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연구 46(2013.9.30), pp.71-102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 華 文 雜 誌 韓 中 文 化 의 발간을 중심으로 - 1) 宋 佳 * 국문초록 월간 한중문화 는 한국 화문간행물 가운데 대표적인 잡지로, 1974년 창간 때부터 1985년 폐간 때까지 총 12년간 128호가 간행되었다. 이 잡 지는 한국화교 사이의 정보 전파ㆍ감정 전달의 유대로서 한국화교 사회 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글은 한중문화 창간, 발전, 재정비, 그리고 폐간의 과정을 줄거리 로 하여 각 시기에 잡지 운영자와 내용의 변화를 분석함으로써, 한중문 화 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 사례연구는 그동안 한국화교의 출판활동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상황에 일조할 것이다. 주제어:한국화교, 출판활동, 화문잡지, 한중문화 Ⅰ. 서론 한국화교는 130년 동안 한반도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의 인구수는 2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한국에서 유일한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국근현대사 전공
72 한국학연구 46 소수 민족으로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1) 한국학계에서 한국화교에 대한 연구는 1960~7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1980년대 발표된 박은경의 박사논문은 한국화교가 이미 하나의 연구대 상으로 정착되었음을 의미한다. 2) 따라서 현재까지 한국화교 연구는 양적 으로나 질적으로나 일정한 성과가 축적되었다. 3) 연구방법에서 보면 이들 연구는 대부분 화교 집단을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간주하고 그 특징을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연구는 연구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좋은 점이 있지만 연구가 심화되면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일부 학자들은 한국화교를 수동적인 연구 대상이 아닌 능동적인 행위주체로, 그 내부에 다양한 층차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4) 그들은 한국화교 집단 내의 지역적ㆍ종족적 ㆍ문화적 커뮤니티의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한국화교 연 구의 방법론을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화교 연구에 있어서 미시적인 화교 생활사 및 대표적인 화교 단체의 사례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연구주제에서 보면 한국화교연구는 크게 화교경제, 화교사회역사, 화 교 정체성, 화교에 대한 정책, 화교의 사회적 지위와 인권, 화교교육, 그 리고 화교 이민 경로 및 분포 상황 등의 연구들로 구분된다. 이 중 사회 사와 경제사의 연구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정체성 및 화 교에 대한 정책도 중요한 주제이다. 화교 교육은 화교의 정체성과 대만 정부의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학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 1) 양필승 이정희(2004),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한국화교 경제의 어제와 오늘, 삼성경 제연구소, 10쪽. 2) 박은경(1981), 화교의 정착과 이동 : 한국의 경우,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3)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3년 4월 현재 한국학계에서 한국화교에 관한 연구 성 과가 총 364종인데 그중 일반논문 254편, 석사학위논문 70편, 저서 24권, 박사학위논 문 14편, 보고서 2편이다. 4) 이창호(2007), 한국 화교( 華 僑 )의 사회적 공간과 장소 : 인천 차이나타운을 중심으 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 송승석(2010), 한국화교 연구의 현황과 미래 -동아시아 구역 내 한국화교 연구를 중심으로, 중국현대문학 55호, 한국중국현대 문학학회, 163~199면 ; 权 赫 秀 (2011), 20 世 纪 以 来 国 内 外 学 界 的 朝 鲜 半 岛 华 侨 史 研 究 综 述, 韩 国 研 究 论 丛 23 辑, 东 北 师 范 大 学 世 界 文 明 史 研 究 中 心, 210~232면 참조.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73 였다. 그러나 화교 교육을 제외하고 한국화교의 문화생활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다. 출판활동은 화교 문화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華 文 5)간행물은 화교단 체ㆍ화교학교와 함께 화교 사회를 결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 문에 해외 화교와 화인 6) 사회에서 3 大 支 柱 라고 불린다. 또한 화문 신문 ㆍ잡지는 한국화교가 스스로 만든 간행물로서 화교들의 생각을 직접 반 영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학계에서 한국 화문간행물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967년에 발표된 대만 학자 馮 愛 群 의 華 僑 報 業 史 이지만 실질적 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7) 이들 연구 가운 데 한국 화문간행물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韓 中 日 報 8) 이다. 이 신문은 한국 화문간행물 가운데 발행기간이 가장 긴 것으로, 한국화교의 5) 華 文 (즉 중국어 )이라는 단어는 1950년대 말부터 싱가포르에서 사용하기 시작하 였다. 많은 화교가 체류국의 국적을 취득함에 따라, 화문 이라는 단어는 동남아시아 및 다른 나라에 있는 화교 화인 사회에서 유행하였다. 본 논문에서 중국어 잡지 가 아닌 화문 잡지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국은 海 外 에서 중국어 신문ㆍ잡지를 발행했는데, 이러한 간행물의 내용과 형식이 화교ㆍ 화인이 발행한 신문ㆍ잡지에 비해 많이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신문ㆍ잡 지를 구분하기 위해 중국학계에서는 화교ㆍ화인이 발행한 신문ㆍ잡지를 화문 신문 ㆍ잡지 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한중문화 는 한국 유일한 화문 잡지이다 라고 자칭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화문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6) 화교는 중국영토 외의 국가에 정착하여 영주권을 얻었으며 중국국적을 보유하고 있 는 중국교민에 대한 총칭이다. 화인이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국가의 국적을 취득하 여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혈통을 가진 자들을 가리킨다. 화교 가 정치ㆍ법률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 화인 은 민족적ㆍ문화적ㆍ정서적 속성에서 출발한 다. 金 慶 國 崔 承 現 외(2)(2005), 중국 海 外 移 民 의 諸 名 稱 분석 연구, 中 國 人 文 科 學 31권, 중국인문학회, 674~679쪽 참조. 7) 한국 화문 신문ㆍ잡지에 관련한 논문은 아래와 같다. 车 根 锡 (1995), 韩 国 的 华 文 报 纸 韩 中 日 报 研 究, 新 闻 大 学 8 期, 复 旦 大 学, 48~50면 ; 吴 庆 堂 (1998), 韩 国 的 华 文 报 业, 新 闻 知 识 4 期, 陕 西 日 报 社 深 圳 商 报 社 외, 48면 ; 金 垠 定 (2002), 韩 国 华 侨 文 学 的 文 化 土 壤, 世 界 华 文 文 学 论 坛 6 期, 江 苏 省 社 会 科 学 院, 71~73면 ; 王 恩 美 (2004), 동아시아를 떠도는 한국화교의 정체성- 한중일보 를 통해 본 한국화교 의 국가정체성,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문학과지성사, 238~270면. 8) 한중일보 는 1953년에 창간되었고, 그 당시의 제호는 中 華 時 報 였다. 그 후 여러 이유로 제호가 韓 華 日 報 (1957년)ㆍ 韓 中 日 報 (1972년)로 바뀌었고 여러 차례 휴 간되다가 2000년대 초반에 폐간되었다. 그 당시 한국 화문 간행물이 대부분 2~3년 만에 폐간된 상황을 고려하면 한중일보 는 50년에 가까운 장기간 동안 발행되어 한 국화교사회에 비교적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74 한국학연구 46 상황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화교사회 내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 에 한국화교사회를 연구하는데 가장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한중일보 는 객관적인 보도에 집중하고 특히 대만과 세계에 관한 시사뉴스가 그 내용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중일 보 는 1964년부터 준 정부 성격의 간행물이 되었다. 아울러 주로 화교 지도층의 활동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으며 화교 중ㆍ장년층의 움직임만 을 대표하였다. 따라서 한중일보 만을 통해 화교사회의 인식을 총괄하 는 데는 한계가 있다. 화문 신문ㆍ잡지를 통해 한국화교사회를 연구하고 자 한다면, 마땅히 같은 시기에 간행된 여타의 한국 화문 신문ㆍ잡지도 검토해야 한다. 필자는 한국 화문 간행물에 대해 수집ㆍ정리하는 과정에서 韓 中 文 化 라는 잡지를 발견하였다. 한중문화 는 1974년 창간 때부터 1985년 폐간 때까지 총 12년간 128호가 간행되었으며 그 당시 한중일보 외의 유일 한 화문 잡지였다. 신문에는 주로 객관적인 사건이 실리는 것에 반해, 잡 지에는 집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반영될 수 있다. 한중문화 에는 한국화교의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한국화교사회 연구를 위한 자료로 한중일보 와 서로 보완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중문화 가 높은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지금까지 이 잡지에 대한 연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우선 한중문화 의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이 잡지가 한국화교사회 가운 데 어떤 계층을 대표했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이 잡지의 성격을 파악하고 자 한다. 또한 한중문화 를 통해 1970~80년대의 한국화교를 연구하는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한중문화 발간 경위에 대한 연구는 잡지를 운영한 한국화교들의 12년간의 출판활동의 과정을 반영 하기 때문에 이 연구 자체가 한국화교 문화생활 연구의 일부분에 속한다 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한국화교 출판활동을 고찰하여 한국화교 를 보다 세밀하게 이해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75 Ⅱ. 한중문화 의 창간과 발전 (1974.6~1982.7) 1) 창간배경 및 운영진의 상황 한중문화 는 1974년 5월 14일에 한국 문화공보부에 등록 신청을 하 였다. 한국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1974년 6월 25일에 창간호를 발행하였 고 본사는 서울에 위치하였다. 이 잡지는 매월 발행하고자 하였으나 여 러 가지 이유로 격월간으로 발행하거나 휴간한 경우도 있었다. 폐간된 시기인 1985년 12월까지 한중문화 는 총 128호를 발행하였다. 잡지에 실린 創 刊 詞 9) 에 의하면, 한중문화 가 창간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목적은 바로 반공선전에 있었다. 즉 한 국ㆍ대만의 민간관계를 증진시킴으로써 반공, 조국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화교사회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중문화 가 창간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한국의 정 치 배경과 관련된다. 한국 화문간행물은 광복 이후부터 나타났지만, 발전 이 비교적 느려 1950년대 말까지 발행된 화문간행물은 한 종류뿐이었다. 1960년에 들어서 허정 과도정부는 新 聞 等 몇 政 黨 等 의 登 錄 法 施 行 令 을 반포하여 정기간행물 허가제를 등록제로 바꾸어 언론의 자유를 확 대하였다. 이때 한국 화문간행물 5~6 종류가 연이어 발간되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집권한 후 외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여러 가지 제한 정 9) 한ㆍ중 양국은 원래 풍속ㆍ습관 등의 측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그리고 분열된 정 치 상황에 처하고 있어서 반공, 조국 통일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 만 양국 민중이 서로 이해하는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문 화 교류를 강화하여 한ㆍ중의 우정을 증진시키는 것은 양국이 당면한 급선무이다. 이밖에 우리는 교민 사회의 단결과 진보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 韓 中 在 風 俗 習 慣 膚 色 體 型 等 方 面 有 很 多 共 同 點, 並 且 目 前 同 處 於 分 裂 的 政 治 環 境 下, 有 著 共 同 的 奮 鬥 目 標, 即 反 共 完 成 統 一 但 不 可 否 認 的 是, 兩 國 人 民 互 相 了 解 的 程 度 並 不 高 因 此, 加 強 韓 中 文 化 的 交 流, 增 進 韓 中 友 誼 就 成 爲 當 務 之 急 除 此 之 外, 我 們 更 關 心 僑 社 中 的 團 結 與 進 步 創 刊 詞, 한중문화 1974년 6월호, 4쪽.
76 한국학연구 46 책을 제정하였다. 정기간행물에 관한 그전의 법령도 1963년 12월 신문 ㆍ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로 개정하여 외국인은 발행인이 될 수 없 게 되었고, 신문ㆍ잡지 등은 모두 형식적으로나마 한국인 발행인을 내세 워야 하였다. 10) 이로 인해 한중문화 가 창간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 은 한국 화문간행물이 새로 창간되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 중미관계개선과 중일관계 정상화에 따라 세계정세 의 데탕트가 시작되었다. 박정희도 1971년 광복 26주년 경축사에서 非 敵 對 國 과 협력할 것 등을 발표하여 탄력적인 외교정책을 채택하였고 소련 및 중국공산당과 접촉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정부는 대만과의 관계가 멀어져서 일부 대만 고위 관료의 우려를 야기하기도 하 였다. 11) 그러나 당시 한국정부는 정책을 조정했을 뿐, 그간 유지해 왔던 반공국시 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정부는 다른 한편으로 반공 우방인 대만과 냉각된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민간외교를 통해 한국과 대만 간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모색하고자 한 한중문화 의 창간 목적은 한국정부의 의도와도 일치하였다. 이로써 한중문화 는 창간을 위한 적절한 외부 환경을 얻었다. 한중문화 의 발행기관은 1970년대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민간 단체인 韓 中 文 化 親 善 協 會 였다. 韓 中 文 化 親 善 協 會 는 1965년 12월에 설 립된 조직으로, 崔 用 德 (한국 공군중장, 駐 臺 灣 大 使 를 역임함)에 의해 명 명되었으며 창립 목적은 문화 친선을 통해 한ㆍ중 양국 간의 우호 관계 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12) 초대 회장은 최용덕, 부회장은 權 基 玉 이었으 며 1971년에 崔 德 新 이 회장의 직무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한중문화 의 발행인은 최덕신이 맡았다. 최덕신은 1930년대 중국 황포군관학교 제10 기 德 文 班 (독일어반)을 졸업했으며, 鄭 為 元 13)을 따라 중일전쟁에 참전하 10) 신문ㆍ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5조, 관보 제3612호, 1963년 12월 12일 참조. 11) 邵 毓 麟 (1980), 使 韩 回 忆 录, 台 湾 传 记 文 学 出 版 社, 387쪽. 12) 韓 中 文 化 親 善 協 會 動 態, 韓 中 文 化 親 善 協 會 舉 行 酒 會, 한중문화 1974년 6월호, 24쪽, 1975년 10월호, 35~36쪽 ; 경향신문 1965년 12월 25일자 참조. 13) 정위원 (1913 1993)은 1930년 5월에 南 京 中 央 軍 校 제8기 三 軍 聯 合 參 謀 大 學 제1 기로 졸업하였다. 國 民 政 府 제91사단 사단장, 육군총부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1949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77 였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휴전협정조 인에 관여하였다. 1961년에는 한국 외교부 장관을 맡았고, 같은 해 대만 을 정식으로 방문하였다. 1967년에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천도교 教 領 으 로 활동하였다. 그 뒤 유신체제에 반대하다가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하였 다. 14) 최덕신이 미국에 장기 체류했기 때문에 한중문화친선협회는 1977년 초에 朴 英 俊 을 회장으로 새로 추대하였고, 이전의 조직도 韓 中 文 化 協 會 로 통합되었다. 한중문화협회의 기원은 1942년 10월 중국 重 慶 에 창립된 中 韓 文 化 協 會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한문화협회의 창립 목적은 한국 역사ㆍ문화를 소개하고 나아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데 있었다. 이 협회의 핵심 인물은 중국 측의 孫 科 ㆍ 吳 鐵 城,한국 측의 趙 素 昂 ㆍ 朴 贊 翊 등이었다. 會 紙 는 中 韓 文 化 였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는 중한문화 협회에 상응하여 1946년 11월에 한중문화협회가 성립되었고, 李 始 榮 이 이사장을 맡았다. 또한 1949년 3월부터 한글로 작성된 韓 中 文 化 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1950년대 들어 한중문화협회는 한동안 정체 상태에 놓여 있었다가 1965년 7월 趙 時 元 의 주도 아래 재건총회를 열었다. 15) 조 시원은 중한문화협회의 핵심 인물인 조소앙의 동생이다. 박영준도 한중문화협회와 깊은 연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가 바로 박찬익이다. 박영준 본인은 1935년에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 하고, 1943년 광복군 제3지대 1구대장을 맡았다. 중국 國 共 內 戰 시기인 1946년에는 韓 國 駐 華 代 表 團 東 北 辦 事 處 에서 외무를 담당하였다. 1947 년에 심양에서 한국 우익청년으로 구성된 한독당 군대인 長 延 區 民 主 自 衛 軍 이 창설되자, 박영준은 이 부대의 副 總 隊 長 을 맡았다. 심양이 중국 공산당 군대에 의해 포위된 후, 그는 1948년 2월경 귀국하였다. 그 뒤 한 년에 대만으로 간 후 台 灣 陸 軍 總 編 訓 署 署 長, 國 防 部 作 戰 廳 廳 長, 國 防 部 部 長 을 맡았다. 14) 최덕신은 1986년에 월북했고 1989년에 사망하였다. 袁 守 強, 訪 天 道 教 教 領 崔 德 新 將 軍, 한중문화 1975년 1월호, 15쪽 ; 매일신문 2012년 9월 17일자 참조. 15) 石 源 华 (2007), 中 韩 文 化 协 会 研 究, 世 界 知 识 出 版 社 ; 동아일보 1946년 11월 27 일자, 1965년 7월 20일자 참조.
78 한국학연구 46 국 육군 요직을 역임했으며 1963년 12월에 소장으로 제대하였다. 16) 한중문화친선협회나 한중문화협회가 한중문화 의 발행기관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단체의 핵심인물은 독립운동시기에 중국에서 활동했고 중국 국민정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회장 을 맡은 최덕신과 박영준은 심지어 전쟁에서 중국공산당 군대와 부딪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두 단체는 모두 반공의 색깔이 짙었으며 문화교류 를 통한 민간외교에 종사하여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힘썼 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들을 단결시키는 것 또한 활동의 일환이 었다. 1972년부터 한중문화친선협회가 한중일보사와 협력하여 신문사 업 무를 발전시킨 것은 하나의 예였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4 년 이후 한국화교가 한국에서 발행권을 가지지 못한 것도 두 단체가 한 중문화 의 발행기관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한중문화 는 발 행인 외에 편집인과 인쇄인도 한국인이 맡았다. 이상의 상황만 보면, 표면적으로 한중문화 는 한국인이 창간한 것으 로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 이 잡지의 발기인은 한국화교였으며 그 중 가 장 적극적인 활동가는 王 世 有 였다. 왕세유는 중국 대륙에서 항일전쟁에 참가했으며 국공내전 시기에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국민당이 패배한 후, 그는 군대를 따라 대만으로 갔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왔으 며 한국육군당국의 협조 아래 한국화교로 구성된 전략정보대(HIDSC)를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이 휴전 상태로 빠지면서 이 부대는 해산되었다. 그 후 왕세유는 한국 육군의 對 공산당 심리작전시스템에 참가하여 심리 전의 방송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맡아 8년 동안 공산당 군대를 상대로 심리전을 벌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재한 화교의 반공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한중일보사의 주필을 담당하였다. 1970년 10월 왕세유는 반공 작업 16) 1984년 4월에 박영준이 한중문화협회 회장에서 물러나자 그 지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趙 一 文 이었다. 조일문은 1944년 중국 남경중앙대를 졸업하고 광복군 참모를 맡았다. 해방 후 건국대학교 총장,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厲 大 年, 朴 英 俊 會 長 其 人, 한중문화 1977년 4월호, 12쪽 ; 염인호(2010), 또 하나의 한국전쟁 - 만주 조선인의 조국 과 전쟁, 역사비평사 ; 趙 一 文 博 士 接 掌 韓 中 文 化 協 會, 한 중문화 1984년 4월호, 16~17쪽 참조.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79 덕분에 한국정부로부터 보국훈장을 수여받았고, 국방부로부터는 한국전 쟁 참전 기념장을 수여받았다. 동시에 그는 재한화교참전동지회 회장으 로 선출되었다. 17) 왕세유는 1962년에 한화일보사(이후의 한중일보사)를 운영하면서 신 문의 주필로 사설을 맡았는데, 성격이 강직하여 항상 화교사회의 병폐를 비판했고, 이 때문에 일부 화교 지도자에게 비판을 받았다. 18) 이로 인해 그는 신문사의 직무를 사직하고 扶 餘 에 있는 화교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70년대에 들어 왕세유는 한국화교 자신의 잡지 창간과 한국 및 동남아시아의 화교를 포괄하는 독자층의 확대 계획을 세웠다. 왕세 유는 화교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한편 자신의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서울, 대전 등지를 뛰어다니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의 계획은 대 전의 화교지도자 朱 維 珊 19) 및 壽 光 同 鄉 會 20) 이사 唐 仙 林 등의 지지를 얻었다. 한중문화 창간 후에는 주유산이 總 經 理 를, 왕세유가 主 幹 을 맡았다. 창간 초기 잡지사의 운영 경비는 주로 주유산과 당선림 등이 마련하였고, 왕세유는 잡지사의 구체적인 업무, 예컨대 행정, 재무 등을 책임졌다. 그 밖에 기사의 취사선택과 잡지의 편집을 책임지는 편집주임은 잡지의 성 격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지만 창간 초기에는 이 직무에 적임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한중문화 잡지의 편집 주임이 몇 차례 교체되 었고 杜 書 溥 가 편집 주임을 이어받은 후에야 비로소 안정되었다. 두서부는 대만사범대학교 신문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때 인천 화 17) 杜 書 溥, 我 所 認 識 的 王 世 有 兄, 한중문화 1977년 3월호, 12~13쪽 참조. 18) 杜 書 溥, 我 所 認 識 的 王 世 有 兄, 한중문화 1977년 3월호, 13쪽. 19) 주유산은 中 國 山 東 省 福 山 縣 에서 출생했으며 충남 대전에서 거주하고 대전 화교 초등학교 이사장이었다. 會 賓 庄 이라는 식당을 경영하였다가 1974년에는 한국인과 협 력하여 韓 國 商 業 開 發 信 用 金 庫 를 운영하였다. 劉 明, 大 田 僑 領 朱 維 珊, 한중문화 1974년 12월호, 20쪽 참조. 20) 山 東 壽 光 同 鄉 聯 誼 會 는 山 東 省 壽 光 縣 의 화교들이 1972년에 창립한 화교 동향 조 직이었다.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영등포에서 채소 재배업에 종사하였다. 그 후 경작 지역의 도시화 때문에 중화요리업으로 직업을 바꾸었다. 李 正 熙 (2010), 关 于 韩 国 华 侨 社 会 组 织 的 研 究 - 以 同 乡 组 织 和 华 侨 协 会 为 中 心, 南 洋 资 料 译 丛 3 期, 厦 门 大 学 南 洋 研 究 院, 66~67쪽.
80 한국학연구 46 교자치회(화교협회의 전신)에 재직하였으며 중국공산당 전쟁 포로를 대 만으로 송환하는 작업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한국화교단체인 旅 韓 華 僑 反 共 救 國 聯 合 會 의 總 幹 事 를 맡은 적이 있었다. 21) 그는 한때 왕세유와 함께 한화일보사에서 일하다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한화일보사를 떠나 韓 國 華 僑 新 報 社 에 입사하였다. 두서부는 1976년에 주유산의 韓 中 開 發 信 用 組 合 사무실에서 우연히 왕세유를 만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왕세유 와 손을 잡겠다는 뜻을 밝혔다. 22) 두서부는 다년간 신문사업에 종사하였고 한국화교신보 의 주필을 맡 은 적이 있어 풍부한 언론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77년에 한중문화 잡지사에 정식으로 입사하여 1983년 6월 그만둘 때까지 총 6년 간 재임했으며 가장 긴 기간 동안 편집 주임을 맡았다. 23) 동시에 두서부 는 한중문화 에 글을 많이 쓴 집필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편집 주임을 이임한 후에도 여전히 한중문화 에 기고하였다. 1976년부터 1985년까 지 본명 혹은 필명 24) 으로 그가 발표한 글은 총 103편이나 되었다. 통계 를 내보면, 한중문화 의 집필자가 발표한 글의 수량은 대부분 1~2편씩 이며, 5편 이상을 발표한 자는 24명뿐이었다. 그중에 두서부가 1위를 차 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두서부는 한중문화 잡지사에서 또 한 명의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왕세유와 두서부의 경험을 보면, 그들이 언론사업의 경 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두 사람이 한중문화 잡지사의 핵심인물 이 될 수 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 모두 한국전쟁에 관여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왕세유는 전쟁터에서 한국인과 함께 싸우며 두터운 우정을 맺었다. 이로써 그들은 한국인의 신뢰를 얻어 한중문화 잡지사에 서 요직을 맡을 수 있었다. 1974년 9월에는 화교로 구성된 한중문화 사무위원회가 조직되었고 漢 21) 追 念 李 栽 之 先 生, 한중문화 1977년 4월호, 13쪽 참조. 22) 杜 書 溥, 我 所 認 識 的 王 世 有 兄, 한중문화 1977년 3월호, 13쪽. 23) 1981년 10월에는 편집국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4) 杜 徵 波 혹은 徵 波 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81 城 華 僑 協 會 會 長 진유광이 주임위원을 맡았다. 뒤이어 편집부 (후에 편 집국으로 바뀜), 취재부, 촬영부, 총무부 (후에 총무국으로 바뀜) 등의 부 서도 설치되어서 한중문화 잡지사의 운영은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섰다. 2) 고정된 지면의 형성 한중문화 는 4 6배판의 크기에 중국 특색인 빨간색 표지로 발간되었 다. 표지의 1~2쪽에는 당시 정치 인물의 사진, 만화, 혹은 한국화교의 행사 사진 등이 게재되었다. 창간 초에는 매호 30~40쪽 분량으로 간행 되었는데 그 당시 보통 100쪽을 넘는 한국 잡지의 발행 현황에 비추어 보면 소규모에 속하였다. 25) 필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중문화 총 128호에 게재된 2,907편의 글 가 운데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는 한국화교사회와 관련된 것으로 모두 668편이었다. 다음으로 많은 분야가 정치논평ㆍ시사보도로 604편이며, 문예ㆍ생활정보ㆍ과학기술 관련이 579편이다. 그밖에 잡지의 사설ㆍ 短 評 이 349편, 한국ㆍ대만의 환경과 풍속 관련이 255편, 경제 관련이 193 편, 한ㆍ중 인물 소개 관련 120편, 역사 회고 관련이 72편, 한중문화 발행기관 및 잡지사 활동 관련이 67편의 순이다. 한중문화 는 창간 초기부터 고정된 지면이 이미 형성되었다. 일반적 으로 잡지의 맨 앞부분은 잡지의 관점이 집중적으로 반영된 사설ㆍ단평 으로, 매호 2~3편이 게재되었다. 이 부분은 주필이 작성하였으며 주로 시국과 화교사회 문제에 대한 잡지사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어서 나온 글은 정치평론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잡지의 창간 목적인 반공선전을 달성하기 위한 고정된 선전 모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우선 시사 논평 26) 을 통해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코민테른의 음모 아래 25) 한국 잡지사 연구 에 의하면, 1970~80년대 한국에서 발행된 잡지는 보통 100쪽 이 상이며, 많은 것은 500쪽 이상이 되는 것도 적지 않았다. 김근수(1992), 한국 잡지사 연구, 한국학연구소, 283쪽. 26) 예컨대 1974년 7월부터 1975년 3월 사이에 兔 死 狗 烹 鳥 盡 弓 藏 이라는 특별기고 가 실렸다. 이 특별기고는 주로 해방 후 중국공산당의 핵심 인물인 劉 少 奇, 賀 龍, 黃
82 한국학연구 46 에서 성장한 것인지, 중국공산당이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어떻게 批 孔 운동을 명목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했는지, 당대 중국 대륙 민중이 폭정과 공산당 내부의 투쟁을 얼마나 혐오했는지 등을 설명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부당성을 표명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ㆍ경제 보도 27) 를 통 해 당대 대만의 진보ㆍ번영을 보여주고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의 발전 상 황을 선전하면서 통일을 위한 대만이나 한국의 노력 등을 서술하였다. 그 리고 한국ㆍ대만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한국ㆍ대만의 풍토ㆍ인 정을 소개하고, 28) 한ㆍ중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회고하기도 하였다 29). 한국과 북한, 대만과 중국 대륙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문화적인 측면에 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한중문화 의 창립자에게는 공산주의 사 상과 동방 전통문화 (혹은 유학) 사이의 충돌로 비취졌다. 이 때문에 한중 문화 잡지사는 전통문화를 선양하기 위한 특집 30) 을 두 차례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통문화 특집 외에 쌍십절 경축 31), 박정희 서거 추모, 손 克 誠 등이 박해를 받은 상황을 소개한 것이었다. 그밖에 1977년 10월부터 12월 사이 의 匪 情 分 析, 1980년 2월부터 1982년 12월 사이의 大 陸 傳 真 등의 특별기고도 있었다. 27) 한국에 관련된 내용은 友 邦 政 治 常 識 解 (1974년 8월호), 友 邦 宗 教 常 識 (1974년 11~12월호), 韓 國 經 濟 (1975년 1월~1985년 12월호), 韓 國 政 經 (1978년 5월~ 1979년 9~10월호) 등이었다. 그리고 1977년 10월~1978년 7월 사이에 韓 國 簡 介 라는 특별기고를 만들어 대만ㆍ홍콩 등의 독자들에게 한국을 소개하였다. 대만과 관 련된 내용은 韓 國 友 人 看 中 華 民 國 (1974년 8월~1975년 2월호), 台 北 拾 穗 (1980 年 6 月 ~1983 年 3 月 ) 등이었다. 또한 1984년 3월부터 10월호 사이에 中 華 民 國 - 繁 榮 的 實 況 이라는 주제로 당대 대만 현황에 관한 조선일보 의 글을 번역ㆍ전재하였다. 28) 예컨대 1975년 2월부터 1976년 2월호 사이에는 韓 中 友 好 之 頁 이라는 특별기고를 만들었으며 1980년 5월부터 1980년 11월 사이에는 한중문화 대만지사의 책임자인 陳 萬 裏 가 쓴 台 北 - 漢 城 之 間 이라는 특별기고를 실었다. 29) 예컨대 金 信 對 故 總 統 永 久 的 懷 念 ( 한중문화 1975년 5월호, 13쪽), 張 偉 光 의 渡 雙 十, 憶 往 事 ( 한중문화 1978년 10월호, 40~41쪽) 등이다. 그리고 1984년 8월부 터 1985년 2월까지 韓 國 光 復 之 回 憶 이, 1985년 4월부터 1985년 12월까지 白 凡 逸 志 가 연재되었다. 30) 1976년 한중문화 잡지사와 일본 亞 細 亞 公 論 잡지사는 한국 동북아문제연구소 소장 인 허우성, 台 北 三 民 主 義 研 究 所 소장인 任 卓 宣, 亞 細 亞 公 論 총편집인 秋 聖 七 을 초청하여 동ㆍ서 문화의 융합인 제3체제의 창조 라는 토론회를 열었다. 한중문화 잡 지사는 이 토론회에 관한 1976년 7~8월호 특집을 간행하였다. 또한 1978년 4월에는 한ㆍ중 전통사상 학술회에 관한 특집을 간행하였다. 31) 쌍십절은 중화민국의 건국 기념일이었다.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83 문 탄생 기념, 1년 간 북한의 동향 등 특집도 발행하였다. 전반적으로 한 중문화 의 정치관점은 대만ㆍ한국 정부측의 입장과 일치하였다. 또한 한중문화 에는 한국화교사회를 단결시키기 위한 내용이 게재되 었다. 이것은 1970년대에 쇠퇴한 한국화교사회의 상황과 관련된다. 1948 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본국의 경제를 키우고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제재를 실시하였다. 박정희 시 대에 들어서는 외국인에 대한 한국정부의 억압과 탄압은 극에 달하였 다. 32) 기존 연구에 따르면, 5ㆍ16 이후 화폐 개혁, 토지법으로 화교사회 의 경제적 제한이 심해지자 적지 않은 화교들은 대만, 미국, 일본 등지로 다시 이주하였다. 한국에 남은 사람들은 침묵 이라는 방식을 통해 계속 생활하고 있었다. 33) 그러나 사실상 그 당시 한국 화교사회에서는 외부환 경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내부적으로 화교사회를 통합하여 결속력을 향상 시킴으로써 변해진 외부 생활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것이 바로 한중문화 가 창간된 또 하나의 배경이었다. 한중문화 는 화교사회의 정보 유통을 확보하고자 매호 僑 社 動 態 등의 특별기고를 통해 화교단체, 화교 학교, 대만의 관련 부서의 동정을 보도하였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같은 시기의 한중일보 에서도 자주 나 왔다. 그러나 한중일보 가 대만 영사관 관원과 화교지도층의 움직임에 집중한 것과는 달리, 한중문화 는 일반 화교의 주관적인 견해와 감정을 드러낼 수 있도록 다양한 특별기고도 만들었다. 이러한 특별기고는 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論 壇 으로 僑 社 論 壇 ㆍ 讀 者 心 聲 ㆍ 有 什 麽 說 什 麽 ㆍ 港 都 僑 社 花 絮 등 총 89 편의 글이 실렸다. 다른 하나는 投 書 로 讀 者 投 書 ㆍ 來 函 照 登 ㆍ 來 후, 중국 대륙에서는 국경일을 10월 1일로 바꾸었지만 대만에서는 쌍십절을 계속하여 이용하였다. 한중문화 쌍십절 경축 특집은 9권이나 달하였다. 32) 李 容 宰 (2012), 韓 國 의 對 華 僑 政 策 과 배제의 역학, 중국어문학논집 72집, 중국어 문학연구회, 399~430면 참조. 33) 박은경(1986), 한국화교의 종족성, 재단법인 한국연구원 ; 崔 承 现 (2003), 韩 国 华 侨 史 研 究, 香 港 社 会 科 学 出 版 社 有 限 公 司 ; 양필승 이정희(2004), 차이나타운 없 는 나라-한국화교 경제의 어제와 오늘, 삼성경제연구소 참조.
84 한국학연구 46 鴻 등 총 96편의 편지가 게재되었다. 이들 특별기고 가운데 가장 오랫 동안 게재되었던 것은 독자투서 였다. 독자투서 란은 1974년 9월부터 1984년까지 약 10년 가까이 간행되었던 것으로 주로 한중문화 잡지사에 보내진 편지였다. 두서부의 회고에 의하면, 한중문화 잡지사는 매월 약 10~20건의 투서를 받았다. 그 내용은 대부분 화교단체의 불공정 선거, 화교 지도자의 비리, 화교학교 교사의 난잡한 생활, 화교단체의 지나치게 높은 수수료, 영사관 관원 문제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34) 잡지의 편집자 는 대표적인 투서 1~2편, 많으면 4편을 선택하여 잡지에 실었다. 한중문화 가 상술한 특별기고를 게재한 목적은 한국 화교사회 내부 의 갈등을 조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대만 영사관에서는 한국정부 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반 교민의 어려움을 외면한 경우가 있어서 일부 한국화교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35) 게다가 몇몇 영사관 관원과 화교 지도자가 부정행위를 저질러서 일반 화교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한중 문화 는 독자투서 와 같은 내용을 통해 일반 한국화교의 목소리를 영사 관에 전달하여 관ㆍ민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고 자 한 것이었다. 한중문화 는 한국 화교사회의 내부소통을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한 국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화교의 요청으로 僑 園 紅 白 喜 慶 이라는 제목의 특별기고도 만들었다. 이 특별기고는 화교사회의 喪 婚 ㆍ 인사변동 등의 소식을 재차 해외로 이주한 화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중문화 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간 한국화교가 쓴 새 거주지 에 대한 견문과 체험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36) 이러한 특별기고들을 통해 해외로 이주한 옛 한국화교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한중문화 운영 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34) 杜 書 溥, 致 雪 筍 主 編 同 學, 한중문화 1981년 9월호, 41쪽. 35) 馬 仲 可 (2005), 建 國 後 韓 國 政 府 限 制 華 僑 政 策 和 華 僑 的 因 應 硏 究, 중국학연구 32권, 중국학연구회, 301쪽 ; 국사편찬위원회(2007), 한국화교의 생활과 정체성, 국사편 찬위원회, 66~69쪽 참조. 36)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화교가 쓴 견문록인 看 到 什 麽 寫 什 麽 라는 특별기고 (1982년 11월~1983년 1월)가 있었으며, 于 碧 川 이 쓴 旅 美 瑣 記 (1983년 2~3월)도 있었다.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85 이 밖에 한중문화 는 한국화교의 옛 이야기를 서술함으로써 한국화 교들의 집단기억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귀속감을 갖게 하였다. 그 리고 1970년대 대만의 국제지위가 쇠퇴하자 한중문화 는 조국 에 대한 한국화교의 구심력을 높이기 위해 명나라 九 義 士 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37) 구의사와 그들의 후손은 조선의 관직을 받지 않고 명나라의 옛 신하로서 한반도에서 생활하여 조선 임금과 신하의 존경을 받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중문화 는 그들의 역사를 통해 한국화교들에게 나라 에 충성한 사람이라야만 남의 존중을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외국사람의 예우를 받을 수 있다는 관점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이상 반공선전과 화교사회에 관한 내용 외에도,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 기 위해 매호 잡지의 뒷부분에 문예 수필, 생활 상식, 그리고 홍콩ㆍ대만 ㆍ한국에서 유행하는 소설 등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이 부분은 잡지 비 중의 약 20%를 차지했는데, 어떤 독자는 한중문화 잡지사에게 잡지 내 용이 정치에만 편중되어서 일반 부녀자와 청소년 독자들이 선호하는 내 용이 소홀히 취급되었다 면서 비교적 가벼운 글의 비중을 늘리기를 희 망한다 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38) 그러나 한중문화 는 여전히 시사보도 와 화교사회의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한 정론형의 잡지였다. 3) 잡지의 발전과 영향력 확대 한중문화 발행지는 처음에 중구 명동 2가 91번지였다가 1978년에 중구 명동 2가 105번지로 바뀌었다. 105번지는 中 正 도서관 빌딩(현 漢 城 華 僑 協 會 소재 건물)이자 당시 한중문화협회의 소재지였다. 같은 해 한 중문화 잡지사의 조직은 한층 더 체계화되었다. 이때 한국화교로 구성된 이사회가 성립되었으며 주유산이 이사장을, 당선림이 부이사장을 맡았다. 37) 九 義 士 는 王 以 文 ㆍ 鄭 先 甲 등의 당시 명나라 고위관리들로 명나라가 청에 망하자 항 전하다 포로로 잡혀 심양에 수용돼 있던 봉림대군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들은 1645 년 봉림대군 일행이 귀환할 때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孤 臣 孽 子 的 故 事, 한중문화 1976년 2월호, 15쪽; 1976년 3월호, 20쪽. 38) 讀 者 投 書, 한중문화 1976년 3월호, 27쪽.
86 한국학연구 46 이사는 총 11명으로 그들 대부분은 원래 한중문화 잡지사 사무위원회 의 구성원이었으며 그중 수광동향회 회원이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 다. 39) 또한 1978년 1월에는 편집위원회가 조직되어 잡지에 게재될 내용 의 선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월간 한중문화 고문 위원 회 가 조직되었다. 고문을 담당한 사람은 주로 대만ㆍ한국의 정계ㆍ학계 유명한 인사들이었으며, 40) 그들 대부분은 한중문화 에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조직의 체계화에 따라 잡지의 내용도 충실해졌다. 잡지 매호의 분량 도 점점 늘어나서 1980년 이후 매호 50여 쪽에 달했는데 특집의 경우 는 70쪽이 넘었다. 또한 원고의 출처에서도 轉 載 된 글의 수량이 줄어들 었다. 예컨대 1974년에는 간행된 총 7회의 잡지 내용 가운데 전재된 글 은 총 21편으로 매호 평균 3편씩, 전체 내용의 15% 정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980년에 이르러 연간 전재된 글은 한 편뿐이었다. 이는 한중 문화 가 안정적인 원고 공급원을 마련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 고 화교사회에 관련된 내용 가운데 논단 과 투서 의 수량도 1980년 부터 급격히 증가하였다. 아래의 표는 1981년 논평과 투서가 총 35편으 로 1974년의 약 4배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한중문화 가 일반 화교들의 의견개진을 위해 점차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하였다는 것 을 의미한다. 39) 이사 명단은 朱 維 珊, 唐 仙 林, 王 世 友, 唐 光 明, 李 舜 華, 張 恩 普, 秦 裕 光, 楊 紹 鏞, 劉 世 君, 唐 湘 清, 陳 國 章 이다. 本 刊 董 事 會 重 新 改 組, 한중문화 1982년 12월호, 23쪽. 40) 한중문화 고문 위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 斐 鳴 宇 (대만 국민대회 대표), 李 宇 清 (대만 육군 중장, 국민대회 대표, 光 複 大 陸 設 計 研 究 委 員 會 委 員 ), 張 偉 光 (대만 국민대회 대표), 張 世 良 (대만 국민대회 대표), 趙 基 (대만 超 心 理 學 會 常 務 理 事 ), 劉 秦 (한국화 교 지도자, 중앙 평의위원), 李 立 信 (대만 東 海 大 學 교수), 李 雲 飛 ( 漢 醫 師, 中 國 醫 學 院 교수), 王 志 詮 ( 台 北 市 進 出 口 商 業 公 會 總 幹 事 ), 岳 汝 霖 (한국화교 중학교 교사), 趙 百 川 (대만 桃 源 周 刊 발행인), 許 宇 成 (한국 동북아문제연구소 소장), 張 世 鏞 (한국 漢 學 家 ), 權 基 玉 ( 韓 中 文 化 協 會 고문)등이었다. 그 중 주임 위원은 斐 鳴 宇,부주임 위원은 李 宇 清, 許 宇 成 이며 상무위원은 張 偉 光, 張 世 良, 趙 基, 劉 琴 이었다. 啓 事, 한중문화 1978년 7월호, 29쪽.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87 논단ㆍ투서류 글의 게재 수량 통계표 (단위: 편) 년대 종류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논단 6 8 3 6 7 9 17 11 11 5 0 6 투서 2 6 16 8 2 7 13 24 15 0 3 0 총계 8 14 19 14 9 16 30 35 26 5 3 6 이와 동시에 한중문화 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예컨대 잡지와 한국 간행물의 교류가 늘어난 것이 대표적이다. 1979년 잡지에 발표된 南 海 血 书 ㆍ 风 雨 中 的 宁 静 등이 한국 간행물인 治 安 問 題 ㆍ 鄉 土 防 衛 報 에 실렸다. 41) 같은 해 한중문화 잡지사가 향토방위보사와 자매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잡지에 기고한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기고자 중에는 한국과 대만 정계 및 문화계의 주요 인물들이 있었 다. 한국 예비역 육군 중장 崔 锡, 민주공화당 院 內 總 務 金 龍 泰,한국 동 북아문제연구소 소장 허우성, 역사학자인 邊 太 燮, 대만 行 政 院 院 长 孙 运 璿, 海 工 会 42) 주임 陈 裕 清, 陆 工 会 43) 주임 白 萬 祥, 台 湾 雜 誌 事 業 協 會 理 事 長 任 卓 宣, 中 國 經 濟 評 論 社 社 長 張 弦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한국화교 중학교 교사 高 登 河, 화교 청년 孙 承 儒, 두서부와 함께 화교신 보사에 근무했던 鲁 卿 등도 한중문화 에 기고하였다. 41) 南 海 血 書 는 베트남인 阮 天 仇 가 쓴 반공적 遺 書 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중문화 에 게재한 글이다. 風 雨 中 的 寧 靜 은 한중문화 에 발표된 黃 新 壁 총영사의 연설인 데, 대만이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후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분발할 지를 밝힌 것이었다. 治 安 問 題 의 주요 구독자는 한국 경찰과 치안문제 연구에 관련된 인사이고, 이 잡 지의 매월 판매 부수는 5만부였다. 鄉 土 防 衛 報 는 향토방위연구소의 기관간행물이 며 향토방위군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신문이었다. 이 신문의 매월 판매 부수는 30만 부에 달하였다. 本 刊 著 論 韓 報 轉 載, 韓 譯 南 海 血 書 收 效 宏 大, 한중문화 1979년 8월호, 24쪽, 1979년 9~10월호, 48쪽 참조. 42) 중국 국민당은 대만에 들어간 후 국민당 당중앙위원회 내부에 제3조를 조직하여 해 외 각 지역 黨 部 의 화교 사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후에 제3조는 海 外 工 作 會 로 이 름이 바뀌었다. 43) 대만 국민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조직으로 정식 명칭은 大 陸 工 作 會 였다. 이 조직은 중국 대륙에 대한 정보수집ㆍ첩보 활동 등에 종사하였다.
88 한국학연구 46 판매 네트워크의 형성은 한중문화 잡지사가 얻은 또 하나의 성과였다. 본사 외에 한중문화 잡지사는 판매와 정보 획득을 위해 한국과 해외에 지사를 두었다. 필자의 통계에 의하면, 1985년까지 한국 각 지역의 한중 문화 지사가 45곳에 달했고 제주도 및 전라남도 외의 다른 각 도에 모 두 지사가 설치되었다. 또한 한중문화 는 한국 문화공보부에 등록된 동 시에 대만 行 政 院 新 聞 局 에도 등록되었다. 그리고 1978년에는 대만 신 문국으로부터 국내 판매 등록 허가를 얻어 한국 화교의 유일한 국내 판 매 출판물 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잡지의 販 路 가 대만 철도국에 속한 각 역에 있는 판매처 및 고급 열차 객실까지 확대되었다. 한중문화 해외 지사의 경우에는 1975년 5월 홍콩에 업무처가 설치 된 후부터 잇따라 일본, 코스타리카, 미국, 캐나다 등에도 설치되었다. 한 중문화 지사가 해외에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화교가 다시 해외로 이민하여 새로운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한중문 화 잡지사는 왕세유의 계획대로 영향력을 동남아시아 화교사회까지 확대 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문화 는 창간 3년 후부터 독자 수가 2,000여 명에 달했으며 독자 가운데에는 한국화교, 화교 사단 외에 몇몇 한국인과 해외 화교도 있었다. 한중문화 는 발행기간 동안 독자들의 호평을 받아서 反 共 先 鋒 ㆍ 僑 民 木 鐸 ㆍ 僑 社 喉 舌 등으 로 불렸다. 44) Ⅲ. 한중문화 의 재정비와 폐간 (1982.10~1985.12) 1) 한중문화 발전을 저해한 문제점 1978년부터 1982년 여름까지는 한중문화 의 발전 시기였지만 이 잡 지는 한국화교수가 감소하고 경제가 쇠퇴하는 상황 아래에 창립된 것이 44) 이와 같은 칭호들은 한중문화 창간 기념축사와 독자투서 등의 특별기고에서 자주 보인다.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89 었기 때문에 창립 초기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한중문화 의 발전을 저해한 첫 번째 문제는 경비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1963년 12월 신문ㆍ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에서는 정기간행 물이 自 給 經 營 原 則 으로 발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즉 정기간행물 이 외국인 또는 외국의 정부나 단체로부터 기부금 등을 받지 못하며 이 를 위반할 경우 등록을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45) 이에 따르면 한중문화 는 대만정부로부터 경제상의 직접적인 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비 록 위의 법률에서 정기간행물이 공보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외국 자선기 구 등으로부터 기증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도 있었지만 두서부의 회고 46) 에 의하면 한중문화 는 적어도 1981년 9월까지 대만 측의 경제적인 원 조를 받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한중문화협회는 한중문화 의 발 행기관으로서 잡지사에 대한 경제적 원조가 크지 않았다. 박영준은 발행 인을 맡은 후 한중문화 에 어느 정도 재정지원을 하겠다고 표명하였 다. 47) 그러나 1981년에 제정된 한중문화협회 사업계획을 보면, 한중문화 협회는 단지 한중문화 잡지사의 운영에서 잡지의 발행 및 확대에 협력하 는 역할만 했을 뿐 적극적인 원조를 하지 않았다. 48) 한중문화 의 경비는 주로 잡지 자체의 수입과 잡지사 이사들의 도움 으로부터 나왔다. 잡지 자체의 수입은 잡지의 구독료와 광고비, 그리고 여러 부업 수입, 예컨대 해외 교포 를 위한 한국 관광 안내 서비스 제공 등이 포함되었다. 구독료의 경우를 예로 들면, 최초 잡지 판매 가격은 1 부에 500~600원이었으며 발행되는 동안 판매 가격을 두 번 상향 조정했 음에도 불구하고, 1985년까지 구독료는 1부에 800원이었다. 게다가 한국 화교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잡지의 발행량이 제한되어 폐간 때까지 45) 제7조 정기간행물의 발행을 위하여 외국인 또는 외국의 정부나 단체로부터 기부금 ㆍ찬조금 기타 재산상의 출연을 받지 못한다. 다만 외국의 교육ㆍ체육ㆍ종교ㆍ구호 또는 자선 등의 기관이나 단체로부터의 기증으로서 공보부장관의 승인이 있는 것은 예외로 한다 고 규정한 것이었다. 관보 제3612호, 1963년 12월 12일. 46) 杜 書 溥, 致 雪 筍 主 編 同 學, 한중문화 1981년 9월호, 40쪽. 47) 朴 發 行 人 的 期 望, 한중문화 1977년 12월호, 5쪽. 48) 韓 中 文 化 協 會 舉 行 定 期 總 會, 한중문화 1981년 5월호, 29쪽.
90 한국학연구 46 매달 2,000부 정도만 유지하였다. 그중에는 대만ㆍ한국의 도서관, 관련 부서 및 관계자에게 무료로 기증된 것도 포함되었다. 두서부의 회고에 의하면 잡지 자체의 수입만으로는 잡지사의 운영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부족한 운영경비는 주로 주유산을 비롯한 잡지사 이사들의 도움 에 의지하였다. 49) 경제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잡지사는 안정적인 경영 을 하기 어려웠다. 1983년 이전에 잡지사의 주소가 거의 매년 변경된 것 을 통해 잡지사의 어려운 형편을 다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잡지사 직 원들은 대우 문제 때문에 재직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외에도 1976 년 잡지 발행인 최덕신의 해외 망명은 잡지사에 큰 타격을 주었다. 50) 심 지어 몇몇 사람은 한중문화 잡지가 2년을 넘지 못하고 곧 폐간될 것이라 고 예측하기도 하였다. 경비와 인원 부족 등의 문제 때문에 한중문화 잡지 발행 과정에서 2호 를 1호로 합쳐서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한중문화 잡지사는 문화공 보부로부터 두 번의 경고를 받았다. 문화공보부는 이런 행위를 缺 號 발 행이라고 간주했으며 앞으로 한중문화 의 연간 발행량이 10호에 이르 지 못하면 즉시 폐간시키겠다고 경고하였다. 이 때문에 그 후 한중문화 잡지사는 아무리 어려워도 더 이상 2호를 1호로 합쳐서 발행하지 않았 다. 51) 그러나 경비, 인원 부족의 문제에 비해 한중문화 잡지사가 직면한 더 욱 큰 문제는 한중문화 의 주장이 한국화교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한중문화 는 관계의 친근함과 소원함에 상관없이 오직 선 악 만을 고려하며 화교 사회의 불량한 상황을 감추지 않고 보도하겠다고 표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발행원칙은 일부 화교에게 받아들여지지 못 하였다. 잡지 창간 초기부터 어떤 사람은 한중문화 가 일부러 화교 사 회를 교란하며 헛소문을 퍼뜨리고 말썽을 일으킨다고 지적하였다. 52) 한 49) 杜 書 溥, 致 雪 筍 主 編 同 學, 한중문화 1981년 9월호, 40쪽. 50) 程 子 實, 韓 中 文 化 創 刊 六 周 年 感 言, 한중문화 1980년 7월호, 26~27쪽. 51) 韓 中 文 化 創 刊 六 周 年 感 言, 한중문화 1980년 6월호, 4쪽.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91 중문화 는 같은 시기의 한중일보 와도 일부 사안에 대해 견해차를 드러 냈으며 이 문제는 나중에 공개적인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외에도 잡지에 실린 독자 투서로 인해 비난받은 화교단체 지도자와 영사관 직원은 이 잡지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한중 문화 의 폐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중문화 의 기록에 의하면, 한중 문화 의 비평을 받은 어느 영사관 직원은 잡지사 이사진과 친분을 갖고 이사진과 잡지사 사이를 갈라놓거나 이사진들에게 지원을 줄이거나 아예 중단하도록 종용하여 잡지사를 곤경에 빠지게 하였다. 53) 그리고 몇몇 큰 지역에서는 한중문화 불매 운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54) 특히 1980 년부터 논단 과 투서 의 수량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한중문화 가 심한 압력을 받자 잡지사 내에서는 의견 충돌이 있었고 심지어 몇몇 이 사가 잡지에 대한 경제적인 원조를 포기하였다. 55)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잡지사 이사들의 재정지원은 잡지사 경비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사들의 지지를 잃는다는 것은 곧 잡지사의 운영이 위기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한중문화 잡지사는 내부 관계 를 완화시키고 경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982년 8월에 처 음으로 휴간을 신청하였다. 2) 잡지사의 재정비 1982년 10월에 재간행된 후 한중문화 잡지사 이사회의 규모가 확대되 었고, 구성원 수도 11명에서 23명으로 늘어났다. 추가로 임명된 12명의 이사도 56) 한국화교단체의 지도자였다. 이사회의 정ㆍ부 회장은 여전히 52) 所 謂 自 我 宣 傳, 한중문화 1977년 5, 6월호, 36쪽. 53) 韓 中 文 化 雜 誌 與 我, 한중문화 1979년 6월호, 29~30쪽. 54) 杜 書 溥, 致 雪 筍 主 編 同 學, 한중문화 1981년 9월호, 40쪽. 55) 本 刊 複 刊 有 感, 한중문화 1982년 10월호, 5쪽. 56) 于 克 儉, 杜 學 增, 王 昭 楷, 張 慶 山, 王 文 波, 陳 樹 聲, 畢 可 欽, 王 金 山, 孔 慶 祐, 王 子 良, 邢 玉 敏, 陶 永 明 등 12명이었다. 本 刊 董 事 會 重 新 改 組, 한중문화 1982년 12월호, 50쪽.
92 한국학연구 46 주유산과 당선림이 맡았다. 1983년 1월 19일에는 한중문화잡지사 이사 회 장정 (이하 장정 으로 약칭함) 이 제정되었는데 총 9장 29조항으로 이루어졌다. 장정은 처음으로 한중문화 잡지사 이사회의 운영 방식을 명 문으로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정 목적은 한중문화 잡지사의 職 權 을 분명히 하고 관리 규범을 순조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앞 장에서 한국인이 한중문화 를 창간한 것으로 보이나 실제 발기인 은 한국화교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장정 의 제3장 7조에서는 한 중문화 잡지사의 이사회가 발행인에 의해 선출되며, 같은 장 11조는 이 사회가 최고의 권력 기구이며 발행인ㆍ인쇄인ㆍ편집인 초빙 권한을 가진 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두 조항을 보면, 재정비된 후 한중문화 잡지사의 발행기관인 한중문화협회와 한국화교로 구성된 이사회가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장정의 전체 내용을 분석해 보면 약 간 다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잡지의 내용면에서 보면, 장정 에서는 잡지사 언론 방침의 제정 과 내용의 취사는 편집위원회가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였다. 동시에 편집 위원회 구성원은 이사회가 임명하며 이사회는 정ㆍ부 이사장, 상무이사 장, 주간, 편집국장 등으로 구성된다고 밝혔다. 즉 당시 잡지의 취재 내 용 및 선전 방향은 여전히 편집위원인 주유산, 당선림, 왕세유, 두서부 등 한중문화 잡지사의 핵심 인물들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잡지사의 재정 측면을 보면, 장정 에는 잡지사의 수입 외 에 부족한 부분을 이사 1인당 매월 3만원의 지원비와 관계 부서의 보조 금으로 보충하며, 그밖에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정ㆍ부 이사장이 6:4 의 비율로 기부하도록 하였다. 그 중 소위 관계 부서 라는 것은 한중문 화협회를 가리킨 듯하다. 그러나 한중문화협회가 1983년에 제정한 사업 계획을 보면, 한중문화협회는 여전히 한중문화 잡지사에 협력만 했을 뿐, 잡지사의 운영은 전적으로 한중문화잡지사에 일임한 것으로 보인다. 57) 위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잡지 내용의 방향이나 경비의 조 57) 韓 中 文 化 協 會 舉 行 定 期 總 會, 한중문화 1981년 5월호, 29쪽, 1983년 3월호, 29쪽.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93 달은 이사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1983년 초 이사회 장정이 통과될 때까지 한국화교들은 여전히 잡지사의 실질적인 운영자 및 최고 결정자였으며, 발행자인 한중문화협회는 보조적인 역할만 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한중문화 는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1982년 여름부터 재정비 조치를 취했으나 한중문화 잡지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1983년 4~5월 에 잡지사는 다시 휴간하였다. 6월 재 간행 후 잡지 속표지를 보면 이사 장 주유산 이라는 항목이 삭제되어 있고, 두서부도 편집국 국장의 직무 를 사직한다는 공고문이 실려 있다. 동시에 한중문화협회는 한중문화 잡 지사 사무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잡지사 내부에 비교적 큰 인사 변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가을 수광동향회의 劉 世 君 이 한중문화잡지사의 신임 사장으 로서 사무 관리를 맡았다. 뒤이어 1984년 1월 24일 잡지사는 이사회를 새롭게 구성하는 동시에 한중문화 를 한중문화협회의 기관지 로 규정 하였다. 이때 발행인 박영준이 24명 58) 의 화교를 초빙하여 새 이사회를 구성하였다. 새로 구성된 이사회에는 기존의 회원이 8명뿐이었다. 그중 1982년에 추가된 12명 가운데에서는 陳 樹 聲 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7명 은 초창기의 이사였다. 이 사실은 1982년 말의 재정비 효과가 크지 않았 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새 이사 명단에 잡지사의 창립자이자 잡지 전반에 대한 중요 결정자였던 주유산, 왕세유 등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도 주목된 다. 대신 수광동향회 회장 唐 湘 清 이 잡지사 이사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 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수광동향회는 한중문화 가 폐간되기 전 마 지막 2년 간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학자 이 정희는 한중문화 가 서울 한국화교단체인 수광동향회에 의해 창간된 것 58) 새 이사회에 선임된 이사 24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唐 湘 清, 常 榮 春, 陳 樹 聲, 秦 裕 光, 楊 紹 鏞, 房 學 愛, 張 本 榮, 唐 光 裕, 唐 仙 林, 唐 光 明, 唐 煥 烈, 裴 正 濟, 範 國 平, 高 延 賓, 林 春 生, 陳 國 章, 王 蘭 芳, 劉 煥 永, 李 文 綱, 周 培 俊, 郭 景 寬, 王 錫 銘, 劉 世 君, 唐 仁 源. 韓 中 文 化 雜 志 社 新 人 成 立 董 事 會, 한중문화 1984년 2월호, 26쪽.
94 한국학연구 46 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59) 그러나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수광동향회의 회원들은 초창기 이사회 회원의 반수 이상에 달했고 잡지발간 후반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지만 이 단체가 한중문화 를 단독으로 창립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잡지사는 새로운 이사회 조직 장정 (이하 신장정)을 수정하여 통과시켰는데, 이 신장정은 총 8장 26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신 장정 가운데에는 여전히 이사회가 한중문화 잡지사의 최고 권력 기구로 명시되고 있었지만, 이사회와 관련된 인사를 초빙하여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을 임명한다는 내용이 삭제되었다. 동시에 신장정에는 만약 본회 가 한중문화 잡지의 미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을 내리면, 발행인 이 부결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고 하는 조항이 추가된 점이 주목된다. 즉 신장정에서는 이사회가 잡지사 발행인을 초빙할 수 있다는 권한을 없애 는 동시에 이사회의 결의가 발행인의 제약을 받는 것을 규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화교로 구성된 이사회가 여전히 잡지사의 운영자이기는 하지 만 기존 이사회에 속한 최고 결정자의 권한은 이미 한중문화협회에 귀속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3) 시대 변화와 한중문화 의 폐간 이상 두 차례의 재정비를 거친 후 한중문화 잡지의 내용도 일정한 변 화가 나타났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한중문 화 에 실린 글의 내용을 반공선전, 경제, 문예ㆍ과학기술, 화교사회 등 네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면 그 변화를 뚜렷이 알 수 있다. 아래의 도표는 1974년부터 1985년까지 12년 간 글의 수량 변화 양상이다. 59) 李 正 熙 (2010), 关 于 韩 国 华 侨 社 会 组 织 的 研 究 - 以 同 乡 组 织 和 华 侨 协 会 为 中 心, 南 洋 资 料 译 丛 3 期, 厦 门 大 学 南 洋 研 究 院, 67쪽.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95 연도별 한중문화 주요 내용 변화 통계도 (단위: 편) 위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반공선전에 관련된 글 외에 나머지 세 분 야에 해당되는 글의 수량에 모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1982년부터 경제 및 문예ㆍ과학기술 분야의 글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내용 을 보면 한국ㆍ대만 경제에 관련된 글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경제 발전 상 황과 최신 과학 기술에 관한 소개도 많아졌다. 이것은 잡지사 재정비 후 운영자가 화교들을 더 이상 협소한 테두리 속에 가두어 두지 않기 위해 세계 각 지역에 대한 보도를 증가시켜 최신의 정보를 화교사회에 전파하 고자 했던 60)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때 문에 전재된 글의 수량은 다시 늘어나게 되었다. 경제 및 문예ㆍ과학기술 분야의 글이 증가한 반면 한국화교사회 관련 글의 수량은 1981년 95편을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하여 1983년에 32편 까지 줄어들었다. 그 후 2년 동안 다시 상승했지만 내용은 주로 객관적 인 사건 보도에 집중됐으며 일반 화교들의 의견을 드러내는 글은 감소하 였다. 이 점은 화교의 의견을 반영하는 논단 과 투서 의 대폭 삭감을 통해 확인된다. 예컨대 1982년 이전 평균 1년에 10편씩 실렸던 투서 는 1983년부터 3년 동안 겨우 3회 게재되었다. 한중문화 가 이러한 변동을 보인 이유는, 한편으로는 이 같은 내용이 화교사회에 준 불화를 완화시 키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중문화 에 대한 영사관의 감찰 강화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일반 화교들의 의견을 반영한 내용의 삭감 60) 回 溯 與 展 望, 한중문화 1985년 7월호, 6쪽.
96 한국학연구 46 으로 인해 교민 대변인이라는 한중문화 의 역할도 점차 약해졌다. 다음으로 반공선전의 측면에서는 시국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도 적당 하게 조정되었다. 한중문화 초기에는 반공선전의 중점을 중국공산당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부당성에 대한 비판에 두었다. 그러나 1976년 중국 공산당은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을 끝내고 내외 정책을 재조정하기 시 작하였다. 1979년 1월 1일 중국공산당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를 열어 告 台 灣 同 胞 書 를 발표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조국을 통일한다는 방침을 선포하였다. 대만 당국은 중국 대륙의 對 台 정책의 변화에 직면 하자 현재 상태를 유지하여 앞으로 닥쳐올 변화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대응할 방법 을 채택하면서 중국공산당 통일 전선 이라는 활동의 허위 성에 대한 비판에 선전의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시간의 추이에 따라 대 만 정부가 평화 회담을 거부한다는 논조는 갈수록 약해졌다. 예컨대 1981년 7월에 열린 제11차 國 家 建 設 研 究 會 에서는 중국공산당의 통일전 선을 반대하는 정책이 융통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정치 형세의 변화는 한동안 한중문화 의 창립자를 곤혹스럽게 하였 고, 이것은 한중문화 의 변화를 야기하였다. 1982년 첫 재정비 후 한중 문화 의 창립자는 중국공산당이 시정방침을 바꾼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 전히 원래의 선전 방식을 고집한다면 중국공산당을 공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반격당할 말꼬리를 잡힐 것임을 자각하고, 반공선전 의 새 방향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61) 陆 工 会 주임 백만상 등이 쓴 정치 논평이 한중문화 에 자주 나온 것은 바로 그 예의 하나이다. 백만상의 글은 이전 시기의 신 반공선전의 글보다 모욕적이거나 공격적인 언사가 적어졌고 표현 방식에서도 비교적 객관적이었다. 62)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한중문화 가 반공 취지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이 때 한중 61) 本 刊 復 刊 有 感, 한중문화 1982년 8~10호, 5쪽. 62) 백만상은 국민당 제11차 건국회의 에서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을 반대하는 정책의 융통성 문제에 관해 토의한 바 있는데 이때 그는 대륙의 호칭을 새롭게 규정하고 공 식적인 장소에서는 匪 偽 ㆍ 匪 軍 등과 같은 모욕적인 호칭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 을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 陈 崇 龙 谢 俊 (1993), 海 峡 两 岸 关 系 大 事 记, 中 共 党 史 出 版 社, 240쪽.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97 문화 는 당시의 분위기 변화를 반영하여 중국공산당 통일전선 정책의 허 위성에 대한 비판에 선전의 중점을 두었으며, 중국공산당의 평화회담에 대한 주장을 음모 ㆍ 함정 이라고 지적한 것이었다. 사실상 1978년 후 중국공산당은 확실히 對 內 ㆍ 對 外 정책을 조정하였 다. 특히 이 시기에 해외 화교에 대한 정책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 해외 화교들은 줄곧 부르주아 계급 ㆍ 자본주의 로 간주 되었고 반동 의 존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중국 대륙으로 귀국하는 해외 화교들은 간첩으로 의심을 받았다. 63) 그러나 개 혁ㆍ개방 후 중국공산당은 해외 화교ㆍ화인을 국가 건설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로 재인식하고 역사적인 잘못을 바로잡는 새로운 僑 務 정책을 제 정하였다. 이러한 대륙 정책의 변화는 화교사회에 일부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중문화 에 의하면 1980년대 이후 중국 대륙에 고향이 있는 한국화교 가 고향과 서신을 왕래하는 것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은 고 향으로 돌아가 친척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64) 한국화교와 중국 대륙의 관 계가 더 깊어질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만 영사관은 대륙에 다녀온 사람 의 일부를 처벌했지만 한국화교의 대륙 방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65) 이 것은 화교가 고향과 관계를 일단 맺게 되면 다시 끊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에서 非 敵 對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개방적인 정책 을 채택하고 그들과 문화 및 경제 측면의 교류를 실행하자 한국과 대만 ㆍ중국 대륙의 관계에도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2 차 세계대전 후 한국은 대만과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1년에 대만은 유엔 안보이사회 상임 이사국에서 제명되고 정 치적인 영향력이 급격히 쇠락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도 어쩔 수 없이 중 63) 庄 国 土 (2000), 1978 年 以 来 中 国 政 府 对 华 侨 华 人 态 度 和 政 策 的 变 化, 南 洋 问 题 研 究 3 期, 厦 门 大 学 南 洋 研 究 院, 4쪽. 64) 港 都 僑 社 花 絮, 한중문화 1982년 12월, 41쪽. 65) 從 僑 胞 回 大 陸 省 親 說 起, 한중문화 1985년 9월, 5쪽.
98 한국학연구 46 국대륙 및 대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 한국 과 중국 대륙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분야를 피해 경제 관계를 중심으로 한 실무외교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일보 및 한국일보 에는 중국어 열기에 관한 기사가 잇따라 등장했는데 10억 인구의 시 장을 잡자 라는 내용도 더불어 기술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한중문화 대 구지사 사장 劉 順 達 은 감회가 자못 깊었다고 표명하였다. 66) 아마도 당시 유순달은 한국의 간행물에 나타난 중국 이 이미 이전의 중화민국 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냉전이 점차 막을 내림에 따라 각 나라는 이념적 대립을 경제적인 합 작 추구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한중문화 는 여전히 반공을 고집했기 때 문에 도태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1985년 이후 한중문화 는 간행되지 못하였다. Ⅴ. 결론 한중문화 는 한국화교사회의 경제가 쇠퇴하고 인구수가 감소하는 상 황에서 창간된 월간 잡지였다.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은 화교사회의 결 속력 강화와 반공선전에 있었으며, 내용상 정치평론 잡지에 속하였다. 잡 지 발행기간 동안 독자들로부터 僑 社 喉 舌 ㆍ 反 共 先 鋒 이라는 평을 받았다. 12년이라는 간행기간 동안 잡지사는 창간기(1974~1977년), 발 전기(1978~1982년), 재정비 및 쇠퇴기(1982~1985년)를 거치며 발간과 폐간을 맞이하였다. 이 잡지의 독자층은 한국화교뿐만 아니라 일부 한국 인과 해외 화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중문화 는 1970~80년대 중반까지 한국화교사회의 유일한 화문잡 지로서 한중일보 와 함께 화교사회의 정보를 전파하고 화교의 유대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한중일보 가 시사보도에 집중한 것에 비 66) 雜 感 五 則, 한중문화 1985년 2월, 13쪽.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99 해 한중문화 는 한국화교사회에 대한 일반 화교들의 견해를 많이 게재 하였다. 이 점에서 당시의 화교사회의 실상을 연구하기에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잡지의 발행인은 외면상 한중문화협회(처 음에는 한중문화친선협회)였지만 실제로는 한국화교가 줄곧 잡지사의 운 영을 맡고 있었다. 특히 1983년 이전 10년 동안 잡지에 큰 영향을 주었 던 인물은 주로 이사장 주유산, 主 幹 왕세유, 편집국장 두서부 등 화교들 이었다. 이로 인해 잡지의 내용도 왕세유, 두서부 등 일부 당시 40~50대 한국화교 지식인의 사상을 반영하였다. 이들의 개인적인 경험은 한중문 화 잡지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대만과 한국 정부측에 있으면서 반공 의식을 적극적으로 선양한 부류였다. 왕세유와 두서부 등은 한국전쟁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참가한 바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한국화교에게 가져온 고통을 목격했고 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참전자인 중국공산당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 냉전이라는 국제환경도 반공의식에 영향을 주었다. 냉전으로 인해 한국화교와 중국 대륙에 있는 고향의 관 계가 인위적으로 단절되었고, 이에 대해 대만 정부는 곁방살이 고향으 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 괴수가 중국공산당 이라고 선전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국화교는 중국 대륙을 다시 점령해야만 비로소 고향으로 돌 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한중문화의 핵심 인물들도 그 일원으로 반공선 전을 그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러한 중국공산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은 고질적이었으며 시대적 변화에 따라 쉽게 변하지 않았다. 한국화교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왕세유와 두서부는 다년간 언론사업에 종사하고 일반 화교를 대표하여 청원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들이 주도한 한중문화 는 화교 엘리트의 사상을 대표한 한중일보 와는 달리, 한국화교 중ㆍ장년층 가운데 비교적 진보적인 지식인의 사상을 대 표하였다. 그들은 엘리트와 영사관 관원의 특권 및 비리를 반대하고 화 교사회의 공익을 추구하며 일반 화교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활동 그 자체의
100 한국학연구 46 특징을 정리하는 것에 집중되어 왔다. 67) 그러나 필자는 한중문화 를 분 석ㆍ정리하면서 한국 화문간행물이 공통성을 가진 동시에 간행물 운영자 의 계층, 직업, 경험, 나이 등에 따라 간행물의 논조도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본고는 그간의 연구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중문화 에 대한 사례를 통해 운영자와 간행물의 논조를 검도하였다. 본고가 한국화 교 출판활동의 다양성을 보완하는 데 일조하리라 기대한다. 한중문화 는 냉전체제가 완화된 시기에 발간된 잡지로, 변화된 세계 정세에 대한 한국화교들의 태도와 견해를 직접 보여 주기도 하였다. 따 라서 이 잡지는 1970~80년대 한국화교사회를 연구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자료의 발굴을 입각하여 한중문화 의 성격을 파악했으며 한중문화 를 통해 본 한국화교사회의 모습에 대해서 는 별도의 논문을 기약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기본 자료 경향신문 1965. 관보 1963. 동아일보 1946, 1965. 매일신문 2012. 韓 中 文 化 1974~1985. 邵 毓 麟 (1980), 使 韩 回 忆 录, 台 湾 传 记 文 学 出 版 社.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2007), 한국화교의 생활과 정체성, 국사편찬위원회. 김근수(1992), 한국 잡지사 연구, 한국학연구소. 金 慶 國 崔 承 現 외(2)(2005), 중국 海 外 移 民 의 諸 名 稱 분석 연구, 中 國 人 文 科 學 31권, 중국인문학회, 671~694면. 67) 대표적으로 车 根 锡 의 韩 国 的 华 文 报 纸 韩 中 日 报 研 究, 吴 庆 堂 의 韩 国 的 华 文 报 业, 金 垠 定 의 韩 国 华 侨 文 学 的 文 化 土 壤 등의 연구가 있다.
한국화교의 출판활동에 대한 일연구 宋 佳 101 박은경(1981), 화교의 정착과 이동 : 한국의 경우,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박은경(1986), 한국화교의 종족성, 재단법인 한국연구원. 양필승 이정희(2004),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한국화교 경제의 어제와 오늘, 삼 성경제연구소. 염인호(2010), 또 하나의 한국전쟁 - 만주 조선인의 조국 과 전쟁, 역사비평사 왕은미(2004), 동아시아를 떠도는 한국화교의 정체성- 한중일보 를 통해 본 한국 화교의 국가정체성,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문학과지성사, 238~270면. 이창호(2007), 한국 화교( 華 僑 )의 사회적 공간과 장소 : 인천 차이나타운을 중심 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李 容 宰 (2012), 韓 國 의 對 華 僑 政 策 과 배제의 역학, 중국어문학논집 72집, 중 국어문학연구회, 399~430면 참조. 송승석(2010), 한국화교 연구의 현황과 미래 -동아시아 구역 내 한국화교 연구 를 중심으로, 중국현대문학 55호,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163~199면. 陈 崇 龙 谢 俊 (1993), 海 峡 两 岸 关 系 大 事 记, 中 共 党 史 出 版 社. 车 根 锡 (1995), 韩 国 的 华 文 报 纸 韩 中 日 报 研 究, 新 闻 大 学 8 期, 复 旦 大 学, 48~50면. 崔 承 现 (2003), 韩 国 华 侨 史 研 究, 香 港 社 会 科 学 出 版 社 有 限 公 司. 金 垠 定 (2002), 韩 国 华 侨 文 学 的 文 化 土 壤, 世 界 华 文 文 学 论 坛 6 期, 江 苏 省 社 会 科 学 院, 71~73면. 李 正 熙 (2010), 关 于 韩 国 华 侨 社 会 组 织 的 研 究 - 以 同 乡 组 织 和 华 侨 协 会 为 中 心, 南 洋 资 料 译 丛 3 期, 厦 门 大 学 南 洋 研 究 院, 62~74면. 馬 仲 可 (2005), 建 國 後 韓 國 政 府 限 制 華 僑 政 策 和 華 僑 的 因 應 硏 究, 중국학연구 32권, 중국학연구회, 287~312면. 权 赫 秀 (2011), 20 世 纪 以 来 国 内 外 学 界 的 朝 鲜 半 岛 华 侨 史 研 究 综 述, 韩 国 研 究 论 丛 23 辑, 东 北 师 范 大 学 世 界 文 明 史 研 究 中 心, 210~232면. 石 源 华 (2007), 中 韩 文 化 协 会 研 究, 世 界 知 识 出 版 社. 吴 庆 堂 (1998), 韩 国 的 华 文 报 业, 新 闻 知 识 4 期, 陕 西 日 报 社 深 圳 商 报 社 외, 48면. 庄 国 土 (2000), 1978 年 以 来 中 国 政 府 对 华 侨 华 人 态 度 和 政 策 的 变 化, 南 洋 问 题 研 究 3 期, 厦 门 大 学 南 洋 研 究 院, 1~13면.
102 한국학연구 46 Abstract Research on Publishing Activity of Chinese in Korea Focus on the Publishing of a Chinese Magazine Korean-Chinese culture ( 韓 中 文 化 ) Song Jia (University of Seoul) Korean-Chinese culture ( 韓 中 文 化 ),a monthly magazine is the representative of Chinese publications in Korea. And it has a sustained publishing history of 12 years from 1974 to 1985. As the bridge of mutual communication, it plays a significant role in information transfer and emotion exchange among Korean overseas Chinese. The paper, following a sequence of its foundation, development and closure, explores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Korean-Chinese culture through the analysis of the change of leadership and its content in each period, aiming to make it easier for the research on publishing activity of Korean overseas Chinese. Key words:korean overseas Chinese, publishing activity, Chinese magazine, Korean-Chinese culture 宋 佳 소 속 :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전자우편 : aysongjia82@naver.com 투고일 13. 6. 27 / 심사완료일 13. 9. 10 / 게재결정일 13.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