하는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승지가 승정원에 모여 있는 啓 를 들고 입시하여, 국왕에게 읽어드리고 재결을 받는 방식이 본격적으로 사 용되는 시점은 성종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종대에는 경연이 끝난 이후 경연관 이 나가면 승지가 입시하여 문서를 직접 입계하였고, 64) 64)여기에서도 처리하지 못한 문서가 있으면 국왕이 수시로 편전으로 나아가서 승지의 보고를 받았다. 65) 65) 그러나 성종대 이후에는 承 旨 親 啓 가 점차 폐지되고, 대부분 入 啓 는 大 內 에 머물 고 있는 국왕에게 내관을 통해 들이는 방식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후 承 旨 親 啓 를 복구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조선후기 類 書 인 東 典 考 (철종대 63) 강제훈, 2005 조선 世 宗 朝 의 조회, 한국사연구 128; 2007 조선 성종대 朝 會 儀 式 과 朝 會 운영, 한국사학보 27. 64) 사례는 成 宗 實 錄 64권, 7년 2월 8일 임오. 이 기사는 대간 박숭질이 차자를 올린 내용 이다. 여기서 시사를 실시하지 못하여 지체되는 입계문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말 하고 있다. 이전에는 내관을 경유 입계 방식으로 처리 하였지만, 현재는 경연 자리를 통 해 승지가 親 啓 하는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65) 여름 더위 때문에 경연을 중지하였을 때도 이 방식은 중지하지 않을 것을 명하기도 하였 다. 成 宗 實 錄, 17년 6월 4일 정축, 承 政 院 啓 曰 今 熱 甚 請 依 乙 巳 年 限 七 月 停 經 筵 傳 曰 可 但 承 旨 啓 事 不 可 廢 也 "

216 奎 章 閣 43 편찬)와 文 獻 撮 錄 (1851년 편찬)는 이 承 旨 親 啓 를 복구하려는 시도에 대해 문헌 별로 정리해 놓았다. 承 旨 親 啓 는 조광조가 준용한 이후 곧 행해지지 않았다.[ 海 東 野 言 ] 선조조에 이이가 말하길, 이 규례는 복구할만 합니다.[ 石 潭 日 記 ] 숙종초에 홍문관에서 차자로 승지로 하여금 公 事 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여 친히 재 결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말하길, 홍문관이 차자로 논한 것은 매우 좋습니 다... 하였다.[ 備 考 ] 66) 66) 중종 14년, 승지에게 명하여 직접 입계하도록 명하였다. 상은 편복으로 편전에 자리 하고, 승지와 사관은 이에 스스로 입계하고 물러간다. 또 국기일에는 주자가례에 의거 하여, 상은 천담복을 입고 시신의 복색도 천담복이다. 67) 67) 이 자료에 의하면, 承 旨 親 啓 는 중종대에 조광조의 주도로 잠시 동안 시행되었으 나 곧 폐지되었다. 이는 實 錄 을 통해 중종대에 承 旨 親 啓 방식을 시행할 것을 재위 초부터 계속 이어졌으나 윤허하지 않다가 재위 14년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확인된 다. 68) 68) 中 宗 實 錄 에는 재위 1년 이후 承 旨 親 啓 가 폐지된 연혁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明 宗 實 錄 에 의하면 이는 조광조에 의해 주도되었다가 기묘사화(중종 14 년 11월) 이후 폐지되었다. 그리고 명종 즉위년에도 복구의 건의는 있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69) 69)조선후기에 들어서도 承 旨 親 啓 의 복구의 노력은 계속되어, 선 66) 東 典 考 承 政 院 承 旨 親 啓 趙 光 祖 遵 而 用 之 後 遂 不 行 [ 海 東 野 言 ] 宣 祖 朝 李 珥 曰 此 例 可 復 也 [ 石 潭 日 記 ] 肅 宗 初 弘 文 館 箚 請 命 承 旨 持 公 事 入 侍 親 加 裁 斷. 領 相 許 積 曰 玉 堂 箚 論 甚 好... [ 備 考 ] 67) 文 獻 撮 錄 承 旨 親 啓 事 中 宗 十 四 年 命 承 旨 親 入 啓 事 上 便 腹 座 便 殿 承 旨 史 官 自 此 親 自 入 啓 而 退. 且 於 國 忌 日 依 朱 子 家 禮 上 御 淺 淡 服 侍 臣 服 色 亦 淺 淡 68) 中 宗 實 錄 36권, 14년 6월 28일; 7월 1일; 7월 2일; 7월 3일; 7월 7일. 69) 明 宗 實 錄 1권, 즉위년 7월 20일 경진, 憲 府 啓 曰 政 院 時 方 出 納 公 事 且 二 十 七 日 以 後 則 視 事 聽 政 不 容 久 廢 承 旨 親 啓 而 自 上 親 聽 有 所 裁 決 則 無 遺 濫 之 患 有 詳 盡 之 美 請 依 舊 例 爲 之 答 曰 今 者 出 納 公 事 之 際 不 知 某 事 有 遺 濫 之 弊 而 時 方 幼 沖 猶 未 辨 君 臣 之 禮 何 能 決 其 可 否 於 親 啓 之 時 乎 仍 傳 于 政 院 曰 成 宗 曾 於 十 三 歲 卽 位 不 知 其 時 亦 有 親 啓 之 事 乎 考 其 日 記 以 啓 承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17 조대에 율곡 이이에 의해 건의되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0) 70)이와 같이 承 旨 親 啓 체계의 정착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조선초기부터 계속되어 왔다. 이는 사림세력 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중간에서 내관들이 부릴 농간을 사전에 예방하고, 신하들의 의사를 정확하게 진달하려는 노력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71) 71) 조선후기 承 旨 親 啓 의 복구는 현종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현종은 지속적으로 안질을 앓았기 때문에 문서를 눈으로 읽는 것이 힘들어, 재위 1년 2월 11일 승지 에게 관문서를 가지고 입시하여 읽게 한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은 당시에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고, 한편으로 국왕의 모범적인 정사로 칭송하였다. 顯 宗 實 錄 1년 3월 7일 기사를 보면, 송준길이 이번에 승지가 公 事 를 가지고 입 시한 것은 실로 성대한 거행입니다. 밖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 기뻐 날뛰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계속 이어가고 그치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고 있 다. 72) 72)그리고 계속 이어진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결국 일상적인 관례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73) 73)현종 3년부터는 경연( 召 對 )과 承 旨 親 啓 가 병행되었고, 74) 74)재위 7년까 旨 親 啓 此 祖 宗 舊 規 在 中 宗 己 卯 年 間 趙 光 祖 等 遵 而 用 之 光 祖 等 被 禍 後 遂 廢 不 行 ; 7월 25일 을유, 政 院 啓 慈 殿 曰 前 日 憲 府 所 啓 親 啓 事 考 成 宗 時 例 大 妃 與 上 同 御 寶 慶 堂 凡 視 事 及 引 見 群 臣 皆 無 不 爲 答 曰 成 宗 時 事 目 書 啓 爲 可 但 今 主 上 幼 沖 似 難 依 啓 70) 宣 祖 實 錄 9권, 8년 6월 24일 신묘, 珥 因 啓 曰 今 日 急 務 莫 如 勉 聖 學 以 爲 出 治 之 本 而 必 得 賢 士 與 之 出 入 經 幄 事 進 啓 而 自 上 以 爲 此 事 當 更 問 大 臣 而 處 之 且 承 旨 親 入 啓 事 此 非 遠 規 中 廟 朝 所 行 也 成 廟 朝 無 時 招 玉 堂 入 直 之 人 對 于 便 殿 名 曰 獨 對 此 例 亦 可 復 也 上 曰 承 旨 親 啓 行 之 似 難 若 玉 堂 之 官 則 當 無 時 召 見 不 必 持 冊 進 講 只 可 商 論 義 理 而 已 近 規 朝 講 外 無 接 見 大 臣 之 時 予 意 欲 頻 召 見 矣 " 珥 曰 : 此 事 甚 美 71) 이근호, 2003 승정원일기 보고기록의 특징과 정보화 방안, 한국사론 37, 국사편찬 위원회, 140-146면. 72) 今 此 承 旨 持 公 事 入 侍 實 是 盛 擧 外 人 聞 之 莫 不 欣 聳 繼 此 而 不 輟 不 亦 好 乎 73) 顯 宗 改 修 實 錄 권2, 현종 1년 2월 3일 무자; 顯 宗 實 錄 권2, 현종 1년 2월 11일 병신; 2월 19일 갑진; 3월 7일 임술; 承 政 院 日 記 160책, 현종 1년 2월 11일 병신; 160책, 현 종 1년 2월 12일 정유; 2월 15일 경자; 顯 宗 實 錄 부록, 顯 宗 大 王 行 狀. 74) 顯 宗 實 錄 권6, 3년 10월 23일 계해. 현종대에는 국왕이 오랜 기간 병을 앓고 있어 신하 가 국왕을 면대할 기회를 얻기 힘들었다. 따라서 국왕과 신하의 정무공간으로 의미가 있 는 경연은 承 旨 親 啓 가 행해질 때 召 對 의 방식으로 시행된 것이다.

218 奎 章 閣 43 지 이어지다가 점차 행해지지 않았다. 숙종대에는 즉위년에 홍문관과 허적의 건의로 선왕이 행하던 것을 시행하기로 결정한 적이 있지만, 75) 75)실제로는 즉위 8년 이후 金 錫 冑 의 건의로 본격적으로 시행 하였다. 76) 76)현종대에 경연과 병행한 것은 국왕이 병을 앓고 있어 신하들을 자주 보 기 어려웠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숙종대의 承 旨 親 啓 는 경연과 병행 되지 않았다. 77) 77)이후 承 旨 親 啓 는 법전의 조항으로 규정되지 않았지만, 고종대까지 관행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承 旨 親 啓 의 재결절차는 국왕이 승지에게 公 事 를 들고 입시( 承 旨 持 公 事 入 侍 )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에야 시행되는 부정기적인 것이었다. 承 旨 親 啓 의 횟수 를 매일 또는 격일로 하자고 하거나 자주해야 한다는 건의는 현종대에도 있었 고, 78) 78)숙종대에도 있었지만, 79) 79)정기적으로 설행한다는 규정은 확립되지 못하였다. 朝 參 이나 常 參 의 설행이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 비하여 承 旨 親 啓 는 일종의 관행으로 남아 국왕의 명이 있을 때만 시행함으로써, 문서의 처리가 원활하게 진 행되지 못한 것은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80) 80)결국 정조 가 즉위한 이후 국왕의 지시에 따라 승지친계를 매일 설행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 75) 肅 宗 實 錄 권1, 즉위년 9월 14일 을해; 9월 15일 병자. 76) 肅 宗 實 錄 권13, 8년 9월 15일 기미, 錫 冑 又 言 自 上 必 頻 御 經 筵 從 容 講 論 淸 燕 之 暇 引 接 承 旨 咨 詢 政 務 則 不 但 勤 政 亦 可 爲 知 人 之 道 如 是 則 親 宦 官 宮 妾 之 時 少 接 賢 士 大 夫 之 時 多 中 人 寧 有 舞 弄 之 弊 乎 古 人 云 當 以 宦 官 宮 妾 不 知 名 者 爲 相 群 下 賢 否 旣 爲 聖 明 所 鑑 別 則 用 捨 之 權 自 在 於 上 矣 仍 援 太 宗 朝 金 汝 知 爲 都 承 旨 三 年 擢 拜 兵 判 先 朝 金 壽 興 金 始 振 徐 必 遠 輩 贊 決 裨 益 之 事 請 另 擇 承 旨 仍 責 久 任 上 答 以 體 念 是 後 時 令 承 旨 持 公 事 入 侍 又 承 旨 之 積 仕 者 或 特 旨 陞 擢 蓋 用 是 言 也 77) 肅 宗 實 錄 권13, 8년 10월 28일 신축. 78) 顯 宗 改 修 實 錄 권12, 6년 1월 7일 갑오; 顯 宗 實 錄 권11, 현종 6년 9월 24일 정미. 79) 肅 宗 實 錄 권47, 35년 1월 15일 정해. 80) 顯 宗 改 修 實 錄 권23, 11년 10월 6일 경인, 上 命 承 旨 持 留 院 公 事 入 侍 左 承 旨 南 龍 翼 入 對 於 興 政 堂 古 制 上 逐 日 御 視 事 廳 則 各 房 承 旨 以 所 掌 公 事 入 稟 取 裁 故 出 入 無 時 公 事 不 滯 矣 中 世 以 後 此 規 盡 廢 承 旨 不 有 命 召 則 不 敢 進 內 外 隔 絶 出 納 稟 裁 只 憑 中 官 及 掖 庭 人 之 口 非 所 以 防 壅 蔽 親 上 下 也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19 다. 즉 정조 원년 11월 30일에 국왕이 앞으로 매일 申 時 이전에 승지들은 公 事 를 가지고 입시할 것 을 명하였던 것이다. 81) 81) 2) 判 付 의 작성 과정과 구성요소의 배치 判 付 의 작성주체는 승정원의 승지였다. 승지가 입시하여 入 啓 한 경우는 물론이 고, 내관을 통해 入 啓 한 경우에도 승지가 직접 문서의 여백에 判 付 를 적었다. 승정 원의 관서지 銀 臺 條 例 에 判 付 規 式 이 실려 있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判 付 에는 국왕의 명령을 정확하게 담아야 하기 때문에 승지가 국왕과 같은 공간에 있는지 다른 공간에 있는 지에 따라 각각의 장애요소가 있었다. 먼저 내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入 啓 방식에서 判 付 의 작성 과정을 살 펴보자. 승정원의 승지는 국왕의 처결이 내관을 거쳐 전해오면 정해진 서식에 맞 추어 判 付 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전달방식은 두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는 국왕의 처결 내용을 승전색이 승지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왜곡될 수 있 다는 점이다. 둘째는 判 付 의 공증력 확보 장치를 갖추는 시점에 관한 것이다. 判 付 의 공증력은 국왕이 답인하는 啓 字 印 과 담당승지의 서명을 갖춤으로서 확보하였 다. 그러나 문제는 계자를 답인하는 것이 승지가 判 付 를 작성하기 이전에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啓 字 印 이 국왕의 재결에 공신력을 부여하는 장치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승지가 의도적으로 또는 실수로 判 付 를 잘 못 적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승지가 스스로 判 付 를 잘못 작 성한 것을 발견하면, 즉시 국왕에게 아뢰어 수정해야 했다. 82) 82)그러나 담당관아에 계하한 후에 判 付 에 잘못이 발견되어 문제가 되는 사건이 실제로 종종 발생하였 다. 83) 83)형벌을 내리는 사안 등 주요한 내용을 담은 啓 에 대한 判 付 는 특히 이러한 81) 承 政 院 日 記 1409책, 정조 원년 11월 30일 임진, 上 曰 此 後 則 每 日 申 前 諸 承 旨 持 公 事 入 侍 事 政 院 知 悉 ; 政 院 故 事 吏 攷 通 行 雜 式 每 日 申 前 諸 承 旨 持 公 事 入 侍 事 下 敎 丁 酉 十 一 月 三 十 日 82) 銀 臺 條 例 附 錄 提 稟 傳 敎 與 判 付 有 誤 書 則 稟. ; 銀 臺 便 攷 通 攷 通 行 事 例 傳 敎 與 判 付 若 有 誤 字 則 承 旨 隨 即 提 稟 事 下 敎.

220 奎 章 閣 43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은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어떠한 장치를 갖추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정조대의 기사이다. 무릇 判 付 는 입시했을 경우는 승정원이 받아 적는다. 그렇지 않으면 片 紙 로 判 付 를 써서 내려주어, 승정원으로 하여금 원본 啓 目 의 아래에 다시 써서 도로 入 啓 하게 한 후, 啓 字 印 을 찍으니, 이것이 還 判 付 이다. 형벌을 주거나, 사형시키거나, 상을 주거나, 관작을 주는 것은 얼마나 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잠시 소홀한 틈에 뜻밖의 우려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還 判 付 하여 간사한 일을 방지하는 법이 있는 것이 다. 84) 84) 이 기사를 통해 정조대에 이미 종이에 적어서 승지에 종이게 처결 내용을 전달 하는 방법으로 첫 번째 문제점을 해결할 것을 볼 수 있다. 85) 85)둘째, 啓 字 印 의 공신 력 문제를 보완하는 장치는 還 判 付 이다. 還 判 付 란 判 付 를 작성하는 절차를 가리 키는 용어로, 승지가 判 付 를 먼저 적게 하고, 왕이 이를 검토한 후에 계자를 답하 는 방식이다. 즉 국왕이 啓 를 열람하면, 일단 재결 내용을 쪽지에 써서 전달하여 승지로 하여금 判 付 를 啓 의 여백에 적게 한 다음에, 이를 다시 들이게 하여 判 付 83) 承 政 院 日 記 1796책, 정조 22년 9월 2일 임술. 84) 正 祖 實 錄 권49, 22년 10월 12일 임인, 次 對 上 謂 左 議 政 李 秉 模 曰 昨 夜 嶺 南 侍 從 守 令 上 疏 皆 已 見 之 而 卿 意 則 何 如 秉 模 曰 疏 本 昨 夜 從 門 隙 出 來 故 臣 則 得 見 而 諸 宰 想 未 見 之 矣 上 曰 諸 宰 如 未 盡 見 從 後 稟 處 近 來 政 院 皆 如 是 大 臣 如 欲 見 之 則 雖 傳 敎 軸 之 不 得 踰 望 門 者 自 當 出 送 至 於 上 疏 則 啓 下 備 邊 司 者 卽 當 粘 連 回 啓 故 以 原 本 卽 爲 頒 布 不 踏 啓 字 者 以 草 記 稟 處 故 原 本 例 不 出 闕 門 雖 萬 言 疏 之 時 急 稟 處 者 司 吏 必 謄 錄 而 去 近 來 則 雖 非 啓 下 本 司 者 直 以 疏 本 回 公 云 寧 有 如 許 道 理 此 承 旨 之 不 擇 而 然 也 以 向 來 秋 曹 郞 拿 處 事 言 之 承 旨 若 爲 廳 坐 而 使 該 郞 聽 傳 敎 則 寧 有 是 乎 大 抵 拿 處 極 爲 重 大 刑 推 重 罪 皆 從 拿 處 中 勘 斷 則 法 意 甚 重 故 凡 干 判 付 若 値 入 侍 時 承 旨 承 書 不 然 則 以 片 紙 書 下 判 付 令 政 院 更 書 於 原 啓 目 之 下 還 爲 入 啓 後 踏 啓 字 此 是 還 判 付 也 刑 人 殺 人 賞 人 爵 人 何 等 審 愼 則 毫 忽 之 間 或 有 意 外 之 慮 故 乃 有 還 判 付 防 奸 之 法 而 近 日 則 承 旨 亦 不 知 此 箇 法 意 豈 不 寒 心 乎 85) 이러한 방식이 정착된 시점은 아직 확정할 수 없다. 처결 내용을 말로 전하는 방식의 문 제점은 적어도 성종대에 이미 지적되어 그 대책으로 처결 내용을 글로 적어 전달하게 하 는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지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이 후대에도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글로 적어 전달하는 방식이 성종대에 바로 정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87)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21 내용을 확인한 후 계자를 답인하는 것이다. 判 付 는 미리 정해진 서식의 문구대로 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말을 만들어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86) 86)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판부규식 홀기에 따르면, 還 判 付 는 후자의 경우에 적용되는 방식이었다. 즉 말을 만들어서 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回 啓 하는 粘 連 啓 目 에서 上 裁 를 요청하는 경우에 적용하는 判 付 작성 방식이었다. 87) 정해진 문구가 아닌 다른 처결을 내렸을 때, 국왕이 승지가 적은 判 付 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문구대로 判 付 하는 경우에도 국왕 의 재결 행위에 있어서 특별히 중시한 사안에 대해서는 還 判 付 를 했다. 위의 기사 에서는 사형을 시키거나, 상이나 관작을 주는 사안이 이에 해당함을 말하고 있다. 還 判 付 를 할 때 判 付 는 두 단계에 걸쳐 작성된다. 먼저 判 付 의 내용은 처음 判 付 를 써서 들일 때 작성하고, 담당승지의 직함과 착명은 계자가 찍혀 내려온 후에 하게 되어 있었다. 還 判 付 의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4> 還 判 付 의 과정 判 付 의 각 요소는 원문서의 왼쪽 여백에 안쪽부터 앞서 살펴본 判 付 절차의 순 서에 따라 작성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判 付 와 還 判 付 는 구성요소의 배치 순서가 다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반적 判 付 는 국왕이 啓 字 印 을 찍어서 내린 후 승지가 判 付 를 적는다. 따라서 判 付 의 구성요소가 <그림 2>와 같이 1[ 啓 字 印 ] - 2[ 判 付 일자] - 34[ 判 付 내용] - 5[담당승지의 직함 및 착명]의 순서로 위치한 다. 한편 還 判 付 는 국왕이 승지가 작성한 判 付 를 검토한 후에 啓 字 印 을 찍어서 내 리고, 그 후 승지가 직함과 착명을 표기한다. 따라서 判 付 의 구성요소가 다음 문서 86) 承 政 院 日 記 1796책, 정조 22년 9월 5일 을축, 判 付 皆 有 規 式 若 措 語 則 例 爲 還 判 付 是 如 乎 87) 有 措 語 則 還 判 付 下 書 爲 良 如 敎 他 皆 同 例 ; 凡 粘 連 回 啓 有 上 裁 則 啓 依 所 啓 施 行 還 判 付

222 奎 章 閣 43 와 같이 ③④[判付내용] - ①[啓字印] - ⑤[담당승지의 직함 및 착명]의 순서를 따른다. <그림 5> 1885년 예조 계목(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문서번호 93346) 啓字印을 判付 내용 바깥쪽에 답인하는 방식이 還判付와 관련 있다는 것은 다 음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성부 계목. 양주 유학 지상보의 격쟁원정에서 운운하였습니다.... 判付. 啓. 그대 로 윤허한다. 判付는 모두 규식이 있고, 만약 말을 만드는 경우에는 으레 還判付를 한 다. 還判付라고 하는 것은 啓字印을 判付의 바깥 행에 찍기 때문이다. 여기 점련한 啓 를 보니, 啓字印을 먼저 찍어 단지 依允이라 쓸 자리에 승지가 감히 말을 만들었다. 대 저 還判付의 법의가 지엄한 것은 간사함을 막기 위함인즉, 사안이 비록 사소하지만 후 일에 폐단에 관계된다. 88)88) 88) 뺷承政院日記뺸 1796책, 정조 22년 9월 5일 을축, 漢城府啓目 粘連楊州幼學池尙普擊錚原情 云云 兩代先塋 一是崇品 一是府院君 而且經前後兩道臣之嚴題督掘 則偸葬三漢 所當卽刻掘 移 而今至六年之久 尙無變動 致此擊錚之擧 曲直與否 今無可論嚴飭山在官 斯速掘移 何如 判付啓 依允爲旀 判付皆有規式 若措語則例爲還判付是如乎 還判付云者 啓字踏於判付外行 之謂也 觀此粘啓者 先踏啓字 只書依允之處 承宣敢爲措辭 大抵還判付之法意至嚴 所以防奸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23 위의 기사는 말을 만들어 判 付 를 적을 때는 還 判 付 를 해야 하는데, 還 判 付 가 아 닌데도 말을 만들어 判 付 를 작성한 승지를 추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還 判 付 라고 하는 것은 啓 字 印 을 判 付 바깥 행에 찍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양 자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말한 부분이다. 이는 啓 字 印 을 判 付 바깥쪽에 찍는 것이 還 判 付 에서 갖는 의미를 환기시킨 말이다. 그 의미는 즉 判 付 의 작성순 서를 문서상에 그대로 나타내어, 국왕이 判 付 의 내용을 확인하였음을 표시하는 것 이다. 銀 臺 條 例 附 錄 判 付 規 式 에서는 啓 字 印 의 안쪽에 判 付 를 위치시키는 경우 즉 還 判 付 를 하는 사안으로 다음을 들고 있다. 89) 89) (ㄱ) 국왕의 재결( 上 裁 )을 청하는 啓 目 (ㄴ) 請 刑 하였지만 국왕이 刑 推 하지 말 것을 명한 경우의 啓 目 (ㄷ) 功 議 가 있는 자의 죄에 대한 형량을 照 律 하는 啓 目 (ㄹ) 병조 형조가 2품 이상 관원의 죄에 대한 照 律 여부를 稟 旨 하는 啓 目 (ㅁ) 兩 司 가 2품 이상 관원의 죄에 대한 형량을 照 律 하는 啓 目 (ㅂ) (국왕이 賻 儀 를 내리는) 侍 從 臣 및 臺 侍 臣 의 직위를 지낸 자의 사망을 알리는 單 子 (ㅅ) 親 祭 親 傳 香 受 押 刈 穫 여부를 묻는 單 子 (ㄱ)국왕의 재결을 요청하는 경우란 啓 의 말미에 上 裁 何 如 라는 문구를 사용한 경우를 말한다. 上 裁 何 如 라는 종결어는 국왕이 재결해 달라는 표현으로, 항상 문 서를 올린 관아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不 敢 擅 便 ) 라는 문구가 함께 등장 한다. 이는 모든 啓 를 국왕이 직접 재결하지만, 이런 표현이 있는 경우는 사안이 엄중한 사안임을 국왕에게 강조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숙종대에 도적을 잡은 之 意 則 事 雖 微 細 有 關 後 弊 當 該 承 旨 爲 先 推 考 雖 以 刑 曹 堂 上 言 之 參 判 宜 諳 似 此 格 例 而 不 爲 往 復 該 房 當 該 參 判 亦 爲 推 考 各 司 公 事 若 有 如 許 錯 書 者 卽 令 政 院 取 來 釐 正 爲 良 如 敎 89) 銀 臺 條 例 附 錄 判 付 規 式 親 祭 親 傳 香 受 押 刈 穫 取 稟 曾 經 侍 從 及 臺 侍 身 死 單 子 與 啓 目 中 請 上 裁 請 刑 而 除 刑 推 有 功 議 照 律 兵 刑 曹 二 品 以 上 照 律 稟 旨 兩 司 二 品 以 上 照 律 等 事 並 書 於 踏 啓 字 之 內 行

224 奎 章 閣 43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을 건의하는 사안의 문서 처리절차를 간략하게 하기 위해서 還 判 付 를 하지 않도록 한 적이 있다. 그때 시행한 문서 형식상의 조치가 上 裁 何 如 라는 종결어 대신 何 如 라는 종결어를 사용하게 한 것을 보아도, 上 裁 何 如 와 還 判 付 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90) 90)(ㄴ)~(ㅂ)은 모두 관인에게 형벌을 주는 사안이고, (ㅂ)은 국왕이 부의를 내리는 사안, (ㅅ)은 국가의식에서 국왕의 직접 할지의 여부를 묻는 사안이다. 앞서 還 判 付 의 개념에 관하여 살피면서 제시한 承 政 院 日 記 정조 22년 기사에 還 判 付 를 하는 사안으로 형벌을 주거나, 사형을 시키 거나, 상이나 관작을 주는 경우가 해당됨을 언급한 것을 확인하였다. 還 判 付 는 또 다른 절차상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判 付 의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에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승지가 判 付 를 書 入 하여 국왕이 이를 확인하고 계자를 답인하여 내려준 후, 서명을 해야 할 담당승지가 퇴 근 등의 이유로 승정원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경우 처음에는 퇴근한 승 지의 私 家 에 문서를 가지고 나가서 직함과 착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문서를 궐 밖 에 가지고 나가는 것에 문제가 제기되어, 현종 8년 이후에는 담당승지가 승정원에 출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함과 착명을 적도록 하였다. 91) 91)그러나 이 경우 문서 의 처리가 지체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방식이 타당한지 논란이 일어난 것이 다. 결국 업무를 대리하기로 미리 정해져 있는 다른 승지( 代 房 )가 서명하는 것으 로 결정되었다. 92) 92)처음에는 判 付 의 내용 작성자와 서명하는 자가 일치 하지 않아 서 문서의 신뢰성에 흠결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우선되었으나, 결국 업무 의 신속한 처리가 우선되는 방향으로 결정된 것이다. 還 判 付 의 방식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는 확증하기 어렵다. 承 政 院 日 記 가 남아 있는 상한인 인조대부터 還 判 付 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최소한 인조대 이전부터 사용한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實 錄 에는 還 判 付 의 90) 承 政 院 日 記 396책, 숙종 27년 3월 15일 임인. 91) 顯 宗 實 錄 권14, 8년 9월 14일 을묘. 92) 承 政 院 日 記 204책, 현종 8년 10월 6일 정축; 205책, 현종 8년 11월 20일 경신 ; 銀 臺 便 攷 工 房 攷 撮 要 還 判 付 公 事 代 房 承 旨 書 啣 ( 該 房 有 故 時 )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25 용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判 付 를 써서 들이라( 判 付 書 入 ) 이라는 표현은 조선전기부터 등장한다. 승지가 判 付 를 적어 국왕에게 다시 들인다는 것으로, 還 判 付 의 한 과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면, 조선전기에도 還 判 付 의 방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승지친계의 入 啓 방식에서의 判 付 작성을 살펴보자. 그 자리에서 바로 작성하면 전달과정에서 오류의 가능성은 줄어들지만, 현장에서 즉시 判 付 를 작성 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첫째로 국왕이 判 付 를 다 작성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면 작성시간이 부 족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실수로 잘못 적는 우려가 컸다. 判 付 를 작성하는 시간 부족은 국왕이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입시가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날씨가 더운 날에는 判 付 를 물러나서 작성하게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물러난 다음에 작성한 경우는 추측하건데 별도의 종이에 적어두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나 정조대 承 政 院 日 記 를 보면, 승지가 公 事 를 가지고 입시했을 때에 는 즉시 判 付 를 쓰는 것이 규례인데, 근래에는 읽기만 하고 判 付 를 적지 않는다. 라며 判 付 를 입시한 자리에서 적지 않는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93) 93)입시하여 보고한 啓 의 判 付 를 물러나서 작성하는 것은 지양해야하는 관행 이었다. 둘째로 조선후기에는 승지직이 자주 교체되었기 때문에, 새로 부임한 승지가 判 付 의 작성 규식 자체를 숙지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94) 94)실제로 이 때문에 判 付 를 적지 못하는 승지를 내보내고 다른 승지가 대신 들어와서 적게 하는 경우도 있었 고, 주서를 밖으로 내보내 판부규식을 확인하고 오게 하기도 하였다. 이에 정조 3 년(1779)부터는 입시하는 승지가 판부규식을 적은 홀기를 지니고 들어오게 하였 고, 이는 철종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銀 臺 便 攷 에도 반영되어 있다. 95) 95) 93) 承 政 院 日 記 1529책, 정조 7년 3월 16일 정미, 癸 卯 三 月 十 六 日 酉 時 上 御 誠 正 閣 右 副 承 旨 入 侍 時 右 副 承 旨 柳 誼 記 事 官 李 祖 承 記 注 官 金 健 修 金 鳳 顯 以 次 進 伏 訖 命 誼 讀 公 事 訖 上 曰 凡 於 承 旨 持 公 事 入 侍 之 時 讀 訖 卽 書 判 付 例 也 而 近 來 承 旨 不 閒 院 務 讀 之 而 已 不 書 判 付 此 公 事 則 竝 爲 判 付 曰 親 啓 下 云 云 可 也 94) 承 政 院 日 記 1453책, 정조 3년 11월 19일 기해.

226 奎 章 閣 43 3) 公 事 의 내용에 따른 처결내용 과 승지의 직함 표기 判 付 의 구성요소 가운데, 처결내용 및 승지의 직함 및 서명 의 표기 방식은 入 啓 된 문서가 담고 있는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 銀 臺 條 例 판부규식에 나타난 判 付 의 구성요소 가운데 처결내용 및 승지의 직함 및 서명 을 표기할 때 적용되는 원칙을 판부규식 홀기에 나타난 문서식과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96) 96) 종류 구분 종결어 4[처결 내용] 5[담당승지의 직함 및 착명] 何 如 依 允 啓 目 上 裁 何 如 依 啓 施 行 爲 良 如 敎 依 回 啓 施 行 爲 良 如 敎 短 銜 ( 某 承 旨 臣 姓 + 着 名 ) 無 啓 目 單 子 何 如 依 啓 施 行 爲 良 如 敎 (없음) (없음) (없음) (없음) 먼저 직계아문이 올린 문서의 종류가 啓 目 인 경우를 보자. 계목은 특수한 경우 를 제외하고 모두 가장 좌측 행에 승지가 단함을 적고 착명을 한다. 단함은 同 副 承 旨 臣 金 과 같이 직함에 겸직은 적지 않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처결내용은 啓 目 의 종결어에 따라 달라진다. 계목은 국왕의 단순히 가부여부를 묻는 경우 何 如 라는 어구로 종결하고, 국왕이 재결해 주기를 정중히 청하는 사안일 경우에는 上 裁 何 如 라고 종결한다. 전자의 경우 依 允 -그대로 윤허함 이라고 간단히 적는 반 95) 承 政 院 日 記 1438책, 정조 3년 3월 27일; 3월 28일; 銀 臺 便 攷 通 攷 承 旨 凡 入 侍 時 判 付 式 笏 記 揷 于 草 紙 軸 入 侍 96) 銀 臺 條 例 附 錄 判 付 規 式 公 事 之 頭 書 以 啓 目 結 辭 以 何 如 者 書 啓 依 允 他 行 書 短 銜 ( 某 承 旨 臣 姓 着 銜 ) ; 無 啓 目 而 有 何 如 者 書 啓 依 啓 施 行 爲 良 如 敎 ; 無 啓 目 及 何 如 者 只 書 啓 字 ; 有 啓 目 及 何 如 而 請 上 裁 者 書 啓 依 所 啓 ( 回 啓 則 依 回 啓 ) 施 行 爲 良 如 敎 ' 頭 書 를 啓 目 으로 結 辭 를 何 如 로 한 것'이란 啓 目 을 가리킨다. ( 頭 書 에) 啓 目 이 없고 何 如 가 있는 것 이란 종결어를 何 如 로 마치는 無 啓 目 單 子 를, ( 頭 書 에) 啓 目 이 없고 何 如 가 없는 것은 종결 어 何 如 가 없는 형식의 無 啓 目 單 子 를 가리킨다.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27 면, 후자의 경우 依 啓 施 行 爲 良 如 敎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하심 回 啓 한 啓 目 에는 依 回 啓 施 行 爲 良 如 敎 -회계한 대로 시행하라고 하심 이라고 적는다. 啓 目 - 何 如 <그림 6> 1884년 예조 계목(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문서번호 93267) 啓 目 - 上 裁 何 如 <그림 7> 1885년 예조 계목(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문서번호 93346)

228 奎 章 閣 43 啓 目 - 上 裁 何 如 承 政 院 日 記 1604책, 정조 10년 7월 15일(병진) 吏 曹 啓 目 粘 連 觀 此 禮 曹 參 判 李 度 默 上 疏 則 以 爲 臣 與 本 曹 判 書 尹 蓍 東 有 親 査 應 避 之 嫌 揆 以 法 例 自 在 當 遞 亟 命 遞 改 亦 爲 白 臥 乎 所 相 避 之 法 在 下 當 遞 似 當 許 遞 是 白 乎 矣 宰 臣 所 帶 之 任 遞 仍 當 否 臣 曹 自 下 不 敢 擅 便 上 裁 何 如 判 付 啓 依 所 啓 施 行 爲 良 如 敎 다음으로 문서의 종류가 無 啓 目 單 子 인 경우를 보자. 무계목단자에는 승지의 직 함과 서명을 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결어를 何 如 로 맺었으면 아뢴 대로 시행 하라고 하심- 依 所 啓 施 行 爲 良 如 敎 라 적고, 종결어에 何 如 가 없으면 처결내용 부분 에 아무 표기도 하지 않는다. 종결어에 何 如 가 없는 경우는 이를테면 敢 啓 와 같 은 종결어로 맺어 국왕의 가부여부를 물을 필요가 없는 사안일 때를 말한다. 이때 에는 立 月 에 이어서 단지 啓 자만 적어 보고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냄으로써 判 付 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無 啓 目 單 子 - 何 如 <그림 8> 1884년 예조 무계목단자(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문서번호 93286)

97)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29 無 啓 目 單 子 - 何 如 가 없을 때 版 籍 司 謄 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 18182) 辛 丑 (1721) 五 月 十 六 日. 戶 曹 全 羅 道 法 聖 倉 所 屬 光 州 等 十 一 邑 庚 子 條 田 三 稅 米 太 幷 一 萬 二 千 三 百 八 十 六 石 零 本 站 元 漕 船 二 十 五 隻 亦 中 分 載 無 事 到 泊 于 西 江 前 洋 爲 白 有 昆 依 前 例 點 檢 次 行 判 書 臣 閔 鎭 遠 參 議 臣 兪 崇 正 郞 臣 李 潗 佐 郞 臣 申 思 永 當 日 出 往 江 上 爲 白 臥 乎 事 啓 아무런 처결내용 없이 단지 啓 자만 적고 判 付 를 마무리 하는 경우는 無 啓 目 單 子 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銀 臺 條 例 의 판부규식은 각도의 狀 啓 가운데 궐내 각사(내병조 제외)에 계하할 경우 啓 자 만 적는다( 只 書 啓 字 ) 고 규정하고 있다. 97) 한편 판부규식 홀기는 자유 이용되는 사례를 정리해 놓고 있다. 판부규식 홀기에 서 보여주는 啓 자만 적는 경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使 臣 의 別 單 ( 使 臣 狀 啓 啓 下 備 邊 司 別 單 只 書 啓 字 ) - 비변사에 내어 줌 진상 장계( 進 上 狀 啓 只 書 啓 字 ) - 사옹원에 내어 줌 먹을 진상하는 장계( 墨 進 上 狀 啓 只 書 啓 字 ) - 상의원에 내어 줌 약재를 올려 보내는 사안( 藥 材 上 送 事 只 書 啓 字 ) - 내의원에 내어 줌 전라도에서 祝 文 紙 를 올려 보내는 사안( 全 羅 道 祝 文 紙 上 送 事 只 書 啓 字 ) - 향실에 내어 줌 강원도에서 紫 檀 香 을 올려 보내는 일( 江 原 道 紫 檀 香 上 送 事 只 書 啓 字 ) - 향실에 내 어 줌 雉 羽, 箭 竹, 樺 皮 등을 올려 보내는 사안 가운데 군기시에 보내지 않는 경우( 雉 羽 箭 竹 樺 皮 等 上 送 該 寺 等 事 啓 下 軍 器 寺 若 無 上 送 該 寺 事 則 只 書 啓 字 ) - 內 宮 弓 房 에 내어줌 낙점할 필요가 없는 망단자( 望 筒 有 落 點 單 子 書 落 點 無 落 點 單 子 只 書 啓 字 ) 각종 제사에 대해 3개월 전에 미리 알려드리는 단자( 各 祭 前 期 三 朔 磨 鍊 單 子 只 書 啓 字 ) 이상의 사례에 해당하는 문서는 별다른 지시사항이 없다면 보고가 완료되었다 97) 各 道 狀 啓 書 啓 下 某 司 隨 所 啓 事 下 各 該 司 而 有 令 廟 堂 稟 處 而 事 屬 於 武 府 者 下 三 軍 府 兵 曹 外 闕 內 各 司 啓 下 者 只 書 啓 字

230 奎 章 閣 43 는 것만 표기하고 담당 관아에 문서를 내려주기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지방 監 司 나 兵 水 使 가 진상하면서 올리는 狀 啓 또는 啓 本, 使 臣 이 장계와 함께 보내는 별단, 후보자가 단독으로 올라온 망단자, 각종 제사의 3개월 전에 이를 알려주는 단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판부규식 홀기는 자주 사용되는 사례를 위주로 정리한 것이고 銀 臺 條 例 의 판 부규식은 일반적인 법칙을 위주로 정리한 것일 뿐, 양자가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銀 臺 條 例 의 판부규식은 使 臣 의 별단, 망단자, 제사에 대해 3개월 전에 미리 알려드리는 단자에 대한 언급이 없어, 모든 사례를 포괄하고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判 付 에 모두 담당승지의 직함을 표기하지 않거나 單 銜 으로 표 기한 경우이다. 다음으로 이를 長 銜 을 표기하는 경우를 살펴보겠다. 여기서 長 銜 이 란, 승지+관품명+겸직+ 臣 +성+착명( 某 承 旨 某 階 兼 職 臣 姓 着 銜 ) 과 같이 겸직까지 표기하는 지감 표기법이다. 신하가 製 進 한 敎 書 의 초본, 왕실의 의례에 관하여 결정할 사안을 담고 있는 문서, 祭 文 등의 문서의 초본에 내리는 判 付 를 할 때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때에는 직함을 長 銜 으로 쓸 뿐 아니라, 立 月 에 이어서 적는 啓 자도 奉 敎 로 표기함으로써 공경의 뜻을 나타낸다. 여기에 해당하는 문서 와 그때 사용하는 처결 내용의 문구를 銀 臺 條 例 의 판부규식 조항을 중심으로 정 리해 보겠다. 啓 / 奉 敎 처결내용 승지직함 사례 奉 敎 可 長 銜 奉 敎 敬 依 長 銜 奉 敎 親 刈 長 銜 頒 敎 文, 敎 書 大 殿 中 宮 殿 에 올리는 箋 文 玉 冊 文 樂 章 文 議 號 單 子 文 廟 關 王 廟 各 宮 廟 園 墓 의 祭 文 諸 臣 致 祭 文 箋 文 玉 冊 文 樂 章 文 議 號 單 子 社 稷 宗 廟 各 陵 殿 肇 慶 廟 에 올리는 祭 文 각 祭 享 의 親 祭 親 傳 香 여부를 물어, 친히 시행한다는 답을 내릴때( 攝 行 할때는 敬 依 대신 攝 依 ) 籍 田 수확 시 親 刈 여부를 물어, 친히 시행한다는 답을 내릴때( 攝 行 할때는 親 刈 대신 攝 刈 奉 敎 恭 依 長 銜 景 慕 宮 顯 隆 園 에 올리는 祭 文

조선후기 判付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231 이상에서 살펴본 判付의 서식 가운데 知製敎가 製進한 敎書 초본에 대해 奉敎+ 可+長銜의 형태로 判付한 사례를 대표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9> 1756년 藝文館 提學 南有容 製進 교서 초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문서번호 71417)

232 奎 章 閣 43 이 문서는 1756년 藝 文 館 提 學 南 有 容 이 제진한 敎 書 의 초본으로, 宋 時 烈 을 文 廟 에 종사한다는 내용이다. 좌측 啓 字 印 바깥 행에 乾 隆 二 十 一 年 二 月 初 六 日 奉 敎 可, 右 承 旨 通 政 大 夫 兼 經 筵 參 贊 官 春 秋 館 修 撰 臣 李 ( 着 名 ) 라고 判 付 를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銀 臺 條 例 의 판부규식은 이외에도 신하하게 형벌을 내리는 사안 등에 적용되 는 서식을 제시하고 있는데, 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啓 / 奉 敎 처결내용 승지직함 문서종류 사례 죄인신분 啓 除 刑 推 議 處 爲 良 如 敎 短 銜 刑 訊 을 청하였으나 刑 推 하지 말라는 답을 내 린 啓 目 啓 依 允 일반 短 銜 照 律 稟 旨 啓 目 啓 照 律 爲 良 如 敎 2품 이상 奉 敎 依 允 일반 長 啣 照 律 啓 目 奉 敎 依 此 律 施 行 爲 良 如 敎 2품 이상 啓 別 致 賻 爲 良 如 敎 (없음) 侍 從 臣 이나 臺 侍 臣 의 직위를 역임했던 신하의 사망 보고하는 無 啓 目 單 子 형벌을 내리는 사안을 담은 문서 가운데, 照 律 啓 目 은 奉 敎 + 長 銜 으로 적어 좀 더 격식을 갖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국왕이 죄인의 형량을 결정하여 지시하 는 사항이므로 특수하게 취급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신이나 그 자손이 죄를 지었을 경우 형벌을 경감하는데, 이를 功 議 가 있다 고 표현한다. 이 경우 처결내용은 照 律 稟 旨 啓 目 과 照 律 啓 目 모두 奉 敎, 依 允 爲 旀, 功 議 各 減 一 等 爲 良 如 敎 이라 적고, 승지의 직함은 照 律 稟 旨 啓 目 은 短 銜, 照 律 啓 目 은 長 銜 을 적는다. 98) 98) 지금까지 살펴 본 처결내용 부분을 적는 규례는 문서에서 건의한 사항 그대로 98) 사례는 承 政 院 日 記 1479책, 정조 5년 1월 30일 계묘; 1553책, 정조 8년 3월 27일 임자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