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 염 정 섭** < 국문초록 >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서로 현재 農 書 輯 要 가 남아 있다. 이 농서는 元 代 의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하고 吏 讀 를 붙여 간행한 것이었다. 간행연대가 아직 불확실하지만 15세기 초반 태종대로 추정된다. 고려말 합천에 서 復 刊 된 農 桑 輯 要 가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 주요한 참고 농서 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조선왕조의 農 政 策 을 수행하는 데 참고서적으로 인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농업현실에 맞는 農 書 를 편 찬하는 데 底 本 으로 이용되었다. 이행과 곽존중이 맡아서 편찬한 농서집요 는 중국 華 北 지방의 특성에 맞추어 엮어진 농업기술서인 농상집요 의 내용 전부를 초록하여 번역한 것은 아니었다. 농상집요 의 일부만 발췌하였을 뿐 아니라 抄 錄 할 부분을 선택하고 본국 俚 語 로 번역하면서 농상집요 의 내용 순서가 농서집요 에서 달라지기도 하였다. 농서집요 의 농업기술로 먼저 벼 耕 種 法 을 살펴보았다. 이때 농서집요 의 벼 경종법을 回 換 農 法 이라고 규정한 선행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리 하여 休 閑 法 과 移 秧 法 이 같이 수행되고 있다는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15세기 에 편찬된 농사직설 에 정리된 벼 재배법이 水 耕 直 播 法 중심의 連 作 法 인 것 을 감안한다면, 14세기 무렵 한국의 농업기술 발달 가운데 특히 벼 재배법은 休 閑 法 에서 連 作 法 으로, 그리고 直 播 法 에서 移 秧 法 으로 농업기술의 발달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부문에서 변동을 일으켰고 결국 왕조체제의 교체를 초래 하였다. 고려말 사회 변동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라는 왕조 교체로까지 이어진 것은 당대 사회변동의 폭과 넓이가 거대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 의 개창 주도세력이 가장 주요하게 개혁을 모색한 부문이 고려사회의 경제 제 도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이 왕조를 개창하기에 앞서 田 制 改 革, 私 田 改 革 을 추진하여 科 田 法 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고려말 사회가 안고 있던 가 장 커다란 문제가 私 田 을 포함한 田 制 의 문란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고려말 權 門 勢 族, 親 元 勢 力 의 경제기반인 私 田 에서 유래한 문제는 高 麗 史 食 貨 志 에 크게 서술되어 있다. 조선 개창의 주도세력이 주목한 고려말 사회의 문란상이 바로 權 門 勢 族 의 土 地 奪 占 으로 야기된 農 民 의 경제적 몰락과 奴 婢 로 의 投 托 현상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2) 新 興 士 大 夫 의 일원으로 田 制 改 革 을 추진하였던 趙 浚 등이 올린 上 書 에서 田 制 의 문란에 따른 사회의 혼란을 * 이 글은 2007년 9월 27일부터 9월 29일까지 中 國 農 業 史 學 會 주최로 中 國 陝 西 省 西 安 市 楊 凌 에서 열린 第 七 史 (The 7th International Symposium of Association of Agricultural History in East Asia) 에서 14세기 한국의 농업기술 발달과 사회 변동(Development of Agricultural Techniques and Changes of Society in Korea during the 14th Century)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던 발표 논문 을 대폭 수정 보완한 것이다. ** 책임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 鄭 道 傳, 三 峯 集 권7, 朝 鮮 經 國 典 賦 典 經 理 ; 殿 下 ( 朝 鮮 太 祖 ) 在 潛 邸 親 見 其 ( 私 田 ) 弊 慨 然 以 革 私 田 爲 己 任 蓋 欲 盡 取 境 內 之 田 屬 之 公 家 計 民 授 田 以 復 古 者 田 制 之 正. 2) 고려말 농업문제와 그에 대한 대책 제시 등에 대한 것은 다음의 연구 성과들을 참고 할 수 있다. 金 泰 永, 1983 朝 鮮 前 期 土 地 制 度 史 硏 究, 知 識 産 業 社 ; 李 景 植, 1984 朝 鮮 前 期 土 地 制 度 史 硏 究, 一 潮 閣 ; 魏 恩 淑, 1998 高 麗 後 期 農 業 經 濟 硏 究, 혜안.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99 조목별로 열거하여 개진하면서 토지 兼 倂 을 주된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3) 그런데 권문세족이 兼 倂 한 토지는 기본적으로 田 租 를 수취하는 형태 즉 竝 作 半 收 의 地 主 小 作 制 경영방식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4) 물론 권문세족의 私 田 중에 는 명백하게 收 租 權 에 근거하여 확보된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5) 하지만 고 려말의 私 田 의 대부분은 권세가의 자의적인 탈점이나 불법적인 겸병을 통해서 집적되어 이룩된 것이었다. 6) 여기에다가 權 門 勢 族 은 대토지를 경작할 노동력 을 확보하기 위해 良 人 을 함부로 奴 婢 처럼 부렸고, 또한 먹고살 길이 사라진 良 人 農 民 들은 이들 권세가의 집에 投 托 하여 處 干 이라는 처지를 달게 여기게 되면서, 국가에 조세를 부담하는 公 民 이 더욱 줄어들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더 욱 크게 축소되게 되었다. 14세기 고려말 私 田 을 둘러싼 경제적인 문제는 권문세족의 토지탈점과 노비 확보 등으로 표출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 발생은 농업생산력의 변 동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었다. 농업생산력의 변동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바 로 한 필지의 주인이 5,6인 이상이나 되고 1년의 田 租 를 8,9번이나 거둔다 ( 一 畝 之 主 過 於 五 六 一 年 之 租 收 至 八 九 ) 라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7) 위의 3) 高 麗 史 권78, 食 貨 志 1 田 制 祿 科 田 辛 瑀 14년 7월 大 司 憲 趙 浚 等 上 書. 4) 鄭 道 傳, 三 峯 集 권7, 朝 鮮 經 國 典 賦 典 經 理 ; 自 田 制 之 壞 豪 强 得 以 兼 倂 而 富 者 田 連 阡 陌 貧 者 無 立 錐 之 地 借 耕 富 人 之 田 終 歲 勤 苦 而 食 反 不 足 富 者 安 坐 不 耕 役 使 傭 田 之 人 而 食 太 半 之 入. 5) 高 麗 史 권78, 食 貨 志 1, 田 制 田 柴 科 ; 明 宗 十 八 年 三 月 判 凡 州 縣 各 有 京 外 兩 班 軍 人 家 田 永 業 田 乃 有 姦 吏 民 欲 托 權 要 妄 稱 閑 地 記 付 其 家 有 權 勢 者 又 稱 爲 我 家 田 要 取 公 牒 卽 遣 使 喚 通 書 屬 托 其 州 員 僚 不 避 干 請 差 人 徵 取 一 畝 之 徵 乃 至 二 三 民 不 堪 苦 赴 訴 無 處. 6) 고려말 소유권에 입각한 私 田 의 확대는 즉 권문세족의 대토지 집적은 국가적인 차원 에서 재정수입의 감소를 초래하고 토지에서의 收 租 가 어려워지면서 관료들에게 녹봉 조차 내어줄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金 泰 永, 1983 朝 鮮 前 期 土 地 制 度 史 硏 究 知 識 産 業 社 ). 7) 高 麗 史 권78, 食 貨 志 1 田 制 祿 科 田 辛 瑀 14년 7월 大 司 憲 趙 浚 等 上 書 ; 至 於 近 年 兼 倂 尤 甚 奸 凶 之 黨 跨 州 抱 郡 山 川 爲 標 皆 指 爲 祖 業 之 田 相 壤 ( 壞?) 相 奪 一 畝 之 主 過 於 五 六 一 年 之 租 收 至 八 九 上 自 御 分 至 于 宗 室 功 臣 侍 朝 文 武 之 田 以 及 外 役 津 驛 院 館 之 田 凡 人 累 世 所 植 之 桑 所 築 之 室 皆 奪 而 有 之... 此 以 私 田 爲 亂 之 首 也.
100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사료는 권문세족의 토지탈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고 과도한 수취를 자행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토지 주인행세를 5,6인이나 하 고 田 租 를 8,9번이나 거둘 정도의 생산성 확보가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 한 과도한 수취 자체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유력자 들의 土 地 (생산수단) 수탈과 田 租 (생산물) 수탈은 당대의 토지의 생산성 발달 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토지 집적을 경제력 축적의 주요한 기반으로 삼기에 적 당한 사정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위의 사료에 나오는 현상은 당시 에 성취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 사회변동의 근본적인 動 因 을 농업생산력의 변화 발달에서 찾 아보는 연구성과 8) 가 제출된 이후, 고려후기 농업기술의 발달의 양상을 경지이 용방식, 수리시설, 토지개간, 시비기술, 농기구, 신종자의 도입 등의 측면에서 제시하는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9) 그런데 경지이용방식으로 파악되고 있 는 休 閑 法 과 連 作 法 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한 실체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고려시대 農 法 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농업생산력을 규명 하기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연구되어, 대체로 耕 地 利 用 方 式 을 중심으로 農 業 技 術 을 고찰하는 가운데 이뤄져 왔다. 10) 휴한법과 연작법을 경지이용방식의 차이 로만 설명하는 것 자체도 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휴한과 연작은 단순한 경지이용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농업기술, 農 法 의 커다란 혁신으로 파악해야 할 8) 여말선초 사회변동의 動 因 을 농업생산력의 변화에서 찾는 연구시각은 다음 논문에 잘 제시되어 있다. 李 泰 鎭, 1983 高 麗 末 朝 鮮 初 의 사회변화 震 檀 學 報 55(1986 韓 國 社 會 史 硏 究, 지식산업사 재수록). 9) 12세기 이후 고려후기의 농법을 살펴본 주요한 연구성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金 容 燮, 2000 高 麗 時 期 의 量 田 制 東 方 學 志 16, 1975; 韓 國 中 世 農 業 史 硏 究, 지식산 업사; 李 泰 鎭, 1979 14 15세기 農 業 技 術 의 발달과 新 興 士 族 東 洋 學 9(1986 韓 國 社 會 史 硏 究, 지식산업사 재수록); 宮 島 博 史, 1980 朝 鮮 農 業 史 上 における 十 五 世 紀 朝 鮮 史 叢 3; 魏 恩 淑, 1988 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 釜 大 史 學 12; 李 平 來, 1991 고려후기 수리시설의 확충과 수전 개발 역사와 현실 5; 李 宗 峯, 1993 고 려시기 수전농업의 발달과 이앙법 韓 國 文 化 硏 究 6. 10) 고려시대 農 法 을 비롯한 農 業 生 産 力 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안병우, 1995 농업생산력 발달과 상공업 한국역사입문 2, 풀빛; 권영 국, 1999 고려시대 農 業 生 産 力 연구사 검토 史 學 硏 究 58 59.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01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한법과 연작법 사이의 연결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사정 때문에 두 農 法 사이에 놓여 있는 중대한 농업사적 의의가 희석되 고 있다. 본 논문은 14세기 여말선초 농업기술의 발달을 水 稻 耕 作 法 즉 벼농사법의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1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水 稻 耕 作 法 이 休 閑 法 에서 連 作 法 으로 전환, 즉 농업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졌음을 제시할 것이 다. 이를 위해 14세기 농업기술 발달의 주요한 논거를 太 宗 代 에 편찬된 農 書 輯 要 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農 書 輯 要 는 1980년대에 발굴된 農 書 로 몇몇 연구자의 연구성과가 제출되었지만 14세기 농업기술의 발달과 직접 연결해서 살펴보지 못하고 있었다. 11) 農 書 의 年 代 에 유의하여 농서집요 를 검 토하면 이 농서에 수록된 농업기술이 14세기 고려말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조선 태종대 농서집요( 農 書 輯 要 ) 의 편찬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서로 현재 農 書 輯 要 가 남아 있다. 12) 이 농서는 元 代 의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하고 吏 讀 를 붙여 간행한 것이었다. 農 書 輯 要 의 편찬경위를 살펴보면서 이 農 書 에 수록된 農 業 技 術 의 성격을 살펴 볼 근거를 마련할 것이다. 즉 農 書 의 편찬연대와 農 書 에 수록된 농업기술의 時 期 를 구별하여 살펴보기 위해 農 書 의 年 代 를 도출해낼 필요성이 있기 때문 이다. 조선 초기 기록에서 農 書 輯 要 와 연결될 수 있는 사료를 찾아보면 먼저 태 종 9년(1409) 정월에 前 鷄 林 府 尹 인 李 殷 이 올린 足 食 之 策 에서 農 書 에 대한 11) 金 容 燮, 1988 農 書 輯 要 의 농업기술 朝 鮮 後 期 農 學 史 硏 究, 一 潮 閣 ; 李 鎬 澈, 1990 農 書 輯 要 의 農 法 과 그 歷 史 的 性 格 經 濟 史 學 14; 吳 仁 澤, 1988 농서 집요 의 경종법 연구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吳 仁 澤, 1999 農 書 輯 要 를 통해서 본 조선 초기의 耕 種 法 지역과 역사 5; 이종봉, 2001 朝 鮮 初 期 施 肥 技 術 의 硏 究 지역과 역사 9, 부산경남역사연구소. 12)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農 書 에 대한 소개와 해제는 다음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金 容 燮, 1980 農 書 小 史 農 書 1 ( 韓 國 近 世 社 會 經 濟 史 料 叢 書 3), 아세아문화사; 金 榮 鎭, 1983 農 林 水 産 古 文 獻 備 要 韓 國 農 村 經 濟 硏 究 院 : 金 榮 鎭, 1984 朝 鮮 時 代 前 期 農 書 韓 國 農 村 經 濟 硏 究 院.
102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언급을 찾을 수 있다. 13) 李 殷 에 따르면 農 書 에서 백성들이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 한다는 전제 아래, 농민들에게 勸 課 하는 것이 백성들을 처음에 는 고달프게 하더라도 나중에 편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데 農 書 에서 인용한 것으로 기록된 위와 같은 내용을 중국에서 편찬한 農 書 類 에서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이 때는 아직 農 事 直 說 이 편찬되지 않은 시기 였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農 書 는 태종대에 편찬된 農 蠶 書 일 것이며 태종대의 농서로 현전하고 있는 農 書 輯 要 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 다. 다만 이러한 구절이 현전하는 農 書 輯 要 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 위의 추정이 부정확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農 書 輯 要 가 新 刊 되는 과 정과 후대에 轉 寫 되어 전해오는 과정에서 탈락한 부분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위의 추론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世 宗 代 의 實 錄 에는 農 書 緝 要 라는 農 書 이름이 나오고 있다. 14) 여기 에서는 農 書 輯 要 의 輯 자와는 다른 緝 자를 쓰고 있다. 그런데 大 小 麥 의 종자 를 활용하는 기술을 언급한 위의 기록과 거의 같은 내용이 農 桑 輯 要 에서 인 용한 것으로 世 宗 實 錄 의 다른 곳에 등장하고 있다. 15) 따라서 여기에서의 農 書 緝 要 는 農 桑 輯 要 를 잘못 인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太 宗 代 에 편찬된 農 書, 蠶 書 (또는 두 책을 합하여 農 蠶 書 로 지칭)에 대한 언급은 조선왕 조실록 에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農 書 輯 要 가 抄 錄 의 底 本 으로 삼은 農 桑 輯 要 가 조선의 農 書 編 纂 과 어떻 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元 代 에 편찬된 農 桑 輯 要 는 고려말 陜 川 에서 復 刊 되 어 간행되었다. 16) 고려말 복간된 책을 元 朝 正 本 農 桑 輯 要 라 부르는데 이 책 13) 太 宗 實 錄 卷 17, 太 宗 9 年 正 月 辛 未 ; 農 書 云 凡 民 之 情 惡 勞 好 逸 慇 懃 勸 課 者 初 似 勞 民 終 於 養 民 恬 不 勸 課 者 始 若 安 民 終 於 害 民. 14) 世 宗 實 錄 권86, 世 宗 21 年 7 月 壬 戌 (4-226); 議 政 府 啓 農 書 緝 要 收 穀 種 條 有 陳 大 小 麥 今 聞 長 湍 人 李 吉 種 陳 小 麥 結 實 與 新 種 無 異 各 道 農 民 若 乏 小 麥 種 者 乃 以 各 官 所 貯 陳 小 麥 貸 之 使 之 播 種 若 大 麥 則 雖 見 於 農 書 經 驗 者 云 但 立 苗 而 已 未 至 結 實 令 訪 諸 老 農 有 經 驗 者 則 依 小 麥 例 分 給 耕 種 如 無 經 驗 者 則 令 籍 田 試 驗 從 之. 15) 世 宗 實 錄 권17, 世 宗 4 年 8 月 丙 午 (2-492); 丙 午 左 議 政 李 原 參 贊 許 稠 等 啓 農 桑 輯 要 收 穀 種 法 有 陳 大 小 二 麥 又 老 農 云 嘗 種 陳 三 年 麥 結 實 與 新 麥 種 無 異 民 未 必 曉 此 今 年 二 麥 種 乏 令 各 官 有 陳 麥 者 悉 給 爲 種. 16) 고려말 元 朝 正 本 農 桑 輯 要 간행에 대한 연구로 다음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金 容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03 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 주요한 참고 농서로 이용되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農 政 策 을 수행하는 데 참고서적으로 인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농업현실에 맞는 農 書 를 편찬하는 데 底 本 으로 이용되었다. 17) 1414년(태종 14)에 右 代 言 韓 尙 德 은 農 桑 輯 要 를 本 國 俚 語 로 번역하여 鄕 谷 小 民 들이 제대로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 한상덕의 제안을 태종이 수용하면서 前 任 大 提 學 李 行 과 檢 詳 官 郭 存 中 에게 농상집요 를 발췌하고 本 國 俚 語 로 번역하여 책자를 만들어 간행하게 하였다. 19) 이 책 이 農 書 라는 이름으로 세종대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바로 이 農 書 라는 이 름으로 편찬된 책이 農 書 輯 要 로 추정된다. 또한 태종대에는 농상집요 에서 養 蠶 方 을 추출하여 本 國 俚 語 로 번역한 책 자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養 蠶 經 驗 撮 要 라는 이름의 책으로 현재까지 전해지 고 있다. 20) 양잠경험촬요 의 편찬도 농상집요 抄 錄 書 편찬과 마찬가지로 李 行 과 郭 存 中 이 맡아서 수행하였다. 前 藝 文 館 大 提 學 李 行 이 농상집요 내 용 중에서 養 蠶 方 을 뽑아 낸 것을 스스로 체험하여 많은 효과를 거두게 되자 이를 간행한 것이었다. 이후 국가에서 民 間 에서 漢 文 을 해득하지 못하는 것을 燮, 2000 高 麗 刻 本 元 朝 正 本 農 桑 輯 要 를 통해서 본 農 桑 輯 要 의 撰 者 와 資 料 韓 國 中 世 農 業 史 硏 究, 지식산업사; 魏 恩 淑, 2000 元 朝 正 本 農 桑 輯 要 의 농업관 과 간행주체의 성격 한국중세사연구 8, 한국중세사학회; 李 宗 峯, 1991 高 麗 刻 本 元 朝 正 本 農 桑 輯 要 의 韓 國 農 學 史 上 에서의 위치 釜 山 史 學 21, 부산사학회. 17) 廉 定 燮, 2002 杏 村 李 의 農 桑 輯 要 도입과 의의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일지사. 18) 太 宗 實 錄 권28, 태종 14년 12월 乙 亥 (2-47); 尙 德 ( 韓 尙 德 : 인용자) 又 啓 曰 元 朝 農 桑 輯 要 有 益 於 民 但 其 文 雅 人 人 未 易 通 曉 願 譯 以 本 國 俚 語 令 鄕 谷 小 民 無 不 知 之 上 從 之 命 前 大 提 學 李 行 與 檢 詳 官 郭 存 中 成 書 板 行. 이때 태종은 禹 希 烈, 李 殷, 韓 雍 등을 각 군현에 보내면서 灌 漑 法 을 제대로 수행하는 지 여부 등을 살펴서 水 利 를 제대로 일으키게 하라는 王 旨 를 내렸다. 19) 太 宗 實 錄 권28, 태종 14년 12월 乙 亥 (2-47); 尙 德 ( 韓 尙 德 : 인용자) 又 啓 曰 元 朝 農 桑 輯 要 有 益 於 民 但 其 文 雅 人 人 未 易 通 曉 願 譯 以 本 國 俚 語 令 鄕 谷 小 民 無 不 知 之 上 從 之 命 前 大 提 學 李 行 與 檢 詳 官 郭 存 中 成 書 板 行. 20) 李 光 麟, 1965 養 蠶 經 驗 撮 要 에 대하여 歷 史 學 報 28; 李 光 麟, 1974 養 蠶 經 驗 撮 要 解 題 書 誌 學 6.
104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걱정하여 議 政 府 舍 人 郭 存 中 에게 명령하여 本 國 俚 語 로 節 을 따라 註 를 붙여 간행 반포하게 하였다. 21) 이러한 편찬 과정과 편찬 태도는 앞서 農 桑 輯 要 抄 錄 書 인 農 書 를 편찬할 때와 동일한 것이었다. 태종대 農 桑 輯 要 抄 錄 書 인 農 書 편찬 활용 사정을 위와 같이 정리한 것 을 토대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農 書 輯 要 와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볼 차례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農 書 輯 要 22)는 태종대에 편찬된 원래의 農 書 原 本 이 아니라 16세기 초반에 새롭게 新 刊 된 것을 다시 후대에 필사한 筆 寫 本 이다. 그리고 農 書 輯 要 는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한 부분과 吏 讀 를 붙여서 번역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農 書 輯 要 가 필사본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태종대에 편찬한 農 書 가 과연 現 傳 하는 필사본과 같은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현전하는 필사본에 등장하는 吏 讀 가 중요한 연대추정의 근거가 된다. 이 필사 본에 등장하는 吏 讀 와 당대의 다른 문헌의 이두를 비교 연구한 이승재의 연구 에 따르면 현재 전해지고 있는 農 書 輯 要 의 편찬연대를 15세기 초반 太 宗 代 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한다. 23) 이승재는 農 書 輯 要 의 한자어 題 目 에 正 音 表 記 가 붙어 있지만 이는 中 宗 代 이후에 삽입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農 書 輯 要 에 두루두루 등장하는 吏 讀 가 대명률직해 (1395년), 양잠경험촬요 (1415년) 등 15세기 초반 이전에 편찬된 문헌에 등장하는 吏 讀 와 같은 것이라 는 점에서 농서집요 의 편찬연대를 太 宗 代 로 추정하고 있다. 24) 이두의 표기 방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5세기 초반 吏 讀 자료를 찾 아볼 수 있는 農 書 輯 要 의 편찬연대를 15세기 초반부로 비정하는 것에 무리가 21) 太 宗 實 錄 권33, 태종 17년 5월 己 酉 (2-162); 初 藝 文 館 大 提 學 李 行 於 農 桑 輯 要 內 抽 出 養 蠶 方 自 爲 經 驗 所 收 倍 常 遂 板 刊 行 于 世 國 家 慮 民 間 未 解 華 語 命 議 政 府 舍 人 郭 存 中 將 本 國 俚 語 遂 節 夾 註 又 板 刊 廣 布 然 非 我 國 所 習 皆 不 樂 爲 之 至 是 命 擇 各 道 閑 曠 有 桑 之 地 分 遣 採 訪 屬 典 農 寺 奴 婢 免 其 雜 役 使 之 養 蠶 以 示 民 間. 이때 各 道 에 뽕 나무를 심는 것 등 養 蠶 을 권장하고 있다. 22) 農 書 輯 要 는 書 誌 家 朴 永 燉 씨에 의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金 容 燮, 1988 農 書 輯 要 의 農 業 技 術 朝 鮮 後 期 農 學 史 硏 究, 一 潮 閣 ). 23) 李 丞 宰, 1992 農 書 輯 要 의 吏 讀 震 檀 學 報 74. 24) 李 丞 宰, 1992 農 書 輯 要 의 吏 讀 震 檀 學 報 74, 193-194쪽.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05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는 農 書 輯 要 에는 1517년(중종 12)에 安 東 府 使 로 있던 李 가 이 책을 新 刊 하면서 작성한 新 刊 序 가 붙어 있다. 25) 李 의 신 간서를 잘 검토하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농서집요 가 16세기 초에 다시 新 刊 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우는 新 刊 序 에서 이 책은 옛날에 이 두로 번역한 것< 吏 釋 >이 있었는데 監 司 金 相 公 ( 金 安 國 )이 國 家 에서 農 桑 에 힘 쓰는 뜻을 깊이 체득하여 蠶 書 와 더불어 모두 언문 번역< 諺 飜 >을 더하여 吾 府 ( 安 東 府 )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였다 라고 지적하였다. 26) 農 書 輯 要 와 蠶 書 를 경상도관찰사 金 安 國 이 함께 諺 文 으로 飜 譯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金 安 國 이 경상도관찰사로서 諺 飜 한 책에 대하여 中 宗 實 錄 에서는 農 書 와 蠶 書 를 諺 解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27) 中 宗 實 錄 의 기록은 金 安 國 이 諺 解 한 農 書 와 蠶 書 은 그 이전인 世 宗 代 에 이미 俚 語 로 번안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鄭 招 가 작성한 農 事 直 說 序 를 보면 古 農 書 를 飜 譯 刊 行 하고 頒 布 하게 한 것은 太 宗 代 의 일임이 확 실하다. 28) 중종실록 의 기사는 俚 語 로 번안하였음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世 宗 代 에 편찬된 農 事 直 說 을 지목하는 것은 될 수 없고, 따라서 태종대와 세 종대의 시기를 잘못 파악한 소치로 생각된다. 따라서 古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本 國 俚 語 로 번역한 시기는 태종대임이 분명하다. 태종대에 農 桑 輯 要 를 발췌하 여 번역문에 吏 讀 를 붙여 農 書 輯 要 를 간행한 것을 中 宗 12년 당시 경상도관찰 사 김안국은 다시 農 書 輯 要 와 蠶 書 를 언해하여 언해본을 만든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農 書 輯 要 는 諺 解 가 없고, 다만 俚 語 로 번역된 부분만 수록 25) 李 는 李 滉 의 숙부로 1517년 당시 安 東 府 使 로 재직하다가 任 地 에서 죽었다. 李 滉 이 李 의 문장을 모아 松 齋 集 ( 韓 國 文 集 叢 刊 17 輯 )을 편집하였는데, 松 齋 集 에 이 序 가 보이지 않는다. 26) 李, 農 書 輯 要 新 刊 序 ; 是 書 舊 有 吏 釋 監 使 金 相 公 安 國 深 體 國 家 務 農 桑 之 意 幷 蠶 書 皆 益 以 諺 飜 命 吾 府 梓 以 廣 其 節 序 寒 暖 之 候 耘 耕 穫 之 宜 條 秩 修 擧 瞭 然 於 人 目 誠 民 之 要 訣 也 民 之 覽 者 有 不 興 起 者 乎. 27) 中 宗 實 錄 권32, 중종 13년 4월 己 巳 (15-414); 如 農 書 蠶 書 乃 衣 食 之 大 政 故 世 宗 朝 飜 以 俚 語 開 刊 八 道 今 亦 頗 致 意 務 本 之 事 故 臣 亦 加 諺 解. 28) 世 宗 實 錄 권44, 세종 11년 5월 辛 酉 (3-181); 恭 惟 太 宗 恭 定 大 王 嘗 命 儒 臣 取 古 農 書 切 用 之 語 附 註 鄕 言 刊 板 頒 行 敎 民 力 本.
106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우가 序 를 붙인 農 書 輯 要 에 딸려 있는 新 刊 이라는 말 이 주목된다. 경상도 관찰사 金 安 國 이 諺 解 한 것과 李 가 새로 간행한 것은 별개의 것이고, 따라서 李 는 農 書 (실은 農 書 輯 要 )와 蠶 書 의 諺 解 本 을 간행하 면서, 다시 李 의 序 에서 언급되어 있는 吏 釋 을 덧붙여 따로 간행한 것이 바 로 農 書 輯 要 였다. 29) 그리고 이때 新 刊 된 農 書 輯 要 가 후대에 필사되어 현 재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를 토대로 태종대 이후 農 書 와 農 書 輯 要 의 편찬 상황을 시간 순서에 따라서 정리할 수 있다. 太 宗 代 에 古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本 國 俚 語 로 번역하면서 農 書 와 蠶 書 라는 제목의 農 書 를 편찬하였다. 30) 이후 한 참 시간이 지나간 후인 1517년(중종 12)에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김안국이 이 것들( 農 書, 蠶 書 )을 諺 解 하여 諺 解 本 을 만들었다. 이때 김안국은 옛날 태 종대에 本 國 俚 語 로 번역되어 있던 농서집요 를 같이 新 刊 하도록 안동부사 이 우에게 지시하였다. 그러자 이우가 정성스럽게 新 刊 序 를 덧붙여 농서집요 를 신간하였다. 그리고 이때 신간된 농서집요 가 후대로 전해지다가 어느 시점에 다시 필사되었고, 그 筆 寫 本 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농서집요 가 바로 諺 解 本 이 아니라 新 刊 本 이었기 때문에 다만 吏 讀 로 번역된 부분만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상집요 抄 錄 書 인 농서집요 는 이후에 農 書 라는 제 목의 책으로 자주 인용되어 활용되었다. 특히 世 宗 은 1428년 윤4월에 농사직 설 을 간행하기 위해 경상감사에게 老 農 의 견문을 정리하여 冊 子 로 만들어 올 리게 명령하면서 동시에 農 書 1,000부를 인쇄하여 올리도록 명령하고 있었 다. 31) 또한 세종은 농서 의 간행을 명령하기에 앞서 평안도와 함길도 兩 道 의 29) 태종대의 農 蠶 書 편찬과 農 書 輯 要 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에서 검토가 이 루어졌다. 金 容 燮, 1987 농서즙요 의 농업기술 세종학연구 2 : 吳 仁 澤, 1988 農 書 輯 要 의 耕 種 法 硏 究 부산대 석사논문 : 魏 恩 淑, 1988 12세기 농업기술의 발 달 釜 大 史 學 12 : 李 鎬 澈, 1990 農 書 輯 要 의 農 法 과 그 역사적 성격 經 濟 史 學 14. 30) 農 書 와 蠶 書 가 편찬된 것은 農 事 直 說 序 에서 보이듯이 분명히 太 宗 代 의 일이 었다< 世 宗 實 錄 권44, 세종 11년 5월 辛 酉 (3-181)>. 31) 世 宗 實 錄 권41, 세종 10년 윤4월 甲 午 (3-129).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07 농사가 그다지 신통치 않은 것을 염려하여 승정원으로 하여금 양도인을 만나서 農 作 狀 況 을 묻게 하고 아울러 農 書 를 가르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32) 그 리고 세종은 1438년(세종 21)에는 함길도관찰사의 계문에 의거하여 禮 曹 가 요 청하자 三 綱 行 實 圖 와 함께 農 蠶 書 를 함길도 富 居 縣 에 보내주기도 하였 다. 33) 이와 같이 농서집요 가 편찬된 이후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인 차 원에서 지방에 반포되거나 지방민을 가르치는데 이용되고 있었다. 농서집요 는 농상집요 의 抄 錄 書 라는 점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성격의 농 서가 필요하였다. 다시 말해서 농서집요 가 농상집요 를 抄 錄 하여 정리하면서 吏 讀 文 에 朝 鮮 고유의 農 法 을 고려하기는 하였지만 조선의 농업환경에 전적으로 근거한 농업기술만 충실하게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농서집요 는 조선 의 風 土 에서 즉 토질이나 기후조건에 따라 현실에서 수행되고 있던 조선의 農 法 을 문자화하려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농업현실에서 채택되어 적용하고 있는 기술내용을 담은 새로운 농서를 편찬하는 것은 하나의 시대적 과제였다. 世 宗 代 에 이러한 과제에 부응하는 농서로서 農 事 直 說 이 편 찬되었다. 世 宗 은 風 土 의 차이가 농업생산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을 農 事 直 說 이 편찬되기 전부터 토로하고 있었다. 1424년에는 卞 季 良 에게 每 月 마다 해야할 農 家 의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을 붙여서 자신에게 올리게 지시 하기도 하였다. 세종 스스로 경계를 삼으려는 의도에서 詩 經 의 風 과 無 逸 의 뜻을 이어받아 勸 農 을 잘 수행하려는 의도를 비친 것이었지만, 결국 風 土 의 차 이에 따른 농업기술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 것이었다. 34) 마지막으로 15세기 초반인 태종대에 편찬된 農 書 輯 要 에 수록된 농업기술의 연대를 어느 시기로 비정해야 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農 書 를 농업기술의 정리 로 파악하는 시각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農 書 의 年 代 즉 農 書 에 수록된 농 업기술이 실제 농사현장에서 활용되던 시기가 언제인지 확인하고 결정하는 작 업이기 때문이다. 실제 농사일에 널리 적용되고 실행되는 농업기술이 문자로 32) 世 宗 實 錄 권40, 세종 10년 윤4월 壬 辰 (3-128); 上 慮 平 安 咸 吉 兩 道 農 事 疎 闊 命 承 政 院 每 遇 兩 道 人 必 問 農 作 之 狀 且 使 知 農 書. 33) 世 宗 實 錄 권84, 세종 21년 3월 丁 巳 (4-195). 34) 度 支 志 外 篇 권3, 版 籍 司 田 制 部 一 勸 農 事 實 世 宗 6년(1424년).
10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정리되고 더 나아가서 체계화된 농서로 나타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적인 격 차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문자화되는 과정 자체, 즉 農 書 편찬 과정이 실제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더욱 오랜 세월동안 농민들이 활용하던 농업기술이 축적된 채 농민의 손과 머리에서 다른 농민의 손과 머리로만 계승되고 있었다. 입과 머리로 계승되는 구비문학에 비견될 수 있는 사정이 농업기술의 계승이라 는 부문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 새로운 農 書 가 등장하였 다면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농업기술은 당연히 앞시기의 농사일에 활용하던 것 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農 書 輯 要 에 등재되어 있는 농업기술 은 편찬시기인 태종대보다 앞선 14세기에 활용하고 있던 기술로 보아야 할 것 이다. 35) 3. 14세기 水 稻 耕 作 法 의 발달 조선 태종대에 편찬된 농서인 농서집요 에 수록된 水 稻 와 旱 田 作 物 재배법 을 14세기 고려말 조선초의 농업기술로 분석할 수 있다는 점은 앞에서 설명하 였다. 여기에서는 농서집요 의 농업기술 가운데 水 稻 耕 作 法 을 본격적으로 살 펴본다. 이때 우선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른바 回 換 農 法 이라는 耕 作 法 이다. 36) 回 換 農 法 을 벼 栽 培 法 의 한 양식으로 설정하는 견해에 따르면, 回 換 農 法 이란 동일한 田 地 에서 한 해는 水 稻 를 재배하고, 다음 해에는 다른 旱 田 作 物 을 재배하는 방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水 稻 와 旱 田 作 物 을 교대로 재배하여 어느 한 토지의 地 目 이 水 田 과 旱 田 으로 번갈아 설정하는 방식을 回 換 農 法 이라 고 지칭하였다. 그리하여 水 稻 作 에 있어서 休 閑 단계과 連 作 단계 사이에 이러한 경작방법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하는 견해였다. 이렇게 回 換 農 法 을 벼 재배법의 단계적인 발달과정에서 하나의 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고 파악하는 견해는 상당 35) 李 鎬 澈, 1990 農 書 輯 要 의 農 法 과 그 역사적 성격 經 濟 史 學 14에서는 農 書 의 年 代 를 결정하는데 序 文 의 기록에만 의존하여 農 書 輯 要 의 農 法 을 16세기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36) 金 容 燮 은 農 書 輯 要 의 水 稻 作 法 가운데 하나를 回 換 農 法 으로 파악하였다( 金 容 燮, 1987 農 書 輯 要 의 농업기술 세종학연구 2 : 1988 朝 鮮 後 期 農 學 史 硏 究, 一 潮 閣 재수록).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09 한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回 換 農 法 의 實 體 를 주장하는 견해의 유력한 자료 가 바로 農 書 輯 要 의 水 稻 耕 作 法 부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農 書 輯 要 의 水 稻 耕 作 法 서술은 農 桑 輯 要 에 인용된 齊 民 要 術 의 水 稻 耕 作 法 을 인용하고 번안한 것이었다. 農 書 輯 要 의 서술구조는 農 桑 輯 要 의 해당구절을 인용한 다음 吏 讀 文 으로 번안한 문장을 뒤에 붙여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吏 讀 文 으로 번안한 문장은 원래의 農 桑 輯 要 의 구절과는 상당히 다른 문맥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설명한 鄕 言 으로 註 를 붙여서 조선의 실정에 맞게 번안한 부분이었다. 37) 따라서 農 桑 輯 要 의 해당구절이 아니라 이두 번역문을 통해서 조선의 농업기술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農 書 輯 要 에 등장하는 水 田 農 法 을 吏 讀 文 을 토대로 자세히 살펴 보겠다. 農 書 輯 要 에 水 稻 作 法 으로 수록된 것은 두 조목이다. 하나는 齊 民 要 術 에 수 록된 淮 河 유역의 歲 易 農 法 을 번안한 것이고, 38) 다른 하나는 마찬가지로 齊 民 要 術 에 보이는 北 土 高 原 의 移 植 法 을 번역한 것이었다. 39) 먼저 歲 易 農 法 에 대 한 農 書 輯 要 의 吏 讀 飜 譯 文 은 다음과 같다. 色 吐 連 處 田 地 亦 或 田 或 畓 互 相 耕 作 爲 良 量 地 品 一 樣 田 地 乙 良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爲 乎 矣 三 月 內 耕 種 不 得 爲 去 等 四 月 上 中 旬 乙 不 違 耕 種 40) 여기에서 제시한 農 書 輯 要 의 吏 讀 文 은 齊 民 要 術 의 문장을 크게 변화시 켜서 번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번안이라는 것은 결국 原 文 에 근거하여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原 文 含 意 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뒤집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 37) 農 事 直 說 農 事 直 說 序 ; 太 宗 恭 定 大 王 嘗 命 儒 臣 取 古 農 書 切 用 之 語 附 註 鄕 言 刊 板 頒 行 敎 民 力 本 38) 賈 思, 齊 民 要 術 권2, 水 稻 第 十 一 ; 稻 無 所 緣 唯 歲 易 爲 良 選 地 欲 近 上 流 地 無 良 薄 水 淸 則 稻 美 也 三 月 種 者 爲 上 時 四 月 上 旬 爲 中 時 中 旬 爲 下 時. 39) 賈 思, 齊 民 要 術 권2, 水 稻 第 十 一 ; 北 土 高 原 本 無 陂 澤 隨 逐 曲 而 田 者 二 月 解 地 乾 燒 而 耕 之 仍 卽 下 水 十 日 塊 旣 散 液 持 木 斫 平 之 納 種 如 前 法 旣 生 七 八 寸 拔 而 栽 之 旣 非 歲 易 草 稗 俱 生 芟 亦 不 死 故 須 栽 而 薅 之 漑 灌 收 刈 一 如 前 法. 40) 農 書 輯 要 水 稻.
110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서 農 書 輯 要 의 위 번역문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齊 民 要 術 의 原 文 을 같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齊 民 要 術 의 해당 부분은 稻 無 所 緣 唯 歲 易 爲 良 選 地 欲 近 上 流 ( 地 無 良 薄 水 淸 則 稻 美 也 ) 이라는 짧은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41) 이 인용문에서 가장 해석 하기 곤란한 부분은 稻 無 所 緣 이라는 구절이다. 緣 이라는 글자를 因 緣 또는 憑 藉 로 해석할 수 있다. 42) 이때 因 緣 의 대상은 土 質 과의 특별한 因 緣 으로 해 석하는 경우와 作 物 과의 특정한 因 緣 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구분된다. 因 緣 의 대상을 土 質 로 해석하는 경우 稻 는 地 味 등에서 특별하게 좋아하는 것이 없 고 다만(대개) 歲 易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라는 풀이가 나올 수 있다. 43) 그리고 因 緣 의 대상물을 作 物 로 설정하는 경우 稻 가 緣 하는 바가 없다 라는 것은 경작체계에서 前 作 과 後 作 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연결되어 제어하는 특정 한 끈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즉 稻 의 재배는 특별하게 前 作 과 後 作 의 관계로 이어지는 다른 작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齊 民 要 術 에서 문제가 되는 구절인 稻 無 所 緣 을 稻 가 특정한 土 質 과 연 결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稻 를 경작하는 것은 일단 水 田 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水 田 을 開 田 하는 작업 자체는 특정한 토질 내지는 토양조건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土 質 자체를 가리키는 것 은 아니지만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上 流 에 가까운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는 지시도 부가되어 있다는 점에서 토양조건과 무관하다고 풀이하는 것은 무리 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稻 無 所 緣 은 前 後 의 작물 재배의 연관체계와는 무관하다는 조건 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44) 稻 가 다른 작물과 깊이 연결되지 않는 조건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水 田 에서 벼를 재배하는 것 외에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기 41) 賈 思, 齊 民 要 術 卷 2, 水 稻 第 十 一. 42) 石 聲 漢, 齊 民 要 術 校 釋 권2, 水 稻 第 十 一 ; 緣 因 沿 憑 藉 無 所 緣 指 前 作 後 作 今 年 對 上 年 沒 有 什 可 以 憑 藉 只 要 不 重 就 行. 43) 西 山 武 一 熊 對 幸 雄, 1957 校 訂 譯 註 齊 民 要 術 上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01쪽. 44) 石 聲 漢, 齊 民 要 術 校 釋 권2, 水 稻 第 十 一 ; 緣 因 沿 憑 藉 無 所 緣 指 前 作 後 作 今 年 對 上 年 沒 有 什 可 以 憑 藉 只 要 不 重 就 行.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11 때문에 歲 易 이라는 休 閑 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歲 易 이라는 휴한방 식을 지정한 다음 벼를 재배하는 適 地 로 上 流 지역을 지적하고, 토질의 비옥도 보다 田 土 에 댈 물이 맑은 것이 우선적인 조건이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齊 民 要 術 의 기사는 稻 를 歲 易 으로 재배하는 방식과 재배하기에 적당한 田 土 의 위치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農 書 輯 要 의 설명도 稻 를 재배하는 방식과 稻 를 재배하기에 적당한 田 土 에 대한 것이라야 걸맞게 된다. 바로 이러한 서술 내용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農 書 輯 要 이두문을 現 代 文 으로 해석하는 데 관건이다. 먼저 農 書 輯 要 의 吏 讀 文 을 1 色 吐 連 處 田 地 亦 或 田 或 畓 互 相 耕 作 爲 良 2 量 地 品 一 樣 田 地 乙 良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爲 乎 矣 와 같이 1과 2 2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조목을 회환농법으로 해석하는 한 입장에 따르면 1에 서 色 吐 連 處 에 대해 起 耕 했을 때 발( 土 + 發 ) 土 된 흙이 같은 색으로 이어 지는 들, 즉 土 性 이 같은 田 野 를 가리키는 것 으로 해석한다. 45) 이 경우 그 러한 田 地 를 한 해는 논으로 다음 해에는 밭으로 바꾸어 경작해 보아 地 品 이 田 穀 과 畓 穀 에 모두 좋은 것으로 판단되면, 그 농지에 매년 水 稻 를 田 穀 과 回 換 耕 作 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2에 나오는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을 해석하면서 글자대로 매년 回 換 하여 水 稻 를 耕 作 한 다 와 같이 해석하지 않고 水 稻 뒤에 田 穀 을 집어넣어 해석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전체적인 해석의 방식에서 앞의 色 吐 에서 爲 良 까지 이어지는 1구절을 2구절의 해석을 위한 前 提 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 악은 당연한 것이지만 1구절의 내용을 수행한 다음에 2구절의 내용에 들어있 는 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은 무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문장이 하 나의 農 法 을 설명하는 구절이라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상당한 기간을 소요하 는 과정을 거쳐 稻 를 경작하기에 적당한 田 土 를 선택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적어도 4-5 年 내지 6-7년의 耕 作 과정을 거쳐야 겨 우 回 換 耕 作 을 할 수 있는 田 土 인지 여부가 판가름난다는 것인데 이미 그러한 시간을 지난 뒤에는 輪 作 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이제 다른 입장에서 위의 조목을 해석해본다. 農 書 輯 要 에서 인용한 위의 구절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稻 를 재배하는 방식과 稻 를 재배하기에 적당한 45) 金 容 燮, 1988 農 書 輯 要 의 農 業 技 術 朝 鮮 後 期 農 學 史 硏 究, 一 潮 閣, 21쪽.
112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田 土 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의 구조를 보면 1과 2 두 부분으로 나뉘 어 있다. 1의 주어와 2의 주어는 문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처럼 서로 다르다. 하지만 둘다 田 地 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앞의 주어는 어떠어떠한 田 地 이고, 뒤의 주어도 또한 어떠어떠한 田 地 이다. 반면에 齊 民 要 術 의 구절 은 분명하게 稻 를 主 語 로 삼아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이 바 로 農 書 輯 要 의 이 구절이 탄생된 배경이다. 農 書 輯 要 의 吏 讀 文 을 만든 사람은 齊 民 要 術 의 稻 無 所 緣 이라는 구절 을 놓고 고심에 고심을 더하였을 것이다. 緣 이라는 단어를 뚜렷하게 설명 하는 구절이 農 桑 輯 要 에는 全 無 하기 때문에 더욱 고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그 결과 上 流 에 가까운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뒤에 나오는 구절과 같이 맥 락에서 의미를 파악하였고, 그리하여 緣 을 堤 를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의 한자어 사전에 해당하는 訓 蒙 字 會 에 따르면 緣 邊 은 바로 堤 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46) 여기에서 緣 은 결국 防 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되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稻 無 所 緣 이라는 구절은 稻 가 防 이 없을 경우 즉 稻 를 경작하는 곳 에 防 이 없을 경우 로 풀이된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唯 歲 易 爲 良 을 연 결시켜 해석하면 稻 를 경작하는 곳에 防 이 없을 경우 오직 歲 易 하는 것이 좋다 라는 해석문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더 강화시켜 주는 것이 바 로 防 이 없는 田 土 의 경우 上 流 에 가까운 지역을 선택해야 한다는 부가 규정 이었다. 다시 말해서 齊 民 要 術 의 문장을 稻 를 재배하는 데 물이 절대적으 로 필요한 데 防 과 이어지지 않는 지역은 歲 易 을 하는 것이 좋고, 가능하면 上 流 에 가까운 田 土 를 선택해야 한다. 라고 풀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문을 얻은 農 書 輯 要 의 吏 讀 文 작성자는 이러한 풀이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에 해석의 관건이 달려 있다. 水 稻 의 재배는 말그대로 물의 공급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齊 民 要 術 의 서술을 마치 제방과 이어지지 않는 지역에서도 稻 의 재배가 가능한 것으로 서 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욱 골머리를 감싸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여 기에서 農 書 輯 要 吏 讀 文 작성자는 두 갈래 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바로 齊 民 要 術 의 내용을 그대로 吏 讀 文 으로 작성하는 길 46) 崔 世 珍, 訓 蒙 字 會 地 理 ; 堤 언뎨 岸 也 緣 邊 也 亦 作.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13 과 조선의 農 法 에 걸맞게 齊 民 要 術 의 내용을 수정하여 吏 讀 文 을 서술하는 길 이다. 農 書 輯 要 의 吏 讀 文 작성자는 위와 같은 齊 民 要 術 문장의 해석을 그대로 吏 讀 文 으로 옮겨놓으면 자기가 해야할 일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는 齊 民 要 術 이 담고 있는 문장의 전체적인 含 意 를 살리면서 朝 鮮 의 水 田 農 法 현실에 걸맞게 吏 讀 文 을 작성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齊 民 要 術 의 문장이 갖고 있는 주요한 축은 稻 재배와 물의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農 書 輯 要 吏 讀 文 작성자가 지금 해결해야 될 과제인 稻 를 경작하기에 적당한 田 土 를 지정하는 문제를 풀어내는 데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吏 讀 文 을 작성하면서 防 에 대한 언급을 집어넣은 것이다. 바로 吐 가 防 을 가리 키는 단어로 사용한 것이다. 즉 防 에 이어진 田 地 는 田 이나 畓 이나 무엇으로 든 각각 耕 作 하여도 무방하다는 전제를 세워놓고, 그러한 防 에 이어진 田 土 중에서 地 品 이 한결같은 田 土 를 稻 의 경작지로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水 稻 경작지에 대한 추천을 한 다음 農 書 輯 要 의 吏 讀 文 作 成 者 는 水 稻 경 작법을 서술하였다. 이두문 작성자가 지시하는 耕 作 하는 방식은 回 換 이라는 방 식이었다. 그런데 齊 民 要 術 의 문장에서 경작방식으로 유일하게 지시한 것은 歲 易 이었다. 두 책 사이에 단순한 연관 관계만 맺고 있다고 추정하면 歲 易 을 回 換 으로 옮긴 것이 확실하다. 문제는 양자 사이에는 단순하지 않은 연관관계 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나온다. 따라서 農 書 輯 要 의 해당 구절을 올바 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경작방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나하나 풀이과 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우선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이라는 구절에 굳이 田 穀 을 집어넣어 해석하는 것 이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을 그대로 每 年 回 換 하여 水 稻 를 耕 作 한다 로 해석하여야 적당하고, 그럴 경우 回 換 을 歲 易 을 바꾸어 놓아도 전혀 문제거리가 없다. 다음으로 或 田 或 畓 의 해석으로 나아가 본다. 이 부분을 한 해는 논으로 경작하고, 다음해에는 밭으로 바꾸어 경작한다. 라고 해석 하는 것은 어색하다. 왜냐하면 或 田 或 畓 을 경작방식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의 地 目 을 설정하면서 경작하는 방식을 부가적으로 덧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47) 게다가 결정적으로 或 田 或 畓 은 우리가 주목하는 地 品 이 一 47) 或 田 或 畓 의 해석을 비롯하여 回 換 農 法 에 대한 검토는 다음 논문으로부터 많은
114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樣 인 토지 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따라서 農 書 輯 要 吏 讀 文 의 중심적인 서술 대상인 地 品 이 一 樣 인 田 土 의 경작방식에 대한 설명은 回 換 이 유일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에서 回 換 이라는 用 語 를 歲 易 의 吏 讀 譯 語 로 사용되었음 을 확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歲 易 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易 의 의미는 農 事 에 연관될 경우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田 土 를 다스리다 나아가 田 土 를 경작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때의 易 字 는 사실상 治 字 와 바꾸어 쓸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易 의 의미 가 治 字 와 동일하게 쓰이는 사례를 孟 子 에서 찾아볼 수 있다. 48) 易 의 두 번 째 의미는 바꾸다 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거르다 라는 뜻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 의미의 易 字 는 不 易, 一 易, 再 易 의 숙어를 구성하여 사용된 다. 周 禮 에 나오는 不 易 之 地 는 家 에 100 畝 로 하고, 一 易 之 地 는 家 에 二 百 畝 로 하며, 再 易 之 地 는 家 에 三 百 畝 로 한다. 는 구절에서 易 字 는 바꾸다, 거 르다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49) 결국 不 易 은 거르지 않는다., 一 易 은 한번 거른다., 再 易 은 두 번 거른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一 易 田 이라고 할 경우에는 한 번 걸러서 경작하는 田, 즉 1년 휴한으로 경 작하는 전토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歲 易 은 당연하게 易 字 앞에 一 年 을 의미하는 歲 가 붙어 있기 때문에 거르 다. 의 의미로 易 을 풀이해야 하는 단어이다. 즉 歲 易 이란 해를 거른다. 라는 뜻이다. 齊 民 要 術 에 사용된 歲 易 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農 書 輯 要 는 齊 民 要 術 의 歲 易 을 回 換 으로 풀이 하였다. 당연하게도 回 換 은 歲 易 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回 換 의 辭 典 的 인 의미를 검토하는 경우, 回 字 는 돌다, 돌리다 의 뜻을 가 지고 있고, 換 字 는 바꾸다, 교체하다, 고치다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 교시를 받았다는 점을 밝혀둔다. 김기흥, 1996 신라의 水 陸 兼 種 농업에 대한 고찰; 回 換 農 法 과 관련하여 韓 國 史 硏 究 94, 韓 國 史 硏 究 會. 48) 孟 子 集 注 卷 5, 文 公 章 句 上 ; 夫 以 百 畝 之 不 易 爲 己 憂 者 農 夫 也 ( 夫 音 扶 易 去 聲 易 治 也 ). 49) 周 禮 地 官 司 徒 第 二 ; 大 司 徒 凡 造 都 鄙 制 其 地 域 而 封 溝 之 以 其 室 數 制 之 不 易 之 地 家 百 畝 一 易 之 地 家 二 百 畝 再 易 之 地 家 三 百 畝.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15 이 확인된다. 즉 回 換 은 돌려가면서 바꾸다 또는 돌려가면서 교체하다 의 뜻을 지닌 熟 語 가 된다. 回 換 이란 무엇인가의 대상을 돌리고, 또는 교체하 는 방식을 형용한 것이다. 따라서 回 換 은 동작의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含 意 를 지니고 있고, 易 字 가 바꾸다, 거르다 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과 통용될 수 있는 마찬가지의 뜻을 지닌 것으로 판정할 수 있다. 즉 回 換 의 語 義 는 歲 易 의 그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은 每 年 水 稻 를 回 換 하여 耕 作 한다, 또는 每 年 水 稻 를 歲 易 하여 耕 作 한다 의 해석문을 부여할 수 있는 구절이다. 정리하자면 齊 民 要 術 의 水 稻 作 法 가운데 歲 易 의 耕 作 방식을 農 書 輯 要 에 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만 耕 作 地 즉 田 土 의 조건에 일정한 변화를 주면서 吏 讀 文 으로 번안하였다. 이제 확실한 것은 回 換 이 輪 畓 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과 回 換 을 벼경작법의 한단계로 설정하는 견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음 인용문을 앞서 인용한 것과 대비해서 살펴보면 回 換 의 의미가 歲 易 즉 休 閑 을 의미하는 것이 보다 확실해 진다. 즉 뒤에 나오는 北 土 高 原 의 水 稻 경 작법에 대한 번역문에서 문맥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陂 澤 이 없는 山 谷 은 地 가 좁아서 歲 易 할 수 없다. 作 畓 에 적당한 곳을 매년 경작 한다.(중략 : 이묘재종기술에 대한 설명-인용자) 모름지기 移 苗 하여 栽 種 하는 일 은 畓 을 매년 回 換 耕 作 하지 못하여 雜 草 가 무성하기 때문에 移 栽 하여야 쉽게 除 草 한다. 50) 陂 澤 이 없는 山 谷 에서는 땅이 좁아 세역(휴한)할 수 없으니 수전을 만들기에 적당한 곳을 매년 경작하라는 주장이었다. 덧붙여서 이앙법의 내용을 설명한 다음 이앙법을 하지않을 수없는 이유로 매년회환경작을 하지 않아서 잡초가 무 성하고 移 栽 를 해야만 쉽게 제초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우선 여기에서 는 회환경작의 대상이 어떠한 작물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답을 회환경작하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을 뿐이었다. 앞서의 인용문에서 每 年 回 50) 農 書 輯 要 水 稻 ; 陂 澤 無 在 山 谷 段 地 窄 歲 易 不 得 作 畓 限 當 庫 以 每 年 耕 作 (중략) 須 只 移 苗 栽 種 爲 臥 乎 事 段 畓 庫 乙 每 年 回 換 耕 作 不 得 爲 在 如 中 雜 草 茂 盛 爲 臥 乎 等 用 良 移 栽 爲 良 沙 易 亦 除 草.
116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換 水 稻 耕 作 이라고 명백히 한 것과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農 書 輯 要 麻 條 의 다음 기사가 주목된다. 옛날에 집이었던 자리는 瓦 石 이 많이 있어서 深 耕 해야 한다. 膏 가 지나치게 심 하면 麻 도 또한 生 長 하면서 傷 折 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단지 上 品 의 田 을 매년 回 換 한다. 田 은 길이로 세 번 耕 하고, 너비로 네 번 耕 하여 일곱 번 反 耕 하고 付 種 한다. 51) 農 書 輯 要 麻 條 에 나오는 위의 기사는 農 桑 輯 要 에 인용된 齊 民 要 術 의 기술을 번역한 것이었다. 齊 民 要 術 에서는 麻 를 재배하는데 良 田 이어야 하지 만 故 墟 를 쓰지 말도록 하고 있다. 척박한 田 地 는 糞 田 을 하고 기경숙치하되 전지를 세역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런데 번역자는 세역을 회환으로 번역하였 다. 모름지기 상등의 토지를 매년 회환하여 기경하고 付 種 하라는 지적으로 번 역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麻 를 上 品 田 에서 재배하는데 매년 回 換 경작하라 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도 회환의 구체적인 대상이 명확히 적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마를 가리킨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회환은 세역에 대한 번역으로서 결국 전지의 휴한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農 書 輯 要 의 편찬자는 麻 를 모름지기 上 等 의 토지에서 每 年 回 換 하여 起 耕 하고 付 種 하라는 지적으로 번역하였다. 다시 말해서 麻 를 上 品 田 에서 재배하는 데 매년 回 換 경작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도 회환의 구체적인 대 상이 명확히 적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麻 를 가리킨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 다. 결국 回 換 은 歲 易 에 대한 번역이었고, 결국 田 地 의 休 閑 을 가리키는 것으 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歲 易 이라는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農 書 輯 要 의 편찬자가 굳이 回 換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換 字 와 易 字 의 訓 蒙 字 會 의 音 訓 을 살펴보면 양자가 동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換 의 음훈을 밧골 환 52) 이라고 새기고, 易 의 그것을 밧 억 53) 이라고 붙이고 있다. 즉 換 과 易 은 동일한 뜻을 지닌 글자로 쓰이고 있었다. 이러한 51) 農 書 輯 要 麻 ; 故 家 代 段 瓦 石 數 多 爲 乎 等 用 良 深 耕 爲 齊 膏 過 甚 爲 乎 等 用 良 麻 亦 生 長 傷 折 爲 臥 乎 等 以 須 只 上 品 田 乙 每 年 回 換 田 長 追 赤 以 三 耕 廣 追 赤 以 四 耕 爲 等 如 七 度 爲 反 耕 付 種. 52) 崔 世 珍, 訓 蒙 字 會 下 卷 雜 語.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17 점에서 歲 易 이라는 용어 대신 回 換 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의 논의의 결과를 정리하여 먼저 水 稻 의 歲 易 農 法 에 대한 農 書 輯 要 의 吏 讀 文 은 현대문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田 土 가) 防 으로 이어진 곳의 田 地 는 혹은 밭으로 혹은 논으로 각각 耕 作 하는 것이 좋다. (이 가운데) 田 土 의 品 等 을 헤아려 한가지로 통일된 田 地 는 每 年 水 稻 를 回 換 하여 耕 作 하되 三 月 內 에 耕 種 하지 못하거든 四 月 上 中 旬 을 어기지 말 고 耕 種 할 것. 54) 농서집요 水 稻 에서 나오는 회환경작은 麻 條 에서와 마찬가지로 歲 易 에 대한 번역이었다. 그리고 북토고원에서의 회환경작의 대상이 회환수도경작이라고 명 확히 결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麻 에서와 같이 水 稻 를 지시한 것이었다. 명백히 다른 작물과의 돌려짓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수도를 매 년 회환경작하지 않기 때문에 잡초가 무성하다는 지적과 移 栽 를 해야만 제초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은 마조에서와 마찬가지였다. 回 換 耕 作 의 대상 즉 돌려 바꾸어 짓기의 대상이 水 稻 라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두문에서의 회환경작 이 휴한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회환 경작의 대상이었던 水 稻 즉 벼를 경작하는 방법은 休 閑 法 이었다. 결국 農 書 輯 要 에서 소개하고 있는 水 稻 耕 作 法 은 1년 휴한방식이었다. 農 書 輯 要 에 수록되어 있는 두번째 水 稻 耕 作 法 은 移 秧 法 이었다. 이 부분은 農 桑 輯 要 에 실린 北 土 高 原 에서의 수도재배기술을 번안한 기사이다. 물론 원 문은 제민요술 에 실려 있는 부분이다. 이 吏 讀 文 은 齊 民 要 術 의 水 稻 條 에서 북토고원의 수도재배를 설명한 부분을 번안한 것이었다. 55) 齊 民 要 術 의 원문 을 그대로 충실하게 번역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자의적으로 당시의 농업기 술을 참고하여 번안한 것이었다. 53) 崔 世 珍, 訓 蒙 字 會 上 卷 儒 學. 54) 農 書 輯 要 水 稻 ; 色 吐 連 處 田 地 亦 或 田 或 畓 互 相 耕 作 爲 良 量 地 品 一 樣 田 地 乙 良 每 年 回 換 水 稻 耕 作 爲 乎 矣 三 月 內 耕 種 不 得 爲 去 等 四 月 上 中 旬 乙 不 違 耕 種. 55) 賈 思, 齊 民 要 術 권2, 水 稻 第 十 一 ; 北 土 高 原 本 無 陂 澤 隨 逐 曲 而 田 者 二 月 解 地 乾 燒 而 耕 之 仍 卽 下 水 十 日 塊 旣 散 液 持 木 斫 平 之 納 種 如 前 法 旣 生 七 八 寸 拔 而 栽 之 旣 非 歲 易 草 稗 俱 生 芟 亦 不 死 故 須 栽 而 之 漑 灌 收 刈 一 如 前 法.
11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방죽이나 못이 없는 山 谷 에서는 田 土 가 좁아 歲 易 ( 休 閑 )을 할 수 없어 畓 으로 만 들기에 적당한 곳에 한정하여 每 年 耕 作 한다. 二 月 에 解 氷 하여 땅이 마르거든 火 燒 하고 起 耕 한 後 에 물을 넣는다. 10일째에 흙덩이가 풀어지거든 所 訖 羅 로 平 正 하게 하고 落 種 한다. 苗 의 길이가 七 八 寸 이거든 위의 예와 같이 起 耕 하고 平 正 한 다른 畓 에 疎 密 이 적당하도록 移 苗 하여 栽 種 한다. 모름지기 移 苗 栽 種 하는 일은 畓 을 每 年 回 換 하여 耕 作 하지 못하여 雜 草 가 茂 盛 하게 되는데 移 栽 하여야 쉽게 除 草 할 수 있기 때문이다. 56) 먼저 제민요술 에서 소개하고 있는 拔 而 栽 之 방식에 대한 해석을 명확 하게 할 필요가 있다. 북토고원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陂 澤 이 없는 수전에서의 제초기술인 拔 而 栽 之 하는 방법을 번역자는 온전한 이앙법으로 해석하고 있 기 때문에 제민요술 의 拔 而 栽 之 를 이앙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 기 때문이다. 제민요술교석 을 지은 중국의 저명한 농서 연구자 石 聲 漢 은 拔 而 栽 之 를 除 草 방식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 석성한은 먼저 連 作 地 라는 점, 둘째 잡초를 제거한 다음 다시 심어주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拔 而 栽 之 를 除 草 방식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57) 제민요술 에서 소개하고 있는 拔 而 栽 之 제초방식의 원리는 17세기에 편 찬된 農 家 集 成 에 수록된 反 種 法 이라는 조목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 다. 58) 농가집성 에 수록되어 있는 反 種 法 이 雜 草 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임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농상집요 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생장상태에 있는 작물을 전토에서 뽑았다가( 拔 )제초를 제대로 수행한 다음 다시 심는( 栽 ) 방식도 除 草 56) 農 書 輯 要 水 稻 ; 陂 澤 無 在 山 谷 段 地 窄 歲 易 不 得 作 畓 限 當 庫 以 每 年 耕 作 爲 臥 事 乎 是 良 二 月 解 氷 地 乾 爲 去 等 火 燒 起 耕 後 入 水 十 日 第 土 塊 解 散 爲 去 等 所 訖 羅 以 平 正 令 是 遣 落 種 苗 長 七 八 寸 是 去 等 右 例 以 起 耕 平 正 爲 乎 他 畓 庫 良 中 疎 密 得 中 爲 只 爲 移 苗 栽 種 爲 乎 矣 須 只 移 苗 栽 種 爲 臥 乎 事 段 畓 庫 乙 每 年 回 換 耕 作 不 得 爲 在 如 中 雜 草 茂 盛 爲 臥 乎 等 用 良 移 栽 爲 良 沙 易 亦 除 草. 57) 石 聲 漢, 齊 民 要 術 校 釋 권2, 水 稻 第 十 一 ; 拔 而 栽 之 據 注 文 是 爲 了 雜 草 多 又 說 旣 非 歲 易 故 須 栽 而 之 顯 然 是 連 作 地 則 其 拔 栽 當 是 拔 後 經 過 除 草 仍 栽 在 原 田 上 所 以 這 裏 的 拔 栽 不 是 先 作 秧 田 移 栽. 58) 申, 農 家 集 成 種 稻 ; 反 種 法 水 田 無 水 雜 草 荒 蕪 未 易 除 却 處 待 水 取 禾 苗 不 至 損 傷 束 如 移 秧 者 反 耕 更 種 一 如 苗 種 法 則 鋤 功 甚 省.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19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農 書 輯 要 편찬자는 拔 而 栽 之 를 제초법이 아니라 수도 耕 作 法 가운데 移 秧 法 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농가집성 의 反 種 法 에서 볼 수 있듯이 농상집요 의 拔 而 栽 之 除 草 法 의 원리가 17세기 조선의 農 法 현실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태종대인 15세기에서도 이러한 拔 而 栽 之 의 제초방식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 또 는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함께 제기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을 아 직 확실하게 논증할 수 없지만, 가능성의 측면에서는 충분히 감안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이 성립할 경우 농서집요 의 편찬자는 제초법의 차원으로 拔 而 栽 之 방식을 소개하지 않고 이앙법으로 飜 案 하는 입장을 취하였는지 설명이 더해질 필요가 있다. 결국 移 秧 法 이 農 法 의 하나로 실행되고 있던 사정 을 농서집요 의 편찬자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拔 而 栽 之 를 제 초법이 아니라 이앙법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5세기초 태종대 이앙법의 지역적 보급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경상도와 강원 도 일부 지방에서 행해지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태종은 前 麟 蹄 府 尹 李 殷 이 올린 제언에 관한 상서에 대하여 내가 듣건대 경상도의 백성들은 여름에 벼의 모를 옮겨 심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가뭄을 만나면 농사일을 전부 망치 게 될 것이니 내년부터 일절 금지시켜라 59) 는 왕명을 내리고 있었다. 태종은 경상도 인민들이 여름철에 稻 苗 를 移 種 하는 이앙법을 채택하여 수전농사를 짓 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태종은 이앙을 하려고 하다가 만약 건조한 날씨 를 만나게 되면 농사를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고 하면서 다음해부터 일절 금지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써 15세기 초반의 기록에 경상도에서 이앙법이 실시되 고 있었다는 사실과 태종이 이앙법을 금지시키는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에서도 대구, 하양 등지에 대하여 묘종을 잘 한다( 長 於 苗 種 ) 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60) 경상도와 강원도에서의 59) 太 宗 實 錄 권27, 태종 14년 6월 壬 子 (2-22) ; 上 曰 予 聞 慶 尙 之 民 當 夏 月 移 種 稻 苗 若 値 旱 乾 全 失 農 業 自 明 年 一 禁. 60) 李 泰 鎭, 1994 조선초기의 水 利 정책과 水 利 시설 李 基 白 古 稀 紀 念 韓 國 史 學 論 叢 ( 下 ), 一 潮 閣, 1064면; 世 宗 實 錄 地 理 志, 慶 尙 道, 慶 州 府, 大 丘 郡 (5-639); 厥 土 肥 相 半 風 氣 暖 俗 好 苗 種 墾 田 六 千 五 百 四 十 三 結 ; 世 宗 實 錄 地 理 志, 慶 尙 道, 安 東 大 都 護 府, 河 陽 縣 (5-644); 厥 土 肥 相 半 墾 田 二 千 二 百 十 六 結 ( 水 田 三 分 之 一 ) 土 宜 稻 黍 粟 楮 木 綿 麻 俗 尙 苗 種.
120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수전농법에 이앙법이 적용된 것은 14세기 이전 시기부터인 것으로 생각된다. 61)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15세기 초반 이앙법이 조선의 농업현실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따라서 農 書 輯 要 의 편찬자는 拔 而 栽 之 를 제 초법이 아니라 이앙법으로 번역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모판을 만들고 本 田 을 기경하여 묘가 7,8촌 자라게 되면 옮겨 심는 이앙법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5 세기 농서인 농사직설 에 이앙법을 가뭄에 커다란 피해를 입히는 경종법으로 주의를 붙이고 있는 반면에 농서집요 는 잡초제거에 혁신적인 효용이 있다는 이앙법의 장점을 크게 지적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14세기 농업기술의 양상을 보여주는 농서집요 의 벼 재배법을 살 펴보았다. 그리하여 休 閑 法 과 移 秧 法 이 같이 수행되고 있다는 점을 정리하였 다. 15세기에 편찬된 농사직설 에 정리된 벼 재배법이 水 耕 直 播 法 중심의 連 作 法 인 것을 감안한다면 62), 14세기 무렵 한국의 농업기술 발달 가운데 특히 水 稻 耕 作 法 은 休 閑 法 에서 連 作 法 으로, 그리고 直 播 法 에서 移 秧 法 으로 변화 발 달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4. 맺음말 : 14세기 水 稻 耕 作 法 발달의 배경 본 논문에서 14세기 水 稻 耕 作 法 발달의 방향과 전개과정을 休 閑 法 에서 連 作 法, 直 播 法 에서 移 秧 法 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수도 경작법의 발달이 과연 어 떠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취된 것인지 대략 그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 로 맺음말을 채우려고 한다. 그동안 고려후기, 고려말 농업기술의 발달을 설명 하는 많은 연구 성과들이 농업생산력 발달의 양상을 지적하고 제기하는 데 그 치고 있었다. 따라서 농업기술의 발달의 모습을 찾아내어 이를 소개하는 연구 는 충실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농업기술의 발달, 농업생산 61) 홍희유는 조선전기에 모종법(묘종법, 이앙법)이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일부 지역 에서도 널리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1963, 15세기 조선 농업기술에 대한 고찰 북한민속학자료집 (주강현 엮음, 1989 북한의 민속학, 재수록, 60면). 62) 農 事 直 說 을 분석하여 조선초기 15세기 농법의 성격을 밝힌 김용섭의 연구성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연구논저가 農 事 直 說 의 水 稻 耕 作 法 을 連 作 法 으로 파악하고 있다.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21 력의 발달은 자연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고 논증이 요구 된다. 휴한법에서 연작법으로의 전환은 농업기술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量 田 法 의 전환도 불러일으킨 커다란 경제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사건 63) 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농업기술 발달의 역사적 배경에 주목한 연구로 고려말 조선초 농업기술 발달 의 動 因 으로 인구증가를 지적한 연구를 찾아볼 수 있다. 64) 이 연구는 이후 고 려후기 인구증가 요인 생성과 향약의술의 발달을 살펴보면서 앞서 농업기술 발 달의 動 因 으로 인구증가를 지적한 것을 보완한 연구 성과로 발전되어 제출되었 다. 65) 농업기술 발달에 대한 사회사적인 원인 분석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연 구성과 외에 농업기술 발달의 동인에 주목한 다른 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본 논문은 고려말 조선초 14세기 농업기술 발달의 배경으로 인구 증가의 요 인 생성뿐만 아니라 고려말 조선초 농경지의 형편, 즉 농경지의 위치와 활용양 상의 변동에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당시 稻 田 의 형편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말 연해 지역의 형편을 趙 浚 은 鴨 綠 이남 은 대부분 모두 산이고, 비옥한 전토는 濱 海 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옥한 들판 에 있는 수천리 稻 田 이 왜구들에게 점령되어 갈대가 하늘과 맞다을 정도가 되 었다. 나라가 이미 魚 鹽 과 畜 牧 의 이득을 잃었고, 또한 沃 野 에서 들어오는 良 田 의 수입도 상실하였다 66) 고 통탄하였다. 조준의 지적에서 稻 田 이 주로 濱 海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수천리 稻 田 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왜구의 침입과 焚 蕩 은 14세기 중엽부터 말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조선전기 定 宗 때에 倭 寇 가 우리나라의 근심이 된 것이 거의 50여 년이다 67) 라고 회고할 정도로 50 63) 고려후기에서 조선에 이르는 시기에 발생한 量 田 法 의 변동 즉 單 一 量 田 尺 에서 隨 等 異 尺 으로의 변화를 休 閑 農 法 에서 常 耕 農 法 으로 전환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 는 견해가 주목된다.( 金 泰 永, 1983 朝 鮮 前 期 土 地 制 度 史 硏 究, 지식산업사, 191-193쪽. 64) 李 泰 鎭, 1986 韓 國 社 會 史 硏 究, 지식산업사, 19쪽. 65) 李 泰 鎭, 2002,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 태학사, 50쪽. 66) 高 麗 史 節 要 권33, 辛 祐 14년 8월; 自 鴨 綠 以 南 大 抵 皆 山 肥 膏 之 田 在 於 濱 海 沃 野 數 千 里 稻 田 陷 于 倭 奴 際 天 國 家 旣 失 魚 鹽 畜 牧 之 利 又 失 沃 野 良 田 之 入. 67) 定 宗 實 錄 권1, 定 宗 원년 5월 乙 酉 (1-149); 倭 寇 爲 我 國 患 幾 五 十 年 矣.
122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년간에 걸친 커다란 시련이었다. 농업생산의 측면에서 50년 동안 수천리 稻 田 을 경작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면 당연히 이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의 농업기술이 요구되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休 閑 法 에서 連 作 法 으로의 농업기 술 발달이 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해지역 개간을 비롯한 低 地, 低 濕 地 개간 68) 이 고려말 조선초에 이루어지 는 상황은 당연히 왜구의 침입을 물리친 다음, 또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이 절박한 과제였던 사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또한 農 事 直 說 에 草 木 茂 密 處 와 沮 潭 潤 濕 荒 地 의 개간방법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데 산전개간에 해당되는 전 자보다는 저습지개간에 해당되는 후자에 대해 훨씬 많은 비중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 69) 도 평화로운 개간의 점진적 확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삼기 보다는 현실적인 생존의 필요성에 따른 개척의 역사적 환경을 감안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다. 왜구로 인한 피해의 직접 대상자는 바로 농민과 향촌사회였다. 물론 沿 海 州 郡 에서 부세징수가 상당기간 중단되면서 국가의 세입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農 地 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정은 특히 京 畿 와 下 三 道 지역에서 가장 극심하였다. 70) 경상도와 전라도 沿 海 의 畓 은 벼 1,2 斗 를 파종 하면 소출이 10여 石 에 달하여 1 結 의 소출이 많으면 50 60 石 적어도 20 30 石 을 내려가지 않았고 旱 田 역시 비옥하여 소득이 많은 곳이었다. 71) 이러한 곳이 왜구의 침략으로 稻 田 數 千 里 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農 民 들은 이를 타파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절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절실 함이 休 閑 法 을 連 作 法 으로 바꾸는 동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농업기술상의 전환, 발달은 당대의 농업현실의 난점을 타파하려는 농민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68) 조선전기 低 平, 低 濕 地 개간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고. 李 泰 鎭, 1989 15-16세기의 低 平 低 濕 地 開 墾 동향 國 史 館 論 叢 2, 국사편찬위원회. 69) 魏 恩 淑, 1998 高 麗 後 期 農 業 經 濟 硏 究, 혜안. 70) 高 麗 史 권78, 食 貨 志 辛 禑 14년 趙 仁 沃 上 疏 ; 全 羅 慶 尙 楊 廣 三 道 國 家 之 腹 心 倭 奴 深 入 擄 掠 我 人 民 焚 蕩 我 府 庫 千 里 蕭 然. 71) 世 宗 實 錄 권49, 세종 12년 8월 戊 寅 (3-252); 摠 制 河 演 以 爲 (중략) 如 慶 尙 全 羅 沿 海 邑 種 稻 一 二 斗 ( 石 의 잘못인 듯) 而 所 出 或 至 十 餘 石 一 結 所 出 多 則 逾 五 六 十 石 小 不 下 二 三 十 石 旱 田 亦 極 膏 所 出 甚 多 若 京 畿 江 原 道 依 山 州 郡 則 雖 種 一 二 石 所 出 不 過 五 六 石.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23 우리 역사에서 休 閑 法, 連 作 法, 直 播 法, 移 秧 法 등의 농업기술은 기술적인 내용의 先 進 性 여부에 의해서 실제 현실의 농사일에 활용되는 지위를 얻는 것 은 아니었다. 농업기술의 갖고 있는 주요한 특색과 당대현실의 농업조건이 결 합되었을 때 실제로 농사일에 활용되는 농업기술이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水 稻 耕 作 法 이 直 播 法 에서 移 秧 法 으로 변화 발달하였지만, 오늘날 새로운 농업기 술 연구개발과 지도교육을 수행하고 있는 농촌진흥청은 直 播 기술을 새롭게 개 발하여 보급에 나서고 있고, 이에 따라 移 秧 法 에서 直 播 法 으로 역류현상이 두 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농업기술의 변화는 당대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맺음말에서 제시 한 14세기 농업기술 발달의 배경에 대한 문제제기를 앞으로 보다 충실하게 해 결해나갈 과제가 놓여 있다. 앞으로 고려의 田 品 制 와 量 田 制 를 비롯한 농지활 용양상과 조선초의 量 田 制 와 농지활용실태 등을 農 法 의 전환 발달과 연관시켜 연구할 과제로 남아 있다.
124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 Abstract > Development of Agricultural Techniques during the 14th Century from Late Korea Dynasty to Early joseon Dynasty on the aspect of Rice Cultivation. This essay aim to explain the development of farming techniques in paddy-field farming during the 14th century. At first we research the method of rice farming by way of examine Nongseojipyo( 農 書 輯 要 ). Nongseojipyo is the first agricultural manual in Korean history. It gathered farming technology which had used during that times by peasants, and it named as Essentials of Farming Manuals(Nongseojipyo : 農 書 輯 要 ), and it had published since 1409. First of all this manual`s publishers extracted some portions of Essentials of Farming and Sericulture (Nongsangjipyo : 農 桑 輯 要 ), the China`s old agricultural manuals, and therefore translated it in consideration of native farming method. In 1429 Straight Talk on Farming(Nongsajiksol : 農 事 直 說 ) was compiled by Jeong Cho( 鄭 招 ) and Byen Hyomun( 卞 孝 文 ) under Sejong( 世 宗 ). This was designed to meet the specific conditions of Korean natural feature. We inquire into wet-field cultivation method( 水 田 農 法 ). In Nongseojipyo( 農 書 輯 要 ) the general method of plowing and seeding( 耕 種 法 ) was two ways. The one is two or three field system, the other is rice transplantation method. In wet-rice cultivation method of 15th century, due to three method in Nongsa Chiksol, the principal method was the direct sowing of wet-tilled fields. Farmers irrigated wet-fields or gathered rainfall, and then tilled with plough. Beforehand the seed was soaked to pregerminate it. The second method was the direct sowing of dry-tilled fields. In case they had suffered from spring drought, they could have adapted to rice cultivation. The technic of transplant rice seedling was the third. The government of Chosun Dynasty constructed many dams( 堤 堰 )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염정섭) 125 and bo( 洑 ) for irrigation. Therefore the number of water supply esta- blishment had been increased in 15th and 16th century. In this point we can find the development of farming method. Keywords : farming technique, Nongseojipyo( 農 書 輯 要 ), plowing, seeding, development of farming technique
126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참고문헌 高 麗 史, 高 麗 史 節 要, 太 宗 實 錄, 世 宗 實 錄, 世 宗 實 錄 地 理 志 賈 思, 齊 民 要 術 ( 石 聲 漢, 齊 民 要 術 校 釋 ), 周 禮, 孟 子 集 注 農 書 輯 要, 農 事 直 說, 申, 農 家 集 成, 崔 世 珍, 訓 蒙 字 會 鄭 道 傳, 三 峰 集 권7 朝 鮮 經 國 典 宮 島 博 史, 1980 朝 鮮 農 業 史 上 における 十 五 世 紀 朝 鮮 史 叢 3 권영국, 1999 고려시대 農 業 生 産 力 연구사 검토 史 學 硏 究 58 59 金 榮 鎭, 1983 農 林 水 産 古 文 獻 備 要 韓 國 農 村 經 濟 硏 究 院 金 榮 鎭, 1984 朝 鮮 時 代 前 期 農 書 韓 國 農 村 經 濟 硏 究 院. 金 容 燮, 1980 農 書 小 史 農 書 1 ( 韓 國 近 世 社 會 經 濟 史 料 叢 書 3), 아세아문화사 金 容 燮, 1988 農 書 輯 要 의 農 業 技 術 朝 鮮 後 期 農 學 史 硏 究, 一 潮 閣 金 容 燮, 2000 高 麗 刻 本 元 朝 正 本 農 桑 輯 要 를 통해서 본 農 桑 輯 要 의 撰 者 와 資 料 韓 國 中 世 農 業 史 硏 究, 지식산업사 金 容 燮, 2000 高 麗 時 期 의 量 田 制 東 方 學 志 16, 1975( 韓 國 中 世 農 業 史 硏 究, 지식산업사, 재수록) 金 泰 永, 1983 朝 鮮 前 期 土 地 制 度 史 硏 究, 知 識 産 業 社 김기흥, 1996 신라의 水 陸 兼 種 농업에 대한 고찰; 回 換 農 法 과 관련하 여 韓 國 史 硏 究 94, 韓 國 史 硏 究 會 西 山 武 一 熊 對 幸 雄, 1957 校 訂 譯 註 齊 民 要 術 上 東 京 大 學 出 版 會 안병우, 1995 농업생산력 발달과 상공업 한국역사입문 2, 풀빛 廉 定 燮, 2002 杏 村 李 의 農 桑 輯 要 도입과 의의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 상, 일지사 吳 仁 澤, 1988 農 書 輯 要 의 耕 種 法 硏 究 부산대 석사논문 吳 仁 澤, 1999 農 書 輯 要 를 통해서 본 조선 초기의 耕 種 法 지역과 역사 5 魏 恩 淑, 1988 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 釜 大 史 學 12 魏 恩 淑, 1998 高 麗 後 期 農 業 經 濟 硏 究, 혜안 魏 恩 淑, 2000 元 朝 正 本 農 桑 輯 要 의 농업관과 간행주체의 성격 한국중세사 연구 8, 한국중세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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