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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꾸준히 관심을 끈 것은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에 따 라 북한체제가 달라질 것이라는 가정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 하는 자체보다는 후계자에 의해 북한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 는 점인데, 북한체제에서 최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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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세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6자회담 재개 대( 對 ) 한 미 일 군사협력 금년 들어 남북관계의 개선 신호는 북측의 적극적인 평화공세에서 시작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 이 어, 북한 국방위원회는 1월 16일 우리측에게 중대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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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2013년에 들어와서는 북한 지도부에서 장성택보다는 최룡해의 영향력이 더욱 커 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 바 있음. 3) - 장성택이 북한 지도부의 핵심 엘리트 중 한 명이기는 했지만, 만약 그가 명실상부한 2 인자 나 실질적인 1인자 에 해당하는 영향력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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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송승종길병옥, ' 군용무인기개발의역사와그전략적함의에대한연구,' 군사 제 97 호, ) 최근공개된자료에따르면주한미군은기간중 268 회의무인기비행을수행한것으로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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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저널(2월호)0327.ok :40 PM 페이지23 서 품질에 혼을 담아 최고의 명품발전소 건설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질의응답 시간에 여수화력 직 DK 한국동서발전 대한민국 동반성장의 새 길을 열다 원들이 효율개선, 정비편의성 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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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과 분석 김정은 체제의 핵정책과 우리의 대응방향 신재현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 (2009~14) 박형중 시진핑 시기 새로운 한중관계의 진화: 연미협 중 전략 추진을 제안하면서 김흥규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10월호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 (2009~14)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dpblue@kinu.or.kr Ⅰ. 서론 북한의 역사에도 중대한 전환점(critical juncture)들이 존재해 왔다. 중대한 전환점이란, 어떤 특정 시점을 전후하여 대내외 정책상의 중요 변화가 한꺼번에 발생하는 경우 그 시점을 지칭한다. 그런데 공식 문건이나 담화에서는 이러한 중대한 전환점이 명시적으로 천명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다시 말해 본고가 분석하는 중대한 전환점의 존재 여부는 외부 관찰자가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내린 결론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북한 지도부가 어떤 특정 시점에 내부적으로 정책상의 중대한 변화를 결정하고 이를 분야별로 또한 점차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이러한 중대한 전환점으로 2009년과 2012년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김정은의 권력승계 과정의 시작과 함께 그리고 종결과 함께 북한의 대내외 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먼저 2009년 제2차 핵실험과 2012년 제3차 핵실험이 거행되었다. 2009년은 김정은에게로의 권력승계가 시작된 해이자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해이고, 2012년은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해이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해이다. 2009년 이후 핵정책과 대남정책 이 현저히 강경해졌다. 제2차, 제3차 핵실험을 통해 북한은 오바마 정부와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을 결정해 주었다. 2012년 이후에도 주요한 변화가 있었다. 둘째, 2009년을 시작으로 후계구도 구축을 위한 권력체계 구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장성택-김경희-최 용해-이영호를 중심으로 하는 세습후견연합이 등장했다. 2012년부터 이 세습후견연합이 공격당하며, 그 대신 조직지도부 계열의 인물이 득세한다. 셋째, 2009년부터 반시장정책과 10

동향과 분석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2009~14) 사회 변화 통제정책이 현저히 강화되었고, 2012년부터는 일종의 친시장정책이 시행되는 한편, 사회 변화 통제정책은 대체로 유지되고 있다. 아래에서 2009년과 2012년에 발생한 대내외 정책의 전반적 변화의 내용과 배경을 보다 자세히 서술한다. Ⅱ. 2009년 이후 대내외 공격성 강화와 그 배경 2008년 8월 뇌경색으로 일선에서 퇴장했던 김정일은 두 달 후인 10월 일선에 복귀했다. 2009년 1월에는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운다는 것이 공식 선언되었다. 다시 말해 현존 수령인 김정일의 권력과는 별도로 후계자가 독자적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아울러 북한은 2008년 말~2009년 초부터 대내외 정책에서 강경화 및 공격성을 강화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보자. 1. 정권 생존환경의 악화 2007년 말까지 북한의 대외관계는 북한에 전략적으로 우호적이었다. 북한은 북한에 유리한 국제적 핵타협을 바탕으로 한국 및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김정일을 중심으로 확고한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2008년부터 정세의 방향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 번째 요인은 북한이 2008년 초 한국에 등장한 보수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해 반발하고 강경한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2008년 말 6자회담 틀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러한 시점에서 북한에는 불운하게도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경색을 당했다. 위에서 서술했던 3가지 사항은 북한 정권에 3중의 위기가 발생함을 의미했다. 첫째, 정권의 대외 생존환경 악화에 따른 정권 생존전략의 위기이다. 둘째, 권력승계문제 대두에 따른 내부 정치의 위기이다. 셋째, 정권 대 사회의 위기이다. 이 세 가지는 독립적인 것으로, 반드시 동시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에는 불운하게도 이 세 가지가 2008년 말 동시에 발생했다. 따라서 당시 북한 당국은 정세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1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10월호 이에 대응하여 2009년 초부터 북한 정권이 대내외 정책을 현저히 강경화시켰다. 아래 서술의 주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순차적으로 정권 생존전략의 위기 문제, 권력승계문제, 정권 대 사회 간의 위기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위기의 내용을 알아본다. 아울러 둘째로 이것이 북한의 대외정책, 특히 핵정책과 대남정책의 공격성 강화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를 분석한다. 2. 3중의 위기 가. 정권 생존전략의 위기 2005년 이후 북한은 다섯 가지 목표를 중심으로 한 정권 생존전략을 추진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러한 정권 생존전략은 2007년 말까지는 대체로 순조롭게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008년 10월경에 이르면, 이러한 전략목표 실현의 전망이 매우 어둡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정권 생존전략이 파탄날 수도 있을 상황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 북한은 대내외 강공으로 이러한 난관을 돌파하고자 시도했다. 먼저 다섯 가지 정책목표를 보자. 첫째, 핵무기 보유를 고수하며, 최소한 묵시적으로 최대한 현시적으로 핵보유국가로 행세한다. 둘째, 핵무기 보유를 묵시적 또는 현시적으로 인정받은 상황에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관계를 개선한다. 셋째, 한국과는 핵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며, 남북관계는 한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서 북한 당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관점에서 형성한다. 넷째, 내부경제 생산성 향상 노력(개혁)은 최소화하고 각종 외화벌이 사업 1) 을 적극적으로 확장하여 정권 생존자금을 확보한다. 다섯째, 수령독재의 공고화, 공안통 치능력 확대, 충성층에 대한 특권 보장, 내부 정치적 각종 견제와 균형을 통해 정치 안정을 유지한다. 적어도 2007년 6자회담에서의 2 13 합의와 10 3 합의 그리고 10월 2~4일의 남북정상회 담 개최를 거쳐 2007년 말까지는 북한의 이러한 정책목표가 대체로 북한 측에 만족스러운 방향에서 성취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당시 북한 당국이 추진 가능하다고 설정하였을 국가전략 포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미 확보한 플루토늄과 핵무기는 비핵화 협상에서 제외한다. 둘째, 한국은 북한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지원세력으로 1) 광물 수출, 대량 살상무기 외교를 통한 외부원조 수혜 확대, 각종 불법활동, 관광진흥, 노동력 수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각종 임대사업(중국-동 해 교통로 임대 수입, 항구 임대, 가스파이프라인 설치 등), 폐쇄형 경제특구 증설 등. 12

동향과 분석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2009~14) 기능해야 한다. 셋째, 북한은 개혁 개방을 배격하며, 현존 체제를 유지한다. 이와 같은 전략을 추구하는 북한은 대외 안보 면에서는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승인 또는 묵시적 인정을 받는 가운데 대내적으로는 현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협력 에 의해서든 협박 의 결실에 의해서든 외부원조, 특히 한국의 지원에 의해 존속되는 국가이다. 북한이 이와 같은 국가전략의 성취에 기대를 가지게 되는 데 있어서 특히 당시 한국정부의 협력이 크게 기여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핵보유는 협상용이고, 적절한 경제적 보상과 안전보장을 제공하면 북한의 개혁 개방과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간주했다. 이러한 관념은 그 당시 국제사회의 주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북핵 해결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시 말해 묵시적 핵보유 상태가 일정 기간 유지되더 라도) 비핵화 협상의 진행에 만족하는 한편,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강화하며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수립할 것을 주요 의제로 내세웠다. 한국의 이러한 입장은 미국의 대북정책, 그리고 6자회담의 의제와 합의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낙관적 정세를 배경으로 2007년도 말경 북한 당국은 경제문제에 집중하겠다는 것, 그리고 2012년까지 강성대국 대문을 열 것을 천명했다. 나아가 2007년에 아마도 이미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당시 북한의 전략 개념은 북한에 유리하게 형성된 북핵문제 해결방향과 우호적 남북관계 를 토대로 김일성 출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까지 세습후계의 기반을 안정화시켜 줄 수 있는 강성대국 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08년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 측에 보수정부가 등장했다. 한국정부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비핵화, 대북 원조, 평화협정 체결 문제에 대해 보다 원칙적인 입장을 취했다. 2008년 12월 북한의 핵능력 및 핵시설 신고와 검증에 대해 북한이 협조하지 않자 6자회담이 중단되었다. 그동안 북한은 6자회담을 통해 플루토늄 생산의 단순 동결을 토대로 한국 및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과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것이 성공하는 것은 북한이 그동안 진전시켜 온 핵능력과 핵무기, 그리고 특히 우라늄 농축 문제에 대해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사실상 국제적 묵인을 받는 상태에서 한국, 미국 및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북한과 다른 6자회담 당사국 사이에는 플루토늄 생산을 동결한다는 데까지는 이해가 일치하고 여러 조치가 진전되었다. 그러나 2008년 말에 이르러 6자회담이 북한 핵능력의 검증 등 그 이상의 문제를 거론하고 실행을 요구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자 북한과 다른 6자회담 당사국 특히 한국과 미국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2008년 12월 6자회담이 결렬되었으며, 북한 대 한국과 북한 대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13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10월호 북한은 이러한 난관을 강공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신생 오바마 정부가 북한에 대한 관여와 대화를 강화할 것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2009년 5월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핵실험을 전후하여, 북한은 핵보유국가의 자격으로 한국 및 미국과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주장을 공식화했다. 또한 이후 북한은 그간 핵능력에 대해 모호성을 견지하던 정책을 포기하고, 우라늄 농축과 핵무기 및 미사일 능력 등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는 북한 대 한국과 북한 대 미국의 관계에서 갈등적 대치를 구조화하는 조치였으며, 북한의 생존환경과 관련하여 하나의 국면 전환을 의미했다. 그동안 북한은 핵동결을 배경으로 주변 환경을 우호적으로 관리하면서 특히 한국으로부터 대량의 원조를 수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6자회담이 결렬되면서 한국 및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북한의 대외 생존환경이 적대적으로 변화하는 국면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대외관계의 위기가 단순하게 외교와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 경제문제와 연계되었다. 그 이유는 대외관계가 경색되면서 그동안 북한경제를 지탱해 주던 대외원조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당시 북한의 대외관계의 악화는 단순히 대외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 내부 경제와 정치의 안정에도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는 문제였다. 나. 권력승계의 위기 대외 생존환경의 위기는 물론 내부의 정치적 안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외원조 감소에 따라 내부 경제사정이 악화되며, 엘리트 내부의 분배 투쟁이 강화되기 때문이 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차원의 문제와 권력세습에 따른 정치 불안정 잠재성 증가의 문제는 그 성격상 별개 차원의 문제였다. 김정일의 입장에서 볼 때, 후계문제는 매우 불운한 시기에 대두하였다. 마침 대내외 정세가 긴박해져가고 있는 과정에서 2008년 하반기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불가피하게 후계체제 건설사업을 시작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인물 중심적 독재정권에서 지도자의 교체는 상층 엘리트 권력의 재편성을 야기하기 때문에 권력 내부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다. 또한 새로운 지도자가 된 인물이 사회와 주민에 대해서 충분한 권위를 다시 확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북한은 정권 생존전략의 위기와 함께 권력승계가 야기하는 내부 불안정 잠재성의 요소를 겹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사실 김정일이 나이가 들어 가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북한의 상층 엘리트 내부에서는 14

동향과 분석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2009~14) 권력승계문제가 중대한 정치문제로 등장해 있었다. 김정일 자신에게뿐 아니라 정권의 주요 엘리트 집단에게도 권력승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각자의 정치적 장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1995년 선군정치가 시작된 이래 김정일을 제외하고 북한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집단은 선군 군부였다. 1990년대 선군정치하에서 군부의 영향력 증대는 김정일에게 있어 이중적 의미를 가졌다. 한편에서 김정일은 군부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권력 보존에 활용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김정일은 군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증대하는 것을 우려했다. 군부는 권력승계 과정에서도 주도권을 잡고 그리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연장하고자 했다. 김정일의 입장에서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는 군부세력을 견제하고, 통치연합을 재편하 는 작업이었다. 김정일의 우려가 가시화된 계기는 2000년대 초반의 권력세습문제 대두였다. 2002년부터 군부가 주도하는 가운데 고영희-군부-조직지도부(이제강 이용철) 연합이 세습후계 프로젝 트를 추진했다. 김정일은 이 시기에 후계 논의를 중단시켰다.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였을 것이다. 첫째, 김정일은 후계 논의 시작이 자신의 권력을 급격히 위축시킬 가능성을 우려했다. 둘째, 그렇지 않아도 강대한 군부가 후계문제에서까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우려했다. 군부가 권력세습의 주도권을 잡으면, 그 후계자는 군부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다. 김정일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을 견제할 권력 게임에 시동을 걸었다. 김정일은 먼저 장성택, 그리고 뒤이어 김경희에게 힘을 실어 주어, 군부-조직지도부의 견제세 력으로 키웠다. 김정일은 2005/2006년부터 장성택을 내세웠고, 2008/2009년 이후에는 그동안 사실상 은둔하고 있었던 김경희도 전면에 내세웠다. 김정일은 2007년 조직지도부로부 터 행정부를 분리해 장성택이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조직지도부를 견제했다. 2005년 이래 김정일은 또한 장성택에게 군부의 무역권을 축소하고 구조조정하는 역할을 맡겼다. 김정일은 그 과정에서 장성택이 자기 자신의 이권을 팽창시키는 것을 묵인했다. 2009년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내세우면서, 권력승계 과정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 그룹 간의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김정일은 구군부를 대신하여 새로운 엘리트 집단을 내세우는 권력 재편을 본격화했다. 2009년부터 선군시대 군부의 주요 인물이 점진적으 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뒷받침하에서 장성택은 2009년과 2010년 오극렬 등 구군부 유력 인물과의 이권 다툼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김정일은 선군 군부가 아니라 김경희-장성택 연합이 2009년 이후 김정은 후계체제 수립에서 주도권을 갖도록 지원했다. 권력승계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상층 통치연합의 재편과정은 엘리트 내부의 긴장과 갈등의 15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10월호 잠재력을 높이는 과정이었다. 특히 김정은 후계자의 권력기반을 만들어 주기 위한 엘리트 재편작업이 2009년과 2010년에 상-중-하층 간부를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2010 년 9월 28일에 열렸던 제3차 당대표자회는 이러한 권력 재편을 중간 결산하는 자리였다. 이와 같은 대대적 내부 권력 재편의 시기와 병행하여 북한 당국은 공격능력 과시를 통한 대외긴장조치를 유발했다. 2009년 5월의 제2차 핵실험에 이어 10월 우라늄 농축능력 과시 등이 있었다. 아울러 2010년 3월 천안함에 대한 공격, 11월에 연평도 포격 등 공격적 대남정책이 펼쳐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조치는 세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첫째, 그 배후 주역인 후계자 김정은의 위신을 대내외에 공고화한다. 둘째, 북한 정권의 강성함을 내부적으로 과시하여 충성을 강화한다. 셋째, 대외긴장을 통해 내부에 긴장을 조성함으로써 내부 규율을 강화한다. 다. 정권 - 사회 관계에서의 위기 아울러 2009년과 2010년은 정권과 사회 간의 관계에서 현저히 긴장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북한 정권과 사회 사이의 긴장은 2005년 이후 반시장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증가하고 있었다. 북한 당국은 권력승계가 시작되던 2009년에 들어서면서 반시장적 정책을 한층 강력하게 전개했다. 이에 따라 이 시기로부터 정권 대 사회의 긴장이 한 단계 높아졌다. 북한 당국에는 불운하게도 2009년 11월 화폐개혁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재앙스러운 상황이 진행되는 가운데 2010~11년 중동에서 재스민 혁명이 발생했다. 북한은 2005년부터 2004년까지의 개혁적 정책으로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2007년 5월부 터 그간의 개혁적 현상에 대한 전국적 비사검열이 현저히 강화되었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2008년을 넘어 2009년 11월 화폐교환조치에서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반개혁적 정책기조는 내부 경제를 불모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시장 참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생계형 중소상인층과의 갈등을 강화시키고 있다. 특히 2009년 11월의 화폐교환조치는 대부분의 자금을 내화로 소지하고 있던 중소상인층과 일반 주민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화폐개혁으로 인해 시장을 유지시켜 주던 하부구조가 붕괴하고 다수 주민의 구매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2010년부터 북한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화폐개혁은 또한 일반 주민에게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근원지가 중앙의 정책이라는 점도 각인시켜 주었다. 북한에서 2010~11년 시기에는 화폐교환조치의 여파로 인해 정권에 대한 주민 불만이 현저히 증가했고, 낙서 행위와 같은 초보적 저항 시도도 나타나고 있었다. 16

동향과 분석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2009~14) 2010~11년 진행된 중동의 재스민 혁명도 북한 당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재스민 혁명이 발생하고 지속된 시기는 북한 당국에는 불운하게도 2009년 11월 화폐개혁조치의 여파가 북한사회를 크게 동요시키고 있던 시기와 일치했다. 또한 중동 재스민 혁명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도 2010년 2월 반정부운동 발생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증가했다. 천안함에 대한 공격은 화폐개혁의 충격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0년 3월 발생했다. 북한 당국은 재스민 혁명이 북한에 영향을 줄 것에 대해 우려했고, 이에 대비했다. 북한에 최초로 폭동 진압 전담조직이 이때 등장했다. 북한 당국은 이러한 내부 동요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부와 같은 내부 공안체계를 현저히 강화했다. 아울러 2010년 9월 당대표자회 이후 김정은이 책임자가 되어 주로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비사검열이 현저히 강화되었다. 그 주요 대상은 탈북, 마약, 외래문물 침투였다. 이와 같이 비사검열이 극도로 강화되던 시기에 북한은 11월 연평도를 공격했다. Ⅲ.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의 변화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다. 이어서 2012년 4월 김정은 정권이 공식 출범했다. 김정은 정권의 등장과 함께 첫째 핵정책과 대남정책, 둘째 권력승계를 위한 통치연합 재편, 셋째 정권 대 사회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김정은 정권의 북한은 이러한 세 가지 분야에서 공히 새로운 정책방향을 보여주었다. 먼저 핵정책과 대남정책은 김정은 정권의 등장과 함께 한 단계 더 공격적으로 변화했다. 북한은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이후 핵무기 소형화 능력과 미사일 운반능력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국제사회,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징벌적 압력에 유례없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둘째, 김정은은 2012년 4월 권력승계가 종결되자 그간 권력승계 과정에서 득세했던 장성택- 김경희-이영호-최용해의 연합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통치연합을 구성했다. 새로운 통치연합 의 핵심은 2000년대 초반 고영희와 함께 세습후계를 추진하는 데 중추 역할을 했던 조직지도부 계열의 인물들이다. 셋째, 김정은이 들어서면서 시장활용정책이 보다 가시화되었다. 김정은 정권의 북한은 2012년 6 28 조치를 시발로, 시장을 용인하고 활용하는 방향에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7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10월호 대내 통제는 2013년 하반기부터 강화되기 시작하여, 12월 장성택 숙청을 거치면서 통제수준이 한 단계 더 높아졌다. 1. 핵정책 및 대남정책 가. 주요 내용 2011년 11월 김정일이 사망한 이후 김정은은 김정일 생존시기부터 진행해 오던 미국과의 협상안을 2012년 2월 29일 승인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4월 13일 장거리 로켓 발사실험을 감행함으로써 2 29 합의를 파기했다. 이 발사실험이 실패로 끝나자, 북한은 같은 해 12월 12월 장거리 미사일 은하 3호를 발사했고 성공했다. 이어 북한은 2013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을 거행했다. 이후 북한의 핵정책은 일련의 변화를 보였다.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특히 소형화 경량화된 원자탄 사용, 다종화된 핵 억제력 을 자신의 핵능력을 표시하는 핵심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다종화된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단 중 장거리의 다종화된 미사일 능력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고 또한 보란 듯이 과시 행동을 취하고 있다. 2013년 3월 7일 외무성 성명의 핵 선제타격권리 주장을 시발점으로 하여 북한은 핵무기의 직접 사용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은 2014년 1월 1일 신년연설 그리고 1월 16일 국방위 중대제안 에서 한국을 상대로 하여 핵재난 을 언급했다. 3월 14일 국방위 성명은 다종화된 핵타격의 주된 과녁이 미국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제4차 핵실험 감행 협박을 일상화하 고 있다. 제4차 핵실험 협박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14년 3월 14일 국방위 성명으로, 핵 억제력을 과시하는 추가적 조치 를 언급했다. 나. 대남정책 김정은 정권이 출범하면서, 북한은 대남 공격능력을 확충하고 대남 군사전략의 공격성을 한층 높였다. 2011년 말~2012년 초 미사일 지도국이 전략로켓군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어 북한은 2012년 4월 군사퍼레이드에서 KN-08을 노출하는 등, 미사일 능력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기 시작했다. 2012년 8월 김정은의 지시로 전략사이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우리 측의 서북도서사령부에 대응하기 위해 2012년 9월경에는 서남전선사령부가 창설된 것이 18

동향과 분석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2009~14) 확인되었다. 아울러 북한은 2015년을 통일대전 완성 의 해로 선포하고 전체 병종별 실전적 전술훈련과 전력 증강을 통해 전면전 준비활동을 했다. 이를 위해 군부대들의 전술과 훈련방식을 완전히 변경했다.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 이후에도 북한은 한층 강경하고 공세적으로 대남 압박을 감행했다. 2013년 3~5월 북한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연례적인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빌미로 한국에 대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높였다. 북한은 이 시기 정전협정 백지화, 남북불가침협정 폐기, 남북비핵화 선언 백지화, 개성공단 폐쇄, 1호 전투근무태세 하달, 핵 선제타격권 주장 등을 천명했다. 2014년 들어서 김정은은 신년연설에서 한국에 대해 핵재난 을 위협하였고, 1월 16일 국방위 중대선언은 이를 남북한이 논의하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북한은 한미합동 군사훈련 기간 중에 이례적으로 도발 수위를 높였다. 나아가 북한은 2014년 들어 9월 초까지 19차례에 걸쳐 111발의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남북 간에 군사충돌위기를 유발할 것 같은 상황이 일상화되도록 유도하면서 이를 주요 협박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 핵정책 및 대남정책의 배경 2009년부터 두드러진 핵정책 및 대남정책에서의 공격성 강화의 배경에는 당시 북한 정권이 직면했던 3중의 위기가 배경으로 작용했다. 3중의 위기는 대외관계에서의 위기, 권력승계의 위기, 그리고 정권 대 사회 간의 위기였다. 북한의 대외정책과 관련하여 2009년 이래 변하지 않고 있는 사항 중의 하나는 북한 정권의 생존조건과 주변 환경 사이에 부조화가 매우 심하다는 것이다. 한편에서 북한은 핵능력 확장을 놓고 높은 수준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다른 편에서는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 강도 높은 다양한 제재로 대응하고 있고 동시에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높은 수준의 도발에 대해 상응하는 강경한 태도로 맞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거듭할수록,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제재의 강도가 증가했고 한국과 미국도 군사적 대응태세를 갖추어 갔다. 다른 편에서 북한도 앞에서 서술했듯이 대남 압박을 강화했다. 북한은 선행 도발을 통해 전략적 성과를 획득한 뒤에, 전술적 유화를 통해 한국(과 미국)이 이를 수용할 수 있는지 반응을 테스트하는 식의 정책을 반복하여 취했다. 2009년 북한에 대한 대화와 관여를 강조하던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직후 북한은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그러고 나서 7월부터 대미 대남 유화정책에 나섰다. 북한은 2010년 3월의 천안함 공격, 11월의 연평도 공격,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등 실력 과시 이후에 2012년 미국과 2 29 합의에 19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10월호 도달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여야 후보 모두가 대북 온건정책을 견지했음에 도 불구하고 북한은 12월 장거리 미사일 실험,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또한 4월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그러고 나서 중 하반기에 대중 및 대남 유화 국면에 진입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2014년 2월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제의에까지 응했다. 2014년 들어 북한은 2월과 3월, 6월과 7월의 대대적인 전술로켓실험, 그리고 3월 이후의 제4차 핵실험 협박을 배경으로 9월 아시안게임 참가를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에 유리한 분위기 조성 을 위해 나서고 있다. 라. 핵능력 증강을 대내 정치 정당성에 적극 활용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핵능력 증강을 대내 정치의 정당성 고양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2012년 2 29 합의를 파기하면서까지 4월 13일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한 것은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것 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김정은 정권은 2012년 4월 개정 헌법 서문에서 김정일이 북한을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었다 고 하여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또한 장거리 로켓 발사 성공 후 사흘째인 2012년 14일에는 15만 군중을 동원하여 평양에서 군민경축행사를 가졌다. 마찬가지로 제3차 핵실험 성공 3일째인 2013년 2월 14일에는 제3차 핵실험을 자축하는 평양군민연환대회 를 개최했다. 북한은 이어 3월 31일 당중앙위 전원회의 결의로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의 병진노선 을 채택했다. 곧이어 4월 1일 열렸던 최고인민회의 제12기 7차 회의는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 라는 법령을 채택했다. 2. 통치연합 재편의 지속과 대외정책 2009년 권력승계가 시작되는 과정은 권력승계 과정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여러 권력 그룹 간의 경쟁이 격화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의 후원을 받아 장성택이 득세했으며, 선군정치 시대에 주류 역할을 했던 구군부와 조직지도부는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사정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표면상으로는 2012년 까지도 김경희-장성택 연합의 주도권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정일의 사망은 김경희-장성택 연합의 가장 중요한 권력 원천이 소멸했음을 의미했다. 이에 김경희-장성택 20

동향과 분석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2009~14) 연합의 반대파인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이 발호하기 시작했다. 김정은도 반대파의 공세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2012년과 2013년 김경희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이는 김경희-장성택 연합의 한 축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김경희의 건강 악화와 함께 2013년 하반기 장성택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이를 기회로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은 장성택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사건들 또는 관행들이 2013년 갑자기 종파 와 국가반역 으로 사건화 되었고, 2013년 12월 장성택 사형의 빌미로 활용되었다. 장성택 숙청의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에는 군부의 무역권을 제한하고 군부를 재편하는 데서의 장성택의 역할과 장성택이 제3차 핵실험 거행에 대해 반대한 것도 들어 있을 것이다. 장성택은 2006년 군부의 무역권을 제한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을 전후로 하여 장성택의 주도로 군부의 무역활동이 현격히 제한당하기 시작했다. 2012년 7월 15일 정치국회의를 통해 이영호 총참모장이 해임되었다. 그 이유 중의 일부는 군부의 외화벌이 사업을 내각으로 이전한 것에 대한 불만 표출 및 개인 비리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로부터 강도 높은 군부 재편작업이 진행되었다. 무역권한 축소에 대한 군부의 저항도 상당했고 심각한 갈등을 유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이후 2013년 중반까지 군부 핵심 보직이 빈번히 교체되었으며, 군 장성들의 잦은 강등(8명)과 복권(4명)이 발생했다. 한편, 이러한 군부 재편의 와중에 2012년 12월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이 시행되고 그 후 4월까지 이례적인 긴장고조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는 군부의 외화벌이 활동이 위기에 처한 시기에 군부의 대남 도발이 증가했다는 점에서 2010년의 패턴과 유사하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었다. 대체로 3월경부터 군량미(전시 비축미)가 방출되었다. 이는 2013년도 쌀값의 하향 안정에 기여했다. 2009년 11월 화폐개혁 직후 군부가 군량미 방출을 비토했던 것과 비교되는 사항이다. 수령독재의 특성상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장성택에게 임무를 맡기고 후원하지 않았다면 장성택의 이와 같은 역할과 권세 확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김정일이 장성택을 내세워 조직지도부와 군부를 견제했으며, 김정일은 무엇인가 그래야 할 정치적 필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사망은 장성택 권력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 소멸한 것을 의미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후원을 배경으로 권세를 확장했으며, 김정일의 후원이 있어야만 권세를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이 새로운 수령이 된 이후부터 장성택과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과거 고영희-이제강 계열의 인물들이 점차로 다시 득세했다. 이는 새로운 수령 김정은의 의중을 반영했을 것이다. 김정일이 장성택을 후원했다면 김정은은 21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10월호 장성택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수령독재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김정일의 정치적 필요와 김정은의 정치적 필요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김정일이 장성택을 앞세워 조직지도부와 군부를 견제한 것은 이들의 권세가 지나치게 팽창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권력세습 과정에서 김정일과 김정은은 장성택과 최용해에게 힘을 실어 주고 이를 활용하여 군부를 효과적으로 재편하는 데 성공했었다. 이러한 역할 때문에 장성택과 최용해는 실각한 군부 주요 인물들의 원성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군부 재편 이후에 김정은은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수령 등극 이후 김정은이 당면한 최대 세력은 장성택이었을 것이다. 장성택을 견제하고자 하는 김정은의 의도는 그간 장성택 권세 확장의 최대 피해자였던 군부와 조직지도부의 적극적 지지를 받았거나 또는 요구를 반영했을 것이다. 장성택 숙청과정에서 그리고 숙청 이후 과거 고영희-이제강 계열의 인물이 다시 득세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장성택을 숙청하는 데 과거 이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 부장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 부장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2014년 4월에는 최용해도 총정치국장을 그만두어야 했는데, 그를 대신한 인물은 황병서 조직지도부 제1부 부장이었다. 황병서는 1990년대 후반 고영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반대에도 당 조직지도부와 군 고위 간부를 내세워 김정은 제1위원장을 후계자로 내정하기 위한 작업을 은밀히 추진할 때 손발을 2) 맞추던 인물이었다. 3. 정권 대 사회 위기의 완화와 격화 정권 대 사회의 관계는 2009년 11월 화폐개혁 이후 2010~11년에 극히 악화되었다. 그러나 정권 대 사회 관계는 2012~13년에 들어서면서 일정하게 회복되는 경향이 발견된다. 무엇보다 2012~13년 북한의 경제사정이 호전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2013년에는 북한에서는 이례적으로 쌀값과 환율이 1년 내내 하향세를 보였다. 또한 북한 당국이 2012년 6월 28일 시장의 역할을 현저히 확대 용인하는 새로운 경제관리체제 를 도입했다. 이후 북한 당국의 시장활동에 대한 단속도 현저히 느슨해졌다. 아울러 외부와의 휴대폰 통화, 한국 문물에 대한 단속 등 각종 명목의 내부 통제도 2012년부터 2013년 9월경까지는 느슨해졌다. 그러나 김정은 집권하에서도 북한의 각종 대외긴장 도발행위는 내부적 긴장과 동원을 통해 주민 규율을 향상시키는 데 활용되었다. 특히 2012년 12월 장거리 로켓 실험으로부터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 그리고 3~5월까지의 대남 군사적 긴장고조 시기에 그러했다. 2) 최선영, 김정은과 인연 北 고위인사들 승승장구, 연합뉴스, 2014. 4. 28. 22

동향과 분석 김정은 권력승계와 대내외 정책의 추이(2009~14) 1월에 군대에 전투동원태세, 2월에는 전 주민을 상대로 준전시상태 선언 등이 선포되었다. 사회통제는 2013년 하반기부터 다시 현저히 강화되었다. 2013년 하반기부터 한국의 영상물 에 대한 단속이 극적으로 높아졌다. 아울러 12월 장성택 숙청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각종 명목의 주민통제가 현저히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체로 2014년에도 지속되고 있다. Ⅳ. 결론 북한 역사를 보면, 어느 한 시점을 계기로 대내외 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는 시점이 있어 왔다. 가장 최근에는 2009년과 2012년이 그러한 해였다. 2009년부터 북한은 대내외적인 위기에 직면하며, 이를 대내외 강경정책으로 돌파한다. 2012년이 되면, 이러한 위기 중에서 일부는 지속되고 일부는 완화된 양상이 나타난다. 2009년 6자회담의 파탄 및 권력승계의 본격적 시작과 함께 북한의 대내외 정책은 한층 강경화되었다. 북한은 2009년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북한을 핵무기 보유국가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남정책은 군사화되었고 핵능력의 모호성 정책이 포기되었다. 대내적으로는 반시장정책이 한층 강화되고 대중동원정책이 시행되었다. 2009년부터 권력세습 이 본격 시작되었으며, 아울러 권력 연합도 재편성되었다. 2012년 4월 김정은에게로의 권력승계 과정이 완료되었다. 동시에 북한의 대내외 정책이 다시 한 번 크게 변화했다. 2013년 2월 북한은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를 전후로 북한은 다종화된 핵무기를 사용하여 핵 선제타격을 감행할 수 있음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북한은 미사일 능력을 공공연히 내세우기 시작했고, 한국에 대한 재래식 군사 압박도 현저히 강화되었 다. 권력승계 과정에서의 엘리트 갈등은 2013년 말 장성택 숙청, 2013년 최용해 실각, 그리고 그 결과로서 중앙당 조직지도부 계열의 패권 확립으로 결말이 났다. 북한은 2012년 6 28 조치 이래 일련의 경제개혁조치를 감행했으며, 시장에 허용적인 조치를 취했다. 사상통제, 외래문물과의 접촉, 탈북 등과 관련하여 정권의 사회에 대한 억압정책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 다.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