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동북아 문화공동체 특별연구위원회 구 분 성 명 소 속 및 직 위 위 원 장 김 광 억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김 우 상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 준 식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전 영 평 대구대 도시행정학과 교수 위 원 정 진 곤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 정 하 미 한양대 일본언어 문화학부 교수 최 진 욱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최 흥 석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본 서는 경제 인문사회연구회 2005년도 협동연구사업 의 일환으로 경제 인문사회연구회 소관 8개 국책연구기관과 3개 기관이 협동으로 수행한 연구과제 중 하나입니다. 본 서에 수록된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당 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요 약
I. 연구의 의의 및 분석틀 동북아시아 문화공동체 형성이라는 대 주제와 관련하여 대중문화 의 영역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동북아시아라는 보다 큰 지역을 중심으로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번영의 기틀을 마련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언설들에도 불구하 고, 국가 간에는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하고, 역사인식의 현격한 차이 가 발견되며, 정치경제적인 현실에서도 국가중심의 이해관계를 벗어 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1990년대 들어 주목되었던 일류( 日 流 ) 현상이나 최근 부각되고 있는 한류( 韓 流 ) 현상 등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특정한 문화 상품 의 소비라는 행위를 통하여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공통의 요소를 발견해 갈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듯이 보인다. 인터넷과 미디어 산업의 발달은 국가의 정책이나 기업의 대응이 따라가기 어려 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전 세계의 소비자를 연결하고 있으며, 특정 문화 상품에 대한 소비자, 수용자의 반응은 생산자, 기획자는 물론 유통에 종사하는 측에서 조차 전혀 의도하거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 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대중문화 및 문화상품의 소비 에 나타나는 초국가적인 흐름의 분석을 통하여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는 문화공동체 형성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먼저 동북아 공동체의 주된 주체라 할 수 있는 한국, 중국, 일본의 각국에서 아시아의 대중문화에 대한 인 식과 흐름이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고 그것을 배경으로 현황에 관한 이해 및 전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실 대 중문화의 흐름을 동북아 라는 지역에 한정하여 논하는 것은 매우 인 위적이고 부자연스런 설정이다. 그것은 1990년 이래 현격하게 긴밀 해진 대중문화의 교류 현상은 동북아뿐 아니라 대만, 싱가포르, 베 트남, 타일랜드 등 동남아시아 각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역에 걸 iii
쳐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지구적 확산을 서구와 비 서구로 나누고, 일본이나 홍콩, 한국 등이 아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의 새로운 문화중심이 되는 가능성을 흔히 말하는 탈중심화 혹 은 다중심화 의 역학에서 이론화 하고자 할 경우에도 동북아의 3국 과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을 나누어 접근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문화산업이나 대중문화 수용에서 주요 배경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발달단계나 근대성의 차이를 보더라도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동일한 NIES계열에 속하는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과의 상호교류 확산의 가능성을 논하는 것이 더욱 용이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역사적 근접성으로 인하여 한국인의 인식 속에서 중국과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구분되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이 바로 동북아 공동체 논의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보고에서는 다소 인위적인 경계 짓기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중국, 일본에 한정하여 대중문화 교 류의 역사적 배경 및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증진방안 에 대해서는 비록 단기간이기는 하나 본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접하게 된 현장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한 중 일 3국간의 대중문화 교 류를 보다 원활히 하고 나아가 그를 통한 상호이해 및 공유의 영역 을 넓혀가기 위하여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 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II. 한 중 일의 대중문화 수용의 역사와 현황 여기서 현황은 주로 동아시아 각국에 일본 대중문화의 침투, 즉 소위 일류( 日 流 )가 대두된 것은 시작으로 미디어 산업 간의 상호교 류 및 연계가 크게 확대되는 1990년대 이후를 말한다. 그러나 이 보 고에서 간단하게나마 그 이전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는 것은 그를 통하여 1990년대 이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지니는 의미를 보다 넓 iv
은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며, 나아가 앞으로의 흐름을 전망 하는데도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 한 중 일 아시아 대중문화 수용의 역사적 배경 최근 들어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대중문화의 교통이 크게 강조 되고 또한 주체적인 소비자의 역할이 주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대중문화의 흐름은 국가 중심의 정치경제적 역학에 의해 크게 좌우 되어 왔음을 부정하 기 어렵다. 현대적인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1900 년대 초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특히 동북아시아 3국에서의 대 중문화의 현황은 문화산업이 민족정체성의 문제 및 국가주의적인 헤 게모니와 밀접히 관련되어 왔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대중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 으며, 해방이후에는 일본의 대중문화 수입이 차단된 속에서 미국 대 중문화 상품의 절대적 지배를 받아왔다. 그와 같은 상황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냉전 구도의 형성에 한국이 최전선으로 편입되었 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최근에 이르기 까지 국가의 공식적 정책으로 채택되었던 일본 대중문화 상품의 수 입 금지 조치 역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한국이 독립된 국민국가로 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데 일본의 영향력을 최대한 차단하여야만 했던 절박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적 독자성을 개발하고 추구하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미국의 대중 문화 상품을 대량으로 받아들이고 흡수하면서 그에 바탕 하여 문화 산업의 기반을 유지하고 소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체제 상의 차이로 인하여 공산화 이후 중국 본토와의 대중문화 교류도 단 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 이전 한국과 일본 및 중국과의 대중문화 v
교류가 국가적 이해관계 및 국제정치적 역학에 의해 정상적인 흐름 이 차단되고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아가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및 한국의 민주화 이후 단계적으로 진행된 중국과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개방조치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90년대 한국사회와 경제의 규모는 일정한 정도로 성장하여 비록 일부의 우려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의 대중문화 요소가 유입되더라도 자국의 문화산업이나 경제가 크게 위협받지 않 을 것이라는 판단이 그 배경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간의 정치경제적 역학은 여전히 대중문화산업과 문화소비 현상 의 기초적 환경으로서 강고하게 존재하며, 문화의 흐름에 밀접한 영 향을 미치고 있음이 확인된다. 중국의 경우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서구의 영향 속에 대중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1940년대에는 대개 틀을 잡고 있었고, 일 본과는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중화인민공 화국 성립 이후 본토에서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같은 사회주 의 국가인 소련이나 동구권과의 교류 활동을 제외하고는 다른 문화 권과의 교류가 거의 자취를 감춘 반면, 홍콩은 아시아 여러 나라와 합작의 방식을 통해 매우 활발한 교류를 실천하게 된다. 1950년대 홍콩 영화산업은 한국과 일본,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그리고 70년대에는 유럽과 미국 등 다양한 나라들과 합작하 여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처럼 홍콩이 다른 나라와 합작 영화 제작 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를 하는 동안 중국 본토는 대약진운동, 반우 파투쟁, 문화혁명 등 잇달아 등장한 정치적 캠페인들과 대중운동의 영향으로 영화산업을 포함한 대중문화 영역 전체가 계속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1980년대 들어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단절 되었던 대만과 홍콩의 대중문화가 중국 본토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중국에서도 다른 나라와의 대중문화 교류가 다시 등장하게 vi
되었다.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와 문화산업의 성장이 있었지만 지난 시기의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만들어진 공백으로 인해 중국 문화산 업은 대중들의 요구를 충족시킬만한 마땅한 콘텐츠가 부족한 상황에 서 홍콩과 대만 및 지리적으로 근접한 일본의 대중문화들이 그 자리 를 채우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소위 강타이( 港 臺 ) 로 일컬어지던 홍콩과 대만의 대중문화가 압도적으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아시아로부터의 대중문 화 유입이나 교류를 특별히 금지하거나 차단하였던 예는 보이지 않 는다. 오히려 1900년대 들어 일본의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시아주의 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상하면서, 일본 문화 산업의 활동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확장되 었다. 중국의 만주, 상해와 조선의 경성 등지에 영화협회를 설립하 어 일본영화업계의 대륙진출 거점을 마련하였으며, 음반업계도 영화 업계와 연계하여 만주나 상해 등지로 진출하였다. 일본 내에도 1930 년대에 소위 대륙붐 이라 하여 영화와 가요를 비롯한 대중문화 영역 에서 중국대륙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현상이 나타났으며, 상당한 수의 중국이나 조선인 가수, 연기자들이 일본에 서 데뷔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전반에 걸 쳐 일본에서 일어난 대륙붐 은 국책에 의한 붐의 조성이라는 성격이 강했으며, 대중문화 영역에서 일어난 붐은 아시아주의 이데올로기의 좀더 대중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 다. 따라서 대륙붐에서 반일하고 항일하는 아시아의 모습은 그려지 지 않았으며, 중국이나 조선에서 만들어진 영화 등이 직접 일본에 소개되고 일본인에게 소비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전반에 걸친 대륙붐 에 이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1970년대 이후의 아시아붐(1980년대의 한국붐을 포함함), 그리고 1990년대 이후 계속되어 온 아시아붐과 vii
2000년대의 한류 등 몇 차례 동아시아의 대중문화 붐이 발견된다. 1970년대 아시아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의 주된 배경은 한국, 중국과 의 국교 정상화였다 (각각 1965년과 1972년). 물론 그 이전에도 1950년대에는 한국의 길옥윤 ( 吉 屋 潤, 일본에서는 기치야 준으로 알 려짐)이 재즈밴드에서 색소포니스트로 활약하고 있었고, 기타 일제 시대에 형성된 인맥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뮤지션들이 있었으며, 1960년에는 패티 김이 NHK가 공식적으로 초청한 최초의 한국가수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1965년의 한일수교는 양국 의 대중문화 교류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다. 곧 일본 음반업계의 주도하에 이미자, 패티 김, 남상규, 김소희(판소리) 등 많은 한국인 가수들이 일본에 와서 음반을 취입, 판매하였다. 그러 나 한일수교라는 정치적 맥락과 일제시대의 인맥 등을 배경으로 일 본의 업계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였던 당시의 대중문화 유입의 시도 는 일본에서 한국가요의 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반면 아시아인의 활동이 일본인 사이에서 전후 최초의 아시아붐 이라 할 만한 반응을 일으키게 한 것은 중국계의 영화와 가요였다. 1970년대에 이소룡에 의한 홍콩의 쿵푸영화 붐, 1970년대 말의 광동 팝의 인기, 그리고 1980년대 초에는 성룡의 영화가 다시금 쿵푸영화 붐을 불러일으키는 등 홍콩영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아시 아 소비의 견인차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하였다. 대중음악의 영역에 서는 1971년에 대만가수 歐 陽 菲 菲 (오오양휘휘)가 일본에서 가장 권 위있는 일본레코드대상의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이어 1974년에 데 뷔한 Teresa Teng( 鄧 麗 君 )은 1995년에 사망할 때까지 일본에서 지 속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또 같은 시기에는 홍콩에서 내일한 Agnes Chan( 陳 美 齡 ), Frances Yip( 葉 麗 儀 ) 등이 일본에서 활동하기 시작 하는 등 이 시기만해도 20명 이상의 동남아시아 가수가 일본에서 데 뷔하고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즉 1970년대 일본의 아시아 붐은 비록 한일수교(1965), 중일수교 (1972)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는 해 viii
도 실제로는 중일수교와 더불어 국교가 단절된 대만 그리고 홍콩 등 지와의 교류가 오히려 활발해졌다는 점에서 단순히 수교라는 정치적 맥락이 이 붐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일본에서 전후 최초의 한국의 대중문화 붐이라 할만한 것은 1980 년대 들어 가요부문에서 나타났다. 1970년대의 아시아붐과 연관되어 은경자(박은경), 미치 걸, 릴리 김, 김상희, 최양숙 등 한국의 가수 들이 일본에서 데뷔하고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서 처음으로 큰 인기를 얻은 것은 1977년에 한국가요의 번안곡 <가 슴아프게>를 히트시킨 이성애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크게 히트를 했고 이어, 나훈아가 데뷔하는 등 한국인 가수의 일본 데뷔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1988년의 서울 올림픽 때에는 김연자가 부른 공식송 <아침의 나라에서>( 吉 屋 潤 작 곡),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잡고> 등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1989 년말에는 일본 최대의 국민적 인 TV가요축제, 紅 白 歌 合 戦 에 조용필, 김연자, 계은숙, 패티김 등 4명의 한국인 가수가 출장하면서 한국 가요붐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가요 붐을 보면 한 국인 가수들이 엥까 ( 演 歌,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는 것이 대부분이 었고, 이성애나 조용필 등 한국에서는 소위 트로트가수 가 아닌 가 수들도 일본에서는 엥까가수 로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즉 한국가요 =엥까 라는 등식이 성립이 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엥까라는 장르 가 오래되고 향수어린 옛 노래로 간주된 당시 일본인의 인식의 틀에 서 한국인 가수나 한국가요가 과거의 것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인식되고 전유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ix
2. 한 중 일 아시아 대중문화 수용의 현황과 대응 가. 한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현황과 대응 1990년대 들어 한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 현황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8년 일본의 대중문화상품에 대한 단계적 시 장개방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대중문화 상품에 대해서는 홍콩 및 대만의 문화상품의 경우 해방 이후로도 계속 단절이 없이 문화상품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어왔기 때문에 실질적인 단절이 없었 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홍콩의 영화산업 상품과 무협 및 역사 드 라마 등은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 소비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해왔고, 작품과 스타에 따라서는 열광적인 국내 팬 들을 보유해오기도 했다. 중국 본토의 경우는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이래 장 이모우, 첸 카이거를 비롯한 제5세대 영화감독이 라 불리는 중국 본토 출신 감독들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면 서 한국에서도 그들의 작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는 몇몇 영상물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가요 등 기타의 분야에서 중국의 대중 문화는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반면 일본 대중문화 상품은 1945년의 해방 이후 1990년대 중반까 지 공식적인 국내 수입이 금지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중문화 상품들은 여러 가지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활발히 소비되었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비공 식적인 차원에서 일본의 음반과 음악들은 불법복제를 거치거나 아니 면 한국 대중음악에서 그 원전 표절의 시비를 끊이지 않게 발생시키 며 보이지 않는 영향력으로 존재해 온 것이다. 이러한 점은 드라마 나 기타 TV 프로그램들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식적 교류나 유입이 차 단된 상황에서 일본의 포맷을 모방하였다거나 표절에 대한 시비가 줄곧 제기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방침이 발표되고 일본의 문화 상품에 대한 단계적 수입개방이 이루어졌다. x
그러나 아직 그 영향은 미미한 정도에 머물고 있다. 예를 들어 2002년을 기준으로 볼 때 국내 극장용으로 수입된 영 화의 원산지를 보면 미국 영화가 170편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 고, 그 다음으로는 일본(18편), 프랑스(16편), 독일(11편), 홍콩(10편) 의 순서를 보인다. 중국의 경우 대중문화 산업이 아직 미약한 본토 의 작품들은 비교적 적은 편이며, 여전히 홍콩의 오락영화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여년간 한국 영화소비 시장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온 홍콩영화의 수입과 소비도 1996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한편 장르별로 보 면, 드라마에 있어서는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 거의 없는데 비해 오 히려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더 많았으며, 대신 만화(애니메이션)에 있어서는 중국과 홍콩으로부터 수입된 것이 한 건도 없지만 일본으 로부터는 지속적으로 상당한 양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수입되어 국내 에서 방영되었다.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에 있어서는 미야자키 하야 오 감독의 세계적 영향력 아래 있는 작품들이 특히 2000년대 들어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외에 [공각기동대], [아키라] 등의 공상과학물 또한 한국에서 적지 않은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 다. 케이블 텔레비전 시청이 급격히 늘어난 2000년대 중반 한국의 각 가정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의 프로그램들 중 절대 다수 또한 일본 작품이다. 또한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수입개방이 있기 훨씬 이전부터 한 국 텔레비전의 드라마를 포함한 각종 프로그램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일본의 그것을 모방하여 기획되었다는 소위 표절시비 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개방조처 이후 이러한 표절시비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의식과 국제적 법률조치가 강화됨에 따라 무단 복제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그에 대신하여 포맷 수입 이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 형식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특히 한국 텔레비전의 오락프 로그램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일본으로부터의 포맷수입에 의존하여 xi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일본 대중가요 상품에 대한 수입규제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 던 최근까지 일본의 대중가요가 음반을 통해 국내에서 소비된 사례 는 최근까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그러다가 2004년에 들어 일부 일본 가수들에 대한 국내 팬클럽이 결성되고 광범한 소비층을 확보 하기 시작하는 경향이 나타나 2005년에는 보다 본격적인 일본 대중 음악의 인기가 국내시장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5년 3월, 한국 국내 유명 음반 체인인 교보 핫트랙스의 일본음악차트 위클리 톱10 에서는 나카시마 미카의 뮤직 이 1위, 보아의 Best of Soul 이 2위 에 올랐다. 더 차트 의 주간 팝 앨범 차트 에서는 보아의 Best of Soul 이 1위, 케니지의 At Last: The Duets Album 이 2위, 그리고 나카시마 미카의 뮤직 이 3위에 올랐다. 나카시마 미카가 일본 내에 서 인기있는 다른 일본 J-pop 가수들을 제치고 유독 한국에서 인기 를 끄는 이유는 그가 부른 노래 원곡이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제곡으로 번안되어 불리어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일본어로 된 가창곡을 삽입해 넣을 수 없지만, 한국 가수가 일본 원곡을 한국말로 리메이크(번안) 해서 부르게 되면 이는 곧바로 일본 가수의 음악에 대한 홍보효과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일본 가수들의 음반을 한국에 유통시키는 직배사 소니 BMG, EMI 등은 2005년에 들어 여러 일본 가수의 음원을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 O.S.T.를 기획 제작하는 한국 음반사들에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현재 이루어지는 대중문화 소비가 역시 다중적 채널, 다차원적 매체의 혼합과 상호영향으로 얽혀 진행된다는 점이 다. 한국 드라마의 국내 인기가 일본 대중가요의 국내 확산으로 이 어질 수 있으며, 거꾸로 한국 드라마의 일본 내 인기가 한국 대중가 요의 일본 진출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각국의 모바일 캐릭터와 게임에 교차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주면서 문화의 xii
장르별 혼성화, 국적적 혼성화, 문화상품 정체성의 혼성화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대중문화산업 원류로서의 미국 대중문화가 가장 기본적인 환경이자 리소스의 제공자로서 튼튼하게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게임 프로그램 수입에 있어서는 사실상 그동안 별다른 제 한이 없었다. 전반적인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소 니의 플레이스테이션 2(PS2) 게임 프로그램은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것처럼 한국 안에서도 절대적인 시장적 지배력을 지니고 있다. 소니, 세가, 닌텐도 등이 세계시장의 99%를 석권하고 있는 게임기용 비디오 게임물 시장은 2003년 말 추가로 개방되기 이전부터 플레이 스테이션용 프로그램 한 가지 종류만 해도 한국 내에서 2002년에 1,500억원, 2003년에는 2,500억여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2004년 에도 증가추세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 경우는 게임 소프트웨어가 일본어로 제작된 것에 대해 수입이 금지되어 있던 당시 유럽과 미국 지사를 통해 영문판이 우회공급된 것으로서, 현재는 일본에서 새 게 임 출시 후 한국수입까지 3개월 이내에 이루어지며, 한글판 게임의 동시제작도 어렵지 않아 시장 활용의 동시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상태다. 플레이스테이션 이전부터 한국에서 널리 소비되어온 세가와 닌텐도의 소프트웨어는 그 매출액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적으나 한 국 내 게임 소비시장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을 확고히 해왔다. 그렇지만 한국의 게임 소프트웨어 시장이 일본 상품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문화적 콘텐츠 성격으로 볼 때는 중국의 영향 또 한 적지 않다. 또한 한국에서 주축이 되어 개발, 판매하기 시작한 한 국산 게임 소프트웨어 안에서도 일본과 중국의 대중 문화적 성격들 이 강하게 담겨져 있으며, 개발자들은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 적 성격과 중국적 성격을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그들의 상품을 만들 어가고 있다. 이렇게 한국에서 개발된 게임들은 중국의 게임시장에서 인기가 높 xiii
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우선 스토리상에 있어서 삼국지와 수호지를 비롯한 다양한 중국 무협소설의 스토리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많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개발되어 일본과 중 국으로 팔려나가는 게임들에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일본 게임산업 소 프트웨어의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중국의 고전적 무협지적 내용이 1970년대 이후 중 국과 홍콩의 무협 영화적 성격을 입고 발전되어, 1990년대 이후 특 수효과가 게임에서 한층 발전된 형태로 활용됨으로써 중국 뿐 아니 라 한국,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끄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 서 한국의 업체들은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 게임 소프트웨어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중국 및 대만의 자본출자를 받아 현지법인을 설립하 여 현지문화적 요소를 담아 개발한 상품들은 기획에서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다국적적 문화적 요소의 조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나며, 캐릭터와 프로그램 개발에 있어서도 다국 기업간 합 작과 제휴가 증가하고 있다. 나. 중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현황과 대응 중국의 경우에도 1990년대 들어 외국과의 대중문화 교류가 본격 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최근에는 한류( 韓 流 ) 현상이 주목되고 있다. 중국의 한류는 특히 대중음악 분야에서 한국 가수들의 중국 공연과 라디오 방송, 그리고 음반의 형태로 주로 젊은 층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한국 드라마도 젊은 층이 주요 시청자이지만 점차 외국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청자 층을 확보해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중국과 외국의 대중문화 교류는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은 90년대를 지나 현재까지도 계속 이 어지고 있어서 대중음악의 교류는 일방향적 유입이 지배적이고 드라 마나 방송 프로그램도 동남아 지역과 외국의 화교권을 제외하고는 xiv
수출 실적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영화의 경 우 역시 이러한 실정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직까지 중국의 문화 산업이 앞으로 어떤 방향의 발전경로를 따를 것인지, 외국과의 대중 문화교류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 지금과 같은 심각한 불균형의 상태를 중국 정부와 문화산업계가 어떤 방식으로 극복 할 것인지에 대해서 예단하기는 힘들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고 있는 전 지구화( 全 地 球 化 : globalization)의 과정 속에서 중국 대중문화가 지 금보다 더욱 빨리 변화하고 교류의 형태 역시 지금과는 다른 양상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문화 산업은 자본의 흐름에 매우 민감하다는 점에서 중국의 경우도 자본 의 영향에서 결코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역시 중국 문화 산업의 현재 상태에서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여 러 가지 변화의 양상은 중국 사회의 거시적 미시적 차원의 변화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과 흐름 속에서 관찰 분석되어야 한다. 중국은 개혁개방, 시장경제의 도입, 전세계적 흐름에의 동참 등으 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고, 문화산업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전 의 당과 정부의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던 데서 벗어나 하 나의 산업분야로 자리잡고 있고, 또 국가는 전세계적 추세에 발맞추 어 문화산업이 국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발전을 위 한 여러 가지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고 있다. 그 중 일부는 계획했 던 방향으로 정책이 시행되어 변화를 일으키고 있지만, 또 다른 부 분에서는 아직 눈에 뜨이는 정책의 수립과 시행이 없는 상황이다. 다만 한류 현상에 보이는 한국의 대중문화 상품의 유입에 대응하여 중국정부는 통제자의 역할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 다. 즉 여전히 존재하는 체제의 경직성과 폐쇄성으로 인해서 체제나 정권, 그리고 소위 미풍양속에 위협이 될 만한 문화콘텐츠를 생산 수입 유통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주어지며, xv
이는 콘텐츠 자체에 대한 심의와 수정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문화상 품의 생산과 유통에 관여하는 모든 기관에 대한 지속적 통제를 통해 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음악, 드라마, 영화 모두를 포함해서 중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교류의 문제점은 수입초과라는 것이고, 특히 한국과는 거의 일방적 이다시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문제가 발생한 중요한 원 인 중의 하나는 교류가 완성된 문화상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의 교류는 문화산업이 발달한 국가나 지역에서 그 렇지 못한 지역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중국은 거대한 시 장에 비해서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콘텐츠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우수한 콘텐츠가 유입되기 쉬운 여건에 놓여 있다. 게다가 한국은 일부 영화나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정받 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고, 특히 아시아 각국에서는 열렬한 환영 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전체적인 대중문화의 자체 생산 능 력은 낮은 편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교류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받아 들이는 쪽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류의 흐름은 장기적 으로 교류 자체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고, 교류를 통한 문화 공동체 형성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가는 데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 다. 그런 의미에서,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드라마와 영화의 합 작 내지 합자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상당히 바람직한 움직임이라고 생각된다. 중국 내에서 한류 상품들의 인기에 대하여 중국의 대중매체나 문 화산업계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 에 대한 중국 제작자들의 공격은 한국 드라마의 낮은 질을 공격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그 근거가 빈약하거나 한국 드라마 때문에 중국 드 라마들이 황금시간대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사실 관계의 오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 서는 한국 드라마는 외국 드라마 방영 제한 규정에 묶여 있어서 그 xvi
영향력에 한계가 있고, 또 한국 배우들이 중국 시장을 잠식한다고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들은 또 한 한국 드라마가 중국 드라마 시장에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은 국내 시장이 아니라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 등의 해외시장이라는 것을 밝히고, 한국 드라마가 중국 시청자들에게 사랑받는 상황에서 중국 제작자들은 압력을 느낄 수 있겠지만, 한국 드라마의 좋은 점을 본 받아서 압력을 변화와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 한다. 한국의 드라마, 더 넓게는 한류가 중국대륙에서 뿐만 아니라 홍 콩, 대만,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에 대한 중 국 언론들의 해석도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가 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한국이 여러 국가들과 같이 유교문화권 혹은 중화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유교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채 표현은 현대적이고 세련되게 잘 한다는 점이었다. 그 외에도 한국의 유행가 가사는 청년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번뇌와 우려, 쓰고 달콤한 정감 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또 가볍 고 건강한 마음과 자세로 이후에 더욱 큰 도전을 맞는 내용들을 담 고 있다고 한다. 한국 영화에서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동정( 同 情 ), 약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 사회적 봉사에 대한 생각 등을 발견할 수 있으며, 한국 영화는 자신의 민족문화에 대해서 비교적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밝힌다. 그 외에도 한류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전지구화 과정 중 한국문 화가 자신의 위치를 찾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발견된다. 즉 중국의 현대사회문화에는 특색과 생명력이 결핍되어 있고 민족 특색의 문화가 없다. 한류는 문화 전지구화 과정 중 출현한 전지구 화와 지역화(localization)의 충돌이고 조화이며, 전통논리와 현대성 의 충돌, 동서양 가치관의 충돌을 남김없이 구현하고 있고, 따라서 많은 중국인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들과 연관되 xvii
어 한류는 동서양 문화의 결정체라거나, 전지구화 시대에 한류는 아 시아문화의 존속을 설명하는 유력한 증명이라는 등의 해석도 등장하 고 있다. 한류를 논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또 하나의 점은 이것이 중국의 젊 은이들에게 특히 호소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음악이나 드라 마에 대한 선호를 넘어서서 그들의 의복, 장신구, 머리모양 등을 한 국의 스타, 특히 힙합 스타일의 댄스그룹을 따라하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제 최신 전자수첩, 휴대전화, 컴퓨터 등을 소비하는 등 생 활 전반적으로 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들을 하한주( 哈 韓 族 ) 라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종교적 신앙이나 전통적 유 교 등을 믿지 않는 많은 신세대에게 정신적 지주가 필요한 상황에서 중국의 유행문화가 미성숙하여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므 로 한국 유행문화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한류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언급들도 등장하고 있다. 즉 유행문화는 시장경제의 한 수단이고 많은 경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이들은 그 때문에 한국 정부가 문화산업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고 이해하며, 또한 한국 정부가 제도적으로나 법률적 으로 문화산업을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또 동북아문화공동체 구 축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위의 담론들이 한류에 대해 객관적,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 이라면 한류에 대한 비판적 담론도 폭넓게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 류상품의 내용에 대해서는 드라마에 대해서는 주인공이 항상 불치병 이나 난치병에 걸리는 등 스토리가 유사하다거나 극의 전개가 너무 느리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리고 소위 잘 사는 사람이 많이 등장하 고 남녀 주인공이 너무 잘 생기는 등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나아가 한류도 결국 하나의 유행에 불과하고 사람들은 늘 새 로운 유행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류( 日 流 ) 가 흘러갔듯이 한류도 새 로운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한 때의 유행으로 흘러갈 xviii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류의 생산이나 유통에 대한 비판으로는 중 국에 진출한 한국의 대중문화 제작자와 유통업 종사자 중에는 탄탄 한 대기업도 있지만 영세기업이 많아서( 魚 龍 混 雜 ) 한류의 제작과 시 장 운영 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중국 내의 한국 대중문화 소비자들의 유형은 크게 적극적으로 소 비하는 부류, 소극적으로 소비하는 부류, 그리고 소비하지 않는 부 류의 세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느 부류에 속하든지 대체로 한국 대중문화의 질적 우수성은 인정을 하면서도 맥락과 상황에 대 한 판단 속에서 한국의 대중문화상품 소비양상과 반응은 다양한 층 위를 형성한다. 대부분의 적극적 소비자들 특히 젊은 층 은 불법 적이거나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한국의 대중문화 상품을 소비하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중국 대중문화의 산업구조의 특성에 기인한다 한국 대중문화 상품이 중국의 그것에 비해서는 질적으로 우수하 다고 본다. 한국 대중문화의 소비를 통해 중국인들은 한국과 한국인 에 대한 친근감을 느끼고, 제한적이고 매우 일반화된 수준에서이기 는 하지만 한국의 문화적 특성에 대한 몇 가지 이해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정확한 이해보다는 하나의 기호로서만 한국 을 소비하기도 한다. 중국의 한국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현재 2000년에서 2002년 한국 대중문화에 대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안정적인 상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 일본의 아시아 대중문화 수용의 현황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동아시아에서 문화교통의 흐름이 과거에는 일본에서 다른 지역으로 흘러간 경우가 많았다면, 현재는 일본으로 유입되는 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는 점을 새로운 현상으로 지적할 수 있으며, 이 흐름의 중심에는 현재 한류 의 압도적인 붐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도 일본에는 소위 아시아 의 대중문화 소비 붐이 나타났으나 한류와 같은 최근의 현상과는 일 xix
정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1930년대 크게 유행하였던 소위 대륙붐 은 관주도 민추종 의 형태, 즉 국가의 주도로 민간의 문화업계를 동원하여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정치이데올로기를 정서적으로 뒷받 침하는 대중문화를 생산하며 일반 대중에게 향유하도록 하는 형식이 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1980년대까지의 아시아붐은 민간업계주도 소비자추종 의 도식, 즉 노골적인 정치이데올로기보다는 문화산업이 주도하여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문화유입이 당시 소비자들의 정서 나 욕구의 어떤 측면과 맞아떨어져 붐이 형성되는 형태였다. 이에 대해 최근의 한류를 비롯한 아시아소비의 특징은 소비자주도 문화 업계추종 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소비자들의 주체적 수용이 먼저 나타나고, 시장가능성을 확인한 문화산업계가 반응함과 동시에 미디어 등에서 관심을 보이고 문화정책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식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어떤 점에서 소위 한류의 효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일본의 문화산업이 국내지향성 아니면 서구지향성 이 특히 강한 영역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또 한 한류는 문화 콘텐츠로서 가치를 입증함으로서 지금까지 아시아를 주로 시장으로서만 인식해 왔던 일본의 문화 산업계에 하나의 충격 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 소비자들의 반응에서 일본의 한류현상을 설 명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지적되는 것은 상대적 친근감, 문 화적 유사성 이다. 즉 중국이나 대만, 홍콩 등 중국어권과도 달리 한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면에서도 언어만 조금 다를 뿐이고, 외모 면에서나 문화적 배경의 면에서나 일본과 매우 유사함을 발견하게 되어 공감을 얻는 것이 쉽다고 한다. 그러 한 유사성 속에서도 한국의 드라마에서는 감정의 표현이 더 강렬하 게 나타나는 등 한국적 인 특색이 나타나기 때문에 매력을 느낀다 고 한다. 한편 한류 현상의 배경요인으로 특히 문화 산업계 종사들에 의해 xx
자주 지적되는 것은 일본의 대중문화가 로컬한데 비해 한국의 그것 은 글로벌하다는 견해이다. 즉, 일본의 대중문화 상품들은 오랫동안 국내 시장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왔기 때문에 지방적인데 대해 한 국의 것들은 애초부터 해외 시장을 겨냥하고 만들어져 온 까닭에 보 편성을 띠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로컬성 대 한국의 글로벌성 이라 는 인식은 널리 공유되고 있으며, 특히 음악 등과 관련해 자주 언급 된다. 예를 들어 J-Pop은 보다 세련됐고 듣기에도 편하지만 가볍고 그 호소력이 일본 국내에 한정이 돼 있는 반면 K-Pop은 미국남부의 음악, 특히 블루스와 유사한 애절함, 애수가 깃들어져 있으며 정서 적으로도 더 깊고 호소력이 강하고 넓다고 한다. 드라마의 경우에도 한국 것이 보편적인 주제나 문제를 다룸으로써 보다 널리 수용될 수 있는 반면, 일본 것은 대사부터가 극히 로컬하며 심지어는 일본 국 내에서조차 도쿄 중심으로 짜여서 지방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한국 드라마는 일본에서 받아들 여질 수 있는 여지가 많지만, 일본 것은 한국에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하며, 이제 일본도 한국으로부터 배워 글로벌화 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이런 설명방식으로는 왜 한류 이전까지는 한국의 드 라마가 일본에서 거의 수용된 적이 없었는지, 또 왜 일본의 각종 대 중문화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는 설명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특히 영화와 관련하여 한국의 보 편성은 일종의 미국화의 징후이고 일본의 로컬성은 문화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꼭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언설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한류현상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재일교포들의 역할이다. 예를 들어 <겨울연가>가 본격적인 한류 붐을 일으키기 전에 일본에서 최 초로 히트 를 친 영화 <쉬리>를 수입, 배급한 회사 CINE QUA NON의 사장 이봉우의 시도는 오늘날 한류의 전사( 前 史 )로 매우 중 xxi
요한 케이스로 들 수 있으며, 그 이외에도 많은 한국인 뉴커머들이 일본에 정착하고 조금씩 여러 사업을 확장해 온 것도 한류 붐의 밑 바닥이 되었다. 한류가 터지고 나서는 이들에 의해 많은 관련 회사 들이 만들어졌으며, 이들은 또한 신주꾸( 新 宿 )와 신오꾸보( 新 大 久 保 ) 사이에 새로이 형성된 코리아 타운 에서 한류의 유통에 중요한 역할 을 담당하고 있다. 한류의 효과로 나타난 또 한 가지의 현상은 일본의 주류 문화산업 계로 진출하는 한국인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일본의 업계에 진출하여 일본인 업주를 설득해 가며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 해 가는 적극적이고 개입적인 문화생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담당하는 일은 반드시 한류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업무만은 아니며 오히려 그보다 한류를 넘어서 일본시장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대중문화 아이템을 개발하고 소개하려는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앞으로의 문화교류의 전망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외에도 한류의 파급 효과로 다양한 종류의 합작 내지 공동제 작의 시도가 한일 양국의 문화업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업계 간 교류 확대는 생산과 유통 차원에서 지속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해 나가고자 하는 업계차원의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경제적인 이해관 계가 개입되어 있다. 합작은 제작과정에 원작, 자본, 스텝, 배우, 편 집 등이 복잡하게 얽혀지는 혼성적 작품을 포함하여 리메이크에 이 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1 그와 같은 제작과정의 얽혀지고 융합된 실태를 나타내기 위해 메이드 인 JK 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 도 있다 ( 小 倉 紀 蔵 2005: p. 212). 또한 한류, 일류의 붐을 타고 타 국에서 붐이 된 것이 자국으로 전해져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게 되 는 소위 역한류, 역일류 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 小 倉 紀 蔵 전 1 허준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나가사키 슌야( 長 崎 俊 一 ) 감독, 야 마자키 마사요시( 山 崎 まさよし) 주연으로 리메이크 중이다. xxii
게서: 215-216). 이와 같이 한국 작품의 리메이크, 그리고 한국에서 의 인기가 일본으로 역수입되는 현상도 역시 한류의 파급효과의 하 나로 한일 간에 보다 대등한 새로운 상호적 관계가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일본의 한류 현상을 이해하는데 미디어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 미디어는 <겨울연가>같은 TV프로가 그렇듯 한류 콘텐츠의 유통기제 그 자체이기도 하다. 물론 일본의 모든 미디어가 한류에 대해 우호 적인 것은 아니며, 한류에 대해 비판하거나 야유하는 듯한 보도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의 한류경험은 각종 미디어로 인해 매 개되고 구성된 경험인 것임은 분명하다. 즉 미디어는 한류에 대한 일종의 세론 을 형성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 라 문화업계 종사자들의 한류 인식이나 국가의 정책 입안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일본국내의 미디어보도, 특히 한류 팬의 미디 어표상은 한국 미디어가 스스로의 보도 작업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전함으로써 초국가적 미디어교통의 양상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일본 한류의 미디어표상은 일본국내에 머물지 않고 국경을 넘어 일본의 한류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본에서 한류효과가 가장 두드러진 미디어의 하나로 출판업계를 들 수 있다. 한국드라마나 영화, 배우 등을 시각적으로 소개하는 여 러 잡지들, 드라마나 영화의 내용 등을 기술한 서적들, 나아가 한국 어 학습서 등 수많은 한류관련의 출판물이 새로 간행되었으며, 기존 의 여성잡지들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한국 현지의 체험 담이나 심지어는 한일간 국제결혼의 경험담 같은 책들도 한류 특 수를 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출판물들은 한류 팬을 주된 독자층 으로 상정하고 있으며, 한류와 관련된 실용적 정보나 이미지, 그리 고 보다 수준 높은 팬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여러 측면에 대해 학습 하기 위한 정보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한류 팬들 이 서로 소통하고 교육하는 장이 되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독자들 xxiii
이 스스로 집필하면서 문화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문화생산과 관련하여서는 오프라인 출판만이 아니라 인터넷 홈페 이지의 개설이라는 차원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즉 셀 수 없을 만큼 한류 팬들의 개인 사이트가 등장하였으며 사이버공간에서 팬들이 서로 의견과 정보, 그리고 감성이나 정서까지도 주고받으면 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개인 사이트 외에도 수많은 한 류 관련의 정보 사이트가 있다. 일본의 한류 붐의 파급효과 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 중의 하나는 사진집이나 주류 영상 미디어의 광고 등에 한류배우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배용준이 일본의 광고, 특히 TV의 CF에 출 현하면서 한국의 배우들이 TV 광고를 비롯해 이미지의 세계에서 본 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조차 어 려웠던 이런 광고들은 보통 일본인들에게 다양하게 독해되면서 드라 마보다도 오히려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며, 일본의 도시공간에서 한국 배우와 콘텐츠의 존재감(presence)을 비약적으로 확대하는 역 할을 하고 있다. 한류 팬들의 정서적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온라인 오프라인 매체 공간들이 대체로 사적이고 친근한 정보로 가득한데 반해 똑같이 긍 정적이면서도 좀 더 공식적인 의미부여를 하는 미디어로 일간지와 같은 공공성이 높은 매체를 들 수 있다. 2 이들의 주된 메시지는 한 일우호나 교류, 그리고 역사적 의의 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런 공 적인 긍정적 한류담론은 한일 정부의 日 韓 友 情 年 이라는 정치적 입장 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며, 적잖은 일본인의 한류에 대한 공적인 의 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고 또 그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2 공론적 입장에서 한류를 취급하는 경향이 강한 대표적인 매체가 아사히 ( 朝 日 )신문으로 이 신문에서는 한류의 원류 란 제목으로 2005년 5월 23 일에서 6월 10일까지 15회에 걸쳐 한류관련의 집중 연재기자를 실었다. 그 내용은 오늘날의 한류가 있기까지의 전사( 前 史 )에 초점을 맞추어 눈에 잘 보이지 않은 한일교류의 뒷이야기들을 오랜 취재를 바탕으로 발굴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xxiv
일본의 한류 팬의 주된 층은 30대에서 60대 정도의 연령의 여성 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2004년 4월에 배용준이 <겨울연가>의 방영 후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그를 보러 나리타 공항에 모였던 5000명에 달하는 열광적인 아줌마 팬 의 모습이 보도되면서 서서 히 대중적 미디어의 표면에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지민 2004: 94).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미디어는 일본 미디어에 비추어진 일본인 팬의 모습을 호기심과 신기함이 뒤섞인 시선으로 적극 한국에 전하 였으며, 이런 초국가적 미디어 교통은 많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열도가 완전히 한류에 휩쓸린 것으로 생각하게 한 효과를 가져다 왔 다. 그런데 이런 아줌마팬 의 미디어표상에서 팬이 아닌 나머지 일본 인들이 받는 인상은 긍정적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적잖은 미 디어표상에는 열광하는 아줌마들을 야유하는 시선이 담겨져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미 국내의 일부 미디어에도 보도된 바와 같이 보 다 적극적인 반 한류의 담론도 발견된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펴져 있고 일부 책으로도 출판된 앤티담론은 공공성을 띠는 기존 매체의 형태보다는 사이버공간의 개인 블록 같은 데서 유포되는 음성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즉 사이버 공간에서는 한류나 재일교 포, 한국인을 야유하거나 비방하는 댓글들이 흔히 발견된다. 최근 오프라인 시장에서 서적 형태로도 출판된 マンガ 嫌 韓 流 ( 山 野 車 輪 지음, 2005)는 그러한 반 한류 담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내용 을 보면 한류에 대해서는 마지막의 에필로그에서 조금만 언급할 뿐 나머지 9개의 챕터들은 한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시사문제나 역사 문제의 이야기로 짜여져 있는데, 그 내용과 소위 새로운 역사를 만 드는 모임의 기본적인 주장과의 공통성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山 野 車 輪 은 가명으로 추정되며, 소위 새역모 와 그 동조자들이 중 심이 되어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집필한 서적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일본의 대형 서점들에서 베스트셀러로 올라 있다거나 출 간된 지 2개월 안에 매진되었다는 소문들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디어 xxv
에서는 이에 대해 보도를 거의 안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인터 넷 서점에서 보이는 서평이나 댓글에는 일반 미디어로부터 무시당하 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 책의 독자들이 불만이나 답답함을 을 표 시하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또한 그들은 한류 팬들에 대해 혐오감을 보이거나 혹은 노골적인 비방을 가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매스컴에서 다루어지는 한일우호 일변도의 공식적인 담론에 대해 회의를 드러낸 다. 또한 한류에 대한 앤티사이트라 볼 수 있는 사이버 공간에 오르 는 글 들 중에는 한류 팬들을 세뇌당한 아줌마들 로 폄하하거나, 재일교포의 동원, 혹은 한국 음모설 등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한류를 통해 미소로 다가오는 회유책 의 이면에는 참된 모습, 즉 반일하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초국가적 반일네트워크 가 조직되어 있다는 주장 등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오선화의 최근 저술을 들 수 있다). 한류 현상은 일본에서 학술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되어 활발히 분석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한류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 심이 쏟아져 나온 한국의 상황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일본에서 한류 에 대한 최초의 학술서적이라 할 수 있는 日 式 韓 流 (2004)의 편 자 모오리 요시타카( 毛 利 嘉 孝 )는 서두에서 저널리즘의 열광에도 불 구하고 미디어연구, 매스커뮤니케이션연구나 대중문화연구 등 학술 적인 영역에서는 지금까지 이 새로운 현상은 거의 연구되지 않고 있 었다. 이 책의 기고자인 이와부치 고이치( 岩 淵 功 一 )의 작업은 아마 유일하다고 해도 좋은 예외이다 라고 쓰고 있다(p. 8-9). 한류가 학 술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유로는 우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 로 일본의 경우에도 자국 발신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에 비해 유입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한류현상을 주된 사회문화 현상의 하나로서 보다는 피상적인 유행 정도로 보는 시선도 학술적인 무관심 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xxvi
일본의 한류는 국가의 문화정책의 방향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 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연구에서 지적하였듯이 일본은 상대적 으로 국가가 문화산업에 개입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양영 균, 문옥표, 송도영 2004). 그런 특징은 국가가 강하게 문화산업을 통제하고 국책으로 대중문화 생산과 유통을 장악했던 제2차 세계대 전 시기의 상황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구조화된 것이다. 이런 일 본의 맥락에서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매력적인 대중문 화를 만들어 내어 일본으로 상륙한 한류 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 영향으로 일본에서는 이제 한국이 국가의 문화전략에서 일본보다 앞 서 있다는 인식은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한국에 배우자는 소위 룩 코리아 (Look! Korea) 의 움직임은 문화산업계와 관련해서는 무엇 보다 문화정책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小 倉 紀 蔵 2005: p. 201 참조). 즉, 한류 자체보다도 오히려 그 배경에 있는 한국 정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거기서 힌트를 얻어 일본 문화산 업계의 부흥, 강화를 시도하려는 방향성이다. 한류와 관련해서 일본 정부의 역할은 예전부터 해 오고 있는 한국 문화의 일본 소개라는 방향으로도 물론 나타나고 있다. 즉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한류 행사를 여러 가지 형태로 지원함으로써 일한우호 라는 정치적이고 관적인 의미를 부여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방향성 은 오히려 어떻게 대중문화를 의식적으로 해외로 수출해 나갈 것인 가에 모아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제 일본에서도 대중문화 영역을 포함한 문화외교 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그 한 예로 볼 수 있다. 물론 문화외교라는 생각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예 컨대 Nissim 2003 참조). 그런데 예전의 문화외교가 일본의 소위 전통문화, 고급문화에 한정이 되어 있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애니메 이션 같은 대중문화 영역을 부각시켜 보다 산업적이고 마케팅적인 사고가 스며든 개념이 되었다 ( 中 央 公 論 2005년 10월호 특집, 지금 정말로 문화외교를: 세계에 일본의 애니메 세대 를 키우라 참조) xxvii
일본이 이렇게 국가주의적으로 문화산업에 적극 개입하고 육성해 야 한다는 인식이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확산되고 있으며 어 느 정도의 사회적 동의도 얻을 수 있게 된 데는 분명히 한류 의 충 격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류에 매개된 일본의 문화정책의 방향 이 한국 정부와의 관계에서 협력과 공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아닌 지는 앞으로 아주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Ⅲ. 한중일 대중문화 교류의 전망과 과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와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로의 전망에 대해 논하기 위해 우선 현지조사와 현황파악을 통해 떠오른 여러 가지 과 제들에 대해 언급하도록 한다. 이런 과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한 방안 이나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동아시아의 앞날을 전망하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출발점은 동아시아의 대중문화 교류, 특히 한 일 간의 교류라고 할만한 현상들은 다방면에 걸쳐 상당한 규모로 이 미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한일 양국의 정부가 공식적으로 교류 라는 명칭으로 인식하든 안 하든 간에, 문화업계, 소비자, 미 디어, 학계 등에서 수많은 교류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 현황이다. 따 라서 문제는 정부가 전면에 나서 새로운 흐름을 구축하여 추진하는 방향보다는 오히려 이미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미세하고도 다양한 교류들을 좀더 원활하게 유지시켜 나가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선 교류현장이 현재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과제들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즉 교류의 현장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나 거부감 들에 귀를 기울이고 해소해 나가는 방향에 한국 정부가 정책적으로 구상할 수 있는 방안이 설정되어야 한다. xxviii
1. 한류 효과의 양가적 측면에 대한 인식 앞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문화 산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대중문화에 대하여 양면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외국 상품의 인기에 자극 을 받아 국내의 문화산업을 증진하고 나아갈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소위 윈윈 전략 이라 할 수 있는 입장 을 표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류와 같이 일방적인 문화흐름의 상황에서 그것을 발신하는 측에서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그 효과를 극대화 하려 할 경우 수용하는 측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교 류 증진의 노력들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따 라서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인접국들과의 장기적이고 순조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나아가 동북아 공동체라는 구상을 구체화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필 수적인 포석이 된다. 거꾸로 말하면 교류현장에서 일어나고 경험되 는 미시적이고도 구체적인 제 국면들에 대한 진지한 고려나 대책 없 이 한국 정부의 독선적 입장에서 동북아 공동체 구상이 추진된다면,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 측의 반감을 심화시킬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이 된다. 또한 특정 문화상품의 유행으로 나타나는 전반적인 인식변화의 효 과에 대한 지나친 과장도 경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류의 효과 로 아시아회귀의 경향을 나타내면서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일본 의 문화 산업계에도 여전히 옛날부터의 구조적인 문제나 관습적인 인식은 존재한다. 그리고 아시아와 같이 작업을 해 온 일본 업계인 들은 여전히 주변사람들과의 갈등이나 한류소비자들에 대한 불신감 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곤 한다. 이러한 예는 한류와 같은 현상의 효 과가 상당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상호 인식을 하룻밤에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xxix
2. 거래문화의 차이와 갈등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교류가 확대되면서 증가하고 있는 한중, 한 일 등의 거래나 합작 등의 직접적인 교류 현장에서 더욱 강화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한류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일본 측이 라는 견해가 상당히 퍼져 있다. 물론 경제적 이득이 일본에서 한류 현상을 계속해서 가능케 하는 기본 여건이긴 하다. 그런데 실제로 거래를 담당하는 입장에서는 한일 양국에 엄존하는 거래의 접근방식 이나 관습 등의 차이로 인해 여러 가지 갈등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 이 극대화될 경우 한국과의 거래에서 손을 놓겠다는 견해까지 실제 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한 갈등은 한류상품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새 로이 유입되는 상품의 구매 가격 협상 등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구입 하는 측에서는 한 가지 상품이 성공하였다고 다음의 상 품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합리적인 가격 으로 시작하여 흥행이 성공한 경우에 이익부분을 나누는 형식의 파 트너십을 구축해 가고자 하나 수출하는 측에서는 눈앞의 선불 금액 에 모든 것이 집중이 되어 가격의 협상이 결렬되는 예들이 많이 나 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류 상품의 수 출에 악영향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다양한 파트너십의 구축을 통한 일종의 문화산업적 공동체의 형성에도 장해가 되고 있다. 물론 한일관계에서 보면 이런 거래문화의 차이는 역사적인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즉, 한일 간의 역사적 관계, 특히 식민지시기의 경 제적 수탈이라는 피해자적 기억이 현재 한일 양국의 거래관계에서 한국 측이 취하게 되는 입장을 여전히 규정하고 정당화는 측면이 있 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차원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도 용납도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갈등구조를 풀 어나가기 위해서는 비즈니스 현장에서 거래문화의 상호이해를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 고안과 함께 역사적 문제의 상호인식과 이해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시 말해 거 xxx
래 관계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차이의 배경과 그것을 재생산해 내는 기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해 나가기 위한 대책이 마련될 필 요가 있다. 3. 합작의 현장에서의 경험과 업계문화의 차이 이번 조사에서 만난 대중문화 업계의 종사들의 다수가 앞으로 국 가간의 교류를 확대하고 공유의 부분을 확대해 가기 위한 효과적 방 안의 하나로 합작이나 공동제작을 늘려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 다. 그것은 우선 합작을 통해 자본을 끌어 모으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리하며, 또 각자가 부담하는 위험(risk)은 감소시킬 수 있을 뿐 아 니라 시장의 확대효과가 있다고 한다. 여러 나라의 합작을 통해서 합작에 참여한 각각의 당사자를 묶어서 하나의 시장에 편입시킨다면 그만큼 넓은 시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물론 각 당사자들이 자신의 본국에서는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 려 있다. 그러나 각 나라에서 문화 산업계는 나름의 관행을 가지고 오래 지 속돼 왔기 때문에 그것이 서로 만날 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 기기 마련이며 실제로 합작의 현장을 경험했던 사람들로부터도 그런 갈등의 구체적 내용을 들을 수 있다. 일본에서 10년 이상 일해 오면 서 한일 양국의 문화산업계의 시스템이나 사정 등을 잘 아는 J씨는 일본에서 일의 진행방식이 한국 측 종사들과 비교해 훨씬 조직적이 고 세밀하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인건비나 제작비 등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러한 양국의 문화차이는 흔히 국민성 의 근본적 차이로 이해되며 따라서 단기간 내에 해소 되기는 어려운 것으로 인식된다. 마찬가지로 한일 양국에서 최초의 합작영화로 선전된 <로스트메모리즈> 제작에 통역자로, <역도산> 제 작에 스텝으로 참여한 어떤 한국인은 스텝이 함께 섞여 일하게 되는 xxxi
경우 시스템이나, 일하는 방식이나 기질이 너무 달라 많은 트러블이 일어나며 결국은 잘 해 보자라고 시작하였던 일이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다 는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역효과라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합작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섞어서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섞이지 않는 다른 방식의 합작을 권하고 있다. 4. 차이와 갈등을 완화하기 위하여 - 한국 측에서 이상에서 살펴 본 바를 기초로 문화교류의 현장에서 감지되는 차 이와 갈등을 완화하고 교류를 증진하기 위하여 1) 전문 인력의 양성 과 적절한 배치, 2) 장기적인 관점과 상호이해의 기본 위에서 만들 어지는 파트너십의 형성, 3) 상호적인 교류 시스템의 구축 및 민간 교류의 활성화, 그리고 나아가 4) 교류의 기반이 되는 쌍방의 문화 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와 교육 등을 제안할 수 있다. 1) 전문 인력의 양성 및 배치: 위에서 살펴 본 현장에서의 차이의 경험과 갈등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교류를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생산, 유통업계의 사람들이 실감하고 있는 과제들이기 때 문이다. 그런데 이런 과제들에 대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그러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현장의 사람들도 효과적인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 가지 지 적될 수 있는 것은 통역과 같은 매개인이 없이 직접 거래하고 작업 할 수 있는 상황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갈등이나 오해의 상당 부분 이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곧 현지 사정에 정통한 전문 인력 의 양성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번의 현지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바를 보면 한류의 부상과 함께, 일본에서는 이미 유학생 출신의 한국인 뉴카마들을 주류 업계에 진 출시켜 한국과의 교류증진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토록 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 양쪽의 문화를 모두 이해하고 의사소 xxxii
통을 증진시켜 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양국간의 교류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서는 특히 중국과의 교류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너무 부족 한 실정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방송국에서 중국어가 가능하고 중국 사회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직원은 기껏해야 한두 명이거나 아 예 없고 그나마 소수의 전문가들을 중국 관련 부서에서 오랫동안 일 하게 하지 않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른 부서로 순환을 시키고 있는 형편인데 반해서, 일본 NHK에는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일본인들 이 국제부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들은 대개 장기적으로 중국 관련 일을 해왔고 특파원 활동도 한 사람들이고 또한 중국에서 유학한 사 람들도 활용한다. 따라서 한국 측에서도 드라마뿐 아니라 대중문화 의 전반적인 영역에서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중국이나 일본의 시스템과 문화를 잘 이해하고 현지어로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이 가 능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양성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 2) 상호 교류시스템의 구축 및 민간교류의 활성화: 문화의 교류를 일 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상호적이며 균형되고 안정적인 방향으로 발전 시킬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킬 수 있어야 한다. 중국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현재 한국과 중국의 대중문화 교류가 비록 균형 잡 힌 모습은 아니지만 민간의 차원에서는 자율적인 대화와 교류가 조 금씩 시도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한류 와 같은 일방적 흐름만을 강조하고 상품의 판매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 체계를 안정 화시켜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단기적인 이익이 나 활황만을 위한 정책은 지양해야 하며 장기적인 차원에서 대안과 정책 수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많은 대중문화 산업계 인사들이 지적 하고 있듯이 단기적인 성과 위주의 지원은, 한국 대중문화상품이 중 국에 더욱 공격적으로 진출하도록 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미 한국 의 게임산업이 중국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 중국 정부가 제재 조치를 xxxiii
내렸으며 한국 드라마의 경우에 대해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는 점 에서 단기적인 성과 위주의 지원 계획은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오늘날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 방하다보니 별로 위협도 아니었다는 식의 담론이 상당히 퍼져 있다. 그리고 일견 일방통행으로 보이는 한류 수출에 만족하면서 한류를 상호적 교류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인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내에는 이미 일본의 대중문화가 상당히 들어 와 있고 일본과의 합작도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아가 한국의 문화 산업계나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이런 상황을 한국 측에서 좀더 오픈하게 인식하게 되어야 일본 측에서도 한국과의 실제적이고도 장기적인 상호적 관계를 구상 할 수 있게 된다. 3) 현장 파트너십의 구축 및 네트워크의 형성: 한중일, 특히 한일 간 의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치적 마찰과 갈등에도 불구 하고,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잘 알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특정의 개 인들의 인맥과 파트너십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해 왔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한류가 급부상하면서 이러한 기존의 네트웍이나 파트너십의 장기적 유지에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임 이 아님이 드러난다. 오히려 한류 이전부터 문화교류에 종사해 왔던 사람들은 이 유행이 지나간 이후를 염려하고,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에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인간관계와 신 뢰의 구축은 정치적, 경제적 변화나 유행의 변화를 넘어 교류를 지 속시켜 나갈 수 있는 효과적인 기제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직접적인 교류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교류를 추진해 온 당사자들 간의 개인 적인 친분관계나 신뢰는 갈등을 해소하고 중재하는데 핵심적인 역할 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류의 증진과 지속을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개인적 인 xxxiv
맥이나 네트웍을 지원하고 활성화 시키며, 새로운 인맥을 발굴하고 키워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한 인맥이나 네트웍은 단순히 업계 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학계, 문화계, 정치계, 시민단체들 사이에 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은 각 방면에 존 재하는 기존의 인맥, 네트웍을 찾아내어 상호 연결시키고 공동으로 협력해 나갈 수 있는 장을 마련함으로써 기존의 교류관계를 더욱 활 성화 시켜 나가는 것이다. 4)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교육: 동북아 국가들, 특히 식민지배의 경험을 가진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서로의 문화적 행위에 대해 가 치평가가 쉽게 개입되는 편이다. 즉 대중문화 교류에 종사하는 사람 들 사이에서도 서로 상대방의 사고나 행동방식에 강한 이질감을 표 출하면서 스스로의 방식을 보다 나은 것으로 전제해 버리는 경향성 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 수정하기 위해서는 교류 상대 방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며, 특히 문화적 차이 를 주어진 본래의 것으로 고정시켜 버리는 구래의 문화관이 아니라 좀 더 열린 동태적 문화관을 키워 가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한 이 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최근의 한류 현상으로 갖게 된 우월감이나 자 신감을 지나치게 내세우게 되면 당연히 상대국과 갈등이 심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특히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한류현상과 관련해 서 일본이나 중국을 정복 했다는 식의 군사적 표현들이 흔히 쓰이 고 있음은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는 미디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표현을 선호하는 한국인 독자, 청중, 시청자들이 존재함을 의 미한다. 그런데 이런 담론은 현재 초국가적 미디어교통으로 인해 상 대국들에도 어느 정도 전해지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것은 업계나 한 류 팬은 물론 한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 를 가져 온다. 이런 미디어 상황의 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그것을 바 xxxv
꾸어 나가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문화상품의 우수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공동제작이나 혼성제작에서 일본이나 중국 등지의 참여 사 실을 최소화하고 때로는 삭제 까지 하는 관행 역시 문제이다. 유명 한 예로는 <박하사탕>이나 <올드보이> 같은 작품들이 일본과의 일종 의 합작인데도 불구하고(전자는 자본, 후자는 원작), 한국에서는 한 국 의 영화로 선전되는 상황, 그렇게 선전되어야 하는 상황임은 일 본 측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합작을 합작으로, 교류 를 교류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한, 한일 양국의 문화 산업계나 소비자 차원에서 아무리 합작이나 교류 가 이루어진다 해도 한국 내에서 별로 사회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 다. 이런 문제는 특히 한일 관계에서는 일본 대중문화의 음성적 수 용이라는 역사와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과제를 풀어 나가기 위 해서는 그것을 양성화하고 공론화함으로써 앞으로는 일본과의 관계 를 있는 그대로 언급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전망들은 한국이 중심이 되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구상하겠다는 식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우회적이고 소극적인 것 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과제와 전망에 대한 성찰적 사 려 없이 추진되는 동아시아 문화 헤게모니의 획득경쟁은 상대국가와 의 상호적 관계를 오히려 악화할 수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전 지구화라는 흐름에서 문화교통은 탈중심화라는 성격을 띠면서 소비 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시대적 추세에 서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을 구상하기 위해서 꼭 고려되어 야 할 전망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xxxvi
목 차 I. 서 론 1 1. 연구의 의의 및 분석틀 3 2. 연구방법 6 II.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 9 1. 한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의 역사적 배경 11 2. 중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의 역사적 배경 42 3. 일본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의 역사적 배경 57 Ⅲ.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65 1. 한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현황과 대응 67 2. 중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현황과 대응 84 3. 일본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현황과 대응 132 Ⅳ.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전망과 과제 175 1. 대중문화의 흐름과 정치경제학적 전망 177 2. 중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수용양상 및 언설을 중심으로 본 전망 179 3. 일본의 한류 수용양상 및 언설을 중심으로 본 전망 185 xxxvii
Ⅴ. 결 론 193 1. 전문 인력의 양성 및 배치 195 2. 상호 교류시스템의 구축 및 민간교류의 활성화 196 3. 현장 파트너십의 구축 및 네트워크의 형성 197 4.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교육 198 참고문헌 201 xxxviii
표 목 차 <표 I-1> 국가 광전총국의 해외 드라마 수입과 방영에 관한 주요 법규 목록 54 xxxix
그 림 목 차 <그림 I-1> 라그나로크의 주요 캐릭터 79 xl
I 서 론
1. 연구의 의의 및 분석틀 동북아시아 문화공동체 형성이라는 대 주제와 관련하여 대중문화 의 영역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동북아시아라는 보다 큰 지역을 중심으로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번영의 기틀을 마련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언설들에도 불구하 고, 국가 간에는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하고, 역사인식의 현격한 차이 가 발견되며, 정치적인 경제적인 현실에서도 국가중심의 이해관계를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는 최근 부각되고 있는 한류현상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특 정한 문화 상품의 소비라는 행위를 통하여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공통의 요소를 발견해 갈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과 미디어 산업의 발달은 국가의 정책이나 기업의 대응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전 세계의 소비자를 연결하고 있으며, 특 정 문화 상품에 대한 소비자, 수용자의 반응은 생산자, 기획자는 물 론 유통에 종사하는 측에서 조차 전혀 의도하거나 예측하지 못한 방 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대중문화 및 문화상품의 소비에 나타나는 초국가적인 흐름의 분석을 통하여 국가의 경계를 넘 어서는 문화공동체 형성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동북아를 한국과 중국, 일본의 3국을 일컫는 좁은 범위로 이해한다면 대중문화의 상호교류 및 확산을 동북아 라는 지역에 한정하여 논하는 것은 매우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설정이라 고 생각된다. 그것은 1990년 이래 현격하게 긴밀해진 대중문화의 교 류 현상은 동북아뿐 아니라 대만, 싱가포르, 베트남, 타일랜드 등 동 남아시아 각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기 때 문이다. 대중문화의 지구적 확산을 서구와 비서구로 나누고, 일본이 나 홍콩, 한국 등이 아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의 새로운 문화중심 이 되는 가능성을 흔히 말하는 탈 중심화 혹은 다 중심화 의 역학에 Ⅰ. 서 론 3
서 이론화 하고자 할 경우에도 동북아의 3국과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을 나누어 접근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문화산업이나 대중문화 수용에서 주요 배경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발달단계나 근대성의 차이를 보더라도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동일한 NIES계 열에 속하는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과의 상호교류 확산의 가능성을 논하는 것이 더욱 용이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역사적 근접성으로 인하여 한국인의 인 식 속에서 중국과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구분되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 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이 바로 동북아 공동체 논의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보고에서는 다소 인위적인 경계 짓기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중국, 일본에 한정하여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 적 배경 및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증진방안에 대해서 는 비록 단기간이기는 하나 본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접하게 된 현장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한중일 3국간의 대중문화 교류를 보다 원 활히 하고 나아가 그를 통한 상호이해 및 공유의 영역을 넓혀가기 위 하여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먼저 동아시아 문화교통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 볼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최근 부상하고 있는 한류와 같은 현상에 관해서도 동떨어지고 독특한 현상으로 보는 오류를 피하 고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미디어문화의 초국가적 이동이 훨씬 긴밀하게 이루어 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즉 미국의 대중문화 포맷이 세계 각지에 침투됨과 함께 그것이 지역적인 맥락에서 혼성화되면서 비서구지역의 미디어문화의 제작 능력이 비 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문화시장이 확대되고, 국 경을 넘는 미디어 문화산업 간의 연계가 깊어지게 된 것, 그리고 이 에 따라 미디어교통의 지역화가 활발해지게 된 것 등이 그 배경으로 4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이해되고 있다( 岩 淵 功 一 2004: p. 112). 문화시장의 확대는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소비력을 지닌 도시의 중산층이 크게 성장 하였다는 점,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 친숙하고 국적이나 민족에 구애 되지 않고 지구적 소비문화를 즐기는 신세대 젊은 층이 등장하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와 같은 흐름을 타고, 1990년대 초부터 일본의 애니메이션, 만 화, 캐릭터, 게임, 패션, 음악 등이 아시아 전역의 젊은이들을 사로잡 았으며, 이어 홍콩의 대중음악과 영화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관 객을 매료시킨 열풍이 지나간 이후, 이제 다시 한국의 드라마, 영화, 음악 등이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류의 현 재에 대한 이해나 앞으로의 전개방향에 대한 전망이나 모두 그것을 독립적인 현상으로가 아니라 전지구화에 따른 문화교통의 확대라는 맥락 안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류를 비롯하여 최근 다방면으로 확대되고 있는 동아시아 문화교 통의 흐름을 고려할 때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교류되는 문화가 특정의 국적을 부여하기 어려운, 다시 말해 하나의 기원으로 수렴되기 어려운 복합적이고 혼종적인 아이템들이라는 점이다. 대표 적 예의 하나로 우리는 한국태생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며 서구에서 유 래된 음악을 하는 가수 보아를 들 수 있다. 보아는 일본 뿐 아니라 아 시아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가 대변하는 문화가 한국적 인 것인지, 일본의 것인지, 서구적인 것인지는 매우 애매하다. 실상 그의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멋진 문화 상품 인 한 그것 이 어디에서 기원하였는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지구화 시대를 사는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혼종을 소비하는 자 로 규 정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이와부치 2003: 90). 이것은 다시 말해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하고 다방면적인 대중문화의 흐름이 초국 적(transnational)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 현 상을 일부에서 시도되는 바와 같이 다시 국가주의나 본질주의적인 민 Ⅰ. 서 론 5
족문화론으로 환원시키려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이 연구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입장은 문화교류의 증진 방안을 논함에 있어 일방적인 진출의 확대를 도모하기 보다는 상호적 인 교류의 확대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교류에 있어서 도 현재 한국과 중국의 대중문화 교류가 비록 균형 잡힌 모습은 아니 지만 민간의 차원에서는 자율적인 대화와 교류가 조금씩 시도되고 있 다. 따라서 정부가 한류 와 같은 일방적 흐름만을 강조하고 상품의 판매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 체계를 안정화시켜 나가기는 어 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오늘날 한국에서 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다보니 별로 위협도 아니었다는 식의 담론 이 상당히 퍼져 있으며, 일견 일방통행으로 보이는 한류 수출에 만족 하면서 한류를 상호적 교류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인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내에는 이미 일본의 대중문화가 상당히 들어 와 있고 일본과의 합작도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아가 한국의 문화 산업계나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대중문화교류 를 통한 동북아 공동체 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 위해서는 한류 와 같은 일방적 흐름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 지고 있는 교류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흐름을 원활히 유지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2. 연구방법 본 연구팀은 연구 책임자를 포함하여 3명의 공동 연구자와 각각 중 국과 일본의 대중문화 분야를 전공하는 두 명의 박사과정 연구보조원 으로 구성되었으며, 한중일의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 여 먼저 한국팀 (송도영), 중국팀 (양영균, 이응철), 일본팀 (문옥표 6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山 內 文 登 )의 3개 팀으로 나누어 2005년 7-8월간에 각기 2주에서 4 주에 걸치는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현지조사에서는 주로 엔터테인 먼트 기획사 등 영화, 드라마, 가요 등을 수입하여 유통시키거나 합 작에 참가한 경험이 있거나 계획 중인 문화교류 관련 종사자들, 부대 상품 판매업자들, 그리고 문화상품의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으며, 그 외에 특히 한류와 관련된 문헌자료 및 온라인, 오 프라인 매체들의 보도 자료를 검색 정리하였다. 현지 조사 후 몇 차례에 걸친 워크샵을 통하여 보고서의 통일된 포 맷을 시도하였으나, 뒤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각 나라별로 대중문화 수용 및 교류의 역사적, 이념적 배경이 다르고, 그에 개입되는 정부 나 업계, 미디어, 소비자의 역할이 각각 다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조 사의 내용 및 현황에 대한 각 연구자들의 이해에도 일정한 차이가 있 어 동일한 구성으로 보고서가 작성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무리하게 포맷을 통일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공동연구 결과보고에 서 통일된 형식을 갖추는 것보다 각 연구자들이 지역전문가로서 중요 하게 생각하는 사항이나 해석상의 차이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각 국의 현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구성은 먼저 연구책임자에 의해 집필된 제 I 장 서론에 이어 제 II 장에서는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을 II-1 한국편 (송도영), II-2 중국편 (양영균, 이응철), II-3 일본편 (문옥표, 야마우치 후미타카)의 3절로 나누어 다루고, 제 III 장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역시 마찬가지로 III-1 한국편 (송도 영), III-2 중국편 (양영균, 이응철), III-3 일본편 (문옥표, 야마우치 후미타카)의 3절로 분담하여 각 팀별로 조사결과를 정리하였다. 그리 고 마지막의 제 IV 장에서는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전망과 과 제>를 각 나라별 주안점을 살려 제시하였다. Ⅰ. 서 론 7
II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 9
1. 한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의 역사적 배경 가. 이식된 해외 대중문화의 혼합 정착사 2005년 현재 한국에서 한, 중, 일 문화공동체를 논하는 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실제로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는 곧 수입된 해외 대중문화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 으며, 특히 일본의 식민 지배를 중심으로 일본의 대중문화가 사실상 한국대중문화를 그 기초적 형태부터 형성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그 런 의미에서 초기의 한국 대중문화는 이미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간에 는 식민지적 문화공동체 (이 단어의 특수한 맥락을 인정해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를 이루고 있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본문화의 절대적 영향아래 있던 일제시대의 한국 대중문화가 1930 년대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기에는 또한 중국문화의 요소들을 그 안에 받아들여 또 다른 의미에서의 한 중 일 문화교류와 혼성 현상마저 보 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타났던 한 중 일의 문화적 혼성과 교류는 2005년 현재의 맥락에서 한국 정부와 지식인들이 논의하고 싶어 하는 문화적 교류 또는 문화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사실은 그 정 반대의 의도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한국 대중문화 형성기의 한, 중, 일 대중문화의 지형도는 일본의 일방적이고 지배적인 헤게모니 아래 서 중국문화가 편입되어 들어간 형국이고, 한국의 경우는 한국적인 문화적 주체성이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일방적인 지배-피지배의 국면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2005년 현재 한국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한 중 일 문화교류 이야기는 소 위 한류 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한국 대중문화 상품의 일부가 한국인 들이 보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의 대중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있어왔던 일본과 그리고 그 이전시기부터 Ⅱ.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 11
자신들에게 문화를 전수해주면서 아시아적 문화 헤게모니를 지배해 왔다고 인식되는 중국의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놀랍고 감격 스러운 현상을 발견하면서 등장하게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대중문화계에서 일고 있는 한,중,일 문화교 류 내지 문화공동체와 관련된 담론,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류 와 관련 된 한국내의 담론이 갖는 성격을 위치매기고 상대화시켜 살펴보기 위 한 전제로서 한국 내에 유입, 이식되어온 해외 대중문화 영향의 역사 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해방 이후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는 일제시대 동안 이미 강하게 형 성된 일본문화의 영향에 뿌리를 둔 채 다시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의 문화적 홍수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 미 개항기 직후부터 일본을 경유한 미국과 유럽 문화상품의 영향이 한국의 문화소비시장 초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미군정의 시작과 함께 한국에 쏟아져 들 어오기 시작한 미국 대중문화는 순식간에 당시 취약했던 한국 대중문 화 산업과 대조를 이루었던 한국민들의 대중적 문화욕구의 폭발적 수 요를 파고들어 일시에 시장을 장악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극 장가에서 절대적 힘을 발휘한 미국 영화의 영향은 당시의 영화광을 소재로 한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대 중음악에 있어서도 여전히 강력한 일제시대 음악적 형성물의 성격에 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부의 욕구와 현대화 를 곧 서구화 와 동일시했 던 대중들의 문화적 분위기가 연결되어 미국 팝 음악의 다양한 장르 들이 곧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새로운 바람으로, 그리고 이어 주도적 경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미국문화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지 속되고 있다. 대중가요와 영화,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유입된 미국문화의 영향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 지하기에 이르렀으며, 분야에 따라서는 표현되는 언어만 한국어 혹은 한국인의 모습이지 사실상은 미국 대중문화산업 상품의 그것과 엄밀 12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히 구분하는 것이 의미를 상실한 단계에 이르기도 했다. 특히 동아시 아에서 인기가 있다고 여겨지는 한류 문화상품의 상당수가 예컨대 로큰롤 과 힙합, 재즈 적 요소들을 그대로 흡수 소화하여 자신의 것 으로 재창출해내는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 상품들을 주된 무기로 하고 있는 점들이 주목된다. 한편 해방 이후에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갈구와 일제 식민지배의 영향을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가 워낙 강하여서 정치적으로 일본 대중 문화의 유입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정책적인 노력이 수십 년에 걸쳐 지속되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함께 1940년대 말 공산화된 중국 대륙의 대중문화는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그 문화산 업적 수준이 빈약했던 것도 사실이거니와 공산국가 의 문화적 영향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도 겸하여져서 중국대륙의 대중 문화적 요 소 또한 오랜 동안 유입이 정책적으로 차단되었다. 대신 1960년대 중 반 이후에는 홍콩에서 발전한 무협영화 또는 무술영화들을 기본으로 하는 오락성 영화들이 한국 영화산업에서 무시하지 못할 열풍을 일으 켜 상당 기간 동안 한국의 대중들을 열광케 하였고, 이후 홍콩영화 로 대변되는 중국영화들의 한국 내 위치를 오랫동안 공고히 했다.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수입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현 실에 있어서의 영향은 여전히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대중문화의 수입이 금지된 해방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동안 일본 대중문 화는 우선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하나의 교 과서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 현실이다. 즉 한국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 램들의 드라마와 프로그램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표절에 가까울 정도 로 일본의 그것들을 베끼거나 재료들을 따와서 혼합함으로써 자신들 의 창작물인 양 방영해온 것 자체가 일본 대중문화의 직접적인 수입 이 금지되어 있는 것을 오히려 악용한 사례로 지적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출판만화와 텔레비전용 만화영화 및 게임에 있어서는 일본 상품 중 적지 않은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비됨으로써 그 문화상품들 Ⅱ.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 13
의 원전이 일본 것인지 한국 것인지를 소비자들이 분간하지 못한 채 수용되는 사례들 또한 적지 않았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 들어 여행 의 증가와 비디오 및 디지털 대중 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일본의 문화 상품들을 한국내로 반입해 들어오는 것이 쉬워졌고, 케이블 텔레비전 의 시청권 확산은 대중문화 상품의 국경개념을 무력화시키기 시작했 다. 이는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한국의 시장개방이 단계적으로 시작 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의 대중문화의 제작과 소 비영역에서 커다란 영향을 계속 미쳐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기부터 현재까지 동아시아 여러 곳에서 인기 를 끌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 산업 상품들의 의미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할 것인가? 특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한류 담론은 한국 대중문화사에 대한 인식위에서 어떤 역사적 의미 를 갖게 될 것인가? 나아가 거기서 대중문화 상품들을 중심으로 한 한, 중, 일 문화교류 의 활성화와 문화공동체 형성이라는 것은 현 실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게 되며 어떤 역사적 상황 위에서 탄생한 담론적 산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 고 이 절에서는 개항기 이후 한국에서 대중문화 라고 할 수 있는 것 이 형성되는 초기에서부터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했던 해외문화의 유 입 현상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나. 일제시대: 일본 대중문화의 절대적인 영향 대중사회의 형성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산물이라는 점을 전제하 고, 대중적 매체를 활용한 문화소비상품을 대중문화 상품이라고 한다 면 한국에서 해외 대중문화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적 인 근대화를 겪기 시작한 개항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는 곧 해외 대중문화 유입의 역사와 함께 출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수요와 공급의 자연스러운 시장적 상호작용에 따른 것이기보다는 식민지적 상황이라고 하는 특수한 구조를 바탕으 14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대중문화의 소비 자체가 모두 강압적이 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다수의 대중문화 상품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문화소비 욕구에 부응하는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문화적 영향의 방향은 일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문화를 제작, 유통, 소비할 수 있는 장치와 자본, 그리고 공간의 마련에 있어서 그 러한 일방성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1) 한국 영화사 출범기 일본의 영향 좌파영화인으로서 경향파 의 대표적 활동가이기도 했던 임화( 林 和 ) 의 기록(2002)에 의하면 한국의 영화사는 광무 7년(서기 1903년) 동 경의 흥행업자 요시자와상회( 吉 澤 商 會 )가 한반도에 수입해서 공개한 영미연초회사의 선전필름이 활동사진 형태로 한국내에서 상영된 것 을 효시로 본다. 그 내용은 미국계 담배회사의 선전필름이었으며, 그 것을 들여와 상영한 주체는 동경의 상업 자본이었으므로 한국인들은 단순 소비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영화 이전 활동사진 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역시 일 본 상인들이 들어와 상영한 것으로서 내용물은 미국 유니버설 회사와 프랑스 파테 회사의 단편 및 장편, 일본의 신파물을 담은 활동사진들 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 중 일부는 본래 일본인 관객을 위해 만들어 진 조선 풍물을 담은 활동사진도 있었는데, 이것이 다시 한국에서 상 영되기도 했다. 활동사진 시대는 일본에서도 활동사진 제작이 활발하 기 이전의 시기여서, 미국과 프랑스 등 영화산업을 처음 일으킨 구미 의 작품들이 일본인들의 손을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 게 활동사진 시대 에는 한국에서 제작된 것이 전무하며 따라서 제작 과 유통에 한국인이 참여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한국에서 짤막한 필름들이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은 1918년경 신파 연극이 유행의 한 고비를 넘을 무렵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니까 신극좌, 혁신단, 문예단 등의 극단이 동경에서 일본인 촬영기사를 데 Ⅱ.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 15
려다가 일본에서 신파연쇄극 이라 불리던 연극을 모방한 내용을 한국 에서 공연할 때 연극의 장면과 장면 사이에 스크린을 내리고 비춤으 로써 극의 역동성을 보조하는 필름들이 나타났던 것이다(김종욱 2002: 73).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해 둘 것은 당시 한국에서 인기를 끌던 신파극 이라고 하는 것들의 상당수가 - 가장 대표적이며 인기 를 끌기도 했던 [장한몽]을 비롯하여 - 유럽 등에서 만들어진 문예물 원작을 일본에서 각색, 번안하여 일본 내에서 신파극으로 올렸던 작 품들을 그 원전으로 삼고 있었던 사실이다. 한국의 신파극들은 이렇 게 유럽 문예물 원작에서 일본의 맥락에 맞게 각색된 작품이 다시 한 국에 들어오면서 인물의 이름과 배경설정을 한국식으로 번안, 혹은 각색하여 올리는 것들이 많았다. 바로 이런 이중적인 각색을 거쳐 수 입된 문화적 산물이 일본인 촬영기사와 제작자의 손으로 촬영되고 상 영된 것이 당시 한국의 신파극단에서 상영되던 상영물의 다수를 구성 하였다는 점은 이후로 한국 대중문화가 걸어가게 될 외부문화의 이 식 현상과 주체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약한 객체적 성격 으로서의 콤 플렉스를 설명하는 틀이 될 것이다. 신파연쇄극에서 공연된 작품 중 한국에서 처음 촬영된 것으로 거론되는 것의 하나는 김도산 등의 신 극좌에서 제작하고 단성사에서 1919년 10월 27일 처음 공연된 활동 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투( 仇 鬪 )]라는 작품이었다(김화 2001: 23). 신파연쇄극 사이에 끼어져 상영되는 것을 넘어서서 독립된 작품으 로 제작된 영화는 1920년에 취성좌( 聚 星 座 )와 김도산 등이 경성도청 으로부터 위촉받아 제작한 호열자 예방 선전영화와 1921년 - 김하 (2001)의 주장에 따르면 1923년 작품이 되나 확인하기가 어렵다 - 총독부 산하 체신국의 의뢰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저축사상 선전영 화 [월하( 月 下 )의 맹서] 등이 효시를 이룬다. 즉 독립된 영화작품 자 체가 일본 식민정부의 의뢰로 선전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들이라 는 점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6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보다 완전히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작품으로는 당시 황금관 과 조선극장 두 개의 극장을 경영하던 하야카와 긴타로 ( 早 川 金 太 郞 혹은 早 川 宅 舟 )라는 일본인이 1922년에 동아문화협회라는 회사 를 만들어 거기서 제작한 것으로, [춘향전]이라는 타이틀을 올렸다. 이 [춘향전]은 하야카와( 早 川 )가 감독하고 촬영은 [의리적 구투]를 촬영했던 일본인 히로가와가 맡았다. 다만 주연배우는 한국인이어 서 당시 조선극장의 변사였던 김조성과 김선초가 주연으로 출연했 다(김화 2001: 24). 한국 최초의 춘향전 영화는 이렇게 일본인의 제작, 감독, 촬영으로 만들어져서 일본인 소유의 극장에서 일본인 기사의 손으로 상영되었 다. 이 작품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 흥행에 성공했고, 일본에 수출 되어 상영됨으로써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의 일본 수출에서도 첫 기록 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당시의 맥락에 있어서는 이것이 한국 영화의 일본 수출이라고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며 사실상 형식과 내용 에 있어서도 결코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 의 시작은 당시 일본영화사 의 일부에서 진행되던 포함관계 속의 부 분의 역사 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춘향전]의 흥행 성공에 자극받은 단성사의 사주 박승필은 단성사 의 영사기사 이필우에게 촬영을 맡겨 한국인이 촬영을 맡은 최초의 작품인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하였다. 이 작품은 최초로 한국인 제작자와 촬영기사에 의해 만들어진 극영화로 한국의 영화사( 映 畵 史 ) 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로 박승필은 영화제작에 서 손을 떼게 된다. 그리고 이어 설립되는 최초의 대형 영화사( 映 畵 社 )는 1924년 조선에 건너와 있던 일본인들이 공동출자하여 부산에 설립되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였다. 전부 일본인 자본으로 구성된 조선키네마 주식회사는 영화의 기업 화를 목표로 촬영소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자본, 감독, 촬영 등 은 일본인들이 맡았고 출연하는 연기진은 한국인들이 맡았으며, 주로 Ⅱ.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 17
한국시장과 일본시장을 동시에 겨냥한 작품을 지향했다. 연기를 담당 한 한국인들은 토월회( 土 月 會 )라고도 불린 무대예술연구회 구성원들 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 며, 당시 주류를 이루던 신파극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극을 지향하여,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의 작품들을 공연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창립 작품으로 제주도에서 촬영한 [해( 海 )의 비곡( 悲 曲 )]이란 신파극을 만들었다. 출연은 한국인 들로서 안종화, 이채전, 이월화, 이주경 등이었고, 제작과 각본, 감독 은 모두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대주주 중 한 사람인 다카사가 맡았으 며, 촬영도 일본인 촬영기사가 맡았다. 이 작품은 1924년 단성사에서 개봉되었고 그 이듬해 일본에 수출, 상영되었다. 여기서도 이 작품의 일본 상영을 과연 수출 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는 의문스럽다. 이어 앞 서 [월하의 맹서]에서 감독을 맡았던 윤백남이 조선키네마에 들어가서 일본인 제작자 및 촬영 스탭들과 함께 한국인 배우들을 고 용한 영화 [운영전]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세조대왕의 넷째 아들 안 평대군의 사생활을 소재로 한 소설 운영전을 각색한 작품으로 1925년 에 개봉되었다. 이후 조선키네마는 [운영전]과 [암광]의 흥행 부진으 로 위기를 맞는다. 1925년에는 흥행저조로 사업위기를 맞은 조선키네마에서 경험을 쌓았던 한국인들이 나와 윤백남이 설립한 백남 프로덕션에서 [심청 전]이 만들어지는 때다. 윤백남은 한국에서의 흥행을 바탕으로 주된 시장으로 겨냥했던 일본시장에 [심청전]을 출시하여 상영하려고 하였 지만 이 작품이 한국에서 흥행하지 못함에 따라 일본시장에서 상영할 기회도 얻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백남 프로덕션 회사 자체가 해산 하게 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제작되는 초 기 영화들이 시초부터 일본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에 임하고 있었다 는 사실이다. 즉 아직 규모가 크지 못한 한국 상영시장은 거기서의 18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흥행을 바탕으로 보다 규모가 큰 일본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이 라는 의미를 당시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2000년대에 들 어 일본에서 인기를 끄는 일부 한류 문화상품들이 한국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시장에 들어가 흥행수입을 올리고자 하는 기획 성격을 갖는 것과 비교해보면 보다 흥미로운 사실로 인식될 것이다. 1925년과 1935년까지의 10년은 한국에서 많은 영화사들이 한꺼번 에 설립되는 시기다. 40여개의 영화 프로덕션이 활동을 벌였는데, 실 제로 1년에 제작되는 영화 수는 평균 10편 안팎이었다는 사실에서 많 은 영화사가 생겼다가 또한 금세 소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주 목을 끌었던 회사와 작품으로는 1926년에 설립된 계림영화협회의 [장 한몽]이다. 이 작품은 일본인 작가가 쓴 금색야차( 金 色 夜 叉 )라는 제 목의 소설이 일본 내에서 인기를 끌었었던 작품으로(김종욱 2001: 83), 한국에서는 그것이 다시 번안되어 신문에 연재되면서 인기를 끌 었고, 다시 신파극으로 올려져 또한 인기가 입증된 작품이었다. [장 한몽]을 영화하면서 먼저 남자 주인공인 이수일 역을 맡은 주연배우 는 일본인 오자와( 大 澤 )라는 배우였는데, 촬영 도중 행방불명이 되어 후반부는 나중에 소설 [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해지는 심훈을 발탁하 여 주연배우로 썼다. 이 영화의 감독은 이경손이 맡았고 촬영은 조선 키네마의 촬영기사로 활동했던 니시가와라는 일본인이 맡았다. 1926년이 되어 한국의 영화사는 나중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흥행작품을 낳는다. 요도라는 일본인이 설립한 영화회사에서 제 작을 맡은 나운규 각본, 감독, 주연의 [아리랑]이 그것이다. 이 작품 은 나운규의 시나리오를 본 일본인 사장이 시나리오의 작품적 완결성 을 인정하여 주저 없이 나운규에게 감독과 주연을 모두 맡겼다고 하 는데(김화 2001: 42-43), 작품 내에서 은연중에 일본 제국주의에 시 달림을 당하는 조선 민족의 식민 비애를 반영시켰다는 해석이 이루 어져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여러 차례 말썽을 빚었다. 결국 일본인 제작자는 검열을 통과시키기 위해 일본인 스모리 슈이치를 감독으로 Ⅱ.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 19
기록하여 검열을 통과시켰으나 사실상의 감독은 나운규가 맡았음을 여러 증언들이 확인하고 있다. 당시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흥행의 대성공을 기록한 [아리랑]은 하나의 작품이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 작품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즉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대중 통속극으로 통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당시 식민지배하에 있던 한국인들은 그 작품 안에 서 항일 메시지를 느낄 수도 있는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었 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화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에 소박하나마 조선 사람에게 고유한 감정, 사상, 생활의 진실의 일단이 적확히 파 악되어 있고, 그 시대를 휩싸고 있는 시대적 기분이 영롱히 표현 되 고 있다고 해석되고 있었던 것이다(김종욱 2001: 75). 이후 나운규는 액션 활극의 성격을 띤 작품 [풍운아]를 감독해서 다시 흥행에 성공하였다. 이에 힘입은 나운규는 여전히 일본인 자본 가가 제작자로 나선 [들쥐]라는 작품을 [풍운아]와 유사한 스토리 구 조로 만들게 되는데,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서 검열을 불허함에 따라 상영이 중단되었다가 재상영 되었다. 이후 흥행성 있는 작품에만 열중할 것은 요구하는 일본인 제작자와 결별하 고 나와 독립 프로덕션을 차린 나운규는 [옥녀], [두만강을 건너서] 등의 작품을 제작, 감독하기에 이른다.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의 울분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으로서 검열 당국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장면 삭제와 제목 변경을 요구받고 겨우 개봉되었다. 하지만 이를 기화로 아직까지도 제작비 지원을 하던 일 본인 자본들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자 나운규의 프로덕션도 해산의 길 을 가게 된다. 이후 나운규는 흥행 작품에 몰두하면서 여러 작품을 남기고, 일본인 자본의 원산만 프로덕션에 들어가 1931년에 [금강한] 이란 작품을 감독하였다. 이 작품은 일본인 딸을 둘러싼 러브스토리 에 액션을 가미한 흥미본위의 작품이었는데(호현찬 2000: 57), 사람 들은 나운규가 이러한 작품을 연출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 20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고, 작품 자체도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는 좌파 사상에 입각해 영화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활동한 경향파 영화인들이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반면 영화적 흥행성이 부족했고, 조선총독부의 검열과 감시 가 심한데다 자금난까지 겹쳐 1931년 이후 실질적인 영화제작을 하지 못하고 이론 활동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운동이 신파 조 영화의 구태의연함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진로 모색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된다. 나운규의 [아리랑]과 함께 무성영화기 한국 영화의 2대 걸작으로 거론되기도 하는 [임자 없는 나룻배]는 1932년 이규환의 연출로 탄생 되었다. 이규환은 일본대학 예술과를 나온 친구의 자극과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영화예술연구소에 입소한다. 6개월간의 기초 공부를 마치고 일본의 쇼치쿠 촬영소에 들어가려 했으나 좌절하고 서 울에 왔다가 다시 상하이로 간다. 상하이에서 시나리오를 쓰며 기회 를 기다리던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영화의 거장으로 인정받 던 도요다시로( 豊 田 四 郞 ), 스스키 주키치 등에게 사사하면서 본격적 영화수업을 받는다. 이후 일본에서 쓴 한 편의 시나리오를 들고 한국 에 돌아와 나운규의 적극적 주선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35년은 무성영화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발성영화가 발표되어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발성영화가 녹음장비와 기술을 요구했던 만큼 상대적으로 기술력과 자본력이 부족했던 한국인들의 영화사는 불리 한 상황에 놓인다. 따라서 더 많은 영화인들이 일본 영화사에서 한국 인 스탭으로 일하면서 한국에서의 영화 제작활동을 하게 되며, 이와 함께 일본에서 직수입된 영화의 상영이 한국내 영화소비시장에서 상 대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더욱 직접적인 Ⅱ.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역사적 배경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