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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발표 1 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실록학의 탐구 : 조선왕조실록 1) 목차 실록의 일면모 실록의 탄생과 진화 죽음과 역사: 상례( 喪 禮 )와 실록 편찬 배제( 排 除 )와 비장( 秘 藏 ) 선입견의 재음미 상상의 추체험, 그리고 문제 하나 실록청의궤( 實 錄 廳 儀 軌 ) 세초( 洗 草 )와 상전( 賞 典 ) 실록의 일면모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 史 官 )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2) 병조 판서 조말생( 趙 末 生 )이 춘추관에 가서 사사로이 대제학 변계량( 卞 季 良 ) 에게 청하여 일찍이 납입한 사초를 내어다가 고쳤는데, 변계량이 여러 사관을 경계하여 바깥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한 일이 있었다. 3) 이 날에 이현로( 李 賢 老 )가 승정원( 承 政 院 )에 이르러 일기( 日 記 )를 보고서 장 1) 본고는 필자의 宣 祖 實 錄 修 正 攷 한국사연구 123, 2003; 한국사관제도성립사 (일지 사, 2009); 조선의 힘 (역사비평사, 2010) 2장;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현종실록 의 편찬과 개수( 改 修 )-시정기찬수범례( 時 政 記 纂 修 凡 例 )를 통한 비교- 한국사학 사학보 29호, 2014 등을 수정, 요약한 것입니다. 2) 태종실록 권7 4년 2월 8일(기묘). 3) 세종실록 권26 6년 12월 20일(신유).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리( 贓 吏 )란 두 글자를 고쳐 주기를 청하니, 주서( 注 書 )가 그 말에 따라서 중죄 ( 重 罪 )로 고쳤다. 4)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태종의 말은 사관이 듣고 실록에 적었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변계량의 경계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자신의 죄를 애매하게 바꿔친 이현로의 이름은 6백 년을 넘어 지금 우리 에게 전해지고 있다. 실록의 탄생과 진화 어떤 역사적 현상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답은 늘 맨 나중에 나오는 듯 하다. 사람들이 왜 실록을 만들기 시작했고, 어떻게 유지되었으며, 왜 사 라졌는지. 개념으로 따지면 실록은 등록( 謄 錄 )의 일종이다. 그러니까 책보다는 문 서(또는 문서 모음) 쪽에 속한다. 보존하는 문서이다. 한때 요즘 말하는 Archives(보존기록, 영구보존기록) 의 번역어로 실록 을 쓰자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한 이해가 있는 분들조차도 난색을 표했 다. 전형적인 인상주의적 접근이다. 실록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판한 책 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Archives 의 번역어로 사초 를 고려하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다. 국가기록의 보존을 강조하 면서 사초를 보존하자 고 말한다. 그러나 사초는 원래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록을 편찬하고 나면 세초( 洗 草 ) 하여 없애는 것이었다. 그러 니 보존기록을 말하는 Archives 의 번역어로는 적절치 않다. 흔히 실 록을 역사서라고 하는데, 오해할 수 있는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실록이 편찬 과정 즉, 등록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학계에서는 이 를 2차 사료라고 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문서 규격이 일정치 않 았고 그 보존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시대에는 등록이 매우 보편적인 문서 4) 문종실록 권13 2년 5월 1일(계사).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

관리 방법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아직 우리에겐 낯설지만, 기록학 (Archival Studies)에서 말하는 관할권(Custodianship)의 개념에서 보아 도, 실록은 1차 사료에 속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실록 편찬을 위하여 사초( 史 草 )나 다른 관청의 문서를 요약하는 편찬 과정은, 컴퓨터로 문서 를 작성하다가 불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고치고 다시 쓰는 것과 하등 다르 지 않다. 즉, 역사학자들이 희망하는 자료의 순결성과, 그 자료에 대한 개념적 이해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실록 편찬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실록은 중국 당 ( 唐 )나라 태종( 太 宗 ) 때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에서는 통 일신라 말 9세기쯤부터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면 왜 이 무 렵 사람들은 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을까? 기록의 역사를 보면, 모든 역사 기록은 늘 실용적인 목적에서 작성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 태종을,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안시성( 安 市 城 ) 싸움에서 패 퇴한 중국 황제로 기억한다. 아마 우리에게 당 태종만큼 실제 역사상( 歷 史 像 )과 동떨어진 인상을 남긴 이도 없을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당 태종 이 가장 탁월한 황제로 꼽히고 있다. 그는 당나라의 두 번째 황제로, 중 국 관료제를 혁신한 인물이었다. 그는 법률과 관제에서부터 복식( 服 飾 )에 이르기까지 이전과는 다른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실록 편찬은 그 결과였 다. 기록할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고조( 高 祖 ) 이래 당대까지의 기록을 편찬하게 하는 데, 그것이 실록 편찬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군주가 세상을 뜬 뒤 실록을 편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록의 시대 초반에는 재위 중에도 편찬하였다. 대개 당나라 중엽까지 그러하였다. 연호( 年 號 ) 단위로 편찬 하기도 하다가, 이후 재위 기간 단위로 편찬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시 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편한 기준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대통령이 바뀌는 것도 말 그대로 획기적 인데, 평생 왕좌에 있던 군주의 죽음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실록은 국사( 國 史 )의 대명사였다. 국정교과서 국사 라는 말이 아니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라, 한 나라의 역사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직필( 直 筆 ), 즉 기록 학 또는 문서학( 文 書 學 )의 개념으로 보면 원본성( 原 本 性. Authenticity) 이 강조되었다. 왜곡되거나 훼손되지 않은 기록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믿 을 수 있는 기록의 보존, 즉 직필의 보존은 원본성의 유지라고 할 수 있 다. 이런 위상 때문에 실록은 자연스럽게 마치 사회의 신분( 身 分 )처럼 그 시대 기록의 위계( 位 階 )에서 첫머리를 차지하는 등록( 謄 錄 ) 이 되었 다. 죽음과 역사: 상례( 喪 禮 )와 실록 편찬 고려시대에도 실록을 편찬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의 실록 편찬에 대한 자료를 들여다보면 흥미로 운 사실이 눈에 띤다. 조선의 실록 편찬은 국왕의 승하 후 바로 시작되었 다. 이에 비해 고려시대에는 몇 년 뒤에도 편찬하고 다음 왕대에 편찬하 기도 하는 등 편찬 시기가 서로 달랐다. 왜 그랬을까.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승하하면 상례( 喪 禮 )를 치루는 중간에 실록 편찬 을 시작했다. 상례가 국가적 행사일 경우 흉례( 凶 禮 )라고 불렀는데, 이 흉례에는 장례식 절차 뿐 아니라 왕위를 잇는 사왕( 嗣 王 )의 즉위 절차와 예식도 포함되어 있다. 종종 장난삼아 국왕의 즉위가 흉례인가, 길례 ( 吉 禮 )인가 하고 묻고는 한다. 답은 흉례이다. 선왕( 先 王 )의 장례식 과 정에서 즉위하기 때문이다. 그 장례식 절차 중에 졸곡( 卒 哭 )이 있는데 이 졸곡을 기점으로 실록 편찬이 시작됐다. 졸곡은 국왕이 마냥 상주( 喪 主 ) 로 남아 있으면 국정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상복이 아닌 평복으로 갈 아입고 국정을 보기 시작하는 단계로, 상주의 역할과 국정 담당자의 소임 을 다하게 하기 위하여 마련된 절차였다. 고려시대라고 사람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예식이 없었겠는가마는, 이렇 게 조선시대 같은 3년상 예식은 없었다. 그러니 실록을 재위 기간 단위로 편찬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조선시대처럼 편찬 시기의 규칙성이 발견되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

지 않는 것이다. 이는 좀 더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편이 오히려 이해가 쉬 울 것이다. 역사의식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살지 못했던 시대(또는 삶), 살 수 없는 시대를 자신의 시대로 끌어들임으로써 형성된다. 그래서 어떤 광고처럼,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을 얘기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래 야 역사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는 인간의 시공( 時 空 ) 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자기 이해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이유 때문 에 역사의식에는 종교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유한성을 어떻 게 보느냐에 따라 역사는 각기 다른 의미를 띠고 다가올 것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해탈( 解 脫 )을 통하여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불성 ( 佛 性 )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 는 윤회( 輪 廻 )의 굴 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업( 業 )을 지고 사는 가련한 존재이다. 게다가 그 해탈은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어야 할 깨달음의 길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에서 이해하는 인간의 유한성과 그 극복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며 초월적인 성격을 띤다. 하지만 유가( 儒 家 )는 다르다. 애당초 유가에서는 수사적 표현 이상으로 초월적 존재를 용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한과 무한의 변증법이 다르게 전개된다. 각각의 인간이 갖는 유한성은 가족, 사회 등을 통하여 무한히 확대된다. 이 점은 불교의 연기( 緣 起 )와 부분적으로만 비슷하다. 그리고 그 유한성은 자손과 후대 사람들에 의해 시간적으로 연장된다. 자손에 의 해 연장되는 유한성, 곧 개별적 유한성의 극복은 핏줄이라는 엄연한 생물 학적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리고 인간 문명을 전수받을 후대 사람들 은 그 문명을 통하여 한평생밖에 살지 못하는 지금의 나를 이어간다. 이 런 점에서 유가는 사회적이고 현실적이다. 따라서 불교가 성했던 시대와 유가가 주도했던 시대의 역사의식은 같을 수가 없다. 우리가 전제하는 역사학 또는 역사의식은 불교 쪽보다는 유가 쪽에 친연성( 親 緣 性 )을 갖는다. 역사는 사회와 문명의 문제이며, 현실 속 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지 종교적 깨달음의 영역이 아니기 때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모두 실록을 편찬했음에도 불구 하고 관례가 다르게 나타났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부군신위 라는 영화에서 잘 그려냈지만, 나는 장례식에 갈 때마 다 역시 상례는 산 자들의 일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역사도, 역사의 편찬 도 모두 산 자들의 일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역사에 대한 인식은 이렇 게 맞닿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유한성의 문제이고, 그 처리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까지 유가는 불교에 밀려 2선으로 후퇴해 있었다. 그러다가 유 가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재해석한 성리학( 性 理 學 )이 수용되면서, 상 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역사 편찬이 융성해졌던 것이다. 윤회가 아닌 역사가 인간의 삶에 대한 최종 심판자로 재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니 조선 시대에는 실질적인 상례가 마무리되는 졸곡에 이어 바로 실록 편찬이 이 루어졌던 것이다. 대간( 臺 諫 )이 한 시대의 공론( 公 論 )이라면, 사관( 史 官 )은 만세( 萬 歲 ) 의 공론 이라는 말은 실록 편찬을 두고 자주 했던 말이다. 그 만세 뒤에 살 후세 사람들이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한 뒤에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비밀리에 보관된 실록이 공개되는 것은 바로 다음 왕조나 국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조 시대에, 왕조 이후 를 입에 올린다는 것 은 곧 대역( 大 逆 ) 을 뜻한다. 따라서 오직 역사의 이름으로만 나라 는 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없을 수 없다 고 말했다. 입에 올릴 수 없는 금기를 역사를 빌어 입에 올리고 의식 속에서 반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제( 排 除 )와 비장( 秘 藏 ) 그런데 실록은 함부로 볼 수가 없었다. 기록부터 편찬과 보존까지 체계 적으로 관리되면서 배제( 排 除 )와 비장( 秘 藏 ) 이라는 원칙이 생겼다. 이는 동아시아 역사학의 독특한 성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전통적 으로 동아시아의 역사기록에는 늘 기록을 남기는 사관의 평가( 評 價 )가 포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

함되어 있었다. 잘잘못을 따졌던 것이다. 그러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법정( 法 庭 )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실록을 보자면, 중국의 명나라 실록과 청나라 실록에는 그 평가를 기록한 사론( 史 論 ) 이 없다. 그런데 조선의 실록에는 넘길 때마다 사론이 나온다. 실록에 사신왈( 史 臣 曰 ) 이라고 사관의 사론임 을 당당하게 밝히는 방식이 정착된 것은 성종실록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도 사실 중간에 간간이 끼어든 사론이 있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활 성화되지는 않았다. 사론이 실록의 한 구성 부분이 된 것은 바로 자치통감( 資 治 通 鑑 ) 과 자치통감강목( 資 治 通 鑑 綱 目 ) 의 영향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상으로 세 상을 만들어가겠다는 지식인들이었으니, 역사를 통하여 하고 싶은 말이 오죽 많았겠는가? 그래서 이 시기에는 전보다 사론이 무척 증가했다. 조 선 초기 세종대를 거치면서 역사학을 깊이 탐구한 조선의 학자들이 그런 흐름에 동감했고, 이는 통사( 通 史 )의 역사편찬 방식을 당대사( 當 代 史 )인 실록에 창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한 마디 덧붙인다. 흔히 이 시대의 역사학을 경사일치( 經 史 一 致 ) 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사실은 동아시아 역사학에 서 경사가 일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경은 경이고, 사는 사다. 그런 데, 왜 이런 인상을 갖게 되었을까? 이유는 바로 이 사론에 있다. 해석의 장에서는 언제나 사실과 가치판단이 만난다. 그래야 해석이 된다. 그러므 로 모든 역사학에서 사론은 경사일치 를 지향한다. 쉽게 말해서 경 사일치 가 전근대적 역사학에 고유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춘추 를 제외하면 모든 역사 편찬물은 예외 없이 사실과 사론을 분리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근대 철학이 설정한 인식론의 두 범주인 주관( 主 觀 )과 객관( 客 觀 )이라는 숙제를, 근대 역사학 에서는 해석과 사실( 史 實 )의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리고 그 숙제를 푸느 라 고민이 적지 않았다. 전통 역사 편찬에서는 주관과 객관, 해석과 사실의 문제를 아주 단순한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사실은 사실대로, 해석은 사론으로! 실록도 같은 방식을 취했다. 실록의 사론은 곧 평가를 포함하게 마련이었으니, 누구나 접근이 가능할 경우 그 기록이 온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은 이 실록만은 공개하지 않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갔다. 대신 국가 정 책에 참고할 필요가 있으면 실록에 접근이 가능했던 사관( 史 官 )을 통해 확인하든지, 다른 대체 기록인 승정원일기( 承 政 院 日 記 ) 등을 활용하였 다. 그런데 아무나 볼 수 없었다는 데에 실록의 묘미가 있다. 국왕은 물론 이고, 사관을 제외하고는 볼 수가 없는 기록이었다. 조선 양반 관료제가 자정성( 自 淨 性 )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큰 힘이 바로 이 실록에 있었다. 역 사라는 심판관이 쥔 판결문을 아무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비공개 방법을 택한 데는 시대적 제약도 한 몫을 했다. 우 선 실록에 접근한다는 말을 상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하면 기록을 본다 는 말이다. 보려면 가야 한다. 지금처럼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는 기록(정보)에 대한 접근이 그만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그런 인프라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공개를 통하여 시민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모든 공직자의 책임이 된 것이다. 그저 얻을 수 있는 권리는 물론 없다. 그래서 참여민 주주의가 중요하고, 요즘의 실록이라고 할 수 있는 공공 기록 공개운동은 바로 참여민주주의의 통로이자 실현의 유력한 방법이다. 선입견의 재음미 실록이 군주의 재위 기간을 단위로 하여 편찬된다는 점 때문에 종종 우 리는 실록을 국왕( 國 王 ) 중심의 역사 라고 말하기도 한다. 얼핏 일리 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뭔가 이상하기도 하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나누는 방식이다. 과연 실록을 편찬 하던 시대의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간 구획 방법은 무엇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

이었을까? 자고 깨는 하루, 농사 주기에 따른 일 년, 한평생인 60갑자( 甲 子 )가 있지만, 정치제도의 차원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시간 구획은 군주 의 교체라는 정치적 사건이 주는 끝과 시작의 구분일 것이다. 이야말로 오감( 五 感 )을 만족시키는 분기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주의 재위 기간을 단위로 한 편찬을, 이렇게 시간 구획의 경 험적 편리성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실록 기 사는 국왕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왕의 거소( 居 所 )가 나 오고, 국왕의 전교를 비롯한 거동은 모두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여기서 실록은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기반으로 가능했던 역사 기록이 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록은 중앙정치조직 중에서도 선별된 주요 관청의 문서와, 애당초 실록 편찬을 위하여 작성된 사초를 중심으로 편찬 되었다. 물론 겸춘추( 兼 春 秋, 곧 겸임사관)가 있어 지방의 기록을 남기기 도 했고 이를 실록에 등재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지방관청이나 지방사회 를 바라보는 중앙정부의 관점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실록 기사에서 보이는 국왕 중심성 은 바로 중앙집권적 관료제 의 위계가 반영된 것이었다. 실록의 봉안( 奉 安. 서고에 실록을 보관하는 일)이나 포쇄( 曝 曬. 실록을 햇빛에 쏘여 습기 등을 제거하는 일)에서 나 타나는 사관들의 행차와 그에 대한 지방관의 접대는 실록을 매개로 중앙 과 지방의 위상을 확인하는 절차였고, 실록의 현재성을 논할 때 숙고해야 할 전통적 가치의 함정도 여기에 있다. 상상의 추체험, 그리고 문제 하나 실록은 눈에 보이는 문화적 성과 그 이상의 체계를 담고 있다. 실록을 둘러싼 관례와 규정을 지키는 사회적 역량이 없이는 실록 편찬이란 그렇 게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이 평범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록을 중심으로 한 국사 체계 는 짐작하기 쉽지 않은 깊이를 지니고 있다. 이 깊이를 실감할 수 있는 한 가지 생각 거리가 있다. 관료제 일반의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관리 임용 원리와는 달리, 사관은 하급 관리이면서도 승진할 때는 후임자 를 자기가 뽑았다. 이를 자천제( 自 薦 制 )라고 부른다. 이런 관례는 조선 초기에 정착되었다. 그리고 이는 영조 중반에 당색에 따라 후임자를 뽑는 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고위 인사권자가 신임사관을 뽑는 권점제( 圈 點 制 )로 바뀔 때까지 거의 3백 년 이상 계속되었다. 이 자천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안팎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안팎을 다 따지기 어려우면 안의 조 건, 즉 당사자들의 자세만을 생각해도 좋겠다. 만일 자신이 승진했을 때 그 자리에 누구를 뽑을까 가정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 의 인사( 人 事 ) 문화를 상정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 한 방식이 3백년 이상 유지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행정자치부 정부기 록보존소에 임용된 뒤, 나는 부산지소에 출장 가서 실록이 보 관된 서고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사진 에서 보는 것처럼 오 동나무 상자에 태백산 본 실록이 담겨 있었 다. 그리고 종이도 어찌나 깨끗한지 마치 엊그제 인쇄한 듯했다. 서고문을 열고 들어가 실록을 처음 뵈었을 때 온몸을 휘감던 전율을 잊 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한 장, 한 장 실록을 넘겨보았다. 손끝에서 느껴지 는 한지의 찰진 부드러움. 그 손끝으로 활자를 타고 들어오는 정령( 精 靈 )들. 그해 겨울 서늘한 서고에서 그렇게 실록을 뵈었다. 옆의 사진은 그때 동료가 찍어준 사진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잘못된 데가 있다.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

답은 장갑을 끼지 않고 맨 손으로 책장을 넘긴 행위이다. 사람의 손에 는 우리가 보통 소금기라고 부르는 나트륨과 암모니아가 섞인 땀이 배어 나게 마련인데, 이 땀 때문에 종이가 쉽게 부식된다고 한다. 그래서 종이 기록을 만질 때는 꼭 장갑을 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몰상 식하였다. 그 사진은 내가 1999년에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 전문위원으 로 임용되어 부산지소를 견학하던 중에 실록이 보관되어 있던 서고에 들 어가서 찍은 것이다. 늘 그때를 떠올리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짜 릿한 느낌이 떠오른다. 실록을 뵈었을 때의 전율이. 당연히 안내하던 직원은 장갑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립던 님을 만난 나는 기어코 규정을 무시하고 맨살을 만져보았다. 그것도 증거까지 남기면서. 저 하 나의 님이면 누가 뭐라하겠는가만, 많은 사람의 님을 탐했으니 죄가 무겁 다. 그래서 이 사진을 실어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한다. 실록청의궤( 實 錄 廳 儀 軌 ) 이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을 살펴보겠는데, 그 과정에 대해 기록한 의 궤( 儀 軌 )가 남아 있다. 의궤 란 말 그대로 행사[ 儀 ]가 진행된 궤적, 과정, 절차[ 軌 ] 라는 의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종합보고서 인 셈이 다. 그러니까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 실록청의궤 이다. 그리고 등록( 謄 錄 ) 이란 표현도 문서를 베껴서 모은 것, 혹은 베끼 는 행위 라는 의미와 함께 종합보고서 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데 국가나 왕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전례( 典 禮 )의 경우에는 등록이라고 하지 않고 의궤란 표현을 썼는데, 행사나 사안의 성격에 따른 위계( 位 階 ) 가 이렇듯 용어에도 나타난 것이다. 국왕이 승하한 뒤 그 국왕의 재위 기간을 단위로 실록을 편찬하므로, 조선조에는 27왕대의 실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대의 실록 은 일제시대에 편찬되었으므로 보통 말하는 조선실록 에 포함시키지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않는다. 그러므로 25대 실록에 해당하는 25종의 실록청의궤에 더하여, 조 선 후기에 수정( 修 正 ), 개수( 改 修 )가 4차례 있었으니 모두 29종의 의궤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현재는 15종의 의궤만 남아 있다. 선조실록 까지의 의궤는 전쟁이나 내란으로 없어져버렸다. [실록청의궤 본문 : 실록청에서 해당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라고 보낸 공문들이다. 인쇄기술자들이 사용할 그릇, 못, 아교 등을 보내라는 문서이다. 의궤에는 실록 편찬 발의부터 사용된 물품, 각 기술자들의 인 건비 지급 요청 등에 이르기까지, 실록 편찬의 구체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

문서를 수록하고 있다. 이 판본은 규장각본이다. 장서각에도 이 의궤가 보관되어 있다.] [시정기 편찬 범례] 1. 사관의 시정기, 주서( 注 書 )의 일기, 서울과 지방의 겸춘추( 兼 春 秋 )의 기록 외에, 비변사 장계축( 狀 啓 軸 ), 의금부 추안( 推 案 ) 및 형조의 참고할 만한 중요하고 핵심 적인[ 緊 關 ] 문서, 사변( 事 變 )과 추국( 推 鞫 )에 대한 주서 일기도 마찬가지로 가져와 서 검토하여 갖추어 적는다. 2. 모든 조칙( 詔 勅 ) 및 우리나라[ 本 朝 ]의 유관 교서( 敎 書 )는 찾아내어 기록한다. 3. 이름 있는 신하는 졸기( 卒 記 )를 작성하는데, 빠진 대목이나 소략한 데가 있으면 당시 의 공론이나 혹은 문집의 비문과 지문( 誌 文 )을 참고하여 상세히 보충하여 기록한다. 4. 매일 매일의 날짜는 갑자( 甲 子 )만 기록한다. 5. 모든 재변의 경우, 관상감 초록( 抄 錄 )을 하나하나 첨가하여 적고, 지방의 바람, 비, 지진 등 각각의 사항은 그 당시 보고한 문서[ 啓 聞 ]를 반드시 살펴보고 갖추어 기록한다. 6. 대간의 논계( 論 啓 )는, 첫 번째 논계[ 初 啓 ]의 경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적고, 잇달아 올린 논계[ 連 啓 ]의 경우는 단지 연계 라고만 적고, 혹시 중요한 내용이 첨가되어 있으면 뽑아낸다. 7. 대간의 논계는 단지 사헌부, 사간원 이라고만 적고, 와서 보고한 사람의 성 명은 적지 않는다. 다만 첫 번째 논계했을 때는 성명을 모두 적는다. 중대한 시비 가 걸린 사안의 경우는, 다른 의견을 꺼낸 경우도 적지 않으면 안 된다. 어사( 御 史 )의 성명 및 관리를 쫓아낸 일[ 黜 陟 ], 폐단을 변통한 일 등도 상세히 기록한다. 8. 상소 중에서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은 상세히 갖추어 싣고, 그 사이의 불필요한 글자는 해당 구절을 빼더라도 무방하다. 예에 따라 사직하는 상소나 차자의 경우는 반드시 모두 적을 필요는 없지만, 혹시 거취나 시비 같은 당시 정치에 관련된 사안 은 역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9. 모든 관직 임명[ 除 拜 ]의 경우, 중요하지 않고 잡다한 관직이나 산직[ 冗 散 ] 외에는 이조와 병조[ 兩 銓 ]의 문서를 다시 살펴보아 상세히 기록한다. 10. 각 연도의 과거에 합격한 인원은 아무개 등, 몇 사람 이라고 적는다. 11. 군병의 숫자, 서울과 지방의 법제, 호구 숫자에 대해서는, 각 해당 문서를 상소하 여 상세히 기록한다. 12. 도움이 되지 않는 번잡하고 쓸데없는 문자는 참작하여 다듬어서 간결하고 압축적 인 문장이 되도록 힘쓴다. 13. 조정[ 朝 家 ]의 길흉( 吉 凶 ) 등 여러 의례 중에서 나라의 헌장( 憲 章 )에 관계되어 후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세 사람들에게 남겨 보여줄 만한 것은 문장이 비록 번거롭고 잡다해도 갖추어 기 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4. 서울과 지방의 관리 출척이나 공적 또는 사적 시비는 반드시 그 대략을 뽑아 기록 한다. 찬수범례는 모두 1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실록 청의궤를 보면 이 14개 조항은 공통된다. 하지만 이렇게 산절과 찬수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하더라도 도청과 각방에서 이토록 엄밀히 구분되었 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산절은 곧 찬수를 전제로 하고 또 동시 진행이 가 능하기 때문에 일련의 프로세스를 거치게 될 것이다. 산절과 찬수는, 뒤 에 살펴볼 찬수와 교정, 교정과 교수처럼 명확히 구별되는 프로세스가 되 기 어려웠다. 이상과 같이 산절, 찬수 과정을 거치면서 나오는 산물이 초초( 初 草 )와 중초( 中 草 )이다. 현존하는 광해군일기( 光 海 君 日 記 ) 는 활자로 간행되지 못하고 바로 이 중초 단계에서 사고( 史 庫 )에 보존한 것이다. 이들 찬수본을 토대로 교정을 보았으며 이를 담당한 곳이 교정청이고, 그 활동은 교정청등록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교정은 찬수가 끝나고 인쇄 에 들어가기 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물론 잘못된 글자나 편 집의 수정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이를 교정청 당상과 낭청이 담당했던 것 이다. 그런데 의궤를 보면, 초초와 중초 말고도, 초견본( 初 見 本 ) 과 재 견본( 再 見 本 ) 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교정 당상이 초견본을 보았다고 하 였고, 그렇다면 초견본은 교정청에서 사용하는 교정본임을 알 수 있다. 아마 교정은 초견본과 재견본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 게 수정이 끝나면 분판( 粉 板 )에 베껴 쓰고 활판을 짜서 인쇄에 들어간다. 아래는 실록 편찬 과정별로 주체, 활동, 산출물을 표로 만들어본 것이 다.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

행위 주체 산절청 찬수청 ( 刪 節 廳 ) ( 纂 修 廳 ) 활동 사초를 비롯한 실록 체재로 시정기에서 원고 작성 초출( 抄 出 ) 산출물 초초( 初 草 ), 중초( 中 草 ) 교정청 ( 校 正 廳 ) 작성된 원고의 교정 초견본( 初 見 本 ), 재견본( 再 見 本 ) 분판 낭청 및 창준( 唱 準 ) 등 기술자 활자 인쇄 교수청 ( 校 讎 廳 ) 인쇄물 확인 교정 실록 인쇄본 실록 최종본 실록청 전원 봉안 및 세초 아직 모르는 대목 누차 강조했듯이, 실록은 비장( 秘 藏 )에 그 힘이 있는 기록이었다. 그런 데 편찬을 하자면 사초를 비롯한 시정기를 꺼내어야 했고, 그러자면 기록 을 편찬하는 동안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무오사화( 戊 午 士 禍 )는 바로 김종직( 金 宗 直 )의 의제를 애도하는 글[ 弔 義 帝 文 ] 이 성종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극돈( 李 克 墩 )에 의해 누설되면서 시작된 것 이었다. 그런데 일정한 기간 동안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일단 관원을 동원 해야 했다. 그리고 실록청이 임시 관청이었으므로, 자연히 편찬에 참여하 는 관원들은 겸임 사관으로서 다른 관직을 본직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들 이었다. 관직이 없던 사람을 동원하려면 군직( 軍 職 )을 주어 관원 신분을 띠고 편찬에 참여하게 하였다. 원래 본직이 있다 보면 아무리 실록편찬에 참여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라고 해도 본직의 구애를 받을 수밖에 없었 다. 실제로 이들 편찬에 참여한 관원들은 편찬하던 중에 지방관이나 사신 으로 나가거나, 병환 등을 이유로 교체되는 일이 매우 빈번하였다. 그렇다면 실록청의 정보 보안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실 이 문제는 실록 편찬이 시작되었던 초기에 세계 최초의 역사 학개론인 사통( 史 通 ) 을 저술한 유지기( 劉 知 幾 )가 지적했던 문제였다. 유지기는 측천무후실록( 則 天 武 后 實 錄 ) 의 편찬 과정에서 무삼사( 武 三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思 ) 위원충( 魏 元 忠 ) 등과 의견이 대립하였고, 이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사관직에 몸담지 못할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하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공동편찬의 문제점의 하나로 기록의 누설을 들었다. 즉, 역사 편찬 장소가 궁중에 자리한 것은 인정에 이끌린 청탁을 막고 그 역사 편찬 과정에서 기록될 내용에 대한 비밀보장을 위한 것인데, 사 관이 많다 보니 먹이 마르기도 전에 기록한 내용이 조정과 재야[ 朝 野 ]의 신하[ 搢 紳 ]들에게 바로 누설되어, 비밀보장은 물론 직서( 直 書 )를 해야 하 는 사관의 신변까지도 위협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를 공동 편찬할 경우 쉽게 예상되는 문제점이기도 하였다. 특히, 기록과 편찬이 서로 다 른 주체들에 의해 수행되는 작업이 되었기 때문에 편찬과정에서 나타나는 기록의 누설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조선의 경우 무오사화를 일으켰던 이극돈의 사례로부터 얻은 교훈 으로, 편찬 과정에서 기록을 누설할 경우에도 사초 훼손에 버금가는 처벌 을 받게끔 하는 법령이 마련되었다. 실록청[ 史 局 ]의 일을 누설한 자는 변 방에 종으로 보내고 자손을 금고( 禁 錮 )하여 사면이 있어도 풀어주지 말도 록 법을 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법령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준수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법이 있으면 불법이나 위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편찬과정에서 기록이 누설됨으로써 불거진 소동이나 사건을 나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렇게 편찬에 참여하는 겸임 사관이 많았고 자주 교체되었으면 기대하 는 소동이나 사건이 연출될 법도 하건만, 조선 초기 실록편찬 관례가 뿌리 내린 뒤로는 그런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 세초( 洗 草 )와 상전( 賞 典 ) 실록 편찬 뒤에 벌이는 잔치는 이미 중국 송대( 宋 代 )에 발견된다. 그러 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언제부터 세초를 하였는지에 대한 확정된 사료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세초의 관례는 성종실록 편찬 이전에 있었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

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 이미 우리 선왕 대대로 전례가 있는 일 [ 祖 宗 朝 故 事 ] 이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세조실록 과 예종실록 이 편찬되던 성종 초반에 이미 세초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데 세종 20년에 헌릉( 獻 陵. 태종) 비문 개수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 태 조실록 의 편찬에 이용된 사초가 거론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세초 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세초가 성례가 된 것은 세 종 31년 사초의 엄격한 관리를 위한 규정이 마련되고, 실록청 중심으로 편찬이 전환되는 세종실록 편찬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편찬을 끝으로 효용을 다한 사초를 물에 씻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불에 태웠던 분명 중국 명( 明 )나라의 경우와 차이가 있는데, 왜 이런 방 법을 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초의 누설을 막는다든지, 종이를 재생 하려는 목적 등이 떠올릴 수 있는 한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세초 가 시행되었던 현재 상명대학교 앞 세검정 차일암( 遮 日 巖 )에서 민족문화 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이 있는 구기동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종이 를 만들던 조지서( 造 紙 署 )가 있었다. 물로 씻든지 불로 태우든지, 이는 어떤 단계의 변화, 즉 죽음이나 이별 또는 승화를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세 초가 단순히 사초를 처리하기 위한 실무의 의미에 그쳤다면 당상관과 낭 청이 서리나 아전을 데리고 마무리해도 될 일이었지만, 모든 실록편찬자 가 참여하였고 이들에게 국왕의 선온( 宣 醞 )이 내려지는 잔치였다는 것은 그 의례적 집단성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초와 세초 때의 잔치 [ 洗 草 宴 ]은 곧 사초의 상례( 喪 禮 ) 로 한 시대의 마감,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세초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공감하는 예식이었으며, 차일암은 곧 그 의례와 연행( 演 行 )의 마당이었다고 생각된다. 국가의 중대사를 마감하는 자리에 상( 賞 )이 빠질 수 없는 것은 요순( 堯 舜 ) 임금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관직의 품계를 높여주는 가자( 加 資 )와 상전( 賞 典 )은 실록을 둘러싼 예식의 주인공들에게 그간의 느낌을 구체적 인 물질로 전환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본디 제사와 젯밥은 뗄래야 뗄 발표1_조선왕조실록 편찬 체제와 내용

수 없는 의례의 구성요소였던 것인데, 이는 실록 편찬에서도 예외가 아니 었다. 젯밥만 탐하는 것이 문제이지, 원래부터 젯밥은 제사 참석자의 몫 이기도 하였다. 상으로는 대개 말이나, 마구 활 등을 주었다. 예종실록 편찬이 끝난 뒤 성종은 세종실록 편찬에 이어 수찬관들에게 자급을 더해주었는데,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이후 실록 편찬 뒤의 가자( 加 資 )는 상례가 되었다. 그리고 편찬에 참여했던 신하들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바치는 글[ 進 謝 箋 ] 을 올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에 인사하는 절차를 거쳤던 것이 다. 제36회 장서각 콜로키움_ 한국과 일본의 실록 편찬 체제와 그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