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 種 德 種 學 種 홈의 生 ;훌와 活 動 올 中 心 으로 - 申 千 混. 목 차 I. 머리말 11. 秋 隊 의 家 學 理 ;융: m. 救 隨 家 쩔의 成 立 N 맺옴말 1. 머리말 收 隱 李 짧은 고려말의 대석학으로써 당시 사회에서 橋 宗 으로 존숭을 받았다. 그는 緣 亨 李 짧의 아틀로 1353 년(공민왕 2)에 李 齊 賢 과 洪 彦 博 의 문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 여 官 路 에 진출하였다. 이후 그의 학문은 크게 빛을 발하여 1358년(공민왕 7)에는 왕으 로부터 이색의 재주와 도덕은 출중하여 다른 사람과 비할 바 아니다 라는 칭송을 받았 다. 그는 당시 고려 사회의 학풍을 성리학으로 개변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1367년(공민왕 16)에 成 均 大 司 成 으로서 행한 그의 교육중흥 정책은 고려 후기의 사상적 구조를 성리학으로 전환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6차에 걸쳐 과거의 考 試 官 에 임용되어 수많은 門 生 을 배출하였다. 그의 문 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門 徒 와 문생틀은 이후 고려 사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여 정 치개혁과 학문발전을 선도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정치개혁과 학문발전에 크게 기 여하였다. 고려말에 대사성을 맡아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李 至 尹 紹 宗 李 行 宋 文 中 퉁은 그의 문생이었고, 조선 건국 후에 대사성을 맡아 학문발전에 기여한 劉 敬 柳 寬. 金 若 桓. J 或 {행 森 李 伯 由 李 훌 퉁도 모두 그의 문생이었다. 또 조선 건국 후에 정치개 혁의 선봉에 서서 활약한 河 잃과 權 近 퉁도 그의 문생이었다. 이와 같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한 수많은 문도와 문생들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정치개혁과 학문발전을 선도하 * 영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128 ^ 文 科 學 쩌 究 論 靈 第 二 +:n 號 였다. 목은은 당시 사회에 학문적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학의 발전에도 크 게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가정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이면서 자제들을 엄격하게 훈도하 였다. 그는 아버지 곡의 가르침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아 자제틀을 훈도하였는데, 그 이 념은 莫 負 起 家 文 孝 公 이었다 이러한 이념을 전제로 그는 자신의 교육이념을 현상화 하여 이를 가학 이념으로 승화시켜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겼다. 그의 아들 種 德 種 學 種 善 도 목은의 교훈을 받들어 모두가 과거에 합격하여 忠 節 과 효행으로서 그 이름을 떨쳤고, 그의 손자들도 이러한 목은의 가훈을 승계하여 가업 을 계승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목은의 가학 이념은 자손들의 가훈으로 전승되어 이후 그들 門 中 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게 된다 그의 후손들 중에 단종 때의 李 탤는 死 六 뭄의 한 명으로 충절을 지켰고, 중종 때는 기묘명현 李 쯤가 의리로 이름을 떨쳤으며, 선조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李 之 옳 李 山 海 李 山 南 가, 영조와 정조대에는 大 山 李 象 靖 小 山 李 光 靖 李 秉 泰 가 가학을 계숭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또한 구 한말에는 李 南 珪 李 容 珪 李 商 在 선생이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목은가의 학맥을 주목하면서 본고에서는 목은이 자손들에게 내린 가 학의 성립과 이념을 추적하고, 특히 그의 아들 종덕 종학 종선의 생애와 활동을 조명 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가 목은의 가학 이념 이 이후 자손틀의 가학 실천 이념으로 현상화 되는 시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고는 먼저 목은의 가학 이념을 고찰하고 이러한 가학 이념으로 교육을 받은 그의 아들 들이 어떻게 이를 수용하면서 현실적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가를 조명하였다. II. 救 隱 의 家 學 理 念 목은은 고려 후기의 석학으로 이 시기의 모든 학자들로부터 유종으로 존경을 받았다 또 그는 후학들의 교육을 필생의 과엽으로 여겨 교육활동에 전력하면서 수많은 제자들 을 배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은 이후 고려 사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 하여 정치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목은이 당시 고려 사회에서 유종으로 자리하기까지는 그의 아버지 곡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목은의 아버지 곡은 그가 일찍이 성균시 에 합격하자 熱 京 에 있으면서 그에게 시를 보내어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
收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29 f성 兒 須 솥'i# 王 협! 잠 欲 致 身 均 是 勞 남아가 벼슬하고자 하연 제왕의 도읍에서 해야 할 것이요 폼을 빛내려고 한다면 이에 따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긍 十 年 前 懶 調 휩 1옮 名 去 U 歡 白 頻 餘 엄k 今 當 홉 分 陰 學 협뽑 rjj 求 綠 木 魚 30세 전에 독서 를 게을리 한다연 늙은 후에 탄식한들 무엇하리 너는 지금부터 마땅히 시간을 아껴 공부해야 하리니 그렇지 않으면 부귀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함과 같으리라 1) 이때 아버지 곡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그의 평생의 지침이 되었고, 그는 이를 그의 자 손들에게도 傳 힘 11 하여 가업을 계승하도록 교육하였다. 이것은 그의 만년에 아들 種 善 과 장손 I굶폈를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다음의 시에서 보인다. 얹 H훌염 分 R감 哲 後 賢 愚 元 在 養 豪 中 t!j: 曺 當 把 分 陰 惜 莫 負 起 家 文 孝 公 귀하고 천하게 됨은 천명을 밝히느냐에 있고 현자와 우자는 어려서부터의 닦음에 있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촌음을 아껴 써서 우리 집을 일으킨 文 孝 公 ( 李 뤘)의 뜻을 저버리지 말아라2) 위에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없 今 當 惜 分 陰 學 이란 교훈을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 밟 曺 當 把 分 陰 惜 이란 말로 傳 訓 하면서 우리 집을 일으킨 文 孝 公 ( 李 觀 )의 뜻을 저버리 지 말아라 고 부탁하고 있다. 목은이 자손들을 위하여 가르친 가학이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Ä. 가업의 계승과 충효의 실천 목은은 아버지 콕의 가르침을 계송하여 가업을 발전시키 고, 아울러 충과 효률 실천하 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였다. 이러한 그의 가학 이념은 손자 굶뼈에게 준 글에서 太 上 正 心 術 次 乃 能 文 學 먼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正 心 術 ) 다음에 학문을 연마하라 1) r 據 훔 集 권 18. 用 家 兄 詩 題 寄 示 兒 子 해 懷. 2) r 收 隱 詩 題 권 13. 誠 季 子 參 軍 長 孫 굶 田 柔.
130 人 文 科 學 쩌 究 論 養 第 二 + 五 號 終 뚫 君 子 휴짐 輪 a흉훗! 家 光 군자다운 선비가 되어 우리 집 안을 크게 일으켜 라 3) 고 한 데서도 보인다. 목은은 아버지 문효공의 뜻을 계승하여 가업을 일으킨다는 전제하에 자손들을 철저 하게 교육하였다. 그는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자제틀을 교육할 때는 엄격하였다. 그의 교육이념은 存 天 理 遍 人 愁 하는 성리학적 이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지 상의 목표는 이러한 이념을 전제로 진정한 충과 효를 실천하는데 두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바로 자제들의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는 일차적으로 자제틀에게 충과 효를 가르쳤고, 자손들의 화목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웠 이 자손들을 위하여 남긴 底 힘 11이기도 하였다. 我 之 子 孫 百 代 至 親 詩 禮 傳 家 忠 孝 立 身 나의 자손들은 百 代 에 이르기까지지 화친할 것이며 詩 와 禮 를 대대로 전하여 忠 과 孝 로서 立 身 하리4) 忠 과 孝, 이것은 그가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교육할 때나 그의 문생들을 교육할 때 가 장 주요한 되목으로 제시하였던 이념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그의 문생들에게 준 詩 에서 在 於 家 門 名 日 孝 在 於 윷ß 國 名 B 忠 집에서는 효가 끈본이요 나라에서는 충이 근본이로다 忠 之 與 孝 本 一 物 如 水 隨 地 形 不 同 충과 효는 근본이 하냐이니 비록 물은 땅을 따라 흐르지만 모양은 같지 않음이라 我 今 解 훗 言 莫 盡 냐는 지금 취하여 말을 다 못하니 'ttr. 向 書 中 尋 正 宗 너희들은 글 속에서 근본( 正 宗 )을 찾으라 靈 훌 麗 麗 方 -t~ 全 # 大 用 없 流 通 영묘한 기운을 갈고 닦아 어린이의 마음을 가지연 모두 크게 쓰여 널리 유통되리라 3) r 救 隱 詩 覆 권 34, 示 孫 굶어성 敬 童. 4) 韓 山 李 ~ 大 宗 會, r 救 隱 先 生 年 짧 A.
쨌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31 後 生 可 뽑몇 不 짧 努 力 樹 立 重 興 져1 후생이 두려우니 희망을 깊게 갖고 열섬히 노력하여 큰 꽁올 세우라 ) 고 한 데서도 보이고, 또 李 文 和 에게 준 글에서 李 文 和 가 나에게 찾아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려 한다연 장차 무엇으 로 근본을 삼아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크도다 이 말이여! 그것에는 바로 中 이 있을 뿐이다. 부모를 잘 섭기는 것을 이름하여 효라 하고 이것을 임금에 게 옮기는 것을 충이라 한다. 이름은 다르지만 이치는 하나인 것이다- 이치가 하나인 것은 즉 中 인 것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사람이 태어날 때 健 順 과 표 倫 의 덕을 갖 추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性 인 것이다- 어찌 충과 효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寂 然 하 여 옴직이지 않아서 거울처럼 비었고 또 저울처럼 공명한 것은 性 의 體 이니 이름하 여 中 이라 한다. 그것이 감동하여 드디어 통해져서 구름 가듯 물 흐르듯 하는 것은 性 의 用 이니 이름하여 和 라 한다 中 의 體 가 서연 천지가 놓이고 和 의 用 이 행하연 안물이 발육한다. 성인이 참여하여 룹는 미묘한 힘으로 해서 덕성이 높아지고 인륜 이 퍼 진다 고 하였다.6) 라 한 데서도 보인다. 그 자신도 항상 효의 실천을 지침으로 생활하였다. 지은 이것은 그가 父 母 助 勞 有 此 身 昇 天 恩 德 老 鋼 新 今 朝 靜 座 思 無 盡 終 始 % 陽 可 孝 親 부모님 힘쓰시어 이 몸이 생겼으니 하늘 같은 그 은혜 늙올수록 새로워라 오늘 아침 조용히 앉아 끝없이 생각하니 부모님 섬기기를 郭 % 陽 같이 해야 하리로다7) 란 시에서도 보인다. B. 몸가짐을 바로 하고 근원을 맑게 할 것( 形 端 源 찔) 목은은 자손틀에게 몸가짐을 바로 하고( 形 端 ) 근원을 맑게 할 것( 源 燦 )을 강조하였으 5) r썼 隱 詩 훌J~ 隱 先 生 年 諸 56세조, 有 誠 諸 生 詩. 6) r쨌 隱 文 훨 권 10. 伯 中 說 - 7) r 收 際 詩 훌 권 29. 有 感.
132 人 文 科 學 昭 究 論 養 第 二 十 五 號 며, 아울러 황음과 망동을 경계하였다. 나의 몸은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항상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性 과 情 을 보존하 여 本 然 之 性 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만약에 이를 소홀히 하여 나의 몸을 함부 로 다룬다면 본연지성을 앓어 짧 默 의 성과 정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본연지 성을 전제로 한 나의 행동은 즉 군자의 행일 것이며, 군자의 행으로 임금을 보필하고 부모를 섬길 때에 비로소 庸 慮 之 治 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 기 위하여 항상 몸을 단정히 하고( 形 端 ), 근원을 깨끗이 하여( 源 燦 ), 모든 일을 誠 으로 할 것을 강조하였고, 황음과 망동은 元 精 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경계하도록 하였 다- 이것은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긴 다음의 시에서 보인다. ~ 端 影 움 曲 t링 y웠 流 斯 淸 修 身 可 齊 家 無 物 不 由 誠 f훈품 喪 本 性 忘 動 傷 元 精 所 以 llx: 自 짧I 짧 根 木 不 榮 寢 席 웰 安 地 天 命 1m 然 明 奈 之 { 可 忽 請 흠 身 所 由 生 或 흉 而 玩 之 짧윌t 其 性 情 q 差 陸 我 子 孫 視 此 座 右 銘 모양( 形 )이 단정( 端 )하연, 그림자가 어찌 굽을 것이며 끈원( 源 )이 맑으면( 燦 ), 흐르는 물도 맑으리로다 몽을 닦아야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은 정성( 誠 )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도다 갚품은 本 性 을 잃게 하고 忘 動 은 元 精 을 상하게 하노니 (내가) 스스로 본성을 깎지 말도록 경계하는 것은 뿌리를 상하연 나무가 무성치 못하기 때문이로다 잠잘 때나 편안히 쉴 때에 도 天 命 은 언제나 밝게 비추고 있으니 어찌 잠시라도 소홀히 대할 수 있으랴 내 몸은 천명을 받아 냐왔는데 혹시 라도 내 몽을 함부로 처신하연 그 性 情 은 t용휩t 와 같이 되리라 아아 나의 자손들이여 이를 보고 좌우명으로 삼아라8) 위에서 그는 자손들에게 몸을 단정히 하고( 形 端 ) 마음을 맙게 가져( 源 燦 ) 天 命 으로 태어난 나의 몸을 천명에 어긋나지 않도록 처신하라 는 부탁을 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 귀하고 천하게 되는 것은 바로 천명으로 부여받은 本 然 之 性 을 어떻게 보존하느 냐에 두어 어릴 때부터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본연 8) r 秋 隱 詩 棄 권 26, 示 子 孫 詩
收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33 지성은 至 純 至 高 至 燦 하여 갖추지 않는 바 없는데 후천적인 기질에 의하여 구름이 해를 가리듯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갈고 닦아 본연지성을 잃 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위의 시에서 보이는 황음과 망동은 즉 후천지성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이며, 이것은 뿌리를 상하게 하고 원정을 잃게 함으로써 금수의 성정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여 경계하 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일찍이 그의 벗인 韓 備 의 아들에 대한 가르침에서 사람이 天 으로부터 理 를 얻어 갖추고 만사에 상응함은 본연의 善 이 있기 때문이 다, 기질이 혹 이를 구속하거냐 물욕이 그것을 가리거나 하니, 이로써 本 然 之 善 을 잃게 되는 것이다. 天 으로부터 얻은 것을 자기에게서 잃은 것이다, 9) 라 한데서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그가 지향한 교육이념은 바로 후천적인 기질에 의하 여 가려진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이며 이것은 바로 천명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여 천명에 부합시키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파악하였다. 이것은 다음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본연의 선은 본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賢 不 씹 智 愚 의 차이가 냐 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질이 앞에서 가리고 울욕이 뒤에서 구속하여 날마다 어두 운 곳으로 달려가서 막히고 병이 되어 버리연 다시 구해 낼 약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克 己 復 禮 하고 보면 마치 맑은 바람이 일어나 모든 어 두운 것이 사라 지게 하는 것처럼 마음속이 찬란히 벚나고 밝아서 천지의 이치를 살피고 神 明 이 통 하게 될 것이다 10) C.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 것이며 靖 節 을 함양할 것( 莫 爭 論 I빼 靖 節 ) 목은은 자손들에게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 것이며, 靖 節 을 함양하도록 교육하였다. 그는 하늘로부터 받은 本 然 之 性, 즉 陽 의 氣 를 배양하여야 할 것이며, 다른 사람과 쟁 론을 한다던가, 또 性 情 을 망각함으로서 정절을 버리는 행위를 경계하였다. 이러한 그 의 사상은 r 藥 隱 薦 記 에서 9) r 秋 隱 文 覆 권 10, 韓 山 四 子 名 字 說. 10) r 救 隱 文 짧 권 10, 可 明 說.
134 人 文 科 學 뻐 究 論 養 第 二 十 표 號 사람마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으니 이것은 즉 天 짧이 다- 천작을 닦아서 A 爾 이 이에 따르게 하는 것이 四 뀔 子 가 크게 하고자 하는 바이 다. 따라서 인작만을 구하고 천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우리 유자들이 할 일이 아 니다- 천작이란 仁 義 忠 信 과 樂 善 不 짧하는 것이다. 인의충신과 낙선불권은 바로 中 道 열 따름이다 1 1) 란 한 데서 보이고, 또 그의 장손 굶 田 柔 에 게 준 詩 에서 曉 曉 易 折 莫 爭 雄 最 是 忘 情 樂 견E 中 豪 髮 鷹 秋 成 老 짧 trù짤 國 保 初 終 我 今 族 命 夫 何 慮 단단하면 꺾이기 쉬우니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라 무엿보다 감정( 情 )을 잊으면 樂 은 그 속에 있도다 머리털은 나이 틀연 희어지고 늙으면 톰도 추해지 지만 마음만은 나라를 생각하고 이 마옴 끝까지 변치 마라 냐는 이제 옮올 기다리니 무엇을 근심하리 품 爾 輩 持 身 且 盡 忠 너희들은 몸가짐올 잘하여 나라에 충성 하라 품 有 世 톰 關 靖 節 뽑나라에는 대대로 나라 섭긴 關 淵 明 의 절개가 있어?ß 然 千 減 有 펴 風 千 年 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명성이 빛을 발하고 있도다12) 라 한 데서도 보인다. 마음만은 나라를 생각하고( 苦 心 憂 國 ) 마음을 끝까지 변치 말라t 保 初 終 ) 는 그의 교훈 은 바로 그 자신의 생활 지침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것을 正 心 術 의 요채로 파악하였 고, 실지로 그렇게 행동하였다. 고려 말의 격동기에 그는 조금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고려 에 충절을 다하였다. 항상 그는 어버이에 대한 효를 강조하였으며, 또한 그는 이것을 실 천하였다 충과 효는 이름만 다를 뿐 그 자체는 하나라는 생각 이것은 그가 如 水 階 地 形 不 同 이 라 한 바와 같이 바로 그의 정치 및 생활의 신조였다. 위에서 보이는 단단하면 꺾이기 쉬우니 다른 사람과 싸우지 말라t 曉 曉 易 折 莫 爭 雄 ) 란 훈계도 바로 그가 일관해 왔던 생활의 신조였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이 거 의 없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배타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鄭 慶 周 를 비롯한 당대의 석학들도 모두 그에게 경복하였고 고려 말에 그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한 鄭 道 傳 南 閒 퉁도 그의 인품에 대하여는 경복하였다. 11) r 收 隱 文 웰 권 5, 樂 隱 寶 記. 12) r 收 隱 詩 뤘 권 19, 中 童 흉훌 來.
收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35 D. 말을 삼가 할 것( 慣 릅) 목은 자손들에게도 이러한 그의 생활 신념을 기조로 하여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 하도록 경계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아들에게 준 다음의 시에서 보다 확실하게 나타나 고 있다 츠 織 其 口 慣 言 A 千 載 流 傳 面 目 新 莫 I피 座 中 輕 - 語 말을 할 때는 세 번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렇다면 천년이 흘러가도 그 面 g 이 새로워 질 것이다 어떠한 자리에서도 한 마디도 경솔히 하지 말아라 樞 機 榮 첼 在 搖 層 영화와 치욕은 오로지 입 놀리는 데에 있느니라 13) 말을 삼가 하라( 慣 를) 는 것은 그의 교육 이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제자를 가 르치는 스승들에게도 f 光 f 先 딩힘y:: 間 짧}홉 易, 容 易, 字 訓 之 非 流 網 明 在 史 제자를 모아 가르치는 자리에서 함부로 입술을 놀리지 마라 한 글자라도 가르치는데 잘못이 었으연 그 網 는 흘러 역사에 남으리 14) 라 하여 말을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위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것은 그의 자손은 물론 그의 제자 및 문생들에게도 항상 강조하였던 그의 교육관이기도 하였다. 다음의 시에서 이 러한 그의 사상을 보다 깊이 알 수 있다 君 子 有 所 思 는 思 X 暴 三 明 明 方 -t 間 自 興 天 地 參 군자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으니 세 번 생각하고 또 세 가지 반성함이네 밝고 밝은 한 치의 마음으로 스스로 천지와 더불어 같이 하여야 하네 /흰 홉 中 標 然 게으르게 행동하여 마음이 텅 비연 13) r 救 隱 詩 薰 권 28, 示 諸 子. 14) r 救 隱 詩 훨 권 23, 有 感.
136 ^ 文 科 學 昭 究 論 養 第 二 十 표 號 他 年 當 엄 漸 후일에 마땅히 후회함이 있으리라 主 守 敬 字 마음을 오로지 하여 敬 자를 지키면 水 짧 天 光 뼈 물은 맑고 하늘이 빛남을 항상 간직하리라 l ) E. 정백( 淸 白 )하고 근검( 動 檢 )할 것 목은은 자손들에게 청백과 근검을 가르쳤다. 그는 분수에 넘치는 부와 낭비는 性 情 을 흐리게 하여 가정의 파탄은 물론 더 나아가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여 경계하였다. 이것 은 그의 손자 季 힘이 세종에게 올리는 글에서 조부 이색이 시에서 말하기를 단지 장차 청백할 것을 자손에게 남겨주겠다( 只 將 淸 白 遺 諸 孫 ) 고 하였다 16) 고 한 내용에서 보인다. 이것은 목은 자신의 생활관이기도 하였다. 그의 생활은 벼슬이 말단에 있을 때나 三 重 大 품의 직에 있을 때나 별로 변함이 없었다. 항상 청백과 근검으 로 일관한 것이 그의 생이었다. 이것은 다음의 시에서 보인다. 天 敎 救 隱 子 曉 歲 없A 第 盧 { 立 列 三 重 後 年 登 五 十 餘 하늘은 목은으로 하여금 만년에 궁하게 살도록 하였네 벼슬은 삼중대광을 지냈고 나이는 50이 넘었는데도 許 身 憂 社 樓 刻 骨 感 詩 書 自 信 無 他 望 秉 心 金 石 如 이 몸은 사직을 근심하며 보냈고 시와 서를 열심히 공부하였지 스스로를 믿으며 다른 소망은 없었다 이 마음 금석같이 굳게 지키리 17)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었던 傳 中 李 成 林 과 그의 벗 嚴 興 훗ß이 지나 친 탐욕으로 분수에 넘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15) r 收 隱 詩 講 권 15, 君 子 有 所 思 16) r 世 宗 實 錄 권 11, 世 宗 4년 2 쩔 辛 표. 17) r 收 隱 先 生 年 짧 J 50세조
救 隱 家 學 의 成 立 과 f뚫: 137 랴 rl:j 李 成 林 이 조그마한 집 에서 생장하였는데 재상이 되자 민전을 겁탈하고 한꺼 번에 큰 집 세 채를 지었고 左 使 願 興 취5 도 역시 수탈을 일삼으니 나라를 그르칠 자 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이다 18) 라 탄식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청백과 끈검을 봄소 실천하였고, 또 후손들에게도 이를 교훈하였다. 이것은 다 음의 시에서 보인다. 뭔1-j X: 童 {행JiI j센 어찌 문장을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으랴 ~--~ 將 f퍼- 白 週 諸 孫 단지 청백하게 살 것을 여러 후손들에게 남기려 하노라 1 9) F. 부지런히 독서하여 至 善 을 이루도록 할 것 목은은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30세 전에 독서를 게을리 한다면 늙은 후에 탄식 한들 무엇하리( 三 十 年 前 懶 讀 뿔 虛 名 훌n 歡 白 頭 餘 ) 20)란 교훈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고, 또 그의 자손들에게 이를 교훈으로 전수하였다. 특히 그는 자포자기하여 자신을 버리는 행위를 크게 경계하였다. 그는 말년에 다음과 같은 自 敵 廢 이란 시를 지었다. 쉰: 近 훤며H훌 之 若 得 훨 rm 失 之 가까운 듯 하다가도 멸고 얻은 것 같으면서도 앓어버렸다 遠 쫓 而 時 近 也 失 옷 而 時 得 也 먼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가까이 있고 잃은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얻는다 *촌 乎 無 所 指 也 麻 乎 如 有 觀 也 아득해서 손댈 곳이 없기도 하고 뚜렷해서 마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음도 있다 輪 乎 或 味 휠 it 乎 或 1꺼 뚫 밝았다가도 혹 어두워지고 아득하다가도 흑 환하게 된다 18) r 高 麗 史 권 115, 列 傳 28, 李 趣 19) r 收 隱 先 生 年 諸 J 58세조, 有 感 詩 - 20) r fj:후 集 권 18, 用 家 只 詩 題 寄 示 兒 子 햄 懷
138 人 文 科 學 쩌 究 論 養 第 二 十 五 號 將 盡 也 不 忍 월 將 짧 也 不 足?틀 파: 乎 덤 寶 I떠 自 ;맹 많 fi 十 {띠 知 非 fl 十 lírh'f빼j 장차 그만 두려하연 차마 하지 못하고 장차 힘써 하려면 힘이 부족하니 마땅히 스스로를 잭할 것이로다 또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 일이다 나이 50세에 지난 날 잘못을 알며 90세에 빼 詩 를 지을 수 있도다 斯 古 之 自 力 也 이것이 古 A들이 힘 쓴 바이니 尙 不 懶 f - - 息 오히 려 한 번 숨쉬는 사이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때 之 행뺑 之 載 自 옳 自 棄 是 何 物 耶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자포자기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21) 이것은 그 자신에 대한 경계이면서 그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준 교훈이기도 하다. 그 는 자포자기는 물론 태만한 생활태도 자체를 경계하였다. 이것은 r 혈 寢 이란 다읍의 시 에서 보인다 心 居 性 情 間 出 入 還 無 鄭 生 民 熟 非 聖 由 間 ;융: 作 狂 마음은 性 情 의 사이에 있으연서 들어오고 나가는 곳 알 수가 없구나 사람이 태어날 땐 누군들 성인이 아닌 자 없는데 間 念 으로 인하여 미치광이 되어 갖 流 짧 默 城 홉$용t의 세계로 빠져 들어 哀 歲 日 違 違 讀 書 要 修 道 뿔:(E 媒 金 章 애달프게 날마다 허우적거리네 讀 書 는 본래 道 를 닦기 위한 것 어찌 벼슬이나 구하는 것이랴 夫 子 有 聖 힘 11 炳 如 天 日 光 宰 予 病 根 消 仍 則 짧 閔 行 易, 貴 不 遠 復 萬 世 聖 道 昌 공자께서 남기신 엄한 가르침 밝기가 하늘의 태양 같구나 宰 予 처럼 낮잠 자는 습관 없애야 짧 淵 과 閔 子 薦 과 가까이 되 리 周 易 에서는 不 遠 復 을 귀히 여기니 만세토록 성인의 道 번창하리라 웰11 養 浩 然 志 浩 然 之 氣 를 기르는 것은 21) r 收 隱 先 生 年 諸 J 50세조, 엽 敵 彼.
收 隱 家 學 의 成 立 과 f뚫; 139 걷 Nf. 自 rßl 心 中 正 字 f&(jst 微 t 蒼 밝 之 l맘 左 右 때j 갖w<: 無 忘 군자가 自 끓 不 息 하는데 있네 마음속에 항상 바를 正 자를 간직한다연 환하게 그 이치 하늘에 통할 것이다 이를 써서 좌우에 두어 조석으로 경계하여 잊지 않도록 하리 22) 그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손틀에게 먼저 심성을 바르게 가질 것을 가르쳤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맑게 가질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러한 바탕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야만 진정한 군자의 도 즉 지선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 았다. 이러 한 그의 이념은 그의 손자들에게 준 다음의 시에서 보인다. r.tcfl. 究 뿔. 혀" #, 玩 忘 朝 뼈 너희들은 성현의 가르침을 탐구해야 할 것이니 조석을 잊고 찾아 익히도록 하라 *덤썽m 大 志 짧 - IY.. 二 파업 서로 익혀 大 志 를 세워 하나를 반복하여 셋올 알도록 하라 所 止 흠- 숲 善 始 f흘td.5t 夫 至 善 에 머물러 있는 사랍은 비로소 참 장부라 할 것이다23) 위에서 목은은 성현의 학문을 익혀 대지를 세워 지선에 이르도록 부탁하였다. 이로 볼 때 그는 正 心 術 하여 덕을 배양하고( 種 德 ) 학문올 익혀( 種 學 ) 지선에 이르도록 함( 種 善 )으로써 중화의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그가 교육이념으로 제시한 본연지 성 의 회복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목은이 그의 장자의 이름을 種 德, 중자를 種 學, 계자를 種 善 이라 한 것도 이러한 그의 교육이념이 전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은의 자손들은 그의 유훈을 받들어 이를 생활의 지침으로 실천하였다. 그에게는 種 德 種 學 種 善 의 세 아들이 있었고 또 손자는 굶없 굶어딩 굶 曉 굶땅 缺 野. 1.없 어훌 없힘. I웠뼈 寂 福 꿨 時 季 購 季 職 季 웹 季 聊 季 IHJ 퉁 15명을 두었다. 목은 의 아들들은 그의 유훈을 받들어 실천하였고 이틀은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이를 전하여 22) r 收 隱 詩 훌 권 3. 寶 寢. 23) r 收 隱 詩 흉 권 35. 敬 樓 來 作 此 因 示 中 童.
140 ^ 文 科 學 쩌 究 論 養 第 二 十 五 號 가문의 교훈으로 전숭시키고 있다. 그의 손자 중에 맹균과 계전은 대사성과 지공거를 역임하여 조선 초기의 학맥 형성에 크게 공헌하였고 맹진 숙묘 숙전 계린 등은 조 선 초기의 정치에 우뚝한 자리를 매김하여 정치질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나머지 손자 들도 유훈을 받들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자도 있었지만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들어 근겸하게 생활하였다 그가 제시한 가학 이념이 그의 자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는 그의 손자 계전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458년(세조 4)에 領 中 樞 府 使 로 있었던 계전은 思 政 嚴 에서 행한 권신틀의 향연에서 신이 일찍이 f주역 의 譯 춧f 象 { 專 을 보니 A 道 는 가득한 것을 싫어하고 겸손함을 좋아한다 라 하였고, 신의 할아버지 이색은 시에 말하기를 단지 장차 청백함만을 자 손에게 남겨 주겠다.( 只 將 淸 白 道 諸 孫 )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지조를 지키는 데 간 절하고 긴요한 것입니다 신은 그욱이 생각하건대, 사람의 마음은 수하려 하지 않는 이가 없지 않으나 수한 자는 드문데 신은 귀밑털(활)이 이미 晧 白 하였고 사람의 마 음은 부하려 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부한 자는 적은데 신은 지위( 位 )가 옳 班 에 올랐 습니다. 신은 비록 집이 대대로 정빈하다고 하나 다행히 말단의 영광에 의지하여 두 번 짧 府 에 참여하였으며, 깊은 은혜가 매우 중하여 토전과 노비를 넉넉히 하사 받았 고, 또 벼슬은 높고 녹은 중하여 의식이 궁핍하지 않으 니, 완전히 가난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사에 있어서 영광됨이 이미 10분의 극진한 데에 이르렀습니다. 이지 러지고 가득 차는 이치를 항상 생각하여 잊지 않고, 할아버지( 救 隱 李 廳 )의 훈계를 저버려 서 세상의 기홍을 초래할까 두려웠는데, 엎드려 輪 륨를 보니 더욱 간절하고 감격합니다. 공경하여 벽위에 써 붙여서 항상 눈으로 보고 경계하고 살펴서, 가문에 전하여 청백을 지킬 것을 맹세하여 성덕의 만에 하나라도 갚기를 원합니다찌 라고 하면서 마음의 시를 지어 올라고 있다. 정녕한 天 語 가 간절하시니 잠깐이라도 그 말씀을 어기리이까 짧 綠 이 흑 높을 것 같으면 교만과 사치를 응당 기약하겠으나 공자의 가르침( 尼 父 회 11)을 마음에 새기고 할아버지( 李 權 )의 가르침을 뼈에 새겨서 24) r 世 祖 實 錄 권 11, 世 祖 4년 2월 辛 표
썼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41 아침저녁으로 욕됨이 없기를 생각하고 남의 비웃는 바가 되지 않겠습니다 25) 라고 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이색의 가르침은 그의 후손들에게 거울이 되어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I. 收 隱 家 學 의 成 立 A. 種 德 (1350, 충정왕 2-1383, 우왕 14) 종덕은 목은의 장자로 자는 得 性 또는 致 久 이며, 호는 玄 嚴 또는 三 堂 이라 하기도 하 고, _:t r!?; 이라 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文 뚫 이다. 1369년(공민왕 18)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국자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성균대사성은 아버지인 목은이었고, 園 隱 鄭 夢 周 는 성균 사예로 있었다 당시 그와 같이 수학한 자로서 빼어난 자는 治 隱 吉 再 였는데, 그는 길 재와 더불어 정몽주의 문하에 수학하여 명성을 떨쳤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 2명을 일러 鄭 門 의 二 生 이라고 칭송하였다.26)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27) 왕을 호종하였다. 공민왕 말년에 越 l 廷 에 행차하였을 때에 그는 왕의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이때 그의 아버지인 12...Q_..Q_ tu좋 南 R추 草 廠 長 關 樂 群 bi 爛 有 光 禮 數 護 嚴 皆 奉 命 班 行 輔 樓 欲 生 香 홉의 남쪽 기숨 풀이 무성한데 구경하는 여러 신하 현란하게 빛 발하네 禮 數 가 근엄하여 모두가 명령을 받들었고 반열이 엄숙하고 애애하니 香 이 솟는 것 같구나 25) r센 펴 實 錄 권 11, 世 祖 4년 2월 辛 표 - 26) M 久 文 題 公 玄 堂 李 先 生 行 狀 " 韓 씨 速 橋, 3 연. 27) ~헬 山 李 e:; 文 婆 公 派 下 篇 甲 鍾 德 조에는 1369 년(공민왕 18 己 西 ) 봄에 司 馬 試 에 합격하고, 이 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1369 년의 고시관은 그의 아버지 李 짧이었다. 이색의 인품으로 볼 때 과연 그가 고시관으로 있을 때 그의 아들을 응시하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설제로 이 해의 勝 目 에는 그의 이륨 이 보이지 않는 다.
142 ^ 文 科 學 쩌 究 論 靈 第 二 + 五 號!꺼 %1 法 制 P쉽 時 짧 共 說 權 網 比 옆링5 大 小 所 由 和 最 웠 莫 爭 分 τf 氣 揚 楊 法 制 가 분명하니 예전과 다른 것을 알겠고 모두가 權 網 이 옛날보다 강하다고 말하네 크고 작은 일의 근본은 화목한 것이 가장 으뜸이니 分 #을 다투어 氣 를 揚 揚 하게 하지 마라28) 란 시를 지어 그를 경계하고 있다. 위의 시는 목은이 항상 자손들에게 준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며, 靖 節 을 함양하도록 하라( 莫 爭 論 關 靖 節 ) 는 교훈과 연계되기도 한다. 우왕 초에 승선을 배수하였다. 이 때 그의 同 年 들이 모여 이를 축하하고 있는데, 목 은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기쁨을 같이 하고 있다. 我 家 腦 大 拜 承 宣 t 舍 同 年 設 貨 鐘 E힘 味 滿 盤 堆 錯 落 老 生 隔 앓 館 芳 蘇 賽 唯 將 出 養 遺 止 챔i!; ì짧îjj 管 喜 欲 願 但 願 諸 公 敎 孝 友 나의 아들이 숭선에 배수되니 上 舍 의 同 年 들이 축하연을 베풀었네 풍성 한 안주 가득한 상에는 술잔이 쌓여있고 늙은 나도 벽에 격하여 맛있는 생션을 포식하네 장막을 걷고 나가려다 염치없이 다시 앉았네 술잔을 들어 처음 맛보니 기쁨을 가눌 수 없구나 원하노니 제공들은 효우를 돈독히 하고 移 忠 贊 化 格 皇 天 이 마음 충으로 옮겨 그 지극함이 하늘에 이르도록 하라 29) 이후 한림시독을 역임하였고, 1380년(우왕 6)에는 밀직이 되었다. 이 때 우왕은 그의 波 훌인 梅 花 를 빼앗아 궁중에 들이고 있다.3 0 ) 이후 同 知 密 直, 成 均 館 大 司 成, 知 書 鐘, 藝 文 館 提 學 등의 관직을 거쳐서 3 1) 1387 년(우왕 13)에는 知 密 直 퍼 事 에 올랐다. 이때 그 는 왕명을 받들어 월 正 使 가 되어 南 京 에 갔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32) 얼마 후에 돌아가시니 文 麗 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의 졸년과 사인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高 麗 史 와 高 麗 史 節 要 의 기록에서 우왕 13년의 기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 28) 韓 山 李 民 文 꿇 公 派 宗 會, 韓 씨 速 鎬, 43 연. 29) ~ 救 隱 詩 훌 권 18, E. 西 生 員 同 年. 30) i' 高 麗 史 권 134. 列 傳 47, 鋼 王 6년 1 2 월. 31) 河 久 奉 翊 大 夫 推 誠 翊 衛 功 ê~ 密 直 司 專 文 훌훌 公 玄 堂 李 先 生 行 狀,. 韓 1'1 l 速 橋, 3-4 연. 그러나 r 高 麗 史 와 高 麗 史 節 要 에서는 위의 行 錄 이 보이지 않는다. 32) r 高 麗 史 권 1 36, 列 傳 49, 隔 王 13년 10월.
收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43 로 보아 이 해에서 머지 않은 시기에 죽은 것 같다.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1388년(우왕 14) 에 위화도회군을 전후하여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창왕 때에 이색이 지은 시에 서 去 年 長 -f A 黃 天 이란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원인은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죽은 원인은 무엇 일까? 河 久 가 지은 r 文 뚫 公 玄 堂 李 先 生 行 狀 에는 I:X: 辰 (13 88)에 군소배들의 모함을 받아 폐조에서 장형을 받고 쭈하니, 이때 공의 나이 39세였다 33) 라 하여 그가 1388년(우왕 14)에 모함을 받아 장살되었다고 기록하였고, 尹 演 이 지은 신 도비문에는 목은공의 入 山 哭 詩 가 있는데, 休 줬 沈 光 世 가 그 서문에 말하기를 옥은의 두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귀하게 나타났더니,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마음을 고 치지 않아 모두 장살되었다 고 하였다 34) 라고 하여 혁명이 일어났을 때 마음을 고치지 않아 장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두 기록은 많은 차이가 있다. 즉 전자는 우왕 14년 우왕 집권기에 군소배들의 모함으로 장살 당한 것이고, 후자는 혁명 이후에 충절을 지켜 우왕에 대한 충성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파에 의하여 장살 당한 것으로 볼 수 었다. 우왕 14년 을 전후한 시기에는 그의 아버지인 목은은 당시 유종의 칭호를 받으면서 당시 학계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시기이다. 당시 조정의 신료들은 거의 모두가 그의 문 생이거나 문인들이었다. 목은은 1385 년(우왕 11)에는 檢 校 門 下 傳 中 을 제수 받았고, 그 다음해는 韓 山 府 院 君 으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설행하였다. 따라서 그의 아들인 種 德 도 조정의 신망을 받고 있었으며 당시 知 密 直 이라는 중책을 맡아 왕의 측근에서 보 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왕 때에 그가 모함을 받아 장살 당하였다는 것은 이 해하기 어렵다. 기록에 나타나는 종픽의 행적은 1387 년(우왕 13) 10월에 知 密 直 司 事 로 寶 正 使 가 되 어 明 에 간 것이 마지막이다. 따라서 펼자는 그의 죽음을 위화도회군에 따른 왕당파와 33) 河 久, 文 뚫 公 玄 堂 李 先 生 行 狀 " 韓 州 速 橋, 3-4연. 34) 尹 演, 文 裵 公 玄 嚴 李 先 生 諸 種 德 神 道 陣, 韓 써 速 橋, 9-12 연.
144 ^ 文 科 學 쩌 究 論 義 第 二 + 五 號 혁명파의 투쟁에서 찾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우왕 13 년 10월에 하정사로 명에 갔다가 황제의 거절로 입국에 실패하고 귀국 하였다 이때 명이 고려의 사신을 거절한 이유는 鐵 領 衛 의 소속을 놓고 벌어지고 있었 던 양국간의 긴박한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명은 고려에 대하여 그 나라의 집정자들은 경박하고 간사하여 믿을 수 없다 금후로는 고려국의 사신으로 오는 자는 100리 밖에서 그대로 돌려보내어 국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또 남경으로 보내지도 말 것이다 35) 고 하여 사실상 고려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로써 고려에서도 명에 대한 적대감정이 폭발하였고, 1388년(우왕 14) 4월에는 요동 정벌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성계를 비롯한 반대파들이 주동이 되어 위화도회군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최영을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반왕파의 무 력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그는 지밀직사사로서 왕의 측근이 되어 호종하였을 것이 다 이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이 살상 당하였을 것이고, 그도 이때 죽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수없다. 그가 죽자 鄭 夢 周 는 그의 죽읍을 애도하여 自 是 三 韓 積 활- 餘 三 韓 때부터 善 을 쌓아왔는데 賢 郞 次 壽 竟 { 可 如 賢 郞 이 천수를 다하지 옷함은 어인 일인고 古 來 此 理 終 難 誌 옛날부터 이 이치 따져 묻기 어려웠도다 孔 뿔 續 曾 哭 伯 魚 孔 子 같은 성인도 그 아들 伯 魚 에게 哭 하였으니 36) 란 시를 지었다. 종덕은 효행이 두터워 목은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는데, 부인인 ~[ljf; 또한 효행 이 빼어났다 목은은 이들의 효행을 기려 佳 兒 佳 歸 옳 如 琴 春 場 옳홉 惜 -t 陰 美 酒 ε 來 從 寶 庫 嘉 看 求 得 向 雲 林 아름다운 아들과 며느리, 화락함이 거문고와 같구나 아침저녁으로 봉양하길 잠시도 쉬지 않네 아름다운 술, 寶 庫 에서 벌어오고 맛좋은 안주 구하고자 雲 林 으로 향하네 35) r 高 麗 史 節 要 권 32, 鋼 王 1 3년 11 월. 36) 韓 山 李 民 大 宗 會 r뺑 隱 先 生 年 讀 J 61 세조.
쨌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45 ;}d({쪽?후 機 好 에껴L 경 未 帝 德 深 얼음 속의 물고기와 겨울의 죽순은 하늘의 베품을 입은 것이며 언덕에 앉은 봉황과 아름다운 곡식은 임금의 덕이 깊음이로다 感 M댐 分 R)3 無 小 大 天 機 와 帝 德 의 감응이 분명하니 많고 적고가 있을 손가 II~ 때tt 時 復 檢 공 心 술이 얼큰하니 다시 내 마음을 살피노라 37) 란 시를 지어 그의 마음을 표하고 있다. 아틀은 4명인데 굶어쫓 굶뼈 굶 魔 굶양이고, 딸은 2명인데 장녀는 三 司 左 尹 을 지 낸 쐐떨심 행IJI 享 의 아들인 빠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목은의 문생인 河 밟의 아들 久 에 게 출가하였다 B. 種 學 (1361, 공민왕 10-1392, 태조 1) 종학은 목은의 중자로, 자는 件 文 이며, 호는 擬 續 이다. 그의 생애에 대하여 朝 蘇 王 朝 贊 錄 에는 f필 學 의 자는 件 文 이니, 韓 山 伯 李 鏡 의 둘째 아틀이다. 천성이 영특하고 호걸스러 워서 공민왕 甲 寅 年 ( 1374)에 나이 14세로 성균시에 합격하고, 隱 朝 內 辰 年 에 진사에 합격하여 마침내 長 興 庫 使 에 임명되고, 관직을 오랫동안 지내어 密 直 司 知 申 事 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성균시를 주관하여 簽 書 密 直 司 事 에 승진되고, 己 E 年 에 지공거 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색이 나라의 정무를 맡고 있었으며, 종학이 해마다 시험을 관 장하게 되니 사람들이 자옷 이를 비난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색이 탄핵 을 당하고. 종학도 또한 펌출되었다 康 午 年 에 尹 藝 李 初 의 옥사가 일어나매, 부자 가 함께 청주에 체포되어 있던 중에 수재로 인하여 함께 사변을 입었다. 王 申 年 에 또 l 或 텀으로 펌출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孫 興 宗 이 鍵 林 에 와서 등골에 곤장을 치 려고 하니, 문생 金 @ 知 가 그때 判 官 이 되어 몰래 형리에게 법 밖의 형별은 시행하 지 못하게 하니, 이로 인하여 겨우 살게 되어 長 沙 縣 으로 옮겨 안치되었는데, 손홍 종이 사람을 보내어 뒤쫓아 종 村 購 에 이르러 밤을 이용하여 목매어 죽이니, 나이 32 세였다. 아들이 여섯이니, 淑 野 없 唯 뼈 當 寂 敏.~ 福.~ 牌 이다갯) 37) r 韓 山 李 & 文 뚫 公 派 世 짧 下 篇 甲, 文 훌 公 事 題. 38) r 太 ií!él 寶 錄 권 1, 太 祖 왼년 8월 王 申,
146 A. 文 科 學 昭 究 論 옳 第 = 十 표 號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1374년(공민왕 23) 에 14세로 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에 정당문학 洪 싸 宣 과 지밀직 韓 뼈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39)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다. 과거 에 급제하자 長 興 庫 使 를 배수하였고, 1377년에는 輪 林 直 學 士 에 제수되고 春 秋 館 編 修 官 과 知 製 敎 를 맡았다, 이후 성균사성을 거쳐, 1385 년(우왕 11)에는 判 內 府 총 事 에 올라 知 典 法 버 事 를 겸하였다. 얼마 후에 츠퍼 右 使 와 藝 文 館 直 提 學 을 거쳐서 1386에는 成 均 大 리 成 이 되었고, 이어 判 典 校 -훈 事, 藝 文 館 提 學 寶 門 聞 提 學 을 역임하였다. 1388년 (우왕 14)에는 右 代 듭이 되었는데, 이 해 4월에 조정에서는 요동정벌을 위한 군대를 출 동하게 된다. 이때 그는 왕명을 받들어 이들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하여 助 兵 六 丁 神 에게 醒 쫓를 올렸다.40) 창왕이 즉위하자 知 申 事 가 되었으며, 이 해 8월에는 성균시를 주관하여 ilií. 思 짧 등 99 명을 선발하였다.41) 1388 년(창왕 원년) 9월에는 훔 德 府 尹 을 배수하여 왕의 親 朝 를 호종 하는 從 付 官 이 되었다 42) 이때 통지공거가 되어 判 開 城 府 事 柳 源 과 더붙어 과거를 주 관하여 金 밟 知 등 33 명을 선발하였으며,43) 다음 달에는 簽 書 密 直 司 事 에 올랐다 그러나 이 해 12월에 공양왕이 즉위하자 左 司 議 吳 思 忠 과 門 下 舍 λ 趙 樓 등에게 창왕 즉위에 대한 탄핵을 받아 아버지인 목은과 함께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또 이들의 계속된 탄핵 에 의하여 목은은 長 淵 으로, 그는 順 天 으로 유배되었다.44) 이때의 유배생활 중에 그는 다읍과 같은 시 를 남기고 있다 江 山 雖 寂 莫 天 地 自 淸 寧 身 困 春 歌 tt 心 愁 훌 據 局 f 可 A 越 北 關 此 地 近 南 훨 客 훌훌 春 初 件 時 時 讀 楚 經 강산은 비록 적막하나 천지는 절로 맑고 현안하여라 옴이 곤하니 봄 베개에 기대어 졸고 마음에 수심 있으니 하루종일 문을 닫고 있네 어느 사람이 北 關 로 가는가 이 곳은 남쪽 바다에 가깝구나 객지에서 봄은 이미 반이나 지났는데 나는 때때로 楚 經 을 읽고 있네 45) 39) r 高 麗 史 권 73, 志 27, 選 題 1, 科 13 1, 選 場. 40) rr 高 麗 史 권 1 37, 列 傳 50, 隔 王 1 4년 4월. 41) r 高 麗 史 권 74. 志 28, 選 學 2, 科 目 2, 國 子 試. 42) r 高 麗 史 권 137, 列 傳 50, 昌 王 원년 9월. 43) r 高 麗 史 권 73. 忘 27, 選 趣 1, 科 13 1, 選 뚫. 44) r 高 麗 史 節 要 권 34. 켰 讓 王 원년 1 2 월.
收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47 이때를 당하여 이색은 비통한 마음을 긍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목은의 심정은 이때 지 은 그의 시에서 보인다. ~~I:: l강 子 入 黃 없 {'i' fi;; 今 장 i빼 海 f짧 IllJ 說 펴 Il )j 被 쳤j 지난 해에는 장자를 황천에 보내고 올 겨 울 에는 둘째 아들도 바닷가로 귀양 떠났는데 듣자니 셋째 아들도 탄핵을 당한다 하는구나 셨{ LRtß 1.즘 { 可 天 어찌 하오리까. 어찌하오리까. 하늘이여 미 :f1lj 榮 經 似 뼈 X뚫 f상 f펌 蒼 蒼 X 苦 寒 IP션{매Jt 陳 九 화 피.!if{ 身 It꺼 f 長 f힘 세간의 영화와 괴로움은 돌고 도는데 송백은 푸르러도 추위에는 시달리네 지금 孔 子 의 周 易 휩를 풀어보니 늙은 이 몸 장단에 가야 하는구나46) 1390년(공양왕 2) 에는 尹 錄 李 初 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1390년 5 월에 明 에 사신으로 갔던 王 助 과 趙 9 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들은 명에서 귀국하자 조정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李 倚 中 ( 李 成 桂 )이 짧(공양왕의 讓 )를 임금으로 삼았는데, 요는 왕족이 아니고 그 인 척일 따름아다. 그리고 요는 이시중과 함께 군사를 통원하여 중국을 침범할 것을 계획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상 이색 퉁이 이에 반대하자 이색과 이종학 동 10여 명 을 살해 하고, 휠l 玄 寶 둥 9명은 원지로 유배당하였다. 그래서 유배된 재상들이 우리를 보내어 親 士 께서 천하의 군사를 통원해 달라 고 하였다.47) 이성계 일파는 이를 빌미로 반대파였던 이색 동을 제거하기 위하여 욱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그는 이색과 李 編 禹 仁 烈 李 仁 敏 李 옳 仁 權 近 등과 함께 이 사건의 배 후인물로 지목되어 淸 州 의 감욱에 갇히게 되었다.48) 그러나 얼마 후에 水 %가 일어나자 사면을 받았다. 이때의 사실을 F 高 麗 史 節 要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바야흐로 여러 죄수를 국문하는데 갑자기 천퉁이 치고 큰비가 와서 앞 뱃물이 갑자 기 범람하여 성의 남문을 부수고 바로 북문에 부딪쳤다. 성 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 었으므로 관사와 민가를 거의 모두 떠내려 보냈다. 매우 급하게 되자 옥관은 니무를 휘 어잡고 올라가서 죽음을 연하였다 고로들이 고을이 생긴 이후로 수재가 이와 같이 심 45) r 東 文 選 권 10, 調 居 gn 事. 46) 歸 山 李 a:; 大 宗 會 r썼 隱 先 生 年 짧 및 r 軟 隱 詩 훌 권 35, 寄 省 郞 諸 兄. 47) r 高 麗 사 권45, 世 家 4 5, 1fi 讓 王 2년 5월 훗 B. 48) r 高 麗 史 권 45, 世 家 45,.$홉 王 2년 5 월.
148 A 文 科 學 쩌 究 論 廳 第 二 + 五 號 한 적은 없었다 라고 하였다.49) 1391 년(공양왕 3) 6월에는 鄭 道 傳 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의 탄핵으로 목은은 成 昌 으로 유배당하고, 그도 원지로 유배당하였으나 이 해 11월에 소환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4월 에 鄭 夢 周 가 살해되자 옳 震 陽 의 옥사에 50) 연류되어 다시 탄핵을 받아 鎭 川 으로 유배되 었다가 1392년 7월에 조선이 개국되자 그는 結 黨 課 亂 의 죄를 입어 직첩을 회수당하 고, 校 100의 형을 받고 다시 成 陽 으로 이배되었다 51) 이때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孫 興 宗 이 고문을 가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문생 金 & 知 가 그 곳의 判 官 으로 있 으면서 jflj 更 들에게 볍 밖의 형별은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52) 이후 다시 長 沙 縣 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흉 村 羅 에 이르자 밤에 손흥종이 보낸 자틀에 의하여 목을 졸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는 죽기에 즈음하여 그 의 아들들에게 네 아비가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이 여 기에 이르렀으니 너희들은 삼가하여 과거를 보지 마라 는 글을 남겼다 53) 또 그의 아들 들에게 보내는 시를 지었는데, 여기서 ì'p:~창 雖 短 ÛIì ì'p:~!ii 必 高 年 & 等 知 홈 志 最 홉 莫 或 전1 네 아비는 비록 단명하나 네 할아버지는 반드시 壽 할 것이다 너희들은 내 뜻과 같이 하여 혼정성식을 혹시라도 어기지 않도록 하라54) 라 하여, 할아버지 목은을 지성으로 받들도록 유훈하였다. 두 아틀을 잃은 목은의 슬픔은 극에 달하였던 듯하다. 이후 그는 산 속에 틀어가 죽 은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대성통곡하였고, 그때의 마음을 시를 써 달래고 있다. 無 聲 煩 我 U 有 聲 落 A 耳 소리 없이 울자니 내 마음 괴롭고 소리내어 울자니 남의 이옥 어지럽히겠지 兩 思 無 - 可 두 가지 모두 하나도 좋은게 없으니 49) r 高 麗 史 節 要 권 34, ~ 讓 王 2년 5 월 ζ E.. 50) 옆 讓 王 4년 3월에 鄭 道 傳 南 聞 趙 浚 올 탄핵한 金 震 陽 의 상소로 일어난 뤘 事 를 말한다. 51) r 太 祖 質 錄 a 권 1, 太 祖 원년 8월 王 申. 52) r 太 祖 힘 錄 권 1, 太 祖 원년 8월 王 申. 53) 韓 山 李 民 大 宗 會 r 收 隱 先 生 年 讀 J 65세조. 54) r 太 宗 뤘 錄 권 22, 太 宗 11 년 7월 찢 西.
쨌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49 不 1.(1] 走 入 深 山 짧 갚은 산 속에 들어가니만 못하네 영g 聲 終 日 씻 父 f 之 휩뿔 終 極 소리 높혀 하루종일 울어 봐도 父 子 의 정이 어찌 다 할 수 있겠는가 傷 J- 斷 眼 長 站 창자는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물도 말랐구나,쫓짧 會 見 此 事 無 꿈속이라도 어찌 이런 일을 다시 볼 수 있으리오55 ) 태종은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1411 년(태종 11)에 국초에 李 햄 學 을 액살(옥매 죽임)하고, 李 옳 仁 을 장살한 일을 나는 처음에 알지 못하였다. 이 일은 참으로 혼미하기가 품나라 靈 帝 와 같다연 혹 있을 수 있지만, 태 조와 같은 간명한 임금으로서 창업하는 처음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형벌을 감독하는 자가 명령을 받고 장형을 가한후에 또 권신의 뜻에 아부하여 목을 메어 죽였다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6) 라 하여 사헌부로 하여금 진상을 구명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사헌부에서는 그가 억울 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그를 죽인 黃 居 正 과 孫 興 宗 을 국문하도록 청하였다. 7 ) 이로써 황거정과 손흥종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사면되었고, 이후 그 는 조선의 사림틀에게 충절의 표본으로 존숭되었다. 1669년(현종 10)에는 鎭 川 의 유생 들이 그의 충절을 기려 서원을 세워 조정에 사액을 청하니, 왕은 특별히 사액할 것을 명하고 었다 58) 그는 門 下 倚 中 을 지낸 李 春 富 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6남 l 녀 를 두었다. 아들은 l꿨 野 얹어후- 寂 當. 1꿨빼. ~ 福 꿨 時 이고, 딸은 義 安 大 君 和 의 아들인 李 漸 에게 출가 하였다 55) r 救 않 先 生 年 讀 J 68세조, 入 山 哭 詩 56) r 太 宗 實 錄 권 22, 太 宗 11 년 7 월 辛 西. 57) r 太 宗 판 錄 권 22. 太 宗 11 년 7 월 內 IX. 58) r 顯 宗 寶 歸 권 16. 顯 宗 10년 4월!R g힐.
150 ^ 文 科 學 昭 究 論 養 第 二 十 五 號 C. 種 善 (1368, 공민캉 17-1438, 세종 2이 종선은 목은의 계자로 자는 慶 夫 이며 시호는 良 景 이다. 일찍이 음으로 벼슬에 나가 郞 將 이 되었는데, 15세가 되던 1382년(우왕 8) 에 )1핍 興 君 安 宗 源 과 判 } 享 德 府 事 尹 珍 의 문하에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후에 左 郞 과 正 郞 을 역임하였고 또 司 憲 執 義 와 司 課 을 지냈다. 1392 년(공양왕 4)에는 簽 휠로 있었는데, 이 해에 정봉주가 살해되자 金 震 陽 의 옥사에 연류되어 형인 種 學 과 더불어 서인으로 폐출되고 유배를 당하였다.5 9) 이때 목은은 그에 게 글을 보내 위로의 마음을 보내고 있다. 有 命 在 天 須 염 身 安 心 是 藥 벚 何 求 사람의 命 이 란 하늘에 있으니 모름지기 자신을 가져라 마음을 편안케 하는 약을 이밖에 어디서 구하겠는가-QO) 1392년 7월에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結 黨 짧 亂 의 죄를 입어 校 70의 형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는데,6l) 이는 아버지 목은과 더불어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는 충절 때문이었다. 1396년(태조 5) 4월에 전조의 훈신자제로서 명망이 있는 자를 발탁하여 관직을 내렸는 데, 이때 그도 발탁되어 兵 햄왔 議 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다음 달에 아버지 목은이 돌아 가시자 벼슬을 버리고 한산에 낙향하여 3 년 동안 시묘하면서 애훼하니, 보는 사람마다 그 효성에 감복하였다. 이로써 향당에서는 효자비를 세워 그의 효성을 기렸고, 나라에 서 는 정문을 세워 포상하였다.62)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두문 불출하였으나 1407년(태종 7 )에 왕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左 司 議 大 夫 를 제수하였고, 다음 해에 戶 醫 判 事 를 배수하였다. 이 해 8월에는 前 司 憲 藍 察 鄭 뚫가 호조의 문서 를 조작하여 쌀 60석을 사취하려 한 것을 적발하였고,63) 다음 해 2월에는 右 司 課 大 夫 가 되었다. 이때에 세자가 활쏘기에 전념하니 글을 올려 그 부당함을 극간하였는데, 이에 왕은 그를 불러 문과 무는 그 하나도 폐할 수 없다. 그러 므로 세자로 하여 금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는데, 그대들이 모두 옳지 못하다 하니 내가 그만 두게 하였다"64)고 말하고 있다. 이 해 4월에 左 司 課 大 夫 가 되었고, 1411 년(태종 59) r 高 麗 史 권46, 世 家 46, 짧 讓 王 4년 4월 및 高 麗 史 권 117, 列 傳 3D, 金 震 陽. 60) r 收 應 先 生 年 讀 J 65세조, 示 季 子 簽 書 詩. 61) r 太 祖 寶 錄 a 권 1, 太 祖 원년 7 월 T 未 62) r 世 宗 實 錄 a 권 80, 센: 宗 20년 3월 여않 李 種 善 후 記. 63) r 太 宗 實 錄 권 16, 太 宗 8년 8월 ~ 寅.
썼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51 1 1)에는 戶 햄왔 議 가 되었다. 이 해 6월에는 明 의 국자조교 陳 鍾 이 지은 r 秋 隱 훌 誌 銘 이 말썽이 되어 탄핵을 받았다, 이 묘지명에서 공양왕이 즉위하자 用 事 者 들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여 收 隱 光 '1::을 탄핵하고 長 端 으로 유배시켰다 는 내용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용사자란 바로 태조를 의미한다 고 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장 100의 형을 받고 폈 聚 로 유배되었으나장) 이 해 11 월에 용서를 받고 풀려났다. 다음 해 정월에는 戶 훨 參 議 의 f섣 身 을 돌려 받았고, 이 해 10월에는 科 田 을 돌 려 받았다 이후 淳 昌 白 J 11 廳 興 의 KJ{혔를 지냈고, 1 416년(태종 16) 에는 代 言 의 직에 있으면서 이 해 4월에 柳 亮 이 죽자 왕명 을 받들어 그의 집으로 가서 조문하였다. 141 7 년(태종 17) 2월에는 豊 海 道 都 觀 察 使 로 출보하였고, 이 해 11월에는 金 得 理 의 후손인 朴 없이 조정의 판결에 불복하고 신문고를 올려 재심을 청구하였다가 의금부에 구속 되는데, 그도 이에 연류되어 구속되었다.66) 세종이 즉위하자 江 原 道 都 觀 察 使 로 출보하였고, 다음 해 2월에는 漢 城 府 尹 이 되었 으며, 얼마 후에 仁 찮 府 尹 을 배수하였다. 1420년(세종 2)에 국상이 나자 짧 願 都 藍 提 調 가 되어 장례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題 웠에서부터 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장례절차를 朱 f 家 댐에 준하여 행하였다.67) 다음 해 4월에는 右 軍 橋 制 가 되었고, 다음 달에는 左 軍 폐있1뺑 制 가 되었다. 1422년(세종 4)에는 忠 淸 道 觀 察 使 로 나갔는데 이때 좁 山 縣 藍 卓 社 가 지난번 국상 때에 부인틀을 모아 향연을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잡아 국문하였다.68) 또 이 해에 永 春 月 陽 지방이 수재를 입어 이곳 사람들의 피해가 막심하였는데, 그는 조정에 글을 올려 그 실상을 아뢰고 조세의 감면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1423년에는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기 위하여 새로이 朝 服 을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는 이를 위하여 官 馬 色 을 설치하고, 그로 하여금 提 調 를 삼아 이를 주관하도록 하였 다.69) 얼마 후에 進 훌 使 가 되어 명에 갔다가 다음 해 2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使 行 중 에 進 쩔 使 權 希 達 이 명의 조정에서 위의를 잃은 행동을 서슴치 않았고, 또 사행들의 경 비 를 횡령하였으며, 귀국 도중에는 평안도에서 生 廠 와 肉 味 를 토색하여 민폐를 끼쳤다. 64) r 太 宗 寶 錄 a 권 17, 太 宗 9년 3월 영 辰. 65) r 太 宗 質 錄 권 21, 太 宗 11년 6월 않 午. 66) r 太 宗 짝 錄 권 34, 太 宗 17 년, 7월 甲 子. 67) r ili:줬 賞 錄 권 8. 世 宗 2 년 7월 困 子 - 68) r 世 宗 흉 錄 a 권 17, 世 宗 4년 9월 困 寅. 69) r tt.t 宗 實 錄 권 21, 世 宗 5년 8월 E 쩔.
152 ^ 文 科 學 昭 究 論 養 第 二 十 五 號 그리하여 사헌부에서는 권희달을 탄핵하였고, 그도 이 사실을 조정에 즉시 보고하지 않 았다는 탄핵을 받아 직첩을 회수 당하고 외방으로 유배되었다 70) 1425 년(세종 7) 정월에 다시 직첩을 돌려 받고 풀려났으며, 이 해 6월에는 병선은 국가의 울타리인데, 수군은 맡은 바의 일이 너무 힘틀어 수군 중에 유능한 자는 간계를 부려 육군으로 이적하니 병선의 허약함이 지금 극에 이르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수군의 유능한 자를 육꾼으로 바꾸지 못하게 하여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 게 하소서 71) 라는 상소를 올렸다. 다음 해에는 함길도 관찰사로 출보하였고, 1 427 년(세종 9) 10월에는 판한성부사가 되 었다. 다음 해에는 進 웠 使 가 되어 명에 갔으며, 1429년 7월에는 黃 1'1 宣 恩 使 를 겸하였 고, 이 해 11월에는 世 子 紀 를 책봉하는 임무를 띠고 전라도에 가서 처녀틀을 물색하였 다 72) 1429년(세종 11) 9월에는 開 城 留 後 司 留 後 가 되었으며, 이후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하였다, 1438년(세종 20) 정월에는 中 樞 院 使 를 배수하였는데, 이 해 3월에 죽으나 향년 71 세였다. 良 景 이란 시호를 내렸다. 良 이란 것은 성품이 온량하여 화락하였다는 데서 주어졌으며, 景 이란 행실을 의리로서 행했다는 데서 주어졌다,7 3) 그는 泰 贊 門 下 府 事 를 역임한 權 錫 의 딸을 첫째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이후 吉 昌 君 權 近 의 딸을 후취로 맞이하였다,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季 隱 季 購 季 빼 季 觸 季 IIJJ이고, 딸은 李 伯 常 과 金 몇 老 에게 출가하였다. N. 맺음말 이상에서 收 隱 家 學 의 성립과 이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목은은 고려말의 대석학으 70) r 世 宗 흉 錄 권 23, 世 宗 6년 3 월 DGBt 71) r 世 宗 팝 錄 권 28, 世 宗 7년 6월 辛 西. 72) r 世 宗 寶 錄 권 45, 世 宗 11 년 8월 6월 辰. 73) r 世 宗 質 錄 권 80, 世 宗 20년 3 월 DG~ 李 種 善 후 記.
收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53 로써 당시 사회에서 유종으로 존경받으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하 에서 배출된 수많은 문도와 문생틀은 이후 고려와 조선 사회에서 정치개혁의 선봉에 섰 을 뿐만 아니라 학문발전에도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 5 백년의 학문적 성과는 조선 건국 후의 학문적 배경에서 연혁한다면, 그것은 바로 목은의 문하에서 배출된 문 생과 문도틀의 활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목은 사상의 계승 발전이기도 하다. 목은은 후학 양성을 자신의 본분으로 하면서 가정에서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최 선을 다하였다. 그는 항상 자식들에게 아버지인 문효공의 뭇을 잊지 말도록 교육하였으 며, 됐 之 f 孫 텀 代 之 親 詩 禮 傳 家 忠 孝 立 身 이라는 교훈을 가훈으로 전승시켰다. 그는 충과 효를 중시하였으 며, 이것을 후학 교육의 이념으로 또 자손들을 위한 가학 이념으 로 중시하였다. 在 於 家 門 名 日 孝 te 於 춰3 園 名 B 忠 忠 之 與 孝 本 - 物 이란 이념은 바로 그 의 교육이념 이기도 하고, 가학 이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충과 효의 덕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덕을 쌓고, 그 다음에 학문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선을 실천하는 것이 순서라고 보았다. 그가 아들의 이름을 햄 德 種 學 種 善 이라고 하였던 것도 이러한 그 의 사상이 전제가 되었다. 그는 아들과 손자 그리고 자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많은 가르침을 내렸다. 그가 아 들과 자손들에게 내린 교훈을 살펴보면 終 뚫 君 子 隔 a홈 輪 취3 家 光 이라 한 바와 같이 군 자의 자질을 연마하여 우리 가문을 빛내라는 가르침이 주지를 이루고 있다. 그가 가학 이념으로 자손들에게 내린 교훈을 정리하면 1. 가엽의 계승과 충효의 실천 2. 몸가짐을 바로 하고 근원을 맑게 할 것( 形 端 홈 燦 ) 3.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 것이며 정절을 합양할 것( 莫 爭 論 뼈 靖 節 ) 4. 말을 삼가 할 것( 慣 言 ) 5. 청백하고 근겸할 것 6. 독서하여 지선을 이룰 것 퉁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서 특히 자손들에게 내린 r 示 子 孫 詩 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 다. 그는 이 시에서 위의 모든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으로 아아! 나의 자손들이여! 이 를 보고 화우명으로 삼아라 고 강조하고 있다. 목은은 참으로 자상한 어버이였다. 자식들의 교육에는 엄격하였지만 항상 애정으로
154 ^ 文 科 뽑 昭 究 論 養 第 二 + 五 號 앞길을 염려하면서 그들이 위기에 처할 때에는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고, 또 벼슬에 나 아갈 때에는 경계하는 교훈을 잊지 않았다. 장자 種 德 이 과거에 합격하여 젊 底 에서 공 민왕을 시종할 때에 그는 大 小 所 由 和 最 貴 莫 爭 分 -t 氣 揚 揚 이란 글을 내려 항상 다른 사람과 화락할 것이며, 氣 를 강하게 가져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 하였다. 창왕 즉위 초에논 중자 種 學 이 유배를 떠나자 r 寄 省 郞 諸 兄 이란 시를 지어 자 탄하였다 그리고 종덕과 종학이 화를 당하여 죽게 되자 그는 산 속으로 들어가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대성통콕하였는데, 이때 지은 시가 r 入 山 哭 詩 로서 收 隱 文 集 에 전하고 있다. 또 1392 년(공양왕 4)에 계자 종선이 유배를 당하자 有 命 在 天 須 엽 身 安 心 是 藥 更 何 求 란 글을 보내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의 아들 종덕 종학 종선은 아버지 목은의 교훈을 받들어 모두 학문적으로 대성 하였고, 또 가학 이념을 익혀 충과 효를 그대로 실천하였다. 종덕은 우왕 말년에 지조를 지켜 충절로서 한 생을 마쳤고, 團 隱 鄭 夢 周 는 이러한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렴 詩 를 지어 애도하였다. 또 그는 효심도 빼어나 부인 柳 a;와 더불어 목은을 정성으로 받들었 다. 목은은 佳 兒 佳 歸 옳 如 琴 春 場 ( 長 )훌몹 惜 τf 陰 이란 시를 지어 이들의 효행을 칭찬하 였다. 종학 또한 학문이 빼어나 2차에 걸쳐서 과거를 주관하였고, 고려말에는 목은의 돗을 받들어 고려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하였다. 수차에 걸친 유배와 가혹한 형벌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조선이 건국되자 結 黨 課 亂 의 죄로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며, 얼 마 후에 鄭 道 傳 의 사주를 받은 孫 興 宗 과 黃 居 正 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 또한 효행이 철저하여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아들들에게 글을 보내어 네 아비는 비록 단명하 나 네 할아버지는 반드시 수할 것이니, 너희들은 내 뜻을 따라 혼정성식을 혹시라도 게 을리 말라 는 유훈을 남기고 었다. 종선도 1382년(우왕 8)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아갔는데, 고려말에 아버지 목은 을 받들어 고려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하였다. 그 또한 수차에 걸친 유배와 가혹 한 형벌에도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結 黨 課 亂 의 죄를 입어 校 70의 형을 받고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1396년(태조 5) 에 前 朝 의 훈신 자제들 중에서 명망이 있는 자를 발탁하여 관직을 내렸는데, 이때 그도 발탁되어 兵 團 參 議 를 제수하였다. 이후 그는 관로에서 활동하였는데, 세종 때에는 漢 城 府 尹, 빙 淸 遊 觀 察 使, 中 樞 院 使 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로에서 正 道 를 지켜 不 義 와는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모함을 받아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자 세종은 그에게 良 景 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良 이란 성품이 온량하여 화락하였다는 데
收 隱 家 學 의 成 立 과 理 念 155 서 주어졌으며, 景 이란 행실을 의리로서 행하였다는 데서 주어진 것이었다. 그 또한 효행이 남달랐다 1396년(태조 5)에 목은이 죽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韓 山 으로 낙향하여 3 년 동안 시묘하면서 애훼하니, 보는 사람마다 그 효성에 감복하였다 이로써 향당에서 는 효자비를 세워 그의 효행을 기렸고, 나라에서는 정문을 세워 포상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목은의 가학 이념은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그대로 계숭 되어 실천되었고, 이러한 가학 이념은 그의 손자들에게도 계숭되어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종덕은 아틀 굶없 굶뼈 굶 曉 굶%을 두었고, 종학은 아들 꿨 野 없 唯.!꿨 휩 以 뼈. ~i뼈). 꿨 時 를 두었으며, 종선은 아들 季 뚫 季 聯 季 빼 季 輪 季 메을 두 었다. 이들은 모두가 목은의 가학 이념을 받들어 자신틀의 생활철학으로 실천하였고 또한 자신의 아들틀에게도 이를 전하여 가문의 교훈으로 전숭시키고 있다. 그의 손자 중에 맹균과 계전은 대사성과 지공거를 역입하여 조선 초기의 학맥 형성에 크게 공헌하 였고, 그 밖의 손자들도 대부분 조선 초기의 정치에 우뚝한 자리를 매김 하여 정치질서 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목은의 가학 이념이 그의 자손틀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계전의 예에서 철을 수 있다. 즉 1458년(세조 4) 領 中 樞 府 使 로 있었던 계전은 思 政 願 에서 행한 권신들의 향연에서 공자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조부( 李 짧)의 가르침올 뼈에 새겨서 아침저녁으 로 욕됨이 없기를 생각하고 남의 비웃는 바가 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