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이지만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동몽골 지 역에서의 의료, 선교 활동 등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창희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 고자 한다. 1.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졸업과 교수, 진료활동 신창희의 본관은 평산, 원적은 경기도 경성부이며, 1877년 5월 21일 출생하였다. 1904년 5월 21일(만 27세)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1908년 6월 3일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하였다. 2) 그런데 백범일지 에서 김구는 1904년 최준례와의 결혼에 관해 언급하면서 신부(최준례)의 어머니와 가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준례의 모친 김부인은 경성에서 자랐는데 젊어서 과부가 되어 두 딸을 기르며 예수교를 믿 고 있었다. 제중원이 임시로 구릿재[ 銅 峴 ]에 세워졌을 때, 원내에 살면서 제중원에 고용되어 있을 당시 신창희( 申 昌 熙 )를 맏사위로 맞았다. 신창희는 제중원 의과생이 되어 의사로 일하다 가 생업을 위해 신천 사평동으로 이사하였는데, 준례는 여덟 살 때 모친과 같이 신창희를 따 라와 살고 있었다. 3) 위의 언급을 통해 신창희가 백범 김구의 손위 동서였다는 사실과 함께 1904년 제중원의 학교에 정식 입학하기 전부터, 즉 구리개 제중원 시절부터 제중원에서 의학을 수련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중간에 잠시 제중원에서 수학을 중지했다가 다시 입학했을 가능성 이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졸업한 이후 1년간 모교 간호원양성소에서 미터법 을 포함한 계량과 측정, 현미경을 이용한 세균학 을 강의한 후, 4) 졸업 동기였던 홍종은과 함께 1909년 학교를 떠나 의주부( 義 州 府 ) 남문 바깥에 구세병원( 救 世 病 院 )을 열었다. 대한 매일신보 의 광고란에 다음과 같은 구세병원의 개원 소식이 실려 있다. 본원을 작년 음( 陰 ) 11월 분( 分 )에 설립 고 평양의사 최용화씨로 동사 개업이옵더니 우원이 인사귀향( 因 事 歸 鄕 )되옵기 호상 분장( 分 掌 ) 고 해원( 該 院 )에셔 진료에 종사하던 의학박사 신 1) 박형우, 세브란스와 한국의료의 여명 (청년의사, 2006), 227-228쪽. 2) 세브란스연합의학교 학적부. 3)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191-192쪽. 4) shields, EL: Nurses Training School, Korea Mission Field 5-84, (1909).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 41 창희, 홍종은 양씨를 연빙( 聯 聘 ) 시무 오니 유병첨원( 有 病 僉 員 )은 내의조리( 來 議 調 理 ) 심으로 앙요( 仰 要 ). 의주부 남문 외 구세병원( 救 世 病 院 ) 주무원( 主 務 員 ) 김지하( 金 志 河 ) 고백 5) 2.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910년 구세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한 이부터 1910년대 후반 독립운동에 뛰어들기까지 그 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나 1917년 그가 신의주의 압록강 대안에 있는 만주 安 東 (현재 丹 東 )에서 평산병원 을 경영하고 있었다는 사실 6) 을 통해 이 시기 의주, 안동 등 접경 지역에서 의료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후 3 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그는 義 州 와 安 東, 그리고 上 海 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어떠한 계기와 인적 계통 속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후 그의 행보 등을 고려 할 때 김구 등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1운동을 전후하여 그는 신한청년당의 당원이자 상해 임시정부 요원으로서 활동하였 다. 당시 安 東 은 상해와 국내를 잇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는데, 신창희는 임시정부 교통국 요원으로서 독립군 자금을 모집하고, 7) 일제의 탄압을 피해 渡 航 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제 관헌에서는 그를 상해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獨 立 新 聞 의 통신 부원으로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자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8) 이러한 신창희의 활동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던 영국인 기업가 조지 엘 쇼(George L. Shaw) 9) 의 도움에 힘입은 바 컸는데, 쇼가 경영하던 무역회사 怡 隆 洋 行 의 社 屋 과 汽 船 등이 활동의 주요한 근거지이자 수단이 되었다. 10) 1921년 10월초 그의 가족들과 임시정부 요인 吳 仁 錫 11), 金 秉 祚 12) 등도 일 5) 대한매일신보 (1909. 11. 16). 6) Catalogue. Sevrance Union Medical College, 1917, p.30; Korea Mission Field 18, (1922. 7), p.53. 7) 獨 立 有 功 者 功 勳 錄 編 纂 委 員 會, 獨 立 有 功 者 功 勳 錄 第 5 卷, ( 國 家 報 勳 處, 1988), 361쪽. 8) 朝 鮮 治 安 狀 況 ( 國 外 ), 金 正 柱 編, 朝 鮮 統 治 史 料 7 卷 (1971), 273쪽. 9) 아일랜드 출신 Shaw의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우호적 활동에 대해서는 韓 哲 昊, 조지 엘 쇼 (George L. Shaw)의 한국독립운동 지원활동과 그 의의: 체포 석방과정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 사연구 18, (2006) 참조. 10) 신창희의 활동과 怡 隆 洋 行 의 연계에 대해서는 朝 鮮 治 安 狀 況 ( 國 外 ), 金 正 柱 編, 朝 鮮 統 治 史 料 7 卷 (1971), 272-273쪽 참조. 11) 1919년 4 月 上 海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內 務 部 參 事 로 임명되었다가 그 後 臨 政 國 務 院 秘 書 로 活 動 하고 滿 洲 丹 東 에 있는 大 韓 獨 立 靑 年 團 本 部 員 으로 있으면서 國 內 로부터 送 納 되는 獨 立 資 金 을 받 아 臨 政 에 傳 達 하면서 中 國 天 津 에서 韓 血 團, 大 韓 恢 復 忠 烈 士 團 을 組 織 하여 活 動 하였다. http://www.koreanhistory.or.kr/ 참조.
42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제의 검거를 피해 怡 隆 洋 行 의 汽 船 鷄 林 號 을 통해 上 海 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13) 상해에서 신창희는 1922년 초반 醫 師 로서 일제에 의해 상해 임시정부 軍 醫 로 파악되기 도 하였고, 14) 상해에 머물면서 대한적십자회 常 議 員 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5) 그런데 그 가 본격적으로 상해에서 활동하기 직전인 1921년 초반부터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각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반발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위임 통치청원을 비롯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노선 등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정에서 배태된 협애한 지지 기반을 지적하는 가운데 3 1운동 이후 이념적 조직적으로 다양하게 분화된 독립운동세력의 노선과 활동을 광범위하게 대표하고 통일적으로 결집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國 民 代 表 會 議 소집 요구로 이어졌다. 16) 1921년 중반 이후 기존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새로운 통일기관의 위상 과 설립 방법을 놓고 대립과 갈등이 전개되었다. 신창희 또한 1921년 중반부터 1923년까지 上 海 에 체류하면서 17) 國 民 代 表 會 議 소집과 관련된 움직임에 휩싸였다. 18) 국민대표회의와 관련된 그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한청년당에서의 태도를 통해 그의 행보를 추측할 수 있다. 1918년 11월 28일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이 정식 결성되자 그는 창당 직후 입당하였다. 19) 주지하듯이 신한청년당은 여운형, 김규식, 서병조 등의 주도 하에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계기로 조성된 국제정세를 활용하여 외교활동을 전 개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으며, 3 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결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단체였다. 그런데, 國 民 代 表 會 議 소집을 둘러싼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대립이 본격 12) 3.1운동에 있어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인으로 평북 일대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1919월 4월 13일 上 海 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의원 및 법제위원, 국제연맹청원서 기초위원, 임시 정부사료편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http://www.koreanhistory.or.kr/ 참조. 13) 高 警 28413 號, ( 國 外 情 報 ) 不 逞 鮮 人 및 家 族 上 海 着 發 의 件, 발송 1921년 10월 21일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長, 수신 1921년 10월 25일 外 務 次 官 內 閣 總 理 大 臣 等. 14) 公 第 68 護 上 海 假 政 府 軍 務 部 臨 時 編 輯 委 員 規 程 에 關 한 件, 발송 1922년 2월 16일 山 內 四 郞 (하얼 빈총영사), 수신 1922 年 2 月 23 日 內 田 康 哉 (외무대신) 15) 관기고수 제6857호의 1, 大 韓 赤 十 字 會 請 捐 書, 발송 1922년 5월 25일 關 東 廳 警 務 局, 수신 1922년 5월 30일 拓 植 局 長 官 등 수신; 獨 立 新 聞 (1922. 3. 1), 3면. 16) 國 民 代 表 會 議 의 구체적인 노선 대립에 대해서는 朴 永 錫,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와 國 民 代 表 會 議, 韓 國 史 論 10, (1981); 金 喜 坤, 中 國 關 內 韓 國 獨 立 運 動 團 體 硏 究 ( 知 識 産 業 社, 1995), 제2장; 조철행, 국민대표회(1921~1923) 연구-창조파 개조파의 민족해방운동론을 중심으로, 사총 44, (고대사 학회, 1995); 박윤재, 1920 年 代 初 民 族 統 一 戰 線 運 動 과 國 民 代 表 會 議, 學 林 17, (1996) 참조. 17) 1921년 9월 일제가 조사한 上 海 在 留 朝 鮮 人 人 名 簿 에 따르면 그는 上 海 本 區 에 거주하고 있었 다. 機 密 第 110 號 上 海 在 留 朝 鮮 人 現 在 人 名 簿 調 劑 에 關 한 件, 발송 1921 年 9 月 28 日 在 上 海 總 領 事 山 崎 馨 一, 수신 1921 年 10 月 5 日 外 務 大 臣 內 田 康 哉. 18) 高 警 제18616호, ( 國 外 情 報 ) 耶 蘇 勉 勵 會 總 會 提 出 事 項 其 他 에 관한 件, 발송 1921년 6월 11일 朝 鮮 總 督 府 警 務 總 長, 수신 1921년 6월 14일 次 官 ; 機 密 第 106 號, 國 民 代 表 會 議 議 事 에 관한 件, 발 신 1923년 2월 26일 山 內 四 郞 (하얼빈총영사), 수신 1923년 3월 9일 內 田 康 哉 (외무대신). 19) 金 喜 坤, 中 國 關 內 韓 國 獨 立 運 動 團 體 硏 究 ( 知 識 産 業 社, 1995), 80쪽.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 43 화되는 속에서 신창희는 신한청년당을 탈당하였다. 1922년 초반 당을 주도하던 여운형 김규 식 등이 소련의 독립운동 원조와 공산주의 그룹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자 그는 당 내부에 서 임시정부측 인사라 할 수 있는 金 九, 張 鵬, 李 裕 弼, 安 定 根 등과 함께 탈당했던 것이다. 20)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대표로서 국민대표회의에 출석했던 서병조가 國 民 代 表 會 議 본회의 진행과정에서 개조파의 입장을, 김규식은 창조파의 입장을 취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신창희는 김구 등 임정고수파와 유사한 노선을 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동몽골 지역에서 활동과 죽음 정확한 일시와 배경을 알 수 없으나 이후 그는 상해를 떠나 동몽골 지역으로 이주하였 고, 그곳에서 醫 師 로서, 지역 교회의 信 者 로서, 그리고 교회의 직원으로서 전도사업 등을 돕다가 1926년 2월 28일 폐렴으로 운명하였다. 21) 사망하기 전 동몽골 지역에서 그가 벌인 활동과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1926년 3월 31일자 기독신보 에 실린 다음과 같은 애도 기 사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22) 아- 申 君 은 갓다 1926년 2월 28일 하오 5시에 남다른 포부를 품고 수 천리이역에서 표랑의 생활을 계속 던 신군은 맛츰내 그 쓸々 몽고천지에서 영영 가버리고 말엇다. 그는 일즉이 경성 세브란스의학을 졸업 고 얼마동안 내지에서 醫 師 일을 보다가 국권의 상실과 민족의 실패를 통분히 녀겨 필경은 고국을 나 자자단신( 自 自 單 身 )으로 중국천지를 편답( 遍 踏 ) 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항상 동포를 랑 는 정신이 히지 않고 어 를 가 던지 자기의 운 기술로 유리( 流 離 ) 는 동포를 힘써 도와주며 제세( 濟 世 )의 술( 述 )을 광시( 廣 施 ) 여 만리이역에 고통 는 형제를 많이 구호하여 주었다. 그러다가 맛츰내는 동몽고 지방 으로 와서 역시 의술로 신불신자( 信 不 信 者 ) 間 에 다대 유익을 쳣스며 우리 동몽고 교회의 직원 중 1인이 되어 열심히 교회일을 도와 주엇다. 아-신군은 다년간 해외에서 한 생활 을 겪어 온 결과에 불행히 폐렴이라는 병마에 걸니어 인( 因 ) 야 회복치 못하고 앗갑게도 이 역에서 불귀( 不 歸 )의 객( 客 )이 되어 하 님 압으로 가고 말엇다. 동몽고 교회 형제들은 애상 ( 哀 傷 )함을 불승( 不 勝 ) 중 니면서 동정금( 同 情 金 ) 80여원을 모집 야 교회장( 敎 會 葬 )을 거행 고 유해를 몽고사막( 蒙 古 沙 漠 )에 매장 엿으니 참으로 일색( 日 色 )이 무광( 無 光 ) 듯 산천초목이 다 슬허 는 듯 비애하기 그지 업섯다. 아-그의 육체는 임의 지하의 흙과 합 였으니 다시 보올 길이 업거니와 그 영( 靈 )은 하날나라에서 영영 살아잇서 그 뒤를 밟는 오 인( 吾 人 )을 영접 여 줄々노 밋는다. 그가 운명( 殞 命 ) 든 당시에 성찬석( 聖 餐 席 )에서 기도 는 중에 主 로 갓다. 20) 獨 立 新 聞 (1922. 3. 31), 4면; 國 會 圖 書 館, 韓 國 民 族 運 動 史 料 ( 中 國 編 ) (1976), 290쪽. 21) 기독신보 (1926. 3. 31); 세브란스교우회보 7, (1926), 23쪽에는 2월 26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음. 22) 東 蒙 古 崔 聖 模, 故 申 昌 熙 君 을 吊, 기독신보 (1926. 3. 31).
44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글을 쓴 인물은 3 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에 서명한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최성모( 崔 聖 模 ) 23) 인데, 그는 3 1운동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후 출옥하여 1920년대 중반 만주 봉천의 십간방교회( 十 間 方 敎 會 ) 에서 교역했으며, 중외일 보 봉천지국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동몽골 지역에서 선교 계몽활동을 전개했던 인물이 다. 24) 그의 유해가 동몽골 사막에 매장되었다는 위의 언급을 통해 그가 마지막으로 활동한 동몽골 지역은 내몽골 자치구의 동쪽 가장자리, 즉 당시 奉 天 省 의 서북쪽 通 遼 縣 인근 지 역으로 추정된다. 23) 최성모(1873~1936)는 서울 출신으로 3 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 중의 한 사람이 었다. 서울 협성신학교( 協 成 神 學 校 )를 졸업하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어 해주 남본정( 南 本 町 )교회에 서 교역생활을 하였다. 1919년 2월 당시 서울의 기독교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 朴 熙 道 )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하여 듣고 서울에서 이필주( 李 弼 柱 )의 안내로 이승훈( 李 昇 薰 ) 오화영 ( 吳 華 英 ) 이갑성( 李 甲 成 ) 등을 만나 기독교측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월 1일 태화관( 泰 華 館 )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에 봉천성( 奉 天 省 )을 중심으로 계몽운동과 전도사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24) 동아일보 (1925. 10. 4); 중외일보 (1926.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