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 심리록에 수록된 사례를 중심으로 - 김 용 희 * 차 례 Ⅰ. 서 설 Ⅱ. 심리록에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사법행정능력 1. 검험의 기준 2. 검험조서 Ⅲ. 심리록에 나타난 재판의 기본원칙 1. 관용의 원칙 2.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in dubio pro reo) 3. 신법 우선의 원칙 4. 우발적 범행과 악의적 범행의 구별 원칙 5. 판결을 통한 윤리교화의 원칙 Ⅳ. 결 어 Ⅰ. 서 설 심리록( 審 理 錄 ) 1) 은 정조( 正 祖 )가 대리청정하던 때인 1775(영조 51)~1799년(정조 23)까 지의 중앙과 지방의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에 대하여 처결과정 2) 에서 논의된 다양한 의견 을 토대로 형벌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죄인에 대한 법 적용을 구체화한 후 국왕에게 보 * 충청대학 경찰행정 전임강사(법학박사) 1) 審 理 錄 은 총5종이 존재한다. 서울대학교 奎 章 閣 소장의 筆 寫 本 이 3종이고 弘 齋 全 書 에 수록된 印 刷 本, 그리고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에 소장되어 있는 藏 書 閣 筆 寫 本 이 있다. 2) 처결은 대신과 법을 담당하는 관리, 그리고 三 司 의 官 吏 들이 모두 참여하여 각자의 의견을 제시함으 로써 공정한 법 적용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正 祖 實 錄 46 券, 正 祖 21 年 5 月 18 日 ). 93
치안정책연구 고하면, 그에 대해서 국왕의 최종 판결을 모아 정리한 판례집이다 3). 심리록에 수록된 사건 대부분이 살옥사건( 殺 獄 事 件 )에 대한 판결로 한정되어 있지만 정조 제위 25년간의 판례가 거의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왕과 형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법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당시에 심리록의 편찬은 단순하게 살옥사건에 관한 판결을 모아 정리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형벌집행의 실무자들로 하여금 공정한 형사재판을 통해 가해자나 피해자가 다 같이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형조( 刑 曹 ) 낭관( 郎 官 )들에 대한 지시를 살펴보면 심리( 審 理 )하는 일로 인하여 제도( 諸 道 )의 문안을 녹계( 錄 啓 )하게 되면서 그들로 하여금 책자로 베껴내게 하여, 한 건 은 을람( 乙 覽 )에 대비하게 하고 한 건은 본사( 本 司 )에 간직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 로 자주자주 펴보고 상고하여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서 살리기를 구하려는 것이니, 대 저 낭관은 모두 앞으로 지방장관이 될 사람이니 또한 그들의 의견과 식해( 識 解 )가 어떠 한가를 관찰하고 싶다. 원문안을 계하( 啓 下 )하는 대로 먼저 낭관으로 하여금 의견을 갖 추어 꼬리에다 붙인 뒤에 세 명의 당상관이 제도( 諸 道 )를 나누어 관장하고 각각 의견을 갖추어 들이도록 하되 만일 성옥( 成 獄 )할 때의 도백( 道 伯 )과 상의( 商 議 )할 곳이 있으면 전 도백과 함께 서계( 書 啓 )하도록 하라. 4) 고 하여 형조의 낭관들이 자주 심리문안을 살 펴보고 상고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조는 형조의 낭관은 앞으로 지방장관이 될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형벌을 어떻 게 처리하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심리의 원문안에 형조 낭관들의 의견을 첨 3) 死 罪 에 해당하는 사건은 啓 覆 節 次 에 따라 심리되었다. 啓 覆 이란 死 罪 에 해당하는 모든 犯 罪 者 에 대 하여는 최종적으로 王 이 審 理 하는 節 次 로서, 死 人 三 覆 制 度 가 法 定 化 되어 있기 때문에 初 覆 과 三 覆 은 王 의 面 前 에서 행해졌고 再 覆 은 刑 曹 에서 행하여 졌다. 世 宗 3년(1421)의 下 敎 에 의하면 무릇 死 罪 를 반드시 三 覆 하고 아뢰게 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인데, 刑 曹 에서 再 覆 이후에 는 다시 原 券 을 상고하지 아니하니, 法 을 세운 뜻에 어긋남이 있다. 이제부터는 아뢸때마다 모름지기 原 券 을 憑 考 하여 아뢰게 할 것이다. 라고 하여 모든 관련서류를 三 覆 시 제출토록하고 있다. 啓 覆 은 冬 至 전에 承 政 院 에서 稟 奏 하여 王 의 裁 可 를 받아 擇 日 하여 거행하였다. 擇 日 은 9월부터 冬 至 전에 정하여야 하며, 나라에 흉년이 들거나 三 政 丞 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王 에게 裁 可 를 稟 奏 할 수 없으며, 이러한 사유를 보고하여야 했다. 審 理 에는 六 曹 의 長 官, 漢 城 府 의 堂 上 官, 兩 司 ( 司 憲 府 司 諫 院 )의 官 員 은 반드시 참석하여야 하며, 六 曹 의 長 官 이 有 故 시에는 次 官 이 대신 참석할 수 있었다. 4) 正 祖 實 錄 17 券, 正 祖 8 年 3 月 27 日. 94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부하도록 명령하였다. 심리록 편찬과 관련된 이러한 의도와 목적은 심리록 편찬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 했던 홍인호( 洪 仁 浩 )의 건의에서도 들어나고 있다. 그는 심리록을 형조, 한성부, 그리고 지방의 사유수도( 四 留 守 都 )와 팔도 등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각 관청에 배포하여 거행하 도록 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5) 심리록 편찬에 이러한 의도를 보이는 것은 형사사건에 있어서 공정한 재판의 전제가 되는 정확한 진상의 파악은 사법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실 무관리들의 자질과 소양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이 강했던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인한 것 으로 보인다. 당시의 지방수령은 태형( 笞 刑 )이하의 형사사건에 관하여는 관할권 6) 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형이상에 해당하는 사건에 관하여도 1차적 수사권은 해당지역 수령이 행사하였기 때문에 지방관리들에게 사법지식의 습득은 필수적이었다. 심리록의 편찬은 영조( 英 祖 )때부터 실시되어오던 어제편찬사업( 御 製 編 纂 事 業 ) 7) 의 일환 으로 추진되었으나, 정치 운영의 주체인 정조 자신의 정책이나 정치운영에 관한 모든 것 5) 등사한 책자에다 原 案 의 개략을 첨부하고 모든 供 招 의 긴요한 대목이나 奏 讞 가운데 중요한 말로서 상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뽑아내고 초록하여 안건마다 細 註 를 달며, 안건마다 그 밑에 특별히 判 付 를 게시하여 베껴 교정한 후 生 生 字 로 인출하여 中 央 의 刑 曹 와 漢 城 府, 地 方 의 四 都 와 八 道 에 한 질씩 나누어주고 각기 이를 준수하여 거행하도록 한다면 王 命 을 중히 여기는 법도가 될 뿐만 아니라 모범이 되는 준칙의 본의를 드러내 보이기에 부합됩니다( 審 理 錄 啓,( 國 譯 審 理 錄 1, 民 族 文 化 推 進 會, 1999, 4-5면.)). 6) 朝 鮮 時 代 에도 事 件 의 輕 重 에 따라서 事 件 을 審 理 할 수 있는 機 關 이 달랐다. 지방의 수령과 각 衙 門 에 서는 笞 刑 이하에 해당하는 犯 罪 에 대하여만 管 轄 權 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 이상의 犯 罪 에 관하여는 搜 査 權 만을 가지고 있었다. 笞 刑 이란 五 刑 중 가장 가벼운 刑 罰 로 경미한 犯 罪 에 대한 卽 決 處 分 의 성 격을 띠고 있었다. 流 刑 이하에 해당하는 犯 罪 에 관하여는 중앙에서는 刑 曹 1)가, 지방에서는 開 城 府 및 觀 察 使 가 管 轄 權 을 행사하였다. 觀 察 使 밑에는 중앙에서 파견하는 都 事 判 官 中 軍 檢 律 등의 官 員 이 있었으며, 檢 律 은 刑 曹 에서 추천 임명되는 官 員 으로서 法 律 의 解 釋 과 適 用 및 行 刑 에 관한 事 務 를 전담했다. 또한 刑 曹 는 死 罪 에 해당하는 경우에도 管 轄 權 을 행사하였으나, 王 이 최종 裁 判 權 을 행사하였으므로 專 屬 管 轄 權 을 행사하였다고 볼 수는 없고 審 理 를 주관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만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死 罪 에 해당하는 모든 사건에 王 의 審 理 를 필요로 했으므로 대부분의 사건은 書 面 審 理 만으로 종결되 었으며,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만 鞫 을 설치하고 事 實 審 理 를 다시 하였다. 7) 御 製 을 10년에 한 번씩 編 纂 하는 일은 英 祖 때에 결정된 바이고 正 祖 도 즉위 직후 奎 章 閣 을 설치하여 그 곳에서 자신의 御 製 를 編 纂 하게 하였다. 95
치안정책연구 들을 상세히 남기고자 했던, 정조의 개인적인 의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정조 의 의지는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일득록( 日 得 錄 ) 8) 에 잘 드러나 있다. 정조는 그의 문집에서 관직의 출척( 黜 陟 ), 형옥의 판결 등을 모두 상세히 기록하고 다양한 활동과 관련된 자신의 말과 행동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본보기로 삼고자 하는 뜻을 피력하고 있다. 9) 심리록은 이러한 정조의 개인적인 의지와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려 했던 의지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판례집이다. 정조 11년 8월 29일에 규장각( 奎 章 閣 )에서 정조에게 바친 어제( 御 製 ) 중 심리록 10권 이 포함되어 있으나, 10) 이 때 편찬된 심리록은 사형죄에 대하여 각 도에서 올린 보고서 와 판부( 判 付 )를 초록한 매우 간략한 책으로, 문안이 너무 간략하고 빠진 부분이 많기 때문에 옥사의 전말을 알기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심리록 편찬에 관여하였던 홍인호는 심리록의 수정보완을 요구하는 건 의 11) 를 올리고, 이러한 그의 건의가 받아 들여져 정조 재위 중에 있었던 2차 어제편찬 8) 총 18권. 문학 5권, 政 事 5권, 인물 3권, 訓 語 5권 등으로 구성되었다. 奎 章 閣 直 提 學 鄭 志 儉 이 국왕 의 언행을 기록으로 남겨 뒷날 반성의 자료로 삼자고 건의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史 臣 의 역할 도 겸한 奎 章 閣 各 臣 이 각자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 각 편은 대체로 시대순으로 배열했으며, 국가 의 제반 행사에서 정조가 대신 각료 유생과 나눈 대화와 傳 敎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정 조의 문장론과 經 史 에 관한 인식, 右 文 政 治 와 탕평책의 성격, 조선과 중국의 역대 인물에 대한 품평, 君 主 와 士 大 夫 의 역할에 대한 반성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일차자료로서, 全 文 이 正 祖 의 문집인 弘 齋 全 書 券 161-178면에 포함되어 있다. 9) 무릇 임금의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후세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다. 국사는 엄하고도 비밀스러워 엿볼 수 없더라도 簡 策 의 기록을 만들어 두어 한가한 틈에 상고해 볼 수 있도록 한다면 옛 사람이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하였던 뜻에 있어 필시 조금이라도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다. 관직 의 黜 陟, 刑 獄 의 판결 등의 일 같은 것을 모두 상세히 기록하고 경연을 정지하였는지의 여부, 臺 啓 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하는 것이 비록 응당 행할 일에 속하더라도 또한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 弘 齋 全 書 166, 日 得 錄 6, 政 事 待 敎, 계묘년 記 錄 ). 10) 奎 章 閣 에서 御 製 春 邸 錄 4권, 詩 1권, 序 記 跋 銘 을 합한 1권, 碑 碑 銘 行 錄 行 狀 雜 著 를 합한 1권, 祭 文 2권, 策 問 2권, 講 義 26권, 綸 音 3권, 傳 敎 3권, 備 忘 記 1권, 批 答 3권, 判 付 1권, 手 書 封 書 諭 書 를 합한 1권, 敦 諭 問 議 를 합한 1권, 審 理 錄 10권, 모두 60권을 編 次 하여 바쳤다. ( 正 祖 實 錄 24 券, 正 祖 11 年 8 月 29 日 ). 11) 承 旨 洪 仁 浩 는 병신년 이후로 내려진 審 理 錄 啓 에 대한 判 付 를 죽 초록하여 책으로 만들어서 乙 覽 에 대비해왔습니다. 그런데 臣 이 자주 該 房 의 승지로 있었던 때문에 명을 받들어 수정한 것이 지금 까지 15년 동안에 걸쳐 18권에 1천 3백여 案 이 모아졌습니다. 그런데 다만 그 文 案 이 너무 간략하 게 산삭되어 獄 情 의 본말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에다 原 案 의 개략을 첨부하고, 모든 供 招 의 중요한 대목이나 奏 讞 가운데 중요한 말로서 憑 考 하지 않을 수 없는 96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작업에서는 심리록에 대한 수정보완 작업이 이루어 졌다. 또한 2차 어제편찬 작업에서는 심리록 편찬과 관련하여, 무릇 심리한 옥안( 獄 案 )에 대해서 해조( 該 曹 )에 판하( 判 下 ) 한 것은 해조의 심리낭청으로 하여금 단초( 單 抄 )를 주관하게 해서 심리록을 수정할 바탕을 삼게 하고, 또한 초본 2건을 내각 및 정원에 나누어 보내 일성록과 일기에 기재 하도록 할 것을 하나의 제도로 정하였다. 12) 이러한 작업을 거쳐 정조 23년에 규장각에서는 어제를 4집으로 나누고 30목으로 분류 하여 정리하며 심리록 25편을 정조에게 바쳤다. 13) 그 후 심리록의 보완 작업은 1편이 추 가되어 순조( 純 祖 )때에 총 26편으로 완장( 完 粧 )되었다. 14) 데에 관계된 것들을 다 뽑아내서 대략 초하여 案 마다 細 註 를 달며, 안마다 그 밑에 삼가 판부를 힘 써 정밀하고 자상하게 기록하도록 하되, 抄 案 작업은 유사에게 맡기고 판부는 내각으로 하여금 다시 교정을 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을 다 마친 뒤에는 이를 호남 영남의 감영으로 내려 보내 서 數 本 을 淨 書 하게 했다가, 그들이 이를 올려 보내기를 기다려서 그대로 活 字 를 사용하여 간행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차후로는 내려진 판부가 한 卷 이 차는 대로 즉시 이 예에 의거해서 계속 간행하 여, 안으로는 형조와 한성부, 밖으로는 四 都 와 八 道 에 각각 1 件 씩을 頒 下 해서 각기 이대로 준수하여 봉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사체가 중대하니, 묘당 및 각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 正 祖 實 錄 48 券, 正 祖 22 年 5 月 22 日 ). 12) 承 旨 洪 義 浩 啓 言 凡 審 理 之 判 下 該 曹 者, 令 該 曹 審 理 郞 廳, 主 管 單 抄, 以 爲 審 理 錄 修 正 之 地, 而 亦 以 草 本 二 件, 分 送 于 內 閣 及 政 院, 俾 爲 載 錄 於 日 省 錄 日 記, 定 式 施 行. 從. ( 正 祖 實 錄 51 券, 正 祖 23 年 5 月 22 日 ). 13) 奎 章 閣, 進 御 製 繕 寫 本. 御 製 自 春 邸 時, 至 己 未 年 分, 爲 四 集, 其 目 爲 三 十. 詩 五 編, 書 一 編, 序 引 四 編, 記 三 編, 碑 三 編, 誌 一 編, 行 錄 一 編, 行 狀 一 編, 祭 文 八 編, 綸 音 四 編, 敎 七 編, 敦 諭 三 編, 諭 書 三 編, 封 書 三 編, 批 五 編, 判 三 編, 策 問 五 編, 說 一 編, 論 一 編, 贊 二 編, 箴 一 編, 銘 四 編, 頌 一 編, 雜 著 七 編, 講 義 五 十 六 編, 類 義 評 例 二 編, 故 寔 六 編, 審 理 錄 二 十 五 編, 日 得 錄 十 九 編, 群 書 標 記 五 編, 凡 一 百 九 十 一 編. ( 正 祖 實 錄 52 券, 正 祖 23 年 12 月 21 日 ). 14) 癸 丑 / 奎 章 閣, 以 先 朝 御 製, 春 邸 錄 四 編, 詩 三 編, 序 引 六 編, 記 一 編, 碑 一 編, 誌 一 編, 行 錄 一 編, 行 狀 一 編, 祭 文 七 編, 綸 音 四 編, 敎 七 編, 敦 諭 一 編, 諭 書 一 編, 封 書 三 編, 批 五 編, 判 一 編, 策 問 五 編, 說 贊 銘 合 一 編, 雜 著 十 編, 講 義 五 十 六 編, 鄒 書 春 記 二 編, 魯 論 夏 箋 四 編, 曾 傳 秋 錄 一 編, 類 義 評 列 二 編, 故 寔 六 編, 審 理 錄 二 十 六 編, 日 得 錄 十 八 編, 群 書 標 記 六 編, 凡 一 百 八 十 四 編, 完 粧 爲 一 百 冊, 進 獻. 命 校 準 閣 臣 以 下, 施 賞 有 差. ( 純 祖 實 錄 3 券, 純 祖 1 年 12 月 11 日 ). 97
치안정책연구 Ⅱ. 심리록에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사법행정능력 1. 검험의 기준 조선의 검험기술은 무원록( 無 寃 錄 )이라는 명대( 明 代 )의 검시관의 안내서에 정해진 관 례를 따랐다. 이 책은 상처의 구조 모양 색깔을 비교하고 상처의 기원을 결정하기 위해 또 피해자의 사망과의 관계를 결정하기 위한 상처의 비교에 수세기 동안 이용되며 발전 되어온 상세한 방법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 교본은 세종때 조선에서 이용되기 시작하여 왕명에 의해 최치운( 崔 致 雲 )이 주석서를 마련했다. 1435년 의정부와 예조의 제안 검험을 행할 때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것도 인간 의 생명과 관계되는 것이다. 서울이나 지방의 관리들이 검험를 할 때 총명하지 못하면 불만이 생겨난다. 우리의 소견으로는 무원록에 검시를 행하는 규칙과 절차가 상세히 규 정되어 있으므로 이 책을 서리나 법률관을 선발하는 시험의 과목으로 할 것을 요청한다 이 있은 후 경국대전이 편찬된 이후로 무원록에 관한 지식은 법률전문가를 선발하는 시 험에 공식적으로 요구되기에 이르렀으며, 15세기의 검시관 교본의 공식적 이용과 중앙 정부의 법률전문가들의 성장이 지방차원의 무능 비행 혼란과 같은 조선의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법률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을 가져오지는 못하였고, 각지에서 사용하는 치 수가 서로 다른 보고서들이 계속 답지하여 검험보고서를 다루는 표준화된 양식과 절차 의 편찬이 요구되어 체계화되기에 이르렀다. 조사를 위한 검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신체에 대한 물리적 조사인 검험과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 대한 질문으로, 이단계에서 살인사건에 관한 사실상 모든 실질적 자 료를 모아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많은 절차적 안전장치가 있었다. 검험이 명령되면 부속관리(지방에서는 수령)는, 중국의 검시관 교범인 무원록 의 상세 한 절차 15) 에 따라 검험이 행해지는 장소에 의학과 법률의 전문가들과 더불어 참석하여 15) 자세한 것은 徐 壹 敎, 朝 鮮 王 朝 의 刑 事 制 度 의 硏 究, (서울: 博 英 社, 1974), 397-415면 參 照 ; 同, 沈 羲 基, 殺 獄 에 관한 硏 究 (1), 法 學 硏 究 ( 釜 山 : 釜 山 大 學 校, 第 25 券 1 號 ), 243-261면 參 照. 98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야 했다 16). 검시가 시작되기 전에 사망자들의 친척들과 가장, 목격자들로 부터 증언을 청취해야 한다. 질문은 사건의 실행상황이나 피의자와 피해자 사이에 원한 관계의 존재 여부 사용한 무기의 크기나 성질 등 주제에 적당한 것이어야 했다. 검험이 끝나면 두번째 증언을 청취하여 첫 번째 증언의 기록과 검시에 밝혀진 증거와 상치되는 것을 없는가를 비교했다. 이러한 증언들 사이나 또는 어떤 사람의 앞, 뒤의 말 이 서로 모순되면 좀 더 질문하거나 상반되는 증인들을 대질시켜 다시 검사했다. 필요하 면 세 번, 네번씩 증언하게 했다. 교차조사가 끝나면 사망의 참된 원인으로 판단되고 검험에 관계된 모든 서류는 봉인 되어진다. 사망으로 이끈 상황의 요약적 진술과 사망의 참원인을 을 함부로 변경하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하여 작은 글자체로 쓰고 검관의 의견과 추론을 포함하는 추록을 더한 후에 모든 기록을 형조로 보냈다. 지방에서는 서류를 관찰사에게 보내는 것 외에는 모든 절차가 동일했다. 이러한 서류 를 올리는 것과 함께 두번째 검험를 요구했다. 이는 서울에서는 한성부의 하급관리들에 의해서 지방에서는 이웃의 지방관에 의해서 지도되는 다른 조사관들에 의해서 행해졌다. 이관된 인근 수령의 책임 고정된 명령에 의한 것이다. 각 고을 수령은 그 고을의 수령이 없을 때 인근 고을을 선발해야 할 잠정적 책임이 있었다. 그러므로 각 수령들은 그 고을을 위한 선정된 대체관리가 되었다. 그래서 그 고 을에서 일어난 사건의 2심을 행하는 책임이 그에게 있었다. 상황이 그에게 그 직무를 수행치 못하게 하면 2심 업무를 위해 다른 고을 수령을 선정하였다. 만약 모든 고을 수 령들에게 이 직무를 감당할 수 없는 충분한 이유 가 있게 되면 마지막 수단으로 다른 도 의 수령이나 원래의 군보다 상위의 수령을 선정할 수 있었다. 이는 1심의 결과를 점검 하는 데 있어 조사와 평가에서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16) 肅 宗 18 年 (1692) 殺 獄 의 가장 긴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檢 覈 만한 것이 없다. 하나라도 명백하 지 못함이 있으면 死 生 이 달렸으니, 자세히 살피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간혹 外 方 守 令 이 친히 살 피기를 싫어하여 下 吏 에게 맡기니, 인연해 用 奸 하여 마음대로 보태고 줄이므로 獄 事 가 遷 就 되어 수 십년이 되도록 未 決 로 있어 瘦 死 한 者 가 있으니, 이것이 원망과 억울함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내가 몹시 이를 惻 然 해 한다. 該 曹 로 하여금 諸 道 에 알려서 이제부터는 해당관원이 반드시 친히 開 檢 하 되, 일체 無 寃 錄 에 의하여 혹시라도 밝히기 어렵고 근심이 없도록 하라. 고 下 敎 하고 있다( 國 譯 增 補 文 獻 備 考 133 券, 詳 讞, 271면). 99
치안정책연구 검험보고서를 검토하여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좀더 검험이 필요한 가를 결정 하는 것은 형조나 관찰사의 책임이었다. 만약 1심의 두 검험조서에 모순이 있으며 제 3, 제4의 검험를 명할 수 있었다 17). 2. 검험조서 지방정부가 작성하여 보고하는 검험조서는 재판절차에 있어서 진실을 규명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검험조서를 작성하는 지방관리들의 자질과 능 력에 대해서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단적인 예는 당시 살인사건에 있어서 검시관의 교본인 무원록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하 급관리 임용시험에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정부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지방정부의 기술적 능력과 절차적 지식의 수준은 국왕의 기 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금성현 김세운( 金 世 云 ) 등의 옥사 18) 와 관련하여 사건 당초에 신중한 조사와 심리를 하지 못함으로써 정범과 종범이 뒤바뀌는 오류를 범한 해도 관찰사와 검험을 담 당했던 초검관( 初 檢 官 )과 복검관( 復 檢 官 )을 모두 처벌하고 있다. 또한 연안 박천일( 朴 千 一 )의 옥사 19) 에서도 본도에서 올라온 검험조서에 피해자가 거의 술에 취한듯하다는 문 구를 들어 정조는 크게 책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살인옥사의 검험조서는 사망의 원 인을 먼저 명백히 밝히고 그 다음으로 사건의 실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망의 원인조차 불분명하게 적고 있는 것에 대해 지적하며, 해당 관찰사를 의 법 조치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정조의 지방정부의 사법능력에 대한 비판은 심리록에 수록된 다수의 판례에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관리들의 사법능력에 관한 정조의 관심은 지방관리들 뿐만 아 17) 자세한 것은 審 理 錄 凡 例 應 行 格 式 參 照. 18) 金 世 云 이 朴 弼 琦 가 자기의 妻 任 女 人 과 姦 通 을 저지르려하였다고 의심하여 朴 弼 琦 의 妻 인 金 今 金 과 함께 몽둥이로 때려 죽인 事 件 ( 審 理 錄 9 券, 1783, 江 原 道 金 城 金 世 云 등의 獄 事 ). 19) 審 理 錄 7 券, 1781, 黃 海 道 延 安 朴 千 一 의 獄 事. 100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니라 중앙정부의 관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정조는 살인옥사를 지체 없이 완결하도록 신칙한 분부가 지엄하였는데도 근래에 옥관 ( 獄 官 )으로 있는 자들이 대다수 애처롭게 여기는 의리에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 그리하 여 심문을 행한 지가 이미 상당히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두어 옥사 를 결정지은 것도 아니고 결정짓지 않은 것도 아니고, 살리는 것도 아니고, 죽이는 것도 아닌 상태에 두었으니 옥관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형옥( 刑 獄 )을 신중하 게 처리해야 된다는 도리상 더없이 소홀하다. 어찌 이런 獄 官 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20) 라며, 형조판서 이조원( 李 祖 源 )을 파직시키고 있다. 정조의 이 같은 관심과 조치는 단지 사법행정에 관한 기술적 능력뿐만이 아니라 형벌 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지녀야할 소양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정조는 죄가 있으면 가두거나 묶어도 무관하지만 죄가 없는데 옥송( 獄 訟 )을 초래하는 것은 송관( 訟 官 )의 수치 라고 강변한다. 그는 또 옥사를 담당하는 자들이 물 흐르듯이 잘 결단하지 못하니 체포되어 묶이는 자가 계속 이어지는 것 이라고 질책하기도 하였다. 21) 이러한 정조의 태도는 당시 국왕의 사법행정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과 관리들의 무능함을 질책함으로써 형벌을 집행하는 관 리들의 자질을 높이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Ⅲ. 심리록에 나타난 재판의 기본원칙 1. 관용의 원칙 조선건국의 주도세력인 신흥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인 신유학적 이데올로기는 형사제도 의 운용에 있어서도 도덕적 요소의 보충이라는 결과로 접목된다. 이러한 요소는 조선의 20) 正 祖 實 錄 44 券, 正 祖 20 年 5 月 12 日. 21) 弘 齋 全 書 169, 日 得 錄 9, 政 事, 原 任 直 提 學 徐 龍 輔, 丁 巳 年 記 錄. 101
치안정책연구 건국자인 태조의 의지 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22) 건국의 주도세력으로 조선경국전( 朝 鮮 經 國 典 )을 집필한바 있는 정도전( 鄭 道 傳 )은 그의 저서에서 법이 가혹할 때도 상황이 관 용을 베풀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할 때가 있다. 법전에 많은 다른 규정과 원칙들이 있음에 도 불구하고 상황과 법은 각 경우의 두면으로 이용되어 이 둘의 각자의 중요성을 평가 하여 중용( 中 庸 )을 취할 수 있으며, 법을 이용하는데 기준점을 제공하게 할 수 있다. 라 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정도전의 관용의 정신은 법의 운용에 있어 유교철학의 중요한 국면으로, 이러 한 신유학적 사유( 思 惟 )는 일찍이 조선형법이 행위형법에 머무르지 않고 행위자의 개개 의 상황까지 고려하는 절충적 입장을 취하는 발전적 형태를 띠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판결의 태도에 대하여 형식적 규칙에 의하여 판결을 내리지 않고 주관적인 성격 이나 상황에 의하여, 즉 구체적 결과의 균형성과 타당성에 의하여 판결한 솔로몬적 카디 재판 이라는 비판을 제기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타당한 견해가 아니라고 본다. 심리록 서례( 叙 例 )에서 형벌이란 것은 교화를 돕는 도구이다. 대체로, 한갖 법만으로 는 정치를 할 수 없다. 반드시 떳떳한 도리로써 그 정치를 보강한다. 그런 까닭에, 률은 비록 유례에 의경( 依 敬 ) 하지만 판결은 법과 교화를 경( 經 )과 위( 緯 )로 한다. 정적( 情 跡 )을 참작하여, 권도( 權 道 )를 쓸지라도 상법( 常 法 )에 합치하여야 하며, 낮추고 높이는 것과 감경하고 가중하는 것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뒤라야 바른 법률가의 지침이다. 라 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심리록 판결에 나타나는 관용의 원칙이 통치자의 주관적인 도덕 적 통찰력에 배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조 화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예로 피해자 김정호( 金 挺 豪 )가 가해자의 처를 강간한 것으로 의심하여 구타한 결과 13일만에 사망한 양주 이귀복( 李 貴 福 )의 옥사 23) 를 살펴보면 이 원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사건에서 해도와 형조에서는 피해자의 나이가 70세에 가까우므로 가해자의 구타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사형으로 판결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어 놓고 있다. 이에 대해 정조는 사형할 사람을 살려 주는 것은 참으로 만에 하나라 22) 太 祖 實 錄 1 券, 太 祖 1 年 7 月 28 日. 23) 審 理 錄 8 券, 1782, 京 畿 楊 州 李 貴 福 의 獄 事. 102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도 유념해야 한다. 옥사의 실정이 대부분 불분명 한데다가 뒤따라서 검안( 檢 案 )도 서로 어긋나니, 과연 용서할 만한 자취가 없다. 그런데도 억지로 가벼운 형벌에 처한다면 그로 인해 끼치는 폐단은 도리어 법을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 옥사는 다시 더 철저하게 밝혀서 서서히 살려주는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 실로 옥사를 처결하는 체모 에 합당할 것이다 라고 판부( 判 付 )하여 해당 도신( 道 臣 )으로 하여금 정확한 조사를 요구하 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은 재조사를 통해 구타가 사망에 이를 정도로 행하여 졌다는 진상 은 파악되었으나, 당시 검시교본 이었던 무원록에 의할 경우 옆구리 늑골 가슴의 급소 를 맞은 경우에는 10일을 넘기지 못한다고 되어있는데 13일이 지난 후 사망하였으므로 사형으로는 처벌할 수는 없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2.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 법관은 피고인에게 유죄의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proof beyond a reasonable doubt) 또는 확신을 가져야 하며, 증거 평가의 결과 법관이 유 죄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라는 원칙은 현대에 확립된 원칙으로 오늘날에는 단순히 증거법상의 원칙이 아니라 실체형법에 속하는 법원칙으로서 평가 받고 있다. 24) 심리록 판결을 분석하여 볼 때, 현대와 같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라는 원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의 김칠갑( 金 七 甲 )의 옥사와 관련한 판부를 살펴보면 형조에서는 주먹으로 때린 남편 김칠갑이 정범으로 살인죄정범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나, 정조는 간통한 부인을 내어 쫓으려는 시댁 식구들과 쫓겨나지 않으려는 부인사이의 격렬한 몸싸움 과정에서 부인이 사망하였으므로 누구 손에 맞아 죽은 것인지가 불분명한 사항에서 단지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범으로 처벌할 수 없 다며 사형을 감하여 정배( 定 配 )하라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25) 24) 이재상, 형사소송법 5판, (서울:박영사, 2000), 108면; 임동규, 형사소송법 5판, (서울:법문 사, 2008), 13면. 25) 審 理 錄 7 券, 1781, 慶 尙 道 安 義 金 七 甲 의 獄 事. 103
치안정책연구 또한 사체를 매장해 버려 검험을 하지 못한 해남의 종 덕돌( 德 乭 )의 옥사 에서는 시 체를 파내어 검험도 하지 않은 옥사이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단서는 결국 분명히 밝혀지 지 못하였다. 이 옥사의 결말은 오직 시체를 발굴해서 검험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삼가 선왕조의 수교내용을 상고해 보면, 시체를 꺼내어 검험하는 문제는 이 같은 옥사에 서는 급급히 논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조정에서 알고 있는 것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이 기보다는 차라리 법대로 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겠다. 라는 말이다. 덕돌은 도신( 道 臣 )으로 하여금 사형을 감하여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26) 는 결정을 내리고 있다. 위 사례와 같이 사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 모호하거나 사증( 詞 證 )을 갖추지 않았을 경 우 27), 또는 정범과 종범을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그 죄의 정범으로 처벌할 수 없다 는 판결은, 심리록에 수록된 모든 사건에 일관된 하나의 원칙이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 의 원칙이 적용되는 경우에는 무죄의 판결을 내리는 오늘날의 경향에 비 추어 보면 보잘 것 없는 원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과학이 오늘날과 같이 발달하지 않 았던 당시의 환경에서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그 죄의 정범으로 처벌하지 않고 감경하여 처벌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에 대해서는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3. 신법 우선의 원칙 다양한 경로를 통해 법이 제정되던 조선사회에 있어서 법적용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대명률을 모법( 母 法 )으로 한 판례법 28) 국가였던 조선의 26) 덕돌이, 朴 大 千 이 저의 주인집 빚을 갚지 않는다고 腎 囊 과 허리를 발로 차 10일 만에 죽게 하였는 데, 서둘러 매장을 하였기 때문에 검험을 하지 못한 사건( 審 理 錄 25 券, 1794, 全 羅 道 海 南 의 종 德 乭 의 獄 事 ). 27) 朴 根 成 이 朴 三 先 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구타하여 죽게 한 사건에서, 산골 외딴 마을에서 목격한 증인도 없고, 두 차례 檢 屍 帳 의 상처도 각기 다른데, 각기 다른 상처를 檢 屍 官 의 불찰로 돌 린다 하더라도 목격한 증인이 없으니 실로 의심을 가질 만한 한단서가 된다. 박근성을 석방하 라. ( 審 理 錄 19 券, 1789, 京 畿 長 湍 朴 根 成 의 獄 事 ). 28) 朝 鮮 刑 法 體 系 가 大 明 律 直 解 를 基 本 刑 法 으로 判 例 의 집적을 통해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經 國 大 典 刑 典 의 用 大 明 律 條 項 이 續 大 典 에 이르러서는 經 國 大 典 의 규정에 의하여 大 明 律 을 적용하되 經 國 大 典 과 續 大 典 에 해당율이 있으면 2 典 을 따른다 고 규정하여 大 明 律 直 解 의 적용을 배제하고 있다. 104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형사법 운용체계에서는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법의 시간적 효력에 관한 문제도 이들 중 하나의 문제로 대명률직해( 大 明 律 直 解 )나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에서는 명문의 규정을 찾 아 볼 수 없으나 신법우선의 원칙이 지켜졌던 것으로 보인다. 남부 정윤환( 鄭 潤 煥 )의 옥사 29) 를 살펴보면 정윤환이 자기 할아버지의 군공( 軍 功 )과 기근( 饑 饉 )을 구제한 두 가지 일을 위에 알리기 위해 봉화대 아래에 불을 놓은 사건으로 형조에서는 효시형( 梟 市 刑 )을 건의하였으나, 정조는 수교와 속대전을 가져다 살펴보니 그 가운데 거짓으로 봉화를 올린 죄에 대한 형률 조항은 하나는 사형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하나는 효시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개 법의 규례가 전후로 차이가 있는 것은 반드시 모두 나중에 시행한 것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수교는 지난 신사년(1701, 숙종 27 년)에 있었고 속대전은 이번 갑자년(1744, 영조 20년)에 완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해조가 갑자년에 완성된 속대전을 쓰지 않고 멀리 속대전 이전에 내려진 수교를 끌어다 쓴 것 은 어째서인가? 사형하는 것은 마찬가지나 정형하는 것과 효시하는 것 사이에 불가불 하나로 결론 지어 결정한 뒤에야 처단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세한 곡절을 해조로 하 여금 이치를 따져 초기하게 하라는 전교( 傳 敎 )에 대해 형조는 사형에 처하는 방법은 속 대전에 의거 시행하고, 제도를 정하는 묘당( 廟 堂 )으로 하여금 품처( 稟 處 )하게 하겠다는 의견을 올리고 있다. 4. 우발적 범행과 악의적 범행의 구별 원칙 심리록에 수록된 사건들 중 98%에 해당하는 사건들이 관용의 원칙에 따라 감형되고 2%만이 사형판결을 받아 처벌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유발시킨 하나의 원칙은 범행의 악의성이라고 하겠다. 심리록의 판부를 살펴보면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죽은 자의 생명을 보상하려는 것이지만 우발적 범행의 경우에는 반드시 생명으로서 보 상할 만한 범죄는 아니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신천 옥사곤( 玉 士 坤 )의 옥사 30) 를 살펴 보면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29) 審 理 錄 9 券, 1783, 서울 南 部 鄭 潤 煥 의 獄 事. 30) 審 理 錄 15 券, 1785, 黃 海 道 信 川 玉 士 坤 등의 獄 事. 105
치안정책연구 대저 목숨으로 갚게 해야 한다는 법은 우선 그 범죄에 악의가 숨어 있느냐 없느냐를 논해야 한다. 시장을 보고 돌아 가다가 길에서 서로 만나 상대도 취한 사람이고 나도 취 한 사람으로 우연히 서로 시비를 일으켜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욱이나 본래 서로 모르는 사이 였으니 응당 품어온 감정은 없었을 것이고 말실수를 가지고서야 어찌 꼭 죽이려 들었겠느냐. 한 짓으로 보아서는 의심스럽기는 하나 내용상으로는 용서할 만한 일이니, 도신의 살려 주자는 논의가 소견이 있는 성 싶다. 옥사곤은 엄히 한차례 형장( 刑 杖 )을 때린 뒤 정배하라 고 판결하고 있다. 사형판결이 내려지는 기준이 범죄의 악의성에 있다 보니 강도 절도에 수반하여 저지러진 살인범죄에 있어서는 대다수가 감 형 없는 사형을 언도 받고 있다. 5. 판결을 통한 윤리교화의 원칙 심리록의 판결들은 윤리문제와 관련이 있는 범죄에 관하여는 판결을 통해 풍속을 교 화하고 윤리기강을 확립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를 담고 있다. 경주 권상만( 權 尙 萬 )의 옥사와 관련한 판부에서 정조는 극단적 표현으로 살인자는 죽어야 한다는 것은 왕법을 중시한 것이요, 열부( 烈 婦 )의 절행을 정표하여 장려함은 천륜을 중시한 것이다. 왕법은 때때로 적절히 조정할 수 있지만 천륜은 만고토록 변할 수 없는 것이며, 법은 굽힐 수 있어도 천륜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 31) 라고 하여 윤리적 잣대로 사형을 감하여 차 율( 次 律 )로 처벌할 것을 명하고 있다. 또한 이사건과 관련하여 살인자인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살한 어머니의 행위에 대하여 비난하는 보고서를 올린 경상감사 김광묵( 金 光 黙 )과 경주부윤 이병정( 李 秉 鼎 )을 중징계하 라고 명령했다. 심리록 전체 사건 중에서 풍속의 교화와 윤리기강을 위한 판결은 빈번히 나타나는 문제이다. 그러나 심리록 서례에서 밝히고 있듯이 윤리적 기준을 판결에 잣대로 사용한다고 하여도 법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옥사를 결단할 때는 마땅히 율문 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 옛사람이 율문을 제정한 것은 각기 뜻이 있는 것이다. 비록 전혀 31) 遺 腹 子 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가 대신 자살한 事 件 ( 審 理 錄 18 券, 1787, 慶 尙 道 慶 州 權 尙 萬 의 獄 事 ). 106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의심할 것이 없는 옥사라 할지라도 반드시 비추어 볼 만한 율문을 찾은 뒤에야 바야흐로 의 거할 바가 있다. 게다가 반드시 죽을 상황에서 살리기를 구하는 것은 왕자( 王 者 )의 마음이 더라도 마땅히 살아야 할 자가 잘못 걸려드는 것이나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요행히 면하는 것은 형벌을 잘못 쓴 것으로 보면 마찬가지이다. 나는 한번 법에 회부함에 일찍이 생각만으 로 낮추거나 높인 적이 없다. 32) 고 하여 판결에 있어서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Ⅳ. 결 어 조선시대 형벌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유가철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조선 건국의 이론 적 토대를 제공했던 정도전은 그의 저서에서 천지는 만물을 봄으로 낳고 가을로 숙살 ( 肅 殺 )하며, 성인은 만민을 인( 仁 )으로 사랑하고 형벌로 위엄 있게 한다. 대개 숙살하려 는 것은 그 근본을 회복하려는 까닭이고 그 위엄 있게 한 것은 그 삶을 같이 하려는 까 닭이다. 가을이 천지에 있어 의기가 되므로 형관을 추관( 秋 官 )이라 하게 되니 그 용사( 用 事 ) 하는 것은 동일하다. 33) 그의 이러한 사상은 천리에 순응하고자 하는 유가철학의 당연한 귀결이며, 이러한 사상은 형벌의 집행에 있어서도 십악( 十 惡 )의 죄를 범하거나 강도범으 로서 사형에 처할 자를 제외하고는 입춘이후 추분 이전에는 사형집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의 저서에서 형벌을 제정한 것은 형벌만 믿어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보조로 하여 다스릴 뿐이다. 사형하는 것은 사형수가 다시는 생기지 않을 수 있어 야 쓰되 형( 刑 )을 형( 刑 )이 없게 하는데 기할 것이니 진실로 나의 다스림이 이미 이루어 지게 되면 형( 刑 )이 방치되어 쓰이지 않을 수 있다. 34) 라고 하여 형벌의 사용에 있어 서 절제를 요구하며 유가철학의 관용의 정신을 보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32) 弘 齋 全 書 167, 日 得 錄 7, 政 事, 直 閣 李 晚 秀, 己 酉 年 記 錄. 33) 鄭 道 傳, 三 峰 集, 朝 鮮 經 國 典 憲 典, ( 韓 國 의 思 想 大 全 集 6, 同 和 出 版 公 社, 1985, 154면). 34) 鄭 道 傳, 三 峰 集, 朝 鮮 經 國 典 憲 典, ( 韓 國 의 思 想 大 全 集 6, 同 和 出 版 公 社, 1985, 155면). 107
치안정책연구 사상은 조선왕조 전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상으로 작동하고 있다. 세종 4년의 하교를 살펴보면 소송( 訴 訟 )을 심리하는 법은 진실로 마땅히 공평한 마음으 로 깨끗하게 물어서 사죄를 심리하게 되면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중죄를 심리하게 되면 가볍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실정을 헤아려서 죄를 과하여도 오히려 실수하는 바가 있 다. 35) 고 하여 형옥의 신중함을 당부하고 있다. 살옥사건의 심리에 있어서, 형벌이란 교화 를 돕는 도구이나 형벌을 사용함에는 반드시 떳떳한 도리로써 사용하여야 하며, 범죄자의 상황을 참작하여 관용을 베푸는 것이 바른 법률가의 자세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36) 실증적으로도 영조 정조시대 살옥에 관한 판례집인 심리록을 분석해 볼 때 1000건에 가까운 사건들 중에 사형판결이 내려진 사건은 2%에 불과하고 대다수 많은 피고인들이 감형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점이 서양의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법을 무시한 솔로몬 적 카디재판이라는 비판 37) 을 받고 있으나 심리록의 구체적 분석을 통해 검증해 볼 때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합리성의 추구가 아닌 법에 합치되는 범위안에서의 형사 정책 적 고려와 동양식 사고에 기인한 인본주의 38) 요청에 의한 결과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 다 하겠다. 또한 근대형법의 소산 이라할 수 있는 증거의 형법적 가치를 인정 의심스러운 경우에 있어 책임을 감경 하는 원칙(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이 조선시대에 확립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제어(Key Word): 재판(judgment), 관용(clemency), 감형(leniency), 살인사건(murder cases), 심리록(simnirok), 상황(circumstances), 형사재판(criminal justice), 유교(Confucianism) 논문접수 2008.10.22, 심사개시 2008.10.23, 게재확정 : 2008.11.14 35) 國 譯 增 補 文 獻 備 考 134 券, 恤 刑, 20면. 36) 審 理 錄 序 文. 37) 崔 鍾 庫, 막스 베버가 본 東 洋 法, 法 史 學 硏 究 (서울:1981), 265-266면 參 照. 38) 都 珖 淳, 儒 敎 의 思 想 的 本 質, 創 作 과 批 評 (서울: 創 作 과 批 評 社, 11 券 第 4 號 ), 582-587면. 108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참 고 문 헌 Ⅰ. 국내문헌 1. 단행본 鄭 道 傳, 朝 鮮 經 國 典 ( 韓 國 의 思 想 大 全 集 6), 同 和 出 版 公 社, 1985. 金 淇 春, 朝 鮮 時 代 刑 典, 三 英 社, 1990. 朴 秉 濠, 韓 國 法 制 史 考, 法 文 社, 1987. 朴 秉 濠, 近 世 의 法 과 法 思 想, 진원, 1996. 全 豊 德, 韓 國 法 制 史 硏 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68. 徐 壹 敎, 朝 鮮 王 朝 의 刑 事 制 度 의 硏 究, 博 英 社, 1974. 朴 秉 濠 외, 茶 山 學 의 硏 究, 民 音 社, 1990. 朴 秉 濠 외, 丁 茶 山 硏 究 의 現 況, 民 音 社, 1985. 李 在 龍, 禮 의 思 想 에서 法 의 統 治 까지, 예문서원, 1995. 오영교편, 朝 鮮 建 國 과 經 國 大 典 體 制 의 形 成, 혜안, 2004. 吳 甲 均, 朝 鮮 時 代 司 法 制 度 硏 究, 三 英 社, 1995. 李 在 祥, 刑 事 訴 訟 法 5 版, 博 英 社, 2000. 임동규, 형사소송법 5판, 법문사, 2008. 2. 논 문 李 壽 成, 刑 法 的 道 德 性 의 限 界 에 관하여, 서울대 법학 18권, 1970. 崔 鍾 庫, 韓 國 法 思 想 의 近 代 化 過 程, 법사학연구 7호, 1983. 李 在 龍, 朝 鮮 時 代 의 性 理 學 的 規 範 觀, 고려대학교박사학위, 1992. 都 珖 淳, 儒 敎 의 思 想 的 本 質, 창작과 비평 통권42, 1976. 崔 鍾 庫, 막스베버가 본 東 洋 法, 법사학 연구 6집, 1981. 沈 羲 基, 儒 敎 法 의 哲 學 的 基 礎, 영남대 사회과학연구7, 1987. 109
치안정책연구 沈 羲 基, 殺 獄 에 관한 硏 究 (1), 부산대 법학연구 25권 1호, 1982. 南 晩 星, 大 明 律 과 우리 古 法 典 과의 關 係, 법제월보 5권 8호, 1963. 吳 道 基, 韓 國 刑 法 의 基 本 性 格 에 대한 法 制 史 的 考 察, 사법행정217권, 1979. 丁 玉 泰, 李 朝 立 法 節 次 에 관한 考 察, 전남대논문집(법학), 1984. 劉 基 天, 韓 國 文 化 와 刑 事 責 任, 사상계 62호, 1958. 金 漢 植, 大 明 律 의 朝 鮮 朝 的 계수, 경북대논문집 34집, 1982. 尹 載 秀, 東 洋 法 制 史 에 있어 罪 刑 法 定 主 義 考 察, 법제월보, 1964. 劉 永 玹, 李 朝 刑 事 法 理 論 의 展 開, 법제월보, 1962. 李 鍾 吉, 世 宗 朝 欽 恤 政 策 에 관한 硏 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李 昌 鎬, 刑 事 法 上 의 罪 刑 法 定 主 義 에 관한 소고, 순간법제, 1983.12. 김형승, 朝 鮮 王 朝 의 立 法 過 程 에 관한 硏 究, 法 制 月 報 3-5, 1969. 3. 기 타 朝 鮮 王 朝 實 錄, 世 宗 大 王 記 念 社 業 會 ( 太 祖 - 正 祖 ) 增 補 文 獻 備 考, 世 宗 大 王 記 念 社 業 會 三 峰 集, 民 族 文 化 推 進 會, 國 譯 古 傳 總 書, 1977. 星 湖 僿 說, 民 族 文 化 推 進 會, 國 譯 古 傳 總 書, 1984. 經 國 大 典,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4.6집, 1962, 1963. 大 典 通 編,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8집, 1963. 大 明 律 直 解,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13집, 1964. 受 敎 輯 錄,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16집, 1964. 審 理 錄, 法 制 處, 法 制 資 料 ( 上 篇, 下 篇 ), 1968. 國 譯 審 理 錄 (1 券 -4 券 ), 民 族 文 化 推 進 會, 1999, 2000. 典 錄 通 考 ( 刑 典 ),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35집, 1969. 秋 官 志 (1권-4권),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75-78집, 1976. 刑 典 事 目,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82집, 1976. 百 憲 總 要,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108집, 1979. 110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唐 律 疏 議, 法 制 處, 法 制 資 料 제147집, 1988. 國 譯 弘 齋 全 書, 族 文 化 推 進 會, 2000. Ⅱ. 외국문헌 朱 胎 庭, 中 國 傳 統 倫 理 思 想 史, 華 東 師 範 大 學 出 版 社, 1989. 楊 榮 國, 中 國 古 代 思 想 史, 三 聯 書 店, 1962. 宇 野 精 一, 東 洋 思 想 講 座 2, 岩 波 書 店, 1967. 劉 澤 華, 先 奏 政 治 思 想 史, 南 開 大 學 出 版 社, 1984. William Shaw, Legal Norms in a Confucian Stat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82. 111
치안정책연구 [ABSTRACT] A Study on the Principle of Judgment in Cho Sun Dynasty Criminal Justice Kim, Yong Hee This thesis is on the principle of judgment existed in the criminal justice in the era of the Cho Sun dynasty of Korea. The early Cho Sun dynasty drive for uniformity in inquest as well as other procedures was almost certainly rooted in a concern for substantive justice and leniency derived in turn from cosmological and philosophical considerations. Even when the letter of the law is severs, the circumstances may give grounds for leniency. The concept of requital for life was unquestionably one aspect of Korean legal thinking in the resolution of murder cases. in the simnirok cases at hand, however, nothing indicates that the principle was applied mechanistically that every death must inevitably be requited with anther. Sentences of death, noted in the case records as according to the statute, account for no more than 2 percent of nearly one thousand cases for which records exist in one case book. A spirit of clemency is an important aspect of morality in Criminal Justice. Consequently, Though, the principle of judgment which contributed to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in the era of the Cho Sun dynasty was different from that of the West, that was developed on the Individualism and the Liberalism, the purposes it meaned were alike. Also the spirit of the Confucianism which was representative of the ideology in the era of the Cho Sun dynasty, was ideally combined with the principle of judgment.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