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嶺 南 學 派 의 政 治 哲 學 形 成 과 관련하여- 薛 錫 圭 * 1. 머 리 말 4) 理 氣 分 合 論 2. 理 氣 心 性 論 의 대두와 삶의 4.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정치적 의미 철학 형성 1) 士 林 의 정국주도와 朋 黨 論 의 대두 1) 退 溪 南 冥 의 理 氣 心 性 論 과 2) 理 氣 妙 合 論 과 保 合 論 삶의 철학 3) 理 氣 分 對 論 과 君 子 小 人 論 2) 嶺 南 學 派 삶의 철학의 분화 4) 理 氣 隨 乘 論 調 劑 湯 平 論 3. 理 氣 心 性 論 의 발달과 분화 5) 理 氣 分 合 論 과 中 道 蕩 平 論 1) 理 氣 妙 合 論 6) 從 祀 服 喪 論 爭 과 嶺 南 學 派 의 대응 2) 理 氣 分 對 論 5. 맺 음 말 3) 理 氣 隨 乘 論 1. 머 리 말 17세기는 倭 亂 과 胡 亂 으로 초래된 피해를 극복하고 國 家 再 造 를 목표로 한 實 用 的 개혁 방안이 다각도로 모색되는 가운데, 栗 谷 學 派 와 退 溪 學 派 를 중심으로 한 西 人 과 南 人 정치 세력 사이에 成 渾 李 珥 의 문묘종사 문제를 매개로 한 觀 念 的 理 氣 心 性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같은 실용성과 관념성의 이율배반적 양상은 17세기 시대상을 규정하는데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왕조가 성리학적 질서구축을 목표로 한 사회 경제적 변화모색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으로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1) 사림의 정치 사회적 지배체제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號 牌 法 과 大 同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 최근 조선전기 유학사상을 주자성리학으로, 인조반정 이후 유학사상을 조선성리학으로 규정 하여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관점에 입각한 연구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고 하겠다(지두환, 고려말-조선시대 유학사상 연구동향, 韓 國 史 論 28, 국사편찬위원회,
- 72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法 의 실시, 良 役 變 通 의 논의 등 사회 경제적 변화가 추진되는 양상도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2)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체제구축과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은 어 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17세기의 제반 변화와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명은 17세기 사회 경제적 변화의 정치 사상적 배경을 규명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이기심성론은 자연의 변화과정에서 발견되는 법칙성을 인간의 심리현상에 적 용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선초 鄭 道 傳 權 近 등 관학파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도 했으나, 그것은 성리학적 질서수립을 위한 방안모색의 차원에서 불교 등 異 端 에 대한 비판의 논 리로 활용된 측면이 강하였다. 3) 따라서 그것은 성리학적 우주관과 인간관을 접목한 정연 한 이론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같은 한계는 鄭 汝 昌 李 彦 迪 徐 敬 德 등에 의해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으나, 그들 역시 주로 理 氣 論 을 중심으로 자신의 학문적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조선조 성리학의 본격적인 논란거리였던 心 性 論 의 체계를 수립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인성관의 일관성을 지니는 논리적 정합성을 획득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할 수 있게 되는 철학적 전환은 李 滉 과 奇 大 升 사이에 벌어 진 四 七 理 氣 논쟁에서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 결과 그 자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확인하고 한국적 성리학의 철학체계를 수립하는 계 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핵 심적인 이념적 기반으로 규정되는 완결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심성을 자연의 합법칙성에 투영하여 삶의 철학과 방식을 규정함에 있어 경험적 관점에 입각해 해석상 다양한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다시 말 해 조선시대 이기심성론에 대한 관심은 현실의 모순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논 리적 토대를 구축하고, 개인의 삶의 철학과 정치운영 방향의 철학적 근거를 찾는데 주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시대적 상황변화에 따른 可 變 性 과 함께 多 岐 性 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理 氣 는 不 相 離 不 相 雜 의 관계로 理 가 올바르면 氣 는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에 도덕실천이 우선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성리학의 기본 사고체계였다. 그러므로 主 理 論 이 본성을 중시하여 관념적 성격이 강하다거나, 主 氣 論 이 수양에 중점을 두고 있어 현 실성이 두드러진다는 등의 분류방법으로는 이를 통한 정치 사회적 동향을 구조적으로 1998). 2) 고영진, 조선시대 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풀빛, 1999. 3) 柳 仁 熙, 退 栗 이전 朝 鮮 性 理 學 의 發 展 問 題 ( 東 方 學 志 42, 1984).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73 - 설명하는데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사상계의 동향에 대해서는 이같은 主 氣 主 理 論 내지 一 元 二 元 論 의 이분법적 틀에 입각하여 파악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해석방법은 퇴계 율곡학파의 차별적 경향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학파 내부의 다양한 동향을 포괄하여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嶺 南 學 派 의 5) 경우 退 溪 學 派 와 南 冥 學 派 의 연대와 분열, 퇴계학파 내부의 趙 穆 系 와 柳 成 龍 系 의 불화, 仁 祖 反 正 후 山 林 으로 발탁된 張 顯 光 의 出 處 문제, 서인정권에 대응하는 남인공론의 분열, 嶺 南 南 人 과 近 畿 南 人 의 제휴와 분열, 淸 南 과 濁 南 의 분열 등은 이들이 동질적 기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립 내지는 鄕 戰 의 형태로 내부적 갈등 을 겪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6) 그러한 갈등은 영남학파 내부의 단순한 이익갈등이 아니라 그들이 확립하고 있는 삶의 철학과 그들이 지향하는 정치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그것을 규정하는 성리학적 이기심성론의 해석 상 차이가 내부에 작용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고는 17세기 이기심성 논쟁이 정치적 상황변화에 따른 탄력적인 적용방식을 모색하 는 과정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율곡학파에 대응하는 영남학파의 이기심성론 을 그들의 出 處 觀 을 비롯한 정치철학과 연관하여 검토해 봄으로써 그것의 현실적용 양태 와 함께 그들의 분화양상을 추적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최근의 퇴계학 에 관한 연구성과의 정리가 한결같이 새로운 연구방법론 개발을 촉구하고 있는 7) 것에서 도 나타나듯이, 17세기 영남학파의 다양한 정치 사상적 동향을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설 명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데 8) 목적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4) 조남호, 조선에서 주기철학은 가능한가 (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8). 5) 여기에서 嶺 南 學 派 라 함은 退 溪 學 派 와 南 冥 學 派 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물론 선조 광해군대 대북세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남명학파는 仁 祖 反 正 을 계기로 학파를 표방할 수 없게 되고 퇴계학파에 수렴되었다. 그럼에도 영남학파로 지칭하는 것은 남명학파의 철학과 정치적 입장 이 17세기 퇴계학파와 함께 남인세력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퇴계학파 내부의 이질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6) 조선시대 영남사림의 이같은 동향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성과로는 李 樹 健, 嶺 南 士 林 派 의 形 成, 영남대출판부, 1979 및 嶺 南 學 派 의 形 成 과 展 開, 一 潮 閣, 1995 참조. 7) 琴 章 泰, 退 溪 學 연구의 회고와 전망- 哲 學 영역- ( 韓 國 의 哲 學 18,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0). 丁 淳 佑, 退 溪 哲 學 의 唯 物 論 的 해석에 대한 批 判 的 검토 ( 퇴계학연구 4, 단국대 퇴계학연구 소, 1990). 尹 天 根, 李 滉 哲 學 연구의 방법론적 모색 ( 韓 國 의 哲 學 20,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2). 金 鍾 錫, 退 溪 哲 學 연구현황과 비판적 검토 ( 韓 國 의 哲 學 23,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5). 韓 德 雄, 退 溪 學 의 實 證 的 연구방법 모색 ( 退 溪 學 報 89, 퇴계학연구원, 1999). 8) 사상계의 동향과 분화양상을 통한 17세기 시대상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한국역사연구회, 17
- 74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2. 理 氣 心 性 論 의 대두와 삶의철학 형성 1) 退 溪 南 冥 의 理 氣 心 性 論 과 삶의 철학 李 滉 의 제자 曺 好 益 은 그의 스승의 出 處 義 理 에 대해 언급하면서 退 溪 의 出 處 와 去 就 는 추호라도 흐트러지거나 지나치지 않았다. 丁 卯 (1567, 선조 즉위) 년 8월 결연히 물러나 돌아간 것은 평생 출처의 大 節 을 보여준 것이었다. 奇 明 彦 의 지혜는 족히 大 賢 을 알만한 것인데도 時 議 가 분분한 상황에서 의혹을 떨치지 못해 편지로 힐난하기 에 이르렀는가? 사람을 알기란 쉽지 않구나. 9) 며 기대승이 이황의 理 氣 心 性 論 에 이의를 제기한 배경에는 그의 出 處 에 대한 근본적 불 신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변이 성리학적 이 기심성론의 학문적 검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출처의 논리적 토대를 여기에서 찾고 있 는 것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두 사람의 논쟁의 발단은 鄭 之 雲 이 작성한 天 命 圖 를 이황이 검토 하는 과정에서 四 端 發 於 理 七 情 發 於 氣 라 한 것을 四 端 理 之 發 七 情 氣 之 發 이라 수정 하면서 비롯되었다. 理 의 절대적 가치와 함께 그것의 發 用 性 을 인정한 이황의 그같은 논 리가 당시 士 林 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자 그의 해명에도 10) 불구하고 기대승이 이 의를 제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기대승은 그의 第 一 書 에서 사단과 칠정은 모두 理 氣 의 合 인 情 으로 理 와 氣 가 각각 발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理 는 氣 에 내재할 뿐 이기 때문에 氣 를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발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도덕적 규범의 理 는 내면에 잠재하면서 兼 善 惡 의 氣 가 작용할 때 惡 에 흐르지 않도록 제어한다는 것으 로 논리상 원칙에 근거한 탄력적인 현실대응을 정당화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에 세기 전반 조선사상계의 동향과 그 성격, 역사와현실 8, 1992 및 17세기 후반 조선사상 계의 분화, 역사와현실 13, 1994에서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9) 芝 山 集 ( 曹 好 益 ) 권5, 雜 著 退 溪 先 生 行 錄. 10) 高 峰 集 의 年 譜 에 의하면 기대승은 32세 되던 해인 1598년 8월 鄭 之 雲 과 함께 天 命 圖 說 을 講 論 한 바가 있었고, 10월 과거에 합격하자 李 滉 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그는 이 황에게 處 世 에 대해 질의를 하는 한편 이기심성론이 사림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음을 전하 면서 이에 관한 토론을 했으나 견해차만 확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이황은 이듬 해 정 월 기대승에게 자신의 처지와 時 論 의 상충으로 인한 處 世 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논설 은 四 端 之 發 純 理 故 無 不 善 七 情 之 發 兼 氣 故 有 善 惡 으로 보완하면 납득이 될 수 있는지 물었 다. 이로써 보건대 이황은 당시 자신이 四 端 七 情 을 理 發 氣 發 이라 한 것이 사림들 사이에 善 惡 의 극단적인 가치론적 관점에 입각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 다.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75 - 대해 이황은 答 書 에서 理 氣 의 渾 淪 만 고집하고 分 開 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性 卽 氣 의 폐단 에 빠지고 人 欲 을 天 理 로 오해할 수 있는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그의 주장을 수용하기 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理 와 氣 는 不 相 雜 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分 開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不 相 離 이기도 하기 때문에 渾 淪 의 측면도 없을 수 없다며 理 氣 의 分 開 와 渾 淪 의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황은 이 答 書 와 함께 자신의 처세관을 피력하는 내용의 편지를 별도로 기대 승에게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北 宋 代 인물인 胡 安 國 이 出 處 去 就 는 마땅히 자신의 마음 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으로 남과 도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도모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 한 말이 탁견이라 평가하면서, 다만 患 亂 과 平 常 時 를 차례로 만났을 때 이치가 정밀하지 못하고 뜻이 굳세지 못하면 스스로의 결단이 時 義 에 어두워져 마땅 함을 잃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편지에서 處 世 의 어려움은 역시 나의 학문이 지극하지 못한데 있으니 만약 나의 학문이 지극하다면 처신에 반드시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고 했는데 이는 진실로 절실하고 지극한 말 입니다. 보내준 四 端 七 情 說 은 그 만들어진 바가 심오하다고 할 만 합니다. 내가 어리석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高 明 의 학문이 正 大 廣 博 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겠으나 아직 細 密 精 微 의 자세로 투명하게 꿰뚫어 보지는 못한 것같습니다. 그 處 心 制 行 은 대범하고 폭넓은 의지에서 많이 얻었다고 하겠으나 거두어 들여 응집해 확정하는 功 이 결여된 것같습니다. 무릇 선 비가 세상에 태어나 出 과 處, 遇 와 不 遇 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義 를 행함에 돌아갈 뿐으 로 禍 福 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 東 方 의 선비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志 慕 와 道 義 가 있는 자는 환란을 당하여 고통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는 땅이 좁고 사람이 많은 때 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스스로 할 바에 진력하지 않은데 이유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른 바 진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배움이 지극하지 않으면서 너무 높은 곳에서 自 處 하고, 시세를 살피지 않고 經 世 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패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으로 大 名 을 지고 大 事 를 맡은 자가 절실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11) 며 학문적 성취가 없는 현실개혁은 禍 만 자초할 뿐으로 바른 출처의 길은 깊은 철학적 사 유에서 찾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설명은 학문의 천착을 통한 도덕성과 정치 철학의 확립이 결여된 經 世 的 자세가 야기하는 폐단을 환기시킴으로써 理 의 가치우위를 보장함과 동시에 理 氣 의 渾 淪 이 초래하게 될 오류를 경계하는 의미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황이 理 氣 의 分 開 와 渾 淪 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논리로 도덕성을 전 제한 탄력적 出 處 觀 을 제시하면서도 四 端 을 理 發, 七 情 을 氣 發 이라 하여 양극으로 分 對 하 는 것에 대해 여전히 납득하지 않았다. 그는 情 이란 理 氣 를 겸하고 善 惡 이 있는 것으로 11) 退 溪 書 集 成 2 冊, 59 歲 (1559) 篇 答 奇 明 彦 및 退 溪 集 ( 李 滉 ) 권16, 書 答 奇 明 彦.
- 76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四 端 七 情 은 다같이 情 이므로 理 氣 에 나누어 소속시킬 수 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 하며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四 端 七 情 書 1 冊 을 이황에게 보냈다. 그의 지적에 스스 로 논리적 모순을 인정한 이황은 第 一 書 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改 本 을 보내면서 자신의 出 處 觀 을 피력하는 내용의 편지를 기대승에게 다시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出 處 의 自 決 에 앞서 이치가 정밀하고 뜻이 굳건해야 한다는 자신의 出 處 觀 을 재확인하는 한편, 理 氣 와 같이 善 惡 의 分 對 와 渾 淪 으로 빚어지는 병폐가 모두 여 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악을 미워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 힘쓰지 않는 자가 많고, 유순하고 겁많은 자는 서로 경계하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아첨하는 태도만 보일 뿐이라 12) 며 剛 과 柔 일변도의 자세가 갖는 한계를 지 적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치밀한 자세로 이치를 궁구하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만 출처 에 있어 剛 柔 의 탄력적 선택이 가능하다는 자신의 出 處 義 理 를 규정하는 것이자, 그것이 理 氣 를 分 開 하면서 渾 淪 을 인정하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와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을 표방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세상에 나갔을 때 본분과 책임을 다하고 맺고 끊음에 定 則 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도덕적 규범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進 退 의 탄력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이황 의 그같은 자세는 첨부한 四 端 七 情 第 二 書 改 本 에서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그는 義 理 의 학문의 세밀한 점은 마음을 크게 하고 안목을 높여 한 가지 說 로만 고집하지 말고 邪 心 없이 그 뜻의 취지를 살피면 理 氣 가 같은 가운데 다름이 있고 다른 가운데 같음이 있음을 알게 되고, 나누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으며 합해도 서로 섞이지 않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어 한 쪽에 치우침이 없게 된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논지를 전 개한다 13) 고 밝혔다. 여기에서 그는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잘못된 부분을 일일이 수정하 는 성의를 보이면서도 특히 講 學 에 分 析 을 싫어해 一 說 로만 합하려 하는 것은 결과적으 로 氣 로써 性 을 논하고 人 欲 으로 天 理 를 인식하는 폐단을 범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탄력적이고 유연한 出 處 義 理 는 정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이 철학적 논리와 상충된다는 지적에 대해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四 端 理 發 而 氣 隨 之 七 情 氣 發 而 理 乘 之 라며 四 端 七 情 을 매개로 한 理 氣 의 관계를 分 對 를 전제한 隨 乘 의 논리로 수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같이 이황과 기대승의 四 端 七 情 을 둘러싼 논변은 성리학적 이기심성론에 입각한 出 12) 退 溪 書 集 成 3 冊, 60 歲 (1560) 篇 答 奇 明 彦 夫 如 是 士 苟 一 立 於 朝 則 皆 爲 中 釣 之 魚 其 剛 腸 疾 惡 者 多 至 於 不 免 依 阿 巽 懦 者 不 過 相 戒 爲 模 稜 容 悅 之 態 而 已 是 二 者 皆 可 悶 也. 13) 退 溪 書 集 成 3 冊, 60 歲 (1560) 篇 答 奇 明 彦 ( 論 四 端 七 情 第 二 書 ) 및 退 溪 集 권16, 書 答 奇 明 彦 大 抵 義 理 之 學 精 微 之 致 必 須 大 著 心 胸 高 著 眼 目 切 勿 先 以 一 說 爲 主 虛 心 平 氣 徐 觀 其 意 趣 合 而 爲 一 而 實 歸 於 不 相 雜 乃 爲 周 悉 而 無 偏 也 請 復 以 聖 賢 之 說 明 其 必 然.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77 - 處 觀 을 形 而 上 學 的 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왕조존립의 명분을 뒷받침하는 형식적 기능에 그치던 성리학이 우주의 원리와 인성을 접합하여 인간 의 행동규범 및 사회의 가치기준을 규정하는 내용상의 진전을 가져왔음을 의미하는 것이 기도 했다. 이황의 주장은 理 의 가치와 실체를 부정하고 氣 를 위주로 하여 性 情 을 논할 경 우 인욕을 중시하여 그것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전제로 그로 인해 초래되는 도덕과 원칙이 경시되는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 하여 그는 理 의 가치우위를 전제로 한 理 氣 의 分 開 와 渾 淪 의 양면성을 수용하는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며, 그의 出 處 義 理 도 여기에 토대를 두고 확립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純 善 인 理 의 발용성을 인정하여 그것이 兼 善 惡 의 氣 를 지배 통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현 실적으로는 군자 소인의 대립과 군자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황의 이기심성론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純 善 한 本 性 에서 찾고 그 도덕적 주체 에 능동적 힘을 부여하는데 궁극적 목표가 있었다. 그가 理 氣 를 分 對 의 관점에서 파악 한 것은 兼 善 惡 의 氣 에 대한 純 善 한 理 의 상대적 가치를 부각하려는데 있었던 것으로 善 惡 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파악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이기심성론 의 근저에는 이분법적 시각이 엄존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같은 사고체계는 현실적으 로 天 理 와 人 欲, 君 子 와 小 人 의 극단적인 구분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적용될 수 있는 개 연성을 안고 있기도 했다. 己 丑 獄 事 에서 被 禍 된 鄭 介 淸 이 朱 子 가 四 端 은 理 發 이고 七 情 은 氣 發 이라 말한 점을 근거로 理 氣 가 각기 발할 뿐만 아니라 四 端 七 情 이 分 開 된 다 14) 고 규정하는 한편, 天 理 의 公 은 理 에 근본하고 人 欲 의 私 는 氣 에서 생긴다. 理 를 위주로 하는 자는 君 子 가 되고 氣 에 힘쓰는 자는 小 人 이 된다. 天 理 라는 말은 小 人 之 心 과 상반되고 人 欲 이라는 말은 君 子 之 心 과 배치되는 것으로, 兩 者 는 서로 들어갈 수도 없고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되지 않 는다. 이 때문에 君 子 小 人 은 항상 相 反 인 것이다. 天 理 라는 말은 天 理 之 心 과 합치되고 人 欲 이라는 말은 人 欲 之 心 에 합하는 것이니, 이는 곧 君 子 와 小 人 은 각기 그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위에 있는 자가 사람마다 모두 明 德 을 밝힘이 있도록 한다면 어찌 小 人 들이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15) 라 한 것이 그같은 시각을 극명하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16) 14) 愚 得 錄 ( 鄭 介 淸 )권2, 釋 義 論 四 端 七 情 之 發 四 端 七 情 皆 是 性 發 但 四 端 不 暇 思 慮 而 便 發 理 爲 之 主 七 情 則 或 有 所 計 慮 而 引 發 氣 爲 之 主 理 爲 之 主 則 謂 之 理 發 可 也 氣 爲 之 主 則 謂 之 氣 發 亦 可 也 故 朱 子 曰 四 端 是 理 之 發 七 情 是 氣 之 發 也. 15) 愚 得 錄 권1, 論 學 君 子 小 人 相 反 說. 16) 정개청은 처음 徐 敬 德 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氣 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의 관점에 동조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李 彦 迪 李 滉 과 견줄만한 독자적인 논설과 출처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되
- 78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理 氣 를 分 對 하는 태도는 이황도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특히 曺 植 에게서 두 드러지는 측면이 있었다. 조식은 周 敦 頤 와 程 顥 程 頤 이후 저술과 해석을 통한 학맥이 日 星 과 같이 밝아졌다 17) 고 규정하면서도 性 命 義 理 의 궁구에는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그 가 만년에 李 滉 의 학문이 今 文 에 비중을 둠으로써 성취한 바가 있었으나 자신은 古 文 에 치우쳐 이룬 바가 없었다 18) 고 술회한 바와 같이 그의 학문방법이 성리철학 보다는 유학 경전의 탐구를 우선한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학문의 목적이 人 倫 등 인간의 삶의 실천적 규범을 확립하는데 있는 것으로, 유학의 근원적 이해가 결여된 天 理 일변도의 탐구는 자칫 그와 괴리될 수 있다는 경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修 養 工 夫 없이도 모두 聖 人 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心 卽 理 說 을 제기한 陸 象 山 의 학문적 오류는 바로 그러한 단계적인 학문자세가 결여된데서 빚어지게 되었다 19) 는 것이다. 그가 당시의 학자들이 현실의 절실한 문제해결은 제쳐둔 채 高 遠 한 것을 추종하는 학문에 매 달려 있다 20) 거나, 高 談 性 理 로 인해 그 마음에 유용한 것을 얻지 못하고 있다 21) 고 비판 한 것은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그가 程 朱 이후 著 書 가 필요없다 22) 는 태도 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도 그것의 관념성을 비판한 것이라기 보다 그에 입각한 실천철학 의 확립이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가 致 知 에 있어 李 滉 의 박람 광대 함에 미치지 못하지만 궁행 실천의 공부는 심히 독실하여 정신과 기백이 사람을 깨우치 게 하는 점이 있었다 23) 고 평가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조식이 이해하고 있는 성리철학의 성격은 그가 先 賢 의 학문을 傳 習 하면서 그 요지를 近 思 錄 의 체제에 맞추어 정리한 學 記 類 編 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대부 분의 내용이 先 賢 의 語 錄 내지 論 說 로 구성되어 있으나, 특히 여기에 함께 수록되어 있 는 學 記 圖 가운데 자신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心 統 性 情 圖 는 그의 이기심성론의 일단 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에 의하면 性 은 心 이 갖춘 理 이고 情 은 性 의 用 어 朴 淳 은 그를 程 朱 의 嫡 傳 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愚 得 錄 附 錄 下, 困 齋 先 生 行 狀 又 從 遊 徐 花 潭 敬 德 門 下 得 有 異 聞 然 後 平 生 疑 難 慨 然 以 斯 道 自 任 與 晦 齋 退 溪 兩 先 生 其 立 言 行 事 頗 相 發 明 豈 非 猶 興 之 豪 傑 乎 思 菴 語 之 曰 卿 無 可 從 遊 之 士 惟 鄭 介 淸 道 成 德 立 得 程 朱 嫡 傳 爾 其 亟 往 從 之 ). 17) 南 冥 集 ( 曹 植 ) 권5 附 錄, 言 行 總 錄 行 狀 ( 金 宇 顒 ) 濂 洛 以 後 著 述 輯 解 階 梯 路 脉 昭 如 日 星. 18) 南 冥 集 別 集 권2, 言 行 總 錄. 19) 위와 같음 先 生 嘗 與 同 志 之 士 慨 然 曰 今 之 學 者 每 病 陸 象 山 之 學 以 經 約 爲 主 而 其 爲 自 己 之 學 則 不 先 讀 小 學 大 學 近 思 而 做 功 先 讀 周 易 啓 蒙 不 求 之 格 致 誠 正 之 次 序 而 又 必 欲 先 言 性 命 之 理 則 其 流 弊 不 但 象 山 而 已 也. 20) 南 冥 集 권5 附 錄, 言 行 總 錄 墓 碣 銘 ( 成 運 ) 嘗 語 學 者 曰 今 之 學 者 捨 切 近 趨 高 遠 爲 學. 21) 南 冥 集 권5 附 錄, 言 行 總 錄 神 道 碑 銘 ( 許 穆 ) 敎 人 必 隨 人 資 稟 而 激 勵 之 不 開 卷 講 論 曰 今 之 學 者 高 談 性 理 無 實 得 於 其 心. 22) 南 冥 集 권4, 學 記 類 編 下 學 記 跋 程 朱 以 後 不 必 著 書. 23) 東 岡 集 ( 金 宇 顒 ) 권11, 經 筵 講 義 癸 酉 11월 30일.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79 - 이라는 명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心 의 未 發 이 性 이 되고 心 의 已 發 이 情 이 된다. 性 은 다시 본래 不 善 함이 없는 仁 義 禮 智 의 本 然 之 性 과 剛 柔 善 惡 의 上 下 分 別 이 있 는 氣 質 之 性 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情 은 理 가 발한 四 端 과 氣 가 발한 七 情 으로 나누어 지는데 四 端 은 不 善 함이 없으나 七 情 은 善 惡 을 겸하여 中 節 한 것이 善 이 되고 不 中 節 한 것은 惡 이 된다 24) 는 것이다. 결국 그의 이기심성론도 이황과 마찬가지로 性 卽 理 를 전제 로 理 氣 를 分 對 하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황이 작성한 心 統 性 情 圖 는 理 氣 의 分 對 를 전제로 하면서도 隨 乘 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듯이 그들의 理 氣 에 대한 이해방식은 여기에서 차이가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조식은 問 答 의 방식으로 理 氣 가 二 物 로 先 後 가 있으며 理 는 氣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현한다 25) 는 논리를 구체화함으로써 理 의 가치우위와 發 用 性 을 전제로 한 도덕적 규범의 절대성을 확인하고 있기도 했다. 理 氣 를 分 開 하여 대립적으로만 파악하는 조식과 그것을 分 開 하되 隨 乘 의 관계로 파악 하는 이황의 그같은 이기심성론의 미묘한 차이는 그들의 성품과 출처가 비교되는 근원적 토대가 되었다. 조식의 敬 을 통한 엄격한 자기수양과 義 를 토대로 한 확고한 出 處 義 理 는 바로 理 의 절대적 가치를 보장한 가운데 理 氣 를 分 對 하는 이분법적 사고체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안으로 밝혀야 할 것이 敬 이고 밖으로 단호해야 하는 것이 義 26) 라며 항 상 山 天 齋 窓 壁 에 敬 義 두 字 를 써놓는 한편, 그것을 각각 상징하는 방울과 칼을 몸에 지니고 內 外 를 관통하는 剛 毅 直 方 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사람을 대할 때도 善 人 은 반기는 기색을 보였지만 惡 人 일 경우 원수를 보듯이 피했다 27) 고 할 정도로 好 惡 의 태도를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그와 긴밀하게 교유했던 成 運 은 그에 대해 端 巖 直 方 剛 毅 精 敏 의 자세로 그 품행이 확고하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28) 고 평가했고, 申 季 誠 역시 그의 方 巖 淸 峻 의 성품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許 交 함이 드물었다 29) 고 회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직선적 성품이 확고하면서도 배타적인 出 處 觀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그 는 고금의 인물을 평가할 때 먼저 그 出 處 를 살핀 후 行 事 得 失 을 따졌고, 30) 죽기 전에도 24) 南 冥 集 권3, 學 記 類 編 上 心 統 性 情 ( 林 隱 程 氏 復 心 亦 有 一 圖 ). 25) 南 冥 集 권3, 學 記 類 編 上 論 道 之 統 體 問 理 在 先 氣 在 後 曰 理 氣 本 無 先 後 但 推 上 去 時 却 如 理 在 先 氣 在 後 相 似 又 問 理 在 氣 中 發 見 處 如 何 曰 陰 陽 五 行 錯 綜 不 失 便 是 理. 26) 南 冥 集 권5, 銘 佩 劍 銘. 27) 南 冥 集 別 集 권2, 言 行 總 錄 先 生 聞 人 之 善 喜 動 於 色 若 已 有 之 聞 人 之 惡 恐 或 一 見 避 之 如 仇. 28) 大 谷 集 ( 成 運 ) 下, 碣 銘 南 冥 先 生 墓 碣 公 天 資 英 達 器 宇 高 嶷 端 嚴 直 方 剛 毅 精 敏 操 履 果 確 動 循 繩 墨 目 無 淫 視 耳 無 側 聽 莊 敬 之 心 恒 存 乎 中 惰 慢 之 容 不 形 于 外. 29) 松 溪 實 紀 ( 申 季 誠 ) 下, 疏 章 請 幷 享 新 山 書 院 疏 至 於 南 冥 方 嚴 淸 峻 擧 一 世 許 人 盖 寡. 30) 위와 같음 先 生 深 以 出 處 爲 君 子 大 節 泛 論 古 今 人 物 必 先 觀 其 出 處 然 後 論 行 事 得 失.
- 80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鄭 仁 弘 金 宇 顒 鄭 逑 등 제자들에게 士 君 子 의 大 節 은 오직 출처에 있을 뿐이라 31) 며 出 處 義 理 를 특히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 자신 용을 잡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희생 을 잡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듯이 王 道 政 治 를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은 覇 道 政 治 를 하는 나 라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라 32) 며 戚 臣 政 權 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金 孝 元 에 게 오늘날의 時 俗 은 오염되고 훼손된 것이 심하니 천길 절벽처럼 우뚝하게 서서 머리가 쪼개지고 四 肢 가 분해되더라도 시속에 따라 변하지 않은 뒤에야 吉 人 이 될 수 있을 것이 다 33) 며 不 義 와의 타협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반면 이황이 평소 보여주는 외형상 풍모는 조식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鄭 惟 一 은 그의 성품에 대해 너그럽되 절제가 있었고 조화가 있되 휩쓸리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사납지 않아 순수하기가 良 金 美 玉 과 같았고 광명정대하기는 靑 天 白 日 과 같았다 34) 고 회고 했다. 또한 李 國 弼 은 그가 남들과 다투지는 않았지만 大 夫 들과는 반드시 정색을 하여 끝 까지 따져 是 非 를 가려내고야 말아 권력과 타협하기를 거부했음을 강조하는 한편, 不 仁 을 보면 미워하되 성내지 않는 처신의 방법을 가르쳤다 35) 고 회상했다. 이로써 보건대 이황 은 내면적으로는 持 敬 을 통해 확고하고도 엄격한 삶의 철학을 확립하면서도 외면적으로 는 온유하고 포용적인 인상을 보여주는 剛 柔 兼 全 으로 外 柔 內 剛 하는 양면을 겸비하고 있 었던 것이다. 이황의 그러한 탄력적 인품은 그의 出 處 觀 의 형성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그는 관 직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나아가는 것이 恭 順 한 것이고,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나아 가지 않는 것이 恭 順 한 것이라며 出 處 에도 탄력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출처관은 出 과 處 의 양면을 모두 인정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는 한편으로 양면에 모 두 철저하지 못한 일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던 36)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황 도 그러한 비판을 의식하여 스스로도 자신의 進 退 에 앞과 뒤가 달랐음을 인정하면서도 관직이 낮을 때 임금이 부르면 달려갔지만 높은 관직에 부를 때는 사양했고, 가더라도 굳 이 머물려하지 않았던 것은 주어진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出 處 의 大 義 를 돌아보지 않고 임금의 은혜를 내세워 물러나지 않는 것은 31) 來 庵 集 ( 鄭 仁 弘 ) 권12, 雜 著 南 冥 先 生 病 時 事 蹟 又 語 仁 弘 及 顒 逑 曰 汝 等 於 出 處 粗 有 見 處 吾 心 許 也 士 君 子 大 節 惟 在 出 處 一 事 而 已. 32) 南 冥 集 권4, 雜 著 嚴 光 論 屠 龍 之 技 不 入 於 犧 庖 佐 王 之 足 不 踐 於 伯 都. 33) 南 冥 集 권3, 書 答 金 仁 伯. 34) 文 峯 集 ( 鄭 惟 一 )권4, 雜 著 退 溪 先 生 言 行 通 述. 35) 退 溪 全 書 言 行 錄 권2, 類 編 起 居 語 黙 之 節 先 生 與 衆 人 言 和 說 無 諍 與 大 夫 言 未 嘗 不 正 色 極 言 辨 之 問 見 人 之 不 善 輒 加 矜 憐 而 不 怒 如 何 先 生 曰 是 或 一 道 惡 不 仁 亦 公 天 下 之 心 要 當 幷 行 爲 可 耳. 36) 李 秉 烋, 退 溪 李 滉 의 家 系 와 生 涯 ( 韓 國 의 哲 學 1, 경북대 퇴계연구소, 1973).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81 - 군신관계가 道 義 가 아닌 爵 祿 으로 맺어진 때문이라 37) 비판했다. 이에 따라 李 德 弘 도 그 가 道 에 만족해서 세상을 鄙 陋 하게 여긴 것이 아니고 出 과 處 의 사이에서 열심히 노력했 다며, 聖 賢 의 출처는 時 運 의 盛 衰 에 관계되는 것이지 人 力 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38) 고 옹 호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進 退 를 반복한 것은 척신정권의 파행적 정국운영이라는 현실 적 상황에 의한 것으로 내면적으로는 확고한 出 處 大 義 를 확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식의 內 外 를 관통하는 剛 毅 直 方 의 성품과 출처관은 剛 柔 를 兼 全 한 이황의 그것들과 비교가 되는 것으로, 이는 그들이 갖는 세계관과 인성관을 현실에 투영하면서 나타난 것 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관 인성관은 성리학적 이기심성론의 독자적 해석에 의해 형 성된 것으로, 그같은 차이는 그들이 氣 에 대한 理 의 상대적 가치를 보장하되 그것의 分 開 에 비중을 두는 理 氣 分 對 論 의 입장과 그것의 渾 淪 을 일정하게 수용하는 理 氣 隨 乘 論 의 시 각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시각차는 己 卯 士 禍 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서도 부 분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조식은 기묘사림의 道 學 政 治 가 실패한 원인은 趙 光 祖 의 학 문 처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己 卯 士 林 들이 형세를 살피지 않고 급진적인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라 39) 며 先 見 之 明 이 부족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이황은 士 禍 의 원인은 조광조에게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조 광조는 비록 타고난 자질이 있었으나 학문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는 일에 지나침이 있었 는데, 만약 그가 학문에 충실하고 德 器 가 이루어진 뒤에 세상에 나아가 개혁을 추진했더 라면 성공여부는 쉽게 헤아릴 수 없었으리라 40) 는 것이다. 그같은 차이에는 己 卯 士 林 의 극단적인 君 子 小 人 論 에 입각한 至 治 主 義 이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조식의 분대론적 관점과, 그것을 理 氣 의 지나친 分 開 가 초래한 역사적 시행착오로 간주하는 이황의 수승론 적 관점이 각각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조식과 이황의 이기심성론은 척신정치가 야기한 현실의 모순구조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마련된 것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적용방식에 있어 朱 子 의 논리를 토대로 善 惡 의 이분법적 구조를 고수하려는 조식과 그 속에서 탄력적 방안을 모색해 보 려는 이황의 상이한 자세로 인해 해석상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서 조식이 程 朱 以 後 不 必 著 書 의 자세를 견지하며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변을 전개하고 있던 이황에게 天 理 를 논하는 것은 세상을 속이고 명망을 훔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며 그에 앞서 37) 退 溪 全 書 言 行 錄 권3, 類 編 出 處. 38) 艮 齋 集 ( 李 德 弘 ) 권7, 雜 著 與 李 浚 問 答 以 愚 觀 之 則 吾 先 生 不 以 有 道 自 許 不 以 行 道 自 期 常 守 不 足 之 懷 以 期 無 過 之 域 然 而 聖 賢 之 出 處 關 時 運 之 盛 衰 非 人 力 之 可 及 矣. 39) 東 岡 集 권17, 行 狀 南 冥 先 生 言 行 錄. 40) 退 溪 全 書 言 行 錄 권5, 類 編 論 人 物 嘗 曰 趙 靜 庵 天 資 信 美 而 學 力 未 充 其 所 施 爲 未 免 有 過 當 處 故 終 至 於 敗 事 若 學 力 旣 充 德 器 成 就 然 後 出 而 擔 當 世 務 則 其 成 就 未 易 量 也.
- 82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청소하는 방법부터 가르칠 것을 41) 촉구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주자에 의해 확립된 이기분 대론의 실천적 수용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그가 평소 天 上 의 이치를 말 하는 자의 행실이 無 知 한 사람보다 오히려 못하다고 개탄하며, 입으로 性 理 를 말하고자 한다면 남에게 지지 않을 것이지만 오직 말하기 싫을 뿐이라 42) 고 하듯이 이기심성론의 논변 자체에 대한 의도적 기피의 태도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實 踐 躬 行 의 자세도 성리학적 이념의 현실적용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것의 부정을 전 제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황도 조식의 그같은 지적을 제자들에게 환기시키며 종신토록 명심하도록 당부하는 43) 한편 기대승과의 논변도 더 이상 전개하지 않았는데, 이는 논쟁이 비록 그의 경험적 토대에서 전개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갖는 思 辨 性 과 함께 그 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주자의 이기심성론과의 논리적 상충을 우려한 때문 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기대승과의 논변과정에서 정립한 이기수 승론적 시각과 그에 입각한 출처의 자세는 포기하지 않았다. 2) 嶺 南 學 派 삶의 철학과 분화 조식의 理 氣 分 對 論 과 이황의 理 氣 隨 乘 論 은 다같이 그들의 학풍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삶의 철학 형성과 정치 사회적 문제해결의 방법을 모색하는 이념적 근간으로 자리잡게 되었지만, 그것의 논리구조상 차이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차별적 경향 뿐만 아니라 각 학파 내부의 多 岐 性 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식을 포함한 분대론자의 경우 그것의 이론적 궁구에 대하여는 전반적으로 소극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같은 양상 은 분대론의 이분법적 가치구조가 갖는 논리적 단순성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식의 철학적 논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상당한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 그의 외손서이자 제자인 김우옹이 讀 書 錄 을 작성할 때 7 卷 2 附 가운데 理 氣 에 관한 것이 3권을 차지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으나, 44) 그것이 현재 전하지 않는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나아가 여기에는 선조 22(1589)년에 일어난 己 丑 獄 事 에 崔 永 慶 金 宇 顒 鄭 仁 弘 이 鄭 汝 立 과 함께 湖 南 에서 理 氣 分 對 論 의 이론적 기반 을 제공하고 있던 鄭 介 淸 등과 연루됨으로써 45) 정치적으로 곤경을 겪게 되는 상황도 간 41) 南 冥 集 권3, 書 與 李 退 溪. 42) 南 冥 集 권2, 書 與 吳 御 史 書 手 不 知 洒 掃 之 節 而 口 談 天 上 之 理 夷 考 其 行 則 反 不 如 無 知 之 人 此 必 有 人 譴 無 疑 矣 僕 平 生 不 執 他 技 只 自 觀 書 而 已 口 欲 談 理 豈 何 於 衆 人 乎 猶 不 肯 屑 有 辭 焉. 43) 退 溪 書 全 書 3 冊, 62 歲 (1562) 篇 答 李 剛 而. 44) 東 岡 集 別 集, 讀 書 錄 此 吾 少 時 手 抄 極 草 率 不 可 觀 然 以 其 用 力 辛 勤 故 不 忍 毁 棄 置 諸 篋 中 以 備 考 覽 焉. 45) 정개청의 남명학파와의 학문적 유대는 그가 徐 敬 德 의 제자였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가 스승의 氣 를 위주로 한 관점에 평생동안 의혹을 가졌던 사실에 비추어 理 의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83 - 과될 수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들이 비록 이기분대론의 논리적 구조화에 대하여는 소 홀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입각한 삶의 철학은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 식의 제자로 義 를 상징하는 칼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진 정인홍의 성품과 출처에서 극 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理 氣 分 對 論 的 시각을 견지한 정개청의 성품이 篤 實 하고 뜻이 굳고 확연한 것으로 평가 된 46) 만큼이나 鄭 仁 弘 역시 단호한 성품과 확고한 출처의리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조 식의 端 嚴 直 方 剛 毅 精 敏 한 기질을 계승하여 스스로도 편벽되고 막혔다고 실토할 47) 정 도로 剛 淚 自 用 48) 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조식이 方 嚴 淸 峻 의 성품으로 인해 다 른 사람과 許 交 함이 드물었다고 하듯이 그 역시 과격하고 극단적인 성품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했다. 史 臣 은 말한다. 仁 弘 의 효성은 하늘에서 나왔으며 品 行 이 강직하고 방정하다. 어려서부터 南 冥 을 스승으로 따랐는데, 남명이 그의 됨됨이에 대해 말하기를 德 遠 이 있는 한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고 했다. 인홍 역시 그를 尊 信 하여 학문에 전념하였고 앉아서 독서하기를 밤을 낮으로 삼았으며 청렴하고 위엄을 갖추고 있어 다른 사람과는 잘 화합하지 못했다. 尙 義 嫉 邪 하는 마음은 시종 동요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의논할 때에는 칼로 물건을 자르듯이 분 명했다. 어떤 사람의 義 에 어긋난 행동에 대해 들으면 高 官 大 爵 이라도 奴 처럼 비루하게 여 기고 원수처럼 미워했다. 비록 名 儒 碩 士 라 불리고 본래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더라도 조금 이라도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며 분별없이 남의 말에 찬동하는 작태가 있으면 절교하여 말도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개탄하여 病 이라 했다. 49) 정인홍의 이러한 성품은 그의 단호한 出 處 義 理 의 형성에 그대로 투영되었지만, 이는 이분법적 가치구조를 정당화하는 理 氣 分 對 論 의 관점이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라 하겠다. 조식을 중심으로 한 嶺 南 의 南 冥 學 派 는 理 氣 分 對 論 의 철학체계를 매개로 하여 정개청 을 중심으로 한 湖 南 의 困 齋 學 派 와 교감할 수 있었다. 그들의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체 계는 현실적으로 君 子 小 人 의 분별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으로 己 丑 獄 事 에서 다같이 禍 절대적 가치를 전제로 한 이기분대론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西 人 세력 이 정여립과 정인홍이 유대를 갖고 있었고 정개청이 다시 정여립과 교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 宣 祖 實 錄 권23, 22년 12월 丁 亥 ) 점으로 미루어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김우옹도 정개청의 핵심제자인 羅 德 峻 德 潤 등과 긴밀한 관계 를( 東 岡 集 遺 集, 附 錄 及 門 錄 ) 유지함으로써 獄 事 에 연루되기도 했다. 뒤에 정개청을 제향한 紫 山 書 院 이 西 南 人 의 정권교체에 따라 置 廢 를 반복하게 되는 것은 金 東 洙, 16~17세기 湖 南 士 林 의 存 在 形 態 에 대한 一 考 察, 歷 史 學 硏 究 7, 1997) 그같은 사정을 뒷받침한다. 46) 愚 得 錄 附 錄 下, 困 齋 先 生 行 狀 先 生 天 資 篤 實 立 志 堅 確. 47) 來 庵 集 권5, 疏 箚 封 事 辭 都 憲 疏 臣 則 性 本 偏 滯 又 無 他 技 無 意 仕 進 安 分 田 廬 而 已. 48) 宣 祖 修 正 實 錄 권7, 6년 5월. 49) 宣 祖 實 錄 권211, 40년 5월 丁 丑.
- 84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를 입는 원인이 되기도 했으나, 광해군대 그들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도 했다. 그러나 大 北 政 權 의 전제에서 나타나는 바와같이 그것은 배타적인 一 黨 專 制 를 초 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한계는 이미 선조대 金 宇 顒 과 鄭 逑 가 퇴계학파의 수승론자와 교유하면서 극단적 분대론자와 차별화 경향을 보이게 50) 됨에 따라 극복의 조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는 남명학파 내부의 수승 적 분대론자와 퇴계학파 수승론자의 교감을 통한 연대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라는 점에 서 주목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와 함께 조목 이덕홍이 정인홍계와 일정한 유대를 견지하 고 있었던 것에서 나타나듯이 퇴계학파 내부의 분대적 수승론자와 남명학파 분대론자의 교감도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있기도 했다. 이황의 이기심성론은 기대승과의 논변을 거치며 隨 乘 論 으로 정리되기는 했지만, 그 근 저에는 역시 分 對 論 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퇴계학파 내부에서도 그들의 현실인식 과 出 處 觀 에 따라 分 對 와 隨 乘 에 비중을 두는 시각차가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전자 의 경우 성리학의 본연에 충실함으로써 성리학적 원칙을 중시하며 그에 반하는 현실적 상황과는 타협을 거부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성리학에 대한 현학적 이해를 통해 탄력적 인 현실적응의 방향을 모색하는 입장으로 각기 상이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퇴계학파 내부의 분화양상은 성리학의 이해에 따른 학문적 견해차이에서 비롯되고 있었 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갖는 학문적 이해를 자신의 현실인식과 출처관에 투영해 적용하 는 과정에서 야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같은 양상은 趙 穆 과 柳 成 龍 의 학문태도와 출처관 의 차이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이황의 성리학적 우주론과 인성론을 형성하는 근저에는 心 學 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이 자리잡고 있었다. 51) 그는 서울에 유학하면서 眞 德 秀 의 心 經 을 얻어 보고서 비로소 성 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 책을 四 書 와 近 思 錄 의 아래에 두지 않았을 52) 뿐만 아 니라, 小 學 近 思 錄 心 經 가운데 초학자가 학문을 시작하는데 읽어야 할 책으로 심 경 만큼 적절한 것은 없다 53) 고 할 정도로 평생 이를 尊 信 하고 있었다. 의 그같은 신뢰는 그것을 註 解 한 程 敏 政 의 깊이 연구하는 한편 닭이 울면 일어나 그것을 암송했다 54) 고 한다. 心 經 에 대한 그 心 經 附 註 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그는 이를 50) 燃 藜 室 記 述 別 集 권14, 文 藝 典 故 學 問 嶺 南 則 退 溪 李 滉 南 冥 曺 植 門 脈 頗 異 南 冥 高 弟 鄭 寒 岡 逑 金 東 岡 宇 顒 爲 最 而 聲 價 皆 不 及 鄭 仁 弘 兩 岡 兼 宗 退 溪 故 稍 異 於 仁 弘. 51) 이황의 心 學 에 대한 이해와 체계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으로는 金 鍾 錫, 退 溪 心 學 硏 究, 영남대 박사학위논문, 1996가 있어 참고가 된다. 52) 退 溪 集 권41, 雜 著 心 經 後 論. 53) 退 溪 全 書 言 行 錄 권1, 類 編 讀 書. 54) 退 溪 全 書 言 行 錄 권1, 類 編 學 問 先 生 居 陶 山 玩 樂 齋 鷄 鳴 而 起 必 莊 誦 一 遍 諦 聽 之 乃 心 經 附 註 也.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85 - 趙 穆 도 心 經 을 읽기를 좋아해 일생동안 勤 苦 受 用 의 경지로 삼으며 經 傳 에서 유래 한 諸 儒 의 說 을 神 明 과 같이 믿고 嚴 師 와 같이 공경하여 晝 誦 夜 讀 으로 心 을 이해하는데 힘썼다고 할 정도로 心 學 의 탐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는 특히 心 經 附 註 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尊 德 性 에 편중되어 道 問 學 을 소홀히 한 탓도 있었지 만, 저자인 정민정이 試 官 으로 재직하는 동안 돈을 받고 문제를 알려준 적이 있는 등 權 力 利 害 와 타협하려는 心 事 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55) 고 본 때문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정민정이 주자학을 존숭하면서도 陽 明 學 과의 타협을 모색한 이른바 朱 陸 和 合 을 지향하는 태도가 56)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는 明 代 朱 陸 和 合 의 풍조를 비 판하며 排 陸 崇 朱 를 표방한 陳 建 의 學 蔀 通 辯 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의 자세를 보여주었 다. 57) 그는 廬 江 書 院 에서 이를 다른 사람들과 講 論 하면서 항상 이것이 유교와 불교의 歸 着 處 및 朱 子 와 陸 象 山 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고 극찬했다. 李 德 弘 도 그의 心 圖 에서 학부통변 이 性 은 道 心 이고 知 覺 은 人 心 이라 하는 등 학문체계에 오류가 없지 않 지만, 義 理 가 분명하고 이치를 드러냄이 정당하여 邪 說 을 물리치고 正 學 을 보호하여 斯 道 를 위해 크게 공을 세웠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58) 이에 반해 柳 成 龍 은 程 朱 이외의 글을 읽지 않는 학자들의 배타적 자세를 비판함과 동시에 心 經 近 思 錄 에만 집착하는 풍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여기에 매진하는 학자의 경우 곧 나태해져 初 心 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 뿐만 아니라 명예를 구하는 데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59) 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心 이 비록 一 身 의 가운데 있으면서 천하의 이치를 관장하고 우주의 사이에 心 의 境 界 가 아님이 없으 나 근본적으로 出 入 이 없다 60) 고 이해하고 있는 바와같이, 그것이 성리학의 원론적 측면 을 설명할 수 있을 뿐 현실의 다양한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 55) 月 川 集 ( 趙 穆 ) 附 錄, 行 狀 好 讀 心 經 爲 一 生 勤 苦 受 用 之 地 而 於 篁 墩 附 註 尤 致 意 常 怪 其 於 四 書 之 說 不 專 用 朱 子 本 註 而 附 以 他 說 又 疑 末 章 之 論 偏 於 尊 德 性 而 以 道 問 學 爲 不 足 事 先 生 且 讀 且 疑 而 及 讀 皇 明 通 紀 見 篁 墩 賣 題 勢 利 之 誚 著 道 一 篇 之 說 始 知 其 爲 人 爲 學 於 名 利 上 未 能 擺 脫 得 去 而 陷 溺 於 江 西 禪 寂 之 弊. 56) 中 國 明 代 心 學 의 동향과 退 溪 心 學 과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周 月 琴, 性 理 文 化 에 대한 退 溪 心 學 의 思 想 的 寄 與, 退 溪 學 10, 안동대 퇴계학연구소, 1999 참조. 57) 月 川 集 附 錄, 行 狀 陳 淸 瀾 建 著 學 蔀 通 辨 深 斥 陸 學 爲 道 學 之 豊 蔀 先 生 與 學 者 讀 其 書 曰 淸 瀾 所 著 人 心 道 心 圖 說 與 朱 子 所 論 不 合 其 於 大 頭 腦 處 看 得 不 破 未 知 其 學 爲 如 何 而 於 朱 陸 之 辨 其 勤 如 此 此 實 朱 子 之 忠 臣 也. 58) 艮 齋 集 권7, 雜 著 陳 淸 瀾 學 蔀 通 辯 心 圖 說 辯. 59) 西 厓 集 ( 柳 成 龍 ) 권15, 雜 著 釣 名 說 於 是 一 時 之 士 爭 自 淬 礪 紛 然 向 學 庠 序 閭 巷 間 非 程 朱 之 書 不 讀 心 經 近 思 錄 盛 行 於 世 旣 而 耆 老 淪 沒 時 向 漸 變 而 前 日 所 謂 向 學 之 士 漸 以 日 怠 不 能 繼 初 心 世 遂 以 心 經 近 思 錄 爲 釣 名 之 餌 至 於 近 日 則 絶 無 學 習 者 聖 賢 垂 世 立 敎 之 書 幾 於 全 廢 良 可 歎 也. 60) 西 厓 集 권15, 雜 著 心 無 出 入.
- 86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었다. 그가 思 를 학문의 근본으로 제시한 61) 것도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는 聖 賢 之 學 은 思 를 위주로 하고 있으며 思 가 아니면 口 耳 之 學 에 불과한 것으로, 많은 책을 읽어 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은 때문으로 보았다. 나아가 그는 思 字 를 破 字 하면 田 과 心 이 되듯이 그것은 농부가 농토를 경작하는 심정과 마찬가 지로 마음의 밭을 경작하고 다스리는 것과 같다 62) 는 점을 강조하며 思 의 실용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같이 그의 학문태도는 성리학의 근원적 이해에 매진한 조목 이덕홍과는 달리 그것 의 활용처를 염두에 둔 經 世 的 측면을 중시하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무릇 帝 王 之 學 은 經 綸 을 귀하게 여겨 반드시 本 末 을 아울러 거론하고 體 用 을 함께 갖추어 야 한다. 안으로 心 神 과 性 情 의 미묘함에서부터 밖으로 政 事 를 시행함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 조리에 맞게 精 粗, 巨 細 에 하나라도 관통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크게는 經 綸 이 天 地 四 方 에 미치고 작게는 추호라도 부지런히 노력한 뒤에라야 바야흐로 明 體 適 用 의 學 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有 體 無 用 이란 비웃음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63) 며 학문의 목표가 體 만 있고 用 이 없는 사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本 末 과 體 用 을 포괄 하는데 있는 것임을 강조한 것도 그같은 차별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 한 경향에는 陽 明 學 의 영향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판단되기도 64) 하지만, 그의 수승 론적 이기심성론과도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유성룡은 天 地 의 사이는 理 와 氣 뿐으로 理 는 氣 가 아니면 형상화할 수 없고 氣 는 理 가 아니면 생겨날 수 없다고 하여 理 氣 不 相 離 의 관점에서 일단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인정하 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면서 둘이 되고 둘이면서 넷이 되는 방법으로 수많은 자연의 象 數 는 氣 가 理 를 매개로 하여 나타나게 된다 65) 며 理 가 氣 로 되거나 氣 가 理 로 되는 법 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理 氣 의 가치론적 구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理 는 是 非 可 否 와 같이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불변의 가치이고, 氣 는 消 長 通 塞 盛 衰 强 弱 과 같이 수만 가지로 갈라져 일정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 문에 聖 人 은 理 만을 말하고 氣 를 말하지 않은 것으로 理 를 보존하면 天 德 이 되고 理 를 행하면 天 道 가 되는 만큼 理 로 일관할 때 하늘을 거역하지 않게 된다 66) 는 것이다. 나아 61) 금장태, 西 厓 柳 成 龍 의 哲 學 思 想 ( 韓 國 의 哲 學 23,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5). 62) 西 厓 集 권15, 雜 著 學 以 思 爲 主. 63) 西 厓 集 권8, 啓 辭 柳 祖 訒 上 疏 回 啓. 64) 李 樹 健, 西 厓 柳 成 龍 의 學 問 과 學 脈, 韓 國 의 哲 學 23,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5. 65) 西 厓 集 권13, 雜 著 河 圖 洛 書 眞 有 是 耶 聖 人 以 神 道 設 敎 天 地 之 間 理 與 氣 而 已 理 非 氣 不 形 氣 非 理 不 生. 66) 西 厓 集 권13, 雜 著 許 魯 齋 論 予 所 否 者.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87 - 가 그는 理 가 있으면 氣 가 있게 되고 氣 가 있으면 象 이 있게 되며 象 이 있으면 數 가 있 게 된다며 우주의 근원에서 현상에 이르는 과정을 理 氣 象 數 의 단계로 설명함으로써 67) 理 氣 不 相 雜 의 시각에서 理 의 발용성과 함께 그것의 절대적 우위를 보장하고 있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理 氣 에 대한 설명은 이황에 의해 확정된 理 氣 隨 乘 論 을 충실하게 수 용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體 用 的 경세관을 형성하는 논리적 근거도 여기에서 마련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趙 穆 이 학자의 心 事 가 올바르고 出 處 가 분명해야 학문적 순수성이 보장될 수 있 다는 입장에서 성리학의 근원적 이해에 매진했다면, 柳 成 龍 은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는 處 事 를 중시하여 성리학의 가변성을 전제로 한 현실적용의 탄력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입장 을 보여주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이 갖는 현실대응의 태도와 불가분의 관 계에 있는 것으로 그들의 出 處 觀 의 형성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조목은 心 學 의 깊은 천착을 통해 內 外 를 관통하는 곧은 자세를 유지하는데 매진함으로 써 剛 柔 를 兼 全 하면서도 剛 毅 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陶 山 書 院 에 配 享 될 당시 守 志 林 泉 篤 志 不 懈 68) 라 하여 평생동안 지조를 굳건히 지키며 山 林 으로서의 풍모를 지 켰다고 평가된 것은 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許 衡 의 사람됨을 논하면서 그가 聰 明 博 學 하고 躬 行 實 踐 함이 있었으나 元 에 벼슬하며 시류와 타협했던 점을 개탄하며 士 君 子 의 出 處 의 어려움을 토로함으로써 69) 상대적으로 出 處 義 理 에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려 했 다. 그리하여 그는 忠 이란 나라를 위해 죽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罪 란 權 奸 에 아부하는 것만큼 심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곧 君 子 小 人 의 극치라고 규정하는 한편, 군자이면서 후세에 重 罪 를 지게 되는 것은 군자의 비극이며 소인이면서 후세에 重 名 을 얻는 것은 군 자의 痛 憤 으로 그같은 오류를 초래하는 行 事 의 평가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할 것임을 70) 강조하기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盈 德 縣 令 을 辭 職 하는 상소에서 宣 祖 에게 狂 直 之 士 와 忠 讜 之 言 을 적극 수용하고 好 惡, 賞 罰 을 분명히 할 것을 71) 촉구한 것도 그러한 배경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에 반해 유성룡은 온후하면서도 의연하여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기상을 갖추고, 67) 西 厓 集 권13, 雜 著 河 圖 洛 書 眞 有 是 耶 聖 人 以 神 道 設 敎. 68) 月 川 集 年 譜, 癸 丑 ( 光 海 君 5:1613). 69) 月 川 集 附 錄, 行 狀 論 許 魯 齋 之 爲 人 曰 平 仲 聰 明 博 學 躬 行 實 踐 發 明 斯 道 甚 有 力 只 恨 仕 於 穢 朝 事 耳. 70) 月 川 集 권6, 論 荀 彧 論 論 曰 忠 莫 大 於 死 國 而 罪 莫 甚 於 附 姦 此 君 子 小 人 之 極 致 也 嗚 呼 以 君 子 之 極 致 而 負 重 罪 於 後 世 君 子 之 所 深 悲 也 以 小 人 之 極 致 而 獲 重 名 於 後 世 君 子 之 所 痛 憤 也 然 則 吾 何 以 斷 之 求 之 行 與 事 而 已. 71) 月 川 集 권2, 疏 甲 申 辭 職 疏 又 恢 弘 大 度 天 覆 地 載 包 容 狂 直 之 士 延 納 忠 讜 之 言 好 惡 一 循 乎 天 理 賞 罰 母 徇 乎 已 意 使 朝 廷 正 而 萬 事 無 不 正.
- 88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엄하면서도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며 친근감을 유발했다 72) 고 평가되듯이 剛 柔 를 兼 全 하면서도 오히려 溫 柔 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善 惡 의 변별에 분명 하면서도 극단적 언동을 자제했으며, 常 黙 最 妙 를 좌우명으로 삼아 비록 남의 잘못을 보더라도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73) 이같은 그의 자세가 탄력적 이고도 현실적인 出 處 觀 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도 兵 制 조차 禮 樂 의 기준에서 순서와 조화를 모색할 74) 정도로 온건하면서도 타협적 태도를 견지하 는 토대가 되었다. 나아가 그는 許 衡 이 元 에서 벼슬을 버리지 않은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옹호하는 한편, 周 武 王 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首 陽 山 에서 餓 死 한 伯 夷 의 행위가 반드시 仁 이라고 볼 수 없다 75) 며 경직된 出 處 에 비 판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 柳 袗 에게도 전란의 와중에 도처에 쫓겨 다니면서도 學 業 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大 儒 가 된 허형의 학문태도를 본받을 것을 76) 강조하기도 했다. 이같이 조목과 유성룡은 이황이 지닌 剛 柔 兼 全 의 성품과 출처의리를 각각 剛 과 柔 를 부각하여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황의 이기심성론의 分 對 論 과 隨 乘 論 을 각각 수 용하여 그들의 삶의 철학을 형성한 결과였다. 조목의 이기심성론에 대한 직접적 논설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不 失 先 賢 遺 緖 의 자세로 朱 子 의 학문을 비판할 경우 腹 心 之 賊 으로 규정해 배척하는 77) 태도에서 유성룡의 隨 乘 論 的 시각과는 달리 分 對 論 的 관점을 확립하 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격상 조목의 分 對 論 的 철학과 출처는 남명학파의 그것과 접점이 찾아질 수 있는 것으로 그가 鄭 仁 弘 李 山 海 등 大 北 系 인물들과 긴밀하게 교유하면서도 유성룡과는 退 溪 集 편찬방법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게 되는 78) 것도 그같은 배경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鄭 仁 弘 의 晦 退 辯 斥 事 件 이 일어났 을 때 嶺 南 左 道 유생들의 上 疏 움직임에 趙 穆 이 제동을 걸고 나선 79) 것이나, 그의 사망 72) 西 厓 集 年 譜 권3, 行 狀 蒼 石 李 埈 狀 末 總 論 曰 溫 而 有 毅 然 難 犯 之 象 厲 而 有 薰 然 可 親 之 意 對 之 者 非 心 邪 念 自 然 消 沮 其 學 之 所 得 未 嘗 輕 以 語 人. 73) 위와 같음 尹 判 書 國 馨 手 記 曰 論 議 之 間 雖 明 乎 善 惡 之 辨 而 溢 美 已 甚 之 言 未 嘗 出 諸 口 盧 校 理 景 任 手 記 曰 見 人 有 過 未 嘗 斥 言 而 人 自 畏 憚 之 座 右 書 常 黙 最 妙 四 字. 74) 위와 같음 蒼 石 李 埈 狀 末 總 論 曰 其 論 兵 則 曰 禮 樂 而 已 事 得 其 序 之 謂 禮 物 得 其 和 之 謂 樂. 75) 西 厓 集 권13, 雜 著 許 魯 齋 論 予 所 否 者. 76) 西 厓 集 권12, 書 寄 子 袗 世 雖 危 難 男 子 所 當 爲 事 不 可 以 世 亂 而 自 廢 昔 許 魯 齋 東 西 奔 竄 於 兵 戈 擾 攘 之 中 而 到 處 不 廢 學 業 以 成 大 儒 此 雖 非 尋 常 人 所 敢 言 然 立 志 則 不 可 不 如 此 也. 77) 月 川 集 附 錄, 行 狀 有 人 著 人 心 道 心 圖 說 以 爲 四 端 七 情 皆 是 氣 之 發 而 不 由 於 理 妄 爲 圖 說 先 生 憤 然 曰 義 理 微 妙 非 精 察 而 力 行 之 難 可 剖 析 於 幾 微 之 際 妄 肆 已 見 改 動 朱 先 生 理 發 氣 隨 氣 發 理 乘 之 語 此 腹 心 之 賊 也. 78) 조목의 정인홍 등 남명학파와의 연대 및 유성룡과의 불화에 대하여는 李 樹 健, 西 厓 柳 成 龍 의 學 問 과 學 脈, 韓 國 의 哲 學 23,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5 및 徐 廷 文, 退 溪 集 의 初 刊 과 月 川 西 厓 是 非, 北 岳 史 論 3, 국민대 국사학과, 1993 참조.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89 - 후 안동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大 北 政 權 의 지원으로 그가 陶 山 書 院 에 배향되는 80) 것 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 반해 柳 成 龍 의 탄력적이고 유연한 隨 乘 論 的 철학과 출처 는 西 人 勢 力 과의 일정한 교감을 통한 공존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 것이기 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이 갖고 있는 이기심성론에 대한 심대한 견해차를 극복해 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 것으로 그들의 제휴가능성은 일단 모색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3. 理 氣 心 性 論 의 발달과 분화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벌어졌던 사단칠정 논변은 그 자체 완결된 것이 아니었듯이 성 리학적 이기심성론은 언제든지 논란의 대상이 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더욱이 사단칠정 논변은 척신정치라는 시대적 환경에서 이황의 出 處 가 그의 哲 學 과 상충된다는 의혹에서 출발한 것인 만큼 시대적 국한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 사 회적 상황변화에 따른 새로운 出 處 觀 의 형성이 요구될 때 이를 위한 철학적 재해석은 불 가피한 것이었다. 척신정권의 몰락과 사림정권의 대두, 사림세력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정 치적 상황에 의해 다양한 이기심성론과 함께 정치철학이 제시되는 것은 이와 무관한 것 이 아니었다. 특히 이황 조식의 이기심성론은 도덕적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군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편성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대립구조를 조장하는 측면이 없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척신정권이라는 파행적 정치상황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사림세력의 정국 주도 상황에서는 사림의 분열을 촉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李 珥 가 理 氣 分 對 論 과 理 氣 隨 乘 論 을 동시에 비판하며 理 氣 妙 合 論 을 제 기하고 나선 것은 그같은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반영된 때문이었다. 1) 理 氣 妙 合 論 李 珥 의 이기심성론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현실적 상황과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긴장 과 괴리를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주목하여 극복하고자 하는데 궁극적 목표가 있었다. 그 는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에 대한 글을 읽고서는 사단과 칠정을 二 情 이라 규정하는 이황 의 관점보다 그것을 一 情 으로 이해하는 기대승의 입장을 옹호했다. 81) 그리하여 그는 우 79) 孤 臺 日 錄 ( 鄭 慶 雲 )권4, 乙 巳 (선조 38:1605) 年 12월 8일 聞 江 左 儒 生 上 疏 欲 攻 來 庵 先 生 趙 月 川 固 禁 中 止 又 館 中 掛 退 溪 先 生 行 事 差 誤 處 于 殿 廡 下 云 可 怪. 80) 光 海 君 日 記 권84, 6년 11월 癸 酉.
- 90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주는 理 氣 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그것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면서도, 理 氣 를 二 體 二 物 로 규정하는 二 元 論 에는 반대했다. 나아가 그는 理 는 氣 의 主 宰 이자 氣 를 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理 가 아니면 氣 가 根 底 할 수 없고 氣 가 아니면 理 가 依 着 할 수 없다 고 하여 理 氣 의 스스로의 작용을 부정했다. 곧 發 하는 것은 氣 이며 발하는 所 以 는 理 로서 理 를 매개로 하지 않고 發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궁극적으로 發 하는 작용은 氣 라 82) 는 것이다. 이는 氣 發 만을 인정하고 理 發 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가치론적 입장에서 理 의 능동적 작용을 용인한 주자 이황의 견해를 비판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했 다. 83) 그는 이황의 理 氣 隨 乘 論 이 理 와 氣 가 各 出 하여 사람의 마음에 두 근본이 있는 것 처럼 오해한 혐의가 있다며, 氣 가 발하여 理 가 탄다는 것은 옳으나 七 情 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四 端 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로 비판했던 것이다. 이이의 이기심성론은 氣 發 理 乘 에 토대를 두고 있기는 하나 氣 의 작용 만을 강조하는 主 氣 論 的 입장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理 는 독립적이고 가치우위적인 것 이 아니라 氣 를 보완적으로 필요로 하는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氣 의 발용은 理 의 主 宰 를 통해 가능하나 물이 그릇의 모양에 따르고 공기가 병의 크기에 따르 듯이, 84) 理 의 원리적 성격은 氣 를 통해서만 드러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氣 의 개별 적 현상에 따라 그 속에 내재한 理 도 변화하기 마련으로 원칙과 명분도 현실적 요구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理 氣 는 그 가치의 우열에 따라 分 對 또는 隨 乘 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妙 合 의 관계에 있게 되는 셈이다. 85) 이같은 그의 理 通 氣 局 내지 理 氣 妙 合 論 은 주자나 이황이 理 의 작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氣 의 속성을 제한하 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제기된 것이었다. 그는 이황이 本 然 之 性 을 理, 氣 質 之 性 을 氣 라며 性 을 이분법적으로 分 對 해 각기 발용이 가능한 것으로 파악한데 대해 本 然 之 性 은 無 爲 의 理 이고, 氣 質 之 性 은 理 氣 의 合 으로 보아 86) 본연지성은 관념으로 기질지성에 포함되어야 만 발현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81) 栗 谷 全 書 ( 李 珥 ) 권14, 雜 著 1 論 心 性 情 覽 奇 明 彦 與 退 溪 論 四 端 七 情 書 退 溪 則 以 爲 四 端 發 於 理 七 情 發 於 氣 明 彦 則 以 爲 四 端 七 情 元 非 二 情 七 情 中 之 發 於 理 者 爲 四 端 耳 往 復 萬 餘 言 終 不 相 合 余 曰 明 彦 之 論 正 合 我 意. 82) 栗 谷 全 書 권10, 書 2 答 成 浩 原 發 之 者 氣 也 所 以 發 者 理 也 非 氣 則 不 能 發 非 理 則 無 所 發 聖 人 復 起 不 亦 斯 言. 83) 栗 谷 全 書 권10, 書 2 答 成 浩 原 若 朱 子 眞 以 爲 理 氣 互 有 發 用 相 對 各 出 則 是 朱 子 亦 誤 也 何 以 爲 朱 子 乎 退 溪 之 精 詳 近 密 近 代 所 無 而 理 發 氣 隨 之 說 亦 微 有 理 氣 先 後 之 病. 84) 栗 谷 全 書 권10, 書 2 答 成 浩 原 理 氣 詠 呈 牛 溪 道 兄 水 逐 方 圓 器 空 隨 小 大 甁. 85) 栗 谷 全 書 권10, 書 2 答 成 浩 原 理 氣 之 妙 難 見 亦 難 說 夫 理 之 源 一 而 已 矣 氣 之 源 亦 一 而 已 矣 氣 流 行 而 參 差 不 齊 理 亦 流 行 而 參 差 不 齊 氣 不 離 理 理 不 離 氣 夫 如 是 則 理 氣 一 也. 86) 栗 谷 全 書 권10, 書 2 答 成 浩 原 特 就 氣 質 上 單 指 其 理 曰 本 然 之 性 合 理 氣 而 命 之 曰 氣 質 之 性 耳.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91 - 이같은 관점은 인간은 善 惡 之 情 을 보편적으로 겸비하고 있으나 어버이가 있어야 孝 를 발할 수 있고 임금이 있어야 忠 을 발하는 것처럼 외적인 요소에 의해 선 악으로 발현하 는 것일 뿐 純 善 無 惡 의 聖 人 의 실체를 상정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것 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점에서 君 子 小 人 의 변별을 비롯해 修 己 者 나 治 人 者, 山 林 處 士 나 經 世 家 의 가치론적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며, 인간들이 道 心 에 도달할 수 없지만 그것을 지향하는 도덕성의 함양에 매진할 때 정치 사회적인 正 道 가 확립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곧 인간의 심성은 未 發 일 때 이미 純 善 과 함께 不 善 의 맹아가 있는 것 으로 理 를 주재로 한 氣 의 작용에 의해 可 善 可 惡 으로만 발현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氣 質 의 변화에 의해 聖 人 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심성이 未 發 인 상태에서 는 聖 人 이든 常 人 이든 純 善 으로 已 發 일 때 理 氣 의 작용에 의해 純 善 可 善 可 惡 으로 나누 어짐으로써 현실적으로도 聖 人 常 人 의 대비가 가능하다는 입장과 상충하는 것이었다. 그 같은 차이는 이황이나 조식이 善 惡 의 이분법적 구조에서 우주 및 인간심성의 원리를 파 악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인간의 심성이 可 變 的 이고 現 實 的 인 것이기 때문에 그같 은 가치론적 구분은 관념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87)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황이 聖 學 十 圖 에서 군주의 자발적인 修 己 를 통해 聖 人 의 경지를 지향한 것과는 달리, 그가 聖 學 輯 要 에서 賢 臣 이 聖 學 의 이름으로 군주를 가르쳐 氣 質 의 변화를 유도하는 방안을 제시했 던 88)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고 하겠다. 인간심성의 도덕적 가치 보다는 보편적 원리에 주목한 李 珥 의 이기심성론은 그의 현실 참여를 통한 개혁을 추구하는 출처관과, 모순의 점진적 극복을 통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 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天 地 의 造 化 에 二 本 이 있을 수 없고 人 心 의 發 動 에 二 原 이 있을 수 없듯이 理 氣 도 互 發 할 수 없다 89) 는 그의 관점은, 사회적 갈등해결 을 대립의 방법 보다는 통합 융합의 방법에서 찾으려는 그의 삶의 철학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그가 사람을 대함에 親 疎 를 구분하지 않고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으려는 포용력 을 발휘했던 90)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광조가 간결하면서도 공손해 精 金 美 玉 으로 비유된 것과는 달리 맑고 시원스런 성품으로 光 風 霽 月 로 일컬어졌 으며, 조정에 나아가서는 조광조가 순수한 마음으로 일관해 精 神 으로써 사람을 움직인 반 87) 이같은 시각에 입각한 李 珥 의 理 氣 心 性 論 의 현실적 적용문제에 대하여는 李 永 慶, 栗 谷 의 心 性 論 에 있어서 善 惡 과 道 德 意 志 의 문제, 韓 國 의 哲 學 26,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8 참조. 88) 金 駿 錫, 朝 鮮 後 期 國 家 再 造 論 의 擡 頭 와 그 展 開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0). 89) 牛 溪 集 ( 成 渾 ) 年 譜 1, 萬 曆 12(선조 17:1584) 年 正 月 哭 栗 谷 先 生 先 生 慟 曰 栗 谷 於 道 體 洞 見 大 原 所 謂 天 地 之 化 無 二 本 人 心 之 發 無 二 原 理 氣 不 可 互 發 此 等 說 話 眞 是 吾 師. 90) 栗 谷 全 書 권38, 附 錄 6 諸 家 記 述 雜 錄 栗 谷 與 人 言 不 閒 親 疎 必 豁 然 無 所 礙 阻 傾 倒 無 餘 而 止 可 見 其 德 量 之 宏 大 而 其 見 陷 於 小 人 者 亦 以 此 也.
- 92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면 그는 공정하고 성실하며 평탄하고 넓은 心 事 로 사람들이 승복하도록 했다 91) 고 비교되 기도 했다. 이이의 온후하고 포용적인 성품은 그의 참여지향의 出 處 觀 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선조 6년 사림세력의 回 天 노력이 한계에 도달하자 鄭 仁 弘 등이 辭 職 함으로써 出 處 의 태 도를 분명히 한 것과는 달리, 그는 賢 者 가 조정에 있으면서 성의를 다해 輔 導 한다면 일말 의 성취도 있을 것이라며 조정에 남아 있기를 희망함으로써 참여를 통한 지속적인 개혁 추진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홍은 그가 개혁을 추진한다면 小 康 정도는 이룰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평범한 宰 相 에 머물 것이라 92) 며 그의 단호하지 못 한 出 處 의 자세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剛 毅 의 자세로 적극적인 개 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이이의 지나친 柔 弱 함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이이는 서로의 상반된 出 處 觀 을 인정하며 그와 合 一 한다면 모든 일을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 라 93) 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이의 그같은 온후한 성품과 柔 軟 한 出 處 는 理 氣 를 妙 合 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그 의 철학체계를 반영한 것으로,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정당화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황 조식의 철학 및 出 處 觀 의 비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학통을 잇는 嶺 南 學 派 의 반발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의 철학과 출처관이 인조반정 이후 文 廟 從 祀 論 爭 을 계기로 이들에 의해 집중적인 공격 의 대상이 되는 것도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이에 대한 영남학파의 비판도 정치 사회적 변화상황과 맞물려 그들의 철학과 출처관에 있어 일관된 면모를 보여주기 는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영남학파 내부의 理 氣 分 對 論 과 理 氣 隨 乘 論 을 비롯해 理 氣 分 合 論 에 입각한 출처관과 정치철학의 형성은 이이의 이기묘합론적 구조에 대응하는 그들의 시각차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2) 理 氣 分 對 論 17세기 理 氣 分 對 論 者 들은 기본적으로는 善 惡, 正 邪, 君 子 小 人 의 이분법적 가치 구조를 전제로 理 氣 의 대립적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율곡학파의 理 氣 妙 合 論 에 대한 배 타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그들의 이기심성론은 南 冥 困 齋 學 派 의 극단적인 分 對 論 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分 對 論 的 시각이 91) 위와 같음 靜 菴 栗 谷 天 資 皆 屬 高 明 然 靜 菴 簡 重 溫 栗 栗 谷 淸 通 灑 落 靜 菴 如 精 金 美 玉 栗 谷 如 光 風 霽 月 觀 二 先 生 立 朝 行 事 則 靜 菴 精 白 專 一 精 神 足 以 聳 動 人 栗 谷 公 誠 坦 蕩 心 事 足 以 悅 服 人 然 栗 谷 才 較 大. 92) 栗 谷 全 書 권29, 經 筵 日 記 2 선조 6년 12월. 93) 栗 谷 全 書 권30, 經 筵 日 記 3 선조 14년 4월 仁 弘 疑 珥 過 柔 謂 安 敏 學 曰 叔 獻 非 剛 毅 做 事 底 人 敏 學 告 珥 珥 笑 曰 我 當 爲 德 遠 之 韋 德 遠 當 爲 我 之 弦 我 與 德 遠 合 一 則 豈 不 做 事 乎.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93 - 갖는 철학적 극단성의 시대적 한계를 그들이 절감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곧 광해군대 분 대론자들이 지배하는 대북정권 일당전제의 부작용을 경험한 바가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보편성을 획득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李 珥 의 妙 合 論 을 배경으 로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서인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嶺 南 學 派 의 사상적 정치적 결집이 필요한 상황에서 배타적인 분대론은 오히려 장애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 이 分 對 論 을 골격으로 하면서도 隨 乘 論 을 일정하게 수용하는 자세변화를 보이게 되는 것 은 그같은 배경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한 관점은 尹 義 貞 (1525-1612)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天 地 에는 陰 陽 만 존재할 뿐으로 이것이 곧 理 氣 로서 그것들은 陰 陽 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니라 94) 며 분 대론적 우주관을 전제로 하면서도, 理 가 氣 를 타고 發 하여 不 善 함이 없고 氣 가 理 를 끼고 動 하여 善 惡 이 있게 된다며 理 乘 氣 氣 挾 理 의 수승론적 인성관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 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善 惡 은 氣 質 의 淸 濁 에서 나누어지지만 淸 者 는 적고 濁 者 는 많은 법으로, 天 地 之 心 을 가진 자가 하늘의 명령으로 나와 君 師 가 될 때 道 가 밝아지고 法 이 새로워지며 근본이 지켜지는 법이라 95) 며 氣 의 善 情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理 氣 를 善 惡 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또한 金 垓 (1555-1593)도 正 邪 는 兩 立 할 수 없는 것이라 96) 는 점을 분명하게 천명하는 한편, 天 地 四 方 에 충만하고 古 今 을 관 통하는 것은 理 氣 일 뿐이며 사람의 一 身 은 理 氣 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전제하면서도, 그것이 발할 때는 理 發 氣 發 로 分 開 되지 합하여 발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들의 不 相 離 ' ' 不 相 雜 한 속성을 토대로 각각을 위주로 할 때 理 發 氣 隨 氣 發 理 乘 이 되는 것이라 97) 주 장하기도 했다. 나아가 權 益 昌 (1562-1645)도 四 端 은 理 發 이고 七 情 은 氣 發 이라 98) 는 인 식을 전제로 하면서도 理 氣 隨 乘 의 관점을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었지만, 理 가 발하여 氣 가 따른다는 것은 理 를 위주로 하되 氣 가 아직 用 事 하지 않은 것으로 99) 파악함으로써 四 端 94) 芝 嶺 集 ( 尹 義 貞 )권3, 雜 著 理 氣 說 天 與 地 是 陰 與 陽 而 已 曰 理 曰 氣 實 不 外 乎 陰 陽. 95) 芝 嶺 集 권3, 雜 著 續 陽 節 潘 氏 歷 代 總 論 理 乘 氣 而 發 發 無 不 善 氣 挾 理 而 動 動 或 有 善 惡 其 爲 善 爲 惡 初 分 於 氣 質 之 淸 濁 淸 者 少 而 濁 者 多 此 人 之 不 能 全 其 天 地 之 心 也 一 有 能 天 地 之 心 者 出 於 其 間 卽 天 必 命 之 以 爲 衆 人 之 君 師 其 明 之 也 有 道 因 其 所 固 有 而 明 之 也 其 新 之 也 有 法 因 其 所 當 行 而 新 之 也 其 止 之 也 有 本 使 人 顧 諟 天 之 明 命 而 不 少 離 於 動 靜 語 黙 之 間. 96) 近 始 齋 集 ( 金 垓 )권3, 箋 擬 大 學 生 等 請 撤 去 諸 道 寺 刹 箋 道 統 有 自 來 光 啓 文 明 之 運 邪 正 不 兩 立 盍 絶 緇 之 徒 俯 竭 闢 異 之 誠 仰 干 從 諫 之 聖 竊 觀 守 正 之 主 咸 以 去 邪 爲 先 命 有 司 而 汰 僧 尼. 97) 近 始 齋 集 권3, 雜 著 理 氣 說 彌 滿 六 合 流 行 古 今 者 理 氣 而 已 人 之 一 身 合 理 與 氣 而 成 者 也 四 端 之 發 雖 不 可 謂 之 無 氣 而 以 其 爲 主 者 理 故 云 理 發 而 氣 隨 也 七 情 之 發 雖 不 可 謂 之 無 理 而 以 其 爲 主 者 氣 故 云 氣 發 而 理 乘 也 從 古 聖 賢 就 其 不 相 離 之 中 拈 其 不 相 雜 之 妙 以 爲 言. 98) 湖 陽 集 ( 權 益 昌 )권3, 字 訓 撮 要 之 目 四 端 ( 理 之 發 仁 義 禮 智 之 性 渾 然 在 中 而 四 者 其 端 緖 也 ) 七 情 ( 氣 之 發 外 物 之 來 易 感 而 先 動 者 莫 如 形 氣 七 者 其 苗 脈 也 ) 99) 湖 陽 集 권3, 自 省 錄 理 發 而 氣 隨 之 理 爲 主 而 氣 未 用 事 也 氣 發 而 理 乘 之 氣 爲 主 而 理 無 不 在 也.
- 94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에서 氣 의 개입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이같이 分 對 論 者 들의 이기심성론은 理 의 절대적 가치나 理 氣 分 對 의 관점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氣 가 곧 惡 이라는 인식에 치우친 종래의 입장에서 물러서 兼 善 惡 의 입장을 제 한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理 氣 를 하나로 간주하는 이이 의 妙 合 論 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隨 乘 論 을 차별적으로 수용 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그들의 이같은 철학적 논리는 퇴계학파 내부에서 性 理 學 을 倡 明 한 것으로 100) 평가된 李 榘 (1613-1654)에 의해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101) 그는 理 氣 라는 것은 서로 不 離 性 과 不 雜 性 을 갖지만 성격상으로나 上 下, 先 後 에 있어 뚜렷이 구분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곧 理 는 至 善 을 칭하는 것이나 氣 는 兼 善 惡 을 말하는 것으로, 理 의 밑바닥에 不 善 이 있는 것은 氣 가 섞였기 때문이지 理 의 本 然 은 아니라 102) 는 것이다. 또한 그는 理 는 소리와 냄새, 形 迹 과 際 限 이 없으나 氣 는 그것들이 있기 때문 에 理 氣 는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上 下 關 係 에 있게 되어 결과적으로 理 는 形 而 上 으로서 道 가 되고 氣 는 形 而 下 로서 器 가 되는 것으로 103) 보았다. 이같이 理 氣 의 관계 를 分 對 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는데 대해 그는 分 이면서 合 이고 合 이면서 分 이 되는 식 으로 서로 섞듯이 氣 가 理 로 된다거나 理 를 가리켜 氣 가 된다고 하면 道 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라 104) 주장했다. 이러한 우주론을 토대로 그는 자신의 人 性 論 을 다음과 같이 정리 했다. 理 氣 가 사람에게 있을 경우를 말해보자. 이른바 天 命 道 心 四 端 은 理 에 속하고, 氣 稟 人 心 七 情 은 氣 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性 命 에서 근원해 發 하여 四 端 이 되는 것이 道 心 이요 氣 稟 에 근원해 發 하여 七 情 이 되는 것이 人 心 인 것이다. 理 氣 를 合 하여 性 情 을 다 스린다는 것은 이 心 의 全 體 妙 用 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理 는 不 善 함이 없고 氣 는 惡 을 겸하기 때문에 반드시 理 가 主 로 되어 氣 가 聽 命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라야 體 가 설 수 있는 것이며 用 이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理 氣 가 하나가 된다면 이는 人 心 을 道 心 으로 간주하여 天 命 이 氣 稟 과 섞이고 四 端 을 七 情 과 혼동하게 됨으로써, 필경 微 가 더욱 微 해지고 危 가 더욱 危 해지게 되는데다 理 가 氣 로 된다 하여 善 이 惡 이 되어 멸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니 그 폐를 말로 할 수 있겠는가. 105) 100) 活 齋 集 ( 李 榘 ) 附 錄, 行 狀 是 故 當 先 正 旣 遠 吾 道 方 微 之 際 能 發 然 以 興 而 倡 明 性 理 之 學. 101) 李 榘 의 理 氣 心 性 論 의 내용과 정치적 성격에 대하여는 薛 錫 圭, 活 齋 李 榘 의 理 氣 心 性 論 辨 說 과 政 治 的 立 場, 朝 鮮 時 代 史 學 報 4, 조선시대사학회, 1998 참조. 102) 活 齋 集 권2, 雜 著 理 無 雜. 103) 活 齋 集 권2, 雜 著 形 而 上 下. 104) 活 齋 集 권2, 雜 著 圖 說 後 論 理 氣 發 明. 105) 活 齋 集 권2, 雜 著 理 氣 心 性 情.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95 - 理 氣 를 대립적이고 가치론적으로 구분하는 分 對 論 者 들의 이러한 理 氣 心 性 論 은 일차적으 로는 理 氣 를 妙 合 하는 李 珥 의 이기심성론이 朱 子 李 滉 의 그것과 배치되는 것이자 사상 정치적 혼돈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는 점을 부각시켜 西 人 세력이 추진하는 文 廟 從 祀 를 무 산시키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仁 祖 反 正 이후 전개되는 문묘종사 반대운동 은 사실상 이들이 주도하며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李 時 明 (1590-1674)이 종사 反 對 疏 에서 사람의 善 惡, 正 邪 는 理 氣 의 분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理 氣 를 혼합할 경우 不 善 조차 善 으로 간주해 반성하거나 고치려는 공부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점과, 天 下 의 道 에는 是 非 둘 밖에 없는 것으로 그것을 분별할 때 公 과 私 의 구분도 가능해져 古 今 의 병통이 치유되고 公 道 도 실현될 수 있다 106) 는 점을 부각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 인 예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理 氣 妙 合 論 이 羅 欽 順 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정통주자학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107) 는 비판에서 한걸음 더나아가 邪 說 로 규정함으로써 서 인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겠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기도 했다. 金 弘 微 (1557-1605)가 理 를 위주로 하는 유학의 철학체계는 자연의 법칙과 인륜에 순응하는 것인데 반해, 靈 明 의 氣 를 위주로 하는 불교의 그것은 세상의 이치와 단절되어 실용성이 결여된 邪 說 로 파악한 108) 것은 氣 를 위주로 하는 이이의 이기심성론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分 對 論 者 의 학문적 배경과 자세는 기본적으로 퇴계학파의 그것에 두고 있었지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남명학파의 영향을 일정하게 받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 된다. 학문을 중시하는 퇴계학파와 節 義 를 앞세우는 남명학파의 학풍상 차이는 일찍부터 지적이 되었지만 109) 두 문하를 왕래하는 인물도 당시에는 적지 않았다. 金 宇 顒 鄭 逑 등 과 같이 조식의 제자로서 이황의 문하에 출입한 인물들은 대체로 학문적 영향을 주로 받 은 것과는 달리, 이황의 제자로서 조식의 문하에 들어간 경우 조식의 인품에 감화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周 世 鵬 李 滉 에게서 학문을 연마하다 조식을 찾아가 배운 적이 있는 申 元 106) 石 溪 集 ( 李 時 明 )권2, 疏 論 牛 栗 從 祀 疏 人 之 善 惡 邪 正 每 由 於 理 氣 之 分 故 先 輩 於 精 一 執 中 之 功 未 嘗 不 致 意 焉 臣 竊 以 爲 天 下 之 道 二 是 與 非 而 已 是 非 之 心 人 皆 有 之 而 得 其 眞 者 蓋 寡 是 其 眞 是 非 其 眞 非 愜 於 人 心 而 無 復 異 議 則 公 道 立 而 世 治 隆. 107) 湖 陽 集 권3, 自 省 錄 栗 谷 曰 理 氣 一 也 何 處 見 其 有 異 邪 所 謂 理 自 理 氣 自 氣 者 何 處 見 其 理 自 理 氣 自 氣 邪 此 正 是 羅 整 庵 理 氣 無 二 之 說. 108) 省 克 堂 集 ( 金 弘 微 )권3, 雜 著 送 泂 上 人 序 我 有 一 段 至 寶 底 物 靈 明 泂 徹 神 妙 莫 測 而 理 爲 之 主 故 其 虛 也 實 其 應 也 不 亂 井 井 乎 如 帛 之 有 縷 焉 在 父 子 而 親 處 君 臣 而 義 別 於 夫 婦 序 於 長 幼 以 至 日 用 動 靜 語 黙 食 息 之 微 莫 不 有 自 然 之 則 焉 此 吾 儒 之 學 所 以 順 理 而 不 敢 違 者 也 若 釋 氏 則 異 於 是 矣 自 私 其 心 以 恐 恐 然 惟 懼 一 物 之 或 累 乎 我 屛 世 絶 事 而 雖 君 臣 父 子 天 敍 天 秩 之 倫 一 切 掃 除 自 謂 超 乎 萬 象 之 外 不 泥 於 形 器 之 間 視 天 地 六 合 不 翅 若 錙 銖 塵 芥 焉 其 意 本 欲 徑 造 乎 理 而 畢 竟 所 主 者 只 一 點 靈 明 之 氣 而 已 理 反 爲 芻 狗 其 桀 逆 不 幾 甚 矣 乎 上 人 空 門 之 志 乎 栢 樹 者 也. 109)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학풍상 차이와 정치 사회적 동향에 대하여는 李 樹 健, 嶺 南 學 派 의 形 成 과 展 開, 一 潮 閣, 1995, pp.327~369 참조.
- 96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祿 (1516-1576)이 조식이 평소 사람들과 經 書 를 講 說 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言 論 風 采 는 감화받는 바가 있어 그로 인해 계발된 사람이 많았다 110) 고 회고한 것이 그러 한 사정을 전해주고 있다. 尹 義 貞 은 어릴 때 이황에게서 독서권유를 받기는 했으나 직접 배운 적은 없었으며, 중 년에는 조식을 찾아가 학업을 닦았고 자신의 아들도 그에게 보내 수학토록 했다. 111) 後 彫 堂 金 富 弼 의 조카인 金 垓 는 禮 安 출신으로 유성룡 김성일과 함께 退 溪 集 수정에 참 여하기도 했으나, 남명학파가 연루된 己 丑 獄 事 에서 체포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12) 李 時 明 의 姨 從 兄 이기도 한 權 益 昌 은 평생 處 士 로 지내면서 유성룡 김성일 조목 등에게서 두루 학문을 습득하며 퇴계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曺 植 이 지식 을 기반으로 인품을 갖춘 후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어야 도움되는 바가 있다고 한 것이나, 資 質 을 믿기 보다는 밤중에 깊이 공부에 침잠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하는 자세 라 한 것을 名 言 이라 113) 극찬함으로써 그의 학문적 자세에 호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李 榘 의 학문배경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조부 李 惇 이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조식을 찾아가 학문의 요체와 善 惡 의 변별에 대해 토론하며 감명을 받았으며, 114) 李 山 海 鄭 仁 弘 등이 주도한 柳 永 慶 獄 事 에 공을 인정받아 아들 光 沃 光 漢 과 함께 광해군 6년 定 運 原 從 功 臣 에 冊 錄 되기도 한 115) 점으로 미루어 남명학파의 영향을 주로 받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李 時 明 은 장인이자 스승인 張 興 孝 의 영향을 주로 받았는데, 장흥효는 김 성일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뒤에 鄭 逑 를 찾아가 질의하면서 그 학문이 心 得 한 것 110) 悔 堂 集 ( 申 元 祿 ) 年 輔 명종8(1553)년 9월 先 生 遊 南 冥 先 生 之 門 非 一 再 嘗 語 人 曰 曺 先 生 平 居 不 喜 向 人 談 經 說 書 然 其 言 論 風 采 自 然 有 竦 動 人 處 對 之 非 僻 之 心 自 不 敢 萌 從 學 者 多 所 啓 發 蓋 有 得 於 觀 感 之 間 者 也. 111) 芝 嶺 集 권4, 附 錄 遺 事 弱 冠 遊 縣 庠 退 溪 老 先 生 見 筆 法 之 精 文 藝 之 就 因 誨 之 曰 文 藝 非 儒 者 事 須 勉 讀 書 中 年 寓 星 州 地 見 南 冥 學 業 使 子 受 學 焉. 112) 近 始 齋 集 권4, 附 錄 行 狀 未 幾 中 司 馬 試 呈 辭 而 歸 與 鶴 峰 西 厓 二 先 生 修 整 退 陶 先 生 文 集 時 逆 獄 起 搆 誣 士 類 先 生 亦 在 逮 中 擧 家 驚 懼 不 色 動 飮 食 言 笑 如 平 日 及 就 對 禍 將 不 測 賴 朝 廷 伸 救 得 削 秩 而 歸. 113) 湖 陽 集 권3, 自 省 錄 南 冥 語 學 者 曰 爲 學 要 先 使 知 識 高 明 如 上 東 岱 萬 品 皆 低 然 後 惟 吾 所 行 自 無 不 利 又 曰 遨 遜 於 通 衢 大 市 中 金 銀 珎 寶 靡 所 不 有 盡 日 上 下 街 衢 而 談 其 價 終 非 自 家 家 裏 物 却 不 如 用 吾 一 疋 布 買 取 一 尾 魚 來 也 今 之 學 者 高 談 性 理 而 無 得 於 己 何 以 異 此 又 曰 夜 中 工 夫 儘 多 切 不 可 多 睡 又 曰 恒 居 不 可 與 妻 拏 混 處 雖 資 質 之 美 因 循 汩 溺 終 不 做 人 矣 此 皆 名 言. 114) 活 齋 集 권7, 行 狀 先 大 考 贈 嘉 善 大 夫 吏 曺 參 判 兼 同 知 義 禁 府 事 行 通 善 郞 戶 曺 佐 郞 府 君 家 狀 自 幼 從 游 退 陶 門 人 於 先 生 長 者 之 風 盖 已 樂 聞 而 有 得 監 察 公 嘗 宰 山 陰 南 冥 曺 公 自 山 中 來 訪 府 君 時 隅 坐 南 冥 見 而 驚 異 與 論 爲 學 之 要 善 惡 之 辨. 115) 定 運 功 臣 은 柳 永 慶 의 獄 事 에 공을 세운 인물들로 李 山 海 鄭 仁 弘 李 爾 瞻 李 惺 이 首 功 者 로 서 광해군 5년 衛 聖 翼 社 亨 難 功 臣 들과 함께 일괄 冊 錄 된 바가 있으나, 定 運 原 從 功 臣 은 광 해군 6년 10월 冊 錄 이 결정되었다. 定 運 原 從 功 臣 錄 券 에는 一 等 定 遠 君 琈 등 252명, 二 等 蓬 萊 府 院 君 鄭 昌 衍 등 80명, 三 等 僉 知 許 筠 등 510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97 - 에 감탄하여 뒤늦게 알게 된 것을 개탄했다고 하며, 항상 敬 字 를 크게 써두고 좌우명으로 삼는 116) 한편 이시명에게 敬 以 直 內 義 以 方 外 의 처신을 당부할 117) 정도로 학문적 자세 가 남명학파의 그것과 흡사한 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분대론자들의 성품은 강직하면서도 出 處 義 理 에 확고한 측면이 있었다. 118) 42세의 짧은 생애이기는 하나 평생토록 時 世 에 편승하지 않고 處 士 로서 異 說 을 배격하고 正 統 을 존중하는 자세로 살았던 李 榘 의 삶이 119)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李 時 明 도 권력이나 재물과의 타협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不 善 을 보면 면전에서 배척하 는 분명한 성격 때문에 교유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로 그 氣 像 이 嚴 毅 峻 整 했다 120) 고 한다. 실제로 그는 우율의 문묘종사를 지지하면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서인세력의 회유에 대해 궁하고 통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 121) 며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는 결과적으로 현실정치와 타협할 수 없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그들 대부분이 서인정권 하에서 처사형 학자로 在 野 에 주로 머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3) 理 氣 隨 乘 論 한편 理 氣 隨 乘 論 은 이황의 이기심성론을 이론적으로 보강함과 동시에 탄력적인 현실적 용의 방안을 모색하는 방향에서 전개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의 논리적 구조는 理 의 가치우위와 지배를 원리로 하는 것이지만 氣 의 비중을 惡 보다는 善 에 둠으로써 氣 의 지배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理 의 작용을 통해 자발적 정화능 116) 敬 堂 集 ( 張 興 孝 ) 續 集 권2, 附 錄 墓 碣 銘 先 生 早 承 學 於 鶴 峰 西 厓 兩 先 生 求 道 益 力 造 詣 日 深 亟 蒙 師 門 稱 許 晩 更 就 質 於 寒 岡 鄭 先 生 先 生 深 歎 其 學 有 心 得 恨 其 相 知 之 晩 也 嘗 大 書 敬 字 於 座 右 因 以 自 號. 117) 石 溪 集 附 錄 권1, 行 狀 ( 敬 堂 ) 先 生 莞 爾 而 笑 於 其 歸 也 贈 之 以 言 曰 性 者 道 之 體 也 道 者 性 之 用 也 大 而 天 地 小 而 事 物 細 微 無 一 不 具 於 此 道 之 中 必 也 敬 以 直 內 使 大 本 巳 立 義 以 方 外 使 本 體 呈 露 則 體 用 在 我. 118) 장흥효를 중심으로 한 분대론자들의 현실인식과 출처관에 대하여는 金 允 濟, 안동선비의 현 실인식과 처세관, 安 東 의 선비문화, 아세아문화사, 1997이 참고된다. 119) 活 齋 集 附 錄, 墓 碣 銘 活 齋 先 生 李 公 當 仁 孝 兩 世 適 値 世 道 升 降 之 會 以 渺 然 一 布 衣 絀 異 說 尊 正 統 不 以 時 世 氣 貳 其 心. 120) 石 溪 集 附 錄 권1, 墓 誌 銘 公 氣 像 嚴 毅 峻 整 於 交 際 無 所 苟 苟 其 人 貴 顯 雖 親 戚 不 踵 其 門 雖 賢 長 者 不 留 其 館 見 人 爲 不 善 者 必 心 鄙 而 面 斥 之 不 少 假 借 然 成 人 之 美 急 人 之 困 甚 於 巳 以 故 賢 者 樂 與 之 遊 而 不 肖 者 忌 之 其 平 生 所 相 善 惟 金 溪 巖 坽 趙 龍 洲 絅 崔 處 士 喆 數 人 而 已. 121) 石 溪 集 附 錄 권1, 行 狀 及 公 以 鄕 貢 入 京 當 是 時 牛 溪 栗 谷 從 祀 之 議 方 始 李 見 公 謂 曰 吾 同 儕 三 十 三 人 三 十 人 登 第 其 餘 從 他 岐 入 仕 一 時 號 爲 能 然 要 之 無 爾 敵 也 君 今 一 言 相 答 及 第 翰 林 不 足 得 也 君 以 遠 方 寒 士 幸 及 尊 堂 無 恙 時 擢 上 第 登 顯 仕 不 亦 善 乎 公 答 曰 窮 通 有 命 非 人 之 所 能 爲 也 豈 敢 强 其 所 不 知 以 爲 知 李 憮 然 曰 嶺 南 人 性 執 每 如 此.
- 98 -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純 善 無 惡 의 理 와 대립적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에 있게 됨으로써 당위와 현실 사이에 調 和 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었다. 柳 贇 (1520-1591)이 사냥을 많이 한 사람이 적게 잡은 사람 의 것을 빼앗아 조상의 제사에 쓰는 魯 나라의 獵 較 풍습에 孔 子 도 참여한 것에 대해 긍정 적으로 평가한 122) 것은 그같은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道 란 出 治 의 근본으로 形 而 上 의 理 이고 法 은 輔 治 의 도구로 形 而 下 의 器 라 규정하면서, 器 는 道 에서 말미암고 道 는 器 안에 있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道 가 아니면 器 는 근본하는 바가 없 고 器 가 아니고는 道 가 기댈 곳이 없게 된다 123) 며 道 器 의 관계를 隨 乘 의 구조에서 설 명했다. 이는 당위와 현실은 대립적인 모순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보완관계 에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당위의 현실참여를 통한 도덕성의 함양은 불가피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유빈의 이러한 사유방식은 탄력적인 현실참여를 보장하는 것으로 이는 柳 成 龍 에게서도 이미 확인된 바이지만 그의 三 子 인 柳 袗 에 의해 보강되고 있기도 했다. 유진은 성리학자들이 三 代 心 法 의 근원 가운데 하나로 파악하고 있는 人 心 惟 危 道 心 惟 微 惟 精 惟 一 允 執 厥 中 이 人 心 을 먼저 말하고 道 心 을 뒤에 말한 이유에 대해, 偏 正 輕 重 의 단계로 보면 道 心 을 먼저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학자의 用 力 의 처지에서는 人 心 을 먼저 살펴 정밀하게 한 뒤라야 道 心 을 지킬 수 있고 誠 心 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라며 철 학적 사유의 일차적 관심을 현실에 두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는 내 나이 17 8세 때 先 君 子 에게서 中 庸 을 받았는데 선군자께서 一 蠹 鄭 汝 昌 이 일찍이 中 庸 章 句 를 읽다 하늘은 陰 陽 五 行 으로 萬 物 을 化 生 시켰으며 氣 가 形 을 이루어 理 가 부여 된 것이라는 설에 이르러 의심을 품고 말하기를 이는 朱 子 의 오류다. 어찌 氣 뒤에 理 가 있 겠는가 고 했는데 너는 일두의 說 이 옳다고 보느냐 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맞는 것이 아니겠 습니까 고 했다. 선군자께서 일두의 설은 맞지 않다 고 했다. 내가 물러나와 여러 날을 생각 했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십여 년이 지난 뒤 玉 淵 書 堂 에서 다시 중용 을 얻어 반복하며 생각한 뒤에서야 비슷한 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대개 本 原 을 처음 논하자면 반드시 앞 에 理 가 있은 뒤에 氣 가 있지만 人 物 의 품부로 말할 경우 氣 가 있은 뒤에 理 가 따라 갖추어 진다는 점이다. 무릇 形 質 이 있어 天 地 에 가득찬다는 것은 形 이 있지 않고는 理 를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니 形 이 없고서야 理 가 어찌 부여받겠는가. 詩 經 에 이르기를 하늘이 백성을 낳고 物 이 있고서야 법칙이 있다 고 했다. 주자의 뜻은 본래 여기에 있었던 것이니 일두가 제대로 살피지 않은 셈이다. 124) 122) 倦 翁 集 ( 柳 贇 )권1, 論 獵 較 論. 123) 倦 翁 集 권1, 論 鑄 刑 書 論 道 爲 出 治 之 本 而 形 而 上 之 理 也 法 爲 輔 治 之 具 而 形 而 下 之 器 也 器 由 於 道 道 寓 於 器 二 者 未 嘗 相 離 而 非 道 器 無 所 本 非 器 度 無 所 托 夫 禮 樂 者 治 天 下 之 道 也 禮 雖 非 玉 帛 而 禮 不 可 以 虛 拘 樂 雖 非 鐘 鼓 而 樂 不 可 以 徒 作 蓋 其 形 而 上 者 之 道 托 於 器 而 後 行 形 而 下 者 之 器 得 其 道 而 無 弊 道 之 於 法 亦 猶 是 也. 124) 修 巖 集 ( 柳 袗 ) 권1, 雜 著 正 字 金 公 延 祖 遺 事.
17세기 理 氣 心 性 論 발달의 역사적 의미 - 99 - 며 四 端 을 절대적 가치의 本 原 으로, 七 情 을 人 物 이 보편적으로 부여받는 것으로 파악하 여 七 情 역시 가치론적 기준에서 파악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는 내실있는 학문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면서도 현실참여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수승론 에 입각한 탄력적 출처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현실참여의 논리는 자칫 氣 의 작용성만 인정하는 妙 合 論 의 그것과 혼동 되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없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조카 柳 元 之 가 수승론에 입각 하여 본격적으로 이기심성론을 구조화하는 한편 이이의 이기심성론에 대한 변설을 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125) 실제 당시 洪 汝 河 가 그에게 理 를 위주로 하면서도 理 氣 가 二 物 이라 한 것은 일찍이 聖 人 이 말한 적은 없고 後 賢 이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 126) 주장하는 등 그에 대한 적극적 해명은 불가 피한 상황으로 대두하고 있기도 했다. 나아가 여기에는 유성룡의 임진왜란 당시 처신을 主 和 誤 國 으로 규정하는 남명학파 및 퇴계학파 일각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의도 도 크게 작용했던 127) 것으로 판단된다. 柳 元 之 는 이황이 聖 學 十 圖 의 下 圖 에서 四 端 理 發 而 氣 隨 之 七 情 氣 發 而 理 乘 之 라 한 것은 渾 淪 의 가운데 情 의 근간을 直 指 한 것이자 어느 것이 理 가 되고 氣 가 되는지를 구 분하여 밝힌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理 氣 를 判 別 하여 二 物 이 된다는 것이 아니며, 사단이 理 發 이고 칠정이 氣 發 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發 할 때 느끼는 것이 하나가 아니어서 理 또는 氣 의 不 同 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각기 重 한 바를 취하여 말한 것일 뿐 그 안에 二 情 이 있어 先 後 로 대립하고 둘로 나눠져 별도로 나온다 는 점을 설명한 것은 아니라 128) 고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대저 理 氣 는 相 須 이다. 理 는 氣 의 主 이며, 氣 는 理 를 가득 채우는 器 이다. 理 는 氣 가 아 니라 理 가 걸어 붙은 곳 없이 발한 것이 반드시 氣 이니 古 人 이 人 馬 를 理 氣 에 비유한 것이 이것이다. 대개 四 端 은 性 之 發 을 말함이니 이 四 라는 것은 性 命 을 주재함이 있음을 말하 125) 柳 元 之 의 理 氣 心 性 論 의 내용과 의미에 대하여는 薛 錫 圭, 拙 齋 柳 元 之 의 理 氣 心 性 論 辨 說 과 政 治 的 立 場, 朝 鮮 史 硏 究 6, 朝 鮮 史 硏 究 會, 1997 참조. 126) 木 齋 集 ( 洪 汝 河 )권4, 書 答 柳 拙 齋 理 氣 爲 二 物 聖 人 未 嘗 言 也 析 而 二 之 者 後 賢 不 得 已 之 說 也 至 於 性 與 理 所 從 言 之 者 然 也 性 卽 理 也 理 卽 性 也 豈 有 分 而 二 之 者 哉 鄙 見 如 此 何 如 何 如. 127) 柳 成 龍 의 전란에 대처하는 태도에 대해 임진왜란 당시 남명학파를 중심으로 한 대북세력이 主 和 誤 國 으로 규정하여 탄핵함으로써 그의 실각의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趙 穆 을 중심으로 한 예안사림도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柳 袗 은 그것을 해명하는 장문의 편지를 예안사림에게 보낸 적이 있으며( 修 巖 集 권2, 書 答 宣 城 士 友 別 紙 ), 다시 金 時 讓 이 저술한 荷 潭 破 寂 錄 에서 유성룡의 출처를 비판하는 등 서인세력에서도 논란 의 대상이 되자 柳 元 之 가 나서 그의 아들 金 徽 에게 편지를 보내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拙 齋 集 권3, 書 與 金 監 司 徽 別 紙 및 又 別 紙 ) 했다. 128) 拙 齋 集 ( 柳 元 之 )권8, 雜 著 理 氣 說 四 端 七 情 辨 後 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