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永 鍵 의 베트남 硏 究 에 대한 基 礎 的 檢 討 윤대영 머리말 1905년 9월에 上 海 에서 출판된 越 南 亡 國 史 가 한국 사회에 유통된 이후, 한국 지식 인들의 베트남에 대한 관심은 점차로 고조되었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자 李 如 星 은 1932년 에 世 界 弱 小 民 族 運 動 槪 觀 이라는 책자에서 베트남 필리핀 등 11개국의 독립운동을 소개 하였으나 일제가 치안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1) 또한 8세 때 부친을 따라 渡 日 하여 東 京 에서 성장한 독립운동가 洪 穆 (1920-1982)의 경우도 흥미롭다. 中 央 大 學 을 졸업 한 후 현지에서 日 立 會 社 에 취직하려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그는 우 선 南 方 에 進 出 할 뜻이 있어 다니게 된 安 南 語 學 院 에서 베트남 교사 응오 반 민(Ngô Văn Minh, 吳 文 盟 )을 만나 베트남의 민족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동시에, 스승을 통해 입수하 게 된 판 보이 쩌우의 저서 몇 권을 바탕으로 印 度 支 那 動 亂 四 十 年 史 를 大 山 幸 伸 이라 는 가명으로 저술하여, 1943년 1월부터 일본 전국의 서점과 神 田 소재 한인 식당을 통해 배포하기 시작했다. 2) 독립운동을 소재로 하는 베트남의 소위 越 流 는 이처럼 국내와 국외 를 막론하고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金 永 鍵 의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 東 京 : 冨 山 房, 1943, 315 p.)라는 책을 필자가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과 베트남의 관계뿐만 아니라 조선과의 접촉 사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 이 연구서는 일종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한국인들의 베트남 연구 동향에 대해 門 外 漢 이던 필자는 어떻게 이런 진지한 학문적 작업이 식민지시기의 한 한국인 연구자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 는가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10년 정도가 흐른 현 시점에서 그 실마리를 조 금씩 풀어나갈 수 있는 단서들을 포착할 수 있었기에, 본고에서는 1930년대부터 꾸준히 진 행되어 온 金 永 鍵 의 베트남 硏 究 를 새롭게 규명해 봄으로써,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가 출현할 수 있었던 金 永 鍵 의 학문적 이력과 그 이후의 지적 변용 과정에서 나타난 특성들을 집어보고자 한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金 永 鍵 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부족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1946년 9월 金 永 鍵 자신도 1940년 이래 본인의 인생이 轉 變 無 常 한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3) 학계의 金 永 鍵 에 대한 인식도 평론가, 인 류학자, 혹은 역사학자 등으로 다채롭다. 1) 朝 鮮 出 版 警 察 月 報, 第 28 號, 出 版 警 察 槪 況 - 不 許 可 差 押 및 削 除 出 版 物 記 事 要 旨 - 世 界 弱 小 民 族 運 動 槪 觀, 1930년 12월 2일 발송; 김인덕 김도형, 1920년대 이후 일본 동남아지역 민족운동, 한국독립 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p. 211. 2) 大 山 幸 伸, 印 度 支 那 動 亂 四 十 年 史, 東 京 : 軍 事 敎 育 史, 1943, 358 p.(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洪 穆 의 이 저 술과 그에 관한 정보를 필자에게 제공해준 계명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김미월씨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최 근에는 印 度 支 那 動 亂 四 十 年 史 가 번역되었다. 홍목 저, 홍욱 안경환 역, 인도차이나 동란 40년사, 조명 문화사, 2007, 194 p. 참조. 3)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序, 서울: 正 音 社, 1947, p. 3. - 1 -
우선, 실천적인 문학 평론가로서의 모습이 1988년부터 조명되기 시작했다. 건설기의 조선문학: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 자료집 및 인명록 에서는 평론가 金 永 鍵 이 조선문학가동 맹에 가담하여 1946년 제1회 조선전국문학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피선되어 세계문학의 과거와 장래의 동향 을 보고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4) 한편, 임동권은 1996년 당시 국 내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류학자 金 永 鍵 에 대해 다루면서, 1936년과 1943년에 民 族 學 研 究 ( 日 本 民 族 學 會 )에 발표된 그의 글과 1941부터 1943년 사이의 학회 활동 등을 한 국 인류학계에 소개했다. 5) 전경수는 한국인류학 백년 을 일별해 보는 기회에 인류학을 주 전공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인류학적인 연구와 활동을 했던 선각자들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는 차원에서 金 永 鍵 에 접근했다. 전경수는 임동권의 연구 성과와 필자 자신의 자료조사 및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1931-1945년 시기 金 永 鍵 의 이력과 학문적 성과를 연구사적인 차원 에서 조망했다. 6) 한국 동남아시아 역사학자들의 지적도 주목할 만하다. 1998년 유인선은 한국에서 동남 아시아 역사와 관련하여 처음 발표된 글은 1948년 金 永 鍵 의 安 南 國 使 臣 唱 和 問 答 錄 ( 金 永 鍵, 黎 明 期 의 朝 鮮, 正 音 文 庫, 正 音 社, 1948, pp. 50-59)임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7) 조흥국은 유인선의 평가를 염두에 두면서도 印 度 支 那 に 於 ける 邦 人 發 展 の 硏 究 : 古 地 圖 に 印 されたる 日 本 河 に 就 いて ( 杉 本 直 治 郞 金 永 鍵, 東 京 : 冨 山 房, 1942)와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와 같은 두 가지 연구서에 의거하여, 金 永 鍵 은 일본과 대륙 동남아 특히 베 트남 및 캄보디아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연구는 모 두 일본인들의 동남아 진출사에 관한 것으로서,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시기에 발표되 어 당시 일본의 大 東 亞 共 榮 圈 수립의 망상을 합리화하기 위한 어용적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8) 이상에서 살펴 본 연구 동향을 통해 볼 때,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있다. 우선, 임동권도 지적하는 것처럼, 金 永 鍵 이 언제 어디에서 出 生 했으며, 그의 學 歷 이나 經 歷 에 대 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9) 또한, 1942-1943년 어용학자로 활동하던 金 永 鍵 이 어떻게 해방 이후에 실천적 평론가로서 조명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현재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金 永 鍵 의 生 涯 에 대해서 그동안 잘 알 려지지 않았던 事 實 들을 재구축하고자 한다. 아울러, 金 永 鍵 이 발표한 몇 가지의 제한된 저 술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1920년대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그의 글을 최대한 많이 검토해 봄으로써 시기에 따른 혹은 현실적 필요에 따른 한 지식인의 변모 과정을 추적해 보고, 이 과정에서 그의 베트남 연구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4) 조선문학가동맹 엮음, 최원식 해제, 건설기의 조선문학: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 자료집 및 인명록, 서울: 온누리, 1988, p. 201. 5) 임동권, 金 孝 敬 金 永 鍵 論 - 1930 年 代 日 本 에서 活 躍 한 두 學 者 -, 韓 國 民 俗 學 (한국민속학회, 구 민 속학회), 第 28 輯 (1996.12), pp. 62-63. Cf. 임동권, 김효경 김영건론, 김선풍, 한국민속학인물사, 보고 사, 2004, 358 p. 6) 전경수, 한국인류학백년, 일지사, 1999, pp. 95, 98-100, 112. 7) 劉 仁 善, 回 顧 와 展 望 ( 東 洋 史 ): 東 南 亞 印 度, 歷 史 學 報 (서울: 歷 史 學 會 ), 第 159 輯 (1998.9), p. 221. 유인 선에 의함녀, 安 南 國 使 臣 唱 和 問 答 錄 은 1943년에 처음 일본어로 쓴 安 南 國 使 臣 唱 和 問 答 錄 に 就 いて ( 金 永 鍵,,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東 京, 1943, pp. )에 약간의 가필을 한 것이고, 黎 明 期 의 朝 鮮 에는 濟 州 道 民 의 安 南 漂 流 記 도 실려 있으나, 이는 논문이라기보다 짧은 소개의 글이다. Cf. 蒙 古 兵 을 擊 退 시 킨 花 山 君 李 龍 祥 의 事 蹟, 黎 明 期 의 朝 鮮, pp. 28-49? 8) 조흥국, 동남아시아 연구의 문제와 과제, 국제지역연구, 제5권 제1호(2001.6), p. 49. 9) 임동권, 金 孝 敬 金 永 鍵 論, p. 62. - 2 -
Ⅰ. 金 永 鍵 의 初 期 履 歷 과 EFEO 우선 金 永 鍵 의 생애와 관련된 그의 출생 연대 혹은 출생 지역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 태이다. 공식적인 자료나 학회지 등에 등장하는 金 永 鍵 이란 성명은 1902년 11부터 등장하 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宮 內 府 소속의 管 理 署 主 事 에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아울 러, 1907-1908년 사이에는 關 西 지역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西 友 學 會 와 西 北 學 會 에 회원으로 활동한 흔적도 있다. 11) 이후, 1909년 平 壤 府 의 書 記 로 일하던 金 永 鍵 은 1910년 11월 25일부터 1912년 12월 25일까지 朝 鮮 總 督 府 의 黃 海 道 甕 津 郡 郡 守 를 역임 하게 되었다. 12) 그러나, 여기에 소개된 金 永 鍵 이란 인물은 이후의 활동 시기나 주변 사람 들과의 교유 관계를 고려할 때,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金 永 鍵 과 同 名 異 人 일 가능성이 높다. 전경수에 의하면, 金 永 鍵 은 1920년대에 프랑스로 유학을 한 후, 베트남의 하노이에 있 는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 발령을 받았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13) 현재까지 金 永 鍵 이 남긴 저작들 이나 방증 자료들 중에서 그의 프랑스 체류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만한 증거는 전혀 없는 상 태이다. 金 永 鍵 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 및 시기와 관련하여 신빙성 있는 자료는 <표 1>에 보이는 바와 같이, 1927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표 1> 1927-1931년, 金 永 鍵 의 詩 作 제목 간행시기 가을이라고요 1927.2 고요한 저녁 거리 위를 1927.2 病 室 의 壁 1930.5 錘 1930.8 늙은 水 夫 에게 1930.12 群 衆 1931.1.2 <표 1>에 소개된 시들은 1927년 2월부터 1931년 1월 사이에 朝 鮮 文 壇, 大 潮, 解 放, 朝 鮮 日 報 등에 발표했던 습작들이었다. 14) 그밖에도, プロレタリア 文 學 1928 年 十 二 月 號 와 無 産 者 1929년 號 에 小 說 苦 力 와 同 盟 罷 業 을 각각 게재 하기도 했다. 15) 이후 金 永 鍵 이 1930년대에 베트남 하노이에 소재한 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遠 東 博 古 學 院, Viến Đông Bác Cổ Học Viện, 이하 프랑스 遠 東 學 院 으로 약함) 16) 의 10) 官 報, 第 二 千 三 百 五 十 七 號, 光 武 六 年 十 一 月 十 四 日 金 曜, 敍 任 及 辭 令 ; 官 報, 第 二 千 三 百 六 十 一 號, 光 武 六 年 十 一 月 十 九 日 水 曜, 敍 任 及 辭 令. 11) 서우, 제5호(1907-04-01), 新 入 會 員 氏 名, p. 43, 會 計 員 報 告 第 五 號, p. 45; 서우, 제16호 (1908-03-01), 會 報, p. 38. 12) 朝 鮮 總 督 府 官 報, 제78호( 明 治 43 年, 1910.12.1), 敍 任 及 辭 令, 제145호( 明 治 44 年, 1911.2.25), 敍 任 及 辭 令, 제111호( 大 正 元 年, 1912.12.12), 敍 任 及 辭 令, 제109호( 大 正 元 年, 1912-12-10), 敍 任 及 辭 令 ; 朝 鮮 總 督 府, 朝 鮮 總 督 府 及 所 屬 官 署 職 員 錄,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1911, 1912;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1권, 朝 鮮 總 督 府 警 察 官 署 屬 崔 秉 相 을 朝 鮮, 1912.12.5. 13) 전경수, 한국인류학백년, pp. 97-98. 14) 金 永 鍵, 語 錄 : 一 九 四 二 - 一 九 四 四 年 의 遺 書, 서울: 白 楊 堂, 1945, pp. 102-111. 15) 金 永 鍵, 위의 책, p. 112. 16) 1899년에 설립된 프랑스 遠 東 學 院 은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연구원이 남긴 인도차이나 의 문화 지리 역사 관습 종교 등에 관한 연구 성과는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다.(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 - 3 -
도서관 사서로서 근무했음은 이미 밝혀져 있다. 17) 그러면, 과연 金 永 鍵 은 정확히 언제부터 베트남 하노이로 갔던 것일까?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필자는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서 발간 하던 학술지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이하 BEFEO로 약함)을 검 토해 보았다. 滿 洲 事 變 (1931.9.18 발발) 직후 유럽에서 귀국하던 廣 島 文 理 科 大 學 東 洋 史 硏 究 室 소속 의 杉 本 直 治 郞 이 인도차이나에 잠시 체류하던 중 金 永 鍵 을 알게 된 사실과 1931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BEFEO 잡지의 tome. 31에 平 家 物 語 의 프랑스 번역본 18) 에 대한 서평 을 쩐 반 잡(Trần Văn Giáp, 1902-1973) 19) 과 함께 게재한 것을 보면, 金 永 鍵 은 1931년부 터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서 활동을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 金 永 鍵 자신도 1931년 쐐데 스(George Coedès, 士 德 ) 박사를 알게 되어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 와서 일하게 되었다고 밝 히고 있다. 21) 그리고 1932년 프랑스 遠 東 學 院 의 휘보를 보면, 金 永 鍵 은 응우옌 반 또 (Nguyễn Văn Tố, 1889-1947), 응우옌 반 코안(Nguyễn Văn Khoan), 쩐 반 잡 등과 함께 일종의 조교[assistant]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실제 그는 1932년 5월 1일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 의해 정식으로 고용되었는데, 보조사서[bibliothécaire-adjoint]의 자격으로 일본과 한국 자료에 대한 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22) 보조사서로서 프랑스 遠 東 學 院 의 일본과 한국 자료를 관리하던 金 永 鍵 은 다양한 서적들 을 本 院 에 제공하기도 했는데, 우선 1931년부터 1939년부터 기증한 도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표 2> 1931-1939년, 金 永 鍵 의 기증 도서 연도 서명 / 잡지명 / 논문명 1 朝 鮮 總 督 府, 朝 鮮 圖 書 解 題,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1915 1931 2 大 原 利 武, 朝 鮮 史 大 系, 京 城 : 朝 鮮 史 學 會, 1929 3 靑 丘 學 叢, 1-2 號 (1930), 京 城 : 靑 丘 學 會 1 具 駿 遠, 辛 壬 紀 年 提 要, 京 城, 1922, 一 卷 四 冊 2 李 舜 臣, 李 忠 武 公 全 書, 統 營 : 李 永 宰 商 店, 1921, 14 卷 2 冊 1932 3 儒 敎 經 典 諺 譯 叢 書, 京 城 : 儒 敎 經 典 講 究 所 藏 板, 1922-1924, 8 卷 4 璿 源 譜 略, 統 營 : 李 永 宰 商 店, 1921, 14 卷 1933 1 經 學 院 雜 誌, 18-25 號 (1918-1924), 27 號 (1926), 29-35 號 (1928-1932), 京 城 : 經 學 院 사, p. 301) 프랑스 遠 東 學 院 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는 Daniel Bouchez, 프랑스 國 立 極 東 硏 究 員 의 事 業, 아세아연구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第 94 號 (1995.7), pp. 175-189와 Catherine Clémentin-Ojha and Pierre-Yves Manguin, A Century in Asia: The History of the 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1898-2006, Singapore: Editions Didier Millet, 2001, 236 p. 참조. 17) 松 本 信 廣, 追 記, 民 族 學 研 究 ( 日 本 民 族 學 會 ), 第 二 巻 第 一 號 (1936.1.1), pp. 66-67; 임동권, 金 孝 敬 金 永 鍵 論, pp. 62-63; 전경수, 한국인류학백년, p. 98; 유인선, 베트남 李 왕조의 후손 李 龍 祥 의 行 跡, 한국 베트남 관계사 국제 심포지엄 자료집, 일시: 2007년 8월 20일, 장소: 하노이 대우호텔 그랜드 볼륨, 주최: 한국 역사학회 베트남 역사과학회, 후원: 동북아역사재단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p 69. 18) Épisodes du Heiké Monogatari, traduits par S. GOTO et M. Prunier, avant-propos de M. Sylvain Lévi, Paris : Ernest Lereoux, 1930, 148 p. 19)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서 근무하다가 1927년 파리의 École Pratiques des Hautes Études à la Sorbonne에서 유학한 쩐 반 잡은 1932년 귀국하여 원래의 업무를 재개했다. 20) 杉 本 直 治 郞 金 永 鍵, 印 度 支 那 に 於 ける 邦 人 發 展 の 硏 究 : 古 地 圖 に 印 されたる 日 本 河 に 就 いて, 東 京 : 冨 山 房, 1942; BEFEO, tome 31 (1931), "Bibliographie," pp. 526-528. 21) 金 永 鍵, 安 南 普 陀 山 名 考, 震 檀 學 報 ( 震 檀 學 會 ), 第 10 號 (1939.1), p. 164. 22) BEFEO, tome 33 (1933), "Chronique de l'année 1932," pp. 416-417. 23) 鄭 澈 의 오류. - 4 -
1934 1 經 學 院 雜 誌, 1 號,(1913) 3-16 號 (1914-1918), 京 城 : 經 學 院 1935 1 經 學 院 雜 誌, 36-39 號 (1933-1935), 京 城 : 經 學 院 1 Chiao-tung University. Library catalog, n 1, General works; n 2, Philosophy and religion; n 3, Social sciences; n 4, Natural science; n 5, Applied science; n 6, Fine arts; n 7, Language and literature; n 8, History and geography; n 9, Annuals, periodicals, newspapers, Shanghai, 1933-1934 2 崔 玄 培, 朝 鮮 語 法, 京 城 : 東 光 堂, 1936 3 General Catalogue of Chiao-tung University, Shanghai, 1935-1936 4 白 南 雲, 朝 鮮 社 會 經 濟 史, 東 京 : 改 造 社, 1933-1936 5 朝 鮮 總 督 府 博 物 館 編, 博 物 館 陳 列 品 圖 鑒,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博 物 館, 1932-1936 6 朝 鮮 總 督 府 博 物 館 編, 博 物 館 略 案 內,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博 物 館, 1936 7 金 克 培, 한글 鐵 筆 自 習 書, 京 城 : 日 月 社, 1931( 初 版 ), 1934( 再 版 ) 8 金 台 俊, 朝 鮮 漢 文 學 史, 京 城 : 淸 進 書 館, 1933. 朝 鮮 語 文 學 會 叢 書, 2 9 金 台 俊, 朝 鮮 小 說 史, 京 城 : 淸 進 書 館, 1931. 朝 鮮 語 文 學 會 叢 書, 1 1936 10 金 在 喆, 朝 鮮 演 劇 史, 京 城 : 淸 進 書 館, 1933. 朝 鮮 語 文 學 會 叢 書, 3 11 金 永 鍵, 日 本 見 聞 錄 について, 民 族 學 研 究, 2 巻 1 號 (1936) 12 李 淸 源, 朝 鮮 社 會 史 讀 本, 東 京 : 白 揚 社, 1936 13 申 明 均 編, 世 宗 御 製 訓 民 正 音 原 本, 京 城 : 中 央 印 書 館, 1935 14 申 明 均 [ 中 央 印 書 館 編 ], [한글] 歷 代 選, [ 第 1 輯 ] 京 城 : 中 央 印 書 館, 1933 15 宋 完 植, 日 鮮 大 字 典, revu par 李 允 宰, 京 城 : 東 洋 大 學 堂, 1935 16 鄭 徹 23), 松 江 歌 辭, 申 明 均 編, 京 城 : 中 央 印 書 館, 1933 17 申 明 均 編, 周 時 經 先 生 遺 稿, 京 城 : 中 央 印 書 館, 1933 18 靑 年 朝 鮮, 創 刊 號 (1934.10), 京 城 : 靑 年 朝 鮮 社 19 한글, 第 1 卷 第 2-8 號, 第 2 卷 第 1-7, 9 號, 第 3 卷 第 1-10 號, 第 4 卷 第 16 號 (1932.6-1936.6),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20 靑 丘 學 叢, 3 號 (1930), 5-6 號 (1930), 10 號 (1932), 京 城 : 靑 丘 學 會 21 震 旦 學 報, 第 一 - 四 號 (1934.11-1936.4), 京 城 : 震 旦 學 會 22 正 音, 1-14 號 (1934.2-1936.6), 京 城 : 朝 鮮 語 學 硏 究 會 1 崔 玄 培, 方 言 採 集 手 帖,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1936 2 朝 鮮 語 學 會, 한글 마춤법 통일안,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1933-1936 3 Jung Insub, The International Phonetic Transcription of Korean Speech-Sounds, Seoul: Oriental Daily News, 1935 4 金 永 鍵, 雲 屯 と 日 本 人, 歷 史 學 硏 究, 第 七 卷 第 八 號 (1937.8), 東 京 : 歷 史 學 硏 究 會 5 Horace H. Underwood, 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Works on Korea with a paper on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English Publication n 1 of The Literary Department, Chosen Christian 1937 College, Seoul, 1931. (Reprint from the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vol. XX) 6 朝 鮮 語 學 圖 書 展 覽 會 出 品 目 錄,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7 한글, 第 4 卷 第 8-11 號 (1936.9-12), 第 5 卷 1-6 號 (1937.1-6),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8 小 川 香 料 時 報, 第 八 卷 第 八 號 (1935.8), 第 九 卷 第 六 號 (1936.6), 大 阪 : 小 川 香 料 店 9 歷 史 學 硏 究, 第 七 卷 第 八 號 (1937.8), 東 京 : 歷 史 學 硏 究 會 10 靑 丘 學 叢, 27 號 (1937.2), 京 城 : 靑 丘 學 會. 1 秋 守 常 太 郞, 印 度 旅 行, 旅 行 叢 書 10, 大 阪, 1939 1939 2 秋 守 常 太 郞, 印 度 旅 行 出 入 の 辭, 大 阪, 1938 3 秋 守 常 太 郞, 廣 義 の 特 權 全 廢, 大 阪, 1934-5 -
4 ベビ 新 辭 典, 三 版, 東 京 : 至 誠 堂, 1929 5 二 葉 亭 四 迷, 平 凡, 六 十 版, 改 造 社, 1930 6 訓 民 正 音 ( 活 版 本 ),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1937 7 李 斗 星, 中 國 短 篇 小 說 集, 京 城 : 開 闢 社, 1929 8 李 浩 盛, 啓 蒙 夜 學 會 諺 文 敎 授 指 針,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1938 9 鄭 台 鉉 編, 朝 鮮 植 物 鄕 名 集, 京 城 : 朝 鮮 博 物 硏 究 會, 1937 10 李 命 七, 漢 日 鮮 滿 新 字 典, 二 版, 京 城 : 三 文 社 以 文 堂, 1937 11 李 鐘 極, 現 代 朝 鮮 外 來 語 辭 典, 京 城 : 漢 城 圖 書 株 式 會 社, 1937 12 金 澤 庄 三 郞 編, 廣 辭 林, 東 京 : 三 省 堂, 58 版, 1928 13 金 斗 奉, 24) (깁더)조선말본, 京 城 : 匯 東 書 館, 1934 14 金 永 鍵, 安 南 普 陀 山 名 考, 震 檀 學 報, 第 10 號 (1939.01[04?]) 15 金 永 鍵, 佛 領 印 度 支 那 東 京 興 安 に 於 ける 舗 客 に 就 いて, 史 學 ( 慶 應 義 塾 大 學 文 學 部 內 三 田 史 學 會 ), 第 十 八 卷 第 一 號 (1939.9) 16 金 永 鍵, 迦 知 安 に 於 ける 日 本 人 の 十 字 架, 歷 史 學 硏 究, 第 九 卷 第 七 號 (1939.7) 17 金 允 經, 朝 鮮 文 字 及 語 學 史,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1938 18 權 悳 奎, 朝 鮮 語 文 經 緯, 京 城 : 廣 文 社, 1923 19 啓 蒙 夜 學 會 速 修 讀 本,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1938 20 山 本 達 郞, 安 南 の 貿 易 港 雲 屯, 東 方 學 報, 9 冊 (1939.1), 東 京 : 開 明 堂 21 山 本 達 郞, Drug-gu (Dru-gu, Drug)に 就 いて, 東 方 學 報, 8 冊, 26 卷 1 號 (1938.11), 東 京 : 開 明 堂 22 山 本 達 郞, 河 內 佛 國 極 東 學 院 字 喃 本 及 び 安 南 版 漢 籍 目 錄, 同 追 記, 史 學 ( 慶 應 義 塾 大 學 文 學 部 內 三 田 史 學 會 ), 第 十 六 卷 第 四 號 (1938.4) 23 山 本 達 郞, 印 度 支 那 の 建 國 神 話, 史 學 會 編, 東 西 交 涉 史 論, 東 京, 1939 24 吉 江 喬 松, 佛 蘭 西 文 學 槪 論, 東 京 : 新 潮 社, 1933 25 柳 僖, 諺 文 志,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1938 26 崔 玄 培, 한글의 바른길,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1937 27 崔 玄 培, 우리말본, 京 城 : 延 禧 專 文 學 校, 1937 28 崔 玄 培, 中 等 敎 育 朝 鮮 語 法, 京 城 : 東 光 堂, 1936 29 최현배, 중등조선말본, 京 城 : 東 光 堂, 1938 30 崔 允 善, 朝 鮮 語 綴 字 器, 京 城 : 立 文 社, 1936 31 趙 重 洽, 鄕 愁, 京 城 : 以 文 堂, 1938 32 劇 作, 第 二 卷 (1933) 11-12 號, 第 三 卷 (1934) 1-4 號, 6-7 號, 9-10 號, 東 京 : Hakusui-sya 33 한글, 第 6 卷 第 11 號 (1938.12), 第 7 卷 第 1-2 號 (1939.1-2),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34 韓 淸, 第 2 卷 第 5 號 (1937), 上 海 : 韓 淸 社 35 京 城 帝 大 史 學 會 誌, 第 13 卷 (1938), 京 城 : 京 城 帝 國 大 學 史 學 會 36 震 壇 學 報, 第 十 號 (1939.4), 京 城 : 震 壇 學 會 37 正 音, 第 26-27 號 (1938.9 11),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출처: BEFEO, tome 31, "Bibliographie," pp. 571, 585, 603, tome 33, "Chronique de l'année 1932," pp. 438, 447, 457, "Chronique," p. 1090, tome 34, p. 741, tome 35, p. 448, tome 36, pp. 543, 549, 551, 555, 562, 564-565, 569, 574-575, 581, 584, tome 37, pp. 560, 565, 567-568, 582, 584, 591, 595-597, BEFEO, tome 39 (1939), pp. 276-277, 286-288, 304-305, 311, 313, 319. 이상에서 소개한 <표 2>에 의하면, 金 永 鍵 이 기증한 도서는 총 72종으로, 유형별로 살 24) 원문에는 金 科 奉 으로 되어 있으나, 저자에 대한 로마자 표기가 Kim Tu-Pong 인 것으로 보아 金 斗 奉 의 오식인 듯하다. - 6 -
펴보면 단행본 52종, 학술지 11종, 논문 9종이다. 내용상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부 터 나열하면, 歷 史 類 (23), 語 學 類 (21), 文 學 類 (8), 辭 典 類 (5), 書 目 類 (5), 哲 學 類 (3), 考 古 類 (2), 族 譜 類 (1) 등이다. 25) 1937년 朝 鮮 總 督 府 와 朝 鮮 中 央 佛 敎 專 門 學 校 가 각각 書 法 에 관한 도서와 불교 계통 서적을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 기증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26) 金 永 鍵 은 歷 史, 語 學, 文 學 등의 방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역사와 관련해서는 朝 鮮 史, 베트남과 일본의 관계사, 향료를 둘러싼 아시아와 서구의 관계사 등에 집중되어 있었고, 어 학 부분에서는 베트남 현지 사회에 한글을 알리기 위해 朝 鮮 語 學 會 에서 당시 출판된 서적이 나 한글, 正 音 등과 같은 학술지를 기증했던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특히, 한 글 은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윤재(1888-1943)가 정기적으로 金 永 鍵 에게 보내주 었던 것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 기증한 것으로 생각된다. 27) 金 永 鍵 의 활동은 도서 기증에만 그치지 않았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金 永 鍵 은 뻴리오(Paul Pelliot)가 1904년에 BEFEO에 발간한 "Deux itinéraires de Chine en Inde à la fin du VIIIe siècle"에 등장하는 다양한 지명에 대한 색인 작업을 담당했다. 28) 또한, 1933년 9월에는 과거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있었던 호이 안(Hội An)을 직접 방문하여 일본 역사 유적의 흔적을 탐구하는 등의 현지조사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29) 그 이외에도, 1936년 프랑스 遠 東 學 院 과 普 成 專 門 學 校 의 문화 교류 과정에서 있음직했을 법한 金 永 鍵 의 역할이다. 당시 普 成 專 門 學 校 는 하노이의 프랑스 遠 東 學 院 과 고고 유물, 민속 유물, 미술품 등을 교환하면서 新 羅 의 磚 瓦 와 高 麗 의 磁 器 등을 보낸 적이 있는데, 同 年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金 永 鍵 이 양 기관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30) 개인적인 연구 이력과 관련해서는, 우선 金 永 鍵 이 점차 베트남어에 친숙해져 가는 과정 을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자료를 정리하던 金 永 鍵 에게 한글의 로마자 표기는 쉽지 않은 문제였을 것이다. 1932년 당시에는 全 書 를 zen-se 로 經 典 을 kyeng-zen 으로 전사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ㅓ 를 e 로 ㅕ 는 ye 로 표 기했다. 31) 그런데 적어도 1936년부터는 朝 鮮 을 Zosơn 으로, 語 法 을 ơ bơb 으로, 崔 玄 培 는 Ch'oi Hyơnbai 로 표기하기 시작하여, ㅓ 는 ơ 로 ㅕ 는 yơ 로 표현했다. 32) 기존의 25) 기증 도서의 유형별 분류에서는 중복되는 부분을 생략했기 때문에, 내용상의 분류에서 제시된 통계와 일치하 지 않는다. 26) 朝 鮮 總 督 府 는 朝 鮮 名 家 筆 跡 展 觀 目 綠 ( 朝 鮮 總 督 府 編,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1935)를 기증하였고, 朝 鮮 中 央 佛 敎 專 門 學 校 는 총 10종의 불교 서적을 기증했는데, 아래와 같다. 1 崔 南 善, 朝 鮮 佛 敎, 京 城 : 朝 鮮 佛 敎 靑 年 會, 1930; 2 金 泰 洽, 法 起 菩 薩 之 緣 起, 京 城 : 應 禪 庵, 1935; 3 金 泰 洽, 普 德 閣 氏 之 緣 起, 京 城 : 佛 敎 時 報 社, 1935-1936; 4 金 泰 洽, 浮 雪 居 士, 京 城 : 佛 敎 時 報 社, 1932-1936; 5 金 泰 洽, 聖 異 次 頓 之 最 後, 京 城 : 大 衆 書 屋, 1936; 6 金 泰 洽, 性 月 大 師, 京 城 : 佛 敎 時 報 社, 1936; 7 金 泰 洽, 六 祖 大 師, 京 城 : 佛 敎 時 報 社, 1932-1936; 8 金 泰 洽, 長 壽 王 之 慈 悲, 京 城 : 佛 敎 時 報 社, 1932-1936; 9 極 樂 之 道, traduit par ZUL, 京 城 : 佛 敎 時 報 社, 1932-1936; 10 中 央 佛 敎 專 門 學 校 圖 書 分 類 表, 京 城 : 朝 鮮 語 學 會. BEFEO, tome 37 (1937), pp. 560, 568-569, 584 참조. 27) 김영건, 안남 하노이 통신, 한글 (한글학회), 제44호(제5권 제4호, 1937.4), p. 464. 28) Paul Pelliot, "Deux itinéraires de Chine en Inde à la fin du VIIIe siècle," BEFEO, IV (1904), pp. 121-403; Yung Kun Kim, Paul Pelliot, Deux Itinéraires de Chine en Inde : Index des noms géographiques, Manuscrits. Pamela Gutman, "Ancient Arakan," The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Thesis (PhD), 1976, "Select Bibliography," p. 360 참조. 29) BEFEO, tome 33 (1933), "Chronique," p. 1049, 30)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p. 82. 유인선은 金 永 鍵 이 李 龍 祥 연구를 위해 1936년 여름 황해도 옹진을 방문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유인선, 베트남 李 왕조의 후손 李 龍 祥 의 行 跡, 한국 베트남 관계사 국제 심포지 엄 자료집, 일시: 2007년 8월 20일, 장소: 하노이 대우호텔 그랜드 볼륨, 주최: 한국 역사학회 베트남 역사 과학회, 후원: 동북아역사재단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p. 69) 31) BEFEO, tome. 33, pp. 447, 457, 458, tome 39 (1939), pp. 286, 288, 305, 311. - 7 -
로마자에 존재하지 않는 베트남어의 모음 ơ 는 한글의 ㅓ 발음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에 착안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ㅡ 를 ư 로, ㅢ 를 ưi 로 표현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데, 33) 베트남어 발음에 점차 익숙해진 金 永 鍵 이 프랑스 遠 東 學 園 의 프랑스 학자들이나 베트 남 관계자들의 정확한 한글 발음을 유도하고자 고안해 낸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베트남어를 활용한 것 이외에도, 金 永 鍵 의 학문적인 활동은 아래 의 <표 3>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표 3> 在 하노이 시기 김영건의 학문 활동 시기 1931 서평 / 목록 / 논저 서평: Épisodes du Heiké Monogatari, traduits par S. GOTO et M. Prunier, avant-propos de M. Sylvain Lévi, Paris : Ernest Lereoux, 1930 불교 관련 자료 소개 1932 서평: 伊 達 光 美, 日 本 寺 院 法 論, 東 京 : 嚴 松 堂 書 店, 1930 1934 서평: 郡 司 喜 一, 十 七 世 紀 に 於 ける 日 暹 關 係, 東 京 : 外 務 省, 1934 1937.4 안남 하노이 통신, 한글 (한글학회), 제44호(제5권 제4호) "Note sur la nouvelle romanisation officielle du japonais," BEFEO, tome 1938 38 이미 언급한 것처럼, 金 永 鍵 은 1931년에 平 家 物 語 불역본에 대한 서평과 해제를 동료 쩐 반 잡(Trần Văn Giáp)과 함께 작성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34) 또한, 동년에 쎄데 스(G. Coedès), 쩐 반 잡 등과 함께 불교 관련 연구 성과를 소개하면서, 金 永 鍵 은 1931년 공동 저자에 의해 파리에서 간행된 Bibliographie bouddhique 35) 에 누락되어 있는 佛 敎 硏 究, 密 敎 硏 究 등의 잡지와 辻 森 要 修 의 學 界 綜 覽 을 보충하고 1929-1930에 간행된 일본의 저서와 박사논문 목록 중에서 불교와 관련된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지적했다. 36) 아 울러, 1932년과 1934년에는 각각 伊 達 光 美 의 日 本 寺 院 法 論 과 郡 司 喜 一 의 十 七 世 紀 に 於 ける 日 暹 關 係 에 대한 서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37) 1938년에는 일본어의 공식적인 로 마자 표기에 대해 정리하고 소개하여 프랑스 遠 東 學 院 도 이 방식을 채택하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38) 이처럼, 金 永 鍵 은 프랑스 極 東 學 院 에서 일본의 문학, 종교학, 역사학, 언어학 등과 같은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개척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1937년 4월 안남 하노이 통신 라는 글을 한글 (한글학회)에 발표하여 한국학 분야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 작했다. 39) 이미 1936년부터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관심을 갖고 있던 金 永 鍵 은 외국어의 한 32) BEFEO, tome. 36, p. 543. 33) BEFEO, tome 39 (1939), pp. 286, 288, 305. 34)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ēme-orient (이하 BEFEO로 약함), tome 31 (1932), "Bibliographie," pp. 526-528. 35) M. J. Przyluski et al., Bibliographie bouddhique, Paris : Geuthner, 1931, 97 p. 36) BEFEO, tome 31, "Bibliographie," pp. 546-550. 37) BEFEO, tome 33 (1933), "Chronique de l'année 1932," pp. 1033-1034; BEFEO, tome 34 (1934), pp. 704-707,, 38) Kim, Yung Kun, «Note sur la nouvelle romanisation officielle du japonais», BEFEO, tome 38 (1938). pp. 306-308. 39) 김영건, 안남 하노이 통신, 한글 (한글학회), 제44호(제5권 제4호, 1937.4), pp. 464-465. 이 글은 1936년 12월 29일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 8 -
글 표기에 대해 한말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윤재(1888-1943)에게 의견을 개진 하면서, 외국말(자연을 묘사하는 음)을 한글로 고쳐씀에 있어서는 그의 홀소리와 닿소리와 또는 첫소리와 나중소리를 맞후는 법을 문법으로 정하지 말고, 자유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 을 것으로 믿습니다 고 주장했고, 예를 들어 베트남어의 â 는 ㆍ 로 표기할 것을 제안했 다. 40)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金 永 鍵 은 하노이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서 근무하면서 점차 연구 경력을 쌓아나갔던 것이다. 1937년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 고고학 분과가 창설되었을 때 기념 촬영한 두 장의 사진에 金 永 鍵 으로 보이는 동그란 테의 안경을 쓴 한국인이 브자씨에(Louis Bezacier), 副 院 長 고루브(Victor Goloubew), 院 長 쐐데스, 꼴라니(Madeleine Colani), 뒤 뽕(Pierre Dupont), 마니쿠(Jean Manikus), 레비(Paul Lévy) 등과 함께 나란히 서 있을 수 있었던 것도 41) 사서로서의 경력과 전문적인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Ⅱ. 1940년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의 활동 1939년 12월 23일 당시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 근무하고 있었던 아시아계 근무자들이 크 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연말 파티 명분으로 찍은 사진에 의하면, 金 永 鍵 도 이 자리에 참석하 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2) 전경수는 김영건은 1940년 초까지는 하노이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중략] 1940년 말과 1941년 초반 사이에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일본의 도쿄로 거처를 옮긴 것 같다 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金 永 鍵 본인에 따르면, 그는 1940 년에 朝 鮮 으로 돌아온 뒤로부터 나의 生 活 은 轉 變 無 常 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 술회하 고 있다. 43) 베트남을 떠나게 된 시점은 1940년 10월 일본군이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이라는 이름으 로 하이 퐁 항을 점령하게 되면서 프랑스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자, 당시 일본 국적의 金 永 鍵 은 베트남을 떠나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4) 하노이를 떠나온 이듬해에도 쐐데스 院 長 은 副 院 長 고루브를 통해 프랑스 遠 東 學 院 으로 돌아오기를 懇 請 했지만, 金 永 鍵 은 일본 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상 그에 응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45) 이후의 행적은 일본에서 발견된다. 46) 金 永 鍵 은 1941년 5월 28일 東 京 의 學 士 會 館 에서 日 本 民 族 學 會 의 주최로 印 度 支 那 人 類 研 究 所 の 事 業 と 其 の 意 義 를 강연했다. 또한 5월에 개최된 바 있는 日 本 民 族 學 會 의 회원간담회[ 懇 親 會 ]에도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6월 간담회에는 당시 일본에서 민속학을 연구하고 있던 金 孝 敬 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47) 40) 필자와 함께 金 永 鍵 의 글을 검토한 바 있는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이지영씨에 의하면, 金 永 鍵 은 당시 한글 연구의 동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41) Catherine Clémentin-Ojha and Pierre-Yves Manguin, op. cit., pp. 37, 180-181. 42) Nguyen Thieu Lau, "Ong Chu Su: Dong Phuong Bac Co Hoc Vien," Xưa và Nay, 40 (1997), p. 29; 전경수, 한국인류학백년, p. 98. 43)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서울: 正 音 社, 1947, p. 3. 44) 松 本 信 廣, 序,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東 京 : 冨 山 房, 1943, p. 2. 45) 죠르즈 쎄대스, 金 永 健 譯, 第 七 ~ 十 三 世 紀 의 南 海 帝 國, 震 檀 學 報 ( 震 檀 學 會 ), 第 十 五 號 (1947.5), p. 150. 이 말이 끝나자 고루브는 金 永 鍵 과 感 激 의 抱 擁 을 남기고 헤어졌다고 한다. 46) Cf.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홍종우에 관한 자료, p. 61 :... 동경으로 건너와서 이때까지 머물러 있 는 터이나... 47) 金 永 鍵, 印 度 支 那 人 類 研 究 所 の 事 業 と 其 の 意 義, 民 族 學 研 究 ( 日 本 民 族 學 會 ), 第 七 卷 第 三 號 (1941.12), - 9 -
1941년 10월 5일 간행된 民 族 學 硏 究 ( 日 本 民 族 學 會 ) 第 七 卷 第 二 號 에 新 入 會 員 名 單 에 이름이 있으니 이때부터 金 永 鍵 은 日 本 民 族 學 會 의 회원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41년 10월 당시 金 永 鍵 의 주소는 東 京 市 淀 橋 區 戶 塚 1-49 日 乃 出 館 2 號 로 되어 있고, 1942년 6월 10일에 간행된 民 族 學 硏 究 第 七 卷 第 四 號 에 의하면 會 員 轉 居 欄 에 東 京 市 芝 區 白 金 臺 町 1-56의 藤 山 工 業 圖 書 館 으로 이사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1943년 1월의 주소 는 東 京 市 本 鄕 區 丸 山 福 山 町 3 八 淸 莊 28 號 로 되어 있으니, 이는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 하고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옮겨 다녔음을 의미한다. 1943년 9월 5일에 간행된 民 族 學 硏 究 新 第 一 卷 第 九 號 의 會 費 領 收 者 명단에 金 永 鍵 의 이름이 보이나, 그 이후 일본에 서 활동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한국에서 활동한 흔적들이 1941년 9월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영건은 1946 년 9월 당시에, 처음부터 나는 朝 鮮 史 를 專 攻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外 國 의 文 獻 을 涉 獵 하 는 동안에 朝 鮮 에 關 한 史 料 들로 내가 朝 鮮 에 紹 介 해 보았으면 하는 것들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기는 아깝고 하여 나는 틈 있는 대로 조 금씩 노트를 해두었다. 그러다가 1940년에 朝 鮮 으로 돌아온 뒤로부터 [...] 時 局 은 緊 迫 을 告 해 가며 나도 언제까지나 그 노트들을 꾸리고 다닐 수도 없고 하야 忽 忽 히 그것들 을 整 理 한 뒤에 하나씩 둘씩 春 秋 와 朝 光 의 雜 誌 위에 發 表 하기를 비롯했다. 라고 회고하고 있다. 48) 여기에서 일찍부터 라고 하는 것은 하노이에 체류하면서 프랑스 원동 학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시점을 말하며, 49) 春 秋 제2권 제8호(1941.9)와 朝 光 제10 권 제1호(1944.1)에 西 伯 利 亞 와 朝 鮮 의 移 民 과 朝 鮮 外 交 史 의 一 端 을 각각 발표했 다. 西 伯 利 亞 와 朝 鮮 의 移 民 에서는 러시아의 뿌실로 가 남긴 문헌을 기초로 1863년 이 래 시작된 韓 人 이주민의 역사를 다루었고, 朝 鮮 外 交 史 의 一 端 에서는 1886년 6월과 1887년 5월 사이에 전개된 조선과 프랑스 양측의 외교 교섭 상황에 대해 서술했다. 50) 이와 같은 조선의 대외 관계사에 대한 金 永 鍵 의 관심은 文 一 平 (1888~1939) 및 1934 년 5월에 창립된 震 檀 學 會 와의 지적 교류가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文 一 平 은 항상 金 永 鍵 에 게 무엇인가를 激 勵 해 주었다곤 하는데, 金 永 鍵 이 文 一 平 에 대해 近 代 朝 鮮 의 對 外 關 係 에 關 해서 重 要 한 첫 페이지를 開 拓 해 놓았다 라고 평가하고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와의 관계사 에 관한 글을 발표한 것을 고려한다면, 文 一 平 의 학문적 성과가 金 永 鍵 에게도 큰 자극이 되 었던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震 檀 學 會 先 輩 들 의 계속적인 激 勵 는 金 永 鍵 으로 하 여금 본인의 菲 材 를 돌아보지 않고 뒤로는 좀 더 科 學 的 으로 이 方 面 [근대 조선의 대외 관 계]에 關 한 調 査 와 硏 究 를 거듭해 보고자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51) 그래서 해방된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서울 인사동의 태화정에서 개최된 震 檀 學 會 의 임시총회에 참석 pp. 425-433; 임동권, 金 孝 敬 金 永 鍵 論, p. 62. 48)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p. 3. 49) 예를 들어, 金 永 鍵 은 하노이에 있을 때 우연히 洪 鍾 宇 가 조선인으로 최초로 프랑스에 가게 된 사람이라는 것 을 알고, 당시 기메(Guimet) 박물관의 소장으로 있던 죠세프 아깽 박사에게 서한으로 洪 鍾 宇 에 대한 정보를 문의한 적이 있었다.(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p. 60) 50)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pp. 18-25, 40-45 참조. Cf. [ 개화비담, 홍종우에 관한 자료, p. 61 ->... 동경으로 건너와서 이때까지 머물러 있는 터이나 조광 춘추 양지의 지상을 통하여 홍종우와 직 성행년요람 심청전 춘향전 등에 관한 몇 가지에 기술을 거듭해온 일이 있기에...] 51)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서울: 正 音 社, 1947, pp. 3-4. - 10 -
한 金 永 鍵 은 위원으로 선출되기에 이르렀고, 52) 10월 29일부터 국정교과서편찬연구위원회의 대표로 震 檀 學 會 위원장 宋 錫 夏, 李 定 根, 李 源 朝 등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53) 그러나 해방 이후의 격동적인 정국은 金 永 鍵 이 조선의 대외 관계사를 차분하게 연구하 거나 교육 방면에서의 학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충족시켜줄 수 없었던 것 같다. 해방 직전부터 金 永 鍵 이 발표한 글들을 시기별로 정리해 보면,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표 4> 1945-1949년, 金 永 鍵 의 저술 활동 발표 시기 발표 내용 1945.7 再 出 發 에 있어 文 學 的 自 己 批 判 : 앞으로 나갈 길을 操 心 하라, 신 문예 (신문예사), 제1권 2호 1945.10 國 際 文 學, 人 民 報 1945.11.15 世 界 文 化 의 動 向, 文 化 戰 線, 創 刊 號 1945.12 演 劇 과 劇 場 의 統 制, 藝 術 ( 週 報 ), 1-2 1946.1 고고리의 검찰관[ 檢 査 官 ] - 극단 전선 창립공연을 보고, 藝 術 1946.1.25-27 農 村 啓 蒙 運 動 에의 提 案, 中 央 新 聞 歷 史 文 學 의 封 建 的 性 格 : 特 히 女 性 觀 에 對 하여, 文 學 (조선문학 1946.2 가동맹), 2 英 雄 : 露 西 亞 文 學 運 動 의 一 面, 藝 術 ( 週 報 ), 2-2 1946.3 朝 鮮 과 佛 蘭 西 와의 文 化 關 係, 人 民 評 論 (인민평론사), 1 1946.7 世 界 人 類 와 機 械 文 明 : 唯 物 史 觀 의 一 見 解, 人 民 評 論, 1-2 알렉산드라 브루스타인, 金 永 鍵 譯, 소 聯 의 兒 童 劇, 文 學, 1 1946.8 外 國 文 化 의 攝 取 와 民 族 文 化, 신천지 (서울신문사), 1-7(1946.8) 1946.9 스미스, 金 永 鍵 譯, 아메리카의 親 友 들에게: 朝 美 文 化 協 會 獨 立 祝 賀 記 念 講 演, 신천지, 1-8 1946.10 國 際 文 學 의 情 勢 에 關 한 報 告, 신천지, 1-9 쏘련의 어린이들, 신천지, 1-10 1946.11 歷 史 文 學 의 封 建 的 性 格 - 특히 女 性 觀 에 대하여, 文 學 弱 小 民 族 의 文 學, 서울신문 (1946.11.18) 1946.12 大 戰 과 國 際 情 勢, 신천지, 1-11(1946.12) 1947 朝 鮮 開 化 秘 譚, 서울: 正 音 社, 1947(1946.9 序 ) 1947.1 民 族 文 學 의 眞 髓, 신천지, 2-1 英 譯 된 九 雲 夢, 百 濟 (백제사), 2(1947.1) 1947.2 학문과 정치성, 신천지, 2-2 1947.3 語 錄 1, 우리 文 學 (우리문학사), 3 1947.5 꼴키 가 본 獨 逸 의 軍 國 主 義, 白 民 ( 白 民 文 化 社 ), 3-3 1947.9 ( 附 錄 ) 巴 里 시대의 홍종우: 불국문헌에서, 閔 泰 瑗, 甲 申 政 變 과 金 玉 均, 서울: 國 際 文 化 協 會, 1947.9 1948.3 壬 辰 倭 亂 과 遣 日 使 節, 향토 ( 正 音 社 ), 8(1948.3) 1948.4 뷔똘 니꼴라예브, 金 永 鍵 譯, 쏘비에트 文 學 의 發 展 과 諸 問 題, 文 學 (조선문학가동맹), 7(1948.4) 1948.6 文 化 와 評 論, 서울출판사, 1948.6 1948.7 黎 明 期 의 朝 鮮, 正 音 文 庫, 서울: 正 音 社, 1948.7, 95 p. 1949.1 한글에 關 한 斷 想, 한글 (한글학회), 제105호 52) 전경수, 한국인류학백년, pp. 99, 112. 당시 震 檀 學 會 에서 결정된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송석 하, 총무부장: 조윤제, 출판부장: 손진태, 편집부장: 김상기, 사업부장: 유홍렬, 재무부장: 위원장 겸임, 위원: 김상기, 김두헌, 김수경, 김영건, 김상오, 도유호, 손진태, 송석하, 신석호, 유홍렬, 이병기, 이병도, 이상백, 이 숭녕, 이여성, 이인영, 조명기, 조윤제. 53) 자유신문, 1945년 11월 9일자, 국정교과서편찬연구위원회, 學 務 局 에 건의서 제출.( 자료대한민국 사, 제1권) - 11 -
<표 4>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해방 직전부터 1949년에 이르기까지 金 永 鍵 의 저술 활동은 조선의 대외관계사 이외에도 문학적 방면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金 永 鍵 이 역사 학적 작업 이외에 문학적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1945년 서울의 白 楊 堂 에서 간행된 金 永 鍵 의 語 錄 은 그 단서가 될 수 있다. 金 永 鍵 은 序 에서, 이 語 錄 의 副 題 目 은 一 九 四 二 - 一 九 四 四 年 의 遺 書 다. 부르조와 社 會 의 腐 敗 한 僞 善 的 인 道 德 律 에 對 하야 나는 無 限 한 憤 怒 를 느꼈던 것이다. 나는 이 묵은 原 稿 를 發 表 함으로써 나의 過 去 를 淸 算 하고자 한다. 라고 밝히고 있다. 54) 1942-1942년 시기의 斷 想 들을 두세 줄의 문장 혹은 한 페이지 정도 의 분량으로 적어나간 語 錄 은 당시의 부르조와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자 하면서 새로운 윤리와 도덕률을 촉구하고 있었다. 金 永 鍵 은 네 것은 내 것이요 내 것도 내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인 부패한 도덕이다 라고 부르조아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고,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청산할 것을 호소했다. 55) 나 혼자 괴로움을 당해서 해결을 지을 수만 있다 뒤에 올 젊은이들이 그것을 피할 수 만 있다면 나는 무슨 괴로움이나 자진해서 다 당해 보겠다 는 56) 이타적인 자세는 학문관에 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양심에게 물어 보는 말이 있다. 무엇 때문에 학문을 하느냐? 고.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료하지만, 흔히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학문을 하는 것도 같고, 학문 을 위해서 학문을 하는 것도 같이 생각이 들기 까닭이다. 라고 語 錄 은 소개하고 있다. 인류의 행복을 위한 학문은 우선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57) 그러면서,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움직이는 것이다. 생명이 움직여서 죽음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생명의 연장이 다. 등과 같은 이 따위 관념적인 말만의 철학 을 부정하고 있다. 58) 동시에, 자신의 의사를 효 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써 문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59) 이러한 도구로써의 문학은 사람의 마음이 몸보다 귀중하다면서 실제로는 몸을 위해 마음을 희생시키는 젊은 베르테 르의 슬픔 과 같은 인위적인 비극을 부정하고 있으며, 자신의 시흥에 혼자서나 취해 있는 54) 金 永 鍵, 語 錄 : 一 九 四 二 - 一 九 四 四 年 의 遺 書, 서울: 白 楊 堂, 1945, p. 3. 55) 위의 책, pp. 12, 30. 56) 위의 책, p. 46. 57) 위의 책, p. 21. 58) 위의 책, pp. 34-35. 59) 위의 책, p. 21. - 12 -
불란서 상중파 의 시인이 되기보다는 시를 쓰지 않고 차라리 아편대나 물고 들어 누어있겠 다고 천명했다. 60) 그래서 金 永 鍵 은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에 자신을 포함한 朝 鮮 의 文 學 家 들이 活 潑 한 鬪 爭 을 繼 續 하지 못했던 過 誤 를 率 直 하게 自 己 批 判 하는 同 時 에 地 下 또는 地 上 에서 力 戰 과 血 鬪 의 經 歷 을 가진 偉 大 한 指 導 者 들이 指 示 해주는 코-쓰에 依 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過 誤 를 안토록 操 心 스러히 그리고 忠 實 하게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 게 되었다. 61) 이처럼 원래 친숙했던 역사학적 방법론에 도구로써의 문학적 수단을 체용하게 된 金 永 鍵 은 어떤 때에는 나에게도 時 間 的 으로나 物 質 的 으로나 조금만 더 餘 裕 가 있어주었으면 하 고 어이없는 꿈을 꾸어 본 일도 있었지만 그러한 꿈은 나의 一 生 을 通 해서도 現 實 的 으로 있 을 수 있는 일인 것 같지는 않고 하야 나는 日 常 의 鬪 爭 을 繼 續 해 나가면서 學 問 을 해나가 는 것이 가장 賢 明 한 일이라고 깨달았다. 62) 결국, 해방 이후 金 永 鍵 의 주된 활동은 震 檀 學 會 내에서의 학문적인 활동 이외에도, 당시 문학가들과의 제휴를 통해 활발한 현실 참여로 나타나게 되었다. 金 永 鍵 은 1945년 9월 17일에 발족된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 에서 김태준, 권한, 이원조, 한효, 박세영, 이태준, 임화, 김남천, 안회남, 김기림, 박찬모 등과 함께 조직 위원이 되었다. 63) 또한, 1945년 10월 22일에 결성된 신예술가협회 에도 참여하여 오장환, 함세덕, 曺 圭 奉 (인천 태생으로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조각가), 金 晩 炯 (개성 태생으로 동경 제국미술학 교 출신의 화가), 崔 載 德 (경남 산청 태생으로 동경 태평양미술학교 출신의 화가), 서정주, 그 리고 흑인으로 추정되는 린우드 E. 브라운 등과 함께 평론가로서도 활동했다. 64) 한편, 1945년 8월 18일 조직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와 1945년 9월 30일에 결성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이 대립을 겪어가는 과정에서 이 두 단체의 통합이 현실적인 과제로 부각되기 시작하여 1945년 12월 6에 통합을 위한 회담이 열렸다. 여기에서 가칭으 로 조선문학가동맹 으로 명칭을 정한 후, 12일에는 조선문학의 지향 이란 주제로 좌담 회가 개최되었는데, 金 永 鍵 도 여기에 참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5) 그리고 12월 13일의 모임에서는 정식으로 조선문학가동맹이 결성되고 전국문학자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했는 데, 金 永 鍵 은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의 書 記 長 직을 맡았으며 김태준 권환 이원조 임 화 한효 박세영 이태준 김남천 안회남 김기림 박찬모 등과 함께 전국문학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6) 이후, 1946년 2월 8, 9일 이틀 동안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가 서울 종로 YMCA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金 永 鍵 은 소련 작가동맹 니콜라이 치호노프의 메시지를 낭독 한 이후에, 9일 오전 11시에 속개된 대회에서 세계 문학의 과거와 장래의 동향 이란 제 목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소련, 미국, 중국의 문학 운동을 언급하고 세계 문학의 장래 동향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67) 60) 金 永 鍵, 語 錄 : 一 九 四 二 - 一 九 四 四 年 의 遺 書, pp. 57-58. 61) 金 永 鍵, 再 出 發 에 있어 文 學 的 自 己 批 判 : 앞으로 나갈 길을 操 心 하라, 신문예 (신문예사), 제1권 2호 (1945.7), p. 37. 62)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p. 4. 63) 김혜니, 한국 현대시문학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2.03.25, p. 23. 64) 대중일보, 1945년 10월 22일자; 尹 永 川, 배인철의 흑인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1989년 봄호 (통권 63호, 1989.3), p. 208. 65) 金 在 湧, 해방직후 남북한 문학운동과 민중성의 문제 - 소설 작품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1989년 봄호(통권 63호, 1989.3), pp. 138-141; 藝 術, 1946년 1월호. 66) 자유신문, 1945년 12월 25일자, 조선문학동맹 결성, 각부 위원 결정 (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67) 朝 鮮 日 報, 1946년 2월 10일자, 전국문학자대회 2일째 (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金 永 鍵, 세계 - 13 -
1946년 봄부터 가을까지 金 永 鍵 의 언론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조선문학가동맹 부의장 이태준이 1946년 3월 25일에 창간한 현대일보 의 활동에도 참가하여 외보를 책 임지게 되었다. 68) 語 錄 에는 당시 기자들의 무지함을 한탄하면서, 쪄어날리스트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나 다 아는 척하는 사람을 이르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검열관이 있다. 그 하나는 정부의 관리요, 또 하나는 신문이나 잡지 를 편집하는 기자다. 우리에게는 다음 것이 더욱 말썽일 때가 많다. 쪄어날리스트가 알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라 시인의 이름이요, 예술이 아니라 예술가의 이름뿐이다. 남자의 매춘부는 지식계급의 쪄어날리스타. 등과 같은 혹독한 비평을 싣고 있는데, 69) 金 永 鍵 자신이 저널리스트로서 언론계에 투신한 것을 보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는 문학적 활동이 저널리즘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후 1947년 金 永 鍵 의 활동은 전국문화단체총연맹(이하 문련)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좌익진영이 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문화예술단체를 연합하여 결성한 문련에서 金 永 鍵 은 2월에 대표로 선출되었다. 70) 또한, 3월 17에는 民 主 主 義 民 族 戰 線 71)이 世 界 勞 聯 極 東 調 査 團 일행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고자 民 主 主 義 政 黨 團 體 聯 合 世 界 勞 聯 極 東 調 査 團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는데, 金 永 鍵 도 接 待 部 委 員 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72) 그러나 1948년에 이르러 金 永 鍵 의 활동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남로당 중 심부를 포함해서 문련의 지도자였던 임화도 월북한 뒤였던 만큼 대리인이었던 金 永 鍵 은 위 원장으로서 문련의 명맥만 유지시킬 뿐이었다. 1948년 2월 13일 현재, 조직의 약화를 감출 수 없었던 金 永 鍵 은 이 사실과 여건의 불가피함을 북쪽에다 보고했다. 73) 이후, 金 永 鍵 과 관 문학의 과거와 장래의 동향, 朝 鮮 文 學 家 同 盟 編, 建 設 期 의 朝 鮮 文 學, 京 城 : 朝 鮮 文 學 者 大 會, 1946.6, pp. 111-128. 68) 이태준, 이태준 전집 1, 가람기획, 2005, p. 27; 이재인, 한국의 소설 사상사, 문학아카데미, 1997, p. 192. 현대일보 는 그해 9월 미군 사령부 포고 제2호를 위반해서 정간 처분을 받았다. 69) 金 永 鍵, 語 錄 : 一 九 四 二 - 一 九 四 四 年 의 遺 書, pp. 14, 27, 62. 70) 김윤식, 해방공간의 문학, 해방전후사의 인식 2, 한길사, 1985, p. 467. 71) 약칭 민전( 民 戰 )으로도 부른다. 1946년 2월에 남한의 모든 좌익 정당 및 사회단체를 총집결하여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조직은 여운형( 呂 運 亨 ) 박헌영( 朴 憲 永 ) 허헌( 許 憲 ) 김원봉( 金 元 鳳 ) 백남운 ( 白 南 雲 ) 등 5명의 의장과 10명의 부의장이 있었으며, 의장단을 포함한 상임위원 73명, 전국에서 선출된 중앙 위원 305명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해에 결성된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민족혁명당 천도교청우당 등 5개 정당이 중심이 되어 그 산하의 사회단체를 통합한 단체다.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김구( 金 九 ) 중심의 비상 국민회의와 미군정청 자문기관으로 발족한 대한국민민주의원에 대응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단체 가 결성된 후, 좌우익의 대립이 한층 심화되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 되자, 민족진영에서는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익진영은 신탁통치를 지지하고 나섬과 동시에, 좌익세력의 결속으로 힘의 대결을 기도하였고, 양 진영은 과도적 임시국회의 역할을 자임하며 과도임시정부의 수립을 주 도하고자 했다. 민전은 8개조의 강령과 37개 조항에 달하는 행동지침을 발표하였는데, 강령의 주요골자는 1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의 지지 2 우익과 같이하는 5당연합체 탈퇴 3 비상국민회의 반대 4 미 소공동위원회 지지 5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단 6 토지문제의 민주적 해결 7 8시간 노동제 실시 등이다. 표면적으로는 좌 익단체의 민주적 연합체 형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공산당에 의해 움직였던 민전은, 미 군정을 반 대하고 한국의 공산화를 이루는 것을 궁극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정 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박헌영 이 주하( 李 舟 河 ) 이현상( 李 鉉 相 ) 이강국( 李 康 國 ) 등 남조선노동당의 주요 간부들이 북한으로 탈출하거나 지하로 잠 입하면서 남한 내에서 소멸했다. 72) 서울신문, 1947년 3월 19일자, 민전, 세계노련극동조사단 입국환영준비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제4권) 당시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委 員 長 : 許 成 澤, 副 委 員 長 : 朴 世 榮, 魯 振 漢, 李 仁 同, 總 務 部 : 玄 勳 金 正 洪 外 16명, 接 待 部 : 李 成 百, 金 永 鍵, 文 藝 峰 外 27명, 連 絡 部 : 朴 秉 一 朱 炳 輔 外 16명. - 14 -
련된 남한에서의 행적은 밝혀진 것이 아직 없고, 언젠가 월북했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 을 뿐이다. 74) 1940년에 귀국하여 한동안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국내에서 학 문 활동과 본격적인 현실 참여를 병행하고자 했던 金 永 鍵 은 1948년 2월을 전후해서 文 壇 과 言 論 을 통한 자신의 의사 표현과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자, 先 學 들의 督 勵 로 원래 계획하고 있던 학문 연구 쪽으로 조금씩 회귀해 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미 1947년 9월에 巴 里 시대의 홍종우: 불국문헌에서 (1947.9)를 발표했던 金 永 鍵 은 1948년 3월에는 壬 辰 倭 亂 과 遣 日 使 節 를 소개하여 대외 관계사 연구를 재개했다. 1948년 6월과 7월에는 文 化 와 評 論 과 黎 明 期 의 朝 鮮 을 각각 발간하여 그간의 학문성과를 재정리하고, 1949년 9월 1일에 발표된 한글에 關 한 斷 想 을 끝으로 남한에서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과연 1930-40년대 하노이 체류와 고국에서의 활동이 金 永 鍵 의 베트남 연구에는 어 떻게 반영되어 나타났는지에 대해 그 성과와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Ⅲ. 金 永 鍵 의 베트남 연구 조흥국은 金 永 鍵 의 동남아시아 연구를 소개하면서 일본의 大 東 亞 共 榮 圈 수립에 연류되 어 있는 그 어용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75) 그러나 金 永 鍵 의 하노이에서의 행적과 베트남 연구의 성과를 검토해 본다면, 조흥국의 평가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우선, 金 永 鍵 개인은 공식적으로는 일본 국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글을 일본 학술지에 발표할 때를 제외하고는, Kin Ei-Ken 이라는 이름 대신에 Kim Yung-kun 이라 는 한국식 이름을 항상 사용했다. 또한, 일본이나 한국 관련 도서의 서지 목록을 작성할 때 에도, 1910년 이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漢 城 을 대체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京 城 이라 는 지명도 항상 Séoul 로 바뀌어 표현되었다. 아울러, 출판연도를 표시할 때에도 大 正 이나 昭 和 라는 연호를 쓰지 않고, 西 紀 로만 나타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고려해 본다면, 金 永 鍵 은 식민지 조국을 떠나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던 하노이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 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고자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金 永 鍵 의 베트남 관련 연구는 1934년경부터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데,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5> 金 永 鍵 의 베트남 연구와 관련된 저술 목록. 발표시기 논문명 / 저서명 1934.10 東 洋 學 史 論, 靑 年 朝 鮮 ( 靑 年 朝 鮮 社 ), 第 1 卷 第 1 號 1936.7.1 安 南 遊 記 ( 一 ): 安 南 의 文 壇 ( 上 ), 東 亞 日 報 1936.7.2 安 南 遊 記 ( 二 ): 安 南 의 文 壇 ( 下 ), 東 亞 日 報 1936.7.3 安 南 遊 記 ( 三 ): 安 南 의 古 都, 東 亞 日 報 1936.7.5 安 南 遊 記 ( 四 ): 安 南 의 古 都, 東 亞 日 報 1936.7.7 安 南 遊 記 ( 五 ): 安 南 의 古 都, 東 亞 日 報 73) 김윤식, 해방공간의 문학, pp. 467-468. 74) 權 寧 珉, 韓 國 近 代 文 人 大 事 典, 亞 細 亞 文 化 社, 1990, p. 241. 75) 조흥국, 동남아시아 연구의 문제와 과제, p. 49. - 15 -
1936.7.9 安 南 遊 記 ( 六 ): 安 南 의 古 都, 東 亞 日 報 1936.7.10 安 南 遊 記 ( 七 ): 占 城 의 文 化, 東 亞 日 報 1936.7.11 安 南 遊 記 ( 八 ): 安 南 의 서울 順 化 ( 上 ), 東 亞 日 報 1936.7.12 安 南 遊 記 ( 九 ): 安 南 의 서울 順 化 ( 下 ), 東 亞 日 報 1936.11.1 日 本 見 聞 錄 について, 民 族 學 研 究 ( 日 本 民 族 學 會 ), 第 二 巻 第 一 號 1937.2.14 安 南 通 信 : 建 國 神 話 ( 一 ), 朝 鮮 日 報 1937.2.16 安 南 通 信 : 建 國 神 話 ( 二 ), 朝 鮮 日 報 1937.2.17 安 南 通 信 : 建 國 神 話 ( 三 ), 朝 鮮 日 報 1937.2.18 安 南 通 信 : 建 國 神 話 ( 四 ), 朝 鮮 日 報 1937.2.19 安 南 通 信 : 建 國 神 話 ( 五 ), 朝 鮮 日 報 1937.8 雲 屯 と 日 本 人, 歷 史 學 硏 究 ( 歷 史 學 硏 究 會 ), 第 七 卷 第 八 號 1938.7 安 南 の 史 料 に 現 はれたる 顯 貴 の 名 に 就 て, 史 學 硏 究 ( 廣 島 文 理 科 大 學 內 廣 島 史 學 硏 究 會 ), 第 十 卷 第 一 號 1938.8 安 南 松 本 寺 釣 り 鐘 と 泰 德 通 寶, 史 學 ( 慶 應 義 塾 大 學 文 學 部 內 三 田 史 學 會 ), 第 十 七 卷 第 一 號 1939.1 安 南 普 陀 山 名 考, 震 檀 學 報 ( 震 檀 學 會 ), 第 10 號 1939.7 迦 知 安 に 於 ける 日 本 人 の 十 字 架, 歷 史 學 硏 究, 第 9 卷 第 七 號 1939.9 佛 領 印 度 支 那 東 京 興 安 に 於 ける 舗 客 に 就 いて, 史 學, 第 十 八 卷 第 一 號 1940.12 占 城 (チャムバ)と 日 本, 東 亜 学 ( 東 京 : 日 光 書 院 ), 第 參 輯 1941.7.7 安 南 의 童 話 : 날러다니는 풀, 每 日 申 報 1941.12 安 南 に 於 ける 浦 島 の 傳 説, 民 族 學 研 究, 第 七 卷 第 三 號 印 度 支 那 人 類 研 究 所 の 事 業 と 其 の 意 義, 民 族 學 研 究, 第 七 卷 第 三 號 杉 本 直 治 郞 金 永 鍵, 印 度 支 那 に 於 ける 邦 人 發 展 の 硏 究 : 古 地 圖 に 印 されたる 日 1942 本 河 に 就 いて, 東 京 : 冨 山 房 日 佛 安 南 語 會 話 辭 典, 東 京 : 岡 倉 書 房 1943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東 京 : 冨 山 房 1943.2 安 南 の 多 妻 制 度, 民 族 學 硏 究, 新 第 一 卷 第 二 號 1943.3 安 南 の 仏 教 と 祭 祀, 大 法 輪, 昭 和 18 年 3 月 號 1946.12.31 金 永 鍵 氏 談 : 보라! 越 南 人 民 抗 爭 - 崎 嶇 한 運 命 朝 鮮 과 恰 似, 朝 鮮 日 報 1947.5 죠르즈 쎄대스, 金 永 健 譯, 第 七 ~ 十 三 世 紀 의 南 海 帝 國, 震 檀 學 報 ( 震 檀 學 會 ), 第 十 五 號 1948.7 黎 明 期 의 朝 鮮, 正 音 文 庫, 서울: 正 音 社 1934년 10월 靑 年 朝 鮮 에 발표된 東 洋 學 史 論 에서, 金 永 鍵 은 東 洋 學 의 범주에서 중국학, 인도지나학 그리고 인도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인도지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 문화와 중국 문화 두 요소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6) 이러한 관점은 다분히 프랑스 遠 東 學 院 소속 연구자들의 학문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후 金 永 鍵 의 베트남 연구는 한국 언론을 통한 베트남 알리기로 구체화되었다. 우선, 1936년 7월 1일과 7월 12일 사이에 安 南 遊 記 라는 제목으로 7편의 시리즈 기사를 東 亞 日 報 에 게재했다. 7월 1일과 2일에 발표된 安 南 遊 記 : 安 南 의 文 壇 에서 는 베트남 文 壇 의 상황을 먼저 논하기에 앞서, 베트남어의 발전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金 永 鍵 에 의하면, 중국어와 같이 安 南 말 도 모노씰라빅(Monosyllabic)한 말인데, 吏 讀 와 비 슷한 喃 (Nôm)에 대해서도, 즉 셋 이라고 하는 글자는 바 (ba)라고 하는데 라는 喃 으로 쓸 때는 으로 셋이라고 하는 三 자와 音 으로 바 라고 하는 巴 자를 합쳐서 라고 쓰고 읽기는 바 라고 하며 뜻은 셋 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76) 金 永 鍵, 東 洋 學 史 論, 靑 年 朝 鮮 ( 靑 年 朝 鮮 社 ), 第 1 卷 第 1 號 ( 昭 和 9[1934.10]), pp. 17-19. - 16 -
로 풀이하면서 상세히 다루었고, 喃 을 이용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金 雲 翹 를 들었다. 또 한, 베트남 國 語 (quốc ngữ)의 발전 과정과 통일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范 瓊 [Phạm Quỳnh]의 南 風 (Nam Phong) 잡지, 저명한 불문 번역가 阮 文 榮 [Nguyễn Văn Vĩnh?], 漢 學 者 로서 문단에서 활발을 하고 있던 黎 懙 [Lê Dư] 등을 소개했다. 아울러, 보다 젊은 문 인들로 구성된 自 力 文 壇 의 활동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극예술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기까 지 했다. 이어서, 東 亞 日 報 의 1936년 7월 3일자, 5일자, 7일자, 9일자에서는 安 南 遊 記 : 安 南 의 古 都 란 제목으로 18세기 말엽까지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였던 하노이의 역사를 주 변 지역의 역사와 함께 다루었다. 그리고 1936년 7월 10일자와 11 12일자에서는 安 南 遊 記 : 占 城 의 文 化 와 安 南 遊 記 : 安 南 의 서울 順 化 라는 주제로 중부 다 낭(Đà Nẵng)을 중 심으로 남부로 발전해 갔던 참파(Champa) 왕국의 역사와 19세초부터 응우옌 왕조( 阮 朝, 1802-1945)의 수도였던 후에(Huế)의 발전 과정을 소개했다. 마찬가지로, 金 永 鍵 의 베트남 알리기는 朝 鮮 日 報 를 통해서도 진행되었다. 1937년 2월 14일부터 19일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서 安 南 通 信 를 게재하여 中 國 의 炎 帝 神 農 氏 부터 시작되는 베트남의 建 國 神 話 에 대해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재미있게 서술 했다. 한편, 하노이 체류를 통해 베트남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게 된 金 永 鍵 의 관심은 베트남-일본 관계사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1936년 11월에 발표된 日 本 見 聞 錄 について ( 民 族 學 研 究, 日 本 民 族 學 會, 第 二 巻 第 一 號 )를 들 수 있다. 원래, 1815년 사이공에서 후에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일본의 九 州 지역까지 표류하게 된 당 흐우 보이(Đặng Hữu Bôi, 鄧 有 杯 ), 응우옌 주이 바오(Nguyễn Duy Bảo, 阮 惟 寶 ) 등이 현지에서 본 각종의 풍속, 제도, 문물 등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을 1828년 조정의 관리 쯔엉 당 꾸에 (Trương Đăng Quế, 張 登 桂 )가 日 本 見 聞 錄 이란 제목으로 다시 정리해 놓았는데, 金 永 鍵 은 당시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 보존되어 있던 8 枚 의 小 寫 本 을 발굴하여 표점을 찍고 일본어로 번역을 하여 재출간하게 된 것이었다. 77) 일본인들의 베트남 방문과 관련해서는 1937년 8월에 歷 史 學 硏 究 에 雲 屯 と 日 本 人 이란 글을 발표했다. 金 永 鍵 은 뒤무띠에(Gustave Dumoutier)가 1895년 Bulletin de géogrqphie historique et descriptive(paris, vol. 10)에 게재한 "Les comptoirs hollandais de Phô-hien ou Phô-khach, près de Hưng-yen (Tonkin) au XVII e siècle"를 근거로, 일본 상인들이 왔었다고 추정되는 번 돈(Vân Đồn, 雲 屯 )이란 지역에 대한 정확한 고증을 하고자 했다. 약 1년 후인 1938년 7월에 간행한 安 南 の 史 料 に 現 はれたる 顯 貴 の 名 に 就 て ( 史 學 硏 究, 第 十 卷 第 一 號 )는 1931년 5월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당시 金 永 鍵 은 프랑스 遠 東 學 院 에서 알게 된 베트남 직원 레 즈가 大 南 寔 錄 前 編 에 보이는 顯 貴 이라 는 日 本 名 이 일본 자료에 나타나는 白 濱 顯 貴 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通 航 一 覽 과 外 蕃 通 書 와 같은 일본 측 사료를 근거로 16세기의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가 설을 제시했다. 또한, 16세기 후반부터 일본 국내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베트남의 해변으로 까지 이주해 와서 日 本 井 을 건설한 사례도 흥미로운 연구 영역이 되었다. 78) 金 永 鍵 의 베트남-일본 무역 관계에 대한 관심은 17세기로까지 확장되었다. 먼저, 떠이 77) 松 本 信 廣, 追 記, 民 族 學 研 究 ( 日 本 民 族 學 會 ), 第 二 巻 第 一 號 (1936.1.1), pp. 66-67 참조. 78) 金 永 鍵, 迦 知 安 に 於 ける 日 本 人 の 十 字 架, 歷 史 學 硏 究, 第 9 卷 第 七 號 (1939.7). - 17 -
썬 정권이 출현한 이후 泰 德 通 寶 를 주조하기 위해서 17세기 한 일본인이 베트남에 세운 松 本 寺 의 釣 鐘 을 이용했음을 밝혔다. 79) 그리고 동시대 하노이와 흥 옌(Hưng Yên)에서 활동한 일본 상인들의 활약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80) 金 永 鍵 의 베트남-일본 관계사 연구는 참파 왕국에 대한 연구로까지 발전되었다. 1938 년 5월 17일 밤 하노이 81) 에서 脫 稿 하여 이듬해 震 檀 學 報 에 발표된 安 南 普 陀 山 名 考 에 의하면, 1933년 金 永 鍵 은 쐐데스와 함께 다 낭의 포 다(Phổ Đà) 산( 普 陀 山 )으로 사적 답사를 갔었다. 여기서 발견한 각종 碑 銘 과 중국 측의 자료를 이용하여, 普 陀 山 의 명칭은 觀 世 音 菩 薩 이 자주 왕래하여 노닐던 인도의 포타라카(Potalaka 혹은 Potaraka로 표기) 산 을 漢 譯 한 것이기 때문에, 1925년 쌀레(A. Sallet) 博 士 가 普 陀 山 을 La Montagne de l'universel escarpement 으로 직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82) 그리고 이러한 베 트남 중부 지역에 대한 관심은 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반에 거 쳐 형성된 참파 왕국과 일본과의 교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83) 1940년 후반에 귀국했다가 이듬해부터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베트남의 동화와 전설을 소개하는 84) 한편, 베트남의 전통적인 多 妻 制 度 와 佛 教 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했다. 85) 아울러, 1942-1943년 사이에는 그간의 연구 성과가 세 종류의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결실 을 맺게 되었다. 金 永 鍵 은 하노이에 체류할 당시인 1931년과 1933년에 각각 杉 本 直 治 郞 과 松 本 信 廣 과 알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자신이 수집한 다양한 베트남 남부 관련 지도를 바 탕으로 杉 本 直 治 郞 과 함께 1942년에 印 度 支 那 に 於 ける 邦 人 發 展 の 硏 究 : 古 地 圖 に 印 された る 日 本 河 に 就 いて 를 발간하였으며, 1943년에는 유명한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를 학 계에 선보였다. 86) 印 度 支 那 に 於 ける 邦 人 發 展 の 硏 究 에 의하면 일본과 동남아간의 무역이 점차 활발해 짐에 따라 동남아의 주요 항구들에 정착하여 사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증대되었는데, 17세기 초가 되면 당시 캄도이아의 수도인 우동(Oudong)의 外 港 이었던 폰히어루(Ponhea-lu)뿐만 아니라 프놈펜에도 소위 日 本 井 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第 十 七 圖 를 통해 명확히 보여주었다.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는 이하에 나타낸 本 書 의 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간의 개별적인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는 동시에 베트남-일본 관계나 태국의 역사 혹은 베 79) 金 永 鍵, 安 南 松 本 寺 釣 り 鐘 と 泰 德 通 寶, 史 學 ( 慶 應 義 塾 大 學 文 學 部 內 三 田 史 學 會 ), 第 十 七 卷 第 一 號 (1938.8), pp. 77-87. 80) 金 永 鍵, 佛 領 印 度 支 那 東 京 興 安 に 於 ける 舗 客 に 就 いて, 史 學 ( 慶 應 義 塾 大 學 文 學 部 內 三 田 史 學 會 ), 第 十 八 卷 第 一 號 (1939.9), pp. 77-109. 81) 본문에는 古 都 다이 라(Đại La, 大 羅 ) 로 적혀 있다. 다이 라 성은 11세기 초에 리(Lý, 李 ) 왕조 (1009-1225)의 수도였는데, 이름이 탕 롱(Thăng Long, 昇 龍 )으로 바뀌었다가, 1820년대부터 하노이라는 이 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82) A, Sallet, "Les Montagnes de Marbe (Ngu-hanh son)," Bulletin des Amis du Vieux Hue, Hanoi, Ⅱe année (1924), n 1 (janvier-mars), 1925, pp. 9, 130 참조. 83) 金 永 鍵, 占 城 (チャムバ)と 日 本, 東 亜 学 ( 東 京 : 日 光 書 院 ), 第 參 輯 (1940.12), pp. 357-370. 84) 金 永 鍵, 安 南 의 童 話 : 날러다니는 풀, 每 日 申 報 ( 每 日 申 報 社 ), 1941년 7월 7일자, 4면; 金 永 鍵, 安 南 に 於 ける 浦 島 の 傳 説, 民 族 學 研 究, 第 七 卷 第 三 號 (1941.12), pp. 358-362. 85) 金 永 鍵 ), 安 南 の 多 妻 制 度, 民 族 學 硏 究, 新 第 一 卷 第 二 號 (1943.2), pp. 47-50; 金 永 鍵, 安 南 の 佛 教 と 祭 祀, 大 法 輪, 昭 和 18 年 3 月 號. 語 錄 에는 베트남의 多 妻 制 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 고 있다. 크리스토플 보를리 신부가 안남에 가서 전도를 할 때에, 一 夫 多 妻 制 度 를 반대하니까 그곳의 주민들 이 말했다. 재산이 있고도, 아내를 하나밖에 안 데리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욕심쟁이다. 재산이 있어, 여러 아 내들을 구제해 준다면 그 또한 적선사업이 아니냐?고. 86) 杉 本 直 治 郞, 序, 杉 本 直 治 郞 金 永 鍵, 印 度 支 那 に 於 ける 邦 人 發 展 の 硏 究 : 古 地 圖 に 印 されたる 日 本 河 に 就 いて, 東 京, 1942, pp. 1-2; 金 永 鍵,, 序, 印 度 支 那 と 日 本 との 關 係, 東 京 : 冨 山 房, 1943, p. 1. - 18 -
트남사 자체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보완하였으며, 특히 베트남-한국 교류사에 대한 새로 운 내용이 첨가되었다. 松 本 信 廣, 序, pp. 1-2. 自 序, pp. 1-3. 目 次, pp. 1-2. 印 度 支 那 と 日 本 人, pp. 1-11. 桃 山 時 代 から 江 戶 時 代 に 至 る 日 本 とトンキンとの 貿 易 關 係, pp. 12-41. 鎖 國 後 日 本 と 東 京 (トンキン)との 關 係, pp. 42-79. 暹 羅 とファウルコン 婦 人, pp. 80-130. 安 南 沱 灢 (ツウラン)の 日 本 町, pp. 131-153. 占 城 (チャムバ)と 日 本, pp. 154-169. 雲 屯 と 日 本 人, pp. 170-177. 迦 知 安 に 於 ける 日 本 人 の 十 字 架, pp. 178-186. 安 南 松 本 寺 釣 り 鐘 と 泰 德 通 寶, pp. 187-198. 佛 領 印 度 支 那 東 京 興 安 に 於 ける 舗 客 に 就 いて, pp. 199-234. 安 南 國 使 臣 唱 和 問 答 錄 に 就 いて, pp. 235-242. 安 南 に 漂 流 せる 濟 州 道 の 住 民, pp. 243-244. 安 南 に 於 ける 浦 島 の 傳 説, pp. 245-249. 安 南 人 の 博 奕, pp. 250-254. 安 南 の 史 料 に 現 はれたる 顯 貴 の 名 に 就 て, pp. 255-262. 日 本 見 聞 録 について, pp. 263-282. 附 錄, pp. 283-314. 故 ノエル ペリ[Noël Peri] 氏 を 憶 ふ, pp. 283-288. 故 クロオド エウゼンヌ メエトル[Claude Eugène Maitre] 氏 を 憶 ふ, pp. 289-292. 安 南 花 山 君 李 龍 祥 の 事 蹟, pp. 293-309. 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 리 롱 뜨엉(Lý Long Tường, 李 龍 祥 )에 대한 전설은 이미 朝 鮮 日 報 1927년 2월 22일자에서 다루어진 바가 있었는데, 87) 金 永 鍵 은 1936년 여름 옹진을 방문에서 들은 전설과 花 山 君 家 寶, 花 山 李 氏 世 譜, 花 山 君 本 傳, 甕 津 府 邑 誌 등과 같은 각종 자료를 활용하여 李 龍 祥 의 事 蹟 을 歷 史 化 시키는 데 공헌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金 永 鍵 의 日 佛 安 南 語 會 話 辭 典 ( 東 京 : 岡 倉 書 房, 1942, 270 p.) 편찬이다. 이 사전은 總 說, 文 字, 發 音, 文 法 과 그 特 徵, 慣 用 語 句, 日 常 語 例 文, 會 話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讀 本 을 포함하고 베트남어 교재로서의 가치 를 더욱 높이고 있다. 특히 이 讀 本 에는 인도차이나총독부 학무국에서 편찬한 아동용 國 文 敎 科 書 에서 발췌한 Tôi đi học ( 學 校 에 간다), Cánh đồng nhà quê ( 田 園 ), Sài Gòn và Chợ Lớn (사이공과 쩌 런)과 國 文 史 記 敎 科 書 에서 뽑은 Ông Nguyễn Ki m ( 阮 淦 翁 ) 이외에도 Nam Phong( 南 風 )에 실렸던 팜 뀐의 논설, 녓 린(Nhất Linh, 一 靈 ) 의 소설 Đoạn Tuyệt( 斷 絶 ), 응우옌 주(Nguyễn Du, 阮 裕 [ 阮 攸?], 1765-1821) Kim Vân Kiều( 金 雲 翹 ) 등을 포함하고 있어, 베트남어 학습을 통해 베트남의 일상, 역사, 문학을 동시 에 이해시키려 했던 金 永 鍵 의 안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1946년 11월까지 베트남과 관련된 金 永 鍵 의 연구는 단절되었다. 1942-1944년 시기의 斷 想 들을 적어 발간된 語 錄 에만 단편적으로 베트남이나 동남아시 아에 관한 짧은 노트들이 발견될 뿐이다. 예를 들면, 87) 조선일보, 1927년 2월 22일자, 조간 2면, [내고장의 인물과 전설(전21회)] (16) 萬 古 偉 動 의 주인공인 안남 왕족 花 山 君. 옹진 李 祥 龍 의 전설. - 19 -
안남왕의 궁전에서 총독이 주최한 무도회가 열렸다. 총독이 왕후더러 어찌해서 당신은 춤을 추지 안하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는 춤을 즐기려면 춤추는 계집애들을 불러다 춤을 추게 하고 볼 따름이지 내가 춤을 추지는 않습니다 하고 왕후는 대답을 했다. 라는 남 프엉(Nam Phương) 황후의 당찬 일화를 소개하거나, 88) 나는 남양으로 가고 싶다. 그리고 물질적 경제적 사회제도나 또는 그 조직이 아직 발달 되지 못하고 원시적 그대로의 순진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에 들어가서 그들 의 애정의 심리를 연구해 보고 싶다. 라고 하여, 89) 동남아시아 연구에 대한 인류학적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방을 전후한 한국의 정국과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金 永 鍵 의 베트남 연구는 한동안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金 永 鍵 은 1945년 11월 15일 조선문학건설본부 의 기관지인 文 化 戰 線 90) 創 刊 號 에서 世 界 文 化 의 임무를 첫째, 帝 國 主 義 國 家 에게 占 領 되고 戰 爭 의 慘 禍 를 입었던 諸 地 域 의 復 舊 와 發 展 에 協 力 할 것과, 둘째, 아직 殘 存 해 있는 反 動 的 諸 國 家 와 그 文 化 에 對 한 鬪 爭 에 協 力 할 것 등을 指 摘 했다. 91) 이러한 金 永 鍵 의 反 帝 國 主 義 연대의식은 1946년 12월말 朝 鮮 日 報 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越 南 의 人 民 抗 爭 을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소개하면서 한국의 운명한 흡사한 越 南 의 경우를 예의주시할 것을 요구했다. 92) 그러나 당시 越 南 이 국제신탁을 자원하였으나 국제문제화 되지 않고 결국은 1946년 2월 越 南 共 和 國 의 자치정부로서 승인받게 되었던 점과 프랑스 국내 총선에서 승리 를 거둔 부 룸 이 주도하는 공산당 내각이 월남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원만한 해 결을 볼 것이라고 한 예상은 93) 당시 한국의 현실 정치에 깊숙이 매몰되어 좌익진영의 신탁 통치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金 永 鍵 의 고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金 永 鍵 이 죠르즈 쎄대스 의 논문을 번역하여 1947년 5월 震 檀 學 報 第 十 五 號 에 실은 第 七 ~ 十 三 世 紀 의 南 海 帝 國 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 까? 金 永 鍵 자신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94) 이제 나는 쎄대-스 博 士 의 生 前 에 다시 한번 그를 만나 그의 該 博 한 薰 陶 를 받고 싶은 것이 큰 所 願 의 하나이나, 나의 이 所 願 이 이루어지지 못할지라도, 앞으로 그의 燦 爛 한 印 度 支 那 와 南 海 史 의 硏 究 는 나의 東 西 文 化 交 涉 史 上 에 있어 南 方 의 地 位 라고 하는 硏 究 의 出 發 點 이 되겠기에, 이에, 일즉이 나의 손으로 飜 譯 하여 다른 곳에 揭 載 했든 一 文 을 다시 訂 正 하여 우리글로 發 表 하는 바이다. 베트남을 출발점으로 삼아 확장되어 가던 金 永 鍵 의 연구는 동남아시아 전체로 확장되어 가길 기대했지만, 해방 이후의 격동적인 정국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자 했던 金 永 鍵 자신 88) 金 永 鍵, 語 錄, p. 29. 89) 金 永 鍵, 語 錄, p. 33. 90) 조선문학건설본부 는 임화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등을 중심이 되어 1945년 8월 16일 종로 한청빌딩에서 발족 되었던 단체였다.(김재용, 해방직후 남북한 문학운동과 민중성의 문제, p. 140) 91) 金 永 鍵, 世 界 文 化 의 動 向, 文 化 戰 線, 創 刊 號 (1945.11.15). 92) 朝 鮮 日 報, 1946년 12월 31일자, 조간 2면, 金 永 鍵 氏 談 : 보라! 越 南 人 民 抗 爭 - 崎 嶇 한 運 命 朝 鮮 과 恰 似. 93) 위의 기사. 94) 죠르즈 쎄대스, 金 永 健 譯, 第 七 ~ 十 三 世 紀 의 南 海 帝 國, p. 150. - 20 -
의 선택과 과학적인 학문적 성과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1927년 이후 불완전하게나마 밝혀진 金 永 鍵 의 생애를 통해 그의 베트 남 연구와 그 의미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金 永 鍵 의 베트남 硏 究 에 대해 보다 큰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향후 보완되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먼저, 1927년 이전 金 永 鍵 의 행적에 대해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현재로서는 전무하다 는 점을 들 수 있겠다. 1927년 이전 金 永 鍵 의 이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遠 東 學 院 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는 파리 소재 프랑스 遠 東 學 院 센터와 하노이의 EFEO 지점 및 第 一 文 書 保 管 所 에서 아카이브를 발굴하는 작업이 급선무이다. 또한, 이윤재, 이극로, 진단학회 인사, 문일평 등과 같은 金 永 鍵 주변 인물들의 자료를 통해, 金 永 鍵 의 활동 상황을 간접적 으로 규명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高 麗 大 學 校 博 物 館 을 방문하여 1936년 당시 프랑스 遠 東 學 院 과 普 成 專 門 學 校 사이에 진행된 교류의 흔적들을 보다 실증적이고 정확하게 재구성해야 만 할 필요가 있다. 金 永 鍵 의 베트남 연구와 관련된 거시적 관점으로부터 조망과 관련하여, 金 永 鍵 의 자신 의 朝 鮮 學 에 대한 입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46년 당시 金 永 鍵 은, 아직 朝 鮮 學 이라고 할 것까지는 成 立 이 되지 못했지만 朝 鮮 에 關 한 外 國 의 사료들도 決 코 적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들을 모두 涉 獵 하려면 英 佛 獨 露 和 葡 西 等 多 數 한 言 語 의 知 識 이 必 要 하다. 그리고 亞 라 比 亞 蒙 古 滿 洲 女 眞 등의 現 代 語 와 古 代 語 가 아울러 必 要 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課 業 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다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處 女 地 와 같이 남아 있는 이 分 野 는 반드시 우리들의 손으로 그 草 創 期 나마 開 拓 해 놓아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여, 95) 朝 鮮 學 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과 차후의 사업을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현실 속에 그대로 실현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 이기는 하지만, 1948년 간행된 黎 明 期 의 朝 鮮 ( 正 音 文 庫, 서울: 正 音 社 )은 金 永 鍵 개인 에 의한 朝 鮮 學 구축 노력이 어느 정도 구현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대외교류사에 대 한 통시적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는 本 書 의 내용은 아라비아와 신라, 포루투갈과 고려, 李 龍 祥, 馮 克 寬 과 李 睟 光, 레지이 신부와 조선, 滿 洲 와 朝 鮮, 壬 辰 倭 亂 당시의 遣 日 使 節, 콕스 가 바라 본 조선의 대외 무역, 제주도민의 안남표류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베트남 연 구를 하던 과정 중에 확장되어 간 필자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가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판단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10년간 베트남 현지에서 실증적으로 진행된 安 南 연구는 南 海 史 연구로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었고, 동시에 外 國 學 연구를 통해 얻은 다양한 경험을 朝 鮮 學 의 정립에도 적용시켜 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한편, 金 永 鍵 의 이러한 연구 과정과 노력은 의도하지 않았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베트 남에서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1931년 한국에서 온 동료와 함께 大 南 寔 錄 前 編 을 읽으 며 학문적 교유를 하던 레 즈는 朝 鮮 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 에 金 永 鍵 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양자의 交 遊 관계는 金 永 鍵 의 베트남 연구에서와 마찬 95) 金 永 鍵, 朝 鮮 開 化 秘 譚, pp. 3-4. - 21 -
가지로 레 즈의 한국 연구에서도 적용되어 나타났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1942년 잡지 Tri Tân에 발표된 레 즈의 소논문을 통해, 베트남 출신의 李 氏 가 한국에 살고 있으며 皇 子 리 롱 뜨엉이 始 祖 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96) 마찬가지로 金 永 鍵 의 동료였던 쩐 반 잡도 양국의 교류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朝 鮮 과 베트남 사신이 주고받은 상당수의 詩 文 들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쩐 반 잡이었다. 97) 1959년에 평양을 방문한 쩐 반 잡은 현지에서 수집한 리 롱 뜨엉 관련 자료를 귀국한 이후 현재 베트남 역사과학회 회장인 판 후이 레(Phan Huy Lê)에게 소개하였으며, 레 교수는 그 것이 인연이 되어 12세기 이래 高 麗 에 정착한 베트남 출신의 旌 善 李 氏 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98) 이상에서 소개한 사례들은 金 永 鍵 의 베트남 현지 연구가 일개인의 학문적 성과로 끝나 버린 것이 아니었으며, 10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양국의 지적 네트워크는 베트남 동 료들의 朝 鮮 學 연구를 촉발한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본 연구소의 발전 방향 에도 示 唆 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96) Lê Dư, "Cháu 22 đời vua Lý Anh Tông (1138-1175) hiện ở Cao Ly,"[현재 한국에 있는 리 아인 똥( 李 英 宗 )의 22대 손] Tri Tân, 1942년 봄 호; Phan Huy Lê, "Họ Lý Tinh Thiện Một Họ Lý Gốc Việt ở Hàn Quốc từ Thế Kỷ XII," 한국 베트남 관계사 국제 심포지움, 일시: 2007년 8월 20일, 장소: 하노이 대우 호텔, p. 19. 레 즈의 소논문은 Hội Khao Học Lịch Sử Việt Nam, Người Việt Nam ở Triều Tiên, pp. 23-26에도 소개되어 있다. 97) Hội Khao Học Lịch Sử Việt Nam, Người Việt Nam ở Triều Tiên, pp. 135-136, 140, 144-145, 151-193, 203-205-243 차ăh. 98) Phan Huy Lê, "Họ Lý Gốc Việt Nam ở Hàn Quốc," Hội Khao Học Lịch Sử Việt Nam, Người Việt Nam ở Triều Tiên, p. 15; Phan Huy Lê, "Họ Lý Tinh Thiện Một Họ Lý Gốc Việt ở Hàn Quốc từ Thế Kỷ XII," pp. 19-34. - 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