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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發 刊 辭 南 陽 洪 氏 禮 史 公 派 譜 는 千 年 의 歷 史 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누구 나 읽어서 깨달을 수 있도록 한글판으로 派 譜 를 發 刊 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하며 특히나 一 九 九 年 代 후반에 이르러 전 국 각처에 사는 禮 史 公 系 孫 들이 뜻을 같이하여 禮 史 公 派 宗 人 들 의 宿 願 이던 禮 史 公 派 大 宗 中 會 를 結 成 하여 그 첫 事 業 으로 派 譜 를 發 刊 하게 되어 더욱 感 懷 가 깊습니다. 地 球 上 의 모든 人 類 에게는 世 界 史 가 있고 한 나라의 國 民 에게는 國 史 를 通 하여 그 民 族 의 文 化 를 保 存 하고 國 家 를 發 展 시켜 왔 으며 한 氏 族 에게도 祖 上 의 뿌리와 先 祖 의 德 業 을 族 譜 에 記 錄 하여 保 傳 해 옴으로써 派 祖 로부터 千 年 의 歷 史 를 알게 되고 아 울러 나를 發 見 하게 됩니다. 先 祖 님들께서는 일찍이 族 譜 의 重 要 함을 認 識 하여 戊 午 譜 를 始 作 으로 週 期 的 인 派 譜 를 編 纂 하여 派 祖 이신 禮 史 公 을 비롯하여 祖 上 님들의 빛나는 業 蹟 과 家 系 를 밝혀주셨으므로 나의 뿌리를 알게 되고 歷 史 를 읽게 된데 대하여 고개숙여 敬 意 를 表 합니다. 人 間 社 會 에는 많은 人 類 의 集 團 이 있으나 氏 族 의 形 成 은 같은 血 統 의 集 團 으로서 個 人 의 意 思 에 反 하여 取 捨 選 擇 을 할 수 없 는 天 倫 이므로 姓 氏 ( 洪 氏 ) 의 基 準 은 血 統 의 상징인데도 불구하

고 近 者 姓 氏 의 改 姓 을 主 張 하는 不 道 德 한 時 代 에 族 譜 의 必 要 性 은 더욱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族 譜 를 通 하여 祖 上 님들을 만나뵙게 되고 또한 우리의 子 孫 들은 나를 理 解 하고 自 己 의 뿌리를 찾게 될 것이다. 즉 族 譜 를 통해 서 우리의 過 去 現 在 그리고 未 來 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維 新 譜 ( 庚 子 譜 )를 發 刊 한지가 四 十 餘 年 이되어 宗 人 의 多 數 가 譜 冊 에 登 載 되지 않아 禮 史 公 派 大 宗 中 會 設 立 과 더불어 첫 사업 으로 派 譜 의 續 編 을 出 刊 하게 되어 더욱 뜻 깊으며 특히나 이 번 編 纂 에 있어서는 보다 正 確 하고 理 解 하기 쉬운 內 容 의 派 譜 를 제작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세대 위주로 번역하였으며 派 譜 가 宗 人 個 個 人 의 史 料 的 인 記 錄 이 되도록 身 上 明 細 를 구체적으로 記 錄 하는 등 編 輯 方 法 을 혁신함으로써 族 譜 의 現 實 化 에 노력하였으며 특히나 先 顯 祖 님들의 遺 事 ㆍ遺 蹟 ㆍ遺 物 과 史 料 등의 保 存 管 理 가 個 別 的 으로 所 藏 되고 있는 것을 宗 人 들의 協 助 로 時 代 別 로 整 理 하여 首 卷 에 記 錄 하여 永 久 히 保 存 되도록 하였습니다. 派 譜 編 纂 에 禮 史 公 後 孫 이 한분도 빠짐없이 登 載 되도록 編 纂 委 員 들께서 많은 努 力 을 하였으나 失 存 된 宗 人 과 특히나 北 韓 에 계신 일가 분들의 參 與 가 許 容 치 않아 누락된 宗 人 들에 대하여 배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제 派 譜 의 編 輯 을 마무리하면서 착잡한 감회를 느끼며 그간에 全 國 의 宗 人 들께서 적극적인 參 與 와 아낌없는 협조를 해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리며 특히나 大 浩 門 長 님께서 刻 苦 의 노 력으로 蒐 輯 하여 所 藏 하신 宗 史 의 文 獻 이 首 卷 編 輯 에 根 幹 이 되었으며 基 弘 編 纂 委 員 長 님과 各 處 의 編 纂 委 員 諸 位 의 努 苦 에 대하여 심심한 謝 意 를 드립니다. 甲 申 譜 發 刊 을 계기로 우리 禮 史 公 派 宗 人 모두가 더욱 敦 睦 親 和 하여 崇 祖 思 想 을 새롭게 다짐하고 自 我 發 見 에 밑거름이 되고 家 門 에 指 標 가 되어 주기 바랍니다. 二 四 年 甲 申 十 月 南 陽 洪 氏 禮 史 公 派 大 宗 中 會 會 長 洪 基 勳 謹 書 發 刊 辭 國 家 에는 國 史 가 있고 民 族 은 民 族 史 가 있듯이 한 氏 族 의 家 門 에는 祖 上 代 代 로 그 血 統 과 血 綠 을 밝혀주고 民 族 의 傳 統 을 말려주는 記 錄 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곧 族 譜 인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洪 門 에서의 初 譜 는 正 祖 二 十 二 年 戊 午 ( 一 七 九 八 年 ) 에 唐 城 世 譜 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 후 수차례에 걸쳐

修 譜 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나 우리 禮 史 公 派 譜 는 四 十 餘 年 前 庚 子 譜 이후 出 刊 하지 못하여 많은 後 孫 들이 登 載 하지 못한 안타 까움이 있었으나 派 宗 會 設 立 과 함께 금번 派 譜 를 發 刊 케 됨은 모두 뜻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修 譜 는 아무리 어려운 難 關 이 있다 하더라도 한 世 代 가 바뀔 적마다 週 期 的 으로 刊 行 하여 系 代 를 잘 整 理 해 나아가야 할 責 務 가 宗 會 任 員 陣 에게 있다 하 겠습니다. 금번 우리 南 陽 洪 氏 禮 史 公 派 譜 를 發 刊 함에 있어 이미 發 行 되었 던 族 譜 와 比 較 하여 몇차례 새로운 變 化 를 試 圖 하였습니다. 첫째 한글 음을 달아 젊은 後 孫 들이 읽을 수 있게 한 점. 둘째 C.D 롬을 제작, 컴퓨터를 아는 사람들은 한글로 자기 이름 만 入 力 해도 손쉽게 自 己 系 代 를 찾아 나갈 수 있게 한 점입니 다. 이것은 다른 派 에서는 試 圖 해보지 못했던 일입니다. 덧붙여 일 가님께 자랑 할 일은 首 卷 編 輯 에 있어 文 獻 마다 該 當 사진을 같이 配 置 하여 一 目 瞭 然 하게 볼 수 있도록 文 獻 編 자체를 올 컬러 化 한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 禮 史 公 門 中 의 光 榮 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점을 印 刷 契 約 後 追 加 하다 보니 製 作 費 의 上 昇 으로 財 政 的 어려움이 컸으나 編 纂 委 員 長 의 職 을 修 行 하는 저로서 無 理 가 있었으나 잘 매듭지을 수 있어 千 萬 多

幸 으로 생각합니다. 禮 史 公 後 孫 여러분! 우리들도 머지않아 祖 上 이 될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오늘 의 나를 있게 해 준 祖 上 을 위해 아무리 어려운 점이 있다 하 여도 그 恩 惠 에 報 答 하기 위해 熱 과 誠 을 다 하여야 하겠습니 다. 우리는 族 譜 를 통하여 先 祖 남들의 思 想 과 愛 宗 心 等 忠 孝 를 배 울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자라고 태어날 後 孫 에게 斷 絶 없는 傳 統 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지막 바램은 우 리 禮 史 公 後 孫 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同 姓 同 本 은 禁 婚 되어야 한다는 점 깊이 銘 心 하기 바라며 甲 申 譜 發 刊 에 協 助 를 아끼지 않은 編 纂 委 員 諸 位 에 感 謝 를 드립니다. 二 四 年 十 一 月 南 陽 洪 氏 禮 史 公 派 譜 編 纂 委 員 長 洪 基 弘 근식 禮 史 公 派 世 譜 序 自 古 로 血 綠 을 根 本 으로 하여 系 代 의 昭 穆 을 밝게 하여 宗 族 의 歷 史 를 記 錄 한 宗 史 이다. 禮 史 洪 門 에서 宗 系 別 로 家 乘 은 있었으나 譜 歷 을 點 綴 한 것을 正

祖 丁 酉 ( 一 七 七 七 년) 에 宗 孫 諱 錀 大 諫 公 께서 各 宗 系 別 家 乘 을 合 譜 하여 始 役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宗 子 諱 時 溥 參 議 公 께서 始 役 二 十 年 의 긴 세월에 修 單 하여 正 祖 二 十 二 年 戊 午 ( 一 七 九 八 ) 에 唐 城 世 譜 初 譜 를 刊 行 한 것이다. 누차에 걸쳐 增 譜 하고 改 譜 하여 昭 穆 을 通 明 하게 하였다. 初 譜 에는 禮 史 公 諱 復 을 中 始 祖 로 하여 世 系 하였다. 禮 史 洪 門 은 七 百 餘 年 을 禮 史 公 을 中 始 祖 로 奉 戴 하여 왔다. 肅 宗 五 十 五 年 丙 申 ( 一 七 一 六 )에 南 陽 君 宗 中 에서 合 譜 하기로 하고 諱 殷 悅 公 을 一 世 로 起 世 祖 하고 禮 史 公 中 始 祖 를 四 世 에 別 行 하여 禮 史 公 系 昭 穆 系 代 하다. 先 祖 의 指 向 인바 世 一 系 하여 온지 二 百 七 十 餘 年 의 星 霜 이 지났다. 禮 史 宗 系 는 南 陽 君 世 譜 와 合 編 된 世 譜 는 없으며 禮 史 宗 系 世 譜 로 이어져 왔다. 禮 史 世 譜 의 修 譜 를 누차 增 譜 하였으나 이제 先 顯 祖 의 文 獻 이 最 初 로 黙 하여 譜 世 首 編 單 卷 으로 刊 行 하게 된 것은 禮 史 宗 史 의 大 役 事 이며 宗 人 모두의 榮 光 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글 世 代 가 볼 수 있게 國 譯 으로 번역하여 後 世 가 理 解 할 수 있게 한 것도 큰 大 業 이라 하겠습니다. 先 祖 의 文 獻 이 漏 脫 없이 編 輯 되어야 하나 首 編 의 記 文 이 制 限 되어 未 登 載 됨은 嗟 歎 하는 바이다. 宗 人 이 各 處 에 散 在 하여 生 居 하고 理 解 不 足 으 로 未 載 한 宗 人 外 國 으로 移 民 한 宗 人 北 韓 에 居 住 하는 宗 人

等 參 與 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族 譜 는 氏 族 의 歷 史 로서 三 十 年 을 一 紀 로 하여 修 譜 함은 其 間 의 變 化 된 門 史 宗 人 의 歷 程 生 沒 을 明 察 하여 通 明 함이다. 後 世 가 先 祖 의 歷 行 을 水 鏡 과 같이 알게 함이다. 오늘의 氏 族 文 化 는 어 떠한가? 西 洋 의 文 化 가 烹 滿 하여 家 族 의 制 度 는 核 家 族 化 되고 戶 主 制 度 廢 止 를 主 唱 하는가 하면 同 姓 同 本 의 婚 姻 을 主 張 하는 世 代 로 變 化 하고 있는 時 點 에 있어 宗 人 모두는 血 綠 의 槪 念 을 더욱 굳건히 하여야 한다. 族 譜 에 外 戚 의 四 祖 를 明 記 함은 氏 族 血 統 의 遺 傳 子 鑑 識 의 意 味 도 있다고 본다. 氏 族 의 遺 傳 子 가 優 秀 한 血 統 일 때 自 負 心 을 갖게 한다. 禮 史 宗 人 의 所 願 은 禮 史 公 中 始 祖 를 崇 慕 하는 祭 壇 을 마련하여 全 禮 史 宗 人 이 한 자리에 모여 禮 史 公 血 統 임을 깨우치고 追 慕 하 며 遠 近 을 막론하고 親 愛 하며 宗 族 의 情 을 나눌 수 있도록 祭 典 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所 望 을 가져 본다. 今 次 修 譜 編 纂 을 爲 하여 刻 苦 의 熱 誠 으로 最 善 을 다하여 獻 身 한 編 纂 委 員 長 其 弘 宗 人 에게 깊이 感 謝 를 드리며 禮 史 公 派 大 宗 中 會 長 基 勳 宗 人 께서 勞 心 焦 思 끝에 全 心 全 力 을 傾 注 하여 派 譜 가 發 刊 하게 된 것을 致 賀 합니다. 今 次 世 譜 首 卷 은 識 見 非 才 한 不 肖 가 編 著 述 함은 敢 不 生 意 이나

宗 會 長 의 懇 切 한 請 이 있어 參 撰 하였으나 禮 史 世 譜 에 塵 垢 가 될까 懼 懣 하는 바이다. 禮 史 宗 人 은 修 譜 의 精 神 으로 崇 祖 敎 孫 을 根 本 으로 하고 崇 高 한 忠 孝 의 理 念 을 간직하고 先 祖 의 偉 業 에 毁 辱 되지 않도록 最 善 을 다 합니다. 지금 이 瞬 間 에도 禮 史 賢 裔 들은 各 門 의 後 裔 로서 矜 持 를 가지고 司 法 ㆍ行 政 ㆍ醫 療 ㆍ育 英 ㆍ産 業 體 等 各 分 野 에서 最 善 을 다하 고 있기에 禮 史 洪 門 의 榮 華 는 永 世 照 光 하리라. 二 四 年 甲 申 十 月 南 陽 洪 氏 中 央 大 宗 會 系 譜 審 議 委 員 會 委 員 長 兼 南 陽 洪 氏 禮 史 公 派 大 宗 會 門 長 洪 大 浩 謹 序 序 家 之 有 譜 古 矣 라 苦 使 家 無 譜 則 無 以 稽 其 先 世 貞 忠 丕 蹟 與 後 世 姻 和 睦 族 之 誼 니 安 知 國 無 史 而 難 考 其 興 亡 盛 衰 治 不 治 善 不 善 之 蹟 哉 아 噫 噫 라 古 語 曰 世 衰 道 微 라 하고 又 曰 世 遠 人 이라 하니 時 則 民 心 이 純 厚 하고 世 俗 이 良 美 하야 毫 無 敗 俗 斁 倫 之 獘 而 然 則 豈 比 於 此 日 情 景 哉 아 願 今 良 俗 이 日 壞 하고 美 風 이 漸 燮 하야 倫 常 이 倒 置

하니 可 謂 罔 測 之 事 續 出 하며 一 部 人 士 政 勢 에 便 乘 하여 戶 主 制 度 를 廢 止 코자 하며 墳 墓 葬 禮 法 을 改 廢 한다하니 如 之 何 如 之 何 오 我 洪 之 中 에 惟 我 禮 史 公 派 棋 落 各 處 하야 欲 成 派 大 譜 而 未 果 하 고 間 多 計 劃 而 不 成 이러니 今 此 被 選 任 員 이 期 欲 成 譜 하야 不 論 遠 近 하고 往 訪 宗 責 하야 協 成 合 議 數 年 에 乃 成 하니 曾 未 有 之 盛 事 也 라 奉 讀 再 三 則 自 上 世 로 下 至 近 世 하야 一 目 瞭 然 則 孰 不 欽 仰 景 慕 哉 아 余 以 殘 劣 之 資 愚 鈍 之 材 로 晩 叅 宗 議 하야 難 仲 微 忱 하니 奈 何 오 且 搆 蕪 詞 하야 以 代 頭 卷 言 則 惟 願 奉 讀 諸 彦 은 勿 負 主 事 者 之 若 衰 하고 篤 於 孝 悌 之 方 하야 永 守 敦 誼 睦 族 則 幸 何 如 之 오 是 望 切 託 耳 西 紀 二 四 年 三 十 四 世 孫 春 岡 洪 斗 炫 撰 서( 序 ) 家 門 에 譜 牒 이 있음은 옛적부터라 萬 一 家 門 에 譜 牒 이 없다면 上 世 의 곧은 忠 心 과 業 績 그리고 後 世 의 宗 族 間 의 和 睦 과 敦 厚 한 義 理 를 詳 考 할 수 없으리니 어찌 나라에 史 記 가 없어 그 興 亡 盛 衰 와 政 治 의 잘잘못을 알 수 없음과 같으리오 슬프도다 옛 말에 世 衰 道 微 라 하였고 又 曰 世 遠 人 亡 이라 하였나니 그때에는

民 心 이 純 厚 하고 風 俗 이 良 好 하여 秋 毫 라도 五 常 이 腐 敗 되고 倫 理 가 倒 壞 됨이 없으리니 어찌 이 날의 情 景 에 比 할 수 있으 리요 돌아보건대 이제 어진 風 俗 은 점차 무너지고 고운 바람은 점점 사라지니 父 子 間 에 義 理 와 慈 愛 가 없어지고 兄 弟 間 에 友 愛 도 없어지는 도다. 一 部 人 士 는 이런 政 勢 에 便 乘 하여 戶 主 制 度 를 廢 止 하고 墳 墓 葬 禮 法 을 改 正 하여 佛 氏 儀 式 에 쫓아간다 하니 어찌 되려는지 漠 然 하도다. 우리 洪 門 에 唯 獨 禮 史 公 派 만이 마치 바둑알처럼 各 處 에 散 在 하 여 있으니 自 古 로 派 大 譜 를 刊 行 코자 計 劃 하였으나 失 敗 하였던 바 今 次 被 選 된 諸 彦 께서 期 必 圖 成 을 目 標 로 莫 論 遠 近 疎 親 하고 往 訪 宗 責 하야 協 成 合 議 數 年 에 乃 成 하여 有 終 之 美 를 이루니 實 未 曾 有 之 盛 事 也 라 나의 殘 劣 한 몸과 愚 拙 한 才 質 로 늦게야 宗 中 議 度 에 參 席 케 되어 一 膂 의 힘도 보태지 못한 處 地 라 魚 魯 의 잘못조차 모르면서 敢 히 거친 말로 卷 頭 言 을 쓰게 됨을 悚 懼 하게 생각하며 오직 願 컨대 前 賢 의 格 言 中 同 姓 同 本 은 百 代 之 親 과 一 家 라 뜻을 깊이 吟 味 하여 主 事 諸 彦 의 若 衷 을 저버 리지 말 것을 再 三 付 託 하는 바이다. 西 紀 二 四 年 三 十 四 世 孫 春 岡 洪 斗 炫 撰

1 戊 午 譜 時 溥 謹 序 立 譜 之 法 謹 堂 傳 信 傳 疑 而 已 太 師 公 之 爲 吾 諸 宗 始 祖 其 傳 己 久 今 無 更 疑 而 其 後 世 系 之 次 序 年 代 之 遠 近 有 不 可 不 辨 者 盖 吾 宗 一 派 舊 無 刊 譜 家 藏 小 牒 皆 以 禮 史 公 諱 復 字 爲 始 祖 而 李 公 希 輔 所 撰 司 成 公 碑 及 恥 齋 公 所 撰 贊 成 公 行 狀 皆 以 禮 史 公 爲 始 而 稱 仕 高 麗 中 葉 又 其 前 牧 隱 所 撰 康 敬 公 碑 則 只 擧 康 敬 曾 祖 諱 冲 而 已 則 太 師 公 之 爲 吾 宗 幾 代 祖 無 可 徵 文 獻 矣 近 間 與 太 師 公 曾 孫 行 灝 字 子 孫 派 有 合 譜 之 議 而 其 所 當 合 譜 云 者 以 灝 字 兄 弟 有 曰 沾 曰 福 而 禮 史 公 諱 字 下 有 一 曰 福 云 者 故 乃 以 此 福 字 疑 爲 禮 史 公 諱 字 又 以 灝 之 予 德 升 禮 史 公 之 子 諱 漢 升 故 以 升 字 疑 爲 兄 弟 行 名 又 謂 禮 史 公 諱 復 字 當 從 水 傍 復 字 與 灝 沾 字 水 傍 作 兄 弟 云 而 古 人 作 名 兄 弟 不 必 盡 從 偏 傍 況 復 字 之 從 水 傍 書 乃 是 草 書 放 筆 之 字 則 以 行 爲 水 只 是 以 後 世 之 見 臆 料 而 臆 料 之 不 己 甚 至 於 從 水 傍 爲 澓 之 言 而 尤 覺 其 牽 合 而 穿 鑿 矣 太 師 公 墓 碑 之 改 立 也 意 以 水 傍 澓 字 登 刻 於 灝 沾 兄 弟 後 之 人 不 識 其 由 者 何 以 知 此 澓 字 之 出 自 牽 合 臆 料 也 哉 且 收 隱 南 陽 樓 記 言 太 師 公 爲 麗 朝 開 國 功 臣 而 康 敬 公 兄 弟 仕 於 忠 宣 恭 愍 之 朝 己 是 麗 末 矣 自 朝 只 爲 十 代 自 判 尹 公 入 我 太 師 公 爲 始 而 計 之 不 過 十 代 則 五 百 年 麗 朝 後 今 至 宗 孫 永 觀 爲 十 七 代 則 我 朝 四 百 年 乃 近 二 十 代 而 何 前 朝 五 百 年 只 爲 十 代 耶 玆 不 敢 遽 以 禮 史 公 列 書 於

灝 字 兄 弟 行 而 謹 以 傳 信 傳 疑 之 道 自 太 師 公 以 下 三 代 特 書 首 張 而 依 家 藏 舊 牒 及 恥 齋 公 所 撰 行 狀 以 禮 史 公 爲 中 始 而 序 次 焉 上 之 二 十 二 年 戊 午 嗣 孫 通 川 大 夫 前 行 弘 文 館 副 校 理 兼 館 經 筵 侍 讀 官 春 秋 館 事 官 知 製 敎 時 溥 謹 序 서문( 序 文 ) 초보( 初 譜 ) 무오( 戊 午 ) 보첩을 만드는 법은 삼가 이르거니와 마땅히 전하여 내려 온 것 을 믿고 전하여 의심이 있어도 전하는 것이다. 태사공( 太 師 公 ) 에 대하여 우리 모든 종중은 시조( 始 祖 ) 에 대한 기록이 전하는 것이 없으니 늘 의문을 가지었다. 그 후 세계( 世 系 ) 의 차례 년대( 年 代 ) 가 멀고 가깝게 전하는 것이 분명하게 한 것이 없으며 우리 문중의 간행( 刊 行 ) 된 구보( 舊 譜 ) 나 가첩( 家 牒 ) 이나 모두 예사공( 禮 史 公 ) 휘( 諱 ) 복( 復 ) 으로 하여 시조( 始 祖 ) 가 되었으며 이공( 李 公 ) 희보( 希 輔 ) 가 찬한 사성공( 司 成 公 ) 비문이나 치제공( 恥 齊 公 ) 이 찬한 찬성공( 贊 成 公 ) 행장( 行 狀 ) 모두 예사공 할아버지를 첫 머리에 쓰시었으며 이 분은 고 려 중엽( 高 麗 中 葉 ) 의 분이시다. 또 그전에 목은( 牧 隱 ) 이 찬한 강 경공( 康 敬 公 ) 비문에 처음에 올린 할아버지는 강경공의 증조( 曾

祖 ) 휘( 諱 ) 충( 冲 ) 분이 먼저 적히어 있다. 태사공에 대하여는 우리 문중의 몇 대 할아버지인지 증거( 證 據 ) 할만한 문헌이 없으며 근간에 태사공 증손 항렬( 行 列 ) 에 호( 灝 ) 자 자손( 子 孫 ) 파에서 족보를 합보( 合 譜 ) 할 것을 의론할 때에 하는 말이 호( 灝 ) 자 할아버지 형제( 兄 弟 ) 가 있는데 한분은 점 ( 沾 ) 자요 한분은 복( 福 ) 자 이다. 그런데 예사공의 휘자가 복이니 의문이 간다는 것이다. 호( 灝 ) 자의 아드님이 휘( 諱 ) 덕승( 德 升 ) 이요 예사공 아드님의 휘( 諱 ) 가 한승( 漢 升 ) 인고로 승( 升 ) 자가 같 으니 의문이 가며 형제 항렬( 行 列 ) 이 아닌가 예사공 휘( 諱 ) 복 자가 복( 復 ) 은 수방변( 水 傍 ) 의 복자는 아닐까하며 호( 灝 ) 점( 沾 ) 모두 수방 작명( 作 名 ) 형제이니 옛날에는 형제 작명은 모두 방 ( 傍 ) 은 같이 하였는데 복( 復 ) 자가 초서( 草 書 ) 로 쓸 때에는 수방 은 두인변이나 같이 쓴 것은 아닐까 후세가 볼 때 마음속으로 헤아릴 것이며 마음속으로 헤아리게 하기 위하여 수방( 水 傍 ) 을 따라 복( 澓 ) 자로 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을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며 모두 끌어당기어 합할 것이다. 태사공 묘비( 墓 碑 ) 를 다시 세울 때에 수방복( 澓 ) 을 돌에 새기었으며 호( 灝 ) 점( 沾 ) 형제 후에 잘 모르던 사유를 알게 하 여 새로이 복( 澓 ) 자가 생기게 되어 모두 헤아리고 합한 것이다. 목은( 牧 隱 ) 선생이 남양루기( 南 陽 樓 記 ) 에 이르기를 태사공은 고

려조의 개국공신이며 강경공( 康 敬 公 ) 은 형제 벼슬하였고 고려 ( 高 麗 ) 말 충선왕( 忠 宣 王 ) 때와 공민왕( 恭 愍 王 ) 때이다. 태사공을 위시하여 불과 十 대인데 고려조 五 년에 다만 十 대 에 와서 판윤공( 判 尹 公 ) 이조( 李 朝 ) 들어오시었으니 이조 후 지 금 종손( 宗 孫 ) 영관( 永 觀 ) 十 八 대 이니 이조( 李 朝 ) 에 들어와 四 년이니 근 二 十 대 임으로 전조( 前 朝 ) 五 년에 十 대이니 그 근거가 어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도다. 예사공과 호( 灝 ) 자 형제( 行 列 ) 이니 서로 믿고 전하며 의심이 가는대로 전하는 도리 외는 다른 도리가 없도다. 태사공 아래 三 대의 머리에 특별히 서하니 집안에 소장한 옛 구첩 및 치제공( 恥 齊 公 ) 에 찬한 행장 이나 모두 예사공이 중시조의 차례로 되어 있도다. 상지( 上 之 ) 이십이년( 二 十 二 年 ) 무오( 戊 午 ) 西 紀 一 七 九 八 年 사손 ( 嗣 孫 ) 통훈대부( 通 訓 大 夫 ) 전행( 前 行 ) 홍문관부교리( 弘 文 館 副 校 理 ) 겸( 兼 ) 경연시독관( 經 筵 試 讀 官 ) 춘추관사( 春 秋 館 事 ) 관( 官 ) 지제교( 知 製 敎 ) 시부( 時 溥 ) 근서( 謹 序 ) 二 十 八 世 孫 大 浩 謹 譯 唐 城 洪 氏 壬 辰 世 譜 序 家 之 有 譜 史 法 之 遺 也 明 統 系 謹 宗 支 列 世 次 叙 爵 德 是 皆 史 也 上 而 推

原 於 幾 百 載 之 前 下 而 徵 信 於 幾 百 世 之 後 故 其 法 嚴 發 凡 起 例 彰 往 攷 來 其 有 疑 錯 則 備 佃 而 之 者 一 倣 乎 史 筆 不 如 是 譜 事 不 重 而 非 所 以 傳 後 也 惟 我 唐 城 之 洪 肇 稱 太 師 公 謹 稽 太 師 公 墓 碣 有 曰 其 先 譜 佚 無 당성홍씨( 唐 城 洪 氏 ) 임진세보( 壬 辰 世 譜 ) 서( 序 ) 집에 있던 보사( 譜 史 ) 유문( 遺 文 ) 이다. 밝게 한 계통으로 갈라진 종중을 차례로 서열한 역사이다. 근원 은 옛 백년전과 멀게 한 것도 백년 후에 옛 것을 엄하게 예를 들어 찬란한 유래를 의심없이 착오없게 논 함이라 어렵도다. 역 사를 쓰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보사( 譜 事 ) 는 더욱 옳지 않으며 후세에 전하게 된다. 우리는 당성( 唐 城 ) 홍씨( 洪 氏 ) 라고 부른다. 태사공( 太 師 公 ) 묘비에 이르기를 그 선보( 先 譜 ) 는 증할만 함이 없으며 전하는 것은 당나라에서 재주있는 팔학사가 고구려를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는데 홍씨가 래박한 곳이 당곶( 唐 串 ) 은수 포( 銀 樹 浦 ) 에 사시었으며 당곶( 唐 串 ) 은 후에 남양부( 南 陽 府 ) 로 고치고 한 것이 사실이다. 태사공( 太 師 公 ) 이 전의 사문으로 증 할 것이 없다. 태사공( 太 師 公 ) 고려 태조 익대공신( 翊 戴 功 臣 ) 삼 중태광( 三 中 太 匡 ) 태사( 太 師 ) 덕망높은 큰 어른이라고 하였다.

시조 태사공( 太 師 公 ) 이후 대대로 공을 세웠으며 그 이전의 연 대의 일은 아주 멀어서 믿을만한 명휘( 名 諱 ) 가 있다 하여도 의 심없이 가고 근거가 없으니 남길 수 없다. 예사공( 禮 史 公 ) 을 중시조( 中 始 祖 ) 로 한 것이 우리의 족보이다. 예를들면 역사를 절취할 수는 없으며 사가( 史 家 ) 에 있다 하더라 도 의심이 있으며 이론을 갖춘 것은 없다. 우리 문중에는 구보 ( 舊 譜 ) 는 없고 간행하는 족보 뿐이다. 정조( 正 祖 ) 정유( 丁 酉 ) 에 족보를 다듬는 일을 시작하였다. 할아버지 대간공( 大 諫 公 ) 께서 신중하게 합보( 合 譜 ) 를 하기로 하였다. 무오( 戊 午 ) 년에 아버님 참의공( 參 議 公 ) 께서 모든 가첩( 家 牒 ) 을 합친 보첩( 譜 牒 ) 의 초본 을 만드시었다. 예사공( 禮 史 公 ) 을 중시조( 中 始 祖 ) 로 하여 자세하 게 이어졌으며 처음 예사공( 禮 史 公 ) 을 쓴 것이다. 이 큰 일에 있어 계보를 이어 가는데 미흡한 점도 있었으나 그대로 만들었 다. 다행히 중종의 뜻에 의하여 책을 발행키로 하고 시작하였으 나 강경공( 康 敬 公 ) 후예를 책에 올리지 못하니 한스럽다. 이번에 상세하게 편찬하니 이것이 우리 홍씨의 계보이다. 태사 공( 太 師 公 ) 예사공( 禮 史 公 ) 후손은 멀고 가깝고 모두 일관하게 근원을 이룬 것이다. 조상의 내력을 한권의 책으로 보게 되니 정말 찬란하도다. 수백년간 알지못한 일들을 오늘에야 어렵게 만들었으니 모든 종인이 소장하게 되어 다행이며 불초한 자의

기쁨이 한이 없도다. 오직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하시던 일이 끊 어지지 않게 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소자의 몸을 돌아보건대 그 어려운 보사에 능히 하게 된 것은 책임있는 자손으로서 아 니 할 수 없으며 더불어 영광스럽도다. 태사공( 太 師 公 ) 이 쌓은 정신 몇 배의 근본이 역시 예사공의 덕이 흘러 빛났으며 이어 져서 선조 판윤공( 判 尹 公 ) 장양( 莊 襄 ) 공은 그 시대에 더욱 빛 났으며 치제공( 恥 齊 公 ) 단민공( 端 敏 公 ) 하의공( 荷 衣 公 ) 의 학문 ( 學 文 ) 과 문장 또는 훈덕( 勳 德 ) 명성이 더욱 빛나며 서로 이어 크게 떨치었도다. 후세에 있어 찬란하고 현달하게 하여 우리 모 든 종인은 크고 작고 멀고 가깝고 간에 높은 생각으로 선조의 수백년간 이룬 업적을 떨어뜨리지 아니하게 하며 백세에 이르 기까지 잘 보존하며 서로 사랑하고 번창하여 크게 이루어 백세 에 가도 이 책 머리말을 보고 시해하고 보존하기 바라노라. 서기 一 八 三 二 년 임진( 壬 辰 ) 맹동( 孟 冬 ) 상한( 上 澣 ) 불초( 不 肖 ) 손( 孫 ) 대사간( 大 司 諫 ) 지제교( 知 製 敎 ) 영관( 永 觀 ) 삼 가 씀 후손 야은( 野 隱 ) 정표( 正 杓 ) 행명( 行 名 ) 대호( 大 浩 ) 근역( 謹 譯 )

唐 城 洪 氏 壬 辰 世 譜 序 당성( 唐 城 ) 홍씨( 洪 氏 ) 임진세보( 壬 辰 世 譜 ) 서( 序 ) 우리 홍( 洪 ) 은 처음 당( 唐 ) 나라에서 오셨는데 남양( 南 陽 ) 에 오신 것은 신라( 新 羅 ) 와 고구려( 高 句 麗 ) 때의 일이다. 우리 나라에 오 신 것은 천년이나 된다. 태사공( 太 師 公 ) 이전에 태사( 太 師 ) 가 있 으나 기록이 갖춘 것이 없다. 태사공( 太 師 公 ) 후 三 세에 예사공 ( 禮 史 公 ) 에 대하여 안분당( 安 分 堂 ) 이공( 李 公 ) 희보( 希 輔 ) 가 찬 한 찬성공( 贊 成 公 ) 묘비와 퇴계선생( 退 溪 先 生 ) 이 찬한 찬성공묘 지( 贊 成 公 墓 誌 ) 에 모두 먼저 예사공( 禮 史 公 ) 을 썼으며 목은선생 ( 牧 隱 先 生 ) 이 지은 강경공( 康 敬 公 ) 묘지( 墓 誌 ) 에는 먼저 증조 추 밀공( 樞 密 公 ) 이 태사공( 太 師 公 ) 으로 되어 있으나 세조( 世 祖 ) 의 가첩( 家 牒 ) 이 전( 傳 ) 함이 없다. 병신년( 丙 申 年 ) 에 남양홍씨( 南 陽 洪 氏 ) 대보( 大 譜 ) 를 역사( 役 事 ) 하는데 태사공( 太 師 公 ) 증손 첨사 공파( 詹 事 公 派 ) 후현( 後 賢 ) 이 첨사공( 詹 事 公 ) 휘( 諱 ) 호( 灝 ) 형제 가 있는데 휘( 諱 ) 첨( 沾 ) 복( 福 ) 두분 중 복자( 福 字 ) 분이 예사 공( 禮 史 公 ) 휘자( 諱 字 ) 가 아닌가 하여 복자( 福 字 ) 가 잘못 기재된 것은 아닐까 의심하였다. 첨사공( 詹 事 公 ) 의 자( 子 ) 군기감공( 軍 器 監 公 ) 의 휘( 諱 ) 덕승( 德 升 ) 예사공( 禮 史 公 ) 의 자( 子 ) 추밀부사

공( 樞 密 副 使 公 ) 휘( 諱 ) 한승( 漢 升 ) 항렬자( 行 列 字 ) 가 같으므로 예사공( 禮 史 公 ) 휘자( 諱 字 ) 복자( 復 字 ) 에 수방( 水 傍 ) 하여 복( 澓 ) 자로 하여 첨사공( 詹 事 公 ) 형제로 명증하고 합보( 合 譜 ) 키로 하 였다. 예사공( 禮 史 公 ) 휘( 諱 ) 복( 澓 ) 으로 하여 태사공( 太 師 公 ) 생 석( 牲 石 ) 태사공( 太 師 公 ) 려씨( 麗 氏 ) 개국원훈( 開 國 元 勳 ) 예사공 ( 禮 史 公 ) 증손이라고 돌에 새기었다. 예사공( 禮 史 公 ) 증손 즉 고 려중엽 사성공( 司 成 公 ) 묘비에 형제 있으나 알 수 없다고 하였 다. 강경공( 康 敬 公 ) 이 나라의 일로 공민왕( 恭 愍 王 ) 때에 빛나게 하였다. 태사( 太 師 ) 로부터 강경( 康 敬 ) 까지 十 세에 대하여 시종 ( 始 終 ) 을 알 수가 없다. 나라를 세운지 五 년을 거쳐 알 수가 없으므로 十 세이다. 윗 대는 알 수 없으므로 합보하여도 큰 잘못이 없지 않느냐 미진 한 것이 있으나, 종인( 宗 人 ) 과 이론하여 보사를 할 뿐이다. 믿게 전하는 것과 의심을 갖고 전하여 성인( 聖 人 ) 도 그러하거니와 역 사( 歷 史 ) 도 그러하다. 태사공( 太 師 公 ) 이하 三 세를 게재하고 예 사공( 禮 史 公 ) 은 별행에다 서한다. 그렇게 하여도 二 十 五 ㆍ六 세 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족보를 만들게 된다. 할아버지께서 마음 을 가다듬고 숱한 애를 써서 만들었는데 임진( 壬 辰 ) 년에 서울과 지방에 종인( 宗 人 ) 이 모두 옛 초본을 다시 고치어 편집하기로 하여 편찬하였다.

각파에서 흘러 전하는 것을 사방에서 이름도 없이 잘 알지도 못 한 것을 올리게 되니 애매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보계( 譜 系 ) 가 이어져 세보( 世 譜 ) 모든 것을 정론( 正 論 ) 으로 하고 존중하며 친 이한다. 상식도 없이 떠돌았지만 아는 것이 그 길이니 어찌하겠 는가. 그러나 한 할아버지 자손이 어찌하는가. 동기( 同 氣 ) 는 선 조가 있고 자손이 있지 않는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과 같 이 사랑하며 편애하지 말며 여러 사람이 한마음 되어 한집안 되어 백세( 百 世 ) 를 하루같이 서로 친히 부르며 멀고 가까움을 덕으로 한다. 태사( 太 師 ) 의 정신으로 덕을 쌓고 번창하며 변하 지 말고 덕으로 이름을 남게 전하여 역사가 되게 하여 효와 사 랑 충신의 몸을 이루며 조상에게 잘 제사하며 공손히 받드는 집안 되게 한다. 종족( 宗 族 ) 은 두터운 풍습을 잊지 말고 오늘의 수보( 修 譜 ) 정신으로 너 나 모두 서로 협조하여 살 것이다. 서기 一 八 三 二 년 임진( 壬 辰 ) 계유( 癸 酉 ) 후손 부위( 副 尉 ) 익위사( 翊 衛 司 ) 세마( 洗 馬 ) 직필( 直 弼 ) 삼가 씀 후손 야은( 野 隱 ) 정표( 正 杓 ) 행명( 行 名 ) 대호( 大 浩 ) 근역( 謹 譯 ) 甲 戌 譜 序 보서( 譜 序 ) 갑술( 甲 戌 )

족보에 있는 자는 처음 할아버지는 같다. 물줄기의 근원은 백세 ( 百 世 )에 내려가도 물의 원천을 찾아보면 그 근본에서 갈라짐과 같다. 우리 홍씨는 한 할아버지이다. 태사공( 太 師 公 ) 휘( 諱 ) 은 열( 殷 悅 ) 이며 태사공에서 三 세에 이르러 첨사공( 詹 事 公 ) 휘( 諱 ) 호( 灝 ) 에서 휘( 諱 ) 점( 沾 ) 관( 官 ) 직장( 直 長 ) 이시고 다음 계씨에 휘( 諱 ) 복( 澓 ) 관( 官 ) 예사( 禮 史 ) 바뀌어 올리어 있으며 세보 계 력( 系 歷 ) 은 고려조( 高 麗 朝 ) 의 五 년에 첨사공 후예 十 五 世 이 며 예사공 후예 十 世 이다. 옛 분들이 임진년( 壬 辰 年 ) 에 수보( 修 譜 ) 를 하였는데 그 당시 모 임에서 의론하여 더불어 十 세와 十 五 세로 재촉하여 수보하였는 데 큰 대과없이 합보하였으며 예사공 중시조는 별행에 크게 써 서 분계( 分 系 ) 하였다. 차후 부당하다고 의문점이 있으면 종중의 뜻에 따라 다시 재촉하여 닦으면 될 것이니 이의할 수 있겠는 가 의문이 가는 十 세는 재촉한다 하더라도 五 년에 十 五 세 이니 역시 미급하도다. 그 의심을 다 풀 수는 없다. 우리는 홀로 十 세만 오직 우리파로서 들어가고 본조( 本 朝 ) 역시 五 년인데 二 十 一 세이니, 갈라서서 十 四 세는 지금 고증하여 풀 수 없으며 의심이 간다하여도 이를 심판할 자 있겠는가. 아 버님 문경공( 文 敬 公 ) 이 쓰신 것을 보면 여기에도 이르기로 임진

보( 壬 辰 譜 ) 에도 미진한 것이 있으면 다시 바르게 다시 수보한다 하였으며 나 용관( 用 觀 ) 이 어려서 들었는데 아버님께서 가르침 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二 十 여년이 되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보 첩은 다시 닦아야 하니 옛 족보는 쓰지 말아야 하며 예사공은 별행에 차례대로 이어지며 의심이 간다고 하여도 헤어질 수 없 으며 의문이 있어도 믿고 족보사업을 하노라. 용관이 더 보태어 남게 이어질가 하여 혹시 이어지는데 능하게 저술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 뜻은 능하지 아니하여도 내 멋대로 열거한 것 아 니며 누구든지 삼가 적히어야 하며 옛날의 말이 역시 오늘에 의논하니 같도다. 숭정기원후( 崇 禎 紀 元 後 ) 오( 五 ) 갑술( 甲 戌 ) 서기一 八 七 四 년 중추 ( 仲 秋 ) 상한( 上 澣 ) 후손( 後 孫 ) 용관( 用 觀 ) 근서( 謹 序 ) 序 ( 甲 戌 ) 보서( 譜 序 ) 갑술( 甲 戌 ) 예부터 집에는 족보가 있었는데 우리는 당나라와 송나라 대의 명가( 名 家 ) 거족( 巨 族 ) 이며 보첩에 한 할아버님을 모시고 제사

를 지내니 그 종인이 퍼져서 천만인이며 원천에는 정이 있던 없던간 한 분이 천만인의 종친과 인척을 이루고 정이 없다면 어찌 어진사람이겠는가. 어찌 군자라 이를 수 있겠는가. 그 연 대와 그 대의 사실을 잘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하여도 한통의 줄기로 종족이 가지별로 조상이 차례대로 이어지고 그 작위와 덕을 수백세에 이르기까지 만고 증명이 되게 하여 후세에 전함 이다. 우리 홍성은 원래 당성( 唐 城 ) 이 관향이었는데 신라와 고 려에서 남양( 南 陽 ) 으로 된 것이다. 본조( 李 朝 ) 에 이르러 천여년( 千 餘 年 ) 의 세월이 가면서도 한 할아 버지를 모신 것이다. 태사공의 행적은 아름답고 덕이 높고 번창 하며 빛나고 뛰어났으며 그 후 선조도 법도에 따라 글을 읽고 이름이 빛나니 뒤를 이어 갈 것이며 그간의 우리 홍문의 족보 를 다 닦으며 정묘정유( 正 廟 丁 酉 ) 순조무오( 純 祖 戊 午 ) 와 임진 ( 壬 辰 ) 에도 진중하고도 정밀하게 하였으며 그때도 도( 道 ) 에 어 긋나고 의심이 가는 자도 있었으나 그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잘 못된 것을 반드시 증거에 의거하여 풀었다. 그 의혹은 믿음과 사랑으로 하였으며 실행하는 범예에 대하여는 엄하고 안전하게 하였으며 일을 함에 있어 빠르고 실같이 잘 이어져서 예전에 써있는 것에 오늘의 현실이 능하고 넓게 살피어 찾아서 올리어 야 한다. 혹 후일에 탄식할 일이 생겨서도 아니되며 모든 종인

이 흩어져 있지마는 멀리 있는 분이나 만부득히 올리지 못하는 자 많이 생기면 아니되며 먼저 한 분들이 한 일을 잘 익히어야 하며 한탄하고 후회되는 일 있으면 아니 된다. 금번에 다행히 계속 수보( 修 譜 ) 하니 전일에 올리지 못한 분도 올리게 하며 종 파를 넓게 찾아서 문헌( 文 獻 ) 에 일일이 잘 수록되도록 함이며 종중에 오른 일은 차례대로 잘 기록되어야 하며 무정하게 없애 버려서 한탄하는 일이 없도록 함이다. 상지( 上 之 ) 십이년( 十 二 年 ) 갑술( 甲 戌 ) 서기 년 중추( 仲 秋 ) 상한 ( 上 澣 ) 후손( 後 孫 ) 통훈대부( 通 訓 大 夫 ) 행신계현령( 行 新 溪 縣 令 ) 겸 황주 진관병마절제도위( 兼 黃 州 鎭 管 兵 馬 制 都 尉 ) 대중( 大 重 ) 근서( 謹 序 ) 序 ( 甲 寅 ) 세보서( 世 譜 序 ) 갑인( 甲 寅 ) 위 보첩의 한권의 책은 우리 예사공 후손의 자손이 집집마다 간 직할 보배입니다. 씨족은 같은 나무의 같은 물줄기에 근본을 둡 니다. 원줄기에서 만가지로 갈라졌지만 단 한 근본으로 천파가 되어도 원천은 같으며 백세( 百 世 ) 에 오랜 세월이 가고 멀다고

하더라도 한 권의 책으로 밝게 알 수 있는 합한 씨족이며 같은 사람 한 방에서 족보를 닦고 있으니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가르침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중대하고 큰 일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초의 뼈와 살이 나누어진 것이니 그 공 이 얼마나 친척을 이루었으며 할아버님의 고마움을 다 같이 최 선을 다하여 하기로 서로 왕래하며 미진한 것은 서로 상식으로 풀며 서로 물어야 할 것이다. 공중에 나는 새도 넓은 하늘에서 서로 쫓으며 따라가며 희망을 갖고 살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갑술( 甲 戌 ) 에서 갑인( 甲 寅 ) 까지 일세의 기간이 지나는데도 새로운 보첩이 이루어져야 하 는데 오래 되어서 그런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경 향( 京 鄕 ) 의 여러 종중이 의논하여 보첩을 발간키로 하여 시작한 것이 계축( 癸 丑 ) 년 겨울에 시작하여 을묘( 乙 卯 ) 년 봄이 되어도 교정도 보지 아니하고 있다가 뜻을 이어서 하기로 했다. 조상의 일이니 뜻을 돈독하게 의논하여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옛일은 잊 고 다시 쓰기 시작하여 그 뜻을 이루게 되었으며 몇 번이고 쓸 데없는 말이 붙여진 것은 뒤에 적었다. 지역후에 이어진 보사는 중요하며 어려워도 적혀야 하며 역시 오늘과 같이 서로 의논하 고 같이 이야기하여 이 영광이 변치말고 서로 왕래하여 협조하 며 이해하여야 합니다.

세재( 歲 在 ) 갑인( 甲 寅 ) 서기 년 중춘( 仲 春 ) 상한( 上 澣 ) 후손( 後 孫 ) 경관( 敬 觀 ) 지( 識 ) 대호 근역 序 ( 甲 寅 ) 서문( 序 文 ) 갑인( 甲 寅 ) 나라에 역사가 없다면 천하가 눈이 있다고 하여도 어두울 것이 며 정사를 다스리는데 어찌 어렵지 아니하겠는가. 선악이 같이 따르니 그러함이라 집안에 족보가 없다면 자손이 눈이 있다 하 여도 어두울 것이다. 친척 간에 가깝게 지내지 않으면 형제 숙 질의 차례를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집안에 가승은 바로 나라의 국사와 같은 것이다. 우리 당성홍씨는 한 할아버지이다. 태사공의 후손은 오래도록 빛내었다. 전에 어른들이 합보하여 파별로 번창한 것을 한권으로 묶어서 만들었는데 참으로 신중 하고 정밀하게 뜻을 이루었다. 우리는 임진년( 壬 辰 年 ) 에 예사공 파의 분보가 있고 갑술년( 甲 戌 年 ) 에 보서를 이어서 만들었는데 알기쉽고 편리하게 하였다. 종중조상의 찬란한 공훈과 찬양한 연대는 의심없이 믿게 논하여 등재하였으며 전에 보서의 서문

에 대하여 불초가 한마디하는 것은 갑술보와 갑인보에 일세가 지나는데 어찌 그간 천지의 이치는 돌고 순환하는데 따라 새로 운 문물이 이르렀는데 집의 역사는 등재되지 않으니 선영( 先 靈 ) 에게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옳고 정확한 것이 이어져서 보서에 올리어 기록되어야 함에도 그저 답답할 뿐이며 뒤로만 미룬다 고 동쪽이 서가 될 수가 있나. 누락된 우리파의 문헌에 대하여 길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후손은 넓게 살피고 캐어서 보서에 실 어 후손이 눈이 어둡지 않게 하였으면 한다. 세재( 歲 在 ) 갑인( 甲 寅 ) 서기 년 중춘( 仲 春 ) 상한( 上 澣 ) 후손( 後 孫 ) 현필( 顯 弼 ) 근서( 謹 書 ) 序 ( 甲 寅 ) 세보서( 世 譜 序 ) 갑인( 甲 寅 ) 보사가 있고 밝게 이어진 서문이 있으며 조상과 자손 차례가 있 으며 존엄하고 공경스러운 종조( 宗 祖 ) 가 있도다. 적서( 嫡 庶 ) 가 다르게 되어 있으나 한 씨족으로 족보도 같이 하여 친목을 돈 독케 한다. 선대( 先 代 ) 와 후대( 後 代 ) 의 순서와 이름이 적혀 있는 데 의심이 없이 잘 갖추어지고 바르게 갖춰진 올바른 공훈과

덕망과 효열( 孝 烈 ) 이 잘 나타나게 전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넓게 밝게 한 문장으로 나타나게 하여 믿고 전하며 의심없이 전할 수 있는 역사입니다. 처음 할아버님이 언제 내려오시었던 것인지 기록이 없으며 다만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해석할 뿐이다. 멀리 복희씨( 伏 羲 氏 ) 에서부터 날아왔으니 아름답지 않은가. 우 리 홍씨계는 고려 때 처음 계출( 系 出 ) 되었는데 태사의 휘( 諱 ) 는 은열( 殷 悅 ) 로 전하였으며 삼세( 三 世 ) 복야공( 僕 射 公 ) 삼남( 三 男 ) 휘( 澓 ) 의 할아버지는 예사공( 禮 史 公 ) 이시다. 우리 종파의 파보를 수보함에는 해가 없으며 신중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며 예전에 병신( 丙 申 ) 대보( 大 譜 ) 를 할 때에 복야공 장남 첨사공파와 합보를 할 때 종중이 의논하여 두갈래를 합보하여 일가( 一 家 ) 를 이뤄서 도타운 역사가 오래 전할 수 있게 되었으 니 후회는 없으며 합하여 찬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찬탄하건대 태사공( 太 師 公 ) 장양공( 莊 襄 公 ) 의 공훈의 한 업적과 덕망높은 치제공( 恥 齊 公 ) 하의공( 荷 衣 公 ) 의 도학 문장과 찬란한 선조의 업적을 갖추어서 썼으며 불초는 다만 뒤에 이어갈 것에 대하여 감히 부쳐 할 말은 어느 때부터인지 점차적으로 없어졌는지 또 는 희미하게도 책에 오르지 아니하였으니 후손에게 이어주지 못하니 유익하지 않으며 그 사유를 알 수 없습니다. 모파의 종 지( 宗 支 ) 는 정통하게 이어졌는지 한심한 보책이다.

임진년에서 갑술년까지는 四 十 여년인데 그간 후손은 번창하여 경향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나 족보에 오르지 못하고 있으니 어려움이 있도다.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고 어떠한 성씨가 오고 갔는지 또 언제 낳고 언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버님께서 늘그막에 하시는 말씀이 이번에 하는 일은 뒤돌아보고 다시 돌 아보아서 그 뜻을 이어서 기록하여야 큰 사함이 하는 일이라고 하시었다. 큰 힘으로 자세하게 이어져 빠짐이 없이 전체의 보사 가 되어야 하며 우리 종인은 빠져서 한탄할 자가 없게 함이다. 금번 다행히 종중이 일치되어 발간을 시작한지 十 년만에 이루 어진 일이며 이번에 아주 어렵게 된 우리 종중의 결실이다. 다 같이 경사스러우며 다행한 것이다. 그 중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강경공( 康 敬 公 ) 파와 당릉군( 唐 陵 君 ) 양파 자손이 이리저리 흩어져 시골에 있으니 아주 어려웠으며 널리 찾아보았지마는 혹 있어서도 본인이 빠졌다 원하는 자는 혹 뒤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나중에 증보에 싣기로 하였다. 집 에 조상에 대한 기록이 없으면 유문도 없고 조상에 대하여 가 르침도 없었다. 족보에 기재된 것을 지웠다던가 조상에 세대의 가르침은 족보법 에 따라 해석하면 가히 알 수 있고 구족보와 다시 한 족보를 합한 총편이다. 우리는 태사공과 예사공 후손인 이상 조상을 생

각하고 머리 숙여 경사스럽게 생각하며 백세에 내려가도 어김 이 없으며 종족 간에는 두텁고 도타운 풍속으로 차례를 지킬 것이다. 세재( 歲 在 ) 四 갑인( 甲 寅 ) 서기 년 중춘( 仲 春 ) 상한( 上 澣 ) 후손( 後 孫 ) 현상( 顯 庠 ) 근서( 謹 序 ) 序 ( 丁 未 ) 정미보( 丁 未 譜 ) 서문( 序 文 ) 보첩을 도와서 말하건대 조상을 섬기고 일가친척간에는 화목을 돈독케 함이로다. 삼십여년을 일기( 一 紀 ) 로 하여 족보를 수보함 인데 우리 남양홍은 갑인( 甲 寅 ) 년에 족보를 닦은 다음 지금까지 수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본을 잊었거나 종사( 宗 事 ) 를 소 홀히 하였으니 잊기전에 족보사업을 부지런히 정성껏 하여야 마땅함인데 한심하도다. 그러나 세상이 어렵고 하여 종인간에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정미( 丁 未 ) 년에 종인이 의논하여 태사공( 太 師 公 ) 아 래 삼대 상서공( 尙 書 公 ) 직장공( 直 長 公 ) 예사공( 禮 史 公 ) 아래에 다 구족보에 따라 수보발간 함에 있어 조상을 섬기고 친종간에

화목하게 큰 의미를 가지며 그 사적을 상세하게 하여 구보서 서문( 序 文 ) 도 같이 기재하며 예부터 내려오던 쓸데없는 설화도 이번 파보에 기록하였다. 기록하는데 부족하다 하더라도 잘 보 아주기 바라며 우리 예사공파 후손은 위로는 조상을 잘 섬기고 아래로는 잘 보호하고 화목하게 영원히 의롭게 전하며 잘 살기 를 바라는 바입니다. 단기四 二 四 년( 서기一 九 七 년) 정미( 丁 未 ) 도 유 사 대감 총무유사 현우 재경유사 기준 수단유사 현규 序 ( 壬 子 ) 유신보( 維 新 譜 ) 서( 序 ) 하늘과 땅이 생기고 귀한 사람이 있으니 하늘과 땅의 도( 道 ) 는 막중한데 그는 오상( 五 常 ) 이니 성인이 말씀하기로 천가지 말고 만가지 말은 말하자면 사람의 밝은 도의 가르침이라고 하시었 다. 많은 술책과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가르침이니 여기 의 족보에 사람의 가르침 세가지를 겸하여 말하였으니 종손이

나 지손이나 조상과 후손의 차례가 엄정하게 하고 그의 덕업 ( 德 業 ) 과 문장( 文 章 ) 과 더불어 훌륭한 행위와 절의( 節 義 ) 를 세대 별로 기준하여 잘못하게 하면 크게 원망하게 되니 가히 부끄럽 지 아니하게 하여야 후손이 그를 보고 표본을 삼을 것이며 잘 못을 징계하기 보다는 뜻이 약하여도 내세( 來 世 ) 에 영원히 전할 수 있는 족보가 되어야 한다. 바르지 아니하고 그 세대( 世 代 ) 가 기록되지 아니하면 성인( 聖 人 ) 의 세가지 가르침은 차례가 잘 겸하여야 하노니 그간 족보를 여러 번 수보( 修 譜 ) 를 하였으나 모두 스스로 규칙에 따랐다. 오 직 우리 족보는 무술( 戊 戌 ) 보를 만든 지 十 五 년이나 지났으며 원주( 原 州 ) 에서 소보( 小 譜 ) 를 만든 지 五 년이니 하필 다시 족보 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 하나 전에 족보는 기호( 畿 湖 ) 와 영동( 嶺 東 ) 지구 문중만이 하여 넓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유신보( 維 新 譜 ) 는 중앙종회( 中 央 宗 會 ) 가 주간하여 十 五 파보를 순차적으로 수록 하므로 전국으로 넓게 수록하며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종족이 다 합하여 이루어지니 우리 예사공파( 禮 史 公 派 ) 의 대보( 大 譜 ) 이 니 모든 종인은 송구하나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선조( 先 祖 ) 의 덕업( 德 業 ) 을 빛나게 하는 하나의 족보이니 모든 것을 넓게 갖 추어 쓰니 우리 남양홍씨의 十 五 파보가 모두 마치었노라. 파별 소보이나 합치면 남양홍씨 대보인 것이다. 이번에 합하여지니

하나의 일가되고 좋은 족보가 된 것이다. 모두 한권씩 가지며 잘 갖추어진 족보이니 넓고 바른 지식이 되어주며 우리는 같은 족보에서 보는 자이니 조상을 잘 섬기고 종인간에는 돈독하여 기름같이 잘 지내야 한다. 족보에서 가르침은 두껍고 얇고 멀고 하여도 가깝게 서로 부르며 모든 종인은 협동하고 부지런하며 하나의 족사( 族 史 ) 로 되게 함이다. 족보를 간행하는데 협의기구 모두와 위원장님 수고하심에 감사하며 책 끝에 만부득이 간략 하게 썼으며 권하건대 윤리도덕을 잘 지키는 후손 되시옵소서. 一 九 七 二 년 임자( 壬 子 ) 늦은 가을 예사공 二 十 六 대손 기창( 基 昶 ) 경서( 敬 書 ) 跋 발( 跋 ) 집안에 족보가 있는 것은 나라의 역사와 같은 이치이라 나라에 역사가 없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변란을 무엇으로 증할 수 있겠는가. 벼슬을 하고 못된 일을 하다가 쫓아내거나 옳지 않은 일이나 옳지 아니한 간신 등 또는 문명의 변화와 발전상 등 역

사와 족보가 없다면 그 원천을 알 수 있겠는가. 종중의 갈라진 내력이나 얼마나 가까운지 분명치 않을 것이며 어렵고 불효한 무리나 부모에 효도하고 친척 간에 친목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니 족보는 그 신분과 집안에 중요한 일을 알 수가 있다. 예 사공파는 수백년이 오도록 수차 파보를수록( 修 錄 ) 하여 왔고 남 양홍씨 대보에 합보가 이루어진 것은 지금부터 十 五 년전 무술 ( 戊 戌 ) 보 할 때이다. 호남지방에 많은 같은 파 종인중에 강경공 ( 康 敬 公 ) 후손과 염주백( 塩 州 伯 ) 휘( 諱 ) 순( 淳 ) 동기와 휘( 諱 ) 석 주( 錫 疇 ) 직제학( 直 提 學 ) 공의 계이다. 이번에 입단( 入 單 ) 한 남 자의 수만도 八 五 명이 온지라 종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였는 데 각 지방별 문중 소보( 小 譜 ) 만을 편집한 것인데 이번에 중앙 종회 주간으로 순차적으로 대보간행에 처음 합편수보를 하게 되었으니 할아버님을 존중하게 섬기고 종중간 도타운 마음으로 기름과 같이 떨어짐을 막는 의미이라 그러니 가일층 간절하도 다. 모든 종인은 반드시 빠지지 말고 수보의 큰 뜻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一 九 七 二 年 임자 가을 예사공파( 禮 史 公 派 ) 二 十 五 대손 현우( 顯 禹 ) 근서( 謹 書 )

南 陽 洪 氏 族 譜 의 沿 革 南 陽 洪 氏 譜 牒 의 歷 史 를 살펴보면 西 紀 一 四 五 四 年 ( 端 宗 二 年 ) 甲 戌 에 府 川 公 諱 逸 童 께서 諸 宗 家 에서 秘 藏 하여 오던 家 乘 譜 를 蒐 集 하여 圖 譜 를 發 刊 하고 이에 序 文 을 添 記 하였던 것 그 嚆 矢 인데 不 幸 히도 이 譜 冊 은 現 在 傳 함이 없고 序 文 ( 別 添 ) 만이 遺 傳 하여 겨우 그 片 貌 를 알리고 있다. 國 史 大 辭 典 에 依 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族 譜 는 文 化 柳 氏 가 嘉 靖 年 間 ( 서기一 五 二 二 년~ 一 五 六 六 년) 에 發 刊 한 譜 冊 이 가 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前 에 安 東 權 氏 가 一 四 七 六 년 ( 成 宗 七 年 )에 成 化 譜 를 發 刊 하여 文 化 柳 氏 보다 八 十 餘 年 앞서고 우리 甲 戌 譜 는 서기 一 四 五 四 년에 發 刊 되어 安 東 權 氏 보다 幾 十 年 앞서 發 刊 하였음을 알 수 있다. 特 히나 甲 戌 譜 序 文 內 容 에 洪 氏 家 門 에서 傳 해오는 家 牒 은 大 略 一 二 三 年 경 高 麗 高 宗 때 九 世 祖 尙 書 公 諱 斯 胤 께서 紀 錄 하여 傳 해졌다고 써 있으니 傳 記 란 서기 一 二 三 년대의 것 이 분명하다. 다음은 一 五 年 후인 宣 祖 甲 辰 ( 一 六 四 年 ) 에 文 正 公 派 西 潭 公 諱 瑋 께서 續 修 하신 南 陽 洪 氏 世 譜 는 西 涯 柳 成 龍 政 丞 이 序 文 을 撰 하여 慶 尙 北 道 文 化 財 二 一 三 號 로 指 定 되어 있으며 이로

부터 一 二 八 년 후인 肅 宗 四 十 二 年 丙 申 ( 서기一 七 一 六 년) 에 益 山 君 派 에서 丙 申 譜 를 修 譜 하였고 다시 五 十 九 年 후인 英 祖 五 十 一 年 乙 未 ( 一 七 七 五 년) 譜 가 發 刊 되고 純 祖 三 十 四 年 에 甲 午 譜 ( 一 八 三 四 년) 發 刊 高 宗 十 三 年 에 丙 子 譜 ( 一 八 七 六 年 ) 發 刊 서 기一 九 二 년 日 帝 下 에서 庚 申 譜 發 刊 다시 서기一 九 五 八 년에 戊 戌 譜 를 發 刊 하였는데 이때까지도 禮 史 公 派 는 單 獨 으로 禮 史 公 派 祖 를 始 祖 로 하는 派 譜 를 發 刊 하여오다 戊 戌 譜 發 刊 時 各 派 門 中 과 合 議 하여 合 譜 를 하게 되었다. 禮 史 公 派 譜 編 纂 史 를 살펴보면 서기一 七 九 八 년 正 祖 二 十 二 年 에 戊 午 譜 를 發 刊 하고 四 十 六 年 後 인 서기一 八 三 二 년 純 祖 三 十 二 년에 壬 辰 譜 發 刊 四 十 二 년 후인 서기一 八 七 四 년 高 宗 十 一 년 에 甲 戌 譜 發 刊 서기一 九 七 년 純 宗 一 년에 丁 未 譜 發 刊 서기 一 九 一 四 년 大 正 三 年 에 甲 寅 譜 發 刊 서기 一 九 七 二 년에 中 央 宗 會 의 協 助 下 에 壬 子 譜 ( 維 新 譜 ) 를 發 刊 하여 全 國 의 門 中 에서 所 藏 하고 있으며 서기二 四 년도에 한글형의 甲 申 譜 를 發 刊 하게 되었다. 禮 史 公 派 大 宗 中 會 會 長 基 勳 書

南 陽 洪 氏 世 譜 ( 舊 譜 序 ) 갑술보( 甲 戌 譜 ) 서문( 序 文 ) 대개 우주가 처음으로 열릴 때에 하나의 氣 가 天 地 人 의 三 才 가 구분되었다. 사람은 實 에서 生 하여 父 子 가 系 承 하는 것이니 사 람이 나기 시작한 것이 참으로 오래 되었다. 上 古 로부터 하나의 夫 婦 의 몸에서 子 女 들이 태어나기 시작하여 한없이 갈라지고 흘러내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몇 世 가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 는 것이다. 그러나 소급해 올라가 보면 하나의 氣 로부터 흘러 내려 온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聖 人 들이 이르기를 반드시 그 조상의 뿌리를 중히 여기고 또 근본을 잊지 말라 하였으니 이 는 派 系 의 所 自 出 을 所 重 하게 여김이다. 傳 記 에 이르기를 아무는 아무의 몇 대조요 아무의 몇 대손이라 하고 또 사람의 선행을 칭송할 때에는 반드시 그 선대를 들어 몇 대의 조상이 이러 이러한 덕행이 있었고 이러한 功 德 이 있 었고 이러한 재주가 있었고 이러한 名 望 이 있었다라고 이르는 것이다. 때문에 예부터 조상을 중히 하고 파계를 소중하게 해오 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宗 法 의 제도가 바로 서면서부터 귀천이 나누어지 고 族 屬 이 분별되었다. 이로써 가승을 기록하고 顯 祖 들의 德 業 을 내세움으로써 어느 州, 어느 고을에는 어느 성씨가 우리나라 의 이름난 성씨로 楚 나라의 昭, 屈 氏 와 唐 나라의 崔, 盧 氏 와 같 다 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 일이 되었다. 나 日 休 는 家 門 이 쇠잔하고 박복하여 아버님께서 일찍이 돌아가 시고 또 내가 늦게 태어나서 내외의 숙부님들이 또한 모두 일 찍이 돌아가시어 先 祖 에 대한 것은 겨우 고조까지만 기록할 수 있을 뿐이었다. 辛 酉 年 ( 西 紀 一 四 四 一 年 ) 봄에 사촌형님 明 哲 ( 智 ) 이 족보를 들고 와서 보이면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 족보 는 < 南 陽 洪 氏 派 系 之 圖 > 로 우리 집에 소장되어 전해오는 舊 物 이라 하였다. 그러나 시조 太 師 公 휘 殷 悅 로부터 尙 書 휘 斯 胤 에 이르러 끝이고 이하는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때문에 사윤공 이 우리 형제들로부터 몇 대조가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행히도 우리 집안에 전해오는 譜 牒 이라 일휴가 이를 받아 벽에 걸어놓고 우러러 살펴보니 한 폭은 太 師 公 으로부터 상서공( 斯 胤 ) 에 이르러 끝이고 또 한 폭은 王 璟 으로부터 王 嗣 宗 에 이르러 끝이었다. 이 두 가지를 보니 다 상서공은 태사공의 후손이요 사종의 사위가 되는 것이다. 이는 상서공이 닦은 보첩으로서 왕씨는 상서공의 처당이라는 사

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시중 휘 彦 博 은 일휴의 曾 叔 祖 가 되시는 분이시다. 삼가 그 神 道 碑 文 을 살펴보니 담암 백문보 선생이 기록하기를 공의 十 三 世 祖 휘 悅 이 공덕이 삼한 에 있어 이로부터 대대로 현달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인물이 많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광정공( 奎 ) 에 이르러서는 功 德 이 세 상을 덮어 가문이 더욱 빛이 나고, 장간공( 戎 ) 에 이르러서는 순 박하고 겸손하여 가풍과 세덕을 이어 잘 유지하였으니 장간공 은 일휴의 고조부가 되시는 분이시다. 또 세전되는 자료를 얻어 보니 匡 定 公 이 이부상서로 계실 때에 唐 城 으로 貫 籍 을 삼았다 하였고 學 士 휘 縉 은 아버지가 되시고 할아버지는 사윤이라 하 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사윤은 일휴의 六 代 祖 가 되시는 분이 시다. 또 상성군 洪 海 는 중추 洪 約 의 아우이다. 하루는 내가 당성군을 찾아가서 질의하니 이르기를 우리집에 전해오는 舊 譜 도 역시 자네의 말과 같다하니 일휴는 이미 나의 족보를 고열하고 또 여러 숙부들에게 질의하여 드디어 옛 보첩에 이어 기록하고 이 름하여 < 南 陽 洪 氏 派 系 之 圖 > 라 하였다. 아! 삼한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五 百 餘 年 間 의 부자형제의 世 系 를 소연하게 상고할 수 있고 또 선조들의 적덕과 功 業 에 연유한 바를 알 수 있으니 後 孫 된 자로서 마땅히 대대로 전해

주어야 할 보배로 알고 逸 失 하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 다. 西 紀 一 四 五 四 年 ( 景 泰 甲 戌 ) 九 月 十 六 日 十 六 代 孫 逸 童 記 南 陽 洪 氏 禮 史 公 派 譜 ( 甲 申 譜 ) 編 纂 要 綱 ( 凡 例 ) 一. 本 譜 는 禮 史 公 派 甲 申 譜 라 稱 한다. 一. 派 譜 의 체제는 四 ㆍ六 배판 洋 裝 本 으로 하고 全 四 卷 으로 하 되 一 卷 은 首 卷 으로 하여 序 文 ( 新 舊 譜 ) 南 陽 洪 氏 의 源 流 史 蹟 墓 碣 誌 銘 行 狀 遺 文 等 史 料 를 收 錄 하여 先 祖 님들 빛나는 業 績 을 永 久 히 保 存 하도록 하였다. 一. 舊 譜 의 記 錄 內 容 은 原 文 과 번역문을 記 錄 하여 누구나 쉽게 탐독할 수 있게 하였다. 一. 二 ㆍ三 ㆍ四 卷 은 個 人 別 身 上 明 細 를 記 錄 하되 舊 譜 의 內 容 은 가급적 原 文 그대로 整 理 하고 現 代 人 들의 身 上 은 個 人 의 歷 史 的 意 味 를 갖도록 具 體 的 卽 이름과 生 ㆍ死 時 는 물론 學 歷 重

要 經 歷 賞 勳 國 家 考 試 資 格 證 등 後 孫 들로 하여금 先 代 人 의 人 品 과 個 性 을 認 識 할 수 있도록 하였다. 一. 年 度 의 表 示 는 國 際 共 通 基 準 인 西 紀 年 號 를 사용한다. 一. 適 ㆍ庶 의 區 分 은 하지 않는다. 一. 舊 譜 의 內 容 中 調 整 이 必 要 한 事 件 은 當 事 者 間 의 合 議 下 에 校 訂 하였다. 一. 舊 譜 에 連 繫 되지 않는 宗 人 의 世 帶 가 修 單 登 載 申 請 이 있을 時 는 審 議 委 員 會 의 決 定 에 依 하여 처리한다. 一. 女 子 의 경우 며느리는 本 貫 ㆍ姓 名 ㆍ生 年 月 日 ㆍ重 要 身 分 事 項 등으로 登 載 하고 딸인 경우 이름ㆍ生 年 月 日 ㆍ사위의 本 貫 이름 등을 기록한다. 一. 子 孫 의 登 載 順 序 는 男 子 를 先 登 載 하고 旣 婚 者 는 配 를 記 錄 하며 다음에 딸은 순위에 따라 기록한다.

一. 個 人 의 身 上 內 容 은 政 府 公 簿 (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의 內 容 을 認 證 한다. 凡 例 ( 壬 辰 譜 ) 범례( 凡 例 ) 임진보( 壬 辰 譜 : 一 八 三 二 ) 一. 첫 장에 기록은 시조( 始 祖 ) 이며 태사공( 太 師 公 ) 아래 삼세( 三 世 ) 그 아랫 장에 특별히 예사공( 禮 史 公 ) 중시조( 中 始 祖 ) 였음 을 상세하게 작게 썼다. 一. 휘( 諱 ) 를 고친 것도 갖추어 썼으며 처음 휘도 차례로 써서 잘 보게 하였으며 별호( 別 號 ) 를 쓰고 생ㆍ월ㆍ일을 적은 다음에 모년( 某 年 ) 과제( 科 第 ) 를 적고 관직( 官 職 ) 을 썼노라. 증직( 贈 職 ) 시호( 諡 號 ) 를 쓰고 졸( 卒 ) 년ㆍ월ㆍ일을 적고 다음에 묘( 墓 ) 의 소재( 所 在 ) 좌향을 적었다. 一. 배위( 配 位 ) 를 적고 사조( 四 祖 ) 를 차례대로 적고 생( 生 ) ㆍ갑 ( 甲 ) ㆍ졸( 卒 ) 월ㆍ일을 적은 다음에 묘소 합장 여부와 쌍분( 雙

墳 ) 쌍분 상( 上 ) ㆍ하( 下 ) ㆍ장( 葬 ) 과 연분( 連 墳 ) 각 장에 대하여 적었다. 一. 생( 生 ) ㆍ졸( 卒 ) 년 위에 황명( 皇 明 ) 연호( 年 號 ) 또는 숭정( 崇 禎 ) 이후 이어 조묘( 朝 廟 ) 호( 號 ) 를 쓰고 등과( 登 科 ) 년도 위에 역시 같이 썼다. 一. 관직을 쓰는 데는 말직 경력( 經 歷 ) 관작( 官 爵 ) 을 갖추어 쓰 고 전 관직 현 관직을 썼다. 一. 장지( 葬 地 ) 는 가족 장지 국( 局 ) 내( 內 ) 여부와 읍( 邑 ) 면( 面 ) 리( 里 ) 명을 쓰되 상ㆍ하지명을 적고 모위( 某 位 ) 의 묘( 墓 ) 좌ㆍ 우로 적고 영하( 塋 下 ) 라 하고 비( 碑 ) 갈( 碣 ) 표석( 表 石 ) 행장( 行 狀 ) 을 쓰되 누가 찬( 撰 ) 한지를 적었다. 一. 문집( 文 集 ) 이 간행된 것은 옆에 쓰고 발간되지 아니한 문고 ( 文 稿 ) 유무를 적었다. 一. 원( 院 ) 에 배향된 분을 기록하고 어떤 사원( 祠 院 ) 에 모시었는 지를 적었다.

一. 행직( 行 職 ) 또는 증직( 贈 職 ) 은 배위( 配 位 ) 로 부( 夫 ) 에 따라 직첩( 職 牒 ) 을 쓰고 관직이 없는 분도 생졸( 生 卒 ) 을 배위로 생ㆍ 졸을 썼다. 一. 양자( 養 子 ) 출계( 出 系 ) 자는 출계라 하고 뒤에다 생부( 生 父 ) 의 명도 기록하였다. 一. 외손( 外 孫 ) 은 두 대만 기록하였다. 一. 서파 자손 겸 서자가 원하지 아니하면 올리지 아니하였으며 지난번 족보에 올리어 있는 자는 올리고 옛 족보에 없는 자손 은 올리지 아니한다. 一. 모든 종파( 宗 派 ) 가 경향 각처에 흩어져 있어 보단( 譜 單 ) 을 못한 자는 먼저 보첩대로 올리고 다음에 수보( 修 譜 ) 해 올리도록 하였다. 一. 모든 종파의 묘비명( 墓 碑 銘 ) 행장( 行 狀 ) 시장( 諡 狀 ) 문집( 文 集 ) 은 지금이나 옛 권에도 기록치 못하였다.

一. 천자( 千 字 ) 자로 하여 각장 아래에 적어서 편하게 열람하도 록 하였다. 一. 편집된 책은 천( 天 ) 자에서 존( 尊 ) 자까지 나누어 사( 四 ) 책으로 하고 일( 一 ) 책 이( 二 ) 편 제이( 第 二 ) 책은 삼편( 三 編 ) 제삼( 第 三 ) 책 은 이편( 二 編 ) 제사( 第 四 ) 책은 사편( 四 編 ) 제一 편에는 서( 序 ) 十 장 범례( 凡 例 ) 二 장 파( 派 ) 의 항렬( 行 列 ) 十 五 장 제二 편 四 十 七 장 제三 편 十 五 장 제四 편 三 十 一 장 제五 편 四 十 八 장 제六 편 六 十 一 장 제七 편 三 十 二 장 제八 편 十 六 장 제九 편 二 十 八 장 제十 편 十 九 장 제十 一 편 十 五 장 一 一. 사책( 四 冊 ) 합( 合 ) 十 一 편( 十 一 編 ) 三 三 九 장( 三 百 三 十 九 張 ) 우( 右 ) 임진보( 壬 辰 譜 ) 범례( 凡 例 ) 후손 대호 근역 범례( 凡 例 ) 갑술보( 甲 戌 譜 : 一 八 七 四 ) 一. 예사공( 禮 史 公 ) 세보이나 태사공( 太 師 公 ) 아래 三 세( 三 世 ) 하 에 차례로 한다.

一. 서자( 庶 子 ) 역시 쓰고 배( 配 ) 와 졸( 卒 ) 로 쓴다. 一. 전세보( 前 世 譜 ) 에 올리지 못한 파( 派 ) 도 하나 하나 문헌을 보고 올리었다. 一. 천자( 千 字 ) 의 순대로 각 이름 아래에다 보기에 쉽게 하였다. 一. 세보는 五 代 의 하나로 하고 태사공에서 시작하여 현세대까 지 세( 世 ) 로 한다. 一. 책( 冊 ) 을 나누어 편집함에는 七 책( 七 冊 ) 으로 하고 제一 책은 三 기( 三 起 ) 一 편 四 기 四 편으로 하고 제二 책은 五 기 二 편 제三 책은 五 기 四 편 제四 책은 五 기 四 편 제五 책은 六 기 二 편 제六 책은 六 기 三 편 제七 책은 六 기 二 편이다. 一. 피의 자손의 항렬( 行 列 ) 은 우리 종중 항렬 기( 基 ) 자 아래를 정한다. 義 源 來 烈 喜 로 정한다.

甲 寅 譜 凡 例 범례( 凡 例 ) 갑인보( 甲 寅 譜 : 一 九 一 四 ) 一. 임갑( 壬 甲 ) 양세보의 범례를 창작한 것이며 더하고 깎아서 이룬 것이다. 一. 첫 장에는 시조( 始 祖 ) 태사공( 太 師 公 ) 이하로 차례대로 하였 다. 一. 휘( 諱 ) 를 고치었으면 먼저 쓰고 처음 이름은 다음에 쓰도록 하였다. 자( 字 ) 별호( 別 號 ) 생년월일 언제 등과( 登 科 ) 하고 행한 직책( 職 責 ) 증직( 贈 職 ) 시호( 諡 號 ) 졸( 卒 ) 년 월 일 및 묘소좌향 ( 墓 所 坐 向 ) 을 적었다. 一 一. 배위( 配 位 ) 를 쓰는데는 四 조( 四 祖 ) 에 유명한 할아버지를 쓰고나서 생( 生 ) 년 월 일 및 묘소 합장( 合 葬 ) 부( 祔 ) 쌍분( 雙 墳 ) 쌍분의 위 아래 또는 연분( 連 墳 ) 에 대한 갖추어진 글을 써 서 장소를 알게 한다.

一 一. 행직( 行 職 ) 또는 증직( 贈 職 ) 배위( 配 位 ) 관직과 부인의 직 첩( 職 帖 ) 을 쓰고 관직이 없으면 부인에 대하여 쓰고 언제 출생 하고 언제 졸( 卒 ) 하고 배( 配 ) 도 밝게 생졸( 生 卒 ) 을 쓴다. 一. 생졸( 生 卒 ) 년 위에 황명( 皇 明 ) 의 연호( 年 號 ) 를 쓰고 숭정( 崇 禎 ) 이후 즉 우리나라의 조묘( 朝 廟 ) 를 쓰고 등과( 登 科 ) 년 위에 역시 예를 들면 철종( 哲 宗 ) 계해( 癸 亥 ) 라 쓰고 모 갑( 甲 ) 년 월 일을 적는다. 一. 관직에는 말직도 쓰고 지난 경력과 현직을 쓰고 전에 관직 지금의 관직을 쓴다. 一. 장지( 葬 地 ) 를 쓰는데는 가족장지의 국( 局 ) 내와 읍( 邑 ) 면( 面 ) 리( 里 ) 명을 위에 분이나 아래 분 모두 누구의 묘와 좌묘 우묘 또는 영하( 塋 下 ) 의 요체와 비갈( 碑 碣 ) 표지( 表 誌 ) 행장( 行 狀 ) 을 쓰되 누가 지었다라고 쓴다. 一. 문집의 간행( 刊 行 ) 유무와 문집 미간행도 쓰고 문고( 文 稿 ) 유무도 쓴다. 배향( 配 享 ) 유무와 어느 서원( 書 院 ) 이라고 쓴다.

一. 출계인( 出 系 人 ) 본종( 本 宗 ) 아래에 쓰되 누구에서 입계( 入 系 ) 를 쓰고 아래에다 생부( 生 父 ) 의 명과 차례대로 자와 함을 쓴다. 一. 외손( 名 孫 ) 은 그 대만 기입하고 글머리에 여재( 女 在 ) 하고 외 손( 外 孫 ) 을 이어쓰고 아래 행에 여재( 女 在 ) 맨 아래에 외손( 外 孫 ) 을 옆으로 같은 항렬에 크게 쓴다. 외손은 작게 쓰고 제일 가까운 관직 및 이름 높은 이름과 관직과 모호( 某 號 ) 모후( 某 后 ) 라고 쓴다. 一. 서파( 庶 派 ) 중에 지방에 흩어져 있어 수단( 修 單 ) 을 못한 자 는 먼저 세보대로 올리고 돈이 없어 수단을 못한 자 등은 다음 에 수보할 때 기록하기로 한다. 一. 먼 선대에 자손이 없거나 배위 등이 올려 있지 않은 자는 전에 세보를 보고 빠지지 않았는지를 보고 빠졌으면 다시 올리 었다. 一. 이 책은 천자( 千 字 ) 글자순으로 각 장에 위 아래에다 편리하 게 보도록 한다.

一. 책은 五 대마다 올려 쓰고 처음은 시조( 始 祖 ) 에서 지금까지 몇 대인지를 쓰다. 一. 나누어 책을 편집하였는데 칠( 七 ) 책으로 하고 제一 책은 五 편 서( 序 ) 十 二 장 발문 一 장 범례 二 장 시기( 始 起 ) 一 장 재기( 再 起 ) 一 장 三 기( 三 起 ) 七 장 사기( 四 起 ) 四 편( 四 編 ) 三 十 七 장 제二 책 二 편( 二 編 ) 五 기( 五 起 ) 七 十 六 장 제三 책 四 편( 四 編 ) 五 기( 五 起 ) 五 十 八 장 제四 책 二 편( 二 編 ) 五 기( 五 起 ) 五 十 장 제五 책 二 편( 二 編 ) 六 기( 六 起 ) 九 十 六 장 제六 책 三 편( 三 編 ) 六 기( 六 起 ) 五 十 八 장 七 기( 七 起 ) 一 편 九 장 七 책 합( 合 ) 二 十 一 편 四 八 三 장 一. 후자손( 後 子 孫 ) 항렬( 行 列 ) 내( 來 ) 자 이하 열( 烈 ) 희( 喜 ) 후손 대호 근역 檀 紀 四 千 三 百 年 丁 未 譜 凡 例 범례( 凡 例 ) 정미보( 丁 未 譜 : 一 九 六 七 )

一. 산도( 山 圖 ) 토산도( 태사공의 묘도) 一. 진주산도 및 사진( 삼세 복야공 묘도) 一. 적성산도( 積 城 山 圖 ) 상수리에 남양군파의 세장지 一. 태사공묘표 복야공묘표 홍지사 상량문( 복야공사당) 산도후기 一. 별록 학사공 휘 천하( 天 河 ) 사적( 事 跡 ) 태사공 행장 一. 남양홍씨 상계( 上 系 ) 보 一. 도보( 圖 譜 ) 一 초기는 一 세에서 十 三 세 一 자가 一. 재기는 十 三 세에서 二 十 九 세 범二 十 九 자 자~ 지( 각견) 一. 三 기는 二 十 九 세에서 三 十 五 세 범十 三 자 자~ 비( 견공) 一. 보권( 譜 卷 ) 초기~ 一 세에서 八 세 一 자가 재기~ 八 세에서 十 五 세 범二 자 자ㆍ각ㆍ지ㆍ간 一. 三 기~ 十 五 세에서 二 十 二 세 범三 十 四 자 자ㆍ각ㆍ지ㆍ고 一. 四 기~ 二 十 二 세에서 二 十 九 세 범二 二 九 자 자ㆍ곡ㆍ지ㆍ단 一. 五 기~ 二 十 九 세에서 三 十 五 세 범二 五 자 자ㆍ딛ㆍ지ㆍ벅 후손 대호 근역

南 陽 洪 氏 의 源 流 洪 氏 의 得 姓 由 來 우리나라의 洪 氏 는 學 士 公 이 東 來 하시기 이전에는 東 無 洪 姓 이라 하여 東 方 에는 洪 氏 가 없다 하였다. 따라서 우리 南 陽 洪 氏 의 淵 源 은 西 紀 六 四 三 年 ( 高 句 麗 寶 藏 王 二 年, 唐 貞 觀 十 七 年 癸 卯 ) 에 學 士 公 ( 諱 天 河 )이 唐 나라로부터 東 來 하심으로 비롯된 것이니 우리나라 洪 姓 의 源 流 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의 洪 姓 에 대 한 源 流 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中 國 의 洪 氏 는 그 뿌리를 달리하는 四 개 系 統 의 洪 氏 가 있으니 첫째는 共 工 氏 가 共 으로 改 姓 하였다가 다시 洪 氏 ( 紀 元 前 二 二 五 年 경) 로 改 姓 한 燉 煌 洪 氏 가 있고 둘째는 宏 氏 가 唐 明 皇 ( 西 紀 七 一 二 ~ 七 六 二 ) 의 諱 자를 피해 洪 氏 로 改 姓 한 豫 章 洪 氏 가 있고 셋째는 弘 氏 가 唐 德 宗 ( 七 七 九 ~ 八 五 )( 孝 敬 ) 의 諱 字 ( 唐 高 宗 太 子 李 弘 ) 를 피해 洪 氏 로 改 姓 한 常 州 ( 毗 陵 ) 洪 氏 가 있고 넷째는 翁 處 厚 가 洪 氏 로 改 姓 한 六 桂 堂 洪 氏 가 있다.( 宋 初 期 : 九 六 년경)

以 上 四 系 統 의 洪 氏 中 첫 번째에 기록한 共 工 氏 를 연원으로 하 는 洪 氏 以 外 의 洪 氏 들은 모두 學 士 公 이 東 來 하신 以 後 에 발생 한 洪 氏 임으로 우리 南 陽 洪 氏 와는 무관한 洪 氏 이며 오직 共 工 氏 를 淵 源 으로 하는 돈황洪 氏 만이 우리 南 陽 洪 氏 의 源 流 가 되 는 것이다. 中 國 의 < 元 和 姓 纂 > 에 의하면 < 共 工 氏 之 後 本 姓 共 氏 因 避 仇 改 爲 洪 氏 > 라고 하였다. 洪 氏 의 뿌리인 共 工 氏 의 淵 源 은 中 國 의 上 古 時 代 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國 家 를 다스리는 制 度 에 金 ㆍ水 ㆍ木 ㆍ火 ㆍ土 五 行 을 각각 分 擔 하여 다스리는 官 吏 가 있었으니 水 는 水 力 과 治 水 를 木 은 木 工 業 을 火 는 火 力 을 土 는 國 土 와 土 木 工 業 을 金 은 金 屬 工 業 을 담당하는 制 度 가 있었다. 五 行 의 官 吏 中 에 治 水 를 담당하는 官 吏 를 共 工 氏 라 하였으니 官 名 으로 姓 을 삼은 것이다. 中 國 의 < 元 和 姓 纂 >, < 萬 姓 統 譜 >, < 氏 族 博 考 > 등에 의하면 < 共 工 以 水 名 官 > 이라 하였고 또한 < 共 工 氏 子 爲 后 土 相 傳 上 古 有 金 木 水 火 土 五 行 之 官 共 工 氏 之 子 句 尤 能 平 水 土 爲 土 正 后 土 之 官 > 이라고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洪 氏 의 뿌리가 된 共 工 氏 는 중국의 三 皇 시대부터 존재하여 女 와 씨와 競 爭 하기도 하였고 전욱 高 陽 氏 와 皇 帝 의 後 繼 자리를 놓 고 競 爭 하기도 하는 등 共 工 은 諸 侯 國 中 에 가장 强 國 이었다. 특 히 堯 임금 때 堯 임금의 後 繼 者 로 추천 되었던 共 工 氏 가 비록

後 繼 者 로 選 擇 은 되지 못하고 대신 禹 舜 이 선택되어 帝 位 에 오 르긴 하였으나 舜 임금과 比 肩 될 만큼 위대한 人 物 이었다는 사 실이다. 舜 임금은 帝 位 에 오른 뒤에 政 敵 으로부터 帝 位 에 위협 을 느끼고 四 大 政 敵 을 流 放 할 때 共 工 氏 를 幽 州 ( 河 北 省 ) 로 流 放 하였다. 이에 共 工 氏 가 幽 州 로 流 放 된 후에 工 字 하나를 버리고 共 氏 로 하였다가 뒤에 避 仇 를 위해 共 字 에 삼수변을 더해 洪 氏 로 하였 다 하였고 또 一 說 에는 共 氏 는 共 工 氏 의 후예로써 共 工 氏 는 水 德 으로 벼슬을 하여 世 襲 한 덕을 기려 共 字 에 水 邊 을 붙여 洪 氏 로 하였다는 < 共 氏 水 德 之 緖 遂 爲 洪 氏 > 라는 두 가지 說 이 있다. 八 學 士 公 東 來 說 八 學 士 東 來 說 은 < 世 宗 實 錄 > 을 비롯하여 < 元 史 > < 淡 菴 逸 集 > 등의 記 事 를 근거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洪 姓 의 원류는 八 學 士 東 來 說 에 그 基 礎 를 두고 있는 바 學 士 公 ( 洪 天 河 ) 이 西 紀 六 四 三 年 ( 唐 貞 觀 十 七, 고구려 寶 藏 王 二 年 癸 卯 ) 에 八 學 士 의 一 員 으로 東 來 하심으로 비롯되었다는 說 이 定 說 로 되어 있어 우리 나라의 洪 氏 는 이에 연유하는 것이다,( 詳 見 遡 源 錄 )

一 三 六 三 年 경에 淡 菴 白 文 寶 先 生 이 撰 한 文 正 公 ( 洪 彦 博 ) 의 神 道 碑 文 에 < 洪 氏 著 自 高 句 麗 其 先 則 八 學 士 東 來 者 之 一 也 居 南 陽 遂 而 爲 貫 公 十 三 世 祖 殷 悅 有 功 於 三 韓 官 至 太 師 自 是 以 來 世 冑 光 大 皆 登 輔 相 > 라고 하였다. 즉 洪 氏 는 高 句 麗 때부터 著 姓 이었다. 그 先 代 는 八 學 士 로 東 來 한 사람 중에 한 분으로 南 陽 에 始 居 하여 南 陽 을 貫 鄕 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한 < 世 宗 實 錄 地 理 志 > 에 < 唐 遣 才 子 八 人 往 敎 高 句 麗 洪 其 一 也 子 孫 世 貴 於 三 韓 名 所 居 曰 唐 城 > 이라고 하였다. 즉 당나라에서 재자 八 人 을 보내어 고구려를 교화하게 하였으니 홍씨가 그 중 에 한사람이다. 자손들이 대대로 귀하게 되어 삼한의 甲 族 이 되 었으니 그들이 사는 곳을 당성이라 한다. 라고 하였다. 世 宗 實 錄 의 底 本 이 된 < 新 撰 八 道 也 理 誌 > 는 世 宗 六 년( 一 四 二 四 ) 에 王 이 大 提 學 卞 季 良 에게 命 하여 撰 進 하도록 하여 一 四 三 二 年 에 완성하여 領 春 秋 館 事 孟 思 誠 등이 撰 進 한 것으로 南 陽 都 護 府 조 에 八 學 士 東 來 說 이 실려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八 學 士 東 來 說 을 주장하는 根 據 는 위의 두 가 지 說 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니 위의 두 가지 資 料 中 에 < 淡 庵 逸 集 > 은 비록 私 撰 이라.

南 陽 洪 氏 의 得 貫 由 來 우리 南 陽 洪 氏 의 得 貫 由 來 는 世 宗 實 錄 地 理 志 에 < 唐 遣 才 子 八 人 往 敎 高 句 麗 洪 其 一 也 子 孫 世 貴 於 三 韓 名 所 居 曰 唐 城 >이라고 한 기사 중에 < 名 所 居 曰 唐 城 > 이라고 한 기사와 淡 菴 逸 集 에 < 居 南 陽 遂 以 爲 貫 >이라고 한 기사를 근거로 하여 우리 洪 氏 의 본관 을 唐 城 = 南 陽 이라고 한 典 據 를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甲 戌 譜 서문에 의하면 匡 定 公 吏 部 尙 書 로 계실 때 貫 籍 을 唐 城 으로 삼으셨다라고 하였다. 우리 南 陽 洪 氏 가 高 麗 시대에는 唐 城 洪 氏 로 하였다가 南 陽 洪 氏 로 변경하게 된 경위는 唐 城 의 地 名 이 南 陽 으로 변경됨에 따라 비 롯된 것이다. 南 陽 이라는 地 名 은 西 紀 一 六 九 년에 京 畿 道 를 十 三 縣 에서 三 九 縣 으로 改 編 하면서 唐 恩 郡 을 南 陽 縣 으로 改 稱 하 므로 비로소 南 陽 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된 것이 다. 一 三 一 년에는 十 一 世 洪 奎 의 本 鄕 이라 하여 南 陽 府 로 승격하 고 一 三 一 五 年 忠 肅 王 三 年 에는 匡 定 公 ( 洪 奎 ) 에게 南 陽 府 院 君 을 封 함에 따라 南 陽 은 우리 洪 門 의 움직일 수 없는 本 鄕 이 되어 이때부터 本 貫 을 南 陽 洪 氏 로 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 이다. 이와 같이 南 陽 의 地 名 變 遷 은 高 麗 時 代 부터 오직 우리 洪

門 人 의 地 位 에 따라 地 名 의 변경과 昇 格 을 거듭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南 陽 은 우리 洪 門 의 本 鄕 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팔학사( 八 學 士 ) 칠언연구( 七 言 聯 句 ) 등 登 등 登 금 錦 악 嶽 빙 聘 창 蒼 망 茫 [ 은세통( 殷 世 通 )] 오르고 또 올라 화려한 산악에서 머나먼 바다를 내려본다. 신 信 보 步 층 層 암 岩 근 近 태 太 양 陽 [ 홍천하( 洪 天 河 )] 걸음따라 기암도 발밑에 눌리고 나니 태양은 바로 내곁에 있다 고 하리라. 구 九 만 萬 북 北 진 辰 의 宜 예 曳 리 履 [ 목충( 睦 冲 )] 아득한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길에 나아갈 이내몸이 삼 三 천 千 동 東 해 海 가 可 건 蹇 상 裳 [ 위령( 魏 齡 )] 조그마한 동국이나마 삶의 터전을 마련할만 하다.

서 西 첨 瞻 서 庶 격 檄 연 燕 경 京 제 帝 [ 방비( 房 丕 )] 서쪽으로 머리를 돌리니 연경융족( 燕 京 戎 族 ) 에게 선전포고 할 만하고 남 南 망 望 장 將 금 檎 일 日 출 出 왕 王 [ 기모( 奇 牟 )] 남으로는 일본국왕도 사로잡을 만하다. 영 嶺 략 略 승 勝 구 區 무 無 한 限 경 景 [ 길영( 吉 寧 )] 명승지의 엄청난 경치를 담뿍 안고 빙 憑 허 虛 의 疑 가 駕 대 大 붕 鵬 상 翔 [ 봉수현( 奉 守 賢 )] 허공에 의락한 몸이 대붕( 大 鵬 ) 의 나래를 걸터 탈까한다. 月 堂 洪 震 杓 譯 ( 東 洋 學 硏 究 家 ) 註 1 日 出 王 : 日 出 虞 天 子 上 書 日 沒 虞 天 子 라는 晋 史 에 있는 말인데 日 本 國 王 을 이름이다. 2 大 鵬 : 莊 子 逍 遙 遊 篇 을 보라.

당태종정관 십칠년 계묘 신라 선덕왕 십이년 시년학사 唐 太 宗 貞 觀 十 七 年 癸 卯 新 羅 宣 德 王 十 二 年 是 年 學 士 부해동래 등어풍정 기하당포 학사박처 浮 海 東 來 登 御 風 亭 其 下 唐 浦 學 士 泊 處 공금일련일운남양 재구봉산 즉학사대 共 昑 一 聯 一 云 南 陽 在 九 峯 山 卽 學 士 臺 은수포 홍씨 은씨ㆍ상림원 방씨 기씨ㆍ북일동 봉씨 길씨ㆍ육 교동 위씨 육씨 銀 樹 浦 洪 氏 殷 氏 ㆍ上 林 園 房 氏 奇 氏 ㆍ北 日 洞 奉 氏 吉 氏 ㆍ六 校 洞 魏 氏 陸 氏 홍씨휘천화 초이하자 기후 병부상서 홍도 출래시 이화자 개 정언 正 焉 洪 氏 諱 天 華 初 以 河 字 其 後 兵 部 尙 書 洪 堵 出 來 時 以 華 字 改 唐 城 古 址 의 文 化 財 指 定 과 推 進 經 緯

文 化 財 指 定 우리의 念 願 이던 唐 城 의 文 化 財 指 定 은 드디어 다음과 같은 文 化 公 報 部 長 官 의 通 牒 으로서 一 九 七 一 年 四 月 十 五 日 字 로 確 定 公 布 되었다. 文 化 財 指 定 의 推 進 經 緯 唐 城 古 址 의 由 來 에 있는 바와 같이 이곳은 우리 洪 姓 族 으로서는 至 上 의 尊 貴 한 聖 域 이라 期 必 코 우리 洪 姓 宗 中 所 有 로 만들겠다. 決 心 하고 一 九 六 六 年 에 낱낱이 調 査 해 보니 京 畿 道 山 林 野 台 帳 p 國 으로만 記 載 되어 있었다. 當 時 國 有 地 拂 下 는 財 務 部 所 管 이라 一 件 書 類 를 具 備 해서 水 原 稅 務 署 에 提 出 한 것이 一 九 六 六 年 初 였다. 累 次 交 涉 끝에 同 稅 務 署 職 員 을 案 內 하여 現 地 踏 査 를 하고 擔 當 者 의 調 査 書 와 署 長 의 意 見 書 를 添 附 하여 차례로 地 方 國 稅 廳 ㆍ國 稅 廳 을 經 由 하여 財 務 部 에 上 申 되기까지는 一 年 이 所 要 되었다. 財 務 部 에서 各 部 處 에 照 會 한 結 果 山 林 廳 所 管 의 要 存 林 으로 判 明 될 때까지는 六 回 以 上 의 往 來 와 一 年 半 의 時 日 이 걸렸다. 京 畿 道 廳 山 林 課 台 帳 에는 大 正 一 年 에 九 峯 産 城 이 라 하여 要 存 林 으로 되어 있었다. 要 存 林 이라는 것은 古 蹟 이 있 어 個 人 에게는 拂 下 가 아니되고 國 家 에서 永 久 히 保 護 한다는 것이므로 國 家 文 化 財 한다는 것이므로 國 家 文 化 財 로 指 定 申 請 하

는 것이 良 策 임을 깨달은 卽 時 로 複 雜 한 書 類 를 具 備 한 文 化 財 指 定 申 請 書 를 文 敎 部 所 管 인 華 城 敎 育 廳 에 提 出 하였다. 京 畿 道 廳 을 經 由 하여 文 敎 部 에 上 申 된 때에는 이 事 務 가 文 化 公 報 部 에 移 管 되었다. 一 九 六 九 年 十 月 十 一 日 에 이르러 비로소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의 諮 問 機 關 인 文 化 財 委 員 會 委 員 長 李 弘 稙 博 士 를 現 地 踏 査 케 하여 都 有 司 案 內 로 管 理 局 擔 當 職 員 의 三 人 이 同 行 하였다. 踏 査 後 委 員 長 말이 一 應 地 方 文 化 財 로 하였다가 二 ~ 三 年 後 에 設 備 를 제대로 갖추고 未 備 된 書 類 를 補 充 해서 國 家 文 化 財 로 昇 格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 는 것이다. 一 九 六 九 年 十 一 月 十 三 日 字 京 畿 道 知 事 通 牒 同 十 一 月 十 八 日 字 華 城 郡 守 通 牒 同 十 二 月 十 日 字 文 化 公 報 部 長 官 同 文 化 財 管 理 局 長 通 牒 에 地 方 文 化 財 로 하겠다 는 것이다. 또 不 幸 히도 李 弘 稙 委 員 長 이 病 死 하였 다. 再 三 熟 考 한 나머지 地 方 文 化 財 로 指 定 될 것은 確 實 하므로 旣 往 이면 未 備 書 類 를 갖추어서 國 家 文 化 財 로 申 請 할 것을 決 定 하고 一 九 七 年 一 月 에 申 請 書 를 文 化 公 報 部 長 官 에게 提 出 하였 다. 그 後 一 年 餘 를 不 斷 히 交 涉 한 끝에 一 九 七 一 年 十 二 月 에 文 化 財 委 員 李 基 白 西 江 大 學 敎 授 와 郡 有 司 擔 當 有 司 擔 當 職 員 의 同 行 으로 두 번째의 現 地 踏 査 를 끝마쳤다. 四 月 七 日 에 開 催 된 文 化 財 委 會 議 에서 李 基 白 委 員 의 議 細 한 報 告 에 依 해서 通 過 되

었고 따라서 史 蹟 文 化 財 로 指 定 이 되었다. 당성인( 唐 城 引 ) 당성산( 唐 城 山 ) 은 바다 위에 일산 같이 솟았는데, 그 밑에 냇가 들은 굽이굽이 감돌았네. 이렇게 영기( 靈 氣 ) 가 서린 땅에 많은 인물( 人 物 ) 이 났으니 특이( 特 異 ) 한 재간( 才 幹 ) 과 영특( 英 特 ) 한 재주는 모두 세상에 뛰어난 사람들일세. 덕산촌주( 德 山 村 主 ) 는 본래( 本 來 ) 중국( 中 國 ) 의 강남출신( 江 南 出 身 ) 으로 요동( 遼 東 ) 에 피난( 避 難 ) 하여 오랜 동안 고절( 苦 節 ) 을 지켜왔네. 요동( 遼 東 ) 은 오랑캐 사는 땅이 싫어서 우리나라의 좋은 산천( 山 川 ) 을 찾으려고 배를 타고 바다에 떠오다가 좋은 곳을 발견( 發 見 ) 하고는 보고 또 보며 배를 댔구나. 배에 내려 얼마나 오래 살 수 있고 또 자손( 子 孫 ) 은 얼마나 늘어날 것인가를 점쳐보니 이 나라의 높은 신하로서 천만세( 千 萬 歲 ) 를 내려가게 되었다. 신라( 新 羅 ) 에서부터 고려( 高 麗 ) 에 이르기까지 예악( 禮 樂 ) 과 시서 ( 詩 書 ) 의 발전( 發 展 ) 으로 많은 군자( 君 子 ) 가 생겼구나. 수제[ 壽 齊 : 홍규( 洪 奎 ) 의 호( 號 ) 는 강도말년( 江 都 末 年 ) 에 나라 일 을 도맡아서 난리( 亂 離 ) 를 평정( 平 定 ) 하고 왕실( 王 室 ) 을 보호( 保

護 ) 했으니, 기강( 紀 綱 ) 은 다시 떨쳤고 조정( 朝 廷 ) 에서는 모든 일 을 도맡겨서 소인( 小 人 ) 놈들은 다시 작난( 作 亂 ) 할 틈을 주지 않았네. 그리고 딸을 나 왕비( 王 妃 ) 가 되어서 그 아들 손자는 오늘까지 대를 이어왔으니 아- 덕산촌주( 德 山 村 主 ) 는 보통사람이 아니었 구나. 하늘이 우리를 도와서 이런 좋은 일하게 하셨네. 당성산( 唐 城 山 ) 에 푸른 소나무는 둥그렇게 서 있으니 나는 일찍 이 지내다 바라보고 경례( 敬 禮 ) 를 하였소. 양파선생( 陽 坡 先 生 : 홍언박( 洪 彦 博 ) 의 호( 號 )] 는 지금 어디로 가셨 나 그 거룩한 업적( 業 蹟 ) 은 누구도 따를 이 없어라. 기초( 郗 超 ) 가 제 할아비를 배반한 것은 손자( 孫 子 ) 가 없는 것 같 으니 문하생( 門 下 生 ) 만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목은( 牧 隱 ) 이색( 李 穡 ) 찬( 撰 ) 唐 城 史 蹟 碑 文 당성사적비문( 唐 城 史 蹟 碑 文 ) 당성( 唐 城 ) 은 본래 삼국시대( 三 國 時 代 ) 에 당성군( 唐 城 郡 ) 의 땅으

로서 바로 오늘 경기도( 京 畿 道 ) 화성군( 華 城 郡 ) 서신면( 西 新 面 ) 상안리( 尙 安 里 ) 구봉산( 九 峰 ) 이다. 해안( 海 岸 ) 에 자리하고 있는 모양이 마치 화개( 華 蓋 ) 와 같고 갯벌이 외위( 外 圍 ) 고 있다. 외협 내활( 外 狹 內 闊 ) 하여 물이 들어오는 해구( 海 口 ) 는 한 개의 항( 港 ) 이지만 지항( 枝 港 ) 이 매우 많아서 밀물이나 썰물이 반쯤 찰 때 는 마치 한 나무에 수많은 가지가 있는 모습이고 그 색( 色 ) 은 옥엽같은지라 은수포( 銀 樹 浦 ) 라 불렀다. 성( 城 ) 의 둘레는 二, 四 五 六 척( 尺 ) 이며 높이는 十 척( 尺 ) 으로 신라 ( 新 羅 ) 의 문무왕( 文 武 王 ) 이 당학사( 唐 學 士 ) 를 위( 爲 ) 하여 쌓은 것이다. 이문정공( 李 文 靖 公 ) 목은선생( 牧 隱 先 生 ) 은 우리나라의 명현( 名 賢 ) 으로서 고려조의 열사( 烈 士 ) 이시다. 그 분이 지으신 당성인( 唐 城 引 ) 이 지금도 선생( 先 生 ) 의 시고싶오권이십칠판( 時 藁 十 五 卷 二 十 七 板 ) 에 실려 있고 망해루기( 望 海 樓 記 ) 가 文 集 六 卷 十 三 板 ) 에 실려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신빙( 信 憑 ) 할 만한 근거( 根 據 ) 이고 남양( 南 陽 ) 의 구로( 舊 老 ) 인 송준( 宋 俊 ) 과 조중민( 趙 仲 旻 ) 이 경태을해[ 景 泰 乙 亥 : 一 四 五 五 年 세조원년( 世 祖 元 年 )] 에 펴 낸 계고요람( 稽 古 要 覽 ) 은 축성( 築 城 ) 한 때로부터 그리 먼 시대 의 것이 아니라서 그들이 채록( 採 錄 ) 하고 수집( 蒐 集 ) 한 관부( 官 府 ) 의 문적( 文 籍 ) 과 향언( 鄕 諺 ) 은 실( 實 ) 로 의거( 依 據 ) 할 만하다. 정관년간[( 貞 觀 年 間 十 六 年 : 西 紀 六 三 九 年 )] 에 고구려( 高 句 麗 ) 영

류왕( 營 留 王 ) 이 당( 唐 ) 에 학사( 學 士 ) 를 청( 請 ) 하였는데 당( 唐 ) 에 서는 팔명( 八 名 ) 의 학사( 學 士 ) 를 보내었고 그 중 한분이 홍학사 ( 洪 學 士 ) 이시다. 백모( 白 帽 ) 차림으로 당유학사단( 唐 遺 學 士 團 ) 에 참여( 參 與 ) 하셨다가 고구려( 高 句 麗 ) 의 풍속( 風 俗 ) 이 학( 鶴 ) 의 것 으로서 금수에 가까움을 혐오( 嫌 惡 ) 하시어 해외( 海 外 ) 의 삼선산 ( 三 仙 山 ) 을 찾아서 황해( 黃 海 ) 의 경랑( 鯨 浪 ) 을 타시고 동향( 東 向 ) 하시다가 뜻을 멈추시고 이곳 해안( 海 岸 ) 에 내려 정거( 定 居 ) 하시니 시인( 詩 人 ) 들이 이곳을 당곶( 唐 串 ) 이라 하였고 이 성( 城 ) 을 당성( 唐 城 ) 이라 하였으니 당성군( 唐 城 郡 ) 이라 한 것도 역시 이에서 유래( 由 來 ) 하는 것이다. 나날이 아국( 我 國 ) 을 도와 시 ( 詩 ) 서( 書 ) 예( 禮 ) 악( 樂 ) 을 가르치시어 요망분분( 妖 妄 紛 紛 ) 한 풍속( 風 俗 ) 을 쓸어 없애시니 이에 기강( 紀 綱 ) 이 정제( 整 齊 ) 되었 다. 그러나 천만세가 지난들 그 분의 공열( 功 烈 ) 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러함에도 이 한 구성( 區 城 ) 의 남기신 성( 城 ) 이 고허 ( 古 墟 ) 가 되어버린 지 매우 오래여서 송백( 松 柏 ) 의 그림자가 성 글고 화석( 花 石 ) 의 향기( 香 氣 ) 가 싸늘하더니 얼마나 다행( 多 幸 ) 인지 단군사천삼백사년( 檀 君 四 千 三 百 四 年 ) 서기一 九 七 一 년 신해 ( 辛 亥 ) 에 문화공보부( 文 化 公 報 部 ) 로부터 문화재사적( 文 化 財 史 蹟 ) 제이백십칠호( 第 二 百 十 七 號 ) 로 지정( 指 定 ) 받아 나라에서 황폐 ( 荒 廢 ) 한 성( 城 ) 을 보수( 補 修 ) 하고 아울러 망해루( 望 海 樓 ) 를 중

건( 重 建 ) 하여 모습을 장대( 壯 大 ) 히 하려하니 아! 국가( 國 家 ) 의 관리( 管 理 ) 하는 힘이 앞으로 지대( 至 大 ) 할 것이다. 무진춘 서기一 九 八 八 년( 戊 辰 春 ) 에 남양홍씨( 南 陽 洪 氏 ) 해봉파종 회( 海 峰 派 宗 會 ) 가 대종중( 大 宗 中 ) 과 협모( 協 謨 ) 하고 자력부담( 自 力 負 擔 ) 으로 성( 城 ) 의 남문( 南 門 ) 안에 높이 십오척( 十 五 尺 ) 이나 되는 사적비( 史 蹟 碑 ) 를 세우려고 나에게 기문( 記 文 ) 을 요구하니 나는 늙은 몸이라 이 역사( 役 事 ) 를 도울 수 없는 마당에 어찌 이것마저 또 감히 사절하겠는가. 이어 먼저 당성( 唐 城 ) 의 고사 ( 故 事 ) 를 적은 다음에 당학사( 唐 學 士 ) 께서 우리나라에 오시게 된 유래( 由 來 ) 를 기록( 記 錄 ) 하여 후손( 後 孫 ) 들에게 고( 告 ) 하는 바이니 우리 모든 당성씨( 唐 城 氏 ) 들은 각기 조선( 祖 先 ) 의 높고 넓은 덕업( 德 業 ) 을 살려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무진( 戊 辰 ) 一 九 八 八 年 十 月 당성( 唐 城 ) 홍종범( 洪 鍾 凡 ) 기( 記 ) 당성( 唐 城 ) 홍순용( 洪 淳 湧 ) 서( 書 ) 貫 鄕 地 ( 唐 城 ㆍ南 陽 )의 沿 革 우리 洪 門 의 貫 鄕 地 인 南 陽 의 옛 이름은 百 濟 때에는 唐 項 이라

하였고 高 句 麗 때에는 唐 城 郡 이라 하였고 新 羅 때에는 唐 恩 郡 이라 하였다. 高 麗 때에는 다시 唐 城 郡 이라 하였다가 忠 烈 王 十 六 年 ( 一 二 九 )에는 征 東 行 省 右 承 이 된 洪 茶 丘 의 本 鄕 이라 하 여 南 陽 縣 을 知 益 州 事 로 승격하였고 一 三 五 년( 忠 烈 王 三 十 一 ) 에는 元 의 左 承 相 阿 忽 台 의 妻 ( 洪 奎 의 女 ) 의 本 鄕 이라 하여 江 寧 都 護 府 로 승격하였다. 一 三 一 년( 忠 善 王 二 ) 에는 洪 奎 의 本 鄕 이라 하여 南 陽 府 로 昇 格 하고 洪 奎 를 南 陽 府 使 로 除 授 하였다. 一 八 九 六 年 에 南 陽 郡 으로 하였다가 一 九 一 四 에 南 陽 面 으로 하였 다. 一 九 四 九 年 八 月 十 五 日 에 華 城 郡 西 新 面 尙 安 里 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南 陽 의 연혁에 대하여 좀더 상세하게 밝히 기 위하여 그 沿 革 史 를 年 代 順 으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西 紀 二 七 年 부터 四 七 五 年 九 月 까지 二 五 年 간은 百 濟 領 으로 黨 項 城 이라 하였고 四 七 五 年 九 月 부터 五 五 一 年 까지 七 十 六 年 간은 高 句 麗 領 으로 唐 城 郡 이라 하였다. 五 五 一 年 부터 五 五 二 年 七 月 까지 二 年 간은 百 濟 領 이 되었고 五 五 三 年 七 月 부터 六 四 二 年 八 月 까지 八 十 九 年 간은 新 羅 領 이 되었다. 六 년경에 新 羅 의 진평왕이 築 城 을 하였다. 六 四 二 年 八 月 부터 六 四 五 年 까지 三 년간은 高 句 麗 의 領 土 가 되

었다. 六四三年에 八學士 一行이 고구려의 唐城에 처음으로 도착하였 다. 六四五年부터 九 一年까지 二五六年간은 新羅領이 되었다. 六六一年부터 六八一年 사이에 新羅의 文武王이 築城을 하였다. 七五七年(경덕왕 十六年) 十二月에 唐恩郡이라 고치고 八一六年(헌덕왕 八年)에 漢山州 唐恩縣이라 하였다. 八二三年(헌덕왕 十五年) 二月에 水城郡과 合倂하고 八二九年(흥덕왕 四年) 二月에는 唐恩郡을 唐城鎭이라 고치고 沙餐 極正을 보내어 守備하게 하였다. 九一八年 六月에 高麗가 개국되었다. 九三六年 三國이 통일되었다. 九四 年(高麗태조 二十三年)에 다시 唐恩郡이라 하고 一 一一年(현종 九年)에 唐恩郡을 漢山州의 屬郡에서 水州의 속 군으로 옮겼다. 一 六九年(文宗 二十三年)에 京畿道를 十三縣에서 三十九縣으로 개편하면서 南陽縣이라 하였으니 南陽이라는 地名이 이때부터 비 롯되었다. 一一二二年 仁宗때 水州의 屬縣에서 仁州의 屬縣으로 옮겼다. 一一七二年(명종 二年)에 監務를 두고

一二九 年(충렬왕 十六年)에는 元의 征東行省 右承이 된 洪茶丘 의 本鄕이라 하여 知益州事로 승격하였다. 一三 五年(충렬왕 三十一年)에 元의 承相 阿忽台의 妻(洪奎의 女)의 本鄕이라 하여 江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一三 八年(충렬왕 三十四年)에 다시 益州牧으로 승격하였다. 一三一 年(충렬왕 二年)에 전국의 모든 牧을 폐지함에 따라 益州 牧을 폐지하고 南陽郡 洪奎의 本鄕이라 하여 南陽府로 고치니 洪 奎가 南陽府使로 나가기를 自請하여 府使로 赴任하였다. 一三一五年(忠肅王 元年)에 洪奎에게 南陽府院君을 封하니 이때 까지 唐城洪氏라 하던 것을 南陽洪氏로 개관하였으니 이로부터 南陽洪氏가 비롯되었다. 一三八五年(禑王 十一年)에 三峰 鄭道傳이 南陽府使로 赴任하였 다. 一三九 年경에 南陽府使 鄭乙卿(字善輔 號海亭漁搜 海州人)이 望海樓를 建築하고 牧隱 李穡이 望海樓記를 撰하였다. 望海樓記 는 牧隱集과 東國輿地勝覽에 실려있다. 望海樓記에 이르기를 < 州之洪氏 自太祖興時 有翼戴功 諱殷悅 者是已 世爲大族至江都末 南陽君 誅權臣反正王室 生文睿府主 爲兩朝大母 陞之爲府 益山川靈異之氣 鍾而休祥 以基夫萬億年 無彊之業 固不可以 他郡縣 等夷之也 故重其守臣 亦必愼簡 >라

고 하였다. 즉 남양의 洪氏는 高麗太祖가 開國 할 때 익대한 공 이 있으니 殷悅이라고 하는 분이 곧 이분이시다. 라고 하여 太師 公이 고려의 開國功臣임을 증거하는 자료가 되어 우리 洪門에서 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一三九二年 七月 十七日에에 朝鮮이 開國되다. 一四一三年(태종 十四年)에 南陽都護府로 昇格하였다. 一四五七年(세조 三年) 十月 二十日에 水原鎭에 예속하였다. 一六四四年(인조 二十年)에 逆刑의 胎地라 하여 縣으로 강등하였 다. 一六五三年(효종 四年)에 다시 都護府로 승격하였다. 一六六六年(현종 七年)에 前南陽府使 閔著重이 文定祠(中國의 諸 葛武侯와 胡安國을 配享할 目的으로)를 세우고 宋時烈이 文定祠 記를 撰述하였다. 문정사에는 중국의 제갈무후와 호안국을 배향한 것이나 배향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향이 중국의 남양이기 때문에 지명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배향한 것이다. 문정사가 완성된 뒤에 남양부민들이 전 남양부사 尹棨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한 공을 기려 從享하자는 여론에 따라 윤계 를 추가로 從享하였을 뿐 우리 洪門의 學士公과 太師公을 配享한 사실은 없다.

一六七 年(현종 九年)에 益州로 개칭하고 水州에 예속시켰다. 一六七四年(현종 十五年)에 南陽縣으로 복구하였다. 一七二四年(경종 四年) 文定祠를 세운지 五十八年이 지난 후에 南 陽儒生 鄭雲龍과 趙瑞文이 學士公(洪天河)과 太師公을 文定祠에 追配할 것을 請願하는 通文을 돌렸으나 때마침 國喪(景宗의 昇 遐)을 당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文定祠가 學士公과 太師公을 配享했던 祠宇인 것처럼 인식하고 문정사의 復元이 우리 洪門의 숙원사업인 양 擧 論하는 것은 잘못이다. 一八九五年(고종 三十二年)에 全國을 三十二府로 개편하면서 仁 川府에 예속시켰다. 一八九六年(고종 三十三年)에 全國을 十三道로 개편하면서 京畿 道 南陽郡으로 하였다. 一九一四年(왜정 五年)에 水原郡 南陽面으로 개편하였다. 一九四九年(대한민국 二年) 八月 十五日 水原을 市로 승격함에 따 라 수원군이 폐지되고, 華城郡 西新面 南陽里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唐城의 位置는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 山三二 番地 九峰山에 있으며 新羅 文武王(六六八~六八一)이 築城을 하 였고 唐城의 형태는 百濟式 테메형(山頂型)과 新羅式 浦谷型(丘 陵形)이 혼합된 複合形 土城이다. 城의 둘레는 二, 四六五尺(七四

二m) 높이는 十척(三m)이었다. 城郭內의 면적은 二四, 평이 고 東西南北의 門址와 望海樓址가 남아있다. 望海樓는 一三九 년경에 南陽府使 鄭乙卿이 부임하여 建築하였고 牧隱 李穡이 望 海樓記를 撰하였다. 우리 南陽洪氏의 古事는 望海樓記와 唐城引 의 記事를 많이 引用하고 있어 매우 貴重한 資料로 평가되고 있 다. 唐城은 南陽洪氏大宗中中央宗會의 활약으로 西紀一九七一年 唐 城史蹟地 第二一七號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니 그 내역 을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一九七一年 四月 唐城史蹟地 第二一七號(史蹟地域 總四七,四一 평, 城郭內 二四, 평)로 指定되다. 一九七二年 七月 二十九日 唐城史蹟保存會 法人設立 認可 一九七二年 三月 二十日 法人登記畢 一九七三年 二月 二十日 唐城洪報 創刊 一九七七年 四月 二十二日 進入路 開設 길이 五 미터, 폭 六 미터 一九七九年 十二月 二十二日 唐城聖域化 推進決議 一九八四年 四月 八學士門中 代表者會議에서 會誌表題 <唐城洪 報>를 <唐城>으로 改稱하기로 결의하다. 一九八八年 十月 三十日 史蹟碑 建立(高十五尺, 海峰門中의 誠金

一,五 만원으로)하고 進入路 鋪裝工事 五 一미터를 竣工하였 다.(政府補助金으로 華城郡廳에서 施行) 一九九三年 城郭復元計劃 一,四五一미터(內城 一五一m, 外城 三 미터) 및 地表發掘調査 着手, 二 二年에 완공예정 一九九八年 進入路 포장 총 七五 미터를 완공하고 城郭 一, 미터를 復元, 殘餘部分 四五 미터는 繼續事業으로 추진 중에 있어 성벽복원과 지표조사가 완료되는 二 二年 이후부터는 建 物復元을 추진할 예정이다. 남양부(南陽府) 망해루기(望海樓記) 망해루(望海樓) : 고당성(古唐城)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남양부(南陽府)를 삼국 시대에는 당성(唐城)이라 이름하였는데 본 조에 들어와서 중세(中世) 이래로는 익주(益州)가 되었다. 익주의 홍씨(洪氏)는 태조(太祖)가 처음 일어날 때에 익대(翊戴)한 공이 있는데 은열(殷悅)이라는 이가 그 사람이다. 대대로 대족(大族)이 되었고 강도(江都) 말년에 이르러 남양군(南陽君)이 권신(權臣)을 죽이고 정치를 왕실(王室)로 돌려보냈으며 문예부주(文睿府主)를 낳아서 두 조정의 태모(太母)가 되었으므로 승격하여 부를 만들었 다. 대개 산천이 신령하고 이상한 기운이 뭉치어 아름다운 상서가

되어서 억만년 한없는 왕업(大業)의 기초가 되었으니 참으로 다른 고을들과 평등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을을 지키 는 신하를 중하게 여기고 또한 반드시 삼가 선택하였다. 해정어수 (海亭漁搜) 정후(鄭侯)가 이르매 생각하기를, 날(日)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 있고 물은 근원과 끝이 있는 것이어서 비록 멀고 큰 것이라도 그것을 잘 볼 줄 아는 자는 모두 그 난 곳과 근원을 알거든 하물며 군상(君上)이 나온 곳(어머니의 집)이랴 오죽 하겠 는가 신하 된 자가 진실로 마땅히 공경하여 감소 소홀히 할 수 없 는 것이다. 하물며 내가 영광스럽게 명령을 받아서 군상(君上)이 출생한 그 땅을 지키는 신하가 된 것이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서 오직 공경항 덕화(德化)로 먼저 하기를 힘써서 그 아전을 감화시키고 감히 형벌을 가하지 않으며 그 백성에게는 은혜롭게 하고 감히 위엄을 베풀지 않으니, 일년 만에 크게 화(和)하여져서 이익되는 것은 일으키지 않음이 없고 해가 되는 것은 모두 제거되었다. 이에 고을 읍내에 누각을 지어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것을 장려 (壯麗)하게 하며 <찾아오는> 빈객과 사신(使臣)을 즐겁게 하며 누 의 이름을 써 붙이기를 망해 (望海)라 하고 그 아들 국자생(國 子生)이(彛)를 시켜 내 글을 받아서 기(記)를 삼게 하면서 말하기 를 고을에 예전에는 못이 있었는데 오해 폐하여 수축하지 않아

서 위에는 풀이 우거지고 아래는 지적지적하여 근처에 사는 사람 들이 그 가운데에 섞이어 경작하고 있다. 고을 사람들이 서로 못 의 용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매 그 뒤에 못이 말랐다고 전하나 참 으로 그러한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후(侯)가 이른(至) 뒤에 명하 여 못을 파서 수축하였더니 이날에 검은 구름이 갑자기 동남쪽에 서 일고 바람과 우레가 따라 이르렀다.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용이 꼬리가 꿈틀꿈틀하며 못에 닿아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못 물이 사흘 동안 끓어 흰 기운이 무럭무럭 올라서 그치지 않으니 늙은이와 어린이가 탄식하고 이상하게 여기었다. 하였다. 내가 말 하기를, 마음의 작용이란 큰 것이다. 한번 그 마음을 정하면 천 하(天下)도 하잘 것이 없는 것이다. 정후(鄭侯)의 공경하는 마음이 멀리 통달하여 간격이 없으므로 드러나게는 사람이 화합하고 신비 롭기는 <용같은> 물(物)이 감동되는 것이니 이 누(樓)의 조그마한 것 쯤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는가. 그러므로 먼저 고을의 고 사(故事)를 말하고 다음에 용이 돌아온 사유를 기록하여 뒷사람에 게 고하노라 후(侯)의 이름은 을경(乙卿)이요 자(字)는 선보(善輔) 이며 재간과 능력으로 세상에 쓰여지는 것이다 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찬(撰) 受敎事目

敎旨(皇朝后孫禁役事) 太祖大王의 敎旨 內容에 보면 皇朝人(中國에서 건너와 벼슬한 사 람) 子孫들은 비록 千萬代가 지나가도 軍役에 動員하지 말라 하 였으며 甲戌(一三九四年 太祖三年) 六月十二日에 訓將, 御將, 禮 曹判書, 儒臣들이 임금 앞에 모인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中朝 人을 向化人(中國에서 流離해와서 賤民生活을 하는 者) 名簿속에 混同 記錄하여 賤役에 動員되는 境遇가 많아 該當諸道의 관리는 嚴하게 處罰할 것이니 모든 道伯들은 特別히 留念하라 이제 禮曹 와 漢城府가 서로 帳簿를 對照 調査하여 가짜와 진짜를 밝혀 새 로 정서하여 冊을 만들어 華人子孫錄이라 하여 代代로 役事를 免 해주고 오래도록 軍役이나 稅金을 거두지 않을 것이니 이 命令을 嚴하게 지켜라 하였다. 英宗(一七五八年 英祖三十四年) 武人七月初五日에 大臣備局, 堂 上官들이 임금 앞에 모인 가운데서 司諫 柳健이 狀啓를 올려 말 하기를 昨年에 제가 湖邑에서 待罪하고 있을 때 들은 바인데 해변가에 접근한 고을에서 민폐가 많다고 하여 아뢰옵는 바입니 다. 向化人의 身役과 布(베) 一疋을 거두는 것은 朝廷에서 良賤 (상인들의 천역)을 特別히 勘案하여 먼나라 사람들을 어루만져 救 濟해 주는 盛德인 줄 알고 있으며 현재 良役과 布(베) 한필을 減

했다고 하나 이것은 前과 별 다름이 없으니 이 어찌 우휼(優恤)의 본 뜻에서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또한 良役으로 말하면 三 四 父子가 있으면 빼주는 규정이 있는데 여기 일인즉 모든 고을에서 한결같이 옛 法대로 따져 사람의 머리수대로 징발하여 한 집에 수 십 장정이 있더라도 하나도 빼주는 惠澤이 없으니 臣은 원컨대 各府에 분부를 내려 身役과 布稅를 탕감하여 良賤을 불쌍히 여겨 서 優恤의 德을 베푸소서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일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제 奏 請한 內容을 들으니 眞實로 옳은 일이다. 심지어 皇朝人까지도 그 사이에 끼어 勞力과 稅金을 徵收하니 슬프다 나라가 亡하지 않았는데 그 누가 皇朝人 子孫들을 軍役에 充當시키느냐 萬若 軍 役에 充當시키는 者 있으면 該當 官吏는 法을 違反한 혐의로 다 스리고 아울러 一束紙에 減俸處分을 내릴 것이니 政令을 嚴守하 라 하였다. 正宗 戊午(一七九八年 正祖二十二年) 九月初三日에 임금이 先王 의 陵에 행차하실 때에 이 敎旨를 내렸으니 이 때에 靈嚴의 向化 人 朴昇福이가 징을 치며 말을 올리니 임금이 해당 官에게 審査 토록 하였다. 그런데 朴昇福이 論述한 것이 비록 외람한 것 같으 나 皇朝人 子孫들을 돌보는 惠澤이 그 옛날만 같지 못하니 저들 이 원통한 마음을 품고 횡포 또한 莫甚하여 窮人이 돌아갈 곳 없

는 것 같으니 어찌 가긍하지 않으며 또 하물며 陳林의 모든 사람 들은 顯忠祠에 配享하여 祭香까지 올리니 이런 때에 이런 말을 들인 차마 생각조차 못하였다. 各道 沿海邑에서는 이런 일을 가장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다. 이 제 바로 各道臣들은 細密히 狀啓를 살펴라 其中에 每名마다 所納 한 세금이 二十餘金이나 많은 자는 더욱 가련한 일이다. 向化한 사람과 京中의 漢人들이 많아 年前에도 特別히 漢族廳을 마련하 여 보살펴주고 이들의 대부분이 배를 타고 고기잡아 生計를 꾸려 나가니 因窮이 莫甚하고 누가 돌보는 사람 없으니 向化村에 폐단 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먼저 嶺南地方으로 하여금 이런 實情을 調査하고 處理하여 다른 道도 이에 따르도록 하다. 이제 朝廷에서도 特別한 措置를 내리도록 할 것이다. 近來에 名敎가 날로 떨어져 春秋大義에 어긋나는 者 많으며 官長 이 된 자는 그 扶植하는 方法을 모르고 被害가 무고한 向化村에 미치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랴. 皇朝사람이 우리나라에 流離하여 사는 자를 向化라고 부르는 것은 극히 잘못된 일이니 모든 文書에 記錄되어 있는 向化 二字를 삭 제하라 湖南에서는 아직까지도 向化라고 부른다 하니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로는 皇朝人村이라고 改稱하는 京外에 있는 모든 文書나 邑誌에도 全部 整理하라 하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