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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완료

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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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조선 밖으로의 강제동원 에 관한 실태연구는 점점 국내연구자 로 확산되었고,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면서 점차 사실적인 실체에 접근해가기 시작하였다 4). 이러한 노력 에 의해 조선 밖으로의 강제동원 의 실체는 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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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7 논문 5 朝鮮總督府의 臨時資金調整法 운용과 資金統制 박현 연세대학교 1. 머리말 1937 년 7 월에 시작된 中日戰爭은 전쟁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그 식민지인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전시 경제통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植民地 朝鮮에서 戰時 經濟統制는 1937 년 9 월과 1 월에 輸出入品等臨時措置法, 臨時資金調整法(이하 자금조정법)과 軍需工業動員法의 적용에 의해 시작되어 전면적으로 확대 강화되어 갔다. 戰時統制三法 으로 불렸던 이들 법률 가운데 자금조정법은 회사의 설립, 증자, 합병, 설비투자 또는 금융기관의 융자 등이 일정규모 이상일 경우에 朝鮮總督의 인허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이에 朝鮮總督府는 민간투자를 제약할 수 있는 강력한 통제수단을 확보하게 되었다. 기존 연구들은 전시금융체제의 형성에서 자금조정법의 역할과 특징을 법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고 이 법의 허가를 받은 사업설비 자금이 軍需 관련산업에 집중되었다는 점을 통해서 이 법에 기초해 일제의 전시공업화 정책이 진행되었음을 보였다. 278 그리고 朝鮮紡績(株)의 사례를 통해서 조선총독부가 異纖維部門으로의 경영다각화를 이 법에 의해 억제함으로써 섬유산업에서 중점적이고 전문화된 移入代替化 와 自給自足化 를 유도했음을 보여주었다.279 본 연구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염두에 두면서 자금조정법의 운용 실태에 접근하려고 한다. 기존 연구를 통해서 전체적인 상황과 섬유산업의 사례는 파악할 수 있지만, 조선총독부가 자금조정법을 어떠한 방식으로 운용하였고 어떠한 요인들을 고려해 인허가를 결정했는지 검토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규제대상이었던 기업의 설립과 자금조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분석하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자금조정법과 관련된 조선총독부 문서인 自治調整貸付承認指令書 와 資金調整關係合意書類寫綴 그리고 事業資金調整關係書類 를 활용해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려고 한다.28 278 裵永穆, 韓國金融史 1876-1959, 개신, 22, 8,9,1 장 ; 吳斗煥, 戰時工業化와 金融, 安秉直ㆍ中村哲 編, 近代朝鮮 工業化의 硏究, 一潮閣, 1993. 임시자금조정법에 대한 일본의 연구사는 麻島昭一, 戰時金融統制の一考察, 社會科學年報 32, 1998, 4-5 쪽 참조. 279 정안기, 朝鮮紡績의 戰時經營과 資本蓄積의 전개, 經濟史學 32, 22. 28 自治調整貸付承認指令書 (문서번호: 88-2)는 자금조정법에 따라 1938 년에 총독부가 금융기관의 대출업무를 승인했던 기록이다. 資金調整關係合意書類寫綴 (문서번호: 88-22, 88-23, 88-24)은 총독부의 각 局課들이 각종 法令에 따라 인허가를 결정할 때 자금조정법에 기초해 재무국에 협의를 요구했던 기록인데, 그 기간은 1938 년 12 월부터 1939 년 12 월까지였다.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8 이 자료들은 기간이 194 년까지로 한정되었고 인허가와 승인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기간은 銀 行 等 資 金 運 用 令 에 의해서 運 轉 資 金 까지 통제대상이 되는 194 년 12 월 이후와 시기적으로 구분되고, 이 자료들을 통해서 이 시기 사업설비투자의 상당부분을 검토할 수 있으며 당시 핵심적인 기업들의 투자계획에도 접근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이를 활용해 자금조정법이 시행된 1937 년 1 월부터 194 년까지를 중심으로 조선총독부의 자금조정법 운용과 실적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해서 검토한다. 이는 해당시기 조선총독부의 경제통제가 자금부문에서 어떠한 방법과 수준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자금조정법을 중심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조선총독부의 臨 時 資 金 調 整 法 운용 (1) 조선에서 임시자금조정법 시행 1937 년 9 월에 일본에서 공포 시행된 자금조정법은 1 월부터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되었다. 주지하듯이 자금조정법의 목적은 중일전쟁을 위해서 軍 需 産 業 과 군사상 중요한 基 礎 産 業 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資 金 使 用 의 調 整 이었고, 그 핵심 조정대상은 事 業 設 備 의 신설, 확장 및 개량(이하 사업설비투자)에 관련된 자금이었다. 조정방법은 인허가였고 조선에서 인허가권자는 朝 鮮 總 督 이었다. 즉 자본금 5 만엔 이상인 회사(합명ㆍ합자ㆍ주식ㆍ주식합자ㆍ상호회사)의 설립, 증자, 합병, 목적변경, 未 納 入 株 金 徵 收, 사채모집, 自 己 資 金 에 의한 1 만엔 이상의 사업설비투자는 총독의 인허가를 받아야 했고(자금조정법 제 4 조), 금융기관에서 1 만엔 이상의 사업설비 자금을 조달할 때는 자금공급자인 금융기관이 허가를 받아야 했다(제 2 조). 그리고 회사가 다른 法 令 의 인허가나 면허를 받을 경우에는 해당 인허가 기관이 자금조정법상 인허가권자인 총독과 협의해야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금조정법의 취지가 반영되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동법의 인허가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施 行 令 제 3 조와 제 4 ㆍ 5 ㆍ 6 조의 단서). 이와 같은 인허가 업무를 위해서 事 業 資 金 調 整 標 準 (이하 조정표준)이 설정되었다. 조정표준은 軍 需 와 관계, 國 際 收 支 改 善 과 관계, 生 産 能 力 등을 고려해 각종 산업을 중요도에 따라 甲 乙 丙 3 종류로 분류하였다. 즉 甲 은 軍 需 와 직접 관련된 산업과 군수와 밀접히 관련된 기초산업으로 사업설비가 부족하거나 부족이 예상되는 것이었고, 乙 은 甲 과 丙 에 속하지 않는 산업이나 사업으로 사정에 따라, 예를 들어 군수와 상당히 관련되거나 국제수지 개선에 큰 공헌을 할 경우에 사업설비투자가 인정되는 것이었다. 丙 은 생산력과잉 산업과 사치품이나 필요도가 낮은 물품에 관련된 산업으로 당분간 사업설비투자가 적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 가운데 甲 은 가[イ] 와 나[ロ] 로, 乙 은 가, 나, 다[ハ] 로 세분하였고 이에 기초해 인허가가 이루어져야 했다. 또한 금융기관들은 이 표준에 구체적인 방침을 적용한 自 治 的 資 金 調 整 準 則 에 의해서 自 治 的 調 整 도 가능하였다. 즉 금융기관은 허가없이도 甲 산업에 대출이 가능했고, 乙 (가) 산업에는 5 만엔 이하 대출이 가능했으며 이 한도를 초과할 때는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다만 1 건에 3 만엔 미만의 대출은 승인이 필요없었다. 事 業 資 金 調 整 關 係 書 類 (문서번호: 29-1, 29-2, 29-3)는 자금조정법 제 4 조의 인허가 기록으로 194 년에 한정되어 있다. 資 金 調 整 關 係 合 意 書 類 寫 綴 과 事 業 資 金 調 整 關 係 書 類 의 대부분은 成 案 이 아닌 起 案 이었고, 전자의 문서철은 主 務 局 내부의 협의 절차까지 끝난 단계였다.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9 <표 1> 臨 時 資 金 調 整 法 施 行 令 및 自 治 的 資 金 調 整 準 則 의 주요사항 변화 臨 時 資 金 調 整 法 施 行 令 事 業 設 備 資 金 에 관한 要 許 可 범위 회사설립 등에 관한 要 許 可 범위 (공칭자본금) 自 治 的 資 金 調 整 準 則 自 治 的 資 金 調 整 범위 甲 乙 1937 年 1 1 만엔 이상 5 만엔 이상 가 나 다 月 제한없음 제한없음 5 만엔 이하 1938 年 8 月 5 만엔 이상 3 만엔 1 만엔 3 만엔 이하 이하 이하 1939 年 5 月 특정사업에 2 만엔 이상 2 만엔 7 만엔 이하 3 만엔 이하 194 年 1 月 대해서는 3 만엔 이상 이하 5 만엔 이하 2 만엔 이하 1 만엔 이하 자료: 朝 鮮 金 融 組 合 聯 合 會, 朝 鮮 に 於 ける 資 金 調 整 の 現 況, 1939, 12-15 쪽; 臨 時 資 金 調 整 法 及 銀 行 等 資 金 運 用 令 に 關 する 資 料, 1941, 16-18, 51-68 쪽 ; 臨 時 資 金 調 整 委 員 會, 臨 時 資 金 調 整 法 ニ 基 ク 事 業 資 金 調 整 標 準 ニ 關 スル 件, 1937.11.1 ; 資 金 調 整 の 强 化 決 定, 1938.3.8.( 日 本 金 融 史 資 料 昭 和 編 34 卷 25-218 쪽 수록). 이같이 규정된 자금조정법은 중일전쟁이 대규모화ㆍ장기화됨에 따라 강화되었다. 施 行 令 과 自 治 的 資 金 調 整 準 則 이 개정되어 인허가와 승인의 범위가 확대되었다(표 1). 그리고 1939 년 4 월에는 자금조정법이 개정되어 개인과 社 團 ㆍ 財 團 法 人 의 사업설비투자까지 허가대상이 되었고, 이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회사의 경우에도 회사규모와 상관없이 일정 한도를 초과하는 사업설비투자에 대해서 허가받아야 했다(제 4 조의 2). 이러한 자금조정법의 개정은 동법의 적용대상을 크게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회사수를 규모별로 살펴보면, 1936 년말 현재 조선에 본점을 둔 공칭자본금 5 만엔 이상의 회사는 342 社 로서 전체 회사수의 7%를, 전체 회사 공칭자본금의 79%를 점하였고, 194 년 8 월말 현재 공칭자본금 2 만엔 이상의 회사는 1,78 社 로서 전체 회사수의 18%를 점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정표준의 내용은 총독부가 작성하지만 일본의 것을 채용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변경이나 추가할 때는 일본 정부와 협의해야 했다. 조선에서 처음 시행된 것은 重 晶 石, 鹽 田 用 타일, 工 業 鹽 製 造 業, 페놀수지, 綿 實 油, 棉 花, 埋 立 ㆍ 干 拓 業 등 몇몇 항목이 승격되었을 뿐 일본이나 대만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이후 194 년까지 3 차례 개정되면서 그 차이가 확대되었다. 특히 1939 년에 유럽에서 제 2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에서는 生 産 力 擴 充 計 劃 을 重 點 主 義 로 재편성하면서 동년 12 월에 조정표준에서 많은 항목들을 격하시켰고, 총독부도 이 취지에 따라 194 년 4 월에 조정표준을 개정하면서 朝 鮮 의 特 殊 事 情 을 반영시키고자 했다.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는 甲 (가)였던 텅스텐, 몰리브덴, 마그네사이트와 甲 (나)이었던 燐 鑛, 黑 鉛, 雲 母, 石 綿, 螢 石 을 격하시켰지만, 총독부는 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히려 霞 石 을 甲 (나)로 신설하였고, 土 地 改 良 事 業 을 乙 (가)로 신설하였으며, 丙 이었던 米 作 을 위한 埋 立 ㆍ 干 拓 業 을 乙 (가)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개정은 해당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에 대한 투자를 제고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당시 총독부가 추진했던 朝 鮮 마그네사이트 開 發 ( 株 )의 설립과 朝 鮮 鑛 業 振 興 ( 株 )의 설립계획 그리고 朝 鮮 增 米 計 劃 과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 토지개량사업과 같은 정책사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입장이 조정표준에 모두 반영되었던 것은 아니다. 총독부는 일본산 시멘트의 생산감소와 船 腹 부족에 의한 移 入 곤란을 이유로 丙 이었던 시멘트제조업을 乙 (가)로 격상시키려 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조선에서 시멘트제조업이 重 要 産 業 統 制 法 의 적용을 받았던 첫 번째 산업임을 감안할 때 일본 시멘트 업계의 영향력이 역시 작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총독부의 인허가 범위는 조선이었다. 이에 일본에 본점을 둔 회사의 조선 내 투자와 조선 내 금융기관 점포의 대출도 인허가 대상이었다. 이른바 現 地 認 可 方 針 이었다. 이 원칙하에 총독부와 일본 정부는 臨 時 資 金 調 整 法 運 用 에 關 한 申 合 事 項 을 정하였다. 그 내용은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두 지역 모두에 관련된 사안을 협의해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허가 업무는 총독부 財 務 局 理 財 課 가 담당하였다. 일본에서는 臨 時 資 金 調 整 委 員 會 와 臨 時 資 金 審 査 委 員 會 가 설치되어 중앙은행인 日 本 銀 行 과 함께 업무를 취급하였지만, 조선에서는 두 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았고 朝 鮮 銀 行 도 관련 업무를 담당하지 않았다. 조선은행은 비록 중앙은행이었지만, 총독부는 同 行 의 영업방침에 대한 결정권이나 업무전반에 대한 감독권이 없었고 同 行 의 일반대출 그 자체도 허가대상이었기 때문에 일본은행과 같은 역할을 맡기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운용방식과 인허가 방침 재무국 이재과는 관련 局 部 課 와 합의해 인허가를 결정했다. 중요한 곳은 商 工 課, 鑛 山 課, 臨 時 物 資 調 整 課 등으로 殖 産 局 소속이었다. 1939 년 11 월에 종합적인 동원계획을 담당할 企 劃 部 가 총독부 직할로 설치된 후에는 기획부도 합의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였듯이 회사가 다른 법령의 인허가나 면허를 받을 때는 인허가 기관이 자금조정법상 인허가권자와 협의해야 한다는 규정에 의해서 재무국은 遞 信 局, 鐵 道 局, 殖 産 局, 警 務 局 등의 인허가 결정에도 관여했다. 자금조정법의 인허가 과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인허가의 결정은 기업의 재무상태와 투자계획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자금조정법 시행규칙에 따라 사업설비투자를 원하는 자는 투자가 필요한 이유와 투자계획, 예산과 자금조달 방법은 물론이고 회사의 정관, 최종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그리고 사업설비투자에 따르는 사업계획명세서와 사업수지계획서까지 제출해야 했고, 총독부는 이를 검토해 인허가를 결정했다. 예들 들어 ( 株 ) 靑 木 商 會 는 상품매입자금에 충당하기 위해 증자를 신청했는데, 총독부는 회사의 流 動 比 率 ( 流 動 資 産 / 流 動 負 債 ), 假 計 定, 外 上 賣 出 金 計 定, 外 上 買 入 金 計 定, 資 産 收 益 率, 負 債 比 率 등을 검토해 자금에 여유가 있고 차입도 쉬운 상태라고 판단해 증자를 불허하였다. 반면에 임대건물에서 영업을 했던 모자 제조판매업자의 건물매입 신청에 대해서는 조정표준의 丙 이지만 영업지속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허가하였다. 이처럼 총독부는 신청자와 그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해 인허가를 결정했고, 그로 인해 그 결정에는 자의성이 개재될 여지도 컸다. 둘째, 內 認 可 과정이 있었다. 일부 기업들은 신청에 앞서 口 頭 나 書 面 으로 총독부의 의향을 알아보고자 했고 그에 대한 主 務 局 의 內 認 可 를 받은 후에 정식으로 신청하였다. 이러한 절차는 법률상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1 처음부터 허용되고 있었다. 셋째, 총독부는 인허가 결정뿐만 아니라 사업의 진행까지 감독하며 설비와 자금의 유용을 막고자 했다. 주금납입에는 조건을 달아 허가일로부터 총독부가 정한 기한 내에 납입을 끝내도록 했고, 납입받을 주금의 사용처를 밝힌 경우에는 그에 관한 증빙서류를 사후에 제출시켰다. 설비투자의 경우에는 완성 때까지 진척상황을 보고시키거나 설비규격과 제품종류의 변경은 허가받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제 3 국 수출용 인견직물의 제조를 목적으로 허가받은 설비에서 조선이나 다른 지역 판매용 제품을 생산할 때는 사전승인을 받도록 해서 용도를 제한할 때도 있었다. 또한 日 本 窒 素 肥 料 ( 株 )의 사채모집에 대해서는 수취금을 日 本 興 業 銀 行 에 예탁하고 지불받을 때는 조선총독의 증명서를 첨부할 것을 요구해 자금사용을 감독했다. 그렇다면 총독부는 어떠한 사업들을 인허가했고, 그 인허가 결정에는 어떠한 점들을 고려했을까. 인허가 결정의 기본 원칙은 당연히 조정표준이었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총독부는 개별사안을 면밀히 검토했고 따라서 조정표준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다. 조정표준에서 不 要 不 急 으로 분류된 丙 이나 乙 (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허가를 받은 사업들이 있었고 甲 이었음에도 인허가를 받지 못한 사업들도 있었다. 또한 自 治 調 整 의 범위를 넘었기 때문에 별도의 승인을 받은 대출도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여러 사례들을 검토해 총독부의 인허가 방침을 확인해 보자. 첫째, 자금조정법의 입법취지였다. 이는 조정표준에 반영되어 있었지만, 조정표준을 구체적인 개별사업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예들 들어, 총독부는 軍 需 被 服 생산설비의 확장에 충당할 주금납입을 허가했고 輸 出 用 硬 質 陶 器 제조설비의 확장에 대한 대출을 승인했는데, 이는 모두 조정표준의 丙 이었다. 그리고 乙 (다)였지만, 육군창고의 운송청부업자인 小 運 送 業 회사에 목조선 구입을 허가했고 生 産 力 擴 充 計 劃 에 의해 진행되는 공사들에 사용할 압축산소를 판매하는 회사들에 주금납입과 설비신설을 허가했다. 이들 사례들은 총독부가 자금조정법의 목적을 위해서 조정표준에 얽매이지 않고 인허가를 결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총독부의 산업개발정책이었다. 주지하듯이 이 시기에는 宇 垣 一 成 이 시작한 農 工 倂 進 政 策 이 후임 총독 南 次 郞 의 兵 站 基 地 政 策 으로 변용되어 추진되어 갔다. 이를 공업 측면에서 살펴보면 南 次 郞 은 일본 대기업 유치에 의한 공업화 방식을 유지하면서 1936 년 朝 鮮 産 業 經 濟 調 査 會 와 1938 년 朝 鮮 總 督 府 時 局 對 策 調 査 會 를 통해서 군수 및 군수관련 공업을 중심으로 한 생산력확충계획을 확립하였고 이를 일본의 엔블록 생산력확충계획에 반영시키고자 했다. 기업들은 이러한 정책에 호응해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자본축적과 재생산을 도모했고 총독부는 이들의 투자계획을 인허가해 주었다. 대표적인 사업들은 경금속산업에서 朝 鮮 理 硏 金 屬 ( 株 )의 설립, 석유와 그 대용품산업에서 日 本 窒 素 肥 料 ( 株 )의 이소옥탄 생산설비, 朝 鮮 石 炭 工 業 ( 株 )의 인조석유 생산설비, 석탄산업에서 三 陟 開 發 ( 株 )의 無 煙 炭 田 개발사업, 朝 鮮 重 工 業 ( 株 )의 조선 및 선박수리용 제철설비 등이었다. 총독부는 이들 사업의 인허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인허가에 조건을 달아 정책의지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예들 들어 江 界 水 力 電 氣 ( 株 )에는 江 界 수력발전소 건설계획의 허가조건으로 禿 魯 江 발전소 설립을 명령하였고, 長 津 江 水 力 ( 株 )에는 虛 川 江 수력발전 추가계획의 허가조건으로 일반전기공급사업자를 위한 15 만 kw 의 할당을 명령했다. 총독부가 사업 인허가권을 활용해 추가적인 전력개발과 그에 기초한 공업발달을 꾀했던 것이다.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2 이러한 사업들은 거의 대부분 조정표준의 甲 이었는데,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면 자동차제조 계획을 세운 朝 鮮 國 産 自 動 車 ( 株 )는 자동차 시험노선의 확보를 위해서 海 雲 台 溫 泉 合 資 會 社 의 영업권을 인수하기를 원했고 총독부는 조정표준의 丙 이지만 그 자금확보를 위해 대출을 승인해 주었는데, 이는 朝 鮮 産 業 經 濟 調 査 會 에서 答 申 事 項 인 國 策 上 重 要 工 業 이었던 自 動 車 工 業 을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총독부는 조정표준의 丙 이었지만 朝 鮮 小 野 田 시멘트( 株 )와 朝 鮮 淺 野 시멘트( 株 )에 설비증설을 허가했는데, 이는 時 局 對 策 調 査 會 에서 答 申 事 項 인 北 支, 中 支 의 經 濟 開 發 과 朝 鮮 經 濟 開 發 의 聯 繫 의 실시계획이었던 시멘트공업의 확충 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셋째, 총독부의 移 入 代 替 化 와 自 給 化 정책이었다. 당시 조선 내에서 투자가 확대되었지만 외환통제로 인해 수입이 제한되고 일본산 제품의 이입마저 감소해 물자조달이 어려웠다. 이에 총독부는 조선 내 수요에 대응해 移 入 代 替 化 와 自 給 化 를 추진했다. 여기에는 수출확대에 의한 외화획득과 폐업자 轉 業 의 정책의도까지 반영되어 있었다. 관련 사례들을 살펴보면, 총독부는 철도선로용품 생산을 위해서 東 亞 交 通 機 材 ( 株 )의 설립을, 도료 생산을 위해 京 城 化 學 工 業 ( 株 )의 설립을 인가했다. 그리고 섬유생산 기업들의 조선 내 加 工 一 貫 體 制 를 강화하기 위해서 朝 鮮 紡 織 ( 株 )의 捺 染 設 備, 東 洋 紡 績 ( 株 )의 起 毛 設 備, 大 日 本 紡 織 ( 株 )의 人 絹 織 物 設 備, 郡 是 製 絲 ( 株 )의 絹 織 設 備 등을 허가했다. 또한 廢 服 과 繿 縷 의 재생가공을 위해서 朝 鮮 毛 織 ( 株 )의 설립과 朝 鮮 新 興 紡 織 ( 株 )의 주금납입을 인허가했고 回 收 屑 紙 를 원료로 模 造 再 生 紙 를 생산하는 再 生 製 紙 工 場 의 설치를 허가했다. 고무화 대용품으로 사용할 地 下 足 袋 와 운동화의 제조용으로 帆 布 와 雲 齊 를 제직하려는 ( 株 ) 松 高 實 業 場 의 설비증설도 허가했다. 이들 모두는 조정표준의 丙 과 乙 (다)였다. 이처럼 총독부는 조선 내 생산을 중시했지만 그렇다고 이와 관련된 모든 사업을 인허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인조섬유로 제작되었던 足 袋 에 불만이었던 일본인과 조선인 중상층을 대상으로 면혼방 버선을 제작하려는 京 城 足 袋 ( 株 )의 설립에 대해서는 소비절약과 인조섬유 생산이라는 國 策 에 順 應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인가하지 않았다. 넷째, 機 資 材 와 原 料 의 확보여부였다. 예를 들어 1939 년부터 人 絹 絲 배급이 실시되자 수출용 인견직물을 생산하려는 大 日 本 紡 織 ( 株 )의 경성공장설비는 허가했지만, 같은 목적이었던 東 洋 綿 織 ( 株 )의 공장건설은 불허했다. 신설회사에는 인견사 할당이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불량 인견사를 활용하는 朝 鮮 紡 織 ( 株 )의 製 織 加 工 工 場 설립은 할당된 인견사로는 계획한 공장 규모에 상응하는 인견사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불허했다. 한편, 일본 陸 海 軍 의 共 同 管 理 下 에 軍 需 用 麻 製 品 공장을 신설하려는 帝 國 製 麻 ( 株 )는 1939 년 7 월에 허가를 받았지만, 194 년 1 월에 麻 紡 績 회사의 설립을 신청한 朝 鮮 紡 織 ( 株 )는 인가받지 못했다. 이러한 결정은 곧 실시될 大 麻 需 給 調 整 規 則 과 직결된 것이었는데, 총독부는 194 년 8 월에 이 규칙을 시행하면서 帝 國 製 麻 를 大 麻 買 受 人 으로 지정했지만 朝 鮮 紡 織 은 지정하지 않았다. 결국 부족한 원료를 기존 생산업체에 제한적으로 공급하는 물자배급의 운용방식이 설비확장과 신규진입을 제약했던 것이다. 더욱이 일본에서 物 資 動 員 計 劃 과 生 産 力 擴 充 計 劃 이 진행되자 이들 계획에서 핵심 품목들의 확보는 인허가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예들 들어 大 日 本 紡 績 ( 株 )는 청진공장 내 잉여전력을 이용해 탄화석회 생산설비를 갖추려고 했지만, 총독부는 계획에 소요되는 鋼 材, 銑 鐵 등이 194 년도 물자동원계획에 예정되지 않아 배급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불허했다. 甲 (나)인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3 베어링을 제조하려는 朝 鮮 베어링( 株 ) 설립도 크롬 鋼 배급의 어려움 때문에, 乙 (가)인 시멘트 柱 를 제조하려는 朝 鮮 콘크리트폴( 株 )의 설립도 棒 鋼, 鐵 線 배급의 어려움 때문에 인가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진행 중인 물자동원계획의 범위 내에서 자재를 배급하거나 장차 소요되는 물자를 다음 연도의 물자동원계획에 計 上 하려고 노력하였고 자재 확보를 위해서 일본 대장성ㆍ상공성과 협의도 하였지만, 일본 정부의 물자동원계획에 의해서 총독부의 인허가가 일정하게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섯째, 총독부는 중복ㆍ과잉투자를 방지하고자 했다. 예들 들어 ( 株 ) 淸 水 精 米 所 는 朝 鮮 增 米 計 劃 에 호응해 정미공장을 세우려고 했지만, 총독부는 동일지역에서 다른 업자의 시설투자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에서 불허했다. 또한 석면 생산을 목적으로 한 朝 鮮 石 綿 工 業 ( 株 )과 朝 鮮 石 綿 고무 工 業 ( 株 )의 설립은 조선 내 석면수요와 회사의 생산계획을 검토한 후에 전자만을 우선 인가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194 년부터 더욱 강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일본에서의 重 點 主 義 방침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총독부는 甲 (나)인 광산용 기계를 제작하려는 ( 株 ) 朝 日 機 械 製 作 所 (자본금 1 만엔)의 설립에 대해서 제품수급상 소규모 회사에 기대할 바가 적을 뿐만 아니라 資 材 분산의 폐해를 이유로 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1939 년 11 월에 신청된 協 同 油 脂 ( 株 )의 가성소다 공장신설은 조선 내 자급을 위해서 허가했지만, 194 년 4 월에 신흥 콘체른이었던 日 曹 의 관계사인 西 鮮 化 學 ( 株 )와 日 本 窒 素 肥 料 ( 株 )가 각각 신청한 가성소다 생산설비의 신설과 확장은 甲 (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허하였다. 불허의 이유는 소다공장의 신설 확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당시 가성소다에 대한 생산력확충계획의 기본 정책방향이 설비확충이 아니라 기존 설비의 보수나 그 원료의 확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 년도 생산력확충계획의 實 施 方 針 에 협동유지(주)의 계획이 반영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총독부는 조선 내 수요에 대응해 협동유지의 것만을 194 년도 생산력확충계획에 편입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에 따라 허가를 결정했던 것이다. 한편 日 本 窒 素 肥 料 ( 株 )는 194 년 2 월에 메탄올과 포르말린 생산설비의 신설을, 4 월에는 아세톤 생산설비의 확장을 신청했는데, 총독부는 모두 甲 (나)이지만 자재배급이 곤란해 허가할 수 없고 성공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확장 계획은 기존 설비의 실적이 저조하기 때문에 그 성과를 본 후에 고려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理 硏 알루마이트( 株 )의 자본과 기술을 활용하는 朝 鮮 알루마이트 輕 金 屬 工 業 ( 株 ) 설립과 高 田 알루미늄 製 作 所 의 기술과 유휴기계를 사용하는 朝 鮮 알루미늄 工 業 ( 株 ) 설립에 대해서 원료인 알루미늄 原 塊 의 수급과 자재공급을 감안해 두 회사를 함께 인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둘의 기술력을 비교해 후자만을 인가했다. 요컨대 총독부는 자재부족을 배경으로 기업의 기술력과 계획의 성공가능성, 기존 실적, 그리고 자본규모까지 감안해서 선별적으로 인허가를 결정했던 것이다. 또한 이는 적극적으로 일본 대기업의 투자를 유치했던 이전의 정책과는 다른 양상이었고, 이러한 변화로 인해 조선에서 투자를 확대하려던 日 窒, 理 硏, 日 曹 등의 신흥 콘체른은 그 투자계획의 일부를 축소하거나 포기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교육정책이나 사상통제정책 등과 같은 다양한 정책사업들이었다. 예를 들어 조정표준의 丙 이었지만 3 차 조선교육령 실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교과서 인쇄기계를 증설하려는 朝 鮮 書 籍 印 刷 ( 株 )에 대한 대출을 승인했고, 總 督 施 政 3 周 年 을 기념하기 위한 朝 鮮 大 博 覽 會 의 시설과 護 國 神 社 의 건립을 허가했다. 그리고 예외적인 사항으로 자금조정법 시행 전에 시작된 經 過 的 事 案 과 災 害 設 備 復 舊 도 있었다. 예를 들어 법시행 전에 동양척식(주)가 대출을 口 約 해 주었던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4 豊 田 種 松 의 아파트 건축사업과 소실된 昭 和 酒 類 ( 株 ) 공장설비 복구가 조정표준의 丙 이었지만, 총독부는 그에 대한 대출을 승인해 주었다. 3. 資 金 調 整 실적과 자금통제 (1) 인허가율과 자금조정 실적 자금조정법과 관련된 인허가와 승인 업무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다만 자금조정법 제 4 조와 관련된 신청과 인허가 상황은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을 <표 2>와 <표 3>을 통해 살펴보자. 월평균 신청건수는 1938 년에 2.5 건에서 194 년-1941 년 9 월 에는 54.4 건으로 증가하였다. 시행령 개정으로 적용범위가 확대되었던 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인허가율은 1938 년 97.6%에서 194 년-1941 년 9 월 에 89.7%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높았다. 신청사항별 건수를 기준으로 인허가율을 살펴보면, 사업설비 와 합병 은 높았고 자본증가 와 회사설립 은 낮았다. <표 2> 임시자금조정법 제 4 조에 의한 신청 및 인허가율 (단위: 건, %) 期 間 申 請 取 下 不 認 許 可 認 許 可 認 許 可 率 認 許 可 率 (2) 1937 年 (1.15-12.31) 68(27.2) 4 64 94.1 94.1 1938 年 246(2.5) 2 6 24 97.6 96.8 1939 年 445(37.1) 29 25 42 94.4 88.6 194 年 -1941 年 9 月 1,143(54.4) 121 118 1,25 89.7 81.1 자료: 臨 時 資 金 調 整 法 と 朝 鮮 經 濟 (3), 殖 銀 調 査 月 報 1938.8 ; 資 金 調 整 法 に 依 る 認 可, 許 可 事 業 設 備 資 金, 鮮 滿 支 財 界 彙 報, 194.3 ; 朝 鮮 經 濟 年 報 194 년판 137-141 쪽 ; 昭 和 16 年 第 79 回 帝 國 議 會 說 明 資 料 ( 日 帝 下 戰 時 體 制 期 政 策 史 料 叢 書 9 권 6-64 쪽). 비고: 申 請 의 괄호안은 월평균 신청건수이고 인허가율(2)는 (인허가/신청+취하)로 계산되었음. <표 3> 임시자금조정법 제 4 조에 의한 신청사항별 취급건수, 금액 및 인허가율 (기간: 1937 년 1 월 15 일-1941 년 9 월) (단위: 건, 萬 圓, %) 신청사항 認 許 可 不 認 許 可 認 許 可 率 건수 금액 1 건평균 건수 금액 1 건평균 건수 금액 사업설비 959 78,531.6 81.9 65 4,38.6 62.1 93.7 95.1 주금납입 333 5,75.2 154. 3 486.5 16.2 91.7 99. 자본증가 11 43,732.7 433. 18 871.2 48.4 84.9 93.8 회사설립 18 42,427. 235.7 31 1,675. 344.4 85.3 79.9 합병 23 7,92. 344.3 1 8. 8. 95.8 9.8 목적변경 68 8 89.5 조건변경 85 1. 자료: <표 2>와 같음. 자본증가 와 회사설립 은 공칭자본금이고 합병 은 합병 후 회사의 공칭자본금이고 주금납입 은 납입될 금액임. 인허가를 받은 것과 받지 못한 것의 규모를 살펴보면, 회사설립에서 평균 자본금은 인가된 것이 235 만엔이었고, 불인가된 것은 344 만엔이었다. 주금납입, 자본증가 에서 인허가된 것의 평균금액은 각각 154 만엔, 433 만엔이었고 불인허가된 것은 각각 16 만엔, 48 만엔이었다. 제한된 정보이지만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5 총독부는 기존 대기업들의 주금납입이나 증자에 대해서 관대했지만, 신규 기업에 대해서는 그것이 비록 대규모 자본을 동원하려는 것일지라도 더 제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허가 상황을 이해하는 데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앞서 언급하였듯이 위의 내용은 자금조정법 제 4 조에 관련된 것이었고, 회사가 사업설비자금을 금융기관에서 조달한 것과 다른 법령의 인허가나 면허를 받은 것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당시 각종 통제법령이 증가함에 따라 자금조정법의 영향을 받지만 자금조정법상의 인허가는 받지 않는 것이 함께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둘째, 인허가 과정에서 이루어진 行 政 指 導 였다. 자금조정법이 시행되자 재무국과 관련 부서들은 법의 취지와 운용방침을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민간에 전달했다. 예들 들어 재무국은 법시행에 의해 酒 類 製 造 業 의 설비투자가 제약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 업자와 긴밀한 관계였던 稅 務 署 가 가급적 빨리 업자와 사전협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앞서 언급한 內 認 可 과정에서 투자 축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고, 주금납입 규모나 예산을 축소시킨 후에 허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들도 내인가 과정에서 主 務 局 의 부정적인 견해를 통보받았을 때는 신청을 포기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자금조정법의 운용방침상 일방적인 불허 결정보다는 신청자의 자발적인 취하나 수정후 재제출을 유도하였는데, 총독부의 방침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행정지도의 영향력을 지표로 파악하는 것은 그 특성상 쉽지 않다. 다만 인허가 신청 후에 取 下 했던 것이 증가했고 이 취하까지 신청건수에 포함시켜 계산하면 인허가율이 81.1%까지 하락했다는 점을 통해서 그러한 상황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표 2>의 認 許 可 率 (2)). 마지막으로 조정표준의 발표였다. 조정표준은 총독부의 정책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신호로서 민간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에 민간에서는 조정표준을 감안해 인허가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해서 신청조차 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료로서 확인될 수 없는 부분이다. 다음으로는 자금조정의 결과를 그 핵심 조정대상인 사업설비자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표 4>는 사업설비자금을 금융기관 대부에 의한 것, 자금조정법 제 4 조의 인허가를 받은 것, 그리고 총독부 각국이 협의에 동의한 것으로 구분해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연도별 사업설비자금의 규모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는데, 자금조정법의 적용범위 확대와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표 4> 자금조달별 사업설비자금 (단위: 萬 圓 ) 기간 금융기관 대부 자금조정법 제 4 조 각국 협의 합 금액 % 금액 % 금액 % 금액 % 1937 年 (1.15-12.31) 1,811.2 7.5 19,86.9 82.4 2,442. 1.1 24,114.1 1. 1938 年 14,298.2 26.8 34,273.6 64.3 4,763.7 8.9 53,335.5 1. 1939 年 14,391. 29.2 22,515.1 45.8 12,296.9 25. 49,23. 1. 194 年 -1941 年 9 月 3,645.4 31.1 48,659.1 49.4 19,285.5 19.6 98,59. 1. 합 61,145.8 27.1 125,38.7 55.8 38,788.1 17.2 225,242.6 1. 자료: <표 2>와 같음.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6 사업설비자금에서는 대규모 사업의 비중이 컸다. 당시 최대사업은 각각 소요자금이 1 억엔이 넘은 허천강 수력발전소 공사와 수풍발전소 공사였는데, 이들 사업은 자금조정법 시행 전에 사업허가를 받아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주요 분석대상은 아니다. 이외에 1938 년과 1939 년에 인허가를 받거나 심의 중인 대규모 사업은 日 本 高 周 波 重 工 業 ( 株 )의 제철설비증설(고정자금 3,322 만엔), 日 本 製 鐵 ( 株 )의 淸 津 제철소설립(6,199.3 만엔), 朝 鮮 理 硏 金 屬 ( 株 )의 鎭 南 浦 ㆍ 仁 川 공장설립(건설비 2,442.2 만엔), 日 本 窒 素 肥 料 ( 株 )의 이소옥탄 생산설비(총공사비 3,7 만엔), 朝 鮮 石 炭 工 業 ( 株 )의 인조석유사업(3,5 만엔), 南 鮮 水 力 電 氣 ( 株 )의 발전설비(4,5 만엔), 北 鮮 拓 殖 鐵 道 ( 株 )의 철도부설(2,983.8 만엔), 江 界 水 力 電 氣 ( 株 )의 발전설비(9, 만엔), 漢 江 水 力 電 氣 ( 株 )의 발전설비(4,56 만엔) 등이 있었다. 194 년에 인가받은 南 鮮 水 力 電 氣 를 제외한 나머지 8 개 사업의 고정자금 또는 총공사비 합계는 3 억 5,77 만엔이었다. 1938 년과 1939 년의 사업설비자금이 각각 5 억 3,335 만엔, 4 억 9,23 만엔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업설비투자에서 대규모 사업의 비중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事 業 分 類 金 融 機 関 貸 付 <표 5> 사업설비자금의 사업자금조정표준별 상황 (단위: %) 1937 年 1938 年 1939 年 194 年 -41 年 9 月 資 金 資 金 資 金 金 融 資 金 金 融 金 融 調 整 調 整 調 整 機 調 整 小 計 機 関 小 計 機 関 小 計 小 計 法 法 法 関 貸 法 貸 付 貸 付 4 条 4 条 4 条 付 4 条 가 38.2 64.1 61.9 64.6 75.5 72.3 57.1 66. 62.5 63.3 52.3 56.6 甲 나 1.9 12.5 11.6 3.6 4.7 4.4 1.8 5. 3.7 1.7 8.3 5.8 小 4.1 76.6 73.5 68.2 8.3 76.7 58.9 7.9 66.2 65. 6.6 62.3 計 가 18.2 1.1 1.8 8. 4.3 5.4 4.4 9.9 7.8 5.4 8.3 7.2 乙 나 35. 1.7 4.5 14.2 1. 4.9 3.2 1.3 18.1 25.4 14.9 19. 다 1...1.7.5.6 2.5 4.1 3.5 1.9 3.3 2.8 小 54.2 11.9 15.4 22.9 5.9 1.9 37.1 24.4 29.3 32.7 26.6 28.9 計 丙 5.7 11.5 11. 8.9 13.9 12.4 4. 4.7 4.4 2.3 12.8 8.7 計 1. 1. 1. 1. 1. 1. 1. 1. 1. 1. 1. 1. 자료: <표 2>와 같음. 業 種 金 融 機 関 貸 付 <표 6> 사업설비자금의 업종별 상황 (단위: %) 1937 年 1938 年 1939 年 194 年 ~41 年 9 月 資 金 資 金 資 金 資 金 金 融 金 融 金 融 調 整 各 局 調 整 各 局 調 整 各 局 調 整 計 機 関 計 機 関 計 機 関 法 協 議 法 協 議 法 協 議 法 貸 付 貸 付 貸 付 4 条 4 条 4 条 4 条 小 計 工 業 43.1 11. 26.3 57.9 54.6 81.9 3.6 7. 43. 47.9 88.1 56.5 5.8 51.1 51. 鉱 業 9.2 63.2 9.7 2.3 13.6 14.2 18.5 38.8 2.8 23.8 16.3 26.1 22.3 交 通 業 7.6 23.9 73.7 27.7 1.3 2.3 62.7 9.8 16. 8.6 8.8 1.8 12.4 9.2 1.4 小 計 59.9 98. 1. 95.4 85.2 97.8 93.3 94. 77.5 95.2 99.8 91.2 79.5 86.4 83.7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7 農 林 業 9.9.7 1.4.4.7 1.9 1.5. 1.2 4. 2.6 3.2 水 産 業.8.4.4.4.2.2.7.8.7 商 業.7.2..9.6 2.2 1.3. 1.3 1.4 3.5 2.7 雑 業.7 1.5 1.2.5 6.7 1.3.9.9.2.7 1.5 2.7 2.3 기타 28.8 2.2 11.3 3. 17.1.9 5.4 12.9 4. 7.4 計 1. 1. 1. 자료: <표 2>와 같음. 1. 1. 1. 1. 1. 1. 1. 1. 1. 1. 1. 1. 사업설비자금을 조정표준별과 업종별로 살펴보면, 조정표준의 甲 에 62.3-76.7%가 집중되었고, 공업, 광업, 교통업에 83.7-95.4%가 집중되었다. 연별로 살펴보면, 그 비중은 후반으로 갈수록 감소하였다. 甲 과 공업, 광업, 교통업의 비중이 감소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甲 과 위의 세 업종의 비중감소는 乙 과 농림업, 상업, 잡업, 기타 사업ㆍ시설의 비중증가를 초래했는데, 이는 이들 산업에서 乙 로 분류되었던 부문에 자금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다. 그러한 사업들을 살펴보면 상수도업과 매립ㆍ간척업, 公 共 的 組 合 事 業 과 사회사업, 토지개량사업과 창고업 등이었다. 이는 총독부가 추진했던 정책사업들인 市 街 地 計 劃, 朝 鮮 增 米 計 劃 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진행과정에서 이들 부문에 사업설비자금이 증가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둘째, 甲 의 비중감소가 공업, 광업, 교통업의 비중감소에 비해 컸는데, 이는 이들 세 업종에서 乙 로 분류된 사업에 자금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앞서 보았듯이 당시 조선 내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는 부문에 대해서 설비투자가 증가하였는데, 이러한 사업들에서 乙 로 분류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 세 업종 가운데 甲 으로 분류된 사업이 조정표준의 개정으로 乙 로 격하되었지만, 자금조정은 이에 따라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2) 자금통제 효과와 자금동향 조선총독부의 자금조정 실적을 일본과 비교하면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조정된 사업설비자금의 조정표준별 및 업종별 비중이 비슷하였다. 조선에서는 사업설비자금이 법시행 이후 1941 년 9 월말까지 甲 乙 丙 에 각각 7%, 22%, 8%로 조정되었고, 일본에서는 194 년 3 월말까지 각각 68%, 25%, 7%로 조정되었다. 산업별로 살펴보면, 조선에서는 1941 년 9 월말까지 금융기관 대부에 의한 것과 자금조정법 제 4 조의 인허가를 받은 것에서 공업, 광업, 교통업의 비중이 89%(공업 57%, 광업 21%, 교통업 11%)였고, 일본에서는 1941 년말까지 그 비중이 88%(공업 61%, 광업 15%, 교통업 11%)였다. 그 기간에 차이가 있고 조선에서 광업의 비중이 높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조선에서도 일본과 같은 수준의 자금조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둘째, 조선에서는 금융기관 대부의 비중이 낮았다. 사업설비자금 가운데 금융기관 대부에 의한 것의 비중은 조선에서는 법시행 이후 1941 년 9 월까지 27%였고, 일본에서는 1941 년말까지 41%였다. 일본에서 유가증권모집에 의해서 조달된 사업설비자금의 비중이 같은 기간 9%였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조선 내 금융기관은 대부와 유가증권 모집을 통해서 사업설비자금에 기여한 바가 적었던 것이다.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8 조선에서 사업설비자금 가운데 금융기관 대부의 비중은 이처럼 낮았지만, 사업설비투자에 대한 금융기관의 역할까지 적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사업설비자금을 제공한 금융기관을 먼저 살펴보면, 1937 년에는 朝 鮮 殖 産 銀 行 (이하 殖 銀 )이 전체 대부금액의 69%을 담당하였고, 조선은행, 東 洋 拓 殖 (이하 東 拓 ), 第 一 銀 行, 朝 鮮 信 託 이 각각 11%, 9%, 8%, 3%를 담당했다. 그리고 조선은행은 법시행 이후 194 년 9 월까지 금융기관 사업설비자금 대부액의 3% 정도를 담당했다. 자료의 제약상 사업설비자금의 대부를 담당한 금융기관과 금융기관별 비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국책금융기관ㆍ회사와 일본계 은행의 지점이 사업설비자금을 주로 담당했고, 그 가운데서도 전자인 殖 銀 과 조선은행 그리고 東 拓 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업설비자금을 주로 담당했던 殖 銀, 조선은행 및 東 拓 은 기업의 투자자금 조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殖 銀 은 日 本 高 周 波 重 工 業 의 제철설비 증설계획(5,822 만엔)에 고정자금 3,322 만엔 전액을 무담보어음대출로 융자하였고, 京 春 鐵 道 ( 株 )의 경성-춘천간 철도건설사업(소요자금 1,188 만엔)에 926 만 8 천엔을, 朝 鮮 平 安 鐵 道 ( 株 )의 철도건설(325 만엔)에 2 만엔을, 協 同 油 脂 ( 株 )의 가성소다 공장건설(412 만엔)에 4 만엔을 대출해 주었다. 그리고 조선은행은 三 陟 開 發 ( 株 )의 삼척탄전개발(1,95 만엔)과 석탄질소제조(4 만엔)에 1,5 만엔을, 三 陟 鐵 道 ( 株 )의 철도건설(878 만 2 천엔)과 墨 湖 港 築 造 (535 만엔)에 45 만엔을 대출해 주었다. 또한, 東 拓 은 江 界 水 力 電 氣 ( 株 )의 수력발전사업(1 억 5 천만엔)에 194 년부터 1943 년까지 총 1 억엔을 융자할 계획이었다. 나아가 국책금융기관ㆍ회사는 적극적인 出 資 를 통해 신규회사의 설립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보았던 대규모 사업설비투자 가운데 투자를 위해 신설된 회사는 北 鮮 拓 殖 鐵 道, 漢 江 水 力 電 氣, 江 界 水 力 電 氣, 南 鮮 水 力 電 氣 이었는데, 이들의 자금조달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北 鮮 拓 殖 鐵 道 는 납입자본금으로 47%를 조달하고 나머지는 일본소재 은행에서 차입할 계획이었고, 漢 江 水 力 電 氣 는 납입자본금(55%)과 차입금으로, 江 界 水 力 電 氣 도 납입자본금(56%)과 차입금으로, 南 鮮 水 力 電 氣 는 납입자본금(44%), 차입금(49%), 그리고 放 流 水 利 用 者 기부금(7%)으로 조달할 계획이었다. 결국 이들 신설회사 모두가 고정자본 또는 총공사비의 절반 정도를 납입자본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강계수력전기와 남선수력전기의 최대주주는 東 拓 으로서 전자 주식의 7%, 후자 주식의 5%를 소유하였다. 한강수력전기의 대주주는 殖 銀 과 同 行 이 대주주인 朝 鮮 貯 蓄 銀 行, 朝 鮮 信 託, 京 春 鐵 道 이었고 이들은 한강수력 주식의 4%를 소유하였다. 그리고 북선척식철도의 최대주주는 朝 鮮 鐵 道 (주)로서 주식의 6%를 소유하였는데, 조선철도의 대주주는 東 拓, 조선저축은행, 조선신탁, 조선은행이었다. 결국 이 시기 국책금융기관ㆍ회사는 대부뿐만 아니라 회사설립에 직접 참여해 출자에 의해서 사업설비자금을 제공했던 것이다. 사업설비자금이 조정표준 甲 에 집중되었던 것은 국책금융기관ㆍ회사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렇다면, 자금조정법은 당시 전반적인 자금동향과 회사설립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이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자금조정법의 정책효과를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법시행 이후 사업설비자금의 조정표준별 비중은 살펴보았지만, 엄밀한 평가를 위해서는 시행 이전과 이후의 비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전반적인 자금동향과 회사설립을 통해서 이 문제에 접근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금조정법의 핵심 조정대상이 사업설비자금이었지만, 만일 전반적인 자금동향이 사업설비자금의 조정방향과 달랐다면, 이는 시국산업인 甲 에 자금이 충분히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29 집중되지 않았거나 그 외 부문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이 자금동원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점을 세 가지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는 사업설비자금이 甲 에 집중되면서 동시에 공업, 광업, 교통업에 집중되었다는 점에 착안해 회사자본금과 은행대출이 이들 세 업종에 얼마나 집중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두번째와 세번째는 기업의 차입금 변화와 회사설립 상황을 검토함으로써 기업의 자금차입과 회사설립에 대한 자금조정법의 영향을 살펴보는 것이다. <표 7> 회사 납입자본금의 업종별 증가율과 비중 (단위: %) 증가율 비율 업종 1938 1939 194 1941 연평균 年 年 年 年 증가율 1938 年 1939 年 194 年 1941 年 광업 47.3 26.5 35.1 12.8 29.8 17. 18.2 19.1 18.4 공업 6.5 17.5 41.1 25.2 35.1 42.4 42.2 46.2 49.4 교통업 23.8 35.5 16.6 15.5 22.6 8.7 1. 9.1 9. 농림업.6 3. 4.9 1.4 4.7 6. 5.3 4.3 4. 수산업 23. 11.1 16.7-37.6 -.1 1.4 1.3 1.2.6 상업 6. 13.5 16.9 13. 12.3 16.6 16. 14.5 14. 잡업 -3.4 4.5 3.7-6.9 -.6 7.9 7. 5.7 4.5 전체 31.7 17.9 28.8 17. 23.7 1. 1. 1. 1. 자료: 京 城 商 工 會 議 所 統 計 年 報 해당년판. 증가율은 연말 납입자본금의 전년대비 증가율임. 주: 업종은 사업조정표준에 따라 조정하였음. 1937 년판에는 화학공업 항목이 없었고 이로 인해 1938 년 공업의 증가율이 과대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표 8> 은행대출의 업종별 증가율과 비중 (단위:%) 증가율 비율 업종 연평균 1939 年 194 年 1941 年 증가율 1938 年 1939 年 194 年 1941 年 광업 64.8 36.7 28.6 42.6 4.6 5.3 5.7 6.6 공업 57.9 32.4 15.8 34.3 24.4 26.9 28.3 29.4 교통업 65.6 52.5 18.4 44. 2.7 3.1 3.8 4. 농림업 19.3 15.4 3.4 12.5 18.7 15.6 14.3 13.3 수산업 4.6 48.9 25.3 37.9 2. 2. 2.3 2.6 상업 54.2 7.6 15.4 24.1 29.3 31.6 26.9 27.9 잡업 -4.6 79.5 1.8 2.4 2.9 1.9 2.7 2.5 기타 26. 47.5-3.5 21.5 15.5 13.6 16. 13.8 전체 43. 26.1 11.5 26.2 1. 1. 1. 1. 자료: 朝 鮮 總 督 府 財 務 局, 朝 鮮 金 融 年 報 1942 년판. 증가율은 연말 대출액의 전년대비 증가율임. 먼저 납입자본금과 은행대출을 살펴보자. 납입자본금의 증가율은 공업, 광업, 교통업 순으로 높아 1938 년-41 년 기간에 연평균 증가율이 각각 35.1%, 29.8%, 22.6%였고, 은행대출의 증가율은 교통업, 광업, 수산업, 공업 순으로 높아 1939-1941 년 기간에 연평균 증가율이 각각 44.%, 42.6%, 37.9%, 34.3%였다. 그리고 이들 증가율은 기간내에 모두 감소추세였다. 이러한 동향은, 수산업의 대출증가율이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3 두드러졌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공업, 광업, 교통업에 자금이 집중되었던 사업설비자금의 조정결과와 대체로 같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다른 업종에 대한 은행대출의 증가도 적지 않아 농림업을 제외하면 연평균 증가율이 2% 이상이었다는 점과 공업, 광업, 교통업에 대한 대출비중은 1941 년말에도 4%를 초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은행의 전체 대출이 앞서 살펴본 사업설비자금의 조정결과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 내 은행대출에서 설비자금의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4 년 9 월까지 금융기관 사업설비자금 대부의 3% 정도를 담당했던 조선은행의 경우에도 1941 년말 현재 전체 대출 가운데 17.1%만이 설비자금이었다. 결국 기업들은 사업설비자금이 아닌 다른 명목으로 많은 자금을 조달했고, 따라서 不 要 不 急 산업으로 분류된 기업들이 심각한 차입제한에 직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음으로는 자금조정법이 기업의 자금차입에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자. 여기에서는 殖 銀 의 朝 鮮 會 社 事 業 成 績 調 에서 자금조정법 시행 전후에 일관되게 차입금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정표준이 기업의 차입금 규모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검정해 보았다. 우선 자금조정법 시행전 기업의 차입금 규모는 1936 년과 1937 년 하반기 차입금의 평균값을 사용하였다. 1937 년을 시행전에 포함시킨 것은 조선에서 자금조정법 시행규칙의 시행일(1 월 15 일)과 기업들의 결산일을 감안할 때 1937 년 하반기 차입금은 자금조정법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법 시행후 기업의 차입금 규모는 1938 년부터 1941 년까지 하반기 차입금의 평균값을 사용하였고, 이 값을 자금조정법 시행전 차입금 평균값으로 나누어 해당 기업의 차입금지수로 만들었다. 위의 자료에서 이와 같이 차입금지수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46 社 였다. 이들 기업들은 모두 공칭자본금 2 만엔 이상이었고 1 만엔 이상이 38 社 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료로 인해 대기업만이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회사의 목적을 1937 년 조정표준에 따라 구분해 보면 19 社 는 甲 으로, 17 社 는 乙 로, 1 社 는 丙 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정표준이 1938 년 2 월, 1939 년 3 월, 194 년 5 월에 개정되면서 항목들이 격하되거나 격상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분석을 위해서 甲 乙 丙 이 아닌 중요산업 과 비중요산업 으로 분류하였고, 중요산업은 甲 과 乙 (가, 나)를 의미하고 비중요산업은 丙 과 乙 (다)을 의미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조정표준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丙 과 乙 (다)에 속한 업종이 甲 과 乙 (가, 나)로 격상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甲 과 乙 (가, 나)에서 丙 과 乙 (다)로 격하되는 일도 많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기업들을 중요산업과 비중요산업으로 구분하면 28 社 는 전자로, 18 社 는 후자로 분류되었다. 차입금지수의 평균은 중요산업에서 366 이었고, 비중요산업에서 28 이었다. 중요산업의 기업은 1936-37 년을 기준으로 1938-4 년 차입금이 평균적으로 3.7 배 증가했고, 이에 비해 적게 증가했지만, 비중요산업의 기업은 차입금이 2.1 배 증가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요산업과 비중요산업 간에 차입금지수의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t-검정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를 살펴보면 t-통계량 값은 1.6919 이고 단측검정의 p-값이.489 이었다. 유의수준.5 하에서 중요산업 기업들의 차입금지수는 비중요산업 기업들의 차입금지수보다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금조정법의 조정표준이 대기업의 자금차입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31 <표 9> 신설회사의 자본규모별 구성 (단위: 萬 圓, %) 1935 年 1 月 -1937 年 9 月 1937 年 1 月 -1938 年 7 月 1938 年 8 月 -1941 年 9 月 자본규모 회사수 자본금 회사수 자본금 회사수 자본금 数 % 金 額 % 数 % 金 額 % 数 % 金 額 % 5 만엔이상 211 1.3 48,92 84.6 27 5.2 13,98 78. 143 7.1 35,7 67.9 2-5 만엔 148 7.2 3,735 6.5 84 16.1 2,589 14.4 43 2.1 1,3 2.5 1-2 만엔 231 11.2 2,587 4.5 61 11.7 694 3.9 853 42.4 12,851 24.5 3-1 만엔 334 16.2 1,586 2.7 9 17.2 435 2.4 415 2.6 2,93 4. 3 만엔미만 1,133 55.1 979 1.7 261 49.9 229 1.3 557 27.7 615 1.2 합 2,57 1. 57,87 1. 523 1. 17,926 1. 2,11 1. 52,559 1. 자료: 京 城 商 工 會 議 所, 經 濟 月 報 해당년판. 비고: 자본금은 공칭자본금임. 마지막으로 회사설립을 살펴보자. <표 9>는 자본규모별 신설회사의 수와 자본금 합계를 기간별로 보여준다. 시기구분의 기준은 자금조정법의 시행과 시행령의 개정이다. 이에 첫 번째 기간인 1935 년 1 월-1937 년 9 월 은 자금조정법 시행전이고. 두 번째 기간인 1937 년 1 월-1938 년 7 월 은 자금조정법 시행후로서 회사설립의 인가범위가 자본금 5 만엔 이상인 시기이고, 세 번째 기간인 1938 년 8 월-1941 년 9 월 은 시행령 개정으로 그 범위가 2 만엔 이상인 시기이다. 우선 공칭자본금의 규모가 인가범위에 속한 신설회사들은 두 번째 기간에는 전체 설립회사의 수에서 5.2%를, 공칭자본금에서 78.%를 차지하였고, 세 번째 기간에는 각각 9.2%, 7.4%를 차지하였다. 시행령 개정후 회사수에서 그 비중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1%를 초과하지는 않았고, 공칭자본금에서 그 비중은 오히려 감소했다. 다음으로 규모별 회사신설을 기간별로 살펴보자. 첫째, 자본금 5 만엔 이상인 회사는 법이 시행된 두 번째와 세 번째 기간에 전체 신설회사의 수와 자본금에서 그 비중이 감소했다. 둘째, 자본금 2 만엔 이상 5 만엔 미만 회사는 두 번째 기간에 증가했다가 시행령이 개정된 세 번째 기간에는 다시 감소했다. 셋째, 자본금 1 만엔 이상 2 만엔 미만 회사는 두 번째 기간까지 변화가 없다가 세 번째 기간에 급증했다. 그 중에서도 자본금 18 만엔 이상 2 만엔 미만 회사수는 395 개로서 전체 신설회사 수의 19.6%를 차지했다. 이는 18 만엔 이상 2 만엔 미만 회사가 첫 번째 시기와 두 번째 시기 전체 신설회사 수에서 각각.1%와.2%밖에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과 크게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자금조정법은 규모별 회사신설에 영향을 주었다. 인가범위에서 설립된 회사는 회사수와 자본금에서도 모두 비중이 감소하였고, 인가범위보다 조금 작은 규모로 설립된 회사는 그 비중이 급증하였다. 시행령이 개정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상은, 회사설립에 대한 인가율이 가장 낮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편으로는 회사설립을 규제했던 자금조정법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규제를 회피하려고 했던 민간 경제주체들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었다. 4. 맺음말 1937 년 1 월에 조선에서 시행된 臨 時 資 金 調 整 法 은 전시 경제통제에서 핵심적인 법률이었다. 이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32 법률에 의해 조선총독부는 일정규모 이상 회사의 설립, 합병, 설비투자 및 금융기관의 대부를 제약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내에서 진행되는 투자에 대해서 인허가권을 행사하였다. 총독부는 인허가의 기준이 되는 事 業 資 金 調 整 標 準 의 내용을 조선의 경제상황을 반영해 일부 개정하였고, 일본 정부와 협의에 실패해서 승격시키지 못한 사업, 예를 들면 시멘트의 경우에는 不 要 不 急 산업인 丙 으로 유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사업설비투자를 허가해 주는 방식으로 정책의지를 관철시켰다. 총독부는 조정표준을 고려하면서도 개별 투자계획을 검토해 인허가를 결정했고 인허가에 조건을 달아 사업의 진행까지 감독하여 설비와 자금의 유용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인허가 결정에는 자의성이 개재될 여지가 컸지만 선별적으로 특정사업을 제약하거나 육성하려는 총독부의 정책이 반영될 수 있었다. 당시 총독부는 1936 년 朝 鮮 産 業 經 濟 調 査 會 와 1938 년 時 局 對 策 調 査 會 를 통해서 軍 需 관련 基 礎 産 業 을 중심으로 한 生 産 力 擴 充 計 劃 을 확립하였고 이를 일본의 엔블록 생산력확충계획에 반영시키고자 했다. 또한 조선 내 수요에 대응해 移 入 代 替 化 와 自 給 化 를 추구했다. 기업들은 이러한 총독부의 정책방향에 호응해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자본축적과 재생산을 도모했고 총독부는 이들 기업들의 투자계획을 인허가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國 策 金 融 機 關 은 투자자금을 융자하거나 직접 出 資 에 참여해 신속하게 투자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物 資 配 給 과 物 資 動 員 計 劃 ㆍ 生 産 力 擴 充 計 劃 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자 총독부의 인허가도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는 물자동원계획의 범위 내에서 자재를 배급하거나 소요되는 물자를 다음 연도의 물자동원계획에 計 上 하려고 노력하였고, 자재확보를 위해서 日 本 大 藏 省 및 商 工 省 과 협의도 하였지만, 자재를 할당받지 못한 투자는 진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인허가할 수 없었다. 194 년대 이후 생산력확충계획이 重 點 主 義 로 재편되면서 군수산업과 군수관련 기초산업이었던 甲 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에 총독부는 기업의 기술력과 계획의 성공가능성, 기존 실적과 자본규모까지 감안해 선별적으로 인허가를 결정했다. 이는 적극적으로 일본 대기업의 투자를 유치했던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었고, 이러한 변화에 의해서 조선에서 투자를 확대하려던 日 窒, 理 硏, 日 曹 등의 신흥 콘체른은 그 투자계획을 축소하거나 포기해야만 했다. 자금조정법의 인허가율은 법시행 이후 1941 년 9 월까지 조금씩 떨어졌지만 9% 이상이었고, 신청 후에 취하했던 것까지 신청건수에 포함시켜 계산해도 8% 수준으로 여전히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허가율에 근거해 자금조정법이 민간투자를 크게 제약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총독부의 행정지도나 조정표준을 감안해 스스로 투자를 포기한 것과 자금조정법과 연결되어 다른 법령의 인허가를 받지 못한 것들은 인허가율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간 경제주체들은 자금조정법을 회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점은 회사신설에서 확인되었다. 법이 시행되자 인가대상보다 조금 작은 규모로 신설된 회사가 회사수와 자본금에서 그 비중이 급증하였고, 그 결과 인가대상이 아닌 규모로 신설된 것이 전체 신설회사수의 9% 이상을 점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회사설립을 규제했던 자금조정법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 경제주체들의 회피노력이 반영된 것이었다. 결국 회사설립에 대한 자금조정법의 규제는 실질적인 성과를 충분히 거두지는 못하였다.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33 자금조정법에 의한 자금조정 실적을 살펴보면, 사업설비자금은 법시행 이후 1941 년 9 월까지 조종표준의 甲 에 7% 정도가 집중되었다. 이를 산업별로 보면 공업, 광업, 교통업에 9% 정도가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별 자금조정의 실적은 당시 회사 자본금과 은행대출의 산업별 증가율 동향과 일치하였다. 또한 개별 기업들의 자료를 살펴보면 중요산업으로 분류되었던 甲 이나 乙 (가, 나)에 속한 대기업들은 不 要 不 急 산업인 丙 이나 乙 (다)에 속한 대기업들에 비해 자금조정법 시행이후 차입금 증가가 컸다. 법의 취지대로 자금조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만, 연도별 사업설비자금의 규모는 실질적으로 정체되었고 조정표준별, 산업별 집중도도 낮아졌다. 그리고 은행대출에서 사업설비자금의 비중이 작았기 때문에, 조선 내 전체 은행대출에서는 사업설비자금과 같은 산업집중이 나타나지 않았다. 전체 은행대출에서 공업, 광업, 교통업의 비중은 1941 년말이 되어도 4%를 초과하지 않았다. 결국 사업설비자금은 자금조정법에 취지에 맞게 조정되었지만, 기업들은 사업설비자금이 아닌 다른 명목으로 많은 자금을 조달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자금조정법의 통제효과는 제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