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1 매일신보 는 朝 鮮 思 想 通 信 발행인가 소식을 다음처럼 전한다. 朝 鮮 操 觚 界 重 鎭 으로 일즉 朝 鮮 新 聞, 京 城 日 報 等 諸 社 에 健 筆 을 揮 하다가 多 年 間 每 日 申 報 編 輯 部 長 으로 잇는 現 朝 鮮 語 硏 究 會 主 幹 伊 藤 韓 堂 氏 를 筆 頭 로 斯 界 有 志 의 計 劃 出 願 中 이든 朝 鮮 思 想 通 信 은 四 月 二 十 六 日 附 로 新 聞 紙 規 則 에 依 하야 認 可 되여 不 遠 發 行 하게 되얏는대 右 通 信 은 朝 鮮 에 對 한 各 種 思 想 硏 究 를 目 的 으로 每 日 發 刊 되는 朝 鮮 文 諸 新 聞 을 爲 始 하야 其 他 雜 誌, 著 述 等 에서 主 要 한 部 分 을 內 地 語 로 飜 譯 하야 硏 究 資 料 로 有 志 에게 供 給 하려함이라는대 此 는 다만 內 地 人 안이라 朝 鮮 人 에게도 思 想 上 進 路 의 指 針 을 定 하며 一 面 으로 自 己 를 省 察 함에 一 大 好 資 料 가 될지오. 發 行 所 는 京 城 府 黃 金 町 三 丁 目 三 十 番 地 라더라. 2 인용한 기사는 朝 鮮 思 想 通 信 의 목적을 조선에 대한 각종 사상연구를 목적으로 매일 발간되는 朝 鮮 文 諸 新 聞 을 위시하야 기타 잡지, 저술 등에서 주요한 부분을 내지어로 (신속하게) 번역하야 연구자료로 유지에게 공급하려함 에 있다고 밝힌다. 朝 鮮 思 想 通 信 의 목적은 통치 대상인 조선인들의 사상과 동향, 여론을 발췌 번역하여 총독부의 관변과 재조선일본인 사회의 유지들 나아가 일본 내지인들에게 제공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또한, 이 신문을 통한 조선에 관한 정보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제국주의적 지식 생산의 측면도 가지고 있다. 4 이 매체는 식민통치에 도움이 되었으며, 그러한 공로로 伊 藤 韓 堂 은 시정 25 주년 및 30 주년 기념식에서 총독 표창을 받았다. 1 매일신보 는 1943 년 4 월 18 일자 부고 伊 藤 韓 堂 氏 를 통해 그의 간략한 생애를 요약하여 전하고 있다. 伊 藤 韓 堂 이 죽은 후 10 일 뒤인 4 월 28 일 朝 鮮 通 信 도 폐간되었다. 2 朝 鮮 思 想 通 信 發 行 認 可, 매일신보, 1926 년 4 월 28 일. 3 정진석의 언론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154 쪽)에 따르면, 朝 鮮 思 想 通 信 기자들은 김수진, 조강희, 이완응, 이정섭, 서내섭과 일본인 오가와 슈조, 시바 가쿠마 등이었다. 조강희는 동아일보 기자, 시대일보 사회부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동경지국에는 박상희가 근무하고 있었다. 박상희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근무했던 사람이다. 4 뒤에서 살필 朝 鮮 及 朝 鮮 民 族 의 朝 鮮 各 地 の 風 俗 の 內 から 는 조선 각 지방의 풍속을 삽화와 함께 구성하여 조선의 민속을 살피거니와, 엑조틱한 풍물에 대한 호기심과 조선인의 습속에 대한 지식 구성이라는 두 측면을 함께 보여준다. 1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반으로 하여, 식민지 사회와의 접촉 속에서 본국의 일본인 과는 미묘하게 다른 문화적 정치적 입장을 형성하게 된다. 이 신문을 창간한 伊 藤 韓 堂 의 경우도 이러한 식민 이주자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의 본명은 伊 藤 卯 三 郞 로, 이름을 韓 堂 으로 고칠만큼 조선에 애착을 보였으며 조선에서 終 身 했다. 후쿠오카 출신인 그는 1905 년 5 월 조선에 건너와 일찍이 한글을 습득하였으며, 鎭 南 浦 新 報 社, 조선신문사,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 유력 일본인 신문을 거치며 한글신문 편집을 담당했다. 1924년 7월 每 日 申 報 社 편집부장을 퇴사하고, 1926년 4월 朝 鮮 思 想 通 信 社 를 창립했다. 한글판 편집을 책임질 정도로 출중한 조선어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5 재조선일본인의 조선어학습서, 경찰관의 조선어 시험 등 제도권 내에서의 조선어 보급과 교육의 권위자로 자리했으며, 초창기 조선어 연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조선어에 익숙하며 조선을 터전으로 생활한 재조선일본인인 伊 藤 韓 堂 은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토로 하는 내선융화 라는 이데올로기에 공명하고 있었으며, 피통치자인 조선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살피겠지만, 그는 조선인측의 의견을 듣지 않는 이른바 내지인 측을 비판한다. 그들과 달리 자신은 조선인들의 속마음을 엿보고, 그들의 의견(목소리)에 귀기울이려는 목적으로 朝 鮮 思 想 通 信 을 창간했다고 밝힌다. 7 18 년간 간행된 이 신문 전체 자료를 파악하며 시기에 따라 그 변화의 양상을 검토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요하므로 추후의 과제로 미룬다. 이번 발표에서는 朝 鮮 思 想 通 信 의 맥락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창사 1 주년 기념논문집인 朝 鮮 及 朝 鮮 民 族 제 1 집(1927)을 중심으로 伊 藤 韓 堂 이 주목한 식민지 목소리 와 그 중 당국이 금지시킨 특별한 목소리가 무엇이었으며, 이 지면에 글을 쓴 조선 지식인들의 일본어 글쓰기의 욕망 등에 대해서 간단히 검토하고자 한다. 2. 朝 鮮 及 朝 鮮 民 族 의 나타난 조선의 목소리 朝 鮮 及 朝 鮮 民 族 은 1927 년 8 월에 간행된 저서로 한국의 학계에서는 여기에 실려 있는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이라든가, 이능화의 천도교와 조선 등, 각 학문 분야와 관련된 글에 주목하며 제목만 인용되어 온 저작이다. 범례 에 따르면, 朝 鮮 思 想 通 信 社 창립 1주년을 기념하여 5 매일신보 1940 년 1 월 21 일자 3 면 6 단에 흥미로운 기사를 전하고 있다. 경성방송국 제 2 방송국에서 내지인으로서 조선에 오래 살며 조선말이 능통한 분 4, 5 명을 모아가지고 수십년전의 조선의 교육풍속 교통 산업등을 오날과 비교하야 조선의 今 昔 을 이야기하는 좌담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 참석자로 통역관 田 中 德 太 郞, 통역관 西 村 眞 太 郞, 조선통신사 伊 藤 韓 堂, 본부촉탁 中 村 健 太 郞 등이라고 밝히고 있다. 伊 藤 韓 堂 등의 조선어 실력을 가늠케 해주는 기사이다. 6 일석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연구회 로 출발하였다가 당시 伊 藤 韓 堂 이 동일한 명칭의 조선어연구회 를 만들어 태평로에 사무소를 두고 일본인을 상대로 한글을 가르치며 월간 잡지 조선어연구 를 간행하였기 때문에 회의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고쳤다고 한다.( 일석 이희승 전집 2,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488 쪽) 7 특히 朝 鮮 思 想 通 信 의 초창기에는 조선인의 속마음 을 엿보기 위해서 검열 이전의 원고들을 번역 소개했다는 측면에서 이 신문은 검열 연구, 식민지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2
발행하였으며, 봄과 가을 2 회 출간할 계획이었지만 1 집을 끝으로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伊 藤 韓 堂 은 책머리의 本 書 の 刊 行 について 를 통해 이 저술의 간행 의미를 밝히고 있다. 내선인의 융합은 쌍방이 잘 이해하고 합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며 적을 알지 못하고 전쟁을 하려는 무모함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다. 만세소요 이래, 내지인 측에 있어서는 조선통치에 관한 여러 종류의 논의가 발표되고, 많은 서적들이 출판되었지만, 불가사의하게도 가장 중요한 조선인측의 의견과 비평을 취하려는 자가 없다. 조선을 연구했던 내지인 유지( 有 志 )의 의견은 말할 것도 없이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조선인 자신의 조선연구--특히 일본인의 조선통치에 대한 피치자로서의 조선인의 목소리는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주재하는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것에 의해서 약간이라도 조선동포의 기쁨과 슬픔, 분노를 추측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면, 그 희노애락을 아는 것만으로도 조선인은 지기( 知 己 )의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인사의 붓으로 된 논문집이다. 전연 학술연구에 속하는 것도 있다. 시사에 관한 평론도 있다. 근래의 신운동의 경향을 기술한 것도 있다. 내지인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한 것도 있다. 요컨대 朝 鮮 思 想 通 信 의 연장이며, 그것에 의해서 조선인의 조선 이 여하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면, 편자인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8 伊 藤 韓 堂 은 자신이 주재하는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조선인측의 의견과 비평을 취하고, 목소리를 듣기 위해 생겼으며, 그 결과로 조선인의 희노애락 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조선인에게서 知 己 의 감정을 얻게 되었다고 자평한다. 伊 藤 韓 堂 은 일본인이 조선인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서 비판하며,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 자신의 통신사가 생겼다고 밝힌다. 식민지/제국의 불균등한 권력관계에서 식민지인의 목소리 는 일본어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제국에 들리지 않는다. 조선어를 듣고 말할 수 있으며, 식민자인 일본인이지만 식민지 사회의 접촉 지대에 있는 재조선일본인이라는 특수한 중간자의 위치를 거점으로 伊 藤 韓 堂 은 조선인의 목소리를 내지인측에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한다. 그렇다면 伊 藤 韓 堂 이 전달하고자 한 조선의 목소리 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즉, 伊 藤 韓 堂 (혹은 朝 鮮 思 想 通 信 社 )가 생각하는 의미있다고 판단하는 조선인의 목소리 를 이 책에 실려있는 구체적인 목차를 통해 개괄해 보자. 연번 논문제목 필자 프로필 비고 1 題 字 朝 鮮 及 朝 鮮 民 族 吳 世 昌 2 不 咸 文 化 論 崔 南 善 3 朝 鮮 民 族 思 想 變 遷 の 槪 要 李 覺 鍾 雜 誌 新 民 社 長 4 朝 鮮 民 衆 運 動 の 過 去 及 現 在 趙 奎 洙 朝 鮮 日 報 記 者 8 伊 藤 韓 堂, 本 書 の 刊 行 について, 朝 鮮 及 朝 鮮 民 族 제 1 집, 朝 鮮 思 想 通 信 社, 1927. 8. 3
5 黨 爭 と 朝 鮮 人 洪 承 耈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囑 託 6 我 がハンクル( 諺 文 )の 世 界 文 字 上 の 地 位 崔 鉉 培 延 喜 專 門 學 校 敎 授 7 繼 子 根 性 と 朝 鮮 人 の 心 境 閔 泰 瑗 中 外 日 報 編 輯 局 長 8 西 北 地 方 の 朝 鮮 人 の 特 質 朴 尙 僖 朝 鮮 思 想 通 信 社 東 京 特 派 員 9 溫 突 文 化 傳 播 考 孫 晉 泰 10 朝 鮮 民 族 政 治 運 動 の 一 般 的 趨 勢 ( 削 除 ) 李 灌 鎔 現 代 評 論 主 幹 11 我 我 の 白 紙 はどうする 柳 一 宣 12 朝 鮮 の 思 想 善 導 と 言 論 金 丸 國 民 協 會 相 談 役 時 事 評 論 主 幹 13 朝 鮮 の 學 政 當 局 はなぜ 朝 鮮 語 を 度 外 視 するか 李 完 應 朝 鮮 語 硏 究 會 장 14 此 の 差 別 待 遇 を 奈 何 徐 椿 東 亞 日 報 政 治 部 長 15 朝 鮮 時 文 の 變 遷 鄭 萬 朝 京 城 帝 國 大 學 講 師 16 天 道 敎 と 朝 鮮 李 敦 化 開 闢 社 理 事 17 世 界 の 大 勢 と 朝 鮮 の 將 來 (삭제) 宋 鎭 禹 東 亞 日 報 主 筆 18 朝 鮮 衡 平 運 動 の 槪 觀 19 朝 鮮 女 性 運 動 の 過 去 現 在 及 將 來 朝 鮮 衡 平 社 本 部 黃 信 德 ( 女 史 ) 前 中 外 日 報 記 者 20 朝 鮮 過 去 の 回 顧 李 允 熙 京 城 第 一 高 普 敎 諭 21 吾 人 をして 少 しく 語 らしめよ 安 在 鴻 朝 鮮 日 報 主 筆 22 內 鮮 一 體 론について 鮮 于 金 筍 대동동지회장 23 朝 鮮 靑 年 の 求 むる 將 來 の 基 督 敎 洪 秉 璇 朝 鮮 基 督 敎 靑 年 會 聯 合 會 幹 事 24 無 窮 花 考 禹 浩 翊 崇 實 專 門 學 校 敎 授 25 意 志 の 人 實 行 の 人 李 圭 完 趙 岡 熙 朝 鮮 思 想 通 信 記 者 26 今 後 の 朝 鮮 耶 蘇 敎 會 梁 柱 三 朝 鮮 南 監 理 敎 傳 道 局 總 務 牧 師 27 佛 敎 渡 來 前 の 朝 鮮 と 渡 來 後 の 朝 鮮 權 相 老 雜 誌 佛 敎 主 筆 28 危 機 に 瀕 せる 朝 鮮 敎 育 界 柳 一 宣 29 本 誌 寄 稿 家 諸 氏 略 曆 30 附 錄 - 朝 鮮 各 地 の 風 俗 の 內 から-( 東 亞 日 報 社 懸 賞 募 集 ) 柳 完 熙 (역) 필자들의 면면은 이 책의 기획자가 1920 년대 조선사회의 지형을 파악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 당대 조선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각 종교계의 핵심적인 필자들인 권상로, 이돈화, 양주삼 등의 글이 실려 있다. 언론 및 사상의 측면에서는 동아, 조선의 양대 신문의 주필인 안재홍과 송진우, 20 년대의 중요잡지인 현대평론 주필 이관용 등의 글이 실려 있다. 이들은 1920 년대 이후 연정회의 자치론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그리고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운동 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후 대표적인 친일파 로 거론될 4
대동동지회 선우순, 동민회 이사인 유일선, 국민협회의 김환 등이 나란히 포함되어 있다. 9 요컨대, 伊 藤 韓 堂 (혹은 기획자)는 이른 시기에 내선일체론 을 펴고 참정권 운동을 펼치는 내지연장론자들로부터, 문화통치의 한도 안에서 실력을 양성하고 자치론으로 나아가고 있는 연정회(송진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인 안재홍, 신간회 간사 이관용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다양한 조선의 목소리를 골고루 전달하고자 한 듯하다. 그렇지만 이토가 전달하려한 조선인의 목소리는 검열에 의해 전문 삭제와 자 복자로 누벼진 목소리의 텍스트로 출판되었다. 우선, 하와이 범태평양민족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송진우의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 10 가 전문 삭제되었다. 11 다음으로 이관용의 조선민족정치운동의 일반적 추세 도 전문삭제되었다. 이관용은 이른바 정미칠적 으로 불리는 자작 이재곤의 아들이면서도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현대평론 주필과 신간회 간사로 활동했다. 현대평론 은 흔히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및 사회주의 지식인 계열이 함께 참여한 조선사정연구회의 기관지로 간주되었던 잡지이다. 이관용의 사상적 경향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책의 관계자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다. 12 안재홍도 전체 글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조선인과 국어문제 라는 장이 전문 삭제당했다. 이외에도 범례에서는 민태원, 조규수의 논문 등이 십수항 삭제 당했다고 적고 있다. 목차에서 확인되고 범례에서 밝힌 외에도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면 많은 논문들이 검열에 의해 부분 삭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3 이러한 검열의 결과로 인해 이토가 전하려 했던 다양한 조선인의 목소리 는 삭제되거나 불구화하고, 한 가지 형태의 목소리만이 온전한 형태로 전달된다. 그것은 국민협회, 동민회 등의 적극적 체제 협력 단체들이 주장하는 내선융화 혹은 내선일체 의 목소리이다. 이를테면, 내선인이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즈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대륙 방면으로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웅비하는 방법은, 조선을 독립시켜 소위 삼천리 강산과 2 천만 인구로써 나가기보다 일본과 하나가 되어, 넓은 면적과 7 천만의 인구로 나가는 방법이 확실히 유리할 9 선우순과 유일선은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 1920 년 2 월 5 일자에서 이완용, 송병준, 민원식 등과 함께 처단해야 할 賣 國 賊 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당대의 거물 친일파 의 일인이다. 10 송진우,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 동아일보 1925. 8. 28. - 9. 6(총 15 회) 11 흥미로운 것은 1925 년 동아일보 게재 당시에는 이러한 전면 삭제의 검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검열기구가 정착 강화되어가는 과정과 관련될 것인데, 조선인에게 허용되는 민족주의 논설이 일본인 독자에게는 금지되는 기묘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이동하는 텍스트의 번역 과정에 작동하는 검열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떠올리지만, 거꾸로 식민지에서 생산된 텍스트가 본국 쪽으로 이동할 때의 검열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듯하다. 식민지/제국의 불균등한 권력과 문화적 역량 때문일 터이지만, 朝 鮮 及 朝 鮮 民 族 과 같은 내지의 일본어 독자를 상정한 책에서 식민지와 동일한 기준이 작동하는 것은 흥미롭다. 검열이 그것을 읽는 독자와 무관하게 검열이 이루어지는 법역에서의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12 이관용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씨는 明 治 23 년생으로, 이왕가의 근친 자작 李 載 崐 씨를 아버지로 둔 인물이다. 명치사십일년 동경부립제 4 중학교졸업, 대정 2 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에 건너가 옥스퍼드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위스, 독일의 3 국에서 6, 7 년간 철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의지론 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의 학위를 얻고 대정 11 년 귀국, 연희전문교수, 14 년 시대일보 부사장이 되었지만, 지금은 잡지 현대평론 의 주간으로서 필진을 확장하는 외, 신간회 및 기타 사회주의단체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371 쪽) 13 이들 중에서 한글 신문 잡지에 발표된 후 이 책에 번역되어 수록되면서 검열된 글들은 한글 판본과 일본어 판본, 그리고 해방 이후 원래 전체원고의 재출판분을 함께 교차 대조하면 당대 검열의 기준과 구체적인 적용 등에 대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5
것 14 이라고 주장하는 선우순의 內 鮮 一 體 論 について 는 조금의 삭제 없이 제 목소리 그대로 발화된다. 검열을 통해 朝 鮮 及 朝 鮮 民 族 에서는 조선의 정치적 현재와 미래와 관련해서는 내선융화, 내선일체 를 자발적으로 요구하는 정치세력의 목소리만이 온전한 형태로 전달되었다. 어쩌면 이토는 애초부터 이 계열의 조선인 목소리를 부각시켜 들려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이 기획의 주최측인 朝 鮮 思 想 通 信 社 기자인 조강희가 쓴 意 志 の 人 實 行 の 人 李 圭 完 은 그 증거이다. 일본인들에게 조선인도 나태한 것만이 아니라 우수한 자질을 지닌 민족임을 언명하며 갑신정변의 한 주역으로 이후 식민지에서 강원도지사, 함경남도지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을 역임한 이규완의 일화를 통해 바람직한 조선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규완은 식민지화와 총독정치를 칭송하며 참정권의 획득을 기대했던 인물이다. 편집의 주체인 朝 鮮 思 想 通 信 社 측에서 이러한 이규완의 인물됨과 관료이자 동척 고문으로서의 유능함을 강조하는 자사 기자의 글을 포함시킨 것은 이 책에서 보다 중점을 두어 전달하고자 하는 조선인 목소리의 실체를 암시한다.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재구성해야 하는 재조선일본인과 식민지화를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인식한 자치론자(혹은 내지연장주의자)들 사이의 공통되는 정치적인 입장이 朝 鮮 思 想 通 信 이 발신하는 조선의 목소리 였다고 할 수 있다. 3. 일본어 글쓰기를 통한 조선 의 주체화 그렇다면, 조선인측에서는 이 지면에 왜 글을 실었을까? 우선은 伊 藤 韓 堂 과의 네트워크와 통신사 측의 섭외 등을 염두에 둘 수 있지만, 그 상세한 사정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사실, 식민지 당국에 대한 불평과 비판, 요구 등은 조선사회의 저널리즘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인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일본 독자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지면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朝 鮮 思 想 通 信 社 의 기획은 조선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에게 조선(인) 을 이해시키고, 다양한 요구, 비판 등을 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15 학술 논문은 일본인에 대한 직접적인 요구와 무관한 영역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어떤 글 보다도 일본인 독자를 의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朝 鮮 及 朝 鮮 民 族 의 권두논문격인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에 주목하고 싶다. 1925 년 12 월에 작성되어 이 책에 최초로 발표된 이 장문의 학술 논문은 동양학의 진정한 건립은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의 비밀의 옛 문이 열림을 기다려 비로소 시작 된다고 주장하며 시작한다. 최남선은 이 논문을 통해 단군 이후의 조선민족의 단일성을 언급하고, 중국과 동등 혹은 우월한 동이문화를 설정하며, 특히 조선과 일본을 포함한 불함문화권 을 제시한다. 최남선은 단군을 특수한 공동체의 기원으로 설정하면서 동시에 문화권 논의를 통해서 복수의 세계문화권의 중심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논의 구조가 중국문화를 타자화하면서 새롭게 동양 이라는 지정학적 권역을 창안했던 동양사학의 담론틀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는 일본 동양사학자들의 단군신화에 14 선우순, 內 鮮 一 體 론について, 위의책, 208 쪽. 15 가령, 이완응의 朝 鮮 の 學 政 當 局 はなぜ 朝 鮮 語 を 度 外 視 するか 는 필수과목인 조선어과를 학교에서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고, 조선어 교과서 내용의 부실에 대해서 총독부 학무국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을 토로하고 있다. 6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반박하며 근대학문의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하여 일본 동양사학이 창출한 동양 에 필적하는 동방문화권의 방법적 거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불함문화론은 단군 민족주의만을 주창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주도자로 하는 동방문화권이라는 광역의 문명권을 담론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이다. 최남선은 제국의 학술 아카데미즘을 강하게 의식하며 그들이 구축하는 동양사 에 단군 을 매개로 하여 개입하고 그것을 변형시키려고 시도했다. 그가 이 연구를 집필할 때 의식한 직접적인 독자는 아마도 제국의 동양사 아카데미즘이었으며, 이 글을 통해 제국의 학술에 연루되길 원했을 것이다. 제국의 학술에 자신을 증명하고 조선을 기입하는 작업은 조선어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어쩌면 해방 이후의 전집 작업을 통해 한국어로 번역될 때까지 최남선이 이 글을 조선어로 발표하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호익의 無 窮 花 考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우선 무궁화의 여러 異 稱 들과 文 學 上, 醫 學 上, 식물학상에 나타난 무궁화 등을 설명한다. 이어서 중국의 고대 漢 籍 이 무궁화를 군자국의 꽃 이라 명명한 것에 대해 그 군자국을 일본으로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의 학설을 문헌학적 고증을 통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군자국 을 조선으로 실증한다. 문학, 의학, 식물학에 관한 근대 학술의 방법을 적용하고 문헌고증학을 통해서 조선 이라는 주체성을 표상하는 무궁화 론을 구성하는 이 글 역시 일본어 학술에 대해 강하게 의식하며 잠재적 독자로 일본인 학자들을 상정하고 있다. 16 최남선과 우호익의 글은 조선의 주체성을 구성하려는 조선연구가 일본인의 일본어 학술을 강하게 의식하며 형성되었으며, 일본어 글쓰기와 근대 학문의 형식을 통해 일본 학술계에 자신을 각인시키고, 조선 을 거점으로 제국이 구성한 담론의 체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강한 주체화의 욕망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20 년대 조선 지식인들의 일본어 학술 글쓰기의 면모를 검토하면서, 식민지 말기 최재서가 주관한 국민문학 을 떠올리게 된다. 최재서의 국민문학 도 이와 마찬가지로 내지 에 조선 이라는 특수성을 각인시키고 접속시킴으로써 새로운 국민문학 즉, 제국의 문학 전체를 변형시키기 위해 일본어 로 발신된 조선의 목소리 가 아니었을까? 1920 년대의 조선의 목소리 가 온정적이고 시혜적인 재조일본인의 매개에 의해 전달되었다면, 새로운 세대들은 그러한 매개없이 내지 에 조선의 목소리 를 발신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未 完 ) 16 이 글은 朝 鮮 及 朝 鮮 民 族 을 통해 일본어로 전체 원고가 먼저 발표되고, 1927 년 동광 13, 15 호에 무궁화고 상, 중이 발표된 후 다시 그 나머지 부분이 1928 년 청년 6, 7 호에 무궁화예찬 으로 발표된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