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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소고내지(090518)

Transcription: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김 순 석(한국국학진흥원) Ⅰ. 머리말 Ⅱ. 1920년대 초반 선학원 창설의 배경 Ⅲ.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변화와 財 團 法 人 朝 鮮 佛 敎 中 央 禪 理 參 <차 례> 究 院 의 설립 Ⅳ. 朝 鮮 佛 敎 禪 宗 의 창립과 朝 鮮 佛 敎 中 央 禪 理 參 究 院 의 성격 변화 Ⅴ. 맺음말 <국문요약> 선학원은 1921년 항일적인 면모가 강한 비구승들에 의해서 건립된 사찰로서 우 리 근현대 불교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는 사찰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항일 승 려들의 출입이 잦았고, 현대사에 있어서는 소위 정화불사 의 본산 역할을 하였다. 선학원은 일제의 불교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찰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필자 는 선학원의 설립이 항일적 성향이 강한 승려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1921년 선학원이 창건될 수 있었던 배경을 일본의 식민지 정책 변화 에서 찾고자 한다. 선학원의 창건은 1920년대 일본의 식민지 통치정책이 무단통 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각종 문화단체의 창립을 허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고 본다. 1920년대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단체를 제외한 문화단체의 설립을 허용 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문화단체의 창립을 허용한 것은 반일운동을 진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선학원은 이러한 식민지 통치정책의 이완에 따라서 설립될 수 있었고, 조선총독부 당국이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 기 때문에 적극적인 항일 운동에 나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선학원이 사 寺 나 암

314 선문화연구 창간호 庵 이 아니고 원 院 으로 이름 지워졌다고 하더라도 식민지 통치 권력의 탄압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선학원이 원 으로 이름지워진 것은 사찰령에 사찰의 신규창립에 관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찰령 및 사찰령시행규칙에 사찰창립에 관한 규정이 없는 까 닭에 사찰의 신규창립은 있을 수 없었다. 선학원은 1920년대 후반부터 재정난에 직면하면서 활동이 침체되는 위기를 맞게 된다. 1931년 김적음의 노력에 의해 선 학원은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한 승려의 힘으로 지방조직까지 갖춘 선학원을 회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선학원은 재단법인 설립에 나섰고, 1934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은 1935년 제3차 수좌대회를 계기로 조선불 교선종을 탄생시켰다. 이 무렵 선종의 탄생은 조선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자 주적인 의지의 발로였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재단법인이 된다는 것은 조선총독부 의 간섭과 통제 체제하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주요 사업의 결과와 수입 과 지출 그리고 이사의 교체 상황까지 서면으로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선학원이 재단법인으로 전환되고 난 이후에 당시 31본사 주지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의 시책에 협력하여 창씨개명과 전몰장병 위령제, 국방헌금 납부, 금속류헌납 등 친일 행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제어: 선학원, 비구승, 재단법인, 선리참구원, 수좌대회, 선종 Ⅰ. 머리말 禪 學 院 은 1921년 항일적인 면모가 강한 비구승들에 의해서 건립된 사 찰로서 우리 근현대 불교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는 사찰이다. 식민 지 시대에는 항일 승려들의 출입이 잦았고, 현대사에 있어서는 소위 淨 化 佛 事 의 본산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선학원에 대한 연구 성과 1) 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 까닭은 근현대불교사를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15 전공하는 학자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근현대 불교사에 있어 선학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조명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 지 종교정책에 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하고, 정화불사 에 대한 개념정 리와 객관적인 사실 규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선학원에 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광호는 선학원을 일제의 불교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찰이었다 고 한다. 그리하여 그 이름도 某 某 寺 라는 명칭 대신 막연하게 그냥 선 학원이라는 일종의 위장 칭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선학원이 鏡 虛 惺 牛 로부터 비롯된 禪 風 중흥의 사찰이라는 寺 格 을 가지고 전국의 禪 客 을 통솔하였으며, 해방 후의 이른바 정화불사 때는 명실공히 비구 승 측의 대본산이 되었었다고 한다. 2) 김광식은 선학원의 설립이 1921년 에 이루어지지만 그 시원은 3 1운동 이전부터 서울에서 포교사로 활동 하고 있었던 많은 禪 師 들의 불교 闡 揚 의식과 3 1운동 이후 일제의 사찰 령에 대응하려는 발로에 의하여 창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선학원 창설 주도 인물들이 1910년부터 시작된 臨 濟 宗 設 立 運 動 의 주역들과 1920년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요 멤버들로 구성된 점을 들어 선 학원이 항일 사찰로 기능하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그는 선학원 창설 자체가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하는 의식의 발로라고 한다. 그러나 선 학원은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재정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서 활동이 부진하게 되고 1934년 재단법인 朝 鮮 佛 敎 中 央 禪 理 參 究 院 으 로 전환되면서 일제의 시책에 협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3) 이러한 연구는 1) 정광호, 韓 國 전통 禪 脈 의 계승운동- 禪 學 院 을 중심으로-, 近 代 韓 日 佛 敎 關 係 史 硏 究 (인하대학교출판부, 1994); 김광식, 일제하 禪 學 院 의 운영과 성격, 韓 國 近 代 佛 敎 史 硏 究 ( 民 族 社, 1996); 김순석, 禪 學 院 의 전통 禪 脈 계승운동과 帶 妻 食 肉 금지론의 전개,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 의 대응 (경인문화사, 2003). 2) 정광호, 앞의 책, 185-207쪽 3) 김광식, 앞의 책, 95-146쪽

316 선문화연구 창간호 일제시기 불교사와 선학원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그 의의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성과는 식민지 통 치정책과 불교계간의 拮 抗 관계를 심도있게 조명하지 못하였다는 평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김순석은 선학원의 설립이 항일적 성향이 강한 승려들의 주도로 이루 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1921년 선학원이 창건될 수 있었던 배경 을 일본의 식민지 정책 변화에서 찾고 있다. 그는 1920년대 일본의 식민 지 통치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각종 문화단체의 창립을 허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1920년대 일본은 조선에서 정 치단체를 제외한 문화단체의 설립을 허용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문화단 체의 창립을 허용한 것은 반일운동의 鎭 靜 化 를 노린 일종의 안전판 이 었다. 4) 민족주의자들은 이 안전판을 교육 문화적인 측면에서 독립달성 을 위해 보다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해하였다. 선학원은 이러한 식민지 통치정책의 이완에 따라서 설립될 수 있었고, 조선총독부 당국이 인정 하는 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항일 운동에 나설 수는 없었다고 한다. 또 그는 선학원이 寺 나 庵 이 아니고 院 으로 이름 지워진 것에 대해서 기존의 주장과는 다른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정광호와 김광식이 선학원의 명칭이 院 이라고 붙여진데 대하여 조 선총독부의 사찰령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의식의 발로였다 5) 고 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선학원이 院 으로 이름지워진 것은 사 찰령에 사찰의 신규창립에 관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근 거로서 1925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발간한 寺 刹 例 規 를 들고 있다. 寺 刹 例 規 는 사찰에 관한 법령을 모아서 해설한 책인데 이 해설서에 의하면 사찰령 및 사찰령시행규칙에 사찰창립에 관한 규 정이 없는 까닭에 사찰의 신규창립은 이들 법령이 개정되지 않는 한 불 4) 강동진, 日 帝 의 韓 國 侵 略 政 策 史 (한길사, 1984), 384쪽 5) 정광호, 앞의 책, 191-193쪽; 김광식, 앞의 책, 102쪽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17 가능한 일이다. 라고 되어있다. 6) 또 다른 자료로서 朝 鮮 總 督 府 官 報 를 들고 있다. 이 관보에는 법률이 적용되는 사안에 있어 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분야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관보에 사찰의 병합과 이전에 관한 사항은 많이 실려 있지만 사찰이 창립된 사례는 찾을 수 없다는 점 을 들고 있다. 그리고 설사 寺 나 庵 이 아닌 院 이라고 하더라도 식민지 통치 권력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고 본다. 그는 1935년 3월에 선리참구원에서 개최된 제3차 전국 首 座 大 會 의 결과로 탄생한 朝 鮮 佛 敎 禪 宗 의 창립의 의의를 높게 평가한다. 이 무렵 선종의 창립은 일 본 불교의 영향으로 조선불교가 변질되어 帶 妻 食 肉 현상이 만연되던 시기에 비구승을 중심으로 청정계율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은 조선불교 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파악하였다. 본고는 1920년대 초반에 선학원이 창립될 수 있었던 배경과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가 강화됨에 따라서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성 격이 변질되는 과정과 나아가 朝 鮮 佛 敎 禪 宗 창립의 의의를 검토함으로 써 일제시대 불교계의 당면 문제와 해결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 한 연구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정책 변화와 불교계의 대응이라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우리 근대불교사 이해를 돕고자 한다. Ⅱ. 1920년대 초반 선학원 창설의 배경 일본은 1910년에 무단통치를 시작한 이래 10년이 지난 1919년 3 1운 동이라는 거족적인 항일운동을 경험하게 된다. 식민지 통치정책은 식민 모국인 일본의 정치적인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식민지의 현실 상황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식민지 원주민의 저항이 강 6)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寺 刹 例 規 (1925)

318 선문화연구 창간호 하면 통치정책을 완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3 1운동이라는 거센 한민 족의 저항에 부딪힌 일본은 그 책임을 물어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을 경 질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통치정책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7) 문화정치 의 골자는 정치선전의 강화, 친일세력의 육성 보호 이용, 참정권 문제와 지방제도의 개편, 계층간의 알력 조장을 통한 분할통치 등 이른바 4대 정책이었다. 8) 일본의 식민통치정책의 변화는 불교계에도 몇 가지 부분에서 나타났 다. 1920년 4월에 布 敎 規 則 을 개정하여 종래 敎 會 堂 說 敎 所 講 義 所 의 설립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였던 許 可 主 義 에서 신고만 하면 되는 屆 出 主 義 로 전환하여 포교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게 하였다. 9) 이어서 종교단체의 法 人 格 을 인정하여 종교단체의 법인화를 인정하였다. 이러 한 정책 변화에 힘입어 조선불교계는 민족적 성향을 지닌 총무원과 어 용적 성격이 강한 교무원이 갈등을 일으키며 대립하다가 결국 192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10) 친일파 양성책의 일환 으로 일본 불교계는 1920년에 조선인과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불교신 자들 가운데 유력자를 망라하여 朝 鮮 佛 敎 大 會 라는 外 護 團 體 를 구성하 였다. 조선불교대회는 1925년에 朝 鮮 佛 敎 團 이라는 재단법인으로 변모되 는데 그 설립 목적은 조선인을 정신적으로 일본인화 하는데 있었다. 구 체적인 사업으로는 조선의 우수한 청년 학생들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생 으로 파견함으로써 친일세력을 양성하고, 강연회 개최 영화상영 조찬기 도회 등 각종 문화사업을 통하여 친일파를 육성하는데 있었다. 11) 불교 7) 김운태, 日 本 帝 國 主 義 의 韓 國 統 治 (박영사, 1998), 235쪽 8) 강동진, 日 帝 의 韓 國 侵 略 政 策 史 (한길사, 1984), 9쪽 9) 布 敎 規 則, 朝 鮮 總 督 府 令 第 59 號, 朝 鮮 總 督 府 官 報 第 2294 號 (1920. 4. 7) 10) 김순석, 1920년대 초반 朝 鮮 總 督 府 의 佛 敎 政 策 :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 무원 성립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3집(1999). 11) 김순석, 朝 鮮 佛 敎 團 硏 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9집(1995), 125쪽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19 계의 일본 유학생 파견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부터 이루어졌고, 그 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다가 3 1운동 이후 더욱 증대되어 1920년이 되면 동 경에서 유학생 학우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12) 불교 시찰단의 파견도 1910년대부터 시작 13) 되고 있지만 1920년대 이르면 그 횟수가 증가하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시찰단 파견의 목적은 일본의 지배 아래 위축 된 식민지 조선과 1차 세계대전의 전쟁경기로 윤택한 일본을 비교해서 조선인에게 일본의 강대성 과 자립불능 을 내용으로 하는 독립불능론을 머리 속에 심어 주려는 정치선전의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14) 문화정치 하에서 일본 유학생과 일본시찰단이 증가하였다는 것은 민족 개량주의를 유포시키고, 실력양성기운을 북돋아 독립운동 노선을 타협 적 문화운동으로 전환시켜 민족운동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이었 다. 이러한 회유책은 신문 잡지의 발행을 허용하고, 각종 문화단체의 설 립을 인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선학원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설립인가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선학 원은 대처승들이 늘어가고, 교단의 수행 풍토가 무너져 가던 시기에 항 일적인 면모가 강하였던 비구승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된 사찰이다. 선 학원은 白 龍 城 15) 宋 滿 空 16) 吳 惺 月 17) 등 민족적 성격이 강한 승려들이 12) 김광식, 1920년대 在 日 佛 敎 留 學 生 團 體 硏 究, 韓 國 近 代 佛 敎 의 現 實 認 識 ( 民 族 社, 1998), 127-129쪽 13) 이경순, 1917년 불교계의 일본시찰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5(2000), 8쪽 14) 강동진, 앞의 책, 49쪽 15) 백용성은 1910년 이회광이 원종을 일본 불교 조동종과 연합시키고자 하였을 때 그것을 저지하고자 생겨난 임제종 중앙포교당에서 포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또 3 1운동 당시 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16) 송만공은 근대 禪 佛 敎 의 중흥조라 불리는 鏡 虛 의 法 을 받아 온양 鳳 谷 寺 공주 麻 谷 寺 동래 梵 魚 寺 등지에서 선 불교를 일으키는데 노력한 승려였다 [만공문도회, 滿 空 法 語 (덕숭산수덕사 능인선원, 1982), 298-309쪽]. 경허는 수많은 禪 院 들을 복원하고 대중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禪 을 대중적인 실천

320 선문화연구 창간호 불교의 진리를 널리 펴고, 正 法 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상량문 18) 에 나타난 선학원의 창설 목적은 불법을 전파하기가 至 難 한 시점에 正 法 을 널리 전하기 위함 이라고 한다. 19) 선학원은 창립한 지 얼 마 되지 않아서 禪 友 共 濟 會 라는 자치조직을 만들어 禪 風 振 作 활동을 시 작하였다. 선우공제회의 창립 목적은 진정한 수행자는 숫자가 적고, 비 구승과 대처승이 뒤섞여 있어 수행승과 일본 불교에 동화된 승려들을 구분을 하기 힘들다. 식민통치하에서 승려들의 처지는 날로 궁색해져서 자기 한 몸을 보전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런 까닭에 선우공제회는 비 구 선승들이 출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서 대책을 마련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창립총회의 주요 결의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성에 선우공제회 본부를 두고 庶 務 財 務 修 道 部 의 부서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지부를 둔다. 20) 둘째 임원 선출이 있었고, 셋 째 유지방법에 대한 결의가 있었는데 경비는 禪 友 의 義 捐 金 과 희사금으 로 충당하고 각 지부의 禪 糧 米 2할과 매년 예산액 중 남는 돈을 저축하 여 기본 재산으로 하여 禪 院 을 진흥케 하기로 하였다. 21) 선우공제회 총 회는 세 차례 개최되었지만 결국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26년 梵 魚 寺 운동으로 이끌고자 한 선각자였다. 17) 오성월은 3 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함으로써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던 승려였다. 1920년대 초반 민족적 성향이 강한 총무원 이 성립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승려였다. 18) 禪 學 院, 禪 學 院 上 樑 文, 재단법인 선학원약사 (1986). 상량문에 이름이 실 려 있는 승려는 다음과 같다. 白 龍 城 吳 性 月 宋 滿 空 康 道 峰 金 石 頭 韓 雪 濟 金 南 泉 李 景 悅 朴 普 善 白 俊 燦 朴 敦 法 등이다. 19) 위의 문건 20) 鄭 珖 鎬 編, 禪 友 共 濟 會 創 立 總 會 錄, 韓 國 佛 敎 最 近 百 年 史 編 年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9. 8), 250-256쪽. 지부는 총 19개처로 다음과 같다. 望 月 寺 定 慧 寺 直 指 寺 白 羊 寺 梵 魚 寺 佛 影 寺 乾 鳳 寺 摩 訶 衍 長 安 寺 月 精 寺 開 心 寺 通 度 寺 神 溪 寺 南 長 寺 釋 王 寺 仙 巖 寺 泉 隱 寺 龍 華 寺 海 印 寺 21) 위와 같음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21 포교소로 전환되었다. 이후 선학원은 침체기를 겪게 되고, 1934년에 財 團 法 人 朝 鮮 佛 敎 禪 理 參 究 院 (이하 선리참구원으로 약칭함)으로 전환된다. Ⅲ.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변화와 財 團 法 人 朝 鮮 佛 敎 禪 理 參 究 院 의 설립 선학원이 재정난으로 인하여 재단법인으로 전환될 무렵 일본은 1931 년 만주사변을 도발하여 만주국을 건설하고, 1932년에는 상해사변을 일 으켜 국제사회에서 물의를 빚고, 1933년에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 다. 22) 1935년 3월 16일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체결된 베르사 이유조약의 군사조항 폐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자 이 사실에 고무되었 다. 23) 이 무렵 동경대학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고 귀족원 의원으로 칙임 되었던 미노베 다쓰키치( 美 濃 部 達 吉 )가 천황기관설을 제기하였다. 천황 기관설은 살아있는 神 으로 숭앙되던 천황을 하나의 통치기관으로 규정 한다는 것으로 그 파문은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다. 24) 일본 정부는 미노 베의 서적에 대해서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25) 천황기관설이 큰 문제 로 대두되자 검찰은 미노베로부터 자신의 학설이 국체관념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게 하였다. 26)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국체를 분명히 인식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30년대 초반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위기를 맞고 있었다. 1929년에 밀어닥친 세계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 사정은 매우 악화되었다. 일본 22) 구대열,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역사비평사, 1995), 343-344쪽 23) 京 城 日 報, ヴ 條 約 の 軍 事 條 項 を 獨 政 府 廢 棄 を 宣 言 (1935. 3. 18) 24) 每 日 申 報, 天 皇 機 關 說 에 또다시 猛 爆 擊 (1935. 3. 13) 25) 손정목, 朝 鮮 總 督 府 의 神 社 普 及 神 社 參 拜 强 要 政 策 硏 究,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1992), 285쪽 26) 京 城 日 報, 忠 誠 に 於 いては 人 後 に 落 ちぬ (1935. 4. 9)

322 선문화연구 창간호 은 자국의 공황 피해를 줄이고자 朝 鮮 米 移 入 制 限 措 置 를 취하였다. 27) 세계공황과 더불어 일본 사회는 1920년대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사회주 의 사상으로 사회전체가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른바 外 患 國 難 思 想 國 難 經 濟 國 難 이라는 3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28) 일본은 위험사상 방지책으로 神 道 佛 敎 基 督 敎 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특히 불교에 그것 을 기대한 일본은 불교의 恩 諦 思 想 29)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로 하여금 천황제 국가관을 보완하는 가족적 국가주의와 현실을 긍정하는 諦 의 정신을 통해 사상선도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30)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은 사상적으로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으 로서의 국체관념을 철저히 고취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31) 이러한 상황에서 우가키 가즈시케( 宇 垣 一 成 )는 1931년 7월 제6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내선융화와 조선의 경제부흥이라는 두 가지 과제 를 안고 부임한 우가키는 1932년부터 조선의 농촌 상황을 개선하기 위 해서 농촌진흥운동과 心 田 開 發 運 動 을 전개하였다. 32) 농촌진흥운동이 물 질적인 면에서의 갱생운동이었다고 한다면 심전개발운동은 정신계몽운 동이었다. 심전개발운동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총독부의 정책에 순응하 게 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량한 황국신민을 만드는데 있었다. 총독부는 심전개발운동을 단순히 외형적인 생활의 개선이 아니고 생활 의 근저가 되는 올바른 신념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따라 서 이 운동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33) 총독부가 특 27) 池 秀 傑, 1932~35 年 間 의 조선농촌진흥운동, 한국사연구 46(1984), 119쪽 28) 孝 本 貢 編, 大 正 昭 和 期 の 國 家 旣 成 佛 敎 敎 團 宗 敎 運 動, 論 集 日 本 佛 敎 史 ( 雄 山 閣 出 版 株 式 會 社, 1988), 31-32쪽 29)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하여 성립되었기 때문에 서로 은혜로운 마음으로 얽혀 있어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상 30) 池 秀 傑, 1932-35 年 間 의 조선농촌진흥운동, 한국사연구 46(1984), 7쪽 31) 京 城 日 報, 中 等 學 校 歷 史 敎 科 書 改 正 國 體 觀 念 を 徹 底 (1936. 3. 21) 32) 宇 垣 一 成, 宇 垣 一 成 日 記 (みすず 書 房, 1988), 801쪽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23 히 불교에 역점을 두고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째 불교계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가혹한 탄압을 받아서 피폐된 상황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녀자 층을 비롯해 서 많은 신도들을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큰 종교라는 점에 착안하였 다. 34) 둘째 총독부는 승려들의 자질이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를 상승시켜주고, 정책적으로 불교를 지원해 준다면 심전개발운동 에서 지향하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무난한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셋째 불교는 일본 국가신도에서 중시하는 조상숭배 정신을 거리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종교라는 점이었다. 넷째 향후 일본이 점령하고자 하는 중국을 비롯해서 동양이라는 견지에서 보더라도 불교는 거부감이 생기 지 않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35) 총독부가 國 體 觀 念 의 明 徵 36) 敬 神 崇 祖 의 思 想 및 信 仰 心 을 涵 養 할 것 報 恩 感 謝 自 立 의 精 神 의 養 成 이라 는 이른바 심전개발 3대 목표를 확립하고 적극적인 실행단계에 들어간 것은 1936년 초였다. 심전개발운동 3대 목표는 당시 일본과 조선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었다. 즉 천황기관설의 대두 로 위기에 처한 국체관념을 분명하게 밝히고, 공산주의 사상의 만연으 로부터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사항들이었다. 그리고 농촌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대륙침략을 감행하고, 모든 국민 들에게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이른바 총력전체제로 전환하면서 불교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총력전체제란 모든 국민 33) 津 田 榮, 心 田 開 發 の 根 本 的 用 意, 朝 鮮 제250호(1936. 3) 34) 大 西 良 慶, 心 田 開 發 と 佛 敎, 心 田 開 發 に 關 する 講 演 集 2( 朝 鮮 總 督 府 中 樞 院, 1936), 118쪽 35) 위와 같음 36) 국체명징이란, 국가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뜻한다. 즉 일본은 천황 을 정점으로 하는 군주국임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324 선문화연구 창간호 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세계 재분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준비하는 체제였다. 그 내용은 단지 자원 자재 자금 노동력을 어떻게 배분하는가 하는 물자조달 체제를 구축하는 것과 함께 사상적으로도 통 제책을 강화하여 신속한 명령의 전달체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37) 1937년 8월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일본은 國 民 精 神 總 動 員 運 動 를 구 축하고 총력전 체제로 돌입하였다. 38) 전시체제 하에서 불교계도 국가통 제와 동원 체제에 흡수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기에 돌입하면서 전종 교계는 광신적인 파시즘 체제의 협력자가 되면서 민중들에게 삶의 위안 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본래의 종교성을 상실하였다. 39) 일본의 전시 체제 돌입은 식민지에서 물자수탈과 인력동원 그리고 사상통제의 형태 로 나타났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 병참기지화하여 물적 인적자원을 총 동원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 가혹한 억압과 착취를 감 행하였다. 40) 물자수탈은 각종 공출과 금속류 헌납운동의 형태를 띠었고, 인력동원은 학도병 강제징용 정신대근무령 군위안부 등의 형태로 나타 났다. 사상통제책은 치안유지법 강화로 나타났는데 정치적 색채와는 관 계없이 國 體 의 변혁, 혹은 不 敬 罪 에 해당되는 행위와 관련된 사람 및 단 체 전부를 감시 대상으로 하였다. 불교계는 이른바 皇 道 佛 敎 라는 이름 아래 전시체제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도불교 란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불교란 뜻으로 그 골 자는 尊 皇 護 國 과 國 利 民 福 을 위해 皇 運 을 번창시키기 위한 것이다. 불교계는 大 東 亞 共 榮 圈 41) 건설에 매진하고 세계 신질서 수립에 협력 37) 최원규 엮음, 일제말기 파시즘과 韓 國 社 會 (청아출판사, 1988), 12쪽 38) 최유리, 日 帝 末 期 植 民 地 支 配 政 策 硏 究 (국학자료원, 1997), 78쪽 39) 柏 原 祐 泉, 日 本 佛 敎 史 近 代 ( 吉 田 弘 文 館, 1990), 241쪽 40) 박경식, 日 本 帝 國 主 義 의 朝 鮮 支 配 (청아출판사, 1986), 410쪽 41) 대동아공영권 이란 동아시아에 동남아시아를 더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1940년 7월 일본이 국책요강으로 대동아 신질서 건설 이라는 것을 내세우면 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25 할 것을 선언하면서 종교성을 벗어 던지고 沒 我 報 國 堅 忍 不 拔 의 정신을 함양시키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42) 불교계의 전쟁참여는 宗 敎 報 國 이라 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 무원은 1937년 7월 25일과 8월 1일에 황군의 국위선양과 武 運 長 久 를 비 는 법요식을 전국 31본말사에서 일제히 개최하게 하였다. 이 법요식에 서 모금된 국방헌금과 출정장병의 위문금은 각각 지방군사연맹을 통하 여 헌납되었다. 승려들은 家 家 戶 戶 를 방문하여 시주를 받는 탁발을 통 해서 국방헌금을 납부하기도 하였다. 43) 전국의 사찰은 황군의 무운장구 를 위한 기도를 해야만 하였다. 동시에 각 사찰은 위문금 모집, 각 부대 送 迎 接 待, 군인과 그 가족 및 유족들을 위한 위문 격려, 戰 病 死 者 의 조 문과 慰 靈 遷 度 등 총후의 임무로써 충성을 다해야 했다. 44) 불교계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 매년 7월 7일에 전몰장병위령제와 전승기원제 를 겸한 행사를 가졌다. 45) 선학원은 출발 당시에는 선풍을 진작시키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大 義 를 가지고 출범하였으나 곧 재정적인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선학 원을 창설하였던 비구승들은 선풍진작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노력 은 선우공제회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46) 1922년 3월 30일에서 4월 1일까 지 선학원에서 선우공제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주요한 내용은 다 에는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으며, 같은 달 12일에는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 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대동아공영권의 영 역은 일본 중국 만주를 中 軸 으로 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타이 말레이시 아 보르네오 네덜란드령 동인도 미얀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42) 柏 原 祐 泉, 앞의 책, 249-250쪽 43) 佛 敎 時 報 제51호, 흥남 불교포교당의 탁발국방헌금 (1939. 10. 1) 44) 佛 敎 時 報 제27호, 교계소식 (1937. 10. 1) 45) 佛 敎 時 報 제26호, 제37호, 제49호, 제61호, 제73호. 46) 鄭 珖 鎬 編, 앞의 책, 248-256쪽

326 선문화연구 창간호 음과 같다. 첫째 경성에 선우공제회 본부를 두고 庶 務 財 務 修 道 部 의 부서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지부를 둔다. 47) 둘째 임원 선출이 있었고, 셋 째 유지방법에 대한 결의가 있었는데 경비는 禪 友 의 義 捐 金 과 희사금으 로 충용하고 각 지부의 禪 糧 米 2할과 매년 예산액 중 남는 돈을 저축하 여 기본 재산으로 하여 禪 院 을 진흥케 하기로 가결되었다. 48) 당시 불교 계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승려들은 본사 주지 계층인데 이들은 대부분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이었다. 이들은 妻 子 를 부양 하여야 했기 때문에 독신 비구승들인 선승들에게 수행 공간과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데 인색하였다. 그런 까닭에 禪 僧 들은 생활이 곤궁하여 一 衣 一 鉢 의 雲 水 生 涯 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禪 侶 들은 자립의 활로를 개척하여 禪 界 를 勃 興 하고 大 道 를 闡 明 하여 중생을 苦 海 에 구하려는 원력을 세웠다. 49) 선우공제회는 1924년 무렵부터 재정난에 봉착하게 된다. 창립총회 때 전임간사의 봉급을 매월 50원씩 지급하기 로 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인하여 제2회 정기 총회 때에는 전임간사의 봉 급을 20원으로 삭감하였다. 50) 1924년 1월 5일 通 度 寺 梵 魚 寺 釋 王 寺 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던 총무원 회의에서 선학원을 직할로 운영하기로 결 정하였다. 51) 그렇지만 동년 4월에 총무원이 교무원과 통합됨으로써 이 결정은 무위로 끝이 났다. 이후 선학원은 1926년 5월 1일자로 범어사 포 교소로 전환된다. 52) 이것은 선학원이 재정난으로 인하여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것을 뜻한다. 47) 위와 같음. 지부는 총 19개처로 다음과 같다. 望 月 寺 定 慧 寺 直 指 寺 白 羊 寺 梵 魚 寺 佛 影 寺 乾 鳳 寺 摩 訶 衍 長 安 寺 月 精 寺 開 心 寺 通 度 寺 神 溪 寺 南 長 寺 釋 王 寺 仙 巖 寺 泉 隱 寺 龍 華 寺 海 印 寺 48) 위와 같음 49) 위와 같음 50) 위와 같음 51) 朝 鮮 日 報, 佛 敎 總 務 院 總 會 (1924. 1. 5) 52) 佛 敎 30호, 官 報 抄 錄 ( 佛 敎 社, 1926. 12), 44쪽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27 1924년경부터 재정난에 부딪혀서 침체되었던 선학원은 1931년 1월에 金 寂 音 을 통하여 중흥의 계기를 맞았다. 53) 그는 송만공의 제자로서 한 의학에 능하여 침술과 시약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 다. 김적음은 선학원을 인수한 즉시 큰 방을 거처로 하고 李 炭 翁 을 立 繩 54)으로 하여 참선을 시작케 하니 승려 및 신도는 20여명에 달했다. 55) 3월 1일에는 禪 을 대중화하기 위해서 남녀선우회가 조직되었다. 회원 수는 약 70여명이었고, 부인선우회도 조직되었다. 56) 대중포교를 위해서 기관지 禪 苑 을 간행하였다. 57) 선학원은 선의 대중화에 노력하면서 全 鮮 首 座 大 會 를 개최하여 내실 을 기하고자 하였다. 수좌대회는 1931년, 34년, 35년, 39년 등 몇 차례에 걸쳐서 개최되었다. 제1회 대회에서 결의된 내용은 선 수행에 전념하는 비구승들의 처지가 너무 곤궁하므로 중앙선원을 설치해 달라는 건의서 를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 58) 종회에 제출하였으나 교무원 종회는 53) 老 姿, 禪 學 院 日 記 招 要, 禪 苑 창간호(선학원, 1931. 10), 28쪽 54) 입승이란 禪 수행을 하는 사찰에서 대중 가운데 도덕과 학식이 높은 승려가 소임을 맡는다. 수행의 기강을 확립하는 것이 주요 임무이다. 이운허, 불교 사전 (동국역경원, 1988), 748쪽 55) 老 姿, 앞의 글, 28쪽 56)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 禪 苑 제4호(1935. 10), 33-34쪽. 부인선우회는 별 도의 공간이 없어 불편한 생활을 하였다. 김적음의 도움과 자체 회비를 적 립하여 1935년 초에 선학원 옆 안국동 41번지에 이층 양옥을 구입하여 조선 불교중앙부인선원을 개설하였다. 매월 한차례 정기 모임을 가지고 설법을 들었다. 57) 禪 苑 은 선학원에서 발간하였는데 통권4호까지 간행되었다. 1931년 10월에 창간호가 발간되었고, 1932년 2월에 제2호, 1932년 8월에 제3호가 발간된 이 후 선학원이 침체기를 맞으면서 휴간되었다가 1935년 10월에 제4호가 복간 호로 발간되었다. 58) 1929년에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의 결과로 탄생한 집행기관으 로서 교무원과 중앙종회를 의미한다.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 대해서 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김광식, 朝 鮮 佛 敎 禪 敎 兩 宗 僧 侶 大 會 의

328 선문화연구 창간호 예산상의 이유로 부결시켰다. 59) 김적음은 1931년 11월 8일 예전부터 인 연이 있던 범어사에 경비 보조를 요청하였다. 범어사 본사 총회에서는 선학원이 요청한 매년 600엔의 경비에 대하여 경제 사정이 어려운 까닭 에 매년 200엔씩을 보조하기로 결의하였다. 60) 비구승들은 보다 안정적 인 수행풍토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재단법인 결성의 움직임을 보였다. 선학원은 10년 전 선우공제회 결성 당시 들어온 토지와 신도들의 성금 그리고 새로 각 사찰에서 들어온 토지 등을 모아서 1934년 초 무렵 재 단법인 설립 인가를 신청하여 동년 12월 5일자로 朝 鮮 佛 敎 中 央 禪 理 參 究 院 (이하 선리참구원으로 약칭함)으로 인가를 받았다. 61) 1935년 3월 7 일과 8일 2일 간에 걸쳐 선리참구원에서 제3차 수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선리참구원은 禪 宗 을 탄생시키고 宗 憲 에서 규정한 각종 법 안을 제정하고 종정, 종무원 간부, 선리참구원 이사, 수좌대표의원 등을 새로이 선출하였다. 62) 종교단체가 법인화 된다는 것은 그 단체의 사회 적인 신용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의 감독하에 편입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총독부는 1912년에 공포한 법인의 설 립 및 감독에 관한 규정 을 공포하고 법인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피감독권도 부여한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회계연도 말에 매 년 활동 상황 및 자산 그리고 수입과 지출을 총독부에 보고하고 감독 을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는 법인의 재산 상황을 검사할 수 도 있었다. 그리고 재단법인이 해산될 경우 그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 게 되어있었다. 63) 개최와 성격, 韓 國 近 代 佛 敎 史 硏 究 ( 民 族 社, 1996) 59) 老 姿, 앞의 글, 29쪽 60) 日 波, 禪 學 院 日 記 招 要, 禪 苑 제2호(선학원, 1932. 2), 85쪽 61) 불교시보 창간호(1935. 8. 3) 62) 東 亞 日 報, 佛 敎 首 座 大 會 (1935. 3. 13) 63)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216쪽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29 Ⅳ. 朝 鮮 佛 敎 禪 宗 의 창립과 財 團 法 人 朝 鮮 佛 敎 中 央 禪 理 參 究 院 의 성격 변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은 일제 치하에서 불교계에 일본 불교 풍습이 날로 번성하던 시기에 청정 계율을 중시하는 조선불교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1935년 3월 7일 오전 10시부터 8일 오후 4시까지 2일 간에 걸쳐 선리참구원에서 제3차 수좌 대회에서 朝 鮮 佛 敎 禪 宗 의 창립으로 나타났다. 이 대회에서는 宗 憲 인 朝 鮮 佛 敎 禪 宗 宗 規 와 각종 법안이 제정되었다. 朝 鮮 佛 敎 禪 宗 宗 規 는 宗 名 宗 旨 本 尊 儀 式 禪 院 僧 侶 及 信 徒 禪 會 宗 務 院 宗 正 禪 議 員 會 財 政 補 則 등 12장 29조로 구성되어있다. 64) 종명을 선종이라고 칭한 것은 큰 의 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사찰령 체제 하에서 30본사 주지들의 회합체인 30본산주지회의원에서 채택한 종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이기 때문이다. 본산 주지들은 제대로 된 종명을 채택하지 못하였는데 수좌대회에서 선 종이라고 종명을 표방한 것은 구체적으로 선종의 어떤 종파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조선불교의 연원이 선종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사실 은 선종은 총독부와 결탁된 30본산 주지들의 회합체인 30본산연합사무 소와는 성격을 달리하며 조선불교계의 독자성을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 다. 8개조로 구성된 中 央 禪 院 淸 規 에는 제1조에 본원 衲 子 는 無 常 出 入 을 금하고 매월 3일, 8일에 목욕을 하며 교외를 散 步 할 수 있다고 되어 있 다. 제5조는 본 선원은 飮 酒, 食 肉, 吸 煙, 歌 謠 등 일체 混 亂 을 禁 止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식육이 보편 화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정 계율을 지키는 조선 불교의 전통 을 수호하려 하였다는 것은 일본 불교에 동화되지 않고 자주성을 지키 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수좌대회에서는 종정을 비롯한 임원들을 64) 金 寂 音, 朝 鮮 佛 敎 禪 宗 首 座 大 會 會 錄 ( 禪 宗 中 央 宗 務 院, 1935), 22-25쪽

330 선문화연구 창간호 선출하였는데 宗 正 은 숫자와 임기를 정하지 않고 고승들로 종정회를 구 성하였다. 종정회는 종무원 임원 즉 이사 및 원장 부원장과 이와 같은 수의 禪 會 銓 衡 員 으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전형하여 선회의 동의를 받을 것을 명시하였다. 이때 선출된 종정은 申 慧 月 宋 滿 空 方 漢 岩 등이며, 원 장은 吳 惺 月 이 선출되었다. 65) 종회인 禪 會 의 조직과 권한을 규정한 禪 會 法 은 총 11장 37조인데 組 織, 議 長 書 記 及 司 祭, 禪 會 員 選 擧 及 任 期, 禪 會 의 權 限, 委 員 會, 審 査 委 員, 會 議, 休 會 閉 會 停 會 解 散, 懲 戒, 補 別 등 으로 구성되었다. 선회의 소집은 종정회에서 집회의 기일을 정하여 일 개월 전에 이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회의원 수는 본종 승려의 10분의 1로 규정하였으며, 연령은 25세 이상으로 3 夏 安 居 이상인 자로 中 等 科 이상 學 方 이 있는 자로 규정하였다. 선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 구는 전국에 산재한 각 선원의 수에 비례하여 할당하였다. 또 선회를 대 표하는 선의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인원은 15인이었으며, 종정회에서 7인 을 선출하고, 선회에서 8인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선의원 회는 제반법규와 선회의 특별 권한에 속하지 않은 일체 사항을 제정 의 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선리참구원은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遺 敎 法 會 를 개최하였다. 법회의 목적은 대처승들이 늘어남으로써 교단이 세속화되고, 타락해 가 는 상황에서 비구승들이 청정한 수행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하는 것이었 다. 유교법회는 원래 高 僧 法 會 라고 하기로 하였으나 교무원측이 법회 의 명칭을 맹렬히 비난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66) 교무원측이 비난한 까닭은 그 법회의 명칭이 자신들을 제외한 상황에서 고승법회 이라는 표현을 썼다는데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법회는 宋 滿 空 朴 漢 永 河 東 山 등 당시의 고승들이 65) 東 亞 日 報, 佛 敎 首 座 大 會 (1935. 3. 13). 부원장에는 薛 石 友, 이사에는 金 寂 音 鄭 雲 澤 李 兀 然, 禪 議 員 에는 奇 石 虎 河 龍 澤 黃 龍 吟 이 선출되었다. 66) 정광호, 앞의 책, 295-296쪽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31 참석하여 성황리에 끝이 났다. 유교법회 이후 계속해서 비구들은 梵 行 壇 67)을 조직하여 선학과 계율을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68) 선리 참구원의 전통 불교 禪 脈 계승운동은 1942년에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라 고 불리는 鏡 虛 69)의 문집인 鏡 虛 集 발간으로 이어진다. 1936년 6월에 吳 惺 月 宋 滿 空 張 石 霜 方 漢 岩 韓 龍 雲 康 道 峰 등 40명이 경허집 간행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전국의 禪 院 에 5원 이상, 개인은 50전 이상의 모금을 통하여 1942년 6월에 경허집 을 발간하였다. 70) 식민지 시기 말기에 경허집 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선리참구원이 선풍의 진작 을 통하여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 다. 경허집 은 전국의 禪 院 들이 동참하여 발간되었다. 발간취지서에서 는 조선의 首 座 로서 경허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함으로 써 근대 禪 의 부흥이 경허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다. 71) 그러나 선리참구원은 중일전쟁 이후 성격이 변화되어 총독부 정책에 협조하는 면모를 보이게 된다. 교무원과도 협조체제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5년에 발간된 禪 苑 제4호를 心 田 開 發 특집호로 기획하였 67) 梵 行 이란 범어 brahma-carya의 번역으로 淨 行 이라고도 번역하며 청정한 행위 를 말한다. 따라서 범행단이란 청정한 무리 곧 비구승을 뜻한다. 68) 佛 敎 時 報 제69호, 梵 行 壇 組 織 (1941. 4. 15) 69) 본명은 宋 東 旭 (1846~1912)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9살 되던 해 어머니 를 따라 경기도 廣 州 의 淸 溪 寺 에서 桂 虛 화상을 스승으로 출가하였다. 이후 23세에 동학사에서 開 講 하여 敎 義 를 논하였다. 乙 卯 年 (1879) 동학사에서 깨 달음을 얻고 거처를 서산 天 藏 庵 으로 옮겼다. 이후 20여 년간 開 心 寺 와 浮 石 寺 등지를 왕래하면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경허는 선을 중심으로 교를 원융하는 입장을 취했다. 1912년 함북 갑산의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하였 다. 문하에 滿 空 月 面 慧 月 慧 明 水 月 音 觀 漢 岩 重 遠 등이 배출되었다. 金 敬 執, 鏡 虛 의 禪 敎 觀 硏 究, 韓 國 思 想 史 學 제9집(1997). 70) 鏡 虛 著, 釋 明 正 譯 註, 鏡 虛 集 ( 通 度 寺 極 樂 禪 院, 1991) 71) 최병헌, 近 代 禪 宗 의 復 興 과 鏡 虛 의 歷 史 的 位 置, 덕숭선학 제1집(불교 선학연구원, 1999), 64쪽

332 선문화연구 창간호 으며 심전개발운동을 선전하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1932년 8월 제3호 발간 이후 재정난으로 중단되었던 禪 苑 을 다시 발간하는 續 刊 辭 에 禪 苑 아! 심전개발 종교부흥의 소리 높은 때 큰 사랑을 베푸시 는 世 尊 의 불멸의 心 語 를 闡 揚 하여 죄에 더렵혀진 地 上 을 정화하려는 너의 再 擧 는 意 氣 가 새로 깊을 것이다. 라고 하여 선학원이 심전개발운 동에 참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金 泰 洽 의 心 田 開 發 과 禪 의 대중화 라는 기고문과 鄭 秋 江 의 心 田 開 發 에 대한 謾 說 등 친일 논설 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면모는 이 무렵 김태흡이라는 불교계의 대표 적인 친일 승려가 선학원에서 설교를 담당하는 승려로 있었다는 사실에 도 기인한다고 하겠다. 72) 김태흡은 당시 중앙불전 전임강사였는데 전국 에서 심전개발강연 요청이 쇄도하여 학교 강의를 내어 놓고 총독부 촉 탁 강사의 자격으로 포교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73) 교 무원에서 국방헌금을 모집할 때 선학원 74) 에서도 30엔 4전을 납부하였 다. 75) 1937년 8월 11일에는 교무원과 교무원 사간정 포교소 그리고 선리 참구원 세 곳이 함께 출정부대 송영식에 참석하였다. 76) 동년 8월 17일에 는 김상호 황금봉 이갑득 한성훈 등과 선학원 77) 및 사간정 포교소 대표 가 출정부대 送 迎 에 참가 78) 하는 등 이후로 유사한 많은 행사에 참여하 였다. 1940년 2월 創 氏 改 名 令 이 실시되자 총본산건설사무소에서 무료상 72) 禪 苑 제3호(1932. 2), 85쪽 73) 佛 敎 時 報 제22호(1937. 5. 1), 謹 告 74) 선학원은 1934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바뀌었지만 자료 에는 선학원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75) 佛 敎 時 報 제27호, 在 京 城 各 寺 庵 及 布 敎 堂 獻 金 (1937. 10. 1). 76) 佛 敎 신7집, 교계소식 (1937. 11), 49쪽 77) 선학원은 1935년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되었으나 이후에도 선리참 구원과 선학원을 혼용되고 있다. 선리참구원은 해방 이후 선학원이라는 본 래 이름을 회복하였다. 78) 佛 敎 신7집, 교계소식, 49쪽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33 담소를 운영할 때 선리참구원도 상담소를 운영하였다. 79) 선리참구원은 1941년 9월 3일에는 전국 各 寺 선원에 공문을 띄워 모금된 황군위문금 159 圓 23 錢 을 매일신보사에 납부하였다. 80) 1943년 5월 24일 태고사에서 있은 금속류 헌납운동에 참여하여 眞 鍮 器 1점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81) 선학원은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 성격도 바뀌게 된다. 설립 당시 에는 비구승들이 중심이 되어 대처승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교무원과 차 별성을 보이면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재단법인이 성립된 이후에는 총독 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리참구원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31본사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였다. 82) 그러나 선리참구원이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기 는 하였지만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 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총독부에서는 작년 4월 寺 刹 令 의 개정과 동시에 조선불교도의 총의에 따라 禪 과 敎 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太 古 寺 를 만들고 全 鮮 31본산의 총 본산으로 하여 전선 불교의 중앙지도기관으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 교무원과 선리참구원은 존재하여 많은 피해가 있음으로 금년 3월 총독 부에서는 이 두 가지 단체를 통제하고자 결심하고 여기서 남은 문제는 존립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중앙선리참구원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이 선리참구원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무런 존재 이유 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데 癌 으로서의 존재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지금 그 내용과 구성 인원 등 자세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이것 도 그 통제될 단계에 이른 것만은 명확한 일이다. 83) 79) 佛 敎 時 報 제60호(1940. 7. 15) 80) 佛 敎 時 報 제75호, 선학원의 황군위문금 헌납 (1941. 10. 15) 81) 佛 敎 신50집 합집, 조계종보 (1943. 7), 3쪽 82) 禪 苑 제4호, 우리 각 긔관의 활동상황 (1935. 10), 31쪽

334 선문화연구 창간호 총독부는 불교계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총본사 설립을 종용 하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曹 溪 學 院 으로 전환되었지만 선리 참구원은 여전히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로 남아있었다. 1942년까지도 선 학원이 여전히 총독부에서 감시의 눈길을 뗄 수 없는 기관이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선학원이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나 서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반면에 일제 시기 말까지도 전통 선풍을 유 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해 방 이후 이른바 정화불사 의 본산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선리참구원은 중일전쟁 이후 재정난이 악화되면서 성격도 변화되어 총 독부 정책에 협조하는 면모를 보이고 교무원과도 협조체제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무원에서 국방헌금을 모집할 때 선학원 84) 에서도 30엔 4전을 납부하였다. 85) 1937년 8월에는 두 차례나 출정부대 송영식에 참 석하였으며 86) 1940년 2월 創 氏 改 名 令 이 실시되자 선리참구원도 무료상 담소를 운영하였다. 87) 1941년 9월 3일에는 전국 各 寺 선원에 공문을 띠 워 모금된 황군위문금 159 圓 23 錢 을 매일신보사에 납부하였고, 88) 1943 년 5월 24일 태고사에서 있은 금속류 헌납운동에 참여하여 眞 鍮 器 1점 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89) 선학원은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 성격도 바뀌게 된다. 설립 당 시에는 비구승들이 중심이 되어 대처승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과 차별성을 보이면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재단법인 83) 每 日 申 報, 佛 敎 서도 內 鮮 一 體 로 宗 敎 報 國 에 新 機 軸 (1942. 8. 6) 84) 선학원은 1934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바뀌었지만 자료 에는 선학원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85) 불교시보 제27호, 在 京 城 各 寺 庵 及 布 敎 堂 獻 金 (1937. 10. 1) 86) 불교 신7집, 교계소식 (1937. 11), 49쪽 87) 불교시보 제60호(1940. 7. 15) 88) 불교시보 제75호, 선학원의 황군위문금 헌납 (1941. 10. 15) 89) 불교 신50집 합집, 조계종보 (1943. 7), 3쪽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35 이 성립된 이후에는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리참 구원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31본사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였다. 90) 선리참구원은 수좌대회를 통하여 선종을 탄생 시켰으나 종정으로 선출된 세 승려 가운데 方 漢 岩 은 1941년 조계종 총본 사 태고사의 종정으로 취임하였다. 91) 그리고 宋 滿 空 金 擎 山 宋 蔓 庵 은 총본사의 종무고문을 승낙하는 등 여러 가지로 굴절된 면모를 보였다. 92) Ⅴ. 맺음말 선학원은 1921년 白 龍 城 吳 惺 月 宋 滿 空 康 道 峯 金 石 頭 金 南 泉 등 항 일의식이 강하였던 승려들에 의해서 전통선맥을 계승하고, 불법을 대중 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창립되었다. 이 시기 선학원의 창립이 가능하였 던 것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정책이 문화정치로 전환된 데서 찾아질 수 있다고 하겠다.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서 각종 문화단체 의 설립을 인가하였고, 신문 잡지의 출판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 나 문화정치 체제하에서 감시와 사찰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이러한 문 화정치를 통하여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 노선을 분열시키고 조선인에 게 독립불능 의식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친일파로 훼절하였으며 독립운동 노선을 실력양성운동으로 전환 하기도 하였다. 선학원은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계 대처승들이 만연하고 있던 시 기에 비구승들을 중심으로 하여 창립되었다. 이 시기 비구승들은 수행 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一 衣 一 鉢 의 청빈한 생활조차 유지하기 힘든 90) 禪 苑, 우리 각 긔관의 활동상황 (1935. 10), 31쪽 91) 불교 신30집, 宗 務 日 誌 (1941. 9), 41쪽 92) 불교 신31집, 宗 務 日 誌 (1941. 12), 55쪽

336 선문화연구 창간호 상황에서 선학원을 중심으로 하여 선우공제회라는 자치조직을 결성하 고 정법을 구현하려는 원력을 세웠다. 지방에 지부까지 결성하는 禪 院 本 山 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였다. 선학원은 全 鮮 首 座 大 會 를 개최 하여 명실공히 선객들과 전국의 선원을 통솔하는 본산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구승들의 이러한 바람은 현실의 재정난에 직면하면서 활동 이 침체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31년 김적음의 노력에 의해 선학원 은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한 승려의 힘으로 지방조직까지 갖 춘 선학원을 회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 해서 선학원은 재단법인 설립에 나섰고, 1934년에 조선불교선리참구원 이라는 설립인가를 받았다.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은 1935년 제3차 수좌대 회를 계기로 조선불교선종을 탄생시켰다. 이 무렵 선종의 탄생은 조선 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자주적인 의지의 발로였다. 그러나 일제시기 에 재단법인이 된다는 것은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통제 체제하로 편입되 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주요 사업의 결과와 수입과 지출 그리고 이사의 교체 상황까지 서면으로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선학원이 재단 법인으로 전환되고 난 이후에 당시 31본사 주지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 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의 시책에 협력하여 여러 가지 친일 행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선학원은 심전개발운동에 참여하여 기관지 禪 苑 제4 호를 심전개발 특집호로 속간하고 친일 논설들을 게재하였다. 이후 전 시체제하에서 종교보국의 일환으로 출정부대 송영식에 참가하고, 전몰 장병 위령제를 지냈으며, 창씨개명 상담소를 운영하였으며, 국방헌금을 납부하고, 금속류 헌납운동에도 동참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수탈정책이 강화되어가던 전시체제하에서도 선학원은 고승법회를 개최하여 불법을 전파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선의 중흥조라 불리우는 경허 선사의 문집인 경허집 을 간행하는 사업을 통하여 전통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37 선맥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선학원의 이러한 태도를 간파한 총독부는 일제 시기 말기까지 선학원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선 학원은 항일적인 성향이 강한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서 결성되었지만 재 정 확보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곧 난관에 봉착하여 1934년 재단 법인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총독부 당국이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활동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항일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총독부의 감시하에서 일제 시기 비구승을 중심으로 전통 선맥을 수호하고, 정법을 전파하려 한 선학원의 이러한 전통은 해방 이 후 1950년대 이른바 정화불사 의 본산으로 자리 매김 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禪 學 院, 禪 學 院 上 樑 文, 재단법인 선학원약사, 1986. 禪 苑. 佛 敎. 佛 敎 時 報. 每 日 申 報. 京 城 日 報 東 亞 日 報 朝 鮮 日 報 朝 鮮 總 督 府 官 報 宇 垣 一 成 日 記, みすず 書 房, 1988. 鏡 虛 著, 釋 明 正 譯 註, 鏡 虛 集, 通 度 寺 極 樂 禪 院, 1991. 柏 原 祐 泉, 日 本 佛 敎 史 近 代, 吉 田 弘 文 館, 1990. 박경식, 日 本 帝 國 主 義 의 朝 鮮 支 配, 청아출판사, 1986.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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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선문화연구 창간호 <Abstract> The Variation of Character of Seonhakwon after China-Japan W ar Kim, Soon-Seok As Buddhist temple constructed in 1921 by Buddhist monks who had high tendency of anti-japanese movement, Seonhakwon is highly significant in our modern history of Buddhism. During the age of colony, it was frequented by anti-japanese monks. In the modern history, it played the role of main center of so-called Jeongwhabulsa. There is a opinion that Seonhakwonis a Buddhist temple constructed against the Japanese policy of Buddhism. Recognizing that the establishment of Seonhakwon was initiated by monks with high anti-japanese propensity, I am searching background of construction of Seonhakwon in 1921 from the variation of Japanese colonial policy. It is related to permitting foundation of diverse cultural organizations as Japanese colonial policy was converted from military rule to cultural politics in 1920s. In 1920s, Japan permitted the establishment of cultural organizations in Chosun except politic organization. Japan permitted the establishment of cultural organizations in Chosun as an appeasement policy to cool down anti-japan movement. As colonial policy was relaxed in this way, Seonhakwon could be established, but it could not actively spread anti-japan movement, because its activity was confined in the scope approved by Chosun Government-General. Though Seonhakwon was named with the suffix of Won( 院 : temple) instead of Sa( 寺 : temple) or Am( 庵 : small temple), it could not be still free from the oppression of power that ruled colony. Seonhakwon was named with suffix of Won, because there was no provision on the establishment of new Buddhist temple in the order of Buddhist temple. Since there was regulation on the establishment of Buddhist temple in the order of Buddhist temple or enforcement rule of order of Buddhist temple, it was impossible to newly establish Buddhist temple. Facing financial difficulty from the end of 1920s', Seonhakwon was in the crisis of stagnant activity. Thanks to the effort of Kim Jeok Eum, Seonhakwon met the opportunity of restoration in 1931. However, it was difficult for a monk to restore a

중일전쟁 이후 선학원의 성격 변화 / 김순석 341 Seonhakwon with local branch by himself. To solve the financial difficulty, Seonhakwon attempted to establish juridical foundation and was approved to establish Joseonbulkyojungangseonrichamguwon in 1934. Making use of the opportunity of the 3rd Sujwadaewhae( 首 座 大 會 ) in 1935, Joseonbulkyojungangseonrichamguwon established Chosun Zen Buddhism( 禪 宗 ). At that time, the establishment of Zen Buddhism was the embodiment of own intent to preserve the tradition of Chosun Buddhism. However, being juridical foundation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means to be subject to the intervention of Chosun Government-General under the system of control. This is because it had to report in writing the result, revenue and disbursement of main project and substitution of directors each year. After Seonhakwon was converted into juridical foundation, it was inevitable to improve relation with juridical foundation, Chosun Buddhism Central Affairs Institute, which was composed of the then head priest of Buddhist temple of 31st center. Furthermore, cooperating to the policy of Government-General, it was forced to leave pro-japanese traces such as alteration of surname, memorial service for the war dead, payment of contribution for national defense, contribution of metals, etc. Key Words: Seonhakwon, Buddhist monk, Juridical foundation, Samguwon Sujwadaewhae, Zen Buddh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