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올해는 우리나라가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고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을 맞이한 지 정확히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세계8대 무역강국,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 전 세계 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한류문화의 중심, 모두가 우리나라를 수식하 는 자랑스러운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 문화의 발전과 70년간 이어온 분단의 문제 등 아직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 위원회는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이라는 주제로 광복 이후 70년의 기간을 광복, 정부수립,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와 통일시대 를 중심으로 논의하고 각각의 시기를 관통하는 통합가치에 관해 논의할 예정입니다. 이번 토론회를 통해 자칫 갈등과 혼돈의 시기로 보일 수 있는 각각의 시기에도 국민 모두가 하나의 통일된 가치, 신념을 가지고 자유 대한 민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었음을 확인하고, 선진한국, 국민통합, 통일국가 달성 이라는 미완의 과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 진정한 광복 으로 가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바쁘시더라도 함께 하시어 고견을 보태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한 광 옥
광복70년 기념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일시 - 2015. 8. 12.(수) ~ 13.(목) 장소 - 세종문화회관 예인홀
프로그램 8월 12일(수) [주제 1]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09:30-10:00 등록 10:00-10:05 행사안내/국민의례 및 애국가 제창 10:05-10:10 개회사: 한광옥(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10:10-10:15 축 10:15-10:40 발제 1 _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허동현(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10:40-11:05 발제 2 _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냐, 대한민국 건국 이냐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11:05-11:20 휴식 및 질문 수령 11:20-12:00 토론 12:00-12:30 질의응답 및 폐회 8월 12일(수) 사: 정종욱(광복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간위원장) [주제 2] 산업화 민주화 13:30-14:00 등록 14:00-14:05 행사안내 14:05-14:30 발제 1 _ 통합의 역사인식 가치와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화해를 향하여 김세중(前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시대정신 발행인) 14:30-14:55 발제 2 _ 시장질서 대 민주질서의 변증법과 공화사회 윤평중(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14:55-15:10 휴식 및 질문 수령 15:10-15:50 토론 15:50-16:20 질의응답 및 폐회 8월 13일(목) [주제 3] 선진화와 통일시대 준비 13:30-14:00 등록 14:00-14:05 행사안내 14:05-14:30 발제 1 _ 안보통일 정론을 통한 국민대통합 김태우(동국대학교 석좌교수) 14:30-14:55 발제 2 _ 선진화와 통일 이숙종(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14:55-15:10 휴식 및 질문 수령 15:10-15:50 토론 15:50-16:20 질의응답 및 폐회
8월 12일(수) 10:00~12:30 주제 1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좌장 이주영(건국대학교 명예교수) 발제 1 허동현(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발제 2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냐, 대한민국 건국 이냐 토론 1 토론 2 토론 3 토론 4 윤성이(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 진경호(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 이종철(청년지식인포럼 Story K 대표)
광복70년 기념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주제 1>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발제 1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허동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ㅇㅇㅇ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km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 赤 城 )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 艦 載 機 )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 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캡션 : 일본 제로센(Zero Fighter)기의 폭격을 맞아 불타오르는 전함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 진주만공습 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지만, 반 년 만인 1942년 6월 5일 미드웨이해전을 전환점으로 일본제국은 파멸의 길을 걸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13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 을 내세우 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 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 직 한국인 만주인 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 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 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 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 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 火 葬 爐 )였던 그날 10만 이 넘는 생령( 生 靈 )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 과 1억 옥쇄( 玉 碎 ) 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캡션 : 1945년 3월 10일 약 100만발의 소이탄의 소낙비가 내린 도쿄는 지상 30m까지 치솟 는 불기둥 속에서 집과 자동차는 물론 사람들도 숯처럼 검게 구워져 버렸다. 그때 단 한 차례의 폭격으로 대략 25만 동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180만 명이 살 곳을 잃었다. 14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 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 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 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 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 終 戰 )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 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 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 영 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 영 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을 요구하는 포 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 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 (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캡션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폭발 직후 발생한 버섯구름. 34만여 명 중에서 약 7만 명이 사망, 13만 명이 피폭자가 되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15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 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 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 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 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캡션 :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 나 광복의 감격을 온 몸으로 분출하는 독립투사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 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 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 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 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16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 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 는 몰로 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 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 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 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 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캡션 : 사진은 광복의 환희가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9월초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경을 담고 있다. 민초( 民 草 )들이 길 한 복판 자갈돌로 쓴 38이란 숫자 좌우로 그어진 선이 잉태 한 비극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17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 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 宗 谷, La Perouse)해 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 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 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 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 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 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 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 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 捨 石 )이었다 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 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 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 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 반소 반탁 노선 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 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 連 席 )회의 에 참석하기 위해38 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 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 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 鳩 首 )회담과는 거 18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 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 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 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 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 불가 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 可 爲 ) 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 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 하고 외각( 外 殼 )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 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 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 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캡션 : 2005년 북한이 보내온 1948년 4월 22일 연석회의장으로 김구를 안내하는 김일성 사 진. 대한민국 건국 한 달이 채 못 된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 섰다. 이미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는 지령을 내렸으며, 1948년 2월에는 조선인민군 을 창설하고 헌법 초안도 공표한 상태였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19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 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 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김 회 담 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 도 구속 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 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 ( 成 憲 )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 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 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 史 家 )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 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 선 주구( 走 狗 )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 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 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 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 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 이었 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 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 이었지 한반도는 해당 20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 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 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 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 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 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 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 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 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 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 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 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 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 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 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 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며 5 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 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 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21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 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 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캡션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선포식 모습 이승만이 김구 등의 5 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 무상배분 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 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 이 발표된 상황 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 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고 보도할 정도 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22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 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 張 勉 )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 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 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 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 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 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 후 한국문제는 미 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23
캡션 : 제3차 유엔총회에 임한 한국 대표단 (앞줄) 조병옥, 장면 수석, 장기영 (뒷줄)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김진구, 김우평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 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 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 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 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 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 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 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 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 을 아끼지 않았다. 24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캡션 : 제3차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 장면이 발급받은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1호의 앞면. 영 문으로 바티칸에 파견되는 특사임이 명기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교황청의 지 원은유엔 승인 획득에 있어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 (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 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 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캡션 :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1호의 뒷면. 장면 사진 옆 신장 5척 7촌, 모발 흑색, 안색 갈 색 이란 본 여권 소지인의 특징 란에 기재된 내용이 이채롭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25
캡션 : 유엔 총회 후 교황 비오 12세 예방차 바티칸 궁을 공식 방문한 장면 수석대표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 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 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 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캡션 : 유엔 총회 표결을 앞두고 덜레스(John Foster Dulles)와 숙의( 熟 議 )하는 장면 수석 대표 26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 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 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캡션 : 덜레스가 작성해 장면 대표에게 준 1948년 12월 12일 오후 5시 15분에 실시된 제3 차 유엔 총회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대한 표결 결과를 정리한 Voting Check List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 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 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 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 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 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 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 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 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 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 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27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 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 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 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 亡 國 ), 임시정부 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 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 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 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 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 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1)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 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 認 定 )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 적 승인은 1950년 6 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 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 사회의 기억은 긍부( 肯 否 )와 호오( 好 惡 )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 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 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 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 버지 로 다가선다. 1)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 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 이었 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 로 부결되었다. 28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 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 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 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 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 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 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法 統 )을 계승한다 는 헌법 전문( 前 文 )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 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 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 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 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29
캡션 : 1946년 봄 민주의원 회의를 마친 후 악수를 나누는 사진 속 이승만과 김구처럼 우리 시민사회도 서로 부딪치는 역사기억을 넘어서기 위해 화해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 것이 우리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건너야 할 화해의 강물에 놓인 징검다리의 첫 번째 디딤돌이 될 터이다. 30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광복70년 기념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주제 1>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발제 2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냐 대한민국 건국 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냐 대한민국 건국 이냐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 교수) I.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냐 대한민국 건국 이냐? 1.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 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 해방 기념일 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 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 이라는 합 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 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 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 년 당시에는 남 북 좌 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 1주년, 해방 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 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 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 에는 독립기념일( 獨 立 記 念 日 ) 로 되어 있어[1국경일은 3 1절, 헌법기념일, 독립기념일, 개천 절로 함] 1)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 지 명확하지 않다. 1) http://www.klaw.go.kr/cnt/lawcontent/mcntlawetcabsdataview.jsp?filename=jovi ew&showchk=&s_lawmst=4167&l_jono=&l_josn=&l_bupubdt=&l_bupubno=&gubun =&history=&srchgb=&index=&down=(검색일: 2005년 7월 11일);http://www.law.go.kr/ lsrvsrsnlistp.do?lsiseqs=165523%2c72262%2c4167&chrclscd=010102 (검색일: 2015년 3월 30일).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33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 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 서 초안에는 8 15가 독립기념일 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 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2)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 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 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 복절 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 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 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 자구에 집착했으 며, 3 1절, 개천절과 같이 절 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 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 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 라 1948년 8 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3) 1945년 8 15가 아니라 1948년 8 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 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 라고 번역했다. 4)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 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 어인 liberation이다. 5)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 光 復 節 )을 Independence Day of Korea 라고 번역하다가, 6)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 로 바뀌어 있다. 7)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2) 이영훈,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 이승만 포럼 발표논문, 프레스센터, 2011 년 8월 10일, 이영찬, 대한민국은 왜 독립을 기념하지 않는가?: 이영훈 교수, "대한민국 정 부와 국민은 건국과 독립을 忘 却 의 방식으로 부정해 왔다," 코나스넷, 2011년 8월 11 일,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26258 (검색일: 2015년 3월 30일). 3) 김효선,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명칭 변경된 경위와 그 여파, 이주영 (편), 대한민국 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 (서울: 뉴데일리, 2011), p. 156. 4) http://www.korea.net/news/issues/issuedetailview.asp?board_no=9214 (검색일: 2005 년 8월 1일); Address by President Park Geun-hye on the 69th anniversary of Liberation, Aug 15, 2014, http://www.korea.net/government/briefing-room/presidential -Speeches/view?articleId=121366 (검색일: 2015년 4월 25일). 5)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 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 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6) http://endic.naver.com/endic.php?&docid=146632 (검색일: 2005년 8월 1일). 34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 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 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 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 이라는 표현 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 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8)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 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 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9)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 는 뜻 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 거나 한국은 1945년 해 방되었다 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 한 노예(상태)를 해방 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 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 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 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 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 을 의 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 이다. 주역에서 复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 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 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 태(주권 회복) 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 7) http://endic.naver.com/search.nhn?sln=kr&isonlyviewee=n&query=%ea%b4%91% EB%B3%B5%EC%A0%88 (검색일: 2015년 4월 25일). 8) 임대식, 일제시기-해방 후 나라이름에 반영된 좌우갈등: 우 대한-좌 조선가 남 대한- 북 조선의 대립과 통일, 역사비평 제21호 (1993년 여름), p. 38. 9) 한홍구, 건국절? 차라리 8 29를 '문명절'이라 해라: 그들이 '광복'을 싫어하는 이유, 프레시안, 2008년 8월 4일,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 article_num=60080804064958 (검색일: 2008년 8월 28일).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35
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 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 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 다. 10)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 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 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 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 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 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 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 15에 주권을 찾았을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 이며, 광복은 1948년 8 15가 더 적절하 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2. 1948년 8 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 을 주권(국권) 회복 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 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 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 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 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11)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 었고, 12)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 10) 이영훈, 건국 기억의 60년간의 발자취, 이주영 (편),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 (서울: 뉴데일리, 2011), pp. 63-64. 11)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 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 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 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 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 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36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 이므로 1948년 8 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 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 이라는 것이다. 1945년 8 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 어갔으므로 광복의 날 이 아니며 독립의 날 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 15는 광복의 날 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 이라고 주장 했다. 따라서 1945년 8 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 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13)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 (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 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 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 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 로 명기하여, 14)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 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 조선일보 ; 인 12)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 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 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이재봉,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1): 해방 후 최초의 반미 데모는? 프레시안, 2014.10.21 15:50:28,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1127 (검색일: 2015년 4월 6일).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 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 십년 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재봉,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2):미군은 해방군? 소설 속 드러난 미군의 민낯, 프레시안, 2014.10.28 14:26:21,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1324 (검색일: 2015년 4월 6일).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 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3) 김효선,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명칭 변경된 경위와 그 여파, 이주영 (편),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 하지 않는가 (서울: 뉴데일리, 2011), pp. 154, 173-175. 14) 대통령 이승만박사 담화집 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김효선,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명칭 변경된 경위와 그 여파, 이주영 (편), 대 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 (서울: 뉴데일리, 2011), p. 159.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37
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 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15)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 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 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 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 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 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16)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 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기본 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 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 (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7)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 생 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 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 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 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15) 김효선,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명칭 변경된 경위와 그 여파, 이주영 (편),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 (서울: 뉴데일리, 2011), pp. 169-170. 16) KBS공영노동조합, 공영방송 역사 바로 세우기 - 광복 70년, 횟수 논란, 2015년 1월 19일, 이보연, KBS공영노조 공영방송이 광복70년 이라니... : 공영노조, 해방, 광복, 건국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공영 방송 역사 바로 세우기 KBS <광복 70년 미래 30년, 대한민국 100년의 드라마> 슬로건 비판, 뉴스파인더, 2015년 1월19일, http://www.newsfind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882(검색일: 2015년 3월 1일). 17) 서중석, 대한민국의 탄생 - 광복절인가, 건국절인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개정증보판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3), pp. 116-117. 38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이미 1945년 8 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 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 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 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 15 직후 미 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18)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19)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 방 20) 불완전한 광복(부분적 광복; 부분의 광복 21) )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 논쟁을 지 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 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 로, 미군정의 지배로부 터 독립된 1948년 8 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 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 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 다. 22)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 이라는 18)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송광성, 8-15는 해방의 날이 아니다, 역사비평 계간6호 (1989년 가을), 212-213쪽. 19)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 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 15를 정말 8 15를 (...)." 이 재봉,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3): 강화도 농민들이 미군캔디'를 거부 한 까닭은? 프레시안,2014.11.04 14:50:33,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 =121492 (검 색일: 2015년 4월 6일). 20)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 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 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 불완 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21) 김인식, 대한민국 정부수립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4), p. 47. 22)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 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 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 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 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 이라고 했다. 김명성 윤동빈, 보수 진보 망라... 통일운동동단체 모두 참석,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1면. 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 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 이 가능하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39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 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 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 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 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 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 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 (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 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 극단적 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 25전쟁이 발발하 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 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23)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 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4) 3.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 건국60년 중앙경축식 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 의 역사였다 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 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 를 평 23)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 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24)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40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 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 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25)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 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 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26) 이제 차분히 돌아보 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 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 도 했다. 27)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 과 해 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 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 는 것이다. 28)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 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 25) 강만길,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78), pp. 14-15. 26) 홍석률, 대한민국 60년의 안과 밖, 그리고 정체성, 창작과 비평, 통권 139호 (2008년 여름). 27) 대한민국 건국 인가 정부수립 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 연합뉴스, 2008년 5월 13일.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sear chtext=%eb%8f%99%eb%b6%81%ec%95%84%ec%97%ad%ec%82%ac%ec%9e%ac%eb%8b%a8%20'%ea %b1%b4%ea%b5%ad%2060%ec%a3%bc%eb%85%84'%20%ed%95%99%ec%88%a0%eb%8c%80%ed%9a% 8c&contents_id=AKR20080513202000005 (검색일 2008년 12월 26일)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 은 대한민 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 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 으로 축소해 불완 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 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 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한편 이만열, 정당하 게 평가받지 못한 독립운동, 한홍구 (외),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 (5인5색 한국 현대사 특강) (서울: 철 수와 영희, 2009)에서 건국이냐 정부수립 이냐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28) 박명림, 이승만의 한국문제-동아시아-국제관계 인식과 구상: 악마화와 신화화, 건국 담론과 분단 담론의 대립을 넘어서, 역사비평 83 (2008년 여름), p. 58.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41
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 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 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9)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 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 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 이 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 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 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 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30) 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 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 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 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 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 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 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 15를 건국보다는 정 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 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 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 29) 김영호, 국가론의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 건국의 특징과 의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0집 1호 (2008년 8월), p. 23. 30)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서울: 한울, 1995), p. 84. 42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 한민국건국 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 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 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 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 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31)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 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 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32)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 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 사를 지나치게 협애화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 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 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31)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 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 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 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 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 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 고 말했다. 안수찬, 대한 민국은 민주공화국 헌법정신 되살려야 :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토론회, 한겨레, 2008년 8월 20일. 32)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 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 에 해당한다 고 도 했다. [이대근의 단언컨대] 의심만으로 단정 법리적 판단 아닌 정치적 판단, 경향신 문, 2014년 12월 19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191959401&code =910100&nv=stand (검색일: 2014년 12월 20일).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43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 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 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 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33)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4.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 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 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 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 주의적 역사인식 인데 비해 건국절 제 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 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 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 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 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 자는 1948년 8 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 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 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 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 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 33) 김세균, "정부수립 60주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뉴라이트의 식민지시기와 대한민국 건국 및 초창기 해석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사단법인 아셈연구원(편), 한국 현대정치외교의 주요 쟁점과 논 의 (서울: 선인, 2009), pp. 37-38. 44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 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34) ]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 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 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 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34)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45
토론 1 윤성이(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 H. Carr의 책을 인용하자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역사가와 과거 사실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사실을 반추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보다 발전적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역사적 사실은 현대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또한 모든 역사는 생각의 역사이다. 즉 과거의 사건과 사실은 역사가의 새로운 해석과 가치가 부여되면서 역사 적 사실로 거듭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E. H. Carr의 역사관을 따르자면 오늘날 우리에게 해방정국의 역사가 중요 하고 광복 70주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금의 사회, 정치와 연결되어 있 고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해방과 좌익과 우익의 쟁투 그리고 남 북분단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진영정치를 통해 그 끈을 이어오고 있 다. 우리 사회 진보와 보수 세력은 사회정치적 쟁점이 생길 때 마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를 평가할 때 마다 매번 이념적 불러내기 (ideological interpellation)에 의존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 모두 해방정국의 역사와 이후 우리 현대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해석과 가치를 부여 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념적 불러내기 를 덧칠 하면서 해방정국의 역사 를 정치적 반대자를 억압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하는 양상이 뚜렷하다는 것 이다. 해방정국의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교훈과 시사점을 주고 있는 지, 그리고 미래 한국의 방향을 잡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 민과 토론이 있을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허동현 교수님의 논문은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드러난 이승만 대통령의 공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승만, 장면 두 사람의 성공적인 외교 전 략과 헌신이 있었기에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이 가능하였다고 평가한다. 우리 사회 진보와 보수가 이승만과 김구 두 민족지도자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내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47
리고 있는데, 이를 극복하고 두 분 모두에게 건국의 아버지들 이라는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허 교수님의 주장이다. 두 정치지도자에 대한 평가 는 치밀한 사료분석을 통해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E. H. Carr의 주장처럼 역사는 생각의 역사이다. 역사가들이 그리고 개인들이 자신 의 해석과 가치를 부여하면서 두 민족지도자를 평가할 것이다. 당장에 이완 범 교수님은 이승만을 국부로 자리매김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 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 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 나치게 협애화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두 지도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더 궁금한 것은 두 지도 자에 대한 평가가 현대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가이다. 즉 두 지도자가 건 국의 아버지들 이라는 자리를 찾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 며 미래 한국에 어떤 디딤돌이 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완범 교수님의 논문은 해방과 광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교수님의 주장에 따르면, 1945년 8 15 직후 미 소 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 립되지는 못했다. 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 다.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음로 불완전한 해방 불완 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거에 따라 이 교수님은 1945년 8 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 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 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 로 부르는 것 을 제안한다. 그러면서 이 교수님은 역사에 대한 대립적이고 다양한 인식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능은 했으나 지금 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역사인식의 획일화를 경계하면서 다양한 의견표출이 자연스럽고 나쁘지 않 다는 주장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갖는 의문은 앞의 논문과 마찬가 지로 해방과 광복 논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중요성이 무엇인가 48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라는 점이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해 방, 광복 논쟁의 필요성은 이해할 수 있으나 과거와 현대와의 대화라는 관점 에서 볼 때 이러한 논쟁을 통해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역사를 과거와 현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할 때,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발전적 미래를 위한 디딤돌을 놓아야 한다고 할 때 해방정국의 역사에서 개 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사건은 제헌헌법 제정의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헌법은 시대의 가장 중요한 현실적 요구를 담고 있어야 하고, 그 내용은 지난한 정 치적, 사회적 토론과 경쟁을 통해 완성된다. 그런데 우리 제헌헌법은 우리사 회의 역사적 경험과 이념적 토론을 반영하지 못한 채 밖으로부터 주어지고 국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헌법이 우리사회와 유리되어 만들어졌고 이러 한 점은 현재도 여전하다. 오늘날도 개헌을 논의할 때 마다 쟁점이 되는 것 은 오직 권력구조의 문제뿐이다.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사회 적 합의를 헌법이 담지하지 못하고 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49
토론 2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 허동현 교수님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먼저 토론에 앞서 오늘 광복 70주년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에 참가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주 최측에 저를 토론회에 위촉해주신데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토론은 대한민국 선진화와 통일시대를 준비하고 통합가치를 찾아보는데 매우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허동현 교수님의 발표는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의미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비전을 제시해 주셨 다고 생각합니다. 허동현 교수님의 발표 중 21세기에서의 광복과 남북분단 문제,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문제,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 다는 문제의식에서 접근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의 문제들을 핵심적으 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토론자는 광복의 의미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가치,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의 필요성 등에 관해서는 대체로 허동현 교수님 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특히 이승만이 정읍선언에서부터 미국의 정책변화를 이끌어내는 주도자였 다는 지적은 탁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은 미소의 대립, 처칠의 철의 장 막 선언 등 세계 냉전의 흐름을 간파하고 정읍선언을 했던 것이고, 나아가 정부수립 이후 그리스와 터키와 같은 냉전전략을 한반도에서 적용할 것을 초지일관 미국에 요구했습니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 과정이나, 반공전략, 그 리고 한미동맹 등 일련의 주요 과정에서 공히 매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 으며, 그 결과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변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에 관한 장면 대표의 역할에 관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 제를 제기해 주셨습니다. 대한민국은 건국 직후 내부 안정화와 함께 국제사 회로부터의 지지가 가장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는 평소 장면에 관해 깊이 연구하시는 분으로서 이 문제에 관해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해주셨습니다. 바티칸 정부 설득과정이나 그 역할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51
며,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이 기적과 같은 축복 이었다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유엔총회에서의 한국대표단의 역할과 유엔의 승인 문제, 건국외교 문제는 앞으로도 더욱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 오늘 발표하신 내용이 광복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 후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제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학계에서 일반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논쟁중인 사안들도 상당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러므로 토론자는 발표내용 가운데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하거나 논의가 필요 한 부분에 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광복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는 광복을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이라는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물론 절 제목을 정하는데 허동 현 교수님께서 상당한 고심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도둑같이 찾 아 온 광복 이란 표현은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광복 은 연합군의 전세에 따라 예견된 객관적인 조건이었고, 광복이 우리에게 갑 자기 찾아온 것은 우리의 지도자들이 미처 준비되지 못하여 갑자기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주관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광복은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 서든 하루속히 이루어야할 민족적 대과제였고, 문자 그대로 우리민족에게는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의미의 도둑 처 럼 찾아왔다고 하는 것은 다소 수궁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둘째, 전시회담 시기 미국과 소련의 대외정책 평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물 론 이 문제는 냉전의 기원과도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허동현 교수님께서는 미소의 관계를 사후적인, 냉전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시 회담 중 미국과 소련은 같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제사회에서 기능했고, 소련은 그들의 국가이해 관계 속에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면서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고 대일참전의 타이 밍을 보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얄타협정 체결 당시에도 소련군 주력 대 부분은 동부전선 독일군과 대치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미국의 일반명령 제1호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일반명령 제1호 는 한반도 남북에 배치된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관한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것은 해석의 관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이 문제 역시 학계에서 여전히 다양한 논의로 갈리고 있습니다만, 52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38선 이북과 이남에 배치된 일본군 무장해제 과정이 냉전의 시작과 맞물리 면서 38선이 고착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 니다. 물론 종전 직후 소련은 동유럽지역에서의 공산화 정부수립을 지도하여 유럽 국가들을 위협하였고, 한반도에서도 광복 직후 북한 공산정부 수립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38선이 분단의 선으로 점차 고착화되었다 고 생각합니다. 넷째,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할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미국은 대한 민국 정부수립 전후 내부 안정화를 위한 경제적으로 지원하였고,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NSC8, 48/2, 68의 한반도 정책은 대한민국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었습니다. 그 결과 남침 직후 미국정부는 유엔군이 편성되기도 전에 신속 하게 미군을 투입하여 지원하였습니다. 미 육군부나 합참이 1947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한 것은 미군철수 문제를 두고 논의한 것이었으며, 미 지상군 부대를 한반도에 배치할 만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지 한국 자 체가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존 많은 연구에도 이 부분에 관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국의 아버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는 대한 민국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을 계승한다. 라는 것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역 할 부분을 고려하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하는 것을 제안해 주셨 습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오늘날 학계를 포함한 우리사회에 첨예하게 대 립되는 갈등을 해소하는 데는 도움일 될지는 모르나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임시정부시기의 독립운동의 역사도 매우 중요하지만, 건국의 아 버지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에 직접 역할을 수행한 부분이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국부 문제를 논의해야 하 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53
토론 3 진경호(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 1970년대 중등교육을 받은 세대의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부정적 이미지, 김구 선생에 대해서는 긍정적 이미지가 각인돼 있 는 게 현실이다. 다시 말해 이승만 대통령은 조국의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의 역할보다는 정 부 수립 이후 펼쳐온 독재적 집권 형태에 대한 부정적 역사 인식이 강조됐 고,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수반으로서의 항일 운동과 독립, 그리고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민족지도자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됐다. 박정희 정부가 집권하고 있던 1970년대 초 중 고교의 역사 교육이 이처럼 이승만-부정, 김구-긍정 의 프레임으로 이뤄진 배경은 결국 5 16 군사정변 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5 16 정변은 장면 자유당 정부의 무능에 따른 극도의 국가적 혼란 때 문이며, 이 국가적 혼란은 결국 이승만 정부의 장기독재와 이에 따른 4 19 혁명이 촉발한 것이라는 구도를 부각하는 것으로 5 16 정변의 역사적 불가피 성 내지 정치적 정당성을 강조한 까닭에 이승만-부정, 김구-긍정 프레임 이 형성된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역사인식의 구도는 이후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도 별다른 수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았고,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 들어 독재와 반독재, 민주와 반민주의 프레임이 강조되 는 상황에서 더더욱 강화됐다고 할 것이다. 가운데의 목소리는 없고 좌 우, 진보와 보수 양 극단의 목소리만 힘을 얻는 지금의 편향(polarization)의 시 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이 대통령을 비롯해 그 어떤 역사적 인물도 저마다의 공과 과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으나 우리는 그 둘을 함께 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서 있는 이념적,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55
정치적 자리에 따라 공과 과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바라보려 한다. 마치 이 념적, 정치적 외눈박이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인 듯하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 라 역사를 재단하고 사회를 가르는데 매몰된 정치권이 일차적 책임을 져야 겠으나, 이념적 정치적으로 갈라져 있는 사실조차 왜곡해 바라보는 학계의 잘 못도 적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무거운 책임의 일단은 우리 언론이 져야 할 일이다.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지금 사회를 갈라놓는 선봉에 서 있는 게 현실이다. 사회통합의 기능을 발휘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 갈등을 부추길뿐더러 사회 갈등을 적극 소비하고 있는 게 지금 언론의 현실이다. 이는 지난 달로 서거 50년을 맞은 이승만 대통령을 재조명하는 보도 태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다. 진보 진영의 매체들은 저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고, 보수 진영 매체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이 대통령의 업적을 부각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어떤 매체도 이 대통령의 공과를 균 형감 있게 보도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 진보 진영의 무조건적인 이승만 깎아내리기 나 이에 대한 반동적 태도로 나타나는 보수 진영의 이승만 찬양 모두 우리 사회의 올바른 역시 인식 함 양과 국민 통합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역사적 공헌이 왜곡되고 후세에 잘못 가 르쳐져 온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펼쳐져 야 함은 당위의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이념적 또는 정치적 잣 대를 넘어서는 틀 속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자칫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보 기 위한 노력이 정치적으로 악용돼 우리 사회를 친 이승만 대 반 이승만, 보수 대 진보, 우파 대 좌파 식으로 갈라놓고 서로 싸우도록 만드는 결과만 초래한다면 이승만 바로보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거 50 년을 맞아 전개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평가 작업도 공을 강조하되 과도 짚고 넘어가는 현명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이 대통령의 과오 를 부각시키는 데 집착하는 세력 내지 진영과의 소모적 논쟁을 줄여 나가는 노력을 곁들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56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토론 4 이종철(청년지식인포럼 Story K 대표) 허동현 교수는 광복이 미국의 참전이라는 변수 속에서 기인한 측면과 분단 의 책임자로 소련의 움직임 그리고 남북 협상의 현실적 한계 등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승만이 UN의 승인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던 전략과 UN 승인의 의미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허동현 교수가 초점을 두고 있는 내 용들은 요긴한 자료들을 통해 설득력있게 제시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 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 로 자긍하는 이 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 땅한 건국의 아버지 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 로 비칠 뿐 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서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 착화 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 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이승만과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이라는 자기 자리를 찾아 갈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 고 있다. 이승만과 김구를 공히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허 동현 교수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며 설득력이 있다. 이완범 교수의 1945년 8월 15일에 대한 해석, 1948년 8월 15일에 대한 해석에 있어 다양한 견해들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고 설명해 주고 있다. 결 론적으로 (서중석은)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 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 식 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 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 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분단[단독 35) ]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57
건국 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이완범의 견해는 일견 적절한 타협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를 분단정부 라고 설정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 는 보다 심도있는 검토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이 승인한 바 한반 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한다면 그에 준해 접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분단담론과 건국담론을 극복하는 방향 역시 현상적인 접근과 해석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데 초점이 두어져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건국과 정부의 수립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역사적 방향을 설정할 것이 냐 아니냐의 문제부터 정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북한과 대한민국을 양 립해서 볼 것이냐 아니면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북한을 자유 통일해야 할 대 상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기본적인 입장 정리가 필요한 대목인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물을 중심으로 대별한다면 한반도에는 크게 세 가지 역사 관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역사 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역사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역사관 으로 구분 된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역사관은 이승만을 크게 저평가하며 분단의 책임 자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북한 정권 수립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편향적인 인식을 나타내기도 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저 평가 하다 보니 북한 정권 수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객관적이지 못한 문 제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필자가 북한의 역사서를 분석한 결과 북한 역사학 계의 사관인 김일성 중심의 역사관은 김구 역시 저평가하며 이승만은 배타 적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2000년대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제로 바뀐 이후 지속된 이른바 한국사교과 서 논쟁 속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살펴보면 김구 중심의 역사관은 이승만의 복권 에 대해 극히 배타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에 서 가장 아쉬운 점은 북한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함과 한국에 대한 굴절된 35)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 이다. 58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이해-가령 반미주의 등-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론 김일성 중 심의 사관과 김구 중심의 사관이 혼동되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편향성을 극 복하고 객관성을 견지하는 것이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논쟁의 귀결점은 결국 분단사관, 통일지상주의, 민중사관 등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해석 하는 데 머무를 것이냐 자유민주주의, 문명주의 관점으로 역사 해석을 확장 할 것이냐의 문제가 되고 있다.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두산동아 p. 270.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미래엔 p. 310.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 l 59
위 두 사진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비슷한 형태로 모든 교과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행 한국사의 교과서의 경우 차이는 있지만 주류 교과서들이 취하고 있는 관점은 결국 위 두 사진 의 내용을 통해 김구는 옳았을 뿐 아니라 순수하고 헌신적이었으며 이승만 은 분단의 책임자라는 인식이다. 결국 역사의 화해는 김구와 이승만을 알맞은 자리에 놓는 것이라 생각된다. 김구를 단지 시대착오적 정치가 로 저평가하며 그 진정성마저 도외시하는 것 은 지양되어야 한다. 반면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 인식의 변화 역시 필요 하다. 김구 중심의 역사관은 통일지상주의와 민중주의적 관점에 매몰되어 당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도외시하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역사적 평가까지 같이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런 점은 극복이 되어야 한다. 이승만이 분단을 획책한 인물이 아니라 해당 시기 현실적으로 움직였으 며, 북한에서 정권 수립 작업이 이미 이루어진 상황에서 총선거 를 통해 한 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 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인정하거나 또는 그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정도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승만의 의지로 6.25전쟁에서도 북한의 김일성 세력을 타승하고 대 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 역시 인정할 필요가 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역사관은 이런 부분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 이승만은 대 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이지만 독재로 나아감으로써 불행한 오점을 남겼다는 것이 이승만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같은 이승 만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뉴라이트 역사관 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왜곡되고 배제되고 있다. 김구와 이승만이 올바로 자리매김 되기 위해서는 열린 관점에서의 토론과 수용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역사학계가 이념의 도그마 에 사로잡힌 연구 가 아니라 보다 엄정하고 객관적이며 책임있는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역사 가다운 열린 자세와 관점이 절실한 것이다. 통일시대를 이끌기 위한 대한민 국 통합가치는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으로부터 시작된다 하 겠다. 60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8월 12일(수) 14:00~16:20 주제 2 산업화 민주화 좌장 김주성(한국교원대학교 총장) 발제 1 김세중( 前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시대정신 발행인) 통합의 역사인식 가치와 산업화와 민주화세력의 화해를 향하여 발제 2 윤평중(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시장질서 대 민주질서의 변증법과 공화사회 토론 1 토론 2 토론 3 토론 4 강규형(명지대학교 기록대학원 교수) 성한용(한겨레 선임기자) 황성준(문화일보 논설위원) 양건모(정의연대 공동대표)
광복70년 기념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주제 2> 산업화 민주화 발제 1 통합의 역사인식 가치와 산업화와 민주화세력의 화해를 향하여 김세중 ( 前 연세대학교 교수, 현 계간 시대정신 발행인)
통합의 역사인식 가치와 산업화와 민주화세력의 화해를 향하여 김세중( 前 연세대학교 교수, 현 계간 시대정신 발행인) Ⅰ. 통합의 역사인식가치와 산업화와 민주화세력의 화해를 향하여 1) 1. 들어 가는말 1948년 건국이후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87년 6월 항쟁의 결과 지속가능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른바 87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무엇보다 그 체제아래서 결과가 불확실한 경쟁적 선거를 통한 정권이양이 누구도 도전할 수 없 는 규범으로 정착하고 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확보한 민간정치인들이 권 위주의시대에 국가보위기구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던 정치과정의 주역으 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6월 항쟁이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의 확실한 계기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이른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전시대에 예측하지 못했던 또 다른 수준에서 문제점을 노출 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와 관련된 중요한 항목의 하나가 통합가치 확보와 사 회적 통합의 문제이다. 주지되듯 권위주의시대 한국사회는 치열한 갈등 과 균열로 점철된 시대였고 당시 균열을 야기한 최대의 쟁점은 이른바 민주, 반민주 를 둘러싼 것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시대가 개막되며 자연스럽게 민주와 반민 주를 둘러싼 갈등요인이 해소되며 전반적으로 통합의 시대가 열릴 것으 1) 본 발표문은 김세중 건국 산업화 민주화의 갈등과 상호의존 안병직편,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 시대정 신, 2011. 110-143쪽. 김세중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와 외환위기 이태정 외,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 한울 아카테미, 2014, 66-131. 김세중 유신시대 중화학공업과 정치변동 박기주 외, 한국 중화학 공업화와 사 회변동,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014, 695-749쪽의 논지를 이어가며 새롭게 첨삭한 것이다. 산업화 민주화 l 65
로 기대 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 균열양상은 더욱 다기화 되고 심 화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무엇보다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통합이 항시적 으로 중요한 사회적 화두로 부각되는 것은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 발표에서는 특히 정치사회의 주역에 해당하는 여야 정치세력 사이 에 심각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는 갈등양상에 주목한다. 그들이 민주화 이후에도 서로를 광의의 국정동반자라고 하기보다는 적대적 상호불신과 배제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 우리사회의 대 체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를 포함 한 미래지향적 국정운영에 미치는 폐해가 가름하기 힘들 지경 이라는 것은 첨언할 필요도 없다. 그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관계를 야기하는 원 인은 제도와 문화 혹은 행위자의 인격적 특징 그 외 사회변동 양식의 특수성 등 다양한 수준에서 논의 될 것이나 본 발표에서는 정치사회균 열의 근본적 요인의 하나로 한국사회에 풍미하는 분열적 배제적 역사 인식 을 제시한다. 주지되듯 오늘날 한국정치사회에서 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여야의 두 정치세력은 이른바 산업화 세력 과 민주화세력 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강 조할 것은 이 두 세력은 민주화 이전 시대에 시종일관 적대적 긴장관계 아래 있었다는 점이다. 산업화세력은 민주화세력을 생산적 국정운영 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폄하했고 역으로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을 민주 주의를 파괴한 독재 권력집단 으로 치부하여 결과적으로 상대를 정치사 회에서 배제 되어야할 집단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사회가 민주화 이전의 적대적 균열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배경에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사이에 오랜 시간에 걸친 형 성된 뿌리 깊은 적대의식이 놓여 있다는 것이 이글의 기본전제다. 그러 나 이 발표문이 보여주듯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상보적 입장에서 그들은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근대 국민 국 가체제를 갖추는데 결여될 수 없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이에 대한 분 명한 인식은 오늘날 정치사회에서 대립 하는 세력이 대화합을 통해 미 래지향적 협력 체제를 갖추는데 매우 유용한 기초를 놓는 작업이 될 것 이다. 본 발표는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분열과 배제의 역사인식 을 극복하고 66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
통합의 역사인식 의 관점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세력의 역할 재조명을 시 도한다. 이런 전제에서 본 연구는 1948년 이후 한국현대사전개의 주요한 매듭 을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로 규정하고 이것이 계기적으로 달성되는 과 정에서 산업화 국정주도세력과 민주화 대항세력의 역사적 역할을 논한 다. 이는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전개과정에서 큰 쟁점을 이루었던 주요 사건들, 예를 들어 이승만 권위주의 체제, 군부권위주의 체제와 압축산 업화, 박정희의 사망과 신 군부 지배질서의 등장과 6월 항쟁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업의 전제로 먼저 통합의 역 사 인식구조의 의미를 정리한다. 다음에 분단국가로서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된 쟁점을 고찰하는데, 이는 아직도 분단책임론과 관련하여 대한민 국 건국의 정당성이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사이에 파열음을 야기하 는 쟁점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2. 통합의 역사인식과 민주운동 사관의 한계 통합의 역사인식은 구체적으로 한국 현대사의 주요 갈등 당사자였던 이른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은 결과적으로 2) 상보적 관계 속에서 한 국 사회발전에 불가결한 구성분자로서 기능해온 것으로 이해하는 역사 인식 태도이다. 통합의 역사인식은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다 는 의미와 함께 한국 사회에 현존하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치유라는 실천적 의미도 지닌다. 이미 언급했듯 오늘날 한국 정치 사회갈등의 상 당부분은 산업화와 민주화세력이 한국 현대사 속의 역할을 상호 배제적 인 것으로 인식 하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배제적 역사 관을 넘어 통합의 역사인식을 모색하는 노력은 우선 근본주의적 민주운 동 사관 (이후 민주운동 사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민주운동 사관의 핵심적 특징은 민주주의를 어떤 상황 하에서도 타협 될 수 없는 지고( 至 高 )의 가치로 간주 하는 데에 있다. 이와 함께 민주 주의는 저발전의 해소 등 사회적 문제해결에도 가장 효율적 제도라는 2) 본 발표 에서는 정치적 행위의 의미는 결과에서 찾는다. 즉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역할을 그들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베버가 말하는 신념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 가운데 책임의 윤리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막스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 2007, 113-135쪽. 산업화 민주화 l 67
것을 믿는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의 실천은 한국 현대사에서 독점적 중 요성을 지니는 과제로 인식 된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는 민주주의를 위 한 투쟁사이고 민주, 반민주세력 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로 구성 된 다고 전제한다. 이 구도 아래서는 조건반사적으로 민주주의의 고양을 명 분으로 하는 집단과 운동은 역사의 선이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집단과 행위는 악으로 규정 된다. 건국 이후 통치 집단으로 등장하여 국정운영을 주도해왔던 산업화세력 의 집권 시기는 일인 그리고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권력구조를 특징으 로 하였고, 실제로 이 권력구조 아래서 시민의 기본권, 3권 분리, 법치 주의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들이 때로는 심각하게 훼손 된다. 따라서 민주운동 사관에서는 한국의 산업화 세력은 악의 세력으로 치 부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집권기간도 국가발전이 저해된 시기로만 서 술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들의 집권기는 대한민국 건국 의 기틀이 마련되고 산업혁명을 통해 대한민국이 근대 국민국가로 정립 되는 토대가 놓인 시기이기도 하다. 민주운동 사관은 이런 측면을 조명 할 여지가 없으며, 이는 그것에 내포된 몇 가지 심각한 논리적, 실제적 취약점에서 비롯된다. 첫째, 국가과제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 결여이다. 물론 민주주의의 정착 은 대한민국의 중대한 국가과제이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로 출범한 대 한민국은 그에 못지않은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보체제의 구축이 그 하나이다. 국가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울 때 어떤 여타의 가치추구도 어 려운 것이고, 따라서 안보체제 구축은 비교할 수 없는 의미를 부여 받게 된다. 특히 건국 이후 대한민국의 운명이 되어버린 인류역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최악의 반인류적 북한체제와 생사를 건 대결 상황은 이 과 제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했다. 경제발전은 또 다른 긴박한 과제이다. 적절한 국민적 후생의 보장은 근대국가의 통치정통성 확보를 위한 기 본조건이고 또 경제발전은 근대국가가 주권과 자주성확보는 물론 안보 체제 확립을 위해 불가결한 기본적 하부구조를 구축하는 작업이기 때문 이다. 특히 절대빈곤이 풍미했던 한국적 상황에서 이 과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이와 함께 통일이라는 장기적 과제를 한민족의 미래 비전일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체제와 정합성 있는 방향 68 ㅣ 통합가치와 미래비전 토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