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37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나카노 히토시( 中 野 等 ) 머리말 Ⅰ. 근세 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Ⅱ. 근세 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Ⅲ. 근대 일본의 성립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 Ⅳ. 패전 이후 80년대에 이르는 연구 동향 Ⅴ. 관심의 다양화와 문제점 머리말 이른바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이라고 부르는 전쟁에 대하여 어떤 명칭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논의 자체가 이미 学 説 史 를 이룬다고 할 수도 있다. 동시대의 사료에는 唐 入 り 大 明 へ 御 道 座 라는 표현이 보이지만, 근세 초기에는 堀 正 意 의 朝 鮮 征 伐 記 로 대표되듯이 唐 入 り 는 朝 鮮 征 伐 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가는 듯하다. 그밖에 朝 鮮 陣 高 麗 陣 征 韓 이라는 표현도 많이 사용된다. 어찌됐든 征 明 등의 표현처럼 중국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보다 朝 鮮 高 麗 등을 씌워서 전쟁을 호칭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근대로 들어서서 한반도가 식민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朝 鮮 征 伐 이나 征 韓 등의 표 현을 피하고 文 祿 의 役 및 慶 長 의 役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이를 합쳐서 文 祿 慶 長 의 役 이라는 명칭이 정착한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일본의(내지 일본에서 본) 입장 이며,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壬 辰 倭 亂 과 丁 酉 再 亂, 중국에서는 抗 倭 援 朝 万 曆 朝 鮮 役 또는 万 曆 日 本 役 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이다. 그 후 60년대로 들어서면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파병이 侵 略 행위라는 의식이 강해 지게 되며, 일본에서는 朝 鮮 侵 略 이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한편, 일본은 물론 원래부터 한국 중국의 풍부한 연구 축적을 바탕으로 전쟁이라는 호칭에 대해서도 다시
23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貫 井 正 之 씨는 豊 臣 秀 吉 의 대외적 인 정복의도 전반을 검토하고 책 이름에 海 外 侵 略 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으며( 豊 臣 政 権 의 海 外 侵 略 과 朝 鮮 義 兵 研 究 青 木 書 店 1996), 中 野 는 파병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明 나라 정복에 있었다고 하면서 大 陸 侵 攻 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물론 大 陸 에는 한반도도 포함된다. 秀 吉 의 軍 令 과 大 陸 侵 攻 吉 川 弘 文 館 2006). 또 李 啓 煌 씨도 전쟁 의 명칭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전쟁이 동아시아 전 지역과 관 계되는 國 際 的 戰 争 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文 祿 慶 長 の 役 と 東 アジア, 臨 川 書 店 1997). 말할 필요도 없이 명칭에 대한 재고는 이 전쟁의 一 國 史 的 이해 를 다시 파악하려는 흐름과도 관련되어 있다. 즉 이 전쟁을 새롭게 동아시아 삼국전쟁 이라는 관점에서 재 검토하려는 국제학술회의는 전쟁의 명칭을 壬 辰 戰 爭 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 다( 鄭 杜 熙 李 璟 珣 편저 壬 辰 戰 爭, 여기서는 金 文 子 監 譯 小 幡 倫 裕 譯 일본어판을 이 용. 明 石 書 店 2008). 이처럼 최근에는 일본 한국 중국에 공통적인 명칭을 생각해 내야 한다는 논의도 있는 모양이지만, 전쟁의 명칭이 역사의식의 반영인 이상 그것도 결코 용 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부질없는 혼란을 피하는 의미에서 여기서는 그와 같은 현상 인식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고, 전쟁의 명칭에 대하여는 2005년 11월에 간행된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報 告 書 第 2 分 科 篇 (이하 共 同 報 告 書 로 약칭함)에 따라 일단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겠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한 学 説 史 에 대해서는 共 同 報 告 書 에서 이미 주제 별로 매우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성과를 토대로 하여, 다소 잡 박하지만 時 系 列 的 인 관심에서부터 검토하려고 한다. Ⅰ. 근세 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먼저 앞에서 말한 共 同 報 告 書 에서도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근세 일본 ( 江 戶 時 代 )의 학설사에 대해서 전후기로 나누어 간단히 정리해 두겠다. 이와 같은 관심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39 은 이미 先 學 들에 의하여 일정한 정리가 시도되었다. 예를 들면 三 鬼 清 一 郎 씨에게는 < 江 戸 時 代 에 있어서 朝 鮮 役 의 평가에 대하여>( 歷 史 評 論 373호 1981)가 있으며, 北 島 万 次 씨는 豊 臣 政 権 의 對 外 認 識 과 朝 鮮 侵 略 ( 校 倉 書 房 1990) 제1장 豊 臣 政 権 의 朝 鮮 侵 略 에 관한 學 說 史 的 檢 討 의 제1절과 같은 연구를 시도했다. 여기서도 그러한 연구 성과를 학습하면서 논술을 계속하고자 한다. 근세 일본에 있어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생각 할 때 먼저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豊 臣 秀 吉 의 傳 記 類, 즉 각종 < 太 閤 記 >일 것이다. 근세 일본에 있어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기억과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 면, 직접이든 간접이든 먼저 이 전쟁을 실제로 체험한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로 구분해서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 宇 都 宮 高 麗 戰 歸 陣 物 語 >와 < 梨 羽 紹 幽 物 語 > 등은 실제로 종군했던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서 史 料 로서도 중요하지만, 학설사의 정리라는 이 글의 작업과 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覺 書 類 에 대해서는 배제하기로 한다. 다양한 히데요시의 傳 記 중에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정리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은 < 信 長 公 記 >로 알려진 太 田 牛 一 의 < 豊 國 大 明 神 臨 時 御 祭 禮 記 錄 > 및 小 瀬 甫 庵 의 < 太 閤 記 >일 것이다. 太 田 牛 一 에게는 히데요시의 傳 記 로서 < 大 かうさまくんきのうち> 가 알려져 있는데, < 豊 國 大 明 神 臨 時 御 祭 禮 記 錄 >은 그 續 編 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하여 < 大 かうさまくんきのうち>에서 종합적인 기술을 한 것도 아니지만, < 豊 國 大 明 神 臨 時 御 祭 禮 記 錄 >을 언급하며 거듭되는 전쟁에서 일본은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며 히데요시의 공적을 찬양하고 있다. 이어서 寛 永 3년(1626)에 성립한 것 으로 보이는 小 瀬 甫 庵 의 < 太 閤 記 >(이하 甫 庵 < 太 閤 記 >)는 凡 例 에서 秀 吉 公 의 일도 善 을 善 으로, 悪 을 悪 으로 이를 기록한다 고 적은 것처럼 秀 吉 의 事 績 을 노골적으로 찬 양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본질은 당시 발흥하던 儒 学 思 想 에 기초한 史 論 書 라고 할 수 있으며, 반드시 史 実 의 穿 鑿 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용한 古 記 錄 은 간소 화 평이화되고, 더욱이 고문서에 이르러서는 儒 学 的 입장 등으로 인하여 改 竄 되고 창작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마저 있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과 관련해서 보자면 1전 후 두 차례 있었던 晋 州 城 전투를 合 體 시켜서 서술하고, 2 慶 長 2년의 巨 濟 島 ( 唐 島 ) 전 투를 文 祿 2년에 있었던 것으로 하고, 3 慶 長 2년의 蔚 山 전투를 文 祿 3년으로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文 祿 의 役 과 慶 長 의 役 의 구별이 불분명하게 되 어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최근의 柳 澤 昌 紀 씨의 연구성과(< 信 長 公 記 と 信 長 記, 太 閤
24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記 >, 堀 新 編 信 長 公 記 を 読 む 수록 吉 川 弘 文 館 2009)에 따르면, 甫 庵 < 太 閤 記 >는 太 田 牛 一 의 < 豊 国 大 明 神 臨 時 御 祭 礼 記 錄 >과 같은 史 観 을 답습한 것이며, 이른바 牛 一 太 田 이 묘사했던 < 見 取 圖 >를 체계적 疑 似 실증적으로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史 料 로서는 치명적인 문제를 품고 있으면서도, 甫 庵 < 太 閤 記 > 이전의 秀 吉 傳 記 本 과 비교하 여 압도적으로 높은 완성도와 체계성을 가지며, 서술 스타일도 대체로 편년체 형식을 취 한다. 내용적으로도 史 実 을 명쾌하게 재단 통제하는 일종의 구체적인 교훈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마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秀 吉 傳 ( 秀 吉 의 正 傳 )인 듯한 위치가 설정되며, 동시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러서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보이게 된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으로 한정했을 때, 甫 庵 < 太 閤 記 >와 견줄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는 저술은 堀 正 意 의 朝 鮮 征 伐 記 이다. 이 책의 성립에 관해서는 종래 中 村 栄 孝 씨가 주장한 寛 永 中 期 說 이 유력하지만, 최근에 위렘 부트씨는 慶 長 말년에서 元 和 초 에 성립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朝 鮮 征 伐 記 에 묘사된 전쟁-전후 어 떤 일본 유학자의 시선으로 본 秀 吉 ->, 鄭 杜 煕 李 璟 珣 편저 壬 辰 戰 争 수록). 그 내 용은 表 題 에서 명백하듯이 朝 鮮 出 兵 을 중심으로 한 秀 吉 의 傳 記 이며, 또한 朝 鮮 出 兵 을 대상으로 한 軍 記 物 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상적인 특징으로 많은 삽화와 히라가나( 平 仮 名 )가 섞인 문장을 들 수 있으며, 한자에는 토를 달아 놓았다. 따라서 정말로 유학자의 저작인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이점에 대해서 위렘 부트씨는, 본래의 텍스트는 한자와 가타카나( 片 仮 名 )를 섞어서 쓴 문장이며, 堀 正 意 에게는 출판할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추 측하고 있다. 그 문제는 어찌됐든 朝 鮮 征 伐 記 는 朝 鮮 出 兵 를 다룬 가장 오래된 저작 이며, 對 戰 國 특히 중국쪽의 동향에 상세하고 본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점에 관해 서는 萬 曆 34년( 慶 長 11, 1606) 중국에서 간행된 兩 朝 平 攘 錄 을 활용한 점을 들 수 있다. 강화교섭과 慶 長 의 役 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했으며, 이 점을 유야무야 넘어 간 甫 庵 < 太 閤 記 >적인 서술은 여기서는 부정했다. 다만 전쟁 본래의 목적이었던 大 明 國 정벌 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朝 鮮 征 伐 로 轉 化 되었으며, 이 점에 관해서는 앞으로 자 세히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기가 약간 내려가면 薩 摩 島 津 家 의 征 韓 錄 을 들 수 있다. 征 韓 錄 은 藩 主 島 津 綱 久 의 명으로 万 治 연간부터 家 老 島 津 久 通 가 総 裁 가 되어 편찬한 것이다. 관계된 고문서 고기록의 수록은 물론, 편찬할 때는 실제로 종군했던 家 中 의 古 老 에게 질문서를 돌리기도 했으며,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의 기억과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주 목할만한 성과이다. 島 津 久 通 는 跋 文 에서 近 代 吾 祖 從 朝 鮮 征 伐, 振 威 武 於 異 域, 立 功 業 尓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41 邦 家, 而 令 名 遍 四 海 라고 했는데, 주로 島 津 義 弘 및 久 通 의 祖 父 가 되는 島 津 圖 書 頭 忠 長 등의 武 功 顕 彰 에 치중하고 있다. 거의 동시기의 藩 主 家 顕 彰 이라는 점에서 공통되는 것 이 筑 前 黒 田 家 의 黒 田 家 譜 이다. 寛 文 11년(1671) 藩 命 을 받은 貝 原 益 軒 이 黒 田 家 譜 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延 寶 6년에 黒 田 家 譜 1 2권이 만들어졌으며, 다시 天 和 원년에 개정이 행해졌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은 권지6에서 권지8에 이른다. 그 내용은 조선에 있어서 藩 祖 如 水 長 政 의 顕 彰 에 주안점이 있다. 기술 속에서 朝 鮮 을 征 伐 한다는 표현이 나오기는 하지만, 益 軒 도 전쟁 자체에는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전쟁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판단 보류라고 할만한 태도를 보인다. 즉 이들 家 譜 편찬 藩 祖 顕 彰 에 있어서 말로는 朝 鮮 征 伐 이라는 표현을 채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열성적인 서술은 원래부터 대상 인물의 顕 彰 에 있으며, 朝 鮮 征 伐 에 대한 언설을 적극 적으로 정의하려는 태도는 느낄 수 없다. 朝 鮮 征 伐 史 観 이 근세 일본에서 정착되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山 鹿 素 行 의 저작을 잊을 수 없다. 延 寶 원년(1673)에 성립한 武 家 事 紀 는 그 이름대로 武 家 의 実 事 를 정 리한 서적인데, 일본에서 처음으로 역사연구에 고문서를 광범위하게 활용한 저술로 알 려져 있다. 그 실증성 합리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古 案 으로 불리는 文 書 集 이다. 여기 에는 織 田 豊 臣 神 君 今 川 武 田 北 条 長 尾 ( 上 杉 ) 毛 利 기타 여러 家 文 書 가 수록되어 있 는데, 豊 臣 家 古 案 ( 下 ) 권31은 사실상 朝 鮮 出 兵 関 係 史 料 集 이다. 한편 素 行 은 日 本 中 朝 主 義 ( 日 本 中 華 主 義 )를 제창하면서 일본이야말로 万 邦 에서 가장 뛰어난 나라 라고 했다. 거기서는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의 総 括 도 秀 吉, 만년에 이르러 조선을 정벌 했다. 그 勇 胆, 고금에 뛰어나다. 무릇 조선이 本 朝 의 属 国 藩 屛 이라는 사실은 그 옛날 神 功 皇 后 가 三 韓 을 정벌한 때부터의 일이며, 그러한 것은 대대로 舊 記 에 명백하다. ( 中 略 ) 따라서 秀 吉 이 조선정벌을 시행한 것이고, 秀 吉 의 薨 逝 로 말미암아 그 공적이 불완전하다 해도 本 朝 의 武 威 를 異 域 에 떨친 일은 神 功 皇 后 이후 秀 吉 의 治 世 에 있었다. 라는 이야기 가 된다. 日 本 中 朝 主 義 라는 이름 아래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위치시킴으로써 朝 鮮 과 征 伐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위화감을 일거에 해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京 都 의 醫 師 松 下 見 林 이 異 稱 日 本 傳 이라는 책을 편찬한다. 先 哲 談 叢 続 編 에 따르면, 見 林 은 매년 사람을 나가사키로 보내 외국서적을 사오게 하고 직접 이 책을 읽었으며, 또 子 弟 들에게도 이를 읽도록 했다. 따라서 보관하는 책이 이것저것 합쳐서 거의 10만권이나 되었으며,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책 빌리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親 疎 를 묻지 않고 오로지 그가 원하는 바대로 따랐을 뿐이다. 절대로 아끼고 인
24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색한 빛이 없었다 고 한다. 元 祿 戊 辰 (원년 1688) 9월 己 亥 에 쓴 自 序 에 따르면, 異 稱 日 本 傳 의 異 稱 이란 諸 異 邦 之 人 稱 之 之 語 也 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異 稱 日 本 傳 은 일찍이 異 邦 人 이 日 本 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하는 관심에 따라서 정리한 서 적이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해서는 중국의 皇 明 実 記, 両 朝 平 攘 錄, 図 書 編 과 조선의 懲 毖 錄 등을 참고하여 관계사료를 엮었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의 의의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논한 성격의 책은 아니지만, 이 전쟁과 관련된 해외 사료가 망라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클 것이다. 異 稱 日 本 傳 에서도 채택한 懲 毖 錄 은 元 祿 8년 일본에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福 岡 藩 유학자 貝 原 益 軒 이 서문을 썼는데, 서문에서 傳 曰, 用 兵 有 五, 曰 義 兵, 曰 應 兵, 曰 貪 兵, 曰 驕 兵, 曰 忿 兵, 五 之 中, 義 兵 与 應 兵, 君 子 之 所 用 也, 傳 又 曰, 國 雖 大, 好 戰 則 必 亡 天 下, 雖 安, 亡 戰 則 必 危, 好 与 亡 二 者, 可 以 不 戒 守 哉, 曩 昔, 豊 臣 氏 之 伐 朝 鮮 也, 可 謂 貪 兵 兼 驕 与 忿, 不 可 為 義 兵 이라고 했다. 益 軒 은 전쟁을 義 兵, 應 兵, 貪 兵, 驕 兵, 忿 兵 의 5종류로 나눈 뒤에 秀 吉 의 朝 鮮 派 兵 을 貪 兵 驕 兵 忿 兵 이라고 했으며, 義 兵 으로 자리매김하지 않고 명확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懲 毖 錄 의 저자 柳 成 龍 은 일본의 침략 때 宣 祖 밑에서 左 議 政 겸 兵 曹 判 書 를 지낸 인물로서 그 후에 실각하지만 평양 수복 후에 領 議 政 으로 부활하며, 京 畿 黄 海 平 安 咸 鏡 道 體 察 使 를 겸직했다. 懲 毖 錄 은 그와 같은 정부 고관의 입장에서 이 전쟁 을 전반적으로 논한 것이며, 집필 목적은 내가 그것을 懲 하여 후일의 재난을 경계 함에 있었 다. 조선왕조는 국가 기밀의 유출을 우려하여 懲 毖 錄 의 일본 출판을 꺼렸지만 이후에도 유 출이 근절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懲 毖 錄 을 얻음으로써 조선쪽과 관련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의 記 述 이 종합적이며 세부적인 것이 되어 갔다. 근세 중기가 되자 正 徳 度 通 信 使 의 응접을 담당했던 新 井 白 石 과 근세국가의 자립을 희망했던 荻 生 徂 徠 등이 각각의 저술에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하여 논하고 있지만, 지면 관계도 있으므로 여기서는 깊이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Ⅱ. 근세 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18세기 후반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영향력 있는 論 陣 을 폈던 인물은 本 居 宣 長 이다. 宣 長 의 역사 연구는 古 事 記 傳 으로 상징되는 고대사 연구가 중심이기는 한데, 거의 같 은 시기의 저작으로 安 永 6년(1777) 12월에 成 稿 하고 寛 政 2년에 간행된 馭 戎 慨 言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43 이 있다. 이 書 名 은 중국과 조선을 서쪽의 야만족인 戎 으로 간주하고, 이들에게 万 国 을 다스리는 天 照 大 御 神 의 生 国 인 우리나라가 본보기를 보인다, 즉 統 御 해야 한다는 입장 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日 本 中 心 主 義 와 尊 内 外 卑 에 입각하여 중국 조선 과의 외교 교섭의 역사를 慷 慨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2권 4책의 구성인데,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은 下 之 巻 下 전편에 걸쳐 있어서 그 비중이 매우 높다. 両 朝 平 攘 錄 懲 毖 錄 등 중국과 조선의 史 籍 도 근거로 삼고 있지만, 전쟁의 전 과정을 자세히 관 찰했다기보다는 강화교섭 과정과 외교문서의 文 言 등을 상세히 논하는 일에 역점을 두 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술 목적이 国 学 的 正 名 論 을 밝히는 일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 하다. 또 이 전쟁이 별다른 성과도 없이 秀 吉 의 죽음으로 종결된 까닭은 秀 吉 이 자신의 위세에 의지하여 전쟁을 시작했고, 神 功 皇 后 의 神 助 를 얻으려 하지 않았던 점에 원인이 있으며, 무고한 조선 민중을 함부로 살육한 것도 神 功 皇 后 의 神 意 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요컨대 지금까지는 神 功 皇 后 의 三 韓 征 伐 에 대해 서 秀 吉 의 조선 파병의 先 駆 가 되는 것으로 보고 양자의 관계를 順 接 的 으로 설명해 왔는 데, 이 책에서는 秀 吉 의 外 征 을 아득한 神 功 皇 后 의 外 征 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論 断 하 고 있다. 馭 戎 慨 言 에 대해서는 앞에서 본 異 稱 日 本 傳 의 요약문처럼 좋지 않다 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지만, 한편에서 宣 長 의 의학의 스승인 武 川 幸 順 은 감명을 받고 당 시의 摂 政 九 条 尚 実 에게 헌상할 것을 시도하여 漢 学 者 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불 러일으켰다. 약간 앞 시기의 일이 되는데, 大 国 隆 正 은 정통 国 学 의 学 統 을 논하려 했던 学 統 弁 論 ( 安 政 4, 1857년 9월 序 ) 속에서 本 居 宣 長 을 평하여, 이 인물의 篤 学 은 古 今 에 유례가 없으며, テニオハ( 譯 註 ; 弖 爾 乎 波, 옛날 조사 조동사 접미사 용언의 어미 등에 붙 여 그 의미를 명확히 하던 말의 총칭. 한문을 훈독할 때 한자의 네 구석에 テ ニ オ ハ 를 붙였던 것에서 비롯함)의 三 転 을 발명하여 詞 의 玉 緒 를 撰 한 것은 語 学 의 開 祖 라 고 할 수 있다. 馭 戎 慨 言 에서 護 国 의 마음가짐을 드러내고, 玉 鉾 百 首 에서 우리 의 学 意 를 언급한 것 등은 他 人 이 미치지 못한다. 고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 宣 長 이 죽은 뒤의 문하생인 伴 信 友 가 일본 및 중국 조선 蝦 夷 琉 球 등의 異 国 異 域 과의 교류사를 国 学 의 입장에서 논하며 中 外 經 緯 傳 을 저술한다. 中 外 經 緯 傳 은 고대 日 朝 関 係, 儒 佛 의 일본 전래, 義 經 北 方 傳 説, 為 朝 渡 琉 傳 説, 日 琉 交 渉 史, 朝 鮮 出 兵, 琉 球 征 伐 등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전체 6부의 구성이며, 권2 중간에 文 化 3년 12월 伴 信 友 稿 라는 말이 보인다. 本 編 에 朝 鮮 出 兵 의 경위를 간단하게 서술했 는데, 오히려 중요한 것은 中 外 經 緯 傳 草 稿 第 四 부터 同 草 稿 第 六 까지의 부분일
24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것이다. 즉 征 戎 遺 文 類 第 一 부터 同 第 三 에 해당한다. 征 戎 이라는 표현은 스승인 宣 長 의 馭 戎 을 답습한 것일까? 어찌됐든 征 戎 遺 文 類 는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한 古 文 書 集 의 체제를 이룬다. 수록된 사료는 甫 庵 의 < 太 閤 記 > 등을 出 典 으로 한 것도 있 는데, 그 중에는 諸 藩 의 가문에 전래하는 문서들도 다수 인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료 수집 과정을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經 世 家 로 알려진 佐 藤 信 淵 은 같은 고향( 出 羽 秋 田 )의 国 学 者 平 田 篤 胤 과 관계를 형성 해 가는 속에서 日 本 書 紀 古 事 記 등의 고전에 기초하여 독자적인 국가관을 형 성한다. 이 글에서의 관심에서 보자면 宇 内 混 同 秘 策 에서 대륙침공을 논하고 있는데, 出 雲 松 江 과 長 州 의 萩 에서부터 한반도의 東 海 岸 을 經 略 하고, 博 多 에서부터는 한반도 남해 안을 공략해야 한다는 具 體 案 까지 제시하고 있다. 伴 信 友 佐 藤 信 淵 등과 동시대인 文 化 文 政 期 에는 頼 山 陽 이 日 本 外 史 중에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을 대대적으로 취급하게 된다. 山 陽 은 広 島 藩 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国 学 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데, 다시 陽 明 学 者 인 大 塩 平 八 郎 과 친교가 있었 다. 그의 역사 사상은 名 分 과 時 勢 의 2원론적 입장 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유학적 사상 요소인 名 分 을 기축으로 하면서 時 勢 라는 비유학적 사상 요소를 편입하여 역사인식 을 전개하려고 했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한 서술은 < 太 閤 記 >, 朝 鮮 征 伐 記, 朝 鮮 軍 記, 朝 鮮 物 語, 清 正 記, 懲 毖 錄 등 내외의 軍 記 物 語 를 소재 로 하여 한문으로 꾸민 것이다. 다만 엄밀한 고증의 성과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시각 에서 보자면 내용상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역사서술이라기보다 는 일종의 문학작품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織 田 家 의 部 将 이던 무렵부터 秀 吉 은 信 長 을 위하여 韓 및 明 에 대한 공격을 요청 했는데, 그 후 豊 臣 씨의 치세에 이르러 明 의 백성이 혹은 와서 투항하는 자가 있으며, 明 主 朱 翊 鈞 ( 神 祖 萬 曆 帝 )이 失 政 을 하고, 武 備 를 갖추지 않았음을 듣고 더욱 이를 엿보려고 생각했다 고 한다. 日 本 外 史 자 체는 인물 중심의 기술인데,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서도 加 藤 清 正 과 小 西 行 長 의 대립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行 長 은 清 正 을 시기했다. 清 正 은 三 成 에게 미움 을 받았고, 行 長 은 이를 즐겼다. 서로가 상대를 헐뜯었다 고 하여 石 田 三 成 을 끌어들임 으로써 清 正 과 行 長 의 대립을 세키가하라 전투( 関 ヶ 原 合 戰 ) 의 伏 線 에 자리매김하는 구 성을 이루고 있다. 時 勢 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역사의 흐름을 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弘 化 원년에 川 越 藩 에서 学 問 所 博 喩 堂 蔵 版 으로 日 本 外 史 가 출판되었고, 다시 嘉 永 원년에는 頼 家 에서 교정을 추가한 책이 大 坂 에서 출판되었다. 川 越 本 頼 氏 本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45 모두 환영을 받고 출판을 거듭했으며, 諸 藩 의 藩 校 에서 교과서로 채용했고, 明 治 이후에 도 몇 종류의 판본이 출판되었다. 日 本 外 史 는 幕 末 에서 明 治 에 걸쳐 많은 독자를 가진 歴 史 書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후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史 実 이해 는 물론 역사 서술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山 陽 의 日 本 外 史 와 함께 幕 末 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을 이해하는데 근본적 인 영향을 끼쳤던 것은 후기 水 戸 学 의 学 統 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저작은 天 保 2년 (1831)에 간행된 水 戸 彰 考 館 편수 총재 川 口 長 孺 의 征 韓 偉 略 전5권이다. 간행할 당 시에 書 肆 ( 大 坂 河 内 屋 茂 兵 衛, 江 戸 北 島 順 四 郎, 江 戸 西 宮 弥 兵 衛 )가 게재했던 広 告 文 은 당시의 사회가 이 저작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려 했는지를 엿보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아래에 인용해 둔다. 豊 太 閤 의 조선정벌은 우리 일본의 武 威 를 외국에 떨친 盛 挙 로서 国 史 를 편수하는 자가 考 究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漢 土 朝 鮮 의 書, 日 本 諸 家 의 秘 冊 을 인용하여 추호의 私 感 도 더하 지 않았으며, 年 月 地 理 를 推 考 하고, 사실의 경과 功 의 実 否 를 考 正 했다. 조선정벌의 実 錄 이다. 간단히 요약한 기사지만, 여기에 적었듯이 征 韓 偉 略 은 室 町 단계의 日 朝 関 係 를 약술한 뒤에 明 史, 両 朝 平 攘 錄, 懲 毖 錄, 朝 鮮 征 伐 記, 太 閤 記, 豊 臣 秀 吉 譜, 歴 代 鎮 西 要 略, 黒 田 家 記, 鍋 島 家 記 등 당시로서는 正 統 으로 생각되는 史 籍 軍 記 類 를 명시적으로 인용하면서 天 正 14년부터 慶 長 3년에 이르기까지 의 외교 전쟁 상황을 한문으로 정리한 책이다. 그 결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 하여 매우 권위있는 저술로 다루어지게 되는데, 예를 들어 文 政 연간에 편찬하기 시작한 薩 摩 藩 의 舊 記 雑 錄 에서도 관련 부분을 인용하게 된다. 川 口 長 孺 의 征 韓 偉 略 이 나오고 머지않아 역시 水 戸 彰 考 館 의 青 山 延 光 이 征 韓 雑 志 을 정리하였다( 天 保 10, 1839년의 序 가 있으며, 이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 다). 이 책은 다양한 서적에서 朝 鮮 出 兵 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翁 物 語, 砕 玉 話, 常 山 紀 談, 津 田 家 譜 등과 그밖에 朝 鮮 의 승병장으로 유명한 惟 政 의 四 溟 堂 集 등을 出 典 으로 하고 있으며, 자료적으로는 征 韓 偉 略 과 중복을 피하고 있다. 巻 末 의 識 語 에는 當 時 豊 公 自 謂 吾 将 平 定 韓 明, 奉 天 子 駕 于 西 土, 又 謂 以 我 之 智, 行 我 之 兵, 如 利 刀 破 竹 大 水 崩 沙, 何 国 不 兦, 以 是 言 之, 明 人 畏 我 如 虎, 朝 鮮 畏 我 如 虎 者 不 亦 宜 乎, 嗟 乎 使 豊 公 永 年, 則 其 必 平 定 韓 明 帰 我 版 図 矣, 雖 其 不 得 遂 志, 然 威 霊 遠 被 万 方 讋 服 者, 其 功 固 不 可 誣 也 라고 되어 있으며, 神 州 武 威 之 震 于 万 国 한 秀 吉 이 도중에
24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죽지 않았다면 朝 鮮 ( 韓 )과 中 国 ( 明 )을 그 판도에 편입했을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의 공통점은 秀 吉 의 外 征 을 偉 績 으로 찬양하는 태도이다. 후기 水 戸 学 은 治 教 一 致 를 취지로 하고 있으며, 藩 政 의 실상과 현실의 제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을 특징으 로 한다. 여기서부터 대외적 위기의식이 싹트고 攘 夷 思 想 의 源 流 가 되어 가지만, 이와 같은 思 潮 속에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하여 비상하게 높은 평가를 내리게 된 다. 거기에는 徳 川 體 制 를 옹호하기 위하여 秀 吉 을 비난한다는 논리구성은 인정되지 않 는다. 그 후에도 水 戸 藩 에서는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참가했던 大 名 家 에 대하여 事 績 調 査 를 실시했던 모양이다. 예를 들면 日 向 飫 肥 藩 의 伊 東 家 에 관한 征 韓 偉 勲 錄 의 序 에 이 1 巻 은 天 保 11년 水 府 가 ( 伊 東 ) 祐 相 公 에게 御 内 命 했고, 아울러서 落 合 敬 助 兼 賡 安 井 仲 平 朝 衡 에게 분부하여 御 家 来 기타 諸 書 속에서 征 韓 에 관한 사실만을 抜 粋 考 証 해서 편찬한 서적의 副 本 이다 라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調 査 의 반영인지 会 沢 安 ( 正 志 斎 )의 退 食 間 話 에서는 豊 太 閤 이 朝 鮮 을 정벌하고 威 를 해외에 떨쳤다 고 하며, 藤 田 東 湖 의 弘 道 館 述 義 에서는 豊 太 閤 의 雄 才 大 略 또한 海 内 外 를 압도했 다 고 언급했고, 그 후의 水 戸 学 관계의 저작에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언 급이 散 見 되기에 이른다. Ⅲ. 근대 일본의 성립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 日 露 戰 争 이 한창이던 1905년에 史 学 会 가 간행했던 弘 安 文 祿 征 戰 偉 績 등으로 상 징되듯이 전쟁 전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한 연구가 국위선양의 일익을 담당 했으며, 또한 현실문제로서 한국 병합 과 아시아 침략에 깊이 관여했다는 측면은 부정 할 수 없다. 근대 일본의 성립기에 征 韓 論 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朝 鮮 半 島 를 일본의 침 략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가 대두한다.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자리매 김이 이러한 움직임과 상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용이하게 할 수 있지만, 이 단계에 있어서의 専 論 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유감스럽지만 明 治 전반기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이 어떤 위치를 부여받고 있었는지는 이후의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좁은 식견에서 말하자면, 근대 일본에 있어서 본격적인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 연 구는 한반도를 둘러싼 日 清 간의 대립을 배경으로 시작되었고, 발전해 갔다. 1893년( 明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47 治 26)에 간행된 木 下 真 弘 의 저서 豊 太 閤 征 外 新 史 ( 青 山 堂 간행)는 그 효시로 생각되 는 저술이다. 본서는 권1 起 源 으로 시작하여 壬 辰 紀 부터 戊 戌 紀 에 이르며, 제16권의 後 紀 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壬 辰 은 文 祿 원년, 戊 戌 은 慶 長 3년에 해당하므로 전후 7년에 걸친 전쟁 전반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 과적으로 간행된 것은 壬 辰 紀 뿐이었으므로 계획은 文 祿 원년만으로 중단된 모양이 다. 明 治 期 의 간행이기는 하지만 한문체로 기록했으며, 典 拠 한 사료는 일본 사료에 그치 지 않고 중국 조선의 典 籍 에도 이른다. 다양한 해외사료를 망라한 점은 豊 太 閤 征 外 新 史 의 중요한 특징이 되어 있다. 宮 地 正 人 이 校 注 한 維 新 舊 幕 比 較 論 ( 岩 波 文 庫, 1993년)의 저자로 알려진 木 下 真 弘 은 肥 後 国 菊 池 郡 에서 출생했고, 私 塾 古 耕 舎 를 개설 했으며, 熊 本 藩 의 時 習 館 에서 訓 導 로 일했던 인물이다. 나중에 教 部 省 에서 근무했고, 太 政 官 内 務 省 등을 거쳐서 1879년( 明 治 12)부터는 修 史 館 (종래의 修 史 局 이 조직을 개편한 것)에서 근무했다. 절친한 사이였던 竹 添 進 一 郎 이 弁 理 公 使 로서 조선에 부임하게 되자 外 務 一 等 属 의 자격으로 서울에 왔다. 木 下 는 甲 申 事 變 과 관련되어 일본으로 귀환하기까 지 대략 2년 동안 서울에서 지냈다. 豊 太 閤 征 外 新 史 의 간행은 그로부터 10년 쯤 뒤 의 일이지만,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관심은 조선에 머물던 시절에 싹텄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은 前 関 白 太 政 大 臣 豊 臣 秀 吉 欲 征 明, 先 遣 兵 入 朝 鮮 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며, 書 名 에서도 명백하듯이 주된 교전국은 조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明 国 이라는 인식에 기초한 역사서술이었다. 다음으로, 木 下 真 弘 의 가르침을 받은 松 本 重 愛 이 이듬해에 豊 太 閤 征 韓 秘 錄 제1집 을 간행한다( 成 歓 社, 1894년). 이 책은 이른바 기초사료집이며, 제1집에는 < 朝 鮮 征 伐 記 >( 堀 正 意 저술 부분), < 吉 野 日 記 >, < 南 大 門 合 戰 記 >( 天 野 源 右 衛 門 記 ), < 征 西 日 記 > 등 4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외의 여러 사료도 제2집 이후에 계속적으로 간행할 예정 이었다. 이 책 역시 계획상으로는 중단된 모양인데, 제2집 이후는 확인할 수 없다. 그 일은 어찌됐든 이 책을 간행했던 의도는 머리말에 명백하다. 즉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遠 征 의 師 를 배출한 것이 단지 세 번 뿐 이라고 하고, 後 陽 成 天 皇 의 治 世 에 이르러 豊 臣 太 閤 秀 吉 이 明 国 을 정벌하려고 大 軍 을 発 하여 朝 鮮 및 明 軍 을 撃 破 했으며, 이것이 세 번째이다. 그리하여 太 閤 征 韓 의 役 이야말로 사실은 朝 鮮 을 征 伐 하려던 뜻이 아니며, 조 선에서 길을 빌려 장차 支 那 400여 州 를 공격하고, 이어서 欧 羅 巴 마저 併 呑 하여 우리의 武 威 를 萬 邦 에 크게 떨치려는 大 希 望 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고 한다. 欧 羅 巴 併 呑 운운한 것은 시국에 영합하는 발언이지만, 征 韓 이라고 하면서 전쟁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明
24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공략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木 下 의 저술과도 공통적인 자세이 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료집 간행을 기도했던 배경에 대해서 松 本 重 愛 은 지금이야말로 東 洋 이 다사다난한 때이며, 日 清 韓 3국과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이 역사는 우리가 보편적 으로 알고자 하는 바이지만, 古 来 로 이 일을 기록한 것이 대개 杜 撰 粗 笨 하여 그 사실을 오해할 뿐만 아니라, 확실한 材 料 를 얻는 것이 매우 곤란하다 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 며, 今 日 에 이르러서 이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材 料 로 제공하고, 아울러서 이 위대한 사업을 널리 世 人 에게 알림으로써 志 気 養 成 에 一 助 하기를 바랄 뿐 이라고 한다. 굳이 설 명할 필요는 없다고 보며, 덧붙여서 이 책의 緒 言 은 明 治 27년 9월 17일 平 壌 大 捷 의 소식을 접하고 쓴 것이었다. 이처럼 근대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한 연구의 효시는 위와 같이 日 清 의 대립이라는 현실을 앞에 두고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이 상징하듯이, 昭 和 전쟁 전기에 이르는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한 연구는 현실의 정치 외교 문제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많은 연구성과는 당시의 역사인식과 세계관을 전 제로 서술된 것이며,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문제가 될 만한 점도 많다. 이러한 상관성 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에서 충분히 검증되어야 하겠지만, 이 시기에 행해졌던 池 内 宏 씨와 中 村 栄 孝 씨의 실증 적인 연구는 지금도 여전히 유익하다. 그밖에도 伴 三 千 雄 씨 에 의한 성곽 연구, 전후로 이어지는 黒 田 省 三 씨의 연구, 파병 목적을 勘 合 貿 易 의 부활 에서 구하는 논의를 부정했던 田 保 橋 潔 씨의 지적(< 壬 辰 役 雑 考 (제1회)>, 青 丘 学 叢 제14호 1933) 등이 있다. 동일한 青 丘 学 叢 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있어서 기독교의 전개를 논했던 山 口 正 之 씨의 연구는 일찍부터 조선인 被 擄 人 에게도 주목하고 있다. 그리 고 対 馬 宗 家 文 書 의 現 状 에 비추어볼 때, 豊 臣 政 権 에 관한 宗 家 文 書 를 소개했던 武 田 勝 蔵 씨의 연구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伯 爵 宗 家 所 蔵 豊 公 文 書 と 朝 鮮 陣 > 史 学 제4권 제3호 1925 < 宗 家 文 書 の 中 より> 史 学 제5권 제3호 1926 < 宗 家 文 書 より( 二 )>, 史 学 제5권 제4호, 1926년). 또한 蘇 峰 徳 富 猪 一 郎 씨의 近 世 日 本 国 民 史 豊 臣 氏 時 代 朝 鮮 役 과 参 謀 本 部 에서 편찬한 日 本 戦 史 朝 鮮 役 은 사료 비판 등에 여전히 많은 문 제를 남기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망라적 파악과 구체적 사실의 析 出 이라는 점에서 지금 도 다른 연구를 압도하는 점이 있다. 매우 난폭하기는 하지만 戦 前 戦 中 期 에 진행되었던 일련의 연구는 국가주의적인 경향과 실증주의적 인 경향을 두 축으로 하면서 진행되었 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각론적인 연구에 있어서도 개괄적이긴 하지만 현재로 이어지 는 문제점의 제시도 상당히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49 예를 들어서 三 鬼 清 一 郎 씨는 朝 鮮 史 編 修 官 의 이력을 가진 中 村 栄 孝 씨의 연구가 조선총 독부의 修 史 事 業 과 교육행정이 불가분의 형태로 진행되었던 점에 대하여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朝 鮮 役 研 究 の 一 齣 - 中 村 栄 孝 の 業 績 をめぐって-, 三 鬼 清 一 郎 編 織 豊 期 の 政 治 構 造 吉 川 弘 文 館 2000). Ⅳ. 패전 이후 80년대에 이르는 연구 동향 패전 후에는 종전의 실증연구를 계승하여 전후 역사학의 조류 속에서 새로운 관점이 도입된다. 전형적인 경우의 하나는 1954년에 岩 波 新 書 로 간행되었던 鈴 木 良 一 씨의 豊 臣 秀 吉 일 것이다. 즉 그 책의 후기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 해 둔다. 다소나마 위로되는 것은 조선 민족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추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침략 자의 자손이며, 침략자 자신이었던 우리가 조선 민족의 고통을 알 수는 없다. 단지 침략의 역사 를 쓸 수 있을 뿐이며, 또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쓰는 일이 실제로는 침략으로 우리 자신을 타락시키고, 그리하여 이제 거꾸로 독립을 상실하고 상처받은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이 며, 일본 역사가의 엄숙하고도 즐거운 의무라고 생각한다. 鈴 木 의 글은 다시 文 禄 慶 長 의 役 에 관한 연구는 있어도 침략과 저항의 역사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은 슬프지만, 진정으로 그런 역사를 써 보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있어서 예상치 못했던 기쁨이다. 라고 이어진다. 전쟁 전의 연구성과를 文 禄 慶 長 의 役 연구 로 일괄하면서, 그 연구에서 침략과 저항 이라는 관점이 빠 져 있던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조 선침략 과정을 상술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와 明 軍 의 내부를 분석한 기술도 있다. 1953년에 제기되었던 安 良 城 盛 昭 씨의 문제 제기에서 발단이 된 太 閤 検 地 論 争, 그리 고 幕 藩 制 의 구조적 특질 이 논의되는 속에서 조선침략 을 豊 臣 政 権 論 統 一 政 権 論 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연구가 진행되기에 이른다. 60년대의 연구 동향을 간단히 살펴보면, 예를 들어서 朝 尾 直 弘 씨는 豊 臣 政 権 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대륙출병 이 필연적이었다고 언급했으며, 佐 々 木 潤 之 介 씨는 豊 臣 政 権 의 전체적인 정치과정이 조선침략 과 밀접한 연 관이 있다고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또 山 口 啓 二 씨는 豊 臣 政 権 이 전국을 통치하는 封 建
2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国 家 権 力 으로 존재했던 것을 가장 큰 구조적 특질로 들고,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 하여 諸 大 名 에 대한 끊임없는 軍 役 의 부과가 불가피하며, 전쟁상태를 전제로 하는 끊 임없는 軍 役 이 통일전쟁 종료 후 해외침략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도 필연적인 동향이라 고 설명했다. 山 口 씨는 幕 藩 権 力 에 있어서 편성 원리의 본질을 知 行 軍 役 関 係 에서 구하 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三 鬼 清 一 郎 씨가 < 朝 鮮 役 에 있어서 軍 役 體 系 에 관하여>( 史 學 雜 誌 75편 2호 1966)에서 豊 臣 徳 川 사이의 격차를 찾아내는 佐 々 木 씨의 軍 役 論 을 부정하고, 朝 鮮 役 을 계기로 통일적이며 봉건적인 軍 役 體 系 가 영주계급 전체를 포섭하 면서 달성되었다고 했다. 日 本 近 世 史 연구가 幕 藩 制 구조론 및 여기에 연결되는 国 家 論 이라는 조류에서 규정되었기 때문에 文 禄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乱 )에 대한 연구도 불가 피하게 幕 藩 制 구조론과 国 家 論 의 구조분석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여기서 논의되었던 것은 추상적인 軍 役 體 系 로서의 조선침략 이며, 연구가 반드시 鈴 木 가 의도했던 방향으 로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1970년대에는 일본의 대륙침략을 당시의 국제관계 속에서 포착하고 아시아 사적 세계사적인 위치 설정을 시도하려는 연구 동향이 시작된다. 60년대로 이어지는 山 口 啓 二 씨 佐 々 木 潤 之 介 씨 朝 尾 直 弘 씨 三 鬼 清 一 郎 씨 등의 연구가 規 定 的 인데, 여기에 더 하여 旗 田 巍 씨와 石 原 道 博 씨 등의 동양사 연구자, 전쟁 전부터 계속되는 中 村 栄 孝 씨, 그 리고 중세 일본의 대외관계사, 특히 対 馬 를 의식한 日 朝 관계 분석에 진력했던 田 中 健 夫 씨( 中 世 海 外 交 渉 史 の 研 究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59 中 世 対 外 関 係 史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75) 등의 労 作 은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75년 小 学 館 版 日 本 의 역사 시리즈로서 藤 木 久 志 씨가 織 田 豊 臣 政 権 을 저 술했다. 서유럽 식민제국의 진출도 추가해서 격동하는 동아시아 세계 속의 민중들에게 종교 분쟁과 통일 권력, 통일과 침략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의문 아래 이 通 史 가 서술되 었고, 조선 침략이 가진 심각한 실태를 다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해에 동일 시리즈 로 간행한 朝 尾 直 弘 씨의 鎖 国 은 元 和 期 이후를 대상으로 하는 저술인데 근세 일본 을 동아시아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日 本 型 華 夷 秩 序 의 성립을 논했다는 점에서 이후의 연구에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또 1976년에는 內 藤 雋 輔 씨의 文 禄 慶 長 의 役 에 있 어서 被 擄 人 研 究 가 간행되었다(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76). 内 藤 씨는 序 에서 豊 臣 秀 吉 의 文 祿 ( 壬 辰 ) 慶 長 ( 丁 酉 )의 役 의 본질과 그 영향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論 考 가 있지만, 그 러나 정치와 외교 군사 등에 관한 문제 이외에 이 전쟁이 양국 민중에게 준 최대의 고 뇌는 전쟁으로 인한 생활의 파괴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 관심의 소재를 언급하고 조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51 선인 일본인 被 擄 者 의 여러 가지 실상을 그려냈다. 동시에 豊 後 国 臼 杵 安 養 寺 의 종군승 려 慶 念 의 일기를 소개하면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다시 歴 史 学 研 究 会 는 1977년도 대회의 테마로서 민족과 국가 를 제시하고, 綜 合 部 会 에서 北 島 万 次 씨는 < 秀 吉 의 朝 鮮 侵 略 과 幕 藩 制 国 家 의 成 立 >, 矢 沢 康 祐 씨는 < 壬 辰 倭 乱 과 朝 鮮 >을 발표 했다. 北 島 씨가 발표한 논문의 기조는 內 藤 씨의 저작 등을 토대로 조선 민족에게 압박을 가했던 침략전쟁을 통해서 일본의 봉건영주제는 히에라르키(Hierarchie; 신분제도)를 고착 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민중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했다고 했으며, 한편 矢 沢 씨는 壬 辰 倭 乱 기를 통하여 조선 사회의 구조적 변화, 신분적 질서의 변동이 크게 진전된 것을 논하고, 壬 辰 倭 乱 의 경험이 18세기 이후 자립사상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70년대 후반에 시작되는 이들 연구는 일찍이 鈴 木 良 一 이 주장했던 침략과 저항의 역 사 에 근접하는 것이며, 동시에 전쟁 자체를 주제로 하는 다음 연구단계를 향한 이행을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倭 城 研 究 会 등이 한반도 남쪽에 남아 있는 일본 식 성곽의 답사 등을 진행했고, 그 성과는 79년에 보고서 倭 城 Ⅰ 로 공표하여 오늘날 활발한 倭 城 연구의 효시가 된다. 현지답사가 그다지 용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적과 유물로부터 전쟁의 실태에 접근하는 고고학적 수단은 패전 후 부득이 중단되어 있던 형 편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도 보고서 倭 城 Ⅰ 이 研 究 史 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한반도에 축성된 일본식 성곽, 이른바 倭 城 에 대하여는 전쟁 이전에 小 田 省 吾 씨와 伴 三 千 雄 씨 등이 이미 일정한 성과 를 올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쟁 이전의 연구상황과 문제점에 대하여는 福 島 克 彦 의 < 戦 前 의 倭 城 研 究 에 대하여>( 城 郭 談 話 会 編 集 발행 倭 城 研 究 창간 호 1997)에 수록되어 있다. 전후에는 1961년에 부산대학교내 韓 日 文 化 研 究 所 가 정리한 慶 南 의 倭 城 趾 등이 알려져 있는데, 일본 쪽에서는 보고서 倭 城 Ⅰ 이후 왕성한 연구를 보기 에 이른다. 그 후의 주된 연구성과만을 예로 들면, 1985년에 佐 賀 県 教 育 委 員 会 가 文 禄 慶 長 의 役 城 跡 圖 集 을 정리하고, 城 郭 談 話 会 에 편집 발행한 倭 城 研 究 가 창간호부터 제5호 에 이르렀으며(1997~2002년), 최근에는 白 峰 旬 의 豊 臣 의 城 徳 川 의 城 - 戦 争 政 治 와 城 郭 -( 校 倉 書 房 2003)과 黒 田 慶 一 편 韓 国 의 倭 城 과 壬 辰 倭 乱 ( 岩 田 書 院 2004) 등이 간행되었 다. 또한 1998년 神 戸 大 学 文 学 部 가 韓 国 慶 尚 南 道 倭 城 趾 調 査 報 告 를 내고, 高 瀬 哲 郎 씨 등 을 비롯한 佐 賀 県 立 名 護 屋 城 博 物 館 의 계속적인 연구도 있다. 80년대로 접어들면 北 島 万 次 씨가 朝 鮮 日 々 記 高 麗 日 記 -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とその 歴 史 的 告 発 - 을 公 刊 한다(そしえて 1982). 書 名 에 있는 朝 鮮 日 々 記 란 内 藤 雋 輔 씨가 소개 한 慶 念 의 일기, 高 麗 日 記 는 肥 前 의 田 尻 鑑 種 이 남겼던 제1차 침략 때의 기록이다.
25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런 書 名 에서 명백하듯이 北 島 씨의 저작은 전쟁 과정 그 자체를 문서 기록에 의하여 충실하게 기술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副 題 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일찍이 鈴 木 良 一 씨 가 제창했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 연구에 있어서 제3축을 명확하게 의식했던 저 술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60년대 70년대의 연구로 政 権 論 幕 藩 制 構 造 論 을 형성하면서 文 禄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乱 )은 불가결의 구성요소가 되고 그 의미를 어떻게 부여해야 하는지를 모 색해 왔지만, 전쟁 자체에 관한 역사서술이 그다지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구 판 岩 波 講 座 日 本 歴 史 近 世 1 ( 岩 波 書 店 1963)에 수록된 朝 尾 直 弘 씨의 豊 臣 政 権 論 은 그 후의 연구 동향에 지대한 영향을 준 好 論 이지만, 실제로 그의 글에서 文 禄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乱 )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 시기의 연구상황을 상징하듯이 文 禄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乱 )이라는 팩트가 빠진 채 豊 臣 政 権 論 이 정립되었던 셈이다. 조선사 연구분야 에서 의병과 조선 민중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춘 연구가 왕성하게 진행되었던 것과, 중 국사의 岡 野 昌 子 씨가 전쟁의 승패와 진입 경로의 고증, 지휘관의 동향 등이 아닌 일반 병사와 민중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이 전쟁을 다루려고 했던 것 등과 대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藤 木 久 志 씨의 말을 빌리면, 文 禄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乱 )은 오랫동안 豊 臣 政 権 論 의 부속물과 같은 위치 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서 80년대 후반에는 朝 尾 直 弘 씨의 天 下 一 統 ( 體 系 日 本 の 歴 史 8 小 学 館 1988)이 간행된다. 75년의 鎖 国 에 선 행하는 시기를 대상으로 하지만, 여기서 日 本 型 華 夷 秩 序 를 지탱하는 것으로서 武 威 의 존재를 지적하고, 秀 吉 의 대외 강경노선도 武 威 의 발로로서 위치를 설정하게 된다. 어찌됐든 内 藤 씨와 北 島 씨에 의한 전쟁사 서술로 전후의 文 禄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乱 ) 연구에는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의미에서 대륙침략의 기반이 되었던 九 州 를 대상으로 森 山 恒 雄 씨의 豊 臣 氏 九 州 蔵 入 地 研 究 도 정리되었으며( 吉 川 弘 文 館 1983), 또한 藤 木 久 志 씨는 豊 臣 平 和 令 과 戦 国 社 会 속에서 豊 臣 政 権 에 있어서 동아시아 외교의 重 層 性 을 지적하고, 그 전제가 되었던 조선침략의 위치 설정을 시도하 고 있다(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85). 여기서 藤 木 씨는 秀 吉 이 明 과 南 蠻 을 대등한 교역국으로 삼는 한편, 조선과 류큐, 더 나아가 대만 필리핀( 小 琉 球 )을 국내의 大 名 에 준하는 惣 無 事 令 의 대상, 요컨대 복속국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하며, 豊 臣 秀 吉 의 외교가 이원적 중층 적으로 전개되었다고 주장했다. 일찍이 대륙침략의 의도를 둘러싸고 勘 合 貿 易 부활설과 영토확장설이 양자택일적으로 주장되던 시절이 있었다. 원래 현상은 그러한 단락적인 태도를 허용하지 않지만, 藤 木 씨의 지적은 이러한 폐쇄감을 타파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53 고 볼 수도 있다. 폭넓은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전쟁의 의의를 새롭게 밝히려는 上 垣 內 憲 一 씨의 通 史 공허한 출병 秀 吉 의 文 禄 慶 長 의 役 도 1989년에 저술되었다( 福 武 書 店 1989). 80년대에 진행된 豊 臣 政 権 연구의 자극적인 성과가 연이어 하나의 책으로 간행되었다 는 점에서 1990년은 획기적인 해였다. 즉 高 木 昭 作 씨의 日 本 近 世 国 家 史 研 究 ( 岩 波 書 店 ), 山 本 博 文 씨의 幕 藩 制 의 成 立 과 近 世 国 制, 北 島 万 次 씨의 豊 臣 政 権 의 対 外 認 識 과 朝 鮮 侵 略 (모두 校 倉 書 房 ) 등이다. 高 木 씨의 저술은 대륙침략을 정면에 둔 것은 아 니지만, 이것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惣 無 事 令 과 이른바 身 分 統 制 令, 근세적 군단편성 의 실상을 논하고, 山 本 北 島 두 분의 저술은 豊 臣 政 権 아래의 島 津 씨 領 国 의 실상에 접 근한 것이었다. Ⅴ. 관심의 다양화와 문제점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 연구는 이미 政 権 論 의 부속물 이 아니다. 특히 90년대 이 후는 北 島 万 次 씨의 작업에 끌려가는 형태로 관심도 다양화하고, 전쟁의 추이는 물론 병 참보급, 강화교섭, 倭 城, 降 倭 義 兵 被 擄 등 조선 사회에 관한 다양한 문제 등 전쟁이 가진 각양각색의 측면에 대하여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共 同 報 告 書 에 수록된 학설사 정리 및 문헌목록이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그대로이다. 共 同 報 告 書 간행 이 후 특필할만한 연구로는 太 田 秀 春 씨의 朝 鮮 의 役 과 日 朝 城 郭 史 研 究 ( 清 文 堂 2005)와 津 野 倫 明 씨에 의한 일련의 연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文 禄 慶 長 の 役 におけゐ 毛 利 吉 成 の 動 向 >, 高 知 大 学 人 文 科 学 研 究 9호 2002 < 慶 長 の 役 におけゐ 長 宗 我 部 元 親 の 動 向 >, 黒 田 慶 一 編 韓 国 の 倭 城 と 壬 辰 倭 乱 수록 2004 < 慶 長 の 役 におけゐ 黒 田 長 政 の 動 向 >, 海 南 史 学 42 2004 < 慶 長 の 役 におけゐ 鍋 島 氏 の 動 向 >, 織 豊 期 研 究 8 2006 < 朝 鮮 出 兵 におけろ 鍋 島 直 茂 の 一 時 歸 國 について>, 高 知 大 学 人 文 科 学 研 究 13호 2006 등). 전 자는 한일 간에 전개되는 성곽의식과 일본의 軍 勢 와 조선 사회의 교류라는 지금까지 없 었던 참신한 측면에서 전쟁을 고찰하려던 것이었다. 연구 수단으로서도 조선쪽 사료의 적극적인 활용이 주목되는데, 村 井 章 介 씨의 < 朝 鮮 史 料 에서 본 倭 城 >( 東 洋 史 研 究 66-2 2007) 등과 함께 後 学 의 연구 스타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한편, 津 野 씨에 대하여는 慶 長 의 役 ( 丁 酉 再 乱 )에 관하여 매우 상세한 史 実 을 명확히 했던 점
25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을 크게 평가할 수 있다. 文 禄 의 役 과 비교할 때 연구가 별로 없었던 慶 長 의 役 에 관 한 연구는 朝 鮮 日 々 記 研 究 会 編 朝 鮮 日 々 記 를 읽는다, 진종승려가 본 秀 吉 의 朝 鮮 侵 略 ( 法 蔵 館 2000)으로 한층 더 풍부해졌지만, 여기에 津 野 씨의 실증적인 연구가 더해짐 으로써 보다 충실해져 가고 있다. 이밖에도 曽 根 勇 二 씨는 豊 臣 家 奉 行 人 의 동향에 주목하면서 文 禄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乱 )과 관련된 토픽을 취급하고( 近 世 国 家 の 形 成 と 戦 争 体 制 校 倉 書 房 2004), 中 野 는 秀 吉 의 朱 印 状 을 定 点 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으로 豊 臣 政 権 에 의한 전략의 체계화를 시도 하고 있다( 秀 吉 の 軍 令 と 大 陸 侵 攻 ). 최신 연구로서 거론할만한 것은 많지만 지면 관계 상 일단 위의 연구를 예로 드는 것으로 그치겠다. 共 同 報 告 書 에서는 今 後 의 研 究 課 題 로 여섯 가지 논점을 제시했다. 현재 이들 과 제가 여전히 기대되는 연구과제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각각의 논점이 반드시 동 일한 차원은 아니다. 1에서 4의 과제는 전쟁 자체에 관련된 것이며, 5는 전략, 6은 오히 려 정치로서의 넓은 의미의 戦 争 과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拙 著 에서도 언급했지만, 사 견으로는 먼저 이들의 의식적인 구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전제를 토대로, 예를 들어서 6 동아시아의 国 際 秩 序 에 관하여 부언하자면, 전투의 종식과 전쟁 의 종결을 동일한 차원에서 논하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李 啓 煌 씨의 文 禄 慶 長 의 役 과 동아시아 는 전투종결 후의 국제관계를 상세하게 논했던 매우 귀 중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배우는 한편, 中 野 는 文 禄 慶 長 의 役 ( 戦 争 の 日 本 史 16 吉 川 弘 文 館 2008)을 정리했으므로 상세한 내용은 그 책에 양보하고 싶다. 또한 共 同 報 告 書 < 今 後 의 研 究 課 題 >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논점으로 류큐와 조선의 관 계를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면 1998년에 간행된 邊 土 名 朝 有 씨의 琉 球 의 朝 貢 貿 易 ( 校 倉 書 房 )에는 明 実 録 등 중국측 사료에 기초한 전쟁 강화교섭의 추이를 서술한 논 고가 수록되어 있으며, 계승해야 할 중요한 논점이라고 할 수 있다. * 会 議 報 告 후에 明 石 書 店 에서 鄭 杜 煕 李 璟 珣 편저 壬 辰 戰 争 의 일본어판( 金 文 子 監 訳 小 幡 倫 裕 訳 )이 간행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관한 연구의 현재 의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서에 수록된 위렘 부트씨의 논고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접촉했는데 분량이 많은 이유도 있고, 전반적인 論 究 는 다른 기회로 미루겠다.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55 참고문헌 근세의 著 作 에 대해서는 史 籍 集 覧 과 日 本 思 想 大 系 등의 叢 書 類 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근대 이후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본문에서 기본 데이터를 예로 들고 있기 때문에 이하의 리스트는 단행본을 중심으로 한다. 木 下 真 弘, 1893 豊 太 閤 征 外 新 史 ( 青 山 堂 ) 松 本 愛 重, 1894 豊 太 閤 征 韓 秘 錄 ( 成 歓 社 ) 史 学 会 編, 1905 弘 安 文 祿 征 戰 偉 績 ( 富 山 房 ) 池 内 宏, 1914 文 祿 慶 長 の 役 正 編 第 1( 南 満 州 鉄 道 株 式 会 社 ) 徳 富 猪 一 郎, 1921~1922 近 世 日 本 国 民 史 朝 鮮 役 ( 民 友 社 ) 参 謀 本 部 編, 1924 日 本 戰 史 朝 鮮 役 ( 偕 行 社 ) 池 内 宏, 1936 文 祿 慶 長 の 役 別 編 第 1 ( 東 洋 文 庫 ) 中 村 栄 孝, 1939 文 祿 慶 長 の 役 ( 大 日 本 戰 史 3) ( 三 教 書 院 ) 鈴 木 良 一, 1954 豊 臣 秀 吉 ( 岩 波 新 書, 岩 波 書 店 ) 石 原 道 博, 1964 文 祿 慶 長 の 役 ( 塙 書 房 ) 日 本 思 想 史 研 究 会 編, 1965 日 本 における 歴 史 思 想 の 展 開 ( 吉 川 弘 文 館 ) 中 村 栄 孝, 1969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中 ( 吉 川 弘 文 館 ) 山 口 啓 二, 1974 幕 藩 制 成 立 史 の 研 究 ( 校 倉 書 房 ) 内 藤 雋 輔, 1976 文 祿 慶 長 の 役 における 被 虜 人 の 研 究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三 鬼 清 一 郎, 1981 < 小 宮 山 楓 軒 と 朝 鮮 役 > 茨 城 県 史 研 究 40 三 鬼 清 一 郎, 1981 < 江 戸 時 代 における 朝 鮮 役 の 評 価 について> 歴 史 評 論 373 北 島 万 次, 1982 朝 鮮 日 々 記 高 麗 日 記 (そしえて) 森 山 恒 雄, 1983 豊 臣 氏 九 州 蔵 入 地 の 研 究 ( 吉 川 弘 文 館 ) 藤 木 久 志, 1985 豊 臣 平 和 令 と 戰 国 社 会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鄭 樑 生, 1985 明 日 関 係 史 の 研 究 ( 雄 山 閣 ) 北 島 万 次, 1990 豊 臣 政 権 の 対 外 認 識 と 朝 鮮 侵 略 ( 校 倉 書 房 ) 山 本 博 文, 1990 幕 藩 制 の 成 立 と 近 世 の 国 制 ( 校 倉 書 房 ) 崔 官, 1994 文 祿 慶 長 の 役 ( 講 談 社 メチエ) 李 啓 煌, 1997 文 祿 慶 長 の 役 と 東 アジア ( 臨 川 書 店 ) 邊 土 名 朝 有, 1998 琉 球 の 朝 貢 貿 易 ( 校 倉 書 房 ) 中 野 等, 1999 豊 臣 政 権 の 対 外 侵 略 と 太 閤 検 地 ( 校 倉 書 房 ) 朝 鮮 日 日 記 研 究 会 編, 2000 朝 鮮 日 日 記 を 読 む 真 宗 僧 が 見 た 秀 吉 の 朝 鮮 侵 略 ( 法 蔵 館 ) 黒 田 慶 一 編, 2004 韓 国 の 倭 城 と 壬 辰 倭 亂 ( 岩 田 書 院 ) 太 田 秀 春, 2005 朝 鮮 の 役 と 日 朝 城 郭 史 の 研 究 ( 清 文 堂 ) 中 野 等, 2006 秀 吉 の 軍 令 と 大 陸 侵 攻 ( 吉 川 弘 文 館 )
2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中 野 等, 2008 文 祿 慶 長 의 役 ( 戰 争 の 日 本 史 16 ( 吉 川 弘 文 館 ) 太 田 秀 春, 2008 近 代 の 古 蹟 空 間 と 日 朝 関 係 ( 清 文 堂 ) 鄭 杜 煕 李 璟 珣 編 著, 2008 壬 辰 戰 争 ( 金 文 子 監 訳 小 幡 倫 裕 訳, 明 石 書 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