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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인물 4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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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보 제20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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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보람의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 정부파견 사범들 근래 즐겨 보는 낡은 비디오 테이프가 하나 있다. 1999년 국립영상제작소 에서 해외 홍보용으로 제작한 영문 버전의 Fifty years of the Republic of Korea가 그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참혹했던 장면이며 폐허에서 혹독한 가난을 견뎌내며 잘 살아 보겠다는 신념 하나로 억척 같이 살아온 우리민족의 슬픈 지난날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1960년대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오늘 세 계10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경이로운 성공 스토리 속에는 우 리의 자랑스런 문화 태권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계 연맹 발족33년 만에 182개국에서 세계인이 열광하는 한국문화 태권 도', 그 위대한 뿌리내림 이면에는 해외 태권도 사범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나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욱이 1972년부터 행해진 정부 파견, 아프리카 태권도 보급 역사를 보면 파견사범 면면마다 태권도계에서 알아주는 명성을 가진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 시절의 열풍이던 아메리칸 드림의 유혹마저도 깨끗이 물리치고 조국을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분단 국가로서의 남북간 외교 전쟁에서 열세일 수 밖에 없었던 비수교국 과의 외교에 태권도를 통한 민간 외교로 대응한다는 나라 사랑의 신념 하 나로 낯 선 땅 아프리카의 고통스러운 환경을 견뎌내며 청춘을 바쳤던 그 들이다. 그들의 숨은 노력과 가슴 저미는 나라사랑을 되새기면서 이제 그들의 공로 에 이 작은 단서 하나를 제공함으로 오늘의 이 행복한 태권도 번영 역사의 한쪽에 우리들의 태권도와 아프리카 사랑을 기록하여 두고자 한다. 블랙(Black) 아프리카의 태권도 발원지인 서부 아프리카, 그 개척자들은 떠나고 없다. 그러나 그 고귀한 정신은 지금도 이곳 태권도 가족의 가슴 속 에 강렬히 살아 숨쉬고 있다. 나는 그의 후예들과 함께 일궈온 보람의 역사 아프리카 태권도 13년을 그들의 발자취와 함께 전하고 싶다.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15

아프리카 대륙의 最 西 端 (최서단) 세네갈 세네갈은 1,100만의 인구와 우리나라 남북을 합친 면적을 가진 조그만 나 라이다. 한국에서 열린 2002년 월드컵 8강신화로 강렬하게 세상에 존재가 알려져서 지금은 우리에게 그리 낯선 이름의 국가는 아니다. 프랑스의 오 랜 식민지였기 때문에 불어가 공용어이며 유사한 주변국에 대해 강한 인종 적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어 쿠데타가 한번도 없었던 유일한 불어권 국가이며 세네갈 사람들의 뛰어난 언변은 국제외교에도 그 빛을 발휘해 국제기구 수장들도 많이 배출한 나라다. 그러나 국민 90%이상이 이슬람교도 이고 우리와는 많은 문화적 차이가 있다. 지저분한 거리와 사방의 가난한 이웃들, 더운 기후, 비위생적 환경으 로 인한 풍토병의 발병율 등은 우리에겐 너무나 낯설고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임을 대변해 준다. 나 또한 파견 초기에는 우리 가족들이 이런 열악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되었지만 현지 태권도인들의 태권도 열정'을 보며 힘을 얻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83년에 우리나라의 장명관 주 세네갈 대사와 세네갈 측의 체육부 장관 이 양국간에 체육교류협정 체결을 성사시켜 이상진 사범을 선발하여 파견 하고 국립경찰학교에서 첫 태권도 보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성실한 활동은 주재국의 정부 주요 인사들을 감동케 하였고 4년 뒤인 1986년부터 는 국립경찰학교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역에 태권도를 보급할 수 있도록 파 격적인 배려를 하여 세네갈의 태권도 저변을 확산해 나간 바 있다. 또한 그의 원만한 대인 관계와 봉사정신은 모든 관계자들의 존경을 한 몸 에 받기도 했다. 실례로 어느 관련 기관을 방문하더라도 후임자라는 한마 디에 그의 격에 준하는 예우로서 대해주었다. 그렇게 그가 꽃다운 청춘을 바쳐 보급한 태권도는 그가 떠난 14년을 그가 그렇게 바라고 기대를 했을 그 모습으로 뒤에 남은 우리가 발전시켜 가고 있다. 16

(관련기사발췌) 우리 젊은이들 아프리카를 밝힌다 (세네갈 국가대표 사범 박익수씨) 세네갈 수도 Dakar 외곽에 있는 국립종합운동장. 한국말 차려! 국기 에 대한 경례 구호를 시작으로 세네갈 태권도 국가 대표선수 남녀 15 명이 자그마한 키의 한국인 사범 구령에 따라 구슬땀을 흘리기 시작했 다. 선수들의 정면에는 태극기, 국기원기, 세계태권도 연맹기, 세네갈국 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태권도 5단의 한국 젊은이 박익수(35)씨. 그는 해외봉사부문에서 베테랑이었다. 1990년부터 2년간 제1기 한국 청년해외 봉사단원으로 스리랑카에서 봉사했고, 93년 다시 세네갈에 파견돼 4년째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95년에는 제자들이 아프리카 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내 세네갈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마음은 한없이 깨끗하고 순수하지만 삶에 대한 투지가 약한 이들에게 태권도를 통해 한국인의 강인한 정신을 배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 가 너무나 사랑하게 된 이 아프리카 인들이 강인하게 돼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산다면 저로서는 대만족입니다. 박 씨는 국가 대표 사범뿐 아니라 태권도가 정식 과목인 국립경찰학교의 교수도 맡고 있다. 뀉후략 (소설가 홍상화) 조선일보 1997. 8. 31 나의 꿈과 도전 꿈을 찾아서 나는 1963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했다. 당시 대부분 그러했듯이 나 또한 고 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도회지로 이사를 시작하면서 두 번 의 전학을 하게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조무래기 들의 텃세에 시달려야 했 다. 때문에 방어의 기술과 다중의 위협을 향해서도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늘 갈망하면서 억눌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74년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이웃에 사는 태권도 선수 형을 졸라서 시작하게 된 태권도는 지금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17

이렇게 직업인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후진국에 나가서 태 권도를 보급하는 일이 꿈이었던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것에 대비한 능력 배양에 전념하면서 부산의 한 도장에서 태권도 지도를 병행했었다. 1990년 4월 당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주관한 한국청년 해외봉사단 (KOICA 봉사단 전신) 파견단원 선발시험에는 태권도 분야도 있었다. 시험 은 논술과 영어과목까지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자신은 없었지만, 오래 전부 터 꿈꾸어오던 해외 활동의 기회라서 응시했다. 3개월의 갖은 노력 끝에 합격하여 스리랑카로 파견되었는데 오지의 마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태 권도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첫 외국 생활을 지붕에 기와만 얼기설기 올려놓아 비가 오면 새는 집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맨발로 다니거나 손으로 같이 밥을 먹는 일은 이미 각오 가 되어있었기에 견딜 만했다. 문제는 뱀이 많은 나라라서 가끔은 방까지 도 들어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 하면 아무렇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쫓아내고 나서는 "인제 갔다", 대처 법이 라고는 그뿐이었다. 태권도 보급활동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불교가 국민성의 바탕이 라서인지 승부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한 어려움을 딛고 2년간 을 꾸준히 노력하여 5개 지역의 500여명의 오지 청소년들에게 태권도의 강 인함과 도전정신을 심어놓고 돌아왔다. 해외에서의 이러한 값진 경험들에 힘입어 1993년에는 다시 한국국제협력 단 (KOICA)이 실시한 세네갈 파견사범 선발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또 한 번 얻게 되었다. 선발위원회가 정한 기준의 공정한 절차를 다 통과하고 합 격 통지를 받아서 당시 지방에서 운영하던 태권도 체육관을 정리하고 파견 준비를 하면서 출국할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세네갈에서 활동한 전임자 면담과 세네갈 근무 경험의 외교부 직원 면담 이후에는 은근히 부정적 권 유가 들어왔다. '박 사범은 연륜도 부족해서 그곳의 핵심 지도자들인 1951 년생들을 다룰 만한 능력이 안돼 보인다'든가 또는 '그곳 국민들은 체격이 아주 큰 민족인데, '이미 경영하는 도장도 그 정도면 훌륭한데 박봉에 왜 그런 험한 지역을 자청하느냐'. 대강 이러한 논리로 만류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태권도 사범으로서 그들이 원하는 바 어느 누구 못지않게 이루어 낼 자신이 있으며 돈보다는 사범으로서의 의미를 추구하 는 삶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는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한 우여곡절 을 거쳐 1993년 10월 22일 이곳 세네갈과 인연을 맺었다. 18

바르고 강한 지도자의 모습 첫 근무는 국립경찰학교와 함께 세네갈 태권도연맹의 업무도 병행하게 되었는데 민간태권도 조직은 1990년까지 유도 연맹의 일개 분과로서만 존 재 했다. 1990년 체육부의 승인으로 정식 독립하여 태권도 연맹으로 발족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밝은 이론과 잘 갖추어진 연맹의 법규도 있었으 나 거의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시 아프리카 국가에는 나라마다 불 문율처럼 지존 사범이 있었다. 개척 한인사범이 떠난 자리는 일반적으로 현지인 수제자가 그 역할을 맡게 된다. 이곳 역시도 상황은 같았다. 이미 떠 나고 없는 전임자의 경우를 빙자해서 사사건건 비협조적이었다. 상황이 이 러했기에 많은 부분을 새롭게 해야만 했고, 나의 존재가치를 확립하기 위 해서라도 기존질서와는 차별화를 필요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위 말해 현지 회장의 눈치나 보는 사범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타고난 시대의 영웅이라 하더라도 주변여건이 뒷받침 되어 주지 않으면 그 꿈을 펼칠 길 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개혁의 방법은 태권도인으로서의 정신자세와 강인 함, 그리고 기술적, 지식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증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 이었다. 그 고분분투의 과정으로, 경찰학교 졸업식에서 반드시 졸업생과 함께 태권도 사범의 시범 순서가 있는데, 그 시범연습 도중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행사 당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범을 강행하여 책 임감 있는 행동을 과시 한적도 있다. 세네갈과 나의 태권도 보급활동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학창시절 태권도부에서 받은 선배들의 혹독한 교육이나 기합은 지 금도 내 교육법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청소년기의 단 한 살 차이의 선배일 뿐인데도 그들은 의젓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지금 떠올려도 그 시절 그들 은 일개의 청소년이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뛰어넘지 못할 거대 한 그 무엇이었다. 당시 태권도는 지독한 노력과 뛰어넘을 수 없는 선후배 간 예우의 벽뿐이었다. 수련 시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고, 한 치의 흐트러 짐도 용서될 수 없었던 시간만이 내게 각인 되어있다. 세네갈은 여러 문화적 차이로 그만큼의 혹독함은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 정신만은 물려주고 싶었다, 우리의 제자들 또한 그러한 바르고 강한 지도 자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과 정신적 지주를 찾 고 싶어하는 인간 심리는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19

냉혹한 判 官 (판관)의 벽을 넘어서 경기, 피눈물 나는 노력 파견 초기 의사 소통이 어려워 언어 공부에 집중했다. 세네갈이 불어 사용 국가라서 영어는 무용지물이었다. 예전에 스리랑카에서 봉사단원으로 활 동하면서 언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하루 14시간씩 수개월 동안 언어에만 매달려 본 적도 있다. 남들 보다 자신감이 있었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언어 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한 언어 장벽을 넘기 위한 노력들은 되돌아 생각 하면 지금 나에게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게 만들어준 요인이 되기도 했다. 언어 공부와 병행해서 세네갈 태권도 보급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관찰기간 을 가지면서 미래의 존재 가치를 확립할만한 활동 계획을 구상 하였다. 1993년의 세네갈 태권도 인구는 2,500명쯤으로 추산되었고 주로 경찰계 통의 기관에 보급 되어 있었다. 항상 가라테와의 세력 우위경쟁을 해야 하 는 상황에서 세력적으로는 큰 열세를 보였다. 예를 들어 태권도 홍보의 주 요 수단인 TV스포츠 담당PD, 기자, 정부 고위관료 등 대부분 20년이나 앞 선 가라테 출신의 인사들이라서 체육부의 태권도 업무 수행에 있어서 사사 건건 방해를 받기도 했다. 가라테 도장은 전국 방방곡곡 어딜 가도 존재했 지만 태권도 도장은 그보다 훨씬 희귀했다. 그만큼 가라테의 아성은 견고 했고 따라서 당연히 첫번째 활동목표는 가라테의 세력을 제압해 가면서 태 권도를 전국으로 골고루 퍼져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태권도의 존재 홍보를 위해서는 신문이나 방송 매체 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따라서 신문 기자들이 태권도와 관 련해서 나에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그 기자에게 꼭 태권도를 배우기를 권유해서 태권도인을 만들었고, 여의치 않을 경우는 그 자녀라도 태권도를 배우게 하여 태권도 가족화를 실현시켜 나갔다. 태권도의 우수성을 광범위 하게 홍보하는데 언론의 지원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나는 이들의 태권도 교육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제쳐두고 직접 지도를 원칙으로 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공공기관에도 태권도 클럽이 형성되게 하기 위해 정 부의 고위 관료나 대통령 및 총리의 손자들도 가라테에서 태권도로 바꾸도 록 유도한 뒤 성심을 다해 지도해 주었다. 20

지방보급의 열세는 그 지역 출신의 태권도 유단자를 뽑아서 가라테를 뛰 어 넘을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훈련시킨 후 해당지역으로 내려보내서 태권도를 보급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직접 해당지역을 돌며 경찰서장이나 지역유지와 그 지역 담당의 태권도 제자들을 연계해 주 어 공신력을 높여주고 태권도가 발을 붙일 수 있도록 기술적이나 물질적으 로도(KOICA지원물품) 끊임없이 지원을 했다. 이러한 노력은 다행히 빠르 게 그 효과를 보았다. 예를 들면 세네갈의 종교성지인 Touba 지역에서는 굳 건히 자리잡고 있던 가라테의 세력을 밀어내고 예상을 뒤엎는 놀라운 위세 로 태권도가 빠르게 자리잡아 나가기도 했다. 그 결과 2006년 현재 태권도 수련생은 164개 클럽의 13,164명이며 비등록자를 합친다면 2만여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가라테는 40년의 보급역사에도 불구하고 2006년 9월 현 재 5,107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인내의 세월 13년이 지난 지금 세네갈에서는 포스트태권도를 부정하는 의 견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으며, 가라테를 비롯한 유도, 쿵푸, 베트남무술... 등은 엑스트라 내지는 변방의 무술이라는 인식이 확실히 자리 잡혔다. 태권도는 이제 세네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기 종목인 축구와도 등록 회 원 수에서는 1,2위를 다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두 번째 활동 목표는 세네갈을 세계태권도 연맹의 회원국으로 만들어서 세계무대로 진출 시켜 태권도 강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네갈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선수층이 매우 얇다. 그래서 국가대표선수를 선발 하는 게 문제다. 특히 여자의 경우 고작 체급당 두세명의 선수들만 출 전하여 한 명이 선발된다. 선발 후 교육할 때는 결석자도 생긴다. "왜 그랬 느냐?" 물어보면 이유인즉, 교통비가 없어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 난한 선수들이 맘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이 이뤄지지 않았 기 때문에 지도사범이 교통비까지 지급해 가면서 겨우 선수들을 훈련 시켜 야 하는 열악한 실정이다. 또한 회교국가인 까닭에 기도시간만 되면 어김 없이 알라신을 위한 종교의식을 치르기 위해 도장을 빠져나가는 선수가 태 반이다. 거슬리기는 하지만 종교적인 부분이라 어찌 해볼 방법이 없다. 아 무리 엄한 규정을 정해도 그들은 피해갈 만한 이유를 가졌기에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그러나 세네갈 사람들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기 때문에 태권도에 이상적 인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다. 반면에 그들에게는 한국인처럼 암팡진 근육의 운영능력은 없다. 태권도가 키나 체격으로만 하는 운동은 아니기에 10년을 넘게 그 분야를 교정해보려고 노력해봐도 전체적인 혁신까지는 아직도 길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21

이 멀기만 하다. 그래서 기술 발차기만 무작정 시키는 교육방법은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대표팀의 강화훈련 때에는 어느 선수가 체격조건이 좋고 나쁜지 장단점을 고루 분석하여 유망해 보이는 선수들의 특기를 최대한 살 려 지도한다. 예를 든다면 발차기가 이미 잘 익혀져 있는 선수에게는 스텝 바꾸기만 하루에 수천 번을 시키는 등의 1대1 교육방식을 활용한다. 아무 리 좋은 발차기도 동력원이 약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겨루기의 동력 원천 은 바로 스텝 교환 시에 사용되는 근육이므로 선수들의 체력 한계에 도달 할 무렵까지 반복해서 시킨다. 그 이전에는 세부적 전술 발차기 같은 것은 절대로 시키지 않는다. 이런 교육법이 세네갈 사람의 체형에는 매우 효과 적이어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처녀출전 국제대회 짐바브웨 1995 취약 체육종목이 국제대회에 나가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에 서부터 꼭 헤쳐 나가야 할 가시밭길이 있다. 세네갈 체육부에 38개 종목의 체육 단체가 있는데 주로 7개 종목 정도만 참가를 시킨다. 그 38개 종목 중 태권도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노력과 성과를 필요로 한다. 냉 혹한 판관( 判 官 )들의 벽을 넘어 7개 종목 속에 선택되는 것이 국제대회에 나가서 우승하는 것 보다 훨씬 힘이 들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사연이 있지만, 가장 큰 보람의 순간은 짐바브웨 All African Game (아시안게임에 해당)때이다. 국가의 이름을 걸고 국제대회에 출전해 본 경험이 없는 세네갈 선수들이, 바로 All African Game에 남루한 현지 도복을 입고 네 명이 처녀 출전하여 사상 처음으로 국제대회 은메달 하나와 동메달 하나씩을 획득하였다. 세네갈 태권도의 밝은 미래가 시작 되는 순간이었다. 정부의 지원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전혀 성과를 기대 하지 않았던 취약 종목 태권도가 국가성적 아프리카 7위로 급부상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국위선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대통령까지도 크게 기뻐하여 선수 전원에게 50만원 정도의 격려금을 지급했으며, 아울러 선수 단은 대통령의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최초 아프리카 챔피언 탄생, 케냐 1998 세네갈에서 케냐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었다. 꼬뜨 디 브와르(Cote d'ivoire)를 거쳐서 케냐로 가야 하는데 아비장 공항에서 예상보다 14시간 이나 지체 되었다. 공항에 무료하게 있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많은 시간이 22

었다. 시내로 나가려면 한국인은 비자가 필요한데 이런 일을 전혀 예상하 지 못했기에 비자를 준비해 오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문득 생각해낸 것 이 이곳에 30년 태권도 사범으로 계셨던 김 영태 전 정부 파견사범의 명성 에 의지해 보는 것이었다. 출입국 관리사무실에 가서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했다. 케냐에는 아프리 카 태권도대회가 열리고 이 대회에 김 사범이 감독관으로 케냐를 방문하기 에 그것을 빌미로 사정하였더니 흔쾌히 입국을 허락해 주었다. 그분은 떠 나고 없었지만 태권도가 자리한 곳의 보이지 않는 사범들의 열매 맺은 성 과는 대단한 영향력으로 남아 있었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해서도 모든 것이 순탄치는 않았다. 1998년 8월 경기장에서 첫 경기를 위해 주심이 "선수입장!" 이라고 외치는 순간, 세 상에서 처음 듣는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아수라장을 만났다. 바로 그 유명한 케냐 미대사관 테러 폭발 사고였다. 경기장은 폭발지점과 불과 300미터의 거리에 있었다. 우리 선수단은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에서 바로 옆에 계시던 60대의 원로 사범은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놀 라운 순발력과 점프력으로 출입구 계단을 뛰어내려 상황을 대처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너무나 감탄해 했던 일도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 상황들을 떠 올리면 아마도 페닉 상태가 이런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대형 사고로 인해 케냐는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게 되었고 모든 공식행사는 금지 되었다. 후진국 세네갈에서 어렵게 예산을 만들어 출전한 대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고는 갈 수 없었기에 대회 개 최를 요구했다. 그러나 케냐 정부의 공식행사 금지 의지는 확고했다. 우여 곡절 끝에 비공식으로, 국기를 게양하지 않는 조건으로 대회 속개를 허용 해 주었다. 이 대회에서 세네갈은 최초로 아프리카 챔피언 하나를 탄생시켰다. 금메 달을 획득한 티아르노 선수는 이후 그 성과를 계기로 프랑스 대회에도 출 전하게 되면서 미모의 백인 여성을 부인으로 맞이하며 승승장구 성공한 삶 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는 보은의 뜻으로 지금까지도 가끔 국제전화를 걸 어 나에게 안부를 물어 오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23

세네갈에 부는 태권도 열풍 아프리카 대륙 평정, 세네갈 2001 2001년 9월, 제6회 아프리카 태권도선수권 대회를 세네갈에서 개최했다. 최고의 모범대회로 만들기 위한 착실한 준비는 물론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대회의 우승을 목표로 치밀하게 대비해 왔다. 이런 대회의 세네갈 개최는 우승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전례 없이 4개월간을 쉬지 않고 대표팀을 훈련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아프리카대회 조직의 무질서에 대해, 우리 세네갈이 확실하게 다른 참가국들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자며 우리 태권도인들의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 준비해 왔다. 참가국 선수단이 처음엔 지저분한 현지인, 더러운 거리환경에 지옥 같다 는 소리를 연발 했다. 그러나 이곳 태권도인들의 예의 바르고 헌신적인 임 무수행을 보며 이구동성으로 갈수록 정이 드는 곳 이란 표현으로 평가를 달리했다. 세네갈 관중은 경기장을 가득 메웠고 응원 또한 어느 대회에서 도 찾아볼 수 없었던 열렬함 그 자체였다. 세네갈 인근 국가인 말리와의 경 기에서 세네갈 선수가 3회전에 KO로 통쾌하게 승리하자 세네갈 국민 모두 가 열광하며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던 적도 있었다. 대회 결과는 완전 한 우승이었다. 세네갈은 참으로 스포츠에 남다른 정열을 가진 애국심 강 한 나라다. 대회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도 오래 전부터 고심 해왔다. 세네갈의 태권도 집행부는 국제대회의 활동에 있어서는 아무런 경험이 없었기에 어찌 할 바 를 몰라서 경험이 많은 나에게만 의존을 했다. 개인 비용을 들여 봉사요원 113명을 선발하고 3주에 걸쳐 군대 훈련소보다 더 지독하게 자질 교육을 시켰다. 겸손과 권위를 균형 있게 갖춘 세네갈을 연출하기 위한 사전 교육 이었다. 내용은 봉사정신, 태권도 예절, 금품수수 금지, 비난 금지 등 이었 다. 자원봉사요원 투입이 예상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화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선수단을 책임진 자원봉사요원은 외국인에게 부당한 택시 요금을 요구하다 발생한 시비에 다른 택시 운전자 6명이 합세 해 몰아쳐도 한치도 물러섬 없이 끝까지 싸워 보호하는 투혼을 발휘해 그 들을 감탄케 하였다. 이 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의 공식 감사표명까지 24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교육 내용대로 실행 했다. 고생스러운 조건에도 책 임을 다하는 그들의 나라사랑이 감동적이었다. 나는 이 대회가 세네갈 국가 명예를 좌우할 것이라 인식하고 경제적인 도 움을 포함하여 최선을 다하여 지원하였다. 그 동안 세네갈에서 과분한 대 우를 받아온 것에 대한 나의 보답이기도 했다. 행사 후 제자들로부터 헹가 래 축하를 받았다. 지도자로서는 최고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이 성과 로 2002년 8월 2일 와대 대통령은 태권도팀을 대통령 궁으로 초청하여 선 수들과 함께 한국정부의 협력에 깊은 감사를 표명하고 격려해 주었다. 세계 무대 입성, 독일 2003 2003년 9월 독일에서 개최된 세계 선수권대회에 참가함으로써, 꿈에도 그 리던 세계무대 진출의 꿈을 이루었다. 아울러 세네갈 연맹 역사상 처음으 로 세계태권도연맹의 정기총회에 세네갈 대표단으로 참석 할 수 있었다. 첫 세계대회 출전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활기 넘치고 당당한 모습이었 다. 초라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네갈 선수들은 사범 앞에서는 온순 하기 그지 없지만, 사범의 눈밖에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품행이 거칠어 통 제 불능의 지경에까지 이른다. 밴텀급 8강전에서 세네갈 선수와 한국선수 가 맞붙게 되었는데 경기종료 불과 몇 초 전까지도 7:7이라는 박빙승부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패하자 흥분한 세네갈 여자선수가 옆에서 한 국을 응원하던 한국 여자선수를 밀쳐서 양측이 주먹다짐으로까지 갈 뻔한 일도 있었다. 응원의 경우 독특하고도 유별나다. 아프리카 전통 춤을 맹수 처럼 사나운 동물 묘사로 흉내 내며 함께 무리 지어 목청껏 응원을 하고 돌 아 다니는 모습은 세계인들의 눈에 참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으리라 생각된 다. 첫 출전에도 불구하고 세네갈 팀이 보여준 투혼과 의지는 세계 태권도 연맹의 감투상까지 받게 하였다. 위의 대회에 맞추어 열린 세계 태권도 연맹 15차 정기 총회 때는 어느 선 배님과의 안타까운 추억이 있다. 1975년 초대 세계 챔피언이었던 이기형 사범은 페루회장 자격으로 2005년 세계태권도 선수권대회의 페루유치를 위해 이 총회에 참가했다. 유치 후보국은 페루, 중국, 스페인이었다. 세네갈 은 페루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세네갈의 처음 총회 참가이고 첫 투표이기 도 했다. 남미에서 세계대회가 20년 넘도록 개최된 적이 없었고, 또한 아프 리카 선수단의 경우 유럽 등 선진국에서 열릴 경우 비자문제로 온갖 수모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25

와 멸시를 감수하고 참가해야 된다는 논리로 아프리카 주변국을 설득해서 표를 몰아 드렸으나 결과는 스페인으로 결정되었다. 득표수를 공개하지 않 는 등 의혹을 제기하는 국가들도 많았다. 유치 선거 후 그는 선수단을 데려오지 않아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며 격려를 해주셨다. 1982년 도복 200벌을 가지고 가서 고생 끝에 이룬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며 뻔하게 이어질 후배사범의 불안한 미래를 진심으로 염 려해주고 조언해 주셨다. 4개월 후 페루에서 괴한에 의해 총격 사고로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늘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사람과의 이별이 서글펐 으며, 나에게는 또 다른 아픔으로 기억되는 대회였다. 검은 대륙의 희망, 마드리드 2005 국제경기 참가는 지도자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준다. 세네갈선수가 조금 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하기 위해 예상되는 상대선수의 연습을 주 의 깊게 관찰하고 성향분석도 해야 하며, 심리적 위축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기 위해 때로는 심리치료사 역할도 해야만 된다. 2005년 4월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11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진 세 계선수권대회에서세네갈은 여자 페더급의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아 프리카대륙에서 무명의 세네갈선수만 유일하게 획득한 메달이었다. 이러 한 쾌거는 가르친 지도자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보람을 안겨준다. 국가 대 표팀의 지도자로서의 최고의 꿈은, 올림픽보다도 입상하기가 어렵다는 세 계선수권대회에 나가 활동국가의 국기를 시상대에 걸리게 하는 것이다. 힘 도 없고 지원도 보잘 것 없는 나라에서 이런 결과를 이루기는 참으로 요원 한 꿈이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도전 속에서 우리는 세네갈 국기를 시상대 에 걸었다. 이것은 또한 개발도상국에서 활동하는 KOICA 파견 19개국으로 봐서도 유일한 메달이었다. 세계대회에서는 경기 중 간혹 잊지 못할 명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사람 들은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한다. 나 역시 지도자는 선수를 통해 말한다'라 는 말을 늘 마음에 새긴다. 요즘 대부분 국가들은 승부에만 집착한 나머지 방어에만 치중하다 받아 차기로 실리를 얻는 소극적인 경기운영만을 고집 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선수들에게 "비겁한 모습으로 승부에 임하느니 차 라리 전세계국가에 세네갈의 기상을 한번 확실히 심어주자!"라고 줄기차 게 강조했다. 화려한 기술인 몸 던져 공중 뒤 후려 차기'를 타이밍에 맞춰 한번만 성공 시켜보라고 선수들에게 주문을 자주했다. 한 순간을 연출하기 26

위해 수천, 수만 번의 기술을 반복하게 하여 대비해온 터라 바람은 더욱 간 절하였다. 그 몸 날린 공중 뒤 후려 차기' 기술이 8강전 경기에서 통쾌하게 적중 되었다. 순간 수많은 관중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세계인들의 뇌리에 세네갈을 새겨두는 순간이었다. 세네갈의 선전은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조 건을 극복하고 아프리카인의 기상을 심어줌으로 세계 태권도 지도자들에 게 아프리카 및 KOICA 파견국에 대한 인식을 현저히 바꾸는데 공헌했다.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가 쇄도했었다. 그 동안 무시하면서 별 관심 없이 지 내던 사람들도 먼저 와 인사들을 건네주기도 했다. 이 성과는 세네갈 정부 차원의 감사 서한을 한국 정부에 보내게 했고, 이는 내가 외교통상부장관 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West Africa의 새로운 바람 비장함으로 떠난다 나는 주변국 교육 출장을 갈 때마다 비장함을 지니고 떠난다. 아프리카에 서 오랜 활동으로 그들의 악습이나 속성을 너무나도 잘 꿰뚫고 있기에 더 욱 그러하다. 그곳에는 보지 않아도 뻔한 태권도 기득권자의 비리들이 난 무한다. 주로 한 사람의 독선과 수많은 태권도인들의 불만이 그러하다. 대 개의 경우 단증 발급 문제인데 자체적으로 발급하는 단증 배포나 그것마저 도 자기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가혹하게 불이익을 주기에 많은 초급 지 도자들은 환멸을 느끼고 태권도를 떠나버리기 일쑤다. 어찌 보면 그것이 태권도 기술보급에 아무런 연관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의 경 우 태권도 보급의 커다란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나는 주 어진 교육의 기회를 통해 확실히 고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돌아온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이 이어온 30년 세월과도 견줄만한 효과가 창출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 사명은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Guinea, 북한의 혈맹국 기니 공화국은 700만의 인구를 가진 나라로 지리적으로는 세네갈 남단 일 부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북한의 혈맹국이었다. 때문에 북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27

한은 내부의 열악한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지원 을 해왔다. 공설운동장과 대통령 궁을 지어준바 있으며 농업, 의료, 태권도 사범, 군사 등의 분야에 걸쳐 수많은 전문가와 협력요원을 파견하고 있었 다. 기니 대통령이 휴가 때 평양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북한과는 친밀한 형제국이다. 가난하지만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기니이다. 1997년 2월 기니 태권도 연맹의 초청으로 승단심사와 기술 지도를 위해 방문했다. 세네갈 파견초기부터 주세네갈 한국대사관, 선교단체, 세네갈 연맹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태권도 지도 및 승단심사 요청이 있었으나 여건 이 적절치 못해 성사가 미루어진 바 있었다. 북한과의 혈맹 관계로 인해 태권도가 정착하기 매우 힘들었으며 또한 매 우 무질서했고 원칙도 없었다. 태권도 단증도 자체 발급했고 기술 또한 여 러 가지가 뒤섞여 많은 문제점이 있었기에 우리의 기술체계를 정확하게 심 는데 주력하고 조직 관련 부분도 철저히 지도하였다. 과민할 정도로 북한 을 의식한 나머지 공항 마중부터 시작한 경호가 내게는 너무 부담스러워 이틀째부터는 모두 거부하고 교육에만 열중하였다. 아프리카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이지만 내분과 특권의 악용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아프리카의 태권도 발전에 더더욱 걸림돌이 되고 있다. 승단심사도 실시 할 예정이었 으나 연맹의 내분과 실력자로 행세하는 사범이 자기 측 사람만을 위주로 편파 추천하는 등 불공정한 비리가 심하게 밝혀져 심사를 거부하였다. 공 정함은 사범의 필수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으로 궁지에 몰린 현 지사범이 무례하게 대들기도 했으나 사범의 양심으로는 태권도 가족의 대 의를 따르는 것이 도리이기에 돌아올 때까지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반면에 그 동안 불이익을 당해오던 여러 태권도인들을 모아서 정당하게 나 아가야 할 기니 태권도연맹의 방향과 방법을 전수하고 태권도의 기술적인 갈증들을 해소 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기니 체육부로부터 감독관이 긴급 파견되어 연맹 간부의 무례함에 대해 서 매우 정중히 사과를 하면서 기니 태권도 연맹이 더욱 투명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감독부서로서의 책임에 더 충실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이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자처한다면 꼭 세계태권도인들의 국기원 공인단 문제만큼은 깨끗하게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더 이상 특정인의 이권에 의해서 태권도의 본래 목적 이 악용 되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마련의 절실함을 느꼈다. 그렇게 간 절하게 국기원의 공인 단증을 원하는 그들이야 말로 태권도 보급확산의 원 천이기 때문이다. 28

Togo의 태권도 혁신 토고는 2006 독일 월드컵축구대회에서 한국과 첫 경기에 맞붙어 우리에 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게 한 인연의 나라로 지금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 설지 않고 친근감이 드는 나라이다. 인구500만의 불어권 국가로서, 국토 의 면적이 우리나라보다도 작은 소국이다. 2004년 12월17일부터 23일까지 서부 아프리카 토고국 수도 로모에서 28 명의 초급 태권도 지도자들을 상대로 (Olympic Solidarity Technical Course) 국제 올림픽위원회의 전문가 지원교육을 실시했다. 그 초급 태권도 지도자 들 28명 중 국기원 유단자는 단 2명에 불과했고 전부 자체 발급한 단증 소 유자였다. 연맹회장은 현직 공군 대령이었으며 실질적 권한은 부회장에게 있었다. 이 부회장은 국기원 5단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권도를 수련 하고 돌아와 토고 태권도를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현지 태권도인들 및 정부책임인사는 KOICA의 정파사범 파견 프로그램의 혜택을 간절히 원 한다는 의견을 한국정부에 전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부 회장에게 한국 사범의 파견에 대한 의향을 비밀스럽게 물어보니 솔직히 원 하지 않는다고 했다. 좀더 투명하게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불명예스러운 요소를 제거한 다음에 받아들이고 싶다고 했다. 전국에 26개의 태권도 클럽이 있고 태권도 인구는 약 4000여명으로 추산 되고 있다. 그 중에 여자 수련생은 단 17명에 불과할 정도로 보급이 미약한 상태였다. 태권도인 대부분은 자체 단증 소지자라서 국기원 발행 단증을 가지기를 원하지만 현지 지도자에 의해 취득 수단이 좌절되어 억눌린 불만 들이 많았다. 태권도 보급 30년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자체 단증 발급의 폐 단 때문에 국기원 발행의 공인 단증은 전국을 통틀어도 60여장에 불과했 다. 강습기간 동안 혼이 빠질 정도의 강한 훈련은 물론이고 진정한 태권도 수련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심어주었다. 또한 초급 지도자들과 연맹 지도부 와의 대화와 타협을 주선 하는 등 다른 나라들처럼 정당한 국가 연맹의 행 정을 처리할 수 있도록 유도했으며 주로 초급 지도자들의 불만 해소와 해 법 창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은 개선에 큰 효과가 있었다. 이 같은 나의 노력에 참 가자들은 그 동안에 쌓였던 불만이 풀려서 많이 후련해 하고 크게 만족스 러워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29

베냉(Benin)의 희망찬 새 출발 베냉은 700만 명의 인구에 우리나라 만한 영토를 가진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이다. 2005년 10월25일 나는 국제 올림픽위원회의 전문가지원 지 도자 교육을 위해 그곳을 방문했다. 베냉의 태권도 보급역사는 주변 국가에서 태권도를 배운 유단자가 1975년 태권도 클럽을 운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첫날 체육관을 사전답사 했는 데 중국 원조로 웅장하게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불결한 상태였기에 강습 전까지 청결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대부분 눈치만 볼뿐 나의 요구가 잘 받아들여지기 않았다. 그러나 모진 기 합으로 혼을 빼 놓고 사범의 말 한마디를 철판에 글씨를 새기듯 들을 만큼 오롯한 정신 자세를 확보 해놓고 시작 하는 것이 나의 오랜 강습진행의 습 관이다. 지도자들이 알아야 할 모든 기술을 세밀하게 교정하였다. 경기 겨 루기의 경우 나래 차기' 후 반격대비 동시 뒤 후려 몸 날리기'를 시연해 보 이면서 시간차 전술을 위주로 훈련 시켰다. 눈빛이 달라졌다. 여태까지 경 험하지 못했던 절묘한 타이밍 교육법으로 받아 들이는 듯했다. 우레와 같 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베냉의 국가올림픽 위원장의 집으로 식사초대를 받았다. 정중하고 세심 한 배려였다. 이야기 주제 역시 태권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태권도 국제 경 기에는 한국사범의 부정개입이 많다는 언급과 오지국가의 국가 고위 체육 인사에게까지 알려진 부정 사실 등 태권도 전반에 관한 나쁜 소문이 도는 것을 들으며 마음이 참으로 무거웠다. 한국 사범이 코치로 활동 하는 국가 에 심판들은 무조건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도 했다. 이에 "지금 시대에는 규정보다 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런 일은 없다" 라는 요지로 왜곡된 태권도 이미지의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해 야만 했다. 강습초기 베냉 언론은 태권도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첫 날 강습에서 태권도의 절도와 기강에 감탄한 기자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고 다음날부터 태권도 취재가 러시를 이루었다. 그 예로 2개의 라디오 방송사 에서는 1시간짜리 생방송 대담프로그램의 자리를 마련해 줄 정도로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참고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라디오를 참 즐겨 듣는다.) 방송에 출연해 베냉 칭찬과 한국 알리기에 주력했다. 한국 사람들도 베냉 을 잘 아는 사람이 없듯이 이곳 사람들도 한국이란 나라를 모르는 상황이 었다. 따라서 이러한 매체에 한국인으로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전무후 30

무한 일이다. Korea, Taekwondo, Koica등의 단어들을 그 나라 국민 청취자의 뇌리 속에 자리 잡게 하는 것 또한 나의 임무이기에 성심껏 실천 했다. 베냉 정부는 그간 한번도 자국 태권도 대표팀을 국제대회에 참가 시킨 일 이 없었으나 이 강습의 성공이 계기가 되어 니제르에서 열린 불어권 국제 대회에 처음으로 대표 선수단을 국비 파견 하게 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멀지만 가야 할 길 크로아티아의 새지 않는 밤 1999년 크로아티아 공화국 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세계 예선대회가 열렸다. 물론 이 대회 출전 예산은 사전에 배정이 되어 있지 않았다. 시드니 올림픽 세계예선대회 참가 예산을 배정 받기까지는 까다로운 절차가 있 다.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 대회에서의 성적이 3위 이상을 확보 해야만 다음 단계인 세계 대회 지원이 허용된다. 참가 조건부터 까다로운 이 대회에 참 여하여 인지도를 올리고 또한 자신감을 극대화 시키고자 현실적인 난관인 대회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경비마련은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내가 얼 마 전 에어프랑스 컵 골프 대회에 나가 우승하여 부상으로 받은 파리-다카 르 왕복항공권. 그것은 양도가 불가능한 티켓이었지만 항공사에 사정을 설 명하고 동의를 얻어 선수단 항공료에 보태는 우여곡절을 거쳐 극적으로 두 명의 선수를 데리고 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충분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경험 부족으로 올림픽 티켓확보에는 실패하였다. 참가 그 자체에 의미를 갖기로 하고 마음을 추스렸다. 경기를 마친 후 공항이 있는 수도 자그레브 의 도심 외곽의 값싼 호텔을 찾기 위해 차로 6시간 남짓 달려야만 했다. 더욱이 달랑 호텔방 하나만 잡을 수 있는 경비만 남은 것이다. 객지에서 선 수단을 이끌며 여비가 바닥나는 황당함은 후진국에서 일하는 비애로서 종 종 겪게 되는 일이다. 선수 두 명은 일단 방을 얻어 쉬게 하고 회장과 나는 1만원 남짓 남은 돈을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31

반으로 나누고 각자 헤어져서 밖에서 밤을 지새고 다음날 아침에 합류하기 로 했다. 단돈 5천원으로 갈 곳은 없었다. 근처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 밤 을 새기로 하고 대합실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크로아티아는 공산체제의 잔 재가 남아서 대합실에 경찰이 상주하면서 의자에 눕는 사람을 열심히 감시 하고 또 실제로 누운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달려와 제재를 가했다. 밤이 깊 어 갈수록 사람은 하나 둘 사라졌고 피로에 지쳤는데도 누울 수도 없었다. 춥고 허기도 졌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시계를 수십 번이나 보고 나서야 겨 우 날이 밝아오는 것 같았다. 객지에서 선수단과 함께 배가 고파지면 그들 과 훨씬 더 정이 드는 것 같았다. 그때 그들이 보내준 눈길들 즉, 자기들은 참을 수 있지만 내게 무척 미안함을 가지는 눈길이었는데 너무나 인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아! 아프리카 태권도 유니언 (AFTU) 1999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AFTU총회가열렸다. 다른 대륙에서 는 한국사범의 위상이 현저히 하락 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아 프리카만큼은 달랐다. 아프리카는 모든 국가의 선수나 임원들은 한국사범 만 보면 우리에게 배운 그대로 인사했다. 그러나 균열은1999년에 남아공 AFTU 총회 때 왔다. 당시 AFTU 회장 선거에는 정부파견사범 1호인 윤 목 케냐 사범께서 한국사범을 대표해서 출마했는데, 결과는 현지 회장들의 승 리였다. AFTU에서 역량을 구축하여 자국에서 영향력을 높일 속셈으로 타 국 회장들과 비밀담합을 주도한 사람이 다름 아닌 세네갈 회장(Moubarak 1999-2000)이었다. 한국 사범의 수십 년 헌신과 위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 다. 개인적으로도 치욕스러웠지만 그 동안 존경의 대상인 여러 아프리카 선배님들께 너무 죄송했다. 세네갈로 돌아와서는 그토록 정성을 쏟아서 세네갈에 태권도를 뿌리내리게 해준 한국과 나를 한꺼번에 배신한 그와 힘 든 겨루기가 이어졌다, 한번은 총리실의 고문인 직책을 이용해서 사범을 추방 시키겠다고 위협 한 적도 있었고, 반대로 다른 방법으로 회유책을 쓰려고 한적도 있다. 그러 나 불의와 야합해야 하는 것은 한국사범으로서 더 이상 아프리카에 존재해 야 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매몰차게 거절했다. 당시 나는 경찰학교 근무자 였고 제자들 또한 대통령 경호실 등 정부요직에 있었기에 힘으로도 밀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몇 달 못 가 세네갈 태권도계에서 축출되었다. 2년 후 사연 많은 AFTU 총회를 홈 그라운드인 세네갈에서 개최하게 되었 다. 총회의 관리는 내가 이례적으로 권한을 부여 받아 진두지휘 했다. 이미 32

자국에서 축출된 사람들이 AFTU직책은 유효하다며 자리를 차지하려 했 다.(첨부기사 참조) 1국2대표의 난무였다. 세네갈의 위엄을 보여줄 순간이 었다. 더운 공간을 대기실로 주고 주최국의 권위를 경시하는 행위가 사라 질 때까지 우리는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한 시간도 못 가서 모두 기가 죽어 얌전해졌다. 엄격한 대표성 검정 작업을(국가연맹추천장) 실시했다. 대표신분이 인정된 자에 한해서는 사전에 잘 훈련된 태권도요원 20여명을 도열 시켜 대통령보다 더 화려한 예를 갖추어 주었다. 검정을 통과하지 못 한 이들은 이후에 계속 남아 대표성을 주장하며 소란을 피우는 사람도 있 었지만 행사요원 들의 권위에 눌려 주목 받지 못했다. 엄격한 회의장 정리 로 예상보다 훨씬 조용히 회의가 진행되었고 결과도 좋았다. WTF 총재 의 중이 반영된 짐바브웨 씨톨레 IOC위원이 아프리카 연맹회장으로 정식 선 출되었다. 정정당당한 것은 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개인의 이 익을 위한 것이 아닌 태권도와 세네갈을 위해 싸워야 할 때를 현명하게 선 택했기에 두려움도 거칠 것도 없었다. 또 다른 일화 하나. 2004년 1월에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2004올림픽 아프 리카 지역예선이 개최되었다. 세네갈은 당시 아프리카 태권도 선수권대회 에서 우승을 하는 등 그간의 성과로 보아 매우 유력한 팀 이었다. 그러나 출 발직전에 항공사에서 갑작스럽게 출발이 지연 된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대 회신청은 이미 우편으로 마친 상태이지만, 변경된 항공편은 대회지인 이집 트에 대회 개막 후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경기는 이틀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다. 변경 소식을 접한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개인문제를 넘어 국가 차원의 문제라서 무례를 무릅쓰고 카이로에 먼저 도착해 있는 WTF 관계자들에게 사정을 알렸다.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둘 째 날에 경기가 많았다. 그러나 공식 경기 일정이 우리가 도착하는 순간에 바뀌어 있었다. 둘째 날 경기가 오히려 첫날로 앞당겨져 있었다. 그러는 법 이 어디에 있느냐? 항의했다. 그날 오후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하였다고 하 였다. 다른 경우라면 몰라도 올림픽이라 봐줄 수 없다고 했다. 올림픽의 경 우면 이미 오래 전 결정된 경기일정을 맘대로 바꾸는 건 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을 그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결국 세네갈 팀은 출전도 못하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구경만하다 돌 아왔다. 가난한 나라에서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고 경기에도 참가 하지 못 하고 돌아오는 것은 치명적 사고이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33

종주국 전지훈련 세네갈 선수단을 인솔하여 한국에 가서 전지 훈련할 기회를 한번도 가져 보지 못했다. 거리상 너무 멀어 1인 당 왕복 항공료만도 250만원이나 소요 된다. 선수단은 최소한 남녀 합쳐 10명 정도로 구성해야 한다. 세네갈 국가 경제력으로 봐서는 실현가능성이 없는 요원한 일이었다. 2005년 8월 우연하게 기회가 왔는데 강원도 양양에서 개최되는 세계태권 도 여름축제 조직위원회에서 정부파견사범(KOICA) 인솔 팀에 한해서 체제 경비를 부담하고 일부 전지훈련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여 어렵게 이곳 관계부처를 설득하여 한국 전지훈련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나는 그 전지훈련에 필요한 봉사를 위해서 선수들보다 하루 먼저 들 어와 선수들의 첫 한국방문을 준비 하였다. 다음날 공항으로 선수들 마중 을 갔다. 비행기는 도착했는데 세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난 비행 기가 잘못된 건가 하고 마냥 밖에서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출입국 관리실 에 억류되어 있었다. 주 세네갈 한국 대사관에서 국제협력 일환의 방문으 로 처리하여 수수료까지 면제해서 발급해준 비자며 대회 초청장이 있음에 도 억류한 것이었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일은 우리 선수들은 처음에 다 른 곳으로 데려가기에 아! 역시! 하면서 태권도 팀 이라 세네갈처럼 특별 배려 해주는구나뀉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부끄러운 제자 들의 조국 방문이었다. 출입국 관리소 담당 직원의 전화통화는 고압적 취 조형식 이었다. 분을 억누르고 조용히 답하다가 인내의 한계에 이르러서는 독한 욕설 한마디와 "당장 내보내!" 라고 소리쳤다. 5분 안에 우리 선수들이 나왔다. 차려! 사범님께 경례!. 주변의 사람들은 멋모르고 박수를 쳤다. 아! 선수들 마음이 어땠을까뀉눈물 나게 미안 했다. 당시 19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부 파견 사범들도 각자 활동국가의 대 표 선수들을 인솔 하고 참가하기로 하였다. 팀까지도 대동할 능력이 되는 국가도 있었고 여의치 않는 국가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정부파견 사범 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각자 활동국가에서의 고충과 애환, 정보교 류 등을 나눌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오픈 대회라 긴장감은 없었 지만 주최측은 다채로운 행사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공수부대 요원들을 동원한 시범은 태권도의 박력과 강인한 기상이 연출되어 세네갈 선수단들 의 눈빛은 마치 미국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처음 보는 북한주민처럼 입을 벌리고 넋 나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기 결과 역시도 세네갈 팀이 단연 주목을 받았다. 34

합숙훈련을 위해 강원도 어느 대학교의 기숙사를 숙소로 정하고 인도네 시아, 시리아, 세네갈을 축으로KOICA 연합 팀을 만들고 그 대학 선수단과 친선경기를 하였다. 실력적으로는 아마추어인 대학 팀과 국가 대표들간의 격차는 있을 수 밖에 없지만 한국의 지방 대학 선수들은 외국인을 상대로 하기에는 기가 조금 약해 보였다. 우리 선수들은 종주국의 태권도를 참으 로 동경해왔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이 보여준 경기예절이나 사제지간의 예절에 약간의 실망스러움을 경험하게 한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우리가 해외에서 그렇게 눈물 나는 노력으로 간절하게 세계를 향해 전파해 온 그 아름다운 태권도 예절 문화가 오히려 한국의 어느 지방에서는 아프 리카의 한나라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전지훈련을 목적으로 입국할 때 세네갈선수단은 비행기표 이외에 는 한 푼의 돈도 없이 왔다. 아끼고 아껴도 10명 팀원의 하루 생활비는 30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책임자인 내가 대부분을 해결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와 월급도 똑같아서 당연히 여유롭지 않을 인도네시아의 정파사범 선배 가 사비로 우리에게 일주일 분량의 식료품을 사주기도 했다. 그런 애정은 후진국에서 활동해본 태권도 사범이기에 가능한 배려였다. 또 경민대학의 최 모 교수는 여비가 없어서 불쌍한 신세가 되어버린 우리선수단의 잠자리 해결을 위해서 본인의 아파트도 제공해주었다. 차량까지 직접 운전을 해주 는 등의 세심한 배려는 우리를 너무나 눈물겹게 하였다. 우리 선수단이 한 국에서 느낀 가장 감동적인 고마움 이었으며, 그들에게 종주국에서의 그러 한 따뜻한 정은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것 이다. 보라! 태권도의 위상을 오지마을의 태권도 사랑 파견초기 기술적 차이의 교정은 전체 지도자들을 모아서 몇 달간의 강한 훈련으로 해결 됐지만, 태권도 보급의 전국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범단을 조직하고, 하는 일이 일정하지 않은 지방출신의 수련자들을 모아 교육하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고, 또 자주 지방에 내려가 서 지도하면서 늘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인식시켰고 많은 부분을 그들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35

과 함께 노력했다. 지방에 지도를 하기 위해 가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주로 1960년대 깔린 도로는 30여년 동안 한번도 제대로 보수공사를 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었 다. 오랜 시간 풍파에 시달려서인지 융단폭격을 맞은 듯 곳곳이 패어 있다. 때문에 자동차로 달리면 타이어 펑크뿐만 아니라 긴급 시 수리 할 곳이 마 땅치 않아 펑크 난 차를 끌고서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많 았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3년 동안 자동차를 4대나 바꾸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지난해부터는 그마저도 없이 지낸다. 지나고 나면 아득한 세월의 옛 추억거리로 여겨지겠지만 그간의 얽힌 무수 한 사연들 중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어 잠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콜다 지역은 세네갈 남부 지역으로 주변 3개국과 국경선이 맞닿아 있다. 수도 다카르로부터 700킬로 떨어진 곳인데 45도의 살인적 더위가 있는 곳 이며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세네갈 속에 있는 나라 감비아 국경을 통과하 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배에 실어서 건너기도 한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괴롭히고 밤에는 낮동안 그렇게 달궈진 지열이 괴롭힌다. 밤 두시면 절정 으로 덥다. 소위 말하는 원조 열대야다. 콱콱 막히는 숨은 사방팔방 어디에 도 의지를 해볼 곳 없는 고통 그 자체이다. 이러한 오지에도 태권도 보급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 기술적 굴절 방지 와 승급심사, 이 지역의 유력인사 들과의 협력 강화를 목적으로 갔는데 이 런 경우 도지사, 시장, 지역 경찰서장이 총 출동하는 행사가 된다. 고성능 유성기가 동원되는가 하면 아프리카인 특유의 전통 북으로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고 주요 인사들 격려사에만도 2시간이 소모될 정도다. 이런 연설에 사용되는 단어는 Korea, Taekwondo, KOICA 등이 주류인데 줄잡아 수백 번 동원된다. 수련생의 경우 가난해서 도복도 국적 불명으로 적당히 만들어 입는다. 그러나 정신적 자세는 주변의 열악한 수련 환경과는 관계없이 매 우 훌륭하다. 아프리카 시골 오지에 지도를 갈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헐 벗고 볼품없는 아이들이지만 초롱한 눈망울에 수련 태도는 놀랍도록 진지 하다. 2001년 8월에 MBC의 광복절 특집 프로그램 재외동포 600만의 꿈을 찾아 서'에서 세네갈의 태권도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제작자들은 여전히 화려한 기술의 대표팀 보다는 초라한 아이들의 눈망울과 우리말 동작 용어 인 아래막기, 손날막기, 일어서, 들어가'등의 수십 개 단어를 유창하게 발 음하는 어린이들의 진지한 수련태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세계에 부는 한국 36

바람의 원조는 바로 이런 모습의 태권도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 름한 오지 도장의 수련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한국과 태권도의 위대함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장관의 에스코트 행렬 180Km 세네갈의 정부 의전행렬은 삼엄하고 화려하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 대 통령 행렬을 연상케 할 정도다. 2005년 4월, 마드리드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국위를 선양한 태권도인들을 정부차원에서 격려하기 위 해 대통령정무장관. 체육부장관. 주택건설부장관등 3개 부처 장관이 수도 다카르로 부터 180Km 떨어진 소도시 카올락까지 정부 의전 에스코트 팀을 동반하고 작은 지방 대회임에도 기꺼이 참여해서 태권도성과를 치하 하기 도 했다. 그 밖에도 세네갈 정부에서 보여주는 태권도에 대한 애정은 남다른 데가 있다. 공항에도 태권도 손님에 한 해서는 비행기트랩 마중에다 귀빈실 사 용까지도 허락한다. 실례로 2001년에 아프리카 선수권대회의 세네갈 개최 에 감독차 오신 세계연맹의 감독관 일행이나 아프리카 원로 사범들의 경우 에도 변함없었다. 9.11테러 사태이후 어림도 없는 공항트랩마중도 태권도 관계자들 에게는 허용한다. 올해 4월에 우리 연맹의 초청으로 올림픽 지원 교육 차 방문한 최 모 강사의 경우 체육부며 올림픽위원회 인사가 총 출동 하여 환영을 했다. 그 직전 국빈 자격으로 방문한 적 있는 이해찬 총리에 버 금가는 예우였다. 토고와 베냉의 경우를 보자. 그곳에는 운전사 하나만 달랑 나와 가라테 사 범이냐 할 정도로 무지한 것이 아프리카 방식의 예우이지만 이곳 세네갈은 다르다. 나 또한 태권도 사범이란 이유로 과분한 대우를 받는다. 너무 감사 한 일이다. 세네갈태권도 연맹 회장 아싸네 은도예 (2004-현재)회장은 고위 경찰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검 중수 부장 그 이상이랄까, 기소 권한을 가진 세네갈 고위 경찰의 권한은 하 늘을 찌를 듯 위세가 당당하다. 이쯤 되면 못할 것도 안 되는 일도 없는 것 이 후진국 권력자의 위세이다. 예를 들어 예정에 없던 국제 대회의 참가를 위해 여기서는 엄청난 거금인 6,000만원의 지원금도 전화 한 통화로 가볍게 승인을 받아낼 정도이기에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37

해당 공무원들도 그의 위세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루는 KOICA(한국국제 협력단)를 통해 태권도 전용체육관 건립 지원을 우리 정부로부터 도움 받고자 회장에게 논의한 적이 있다. 회장은 그 즉시 세네갈 대통령께 말씀 드려 직접 노 무현 대통령과의 전화를 시도 하게 해 보겠다고 할 정도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측에서 절차상 바람직하지 않게 판단되어 만류했지만, 어쨌든 세 네갈 태권도 발전을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실력자 이다. 이처럼 힘을 가진 회장의 영향력 때문에 해를 거듭할수록 태권도에 대한 위상이 높아 가고 있다 원로 6인의 하모니 (Harmony) 세네갈에 처음 파견되어 느낀 것은 신체조건이 매우 좋고 승부욕도 강한 국민성이 있는데 태권도발전이 왜 이렇게 더디게 진행되어 왔을까라는 의 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끼리의 분열 때문이었다. 자기가 배제된 성과라면 아무리 훌륭해도 흔들어 흠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조화롭게 다루어 모범태권도 국가로 만들어 가는 것은 너무 나 중요한 나의 업무 영역이었다. 갈등이나 분열들을 해소 시켜 나보다는 우리'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그들에게도 공통된 한가 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것은 태권도를 신앙처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세네갈 태권도연맹의 임원 구성은 형식적인 대리인에 불과하고 연맹의 실 질적 영향력은 몇몇 원로들로부터 나온다. 실례로 나의 13년 세네갈 활동 기간 동안 6명의 연맹회장이 교체된 것 또한 이들의 의견과 영향력이었다. 닝5단은 대통령 경호실장 출신으로 세네갈 태권도 연맹회장까지 역임했 으며 헌병대의 태권도 보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파레5단은 (전대통 령 경호원) 대통령 경호실 교육을 담당하였다. 트라오레 5단은 나를 도와 경찰학교에서 태권도 교육활동을, 지바5단과 이브라히마 5단은 각각 외무 장관, 이스라엘 대사의 경호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전투경찰대원 및 자녀들 에게 태권도를 보급하고 세력을 확산시켜 왔다. 또한 아마두 4단은 (검찰 총장의 경호원) 대학 태권도 보급을 책임져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듯 모두가 기관별로 책임을 나누어서 원로라는 이름에 걸 맞는 보급을 담당해 왔다. 일반적으로 세네갈 사람들은 유려한 말솜씨에 비해 실천이 따라주지 않 아서 서로를 신뢰하는 경우가 드문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에는 어느 기관 이든(전투경찰대, 대학교 등) 마찬가지지만 태권도 보급을 위해 아무리 좋 38

은 취지와 성실한 태도로 설명을 해도 믿어주지 않아 공공기관의 클럽개설 은 쉽게 허용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주요 기관에 태권도 클럽 개설을 위 해서 우리는 항상 팀을 이루어 나' 보다는 우리'를 철저히 고집하고 공신 력을 높여서 한걸음씩 영역을 확장해온 결과, 오늘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 어 낼 수 있었다. 이렇듯 한 개인은 혼자서 결코 위대해질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 다. 국가적 차원의 태권도 발전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야만 위대 한 결과를 이루는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세네갈 태권도의 경의적 발전은 바로 이 원로 6인들의 하모니에서 비롯됐다. 모나코에서 모나코는 프랑스 남부지방의 지중해연안에 있는 공(왕자)국 (Principaut de Monaco)이다. 세계 태권도 불어권 국가연합의 회장국인 프랑스가 모나코국왕 알베르 공 의 협조를 얻어 대회를 했다. 세네갈, 프랑스, 베트남, 캐나다, 모로코, 니제 르 등 6개국이 초청되었다. 나로서는 가장 최근에 다녀온 국제 대회였다. 숙소인 호텔방에서 바라본 바다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수없이 정 박해있는 요트들은 지중해 바다색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모래 색에 만 익숙하고 헐벗은 사람들하고만 늘 지내온 나로서는 가히 문화적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대회에 참가한 한국 사람은 프랑스 임원인 김 종완 루앙대 교수, 캐나 다의 원로 사범, 모로코 팀의 후원자인 오 경호 충청대학 이사장, 그렇게 세 분과 나였다. 다른 대회와는 달리 경기는 단 하루였으므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세분의 성공담과 태권도에 얽힌 얘기들을 많이 전해들을 수 있었 다. 김 종완 사범은 한국인으로서 프랑스 대학의 교수가 됐는데 그 7년 과 정의 학문적 노력은 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충청대학의 오 경호 이 사장의 경우는 우리가 엘리트 태권도 위주의 발전에만 매달리는 동안 관심 밖의 소외된 세계의 태권도 가족들을 위해 한국의 태권도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등, 세계태권도인들의 한 가족화를 위해 헌신 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해외 태권도의 발전에 기여 한 분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만남이었다. 알베르 국왕 의 초청을 받은 조 정원 세계 태권도연맹총재도 대회를 참관했다. 경기는 2006년 5월7일이었고, WTF 총재가 참관한 첫 전자호구 착용대회의 단체전으로 세네갈은 6개국 중 3위를 차지하였다.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39

이미 전자호구의 단점을 실험해본 프랑스팀은 세네갈과의 경기에서 실력 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자 권투 식으로 엉겨 붙었을 때나 있을법한 옆구리 주먹질로 우승을 가져가기는 했으나 실력적으로는 정파 사범의 양심을 걸 고 판단을 해도 세네갈은 역시 참가국가 중에서는 최강 팀 이었다. 이 대회 를 통해서 불어권을 확실하게 평정 해보고 싶었는데 전자호구 실험의 친선 대회라서 아쉽게도 3위에 만족하고 물러섰다. 1년 이내 꼭 불어권 대회를 평정하여 세네갈에 심은 한국 정부의 협력 씨앗에 알찬 열매를 맺게 하고, 또 한국정부가 개발도상국에 펼치는 국제협력의 위대함을, 내가 맡은 분야 태권도를 통해 증명 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 할 것이다. 세네갈 태권도와 한국 정부 세네갈에서 13년 동안 정부파견사범으로서 7명의 대사님들을 태권도 분 야에서 보좌하였다. 항상 가까이서 진심을 다해 보좌한 결과 많은 분들이 태권도 지원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했다. 그분들 중에는 언제 다시 떠올려도 마음 깊이 감사를 전하고픈 분들도 있을 정도로 그 분들의 고마움은 항상 가슴 속 깊이 간직 되고 있다. 사실 2001년의 아프리카 세네갈 대회 개최는 불가능한 대회였다. 예산확보가 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 운 현실 속에서도 대회를 잘 진행시켜 결국 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름 아닌 종주국 대사의 숨은 노력 덕분이었다. 내가 그간 수많은 태권도 국제대회에 참가 해봤지만 태권도 종주국 대사 라고 해서 태권도 참가국들의 선수단장을 초대까지 하면서 대회에 그처럼 많은 관심을 보인 대사는 경험해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세네갈주재 한국 대사는 분명 달랐다. 참가국 단장 및 국제 심판원, 체육부장관등 100여명 을 초청하여 노고를 치하하면서 격려를 해주는 것은 물론, 그 다음 해에는 20년간 세네갈 태권도 발전에 이바지한 40명의 지도자들 부부를 대사관저 에 초청하여 그들의 노고에 일일이 감사를 표하는 세심함을 보이기도 하였 다. 이에 태권도 종주국의 대사로서 보여준 높은 사명감과 한국정부의 전 폭적인 지원에 대해 태권도인 모두는 물론 이곳 세네갈 언론도 깊은 감사 와 존경을 보내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거만하기로 유명한 세네갈 고위 공 무원들도 한국 대사들께만은 매우 겸손한 자세로 대한다. 세네갈연맹회장 의 경우도 정부 내에서 최고의 핵심권력을 가진 고위 인사이지만 얼마 전 의 대사배 태권도 대회준비과정에서 자신의 부인까지 참여해 리셉션을 준 비하게 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연맹회장은 직책상 한국인 기소 자나 연루자가 생기면 꼭 우리 대사께 알리고 원만하게 대처 할 수 있 는 정보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 세네갈에서 이루어진 태권도의 발 40

전은 종주국 대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커다란 관심을 보여주는 것과 세네 갈 연맹회장의 진심에서 우러난 태권도와 종주국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세네갈에서 태권도를 통해 얻게 된 정부 요인들과의 많은 관계들 은 우리 한국정부의 확실한 무형의 자산이 되고있다. 에필로그 이 글은 수기이다. 그것은 필자의 눈을 통해 어려움을 딛고 이루 어낸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담담하게 풀어가야 완벽해지는 것을 나는 너무 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이 수기의 최종 목적이었다면 나는 장시간 이 글을 쓰 기 위해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쓴 이 글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이 수기는 잔잔한 감동을 표현하는 대신 대상을 알 수 없는 누구에 게 인가 항변하는 글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아프리카이지만 훗날 한국의 번영을 위해 우리 태권도를 널리 알려서 미래를 걸 수 있는 대륙을 만들기 위해 묵묵히 이들과 함께 했던 한국인들 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자 내가 이 글을 쓴 의도이기 도 하다. 어느 단체처럼 아프리카의 저주 받은 땅에서 우리가 무엇 무엇을 일구었 다는 낯뜨거운 자찬은 애써 피했다. 물론 활동 과정에서 너무나 분하고 억 울한 일도 있었지만 그런 넋두리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한 이유 는 그것 또한 아프리카에 부정적 영향 미칠 수 있다는 나의 작은 염려와 오 로지 지도자의 위상을 갖기 위해서 나만 잘났다는 생각은 절대적으로 버려 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필요이상으로 나 를 부각시키는 일도 경계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날 아프리카 속에 전파된 태권도에는, 1972년부터 시작하여 34년 동 안 21개국에서 45명의 정부 파견 사범들의 청춘을 바친 나라사랑이 있었 다. 그들의 애틋한 노력의 대를 이어받은 나 또한, 세네갈이 가장 강렬한 모 습으로 세계 태권도계를 주름잡을 날까지 이 길을 갈 것이다. 내가 가는 이 길은 내가 아는 한, 너무도 선명하고 확실한 정도 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피우는 한국의 꽃, 태권도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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