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사회의 변화, 5) 豊 臣 정권의 전략적 사고에 관한 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6)동아시아 국 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 관한 재검토를 든다. 물론 이 순서가 과제로서의 순서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일본 측 위원의
|
|
- 병욱 우
- 8 years ago
- Views:
Transcription
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4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 朝 鮮 琉 球 日 本 에 있어서 大 明 外 交 儀 禮 의 관점에서- 구와노 에이지( 桑 野 栄 治 ) 머리말 Ⅰ. 조선 전기의 동아시아 국제환경 1. 명과 조선의 관계 2. 명과 琉 球 의 관계 3. 명과 일본의 관계 Ⅱ. 조선 宣 祖 代 의 의례와 외교 1. 宣 祖 의 책봉의례 2. 임진왜란 이전의 望 闕 禮 1) 명 사신의 來 朝 와 冬 至 의 望 闕 禮 2) 國 忌 에 수반하는 朝 賀 禮 의 順 延 조치 3. 임진왜란기의 望 闕 禮 1)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2) 한성 還 都 후 南 別 宮 에서의 望 闕 禮 3) 전시하 의례 실시상의 문제점 4) 동아시아 세계의 조선과 명 4. 임진왜란 후의 望 闕 禮 1) 朝 賀 禮 의 정체 2) 宣 祖 즉위 40년째의 望 闕 禮 Ⅲ. 日 本 國 王 豊 臣 秀 吉 의 책봉의례 1. 일본국왕 책봉사의 復 命 報 告 2. 景 轍 玄 蘇 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증언 맺음말 머리말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제2분과회에서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임진왜란( 文 祿 慶 長 의 役 )에 관한 연구사 정리를 살펴보고 학계에 귀중한 성과를 제공하였다. 1) 동시 에 이들 성과에서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후 검토해야 할 과제에 어느 정도 견해차이가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일본의 경우 이후의 연구과제로서 1)조선 측 명측의 군량 공급 시스템 규명, 2)피로인의 실태와 송환 시스템 해명, 3)왜성 연구, 4)전쟁으로 인한 조선 1) 六 反 田 豊 / 田 代 和 生 吉 田 光 男 伊 藤 幸 司 橋 本 雄 米 谷 均 北 島 万 次,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 朴 晢 晄, < 壬 辰 倭 乱 ( 文 禄 慶 長 の 役 ) 研 究 の 現 況 と 課 題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2005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報 告 書 ( 第 2 分 科 篇 ) ( 同 委 員 会 ))
2 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사회의 변화, 5) 豊 臣 정권의 전략적 사고에 관한 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6)동아시아 국 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 관한 재검토를 든다. 물론 이 순서가 과제로서의 순서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일본 측 위원의 보고서에는 조선의 군량조달을 주제로 하 는 논고가 게재되어 있으며, 2) 한반도에서 군량 공급 시스템을 밝혀내는 일이 매우 중요 한 과제로 제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한국의 경우는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수행해야 할 공동연구 과제로서 1)임진왜 란과 동아시아 국제정세, 2)일본과 조선왕조의 수군 전력, 3)의병운동, 4)조선군의 병력 동원 체제, 5)임진왜란의 전투지역 조사, 6) 降 倭 被 擄 人 문화재 약탈, 7)임진왜란기의 점 령정책과 민중의 대응 생활상, 8)상호 간의 문화 전파를 제시하였다. 과제는 다양한 분 야에 걸쳐 있으며, 이 순서 역시 과제로 되어야 할 우선순위를 나타낸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측 위원의 보고서에는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을 비교한 논고가 실려 있으며, 3) 당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관한 문제가 반드시 중요한 과제로 설정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제1기 보고서가 세간에서 널리 문제되던 2005년의 시점에서는 한일 양국의 연 구자 입장에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혹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관한 문제 를 금후의 연구과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제1기에서 橋 本 雄 씨가 조선국왕사와 일본국왕 ( 室 町 殿 )의 외교의례에 주목했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 이다. 4) 외교의례가 당사국의 도의적, 정치적, 군사적 관계를 반영하는 실용의 거울이었 다 5) 면, 외교의례의 관점에서 임진왜란기의 동아시아 국제환경을 조명하는 것도 가능해 질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 전기(대략 15~16세기에 해당)의 동아시아 국 제환경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2) 六 反 田 豊,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開 戦 初 期 における 朝 鮮 側 の 軍 糧 調 達 とその 輸 送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3) 鄭 求 福, < 壬 辰 倭 乱 の 歷 史 的 意 味 - 壬 辰 倭 乱 に 対 する 韓 日 両 國 の 歷 史 認 識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4) 橋 本 雄, < 朝 鮮 國 王 使 と 室 町 幕 府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5) 로날드 토비( 速 水 融 他 번역) 近 世 日 本 の 國 家 形 成 と 外 交 ( 創 文 社, 1990년 9월. 原 著 는 Ronald P.Toby.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hu.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 第 5 章 外 交 儀 禮 の 鏡 を 覗 く- 理 念 の 世 界 を 映 し 出 す 姿 見 > 138
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1 Ⅰ. 조선 전기 동아시아의 국제환경 1. 명과 조선의 관계 조선왕조(1392~1897)는 건국 후 즉시 명 태조 洪 武 帝 ( 朱 元 璋. 재위 1368~98년)를 정 점으로 하는 이른바 冊 封 体 制 6) 에 참가하고 의례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1401년( 太 宗 원년)에 恵 帝 建 文 帝 (재위 1398~1402)가 제3대 조선국왕 太 宗 (재위 1400~18)에게 誥 命 ( 辭 令 書 )과 金 印 을 하사하고 책봉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靖 難 의 變 ( 帝 位 를 둘러싼 내 란)을 거쳐서 옥좌에 올랐던 成 祖 永 楽 帝 (재위 1402~24년)도 역시 2년 뒤인 1403년에 다시 太 宗 을 조선국왕 으로 책봉하였다. 7) 제3대 永 樂 帝 는 洪 武 帝 의 대외정책을 계승하 도록 적극적인 조공 권유책을 취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에 노력하고 있었다 8) 이념상 조선국왕은 명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상의 華 夷 秩 序 에 편입되었던 것이 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에 처해 있던 조선국왕이 매년 正 朝 ( 元 旦 ) 聖 節 (명 황 제 생일) 千 秋 節 (명 황태자 생일) 외에 동지 때도 조공사절을 파견했던 것은 주지의 사 6)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국제관계의 특징을 표현하는. 책봉체제 에 관해서는 당장은 西 嶋 定 生 東 アジア 史 論 集 ( 第 3 卷 東 アジア 世 界 と 冊 封 體 制 ) ( 岩 波 書 店 ) < 第 1 部 3 冊 封 體 制 と 東 ア ジア 世 界 > 95~101 참조. 다만 이러한 정치구조에 대한 비판 재검토도 많다. 최근에는, 예를 들어 서 夫 馬 進, < 明 淸 中 國 による 對 朝 鮮 外 交 の 鏡 としての 對 ベトナム 外 交 - 冊 封 問 題 と 問 罪 の 師 を 中 心 に> ( 紀 平 英 作 編, グローバル 化 時 代 の 人 文 學 - 對 話 と 寬 容 の 知 を 求 めて( 下 ) 共 生 への 問 い 京 都 大 學 學 術 出 版 會 ) 238~244에 따르면, 安 南 에서 僞 勅 僞 年 號 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도 明 은 安 南 의 朝 貢 을 계속 받아들였고, 또한 同 <1609 年, 日 本 の 琉 球 倂 合 以 降 における 中 国 朝 鮮 の 對 琉 球 外 交 - 東 アジア 四 國 における 冊 封, 通 信 そして 杜 絶 > ( 朝 鮮 硏 究 會 論 文 集 第 46 集, 2008 년 10월) 7~10에 따르면, 淸 代 의 책봉국은 朝 鮮 越 南 ( 安 南 ) 琉 球 의 3국뿐이었으며, 겨우 暹 羅 를 추가한 4 國 에 불과하다고 한다. 7) 末 松 保 和, 高 麗 朝 史 と 朝 鮮 朝 史 ( 末 松 保 和 朝 鮮 史 著 作 集 5) ( 吉 川 弘 文 館 ) < 麗 末 鮮 初 に 於 ける 対 明 関 係 > (초판은 京 城 帝 國 大 学 文 学 会 編, 史 学 論 叢 第 2 ( 岩 波 書 店 )) < 第 十 一 章 誥 命 印 章 の 獲 得 > 234~237. 李 鉉 淙 < 対 明 関 係 > ( 國 史 編 纂 委 員 会 編, 1974 한국사 9 (양반 관료국가의 성립) ( 同 委 員 会, 서울)) 331~332. 孫 承 喆,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교 린관계의 허와 실 ( 景 仁 文 化 社, 서울). 구판의 일본어 訳 은 鈴 木 信 昭 監 訳, 近 世 の 朝 鮮 と 日 本 - 交 隣 関 係 の 虚 と 実 ( 明 石 書 店 )) <제1장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교린체제> 35~38 8) 佐 久 間 重 男, 日 明 関 係 史 の 研 究 ( 吉 川 弘 文 館 ) < 第 一 編 第 二 章 永 楽 帝 の 対 外 政 策 と 日 本 > 98~99 ; 檀 上 寛, < 明 初 の 海 禁 と 朝 貢 - 明 朝 専 制 支 配 の 理 解 に 寄 せて>( 森 正 夫 他 編, 明 清 時 代 史 の 基 本 問 題 ( 中 国 史 の 基 本 問 題 4)> ( 汲 古 書 院 )) 223 ; 同, < 初 期 明 帝 国 体 制 論 >( 杉 山 正 明 他, 岩 波 講 座 世 界 歴 史 11( 中 央 ユーラシアの 統 合 ) ( 岩 波 書 店 )) 318~321
4 5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실이다. 다만 엄밀하게 말해서 1531년( 中 宗 26)에는 종래의 正 朝 使 를 폐지하고 冬 至 使 가 신설되었으며, 聖 節 使 千 秋 使 冬 至 使 를 명에 파견하는 1년 3공의 대명외교체제로 이행 하였다. 9) 이 1 年 3 貢 체제에 대하여 아직도 연구자들 사이에 오해가 있다. 예를 들면, 朴 成 柱 씨 는 冬 至 使 가 中 宗 26년부터 파견됐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16세기 후반부터 冬 至 使 가 추가되어 1 年 4 貢 이 규례화된 것 이라고 한다. 또 全 淳 東 씨는 正 朝 使 冬 至 使 聖 節 使 에 中 宗 26년(1531) 이후부터는 황태자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千 秋 使 도 함께 추가 되어 1 年 4 使 가 정례로 되었다 고 한다. 10) 그러나 양자 모두 잘못이다. 조선 초기의 遣 明 使 節 은 正 朝 聖 節 千 秋 使 의 1년 3공, 조선 중기인 中 宗 26년 이후는 聖 節 千 秋 冬 至 使 의 1년 3공이다. 이러한 오해가 생긴 까닭은 아마도 16세기 朝 明 関 係 의 실태에 접근 한 실증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니면 조선 후기의 사역원 역관인 金 指 南 金 慶 門 부자가 편찬한 通 文 館 志 (1720년 간행)에 國 初, 매년 파견하는 朝 京 使 에 冬 至 正 朝 聖 節 千 秋 의 四 使 가 있다 고 한 조문 11) 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 9) 1587년( 萬 暦 15)에 완성된 明 代 国 制 総 覧 인 萬 暦 大 明 会 典 ( 新 文 豊 出 版 公 司, 台 北 )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朝 鮮 國 条 에 永 樂 初 賜 印 誥 自 後 毎 歳 聖 節 正 旦 嘉 靖 十 年 (= 中 宗 26년), 外 夷 朝 正 旦 者 倶 改 冬 至 皇 太 子 千 秋 節, 皆 遣 使 奉 表 朝 賀, 貢 方 物, 其 餘 慶 慰 謝 恩 無 常 期 라고 되어 있으며, 中 宗 26년 3월에는 毎 歳 元 朝 ( 正 旦 )의 ( 朝 ) 貢 은 동지 전으로 옮겨 入 賀 하라 는 聖 旨 가 조선에 전달되었다( 中 宗 実 録 권70, 26년 3월 9일 甲 午 条. 사료 중의 안은 割 註, 이하 같음). 10) 朴 成 柱, <조선 초기 遣 明 使 節 에 대한 일고찰> 慶 州 史 学 第 19 輯 慶 州 ( 曺 圭 益 他 編, 연행록연구총서6(역사) ( 学 古 房, 서울)에 再 録 ) 153 ; 全 淳 東, <15세기 조선과 명의 문 물 교류-중국문물의 유입을 중심으로> 韓 国 史 研 究 会 編, 韓 国 史 의 国 際 環 境 과 民 族 文 化 ( 景 仁 文 化 社, 서울) 93. 그밖에 朴 元 熇, 明 初 朝 鮮 関 係 史 研 究 ( 一 潮 閣, 서울) <15세기 朝 鮮 과 明 의 關 係 > 294도 조선은 후일 中 宗 26년( 嘉 靖 10년, 1531)부터 冬 至 使 가 추가되어 1년 4사가 된다 고 하며, 16세기의 동아시아 세계를 그린 金 翰 奎,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중국적 세계질서의 붕괴> 鄭 杜 熙 他 編,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서울). 일본어 訳 은 金 文 子 監 訳, 壬 辰 戦 争 -16 世 紀 日 朝 中 の 国 際 戦 争 ( 明 石 書 店 ) 312도 역시 조선은 賀 正 使 와 聖 節 使 千 秋 使 등 1년 3사를 고집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冬 至 使 를 추가하여 1년 4공을 강행했다 고 서술했다. 한편, 조선시대의 조공 책봉관계를 정리한 権 善 弘, <조선시대 사대관계와 책봉체제> 韓 日 関 係 史 研 究 論 集 編 纂 委 員 会 編, 왜구 위사문제 와 한일관계(한일관계사연구논집4) ( 景 仁 文 化 社, 서울) 65에서 조선은 明 으로부터 1년 3~4공 이라는 유례없이 파격적 대우를 받았다 고 애매하게 표현했다. 11) 朝 鮮 史 編 修 委 員 会 編, 通 文 館 志 ( 朝 鮮 史 料 叢 刊 第 21) ( 朝 鮮 総 督 府, 京 城 ). 底 本 은 1888 년에 重 修 刊 行 된 서울 大 学 校 奎 章 閣 蔵 本 ) 권3, 事 大 上, 赴 京 使 行 条. 이 조문을 근거로, 예를 들어 서 全 海 宗, 韓 中 関 係 史 研 究 ( 一 潮 閣, 서울) < 清 代 韓 中 朝 貢 関 係 考 > 61에서는 李 朝 初 期 의 対 明 使 行 에는 冬 至 正 朝 聖 節 千 秋 의 四 行 이 定 期 的 이었다고 한다.
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3 로 생각된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매년 명절 때마다 조공사절을 명나라로 파견했던 것만이 아니었 다.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經 國 大 典 (성종 16년, 1485)에는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節 에 殿 下 는 왕세자 이하를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올린다 고 명기되어 있으며, 12) 왕조정부의 儀 禮 書 인 國 朝 五 禮 儀 (성종 5년, 1474)에는 이 儀 註 ( 儀 禮 의 式 次 第 )를 嘉 禮 의 첫머리 에 수록하고 있다. 13) 조선 국왕은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節 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왕도 한성의 왕궁에서 명나라 황제를 遙 拜 하는 궁중의례( 望 闕 禮 라고 한다)를 거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4) 이 궁중의례는 일찍이 명 태조 洪 武 帝 가 1369년( 洪 武 2)에 蕃 國 禮 로서 제정 했던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壽 節 에 望 闕 하며 축하를 드리는 의식 의 수용과 실천이다. 15) 이미 고려 恭 愍 王 (재위 1351~74)은 1372년 동지 때 명나라 관복인 冕 服 을 입고 이 요배 의례를 거행했으며, 백관과 함께 만세를 삼창하고 있다. 16) 望 闕 禮 의 의의는 일찍이 제9 12) 經 国 大 典 巻 3, 禮 典, 朝 儀 条 에 正 至 聖 節 千 秋 節, 殿 下 率 王 世 子 以 下, 行 望 闕 禮 라고 되 어 있다. 李 成 茂 씨는 이 朝 儀 条 를 근거로 조선은 사대의 표현으로 일년에 네 차례의 사신(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 고 한다. 그러나 이 조문은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의 望 闕 禮 에 관한 규정이며, 朝 貢 使 節 에 관한 규정은 아니다. 同, 개정증보 조선의 사 회와 사상 ( 一 潮 閣, 서울) <제1부 제1장 朝 鮮 時 代 의 王 権 > (초판은 朝 鮮 時 代 史 学 会 編, 東 洋 三 国 의 王 権 과 官 僚 制 ( 国 学 資 料 院, 서울)) 28. 대체로 조선정부가 명나라에 冬 至 使 를 파 견하는 것은 중종 26년 이후의 일이며, 經 国 大 典 에는 冬 至 使 자체에 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13) 国 朝 五 禮 儀 巻 3, 嘉 禮, 正 至 及 聖 節 望 闕 行 禮 儀 条 및 皇 太 子 千 秋 節 望 宮 行 禮 儀 条 14) 李 範 稷, 韓 国 中 世 禮 思 想 研 究 - 五 禮 를 中 心 으로 ( 一 潮 閣, 서울) < 第 2 章 Ⅲ 世 宗 朝 五 禮 의 分 析 > 327~329 ; 桑 野 栄 治, < 朝 鮮 初 期 の 對 明 遥 拜 儀 禮 -その 概 念 の 成 立 過 程 を 中 心 に> 久 留 米 大 學 比 較 文 化 年 報 第 10 輯 ; 同, < 朝 鮮 世 祖 代 の 儀 禮 と 王 権 - 對 明 遥 拜 儀 禮 と 圜 丘 壇 祭 祀 を 中 心 に>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第 19 号 ; 同, < 朝 鮮 成 宗 代 の 儀 禮 と 外 交 - 經 國 大 典 成 立 期 の 對 明 遥 拝 儀 禮 > ( 同 第 20 号, 2003년 3월) ; 同, < 高 麗 末 期 の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對 明 遥 拜 儀 禮 の 創 出 > ( 同 第 21 号, 2004년 3 月 ). 이들 4편의 논문은 증보 수정된 후 桑 野 栄 治,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對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2001~ 2003 年 度 科 學 研 究 費 補 助 金 基 盤 研 究 (C)(2) 研 究 成 果 報 告 書, 2004년 2월)에 수록했다. 또한 桑 野 栄 治, < 正 朝 冬 至 の 宮 中 儀 禮 を 通 してみた15 世 紀 朝 鮮 の 儒 教 と 國 家 - 朝 鮮 燕 山 君 代 の 對 明 遥 拜 儀 禮 を 中 心 に> 朝 鮮 史 研 究 会 論 文 集 第 34 集 ; 同,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對 明 遥 拜 儀 禮 -16 世 紀 前 半 の 朝 鮮 と 明 日 本 >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第 24 号 참조. 15) 明 集 禮 ( 景 印 文 淵 閣 四 庫 全 書 第 650 冊, 台 湾 商 務 印 書 館, 台 北, 1983년 6월, 수록) 巻 30, 賓 禮 1, 蕃 王 朝 賀,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寿 節 望 闕 賀 儀 条. 萬 曆 大 明 会 典 巻 58, 禮 部 16, 蕃 國 禮, 聖 節 正 旦 冬 至 蕃 國 望 闕 慶 祝 儀 条. 桑 野 栄 治, 전게 < 高 麗 末 期 の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76~79. 또 岩 井 茂 樹, < 明 代 禮 制 覇 権 主 義 と 東 アジアの 秩 序 > 東 洋 文 化 第 85 号 132~133 16) 冬 至, 王 具 冕 服, 率 百 官, 向 闕 拜 賀, 山 呼 萬 歳, 後 百 官 又 行 本 朝 賀 禮 ( 高 麗 史 권67, 禮 志 9, 嘉 禮,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寿 節 望 闕 賀 儀, 恭 愍 王 21년 11월 14일 丁 巳 条 ). 桑 野 栄 治, 전게 < 高 麗 末 期 の
6 5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대 조선국왕 성종(재위 1469~94)이 秘 書 役 인 承 政 院 에 이르기를, 내가 望 闕 禮 를 행할 때 몸은 비록 이곳 조선에 있지만, 몸소 朝 天 하는( 皇 帝 를 拜 謁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라고 말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7) 원래 명절이 되면 蕃 王 인 조선 국왕이 몸소 황제가 기거하는 北 京 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拜 禮 를 해야 하지만 그렇 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득이 조선의 왕궁에서 紫 禁 城 에 거처하는 명 황제를 요배하는 것으로 그 책무를 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명과 琉 球 의 관계 이어서 조선과 마찬가지로 책봉체제 아래 있었던 琉 球 國 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洪 武 帝 는 당초 1372년( 洪 武 5)에 浦 添 을 거점으로 하는 中 山 王 察 度 (삿토, 재위 1350~95년) 가 일찍부터 入 貢 권고에 응했으므로(다만 中 山 王 의 冊 封 은 1404년 제2대 武 寧 ), 大 琉 球 國 의 朝 貢 은 不 時 (= 隨 時 )로 한다 고 우대했으나, 후일 琉 球 使 臣 이 福 建 省 에서 일으켰 던 살인사건을 이유로 1475년(성화 11년)에 憲 宗 成 化 帝 (재위 1464~87)는 琉 球 의 貢 期 (조공 빈도)를 2년 1공으로 제한했다. 18) 그 후 琉 球 국왕이 1년 1공의 주청을 거듭한 결 과 1507년( 正 徳 2)에 겨우 1년 1공의 貢 期 를 얻기는 했지만, 1522년( 嘉 靖 원년)에 다시 2년 1공을 하명받게 된다. 19) 조선의 1년 3공과 비교하면 그 대우의 격차가 현격하다. 20)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75~76. 17) 傳 于 承 政 院 曰, ( 中 略 ) 予 行 望 闕 禮 時, 身 雖 在 此, 豈 有 異 於 親 自 朝 天 乎, ( 後 略 ) ( 成 宗 実 録 권 284, 24년 11월 8일 己 亥 条 ). 桑 野 栄 治, 전게 < 朝 鮮 成 宗 代 の 儀 禮 と 外 交 > ) 祖 訓, 大 琉 球 國 朝 貢 不 時, 王 子 及 陪 臣 之 子, 皆 入 太 學 (= 国 子 監 ) 讀 書, 禮 待 甚 厚, ( 中 略 ) 永 樂 以 來, 國 王 嗣 立, 皆 請 命 册 封, 後 惟 中 山 王 至, 中 山 王 世 稱 尚 氏, 諭 令 二 年 一 貢, 毎 船 百 人, 多 不 過 百 五 十 人, 貢 道 由 福 建 閩 縣, ( 後 略 ) ( 萬 曆 大 明 会 典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琉 球 國 条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四 章 明 代 の 琉 球 と 中 国 との 関 係 > 174~177 ; 邊 土 名 朝 有, 琉 球 の 朝 貢 貿 易 ( 校 倉 書 房 ) < 第 一 部 第 一 章 貢 期 の 制 定 > 23~24 ; 同 < 第 一 部 第 三 章 貢 期 の 制 限 > 64~66. 또 明 実 録 과 歴 代 寶 案 을 토대로 琉 球 의 朝 貢 頻 度 를 정리한 岡 本 弘 道, < 明 朝 における 朝 貢 国 琉 球 の 位 置 付 けとその 変 化 世 紀 を 中 心 に> 東 洋 史 研 究 第 57 巻 第 4 号, 4~6에 따르면, 1480년대 이후는 거의 2년에 1번의 朝 貢 으로 안정되었다. 19)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四 章 明 代 の 琉 球 と 中 国 との 関 係 > 178. 邊 土 名 朝 有, 전게서 < 第 一 部 第 三 章 貢 期 の 制 限 > 76. 뒷날 薩 摩 島 津 氏 에 의한 琉 球 侵 攻 직후의 貢 期 는 10년 1공이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夫 馬 進, 전게 <1609 年, 日 本 の 琉 球 併 合 以 降 における 中 国 朝 鮮 の 対 琉 球 外 交 > 18~22가 이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 村 井 章 介 씨는 明 史 外 國 伝 을 기초로 < 明 에 대한 諸 國 의 入 貢 表 >를 작성하고, 조공 횟수가 171회인 琉 球 가 제1위이며, 다른 나라보다 두드러지게 많은 조공횟수 였다고 한다( 同,
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5 또 1561년( 嘉 靖 40)에 冊 封 使 로 琉 球 에 갔던 郭 汝 霖 의 重 編 使 琉 球 録 에 따르면, 朝 鮮 과 安 南 (현재 베트남 북부)으로 파견되는 冊 封 使 가 대략 正 7 品 ( 副 使 는 従 7 品 )임에 비하여 琉 球 와 占 城 (참파, 현재 베트남 남부)의 경우는 従 7 品 ( 副 使 는 正 8 品 )이므로 琉 球 国 王 은 朝 鮮 国 王 보다 격하되어 취급받은 것이 된다. 21) 다만 이 조공 빈도는 어디까지나 원칙이며, 조선왕조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조공( 琉 球 에서는 進 貢 이라고 한다)사절 이외에 謝 恩 使 慶 賀 使 進 香 使 등 임시사절도 파견하고 있다. 22) 예를 들면, 歷 代 寶 案 에는 제1 尚 氏 王 統, 2대 尚 巴 志 (쇼하시, 재위 1422~39 년)가 1425년에 등극한 宣 宗 宣 徳 帝 (재위 1425~35)를 축하하면서, 신하 尚 巴 志 는 멀리 蕃 國 에 기거하면서 마음은 달려가 遥 賀 한다는 내용의 表 文 (황제 앞으로 보내는 외교문 서)을 보냈다. 23) 외교문서의 상투적인 문구이기는 하지만, 직접 紫 禁 城 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할 수 없는 蕃 王 尚 巴 志 의 심정은 望 闕 禮 를 올리는 조선 국왕 성종의 심정과 상통 한다. 海 から 見 た 戦 國 日 本 - 列 島 史 から 世 界 史 へ ( 筑 摩 書 房 ) 67). 村 井 씨가 작성한 入 貢 表 는 秋 山 謙 蔵 日 支 交 渉 史 研 究 ( 岩 波 書 店, 1939년 4월) < 本 論 第 六 篇 第 五 章 勘 合 貿 易 と 密 貿 易 > 552를 참 조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표에 따르면 조선은 30회(10위), 일본은 19회(13위)이며, 高 良 倉 吉 씨 는 이 데이터를 기초로 明 朝 에 대하여 琉 球 는 아시아 최대의 조공무역국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 한다( 同, < 琉 球 の 形 成 と 東 シナ 海 世 界 > 大 石 直 正 他, 周 縁 から 見 た 中 世 日 本 ( 日 本 の 歴 史 14) ( 講 談 社 ) 193~194). 그러나 원칙상 2년 1 貢 의 琉 球 가 원칙상 1년 3 貢 인 조선의 朝 貢 회수를 이처럼 대폭적으로 상회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朝 鮮 王 朝 実 録 을 조사했던 朴 成 柱 씨에 따르면, 조선 초기( 太 祖 원~ 成 宗 25년 )에는 正 朝 使 102회( 兼 行 14회), 聖 節 使 96회 ( 兼 行 8회), 千 秋 使 61회( 兼 行 4회)의 데이터를 제시하였다. 통상의 조공사절로 한정해도 조선에서 明 으로 약 100년 동안 합계 259회가 파견되었으며, 기타의 임시사절, 예를 들면 謝 恩 使 의 파견 회수는 150회( 兼 行 15회)를 상회한다( 同, 전게 <조선 초기 遣 明 使 節 에 대한 일고찰> 153~156). 그런 까닭에 村 井 씨가 작성한 < 明 に 對 する 諸 國 の 入 貢 表 >는 당시의 실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21) 孫 薇, < 冊 封 朝 貢 について- 中 琉 の 冊 封 朝 貢 関 係 を 中 心 に> 法 政 大 学 沖 縄 文 化 研 究 所 編, 沖 縄 文 化 研 究 17, 57~58 ; 郭 汝 霖 ( 原 田 禹 雄 訳 注 ), 重 編 使 琉 球 録 ( 榕 樹 書 林 ) 下, 群 書 質 異, 使 職 要 務, 176. 원문은 ( 前 略 ) 按 我 朝 封 錫 藩 王 之 制, 如 按 南 朝 鮮, 則 遣 編 修 給 事 中 等 官 爲 使, 占 城 琉 球, 則 遣 給 事 中 行 人 等 官 爲 使, ( 後 略 ) ( 同, 293~294). 다만 金 龍 基, < 朝 鮮 初 期 의 対 明 朝 貢 関 係 考 > 釜 山 大 学 校 論 文 集 ( 人 文 社 会 科 学 篇 ) 제14집, 155에 따르면 조선 초 기에 파견된 明 使 는 正 5 品 부터 従 6 品 의 하급관리였으며, 75회의 明 使 중에서 48회는 宦 官 이었다. 22) 野 口 鐵 郎, 中 国 と 琉 球 ( 開 明 書 院 ) < 明 代 琉 中 往 来 表 > ; 赤 嶺 誠 紀, 大 航 海 時 代 の 琉 球 ( 沖 縄 타임스 社 ) < 進 貢 船 一 覧 表 > 참조. 23) ( 前 略 ) 臣 尚 巴 志, 恭 遇 聖 君 嗣 登 天 位, 遠 處 蕃 維, 心 馳 遙 賀, 仰 紫 宸 三 祝, 祈 聖 壽 以 齊 天, ( 後 略 ) ( 歷 代 寶 案 제1집, 巻 12, 表 奏 文, 洪 熙 원년 윤7월 17일자, 宣 徳 帝 宛 中 山 王 上 表 文 ). 텍스트로 는 沖 縄 県 立 圖 書 館 編, 歷 代 寶 案 校 訂 本 제1책 ( 沖 縄 県 教 育 委 員 会 )를 이용했다. 이 上 表 文 에 관해서는 高 良 倉 吉, 전게 < 琉 球 の 形 成 と 東 シナ 海 世 界 > 188에서 인용되었다.
8 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그렇다면 조선 국왕이 매년 명절에 망궐례를 행했던 것처럼, 琉 球 국왕도 역시 같은 궁중의례를 올리고 있었을까? 史 料 의 제약으로 단정하기는 조심스럽지만, 琉 球 왕권의 관점에서 일찍이 豊 見 山 和 之 씨는 왕은 紅 錦 衣 를 갖추고, 平 天 冠 을 쓰고, 一 僧 과 마주앉아 望 闕 의 禮 를 행한다 ( 朝 鮮 王 朝 実 録 1546년)라고 하듯이, 국왕은 승려와 함께 望 闕 의 禮 = 紫 禁 城 遥 拜 를 올리고 있다. 고 지적하였다. 24) 豊 見 山 씨가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았던 朝 鮮 王 朝 実 録 에 의하면, 中 宗 37년(1542) 琉 球 國 에 표착하여 4년간 생활했던 제주 표류민 朴 孫 등 12명으로부터 들은 琉 球 의 풍속으로, 확실히 琉 球 國 왕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제례용 平 天 冠 을 쓰고, 승려와 마주앉아 望 闕 의 禮 를 행한다 고 기록하고, 大 明 을 섬기기 때문에 이 예를 올리 는 것이다 고 해설하였다. 25) 豊 見 山 씨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実 録 의 기사는 계속해서 百 官 은 관직의 서열에 따라 뜰아래 나란히 서서 배례한다 고 기록하고, 표류했던 제주 도의 朴 孫 일행도 반열의 뒤에서 배례를 행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는 朴 孫 일행도 역시 琉 球 의 백관과 마찬가지로 명 황제의 신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늦 어도 16세기 중반 무렵까지는 琉 球 국왕이 蕃 王 으로서 조선의 望 闕 禮 와 유사한 궁중 의례를 首 里 城 안의 성스러운 광장 御 庭 (우나) 에서 거행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이다. 다만 제주 표류민이 首 里 城 에서 참가했던 望 闕 의 禮 의 경우, 그 계절에 관해서는 朝 鮮 王 朝 実 録 에 기록이 없다. 그런데 豊 見 山 씨는 薩 摩 藩 의 琉 球 침공(1609년) 이전의 古 琉 球 때 초하루와 보름마다 首 里 城 正 殿 앞에서 官 人 은 位 階 에 따라 정렬하여 중국 황 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례를 도입하고, 聖 節 (중국 황제의 생일)과 정월 초하루에 중 국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고 의례를 거행하였다 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26) 아마도 전자 는 매달 초하루의 朝 賀 儀 禮 이며, 후자가 聖 節 正 朝 (그리고 아마도 冬 至 )의 望 闕 禮 를 의 24) 豊 見 山 和 之, 琉 球 王 國 の 外 交 と 王 権 ( 吉 川 弘 文 館 )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 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 ( 前 略 ) 注 書 尹 潔 因 朴 孫 等 之 言, 記 琉 球 國 風 俗, 其 略 曰, ( 中 略 ) 國 王 所 御 之 殿, 高 五 層, 以 板 覆 之, 王 具 紅 錦 衣, 戴 平 天 冠, 與 一 僧 對 坐, 行 望 闕 禮 事 大 明, 故 爲 此 禮 云, 百 官 以 職 次, 分 班 拜 於 庭 下, 立 朴 孫 等 於 百 官 班 後, 令 一 時 拜 曰, 爾 國 亦 爲 大 明 臣, 不 可 不 拜 云 ( 明 宗 実 録 권3, 원년 2월 1 일 戊 子 条 ). 26) 豊 見 山 和 之, 전게서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234 ; 安 達 義 弘, < 琉 球 國 王 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 册 封 朝 貢 體 制 > 久 留 米 大 學 比 較 文 化 研 究 第 19 輯, 60~61도 이 聖 節 正 朝 의 王 朝 儀 禮 에 주목했다.
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7 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豊 見 山 씨가 근거로 했던 歷 代 寶 案 에 따르면, 일찍이 洪 武 帝 로부터 하사받은 관복이 심하게 손상되어 聖 節 正 朝 등의 행사에 지장이 생겼 다 고 한다. 27) 尚 巴 志 가 명나라 禮 部 앞으로 보낸 이 咨 文 은 1436년( 正 統 원년) 당시 琉 球 의 왕권의례의 실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禮 部 의 咨 文 에 주목했던 邊 土 名 朝 有 씨는 聖 節 正 朝 등의 행사 에 대하여, 이것은 洪 武 2년에 정해진 聖 節 正 旦 冬 至 蕃 國 望 闕 慶 祝 儀 ( 大 明 会 典 巻 58, 1006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 中 略 ) 琉 球 王 및 신하가 冠 帯 를 하사받은 洪 武 31년 이후부터는 관복을 갖춘 정식 의례가 행해졌던 것이다. 라고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있다. 28) 어느 것이든 단편적인 사료이기는 하지만, 뒷 날 18세기 전반에 성립한 琉 球 国 由 来 記 (1713년) 琉 球 国 舊 記 (1731년)가 보여주 듯이 薩 摩 藩 지배하의 근세 琉 球 에 있어서도 冬 至 元 旦 정월 15일의 王 府 儀 禮 는 3대 의 례로서 매우 중시되었으며, 중화황제가 사는 紫 禁 城 에 대한 요배의례를 강조하게 되었 다. 29) 이러한 王 府 儀 禮 에서는 외교문서 작성에 정교하여 儀 禮 에 익숙하던 職 能 集 團 閩 人 三 十 六 姓 이 관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30) 이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유구 국왕은 正 朝 聖 節 등 명절에는 帝 都 인 北 京 紫 禁 城 을 遥 拝 하는 의례, 즉 望 闕 禮 를 琉 球 나름으로 27) ( 前 略 ) 一 件, 朝 服 事, 洪 武 年 間, 欽 蒙 太 祖 高 皇 帝 給 賜 本 國 各 官 冠 笏 公 服 等 件, 欽 遵 奉 受 外, 今 照, 本 國 各 官 朝 服 已 經 多 年, 倶 以 朽 壞 無 存 及 不 能 裁 製, 凡 遇 聖 節 正 旦 等 事, 行 禮 未 便, 合 咨, 乞 爲 具 奏 給 賜 便 益, 咨 請 施 行, ( 後 略 ) ( 歴 代 寶 案 第 1 集, 巻 17, 國 王 咨 文, 正 統 원년 9월 24일자, 禮 部 宛 中 山 王 咨 文 ). 단, 朝 服 문제에 대하여 禮 部 는 직접 수선해서 사용하라고 회답했다( 同 書 第 1 集, 巻 4, 禮 部 咨 文, 正 統 2년 6월 6일자, 禮 部 宛 中 山 王 咨 文 ). 28) 邊 土 名 朝 有, 歴 代 寶 案 の 基 礎 的 研 究 ( 校 倉 書 房 ) < 禮 部 咨 文 > ) 琉 球 国 由 来 記 巻 1 ( 伊 波 普 猷 他 編, 琉 球 史 料 叢 書 第 1 ( 井 上 書 房 ) 수록), 王 城 之 公 事, 正 月 朝 拝 御 規 式 朝 拝, 및 11월 冬 至 条. 琉 球 国 舊 記 (전게 琉 球 史 料 叢 書 第 3 수록) 巻 3, 公 事, 正 月 朝 賀 南 殿 賀 禮, 및 11월 冬 至 条. 근세 琉 球 의 紫 禁 城 遥 拝 儀 禮 에 대해서는 豊 見 山 和 之, 전게서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236~241 ; 伊 從 勉, 琉 球 祭 祀 空 間 の 研 究 -カミとヒトの 環 境 学 ( 中 央 公 論 美 術 出 版 ) < 第 3 部 第 11 章 琉 球 王 権 の 場 所 - 首 里 城 正 殿 唐 破 風 の 誕 生 とその 改 修 について> 557~558 참조. 30) 久 米 村 의 福 建 系 화교집단이 琉 球 의 王 府 儀 禮 에 관여하고 있던 것에 대하여는, 예를 들면 真 栄 平 房 昭, < 対 外 関 係 における 華 僑 と 国 家 - 琉 球 の 閩 人 三 十 六 姓 をめぐって> 荒 野 泰 典 他 編, ア 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Ⅲ 海 上 の 道 )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259~260 참조. 또한 明 의 禮 部 가 제2 尚 氏 王 統 제7대 尚 寧 王 (재위 1589~1620년) 앞으로 보냈던 咨 文 에 ( 前 略 ) 竊 惟, 卑 國 僻 處 海 邦, 自 入 貢 受 封 之 後, 一 切 輔 導 禮 義, 悉 頼 原 賜 三 十 六 姓 之 裔, ( 後 略 ) 라는 구절이 보인다( 歴 代 寶 案 第 1 集, 巻 4, 禮 部 咨 文, 萬 暦 35년 12월 13일자, 琉 球 国 王 宛 禮 部 咨 文 ).
10 5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각색한 뒤에 올렸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명과 일본의 관계 한편 일본에서는 1402년( 建 文 4)에 室 町 幕 府 제3대 장군에서 물러난 足 利 義 満 (재직 1368~94)이 京 都 北 山 의 별장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建 文 帝 의 책봉을 수락하였 다. 이듬해 永 楽 帝 의 등극이 알려지자 義 満 은 遣 明 使 에게 日 本 國 王 臣 源 명의로 시작되 는 表 文 을 지참시켜서 명으로 보냈으며, 그 결과 1404년에 永 楽 帝 는 義 満 을 다시 日 本 國 王 으로 책봉하였고, 日 本 國 王 之 印 이라고 새겨진 金 印 을 하사하였다. 31) 이미 전년에 는 永 楽 帝 가 조선 국왕을 책봉했으므로, 이 해 1404년에 琉 球 국왕과 일본 국왕이 탄생 함으로써 조선 琉 球 일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중화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세계 시스템(실제로는 무역시스템) 32) 속으로 편입된 것이 된다. 이때 일본에는 永 楽 勘 合 100 통이 들어왔고, 이후 일본과 명 사이에는 이른바 勘 合 貿 易 이 시작된다. 勘 合 船 ( 遣 明 船 이라고도 한다)은 1547년까지 약 150년 동안 19회에 걸쳐 파견되었는데 실제로는 朝 貢 船 이다. 33) 명나라가 일본국왕인 室 町 殿 ( 室 町 幕 府 의 수장, 대개의 경우는 室 町 장군)에게 인정했던 조공 빈도는 10년 1공이었는데, 34) 勘 合 船 =조공사절의 파견 빈도와 거의 부합 31) 田 中 健 夫, 中 世 對 外 関 係 史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 第 一 部 第 二 章 冊 封 関 係 の 成 立 > 64~ 67 ; 同, 前 近 代 の 國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吉 川 弘 文 館 )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國 王 號 > 49~50 ; 鄭 樑 生, 明 日 関 係 史 の 研 究 ( 雄 山 閣 ) < 第 三 章 明 日 交 渉 > 146~149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二 章 永 楽 帝 の 対 外 政 策 と 日 本 > 109~113 및 < 終 論 明 清 からみた 東 ア ジアの 華 夷 秩 序 > 358~359 32) 坂 野 正 高, 近 代 中 国 政 治 外 交 史 -ヴァスコ ダ ガマから 五 四 運 動 まで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 第 三 章 朝 貢 関 係 - 叩 頭 問 題 > 76~83 ; 浜 下 武 志, 朝 貢 システムと 近 代 アジア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 第 一 部 Ⅰ 東 アジア 国 際 體 系 > 22 ; 村 井 章 介, 전게 海 から 見 た 戦 国 日 本 23 33) 田 中 健 夫, 전게 中 世 対 外 関 係 史 < 第 一 部 第 四 章 明 および 朝 鮮 との 通 交 貿 易 の 展 開 > 153~154 ; 同, 対 外 関 係 と 文 化 交 流 ( 思 文 閣 出 版 ) < 勘 合 符 勘 合 印 勘 合 貿 易 > 102. < 勘 合 貿 易 >의 선구적인 연구로 同, 倭 寇 と 勘 合 貿 易 ( 至 文 堂 )이 있다. 34) ( 前 略 ) 永 樂 初, 復 來 朝 貢, 賜 龜 紐 金 印 誥 命, 封 爲 日 本 國 王, ( 中 略 ) 給 勘 合 百 道, 始 令 十 年 一 貢, 貢 道 由 浙 江 寧 波 府, 毎 貢 正 副 使 等 毋 過 二 百 人, ( 後 略 ) ( 萬 曆 大 明 会 典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日 本 國 条 ). 다만 小 葉 田 淳 씨는 1511년( 正 徳 4)에 간행된 正 徳 大 明 会 典 ( 弘 治 会 典 ) 의 규정에 의문을 품고 10년 1공의 通 交 制 限 은 寶 徳 年 間 (1449~52년) 이후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또한 최근에 伊 川 健 二 씨는 이 통설에 반론을 제기하고, 明 側 의 재정사정과 遣 明 使 節 에 의한 소금 밀매, 北 京 会 同 館 에서의 傷 害 事 件 을 배경으로 10년 1공의 制 定 時 期 를 1484년( 成 化 20)으로 단정 하는데, 明 憲 宗 実 録 과 勅 諭 에서 이 점을 입증할 수는 없다 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설득력이
1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9 한다. 물론 1년 3공의 조선, 2년 1공의 琉 球 와 비교하면 그 대우의 격차는 부정할 수 없 다.(< 表 1>참조). 入 貢 할 때 정규의 朝 貢 使 節 인지 여부를 준별하기 위하여 의무적으로 지참해야 하던 勘 合 도 事 大 의 禮 를 충실히 이행하는 조선과 琉 球 두 나라는 면제받았 다. 35) 勘 合 은 1386년( 洪 武 16)에 暹 羅 (아유타야, 현재 타이의 일부)에게 지급한 것이 시 작이며, 급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日 本 占 城 爪 哇 (자바섬 북부) 満 刺 加 (말라카) 真 臘 (캄보디아) 錫 蘭 山 (스리랑카) 등 해상항로를 이용하여 중국에 来 航 했던 15개국이었다. 36) 勘 合 급부의 대상국이 된 暹 羅 占 城 爪 哇 의 조공 빈도가 모두 3년 1공이지만, 일본의 조 공 빈도는 10년 1공이라는 점에서도 일본의 이질성을 용이하게 간파할 수 있다. 또한 田 中 健 夫 씨에 따르면, 1402년 京 都 北 山 殿 에서 행해졌던 책봉의례 때는 高 机 를 母 屋 앞에 세우고 그 위에 詔 書 를 두고, 義 満 이 먼저 향을 사르고, 이어서 삼배, 그런 다음에 꿇어앉아서 이것을 삼가봤다 고 한다. 37) 鄭 樑 生 씨는 義 満 의 이런 태도는 중화 세계 제국의 일원으로 편입된 속국 국왕의 태도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고 간주하 지만, 38) 室 町 殿 과 명 황제의 종속관계를 시사하는 명절의 遙 拜 의례를 거행한 것인지 지 떨어진다. 小 葉 田 淳, 中 世 日 支 通 交 貿 易 史 の 研 究 ( 刀 江 書 院 ) < 第 六 章 明 の 諸 制 度 > 321~322 ; 伊 川 健 二, 大 航 海 時 代 の 東 アジア- 日 欧 通 交 の 歴 史 的 前 提 ( 吉 川 弘 文 館 ) < 第 一 部 第 二 章 諸 国 王 使 をめぐる 通 交 制 限 > 60~61 35) 鄭 樑 生, 전게서 < 第 二 章 明 の 対 外 政 策 > 62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終 論 明 清 からみた 東 アジアの 華 夷 秩 序 > 353 ; 閔 徳 基, 前 近 代 東 アジアのなかの 韓 日 関 係 ( 早 稲 田 大 学 出 版 部 ). 증보판 은 同, 前 近 代 동아시아 세계의 韓 日 관계 ( 景 仁 文 化 社, 서울) < 第 一 部 第 二 章 朝 鮮 朝 前 期 の 日 本 国 王 観 - 敵 禮 の 面 から> 84~85. 権 善 弘, 전게 <조선시대 사대관계와 책봉체 제> 66. 다만 勘 合 의 現 存 例 는 없으며, 그 使 用 制 度 形 状 에 관해서는 伍 躍, < 日 明 関 係 における 勘 合 -とくにその 形 状 について> 史 林 第 84 巻 第 1 号 ; 橋 本 雄, < 日 明 勘 合 再 考 > 九 州 史 学 研 究 会 編, 境 界 からみた 内 と 外 ( 九 州 史 学 創 刊 50 周 年 記 念 論 文 集 下 ) ( 岩 田 書 院 ) 등, 통설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 중이다. 36) 洪 武 十 六 年, 始 給 暹 羅 國, 以 後 漸 及 諸 國, ( 中 略 ) 毎 改 元, 則 更 造 換 給, 計 有 勘 合 國 分, 暹 羅 日 本 占 城 爪 哇 満 刺 加 真 臘 蘇 禄 國 東 王 蘇 禄 國 西 王 蘇 禄 國 峒 王 柯 支 浡 泥 錫 蘭 山 古 里 蘇 門 荅 刺 古 麻 刺 ( 萬 暦 大 明 会 典 巻 108, 禮 部 66, 朝 貢 通 例, 勘 合 號 簿 条 ). 松 浦 章, < 萬 暦 四 十 五 年 暹 羅 国 遣 明 使 - 明 代 朝 貢 形 態 の 様 相 > 夫 馬 進 編, 増 訂 使 琉 球 録 解 題 及 び 研 究 ( 榕 樹 書 林 ) 183, ) 田 中 健 夫, 전게 中 世 対 外 関 係 史 < 第 一 部 第 二 章 冊 封 関 係 の 成 立 > 65 ; 橋 本 雄, 前 掲 < 朝 鮮 國 王 使 と 室 町 幕 府 > 172~173. 醍 醐 寺 座 主 満 済 (만사이)의 日 記 満 済 准 后 日 記 ( 続 群 書 類 従 補 遺 1, 続 群 書 類 従 完 成 会, 1978 年 4 月 수록) 永 享 6 年 5월 12일조에 ( 前 略 ) 高 机 於 立 母 屋 前, 其 上 被 置 唐 書, 先 御 燒 香, 次 三 拜, 以 後 跪 テ 唐 書 お 御 拜 見 候 キ, ( 後 略 ) 라고 되어 있다. 다만 극히 최근 에는 橋 本 雄, < 室 町 日 本 の 對 外 観 - 室 町 殿 の 内 なるアジア を 考 える> 歴 史 評 論 697 호가 義 満 의 受 封 儀 禮 는 과연 明 集 禮 등 명 쪽의 빈례 규정대로 집행되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재검토를 시도하고 있다.
12 6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금은 알 수 없다. 게다가 足 利 義 満 이 죽은 후 家 督 을 이은 4대 장군 義 持 (재직 1394~ 1423년)은 1411년에 대명외교 방침을 전환하여 책봉관계를 단절했고, 6대 장군 義 教 (재 직 1429~41년)가 책봉관계의 부활을 원하여 1432년 宣 徳 帝 에게 表 文 을 보냈으며, 8대 장군 義 政 (재직 1449~73년) 시대 이후는 명 사신의 来 日 이 끊어지는 등 황제 대 室 町 殿 의 외교관계가 그다지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明 황제가 冊 封 使 를 파견하여 誥 命 수여 儀 禮 를 거행했던 形 跡 이 있는 것은 義 満 義 持 義 教 3명에 불과하다. 39) 義 満 이하 室 町 殿 이 국내에서 日 本 国 王 을 표방했던 形 跡 도 찾아볼 수 없으며, 日 本 国 王 號 는 幕 府 가 対 明 貿 易 을 독점하기 위하여 通 交 名 義 로서 기능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40) 대명무역의 이권을 둘러싼 細 川 大 内 두 집안의 쟁탈전은 조공무역선의 입관수속을 두고 다투었던 寧 波 의 난(1523년, 이른바 寧 波 爭 貢 事 件 )을 초래하였고, 41) 일명관계는 이 후 勘 合 貿 易 을 독점하고 있던 大 内 씨의 멸망(1551)과 함께 단절된다. 16세기의 室 町 정 권하에서는 조공무역 시스템의 본래의 정치적 의미는 상실되고,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 별개의 것으로 전락해 간 것을 상징한다. 42) 훗날 1581년에 日 本 国 王 은 対 明 通 貢 의 중 재를 宣 祖 (재위 1567~1608년)에게 요청했지만, 宣 祖 는 人 臣 에게 私 交 없다 는 논리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43) 그러면 1585년에 公 家 社 会 의 최고 관직인 関 白 에 취임하여 唐 38) 鄭 樑 生, 전게서 < 第 三 章 第 二 節 明 日 國 交 の 開 始 > )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國 王 号 > 51~59에 따르 면, 1433년 6월에 명은 義 教 에 대한 책봉사를 파견했지만, 義 政 이후의 일본국왕에 대하여 책봉사 가 파견된 흔적은 없다. 또 義 政 이후에는 일본 국내의 내란을 계기로 朝 鮮 使 節 의 来 日 도 끊어졌 다. 이 점은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上 ) ( 吉 川 弘 文 館 ) < 五 室 町 時 代 の 日 鮮 関 係 > )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国 王 号 > 44 ; 村 井 章 介, < 易 姓 革 命 の 思 想 と 天 皇 制 > 永 原 慶 二 編, 講 座 前 近 代 の 天 皇 ( 第 5 巻 世 界 史 のなかの 天 皇 ) ( 青 木 書 店 ) 34 41) 寧 波 争 貢 事 件 에 관해서는 최근 일본이라는 조공국의 入 貢 현장에 초점을 맞춘 山 崎 岳, < 朝 貢 と 海 禁 の 論 理 と 現 実 - 明 代 中 期 の 奸 細 宋 素 卿 を 題 材 として> 夫 馬 進 編, 中 国 東 ア ジア 外 交 交 流 史 の 研 究 ( 京 都 大 学 学 術 出 版 会 )가 있다. 42) 尹 誠 翊, 명대 왜구의 연구 ( 景 仁 文 化 社, 서울) <제3장 嘉 靖 時 期 倭 寇 활동의 증폭 요인과 활동의 양상> ) 松 浦 允 任 撰 ( 田 中 健 夫 田 代 和 生 校 訂 ), 朝 鮮 通 交 大 紀 ( 名 著 出 版 ) 巻 3, 萬 松 院 公 昭 景 ( 宗 義 智 ), 朝 鮮 国 王 李 昖 奉 復 日 本 国 王 殿 下 ( 萬 暦 9년 5월 일자), 116~119. 中 村 栄 孝, 전게서 < 一 八 右 武 衛 殿 の 朝 鮮 遣 使 > 749~750 ; 閔 徳 基, < 室 町 幕 府 의 対 明 朝 貢 仲 裁 요청과 朝 鮮 의 대응> 日 本 歴 史 研 究 창간호, 55. 다만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国 王 号 > 80에서는 이 < 日 本 国 王 >을 최후의 室 町 将 軍 足 利 義 昭 (재직 1568~73년)가 아니라 対 馬 에서 창작한 가공의 국왕으로 본다.
1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1 입국(= 明 정복) 을 선언했던 豊 臣 秀 吉 44)은 명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에 포섭되고, 그리고 황제를 요배하는 의례를 올렸던 것일까? 그 전제로서 秀 吉 은 당시 의 명 황제인 神 宗 萬 曆 帝 (재위 1572~1620년)의 책봉을 수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 이 豊 臣 정권에 의한 외교 구상의 성격을 검토했던 藤 木 久 志 씨는 豊 臣 정권의 대명외 교의 기축은 어쨌든 勘 合 =교역 재개책에 있다 고 보고, 豊 臣 의 天 下 一 統 을 군사정복으 로 간주하는 통설을 근본적으로 의심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45) 豊 臣 政 権 은 1589년 정월 시점에서 島 津 씨를 매개로 明 과의 勘 合 부활을 구상했고, 또한 1593년 5월에 명 과의 강화교섭 과정에서 勘 合 의 부활 요구가 나타나기 때문이며, 게다가 秀 吉 의 勘 合 에 대한 이해에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46) 이미 中 村 榮 孝 北 島 万 次 두 분이 지적했던 것 처럼, 본래의 勘 合 이 조공 책봉관계를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豊 臣 정권과 명 사이에 는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47) 특히 幕 藩 體 制 성립기에 있어서 琉 球 支 配 의 구도를 논한 紙 屋 敦 之 씨는 豊 臣 政 権 의 1593년( 文 禄 2) 5월의 日 明 講 和 交 渉 에서 勘 合, 그리고 江 戸 幕 府 의 1610년( 慶 長 15)의 対 明 講 和 交 渉 에서 かんごう(감합) 은 모두 조공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公 貿 易 을 바라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 日 明 간의 인식의 차이를 명쾌하게 지적했다. 48) 勘 合 에 대한 오해는 豊 臣 政 権 뿐만 44) 岩 沢 愿 彦, < 秀 吉 の 唐 入 りに 関 する 文 書 > 日 本 歴 史 第 163 号. 뒷날 三 鬼 清 一 郎 編, 豊 臣 政 権 の 研 究 ( 戦 国 大 名 論 集 18) ( 吉 川 弘 文 館 ) 再 録 ) ;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中 ) ( 吉 川 弘 文 館 )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41~242 45) 藤 木 久 志, 豊 臣 平 和 令 と 戦 國 社 会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 第 四 章 海 の 平 和 = 海 賊 停 止 令 > 243. 이른바 勘 合 貿 易 振 興 説 과 対 外 領 土 拡 張 説 은 진작부터 임진왜란의 동기를 둘러싼 논점이 되었다. 예를 들면, 三 鬼 清 一 郎, < 関 白 外 交 體 制 の 特 質 をめぐって> 田 中 健 夫 編, 日 本 前 近 代 の 国 家 と 対 外 関 係 ( 吉 川 弘 文 館 ) 86 ; 同, < 朝 鮮 役 研 究 の 一 齣 - 中 村 栄 孝 氏 の 業 績 をめぐって> 同 編, 織 豊 政 権 期 の 政 治 構 造 ( 吉 川 弘 文 館 ) 357~360에 그러한 지적이 있다. 46) 藤 木 久 志, 전게서 < 第 四 章 海 の 平 和 = 海 賊 停 止 令 > 229~230, 239~244. 그리고 村 井 章 介, < 東 アジア と 近 世 > 歴 史 學 研 究 会 日 本 史 研 究 会 編, 日 本 史 講 座 ( 第 5 巻 近 世 の 形 成 )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51~52 47)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文 禄 慶 長 の 役 > 177~178 ; 北 島 万 次, 豊 臣 政 権 の 對 外 認 識 と 朝 鮮 侵 略 ( 校 倉 書 房 ) < 第 三 章 第 二 節 日 明 講 和 の 和 議 折 衝 > 188~190 48) 紙 屋 敦 之, 幕 藩 制 国 家 の 琉 球 支 配 ( 校 倉 書 房 ) < 第 一 部 第 一 章 琉 球 支 配 と 幕 藩 体 制 > 22. 島 津 씨에 의한 琉 球 侵 攻 직후인 1610년에 徳 川 政 権 은 日 明 貿 易 부활의 중개역을 琉 球 에 기대 했지만 실패했다 ( 同, 25~28). 또한 同 < 対 明 政 策 と 琉 球 支 配 - 異 国 から 異 国 へ> 加 藤 榮 一 他 編, 幕 藩 制 国 家 と 異 域 異 国 ( 校 倉 書 房 ) 265~268 참조.
14 6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 아니었던 것이다. 中 村 質 씨도 豊 臣 政 権 의 勘 合 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관리 의 통교체제 이며, 현실에서는 朱 印 船 제도처럼 국가관리의 교역형태 로 생각하고, 徳 川 정권기에 정비되는 朱 印 船 무역의 원류를 豊 臣 정권기에서 찾았다. 49) 원래 감합무 역 이라는 용어 자체가 조공무역이라는 본질적인 성격을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극히 최 근에는 명 정부 내부의 대일 강화교섭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한 中 島 楽 章 씨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일본만이 조공무역을 허가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병에 이르렀 다는 화의추진파였던 小 西 行 長 柳 川 調 信 宗 義 智 景 轍 玄 蘇 일행의 말에 주목하였다. 50) 1592년 5월의 漢 城 함락 후, 秀 吉 은 後 陽 成 天 皇 을 北 京 으로 옮기고 秀 吉 자신은 日 明 貿 易 의 要 港 이었던 寧 波 로 居 所 를 정하여 동아시아 통교관계를 장악한다는 구체적인( 또는 공상적인) 구상을 밝히고 있으며, 51) 임진왜란의 원인론 52) 을 살피는데 있어서 흥미 깊은 지적이다. 과연 豊 臣 秀 吉 은 책봉 절차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을까? 책봉체제로 들어선 경우 명과 어떠한 의례적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는지 아마도 秀 吉 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 으로 생각된다. 1년 3공의 조공 빈도로 명과 조공 회사라는 무역 시스템에 편입된 조선 과, 1547년의 제19차 勘 合 船 을 마지막으로 10년 1공의 공기마저 포기했던 일본에서는 49) 中 村 質, < 東 アジアと 鎖 国 日 本 - 唐 船 貿 易 を 中 心 に> 加 藤 榮 一 他 編, 전게서 幕 藩 制 国 家 と 異 域 異 国 수록, 341~342 50) 中 島 楽 章, < 封 倭 と통공-1594 年 の 寧 波 開 貢 問 題 をめぐって> 東 洋 史 研 究 제66권 제2호, 132. 平 行 長 通 書 于 金 應 瑞, 欲 見 更 事 之 人, 與 之 議 事, 應 瑞 使 李 弘 發 入 往, 則 平 調 信 平 義 智 仙 蘇 (= 景 轍 玄 蘇 ) 竹 溪 (= 竹 溪 宗 逸 ) 等, 辟 左 右 謂 曰, 南 蠻 琉 球 皆 是 外 夷 而 奉 貢, 稱 臣 於 大 明, 日 本 獨 爲 棄 國, 未 參 其 列, 前 以 此 意 請 朝 鮮, 欲 達 于 大 明 而 朝 鮮 牢 不 肯 許, 不 得 已 擧 兵 出 來,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57, 27년 11월 1일 을해조). 51)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76~77 ; 同, 전게서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59~260, 283~284 ; 北 島 万 次, 전게서 < 第 二 章 豊 臣 政 権 の 対 外 認 識 と 東 アジア> 95 ; 三 鬼 清 一 郎, < 豊 臣 秀 吉 の 対 外 政 策 > 韓 国 史 論 22( 壬 辰 倭 乱 의 再 照 明 ) ( 国 史 編 纂 委 員 会, 서울) 64~67 52) 壬 辰 倭 乱 연구의 학설사는 北 島 万 次, 전게서 < 第 一 章 豊 臣 政 権 の 朝 鮮 侵 略 に 関 する 学 説 史 的 検 討 > 가 상세하다. 또한 임진왜란의 원인 목적 동기에 관한 연구사는 六 反 田 豊 他, 전게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 日 韓 歴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前 掲 報 告 書, 수록) 28~31 참조. 또한 朴 晢 晄, 전게 < 壬 辰 倭 乱 ( 文 禄 慶 長 の 役 )연구의 현황과 과제> 399에 따르면, 한국 측의 연구자는 원인에 대하 여 체계적으로 심도 있는 분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상 이라고 한다. 최근 朴 秀 哲,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임진왜란 의 재검토> 歴 史 学 会 編,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 一 潮 閣, 서울) 207~223에서는 壬 辰 倭 乱 의 원인론 외에 이른바 豊 臣 平 和 令 의 문제점, 항복하면 살려주고, 반항하면 토벌한다 는 秀 吉 의 침공논리를 재검토하고, 壬 辰 倭 乱 대신에 壬 辰 戦 争 이라는 호칭을 제시하였다. 모두 참조하기 바란다.
1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3 정보수집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격차가 있었을 것이다. 군사력을 배경으로 천하통일을 완수한 秀 吉 에게 있어서 萬 曆 帝 의 신하로서 의례적 관계를 체결하고, 이를 토대로 명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무역 시스템 속으로 포섭된다는 발상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 이다. 동시에 그것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萬 曆 帝 의 신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례적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하에서는 秀 吉 과 거의 동시대에 한반도를 다스리고 있던 선조(재위 1567~1608) 시대로 시기를 좁히고, 望 闕 禮 라는 대명 외교의례의 場 을 통하여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한중 관계의 실상에 다가가려 한다. 물론 임진왜란이라는 전시 하에 있던 王 都 漢 城 이 주된 고 찰의 무대가 된다. 그런 다음에 임진왜란으로 발생한 秀 吉 의 일본국왕 책봉에 관하여 약 간의 고찰을 추가하려 한다. Ⅱ.조선 宣 祖 代 의 의례와 외교 1. 宣 祖 의 책봉의례 먼저 선조의 책봉의례의 場 을 보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1567년 7월 3일, 宣 祖 는 景 福 宮 의 正 殿 인 勤 政 殿 에서 즉위하였다. 53) 당시 16세의 宣 祖 는 先 代 인 明 宗 (재위 1545~ 67년)의 직계가 아닌 徳 興 大 院 君 ( 中 宗 의 7남)의 3남으로 明 宗 妃 仁 順 王 后 沈 씨와 대신 들의 합의에 따라 옥좌에 오른 傍 系 의 조선국왕이다. 54) 그리고 이듬해인 선조 원년 (1568) 2월 27일, 왕도 한성에는 책봉사 姚 臣 李 慶 일행이 영접을 받고 입국하였다. 正 使 로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姚 臣 은 中 官, 즉 宦 官 이다. 55) 宣 祖 의 冊 封 모습은 당일의 실록 기사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53) 宣 祖 修 正 実 録 권1, 즉위년 7월 3일 병진조. 54) 震 檀 学 会 編, 李 相 佰 著, 韓 国 史 ( 近 世 前 期 篇 ) ( 乙 酉 文 化 社 ) < 第 二 編 第 五 章 士 禍 党 争 > 567~568 ; 李 泰 鎮, 朝 鮮 儒 教 社 会 史 論 ( 知 識 産 業 社, 서울). 일본어 역은 六 反 田 豊 訳, 朝 鮮 王 朝 社 会 と 儒 教 ( 法 政 大 学 出 版 局 ) <Ⅱ. 제11장 壬 辰 倭 乱 에 대한 理 解 의 몇 가지 문제> ) 賜 故 朝 鮮 國 王 李 峘 (= 明 宗 ) 謚 恭 憲, 遣 中 官 姚 臣, 行 人 歐 布 稷 吊 祭, 封 其 侄 署 國 事 李 昖 (= 宣 祖 ) 爲 朝 鮮 國 王 ( 明 穆 宗 実 録 권14, 隆 慶 원년 11월 5일 병진조).
16 6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申 時, 冊 封 天 使 上 使 姚 臣 副 使 李 慶 到 迎 詔 門, 百 官 皆 以 雨 具 迎 詔 勅, 至 勤 政 殿, 殿 庭 亦 濕, 及 申 時, 頒 詔 勅 也, 雨 即 止, 上 捧 詔 勅, 退 至 中 門 外 而 還 入, 夕, 上 以 宴 詣 太 平 館, ( 宣 祖 実 録 권2, 원년 2월 27일 정미조) 오후 4시 무렵 책봉사가 迎 詔 門 에 도착하자 조선의 문무백관은 비가 내리는 중에도 공손히 詔 勅 을 맞이했고, 경복궁의 勤 政 殿 으로 이동했다. 책봉사가 詔 勅 을 내릴 무렵에 는 비도 그쳤으며, 선조가 詔 勅 을 받들고 中 門 에서 퇴장했으며, 저녁 무렵에는 太 平 館 에 서 책봉사를 접대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宣 祖 実 録 은 단편적이긴 하지만, 훗날 鵝 城 府 院 君 李 山 海 가 제술했던 萬 曆 36년 6월 12일 자 宣 宗 大 王 穆 陵 誌 에 따르면 이때 선조는 穆 宗 隆 慶 帝 (재위 1566~72)로부터 조선 국왕 에 책봉하는 誥 命 외에 金 印 冕 服 을 받았다. 56) 이 해에 선조가 명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무역체제에 정식으로 편입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록 기사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勤 政 殿 에서 冊 封 儀 禮 의 클라이맥스는 禮 制 上 조선 국왕이 종친 문무백관과 함께 萬 歳 를 삼창하는 장면 이다. 57) 만세삼창이라는 이른바 복속의례는 正 朝 冬 至 의 대명 요배의례에 모두 공통적 이다. 58) 이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豊 臣 秀 吉 에게도 이 의례행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후술). 사료 속에 보이는 迎 詔 門 ( 迎 恩 門 이라고도 한다)은 中 宗 32년(1537) 정월에 慕 華 館 앞 에 신축하고 편액도 달았다. 59) 慕 華 館 이란 한성부 敦 義 門 (서대문) 밖의 盤 松 坊 에 있던 명나라 사신을 위한 영접시설이다. 60) 향연이 베풀어진 太 平 館 은 崇 禮 門 안에 있던 명 사 신을 위한 숙박시설로서, 61) 모두 中 華 를 숭모하는 조선의 대명 외교자세를 가시화했던 56) ( 前 略 ), 翌 年 (= 宣 祖 元 年 ) 春, 皇 帝 遣 太 監 姚 臣 李 慶, 齎 詔 封 爲 朝 鮮 國 王, 欽 賜 誥 命 冕 服 彩 幣,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221, 41년 2월조, 誌 文 ). 57) ( 前 略 ) 左 通 禮 啓 請 山 呼, 殿 下 拱 手 加 額 曰 萬 歳, 啓 請 山 呼, 曰 萬 歳, 啓 請 再 山 呼, 曰 萬 萬 歳, 王 世 子 及 宗 親 文 武 百 官 同, ( 後 略 ) (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迎 詔 書 儀 ). 58) 桑 野 栄 治, 전게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對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 附 録 朝 鮮 初 期 望 闕 行 禮 儀 註 試 釈 > 참조. 59) 中 宗 実 録 권83, 32년 정월 2일 임오조. 柳 本 藝 漢 京 識 略 (순조 30년, 1830) 권1, 宮 室, 慕 華 館 条 에 ( 前 略 ) 館 前, 舊 有 紅 箭 門, 中 宗 丙 申 (= 中 宗 31년), 改 立 雙 柱 門, 蓋 緑 琉 璃 瓦, 扁 曰 迎 詔 門, 己 亥 (=중종 34년), 華 使 薛 廷 寵 以 為 詔 勅 殊 名, 改 扁 曰 迎 恩 門, ( 後 略 ) 이라고 되어 있다. 텍스트 로는 漢 京 識 略 ( 第 2 版 ) (서울 特 別 市 史 編 纂 委 員 会, 서울)을 이용했다. 60) 在 敦 義 門 外 西 北, 本 慕 華 樓, 世 宗 十 二 年 (=1430), 改 爲 館 ( 新 増 東 國 輿 地 勝 覧 [중종 26년, 1531] 권3, 漢 城 府, 宮 室 条, 慕 華 館 ). 在 盤 松 坊 東, 有 迎 恩 門, 爲 華 使 迎 送 之 所 ( 大 東 地 志 [ 高 宗 원년, 1864] 권1, 漢 城 府, 宮 室 条, 慕 華 館 ). 61) 在 崇 禮 門 内, 待 中 朝 使 臣, 館 後 有 樓 ( 新 増 東 國 輿 地 勝 覧 권3, 漢 城 府, 宮 室 条, 太 平 館 ). 在 崇 禮 門 内, 爲 華 使 留 館, ( 中 略 ) 仁 祖 朝, 撤 之, 構 弘 濟 院 ( 大 東 地 志 권1, 漢 城 府, 宮 室 条, 太 平 館 ).
1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5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책봉사를 맞이한 조선에서는 그 후 2월 28일에 선조가 주재하는 翌 日 宴, 29일에 경복 궁의 경회루 관람 후 勤 政 殿 에서 열린 향연, 30일에는 정부 고관이 太 平 館 에서 책봉사를 접대하고 있다. 62) 이러한 일련의 의례는 대명외교상 정해진 규칙이다. 명 사신이 체제 중일 때의 접대의례에 대하여는 成 宗 16년 정월에 시행된 經 國 大 典 에 명 조정의 사신이 왕도 한성에 도착하면 下 馬 宴 과 翌 日 宴 을 베푼다 왕세자 종친부 의정부 육조 또한 차례로 잔치를 베푼다. 사신이 帝 都 북경으로 돌아갈 때는 餞 宴 을 베푼다 고 되어 있으며, 63) 명 사신이 한성에 도착한 뒤에는 원칙적으로 下 馬 宴 翌 日 宴 餞 宴 순서로 조선 국왕이 주재하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64) 이러한 외교 규칙으로 보자면 책봉사가 귀 국할 때는 餞 宴 이 열려야 하는 셈이지만, 宣 祖 実 録 에는 책봉사의 귀국에 관한 기록 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宣 祖 實 錄 을 편찬할 때 최초의 11년분을 보완하는 자 료로 활용된 柳 希 春 의 眉 巌 日 記 草 를 대조해 보면 책봉사는 3월 1일에 한강유람을 즐기고 있다. 65) 당시 한성을 방문했던 명나라 사신에게 있어서 한강 유람은 이를테면 정 평이 나있는 코스였다. 66) 그 후 3일에 太 平 館 에서 餞 別 을 위한 上 馬 宴 이 열렸고, 이튿날 3월 4일에 선조는 백관과 함께 慕 華 館 迎 詔 門 에서 귀국길에 오른 책봉사를 전송했다. 67) 이번의 선조에 대한 책봉을 감사하기 위해 右 議 政 丁 應 斗 와 吏 曹 判 書 姜 暹 이 謝 恩 使 로 명에 파견된 것은 3월 하순의 일이다. 68) 62) 行 翌 日 宴, 上 行 酒 於 天 使, 五 爵 而 畢 後 還 宮, 上 於 慶 會 樓, 請 宴 兩 天 使, 慶 會 樓 觀 光 後, 勤 政 殿 赴 宴, < 宰 樞 宴 于 大 平 館 > (차례로 宣 祖 実 録 권2, 원년 2월 28일 29일 30일조). 63) 朝 廷 使 臣, ( 中 略 ) 致 京, 設 下 馬 宴 翌 日 宴 [ 王 世 子 宗 親 府 議 政 府 六 曹 亦 以 次 設 宴 ], 及 還, 設 餞 宴 凡 接 待, 考 儀 軌 行 之, 倭 野 人 同 ( 經 國 大 典 권3, 禮 典, 待 使 客 条 ). 國 朝 五 禮 儀 권5, 賓 禮, 宴 朝 廷 使 臣 儀 条. 64) 후일 通 文 館 志 권4, 事 大 下, 入 京 宴 享 儀 条 에 의하면, 명 사신 입경 후에 5회( 下 馬 宴 翌 日 宴 仁 政 殿 請 宴 回 禮 宴 別 宴 ), 귀국할 때 2회( 上 馬 宴 餞 宴 ), 합계 7회의 향연이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베풀어졌다. 또한 李 鉉 淙, < 明 使 接 待 考 > 郷 土 서울 제12호, 141~ ) 天 使 二 員 遊 觀 漢 江 (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3월 1일). 텍스트는 朝 鮮 史 編 修 会 編, 眉 巌 日 記 草 ( 朝 鮮 史 料 叢 刊 第 8) ( 朝 鮮 総 督 府, 京 城, 저본은 文 化 柳 氏 家 소장본)을 이용했다. 66) 李 相 培, 2004 <조선전기 외국사신 접대와 明 使 의 遊 観 연구> 國 史 館 論 叢 제104집 ; 曺 圭 益 他 편, 연행록연구총서7(정치 경제 외교) ( 學 古 房, 서울)에 다시 수록, 242~243에 의하 면, 명나라 사신의 한양 遊 観 地 는 한강, 사찰, 도성 안의 개인집, 성균관, 모화루, 남산의 순서이다. 67) 以 太 平 館 上 馬 宴, 朝, 詣 漢 城 府 内 依 幕, ( 中 略 ) 巳 時, 百 官 隨 駕 至 太 平 館 近 處, 館 員 除 經 筵 番 外 入 依 幕, 盧 君 (= 盧 守 慎 ) 及 余 之 出 入, ( 後 略 ), 罷 漏 後, 以 天 使 回 程, 百 官 先 詣 慕 華 館, ( 中 略 ) 巳 時, 上 與 天 使 酬 酢, 四 爵 禮 畢, 両 天 使 與 上 相 別, 歩 至 迎 詔 門 外, 與 百 官 相 揖 而 別, ( 後 略 ) (차례로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3월 3일 4일). 68) 是 日, 謝 恩 使 乃 謝 册 封, 故 丁 應 斗 代 為 右 相 之 任, 姜 暹 亦 假 吏 判 之 銜 (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18 6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상으로 책봉사의 한성 체류는 1주일 정도에 불과했지만, 선조의 책봉의례는 상술한 접대의례를 포함하여 謝 恩 使 를 파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2. 임진왜란 이전의 望 闕 禮 1) 명 사신의 來 朝 와 冬 至 의 望 闕 禮 선조 대에 望 闕 禮 의 시행을 전하는 최초의 기록은 선조 5년(1572) 11월 동지에 보인 다. 이 날의 기록도 柳 希 春 의 眉 巌 日 記 草 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69) 冬 至, 罷 漏 天 明, 上 率 群 臣, 行 望 闕 禮, 仍 班, 又 行 兩 大 妃 殿 賀 禮, 禮 畢, 群 臣 退, 辰 正, 上 出 坐 殿 上, 群 臣 入 行 賀 禮, 禮 畢,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7일 기축조) 동짓날 한성부 안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는 큰 종이 울린다( 罷 漏. 5 更 3 点 ). 새벽녘 ( 天 明 )에 선조는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 조선 국왕이 문무백관과 함께 대명황제에게 동지를 축하하는 대명 요배의례이다. 이어서 양 대비전, 즉 仁 聖 王 后 ( 仁 宗 妃 )와 仁 順 王 后 ( 明 宗 妃 )에 대하여 동지를 축하한다. 이런 의례를 끝내면 신하들은 일단 대궐 정전에서 물러난다. 당일 오전 8시 무렵( 辰 正 )이 되면 선조는 다시 正 殿 으로 행차하고, 신하들이 선조에게 朝 賀 禮 를 올린다. 전자의 望 闕 禮 는 명 황제를 축하 대상으 로 하는 대외적인 궁중의례이며, 후자의 朝 賀 禮 는 조선 국왕을 축하 대상으로 하는 국내 용 궁중의례이다. 70) 望 闕 禮 와 朝 賀 禮 가 끝나면 통상은 대궐 正 殿 에서 会 禮 宴 이 열리지 3월 21일). 朝 鮮 官 人 이 外 交 使 節 로서 北 京 에 파견될 경우, 일반적으로 假 銜 으로서 임시로 1 品 階 를 올리는 일이 관례였다. 金 松 姫 朝 鮮 初 期 堂 上 官 兼 職 制 研 究 - 東 班 京 官 職 과 臨 時 職 을 중심 으로 ( 漢 陽 大 学 校 出 版 部, 서울, 1998년 12월) < 第 4 章 1 対 明 使 臣 과 明 使 迎 接 官 > ) 眉 巌 日 記 草 第 7 冊, 壬 申 11월 7일조 70)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正 至 王 世 子 百 官 朝 賀 儀 [ 誕 日 賀 附 ] 条 ; 国 朝 五 禮 序 禮 巻 2, 嘉 禮, 排 班 圖, 勤 政 殿 正 至 誕 日 朝 賀 之 圖. 正 朝 冬 至 의 朝 賀 禮 事 例 에 대해서는 桑 野 栄 治, 전게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対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에서도 다루었지만, 한국에서는 韓 亨 周, < 朝 鮮 初 期 朝 賀 儀 禮 에 대한 考 察 - 正 至 朝 賀 를 중심으로> 明 知 史 論 第 13 輯 (서울) 외에 姜 制 勲, <조선 초기 朝 会 의식> 朝 鮮 時 代 史 学 報 28 (서울) ; 同, < 朝 鮮 世 祖 代 의 朝 会 와 王 権 > 史 叢 61 (서울) ; 同, <조선 성종대 朝 会 儀 式 과 朝 会 운영> 韓 国 史 学 報 제27호 (서울) ; 同, <조선 초기 朝 儀 의 의례구조와 상징> 韓 国 史 研 究 137 (서울) 등 조선 초기로 시기를 좁혀서 朝 会 儀 禮 전반의 구조분석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正 朝
1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7 만, 71) 선조 6년 이 해의 동짓날 실록 기사에는 会 禮 宴 에 대한 기록이 없다. 正 朝 冬 至 의 会 禮 宴 은 중종대(1506~44년)에 가뭄과 이에 따른 흉년의 여파로 거행되지 않는 추세였 다. 72) 사료의 제약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아마도 이 해의 동짓날에는 会 禮 宴 이 열리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이때 조선은 한성에서 명나라 詔 諭 使 節 을 맞아들였다는 것 이다. 명 사신 翰 林 院 編 修 (정7품) 韓 世 能 吏 科 左 給 事 中 (종7품) 陳 三 謨 일행은 萬 曆 帝 의 등극을 通 達 하는 조칙을 가지고 11월 1일 한양에 도착했다. 그날 정오에 慕 華 館 으로 행 차한 선조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五 拜 三 叩 頭 의 배례로써 명 사신을 환영했다. 73) 저녁 무렵이 되자 선조는 역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太 平 館 으로 가서 명 사신을 위문해야 하는 下 馬 宴 을 개최하고 있다. 74) 이미 책봉사 영접의례의 場 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일 련의 의례는 대명외교상 정해진 규칙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 규칙에 준거하여 다음 날 은 이른 아침부터 太 平 館 에서 翌 日 宴 이 열렸다. 그때 선조는 명 사신이 동짓날인 7일에 望 闕 禮 를 거행하고 나서 귀국한다는 사실을 안다. 75) 이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는 선조가 동짓날 望 闕 禮 를 명 사신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거행해야 하는지 어떤지 문제가 되었으 나, 柳 希 春 은 명 사신과 동석할 필요는 없다며 이를 부정했다. 76) 아울러서 선조는 명 사신에게 체재 일정을 연장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다음의 실록 기사가 그것이다. 天 使 詣 景 福 宮, 周 覽 慶 會 樓, 赴 勤 政 殿 之 宴, 上 以 宗 系 改 正 惡 名 申 雪 奏 請 使 將 遣 事, 令 通 事 告 于 兩 使, 答 曰, 天 子 聖 明, 今 若 奏 請, 可 得 請 矣, 上 又 請 曰, 初 七 日 發 行 云, 冬 至 節 日 行 望 闕 禮 而 後 發 行 日, 晩 矣, 一 日 之 間, 請 留, 天 使 曰, 懇 至, 當 依 許 留, ( 後 略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4일 병술조) 冬 至 의 朝 賀 禮 가 朝 会 儀 禮 의 中 軸 을 이루는 大 朝 会 이며, 그 전제로서 望 闕 禮 가 실시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71) 国 朝 五 禮 儀 巻 3, 嘉 禮, 正 至 会 儀 条 ; 国 朝 五 禮 序 禮 巻 2, 嘉 禮, 排 班 圖, 勤 政 殿 正 至 会 百 官 之 圖 72) 桑 野 栄 治, 전게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對 明 遥 拝 儀 禮 > ) 上 以 卯 時 爲 迎 詔, 而 至 午 時, 天 使 韓 世 能 陳 三 謨 奉 詔 勑, 而 至 慕 華 館, 上 率 百 官, 行 迎 拜 禮, 即 五 拜 三 叩 頭 也, 百 官 從 下 先 行,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1일 계미조) 74)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1일 계미조 75) 早 朝, 上 乃 出, 率 百 官, 詣 太 平 館, 設 翌 日 宴, 行 九 爵, 上 再 行 酒 而 止, 日 暮 雪 止, 還 宮, ( 中 略 ) 天 使 以 初 七 日 冬 至, 行 望 闕 禮 後, 發 行 云, 天 使 明 日 將 謁 聖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2일 갑신조). 76) 天 使 到 成 均 館, ( 中 略 ) 又 衆 議 冬 至 望 闕 禮, 或 疑 上 與 天 使 同 行 一 處, 希 春 以 爲, 不 當 同 處 爲 之 云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3일 을유조).
20 6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날 명 사신은 경복궁 경회루를 관람하고 근정전 연회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서 선조는 먼저 宗 系 를 개정하여 惡 名 을 申 雪 하는 奏 請 使, 즉 宗 系 辨 誣 奏 請 使 파견을 타 진했는데, 명 사신은 지금의 萬 曆 帝 는 총명하여, 만일 명에 주청사를 파견하면 허가하 실 것이다 라고 회답했다. 중종 13년에 재연된 한중 간의 일대 외교분쟁인 宗 系 辨 誣 문 제 77) 는 선조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해결을 보지 못했으므로, 조선 정부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것은 외교 교섭을 직접 진행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선조는 한성 체제 예정기간을 연장하고 동짓날 望 闕 禮 를 마친 다음날 귀국하는 게 어떻 겠냐고 제안했는데, 명 사신도 이를 받아들였다. 78) 선조가 명 사신을 붙잡았던 것은 그 저 외교적인 발언이 아니라 宗 系 辨 誣 을 둘러싼 외교 교섭에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명사 韓 世 能 은 동지 다음날 8일에 열린 太 平 館 에서의 上 馬 宴, 9일의 慕 華 館 餞 宴 이라는 공식행사를 마치고 선조와 종실, 그리고 문무백관이 전송하는 가운데 귀국길에 올랐다. 79) 宗 系 辨 誣 문제는 후일 선조 22년에 해결을 보지만, 그때 宣 祖 가 中 朝 의 明 은 우리 조선을 内 服 (= 帝 居 의 域 )과 마찬가지로 본다 고 말할 만큼 80) 조선 전기 의 한중관계는 긴밀하였다. 그리고 조선과 明 의 이처럼 긴밀한 관계 때문에 明 은 壬 辰 倭 乱 에 참전하게 되는 것이다. 81) 77) 大 明 会 典 朝 貢 条 에 李 仁 任 과 太 祖 李 成 桂 父 子 가 4명의 高 麗 国 王 을 살해하고 政 権 을 奪 取 했 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中 宗 13년에 발각되었다. 이후 조선정부는 그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 는 使 節 을 여러 차례 明 에 파견했다. 末 松 保 和, 전게서 < 麗 末 鮮 初 に 於 ける 對 明 関 係 >의 < 第 十 二 章 宗 系 弁 誣 の 発 端 > ; 桑 野 栄 治, < 朝 鮮 版 正 徳 大 明 会 典 の 成 立 とその 現 存 - 朝 鮮 前 期 對 明 外 交 交 渉 との 関 連 から> 朝 鮮 文 化 研 究 ( 東 京 大 學 文 學 部 朝 鮮 文 化 研 究 室 紀 要 ) 제5호 ; 朴 成 柱, <조선전기 朝 明 관계에서의 宗 系 문제> 慶 州 史 学 第 22 輯 ( 慶 州 ) ; 桑 野 栄 治,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宗 系 弁 誣 問 題 の 再 燃 >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제25호 ; 同, < 朝 鮮 中 宗 20 年 代 の 対 明 外 交 交 渉 - 嘉 靖 会 典 編 纂 の 情 報 収 集 をめぐって> 東 洋 史 研 究 第 67 巻 제3호 ; 同, < 朝 鮮 中 宗 30 年 代 における 対 明 外 交 交 渉 - 宗 系 弁 誣 問 題 をめぐって> 久 留 米 大 学 文 学 部 紀 要 제26호 78) 다만, 明 使 가 동지의 望 闕 禮 를 실시했던 장소는 불명이다. 동지 전날의 실록 기사에는 政 院 啓 曰, 明 日, 天 使 望 闕 禮 處, 時 未 定, 何 以 爲 之, 取 稟, 傳 曰, 大 臣 禮 官 命 招 議 啓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6일 무자조)라고 하는데, 대신과 禮 官 의 협의 결과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79)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8일 9일조. 80) 傳 曰, 我 國 宗 系 昭 雪, 大 明 會 典 一 冊, 則 徑 請 頒 給, 是 我 國 莫 大 之 慶, 而 巻 帙 未 成, 終 有 所 未 給, 中 朝 視 我 國 無 異 内 服, 而 獨 於 會 典 以 其 載 中 國 諸 機, 不 爲 頒 給, 是 外 夷 之 也, 尤 爲 未 穩,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23, 22년 2월 4일 신사조). 문제가 된 萬 暦 大 明 会 典 全 帙 은 이 해 11월에 萬 暦 帝 가 宣 祖 에게 頒 賜 했다( 同 書 권23, 22년 11월 22일 병인조). 81) 예를 들면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씨는 明 과 조선의 관계를 이( 明 )를 보호하는 입술( 朝 鮮 )에 비유하고, 冊 封 朝 貢 体 制 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同, <순망치한( 脣 亡 歯 寒 )-명나라가 참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鄭 杜 熙 他 編, 前 掲 書 임진왜란, 수록) 342
2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9 그 후 선조대의 望 闕 禮 실시 상황을 정리한 것이 표 2 이다. 일련번호 1부터 16까 지는 임진왜란 이전, 17부터 34까지는 임진왜란기, 35 이후는 난후의 상황을 의미한다. 이하에서는 선조대에 특징적인 正 朝 冬 至 望 闕 禮 의 실시 상황을 임진왜란의 국면에 주 목하면서 추적하기로 한다. 2) 國 忌 에 수반하는 朝 賀 禮 의 順 延 조치 임진왜란 이전의 경우 宣 祖 実 録 에 보이는 한 望 闕 禮 실시 상황은 순조롭지 않다. 기상광학적 日 變 이라든가 日 食 등의 天 譴 思 想, 82) 극한 강우 등의 기후조건, 83) 明 宗 妃 인 仁 順 王 后 의 사망에 수반하여 正 朝 동지의 궁중의례는 차츰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 2> ). 더군다나 선조 10년 11월에는 仁 宗 妃 仁 聖 王 后 가 경복궁에서 사망했으며, 84) 그 후 3년 동안은 國 喪 기간인 탓에 명절의 궁중의례가 정지되었다고 판 단된다. 물론 임진왜란 이전의 왕조국가 공식기록은 대부분이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결과 광해군(재위 1608~23년) 때 편찬된 宣 祖 実 録 에는 모두 61개월분(약 5년간) 에 이르는 기록이 빠져 있다. 85) 때문에 望 闕 禮 를 비롯하여 궁중의례에 관한 기록이 빠졌 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선조 14년 正 朝 望 闕 禮 가 약식인 権 停 禮 ( 權 停 例 라고도 한다)로 거 행되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정월 2일이 明 宗 妃 인 仁 順 王 后 의 기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록을 보자. 82) 政 院, 以 日 變 (= 前 日,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한다 는 이상 현상을 관측) 請 停 元 朝 望 闕 禮 及 初 九 日 文 昭 殿 大 祭,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7, 6년 12월 29일 을해조), 日 有 食 之 ( 同 書 권23, 22년 정월 초하루 기유조). 日 變 은 중대한 凶 象 이며, 日 食 또한 위정자가 덕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廃 朝 ( 輟 朝 )되었다. 渡 邊 敏 夫, 日 本 朝 鮮 中 國 日 食 月 食 寶 典 ( 雄 山 閣 出 版 ) 280 ; 田 村 専 之 助, 李 朝 鮮 気 象 学 史 研 究 ( 東 洋 気 象 学 史 論 叢 Ⅰ) ( 三 島 科 学 史 研 究 所 ) 114~115 83) 左 右 相 詣 闕 啓 曰, 日 候 極 寒, 自 上 冒 曉 擧 動, 有 妨 保 攝 未 安, 明 日 望 闕 禮 請 命 停, 本 朝 賀 禮 幷 爲 權 停,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8, 7년 11월 기해 29일 조), 以 庭 濕, 停 望 闕 禮 ( 宣 祖 実 録 권18, 17년 정월 1일 기묘조). 84) 宣 祖 実 録 권11, 10년 11월 29일 신사조. 璿 源 系 譜 紀 略 ( 震 檀 学 会 編, 韓 国 史 ( 年 表 ) ( 乙 酉 文 化 社, 서울) 수록) 璿 源 世 系, 仁 宗 妃. 85) 末 松 保 和, < 宣 祖 実 録 解 説 > 李 朝 実 録 제30책 ( 學 習 院 東 洋 文 化 研 究 所 ) 1 ; 申 奭 鎬 < 凡 例 > 朝 鮮 王 朝 実 録 제21책 ( 國 史 編 纂 委 員 会, 과천) 3~4
22 7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望 闕 禮 權 停, 以 明 日 乃 仁 順 王 后 忌 辰, 今 日 行 舞 蹈 盛 禮 未 安, 或 以 爲 退 行 爲 當, 或 以 爲 爲 上 國 之 禮, 不 可 退 行, 命 大 臣 及 正 二 品 以 上 會 議 于 闕 庭, 定 爲 是 日 行 之, 本 國 賀 禮 則 退 行 於 初 三 日, 永 爲 恒 式, ( 宣 祖 実 録 권15, 14년 정월 1일 병인조) 仁 順 王 后 는 6년 전인 선조 8년 정월 2일에 창경궁 通 明 殿 에서 사망했다. 86) 명절인 正 朝 라고는 해도 王 母 의 忌 日 에 앞서 가무음곡을 즐기며 성대한 축하행사를 거행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정부 안에서는 正 朝 望 闕 禮 를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 혹은 上 國 (=종주 국 명)의 예 를 경솔하게 연기하면 안 된다는 의견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선조는 대신 및 정2품 이상의 고급관료에게 궁궐 뜰에서 의논하도록 하명했다. 그 결과 上 國 의 禮 인 望 闕 禮 는 지금까지 해 온 대로 正 朝 에서 거행하고, 본국 조선의 朝 賀 禮 는 정월 3일로 연기하며, 이후 오래도록 恒 式 ( 恒 例 )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이 해 정월 3일의 실 록 기사에는 以 權 停 禮 行 正 朝 賀, ( 宣 祖 実 録 권15, 14년 정월 3일 무진조) 라고 되어 있으며, 正 朝 를 축하하는 朝 賀 禮 는 仁 順 王 后 의 기일 다음날에 権 停 禮 로 시행 하고 있다. 그 후, 예를 들어서 <표 2> 11 14에서 표시한 대로 선조 17년 正 朝 와 21년 正 朝 의 朝 賀 禮 는 정월 3일에 거행했으며, 87) 선조 14년 正 朝 에서 결정했던 朝 賀 禮 의 順 延 이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까지는 거의 정례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번잡한 의례를 반복했던 것은 조선국왕 뿐만은 아니다. 일찍이 黄 仁 宇 씨는 朝 廷 의 정치는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그 요점은 의례와 人 事 의 둘이다 라고 갈파했는데, 尊 卑 의 등급을 體 現 하고,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의례의 정치적 중요성을 환기하였 다. 宣 祖 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萬 暦 帝 는 각종 의례를 숙지한 군주로 평가받지만, 나중 에 매월 여러 차례 실시되는 이른 아침의 조회도 廃 朝 로서 쉬는 날이 많아졌으며, 제사 의례의 측면에서도 직접 임석하는 일 없이 관료를 대리로 파견하는 등 의례의 간략화가 진행되는 것도 지적되고 있다. 88) 86) 宣 祖 実 録 권9, 8년 정월 2일 임인조. 璿 源 系 譜 紀 略 璿 源 世 系, 明 宗 妃. 87) 以 權 停 禮 行 賀 禮, 以 初 二 日 仁 順 王 后 國 忌, 故 退 行 正 朝 賀 禮 也 ( 宣 祖 実 録 권18, 17년 정월 3일 신사조), < 行 正 朝 賀 禮 > (동서 권22, 21년 정월 3일 정해조). 88) 黄 仁 宇 ( 稲 畑 耕 一 郎 他 訳 ), 萬 暦 十 五 年 - 一 五 八 七 < 文 明 >の 悲 劇 ( 東 方 書 店 ) <Ⅰ 万 暦 帝 > 6~16
2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임진왜란기의 望 闕 禮 1)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宣 祖 25년(1592)4월 13일( 日 本 暦 12일), 小 西 行 長 宗 義 智 등의 軍 勢 가 釜 山 에 상륙하 면서 壬 辰 倭 乱 이 발발했다. 조선왕조의 공식기록에는 일본군 침공의 기술로서 倭 寇 至, 先 是, 日 本 賊 酋 平 秀 吉 爲 關 白 ( 割 註 略 ) 并 呑 諸 國, 殘 暴 日 甚, 常 以 天 朝 不 許 朝 貢 爲 憤, 嘗 遣 僧 玄 蘇 等 乞 假 途 犯 遼, 我 國 以 大 義 拒 之 甚 峻, 賊 遂 傾 國 出 師, 以 玄 蘇 平 行 長 平 淸 正 平 義 智 等 爲 將, 大 擧 入 寇, ( 後 略 )( 宣 祖 実 録 권26, 25년 4월 13일 임인조) 라고 적었으며, 宣 祖 実 録 에는 豊 臣 秀 吉 이 関 白 이 되어 국내를 통일했음에도 불구 하고 天 朝 明 이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분개하였다 고 되어 있다. 작년 정월에 通 信 使 黄 允 吉 副 使 金 誠 一 書 状 官 許 筬 일행의 귀국에 수반하여 日 本 回 禮 使 로서 正 使 柳 川 調 信 副 使 景 轍 玄 蘇 가 来 朝 했는데, 당시의 対 馬 島 主 宗 義 智 등에 의한 전쟁 회피 대책, 즉 対 明 通 貢 을 위한 假 途 入 明 ( 假 道 入 明 이라고도 한다)교섭이 実 録 기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89) 주지하다시피 나중에 明 軍 은 秀 吉 과 함께 博 多 聖 福 寺 승려 景 轍 玄 蘇 의 首 級 에 최고액의 현상금을 걸었고, 秀 吉 을 日 本 国 王 에 책봉할 때는 景 轍 玄 蘇 에게 日 本 国 本 光 禅 師 칭호를 特 賜 하게 된다. 90) 좌우간 일본군 침공이 조선왕조에게는 空 前 絶 後 의 倭 寇 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4월 29일에 忠 清 道 忠 州 의 敗 報 에 접하자 宣 祖 는 庶 出 의 次 子 인 光 海 君 을 王 世 子 로 冊 立 하고(뒷날 宣 祖 25년 6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分 朝 ), 조 선정부에서는 宣 祖 의 去 邠 論 ( 播 遷 論 )과 諸 臣 의 漢 城 固 守 論 이 대립하는 와중에 遼 東 内 附 論 ( 逃 亡 論 ) 者 이기도 한 宣 祖 는 漢 城 탈출을 결의하고 다음날 平 壌 으로 향했다. 91) 임진왜란기에 있어서 望 闕 禮 의 실시 상황을 이전의 상황과 비교한 경우, <표 2>에 표시한대로 그 차이가 확연하다. 선조 25년 4월부터 전후 7년 동안 선조는 正 朝 동지 89) 中 村 栄 孝, < 壬 辰 倭 乱 の 発 端 と 日 本 の 假 道 入 明 交 渉 > 朝 鮮 学 報 제70집, 97~103 90) 長 正 統, < 景 轍 玄 蘇 について- 外 交 僧 の 出 自 と 法 系 > 朝 鮮 学 報 제29집, 136~137 91) 宣 祖 修 正 実 録 권26, 25년 4월 29일 그믐조. 孫 鍾 聲, < 壬 辰 倭 乱 時 分 朝 에 관한 小 考 > 渓 村 閔 丙 河 教 授 停 年 紀 念 史 学 論 叢 ( 刊 行 委 員 会, 서울) 294~296 ; 同, < 壬 辰 倭 乱 時 対 明 外 交 - 請 兵 外 交 를 중심으로> 国 史 館 論 叢 제14집 ( 果 川 ) 172~174 ; 北 島 万 次, < 壬 辰 倭 乱 期 の 朝 鮮 と 日 本 > 荒 野 泰 典 他 編, ア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Ⅱ 外 交 と 戦 争 )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133~134 ; 同, 豊 臣 秀 吉 の 朝 鮮 侵 略 ( 吉 川 弘 文 館 ) 42~44
24 7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그리고 聖 節 의 望 闕 禮 를 거의 매년 충실하게 시행하고 있다(<표 2> 17~34). 이 중에서 명절이 아닌 날에 望 闕 禮 를 시행한 사례가 보인다. 다음의 실록 기사를 보자. 寅 時, 上 幸 淸 溪 館, 率 百 官 耆 老 軍 民, 御 吉 服 行 望 闕 禮, 以 謝 皇 恩, 禮 畢, 反 素 服 還 宮, 以 克 復 京 城 告 于 宗 廟 社 稷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2일 을묘조) 선조 26년 5월 2일 오전 4시 무렵에 선조는 清 渓 館 으로 행차하여 문무백관 기로 군 민을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 表 2> 19). 선조 26년 3월부터 선조는 평안도 肅 川 府 에서 남하하여 永 柔 縣 (별호는 清 渓 )을 行 宮 으로 삼았으며, 92) 의례의 무대가 된 清 渓 館 은 永 柔 縣 읍내에 있던 객사이다. 93) 望 闕 禮 를 실시한 이유는 皇 恩, 즉 대명황제의 은 혜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그 은혜란 경성 수복, 즉 왕도 한성의 탈환을 의미한다. 이해 4월 중순에 明 의 遊 擊 將 軍 沈 惟 敬 과 小 西 行 長 사이에서 日 明 화의교섭이 성립하자 일본 군은 한성에서 철수했다. 94) 일본 측의 생각으로는 명과 조선이 항복을 받아들이는 전제 조건으로 한성에서 철군했던 것이지만, 95) 조선 국왕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파견한 명군 덕분에 한성이 탈환된 것이었다. 화의교섭을 의문시하는 明 정부에서는 社 稷 (국가)를 상실한 宣 祖 의 책임을 추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国 命 을 맡길만한 光 海 君 에게 譲 位 를 권고하는 王 位 交 替 論 까지 나온 것도 사실이다. 96) 경성 수복 에 대한 시선은 일본 조 92) 宣 祖 実 録 권36, 26년 3월 13일 무진조. 임진왜란의 개전으로 한성을 포기했던 선조가 이듬해 인 선조 26년에 평안도 의주에서 한성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족적은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190 ; 李 烱 錫, 壬 辰 戦 亂 史 - 文 禄 慶 長 の 役 ( 中 巻 ) ( 東 洋 圖 書 出 版 ) < 第 二 篇 第 八 章 第 一 節 概 況 > 166~167 참조. 93) 朝 鮮 後 期 地 方 地 圖 평안도편 상(서울대학교규장각, 2002년 12월) <25. 永 柔 縣 地 圖 > 참조. 94)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174~175 ; 石 原 道 博, 文 禄 慶 長 の 役 ( 塙 書 房 ) ~185 ; 李 烱 錫, 전게서 < 第 二 篇 第 八 章 第 一 節 概 況 > 153~154 ; 北 島 万 次, 전게 < 壬 辰 倭 乱 期 の 朝 鮮 と 日 本 > 151 ; 金 文 子, < 豊 臣 政 権 期 の 日 明 和 議 交 渉 と 朝 鮮 > お 茶 の 水 史 学 第 37 号, 35~36 95) 中 村 栄 孝, 전게서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79~271 ; 中 野 等, 秀 吉 の 軍 令 と 大 陸 侵 攻 ( 吉 川 弘 文 館 ) <Ⅲ 戦 局 の 転 換 > 184~186 96) 小 野 和 子, 明 季 党 社 考 - 東 林 党 と 復 社 ( 同 朋 舎 出 版 ) < 第 二 章 第 二 節 明 日 和 平 交 渉 をめ ぐる 政 争 > 122~123 ; 韓 明 基,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 歴 史 批 評 社 ) <제1부 제1장 명군 참전과 정치적 영향> 60~61 ; 同, <임진왜란 시기 決 戦 여부를 둘러싼 朝 明 갈등> 鄭 玉 子 他, 조선시대 문화사(하)-시대정신과 인간의 대응 ( 一 志 社, 서울) 67. 明 정부 내부의 강 화문제를 둘러싼 정책결정 과정은 岡 野 昌 子, <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と 中 国 > 中 山 八 郎 教 授 頌 寿 記 念 明 清 史 論 叢 ( 燎 原 書 店 ) 148~154 외에 三 木 聰, < 万 暦 封 倭 考 ( 一 )- 万 暦 二 十 二 年 五 月 の < 封 貢 > 中 止 をめぐって> 北 海 道 大 学 文 学 研 究 科 紀 要 제109호 ; 同, < 万 暦
2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73 선 明 의 동아시아 3국에 있어서 각기 입장을 달리한다.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를 실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宣 祖 이 며, 4월 하순에 선조는 승정원을 통하여 예조에 그 조치를 하명하였다. 97) 이 해 정월에 李 如 松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 지원군에 의하여 평양 탈환이 성공했지만, 98) 그때 謝 恩 使 파견이 늦어진 탓에 兵 部 尚 書 石 星 에게 비난을 들었던 일이 있다. 그 때문에 선조는 이 번에는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禮 曹 는 우선 5월 1일에 백관을 거느리고 초하루의 哭 禮 를 거행했으며, 다음날에 望 闕 禮 를 실시하는 것이 좋겠 다고 회답하였다. 99) 확실히 조선 국왕은 즉시 望 闕 禮 를 거행하여 명에게 감사해야 하지 만, 禮 曹 는 宣 靖 陵 의 변, 즉 宣 陵 (성종과 그 繼 妃 貞 顯 王 后 의 능)과 靖 陵 ( 中 宗 의 능)이 일본군에게 침탈당한 사건 100) 에 대한 哭 禮 를 우선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선시 대의 형법으로 도입된 大 明 律 刑 律 에 따르면, 무릇 모반이란 도모하여 社 稷 을 위 태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역은 도모하여 宗 廟 山 陵 및 궁궐을 훼손하는 것을 말한다 고 되어 있으며, 조선 왕릉의 도굴 파괴는 쿠데타에 필적하는 大 罪 로서 陵 遲 (8토막으로 자름, 또는 車 裂 )한 뒤에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다. 101) 게다가 禮 曹 는 望 闕 禮 를 거행할 때 원래의 의식에서 춤과 노래를 삭제할 것을 선조에게 요청하였다. 102) 宣 靖 陵 의 변 이라 封 倭 考 ( 二 )- 万 暦 二 十 四 年 五 月 の 九 卿 科 道 会 議 をめぐって> 同 제113호에 상세하다. 97) 上 敎 政 院 曰, 京 城 收 復, 即 時 似 當 率 群 臣, 行 望 闕 禮 謝 皇 恩, 而 該 曹 似 無 處 置 議 處, 且 平 壤 收 復, 不 即 謝 恩, 天 將 累 以 爲 言, 至 於 石 尚 書 (= 石 星 ) 亦 以 爲 非 云, 今 者 謝 恩 使 似 當 趁 發, 並 言 于 禮 曹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8일 임자조). 98) 1개월 뒤인 宣 祖 26년 2월에 비변사는 李 如 松 을 위하여 顕 彰 碑 를 세우고 生 祠 에 제사를 지낼 것을 건의했고, 나중에 平 壌 에서는 李 如 松 과 石 星 을 함께 제사지내는 武 烈 祠 가 완성된다. 中 村 栄 孝, < 朝 鮮 の 慕 明 思 想 と 大 報 壇 > 天 理 大 学 学 報 제78집, 197 ; 桑 野 栄 治, < 朝 鮮 後 期 における 国 家 祭 祀 儀 禮 の 変 動 - 壬 辰 倭 乱 直 後 の 朝 鮮 と 明 > 久 留 米 大 学 文 学 部 紀 要 제23호, 35~36 99) 禮 曹 啓 曰, 望 闕 禮 所 當 即 時 擧 行, 而 自 上 方 遭 罔 極 之 變, 成 服 之 前, 行 禮 未 安, 初 一 日, 自 上 率 百 官, 行 朔 日 哭 禮, 自 初 二 日 行 之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8일 임자조). 100) 李 烱 錫, 전게서 < 第 三 篇 第 十 一 章 第 二 節 交 渉 の 停 頓 > 418~419. 壬 辰 倭 乱 뒤의 日 朝 국교회 복 때 이 王 陵 盗 掘 사건의 범인 인도가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이점에 관해서는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下 ) ( 吉 川 弘 文 館 ) < 三 江 戸 時 代 の 日 鮮 関 係 > 264~266 ; 三 宅 英 利, 近 世 日 朝 関 係 史 の 研 究 ( 文 献 出 版 ) < 第 二 篇 第 一 章 幕 藩 体 制 確 立 期 の 通 信 使 > 158~161 외 에 孫 承 喆, 전게서 <제3장 임란 직후 중화적 교린체제의 부활> ; 李 啓 煌, 文 祿 慶 長 の 役 と 東 アジア ( 臨 川 書 店 ) < 第 五 章 和 好 通 好 関 係 の 成 立 > 242~247 참조. 101) 大 明 律 巻 18, 刑 律, 盗 賊, 謀 反 大 逆 条.. 물론 이 규정의 연원은 唐 律 까지 소급한다. 花 村 美 樹 < 高 麗 律 > 京 城 帝 国 大 学 法 学 会 編, 朝 鮮 社 会 法 制 史 研 究 ( 論 集 第 9 冊 ) ( 岩 波 書 店 ) 57. 朝 鮮 의 陵 遅 刑 에 관해서는 당장은 앤더스 칼슨(Anders Karlsson), < 千 金 の 子 は 市 に 死 せず 世 紀 朝 鮮 時 代 における 死 刑 と 梟 首 > 冨 谷 至 編, 東 アジアの 死 刑 ( 京 都 大 学 出 版 会 ) 109~115 참조.
26 7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는 국난을 당하여 화려한 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望 闕 禮 는 上 國 을 위한 의례이므로 춤과 노래는 당연한 것이며, 다만 사죄를 드릴 때에는 五 拜 三 叩 頭 의 예로써 대처한다고 선조는 결정을 내렸다. 춤과 노래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황제 의 은혜에 대한 더없는 환희를 나타냄과 동시에, 황제에 대한 신하로서의 복종을 표현하 는 身 體 儀 禮 였다. 103) 선조는 5월 1일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의 뜰에 모여서 통곡했다. 104) 4월 하순에 宣 陵 의 변 을 안 이래 선조는 禮 曹 의 진언에 따라 이처럼 四 拜 가 아닌 会 哭 의례를 이 미 세 번이나 지내고 있었다. 105) 그런데 그날 중에 禮 曹 는 宣 陵 의 변 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라는 종실 順 寧 君 李 景 倹 의 장계를 이유로 다음날 예정되어 있던 望 闕 禮 를 중지하 자고 선조에게 청원했다. 106) 이에 대하여 선조는 望 闕 禮 를 올려 사은하는 것은 皇 上 을 위한 일 이라며 일정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선조가 들은 바에 의하면, 군주의 은혜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상중이라도 사은해야 할 일이 있으면 궁궐 밖에서 상복을 벗고 의례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하여 禮 曹 가 대신들과 다시 협의한 결과 선조의 의향을 존중하여 다음날 5월 2일의 望 闕 禮 를 예정대로 거행하자는 의견에 찬성 했다. 이때 선조는 望 闕 禮 의 구체적인 거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구체적 방법이란 지금 한성에 있는 노인 어린이와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문무백관 행렬의 끝에 서고, 백관과 마찬가지로 拜 禮 와 叩 頭 禮 를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일반 백성들도 황제의 은혜를 알고 크게 감격할 것이라고 선조는 생각하였다. 선조의 의중을 안 禮 曹 는 曠 世 의 盛 典, 요컨대 세상에 둘도 없는 성대한 儀 禮 라고 칭송했고, 대신들 또한 이에 102) 禮 曹 啓 曰, 初 二 日 望 闕 禮 儀 註, 減 去 舞 蹈 一 節, 上 敎 曰, 爲 上 國 陳 賀, 則 似 當 有 舞 蹈 之 節, 只 於 陳 謝, 則 似 當 行 五 拜 三 叩 頭 之 禮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9일 계축조). 103) 渡 邊 信 一 郎, 天 空 の 玉 座 - 中 國 古 代 帝 國 の 朝 政 と 儀 禮 ( 柏 書 房 ), 한국어판은 문정희 임대희 역, 天 空 의 玉 座 - 中 國 古 代 帝 國 의 朝 政 과 儀 禮 ( 新 書 苑, 서울) 170~ ) 上 率 百 官, 會 哭 于 闕 庭 之 内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1일 갑인조) 105) 禮 曹 啓 曰, 宣 靖 陵 之 變, 前 日 則 變 服 擧 哀, 行 四 拜 禮 矣, 群 議 拜 禮 未 穩 云, 自 上 率 百 官 哭 盡 哀, 連 三 日 朝 哭, 内 殿 亦 當 如 是,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4일 무진조). 세 번의 會 哭 儀 禮 는 同 書 권37, 26년 4월 25일 26일 29일조. 106) 禮 曹 啓 曰, 即 見 順 寧 君 景 儉 状 啓, 宣 陵 之 變 尤 極 慘 痛, 今 日 自 上 率 百 官 哭 臨, 明 日 望 闕 禮 亦 姑 停, ( 中 略 ) 上 曰, 哭 臨 事, 更 與 大 臣 商 確 以 啓, 謝 恩 一 節, 則 爲 皇 上 事, 聞 中 朝 之 人, 則 初 喪 如 有 謝 恩 之 事, 脱 衰 於 闕 門 外, 成 禮 而 出 云, 蓋 以 君 恩 爲 重 也, 謝 恩 漸 晩, 予 意 雖 哭 臨, 明 日 謝 恩 似 不 可 退, 禮 曹 啓 曰, 更 議 于 大 臣, 則 當 初 聞 變, 已 行 三 日 哭 禮, 今 又 哭 臨 似 爲 未 穩 云, 來 初 二 日 謝 恩 事, 請 依 上 敎 行 之, 敎 政 院 曰, 明 日 謝 恩 時, 此 處 老 少 及 凡 來 此 之 人, 於 百 官 班 列 後 行 退 立, 使 之 同 行 拜 禮 叩 頭, 則 是 率 臣 民 謝 皇 恩, 而 臣 民 亦 知 皇 恩 感 激 之 至, 此 意 預 爲 曉 諭 行 禮, 禮 曹 回 啓 曰, 致 謝 皇 恩, 一 如 上 敎, 實 是 曠 世 盛 典, 大 臣 之 意 亦 如 此,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1일 갑인조).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東 京 大 月 書 店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新 報 關 東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相 互 銀 行 計 數 集 計 ꌞ ꌞꌞ ꌞ ꌞꌞ
More information緊 張 冷 戰 體 制 災 難 頻 發 包 括 安 保 復 舊 地 震 人 類 史 大 軍 雷 管 核 禁 忌 對 韓 公 約 ㆍ 大 登 壇 : : : 浮 上 動 因 大 選 前 者 : : : 軸 : : : 對 對 對 對 對 戰 戰 利 害 腹 案 恐 喝 前 述 長 波 大 産 苦 逆 說 利 害 大 選 大 戰 略 豫 斷 後 者 惡 不 在 : : 對 : 軟 崩 壞
More information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棄 権 DNS: 欠 場 )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More information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More information<B0C5C1A620BFC1C6F7BCBA20B9DFB1BCC1B6BBE720BEE0BAB8B0EDBCAD2E687770>
거제 옥포성 주변 공동주택 신축부지내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03. 12.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거제 옥포성 주변 공동주택 신축부지내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직 책 성 명 소 속 직 위 조 사 단 장 성 태 현 경 남 발 전 연 구 원 원 장 책임연구원 이 범 홍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센 터 장 조 사 원 연구보조원 이 영 주
More information23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貫 井 正 之 씨는 豊 臣 秀 吉 의 대외적 인 정복의도 전반을 검토하고 책 이름에 海 外 侵 略 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으며( 豊 臣 政 権 의 海 外 侵 略 과 朝 鮮 義 兵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37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나카노 히토시( 中 野 等 ) 머리말 Ⅰ. 근세 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Ⅱ. 근세 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Ⅲ. 근대 일본의 성립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More information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碘 岛 监 结 30km 20km 10km 碘 达 碘 测 时 提 高 后 的 上 限 [250,000 微 西 弗 / 年 ] [10,000 微 西 弗 / 年 ] 巴 西 瓜 拉 帕 里 的 辐 射 (1 年 来 自 地 面 等 ) > 辐 射 量 ( 微 西 弗 ) 250,000 100,000 50,000 10,000 注 : 本 资 料
More information<C0BDBEC7B0FA2028BEC8B8EDB1E2292E687770>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More information<4D6963726F736F667420576F7264202D20313030303931302D3242463531B27BA6E6A6D2BBCDA8EEABD72DBEC7BEA7A558AAA9AAC02E646F63>
前 1 前 言 現 行 考 銓 制 度 一 現 行 考 銓 制 度 對 人 事 行 政 的 重 要 性 : 強 烈 建 議 考 人 事 行 政 的 同 學 們, 一 定 要 精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熟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的 好 處, 可 以 從 以 下 幾 個 角 度 來 分 析 : 相 對 重 要 程 度 高 : 現 行 考 銓 制 度 在 人 事 行 政 三 個 主 要 等
More information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More information199-224 서강건치.hwp
국 학 연 구 론 총 제 1 집 택민국학연구원.2008.6.30. 日 本 에 있어서의 韓 國 文 學 의 傳 來 樣 相 江 戸 時 代 때부터1945 年 까지 西 岡 健 治 * 1) 序 言 Ⅰ. 江 戸 時 代 에 읽혀진 作 品 들 Ⅱ. 1868( 明 治 元 ) 年 에서 1918 年 ( 大 正 中 期 )까지 읽혀지고 翻 訳 된 作 品 들 Ⅲ. 三 一 獨
More informationPOWERSHELL CONTROLLER + BATTERY Setup Guide English............................... 4 繁 體 中 文.............................. 12 한국어............................... 20 www.logitech.com/support................
More information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1883.01.24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1883.06.22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22) 1. 조선 대한제국이 일본국과 맺은 조약 주) 1. 아래 목록은 國 會 圖 書 館 立 法 調 査 局, 1964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上 ; 1965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中 ; 外 務 省 條 約 局, 1934 舊 條 約 彙 纂 第 三 巻 ( 朝 鮮 及 琉 球 之 部
More information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More information見 積 書
2 한국일본문화학회 회 장 인 사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물러가고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높고 파란 하늘이 성 큼 다가와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합니다. 한 여름이 지나고 찾아온 10월은 너무도 아름답습 니다. 파아란 하늘, 빠알간 단풍잎, 노오란 은행잎을 맘껏 즐기고
More information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제28차 워크숍 2016-04-08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가와이 에이지로의 제국일본 인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용철(한림대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1.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2. 식민지 인식과 정당화논리 2.1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와 국민적 자유론 2.2 식민지 정당화의 논리 3. 전쟁 인식과 정당화논리 3.1 이상주의적
More information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More information<C0A7B7C9B0F82E687770>
제1장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군대의 일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衛 靈 公 問 陳 於 孔 子. 공자 : 저는 제기( 祭 器 )를 진설하는 법은 들은 적이 있어도, 군대에 관한 일은 아직 배 우지 못하였습니다. 孔 子 對 曰 : 俎 豆 之 事, 則 嘗 聞 之 矣. 軍 旅 之 事, 未 之 學 也. 그리고는 다음날 떠나갔는데, 진나라에 도달할 즈음 양식은 떨어지고
More information대해서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交 通 放 送 은 96 年 상반기도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交 通 專 門 放 送 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委 員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더욱더 사랑 그러면
第 85 回 서울特 別 市 議 會 ( 臨 時 會 ) 交 通 委 員 會 會 議 錄 第 1號 서울 特 別 市 議 會 事 務 處 日 時 1996年 6月 3 日 ( 月 ) 午 前 10時 場 所 議 事 日 程 交 通 委 員 會 會 議 室 1. 交 通 放 送 本 部 所 管 當 面 懸 案 報 告 의件 審 査 된案 件 1. 交 通 放 送 本 部 所 管 當 面 懸 案 報 告
More information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More information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2009 年 12 月 頁 15~36 高 雄 師 範 大 學 經 學 研 究 所 15 韓 國 漢 文 學 硏 究 之 最 近 傾 向 김동협 金 東 協 教 授 / Professor Kim Donghyub 摘 要 我 想 對 於 韓 國 漢 文 學 最 初 之 專 門 著 書 是 金 台 俊 之 >. 此 冊 刊 行 於
More information<3630C1FD28BCF6C1A4292E687770>
東 洋 學 第 60 輯 (2015 年 7 月 ) 檀 國 大 學 校 東 洋 學 硏 究 院 程 學 전통에서의 格 物 致 知 窮 理 * 二 程 4대 初 傳 弟 子 들의 해석과 주자 재해석의 의의 43)이 정 환** 국문초록 본 논문은 程 明 道 와 程 伊 川 의 4대 初 傳 弟 子 로 불리우는 呂 大 臨 楊 時 謝 良 佐 游 酢 의 格 物 致 知 窮 理 에 대한
More information모두 언어와 상관없이 시국적 내용이다. 발표매체별 집필 수(K=조선어 N=일본어) 1939년 기사 등 K 文 章 3 三 千 里 2(좌담2포함) 女 性 1 作 品 1 東 亜 日 報 1 N 国 民 新 報 2 소설 K 文 章 2 1940년 기사 등 K 三 千 里 10(좌담4
최정희의 일본어에 의한 창작 활동 -3 편의 일본어 소설에서 보는 시국 대응 형식- 니가타현립대학교 야마다요시코 1 머리말 1931 년 삼천리사에 입사한 최정희는 기자로서 활동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1937 년에 흉가 로 등단했다. 그 동안 습작기에 일본어 소설 1 편을 포함해 소설 15 편을 발표했다. 일본어 소설 그늘 은 역시 습작기에 쓴 가버린 美
More information초대의 글 한국일본언어문화학회 회원여러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오면서 으스스 추위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재직 중인 회원님들께서는 입시철의 업무와 강요받는 대학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신진 회원님들께서는 우리 학계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연구에 박
2015 年 度 秋 季 國 際 學 術 大 會 日 時 : 2015 年 11 月 7 日 ( 土 ) 11:30~20:30 場 所 : 高 麗 大 學 校 國 際 館 主 催 : 韓 國 日 本 言 語 文 化 學 會 主 管 : 韓 國 日 本 言 語 文 化 學 會 高 麗 大 學 校 GLOBAL 日 本 研 究 院 高 麗 大 學 校 BK21PLUS 中 日 言 語 文 化 敎 育
More information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교육연구 제58집 성신여대 교육문제연구소 2013년 12월 30일 2009 改 定 敎 育 課 程 에 따른 中 學 校 漢 文 敎 科 書 의 多 文 化 敎 育 에 對 한 一 見 이돈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Ⅰ. 들어가는 말 Ⅱ. 한문 교과 교육과정 목표에 대한 검토 Ⅲ. 중학교 한문 교과서 분석 목 차 1. 재제 출전의 문제 2.. 교육 내용과 제시 방법의 문제
More informationDBPIA-NURIMEDIA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 1) 명 경 일 ** 1. 머리말 2. 判 付 의 개념과 구성요소 3. 判 付 의 작성절차에 따른 서식의 변화 4. 맺음말 초록: 조선시대 주요 관아가 각자 맡은 업무에 관하여 국왕에게 아뢸 때 사용한 문서를 계 啓 라고 했다. 그리고 啓 에 대한 국왕의 처결을 判 付 라고 했다. 본 논문은 판부의 작성 절차와 서식을
More information중국기본고적 데이타베이스 기능수첩
중국기본고적고 사용설명서 1 로그인( 進 入 ) 1.1시작을 클릭하신후 왼쪽 프로그램에서 AncientBook 을 찾으신후, AncientBookClient 를 클릭하세 요. 1.2 服 務 器 (ip), 用 戶 名 (id), 密 碼 (pw)를 입력 후 진입( 進 入 ) 클릭하세요. 1-3. 아이콘 설명 : 메인페이지 : 최소화 : 화면 닫기 2. 검색( 檢
More information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짧활 康 t합샤훌 示 範 띔 健 所 運 營 응 위한 技 術 支 援 웹 JE - 示 範 保 健 所 模 型 開 發 을 中 心 으로l' 鍾 和 李 順 英 鄭 基 뽑 編 著 韓 國 띔 健 社 會 댐 究 院 머 리 말 美 國 이나 日 本 등 先 進 國 의 경우 이미 1970년대 부터 人 口 의 高 敵 化 와 生 活 樣 式 의 變 化 에 기인한 成 人 病 증가와 이에
More information토픽 31호(2016.3.7).hwp
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More information<B1E8C5C2B0EF5FC0CFBABB28303931313236292E687770>
출 장 보 고 서 Ⅰ. 출장 개요 1. 출장목적 동북아 농업농촌발전 국제심포지엄 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지역의 농업 농촌발전을 위하여, 농업구조문제를 중심으로 한 공통과제를 선정하 여 토론하는 장이며, 공동연구로 발전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 이다. 심포지엄은 중국, 한국, 일본 순으로 매년 순회 개최하며, 심포지엄을 통하 여 학습효과를 높이기
More information7 청보 86. 3. 29( 對 삼성 )~4. 5( 對 빙그레 ) NC 13. 4. 2( 對 롯데 )~4. 10( 對 LG) 팀별 연패 기록 삼 미 18 연패 ( 85. 3. 31~4. 29) 쌍방울 17 연패 ( 99. 8. 25~10. 5) 롯 데 16 연패 ( 0
전반, 타격, 투수, 수비 진기록 전반 시즌 최고 승률 0.706 85 삼성 (110 경기 77승 32패 1 무) 기별 최고 승률 0.741 85 삼성 ( 전기 55경기 40승 14패 1 무) 시즌 최저 승률 0.188 82 삼미 (80 경기 15승 65 패) 기별 최저 승률 0.125 82 삼미 ( 후기 40경기 5승 35 패) 시즌 최다 승리 91 00
More information名門家 명문가 기록관리의 변천 2011년 부천 족보전문 도서관 變遷 序 文 나이 스물을 조금 넘겨 군대 생활을 할 때 우연찮게 족보를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즈음에는 문맹률도 높았고 그래서, 당히 각 가정에서 책을 구경하기란 아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 같지만 국민학교 교과서 정도가 전부이지 동화나 소설이나 잡지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혹여 나름대로
More information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More information<C3CAC1A12031322DC1DFB1B92E687770>
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More information궁궐은 국왕이 국가 업무를 처리하는 공적인 영역과 국왕 및 그의 가족들의 개인적 삶이 이루어지는 사적인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경복궁은 태조 3년(1394) 짓기 시작하여 1년 만에 완성하였다. 궁궐의 전각 배치 및 명칭 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간 배치
역사 속 행정이야기 : 조선의 궁궐 경복궁( 景 福 宮 )에 반영된 행정체계 역사 속 행정이야기 조선의 궁궐 경복궁( 景 福 宮 )에 반영된 행정체계 경복궁은 태조 3년(1394) 짓기 시작하여 1년 만에 완성하였다. 궁궐의 전각 배치와 명칭에는 조선의 건국 주체세력들의 국왕 정치 및 행정 체계에 대한 이상향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들어가는 말 서울은 한국의
More information표1 고려불화의 本 地 : 직조방식 場 160 本 地 3 平 織 A 奈 良 國 博 明 代 1 a 善 導 寺 14 變 化 平 織 B b 鏡 神 社 1310 本 地 畵 幅 奉 安 4 A B 1 2 A 5 Ⅱ. 고려불화의 本 地 : 絹 織 物 의 조직 160 zoom B A
美 術 史 論 壇 第 34 號 2012 6 高 麗 佛 畵 本 地 畵 幅 奉 安 問 題 I. 머리말 朴 銀 卿 東 亞 大 學 校 人 文 科 學 大 學 考 古 美 術 史 學 科 敎 授 九 州 大 學 文 學 博 士 佛 敎 繪 畵 史 1 * 3 : 2010 10 28 Preliminary Study of the Silk Weave Loom Width and Enshrinement
More informationDBPIA-NURIMEDIA
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의 전개와 그 특징 1) 김 태 훈 * 1. 머리말 2. 己 酉 約 條 의 성립과 倭 使 上 京 금지 조치 3. 대일정책상의 異 見 조정과 명분 확보 4. 대일정책의 功 利 的 宥 和 的 기조 5. 맺음말 초록: 본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대일외교의 출발선이었던 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을, 외형적 측면에서 통교틀의 마련, 정책추진의 안정적 기반
More information金 喜 甲 委 員 ; 金 喜 甲 委 員 입니다. 本 委 員 은 地 下 鐵 淸 掃 用 役 繼 續 締 結 要 望 에 대한 請 願 을 하 고자 합니다. 請 願 의 基 本 要 旨 는 1974 年, 즉 21年 前 부터 地 下 鐵 公 社 와 隨 意 契 約 으로 淸 掃 用 役 을
第 81 回 서울特 別 市 議 會 ( 臨 時 會 ) 交 通 委 員 會 會 議 錄 第 4號 서울 特 別 市 議 會 事 務 處 日 時 1995年 10月 27 日 ( 金 ) 午 前 10時 場 所 交 通 委 員 會 會 議 室 議 事 日 程 1. 地 下 鐵 淸 掃 用 役 繼 續 締 結 要 望 請 願 2. 地 下 鐵 勞 使 問 題 解 決 促 求 請 願 3. 地 下 鐵
More information國 統 調 9 0-1 2-1 0 7 南 北 韓 社 會 次 化 力 量 綜 출 評 價 統 院 調 査 硏 究 室 책 을 내 면 서 南 北 韓 이 分 斷 以 後 각기 相 反 된 政 治 理 念 과 政 治. 經 濟 的 制 度 에 토대를 둔 體 制 成 立 으로 相 異 한 社 會 文 化 를 形 成 해온 지도 벌써 4 5 年 이 지 났다. 이 기간동안 南 과 北 의 社 會
More information역대국회의원_PDF변환용.hwp
역대 국회의원 명단 당적표시는 당선당시(총선결과, 재 보궐당선, 의석승계) 소속정당을 나타냄. 제9 10대 국회의원의 당적중 국민회의 표시부분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선출한 국회의원임. 제헌국회 (당적은 당선당시의 당적임)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姜 己 文 산 청 無 所 屬 金 若 水 동 래 朝 鮮 共 和 黨
More information<3429BFC0C1F8BCAE2E687770>
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More information- 72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法 의 실시, 良 役 變 通 의 논의 등 사회 경제적 변화가 추진되는 양상도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2)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체제구축과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은 어 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그것을 둘러싼 논쟁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嶺 南 學 派 의 政 治 哲 學 形 成 과 관련하여- 薛 錫 圭 * 1. 머 리 말 4) 理 氣 分 合 論 2. 理 氣 心 性 論 의 대두와 삶의 4.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정치적 의미 철학 형성 1) 士 林 의 정국주도와 朋 黨 論 의 대두 1) 退 溪 南 冥 의 理 氣 心 性 論 과 2) 理 氣 妙 合
More information<5B323031345DB4EBC7D0BFE4B6F7283037332D30383229B1E2B1B82E687770>
2. 주요 보직자 명단 (2014년 4월 1일 현재) (1) 교무위원 총장 부총장(인사캠) 부총장(자과캠) 부총장(의무) 일반대학원장 학부대학장 유학대학장 문과대학장 법과대학장 사회과학대학장 경제대학장 경영대학장 자연과학대학장 정보통신대학장 공과대학장 약학대학장 사범대학장 생명공학대학장 스포츠과학대학장 의과대학장 예술대학장 기획조정처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산학협력단장
More information8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다. 2) 김종필 오히라 합의에 이르는 청구권 문제의 해결에 관해서는, 한국 측이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한국 측의 요구에 근접한 금액을 일본 정부가 경제 협력 으로서 무상, 유상(정부 차관)의 방식으로 공여하는, 일본 정부가
일한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의 청구권 문제 재고 87 일한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의 청구권 문제 재고 기미야 다다시( 木 宮 正 史 ) 머리말 Ⅰ. 김종필 오히라 합의에 이르기까지 청구권 교섭 Ⅱ. 포스트 김 오히라 합의의 청구권 교섭과 좌절 (6 3사태) Ⅲ. 김 오히라 합의의 재검토 와 그 귀결 로서의 椎 名 李 東 元 합의 결론 머리말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More informationuntitled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 심리록에 수록된 사례를 중심으로 - 김 용 희 * 차 례 Ⅰ. 서 설 Ⅱ. 심리록에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사법행정능력 1. 검험의 기준 2. 검험조서 Ⅲ. 심리록에 나타난 재판의 기본원칙 1. 관용의 원칙 2.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in dubio pro reo)
More information101-03.hwp
人 文 科 學 제101집 2014년 8월 漢 字 문자 그 이상의 상징 체계 Ⅰ. 서론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자의 본격적인 개혁운동은 5.4 白 話 運 動 이 후 지식인들에 의한 표음문자화를 지향하는 漢 字 革 命 論 이다. 근대 알파 벳 문자를 이상적 원형으로 사유하는 서구학계의 깊은 인식론의 영향으로 1954년 中 國 文 字 改 革 委 員 會 성립 이후
More informationDBPIA-NURIMEDIA
119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역사와 법* 60) 조시현**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개 Ⅲ.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법 적용의 의미 -역사와 법의 관계 1. 법적 책임의 전제로서의 사실에 대한 규범적 평가 2. 법을 둘러싼 진실규명의 필요성 3. 연속된 법의식의 회복과 미래 -피해자의 권리와 공동행동원칙의 정립 4. 국가책임의
More informationchr89-BRLeiJS.hwp
書 評 評 史 泠 歌 宋 代 皇 帝 的 疾 病 醫 療 與 政 治 ( 保 定 : 河 北 大 學 出 版 社, 2013 年, 393 頁 ) 作 一 結 合, 使 我 們 可 從 新 的 角 度, 對 歷 史 得 到 更 完 整 的 認 識. 要 研 究 醫 療 史, 首 先 作 者 必 須 具 備 相 關 的 醫 療 背 景. 然 而, 當 代 的 歷 史 研 究 者 多 缺 乏 醫 療
More information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More informationWhat is Critical & Creative Thinking? (Definitions and Elements) CREATIVE Thinkng is the thinking we do when we generate ideas Pose questions Imagine
CRITICAL AND CREATIVE THINKING 審 辯 性 與 創 意 性 思 考 냉철하고 창의적인 생각 CCT What is Critical & Creative Thinking? (Definitions and Elements) CREATIVE Thinkng is the thinking we do when we generate ideas Pose questions
More information<4D6963726F736F667420576F7264202D203330302D325F924591DE88EA8E9E8BE090BF8B818F9181698AD88D918CEA816A>
일본에서 출국하시는 외국인 여러분께 연금에 6 개월이상 가입하였던 분은, 탈퇴일시금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주) 일본과 연금 통산 협정을 체결한 상대국 2007 년 1 월 현재, 독일, 미국, 벨기에. 현재는 프랑스, 캐나다와 발효를 위해 준비중입니다. 또한, 호주, 네덜란드와도 현재 교섭중입 니다. 최신의 협정 체결 상황은 사회보험청의 홈페이지로 확인해
More information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조선의 역서( 曆 書 )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박권수 (충북대학교) 1. 조선의 역서( 曆 書 )와 역법( 曆 法 ) 서운관지( 書 雲 觀 志 ) 와 내각일력( 內 閣 日 曆 ), 일성록( 日 省 錄 ) 등에 의거하건대, 조선시대 역서( 曆 書 )의 간행부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급격 하게 늘어나기 시작해서 정조( 正 祖 ) 22년( 戊 午 年, 1798)에는
More information국악원 논문집 다. 거운고짧-의 統 對 的 年 代 )1댐의 分 類 는 樂 5앞에 年 代 가 明 記 되지 않은 것이 있어서 困 維 하지만, 그 樂 렘에 실린 짧 l111 의 內 容 에 依 히.0,1 相 對 的 年 代 JI\N의 分 쨌는 퍼 能 할 것드로 생 각한다. 年
現 存 거문고 끓의 年 代 考 現 存 거문고 諸 의 年 代 考 李 惠 求... .... 1. 現 存 거운고 語 40 篇 ll. 第 1 群 의 거운고 語 ill. 第 2 群 의 거문고 諸 IV. 第 3 群 의 거운고 諸 V nu nl ^τ::--i'!. 1. 現 存 거문고짧 40 篇 - 現 存 거운고 樂 諸 는 國 立 國 樂 院 發 行
More information<31312D3331BACFC1A4C0CFB1E22E687770>
北 征 日 記 신류 申 瀏 1619~1680 본관 평산 平 山 훈련원부정 삼도수군통제사 등 역임, 1658년 영장 領 將 으로 나선정벌 羅 禪 征 伐 신기석 역, ꡔ북정일기ꡕ, 탐구당, 1980 북정일기 북 정 일 기 北 征 日 記 포사수( 砲 射 手 ) 방포( 放 砲 ) 시재( 試 才 ) ꡔ북정일기ꡕ 무술 효묘 9년 순치15년 4월 初 十 日 晴 往 會 寧
More informationBook2.hwp
古 下 宋 鎭 禹 關 係 資 料 文 集 巨 人 의 숨결 Volume Two: The Writings and Biographical Materials of Mr. Chinwoo Song - 1 - 序 文 우리나라의 近 代 와 現 代 의 역사에 있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업적을 남기신 人 物 들의 생애 와 사상을 담은 傳 記 나 回 顧 錄 이 많이 出 刊 된
More information재입국허가 및 재입국허가로 간주 를 받고 출국하는 분에게 시구정촌에 전출신고를 제출한 후 재입국허가를 받고 출국한 분은 탈퇴일시금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 POINT 1 - 전출신고를 제출하지 않은 경우, 재입국허가기간 내에는 원칙적으로 탈퇴일시금을 청구할 수 없습니
再 入 国 許 可 及 びみなし 再 入 国 許 可 を 受 けて 出 国 する 方 へ 市 区 町 村 に 転 出 届 を 提 出 したうえで 再 入 国 許 可 を 受 けて 出 国 している 方 は 脱 退 一 時 金 を 請 求 す ることができます POINT 1 - 転 出 届 を 提 出 していない 場 合 再 入 国 許 可 期 間 内 は 原 則 として 脱 退 一 時 金 を 請
More information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 염 정 섭** < 국문초록 >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서로 현재 農 書 輯 要 가 남아 있다. 이 농서는 元 代 의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하고 吏 讀 를 붙여 간행한 것이었다. 간행연대가 아직 불확실하지만 15세기 초반 태종대로 추정된다. 고려말
More information<C1A4C3A530302D31302DBFCFBCBABABB2E687770>
低 所 得 偏 父 母 家 族 의 生 活 實 態 와 政 策 課 題 金 美 淑 朴 敏 妌 李 尙 憲 洪 碩 杓 趙 炳 恩 元 永 憙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머 리 말 배우자의 사별, 별거, 이혼 등으로 초래되는 偏 父 母 家 族 은 産 業 化 의 진전에 따른 개인주의 팽배로 이혼이 증가하였고 經 濟 危 機 로 인한 가 족해체가 확산되어 최근 증가 추세에
More informationJCAK 09
JCAK 12-2(통산65호) Homepage http://www.bunka.or.kr 발행일 2012년 4월 5일 발행인 : 박희남 발행처 : 300-716 대전광역시 동구 대학로 62번지 대전대학교 일어일문과 박희남교수 연구실 042-280-2256, 010-8485-5119 사무 국 : 300-150 대전광역시 동 구 정동 31-1 신영빌딩 201호 E-mail
More information20001031jc0inb001a.HWP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1 2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3 4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5 6 (2000
More information<B0EDBCBA20C0B2B4EB20B3F3B0F8B4DCC1F620B9AEC8ADC0E720C1F6C7A5C1B6BBE720BAB8B0EDBCAD28C3DFB0A1BCF6C1A4BABB292E687770>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003. 11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Ⅰ. 調 査 槪 要 1. 調 査 目 的 고성군에서 추진중인 율대 농공단지 확장예정지에 대해 문화재보호법 제74-2와 동법 시행령 제43-2
More information目 次 第 1 篇 1995 年 度 水 産 業 動 向 1 第 1 章 世 界 水 産 業 動 向 3 第 1 節 水 産 物 生 産 3 第 2 節 水 産 物 交 易 5 第 2 章 우리나라 水 産 業 動 向 7 第 1 節 漁 業 構 造 7 第 2 節 漁 家 經 濟 22 第 3 節 水 産 物 生 産 30 第 4 節 水 産 物 輸 出 入 40 第 5 節 水 産 物 需 給
More information<3035B1E8BFECC7FC2E687770>
정신문화연구 2006 겨울호 제29권 제4호(통권 105호) pp. 119~148. 硏 究 論 文 주자학에서 혼백론의 구조와 심성론과의 관계 * 김 우 형 ** 1) Ⅰ. 서론: 귀신론과 혼백론 Ⅱ. 북송시대 주자학에서의 혼백과 귀신 Ⅲ. 주희 혼백론의 구조 Ⅳ. 혼백론에서 심성의 지각론으로 Ⅴ. 결론: 혼백론을 통해 본 주자학의 성격
More information<313620BFE4BDC3C4ABBFCD20BEC6BEDFC4DA2E687770>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년 9월 617 638면 Seoul Law Journal Vol. 53 No. 3 September 2012. pp. 617 638 1) 1920년~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 吉 川 絢 子 Ⅰ. 머리말 이 글에서는 일제시기 조선에서 발간된 법정신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신문은
More informationMicrosoft Word - km20020132.doc
經 營 學 碩 士 學 位 論 文 韓 國 船 舶 管 理 業 의 競 爭 力 提 高 와 國 際 市 場 進 出 方 案 에 關 한 硏 究 - 國 籍 外 航 船 社 의 船 舶 管 理 部 門 을 中 心 으로 - A Study on Competitiveness Analysis and Entries into International Market of Korean Ship Management
More informationsme_beta[1](류상윤).hwp
1930년대 중소 직물업의 발흥과 그 배경 류상윤(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1. 머리말 1960 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고도성장의 원인 또는 배경이 무엇이었는 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그 중에는 해방 후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조선이 경험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각각 자본주의
More information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 2012 000081 1 000 95% 95% 60 5 B 507 070 4651 3730~4
More information박광현발표.hwp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제 5회 전문가초청간담회 경성제국대학 과 재조 일본인 지식 사회 박 광 현 (동국대학교) 연구 동기 - 문학사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누구인가? 조동일 문학통사의 유행, 小 倉, 高 橋 - 경성제대 출신의 조선인? 조윤제(경성대학 출신으로 은폐), 김태준(사회주의자) - 문학연구과에서 연구할 수 있는 테마로서의 한계 - 인물에 관한 연구(일본인
More information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7 논문 5 朝鮮總督府의 臨時資金調整法 운용과 資金統制 박현 연세대학교 1. 머리말 1937 년 7 월에 시작된 中日戰爭은 전쟁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그 식민지인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전시 경제통제가
More information南 北 體 育 會 談 第 5 次 實 務 代 表 接 觸 會 議 錄 $은 幣 K7를구 淸 를9 를3 는r구# 國 土 統 - Q ( 漆 北 對 話 事 務 局 ) < 目 次 l - 般 事 項 l l l l l l l 3 l l l l l l l l l 3 2 會 議 錄 7 附 錄 : 代 表 團 記 者 會 見 9 7-7 - 린 一 般 事 項 가 日 時 :1990
More information¾ÕµÚ
KOREA-JAPAN ECONOMIC ASSOCIATION THE 38TH KOREA-JAPAN & JAPAN-KOREA BUSINESS CONFERENCE 2006. 5. 25 ~ 27 SAPPORO,JAPAN - 目 次 - Ⅰ. 團 長 團 禮 訪 活 動 3 Ⅱ. 共 同 聲 明 5 Ⅲ. 日 程 8 Ⅳ. 議 題 12 Ⅴ. 兩 側 代 表 團 名 單 13 1.
More informationDBPIA-NURIMEDIA
특집: 부상하는 중국과 일본 3 대두하는 중국과 재일 중국인 커뮤니티의 변화 손안석 (위) 요코하마의 중화가 (오른쪽 페이지 위 왼쪽부터) 하코다테의 중화회관, 이케부쿠로의 중국식료품점 시온, 2009년 이케부쿠로에서 있었던 화교 가게에 대한 항의 시위 74 1. 문제제기 수치화할 수 있는 사회로 변모하는 중국 1980년대 이후의 중국경제 발전이 동북아시아와
More information일본-국문편최종.indd
동북아시아 지석묘 6 일본 지석묘 동북아시아 지석묘 6 일본 지석묘 2011년 10월 26일 초판 1쇄 인쇄 2011년 10월 30일 초판 1쇄 발행 총괄 ㅣ 연 웅 기획자문 ㅣ 김성범,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편집교정 ㅣ 이규훈, 정성목, 성윤길, 이은선 원고작성 ㅣ 小 池 史 哲 번역 ㅣ 이은선 사진제공 ㅣ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발행처 디자인 펴낸곳 ㅣ
More information歷史通識-眺望中國
左 傳 期 中 報 告 ~ 故 事 改 寫 ~ 燭 之 武 退 秦 師 系 級 : 中 文 三 學 號 :49111003 姓 名 : 江 俊 億 指 導 老 師 : 蔡 妙 真 教 授 燭 之 武 退 秦 師 ( 上 ) 星 垂 四 野, 薰 風 習 習, 大 地 一 片 寧 靜 ; 但 今 夜 鄭 國 的 國 都 - 新 鄭 似 乎 很 不 平 靜, 那 是 因 為 秦 晉 兩 大 強 國 的
More information빈면
j 발ζ틸록번호 1 1 4 0 % 0 2 0 - m O O 4 4 - 이 연 구 보 고 2 0 0 2-0 1 I R 애싱 -대도시 징탄성매때지역 증싱으로 g 김승뀐 조애저 김유곁 손승영 한혀 결 김성아 ~잉 z -ι7 / v / ι ζ a Tι r 鉉 ; ιo t n ι a 톨 상r X a 흥 낀 ~ ~ r - * 서 7 A * r - 엉 뇨려 - r M W
More information전체.indb
동북아역사논총 51호 2016. 3 차 례 논문 김규운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7 정순일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55 김득중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3 조윤수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More information#39-0 머리말외.indd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39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이승일 김대호 정병욱 문영주 정태헌 허영란 김민영 지음 발간사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동북아 세 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독자의 문화를 꽃피움과 동시에 여러 면에서 문화를 공유해왔습니다. 한자라는
More information<C1A4BDC537355F30365FDFEFD9A4EBECC0C720BBFDBED6BFCD20B1D4C0E5B0A220C8B0B5BF5FB1E8B9AEBDC42E485750>
정신문화연구 1999 여름호 제22권 제2호(통권 75호) pp. 151~184 硏 究 論 文 徐 命 膺 의 생애와 규장각 활동 김 문 식 1)* Ⅰ 머 리 말 Ⅱ 생 애 Ⅲ 家 系 와 교유 인물 Ⅳ 奎 章 閣 기구의 정비 Ⅴ 奎 章 閣 의 국가적 편찬 사업 Ⅵ 맺 음 말 Ⅰ. 머 리 말 保 晩 齋 徐 命 膺 ~ 은 세기 소론계의 名 家 인 達 城 徐 氏 의
More information논총51-06_이종국.indd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09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이종국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Ⅰ. 머리말 그동안 한일관계는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관련 망언 으로 양국이 대립하는 상 황에 자주 직면하였다. 최근 역사인식 문제 1) 를 둘러싸고, 일본의 우파정치인과 투고: 2015년 10월 16일, 심사 완료: 2016년 2월
More information<B9FDBBE7C7D0BFACB1B820353028BABBB9AE2C2032303130292E687770>
33 已 行 과 未 行 의 의미 -조선의 를 중심으로- 김영석* 79) 목 차 Ⅰ. 머리말 Ⅱ. «대명률»의 已 行 과 未 行 1. 已 行 未 行 에 관한 규정 2. 已 行 과 未 行 의 의미 3. 未 行 의 처벌 Ⅲ. 조선의 法 典 類 에서의 已 行 과 未 行 1. 三 省 交 坐 推 鞫 의 대상범죄 2. «속대전»과 «수교집록»의 비교 Ⅳ. 照 律 과 «대명률»
More informationⅠ. 중국 고급 냉장고 1) 시장의 성장 - 2009년 중국 가전하향( 家 電 下 鄕 ) 정책에 힘입어 보급형 냉장고 매출이 크게 증가했고, 동시에 고급 냉장고 시장도 빠르게 성장 - 시장 선점을 위해 (, )은 고급 냉장고 생산기지 건설을 추진 중이고, (, )는 2
2009. 12. 25. (제09-46호) Ⅰ. 중국 고급 냉장고 시장의 성장 (산업팀 許 李 彦 연구원) Ⅱ. 중국의 반독점법 과 다국적기업의 글로벌 M&A (전략팀 張 沈 偉 연구원) Ⅲ. 主 要 經 濟 統 計 - 1 - Ⅰ. 중국 고급 냉장고 1) 시장의 성장 - 2009년 중국 가전하향( 家 電 下 鄕 ) 정책에 힘입어 보급형 냉장고 매출이 크게 증가했고,
More information<4D6963726F736F667420576F7264202D20B1E2C1B6B0ADBFACB9AE28B1B9B9AE29>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한국학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성무 1. 국제정세의 변화와 한국학 한국학은 한국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적 연구를 말한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학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협력 경쟁하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현대의 한국학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한국학이 되어야 한다. 20 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사적인 전환기가
More information<BFACB1B82D30352DBFC0C7F6BCF62DC8B8B3B2C0DA20B1E2C0E720A1AEB0A5BCAEA1AFB0FA20A1AEBFE4BCF6A1AFB8A62D31C2F7BCF6C1A42E687770>
硏 究 論 文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오현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통합과정 수료, 한국고대사 전공 98kid2000@hanmail.net I. 머리말 II. 갈석 과 요수 조문의 사료 맥락 검토 III. 갈석 과 요수 의 위치 고증 IV.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 V. 맺음말 I. 머리말 근대사학 도입
More information<C3E2B7C25F31343330C8A320B0F8BAB85F32303133303831352E687770>
법원공보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제1430호 법원행정처 2 제 1430호 법 원 공 보 2013년 8월 15일(목요일) 목 차 내 규 1147 법관 및 법원공무원 국내위탁교육훈련 내규 신법령 목록 1157 인사 1163 공지사항 1173 1146 2013년 8월 15일(목요일) 법 원 공 보 제 1430호 3 내 규 법관 및 법원공무원 국내위탁교육훈련
More information1
NEWS LETTER : 300-150 31-1 201 jbunka@hanmail.net : 2 한국일본문화학회 회 장 인 사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창밖에는 노란 개나리. 그리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화사하게 핀 벚꽃들이 바람결에 꽃잎을 날리며 봄의 향연이 한창입니다. 여러 회원님들께서는
More information2015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2015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국제학술행사 한일관계의 과거를 넘어 미래로 일 시 : 2015. 06. 17 ~ 06. 19 장 소 : 제주도 하얏트리젠시호텔 - 주 최 - 동북아역사재단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한국국제정치학회 현대일본학회 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 도쿄대 한국학연구부문 일본국제정치학회 현대한국조선학회 - 후 원 - 대한민국 외교부 일본 외무성
More information<3120B1E8B1D9BFEC2D31C2F7C6EDC1FD2830292DB1B3C1A4BFCFB7E12831707E292E687770>
Perspectives J of Oriental Neuropsychiatry 2012:23(1):1-15 http://dx.doi.org/10.7231/jon.2012.23.1.001 심신치유를 위한 불교의학, 사상의학, 한의학에서의 心 의 연구 김근우, 박성식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신경정신과 교실,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체질과 교실 The Study on
More information620-001768 AMR-0216-A改字型.indd
Contents 內 容 목차 English Setup, 6 Features and troubleshooting, 10 繁 體 中 文 設 定,6 功 能 與 疑 難 排 解,22 6 34 한국어 설치, 6 기능 및 문제 해결, 46 Logitech TM Wireless Desktop MK300 User s guide Logitech TM Wireless Desktop
More information편집완료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1) 李 宣 坭 (서울여대) Ⅰ. 序 言 Ⅱ. 臺 灣 : 황국의 백성 Ⅲ. 滿 州 : 동양 문명화 구현의 장 Ⅳ. 支 那 : 야만성 그러나 노제국 Ⅴ. 유교: 가족주의와 혁명 Ⅵ. 맺음말 Ⅰ.머리말 본 논문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여성언론매체 중 하나였던 婦 女 新 聞 의 중국 관련 담론을 분석하고자
More information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學 術 院 소식 3월 임원회 개최 사위원회는 학술원 회원과 교수 등 관련 3월 임원회가 3월 4일(금) 오후 2시 학술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여 4월 11일(월) 오 원 중회의실에서 임원 15명 전원이 참석한 후 2시에 제1차 심사위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Monthly Newsletter from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Republic of Korea 발행인:대한민국학술원 회장 / 우 137-044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산94-4 / http://www.nas.go.kr / XXXXX / F XXXXX / 편집:학술진흥과 第 76 次
More information時調의 형성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hwp
時 調 의 형성과 새로운 시대의 開 幕 윤 석 산(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고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이 시조들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방원(훗날 태종)의 하여가( 何 如 歌
More information目 次 1. 國 家 體 制 2. 確 認 事 項 3. 檀 君 ( 高 離 國 )의 고대사와 중세사 4. 檀 君 (코리아)와 씨족사 5. 檀 君 (코리아)와 李 氏 (대한)의 이념과 헌법 차이점 6. 국제연합결의문을 통해 본 國 家 호칭과 心 體 制 명칭 7. 선거와 국가호
민원내용 1. 國 家 呼 稱 : 국민권익위원회 답변내용 (신청번호 1AA-1209-091463) 1) 코리아 국호 - 를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코리아 가 되고, 2) 대한민국 국호 - 대한민국 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Daehanminguk 이 됩니다. 참고 : KORE( 高 麗, 고려, 고리) + A( 國, area) = 코리아 憲 法
More information<B1B9BFAAC3D1BCAD2DC6EDC1FD2839292D36C2F7BCF6C1A4C0CEBCE2BABB28BFACB5CE2DC0CEB8ED292E687770>
인 명 497 색 인 인 명 (ㄱ) 강경중 姜 敬 重 182, 193 강덕상 姜 德 相 137 강만철 姜 萬 哲 149, 159 강만희 姜 萬 熙 135 강무형 姜 懋 馨 134 강문선 姜 門 善 88 강병학 姜 丙 學 390 강봉상 姜 奉 相 137 강봉진 姜 奉 辰 150 강석희 姜 奭 熙 133, 139, 158, 225 강선보 姜 善 甫 128, 129,
More information<30342DB9E6BAB4BCB134392D312E687770>
한국학연구 49(2014.6.30), pp.103-128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1)방병선* 국문초록 본 논문은 1870년대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 왕실용 자기 생산을 담 당했던 사옹원 분원의 변천 과정과 원인, 이와 관련된 장인과 관리, 제작 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연구 방법은 문헌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하였 으며
More informationGuest Speakers 講 師 ; 斗 山 東 亜 本 部 長 鄭 国 海 氏 国 際 印 刷 大 学 校 木 下 堯 博 강사: 두산동아(주) 영업본부장 정국해 국제 인쇄대학교 기노시타 아키히로 2011-9-17 IGU AK 2
日 韓 印 刷 文 化 シンポジュウム 한일 인쇄 문화 심포지엄 日 韓 印 刷 文 化 史 2011 年 9 月 17 日 2011년 9월17일 国 際 印 刷 大 学 校 木 下 堯 博 국제인쇄대학교 기노시타 아키히로 2011-9-17 IGU AK 1 Guest Speakers 講 師 ; 斗 山 東 亜 本 部 長 鄭 国 海 氏 国 際 印 刷 大 学 校 木 下 堯 博 강사:
More informationDBPIA-NURIMEDIA
104 韓 國 禪 學 제36호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 김상일(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Ⅱ 목 차 Ⅱ Ⅰ. 시작하는 말 Ⅱ.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와 불교 관련 증서류 산문 Ⅲ. 불교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유교 윤리 권면 Ⅳ. 유불 교유론 Ⅴ. 유불 조화론 1. 김수온: 唯 心 一 理 的 儒 佛 融 通 論 2. 성 현:
More informationuntitled
용역보고서 2000-22 社 會 脆 弱 階 層 의 健 康 增 進 을 위한 푸드뱅크 事 業 의 活 性 化 方 案 (The Food Bank Activation Programs for Health Promotion of Lower Income Classes) 鄭 基 惠 李 誠 國 金 貞 根 金 聖 卿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保 健 福 祉 部 머 리 말
More information<C1F6C7A5C1B6BBE7BAB8B0EDBCAD3134C1FD2E687770>
( 財 ) 東 亞 文 化 硏 究 院 地 表 調 査 報 告 第 14 輯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 구간내 文 化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 0 0 4. 10 目 次 Ⅰ 7. 조사개요 Ⅱ. 역사 ㆍ 고고분야의 조사 8 1. 김해시의 자연환경 1. 8 2. 김해의 역사적 환경 2. 10 3. 조사대상지역 개관 3. 28 Ⅲ 29. 현지조사 및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