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록의 철학적 조건들 - 음악을 듣는 귀, 음악을 보는 눈 1) 허경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마르크 블로흐대학 0. 나는 너다(I is You). 이 글의 나 는 보편적 나, 즉 너 이다. 따라서 이 글의 나 는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 즉 너 이다. 1. 동대문구 이문동의 어느 국민학생이... 1974년 8월의 어느 늦여름 저녁. 국민학교 4학년생인 나는 이문동 개천가 공터에서 친구들 과 다방구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낮은 아직 채 더위가 가시지 않은 뜨거운 날씨였지만 저 녁 무렵에는 가을을 알리는 바람이 솔솔 불어와 우리들이 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곧 있으면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우리들을 부르실 것이었다. 그날 나는 술래가 아니었다. 한참을 뛰어 다니다 멀리 도망나와 개천가에 서서 숨을 헐떡이며 쉬던 나는 저기 멀리서 정 신없이 뛰어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온몸으로 행복을 느꼈다. 그래, 나는 행복하다. 지금 생 각해 보아도 그것은 글자 그대로 온전한 행복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한 순간이었지만 그때 의 체험은 나에게 영원한 것이다. 그것은 지나가 버렸지만 오늘도 내 마음 속에 울려 퍼지 고 있는 아름다운 노래다. 그 노래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국민학교 때 어린이들이 갖는 그 불안하고도 아름다운 느낌. 어두컴컴한 안방 다락에서 숨 어 있곤 했던 그 어린 시절의 놀이들. 학교와 공터 그리고 집말고는 언덕 하나를 넘어서도 놀랍고 신기하고 두려웠던 그 시절. 어머니의 목소리. 친구들의 모습.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유관순 누나. 화장실과 귀신 이야기. 불완전이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라면 나는 그 불완전한 현실에서 온전한 행복을 느꼈다. 나는 행복하고 아름다웠다. 그러한 느낌을 나는 음악을 들 으며 책을 읽으며 각기 딱 한 번씩만 다시 느꼈다. 한 번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芥 川 龍 之 介 )의 광차 (トロッコ)를 읽으며, 또 한 번은 제네시스(Genesis)의 노래 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I know what I like)를 들으며 그랬다. 2) 나는 나이를 먹었고 음악을 듣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와 나는 또래들과 어울려 가요를 들 었고 팝송을 알았다. 당시에 누구나 전문가였던 남진, 나훈아를 거쳐 산울림을 알았고, 비지 스와 퀸을 알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광주에서 큰 일 이 벌어졌어도 나와 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하드 록을 거쳐 뉴 웨이브와 프로그레 1) 이 글의 일부는 한국 록의 철학적 조건들: 나는 서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라는 제명으로 고대대 학원신문 1997년 9월 12일자 8면에 실렸다. 그러나 그 글은 당시 지면 관계상 이 자리에 실린 글의 4분의 1가량만이 게재되었다. 이 기회를 빌어 나는 글의 결론 부분을 완전히 새롭게 다시 쓰고(6장 이하), 상당한 각주와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2) 이 광차 를 읽으며 나는 아쿠다가와가 나와 똑 같은 체험을 했음을 알았다 - 나는 이 단편을 일한대역문고 羅 生 門 :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단편선 (다락원)으로 읽었다. 제네시스의 이 곡은 원래 스튜디오 버전이 그들의 1973년 앨범 잉글랜드를 파운드로 팔기 (Selling England by the pound)에 실려 있지만 내가 말하는 곡은 그들의 1977년 실황 쎄컨즈 아웃 (Seconds out)에 실려 있는 것이다. - 1 -
시브와 그램 록에 미쳤다. 마이클 프랭크스와 에어로스미쓰와 킹 크림슨이 나의 우상이었 다. 판도 오리지날에서 라이센스, 준라이센스, 빽판 가리지 않고 꾸준히 모았다. 그 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월간팝송 의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 들어왔 다. 80년대였다. 이후 나는 한 때 음악을 듣지 않았다. 그것이 사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러한 때에도 내 마음 속에 울려 퍼지는 나만의 음악을 들었었 다. 나는 음악을 들었기에 즐거웠고 음악을 들었기에 괴로웠다. 머리가 굵어지고 특히 대학 을 들어와 자의식이 생기면서 나는 음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대한민국에서 한 20년 음악을 들은 어떤 젊은이가 자신의 생활에서 음악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 고 즐거워 했던 것들에 관한 하나의 기록이다. 2. 음악과 문화. 음악이란 무엇일까? 나는 음악학자가 아니라 잘 모른다. 그러나 물론 音 樂 이란 일본어다. 音 과 樂 은 중국어이겠지만 음악( 音 樂 )이란 용어는 19세기 일본인들에 의한 신조어이다. 3) 그 것은 서구어 music을 번역한 말, 즉 온가쿠( 音 樂 )의 우리말 음독( 音 讀 )이다. 즉 19세기 이 전의 어느 중국, 한국 혹은 일본의 고전 문헌을 살펴보아도 音 또는 樂 이 아닌 音 樂 은 나오 지 않는다. 4) 음악은 哲 學, 理 性, 歷 史, 存 在, 社 會, 藝 術, 美 學 혹은 결정적으로 眞 理 처럼 일 본어이다. 우리의 거의 모든 일상과 학술에 있어서의 개념어는 일본어이다. 5) 그렇다면 나는 3) 나는 온가쿠 ( 音 樂 )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일본인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나 자신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에서의 音 樂 이란 용어의 정착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일본의 서양 음악은 아 르치 모모야마( 安 土 桃 山 )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나 이러한 사건은 일회적인 것으로서 곧 소멸되었다. 정식 수 입은 이후 바쿠후( 幕 府 ) 시대 말기의 일로, 1830년대 나가사키( 長 崎 )에 최초의 네덜란드식 고적대가 창설되었 다. 본격적인 서구식 브라스 밴드는 1869년 시즈마번 가고시마( 島 津 活 蕃 鹿 兒 島 )의 파수병이 요코하마( 橫 浜 ) 에서 영국인 존 펜튼(John William Fenton)에게 서구식 군악을 배운 것이 최초이다. 1872년 메이지( 明 治 )정 부는 서구 근대식 학제를 따르는 법령을 공포한다. 이에 따라 문부성( 文 部 省 )은 1879년 온가쿠 토리시라베 가 카리( 音 樂 取 調 掛 )를 창설한다 - 이것이 음악이란 용어가 일본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일이다. 이 기관의 창설자인 이사와 슈우지( 伊 澤 修 二, 1851-1917)는 타카미네 히데오( 高 嶺 秀 夫 ), 코오즈 센자부로오( 神 津 專 三 郞 ) 등과 함께 도미 유학 중 보스톤의 음악가 루터 메이슨(Luther Whiting Mason, 1828-1894)을 만나 그로부터 최초의 근대 서양 음악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일본 정부는 1880년 메이슨을 초청, 위 기관의 교수 로 임명한다. 이외에도 이 기관에는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인이었던 빈음악원 출신의 루돌프 디트리히 (Rudolf Dittrich, 1867-1919), 독일인 프란츠 엑케르트(Franz Eckert) 등이 교수로 있었다. 이 엑케르트가 바로 1901년 우리나라에 최초의 서구식 군악대를 창설한 바로 그 엑케르트이다. 이후 이 기관은 1887년 동 경음악학교( 東 京 音 樂 學 校 )로 발전적 해체를 한다. 초대 교장은 이사와 슈우지이다. 대일본음악회( 大 日 本 音 樂 會 )는 이보다 한 해 앞선 1886년 200여명 이상의 회원으로 발족했다. 이어 1898년에는 메이지음악회( 明 治 音 樂 會 )가, 1910년에는 동경 필하모니 오케스트라(Tokyo Philharmony Orchestra)가 창설됐다. 이상의 자료는 다음의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호시 아키라( 星 旭, 1931 年 서울 生 ) 지음, 日 本 音 樂 의 歷 史 와 鑑 賞, 140-143 쪽, 崔 在 倫 역주, 현대음악출판사, 1994. 4) 音 樂 이란 용어는 기원전 3세기 呂 氏 春 秋 이후 여러 문헌에 등장하나 물론 오늘날의 용례와는 다른 용법으 로 쓰이고 있다( 세계대백과 사전, 12316쪽, 동서문화). 이는 퇴계( 退 溪 )의 책에서 우리가 야구( 野 球 )라는 동 일한 한자를 발견한다 해도 그것이 베이스볼(baseball)을 번역한 일본어 야구 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 늘날의 음악에 상응하는 고대 중국어는 樂 이다. 5) 이 말들이 영어, 한자어 혹은 일본어임을 보다 선명히 부각시키기 위해 원어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나는 이러 한 관점을 아래에서도 일관되게 그대로 적용하였다. 이른바 일본의 근대화는 난가꾸 ( 蘭 學 ), 즉 네덜란드 학문 및 유럽 사상의 대표로서의 독일 사상에 깊이 영향받았다. 패전후 일본은 미국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간다 - 이는 법학에서 철학까지, 공사판에서 야구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생활 세계와 학문의 장에서 공통 적인 기반을 이룬다. 개념을 지배하는 자란 이름을 붙이는 자, 즉 명명자( 命 名 者 )이다. 명명자는 바로 문화와 정신의, 그리하여 정치의 지배자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보통 명사와 보편 명사는 고유 명사이기 때문이다. 개 념의 역사를 모르고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보편이란 결국 항상 독단의 한 형식이다. 이 글에서 더 - 2 -
이른바 음악 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이후 나는 이 글에서 순전히 편의상 음악을 그냥 내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것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나는 음악을 아주 좋 아한다. 음악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음악이란 누구의 말처럼 자유 혹은 사랑이라도 좋 고 혹은 그 무엇이라도 좋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음악이란 말을 듣고 우리나라에서 판소리나 민요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에게 음악은 서양 음악이다. 6) 나는 영국 음악과 미국 음악이, 즉 서양의 대중 음악 (popular music)이 좋은 것이다. 나는 독일의 영화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1945-) 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미국은 우리의 무의식을 식민지화시켰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심지어 그를 존경하게까지 되었다. 왜? 그 는 미국에 빠져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름으로 미국에 대해 고유성과 자부심을 가 질 것이라 생각하는 독일이나 프랑스도 실상 미국 앞에선 납작 엎드린다. 그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음악 혹은 록(rock)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그 누구도 서양과 미국 혹은 영국에 대 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국 혹은 서양은 우 리의 근대를 직접 디자인한 일본과 더불어 우리 시대의 사유 조건이다. 아무도 서양과 일본 을 피해 나갈 수 없다. 이 글은 서양 에 살지 않는 서양에 빠진 어느 동양 젊은이의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그 문제의식이란 이것이다: 나는 서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한 국에서 음악 혹은 구체적으로 록을 듣는다는 것 혹은 록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가? 흔히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국경은 없어도 문화는 있다. 실상 내가 어 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가라는 문제는 내가 어떤 문화에 길들여져 왔는가를 또한 보여주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문화( 文 化 )란 글자 그대로 글이 되는 것 이며, 이때의 글이란 개념( 文, concept)이다. 7) 모든 철학사가 궁극적으로 문화사의 요소를 갖듯 문화란 곧 개념 화 이고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 ( 觀 ), 즉 보는 방식 이다. 결국 문화란 보는 눈이며 또한 듣 는 귀, 느끼는 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 어떤 문화의 틀 안에서 인식되지 않는 것 은 그 문화의 구성원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심지어는 존재하지도 않게 된다. 이러한 문화 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이를 이른바 동양에서는 고래로 성인 ( 聖 人 )이라 불렀다. 성인이란 작자( 作 者 )이며, 문화의 틀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이름을 붙이는 자이다. 8) 이러한 점에서 이강숙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귀기울일만 하다: 음악 소리 는 물리적 소리가 아니다. 심리 적 소리다. 관련 문화권의 구성원들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소리 다... 그렇 이상의 번쇄한 논의는 삼가한다. 6)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암묵적 정의가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것만이 철학의 문제이다. 철학의 과 제는 오직 이 세상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얀켈레예비치). 이 세상에서 모든 면에서 나의 자연과 당연을 그의 자연과 당연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오직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다. 결국 철학의 존재 근거는 오직 나의 자연(당연)과 너 의 자연(당연)이 언제나 달라 왔다는 현실적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7) 문화( 文 化 ) 혹은 문명( 文 明 ) 또한 서구어 culture, civilization의 일본어 번역이다. 8)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우리나라의 요즘 이른바 전통 가요 로 격상된 뽕짝 혹은 트로트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을까? 물론 우리에게 근대를 직접 이식해준 일본인들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은 이른바 우리 근대의 작자 이며 성인 일 것이다. 박연과 우륵이 트로트를 했던가? 신재효가 트로트 열마당을 정리했 던가? 비담론적 영역과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지식-권력의 이중체 로서의 담론적 영역에서 어떤 하나의 이름 이 일단 명명되면, 그 이후에는 - 그 이름의 사용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그러한 인식 의 메카니즘을 따르게 된다. 이는 - 한국에서 누구도 대입시에서 자신의 학과를 선택할 때, 그것이 NL, 혹은 PD인가를 따지고 들어오는 수험생은 없기 때문에 - 완전히 우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과 혹은 단대 혹은 대학 의 입장에 의해 1-2년이 지나면 NL, 혹은 PD가 되는 현재 학생 운동의 상황도 예외가 아니다. - 3 -
다면 (전통) 음악을 듣는 방식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음악이 탄생된 문화적 맥락 안에서 듣는다 는 뜻이다 ( 중앙일보 1997년 8월 16일자 13면). 9) 음악을 듣는 귀에는 문화의 필 터가 작용한다. 문화는 (음악적) 인식의 조건이다. 그 문화권의 구성원들에게 하도 당연하고 하도 자연스러워서 의식되지도 인식되지도 않는 문화는 인식을 구성한다. 말을 바꾸면 해당 문화의 인식 체계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인식되지 않는다. 10) 그리하여 음악에는 국경이 있 다. 그러나 빔 벤더스 혹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말대로 미국 혹은 서양의 자본주의 문화가 전지구적 현상으로서 세계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음악에 실상 국경은 없 다. 미국과 서양 이외에 문화란 실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특수 한 예외를 제외하고 모든 국악과는 음악대학 안에 있다. 이것은 영문학과대학 안에 국문학 과가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서양은 보편이며 비서양은 특수다. 아시아는 보편적 현상이 되지 못하는 특수로서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을 가질 뿐이다. 현실에서 보편과 특수 는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지 않고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만이 강요된다. 이미 변증법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11) 마르크스의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 양식에서 자연 과학에 이르기 까지, 항상 서구는 보편이며 그외의 모든 문명은 특수였다. 12) 에드워드 W. 사이드는 자신의 책 문화와 제국주의 (Culture and Imperialism, 1993)에서 일견 편견 혹은 권력과 무관해 보이는 문화 예술 작품에서도 우리는 그것들이 갖는 정치적,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제국주 의적 관심을 읽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우레의 현실에 적용하여 우리의 음악과 제국주의, 혹은 더 넓혀 철학과 제국주의, 과학과 제국주의, 혹은 문 명과 제국주의 라는 책을 쓸 수는 없는 것일까? 3. 소리와 노래. 문화는 세상에서 음악 소리를 구분시켜 준다. 나는 여기서 노자( 老 子 )가 썼다는 도덕경 ( 道 德 經 )의 2장이 떠오른다: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됨을 알고 있다. 그 런데 그것은 못생김이다.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좋음의 좋음됨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 은 좋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 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친하며, 앞과 뒤는 9) 물론 엄밀히 말하면, 서양의 클래식이나 록도 하나의 민속 음악 이다. 10) 쉽게 말해, 지금이 조선 시대이고 만약 내가 양반이라면, 나에게 노비들의 고통 이나 그들의 인권 과 같은 감정 혹은 개념은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인식 은 이른바 감정, 특히나 윤리적 감정 을 지배하고 재단하며 한정지워 준다. 이러한 점에서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1978)의 저자 에드워드 W. 사이드(Edward W. Said, 1935-)가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지적했던 것처럼 모든 시대의 지배적 인식은 지배 계급의 인식 이 며, 이러한 지배적 인식은 피지배자의 자기 인식을 규정하고 한정짓는다. 따라서 이른바 오리엔탈리즘 에 대 한 사이드의 핵심적 문제 제기는 동양인의 자기 인식이 서양인들의 동양 인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주장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본다면, 심지어 동양 이란 존재 혹은 명칭 자체가 서양의 필요에 의해 가공되고 생산된 것 이다. 이러한 관점은 여성과 남성의 (자기) 인식 등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11) 오늘날 누구나 한국 사회에 있어서의 철학의 부재 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철학과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는 마 르크스주의 진영에 있어서의 철학의 빈곤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한국의 철학의 근본 문제 들 중 하나는 마르크스주의 원전 등에 나오는 이른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라는) 철학의 근본 문제 를 아무런 근본적 철학적 성찰없이 그대로 외운다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도대체 철학의 근본 문제는 왜 관 념론과 유물론의 투쟁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왜 그러한가? 어떤 근거(reason)에서? 12) 물론 에드워드 W. 사이드의 말대로, 동양과 서양이란 카테고리 자체가 우리 논의의 대상이다. 이 분류에는 인류의 반 이상이 빠진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인은 어느 양 에 속하는가? 라틴아메리카의 볼리비아 원주민 은 또 어떤가? 이것이 사이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일 것이다. - 4 -
서로 따른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 天 下 皆 知 美 之 爲 美, 斯 惡 已 ; 皆 知 善 之 爲 善, 斯 不 善 已. 故 有 無 相 生, 難 易 相 成 長 短 相 轎, 高 下 相 傾, 音 聲 相 和, 前 後 相 隨. 是 以 聖 人 處 無 爲 之 事, 行 不 言 之 敎. 老 子 : 길과 얻음, 15-16쪽, 김용옥 옮김, 통나무, 1989). 여기서 音 聲 이란 일본어 音 聲, 즉 사람의 목소리 (human voice)가 아니다. 그것은 音 과 聲 이라는 명사의 나열이다. 音 이란 우리가 말하는 소 리(sound) 즉 사물 세계의 음향이며, 聲 이란 인간 목소리의 노래(song) 혹은 음악(music)이 다. 이는 바로 노래 혹은 음악이다. 그래서 옮긴이는 노래 와 소리 라 번역했다. 이 도덕 경 2장의 해석을 위해서는 1장을 이해해야 한다. 지루하지만 여기서 나의 일생을 구원한 노자 도덕경 의 제1장을 보자. 다음은 1장의 전문이다: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길 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 음이라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 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생이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음을 가믈타고 한다. 가믈고 또 가믈토다! 뭇 묘함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 ( 道 可 道, 非 常 道 ; 名 可 名, 非 常 名. 無 名 天 地 之 始, 有 名 萬 物 之 母. 故 常 無 欲, 以 觀 其 妙 ; 常 有 欲, 以 觀 其 徼. 此 兩 者, 同 出 而 異 名. 同 謂 之 玄, 玄 之 又 玄, 衆 妙 之 門. 같 은 책, 13-14쪽). 나는 이 두 장을 음악에 연관하여 이렇게 푼다: 소리와 노래, 이 둘은 같 은 것인데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소리와 노래는 같은 것인데 사람 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소리 혹은 노래와 조용한 것 혹은 침묵은 같은 것인데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따라서 나의 음악 철학의 제1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좋은 음악도 없는 것보다 못하다. 이 명제는 사실 음악 미학적 명제라기보다는 음악 심리학적 명제이다. 음악은 시끄러운 것이다. 음악이란 내게 번뇌( 煩 惱 )다. 4. 음악은... 그러나 색이 곧 공이며, 공이 색이다( 色 卽 是 空 空 卽 是 色 ). 이에 따르는 필연적인 논리적 결 론은 다음과 같다: 음악이 있는 것이 음악이 없는 것이며, 음악이 없는 것이 음악이 있는 것이다. 번뇌는 무념무상이다. 나에게 음악은 번뇌이며, 조용한 것은 해탈( 解 脫 )이다 - 이 때의 해탈이란 각자 나름대로 구원, 해방, 카타르시스, 희열 등등 마음대로 바꾸어도 좋다. 물론 음악이 바로 고요함이며, 번뇌가 바로 해탈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할지언정 그 렇게 느끼지 못한다. 그것 또한 나의 번뇌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 본 다: 그러나 해탈한 음악이란 없는 것일까? 아니, 나를 해탈시켜 주는 음악은 없는 것일까? 인간은 음악을 들으며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은 음악을 들으며 나 자 신이 해탈하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며 나는 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아니 나는 그때 존 재이다. 내게 있어서 음악 듣기란 고요함에의 갈구이다. 나는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 마음 이 고요해진다. 고요란 내게 편안이며, 이는 역시 내가 번뇌하고 망집( 妄 執 )에 사로잡혀 있 음을 말해 준다. 음악이란 결국 내게 욕( 欲 ), 바램인 것이다. 앞서 인용한 도덕경 1장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생이를 본다 ( 故 常 無 欲, 以 觀 其 妙 ; 常 有 欲, 以 觀 其 徼 ). 바램이 있음과 없음, 묘함과 가생이란 같은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한 곳이며, 성인과 악인은 하나 다. 우리는 오직 음악을 듣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에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정적( 靜 寂 )이 없 - 5 -
다면 음악이 없다. 음악이란 이 세상 전체다. 음악이란 실체는 이 세계 외부에 혹은 어느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음악을 듣지 않을 때 또한 언제나 그 순 간 우리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 전체가 음악이라는 말은 이 세계에 음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체란 오직 외부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그 안에 남아 있는 같은 것끼리는 서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체란 바로 0, 즉 공( 空 )이며 무( 無 ) 이다. 이 세상에 음악은 없다. 항상 1 앞에는 0이 있다. 1이 없이는 0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1에서 시작하고 그 것만을 본다. 그리고 1이 전부라고 우긴다. 그러나 그런 적은 없다. 1과 0을 동시에 보려는 노력이 철학이다. 또한 바로 그 없음( 無 )이 있음( 有 )과 서로 생겨나는 것( 相 生 )이다. 유무상 생( 有 無 相 生 ). 그러므로 음악은 1이며, 있다. 그래서 나 혹은 네가 음악을 듣거나 혹은 듣지 않는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오늘도 듣는다. 음악이란 혹은 음악을 듣는 나란 1이며 0이 다. 5. 보편과 제국 혹은 해석 의 문제. 우리에게 음악은 오직 서양 음악이다. 국악은 보편으로서의 음악 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특수로서의 국악 일 뿐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의 철학이나 과학이 오직 서양의 철학이나 과학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13) 우리는 그때 그것이 하도 당연해서 서양이란 말을 떼고 그냥 과학, 음악 이라고 쓴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인식은 지배하는 자들의 인식이다. 지배자란 이름붙이는 자이다. 오늘날 세계는 서양이 붙여준 이름을 따라 생겨나 고 멸망한다. 요즘 신중현-김창완(산울림)-서태지 라는 3대가( 三 大 家 )로 이어지는 새로운 대중 음악사의 해석이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점령한 1949년 이후 철학사 해석에 서 한 번 있었다. 중국의 정통은 역시 공자다. 혁명 이전 중국의 정통 사관은 공자-맹자-주 희로 이어지는 주리론( 主 理 論 ) 계열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잘 알다시피 유물론( 唯 物 論 )이다. 이는 따져 보자면 이른바 주기론( 主 氣 論 )에 차라리 가깝다. 따라서 공산당 집권 이 후 중국의 철학과 역사는 정반대로 재해석되었다. 14)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해석이 이론적 담 론의 주류로 자리잡는다는 것은 실제로 신중현이나, 김창완이 당시의 음악계를 지배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문제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서태지는 예외다. 이러한 해석이 주도적이 되어간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대중음악 비평계의 주도 패러 다임이 기존의 - 조용필을 정점으로 하는 - 일본 트로트 중심주의 사관에서 서구 팝송 록 중심주의 사관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지점에서 서태지 이후 주류 패러다임은 얼터나 메틀이 아닌 댄스로 바뀐 것이 아닌가? 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주류 패러다임의 댄스로의 전환이야말로 나의 논의를 입증하는 것이다. 댄스야 말로 우리나라 모든 음악 매니아들이 그렇게도 바라왔던 멜로디 중심의 동양적 가요에서 리 듬 중심의 서양적 팝 혹은 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댄스 이전의 모 13) 이는 실상 우리나라의 지식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서양이 아닌 오늘날의 모든 비-서양 문명에 속한 지식인들 모두가 예외없이 봉착해 있는 근본적 딜레마 이다. 14) 이에 대해서는 김용옥의 東 洋 學 어떻게 할 것인가 (통나무, 1986)에 실린 논문 中 共 學 界 에 있어서의 中 國 哲 學 史 記 述 의 轉 換 (225-262쪽)을 보라. 그는 이를 중국철학사 기술의 은현( 隱 顯 )의 전환 (242쪽)이라 부른 다. 물론 김용옥은 맑스 레닌주의에 의한 중국철학의 격의( 格 義 )야말로, 곧 역으로 맑스 레닌주의의 중국철학 적 격의를 의미함 (230쪽)을 밝히고 있다. - 6 -
든 가요는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 노래 를 위한 곡들이다. 그러나 댄 스 이후에는 노래보다 리듬, 즉 연주 가 중요하다. 더구나 댄스는 록의 본성이 그러하듯 (정서라기보다는) 몸의 언어를 표상한다. 동일한 논리에 의해 우리나라의 얼터 (alternative)는 얼터가 아니다. 그것은 얼터(대안)가 아닌 서구 중심주의 담론의 오쏘 (정통)다. 우리에게는 정통도 대안도 모두 서양이다. 15) 나 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록 그룹들, 예를 들면 시나위나 크래쉬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러한 사실을 알고 록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일탈 과 탈주 와 표류 와 유목 을 외치는 자들은 서 구 프랑스 철학과 사상에로 안정 되고 안락 하게 항로 를 따라 정착 하고 있는 것이 아닐 까? 16) 제국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들은 결코 우리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민주주의를 하라고, 자신들의 과학 기술을 배우라고, 수요 예배에 나오라고, 핑크 플로이드 의 박스 세트를 사라고, 잃어버린 세계 를 보라고, 들뢰즈의 시네마1 2 를 읽으라고 강요 하지 않는다. 이와는 좀 다르지만 요즘 제기되는 문화적 유물론 의 문제도 인식론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문화적 유물론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틀을 전제한다. 즉 유물론 으로 문화 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 때의 문화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화 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 들이 문화를 분석했던 것은 그 자신 마르크스주의자인 영국의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1938-)이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 (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 1976)에서 지적했던대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뿌리에서부터 결정짓고 형성시킨 것 은 패배에 의한 것 (장준오 옮김, 이론과 실천, 142쪽)이다. 지나친 도식화의 위험을 감수하 고 이야기한다면, 결국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문화와 상부구조의 분석에 몰두했던 것은 혁 명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다. 레닌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 의 테제에 대하여 그들은 역량 축적기의 행동 지침으로서 상부구조, 즉 문화 의 분석에 몰두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 러한 논의로서 문화적 유물론의 모든 성과를 부정하고픈 마음은 없다. 인식은 실천을 지배 한다.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화 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자연 의 관계 정립의 문제로서의 문명, 인간과 예술의 새로운 관계 설정으로서의 문화 의 문제 가 아닐까? 그것은 우리 존재의 밑그림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 될 것이다. 6. 나는 서양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는가? - 나는 누구인가? 하나의 사실 명제로서, 일본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東 洋 의 근대화(Modernization)는 결국 언제나 서구화(japanized Westernization of the Orient)였다. 17) 서양인들은 단순히 폭력과 무력으로만 세계를 지배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보편(Universality)과 과학(Science)이 라는 무기가 있다. 그러한 보편적 지식 혹은 진리(épistémè = sophia)를 추구하는 것이 철 15) 나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얼터 라는 용어가 이중적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첫째 그것은 기존의 하드록, 헤비 메탈 등과 같은 하나의 음악 장르이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기존의 정통적 제도권에 맞 서는 - 보다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 하나의 대안으로서의 문화 운동이다. 나는 물론 이러한 구분의 타당성 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음악 장르와 대안적 문화 운동 양자 모두의 공통적인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 이다. 16) 나는 표류 의 경우 그 상대어는 정착 이라기보다는 항로를 따르는 것 에 가깝다고 느낀다. 정착 은 오히려 유목 의 상대어이다. 17) 실상 우리는 그것을 미국화 (Americanization)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 7 -
학(Philosophia) 혹은 학문(Scientia)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인류의 유산이다. 나는 서양 이 제시한 지식(Knowledge) 혹은 진리(Truth)라는 개념이 인류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 행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18) 쉽게 말해 나는 서양의 알파벳 (Alphabet)이 우리에게 마치 지금 우리 문화의 한자 ( 漢 字 )같은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서양 문명은 마치 이른바 외래의 것 이었던 중국 문명이나 불교 문명이 이미 우리 문화 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처럼 앞으로 우리의 것 이 될 것이다. 나는 27세기와 37세기에도 우리가 알파벳을 사용할 것이 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한반도에서 한자 문명을 싹슬어 버릴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는 방도 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에서 모든 전통 유산까지. 지금 서양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서양은 세계를 정의하고 우주를 디자인한다. 그러한 정 의(definition)의 이유와 집합을 우리는 문화라 부른다. 한국 음악 특히나 록의 문제는 이중 적이다. 나는 록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록은 서양이다. 나에게는 주류 패러다임도 대안 패 러다임도 모두 서양이다. 19) 그것은 한편 제국과 종속의 문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오늘 나의 느낌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문제는 다시 한 번 이중적이다. 그렇다면 오 늘 어느 골방에 쭈그리고 앉아 할아버지의 고리타분한 국악과 필(feel)이 안오는 아버지의 뽕짝과 자신이 미치는 록 발라드 사이에서 고민하며, 기타줄을 튕기는 고등학생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나는 가짜(=일본)가 아닌 진짜(=서양)를 택해야하는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3J나 니르바나(Nirvana) 같은 곡을 한 번 써볼까? 그것도 아니면, 어 떻게 해야 한 번 떠볼까? 그러나 기실 그가 빠져 있는 문제는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란 누구인가? 나는 어디까지인가? 나의 것, 우리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 우리는 도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물론 전적으로 타당한 질문들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생적 근대성을 창출해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들에 보다 철학적인 하나 의 관점이 부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나는 왜 나를 알아 야 하며, 나는 왜 나의 것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우리에게 종종 주어지는 대답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혹은 신토불이 ( 身 土 不 二 )라는 말이다. 미국인들에게는 피 자와 콜라가 입맛에 맞듯, 우리는 밥과 김치, 된장 뚝배기다! 미국인들은 뮤지컬을, 일본인 들은 가부키를, 우리는 판소리를! 미국인들은 서의학을, 우리는 한의학을! 아도르노는 마르 크스를, 우리는 정약용을! 왜? 자기 것이니까... 20) 7. 나는 왜 나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가? - 몸의 편함 그렇다. 나는 왜 나를 알아야 하며, 나는 왜 나의 것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최종적 궁극적 근거를 나는 도올 김용옥이 철학강의 (1986)에서 말했던 몸의 편함 21) 에서 18) 내가 이러한 용어들을 대문자로 적은 이유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것의 고유 명사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 한 것이다. 19) 그렇다면 한국적인 것이란 또 무엇인가? 나 자신은 그 한국적, 세계적 혹은 민족적 이라는 담론 자체도 이미 서구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민족 ( 民 族 )이란 용어 자체가 서구 근대 역사학의 이른바 민족 국가 로 번역 되는 nation의 일본어 번역이다. 20) 그러나 우리 것은 반드시 좋은가? 또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 것은 어디까지인가? 한자( 漢 字 )는? 유불선( 儒 佛 禪 )은? 내 이름은? 서얼차별과 남녀차별은? 21) 도올의 논의에 따르면 편함이란 오직 몸(MOM)의 편함이다. 이 때의 몸이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 트 이래의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신체/정신 혹은 물체/형상(body/mind or matter/form)의 개념을 거부하는 것 - 8 -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여기서 잠깐 도올의 몸의 편함 에 대해 생각 해 보자. 도올이 철학강의 의 1장에서 예시한 바 있는 신발의 상대성과 몸의 보편성 이란 논제로부터 나 자신이 도출한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 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진리가 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의 당위론적, 즉 윤리적 주장이기 이전에 하나의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 주장이다. 22) 그들은 왜 자신의 전 통과 현대를 사유하는가? 그것은 그것이 그들에게 편하기 때문 이다. 만약 우리의 우리 전 통에 대한 사유와 천착이 우리를 속박한다면 그것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혹은 강박 관념에 불과하다. 이는 비단 우리의 전통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대 혹은 그들의 전통 과 현대에 대한 우리의 탐구 과정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관념이다. 그것의 준칙(Maxime)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너에게 편하지 않다면 그것을 하지 마라!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그러나 도대체 편함 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편 한대로만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쾌락주의의 역설 을, 더 나아가 이기주의의 역설 23) 을 불 러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러한 타당한 그러한 왜곡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그것 이 도올이 말하는 철학적 특수 용어임을 인식해야 한다. 즉 몸의 편함/불편함은 서구의 pleasure/pain에 해당되는 쾌락/고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편함을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몸? 마음? 정신? 육체? 도올의 편함은 오직 몸 24) 의 편함이다. 편함의 주체 는 정신도 신체 이다. 몸은 신체 혹은 물체가 아니라 身 혹은 體 로서의 몸 이다. 따라서 도올은 나는 이성이나 오성도 느 낌 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 아름다움과 추함, 30쪽)고 말한다. 도올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 는 감성 오성 이성이라는 칸트적 인식론의 역전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몸에 대한 도올의 철학 사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이 자리에 아래와 같은 언급을 덧붙여 두고자 한다. 89년 7월 18일 4-6시 과천국립현대미술관 대강당에서 열린 강연 藝 術 의 理 論 - 檮 杌 美 學 의 定 石 의 팜플렛에서 도올은 감각주의자들은 (우리의 느낌 이라는 - 인용자) 최후적 현상(final prehension)을 최초의 자료 (original sense-perception)로 오인했다 (9쪽)고 말한다. 한편 도올은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 강해를 통 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의식에 대한 통념의 오류는 최종적인 것을 최초적인 것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의식은 우리의 통념과는 반대로 경험의 모자 이지, 발바닥 이 아니다... 그것은 써도 그만 안써도 그만인 것 이다... 결국 의식은 경험을 전제로 하지만,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상은 고신, 二 十 一 新, 10 쪽에서 인용). 이에 덧붙여 나 자신은 도올이 96년 4월 8일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7호에서 행했던 강연 동서문명에 대한 전제없는 토론 의 팜플렛 첫장에 나오는 Beauty is not the matter of Form but of Experience. 아름다움은 형상( 形 相 )의 문제가 아닌, 경험의 문제이다 (원문은 영어, 번역은 나의 것)라는 언급 이야말로 도올의 미학뿐 아니라, 그가 시도하려는 인식론 존재론적 전환을 적절히 드러내 주는 한 마디라고 생각한다. 22) 나 자신의 전공이 윤리학이지만 나는 이와 같은 주장이 당위적, 즉 윤리적으로 주장되어지는 현실에 거부감 을 느낀다. 이는 기본적으로 나의 자아 규정 혹은 자아 정체성의 규정 이라는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내가 나의 것과 우리 것을 아껴야 하는 이유(Reason)를 제시하는 것, 왜(why) 서양인들이 그들의 자아 정체성과 관련하여 그들의 것을 아끼고 생각하는가 하는 이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중요하다. 그들의 추론 행위 (reasoning) 자체를 우리 존재와 행위의 이유(Reason)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명사로서의 이성이란 다름아닌 이성적 행위의 결과물이다(Reason is nothing but a product of reasoning). 23) 이는 각기 쾌락과 이기의 다음과 같은 속성을 칭하는 말이다: 술을 마시면 즐겁다(=쾌락이 증대된다). 그래 서 자꾸 마신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으면 그 즐거움을 가져다 주던 술이 쾌락은 커녕 고통을 증가시킨다. 이 기주의는 나에게 이로움, 즉 이득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이기적으로 산다. 그러나 그러한 이기주의 의 지속은 나로부터 진정한 친구도 사랑도 진정한 인간성도 앗아가 버린다. 따라서 쾌락과 마찬가지로 이기도 어느 선을 넘으면 이득은 커녕 불이익과 고통을 나에게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기심 혹은 이기주의(selfishness or egoism)와 자기에 대한 관심 혹은 자기-사랑(self-interest or self-love)은 다르다 는 점이다. 나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는 모든 행위가 이기주의는 아니다. 내가 나의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고, 가고 싶지 않은 술자리를 거부하는 것은 이기주의가 아니다. 이기적 행위란 내가 어떠한 행위로 인해 이익을 얻고 동시에 나의 그러한 행위로 인해 남이 해를 입는 그러한 행위이다. 24) 도올의 몸 은 우리가 말하는 몸 과 마음 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 즉 이미 분리된 두 가지의 재통합이 아 니라, 미분화된 하나가 심화된 것으로서의 몸 이다. 즉 도올에게는 몸+마음=몸이다. 실상 이 몸 이라는 한 단어야말로 도올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 9 -
도 아닌 몸 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몸이 편하면 마음이 늘어진다 라는 일상적 어법에서의 몸 은 도올의 몸 ( 身, 體 )이 아니라 단지 서양적 신체 (body)의 개념에 불과하다. 마음이 편하지 않고 몸이 편하기란 어렵다. 시험 전날 공부를 하지 않고 술을 마시면 마음이 안 편 하다. 반대로 몸이 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이 편하기 역시 어렵다. 감기나 몸살로 앓아 누워 고열로 끙끙 앓는 상태에서 맑고 차분한 의식으로 시험 공부를 하기란 어려운 일이 다. 25) 편함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느낌 이다. 그렇다면 편함은 감각주의적인(sensationalist)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도올의 기철학은 이성과 감정의 본질적 구분을 허용치 않는다. 편 함은 말초적 감각에 주어진 어떤 최초의 자료가 아니다. 편함은 우리의 이성적 행위에 의해 앞으로 분석되어져야 할 어떤 감각 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26) 인식 작용이 우 리에게 드러내는 최종적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라는 유기체가 빚어낸 최후의 인식, 즉 전관적( 全 觀 的 )이고 총체적( 總 體 的 )인 느낌의 인식 이다. 8. 나의 땅, 우리 땅은 어디인가? - 신토불이 에 대해서 나는 신토불이 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생각해 본다. 身 土 不 二 는 물론 동양적 인식론을 깔고 있는 철학적 개념이다. 이 때의 身 은 몸이며, 土 는 흙, 즉 땅이다. 不 二 란 불교 용어로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언뜻 보아 두 가지 다른 실체들(two different substances)로 암암리에 가정하고 있는 몸( 身 )과 땅( 土 )이 어떤 보다 상위의 개념 작용 혹은 원리(conceptualization or principle) 27) 에 의해 하나로 묶여질 수 있다는 인식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 同 一 )로 묶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둘이 아닐( 不 二 ) 뿐이 다. 결국 신토불이는 몸과 땅이 둘이 아니다 라는 말로 번역 가능하다: 나의 몸이 그 자체 로 땅은 아니다. 땅도 그 자체로 나의 몸은 아니다. 그러나 양자는 그것들을 묶어 주는 어 떤 묘합( 妙 合 )의 원리로 인해 우리의 인식 안에서 통합 가능하다. 그것들의 현상적 이분성 은 어떤 하나의 원리 안에서 본질적으로 통합된다. 그런 의미에서 몸과 땅은 둘이 아니다. 도올세설 (1990)에서 도올은 나의 목표는 서양이 제시한 칸트적 인식론의 한계를 극복한 동양의 기인식 론이다. 그 세부는 칸트의 감성 오성 이성의 체계를 역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나의 한의학 탐구 가 순수히 귀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연역적 가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새로운 기인식론 을 아름다움과 추함 에서 느낌의 인식론 이라 명명했다. 그 세부적 디테일은 한의학이 말하는 몸의 용어 를 소재로하여 엮어질 것이기 때문에 긴 사색의 시간과 클리니칼 데이터를 요하는 것이다 (352 쪽)라고 말한다. 또 氣 哲 學 의 構 造 (1990)에서 도올은 宇 宙 는 世 界 로 구성되어 있다. 世 界 는 사회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의 구극적 단위는 몸이다. 몸은 氣 의 聚 散 이다. 그것이 散 하여도 물론 그것은 氣 일 뿐이다. 모든 聚 는 구조를 갖는다... 이 氣 場 은 理 를 형성하는데, 理 의 形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이 經 絡 (Meridian System)이다... (이 경락의 60개 穴 은-인용자주) 氣 의 모우드의 상관 법칙에 의하여 매우 명료하게 지배된다... 이 법칙은 반복가능한(repeatable) 것으로 정연한 일반법칙(general law)이며 엄 밀한 과학의 대상이지만 아직 공표되어 있지 않다. 이 법칙은 내가 의사가 된 후에 밝혀질 것이 다 (113-115쪽)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것이 가진 야심만큼이나 논쟁적인 것이 사실이다. 사실상 도 올 철학 전체의 성패는 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의 실증적 근거 제시 여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 니다. 25) 우리는 또한 공리주의자 J.S.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쾌락에도 질이 있다 는 말처럼 편함에도 질이 있음 을 인식해야 한다. 몸+마음=몸 이라면, 몸의 편함이란 다름 아닌 현실 혹은 실재에 대한 총체적 느낌, 전관 ( 全 觀 )이다. 26) 이것이 보편적일 수 있는 근거는 신체 구조, 유전자, DNA의 염기 서열 구조 등과 같은 인간이라는 생물의 몸이 공통적으로 갖고있는 구조적 보편성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도올의 생물학주의 는 자연 과학의 한 응용 혹은 지류가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생물학주의가 된다. 27) 그러나 물론 이 보다 상위의 개념 혹은 원리는 그것들 이전에 외재적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상관적인 개념적 실제적 관계에서만 파생되고 현실화되는 내재적인 원리이다. - 10 -
그것들은 두 개의 실체들이 아니라 서로서로의 존재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보장받는 두 개의 관계태들, 혹은 관계적 양상들이다. 이러한 논의의 진전을 위해 우주( 宇 宙 )와 우주인( 宇 宙 人 )의 관념에 얽힌 우리의 일상적 편견 을 생각해 보자.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저는 우주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면 여러분이 믿기 힘들겠지만 저는 그런 적이 있거든 요. 여러분 중에는 혹시 그런 사람이 없나요? 그러면 학생들은 물론 아무도 없다고 말한 다. 나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자 제 얘기가 틀릴 수도 있지만 맞나 틀리나 여러분이 잘 듣고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모든 서울 시민은 대한민국 국민입니까? 학생들은 물론 예 하고 대답한다. 서울은 정의상 대한민국의 한 부분이고, 따라서 서울 시민은 필연적으로으 로 대한민국 국민이다. 나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모든 총각은 남성인가요? 물론 이번에도 대답은 예 이다. 당연한 말이다. 총각의 정의는 결혼 안 한 남성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좀 더 아리까리한 문제를 내보지요? 지구인은 우주인인가요? 정답은... 물론 예스 이다. 그것은 지구가 우주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지구인은 우주인이다. 우리는 외계인들에게 E.T.(Extra-terrestrial) 다. 그들의 땅(terre) 밖(extra)에 있으므로... 따라서 나는 우주인이다. 그리고 지구가 우주 다. 여기가 우주다. 당신의 방이, 이 강의실이, 당신의 어머니가 계신 곳이... 28)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인 만이 아니라 우주 자체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을 깨뜨려 보고자 질문을 던진다: 자 그럼 이번에는 좀 아리까리하니까 제 얘기를 주 의깊게 잘 들어보세요. 지구는 우주 안에 있으니까 우주가 맞죠? 그렇다면 일단 지구는 우 주죠? 하지만 그렇다면... 이 지구의 흙이나 물뿐만 아니라, 소나무, 잣나무 같은 식물, 호 랑이, 원숭이 같은 동물, 더 나아가 여러분 자신이나 저와 같은 인간은 우주입니까? 아닙니 까? 물론 정답은... 인간은 우주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 주라는 개념에 대한 우리의 기존 이해가 그것을 무생명적 공간 개념으로만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칸트적인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을 전제하고 있는 개념이다. 이 이해에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을 갖는 또 다른 존재, 즉 이성적 존재로서 자리매김되 어 있다. 그러나 생명체는 우주를 점유하고 있지 않단 말인가? 서구인들은 이러한 면을 인 간의 물체적 부분, 즉 신체의 영역에만 한정시킬 뿐, 이른바 인간의 본질적 부분인 정신 의 영역은 공간적 혹은 시간적 제약의 구속을 받지 않는 초월적인 성질을 갖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양의 인식에서는 천지( 天 地 )가 세계( 世 界 )이며, 또한 우주( 宇 宙 )이다. 이들은 각기 시공( 時 空 )을 의미하며, 이 둘의 묘합이 인( 人 )이다. 따라서 天 - 地 - 人 은 時 - 空 - 人 이며, 이 들은 결국 時 間 - 空 間 - 人 間 의 三 間 이 된다. 29) 내가 천지이며, 내가 우주이며, 내가 세계이 며, 내가 시간이며, 내가 공간이며, 내가 인간이다. 이것들은 모두 관계태들이다. 30) 이 세상 의 모든 것은 관계되어 있으며, 또 오로지 관계되어 있음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31) 28) 그래서 나는 빅뱅 혹은 달탐험 등과 같은 과학 다큐물에서만 아폴로 (Apollo)등과 같은 브라이언 에노 (Brian Eno) 계열의 앰비언트 뮤직(ambient music)을 쓰지 말고, 정때문에 나 전원일기 같은 프로에서 그런 음악을 장면마다 계속 써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9) 이제 人 은 天 地 의, 宇 宙 의, 世 界 의, 時 空 의 묘합인 人 間 이 된다. 時 間 - 空 間 - 人 間 은 間 (relation)이라는 하나의 통섭적 원리에 의해 서로 다르지 아니한 것들 이 된다. 30) 도올은 이를 間 觀 (interject) 혹은 氣 觀 (kiject)으로 부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올은 인간을 inter-man으로 부르기도 한다(이상 도올세설, 통나무, 344-345쪽, 1990). 31) 이러한 측면에서 칸트적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개념, 그리고 그에 대해 초월적 이성을 갖는 존재로서의 인간 개념은 거부된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다시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 가? - 11 -
다시 신토불이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그 말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무너지거나 불신임될 경우 자신의 주장 근거를 잃게 된다: 나는 나의 땅에서 나온 것이 (나 의 몸의 원리와 같으므로) 나에게 더 편할 것이며, 너는 너의 땅에서 나온 것이 더 편할 것 이다. 이에 대한 반박은 너무도 단순해서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우리 에게 교섭은 필요없는가? 이 전제는 언제나 타당한가? 대답은 물론 아니오 이다. 그러나 내 가 이 말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 말이 갖는 보편성 때문이다. 물론 이 말 자 체도 우리 땅이 아니라 중국 땅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신토불이라는 말의 원의는 그 말 을 받아들이는 이가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을 하도록 촉구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나는 대원군처럼 쇄국을 하고 우선 서양 잔재와 종교를 없애고 과학을 없애고 상투를 다시 틀고 양이( 洋 夷 )들을 몰아내고, 더 나아가 중국것과 일본것과 유교와 도교와 불교와 또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몰아내고 끊임없는 내부적 내재적 영구 혁명을 수행해야 하는가... 물론 나는 우리의 길이 그러한 곳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토불이 의 身 土 중 내 몸( 身 )이 서 있는 이 땅( 土 )은 어디인가? 어디까지인가? 대한민국 한반도와 그 부속영토인가? 남한만? 한수이남( 漢 水 以 南 )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정치적 체제로서의 국가가 달라지고, 지리적으로 특히 바다를 건너면 남의 땅이 되는 듯 싶다. 중국것은 우리것이 아니며, 일본 것도 그렇고, 미국것, 프랑스것은 물론, 심지어 나이지리아것, 칠레것, 인도네시아것, 요르단 것이 우리것일 수 없슴은 명백하다. 땅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처럼 정치적이며, 지리적이 다. 이 때 만약 우리나라의 한강이 동쪽끝의 강릉에서 서쪽끝의 인천까지 끊이지 않고 흐른다고 생각해 보자(물론 실제로는 완전히 이어져 있지 않을 것이지만). 그리고 서울을 통과하는 한강의 위치는 지금과 동일하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집은 일산, 즉 한강 북쪽이다. 그럴 때 한강 아래에 있는 강남이나 노량진은 나에게 내 땅인가 아닌가? 노량진에 포도밭이 있다면, 그 포도는 우리 포도 인가? 더욱이 대구산 사과는 내 땅 에서 난 우리 사과 일까? 이에 대 한 나의 대답은 당연히 그것이 우리 사과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난 후지 사과는 우 리 사과가 아니다. 사과는 정치적인 식물일까? 나는 물론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떄 우리와 남의 기준은 물, 즉 바다를 건너왔느냐는 것이다. 중국 오징어는? 쉽게 생각해서 중국 오징 어는 우리 오징어가 아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가까운 곳, 즉 신의주 바로 건너편 중국 앞바 다에서 잡힌 오징어라 해도 신의주 사람들은 더 멀리 있는 울릉도 앞바다에서 잡힌 오징어 를 우리 오징어 로 부를 것이다. 오징어는 이처럼 정치적 동물이며, 민족 국가의 개념을 의 식하고 있는 존재일까? 물론 아니다. 결국 나의 신토불이론이 말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서있는 이 행성, 이 별 을 우리는 지구 라 부른다. 이 지구는 수구( 水 球 )가 아니라 지구( 地 球 )이다. 우리가 (위에서 가정한 것처럼) 한강으로 갈라진 우리나라의 남쪽과 북쪽은 같은 우리 나라 이다. 그러나 우리와 일본, 우리와 미국 사이에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 그 사이의 바다는 실로 거대한 장 벽이다. 그러나 그 바다 밑은 같은 땅이다. 그 땅은 이어져 있다. 32) 그 거대한 바다는 단지 지구 표면 의 70여 퍼센트를 뒤덮고 있을 뿐, 그 총량은 지구 전체 질량의 수천분의 1도 안되는 양이다. 지구의 모든 바다들, 그 밑에는 오직 하나의 땅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 의 땅 위에서 산다. 미국이 우리땅이다. 일본이, 프랑스가 우리땅이다. 미국이, 일본이, 프랑 32) 여기서 이어져 있다 는 말은 맨틀 위를 떠다니는 거대한 대륙판들의 이어짐 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의도는 보다 거시적인 지구 전체의 시각에서 본 땅의 동질성 에 있다. - 12 -
스가 바로 한국이다. 우리는 햄버거나 스시나 바게트를 먹어도 죽지 않는 것이다. 9. 나는 너다(I am You) - 너의 길을 가라! 여기에 바로 인간 존재의 보편성(universality) 33) 이 있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을 어떻게 보 는가하는 관점의 문제에 달려 있다. 미국과 한국과 일본과 프랑스는 다르지 않다. 미국이 한국이며, 일본이며, 프랑스이다. 미국인과 내가 다르지 않으며, 일본인과 내가 다르지 않으 며, 프랑스인과 내가 다르지 않다. 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하나의 땅 위에 서있듯, 이 땅 위의 모든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원리 위에 기반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 몸의 구조적(=생물학적) 보편성이다. 우리의 신체 구조, DNA 구조의 동일성 위에 우리 인간 존 재의 보편성이 근거해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맞으면 아프며, 그녀 또한 무시당하면 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지구 위의 모든 존재들과 공통적 본질을 공유하고 있는 하 나의 보편적 존재이다. 내가 존엄한 존재라면 그 이유는 바로 네가 존엄한 이유와 동일하 며, 내가 경멸스러운 존재라면 그 이유는 네가 경멸스러운 존재인 이유와 동일한 것이다. 나는 너이다(I am You). 나는 칸트이며 마호메트이고 공자이며, 나는 로저 워터스이며 머라 이어 캐리이고 서태지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이며, 너는 나이다. 34) 우리가 앞에서 던졌던 질문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까지인가? 나의 것, 우리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 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네가 하게 되는 것을 해라! 네가 하게 되는 모든 것, 네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바로 너의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한국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굳이 나를 알아야 하며, 나의 것,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 는가?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이 나를 편하게 해주리라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편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의 것, 우리 것을 사랑 해야 하는 이유는 - 어떤 전통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이 나에게 편하고 잘 맞는 것,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자유케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최소한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는 것, 따라서 보류해야 할 것이다. 35) 오히려 내가 주문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우리는 세계를, 서양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국악이든, 트로트이 든, 가요이든, 팝송이든, 록이든, 펑크이든, 심지어 엔카이든, 제대로만 배워라! 제대로만 해 라! 이제 대한민국의 한 철학도가 음악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또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다음과 같은 한 마디뿐이다: 네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너의 것이며, 우 리 것이다. 너의 길을 가라! 너의 느낌을 따라라! 33) 보편성( 普 遍 性 )이란 용어는 물론 영어 universality를 일역한 말이다. 이 universality의 어원은 우주, 지구, 혹은 전체, 보편을 의미하는 라틴어 univers이다. 즉 보편(universal)이란 여기만이 아니라 저기에서도, 나만 이 아니라 너에게도 통하는 널리 펼쳐져 있는 (= 普 遍 ) 어떤 원리를 이르는 말이다. 즉 특수(particular)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지금 대학( 大 學 )으로 번역된 제도로서의 university라는 말도 particular가 아닌 universal한 원리, 즉 sophia 혹은 épistémè를 배우는 곳이라는 의미이다(philosophia). 이런 의미에서 모든 대학들은 자신만의 보편성을 갖는다 (all university has its own universality). 따라서 하나의 대학이란 글자 그대로 하나의 보편성이며, 그러한 보편성들 각각은 그것들 사이의 세력 관계 에 의해 자신만의 고유한 정치 적 의미를 갖게 된다. 34) 이 때의 나 는 실상 기적 관계태로서 모든 다른 인간 존재들만이 아니라, 실상 우주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과 보편적 동일성을 공유하는 그러한 존재이다. 35) 이는 때로 버려야 할 우리 것 일 수도 있다. - 13 -
Abstracts Philosophical Conditions of Korean Rock Music HUH Kyoung University Marc Bloch, Strasbourg II, France In these days, Music means sometimes and not rarely occidental music. Etymologically, it isn't wrong. But we can not identify the meaning or essence of something with its etymological, linguistic roots. Because simply this kind of argument is essentially based on linguistic, in other words, cultural hypothesis. Music is always and inevitably heard and perceived by some one. And this some one is not a (universal) Man, but a specific man or woman in a given culture and time. The Music doesn't exist. There are only these and those musics. The philosophical conditions of Today's Korean Rock Music should be based on this fact. They are the conditioning and conditioned factors of aesthetic perceptions of Koreans today. In 70's, Back Nak-Cheong said, "the very national is the universal." Today, i'd like to add some remarks on this wisdom, "the very universal is the national." What is korean is what is human and universal because there is one factor which is universal that is human being. Keywords 주제어 계보학, 근대성, 보편성, 록음악, 음악비평. Genealogy, Modernity, Universality, Rock Music, Music Critic. 투고: 2006년 4월 19일 심사: 2006년 5월 4일 ~ 30일 게재 확정: 2006년 6월 21일 -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