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출 문 과학기술부 장관 귀하 본 보고서를 70~90년대 주요과학기술정책이 과학기술발전과 산업발 전에 기여한 성과조사 분석에 관한 연구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07년 9월 일 주관연구기관명 : 한국기술경영연구원 연 구 기 간 : ~ 2007.
|
|
|
- 보배 연
- 9 years ago
- Views:
Transcription
1 정책연구 ~90년대 주요 과학기술정책이 과학기술발전과 산업발전에 기여한 성과조사 분석 (A study on the effects of '70s~'90s major science policies on S&T and industrial development) 과 학 기 술 부
2 제 출 문 과학기술부 장관 귀하 본 보고서를 70~90년대 주요과학기술정책이 과학기술발전과 산업발 전에 기여한 성과조사 분석에 관한 연구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07년 9월 일 주관연구기관명 : 한국기술경영연구원 연 구 기 간 : ~ 주 관 연구책 임 자 : 강 박 광 참 여 연 구 원 연 구 원 : 김 대 석 연 구 원 : 정 기 순 연 구 원 : 이 경 미 - i -
3 목 차 제출문 요약문 ix Summary x 제1편 서 론 제1장 사업 목적과 필요성 xii 1. 사업 목적 xii 2. 필요성 xii 제2장 연구의 내용, 범위 및 방법 xiii 1. 연구의 내용 xiii 2. 연구범위 xv 3. 연구방법 xvi 제3장 활용방안 xvii 제2편 과제별 연구내용 제1장 한국원자력연구소 재도약과 한국표준형 원자력발전소 설계기술 확보 성공 1 제1절 개요 3 제2절 1970년대 핵개발 의혹과 1980년대 초 한국원자력연구소 시련기 년대에서 80년대 초에 걸친 한국원자력연구소의 개황 4 2.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의 회고 9 제3절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재도약 년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재도약 과정 개요 어려웠던 원자력연구소 회생 과정 19 제4절 한국형표준원전 사업추진 사업의 개요 한전 주도의 범부처적 원자력사업 추진을 대통령께 건의 한국형원전표준화 사업의 구상 및 출범 경위 32 - ii -
4 4. 한국형표준원전사업의 역할분담 과정 NSSS 기술 자립의 중요성과 그 추진 결정과정 영광3ㆍ4호기 공동설계팀의 미국 파견에 의한 기술 획득 과정 48 제5절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원자력 사업부분이 타 기관으로 이관되는 제2차 통폐합 과정 사업이관 개요 관계인사의 회고 55 참고자료 참고문헌 워크숍 참가자의 약력 및 회의 사진 원전기술자립의 초석이 된 영광3 4호기 사업추진 주요일정 국내 원자력발전소의 외국 설계담당자 국내 원자력발전소 현황 최초의 한국형표준원전이 된 울진 3ㆍ4호기 건설사업 추진 일정 NSSS 전담기관 관련 서류 67 제2장 한국선박연구소 설립과 조선강국이 되기까지의 과정 분석 71 제1절 한국선박연구소 설립과 조선기술 발전 개요 KIST의 조선공업 발족 배경 및 과정 국가연구기능의 태동 한국선박연구소 설립 한국기계연구소 대덕선박분소로 통합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해사기술연구소 개편과 폐쇄 76 제2절 선박연구소 설립 선행 조건으로 출범한 조선공업 연구소 주도로 출범한 조선 공업 77 제3절 조선공업 출범의 배경과 타당성 사명감이 뚜렷한 과학자의 주장으로 조선공업 계획 수립 조선공업육성의 타당성 조선공업 육성을 위한 기술력과 자금력의 문제 수출과 방위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대형선박 건조를 선택 93 제4절 선박연구소 설립 추진 연구소 설립 초창기의 애환 초창기의 UNDP 원조자금 확보 과정 선박연구소 부지의 물색 101 제5절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역사 속에 묻힌 선박연구소 역사 속에 사라진 선박연구소 선박연구소가 이루어 낸 업적 iii -
5 3. 통폐합의 시련을 극복하고 재도약 112 참고자료 참고문헌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세계 1위의 우리나라 조선산업 현황 125 제3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설립과 국가표준제도 확립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성과 분석 127 제1절 국가측정표준제도 발전 과정 개요 129 제2절 표준연구소 설립과 초창기 기반확립 과정 표준연구소 설립과 킬로그램원기 헌법에 명시된 국가 측정표준 조항 미국과의 협력과 측정표준 기반확립 초창기 NBS와의 협력과 1차 표준기 도입 과정 신소재평가센터 설립과 운영관리 제도의 정착 158 제3절 특정연구사업 출범과 연구소 본연의 연구업무 추진 주요 연구사업 추진 한국표준연구소의 대표적 연구 성과 168 참고자료 참고문헌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회의 사진 173 제4장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과 한국 특유의 정부출연형 국가연구개발 체제 확립 과정 분석 177 제1절 특정연구기관육성법과 국가연구개발 체제 확립 개요 국가연구개발 체제 확립과 KIST모델 특정연구기관 육성법 제정 및 개정 183 제2절 대덕연구단지 조성과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 (주요 관계인사들의 회고)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 근원은 대덕연구단지 조성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의 뿌리와 분화(Spin off) 철학 특정연구기관 제세감면 조치로 막대한 혜택 부여 연구활동비에 과세하겠다는 국세청 방침을 해결한 사례 193 참고 자료 참고문헌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iv -
6 3.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 및 개정 내용 개요 196 제5장 특정연구개발사업 및 선도기술연구개발사업 출범과 국책연구사업 관리 체제 확립 과정 199 제1절 특정연구개발사업 개관 주요 관계인사들의 회고 208 제2절 선도기술연구개발사업(G7) 선도기술연구개발사업 개요 G7과제 선정과 그 연구 성과 232 참고자료 참고문헌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235 제6장 기술개발촉진법 제정과 민간기술연구소 육성발전 과정 분석 239 제1절 기술개발촉진법 개요 241 제2절 기술개발촉진법과 민간기업 기술개발 지원 년대 여건과 민간기업 기술개발촉진 정책 기업연구소 관장 부처가 과기처로 이관된 경위 기술개발준비금제도 기술개발 조세지원제도 정착을 위해 관련 부처 설득 노력 병역특례제도 국산신기술 및 신제품 인정과 보호조치제도 기술개발 성공 사례에 대한 포상 제도 코스닥의 선구자 역할 산업기술진흥협회 설립 및 민간 연구기관 지원 248 참고자료 참고문헌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기술개발촉진법 제정 및 개정 내용 250 제7장 70년대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TAC)와 90년대 한국종합기술 금융주식회사(KTB)가 기술금융에 미친 영향 분석 255 제1절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TAC)와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KTB)를 통 한 기술금융 사업 개요 우리나라 벤처캐피탈의 태동(K-TAC) v -
7 2. KTDC 설립과 벤처캐피탈회사로서의 선구자 역할 과기처 KTDC설립과 운영지원 260 제2절 주요 관계인사들의 회고 우리나라 벤처캐피탈 1호 K-TAC 설립과 성공적 운영 과정 262 제3절 KTDC 및 KTB 설립 운영과 우리나라 벤처캐피탈 KTDC 및 KTB와 벤처캐피탈 개척 KTDC 근무를 통해 얻은 경험 당시 과기처 실무자로서의 회고 290 참고자료 참고문헌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vi -
8 사진(그림) 목차 <사진 1> 원자력연구소 명칭변경에 다른 현판식(1981년)... 9 <사진 2> 원자력안전센터 현판식( ) <사진 3> 영광 3ㆍ4호기 <사진 4> 울진 3ㆍ4호기 <사진 5> 영광 3ㆍ4호기 계약 서명식(1987년) <사진 6> 1차 워크숍참가자 회의사진... 9, 62 <사진 7> 해사기술연구소 현판식( ) <사진 8> 1975~78년 대덕에 건설된 수조 <사진 9> 모형선 1000호 기념식( ) <사진 10> 2차 워크숍참가자 회의사진... 77, 124 <사진 11>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 <사진 12> 1979년 2월 22일 박정희 대통령 연구소 시찰 <사진 13> TEMPO 보고서 <사진 14> NBS-6 세슘원자시계 <사진 15> 실하중 힘 표준기 <사진 16> 전자파 무반향실 <사진 17> 전자파 야외시험장 <사진 18> 물의 삼중점 셀 실물사진 <사진 19> 대구경 광학거울 형상측정 사진 <사진 20> 2520개의 조셉슨 접합소자로 구성된 1V 조셉슨 어레이 소자의 구조도 <사진 21> 25,000개 조셉슨 접합소자로 구성된 10 V 조셉슨 어레이소자 구조 <사진 22> 3차 워크숍참가자 회의사진 , 175 <사진 23> 5차 워크숍 참가자 회의사진 , 195 <그림 1>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역할 <사진 24> 5차 워크숍 참가자 회의사진 , 238 <사진 25> 5차 워크숍 참가자 회의사진 <사진 26> 4차 워크숍 참가자 회의사진 , vii -
9 표 목차 <표 1-1> 영광 3ㆍ4호기 사업추진 주요일정 <표 1-2>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 원자력발전소의 설계담당자 <표 1-3> 국내 원자력발전소 현황 <표 1-4> 울진 3ㆍ4호기 건설사업 추진 일정 <표 2-1> 한국의 조선산업 현황 <표 2-2> 주요국의 선박 수주량 최근 추이 <표 2-3> 주요국의 선박 건조량 최근 추이 <표 4-1> 우리나라 정부연구개발비 추이 <표 5-1> 1981년 기술개발촉진법에 신설된 특정연구개발사업 근거조항 <표 5-2> G7 제품기술 개발 과제 <표 5-3> G7 원천ㆍ기반기술 개발 과제 <표 5-4> G7 제품기술개발사업 기업화 성과 요약 <표 5-5> G7 기반기술개발사업 기업화 성과 요약 viii -
10 요 약 문 본 연구는 70~90년대 주요 과학기술정책의 형성 결정 집행과정에 대해 공 식적인 기록에는 나오지 않은 중요한 사실을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 사들의 회고(증언) 중심으로 엮은 비사를 중심으로 작성된 것임. 본 연구는 과학기술부의 정책연구과제로 2006년도에 발간한 5개 과제에 이어 계속사업으로 추진하였으며, 본 보고서와 주요과제는 아래의 7개 과제임. 1. 한국원자력연구소 재도약과 한국형 원자로 건설기술 확보 성공 과정 2. 한국선박연구소 설립과 조선강국이 되기까지의 과정 분석 3. 한국표준연구소 설립과 국가표준제도 확립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과정 4.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과 정부출연형 국가연구개발 체제 확립 과정 5. 특정연구개발사업 및 선도기술연구개발사업(G7프로젝트) 출범과 국책 연구사업 관리 체제 확립 과정 분석 6. 기술개발촉진법 제정과 민간기술연구소 육성 발전 과정 분석 7.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TAC)와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KTB)가 기술금융에 미친 영향 분석 본 7개 과제들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핵심이 되고 있는 과제들로서 이러한 정책들이 수립되어 시행되기까지는 관계부처의 이해 설득과 최고 결 정권자 차원의 특단의 행정조치를 이끌어 내는 등 공무원들의 투철한 사명 감과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노력들은 후배들에게 살아 있는 경험 지식을 전달 하여 업무추진에 있어 생생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됨. 관계인사들의 증언(회고)을 구어체형식으로 엮다보니 어느 부문은 개인의 자서전이나 자기 자랑식 회고로 오해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수 있으나, 오 랫동안 들어나지 않았던 사실들이 목표달성을 위한 아이디어, 노력, 추진과 정 등을 좀 더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는데 의의가 있음. - ix -
11 Summary 1. The subject of the study A study on the effects of '70s~'90s major science policy on S&T and industrial development. 2. The purpose and the backgrounds of the study The Ministry of Science and Technology played a major role in establishing and implementing science policies to support for the industrial and S&T development uniquely designed for the emerging Korean economy during the '70s and 80's. Such experiences are related to the forging out process of unique Korean Science Policy Model and therefore became a benchmarking target of developing countries which is considered to be worth for archiving from the Science History point of view.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make records of such past policy making experiences focusing on the building up process of national R&D infra structure and R&D management system. Special attention was paid to describe the socio-economic-political backgrounds, underlying philosophy, the stories behind the curtains in overcoming difficulties, pertaining to each study subject of the science policy. Efforts are also made to analyse the impact of such policy on industrial progress. Many of the actors of science policy making in the early days of '70s and '80s are being passed away nowadays and therefore archiving their valuable experiences seems to be important. 3. Contents of the study Study was made on the following seven areas of subject : 1 Revitalization of the 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in the early '80s and its active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Design Technology of Korea Standard Nuclear Power Plant(KSNP) 2 The establishment of Korea Ship Building Research Institute and its contribution to achieve world leading level of Korean Ship Building Industry. - x -
12 3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 Standard Research Institute and its contribution to Korean Industrial Progress. 4 Enactment of the Promotion Law of Government Sponsored Special Research Institutes and establishment of the Korean National R&D System. 5 Initiation of large scale national R&D program(special National R&D Program and G7 Projects) and formation of National R&D Management System. 6 Enactment of the Technology Development Promotion Law and fostering private industries research activities. 7 Establishment of K-TAC(Korea Technology Advancement Corporation) and KTB(Korea Technology Bank) and their impact on the promotion of technology commercialization financing. 4. Method of the Study For each subject of the study mentioned above, a workshop was opened by inviting those persons who made major contribution in making or implementing the subject policy. Invited persons talked about their experiences in the past and discussions were made. All the talks were recorded by electronic digital recorder and it was converted to written form records by stenographing. Based on the written form records, a preliminary chapter report was made. The preliminary chapter report was sent to each workshop participant for review and correction. The corrected chapter report was sent to other reviewers for objective comments. The final report was made by reflecting all these corrections and comments. 5. Expected Application of the study It will serve as a historical records of science policy making and implementation containing many hidden stories, overcoming difficulties, background philosophy, etc. Therefore it will be of help to the science policy makers. This report will be distributed to many sections of the government, research institutes, and private companies. - xi -
13 제 1편 서 론 제 1장 사업 목적과 필요성 1. 사업 목적 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발전과 더불어 과학기술개발의 뒷받침이 필수 적으로 요청됨에 따라, 과학기술부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여명기의 주요 과학기술정책을 입안하고 집행관리함으로서 과학기술 발전의 기본 틀 을 확립하고 산업발전에 직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성과를 거두었음. 이러한 경험과 지식은 특히 한국적 고유 모델 창출과 연관되어 있어 어느 부문은 후발 개도국이 벤치마킹하고자 할 때, 그리고 과학사적 측 면에서 기록에 남겨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사료됨. 70~90년대 당시 관련 정책입안에 직접 참여했던 인사들이 시대 흐름 에 따라 이민 또는 타계하기 시작하여 여명기의 값진 과학사적 경험과 지식이 소멸될 위기에 처해있어 이를 발굴 정리해 둘 필요성이 제기되 고 있으며, 나아가 성과를 분석하되 초창기의 시행착오에 대해서는 그 원인 분석을 시도함으로서 앞으로의 정책 수립에 기여토록 함. 70~90년대에 과학기술부가 계획 수행한 과학기술정책 중 우리나라의 국가 연구개발 인프라 및 관리체제 확립 과정에 연관된 정책과제를 중 점 분석하고 그 결과 산업발전에 기여한 주요 사례를 조사 분석하여 향 후 과학기술정책 수립의 참고자료로 활용토록 함. 2. 필요성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 여명기에 시행된 주요 정책과제 중에서 국가연 구개발 인프라 구축 및 국책연구사업 관리체제 확립과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조사 분석하되 정책의 구상 수립 집행 과정에서 해당 정책을 - xii -
14 입안 하게 된 동기, 담당 주역 및 그들의 철학과 역할, 사회 경제적 정 치적 배경, 난관 극복 과정 등에 초점을 맞추어 자료를 작성함으로서 기존의 사실 나열식의 정책자료와 차별화를 기할 필요가 있음. 기존의 관련자료(정사)들은 그 추진 과정과 내용만 기술되었을 뿐 정책 수립 구상단계 당시 경제 사회적 여건이나 필요성 등은 빠져 있어 누 가 처음으로 발의(아이디어 제공)했으며, 왜 했고, 어떤 과정과 절차를 통해 입안되었는지 하는 것을 조사 발굴 정리하고 또 그러한 정책이 과학기술발전 및 산업발전에 기여한 사례와 연관 효과 등을 분석하며 초창기 시행착오에 대해서도 그 원인분석이 필요함. 제 2장 연구내용 범위 및 방법 1. 연구내용 70 90년대에 수립되어 시행되어 왔던 주요 정책 중 기존의 보고서 (과 학기술정책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성과조사, 과학기술부/한국기술 경영연구원)에서 다루지 않은 7개 과제에 대해, 그 정책들의 수립당시 배 경과 구상단계-수립과정-시행과정 등을 당시 참여하였던 주요 인사들의 회고(증언)를 중심으로 엮었음. 주요 7개 과제와 주요 내용은 1 한국원자력연구소 재도약과 한국형 원자로 건설기술 확보 성공 과정 분석 80년대초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일대 개혁과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안 전성의 불확실성으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원자로 독자 설계 건설 기술 확보에 도전하여 성공하는 과정을 분석함. 특히 언제 왜 누 가 무엇을 주장했으며, 과감한 정책결정을 한 동기와 배경 등을 분석하 고 성공하기까지의 추진방법, 어렵게 극복한 난관들을 정리하여 대형국 책과제 추진에 참고자료로 제공 2 한국선박연구소 설립과 조선강국이 되기까지의 과정 분석 - xiii -
15 한국선박연구소 설립과 동 연구소의 선도적 역할로 세계적 조선강국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분석. 특히 조선계획을 처음에 어떤 단계에서 누가 선도했으며, 정책입안과 실용화 간의 연계성 및 기술개발(설계 건조 시 험 등) 과정의 난관 등을 조사 분석하여 정책자료로 제공 3 한국표준연구소 설립과 국가표준기술 확립이 산업발전에 기여한 과정 분석 한국표준연구원 설립과 국가표준기술 확립 과정을 조사 분석하고 국가 표준기술 수준과 표준제도가 산업발전에 기여한 성과를 분석함. 특히 국가표준제도가 산업현장기술과 밀착되어 있어 연구결과의 실용화 단 계에서 필수적 역할을 담당함을 부각하고 관련 기술개발 저변 확립 및 표준기술 개발 과정에서 봉착한 난관 들을 분석 4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과 한국 특유의 정부출연형 국가연구개발 체 제 확립 과정 분석 우리나라 국가연구개발 체제는 다른 나라의 국립연구기관 체제, 특별법 인 체제, 위탁연구관리 체제 등과는 다른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중심이 된 정부출연형 체제로 우리 특유의 국가연구개발 체제임. 이러한 연구 개발체제의 발상 단계부터 분화 발전 단계에 이르는 과정 분석과 시행 착오, 장 단점 등을 분석. 5 특정연구개발사업 및 선도기술연구개발사업(G7프로젝트)의 출범과 국 책연구사업 관리 체제 확립 과정 분석 80년대 초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출범은 국책연구개발사업의 개념정립과 조직적, 체계적 관리 체제 확립의 최초 시도였음. 또한 90년대 G7프로 젝트는 80년대 10여년을 통해 구축한 국가연구개발 사업 관리 체제의 기반 위에서 최초로 시도된 대형 국책연구사업임. 개도국에서 국가가 특수 행정 영역인 국책연구사업 관리 체제 확립에 성공한다는 것은 매 우 어려워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듦. 그러나 우리나라는 시행착오는 있었으나 이제 선진 연구관리 체제 정립에 근접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 미에서 우리나라의 경우를 분석하고자 함. 특히 국책연구 사업 관리체 제의 최초 확립이란 관점과 산업기술 분야 대형국책연구사업의 실용화 성공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분석. - xiv -
16 6 기술개발촉진법 제정과 민간기술연구소의 육성 발전 과정 분석 우리나라 기업이 기술도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단계에서 스스로 기술 을 개발하여 기술자립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기업부설연구 소 설립과 정부 정책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임. 정부출연연구소 체제에 의한 연구 인프라 구축 및 특정연구개발사업에 의한 연구사업 관리체제가 갖추어짐에 따라 민간기업이 이를 벤치마크 하기 시작한 것임. 특히 중소기업의 기업부설연구소 설립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90년대를 통해 기업 연구활동의 풀뿌리가 형성되었으며, 이러 한 기업연구활동을 일관되게 지원하기 위한 법적근거인 기술개발촉진 법 제정 및 변천 과정과 민간기술연구소 육성 지원을 위한 정부의 지 속적 노력을 분석. 7 70년대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와 90년대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 (KTB)가 기술금융에 미친 영향 분석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TAC)는 벤처기업이나 벤처캐피탈에 관한 사 회적 인지도가 전무하고 벤처기업 생존의 기본적인 토양조차 조성되어 있지 않았던 70년대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구자적 벤처캐피탈회 사임. 이에 비해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KTB)는 국가 및 민간기업 의 기술개발 인프라 및 관리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90년대에 설립된 벤처캐피탈회사임. 이들 양자는 극명하게 대조적인 경제 사회적 기반과 환경에서 출범된 회사로서 상호 비교 분석할 가치가 있는 경우라고 사 료됨. 특히 K-TAC의 경우 초창기의 시행착오 원인분석을 시도하여 향 후 기술금융 정책 추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 사료됨. 2. 연구범위 정책 주제별로 해당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워크숍 형태 의 토론회를 통해 녹취 또는 자료작성 의뢰 등의 방법으로 자료를 수집 정리 하고, 이를 회의 참석자들의 의견을 보충하고, 다른 관계 인사들의 감수를 거쳐 보고서를 작성하되 가능한 한 정량적으로 분석하고 산업자원부, 정보통 신부 등 관련부처의 연관 정책 사례도 조사 분석 - xv -
17 3. 연구방법 관련정보수집 정책입안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사들을 워크숍형 토론회에 초청하거나 직접 면담하여 녹취의 방법으로 기초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함. 과학기술부, 연구기관, 정부 관련기관에서 발 간한 통계 연감 백서 각종사료( 史 料 ; 30년사 등)를 수집하여 분석하고, 정 부문서보관소에서 당시 공문서 자료 등을 열람 수집 분석 정리. 전문가 확보 정책에 참여했던 관련 인사를 회의 초청, 면담 또는 서면 등으로 활용함. 자료정리 감수 등은 관련 전문가를 활용. 연구방법론 주제별로 기초자료 수집 정리 후, 당해 주제 관련 정책 입 안 및 집행에 참여했던 인사를 초청하여 워크숍 형태의 토론회를 통해 보완하는 방식으로 추진하여 필요시에는 관련 인사를 직접 면담 녹취 하 였음. 내용을 좀더 충실히 하기 위하여 1차 작성된 보고서 초안을 근거 로 당시 정책입안 및 집행과정 등과 관련된 인사들의 객관적인 감수를 받아 최종보고서를 작성. [ 과제별 증언(회고) 및 감수자 ] 과 제 명 증언(회고)인 감수인 원자력(연) 재도약과 원자로 건설기술 선박연구소 설립과 조선 강국이 되기까지 표준연구소 설립과 국가표준 체제 기술금융과 KTB, K-TAC 특정연구기관육성법, 국가연구개발체제 확립 특정연구개발사업과 G7사업 기술개발촉진법 제정과 민간기술개발 체제 종 합 감 수 한필순, 김세종 장인순, 임한쾌 남장수, 박승덕 이승구, 이수웅 이익환 김훈철, 장 석 김재관, 박승덕 김재관, 이충희 정낙삼, 박승덕 윤여경, 김창달 하찬호, 노홍길 박승덕 권원기, 조경목 한기익, 홍성원 강인구, 곽종선 김석권 임용규 이상훈 백영학 박시열 김훈철 박승덕 정명세 정광화 권갑택 한기익 권원기, 조경목 최석식, 권오갑 박승덕, 장수영 이상태, 한기익 박승덕 이광영 곽종철 - xvi -
18 제 3장 활용방안 과학기술정책 수립 및 집행과정이 우리환경에 알맞은 주요 자료 제공 - 과거 60~70년대에는 새로운 정책을 입안할 때에는 언제나 일본을 비 롯한 과학기술 선진국의 사례를 우선적으로 조사 분석하여 이를 기본 자료로 활용하였음. 그러나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수립 집행 등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여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 - 우리나라도 이제는 과학기술 행정 분야의 독창적인 정책 입안 및 집행 에 있어 상당한 경험을 축적했으며, 성공 사례도 남기고 있어, 후발국 의 벤치마킹 대상국이 되어 있는 수준에 도달했음. 따라서 이러한 경 험과 지식을 구체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앞으로 유사 정책수립 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토록 함. 과학기술 발달사적 연구의 주요 자료제공 - 정부간행물에는 현실적 통계, 정부정책 내용 설명 등 사실 위주로 기술 되어 있어 보다 이면적 구체적 자료는 나타나 있지 않음. 즉 당시 정 책이 입안 된 배경과 철학, 주역을 담당한 자 또는 사업관리 참여자의 역할과 활동 내용, 난관과 극복과정, 시행착오 등은 나타나 있지 않아 실질적인 과학사적 자료로서는 미흡한 점이 많아 실제적인 자료로서 활용토록 함. - xvii -
19 제 2편 과제별 연구 내용 제1장 한국원자력연구소 재도약과 한국표준형 원자력발전소 설계기술 확보 성공 - 1 -
20
21 제1절 개 요 한국표준형 원자력발전소(이하 한국표준원전이라 함) 설계기술 확보 사업은 정부출연(연)의 연구사업 중에서 대표적인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정부출연 (연)의 기타 대표적인 연구 성공사례로는 전자통신연구원의 반도체 및 이동통 신 기술, 국방과학연구원의 미사일 기술, 항공우주연구원의 인공위성 기술, 기 계연구원의 조선기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연구사업이 성공한 전략적인 요인 을 보면 1우리 능력에 맞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 설정으로 강력한 연구 동 기부여, 2연구기관장의 강한 집념으로 연구원들의 혼신의 노력 유발, 3정부 의 과감한 정책결정과 지속적, 효율적 지원, 4연구결과물을 상용화할 대규모 의 확실한 시장 존재 등을 들 수 있다. 한국표준원전 설계기술 확보 사업은 이 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원자력연구소가 1980년대 초의 혹독한 시련기를 슬기롭게 극복 하고 한국표준형 발전용 원자로계통 설계기술 확보를 이루어낸 것은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및 80년대에 한국원자력연구소에 크게 영향을 미친 국제정세의 변화는 1973년 10월 중동전쟁으로 야기된 1차 석유파동과 1974년 5월 18일 인도핵실험, 그리고 이에 따른 국제적 핵비확산정책의 강화, 그리고 1979년 3월 미국 TMI-2 사고이다. 핵 확산금지정책의 강화로 한국원 자력연구소의 핵주기기술 개발계획은 근본적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특 히 핵연료재처리 연구사업의 시도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80년대 초에 혹독한 시련기를 맞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TMI-2 사고는 한국원자력연 구소에 원자력안전 확보를 위주로 하는 대폭적인 조직개편을 초래하였다. 한국표준원전 건설기술을 확보한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관심의 초점은 원자 력발전소에서 핵반응이 일어나는 원자로를 포함하는 핵심장치 부분인 핵증기 공급계통(NSSS/Nuclear Steam Supply System)을 우리 손으로 설계하고 제 조하는 기술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이다. 이는 핵반응이 일어나는 부분인 핵증기공급계통 부분에 관해서는 블랙박스 상태로 이전 받는 것은 가능하나, 핵반응을 컨트롤할 수 있는 기술력 보유를 전제로 하는 설계 기술의 획득은 그 민감성에 기인해 기술이전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증기공급계 통 기술의 자립화는 타 산업기술의 자립화와는 비교될 수 없는 다른 특성을 가 - 3 -
22 지며, 그 성공의 배후에는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도전과 시련의 이면사가 존 재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NSSS 설계기술을 우리나라의 원자력 산업계가 획득한 것은 1980년대의 우리 기술사에 있어 일대 쾌거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 원자력연구소는 1970년대에 이루어진 핵무기 개발 의혹의 흔적을 송두리째 말소하는 과정에서, 1980년대 초에 연구소 폐쇄 위기라는 극한적 시련기를 맞 았고, 그 후 서울의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대덕에 이전하여 핵연료개발공단과 통폐합됨과 동시에, 철저한 원자력 평화이용 지원 체제로의 특단의 구조조정 은 물론, 한때는 원자력이란 단어를 포함하지 않는 연구소의 명칭인 한국에너 지연구소라 개칭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혹독한 시련기를 슬기롭게 넘기고 재 도약하여 결국은 NSSS 설계 기술 자립화라는 위업 달성의 주역이 된 것은 하 나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유능한 한국원자력연구소 과학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으나 특히 시련기의 위기극복 을 주도한 한필순 박사(당시 소장 역임)의 역량이 두드러진다. 핵개발 의혹 흔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국방과학연구소의 미사일 개발 사업은 폐쇄되고 800여명의 과학자가 해고당해 풍비박산 되었으나, 한국원자력연구 소의 과학자는 해고당하지 않고 그들이 원자력발전기술 자립화에 투입되어 획 기적 성공을 이룩한 것은 당시 과학기술처의 정책적 판단과 한필순박사의 탁 월한 역량발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제2절 1970년대 핵개발 의혹과 1980년대 초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휩쓴 시련기 년대에서 80년대 초에 걸친 한국원자력연구소의 개황 1970년대에서 80년대 초에 걸친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상황을 2001년 발간 된 한국원자력연구소 40년사에서 발췌 요약하여 시대적 배경을 개관하면 다음 과 같다. 1969년 5월에 열린 원자력위원회에서는 원자력연구개발 중장기계획 (12개년 계획)을 최종 확정했는데, 이 계획에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 간(1972~1976)에 핵연료재처리(이하 재처리라 함)를 포함하는 핵연료주기기 - 4 -
23 술 연구와 핵연료 안전성 연구를 수행하고,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 (1977~1981)에는 재처리시설을 포함하는 핵연료주기시설의 설치가 계획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1971년에 재처리사업을 영남화학(주)이 미국의 Nuclear Fuel Services(NFS)와 합작으로 추진토록 하고 한국원자력연구소도 이에 참여하였 으나 결국 합작선인 미국의 NFS사가 자국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하여 중단되 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윤용구 당시 소장은 재처리 연구시설을 중심으로 하는 핵연료주기 연구시설의 도입을 위하여 미국,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 선진국 과의 협력교섭을 적극적으로 펴 나갔다. 1972년 초에는 연구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미국 국립알곤연구소(ANL)에 재처리분야의 기술훈련을 요청하였으 나 응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1972년 5월, 당시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이 프 랑스와 영국을 공식 방문함에 따라 이를 계기로 한 불, 한 영간의 원자력협력 에 관한 공식적인 협의가 이루어지고, 한국원자력연구소가 계획하고 있던 핵 연료가공과 재처리에 관한 연구시설의 도입교섭이 진행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원자력청(CEA), SGN사 및 CERCA사 등과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진 결과 1973년 4월에는 프랑스의 핵연료 제조회사인 CERCA사로부 터 기술용역 제의서를 접수하였고, 1973년 9월에는 윤용구 소장이 프랑스 원자력청 및 SGN사를 방문하여 재처리연구시설 도입사업의 협력방안을 협 의하고 정부 간 차관교섭이 매듭 되는 대로 건설계약을 체결한다는 협의를 하는 등 구체적인 교섭이 진행되었다. 그 후 1973년 10월에 한 불 정부 간 원자력기술협력협정이 체결되었고 연 구소는 SGN사를 재처리연구시설의 협력 선으로 하여 1973년 3월에 시험용 재처리시설의 개념설계 용역계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1975년 4월 12일에는 시설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우라늄 핵연료 성형 가공 연구시설의 도입선은 CERCA로 하여 1975년 1월 12일 공급계약을 체 결하였다. 한편 윤용구소장은 핵연료주기연구시설 사업을 전담키 위해 특수사업부서 를 설치하고, 이를 총괄하는 부서장에 주재양 박사를 임명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분소 형태의 대덕공학센터를 설치하고 1975년 11월 3일에 대덕공 - 5 -
24 학센터의 기공식을 가졌다. 그 후 대덕공학센터는 1976년 12월 1일 한국핵 연료개발공단으로 독립되었고 초대소장으로 주재양박사가 임명되었다.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은 재처리시설이 제외된 우라늄정련 변환시설, 조사후 시험시설, 방사성폐기물시설 등의 도입을 추진하였다. 1977년 11월 프랑스 와의 차관계약을 수정하여 체결하고 그 해 6월에는 SGN(후에 COGEMA와 합병)사와 이미 체결한 기술용역계약도 발효되었다. CERCA사와의 계약으로 추진되었던 10톤 규모의 핵연료(우라늄 핵연료) 성형가공시험시설은 계획대 로 추진되어 1976년에 설계를 완료하고 외자 2백 80만 불(1천 3백만FF)과 내자 약 9억원으로 핵연료 가공기기를 구매하였으며, 1978년 10월에는 연 건평 1천 200평의 시험시설을 완공하였다. 1978년 3월에는 한국핵연료개발공단 제2대 소장에 양재현 박사가 취임하 여 프랑스 차관사업의 성공적 추진에 전력하는 한편, 단기 중점목표를 핵연 료의 국산화에 두고 경수로 및 중수로 핵연료국산화사업을 추진하였다. 우리나라는 당시 이미 IAEA와의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함은 물론, 미국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맺고 있었으며, 모든 원자력시 설은 IAEA 및 미국의 전면 사찰아래 둠으로써 국제적 핵확산금지정책에 적 극 협력하고 있었다. 1975년 9월 22일에는 프랑스로부터 도입되는 시설과 관련한 한 불 IAEA 3자간 협력에 서명하고 이를 발효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와의 협력 사업으로 핵연료주기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시설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던, 1974년 5월 18일 인도에서 지하핵실험이 있었다. 이 를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원자력 수출국들은 London Club을 결성하고, 후 진국에 대하여 핵 물질 및 장비의 수출과 재처리, 농축, 중수생산 등 소위 민감기술의 국제간 이전을 제한하는 등 핵 확산금지조치를 강화하게 되었다. 당시 원자력 기술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 키스탄 등은 물론 기술공여국인 프랑스, 독일 등에 대하여도 압력을 넣어 사 업의 포기를 강요하였다. 특히 미국은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어 인도에 대 한 농축우라늄 공급의 중단, 프랑스 파키스탄 간 협력에 의한 재처리기술 이 전 반대, 독일 브라질 간 협력에 의한 농축, 재처리기술 이전 반대 등 관련 국가들에 대하여 민감기술 및 관련시설의 이전을 중단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였다
25 우리나라에 대하여도 재처리 시험시설에 대하여 1975년 9월부터 국제적 중단압력이 가하여지기 시작하였다. 원자력(연)은 이에 대응하여 이 시설이 에너지자립 차원에서 그 필요성과 경제성이 있음을 설득하고 우리나라가 세 계 어느 나라보다도 국제적 핵확산금지정책을 준수하고 있다는 점을 외교경 로와 정부 간의 협의를 통하여 설득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 리의 논리는 선진국의 강력한 주장을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1976년 1 월에 계획하였던 재처리 시험시설의 도입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국제적 환경 아래에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던 연구시 설의 도입추진이 어렵게 되었으며, 특히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하여도 민감기 술의 이전사업을 중단하도록 외교적으로 압박을 가하여 왔다. 많은 우여곡 절 끝에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추진하여 온 재처리연구시설 사업은 1976년 1 월에 사업을 보류하는 형식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재처리연구시설 사업은 우라늄정련 변환시설, 조사후시험시설,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 등으로 대체 하여 추진되었으며 사업명칭도 화학처리 대체사업 이라고 불렀다. 선거전에서 이미 핵 확산방지를 그의 공약으로 내세웠던 미국 카터 대통령 은 1977년 4월 7일 신 에너지정책 을 발표하면서 핵 확산방지에 대하여 한층 더 단호한 결의를 천명하였다. 그의 신 에너지정책의 7개항에는 미국 내에서부터 핵무기 전용 가능성이 있는 민간용 재처리와 플루토늄 재순환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것과 핵무기 전용 가능성이 없는 새로운 대체 핵연료주 기에 대한 국제회의를 갖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카터 대통령은 핵 확산을 방지할 수 있는 대체 핵연료주기와 노형 시나리오를 세계적인 공 동 작업에 의하여 모색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1977년 10월부터 1980년 2월까지 2년 4개월에 걸쳐 국제 핵연 료주기평가(International Nuclear Fuel Cycle Evaluation : INFCE)회의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IAEA본부에서 열렸다. 원자력(연)은 카터 대통령의 신 에너지정책에 대한 분석평가보고서(책임자 조만 박사)를 작성하여 단기대 책으로는 원자력발전소의 장기 핵연료공급 확보대책의 강구와 사용 후 핵연 료 저장시설의 확장 및 중수형 발전로의 조기도입을, 장기대책으로는 농축 및 지역재처리센터, 신형 안전로를 고려하여 자주적 핵연료주기의 확립을 정 부에 건의하였다
26 제5공화국 출범 후 정부는 유사기능을 갖는 연구기관의 통폐합 작업이 단 행되었다. 이 통폐합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 단이 1980년 12월 19일을 기하여 통합되어 원자력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소장에는 차종희 박사가 선 임되었다. 대덕단지에 위치한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은 연구소의 분소가 되어 대덕공학센터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원자력이란 단어의 사용도 금지된 통폐 합의 배경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정사( 正 史 )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이면사가 존재한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 1983년 5월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은 한국원자력연 구소의 대덕이전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실질적인 이전작업은 1984년 초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이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에게 연구소 본 소의 대덕단지로의 이전계획을 보고하라는 지시로 시작되었다. 1984년 4월 9일 한필순 박사가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연구소의 대덕이전은 구체화되었는데, 서울과 충남대덕으로 분산되어 있는 원자력 연구 기능과 인 력을 대덕연구단지로 집결시켜 국제수준의 원자력연구기관을 조성한다는 구 상으로 인력 및 시설의 이전계획과 기존시설의 활용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전계획은 2단계로 추진되었는데 제1단계는 대덕의 기존시설을 이용하여 기획, 행정, 원자력정책 및 지원부서(전산실, 기술정보실 등) 요원 250여명이 1984년 6월까지 이전하였고, 제2단계로 대덕에 본관동, 원자력안전센터동, 원자력연수원동이 완공되면서 1985년 12월까지 연구부서, 원자력안전센터 및 원자력연수원 등 400여명이 이전함으로서 원자력병원과 TRIGA Mark-II,III 운영 및 관련 연구요원 80명을 제외하고 이전을 완료하였다. 한필순 소장은 관련부처를 설득하여 시설과 부지확보를 위한 많은 예산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기존 부지와 접한 서편에 방사성폐기물관리 연구시험 시설을 확보하였고 기타 연구시설을 수용하기 위하여 부지 약 25만평을 1986년부터 매입하기 시작하여 1989년 12월에 거의 매입을 완료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핵연료재처리 연구사업을 추진하던 시기에 발생한 인도 핵실험 사건과 그 후폭풍으로 휘몰아쳐 온 국제 핵비확산조치 그리고 국제 적 압력에 의한 재처리 연구사업의 포기, 제5공화국의 출범과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추진과정에서 실행된 핵개발 의혹의 말소 조치 등에 휘말려 한국원 - 8 -
27 자력연구소는 혹독한 시련기를 거쳐 가야만 했다. 다음은 그 당시에 주역을 담당한 원로들로부터 희미한 기억으로만 존재하 던 이면사를 녹취방식으로 진술 받아 기록으로 되살려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2.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의 회고 (증언자들의 워크숍 , 과우회 회의실) 년대 초 시련기의 경험담 (한필순 박사 회고) 핵공단은 80년 말까지 존속했으나 81년 1월에 서울의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통폐합되어 대덕분소가 되었고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그 명칭을 에너지연구소 로 개칭했다. 나는 82년 봄에 대덕분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나는 국방과학연 구소에서 미사일개발단장으로 일하고 있다가 82년 초에 갑작스런 결정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로 전직했다. <사진 1> 원자력연구소 명칭변경에 다른 현판식(1981년) - 9 -
28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에 국방과학연구소를 반으로 줄이는, 특히 미 사일 팀을 해체하는 조치가 시행되었습니다. 그 일을 김성진 장관이 담당했 는데 하여튼 대통령의 결정 사항에 관해서 그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면서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진 사람이 김성진 장관이었습니다. 미 사일 팀 해체에 따른 과학계의 수많은 비난을 끝까지 김성진 장관이 다 감 수했다는 것을 이제 과학계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때 김성진 장관에 관 해서는 국방과학연구소를 다 박살낸 사람으로 소문났었어요. 그 당시 국방과 학연구소 소장은 서정욱 박사였습니다. 갑자기 대덕분소에 전직되어 와서 보니까 원자력 쪽의 분위기가 더 살벌하 다는 것을 직감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원자력 분야 통폐합도 김성진 장관이 막후에서 특사 역할을 담당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성진 장관은 레이건 대통 령이 전두환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접견하도록 막후교섭을 담당한 장본인 이었어요. 나는 김성진 장관으로부터 직접 대덕분소로 전직하라는 이야기는 들은바 없으나 모든 정황으로 보아 그가 나를 대덕분소로 보냈다고 생각합 니다. 과기처 장관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테니스 치러 오라고 불렀어요. 그 때 그가 나를 대덕분소로 가라고해서 전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전직해 보니 대덕분소는 모든 활동이 중단되어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상태였었어요. 그런데 장관은 나를 대덕분소에 임명한 후 대전에 자주 내려와서 값싼 여 관인 방산여관에 투숙하면서 나하고 둘이서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어떻게 살 릴 것인가에 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그 계획을 둘이서 연구하고 입안했 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장수 실장이 실무 뒷받침하는데 큰 수고를 하였어요. 장관은 그 계획서를 대통령께 보고했습니다. 그 때 작성된 보고서 내용의 요 점은 원자력 평화이용 사업 즉 원자력발전사업에 과학자들이 적극 참여해야 국가의 진정한 원자력기술자립이 이룩된다는 것이었습니다. 2.2 당시 한ᆞ미관계와 원자력 시련기 (박승덕 박사 회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 미국과 한국정부 사이에 한 때 불편한 관계가 있었 습니다. 1970년 2월 닉슨은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해 새로운 아시아 정 책인 닉슨 독트린을 선포하였어요. 일명 괌독트린 이라고도 하는 이 독트린 에서 미국은 아시아 제국과의 조약상 약속은 지켜나가지만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각국의 자조적인 역할을 강조한 내용이었지요. 말하자
29 면 더 이상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지 말고 아시아 각국은 스스로 협력하여 위험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당시 북한의 위협을 받고 있던 한국으 로서는 충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닉슨에 이어 포드 다음에 대통령이 된 카터는 미군을 한반도 에서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지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 국방을 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자주국방의 핵심은 재래식 무기를 국산화하는 한편 화학 및 생화학무기 외에 핵무기까지도 고려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한국을 위시한 동남아 각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으며 미국은 아주 골머릴 앓고 있었어요. 예외 없이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전두환 대통령의 쿠데타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전으로 고생하고 있던 미국 존슨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참전을 통보함으로서 한미간의 불편함은 일단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니까 미국은 전두환 대통령을 초청하는 대가 즉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미사일 개발과 생화학 무기개발 등을 주도하고 있던 국방과학연구소의 핵심 연구팀을 해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자기가 신임하던 육사동기생인 김성진 박사를 국방과학연 구소장으로 임명하고 이 문제를 해결토록 했습니다. 그 때 국방과학연구소의 많은 주요 연구원들과 일반직원이 해고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후에 김성 진 박사는 체신부 장관을 거처 과기처 장관이 되었으나 장관을 그만둔 후까 지도 해고당했던 인력들과의 마찰이 계속되어 정신적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은 그 후에도 한국에서 혹시 핵무기 개발을 시도 하는 것이 아닌가 하 고 적지 않은 의심을 하여 경계를 하게 되었고 당시 한국에서는 원자력연구 소라는 연구소의 명칭까지도 변경하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그 후에 과학기술처에 들어가 보니 미국과의 관계에서 원자력 협력문 제만은 항상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것은 미국이 한국의 원자력 관련 연구 활동을 자기들 감시 하에 두기 위한 수단 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30 2.3 원자력연구소 폐쇄 위기 극복 과정 (강박광 박사 회고) 80년대 초에 이정오 장관이 과기처 장관으로 임명 되었는데 바로 그 당시 에 나는 원자력개발국장이었습니다. 이정오 장관은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나를 장관실로 불러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라는 갑작스런 지시 를 내렸습니다. 나는 너무나 놀랐으나 그날은 별 말씀 못 드리고 다만 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장관실을 나왔습니다. 이정오 장관의 임 명 배경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처리가 도사리고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얼마 있다가 장관실 결재하러 들어가니까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왜 폐쇄 안 하느냐 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습니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간단하게 폐쇄하기는 어렵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 는데 첫째로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직후 아이젠하워 대통령 의 유엔 총회에서의 유명한 역사적 연설인 Atoms for Peace에 근거하여, 핵폭탄이 아닌 원자력 평화이용에 관한 세계질서가 확립되었고, 그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원자력이란 제2의 불을 켜기 위해서 한국원자 력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 그 하나 입니다. 둘째로는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다른 연구소와 달라 원자력법에 근거해 설 립되었습니다. 원자력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그 법에 명 기된 연구소 설립근거부터 먼저 말소해야 연구소 폐쇄가 가능하며, 이는 정 부차원 뿐만 아니라 국회와도 합의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로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원자력이 그 대안이며 원자력은 매장 에너지가 아니라 기술 에너지라서 우리 형편에 부합하는 에 너지입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폐쇄는 원자력에너지의 포기를 의미하는데 그 역사적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이러한 복잡한 문제가 게재되어 있기 때문 에 장관님께서 간단하게 일개 국장에 지나지 않는 저보고 한국원자력연구소 를 당장 폐쇄하라 하시더라도, 이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납니 다. 등등의 이유를 열거했습니다. 그러나 이정오 장관은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나를 보고 상당히 화를 내셨어요. 그 후 얼마 지나 세 번째 장관실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들어가니 마침 그 당시 진흥국장이었던 최영환 국장이 먼저 들어와 결재를 끝내는 단 계였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간파한 최영환 국장은 나가지 않고 함
31 께 자리를 했습니다. 그때 나는 장관께 다음과 같이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첫째로 대부분의 장관이 임명 초기에는 자기 부처 산하기관들을 의욕적으 로 지원하여 활성화시키는 것이 상례입니다. 특히 두뇌집단인 연구소에 대해 서는 지원 육성 역할을 해주는 것이 과학기술행정의 수장인 과기처 장관이 해야 할 임무인데, 임명 초기에 오히려 연구소를 폐쇄하라는 것은 장관님으 로서 확실히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행동을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리고 후일에는 과학계와 담을 쌓고 살아가실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개 국장에게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앞장서서 국 회와 먼저 접촉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 장관이 되려고 하신다면 제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먼저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를 저에게 납득이 가도록 얘기해 주시면 그 원인 과 이유를 해소하는 방안을 찾겠습니다.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구체적 지시를 받았다는 얘기는 끝내 못하고 한국 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해야 하는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거론했습니다. 첫째로는 거대 국가사업인 원자력발전소 건설 및 운영이 이처럼 본격적으 로 추진되고 있어 도대체 언제 핵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한국원자력연 구소가 이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원자력발전소 안전성에 관한 전문가는 태부족이고, 원자력발전소에서 조그만 문제가 있어도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여 미국 전문가를 초빙하는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이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둘째로는 원자력발전기술 분야 중에서도 핵반응이 일어나는 원자로와 핵연 료 분야 전문가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주류를 이루어야 하는데, 지금의 한국 원자력연구소는 방사성동위원소의 농학적 이용 등 비주력 분야의 전문가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주력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확 보에도 도움이 안 되고 원자력발전기술 자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되니까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말 못할 보다 큰 이유는 감추 시고 나를 설득하기 위해 적당히 머리를 짜내신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장관님은 장관 취임 전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기계분 야 교수이셨는데 원자력 분야는 문외한 이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에 적당히 둘러대어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32 그래서 나는 다시 항변했습니다. 그러면 원자력발전소 핵사고 방지 등 안 전성 확보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고, 원자력발전기술의 자 립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의 이유로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 쇄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는 것이 이 두 가지 문 제의 해결책이냐고 반문했습니다. 또한 이 두 가지 이유가 문제라면 장관 재 임 기간 중에 한국원자력연구소를 개혁하여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놓으 면 유능한 장관으로 평가받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말문이 막히셨는지 그 자리에서 원자력위원들은 뭐하고 앉아 있 어? 그 사람들 당장 내쫓아! 라고 명령하셨어요. 나는 국장급인 제가 어떻 게 저보다 더 고위직인 원자력위원들을 내쫓을 수 있습니까, 저는 못합니 다. 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보기도 싫으니까 과기처에 있는 원자력위원 사 무실을 폐쇄해! 라고 하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원자력위원 두 분을 얼마 간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강력하게 반박하니까 장관님은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는 지 한번 이야기 해봐!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는 원자력발전소 안전문 제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로 기술자립 문제이니까, 그 두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추진하면 해결될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장관은 대안 수립을 명했습니다. 나는 그 당시 서울 태능에 위치한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뛰어 들어 갔습니 다. 그곳에 모든 자료가 있기 때문이었어요. 차종희 박사님이 소장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그런데 장관이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말은 발설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원자력연구소의 일대 개혁을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는 말도 발설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만 방을 하나 비워주세요, 그리고 작업할 것이 있으니 좀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상훈 박사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일 먼저 시작한 작업이 원자력안전센터 설립계획 이었 습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폐쇄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 제일 먼저 황급히 수립한 계획이 원자력안전센터(현재의 원자력안전기술원) 설립계획이었어요. 원자력안전센터 설립계획을 황급히 만들어 장관께 보고 드렸더니 장관께서 그제야 연구소를 폐쇄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느끼신 것 같았습니 다. 그래서 그 후 대통령과 협의를 하셨는지 얼마 있다가 한국원자력연구소
33 를 폐쇄하는 대신에 이름을 바꿔라, 원자력이란 단어를 연구소 명칭에서 빼 라, 서울 태능의 한국원자력연구소를 대덕의 핵공단과 통폐합하여 대덕으로 이전하라, 원자력안전센터를 설립하라는 등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이는 미 국의 압력을 피해가는 한 방법으로 외형상으로는 서울의 한국원자력연구소 를 폐쇄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전략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정오 장관하고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차종희소장 간에 엄 청난 기 겨루기가 약 4개월간 벌어졌던 일이 있었어요. 서울 한국원자력연구 소의 대덕이전 및 핵공단과의 통폐합, 부설 원자력안전센터의 설립, 원자력 발전기술 위주의 대폭적 조직개편 등 혁명적 일대 개혁을 차종희소장에게 요구하니까 차종희소장은 이에 대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버티는 반 응을 보였어요. 차종희소장은 전두환정권 인정 차원에서 그러한 조치가 취해 진다는 배경을 모르고 있었거나 설사 알고 있었더라도 그 배경에 관한 모든 것이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원들에게 발설할 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과기처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지원되는 모든 예산배정을 중단해버리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약 4개월을 버 티다가 차종희소장은 결국 과기처의 조치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 안의 연구원 임금은 차입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후 원자력 연구 기본전략의 선회는 숨 가쁘게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핵 공단은 한국원자력연구소 대덕분소로 통폐합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정오 장관님은 나에게 한필순 박사를 만나보라고 했어요. 한필순 박사는 그 때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전보되어 대덕분소의 분소장으로 막 부임했을 때였 어요. 한필순 박사는 이러한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암울한 시련기를 극복하고 제2의 도약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원자력연구소가 폐쇄되지 않고 방향이 선회되니까 내가 추 측하기에는 미국 측에서는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왔던 것 같습 니다. 그래서 어느 날 느닷없이 미국 대사관의 과학관인 스텔라 씨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 극비리에 미국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미국 군인 대령 두 사람이 내방으로 찾아왔어요.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극동군 핵사령부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극동군 핵사령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 니 비밀이라서 그건 얘기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한국
34 원자력연구소를 왜 폐쇄 안 하느냐고 되물었어요. 나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왜 폐쇄해야 되느냐고 거꾸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 가 장개석 정부에서 대만이 조치한 케이스를 알고 있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잘 모른다고 하고 대만이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장개석 정부 때에 연구용 원자로로 핵을 개발하려고 시도했는데, 미국이 압력을 넣으니까 장개석이 견디지를 못해서 전 세계의 기자들을 불러 모아 놓은 앞에서 연구 용 원자로를 폭파시켜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나한테 1,000여 쪽에 달하는 두툼한 자료를 주고 떠 났어요. 그 것은 세계의 핵정책과 그 역사에 관한 자료로서 MIT, 하버드 등 의 교수들이 작성한 논문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쿠바 핵미사일 사태로부터 시작해서 세계의 핵정책에 관한 상세한 자료였습니다. 또한 한국이 핵개발을 추진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그 경우 한국은 어떤 사태에 직면할 것인가를 시 나리오 별로 상세히 정리한 자료였습니다. 요점은 우리가 그때 한국원자력연 구소를 폐쇄 안 하면 지금 이북이 당하는 사태와 유사하게 단계 별로 세계 적 압력을 받아 가는 시나리오를 적어 둔 것이었습니다. 베일에 싸여 나는 그 배후를 잘 알 수 없었던 한국원자력연구소 폐쇄 방침 을 피해가는 전략으로 이정오 장관은 서울의 한국원자력연구소를 대덕의 핵 공단에 통폐합하고 연구소의 명칭도 에너지연구소로 개칭하여 형식상으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폐쇄된 것으로 보이는 전략을 택했던 것으로 생각됩니 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내적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원자력발전소에 실질적 으로 기여할 수 있는 조직으로 개혁한다는 논리를 동원했겠지요. 이를 위해서는 핵연료와 원자로 공학 분야의 핵심연구원들을 중심으로 대 덕에서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는 것과, 서울의 핵심연구원들이 대덕으로 이전 하는데 대한 반발을 최소화 하고 그들에게 동기부여를 위한 인센티브 제공 이 필요했던 것이죠.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나는 대덕분소로 내려가서 서울의 임창생 박사와 김병구 박사 두 사람에게 긴밀히 상의할 것이 있으니 내려와 달라고 연락했습니다. 나는 그 두 박사와 대덕에서 만나 며칠간 머물면서 이유는 묻지 말고 무조 건 대덕으로 내려와 달라, 대덕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그러 나 내려오면 하고 싶은 모든 걸 다 지원해 줄 수 있다고 간절히 설득했어요
35 그 결과 김병구 박사가 먼저 결심을 해서 대덕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자기가 원하던 연구시설을 새로 설치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후 김병구 박사는 원자로 기술 분야, 임창생 박사는 핵연료기술 분야 발전에 있어 획기 적 기여를 하여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재도약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제3절 한국원자력연구소 재도약 년대 한국원자력연구소 재도약 과정 개요 제5공화국 출범 당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핵개발 의혹 말소를 위해 취해진 조치들이 추진되면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때 아사 상태에 빠 졌으나 극적으로 회생하는 과정을 거쳐 갔다. 그러한 조치들은 서울의 원자 력연구소를 폐쇄하고 대덕으로 이전하여 핵연료개발공단과 통폐합함과 동시 에 연구소의 명칭에서 원자력이란 표현을 말소하여 한국에너지연구소로 하 고, 원자력안전센터를 출범시키는 조치들이었다. 그 후 다음절에서 상술하는 바와 같이 한국형표준원전 설계기술 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한국에너지연 구소는 완전히 재도약하는 면모를 보이게 된다. 통폐합이 추진되었던 1980년도의 두 기관의 출연예산은 한국원자력연구소 가 69억 원,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이 54억 원 수준이었으나 대부분이 시설비 였기 때문에 연구비의 절대부족 문제를 안고 있었고 특히 핵연료 개발공단 은 충격 때문에 폐허가 된 상태였다. 그러나 1984년 4월 한필순 소장이 취임하면서 서울과 대덕으로 분산되어 있는 원자력 연구기능과 인력을 대덕연구단지로 집결시켜 원자력의 평화 이 용에 있어 국제수준의 연구기관으로 거듭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인력 및 시 설의 이전계획과 기존시설의 활용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한필순 소장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추진됨에 따라 연구 분위기의 회생, 필수 선행 시설의 조기 확보, 기존시설의 최대 활용, 연구원의 생활기반 조성 등이 순 조롭게 이루어졌으며 1985년 12월까지는 연구부서, 원자력안전센터 및 원자 력연수원 등 대부분의 부서가 대덕으로 이전하였다
36 한필순 소장은 특히 전력생산용 원자력기술 자립의 중요성과 그것을 위한 연구시설의 추가 확보의 필요성을 관련부처에 역설하여 시설과 부지확보를 위한 많은 예산을 확보하여 80년대 말 까지는 연구소의 연간 예산이 2천억 원 규모로 대폭 증액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지 인근에 방 사성폐기물관리 연구시험시설을 확보하였고, 기타 연구시설을 수용하기 위하 여 부지 약 25만평의 추가 확보를 1989년까지 완료하였다. 이와 같이 원자력발전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원자력 평화이용기술 개발의 중심적 연구소로서의 이미지가 국제적으로 굳혀짐에 따라 1989년 12월 28 일 한국에너지연구소법을 한국원자력연구소법으로 개정하고 연구소 명칭도 한국원자력연구소로 복원하여 연구소의 임무가 원자력연구임을 명시하게 되 었다. 한편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원자력안전센터의 설립 도 순조롭게 추진되어 과학기술처의 강 박광 원자력안전국장의 주관 하에 연구 소의 이상훈 실장 등이 참여하여 원자 력발전소 안전성 확보를 위한 종합대책 이 수립되었다. 이 종합대책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 확보 방안의 하나로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지면서 응분의 책 임을 가지고 운영되는 원자력안전규제 <사진 2> 원자력안전센터 현판식 ( ) 전담기구를 연구소에 설치할 것이 제안 되었다. 그러한 제안에 근거하여 이정오 장관과 차종희 소장은 원자력시설의 안전심사, 안전검사 및 관련기술기준 개발 등 세 가지 업무를 수행하는 원자력안전 전담기구인 원자력안전센터 설립에 합의하였다. 이때 이정오 장관은 종합대책에서 제시된 바에 따라 연구소 내 의 경륜이 있는 연구원들이 원자력안전센터에 참여하여 이 기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차종희 소장은 전문위원으로 이상훈, 박인 용, 노재식, 고병준, 문석형, 김석진 등 6명을 임명하였으며 원자력안전센터
37 는 1981년 12월 12일에 설립되었다. 그에 이어 1982년 원자력법의 개정으 로 원자력안전센터는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으며 후일에 독립 기관으로 발 전하여 원자력안전연구원이 되었다. 2. 어려웠던 원자력연구소 회생 과정 2.1 열화우라늄탄환 개발이 기사회생의 첫걸음 (한필순 박사 회고) 과기처 장관님의 간절한 요청으로 나는 대덕분소로 부임했습니다. 부임하 고 보니까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쓸 만한 시설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게다가 불란서 차관사업으로 추진된 정련변환시설이 준공되었는데 만일에 가동을 안 하고 가만히 두면 그대로 녹슬어 전부 고철이 될 수밖에 없는데 가동할 자금이 없다는 거예요. 준공을 위해서 불란서 사람들이 와서 시운전 을 했는데 시설 가동에는 질산을 사용했어요. 질산은 스테인리스 강철도 다 녹이기 때문에 계속 가동을 하지 않으면 시설은 고철이 될 수밖에 없는 형 편이었어요. 그런데 과기처에서는 후속 가동을 위한 예산을 한 푼도 줄 수 없는 사정이었어요. 그래서 대책을 물어보니까 녹슬지 않게 최소한 가동하는 방법이 있으며, 일년에 최소한 1,000만원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과기처에서는 대덕분소에 1,000만원도 줄 수 없는 사정이라고 했어요. 그 이유는 전임 핵 공단 소장이었던 이한주 박사가 우라늄 농축한다고 별것도 아닌 것을 시도 했으며 그것도 중단된 형편인데 대외적 의심 문제 때문에 대덕분소의 지원 금은 완전 동결된 것이라고 했어요. 그게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정치적인 이 유였어요. 그 뿐 아니라 PI시설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규모가 너무 작 아서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근무하던 국방과학연구소를 찾아 갔어요. 그때 소 장이 서정욱 박사이고 부소장이 홍판기 박사였어요.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다 같이 이 국방과학연구소를 만들었지 않았소, 내가 지금 시집갔는데 시집 보내게 되면 지참금이라도 좀 주어야 하지 않소 라고 때를 섰습니다. 그때 는 국방과학연구소도 마찬가지로 고통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는 홍판기 박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한국원자력연구소에 가보니 돈이
38 한 푼도 없어요, 어떻게 좀 긁어 봐요! 그래서 그는 얼마면 되겠느냐 고 물 었어요. 나는 2,000만원이나 3,000만원 정도 내놔요 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져가려면 몽땅 다 긁어 가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5,000만원을 마련하게 되었어요. 그는 어디에 쓸 것이냐고 물었어요. 나는 그때 전차탄, 열화우라늄탄환 있 잖아요, 내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있을 때 개발하려던 운동자탄, 무슨 탱크든 다 뚫어요. 내가 그걸 개발해 줄께! 이렇게 해서 계약이 성사 되었어요. 열화우라늄탄환 개발은 우라늄을 가지고 전차를 뚫는 포탄을 개발하는 것 이 예요. 이리하여 우라늄탄 개발을 시작했는데 놀랄 정도로 좋은 결과를 얻 었어요. 내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있을 때에 미국 가서 보았는데 그들도 열화 우라늄탄환 개발에 실패했어요. 우라늄이 엿가락처럼 부스러졌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우라늄의 바깥에다가 텅스텐 피복을 입혀 보았더니 놀랍게도 탱크 를 뚫었어요. 미국보다 더 빨리 우리가 만들었어요. 하여튼 그 사업이 대덕분소 를 살려줬어요. 그리고 정련변환시설이 녹스는 것도 그 돈으로 방지했어요. 그 후 전두환 대통령은 김성진 박사를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했는 데, 어느 날 대통령은 내가 김성진 박사를 한 번 방문하러 가야지, 가서 위 로해 주어야지 하고 대전에 내려 오셨어요. 내려오신 차에 원자력이 궁금하 다고 하시니까 김성진 소장은 원자력연구소를 한번 가보십시오 라고 권하 여 대통령은 대덕분소에 오셨어요. 나는 대통령께 열화우라늄탄환과 중수로 핵연료를 보여드리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 드렸습니다. 이것은 어떤 전 차도 다 뚫을 수 있습니다! 중수로핵연료 국산화도 다 완성되었습니다! 그 랬더니 대통령은 너무나도 기뻐하셨어요. 대통령이 가장 관심을 보시이고 감 동하신 것은 열화우라늄탄환이었어요. 그 이후 전두환 대통령은 나를 완전히 신임하게 되었습니다. 2.2 핵연료개발을 위한 한전의 30억원 지원이 연구소 재도약 기틀 마련 (한필순 박사 회고) 그 때의 에피소드 또 한 가지를 소개하면 한전의 양창국 과장이 한국원자 력연구소의 연구비 지원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는데도 박정기 사장으로부 터 처벌을 받는 해프닝이 있었어요. 박정기 사장은 그 당시 핵연료 담당이었
39 던 양창국 과장에게 핵연료 국산화를 위해 한국원자력연구소에 30억원을 지 원해 주라고 지시했어요. 그리고 3일간의 기한 내에 모든 규정에 적합하게 처리하여 한국원자력연구 소로 돈이 나가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박정기 사장은 일본에 출장 갔어요. 그 때 한국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은 나에게 한전의 양창국 과장이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돈을 주기 위해서 3 일 동안 잠을 한잠도 못 자고 지금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박정 기 사장이 돌아와서 양창국 과장을 처벌하는 해프닝이 일어났어요. 양 과장 은 최선을 다했는데도 박정기 사장이 지정한 3일 기한을 맞추지 못하고 하 루가 늦어졌다고 처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한전의 예산집행 절차는 매우 까다롭게 되어 있어 선례가 없는 예산항목을 집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어요. 관련된 모든 규정에 적합하여 감사원 감사에도 문제가 없도록 처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어서 3일 내에 처리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양 과장은 한국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을 불 러 도움을 받으면서 밤을 새워 같이 일했어요. 연구소 직원들은 양창국 과장 이 이번에 엄청나게 고생했으며 같이 일해 보니 무척이나 유능한 사람이라 고 했어요. 한전에서 단 1억 원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 해도 무지무지하게 몇 달간 고생해야 되는데 30억 원의 거액을 단 4일 만에 처리한 것입니다. 82년 당시 30억 원이란 대단한 액수의 연구비였어요. 후일에 양창국 과장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82년 당시에 한전이 그러한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한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한전이 연구소에 대해 연구비 지원을 시작하는 맨 처음 물꼬 를 튼 것입니다. 2.3 한전 연구비 지원으로 연구소 회생의 계기 마련되는 과정 (남장수씨 회고) 한국원자력연구소가 통폐합되면서 대덕공학센터는 완전히 아사 직전이었는 데 한필순 소장님이 오셔서 살려주셨어요. 정부의 R&D 지원은 겨우 명맥 유지에도 태부족한 정도이어서 연구소가 말만 연구소이고 실제적으로는 죽 은 거나 다름없었어요. 한필순 소장님은 그러한 폐허에서 시작해서 중수로
40 핵연료 국산화 사업의 양산 성공까지 몰고 가셨어요. 한 소장님은 다른 사업 은 다 죽어도 이것만은 살려야 된다는 강한 집념을 보였습니다. 그때에 막 과기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이 시작 되었어요. 그런데 특정연구사업의 예산 지원 규모로는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전 박정기 사장님한테 한 소장님이 찾아가서 지원을 간청했 습니다. 한 소장님은 그때 수없이 찾아가서 한전 사장님이 원자력을 이해하 도록 끈질기게 노력하여 결국은 설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설득 이라기 보다는 세뇌를 시켜 박정기 사장님을 완전히 원자력맨으로 변화하게 하는 집념의 과정이었어요. 그 결과 한전은 중수로 핵연료 개발 사업에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전에서는 과거의 전례가 없는 사례였습니다. 한전 사장이 지원하라고 지시 해도 한전에는 타 기관에 대한 연구비 지원 사례도 없고 제도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경우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억지로 찾아낸 것 이 한전 정관에 연구소에 출연할 수 있다는 막연한 조항 하나를 찾아내어 그에 근거하여 지원하게 된 것입니다. 제4절 한국형표준원전 사업 추진 1. 사업의 개요 한국형표준원전 설계기술 자립화 사업은 1985년부터 1996에 걸친 12년간 의 대역사였다. 이 사업을 추진함으로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선진국 수준의 연구소로 도약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할 수 있는 능력 을 갖춘 원자력 선진국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 초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운전 중이거나 건설 중이던 원자력발전 소의 설계는 모두가 선진외국 회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당시까지 우리의 기술수준은 외국 회사가 작성해주는 설계도에 따라 부품을 제작하고 외국 설계도와 외국 전문가의 건설감리 하에 대형 구조물을 시공하는 정도였으며, 그러한 부품과 구조물을 설계하는 능력은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원
41 전 설계능력의 부재는 주계약자를 외국에 넘겨주는 종속관계를 유발하는 원 인이 되었고, 이는 두뇌 역할은 선진 외국회사가 담당하고 손발역할은 우리 가 담당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또한 이러한 종속적 기술관계 하에서는 비효 율성과 비능률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주계약자의 국적에 따라가 는 다국적 인허가 기준의 적용, 기자재 제작비 상승 및 품질 저하, 보수용 기자재의 호환성 결여, 기술자립 및 기자재 국산화 지연 등 여러 가지 문제 점을 안고 있었다. 원자력발전소 설계기술에 있어서 핵반응이 일어나는 발전용 원자로계통 부 분의 설계기술은 핵심부분으로 선진국이 기술이전을 기피하는 부분이었으며, 이의 획득은 핵반응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획득한다는 의미 에서 민감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핵심 부분의 설계기술이 어떠한 전 략과 과정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립을 달성하였던가는 기술정책 차원에서 관 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발전용 원자로 설계기술 획득의 성공에 있어서는 여 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공격적 이고 눈물겨운 노력, 원자력 기피현상 만연에 의한 해외 원자력 발전소 공급 업체의 경영위기 봉착에 따른 기술획득의 절호의 기회 도래, 정부의 과감한 정책결정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80년에는 과학기술처의 원자력발전 기술개발 방침 이 확정되었고 그에 따라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원자력발전소 설계기술 자립 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동력자원부에서도 1983년 7월 원전건설 사 업 장기추진방향 을 확정하고 이어서 1984년 7월에는 기술자립 촉진을 목 적으로 하는 원자력발전 기술자립 계획 을 마련했다. 이즈음 한국전력기술(주)(KOPEC)는 원자력발전소 설계표준화사업의 필요 성을 역설하여 과학기술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으로 1983년 4월부터 1985년 7월까지 원전표준화 기본계획 수립연구를 수행했다. 또한 동시에 KOPEC은 한국전력과 원전설계 표준화사업의 기초조사를 위한 계약을 체결하고, 1984 년 9월부터 1985년 3월까지 국내 실정에 가장 알맞은 참조발전소의 개념을 정립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원자력사업 관할이 과학기술처와 동력자원부에 이원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업 결정이 원활이 이루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
42 대표적 사례는 과학기술처 산하의 한국원자력연구소와 동력자원부 산하 KOPEC간의 역할분담에 관한 논란이 야기된 것이다. 논란의 초점은 원자력 발전기술의 핵심인 핵증기공급계통(원자로와 증기공급계통/NSSS) 설계에 있 어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원자로를 맡고 KOPEC은 증기공급계통을 담당하도 록 동력자원부가 결정한데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원자로와 증기공급계통을 한국원자력연구소와 KOPEC이 분리하여 맡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하여 전력 그룹회의 회원사간에 논란이 계속되었다. 이 문제는 1985년 6월 전력그룹협력회의에서 NSSS 전체와 핵연료의 설 계 부문을 전문기술 인력과 시설과 관련 경험이 축적되어 있는 한국원자력 연구소가 전부 맡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려 동자부에 보고했으며 동 력자원부는 각 사별 역할분담 내용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한편 과기처에 서는 1985년 7월에 열린 원자력위원회에서 한국원자력연구소가 NSSS 전체 의 설계 및 핵연료설계를 전담하도록 의결 하였다. 첫째, 종합적인 사업관리는 사업주체인 한국전력이 담당한다. 둘째, 설계부문의 경우 NSSS 설계는 원자력(연)이 ABB-CE사의 기술을 도입하여 수행하고, 그 외 부분(BOP)의 플랜트 종합설계는 KOPEC이 S&L 사의 기술을 도입하여 수행한다. 셋째, 원자로 등 주기기 및 터빈 부문은 한국중공업이 ABB-CE사와 GE사 의 기술을 도입하여 원자로설비 및 터빈발전기 제작을 담당하고, 한국핵연료 (주)는 ABB-CE사 및 독일 지멘스(Siemens)사의 기술을 도입하여 핵연료 설계 및 제조를 담당한다. 넷째, 시공부문의 경우 국내 업체에게 맡겨 시공기술 능력을 확보하도록 한다. 한국형표준원전 설계기술 확립에 있어서는 영광 3ㆍ4호기 건설과 (1985.2~1996.3) 울진 3ㆍ4호기 건설 기간이(1990.7~1999.6) 겹치도록 추 진하되 영광 3ㆍ4호기 건설이 한발 앞서 추진되면서 설계기술을 습득함으로 서 자립화를 달성함과 동시에 그렇게 습득한 설계기술을 바탕으로 우리 스 스로의 원자력발전소 설계표준화사업을 병행하여 추진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형표준원전(Korea Standard Nuclear Power Plant: KSNP) 설 계를 울진 3ㆍ4호기 건설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표준설계를 개발과 동시에 실제 적용하는 경험을 축적했다. 따라서 영광 3ㆍ4호기 건설과정은
43 원전 설계기술 자립 과정이라 할 수 있고, 울진 3ㆍ4호기 건설은 자립된 설 계기술을 최초로 적용하여 상업적 적용 능력을 입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진 3> 영광 3ㆍ4호기 <사진 4> 울진 3ㆍ4호기 울진 3 4호기의 자력 건설은 10년간의 대역사로 원자력 기술자립과 국가 에너지자립이라는 두 가지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하 겠다. 원전의 핵심기술인 NSSS 설계는 그동안 선진국이 독점해 왔으나, 울 진원자력 3 4호기 건설부터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독자 수행함으로써 명실상 부한 기술자립을 달성하였다. 특히 기업형태의 사업자가 아닌 연구소가 선진 기술을 소화 흡수하여 독자적으로 NSSS의 상업적 설계에 성공했다는 것은 후속되는 선진국 수준의 독자적이고 다양한 원자력 기술개발에 확고한 토대 를 마련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울진 3 4호기의 원자로계통설계 시에는 영광 원자력 3 4호기 설계 및 운전경험과 국내외 원전 신기술을 추가로 접목하였 으며, 원전의 안전성 향상을 위해 안전감압계통을 도입하는 등 안전성과 운 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울진원자력 3 4호기는 1998년 6월 및 1999년 6월에 상업운전을 개시하였으며, 이 사업 수행 이후 후속 KSNP인 영광 5ㆍ 6호기와 울진 5ㆍ6기의 설계, 제작, 시공 및 운전 등 모두를 우리 기술진의 손으로 이룩했다. 이 계획은 당시에 최신 원전인 CE사의 시스템 80 을 모체로 건설된 영 광 3ㆍ4호기를 참조 발전소로 하였으며, 영광 3ㆍ4호기 건설과정에서 전수 된 선진국의 기술을 최대한으로 흡수 소화하여 한국형표준원전의 설계를 완 성하도록 추진되었다. 한국형표준원전 설계사업 계획에서 확정된
44 1,000MWe(1백만KW)급 경수로는 이미 운전 중에 있는 CE사의 1,300MWe 급 경수로를 축소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모 델의 설계에 필요한 기술을 비교적 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CE사가 개발한 1,300MWe급 경수로 기술은 이미 널리 활용 중에 있었다. 더구나 CE사는 당시 극심한 세계 원전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한 국에 핵심기술을 이전하는 것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CE사는 1989년에 스웨덴의 ABB사와 합병하여 한때 닥쳐온 경영위기를 넘기고 상호를 ABB-CE사로 바꾸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시장 환경을 현명하게 이용하여 원전기술의 자립을 꾀하였던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원전건설 시장에서 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캐나다의 AECL, 프랑스의 프라마톰 및 미국의 CE 사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CE사는 웨스팅하우스사와 치열한 경쟁 을 하고 있었다. ABB-CE사는 1978년 고리 2호기의 건설에서 원자로 용기를 제작하여 납 품한 이래 고리 3ㆍ4호기 및 영광 1ㆍ2호기의 원자로 용기를 납품하였고, 영광 3ㆍ4호기의 건설부터는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함께 NSSS 설계를 담당하 였다. ABB-CE사는 영광 3ㆍ4호기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원자로설계 관련기 술을 한국에 이전함으로써, 한국형표준원전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데 큰 기여 를 하였다. 한국형표준원전의 설계사업 계획이 수립되자 원전의 표준화사업은 본격적 으로 추진되었다. 원자로 계통설계를 담당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관련 연구 원 50명을 기술제휴 선인 ABB-CE(미국 코네티컷 주 윈저 시 소재)에 파견 하여 본격적인 기술습득에 나섰다. ABB-CE사에 파견된 이들 연구원들은 모든 기술 활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습득하여, 이를 체계화하 는 데 온갖 정력을 쏟아 부었다. 이들이 수행하는 기술 활동은 기술 선진국 인 미국의 ABB-CE사의 기술자들과 직접 공동설계를 수행하면서 기술을 습 득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생산한 설계문건 및 도면 등은 실제로 영광 3ㆍ4 호기 건설에 활용되었다. 공동설계 및 기술습득의 과정에서 때로는 ABB-CE사의 기술자들과 마찰 이 발생되기도 했지만, 끈질긴 우리 연구원들의 집념으로 한국형표준원전의 설계기술 자립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연구원들은 그동안 쌓아온 기
45 술지식을 활용하고 부족한 기술능력은 ABB-CE사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인 모델의 원자로를 설계해 낸 것이다.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수행한 원자로 계통설계는 마침내 결실을 맺어 영광 3 ㆍ4 호기 건설에 활용되었다. 영광 3호기는 1995년 3월, 영광 4호기도 1996년 1월에 성공적으로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한국원자력연구소의 NSSS 설계 결과의 설계도에 근거하여 한국중공업도 ABB-CE사의 기술지원 하에 원자로 용기, 증기발생기, 터빈 발전기 등 핵심 부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하 였다. 한국중공업이 제작한 이들 원자로 부품들은 영광 3ㆍ4호기에 설치되 었다. KOPEC은 발전소 종합설계의 주계약자로서 미국의 S&L사와 협력하여, 원 자로계통 및 터빈발전기 계통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원전의 보조설비를 설계하는 업무를 직접 수행하였다. 우리 업체들과 연구기관은 한국형표준원 전의 참조 발전소인 영광 3ㆍ4호기를 외국 업체의 기술지원을 받아, 국내 주도로 건설하는 데 마침내 성공하였다. 영광 3ㆍ4호기는 기본설계, 상세설 계, 제작 등 전 공정에서 93%의 기술자립도를 나타냈고, 상업운전이 성공적 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원자력발전 기술의 자립화에 성공했다. 특히, 울진 3ㆍ 4호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형표준원전으로 그 건설을 우리나라가 주도하 여 전체 발전소를 설계하고 제작, 설치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형표준원전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울진 3ㆍ4호기는 1998년과 1999년 각각 완공되었 다. 한국형표준원전 설계기술 자립은 그 후 보다 발전한 기종인 개선형 한국형 표준원전(KSNP+) 설계 개발로 이어졌으며 2008년 및 2009년에 각각 상업 운전을 목표로 건설 중인 신고리원전 1 2호기에 적용되고 있는데, 이름하여 OPR 1000으로 명명하여, 설계의 첫 번째 결실로서 안전성과 경제성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원자력발전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원전 설계기술 개발은 그에 이어 또 한 단계 발전을 시도하여 원자력분야 의 G-7과제로 신형경수로 1400(APR 1400) 설계개발 사업을 2001년 12월 완료하고 이를 신고리원자력 3 4호기 건설부터 적용하고 있는데, 2004년 12월 착공하여 2011년 9월과 2012년 9월 준공을 목표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APR 1400에서는 발전용량을 1,000MW급에서 1,400MW급으로 확대
46 함으로써 보다 경제적인 발전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원자로 등 주요 설비의 성능을 강화하여 원전 수명을 현행 40년에서 60년으로 연장할 수 있도록 설 계함으로써 원전의 경제성을 높였다. 이러한 우리의 원전기술 자립은 외국의 관심을 끌게 되어 중국, 베트남, 인 도네시아 등 원자력발전소 도입을 계획하고 있는 국가들로부터의 기술용역 수주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북한의 KEDO 원전 설계 및 건설 사업을 우리가 주도하게 되는 등 한국표준형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의 해외 진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 한전 주도의 범부처적 원자력사업 추진을 대통령께 건의 (한필순 박사 회고) 한국원자력연구소는 1970년대 기초단계 연구이기는 하지만 국제적으로 민 감한 연구를 시도한 바 있었고 그 결과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연구하지 못하 는 그러한 입장까지 갔다가 다시 평화이용 사업으로 한국형표준원전사업에 참여 하면서 꽃을 피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사실 한국원자력연 구소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 국원자력연구소 과학자들이 무엇을 담당해야 되고 한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관한 역할 분담 결정 과정에서 내가 중간에 끼어 좌충우돌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과거에 저는 그와 관련하여 노태우 대통령께 불려가서 솔직히 말씀드린바 있어요. 그때 대통령은 한국의 원자력기술자립을 어떻게 해야 좋으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가? 라고 나한테 물었습니다. 나는 우선 부처를 초월해 서 사업을 추진해야 합니다. 또한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하여 과학자에게 원자력 평화이용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십시오. 라고 답 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러면 그것을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느냐? 고 물었어요.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한국원자력연구소 예산으로 연간 1,000억원까 지 확보하는 데는 제 역량으로 끌어왔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가장 도움을 많이 준 데가 한전입니다. 그런데 국가 원자력기술자 립이 본궤도에 올라가려면 원자력 예산이 1조원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
47 다. 그 정도의 예산을 확보하려면 한국원자력연구소로서는 역부족입니다. 과 기처 역량으로도 부족합니다. 한전이 사업을 주도하여 중심세력으로 끌고 나 가고 나머지 부처는 다 돕는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는 원자력연구에 관한한 무조건 거의 전권이 나한테 주어 졌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 때는 미국의 압력도 있고 비핵화 선언 문제도 있어 나를 불러 의논하신 것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한전에 엄청난 원자력평 화이용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거기에 주도권을 주고 과학자들과 모든 부 처가 다 협력하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러 면 한전 사장이 모든 것을 주도하면 어떠냐? 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한전 사장 혼자로는 못합니다. 그 정도의 초대규모 사업은 대통령께서 직접 관심 을 가지셔야 합니다. 원자력기술자립에는 최소한도 5,000억원이 투입되어야 됩니다. 한전이 몇 십조의 원자력발전 사업을 추진하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뒷받침해 주시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관련 부처의 의견이 지금처럼 갈라져 가지고는 추진이 불가능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아 오늘 좋은 얘기 들었다 고 말했습니다. 그때 대통령은 비핵화선언 때문에 고심 하 고 있어 나를 만난 것 같으며 나를 만난 후 얼마 있다가 비핵화가 선언되었 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원자력기술자립의 역사에 있어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기관은 나는 한전이라고 봅니다. 나는 지금도 국가적인 초대규모 사업은 부 처를 초월해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내 철학에는 변함이 없어요. 나는 그때 부 처를 초월한 개념으로 원자력기술자립을 위해 3,600억원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80년대에 3,600억원이면 굉장한 규모의 예산이었어요. 그런데 그 때의 나의 꿈은 최소한도 5,000억원 정도의 예산을 투입하고 인원은 한 5,000명 정도를 확보해서 국가적 차원에서 이 사업을 한번 대폭 키우는 것이 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노태우 대통령께 한전 주도로 사업을 추진하되 과학자들 한테 그 일을 맡겨달라고 건의할 때에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느꼈어요. 또한 동자부의 최동규 장관과 이봉서 장관도 그와 유사한 원자력 평화이용에 관한 꿈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과기부는 과학기술을 범부처적으로 전 부처를 총괄하는 부처가 되었지만 그
48 런 개념이 그때 원자력 사업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대통령께 건의한 것이었 어요.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그 당시 1단계 미션은 끝낸 상태였기 때문에 일단 졸업을 한 단계였고 졸업하면 새로운 옷으로 새 입학식을 해야 되는데 새로 하는 사업은 대규모로, 그러니까 대통령이 매니저가 되고 사업 추진은 한전 사장에게 시키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접견 후에 예기치 않은 일이 있었어요. 그 당시 한전사장이 었던 안병화 사장이 사전에 아무 연락 없이 나한테 와서 청와대에 가서 왜 자기 욕을 했느냐고 다그쳤습니다. 대통령과의 대화에 관해 청와대가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병화 사장에게 다음과 같이 응답했습니다. 내가 뭐 잘못 얘기했어요? 당신은 원자력에 대한 의지가 있어요? 한국원 자력연구소 소장이 해야 할 일차적 임무는 이제 졸업했어요. 다음으로는 세 계적 추세에 따라 원자력기술자립이란 대규모 사업을 추진해야 합니다. 특히 미국의 견제를 벗어나려면 이 길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원자력기술자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내가 원자력 추진체제에 관해 간절히 바랐던 것은 원자력 추진체제가 일원화되고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 다. 원자력 추진체제가 불란서와 유사한 체제, 그러니까 관련 정부조직을 포 함해서, 한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안전기술원 등 모든 주체가 불란서의 CEA 와 같은 조직으로 한 우산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전두환 대통 령께도 이를 건의한 바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세 가지 루트를 가지고 원자력 행정을 관할하고 있었어요. 첫째는 과기처 장관이 위원장이 되는 원자력위원 회, 둘째는 동자부 장관이 주제하는 원자력관련 회의, 셋째는 한전 사장이 관할하는 전력그룹협력회의 등이었습니다. 이들 3개 주체는 같은 사안과 토 픽을 가지고 각각 별도로 협의 의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소스는 대통 령 한 분인데 세 군데서 중복 논의하는 불합리한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형표준원전 사업 추진체제와 관련해서 나는 김성진 장관과 매우 가까운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다툰 일이 있었어요. 밤에 장관 댁으로 찾아가서 밤 12시까지 기다렸어요. 장관님 사모님은 나와 장관님 사 이가 절친한 것을 알고 장관님이 새벽 2시경에 올 것 같은데 만나고 가라고 했습니다. 밤 12시까지 기다렸는데도 그냥 갈 거 뭐 있냐고 했습니다. 새벽
49 2시경에 장관님은 귀가했어요. 그때부터 둘이서 언성이 높아지고 언쟁이 벌 어졌습니다. 저는 김성진 장관께 따지고 들었어요. 대통령께서 한국형표준원전 사업을 추진하라고 지시했으면 원자력위원회가 그걸 제대로 끌고 나가야 하는데 내 가 보니 한전이 주도 하고 있어요. 동자부도 아니고 과기처도 아니고 원자력 위원회도 아닌 한전 사장이 주도하고 있어요. 장관님 그 허수아비 장관 역할 을 무얼 하려하고 있어요.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을 무엇 하려하셔요. 그거 그 만 두세요. 내가 보기에는 국가가 원자력사업을 정책적으로 추진하는데 뭔가 가 여하튼 복잡해요. 동자부를 잘 이용하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해 가지고는 국가의 원자력 사업이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께서 직접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을 하셔 야 되는 거예요. 나는 그 때 이렇게 김성진 장관께 대들었으나 내가 장관님 께 정말로 실수와 결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장관님은 그 때 매우 화가 났어요. 그래서 당신은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이야.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이면 소장이나 똑똑히 하지 장관보고 이래라 저 래라 해요 라고 소리쳤다. 장관하고 나하고는 무척 가까운 사이인데 그 때는 매우 화를 내셨어요. 논쟁의 핵심은 한국형표준원전이었습니다. 표준원전 사업을 추진하는데 내 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소스는 대통령인 한분인데 세 군데서 관여하고 중심 세력은 한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장관께 국가운영을 하는데 똑똑히 좀 하시라 고 내가 따지고 들었던 것입니다. 여하튼 대통령께 그렇게 권유를 한번 해보시라고 했더니, 장관은 나보고 말로만 하지 말고 적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에 나의 생각을 보 고서로 만들어 장관께 보고했어요. 그 핵심 내용 중의 하나는 과기처 장관이 원자력위원회의 위원장직을 양보하고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기처가 양 보해서 원자력관리체계를 일원화하는 것이 차라리 국가차원에서 보면 현명 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도 새벽 2시까지 장관과 논쟁을 벌였어요. 장관은 내게 왜 한국원자 력연구소를 그렇게 대폭 키우려고 하느냐? 소장이 어떻게 그렇게도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국가를 위해서 심사숙고하여 그것을 결
50 심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반문했어요. 장관님은 나를 해직할 수 있는 권한 을 가졌소, 마음에 안 들면 해직시키시오, 그래도 나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키워야겠소. 라고 나는 맞섰습니다. 그리고 나서 김성진 장관은 일주일 후에 저를 다시 불렀습니다. 그래서 갔 더니 그동안 대통령을 만나서 보고를 했다고 말했어요. 내가 작성해서 장관 께 보고한 자료를 가지고 그대로 대통령께 보고했다고 했습니다. 한국형표준 원전이라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업을 가지고 한전 사장, 동자부 장관, 과기처 장관 등으로 갈라져 있는 지휘체계의 문제점을 대통령께 보고했다고 했어요. 이러한 과정과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한전 사장이 중심이 되는 원자 력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3. 한국형원전표준화 사업의 구상 및 출범 경위 3.1 김세종씨 회고 한국형원전표준화라는 아이디어의 시발점은 동자부, 한전, 과기처 등 세 군 데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동자부 입장에서는 그 당시 Bechtel사가 관련된 사건이라든가 Westinghouse사의 횡포를 겪으 면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는 것을 절감해서 그 대책으로서 원전표 준화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전에서도 동일하게 느끼고 있었고, KOPEC에서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과기처에서도 KOPEC에 원전표준 화 타당성 검토를 위한 1단계 용역을 발주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원전표준화를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동자부였다 고 생각합니다. 제일 절실한 처지에 있던 차에 나에게 먼저 아이디어를 가져 온 것이 신재인 박사였어요. 신재인 박사는 원전표준화 아이디어를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며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결국 이것을 끌고 가는 주체는 한전이기 때문에 내가 그 당시 이종훈 한전 건설부장에게 얘기 를 해서 이것을 한전에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원전기술자립 계획을 한전이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82년도에 동자부의 원자력발전과장으로 보직되었습니다. 임명된 후에 과의 업무내용을 검토해보니까 원자력사업에 할 일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 았습니다. 그래서 8개 항목을 중요 업무로 정리했어요. 그 중에는 폐기물사
51 업, 안전성 확보 등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감히 원자로를 자력으로 설계하여 제작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더군다 나 그때 원자로 제작을 담당해야 할 한국중공업(한중)은 공장 현상유지 하는 것만 해도 벅찬 상황이었어요. 그 당시 전두환 대통령도 한중은 폐쇄해야 할 회사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상태를 내가 알기 때문에 도저 히 원자로 기술의 국산화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첫 번째 착안한 것은 원자력발전소 건설공기 지연을 방지하기 위한 프로젝트 관리기술만이라도 좀 제대로 갖추어야 되겠다고 생 각했습니다. 한전은 그때 공기지연에 따라 공사비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문제 로 고민하고 있었어요. 공기가 자꾸 늘어나니까 그게 다 공사비로 누적이 되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사비 문제 해결을 위해 프로젝트 관리기술 만이라도 좀 제대로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동일한 기종 및 규모의 원자력발전소를 다수 건설하는 데 같은 설계 를 계속 반복해서 Bechtel이란 엔지니어링 회사에 용역을 주어야 하는 문제 를 우선 해결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엔지니어링만이라도 우리 기 술로 해결하면 큰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정책을 구상했습니 다. 원자로는 어차피 우리가 못 만드는 거니까 외국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자로와 발전기는 외국에서 도입하고 나머지 BOP와 레이아웃만 우 리가 표준화하자는 결론에 도달해, 그러한 개념에 기초해 표준원전 개발 계 획을 스타트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KOPEC의 정근모 사장은 NSSS도 할 수 있고 발전기도 우리 가 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 무렵에 원자력연구소 한필순 소장도 NSSS를 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AE만 생각 하여 그 방향으로 추진하다가 중간에 NSSS가 끼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러면 NSSS를 누가 담당할 것이냐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정근모 사장은 이건 내가 해야 되겠다고 주장하고, 한필순 소장은 아니다, 원자력연 구소에 전문인력이 전부 모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겠다고 옥신각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동규 장관이 관련기관 대표를 다 모아서 장관부속실에 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때 원자력연구소 한필순 소장, 과기부에서는 임용규
52 원자력 위원, 한중에서는 성낙정 사장, KOPEC의 정근모 박사, 한전에서 문 희성 부사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처음 안건에는 NSSS가 KOPEC에서 담당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의결과 최동규 장관이 교통정리를 해서 원자력연구소로 보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원자력발전소를 표준화하게 된 동기와 관련하여 그 당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때에 Westinghouse가 주기기를 모두 공급했으며 가동 후 보수를 할 때에도 Westinghouse가 매번 고가의 보수비용을 요구하여 한전 사람들은 굉장히 애를 먹었다는 것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을 했고, 또 하나는 소위 말하는 Bechtel 사건이 발생한 것도 요인이 되었습니다. Bechtel은 고리 3, 4호기 건설 AE를 했고 영광 1, 2호기도 했습니다. 그 리고 대만의 만산 원자력발전소도 그 사람들이 AE를 했는데 할 때마다 그 설계용역비를 지불하라니까 우리로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고리 3, 4호기와 영광 1, 2호기의 man-hour가 목표보다도 대 폭적으로 초과하는 일이 발생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검토해 봤더니 결 국은 Bechtel과의 계약내용에 잘못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 계약내용 을 제대로 못 따져본 것도 있지만 결국은 우리가 그런 것에 대해서 잘 모르 니까 당하는 꼴이 되었고 이런 것을 안 당하려면 결국 우리가 우리 기술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Bechtel 사건은 기술력 부재와 사업 경영 경험 부족으로 당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우리는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지어가야 하는데 우리 능력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표준화하면 조금씩 modify하는 부분의 비용만 투입하면 됨으로 대 폭적인 비용절감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이 원자력발전소 표준화 사 업 추진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Bechtel 사건을 마무리 하고 동자부에서 앞으로의 대책 방향을 논의한 결 과 결국은 우리가 앞으로 원전표준화를 추진해서 공사비와 설계용역비를 절 감하고 뿐만 아니라 우리 기술을 가져야 앞으로 다수의 원자력발전소를 건 설함에 있어 우리가 스스로 주도하지 않느냐는 관점에서 표준화를 해야겠다 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동자부 내에서 이와 같이 기본 방침이 정해졌으며, 이것을 추진하려면 한
53 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한전의 이종훈 당시 원자력건설부장에게 원자력발전 소 기술자립을 해야겠는데 이것에 대한 한전의 계획서를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이종훈 부장은 그것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전의 계획을 기초 로 해서 원전표준화를 위한 실무 대책회의가 구성되었고 그 다음에 그 후속 조치로써 원자력연구소, 한전, KOPEC, 한중 등 여러 기관의 뜻을 모으기 위 해서 일련의 워크숍이 개최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워크숍이라는 것이 아주 개괄적이고, 심지어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계속 워크숍을 하면서 표준화의 개념을 정립하고 앞으로의 추진계획을 상의하고 또 각 기관이 하는 역할을 소개하고 그러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협조무드를 조성해 갔습니다. 그 렇게 하면서 표준화 사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최동규 장관은 경제기획원 예산국장을 역임하여 국가살림 전체를 맡아 본 분이기 때문에 균형감각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자부장관으로 왔을 때도 국가 전체적인 시각에서 사안을 다루었고 어느 한쪽으로 편향된 성향 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런 장관을 만난 것이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Bechtel 사건이 발생한 직후 최동규 장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최동규 장관이 오자마자 Bechtel 사건을 먼저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장관 취임 후 이틀인 가 됐는데 담당과장이었던 나와 국장을 불렀어요. 그리고 나의 전임 담당과 장이었던 김지섭 과장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장관은 2시부터 보고를 받기 시작해서 밤 9시까지 저녁도 안 먹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의심나는 것을 하 나하나 질문을 하는데 내가 거기서 7시간 심문을 받은 셈이지요. 그런데 내 가 한 마디도 안 막히고 다 대답했는데 마지막으로 나에게 쏘아붙인 한마디 는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왜 문제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어! 당신 사 표 내!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9시가 됐는데 장관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당신 내 방으로 좀 와! 그래서 아 이제 진짜로 사표 갖고 오라는 가보다 라고 생각 해서 사표를 미리 준비해 갔지요. 갔더니 장관은 앉아! 당신 어제 저녁에 수고 많았어. 내가 차 한 잔 마시러 오라고 그랬으니까 한잔 들어! 그래서 마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것이 장관이 나를 완전히 신임했다는 표시 였어요
54 Bechtel 사건을 장관께 설명하면서 원전표준화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해 두었습니다. 우리 기술이 없어서 당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표준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연이어 Bechtel에 대한 대책을 만들어 오라는 지시가 내렸을 때 원전표준화계획을 만들어 장관께 보고했더니 오케이 그대로 해! 라고 즉석 에서 승낙했습니다. 3.2 이승구씨 회고 그 당시 나는 과기처 원자력국의 주무과장이었습니다. 과기처에서 원전기 술자립을 주장하는 데에 있어 한국원자력연구소와 과기처는 핵반응이 일어 나는 부분인 핵증기공급계통(NSSS : Nuclear Steam Supply System) 기술 의 자립화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핵증기공급계통의 핵심은 원자로이며 결과 적으로 원자로 기술자립이 원전기술자립이라는 개념에서 KOPEC에 원전표 준화 용역을 발주했던 것입니다. 그 용역 결과에 근거하여 원자력위원회에 상정하여 심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KOPEC 입장에서 보면 원자로 주변의 엔지니어링(AE) 사업도 엄청나게 크니까 원자로를 포함한 핵증기공급계통 (NSSS) 전부를 표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과기처는 원자로만 표준화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사업이니 원자로만 표준화 하자고 주장 했고, KOPEC은 아니다 NSSS까지 우리 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3 박시열씨 회고 제가 초대 원자력발전과장이 된 이후 우리나라 에너지자원 확보의 필요성 을 통감하고 원자력발전만이 유일한 방도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기술자립에 대하여 공부하고 사색하게 되었습니다. IAEA전문가단을 지원받아 우리나라의 에너지 수요전망과 확보방안에 대한 자문을 받아 Feasibility Study of Nuclear Power in Korea"라는 보고서 를 수집하여 검토하고 관계기관과도 협의하였는데 그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에너지자원과 에너지 수요전망 및 그 공급방안을 장기적으로 검토평가하고 앞으로는 우리의 에너지 확보방안으로 지하자원이나 수력자원에서는 극히 양이 적고 지하자원도 거의 없다는 전제하에 앞으로는 원자력발전으로 에너 지를 확보해야 하며 수요전망을 보아 거의 매년 원자력발전소 1기씩을 도입
55 건설해야 한다는 권고 보고가 있었습니다. 가장 타당한 판단이며 권유라 생 각했습니다. 그러나 국가 전체의 에너지를 하나의 에너지원에 의존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에 원자력발전은 총수요량의 약 1/3정도 조정하는 에너지 정 책이 펴져왔었습니다. 그 후에 실제로 원자력발전소는 동 보고서가 권유한 대로 우리나라에 도입 건설되었습니다. 1973년도 세계 제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였을때 석유도입국 모두는 급히 원유자원 확보 노력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비축 원유량 확보에 현안이 되었 는데 이 직후에 IAEA는 원자력발전의 도약 전망을 보아 Oil Shock and Nuclear Power"란 제목하에 태국 방콕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세계의 오 일 쇼크 실상과 이에 따른 원자력발전의 전망에 대한 세계 석학들의 의견을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당시 원유값은 $1/bbl에서 $6/bbl로 등기하였으며 세계 여론이 들끊었습니다. 이란의 석유상 Yamani박사는 이 원유가 급등의 원인은 산유국의 책임이 아니며, 에너지 재벌이 원유를 통해 올리고 있는 이 익을 약간 줄이면 실수요국가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로비 에서 하는 얘기로는 이 에너지 재벌들은 산유국으로부터 과거 100년간 $1/bbl로 원유를 퍼가서 이문을 남겨왔으니 이는 너무 지나친 착취이며 원 유가 상승은 그들의 남기는 이문을 줄여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현상을 보고 우리나라는 앞으로 원유가 상승에 대응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고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원자력 발전기술을 하루 속히 확립하여 유가변동에 좌우되어 에너지 정책을 세우기보다는 원자력 발전기술을 확립 하는 것이 필요하여 서둘러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고리 원전1호기를 건설할 동안에 정부에서 한전에게 기술개발 자금을 대거 나 직접 기술개발을 할 것을 요구하면 한전의 반응은 기술개발이나 연구는 정부가 할 일이며 한전은 개발된 기술로 전력을 발전하여 공급하는 것이 회 사의 일이니 기술개발, 기술확보에 대한 책임은 정부의 몫이라는 대답이었습 니다. 그런 가운데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구입 계약과 건설추진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KAERI, ACRS의 기술자, 과학자들은 열심 히 기술을 터득하고 노력하였고 그런 가운데 우리의 기술능력의 숨겨진 발 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인이 1977년 원자력안전국장 발령을 받고 부임 다음날 미국 TMI원자력
56 발전소 사고가 보도되고 이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으로 고리 1호기에 대한 안전성이 크게 논의되었습니다. 고리발전소 1호기 운전을 개시한 얼마 후에 이런 일을 당했으므로 TMI 사고 수습 책임자인 미국 전문가가 내한하여 원 자력학회에서 동 사고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는 후 원자력안전국장실로 초빙하여 KAERI 임창생박사와 TMI에 대한 여러가지 질의응답을 함으로서 많은 기술 내용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하였습니다. 이때에 우리의 기술능력은 낮았기 때문에 배운 것이 많았고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고리 1호기는 안전하 다는 발표를 하게 되었으며 이때에도 우리의 기술 확립 필요성을 절실히 느 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우리 기술능력을 과소평가하여 ACRS에서 기술적인 설명 을 할 때에 우리 참석자 한분이 당신 틀렸어요! 라는 한 마디에 설명회가 한참 정지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낮은 우리의 기술수준을 보면 서 기술자립 확립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으며 우리 기술계에는 기술 자립, 확립의 필요성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던 것입니다. 기타 여러 가지 우리 기술의 낮음을 느끼면서 원자력연구소 연구관들을 위 시하여 한전 등 관계기관에서 원전 기술자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며 오늘날의 표준원자력발전소의 설계기술 확립이 이룩되었고 우 리 설계기술에 따른 원전이 건설되어 운전되고 전력이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4. 한국형표준원전사업의 역할분담 과정 4.1 한필순 박사 회고 어느 날 KOPEC의 직원인 박귀영 씨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의 공군사관 학교 2년 선배 이면서 공군사관학교 때 나의 직속상관이었어요. 그는 나에게 원전설계기술 자립화를 위해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전문가 60명을 KOPEC에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느 날 한국중공업(한중)의 이중호 박사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나를 보고 하는 얘기가 원전기술자립에 필 요한 인력에 있어 한중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한 명도 없어도 무조건 한국중 공업이 사업을 맡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업이기 때문에 한국중공업의 사업으 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표준원전 사업은 연구소에서는 담당하기 어려우니 한중이 담당하도록 밀어달라는 의미였어요
57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을 모아놓고 회의하면 NSSS 사업은 워낙이나 크고 어려운 사업이라 못하겠다고 하는데, 이와는 다르게 KOPEC과 한중에 서는 나를 찾아와서 서로 자기들이 할 테니 연구원을 빌려달고 부탁하는 상 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사관학교 선배에게 선배님 여기 오지 마십시오, 나한테 부탁하지 마십시오. 국가 차원의 사업이라서 내가 선 배님 말씀에 따르기 어려우니까 이리로 오지 마십시오. 나도 강한 기술자립 의 의지를 가졌으니 이제는 다시 정근모 사장의 심부름을 하지 마십시오. 라고 했다. 그 후 저는 KOPEC 사장을 만났어요. 만나서 당신이 NSSS 기술자립 사 업을 하고 싶어 하는 데 이건 원래 과학자 집단인 한국원자력연구소 몫입니 다. NSSS는 원전표준화 사업 중에서 가장 핵심기술 부분인데 관련 과학자 를 확보하고 있지 않은 KOPEC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이 사업을 하시려면 당 신이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오시오. 내가 KOPEC 사장하겠소 라고 말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장은 대답을 못했어요. 그런데 그 후 어느 날 동자부의 한 직원이 갑자기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는 비밀리에 나를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 전날 저녁에 밤새도록 동자부에 서 작업한 것을 가지고 왔어요. 그것을 포함한 자료 전체는 매우 두툼했습니 다. 그는 아마 소장님한테는 이 자료가 전달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소장 님한테는 절대 보내 주지 않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 다음 날 최동규 동자부 장관 주제로 원전표준화 사업 추진에 관한 회의가 개최 되는데 이것은 그 회의 자료라고 했습니다. 동자부 내부적으로는 방침이 이 미 결정되어, KOPEC에서 NSSS 사업을 가져가도록 되어 있으니 모르는 척 하십시오 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 나는 더 열심히 그 자료를 읽어 봤어요. 동자부 직원이 얘기한데로 회의 자료는 정식 루트로는 나한테 사전 에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그 다음 날 동자부 장관 주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장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회의장의 동자부 직원한테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나한테는 회의 자료를 사전에 안 보냈소! 그랬더니 그는 우물쭈물하면 서 대전이라 뭐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하겠지요. 라고 했다. 그러자 최동규 장관이 들어와서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최동규 장관 바로 앞에 문희성 한
58 전 부사장(박정기 한전사장 대신 참석)이 착석하고, 그 다음이 KOPEC 사장, 그 다음 자리에 내가 착석했고, 내 옆에 과기처의 조경목 씨가 오도록 되어 있었는데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회의 시작 전에 저는 한중의 S사장한테 내가 몹시 궁금해 하던 한 가지를 물어봤습니다. 원자력연구소에서 이 사업을 하려고 하면 과학자들이 못하겠 다고 그러는데, 전문가도 확보하지 못한 KOPEC하고 한중이 왜 굳이 이 사 업을 하려고 합니까? 그랬더니 S사장은 아이고 한 박사 참 순진도 하시네, 세상에 우리나라에서 인력을 다 확보한 후에 사업을 시작하는 기관이 어디 있소 라고 했다. 대한민국 사업은 돈을 먼저 확보하고 그 돈을 가지고 인력 과 장비를 구비하는 것이 아니오? 라고 했다. S사장은 나한테 눈이 번쩍 뜨 이는 아이디어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의에 참석해보니 나는 이미 완전무장이 되어 있었던 것을 직 감하게 되었어요. 그와 동일한 내용의 회의는 과기부 장관이 주제하는 회의, 박정기 사장이 주관하는 회의가 있었는데 세 번째로 최동규 동자부 장관이 주제하는 회의에 내가 참석하게 되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의가 시작되고 회의 자료는 김세종과장이 브리핑했습니다. 브리핑이 끝 나고 난 뒤에 최동규장관이 그럼 의견을 듣겠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선취권을 뺏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내가 손을 먼저 들었어요. 나의 좌석 위치는 최동규 장관을 마주보는 자리였어요. 나는 다그쳤습니다. 왜 나한테 는 사전에 자료를 안 보냈소! 동자부가 주관하는 회의인데 왜 나한테만 안 보냈소, 그것부터 해명해 주시오 라고 했습니다. 최동규 장관은 당황하는 기 색이 확연했습니다. 보냈을 텐데 라고 얼버무렸어요. 그래서 그 건은 간 신히 넘어갔어요. 연이어 나는 내가 최근에 일어난 사실을 밝히겠다고 하고, KOPEC 사장이 나한테 나의 선배를 보내 가지고 이러이러하게 나를 설득하려 했으며 60명 의 전문가를 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중에서도 또한 이중호 박사를 보 내 가지고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사업의 성격 상 과학자 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설명한 후에 나의 결론으로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과학자로서 이 사업은 과학자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하 며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해야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59 그랬더니 최동규 장관이 KOPEC 사장에게 사장! 뭐 불만 있는 것 같은데 얘기하시오! 얘기하라고 몇 번 부추겼으나 결국 KOPEC 사장은 말을 하지 못했어요. 나는 그때 그 회의의 의장인 최동규 장관의 결론은 정말 명언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이어서 말했어요. 나는 동자부장관이기 이전에 국가를 대 표하는 국무위원입니다. 국가의 중요 정책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 대한민국 의 과학자가 최적임이라면 그들에게 이 중요한 임무를 주어야겠다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그 때의 회의록은 김과장이 작성해 참석자의 서명을 받았습 니다. 4.2 남장수씨 회고 84년도 9월 14일에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서울 본소 간부들과 대덕 분소의 간부 전체가 서울 연수원에서 하루 종일 워크숍을 하고 또한 밤새 토론했는 데, 그때의 결론이 원자로 부분만 참여하는 것으로 났어요. 그 이유는 그때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는 중수로 핵연료 개발 사업이 겨우 끝난 단계였으며, 그때부터 양산화 계획이 시작되고 있었고, 또한 그 다음 사업으로 경수로 핵 연료 개발을 막 시작한 시점이어서 약 200여명의 연구인력이 그 사업에 투 입될 계획이었어요. 따라서 다른 신규 사업에 투입 가능한 여유의 연구인력 이 전무한 상태였어요. 그런 상태에서 경수로 핵연료 개발 사업보다도 엄청 나게 더 큰 발전용원자로 설계기술 개발 사업에 도전한다는 것은 물리적으 로 불가능한 계획이라 생각되었어요. 그런데 심층토론 끝에 원자로 부분에는 참여하자고 결론을 내린 이유는 경수로의 핵연료 설계가 경수로의 원자로 설계의 일부분이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두 사업의 공통되는 부분에는 참여 할 수 있다는 의미였어요. 이렇게 연구소 내의 결론이 났었으나 그게 나중에 한전이 주도하는 전력그 룹협력회의 결과 사업 측면에서 보면 핵증기공급시스템(NSSS)의 일부인 원 자로만을 분리하여 발주하기 힘들다는 관점에서 한 개의 기관에서 일괄 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가 NSSS의 전부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60 5. NSSS 기술 자립의 중요성과 그 추진 결정 과정 5.1 강박광 박사 회고 원자력발전 기술 자립화와 관련하여 특히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은 핵반응 이 일어나는 핵증기공급계통(NSSS)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부분은 일 반 발전소의 기술기반을 활용하여 자체 개발 도전이 가능하나 NSSS 부분의 자체 개발에는 대규모 투자 소요는 물론 핵반응 때문에 고준위 방사능 환경 하에서의 실험이라는 도전하기 어려운 극한 조건이 따르지요. 또한 원자력발 전소가 평화이용 범위에 속한다고 하나, 핵보유국은 NSSS 기자재와 설비는 공급하나 설계기술을 전수하기는 꺼려하여 그 때까지 국제 분쟁의 소지가 있는 비핵보유 국가에 NSSS 기술이전이 이루어진 바가 없으며 비핵보유국 으로서는 오직 일본과 독일 2개 국가에 미국의 NSSS 기술이 이전되었을 뿐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NSSS 기술이 이전된 것은 거의 기적이 이루 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2 한필순 박사 회고 NSSS 기술자립이나 기술이전이 매우 어려운 국가적 과제라는 것을 단적 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중국의 경우를 살펴 볼 필요가 있어요. 이 는 우리가 NSSS 기술자립을 이룬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명백 히 방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89년과 90년에 두 번이나 중국에 정중히 초대되어서 갔던 일이 있습 니다. 그들은 그 당시 NSSS 기술자립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나보고 도와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어요. 자기네는 그 당시 40만 명 정도의 원자력 전문인 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들 중 5만 명을 과거에 고비사막에 파견하여 원자 탄, 수소탄, 핵잠수함 등 핵무기를 전부 개발했는데 원자력 발전소의 NSSS 개발만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으며 이것만은 잘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전 세계에서 NSSS 기술을 가장 기적적으로 쉽게 자립화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산 원자력발전소를 자체 능력으로 건설을 시도했었 는데 그것도 30만KW 수준의 규모가 작은 원자력발전소였는데 NSSS 부분 에서 실패했으며 도저히 자력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
61 다. 그래서 그 다음 전략으로 불란서의 프라마톰사에 발주하여 다이아베이라 는 곳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했는데 아직도 NSSS 부분의 자립화는 막혀 있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NSSS 기술을 중국에 전수해 달라고 간청하 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90년에는 아직 우리와 교역이 이루어지기 전이 어서 그들은 실현 불가능한 요청을 나에게 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40만명에 달하는 원자력 기술인력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 당시 한 국원자력연구소의 전문인력이 2,000명을 좀 넘었던 규모이었는데 우리가 NSSS 자립화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이는 기적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두 번이나 초대받아 중국에 갔다 오니까 미국 대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당신은 미국에서 받은 핵심 원자력 기술을 마음대로 중국에 넘 겨주려는 것은 아니오. 라고 물었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중요한 사실들은 대 통령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정권에서는 에너지 문제에 있어 원자력이 핵심 과제에 위치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을 것입 니다.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시작할 때 김시환 박사 등 정말 최고의 엘리트들이 대거 그 사업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업에 그 인력을 빼 낼 수가 없는 사정이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때에 NSSS 설계 국산화 문제 가 대두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NSSS 사업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국가적 대역사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무리를 하여 팀이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은 우수했는데 경험이 일천하여 그들은 초년병이고 신병들이어서 나 는 오합지졸에 가깝다고 느껴서 매우 불안했습니다. 드디어 이병령 박사를 반장으로 임명하여 미국에 기술전수를 받으러 떠나보내게 되었는데 떠나보 내는 자리에서 나는 우리가 기술자립을 위해 조금 미치자고 했습니다. 기술 자립까지는 무수한 난관과 방해가 가로놓여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만일에 실 패하면 너희들 전부 다 태평양에 빠져 죽을 각오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비장한 각오로 NSSS 기술자립 만세를 삼창했습니다. 5.3 남장수씨 회고 원전표준화 사업은 절차상으로는 한전의 박정기 사장님이 주관하는 전력그 룹협력회의에서 85년 5월에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원자력정책으로 확정하기
62 위해서 85년 7월에 원자력위원회에 그 안건을 상정하여 결정되었습니다. 5.4 임한쾌씨 회고 거기에 첨언하면 84년 11월 16일 제2차 전력그룹협력회의에서는 한중이 NSSS계통, KOPEC이 원자로계통을 제외한 BOP계통,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원자로심만 하되 한중이 주체이고 그 밑에 하청으로 참가하는 것이 원안으 로 결정되었는데, 그것이 몇 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85년 5월에 한국원자력연구소가 Westinghouse의 역할을 하고 KOPEC이 Bechtel 역할 을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러한 변경은 한필순 소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는데 한필순 소장은 전력 그룹협력회의에서 나는 원안대로라면 탈퇴할 것입니다 라는 강경발언까지 하여 회의 분위기를 굉장히 냉랭하게 한 적도 있었어요. 그 회의 후에 한 소 장은 회의장을 떠나면서 나를 꽉 끌어안으면서 임 처장 좀 도와줘 라고 했어요. 한전에서는 표준화 사업의 역할분담 원안은 사업자적인 측면에서 생 각했고 사업추진을 쉽게 한다는 입장에서 구상했는데 변경에 따른 반발도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한전 실무자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고 과학자들이 주도하면 더 깊은 기술을 습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논리로 납득시켜서 그 것을 동자부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자료를 다 만들어서 보냈습니다. 5.5 한필순 박사 회고 NSSS 기술이전이 가능했던 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나라에 서 그 당시 원자력발전소 도입선 다변화 전략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 주효했 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는 카베우사, 불란서에서는 프라마톰사, 그리고 미 국에서는 C-E, Westinhouse, GE 등 3사 이었어요. 불란서, 독일, 미국이 경 쟁해야 하는 사정에서는 미국이 NSSS 기술을 안 줄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5.6 임한쾌씨 회고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공급 시장은 매우 어려운 사정에 있었으며, C-E의 경우는 특히 다급했어요. 그 여건을 우리가 노린 겁니다. 특히 C-E 는 그 당시 한국시장을 놓치면 회사가 위기에 처할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
63 었기 때문에 이번에 들어오려면 무조건 NSSS 기술전수를 해야 한다고 강조 했어요. 그러나 C-E사는 처음에는 꺼려했어요. 그래서 박정기 사장이 나 한테 미리 가서 상대방 사장단들을 만나서 얘기하라고 해서 C-E사를 방문 했어요. 입찰안내서를 내보내기 전에 담당 실무책임자가 상대방 회사를 방문 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에 전례가 없었어요. 오해를 살 것이 뻔한 처음 있는 일을 내가 담당하게 되었어요. 특히 C-E에서는 이번에도 자기네 를 들러리로 세우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해서 내가 대답하기를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이것은 한전 사장지시다. 이번에 기술전수를 하는 회사가 유리하 며, 모든 경쟁회사들은 마라톤 선수처럼 같은 선상에서 출발시킬 것이다. 그러니 NSSS 기술전수가 핵심이 될 것이다. 이렇게 내가 C-E사장에게 말 한 것이 C-E가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5.7 김세종씨 회고 그 당시 기술자립을 위해 기술전수를 받아야겠다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형 성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박정기 사장은 한필순 소장의 얘기 를 많이 들어서 기술자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고 한전의 여건으로 보나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여건으로 보나 우리가 기술자립을 해야겠으며 기 술자립하는데 필수조건이 우리가 기술전수를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따라서 입찰조건에 넣게 된 것입니다. 또한 Bechtel 사건이라든가 Westinghouse의 고압적 자세 등을 감수하면 서 임 처장하고 나하고는 앞으로는 입찰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개런 티, 워런티 조건까지도 주도면밀히 만들어 놓자. 스탠더드 입찰서를 미리 만 들자 라고 생각해서 한 1년 전부터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아까 임처장이 얘기한 것처럼 그 입찰서에 근거하여 사전에 반응을 타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우리는 기술을 달라 상대방은 안 준다는 대립 된 입장이었어요. 그때는 상대방이 주면 다행이라 생각했고 그보다 우리가 처음 목표했던 것은 Westinghouse의 고압적 자세를 눌러서 Westinghouse 를 항복시키려는 것이었는데 Westinghouse는 고집불통으로 뻗쳐버리고 C-E는 우리의 조건에 응해 왔던 것입니다
64 5.8 한필순 박사 회고 우리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NSSS기술을 준다고 해도 받을 여력이 없다는 주장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좀 강경한 고집을 피웠어요. 안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전문인력 200명을 추가로 확보하면 될 것이 아니냐 라고 주장했어 요.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중수로 핵연료 사업을 그 때 막 성공적으로 끝낸 성 과를 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다음 단계의 사업인 경수로 핵연료개발 사 업에 전문인력 200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200명으로 주장한 이유는 사실은 그때 그게 NSSS를 할 수 있는 전문가를 미리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 었어요. 경수로 핵연료 개발 사업은 대부분이 NSSS 설계 사업과 중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설계인력 200명이 필요하다고 했으나 한전에서는 40명이면 된다고 반박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40명의 근거가 어디 있느냐 고 물었더니 브라질의 경우 Westinghouse가 전문인력 40명을 파견하여 핵 연료 설계 작업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Westinghouse에 오래 근무한 경력을 가진 임창생 박사를 대동하고 Westinghouse에 확인하러 방문했지 요. 확인한 결과 현장에 파견된 인력이 40명이고 본사의 개발팀에는 1,000 여명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대통령이 확신을 갖고 뒷받침해주신 것입 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중수로 핵연료 개발을 성공하 는 것을 보고 경수로 핵연료도 해보라고 나를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으로 임 명했습니다. 그리고 경수로 핵연료 개발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보시고 원자력 기술자립화에 대해 상당한 신뢰감과 자신감을 가지게 되셨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결심을 굳히시는 것을 보고 한전 사장이 하겠다 고 마음먹고 동자부 장관이 하겠다고 마음먹고 과기처 장관이 하겠다고 나 서는 분위기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건 소스는 대통령 한 군 데인데 동자부, 과기처, 한전 등의 3갈래로 나누어져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 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3개 기관이 각각 주관하는 회의에 전부 참석 한 사람은 나 하나였으므로 그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5.9 이익환 박사 회고
65 나는 당시 원자력연구소 NSSS사업관리를 맡아 한전과 원자력연구소와의 계약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전의 이중재부장(2006년, 한수원사장 퇴직)이 저와 막바지 계약을 협의 중에 있었습니다. 당시 한필순소장과 한전 의 박정기사장은 에너지 기술자립에 대한 국가적 목표가 일치하여 의기투합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한전은 원자력연구소의 설계인력을 몇 명으로 할 것인지가 현안이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술자립에 너무 치중하게 될 경우 사업비가 너무 많아 원전의 경제성에 어려움을 주게 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이중재부장과 우리 연구소는 약 730명 년(man year)의 인력으로 기술도입사인 CE에 기술을 전수받으면서 영광3,4호기 설계도 하도록 막판 협의 중에 있었습니다. 이 설계인력만 하더라도 최소한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필순소장과 박정기 사장이 조찬 모임을 한다기에 사업총괄책임자인 김병구박사와 저는 자료를 만들어 조찬 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물론 730명 년보다 조금 많은 780명 년의 자료를 드 렸는데 식사 후 메모지가 나온 것은 988명 년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우리는 그 메모지를 들고 이중재 부장에게 달려 같습니다. 그는 유심히 메모지의 글 씨가 사장의 글씨인 것을 확인하고서 결국 988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물론 계약설계서를 모두 재작성하여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200명이 넘는 이 숫자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그 어려운 원자로계통설계의 기술을 자립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사업에 투입된 설계 인력은 바쁜 사업일 정때문에 기술자립이 되었는지 확인을 할 수 없게 되는데, 별도의 인력이 사 업일정에 뒤따라가면서 별도로 설계검증(Design Verification)을 하게 됨으 로써 1995년 95%의 기술자립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좌로부터 CE대표 Mihan씨, 한필순 원자력연구소장, 성낙정 한국중공업사장, 이종훈 한전기술(주) 사장) <사진 5> 영광3 4호기 계약 서명식(1987년)
66 5.10 임한쾌씨 회고 전두환 대통령이 재임 초기에 원자력에 대한 경원심을 가지셨던 것을 긍정 적 생각으로 바꾸어 놓는 데는 박정기 한전 사장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 해요. 박정기 사장은 전두환 대통령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으며, 그러기에 한 전에 부임하자마자 에너토피아 라는 것 즉 에너지유토피아를 적극 주장했어 요. 그는 한전뿐만이 아니라 각 관련 회사 직원들까지 참석한 만찬에서 원전 11, 12호기 계약은 에너토피아 달성을 위한 초석임을 명심하라고 강조했습 니다 김세종씨 회고 한필순 박사님과 김성진 장관님은 국방과학연구소 동료로서 매우 절친한 사이이고, 또한 김성진 장관님은 육사 11기로서 전두환 대통령 및 노태우 대통령과 동기 동창관계이며 나아가 육사의 수재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 리고 박정기 사장님은 전두환 대통령의 대구공고 후배로 형님 아우 하는 관 계였습니다. 이러한 인적 유대 관계가 원자력의 기적을 이루는데 결정적 역 할을 했습니다. 6. 영광3ᆞ4호기 공동설계팀의 미국 파견에 의한 기술 획득 과정 6.1 한필순 박사 회고 저는 1987년 4월 CE사와 정식 계약을 체결한 직후 이 사업 책임자로 김 병구 박사를 임명했습니다. 김병구 박사는 그 당시 영광 3ㆍ4호기 사업부장 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소신껏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예산 권과 인사권을 통째로 넘겨주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1986년 12월 14일 공동설계팀 1진 44명이 그들의 가족과 함 께 CE사가 있는 미국 코네티컷 주 윈저 시로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나는 출 발 직전 그들을 위해 환송연을 베풀었습니다. 환송연에서 나는 그들에게 떨 리는 목소리고 말했습니다. 한국형 경수로 탄생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으니 실패하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말라, 나라를 빼앗기면 식민지 가 되듯이 우리가 원자력 기술 자립을 하지 못하면 밤낮 외국 기술에 의존
67 하는 기술식민지가 된다, 우리가 기술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필코 이번에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저는 연설 말미에 원자로계통설계 사업책임자인 김병구 박사를 일으켜 세 운 뒤 그와 함께 필( 必 ) 설계기술 자립 이라고 쓴 액자를 들고 연구원들 에게 기술독립을 하겠다는 정신으로 만세삼창을 힘차게 함께 외치자고 했습 니다. 내가 먼저 만세하고 외치자 모두 따라서 힘차게 만세를 불렀습니다. 삼창 때는 정말 가슴이 찡한 듯이 눈물을 훔치는 연구원들을 보았습니다. 1986년 12월 14일 공동설계팀 1진 44명은 가족과 함께 CE사가 있는 윈 저로 떠났습니다. 인솔 책임은 이병령 박사가(당시 신형원자로개발단 책임연 구원) 맡았습니다. 이 박사와 우리 연구진은 밤낮 없이 계통설계 기술을 익 히는데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CE사가 당초 약속을 어기고 우리 연 구진들에게 핵심 업무 대신 허드렛일만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병령 박사가 거듭 항의했지만 번번이 시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박사는 철수를 결심 하고 이를 CE사에 통보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CE사는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핵심기술 전 수는 물론 우리 연구진이 중요 업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나중 에 우리 팀이 기대 이상으로 성과를 내자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1988년 윈저에 파견된 연구진은 1백명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연구소가 생 긴 이래 최대 규모의 인력이 해외에 파견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피눈물 나 는 노력 끝에 원자로계통설계는 3년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한국형 경수로가 탄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발전소의 각종 설비들이 잇따라 완성됨에 다라 영광 3ㆍ4호기는 96 년부터 정상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에는 국내 원전 중 최우수 발전 소로 선정돼 국제 원자력학회로부터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6.2 이익환 박사 회고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원자로계통기술의 자립을 시작한지 약 2년 반이 지난 시점인 1989년 8월에 나는 기술자립의 마무리 임무를 띠고 미국 윈저의 현 지 소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이미 전임자인 이병령 박사와 김진수 박사가 훌
68 륭하게 수행하던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온 이 30도를 오르내리던 무더운 날씨에 연구소에서 준비해준 승합차에 이삿짐 을 싣고 가족과 함께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미국 현지의 윈저에는 약 100여명의 우리 직원이 CE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기술자립도 하고 설계 공정에 늦지 않도록 사업도 잘 추진 해야 하는, 즉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일의 실질적인 마무리를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는 나로서는 강한 의지와 결심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과연 미국의 기술을 배운 후에 우리가 그들의 기술적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 독자적 설계를 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모든 일에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주 두세 번의 일과 외의 세미나를 분야별로 그리고 과제별로 개 최하였습니다. 이 세미나를 통하여 각자는 자신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미나는 일과 시간에는 개최하지 못합니 다. 서로가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정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Know Why까지 획득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CE사의 전문가들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고 전문 기술 자료까지 입수할 필요 가 있었습니다. CE 전문가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전문 설계보고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공식적인 자료는 아니나 개인이 계산 근거를 정리 한 것으로 별도의 노트와 토를 달아 본인이 보관하며 그 때마다 편리하게 그 보고서를 설계에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엔지니어들은 설계도의 계산 근거까지 알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료였습니다. 그들은 개 인 책상 서랍 안에 두고 그들만이 사용하므로 이 보고서를 우리가 습득하는 데는 끈질긴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그의 설계 파트너를 자기 집에 자주 저녁 초대를 하면서까지 친밀한 개인 관계를 만들어 자료를 습득 하기도 했습니다. 공동 설계는 미국 설계 회사가 있던 윈저에서 착수했으나 약 2년이 지난 시점에서부터 연구소가 있는 대덕단지로 점차 옮겨갔습니다. 설계가 최종적 으로 완료되는 곳을 연구소로 위치를 정한 것은 우리의 기술 습득 효과를 최대한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점은 발전소 현장의 공사가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로 현장 공사와 설계를 연계하여 서로 확인하는 것이
69 중요하였고 설계 일정관리를 통하여 사업관리 기술을 습득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공동설계를 위해 미국 전문가가 연구소로 오게 되어 CE 전문가의 많은 자문을 받게 되고 까다로운 기술 자료의 통제가 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동 설계 개념은 세계에서 처음 접근한 방식이기도 하 고 우리 방식의 고유한 기술 자립 시도로서 제한된 기간 내에 그리고 한 차 원 높은 기술을 자립하는 데 필요한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경영자의 의지와 확산이 강력하게 지원된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해외의 기술을 소화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 다. 정부와 회사 경영진의 강한 의지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재정적 지원도 필수적입니다. 물론 기술을 소화할 수 있는 인력이 먼저 갖추어져야 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1980년대 중반 만해도 원자력과 같은 대형 기술의 자립을 목적으로 정부에서 예산을 받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습 니다. 그래서 영광 3ㆍ4호기의 건설에는 약 4조원이란 초대규모 투자가 이 루어지기 때문에 그 사업에 공동설계 용역으로 참여한다는 명목으로 기술자 립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 자립의 최종 수요자인 한국전력과 기술자립의 주체인 연구소 간의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경우가 빈발하여 이를 조정해 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업자인 한전은 소요 경비를 최소화하기 원하고 연구소 는 되도록 깊이 있는 기술자립, 즉 해당기술의 절차와 방법만을 배우는 노하 우뿐만 아니라 기술의 원리까지 이해하는 know why까지 배운다는 관점이 니 사업자인 한전과 의견을 같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연구소는 사업 추진을 위해 필요한 통상적인 설계 인력 외에 기술자립 목 적의 별도의 기술 지원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한전에 설명하고 설득하는 데 힘든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사업에 참여하는 설계 인력은 공정을 맞추기 위하여 설계 이외의 업무는 하기 어려우므로 별도의 기술지원 인력이 설계 자가 수행한 설계를 다시 검증해 봄으로써 그 분야의 기술을 완벽히 이해하 도록 한 것입니다. 한전도 이 논리는 이해하였지만 얼마나 인력이 필요한지 또 지원할 인건비가 얼마인지를 추정하여 합의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습니 다. 연구소와 한전의 실무자 간에 상당한 의견 차이가 발생했으며 결국은 양 기관 최고경영자에게 이를 각각 보고하여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소의
70 한필순 소장과 한전의 박정기 사장은 서로가 사소한 이해관계를 떠나서 오 로지 원전 기술 자립에 초점을 맞추어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공 기업의 틀 안에서 의견 차를 좁힌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 해결해 주셨습니다. 한전과 연구소의 최고경영자가 합의하여 기술 지원 인력 확보가 가능해졌 기 때문에 설계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재설계, 즉 계산을 다시 해 보면서 연 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여유 인력이 없으면 공정에 밀려 설계 방법만 습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왜 그 계산이 나오는지 그 이 유에 대해서는 모르고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설계 인력과 기술 지원 인력을 포함한 누계 인력 988명이 오늘날 원전 설계를 우리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 자립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1995년입니다. 한필순 소장과 박정기 사장간의 과감하고 긴밀한 협조관계는 원전 기술 자 립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일례로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는 기술 자립을 위한 인력확보에 필요한 예산을 정부로부터 지원 받지 못하 고 있었습니다. 당장 100여명이 넘는 인력이 훈련을 받아야 하나 경비가 없 어 곤경에 처했을 때 박정기 사장은 연구소에 이를 출연하도록 조치하여 주 셨습니다. 이는 그 이전에는 사례가 없던 일이고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두 분은 기술 자립에 최우선 역점을 두고 과감히 협조하셨습니 다. 특히 한필순 소장의 집요한 노력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소장 은 많은 브리핑 자료를 만들어 빈번히 박 사장께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밤 을 새워서 여관방에서 자료를 준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영광 3ㆍ4호기 설계가 거의 끝나는 단계에서 나는 월성 2ㆍ3ㆍ4호기 설계 책임자로 전보되었으며 사업차 캐나다에 수시 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내에서 박정기 사장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박정기사장은 그때는 한전을 떠나서 체육회의 일을 보고 계셨습니다. 나는 정중히 찾아가서 인사드리며 원전 기술자립 시에 보여 주신 사장님 의 과감하신 결심에 의하여 오늘날 원전 기술 자립이 성취되어 우리도 세계 선진국과 같이 원자력 발전소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 습니다. 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박 사장님은 싱긋이 웃으면서 모든 공을 우리 기술자들에게 돌리셨습니다
71 그 몇 마디 말씀에 나는 갑자기 북받치는 감동을 참지 못해 두 눈에 이슬이 맺혀서 재삼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돌아 섰습니다. 사장님, 훌륭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국가적 사업을 강력히 밀 어주시는 고마운 분도 계셨지만, 원전기술자립 사업에는 배후에 부정의 흑막 이 있다는 방향으로 몰고 가서 제5공화국의 대표적 부정부패 케이스의 하나 로 만들려는 정치인도 있었습니다. 제6공화국이 탄생하면서 국정감사가 부활 되었던 시기에 국회에서 연일 뜨겁게 이 건으로 인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과학기술자가 부정부패의 시비에 휘말리는 사건으로 엄청난 홍역을 치럿습 니다. 국회의 질문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CE사는 130만 킬로와트 규모만 건설하였으니 100만 킬로와트 용량을 맞추려면 결국 짜깁기가 되어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미국의 안전성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 (NRC)의 확인서를 받아오라. 전기 용량이 여유가 있는데 신규 사업을 하는 것은 정치 자금 목적이 아 니냐? 등 등 어쨌든 이 사건은 아무런 잘못을 발견하지 못하고 끝나게 되지만 과학기술 자가 정치권에 의하여 부정부패로 몰리는 억울함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로 인하여 사업 책임자인 김병구 박사는 검찰청에 자주 불려갔습니다. 그래 도 담당 검사는 피의자 조서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호칭을 박사 님, 박사님 하고 존대하여 불러 주었습니다. 제5절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원자력 사업부분이 타 기관으로 이관되는 제2차 통폐합 과정 1. 사업이관 개요 1990년 안면도에서 발생한 방사성폐기물 부지와 관련한 대규모 폭력사태
72 는 방사성폐기물 처리 사업은 기술적 차원보다는 정치적, 사업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연구소가 방사성폐기물 처리사업을 담당하기는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1991년 1월 11일 김영삼 대 통령은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은 한국전력이 수행하고, 국가차원의 원자력추 진체제를 개편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조치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대해 서는 그때까지 주관해 오던 발전용 핵반응과 직접 관련되는 부분의 핵심기 술사업 성격의 원전관련 업무를 관련업계에 모두 이관하게 되는 대폭적 조 직개편과 업무영역 조정의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이는 그때까지 통상산업부와 과학기술처 간에 20여 년 동안 끌어온 원자력 관할권에 관한 논란 문제 해결에 큰 획이 그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양부처간의 논란의 근원은 두 가지로서 첫째는 국가차원에서 볼 때 원자력 이용을 기술차원에 보다 큰 중점을 두어 폭넓은 활용 능력 확보에 중점을 둘 것이냐 아니면 에너지 이용의 사업 측면을 보다 중시할 것인가의 문제이 고, 둘째로는 원자력 기술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규모의 연구자금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1996년 6월 25일 개최된 원자력위원회에서는 원자력사업 추진체제 조정 방안 을 통과시켰으며 그 내용은 방사성폐기물관리 사업을 포함한 원전 관 련 사업을 한국원자력연구소로부터 한국전력 등으로 이관하고 원자력연구개 발기금을 신설하는 것이었다. 원자력연구개발기금과 관련해서는 한국전력이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전한 발전량 1kWh당 1원 20전을 매년 원자력연구개발 기금으로 출연하도록 했다. 또한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시행해오던 원자로계 통설계업무는 1996년 12월 말까지 KOPEC으로 이관하되 인력 344명도 함 께 이관하도록 했다. 통상산업부와 과학기술처는 이와 같은 조정방안을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996년 9월까지 관련법 개정안을 마련하여 정기 국회에 상정하고 관련 기관들은 1996년 9월까지 인계 인수 계획을 작성하 여 늦어도 1996년 말까지 모든 인계 인수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했다. 1996년 12월 31일에는 업무이관 및 한국원자력연구소 인력 344명에 대한 인사발령을 완료하고 1997년 1월 1일부터 정상적인 업무수행에 들어갔다. 이로서 KOPEC는 원자력발전소의 핵심부분인 원자로계통설계를 이관 받음 으로써 NSSS와 기타부분인 BOP를 포함, 원자력발전소 전 부문을 종합설계
73 하는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원자력발전기술자립의 근거가 되었던 원자력발전 사업의 이관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대폭적인 조직 축소와 대규모 연구비의 안정적 확보의 불확실성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원자 력연구소 경영진은 원자력발전사업 이관 이후의 대책 미흡과 관련하여 정부 를 설득하는데 노력하였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직원들도 노동조합 및 사업단 직원을 중심으로 사업이관 저지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대 국민 홍보 및 관 계기관 설득을 벌였다. 결국 1996년 11월 22일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연구업무심의회를 개최하여 사업별 이적규모 및 이적 대상자를 확정했다.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156명) 은 한국전력공사로 이관하고, 원자로계통설계사업(339명)은 한국전력기술 (주)로, 핵연료사업(PWR핵연료설계 및 중수로핵연료제조)은 한국원전연료 (주)로 이관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PWR핵연료 설계업무인력(65명) 전원과 중수로핵연료 제조인력 60명중 38명은 원전연료(주)로, 11명은 한국전력공 사로, 11명은 한국전력기술(주)로 전보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총 614명의 이 적이 결정되었다. 2. 관계인사의 회고 2.1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원전사업 이관 과정 (김세종씨 회고) 95년 말 나는 동자부에서 과기처의 원자력실장으로 전보되었습니다. 그 때 정근모 장관은 나한테 두 가지 미션을 주었습니다. 한 가지는 저준위 방폐장 사업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원자력연구소의 원전사업 이 관 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방폐장 사업은 아 시다시피 매우 복잡하게 꼬여있는 사업이라서, 내가 과기처에 부임 후 한 6 개월간은 세종로의 모처에서 매일 밤새다시피 정신없이 일했습니다. 하여튼 방폐장의 지정고시 단계까지 끌고 갔는데 애석하게도 활성단층 문제 때문에 백지화되어 버렸어요. 사업이 백지화 되니까 보다 위급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방폐장 사업을 더 이상 과기처에 맡겨 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활성단층 문제
74 가 발생하기 전부터도 그런 움직임이 청와대 내부에서 거론되었었는데, 활성 단층 문제가 발생하니까 그것을 계기로 방폐장 사업 전부를 한전으로 넘기 라고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이어 일어난 문제는 차제에 그 동안에 미결 문제로 남아 있던 NSSS 사업과 핵연료설계 사업도 함께 해결하기 위하여 이들 사업 모두를 원자력연구소로부터 한전으로 넘기라고 대통령이 지시하신 것입니다. 대통령 지시가 떨어지니 그때부터 국무총리실이 개입하게 되었고 그 당시 국무조정 실 강봉균 실장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강봉균 실장은 과기처 및 동자부 양 쪽 부처를 불렀습니다. 과기처에서는 내가 가고 동자부에서는 김 태곤 자원 정책실장이 나와서 그 자리에서 일체 다 넘기는 것으로 합의를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원자력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원자력연구소의 사업부분이 모두 한전 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사실은 우리가 꼭 알고 넘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자력연구소에서 사업이 넘어갈 때 마치 연구소가 사업을 통체로 빼앗기고 연구소는 손해만 봤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사업을 넘기는 대신 에 연구소는 본연의 R&D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업부 분은 한전으로 넘기는 대신 원자력연구소에서 필요한 막대한 연구비를 한전 에서 지원하게 조치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명분은 연구소가 제대로 R&D를 하려면 R&D에 전념해야 되며 사업부분은 모두 사업에 경험이 많은 한전에 넘겨서 사업을 효율화 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한전의 전력 매상고 중에서 kwh 당 2원 상당의 자금을 원자력연구소에 연구비로 매년 의무적으로 출연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 다. 그 자금은 지금 와서는 1년에 1,500억 원 규모로 늘어났어요. 연구소는 연간 1,500억 원 규모의 연구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러한 자금이 토대가 되어 원자력연구소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크나큰 성과 를 달성하였다고 봅니다. 2.2 원전사업 이관에 대한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입장 (장인순 박사 회고) 그때 우리 연구소는 그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원자력은 다른 분야의 일반적 연구나 비즈니스와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화
75 이용 관점에서 자원에너지가 아닌 기술에너지 확보라는 국가 장기 에너지 전략적 측면, 국제 핵비확산 정책과 관련되어 국제 규약 준수와 국제 사찰을 받아야 하는 측면, 안전성 확보가 비즈니스 이윤 창출보다 중요하고 이를 위 해 고도의 기술력을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측면, 독점 사업인 동시에 판매처가 하나뿐이어서 사업 경영이 극히 단순한 반면 기술경영이 보다 중 요한 특성 때문에 연구소도 관리할 수 있다는 측면 등등이 차별화되는 점입 니다. 따라서 연구와 사업을 통합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단점보다 더 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례를 불란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필순 소장님이 불란서의 CEA와 같이 원자력 분야의 행정과 연구와 사업이 모두 통합된 형태의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하시 는 것도 이러한 논리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 백년대계란 측면에서의 깊은 성찰과 연구 과정도 없이 힘으로 밀어붙여 해결하려 한데에 대해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불만을 표출했던 것입 니다. 지금도 원자력 사업추진이 원활하지 않고 마찰을 야기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산자부와 과기부 간의 심각한 갈등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합 리와 깊은 성찰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부처 간 이기주의가 앞을 가리고 있어요.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사업을 가지고 있으면 한전에 연구비 를 의존하는 데서 초래하는 한전과 정부의 불합리한 간섭을 피하고, 연구비 를 스스로 벌어서 충당함으로서 연구의 자율성과 생산성이 제고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경험한 실례를 들면 제가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방사능 폐기물팀을 이끌고 한전에 넘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방사능폐기물팀은 돈을 쓰는 팀이고 골치 아픈 문제를 안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찬밥 신세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러나 NSSS 설계팀은 돈을 버는 팀이고 기술이 원전 운영에 도움이 되니까 넘어가서 대접을 받는 거예요. 폐기물팀은 지금도 굉장히 힘 들어하고 있어요.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면 방사능폐기물 사업이나 NSSS 사업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며, 국민의 관심사로 보면 오히려 방사능폐기물 쪽이 더 큰 관심 사라는 것은 명명백백한데 이윤 지상주의의 비즈니스 측면에서 보면 전혀
76 다른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된 것입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나 면 그러한 결정이 과연 타당했는가는 분명히 판명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2.3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본부장, 한전으로 이전 (이익환 박사 회고) 연구소에서 한전으로 이전될 직원 156명은 정부방침에 따라 하루아침에 전직이 되었습니다. 약 6개월의 협상기간을 거쳐 한전에 이전되었는데, 협상 주요골자는 정부가 제시한 연구소 정년을 보장받는 등 개인 불이익이 없도 록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 졌습니다. 대부분의 직원이 이전반대를 주장하였 으나 정부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누누이 설명하여 당시 장인순 환경관 리센터 소장을 주축으로 이전이 되었습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당시 굴업 도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사업에 민간 복지재단에 출연한 500억원을 회수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두 가지 일의 책임을 맡은 나로서는 해결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민간인의 덕적도 복지재단에 넘어간 기금 500억원을 회수 하기까지는 개인적으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결국 이 기금은 우여곡절 끝에 이자를 포함하여 약 520억원을 모두 회수하는데 성공 하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김대중 정부의 인수위에서 방사성폐기물관리 기금 사용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하려 하였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칭 찬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인력이관이 되고 3년이 경과되지도 않아 이전된 직원에 대한 한전 의 대우는 냉랭하기만 하였는데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주면서 개인을 타 근무지로 발령하는 등 회유하게 되고 결국 이전할 당시 합의한 고용조건 은 모두 포기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한사람 각 개인의 실망은 얼마나 컸겠으 며 이전에 앞장서야 했던 관리자를 얼마나 원망하였겠습니까. 나는 같이한 156명에 대해 이전합의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언제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협상을 이끌어 내게 해 주었지만 결국 정 부에 대한 불신으로 남게 된 사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부는 앞으로는 이와 비슷한 일에 대해서는 보다 성의 있고 후속조치도 챙겨줄 수 있는 아 량과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77 참고자료 1. 참고문헌 1. 한국원자력연구소 4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소 발행(2001.7) 2. 사진으로보는 한국원자력연구소40년(1959~1999),한국원자력연구 소 발행(2000.4) 3. 한국전력기술30년,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발행( ) 4. 과학기술30년사, 과학기술처 발행(1997.6) 5. 21세기 우리의 선택 - 원자력기술 자립의 길목에서, 한필순 편저, 대덕클럽 발행( ) 6. 과거속의 미래, 이익환 저, 누리기획 발행( ) 2.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회의 사진 한필순 ( 韓 弼 淳 1933년생) 1957 공군사관학교 졸업 1969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물리학 박사 공군사관학교 물리학과 교관 국방과학연구소 인문공학 연구실 연구부장, 탄약 개발부장, 유도탄 개발부장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 소장, 한국핵연료(주) 사장, 김세종 ( 金 世 鍾 1941년 생) 1964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1968 원자력청 원자력연구관 동력자원부 발전과장, 원자력발전과장, 전력국장 1994 상공자원부 전자정보산업국장 1995 과학기술처 원자력실장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장 장인순 ( 張 仁 順 1940년 생) 1964 고려대학교 화학과 졸업 1976 카나다 Univ. of Western Ontario 화학과 박사
78 한국원자력연구소 핵화공연구실장, 화공재료연구부장, 신형로ㆍ핵 연료개발본부장, 원자력연구개발단장, 원자력환경관리센터소장 한국전력공사 부설 원자력환경기술원 원장 한국원전연료(주) 생산본부장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임한쾌 ( 林 漢 快 1935년 생) 1962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한국전력 원자력부 품질관리과장, 월성원자력건설사무소 부소장, 신규사업추진처장, 품질관리실장 한전기술연구원 원자력연구실장 남장수 (1946년 생) 1968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원자력청 원자력발전과 근무 한국원자력연구소 핵주기계통분석실장, 원자력정책연구부장, 원자력환경관리센터 사업본부장, 관리본부장, 다목적연구로 건설본부장,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 원자력환경기술원 기술관리실장, 사업추진실장 박승덕 ( 朴 勝 德 1933년 생) 1956 육군사관학교 졸업 1971 캐나다 Ottawa 대학 기계공학 박사 육군사관학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한국기계연구소 소장 과학기술처 기계연구조정관, 연구개발조정실장, 기술정책실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이승구 ( 李 昇 九 1946년 생) 1972 한양대학교 금속공학과 학사 과학기술처 과장, 국장, 국립중앙과학관 관리관 과학기술부 차관 2003-현재 과학술인공제회 이사장
79 강박광 ( 姜 博 光 1941년 생) 1966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학사 1973 캐나다 월터루 대학 화학공학과 박사 과학기술처 심의관, 기술협력국장, 원자력국장, 연구조정관 주미대사관과학관, 연구개발조정실장 기초과학지원연구소 소장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호서대학교 교수 이익환 ( 李 翼 煥 1943년 생) 1972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 학사 한양대학교 원자로공학과 석사 미국 Western New England College (Engineering 1학기 이수) 한국원자력연구소 선임연구원 현대건설 원자력 부장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로계통설계 사업관리실장, 미국 윈저 사무소 장, 중수로사업부장, 방폐장 건설추진본부장 한전/한국수력원자력(주) 원자력환경기술원 사업추진실장 박시열 ( 朴 時 烈 1932년 생) 1956 부산수산과대학 수산제조학과 학사 1973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일반행정학 석사 원자력청 원자력국 원자력발전과장 과학기술처 원자로과장, 원자력국장, 원자력위원회 상임위원 IPS 서울 사무소 소장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전문위원
80 김세종 한필순 이승구 임한쾌 박승덕 장인순 강박광 남장수 이수웅 <사진 6> 1차 워크숍참가자 회의사진
81 3. 원전기술자립의 초석이 된 영광 3 4호기 사업추진 주요일정 <표 1-1> 영광 3ㆍ4호기 사업추진 주요일정 장기 전원개발계획 수립 (11호기-1990년 9월, 12호기-1991년 9월 준공) 원전 11 12호기 추진방침 협의(동자부) 장기 전원개발계획 수정 (11호기-1993년 3월, 12호기-1994년 3월 준공) 한전의 신규 발전소 건설사업 추진 기본방침 결정 표준원자력발전소 설계사업추진계획 확정(동력자원부), 기관별 역할 분담 제7차 장기전원개발계획 확정(경제기획원) - 원전 11호기 : 1995년 3월 준공, 원전 12호기 : 1996년 3월 준공 - 원전 11 12호 사업추진은 관련기술의 전수를 전제로 추진할 것을 결정, 관련기관별 역할 분담 원전 11 12호기 건설기본계획 확정 (한전 제9차 이사회 의결) 발전로계통사업부 발전(33명) 제 214차 원자력위원회에서 한국원자력연구소의 NSSS 계통설계 기술전 담 결정 원자로계통설계 발주의향서(L/I) 접수 대 외국하도급 계약자 입찰안내서(ITB) 발급 [NSSS 공동설계(JSD) 및 기술도입(TT) ITB 동시발급], (WH, C-E, FRA, AECL, KWU, MHI), 해외 응찰서 접수, 평가 착수 NSSS 4개사 : WH, C-E, FRA, AECL NSSS 설계단 조직, 국내훈련 착수 계약협상 대상자 선정 발표, 협상 착수, - NSSS/Fuel : C-E, A/E : S&L, T/G : GE NSSS 설계요원 사전 해외 훈련계약 C-E와 체결 NSSS 설계요원 해외 훈련(6개월간) 착수, Windsor 사무소 발족, NSSS : 37명, Fuel : 11명, 한전 : 5명 원전 11 12호기 관련계약 서명 조인식 APT ( 일자)접수, 본 사업 착수 기술도입계약(TT) 정부 신고 및 발효 공동설계계약(JSD : Joint System Design) 정부승인 획득 및 발표 계통설계계약(SD : System Design) 발효 원전사업단 발족 JSD(13명) 및 TT(2명)요원 C-E에 추가 파견 제 1차 PRM(8.25 ~ 8.30), KEPCO 기술도입계약 Group B(22명)요원 C-E 파견 사업명 개칭 : 원전 11 12호기에서 영광 원전 3 4호기로 변경
82 영광 3 4호기 NSSS LEVEL-Ⅱ 공정 확정 원자력안전센터 요원 훈련(6명, 10주) 설계센터 대덕이전 계획(Transition Plan) C-E와 합의 기술도입계약 기술비 보상을 위한 계통설계 계약변경 영광 3 4호기 예비안전성분석보고서(PSAR) 원자력안전센터 제출 설계센터 이전에 따라 C-E사 대덕사무소 개소식 건설허가(CP) 취득 원자로계통설계 기술자립 세부실천계획서(Rev. 1) 제출 원자로계통설계 기술자립 1차 평가보고서 제출 원전건설 기술자립 간담회 원전건설 기술자립계획 보완설명 및 간담회 영광사무소 개소 최종안전분석보고서(Rev. 0) KINS 제출 원자로계통 및 초기노심설계분야 기술자립 실천계획서(Rev. 2) 제출 영광 4호기 성능보증시험 완료 영광 4호기 상업운전 착수 제1차 Strt-p Progress Review Meeting(4.1~4.3) 영광 3호기 Cold Hydro Test(11.10~11.18) 영광 3호기 Hot Functional Test(3.28~5.21) 기술자립 Workshop, 한전기술연구원(대덕) 영광 3호기 운영허가(OL) 취득 및 Initial Fuel Loading(9.9~9.14) 영광 4호기 Cold Hydro Test(9.28~10.7) 영광 3호기 계통병입 영광 4호기 Hot Functional Test(2.13~3.25) 영광 3호기 성능보증시험 착수 영광 3호기 성능보증시험 완료 영광 3호기 상업운전 개시 원자로계통설계 기술자립 자체평가보고서(제2차) 제출 영광 4호기 운영허가(OL) 취득 및 Initial Loading 영광 4호기 계통병입 원전건설 기술자립 전문평가단 평가용역지원(1995.7~1995.9) 영광 4호기 보수작업 및 영광 4호기 Fuel Constitution Test 수행 원전기술자립 최종평가 Symposium 개최, 한전 영광 4호기 성능보증시험 착수
83 4. 국내 원자력발전소의 외국 설계담당자 <표 1-2>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 원자력발전소의 설계담당자 호기 위치 용량(MWe) 원자로 계통설계 BOP 종합설계 고리 1 고리 2 경남 고리 Westinghouse(미국) Gilben 고리 3, 월성 AECL(캐나다) AECL(캐나다) 경북 월성 월성 2,3,4 713 AECL(캐나다) AECL(캐나다) 영광 1, 2 전남 영광 950 Westinghouse(미국) Bechtel(미국) 울진 1, 2 경북 울진 950 Framatome(프랑스) Framatome/ Alstome(프) 영광 3, 4 전남 영광 1,000 ABB-CE/ 한국원자력연구소 KOPEC/S&L 울진 3, 4 경북 울진 1,000 한국원자력연구소 KOPEC 5. 국내 원자력발전소 현황 <표 1-3> 국내 원자력발전소 현황 호기 위치 용량(만kw) 원자로형 상업운전일 고리#1 고리#2 고리#3 고리#4 신고리#1 신고리#2 신고리#3 신고리#4 월성#1 월성#2 월성#3 월성#4 신월성#1 신월성#2 영광#1 영광#2 영광#3 영광#4 영광#5 영광#6 울진#1 울진#2 울진#3 울진#4 울진#5 울진#6 신울진#1 신울진#2 부산시 기장군 울산시 울주군 경 북 경주시 전 남 영광군 경 북 울진군 경 북 울진군 *주 : ( )내는 상업운전 예정일 가압경수로 가압경수로 가압경수로 신형경수로 신형경수로 가압중수로 가압경수로 가압경수로 가압경수로 신형경수로 ( ) ( ) ( ) ( ) ( ) ( ) ' ( ) ( )
84 6. 최초의 한국형표준원전이 된 울진 3ㆍ4호기 건설사업 추진 일정 <표 1-4> 울진 3ㆍ4호기 건설사업 추진 일정 일 자 주 요 일 정 ( ) ( ) 전원개발계획 확정(정부) 건설 기본계획 확정 주기기 공급, 종합설계 계약체결 주설비 시공계약 체결 공사계획 인가(정부) 본관 기초굴착 착수 건설허가 취득 한국 표준형 원전(3호기) 최초 콘크리트 타설 4호기 최초 콘크리트 타설 한국 표준형 원전(3호기) 원자로 설치 한국 표준형 원전(3호기) 전원가압 4호기 원자로 설치 한국 표준형 원전(3호기) 원자로 계통 상온수압시험 한국 표준형 원전(3호기) 고온기능시험 한국 표준형 원전(3호기) 최초연료장전 한국 표준형 원전(3호기) 상업운전 개시 4호기 최초연료장전 4호기 상업운전 개시
85 7. NSSS 전담기관 관련 서류를 박정기 사장에 보고한 결재서류
86 - 68 -
87 - 69 -
88
89 제2장 한국선박연구소 설립과 조선강국이 되기까지의 과정 분석
90
91 제1절 한국선박연구소 설립과 조선기술 발전 개요 우리나라의 조선공업이 실질적으로 시작된 것은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 발표된 1973년부터라 할 수 있다. 그전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이 잠 수정을 건조한 사실이 있는 인천기계제작소, 부산 영도의 대한조선공사, 진 해의 해군공작창 등이 있었으나 기술수준이나 생산량이 매우 미미할 정도였 다. 제3차 5개년 계획에는 중공업발전을 위한 4대 핵공장 건설 사업 (울산 조선소, 포항 주물선, 창원 특수강, 창원 중기계)이 들어갔으며 그에 울산의 현대조선소 건설 사업이 포함되어 포항제철과 더불어 우리나라 중공업의 근 간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공업 발족 후 35년이 지난 현재 한국은 선박 수주량, 건조량, 수주잔 량 등 3개 지표에서 모두 세계 1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10대 조선소 중 한국이 7개사(현대 重, 대우조선해양, 삼성 重, 현대미포, 현대삼호, STX조선, 한진 重 )를 점유하고 있다. 조선산업은 2006년 현재 연간 수출액 250억 달러, 고용 10만명(기자재 포함 시 20만명)의 매머드 산업으로 발전 했다. 1. KIST의 조선공업 발족 배경 및 과정 우리나라에서 조선공업이 육성되어야 한다는 그 간의 노력은 60년대부터 줄곧 제기되었으나 1969년경에 김훈철박사를 중심으로 한 KIST 내의 조선 분야 전문가(후일의 한국선박연구소 설립 주역들) 몇 명에 의해 그 해결방법 이 주장되었으며, 그들이 작성한 조선공업육성계획이 경제개발 제3차5개년 계획에 포함됨으로서 근대적 의미의 조선공업이 우리나라에 꽃피게 되었으 며 또한 선박연구소도 설립되어 조선공업을 뒷받침했다. 조선공업은 김훈철 박사를 포함한 몇 명의 출연연구소 전문가의 헌신적 노력으로 국가 전략산 업 계획으로 확정되었고 자연발생적이 아닌 계획적인 출범이었다는 것과 출 연연구소에서 아이디어가 출현하여 산업발전을 선도해 갔다는 것이 매우 특 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92 2. 국가연구기능의 태동 1968년 7월 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조선기술연구실(실장: 김훈 철, 후에 조선해양기술연구실로 개칭)이 설치되면서 선박과 해양공학에 관한 체계적인 기술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연구 인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연구시설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당시의 연구실 기능은 본 격적인 연구개발 보다는 선진 조선기술의 획득과 응용에 치우쳐 있었다. 정부는 1971년 1월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선언과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에 의해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통한 경제성장을 위한 5개의 전략산업기술 연구기관 설립을 추진했는데 그 중 하나가 선박연구소 이다. 동 계획에 의해 선박연구소는 선박설계, 박용기관, 조선, 해양공학 분 야의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중추적인 기관으로 설정되었다. 초기에는 선형시 험수조 건설을 위해 UNDP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1973년 1월 140만 달러 규모의 UNDP 자금지원이 결정되었고, 장기 조선공업 진흥계획 이 확정됨에 따라 이 분야의 연구기반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1973년 2월 선박연구소 설립계획 초안이 수립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선 박연구소 설립에 관한 사업계획서 를 확정하였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이사 회에서 부설 선박연구소와 해양개발연구소의 설치 운영 규정을 제정하고, 동 년 10월 30일에는 KIST 내에서 부설로 선박연구소(소장: 윤정흡)가 공식 발 족되었다. 당시 정부는 새로 발족한 선박연구소와 해양개발연구소는 물론, 표준연구 소, 전자통신연구소 등의 국가 연구기관을 국책사업으로 추진 중이던 연구학 원도시(충남 대덕군)내에 입주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75년 3월 22일 기 공식을 갖고 연구소 부지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5년에 걸쳐 총 133,365평을 확보하게 되었다. 1976년 3월 대덕연구단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소의 적극적인 육성을 지시하였다. 그 후 1976년 5월 15일 선박연구소와 해양개발연구소 가 통합되어 KIST 부설 선박해양연구소(소장: 윤정흡, 부소장: 이병돈)로 변 경되었고, 이어 박대통령 지시에 의해 관할부처가 상공부로 변경되면서 동년 11월 4일 독립법인체인 한국선박해양연구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연구소 최초의 대형 연구시설로서 1976년 1월 골조공사가 시작된 선형시
93 험수조동은 예인전차 등 다수 장비를 그 해 12월까지 설치한 후 1978년 3 월에 완공하였다. 특히 선형시험수조는 길이 216m, 폭 16m, 깊이 7m에 달 하는 수조에 물을 채웠을 때 받는 압력과 철저한 방수를 감안한 고난도 공 사였다. 이 수조는 국제 수준의 연구 활동과 기술교류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주춧돌이 되었다. 3. 한국선박연구소 설립 선박연구소와 해양개발연구소가 통합한지 2년이 채 되지 못한 1978년 초 두 기관의 재분리에 대한 검토가 시작되었다. 해양연구기능이 중공업분야와 직접적인 연관이 적다고 판단한 상공부는 과학기술처와 협의, 1978년 3월 선박해양연구소 이사회에서 해양연구소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로 분리 하고, 선박분야는 한국선박연구소(소장: 김극천)로 발족토록 하였다. 당시 연구소의 주요 사업은 국내 조선소와 해운업계 등의 요청에 따른 기 본설계사업과 신건조 선박의 안정성 미흡 및 성능저하 등의 문제점 해결을 위한 설계도면 검토사업, 선체공작기술, 생산관리기술 등 조선 생산성 향상 을 위한 핵심 요소의 연구개발 등 주로 조선소 기술지원을 위한 사업이었다. 4. 한국기계연구소 대덕선박분소로 통합 1980년에 들어서 정부 출연연구소의 통폐합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고, 많 은 연구기관이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와중에 한국선박연구소(소장: 김훈철) 또한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와 통합되면서 1981년 1월 5일 한국기계연구 소 대덕선박분소(분소장: 김훈철)로 축소되었다. 통합 후 조직은 분소장 산하 에 선박기술부와 선박연구부, 연구개발실, 수조운용실로 대폭 축소되었다. 당시의 주요 사업으로는 고성능 선박과 경제적인 선박의 개발, 고속 추진 기 개발, 조선 생산성 향상기술 개발과 지원, 선박 및 해양구조물의 구조 진 동평가, 디젤기관 등 기기의 개발, 용접기술 개발과 전문기술자 교육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1978년 12월에 착공한 바 있는 캐비테이션 터널이 1982 년 7월 완공되었고, 방화방폭시험동, 구조시험동, 용접시험동 등 신규 건설 사업이 완료되었으며, 선용품시험동의 엔진 테스트 설비가 갖추어지고, 박용 기기동의 건설이 착수되었다
94 5.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해사기술연구소 개편과 폐쇄 1989년 10월 10일 한국기계연구원 이사회는 대덕선박분소를 부설 해사기술 연구소(소장:장석)로 발족시켜 체제를 개편했다.발족 당시의 조직은 해양기 술연구부,해상기계연구부,구조용접연구부,선박연구부의 4개 연구부와 16개 연구실,해사경제실 등 6개 기술 및 행정지원 독립실로 구성되었으며,정규 인력은 모두 258명 이었다.이 시기의 주요 연구 성과로는 선박의 주문에서 부터 설계와 생산 등 모 든 공정을 일관화 하는 선박설계생산전산시스템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 기술의 개발 보급은 우 리가 일본의 조선업을 따라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시기에 는 1988년에 착공한 박 용기기동이 완공되었고 <사진 7> 해사기술연구소 현판식( ) 해양공학수조 건설사업 비의 확보 등 연구시설 확충과 신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1년 10월 과학기술처는 기계연구소의 확대 개편과 관련하여 해사 기술연구소를 기계연구소 내의 선박연구센터 로 통합하고, 일부 시설과 인력을 기계시스템엔지니어링 연구에 활용키로 결정하였다. 그 사유로는 대일 기계류, 부품 열위를 극복하고 선진 7개국권 진입을 위한 핵심기계기술 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계연구소의 확대개편에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1년 10월 상공부와 선박업계는 과기처 개편(안)이 부설연구소 형태 폐지로 인한 검사 전문기관으로서의 국제 공신력 실추 등을 이유로, 반 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일부 기계 공통 이용분야는 조정하되, 연구소 형태는 부설형태를 유지하고, 민간업계의 출연을 연차적으로 확대하여 1996년에는 독립 연구소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은 1993년 4월 한국기계연구원 이사 회는 부설 해사기술연구소를 내부 조직인 선박해양공학연구센터(소장: 양승 일)로 흡수 변경되도록 하여서 선박연구소의 운명은 기구하게 끝났다
95 이와 같이 우리나라 조선공업이 세계 1위로 발돋움하기까지는 많은 난 관과 곡절이 있었음. 특히, 관련 과학자들의 신념에 따른 건의와 정부의 강력한 정책에 따라 연구시스템이 구축되고 정책 및 예산의 뒷받침과 연 구기관장 및 연구원들의 피나는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으로 다음 절 부터는 당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인사들의 회고를 중심으로 엮어 나갔음. (증언자들의 워크숍, , 과우회 회의실) 제2절 선박연구소 설립 선행 조건으로 출범한 조선공업 1. 연구소 주도로 출범한 조선 공업 (김훈철 박사 회고) 본인과 몇 명의 KIST(후일 한국선박연구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조선공 업의 발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정부 출연연구소들에서 는 관련 공업 분야의 계획적 출범과 긴밀히 연계된 사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조선공업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우리가 기본계획 을 만들고 이를 정부가 수용하여 인위적으로 계획적으로 출범된 것입니다. 본인은 1968년 10월 미국에서 KIST로 유치되어 69년 2월까지 선박연 구소육성계획 을 만들었어요. 조그맣고 파란 책자에 기록된 그 육성계획을 당시 KIST 소장이었던 최형섭 장관에게 갖다 드렸는데, 최형섭 소장은 이 거 꼭 하고 싶으면 조선공업을 먼저 육성하시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다
96 른 몇 사람들은 당신 미쳤어! 라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1.1 조선공업 5개년 육성계획의 수립 그래서 석인영( 石 寅 永 ) 씨와 함께 둘이서 1969년에 작성한 것이 조선공 업 5개년육성계획 개요 이며 그 핵심내용은 우리나라의 선박수송 물량 증 가 추세 예측으로 물량과 수송비를 함께 추산한 것입니다. 특히 국내선으로 수송하는 경우와 외국선으로 수송하는 경우를 비교하여 수송비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부각했습니다. 그 계획서를 가지고 관계요로를 방문하여 설득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그 당시 청와대의 경제수석과 상공부의 조선과장을 찾아가서 설명했 으나 잘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경제수석은 과학기술 분야도 담당하 고 있었으며 두 분은 본인의 일 년 선배인데도 설득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큰 돈이 수송비로 해외로 빠져나갈 것인데 그중에 4분의 1만 국내선을 활용하게 된다면 조선공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라고 주장 했습니다. 또한 경제과학심의위원회의 위원장을 찾아가 설명했더니 이것은 하기는 해야 하는데 이 계획 내용만 가지고는 안 된다. 라는 반응을 보였습 니다. 1.2 기계공업 육성방안의 일부로 시도한 조선부문 계획 그래서 그냥 주춤하고 있을 때인데 재미 전문가인 해리 최(Harry S, Choi, 崔 榮 華, 일본 태생) 박사, 김재관( 金 在 官 ) 박사, 이경서( 李 景 瑞 ) 박사, 남준우 ( 南 俊 佑 ) 씨 등으로 구성된 KIST 연구팀이 제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반 영할 한국기계공업육성 방안 을 1970년에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100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방을 잡아놓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 다. 그들은 저를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은 장사가 잘 되는 산업분야가 드물어 기계를 팔아 돈을 버는 계획을 작성 중인데 조선공업이 어떠시오?, 자료를 가져와보세요 라고 해서 불시에 전달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의 후배인 정경조( 鄭 敬 朝 )씨와 함께 조선 부문의 기계공업육 성 방향 작성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경조씨는 아주 머리가 샤프하 고 나중에 미국 터프트대학(Boston 소재 Tuft University, Harry Choi 박 사가 교수이었던 곳)에서 Choi 박사의 추천에 의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97 현재는 목사가 되어 있는 친구입니다. 기계공업육성 방향 작성 작업의 주 역은 후배인 이경서 박사, 동기생인 김재관 박사, 남준우 씨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은 이 세 사람이 우리가 작성한 작업 내용을 저녁마다 검토해서 퇴자를 놓는 일이었습니다. 작업 결과를 가지고 가면 틀렸어! 라는 반응이 었습니다. 우리가 심혈을 기우려 낮에 만든 자료를 가지고 가면 저녁 10시 쯤 시작해서 새벽 2시쯤까지 검토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래서 안 되고!, 저 래서 안 되고! 그러니까 다시 해!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정경조씨와 둘이서 다시 뜯어 고치는 작업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데 정경조씨는 굉장히 무서운 친구로서 그 다음날 오후까지 매번 수정작업 을 완료해 놓았습니다. 정경조씨는 그 때 대학을 갓 나온 젊고 머리 좋은 친 구였는데 이 친구가 이튿날 낮까지 잠도 자지 않고 작업을 끝내고 나서 밤 까지 눈을 붙였고 나는 낮에 잠을 잔 후에 밤에 가서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때 조선부문계획의 작업을 우리가 담당했지만 앞서 언급 한 주역들의 검토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핵심 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은 계획 입안 방법을 제대로 아는 전문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장 전 망은 어떠하며, 항만은 어떠하며, 투자규모는 어떠하며, 부실기업이 될 가능 성은 어떠하며 등등 매우 광범하게 검토했습니다. 일단은 그 사람들을 통과 해야 기술적인 검토는 실질적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경서 박사는 특히 머리가 좋아서 그를 통과하려면 하루 이틀 걸려서 철저히 공부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저녁을 먹으러 술집엔 자주 갔어요. 그 때 내 나이 가 서른다섯 살이었는데 술집에서 코피를 쏟고 비실비실 쓰러지기도 하니까 여자아이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있느냐? 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런 정도로 열심히 일하여 계획서를 만들었는데 그게 우리나라의 현대조선 설립을 제안한 최초의 계획서가 되었습니다. 1.3 국가가 접수한 유일한 보고서 : 신 조선소 설립 간이 사업계획서 그에 이어 1970년에 저와 정경조씨가 함께 작성한 것이 경제기획원 이름 으로 된 新 造 船 所 設 立 簡 易 事 業 計 劃 書 인데 20~30 페이지 정도의 보 고서로서 국가가 접수한 유일한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는 원래 두 가지로
98 작성되었는데 하나는 조선소 설립 계획 위주의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선박 용 기자재 산업 육성 계획까지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자재 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택하도록 건의했고 정부는 전자만 택했습니다. (기계 공업 육성계획과의 연계가 바로 선박용기자재공업인데 이것의 포함이 어려 우니까 당분간은 빼는 것이 되었고 한국선박연구소에서는 1979년부터 건물 을 짓고 이것을 다시 챙기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능은 1993년에 한 국기계연구소에서 다시 없애고, 지금은 또 다시 부산의 한국해양대학에 생기 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1.4 장기 조선공업 진흥계획 : 대 충무조선지역 설정안 그다음에 작성한 것이 1973년에 작성된 長 期 造 船 工 業 振 興 計 劃 - 大 忠 武 造 船 地 域 設 定 案 이었습니다. 거의 열개의 조선소와 하나의 비행장이 포 함된 이 계획서는 김재관 박사, 저 김훈철, 장석 박사 및 김현왕 박사가 작 성했습니다. 김재관 박사는 그 때 이미 상공부 차관보로 발탁되어 있었습니 다. 김현왕 박사는 현재 미국 토리도(Ohio에 있는 Toledo University)대학 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1.5 거제도 조선소 후보지 물색을 위한 현지 실사 이순신 장군이 500여 년 전에 거북선으로 왜적을 무찌른 역사적 충무지역 에 대규모 조선소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 위하여 저와 김재관 박사 는 현지 실사를 갔습니다. 그 당시 거제도는 보안지역이어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출입에는 반드시 신분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김재관 박사가 신분증을 안가지고 와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저의 신분증을 제시하고 김재관 박사는 저를 수행하고 온 사람으로 위장하여 겨우 검문소 를 통과했습니다. 대 충무조선지역이라는 단어는 김재관 박사가 고심 끝에 저와 합작으로 만들어 낸 단어이고 상공부에서는 이것을 충무공 탄신 제428 주년 기념일인 그 해 4월28일에 빨간 동백꽃 사진과 함께 발표했습니다. 거제도에 들어가서는 관광호텔에서 큰 자동차 한대를 렌트해서 하루 내내 조선소 후보지가 될 수 있는 곳을 샅샅이 조사했는데 10 군데를 찾아가 보 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거제도는 길이 무척이나 나빠서 하루 종일 몰고
99 다니면서 거제도를 한 바퀴 돌았더니 자동차가 고장나버렸어요. 그래서 2만 원에 빌린 차인데 2만원을 더 주고 해결했습니다. 그 당시 연구원 월급이 3 만원 정도였으니 거액을 주고 해결한 것이지요. 장석 박사는 거제도에 같이 가지도 않았고 가본 일도 없는 사람인데 떠나 기 전에 5만분의 1 지도를 보고서는 여기는 지형이 이러 이러하게 생겼고, 토지는 어떠하고, 해변의 바닷물은 이렇게 깊어질 것이라는 등 상세한 설명 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는 사실 5만분의 1 지도는 일반인은 구하지도 못할 때인데 KIST 명의로 구했어요. 그래서 실제로 가보니까 설명과 일치해서 그 의 전직 육군 수송 장교 실력에 놀랐습니다. 1.6 선박연구소 부지 물색 그다음엔 1971년에 선박연구소 부지를 물색하려고 장석 박사와 서울대학 의 황종흘( 黃 宗 屹 ) 교수님과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고 마지막에 대덕에 갔습니다. 선박연구소 부지로서의 핵심 조건은 모형 선박을 만들어 시험할 400미터 크기의 수조를 건설할 수 있는 암반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덕에서는 선박연구소의 부지로 잠정 결정되어 있었던 동쪽지역부터 갔어 요. 장석 박사가 그곳을 둘러보더니 안돼요, 공급해야할 용수의 수질에 문 제가 있고 수조 건설 조건에 부적합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최형섭 장관께 가 서 예정된 선박연구소 땅이 부적합하니까 옮겨야 합니다. 라고 말씀드렸더 니 아, 그럼 옮겨 라고 하셔서 대덕연구단지전체의 계획과 함께 지금의 연 구소 자리인 대덕연구단지의 서쪽으로 옮기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연구소 수 조 자리는 남향으로는 둘 자리가 나오지 않아 산의 북쪽에 두게 되었는데 400미터 수조를 건설할 자리가 북향 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향 쪽은 지금의 표준연구소가 위치한 자리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가 KIST에서 조선해양기술연구실장에 재직할 때 에 조선공업계획을 작성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국가에서 조선공업을 제3 차 5개년 계획에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1.7 조선공업 추진 당시의 국내외 여건 그 때 조선공업을 추진하게 된 우리나라의 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
100 째는 그 당시 중동에 진출했던 건설사들이 중동 건설 특수 기간이 종료됨에 따라 철수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공사를 끝낸 후의 거액의 공사장비 처리 문제가 제기되었어요. 그래서 그 장비를 회수하여 국내에서 계속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구상된 첫째 사업이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었고 그 사업이 끝날 즈음에 그 다음으로 구상된 사업이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포함 되는 공장 건설사업 즉 4대 핵심 공장 건설 사업이었으며 그에 현대조선 건 설 사업이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중화학 분야의 수출산업과 방위산업의 육성이었습니다. 경제개 발 제3차5개년계획 입안 당시에 상공부에서 차관보였던 오원철( 吳 源 哲 ) 씨 를 중심으로 수 십 가지의 공장육성계획을 추진하려했습니다. Harry Choi 팀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단어는 쓰지 안했지마는 그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 했습니다. 실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후에 청와대로 옮긴 오원철 수석은 후에 세운 다른 계획, 예로 창원공업단지, 구미공업단지 등에 우리 팀 보다 다른 KIST팀을 더욱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우리 팀은 중점분야를 찾기 위해 약 40여 가지의 수출 업종이 검토되었는 데 심지어는 타이프라이터까지 검토되었습니다. 자동차는 검토하다가 도중에 서 제외되었는데 우리 GNP 수준에서는 무리가 따르고 특히 멕시코에서 실 패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강계획(포항종합제철-KIST에서 김재관 박사가 주도)이 이미 되어 있었으니까 그다음으로 주물선, 특수강, 종합기계, 조선 등의 4대 핵심공장 건설도 수출과 방위산업에 연계되어 선정된 업종입 니다. 조선은 제일 마지막에 검토된 업종인데 중화학 제품을 실어서 수출하 기 위해서는 선박 건조가 꼭 필요했으며 선박용 기자재 공급이 주물선, 철 강, 종합기계 등의 타 중공업과 연계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김재관 박사가 금속재료 분야를 검토했는데 포항제철은 이미 건설되 어 있었기 때문에 주물선과 특수강을 집중 검토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경서 박사와 남준우 씨는 종합기계 분야로서 창원의 한국중공업(지금의 두산중공 업)을 검토했습니다 차 5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추진된 조선 사업 3차 5개년 계획에서 4대 핵심공장의 건설 예산에 약 2억5천만 달러가 책
101 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중에서 1억5천만 달러가 조선 프로젝트에 배 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중화학 제품의 수송 목적으로 선정한 조선 사업의 예산이 5개년 계획의 타깃이 되는 중화학 제품의 생산 공장 예산보다 커지 는 역전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조선 사업에 약 8천만 달러가 책정되었고 전체 사업의 예비비를 조선 사업에 묻어두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업 내용을 당시 경제기획원의 장관이었던 김학열( 金 鶴 烈 )씨에게 보고했는데 그가 듣고서는 아 됐어. 그 정도 규모의 돈은 이거 다 끝날 때 가 되면 우리 가지고 있을 거야 라고 하면서 그 계획을 쾌히 수용했습니다. 김학열 장관님은 과로로 이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고인이 되셨고 대통령께 서 현대조선소 기공식 연단에서 이름을 거론하시면서 그의 공을 치하하셨습 니다. 1.9 민( 民 ) 주도로 추진하기로 결정된 조선사업 : 현대그룹에 대한 어려운 설득 과정 대통령, 김학렬 씨와 황병태 씨( 黃 秉 泰, 그때 경제기획원의 차관보), 이분 들이 그때 내린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단 중의 하나는 5개년 계획을 민 주도 로 추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획은 국가가 세우지만 일을 추 진하는 것은 민간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 분야는 현 대그룹이 담당하게 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잡으려고 하는데 현대가 거부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안하겠다고 하는 현대에게 하라고 압력을 넣었더니 현대는 마지못해 7만톤 미만의 소형선박인 일반상선을 건조하겠다는 계획을 가져왔습니다. 그 사업 을 지금 현대자동차가 위치한 태화강 하구(당시 염포)에서 하겠다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한 내용의 조선 사업은 일본이 한국의 도전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한국 이 자기네들보다 한 단계 아래의 사업을 하기를 원하는 식의 조선 사업이었 습니다. 나는 일본 IHI가 대만과 브라질에서 그런 식으로 사업을 추진했는데 실패한 선례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안돼요! 라고 하면서 현대의 주장을 꺾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김학렬 씨에게 안 되는 이유를 자세 히 설명했더니 그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순순히 받아들인
102 배경으로는 내가 알기로는 정부가 그때 거의 98%의 투자비를 여러 가지 명 분을 붙여서 투입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현대가 돈 낼 것은 거의 없기 때문에 결정은 정부가 한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추측됩니 다. 후일에 현대가 주식지분을 전부 사들여서 자기 회사로 만들었지만 국가가 기업에 합법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방법은 다양하여 지금 현대자동차가 있 는 쪽에서 조선소로 넘어가는 도로공사를 현대에게 수주하게 한다든지 울산 의 방파제 건설공사를 수주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 이외 에도 장기 저리로 융자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국가발전을 위하여 명분이 있 다고 생각되면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있게 마련입니다. 현대조선은 그러한 국가적인 숨은 노력이 뒷받침되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일본사람들(Akaska/ 赤 扳 중공업국장)이 방한하여 먼저 물어 보는 것은 이거 정부가 하는 겁니까? 민간이 하는 겁니까? 라는 것이었습 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기술을 도와주고 있는 상대가 국가라면 도와 줄 수 있고 민간이라면 도와 줄 수 없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황병태 차관 보는 이것은 민간이 하는 것입니다! 라고 끝내 당당하게 얘기했습니다. 그 런데 이제 와서 보면 현대와 같은 민간 기업의 효율성을 그 때 도입한 것은 정부가 매우 잘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소형 상선 보다는 대규모 탱커에 먼저 도전하자고 끝까지 주장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는 우리가 조선 사업을 착수함에 있어 7만톤 미 만의 소형 일반상선을 건조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했습니다. 아니 다! 30만 톤 규모의 큰 탱커를 건조해야 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은 기술적으로 보면 탱커가 훨씬 쉬워요. 탱커를 건조하는 것은 좀 규모가 커 서 그렇지 자동차에 비하면 트럭과 같은 것이고 일반상선은 만들기 어려운 승용차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현대 사람들은 그 얘기를 이해하지 못 하 고 나한테 와서 왜 당신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 큰 탱커를 건조하자고 주장하느냐. 라고 따졌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의 2년 선배가 되는 정태구( 鄭 泰 耈 ) 전무였습니다. 현대는 그를 보내서 압력을 가하고 설득하려 했는데 나는 끝끝내 안 들었어요. 그 후 일본에 갔을 때 IHI사의
103 Hasegawa( 長 谷 川 )부사장이 아가사가에 기생파티에 까지 초대해서 설득을 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들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기획원의 김학렬 씨와 황병태 씨는 내가 하는 얘기는 그 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대의 주장은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계획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꼼꼼히 따졌습니다. 선종이나 수요예측은 물론, 왜 기존의 조선공사가 있는데 새로운 조선소를 건설해야 하는가? 국제경쟁 력 확보가 가능한가? 라는 등 매우 치밀하게 챙겼습니다. 조선공사의 남궁련( 南 宮 練 ) 회장은 자기 밑에 있는 오세윤( 吳 世 允 ) 상무와 정해직( 丁 海 稷 ) 전무를 나에게 보내서 조선호텔에서 최고급 요리인 뉴욕 스 테이크로 대접하면서 조선공사가 담당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는데 그것도 거절했습니다. 기존의 조선공사로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조선소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무지무지하게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정부는 나의 주장을 받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런 일을 할 때 보면 결국은 정부의 예리한 판단력이 매우 중요해요. 그 때 우리 KIST 팀의 이야기를 들어준 주역은 김학렬 장관(후일에 부총 리)이었습니다. 김학열 씨는 특히 수재인 이경서 박사를 신임했습니다. 또한 김학렬 씨는 이경서 박사의 아버님과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저놈들은 절대 거짓말 안해 라고 신임하면서 결국은 유능한 수재를 국가가 활용한 거예요. 그 때 나는 책임연구원이었고 이경서 박사는 젊은 연구원이었으나 아무튼 가장 샤프한 친구였어요. 이 예기를 특히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국가는 유능한 사람들의 주장을 들 어 줄 수 있는 예리한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정부 출연 연구소에는 아이디어를 가진 수재들이 많아요. 연구소 쪽에서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저렇게 해야 됩니다라고 아이디어를 내지만 지금은 우리 정부가 그 것을 잘 들어 주질 않고 예리한 판단력을 구비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그 때 국가 최고 결정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조선공업 계획과 관련한 회의 를 청와대 본관에서 직접 주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회의에 이후락 씨, 김 학열 씨, 남궁련 씨, 최형섭 KIST 소장 등이 초청되었는데 최형섭 박사는 나를 그 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04 1.11 박정희 대통령께 일본하고는 안 된다고 주장 그때 나는 작은 자동차를 내가 직접 운전하고 갔는데 청와대 경호원들은 나를 운전기사로 보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나 겨우 설득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그 회의에는 회의에 초대된 사람들 6명 이외에 삼군참모 총장들과 관련 비서관들도 뒤에 배석했습니다. 조선계획에 관한 브리핑은 황 병태 차관보가 했습니다. 그런데 회의를 마치고 대통령이 일어나면서 이후락 ( 李 厚 洛 )씨 보고 이거 일본하고 잘 얘기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 어나고 있는 대통령에게 잠깐만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라고 했습니 다. 그랬더니 아 앉으세요. 뭐 얘기 다시 계속 합시다. 라고 해서 다시들 앉 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각하 일본하고는 안 됩니다. 일본하고 중국은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일본하고 중국은 안 됩니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 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박대통령이 한참 듣더니 알았어 하면서 이후 락씨 보고 그러면 계속해서 일본하고는 접촉 해 봐 라고 하시고 내일 주 영대사가 오기로 되어 있는데 내가 주영대사한테 얘기를 해봐야 되겠구먼. 라고 하시면서 일어나시더라고요 영국과의 협력으로 조선사업 출범해 10년 내에 20억 불 수출 달성 그 후 우리가 영국과 실제로 기술협력하게 된 것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주영대사하고 얘기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그 때 영국은 정주영( 鄭 周 永 ) 씨와는 사이가 좋은 관계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강관 (파이프) 회사를 정주영 씨가 영국기술을 도입하여 막 설립한 때였으며, 또 한 정주영 씨는 한영경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결국 현대조선소는 영국과의 협력으로 설립되었는데 영국은 기술 뿐 아니라 필요한 차관자금을 제공하고 처음 건조된 선박 두 척의 구입까지 계약해 주었어요. 처음엔 삼천 만 달러 정도에 계약했는데 나중에 배 값이 올라 좀 더 받았습니다. 이어 1973년에 이르러 중화학공업육성정책이 선언되었고 그에 맞추어 스무 명 정도로 구성된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단장은 서석준( 徐 錫 俊 ) 씨였고 조선 분야를 나와 상공부 구자영( 具 滋 英 )조선과장이 맡았는데 조선분야는 이미 그전에 계획이 짜 져 있던 터라 나는 조선 분야 중에서 기술하고 인력을 맡았습니다. 그 당시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105 년 내에 수출목표 100억불 달성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조선이 내 생각대로 20억불로 하느냐, 서울대학이나 상공부 생각대로 10억불로 하느냐 하는 것이 논쟁되었습니다. 결국은 내가 저서 10억 불로 목표를 수정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10년이 되기 전에 20억불을 달성했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 전체의 수출고가 연간 수천만 불 수준이었으니까 아무도 20 억 불 목표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우리는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 내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영국이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와 협력 그런데 영국은 선박연구소에도 적극적인 기술협력을 해주었습니다. 연구소 는 영국과의 기술협력에 있어 특히 인력양성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장 석 박사도 뉴카슬대학(University of Newcastle-Upon-Tyne)에 가서 일 년 간 티스데일(James A. Teasdale) 교수 밑에서 연수받았습니다. 티스데일 교 수는 이제는 돌아가셨으나 나는 과거 미시간대학에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 를 옛날부터 잘 알았어요. 나는 그 교수와 자주 만나 의논했는데 그 친구가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습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낸 것보다도 그 사람이 나한 테 가르쳐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 교수가 자문해준 것 중의 하나가 일본 의 조선공업에 대항할 수 있는 제2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하나는 그가 얘기해 주었는데 내가 호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꼭 1등을 하려고 하지 말고, 2등이 돈을 버는 데는 더 재미가 있어요 라는 것이었습 니다. 그다음으로는 충무조선지역 설정계획에 관한 그의 평가로서 그건 너 무 많아, 한 3개 지역 정도만 합시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전문 가가 먼저 우리 계획을 보고 너무 과한 계획을 세웠다고 평가한 것이며, 처 음에 10개 지역을 계획했는데 결과는 3개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티스데일 교수와 돌아다니면서 둘이서 저녁마다 12시까지 맥주를 마 시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굉장히 많이 배웠어요. 나는 우리가 중요 한 일을 추진할 때에 선진국 사람들의 지혜를 받아서 추진하고 그들로부터 먼저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에는 선생님들이 있고 역시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6 1.14 기자재는 기술획득의 매체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공업육성계획을 만드는 과정에서 두 가지를 작 성했는데 하나는 기자재가 포함되고 다른 하나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어요. 결국 기자재 불 포함 계획을 정부에서 수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처음에 는 기자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다가 티스데일 교수의 말을 듣고 생 각을 고친 것입니다. 티스테일 교수는 조선공업을 구주의 기자재업체와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이야기했고 그래야 기술이 들어오고 선주들이 배를 살 것이라는 것이었습니 다. 그러니까 영국은 일본의 조선공업에 대항하는 제2전선 구축에 있어, 우 리나라의 근면하고, 교육열이 높고, 그러면서도 값이 싼 노동력과 영국의 기 술력과 자금력을 결합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는 의미였습니다. 조선용 기자재는 구라파에서 많이 생산되니까 영국이 이를 공급하는 고 수 익의 장사를 하고, 기술집약 부분인 설계는 영국의 축적된 노하우로 영국에 서 수행하고, 차관자금을 제공함으로서 이자를 받고, 값싼 노동력으로 싼 값 에 건조된 선박을 그네들이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조선소 의 설계는 티스테일 교수가 경영하고 있던 A&P애플도어(A&P Appledore, Inc)라는 설계사무소에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은 돈을 빌려주어 우리나라에 조선소를 건설했는데 그네들의 조선소를 우리나라에서 운영하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는 그네들이 공급하는 기자재를 들여와서 값싼 노동력으로 조립 하는 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기술인 력 훈련에도 매우 협조적이었습니다. 우리 기술자들을 영국의 스캇리스고 (Scott-Lithgow Shipyard, Scotland 소재) 조선소에 보내서 대대적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후에 자동차 분야에서도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영국과 협력한 일이 있 었는데 현대 포니 사장으로 영국 사람이 왔었어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영국 사람들하고 우리가 서로 win-win 효과를 얻었으니 국제협력을 비교적 잘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조선 산업을 우리만의 능력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아마 굉장히 어려웠을 거예요
107 영국이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와 협력한 것과 같은 동일한 전략 을, 독일과 일본이 지금 우리를 견제할 목적으로, 전략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독일은 그러한 전략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 습니다. 상해에는 조그마한 조선소 하나가 독일과 50:50 합작으로 작동 중 입니다. 그러니까 구라파는 중국에 기술과 자금을 지원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선박을 건조함으로서 중국은 경쟁력을 갖게 되고 구라파는 싼 선박을 조달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일본의 Kawasaki조선소가 중국에 아주 큰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발표되었습니다. 사실 조선공업의 장래를 위하여 나는 이 가능성 에 대해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조선 분야에서 유럽에 대해 경쟁과 배척의 관계를 유지 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998년에 그러한 견제 전략을 풀어버렸습니다. 일본은 그제야 한국이 유럽과의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여 배가 잘 팔리고 오히려 자기네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1996년경 에 일본 사람들은 처음으로 10억불 상당의 조선 기자재를 유럽에서 구매하 게 됩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설계 기술에 대한 현명한 판단 현대조선을 설립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정주영 씨는 매우 현명하고 결단성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현대조선 초창기에 정주영 씨 를 두 번째 만났을 때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영국 측에서는 조 선소의 설계도면을 자기네들이 작성하여 비행기로 공수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주영 씨는 나를 찾아 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나는 단호히 안 됩니다. 설계실은 반드시 우리가 구비해야 합니다. 이 사업을 성 공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아는 사람을 확보해야 하고 설계실도 필요합니다. 한 500명 정도의 설계사가 필요합니다. 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랬더 니 정주영 씨는 아 그럼 그대로 하죠. 라고 즉석에서 결단을 내리는 거예 요.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인 내가 빡빡 우겼는데 그렇게 즉석에서 결단을 내 리는 거예요. 그 후 한 일년 후에 가보니까 내가 500명을 얘기했는데 1500 명 정도의 설계 인력을 확보해 놓았었습니다. 정주영 씨는 그 때 내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인리 발전소를 건설했고 구
108 조물도 많이 만들었는데, 선박의 엔진룸이라는 것이 당인리 발전소와 똑같더 구먼. 발전소의 구조물은 우리가 취급하는 것인데 배의 구조물은 당인리 발 전소의 구조물과 같은 것이지요. 정주영 씨는 아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그런 노하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얻을 정도로 깨끗한 분이었어요. 박대통령은 그가 성공하리라 믿고 완전히 맡겨버렸습니다. 유능한 인재를 선임하여 완전히 믿고 맡겨서 성공한 경우로 서는 정부투자기업으로는 포항제철이라 할 수 있으며, 민간기업으로서는 현 대조선의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화살 만든 곳이 대규모 조선 단지로 변화 충무조선지역 조성과 관련하여 1971년 거제대교 개통 이후 죽도지역에 삼 성중공업 조선소가 착공되었고 전에 진행 중이던 옥포지역에는 대우옥포 조 선소가 강화 건설되어 한국 제1의 조선공업기지가 되었습니다. 죽도지역 건 설은 황무지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며 삼성중공업 조선소는 장석 소장이 부지 조성에 있어 자문을 했습니다. 죽도는 충무공이 화살을 만들던 자리였으며 화살을 만들기 위해서 대나무를 심어 놓았었기 때문에 섬 이름이 죽도( 竹 島 ) 가 되었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영빈관을 지어놓았습니다. 옥포( 玉 浦 )는 그 때까지 거제도의 동쪽에 위치한 소규모 어항으로 구슬같이 맑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며 임진왜란(1592년) 때 충무공이 일본의 수군을 맞아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한 곳입니다. 또한 러일전쟁 때는(1904년)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東 鄕 平 八 郞 ) 함대 사령관이 일본의 함대를 숨겨 놓았던 자리이기 도 합니다. 충무조선단지 건설 계획은 대대적인 계획이었으며 그 당시는 이러한 큰 계 획을 정부출연연구소가 정책적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출연연구소는 과거에 는 이러한 계획을 여러 건 만들어 냈는데 이러한 새로운 국가적 사업을 일 으키는 활동이 현재는 쇠잔해버린 것 같아 아쉬움을 금치 못합니다
109 제3절 조선공업 출범의 배경과 타당성 (김재관 박사 회고) 1. 사명감이 뚜렷한 과학자의 주장으로 조선공업 계획 수립 지금 우리나라는 조선공업 대국이 되어 있는데 그 기반이 되는 초창기의 계획서는 중화학분야 중의 기계산업계획의 일부로 60년대 후반에 KIST의 기계분야 전문가 팀이 모여서 만들었습니다. 그 때 나와 함께 재미 과학자 해리 최 박사, 이경서 박사, 남준우 씨 등이 그 팀의 멤버였습니다. 그 KIST 팀은 앞으로 우리나라 기계산업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를 골똘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계획을 만들고 있는 중에 김훈철 박사를 만나는 계기가 이루어졌으며, 김훈철 박사는 68년에 미국에서 KIST로 유치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조선공업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김훈철 박사 가 우리 팀에 찾아와서 조선공업이 유망한데 계획에서 빠져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우리 팀은 조선공업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는데 김 박사는 그게 빠질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은 김훈철 박사의 도움으로 조선공업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 했는데 우리나라의 기간산업으로 육성할 충분한 타당성이 인정되었어요. 조 선공업을 그때부터 육성해야할 타당성에 관한 대강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 다. 2. 조선공업육성의 타당성 조선공업은 초창기에는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에 의해 발전되었으나 영 국이 스팀엔진을 사용하는 철강선을 개발한 이후 장족의 발전을 해서 산업 혁명을 이루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습니다. 영국은 스팀엔진 철강선의 위력 으로 세계 각처에 식민지를 만들고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전성시대를 열 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일본의 명치유신 시대에 영국의 도움을 받아서 조선 공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일본이 조선공업을 크게 일으켜서 일본의 조 선공업이 세계 수요의 거의 60%를 차지하는 조선 대국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조선공업 발전은 영국의 조선공업 사양화와 맞물려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조선공업에 비해 보다 기술집약적인 다 른 분야의 산업을 창출했습니다. 그런데 조선공업은 중노동 산업이었기 때문
110 에 조선소 노동자들은 보다 근로조건이 유리한 다른 산업으로 직장을 이탈 하여 결국은 조선공업의 사양화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조선공업으 로 국부가 늘어나고 해외식민지가 늘어나고 산업이 커지고 했으나 그에 따 른 생활수준의 향상은 조선공업의 사양화를 초래하였습니다. 후발국인 일본 은 이때에 끼어들어 조선공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그 당시 조선공업은 잘되고 있었으나 일본도 멀지 않아 영국과 똑 같은 추세를 따라갈 수밖에 없어 우리나라가 이때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이 김훈철 박사의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조선공업을 이어받을 제2의 후 계자로는 우리나라가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공업의 후계자는 중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 떠맡아야 되는데, 양질의 노동력이 양적으로 풍부 하면서 임금 수준이 낮아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데 그러한 조건을 갖춘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중국은 그때 혼란기에 있었 고 인도나 기타 아시아 국가에서는 양질의 노동력 확보가 어렵고 멕시코 같 은 중남미 국가도 같은 사정이었습니다. 3. 조선공업 육성을 위한 기술력과 자금력의 문제 그런데 그때 검토 과정에서 부각된 문제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그 당 시 우리나라는 5,000톤짜리도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 낮은 기술수준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금력 문제였습니다. 특히 자금력 문제에 있어서는 선박 을 구매하는 회사는 선박을 인도 받은 후에 배를 운영해서 벌은 돈으로 연 차적으로 배 값을 지불하는 것이 관례여서 연불수출을 지원할 자금력을 가 진 은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은행에 연불 수출 기금 제 도가 있어야지 배를 수주하고 수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연불수출을 지원할 자금력을 가진 은행이 없었기 때 문에 일본과의 교섭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한국은 기술도 없거니와 돈도 없고 수출 시장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이니 자금이 적 게 드는 5만 톤 이하의 화물선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 놓았습 니다
111 4. 수출과 방위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대형선박 건조를 선택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목표하던 수출산업의 육성과 방위산업에의 동시 기 여라는 조건과는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세계 선박시장의 주종을 이 루고 있는 품목은 대형 벌크선이나 석유탱커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수출 산 업화와 동시에 방위산업의 육성에 기여할 수 있는 품목을 찾고 있었기 때문 에 대형 선박의 건조가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으로 결국 우리나라 조선공업은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는 영국과 협력하여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여명기를 회상해 볼 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훈 철 박사는 조선공업의 선각자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공업에 관 한 지식과 경험과 개념조차도 없었던 때에 김훈철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 서 조선공업을 해야 된다고 주창했습니다. 이런 상상도 못했던 일을 시작 시 켰는데 그 공로를 우리가 알아 줘야 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세계 최 대의 조선공업을 일으킨 제창자로서 국가의 큰 표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4절 선박연구소 설립 추진 1. 연구소 설립 초창기의 애환 (장석 박사 회고) 1.1 해군 고속정 개발 후에 시작된 선박연구소 설립 계획 작성 제가 1970년에 처음 KIST에 들어갔을 때 40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는 해 군 고속정을 만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 고속정은 후일에 위장 이름으로 어로지도선( 漁 撈 指 導 船 ) 또는 'KIST Boat'(한국해군 의 주력고속정인 참수리 로 발전됨)로 명명되었습니다. 고속정의 설계개발 에 있어서는 6개월 동안 우리들( 金 燻 喆, 張 晳, 徐 尙 元, 朴 泰 仁 )이 주가 되고 해군( 梁 承 一 )과 서울대학교 교수들( 黃 宗 屹, 任 尙 錪, 金 極 天 )의 협력 하에 수 행하게 됐는데, 그때 정말 밤잠 안자고 합숙하면서 일을 하였습니다. 낮에는 설계 작업을 수행하고 저녁이 되면 지도 교수님들이 오셔서 작업결과를 토 론하고 그 다음날 다시 또 그것을 토대로 작업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고속정
112 설계를 6개월 걸려서 끝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진해에 가서 내가 책임지고 통제부 내에 있는 해군공창( 海 軍 工 廠 )에서 배를 직접 건조하여 프로젝트를 마쳤는데, 그 후에는 연구실의 프 로젝트 수주가 고갈되어 공식적 일이 다 떨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때 김훈철 박사님이 1968년에 만들어 놓은 선박해양공학센터 설치안을 토대로 선박연구소 설립계획을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1972년 여름 부터 시작해서 만들었습니다. 김 박사님의 지휘 아래 김현왕( 金 鉉 汪 ) 박사, 양승일 박사, 저 그렇게 셋이서 작업했는데 그것은 사비를 들여서 무료봉사 로 만든 보고서였습니다. 1.2 메아리치지 않는 선박연구소 설립 주장 이 계획서를 가지고 선박연구소 설립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하여 과기처의 담당직원은 물론 최형섭 장관께도 말씀을 드렸는데 최 장관께서는 그때 이 것을 영문으로, 독일어로, 불란서어로 번역하여 오도록 하여 외국 대사라던 가 또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연구소 설립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성과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 결국 연구실을 해산하자는 논의를 시작했어요. 김훈철 박사님은 보따리를 싸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시고 우리들도 전부다 각자 갈 길을 가자는 논의를 한 결과 결론은 좀 더 노력해보는 방향으로 내 려졌습니다. 1.3 KIST 분화(Spin Off) 계획의 일환으로 떨어진 선박연구소 설립계획서 작성 요청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과기처로부터 선박연구소 설립계획서를 만들어 달 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다 만들어 둔 계획서를 재정 리하여 며칠 만에 또 하나의 계획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그래서 연구소 설립계획이 다시 살아났는데 사실은 도중에서 해산될 뻔했던 위기가 있었다 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연구소설립 분위기가 되살아났는데 이는 선박 연구소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연구소들도 KIST에서 spin off하는 큰 계획의
113 일환이었습니다. 1.4 연구소 설립의 첫걸음은 전문분야별 연구원 양성 그로부터 저희 연구실에서 첫 번째로 착수한 일은 연구소 설립을 대비하여 앞으로 필요한 전문분야별로 연구원들을 해외파견 훈련을 보내는 것이었습 니다. 그에 따라 제가 첫 번째로 차출되어 영국에 가서 훈련을 받게 되었습 니다. 그 때 상공부에서는 조선공업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앞 으로 우리나라에 조선소를 많이 설립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가서 조선소의 설립 디자인과, 레이아웃 디자인 분야 교육훈련을 받기로 했습니 다. 나는 영국의 뉴카슬 대학에 가서 티스데일 교수님 아래에서 교육훈련을 받았으며, 현대조선소 설계를 담당한 에이엔피애플도어라는 영국 회사에 가 서 훈련을 받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훈련을 받은 후에 느낀 것은 훈련만 받아서는 안 되고 공부를 제대로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김훈철 박사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요지는 저는 콜롬보플 랜으로 가서 단기 교육을 받고 있는데 제 후배들은 그러지 말고 제대로 공 부를 하여 석사나 박사학위를 받도록 해 주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제 후임들은 대개 석박사 코스를 마치고 돌아와서 지금 그 사람들이 연 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를 만들면서 첫째로 해야 하는 일은 연구 원들의 훌륭한 역량을 키우는 일을 시작하여 앞으로 중요한 연구업무를 책 임지고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길러진 훌륭한 인재들은 지금 은 연구소의 주역이 되어 있기도 하고 대학으로 진출하여 교수가 된 사람도 있어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인원이 한 이삼십 명에 달합니다. 1.5 초창기의 연구소 육성 철학의 차이에 따른 갈등 선박연구소는 초창기부터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김훈철 박사님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1973년에 KIST 부설 연구소로 설립되었습니다. 초대 소장은 대외적으로 역량 있는 인사를 모시자고 의견을 모아서 윤정흡 박사를 미국 에서 유치해서 모셨어요. 윤정흡 박사는 정부 내에도 아는 분이 많고 활동적 이어서 연구소 설립 당시의 예산 확보에 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연구소 설립계획부터 시작했던 우리 연구원들의 철학과
114 윤정흡 소장의 설립 철학 또는 운영 철학과는 잘 맞지 않아서 마찰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를 8남매를 둔 가난한 가족에 비유하면 우리 연구원들은 큰아 들부터 차례로 교육시키고 교육을 마친 형은 돈을 벌어서 동생을 교육시키 는 방식으로 8남매를 기르자는 주장이고 새로 오신 윤 소장은 부잣집처럼 8 남매 전부를 다 같이 기르는 밖으로는 여러개를 시작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허술한 소위 외화내빈 전략을 택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저희 초창기 연구원 멤버들은 연구소 발전에 있어 핵심모듈의 순차적 추가 방식으로 발전해나가자는 주장을 했는데 예를 들면 처음에는 유체역학 분야, 그다음에 구조 분야, 그다음에 설계 및 기자재 분야 등 모듈별로 추가해 나 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윤 소장의 설립 전략을 따른 결과는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또 시간이 갈수록 성과가 나는 게 없었어요. 이러한 철학의 차이는 초창기 멤버 특히 김훈철 박사님과 윤정흡 소장님 간의 마찰을 야기했습니다. 1.6 반쪽이 되어버린 핵심 연구시설 토우잉탱크 특히 의견차이가 컸던 부분은 모형 예인수조 즉 토우잉탱크(Towing Tank)를 만드는 경우였습니다. 토우잉탱크의 건설에 있어 우리는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를 조사해서 우리가 상용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조선기술 개 발을 수행하려면 최소한 폭 18미터, 길이 400미터의 수조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윤 소장은 예산이 없으니 폭과 길이를 대폭 줄이고 추후 예산 이 확보되면 확장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조의 확장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수조의 건설은 결국은 윤 소장의 의견대로 폭은 16미터, 길이는 200미터 로 줄여서 건설했으나 의미 있는 조선기술 개발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 후 수조의 확장은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7 연구소를 떠나버린 김훈철 박사 그래서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김훈철 박사님하고 연구소를 운영하는 윤정 흡 소장님과의 관계는 악화되어 결국은 김훈철 박사님은 국방과학연구소로 이적하시고 윤정흡 소장도 연구소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KIST의
115 심문택 박사님이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으로 부임하시게 되었는데 그것 을 계기로 KIST의 유능한 연구원들이 ADD로 옮겨갔습니다. 그 때 김훈철 박사, 이경서 박사, 현경호 박사 등 여러 명의 유능한 KIST 연구원들이 ADD로 이적했습니다. 연구소는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시작되었는데 그분들 이 떠나시고 나니 선박연구소를 이끌 사람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1.8 연구소의 상공부 이관과 기금 조성 그 와중에서도 처음에 KIST 부설로 설립된 선박연구소는 1976년 11월에 는 상공부 산하로 이관되었으며 상공부 산하로 가서는 독립연구소로 격상되 었습니다. 그러나 연구소 운영자금 확보는 아직도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때 상공부와 청와대 측에서는 연구소 운영자금을 정 부 출연 형태로 지원하기 보다는 기금을 만들어서 그 기금의 과실로 연구소 를 운영하게 하는 조치를 추진했습니다. 그때 조선공업이나 조선기자재공업 은 굉장히 열악한 상태였지만 그들로부터 기금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 당시 청와대의 오원철 수석의 아이디어였으며 따라 서 그가 앞장서고 상공부가 행정조치를 담당하여 선박연구소의 기금을 모았 는데 4억4천만 원 정도 모았어요. 그 당시 연구원의 월급이 10만원 내외였 으니 거액의 기금이 모인 것이었습니다. 그때 포항제철과 현대중공업 등에서 기금을 모금했는데 정부가 조선산업을 도와 줄 목적으로 기술개발을 지원한 다니까 기업들은 어려운 사정인데도 모금에 응해서 그 당시로는 굉장히 큰 돈이 모금된 것이었죠. 1.9 과학자의 재등장, 그러나 통폐합의 돌풍에 휘말린 연구소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김훈철 박사님이 ADD에서 임무를 마치시고 1979년 에 선박연구소 소장으로 다시 복귀 하셨어요. 선박연구소가 1978년에 대전 으로 이전되었는데 1979년에 김 박사님이 복귀하셔서 다시 연구소를 일으켜 세우게 되었고 옛날 팀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박연구소의 운명은 기구하여 그해에 박 대통령이 서거 하시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으며 이어서 정부의 체제가 바뀌면서 연구소가 통폐합 돌풍에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 선박연구소는 이번에는 기계연구소로 통폐합 되어 분소로 격하되었어
116 요. 그때 기계연구소는 서울의 정밀기기센터(FIC), 창원의 기계금속분소, 대 덕의 선박분소 등이 통폐합된 연구소가 되었습니다 선박분소를 거쳐 해사기술연구소로 잦은 명칭 변경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도 저희들이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차근차근 연구 인력을 기르고 우수한 인력을 유치하고 연구 분야를 하나하나 개척해서 200 여명의 연구원 규모로 성장하여 연구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김훈철 박사님은 기계연구소 소장이 되시고 제가 선박분소의 분소장을 담당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훈철 박사님은 3개의 연구소가 통폐합된 기계연구 소의 소장을 하시면서 3개의 분소가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하도록 자율권을 주셨습니다. 김훈철 소장님은 3개 분소장이 각자 노력해서 대정부 예산 투쟁 을 하면 소장 혼자서 노력하는 것 보다 3배의 노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 신 것입니다. 그 결과 선박분소의 연구비는 상당히 늘어나고 규모도 커졌습 니다. 규모가 커짐에 따라 자연히 분소를 부설연구소로 승격하게 되어 89년 에는 해사기술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부설기관이 되었고 그 부설기관을 제가 맡아서 계속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 후 한 3년이 지났을 때에 정근모 장관님이 우리연구소를 방문하셔서 현재 해사기술연구소가 선박분야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데 연구범위를 좀 더 넓혀서 기계분야도 연구를 했으면 좋겠으니 검토해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그 가능성을 검토해서 앞으로 해양장비 개발 분야로 연구 범 위를 넓히겠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근모 장관님의 말씀 배경에는 기계연구소가 창원에 있 었는데 대덕으로 이전하기를 희망하고 있었고 항공연구실도 창원에 있었는 데 그것을 우주연구소로 이전하여 항공우주연구소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어, 창원에 있는 기계연구 분야와 해사기술연구소의 기능 일부를 기 계연구소로 이관하면서 창원의 기계분야가 대덕으로 옮기는 계획의 일부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창원에는 재료연구 부분만 남고 기계분야는 대 덕으로 이전하여 해사기술연구소에 있던 기계분야, 구조분야, 용접분야 등을 흡수하여 과거 선박연구소의 자리에서 현재의 기계연구원 기능으로 변경해 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17 2. 초창기의 UNDP 원조자금 확보 과정 (김훈철 박사 회고) 2.1. 최형섭 장관의 영향력으로 UNDP 원조자금 확보 최형섭 장관님은 선박연구소의 설립 예산을 확보해 주려고 많은 도움을 주 신 분입니다. 외국의 원조자금을 얻어 주시려고 사업계획서를 영어와 독일어 로도 작성하게 하고 예산 규모를 여러 가지로 바꾸어 만드는 등 우리가 만 든 사업계획서가 아마 한 20권이나 될 것입니다. 그때 최형섭 장관님이 주한 UNDP의 예산 지출구조를 검토하셨는데 프로 젝트 비용의 약 80%가 외국 전문가 활용비에 사용되고 우리나라에 떨어지 는 비용은 20%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내셨어요. 그래서 최 장관님이 안 되 겠으니 거꾸로 하여, 80%는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20%는 UNDP의 경비로 사용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UNDP는 우리나라에서 일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 라고 지시하셨어요. 그리고는 그렇게 될 경우 우리나라에 추가로 떨 어지는 UNDP 예산을 조사하고 그 예산을 선박연구소 설립에 투자하라고 지시하셨어요. 그래서 그때의 돈이 거의 150만 불 내지 200만 불이 되었어 요. 그래서 갑자기 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UNDP 사람들과 접 촉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사람들이 우리 정부에서 그들의 약점을 잡아 장관 이 직접 지시하니까 돈을 내어놓을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UNDP 의 예산지원이 확정되기 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UNDP도 본부의 승인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에 호락호락하게 예산을 내어 놓지는 않았습니다. 2.2 UNDP 설득 작전과 150만 불 확보 그 당시 주한 UNDP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서 딕 브라운(Dr. Richard Brown - Harvard대 Ph. D.) 박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미국 인이지만 방글라데시 출생으로 미혼이었는데 그 사람과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이 우선 첫 단계로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맨 날 둘이 돌아다니면서 서 로 사귀고 해인사 등에도 같이 갔습니다. 이 친구가 어느 날 그러면 우리를 도와 줄 사람을 찾아 가자고 해서 국제해사기구에서 근무하는 영국태생의 인도사람으로 선장출신인 캡틴 씽(Captain Singh)씨와 화란 태생으로 내가 배웠던 교과서 Resistance and Propulsion 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사 람인 아리 랩(Professor Ari Lap) 박사를 찾아가 만났습니다
118 그래서 딕 브라운과 저하고 넷이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 씽 선장은 두 가지 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연구소의 명칭을 선박연구소라 하지 말고 선 박산업기술지원소(Shipbuilding Industry Technical Services)로 고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소의 주 임무가 조선공업을 위한 기술지원이라는 것을 명 확히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두 번째는 UNDP는 군사기술과 관련성이 있는 사업은 절대 지원하지 않으니 그러한 개연성이 조금이라도 없도록 하고 예 산은 100만 불 이하로 축소하라고 했습니다. 100만불이 넘으면 결재가 복잡 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분이 생긴 150만 불 내지 200만 불의 자금 중에서 우선 100만 불을 통과 시켜놓고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자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문한 방향으로 영문으로 된 사업계획서를 고쳐 쓰기 시작 했습니다. 매일 오후 2시나 3시 경에 그들과 모여서 얘기를 하고 그 다음날 10시 까지는 보완 작업이 완료된 계획서 초안을 그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 어요. 우린 그렇게 열심히 매일 일했고 그렇게 하니까 그들은 매우 만족했으 며, 우리들에 대한 신뢰감은 무척 높아졌으며 당신들 같은 사람들은 처음 봤소, 당신들에게 선박연구소 설립 업무를 맡기면 해낼 만하겠소. 라고 했 습니다. 그래서 결국 UNDP 예산 150만 불은 확보되었습니다. 2.3 보고서 문구 하나 잘못으로 UNDP 자금 30만 불 삭감 그 후 그 예산을 선박연구소 설립 사업에 집행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예 기치 않았던 문제를 UNDP 측이 제기하여 일부 예산을 사용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선박 건조에 있어 용접기술은 핵심기술입니다. 용접기술 담당 책임연구원이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 내용 중에 잠수함(submarine) 건조 에 사용가능한 용접기술 이란 문구가 포함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잠수 함은 군사 목적이니까 UNDP는 그 부분의 예산은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 습니다. 그래서 150만 불 중에 마지막에 30만 불은 그 보고서 문구 하나 때 문에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UNDP는 군사목적 사용을 검색하는 고성능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보고서가 제출되면 그 내용 중에서 군사목 적 사용과 관련되는 단어(예 : 잠수함)를 즉시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
119 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고서 중에 용접에 관련된 부분은 20~30 페이지가 되는데 내가 그것을 사전에 발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습니 다. 2.4 ADD 전직 만류를 위한 최형섭 장관의 회유책 과기처의 최형섭 장관님이 선박연구소 설립을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하시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있습니다. KIST에 계시던 신응균( 申 應 均 ) 장군님이 ADD 설립 초창기에 그리로 옮기셨는데, 신 장군님은 어느 날 나를 보자고 하셔서 갔습니다. 신 장군은 나에게 ADD에 오면 예산 걱정도 없고 프로젝 트 걱정도 없으니까 오라 내가 그걸 다 해줄게 너 오라 라고 하셨어요. 그 소문이 최형섭 장관에게 까지 알려졌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날 최 장관님 이 테니스를 치시는데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나를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너 ADD로 가지 마, 내가 도와줄게, 선박연구소를 만들어 줄 게 너 가지 마 라고 했습니다. 나는 신응균 장군하고 최형섭 장관하고 두 분 사이에서 곤란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최형섭 장관님은 아마 그때 나를 붙 들어 놓고 선박연구소를 만드는 예산을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같 습니다. 3. 선박연구소 부지 물색 (장석 박사의 증언) 미터 길이의 수조가 들어갈 수 있는 연구소 부지 물색 선박연구소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놓고 누가 돈 대주려는 사람도 없는데 부 지를 먼저 보러 다녔습니다. 선박연구소의 기본 플랜은 김훈철 박사님이 먼 저 그린 것이며 섹션페이퍼에다가 수조를 선으로 그려 놓았어요. 처음에는 예산이 모자라면 약 300미터 규모로 건조하고 나머지는 점선으로 그려서 후 일에 키우게끔 고속 수조를 배치하셨어요. 그런데 이렇게 큰 땅을 어디에 찾 을 수 있나가 의문이었어요. 처음에는 서울 근교에서 찾으려고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근처를 찾았어요. 그걸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 황종흘( 黃 宗 屹 ) 교수, 김훈철 박사, 그리고 저와 셋이서 같이 가서 찾았어요. 그러나 마땅한
120 부지를 찾지 못했어요. 안양유원지로 부터 훑어 넘어오면서 서울대학교 캠퍼 스까지 보았으나 적합한 부지를 찾지 못했어요. 또한 주말에는 의왕시 근처 에도 부지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서울 근교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선소에 기술지원 해야 되니까 조선소 인근 지역에 가보기 로 했습니다. 그래서 부산 근처에 가 본 데가 송도였습니다. 거기가 송도의 산 옆인데 지도를 보니까 숲이 무성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어요. 그러나 500미터 길이의 수조가 들어갈 자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수영 비행장 자리까지 가봤어요. 3.2 대덕연구단지 건설계획과 맞물려 대덕에서 연구소 부지 물색 그런데 마침 그때에 과기처에서 대덕연구단지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대덕연구단지 계획을 입수하여 마스터플랜을 보니까 선박해양 계열연구소는 대덕연구단지의 갑천( 甲 川 ) 변에 위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지답사를 위하여 김훈철 박사님과 저 그리고 남궁 우 씨 등이 차 를 타고 대전의 대화공단을 거쳐 연구단지 예정 부지로 들어갔습니다. 연구 단지 예정 부지는 아직은 황무지였으며, 대화공단에서 다리도 없는 갑천의 물길을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고 물길을 건너갔는데 완전 개골 창을 건너가야 했어요. 그때의 갑천은 대전시의 오수가 그냥 방류되고 있었 고 그 근처에는 상하수도 시설도 없었고 심지어는 수세식변소도 없었기 때 문에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다 건너가고 보니까 이런 누추한 곳 에 연구소를 지어놓고 우수한 연구인력을 유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몸을 씻으려고 유성 온천에 가서 목욕을 했습니다. 그리고 원촌교를 바로 건너 위치한 산기슭의 포도밭에도 가보았습니다. 거 기는 지금도 연구시설이 없는 곳인데, 거기 갔더니 마침 나무를 정리하는 농 부가 있어 물어봤어요. 이 근처의 땅값이 얼마나 되죠? 그랬더니 평당 2000원은 줘야죠. 그런데 요즘 여기에 연구소가 들어온다는데요. 벌써 소 문이 누설되어 그 때로는 고가인 평당 2000원을 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서 마스터플랜에 계획된 위치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얻고 과기처에 다시 이 야기 해가지고 장소를 물색을 한 것이 지금의 연구소 자리입니다
121 3.3 박대통령이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곳에서 연구소 세우라고 지시 선박연구소는 대덕연구단지에 가장 일찍 들어간 연구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먼저 들어가는 연구소에 대해서는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데다 연구소 를 세우라는 청와대의 지침이 있었습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라고 들었습니다만 박대통령의 연구단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의 표시라고도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잘 보이는데 먼저 연구소를 세우게 한 뜻은 국민이나 외국 사절단이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에 도 훌륭한 두뇌집단이 있다는 국민적 긍지를 갖게 하고 외국 사절단에게도 홍보하고 싶은 대통령의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대덕연구단지는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사이에 위치한 삼각형 형태의 지역으로서 고 속도로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거기가 연구단지라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게 하여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3.4 수조는 고속도로에서 보이지 않아야 선박연구소는 대덕연구단지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구소를 짓고 보니까 수조가 대형 건물로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건물로 나타났습니다. 수조는 흰색의 길 이가 매우 긴 건물이었으나 유리창이 없어 보기에는 이상한 건물로 나타나 는 문제가 지적되었습니다. 저게 우리나라 과학 두뇌가 일하는 연구소라고 자랑하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수조 건물에 유리창이 없는 것은 햇빛 이 들어오면 그 안에 이끼가 끼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은 수조가 고속도로에서 보이지 않게 나무를 심으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부 리나케 나무를 심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진 8> 년 대덕에 건설된 수조, 왼쪽 : 수조건설 초기의 토목공사 모습, 오른쪽 : 멀리서 본 수조 건축 초기 모습
122 제5절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역사 속에 묻힌 선박연구소 1. 역사 속에 사라진 선박연구소 (김훈철 박사 회고) 년대 초의 시련기 선박연구소는 이와 같이 어려운 역경 속에서 설립되었고 현재 우리나라의 효자 산업인 조선공업을 창출한 연구소였으나 불행하게도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는 불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선박연구소만 관 계되는 것은 아니고 80년대 초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박정희 대통령 이후에 정부출연연구기관이 겪은 혹독한 시련기의 일부라 하겠습니 다. 이 시련기의 배경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설립 운영해 보았으나 그 성과 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KIST 출범 시의 목표인 재정 자립 이 70년대 말에 실패로 나타난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상공부와 과기처 간의 업무 영역 다툼과 부처 이기주의가 작용한 것입니다. 80년대에 들어 박대통령 시대의 5개년 계획 업무는 퇴색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 때까지 상공부의 공업부문의 주 업무 였던 공단 건설 및 관리 업무도 퇴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상공부의 공업 부문의 생존 전략으로서 과기처의 업무 영역인 연구개발 관리 영역을 침투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1.2 국보위 시대 연구기관의 과기처 산하로 통폐합 이러한 배경에서 박대통령 시대가 막을 내린 직후인 80년대 초부터 출연 연구소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전두환( 全 斗 煥 )정권 시대에 막강한 힘을 가진 국보위의 결정으로 대부분의 출연연구소를 과기처 산하로 통합했 습니다. 이는 상공부의 정책 방향과는 반대로 상공부 산하의 연구소가 과기 처 산하로 이관된 결과를 낳아 그 후 계속되는 두 부처 간의 마찰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국보위 때에 흘러나온 소문은 표준연구소와 선박연구소가 차지 하고 있는 땅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분야에 지나지 않 는 선박분야의 연구소가 13만평이나 차지하고 표준연구소도 20만평이나 차
123 지하고 있는 것은 투자 낭비라는 논리였습니다. 표준연구소와 선박연구소가 특히 표적이 된 것은 이들이 상공부 산하에서 과기처 산하로 통합된 것과 연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한 부처 산하 로 출연연구소를 이관하는 정도로 넘어갔습니다 년대 초 노태우 대통령 때의 2차 회오리바람 그 후 얼마 지나 노태우 대통령 때인 91년경에 상공부가 주관하는 수출진 흥확대회의에 과기처 산하 산업기술 분야 연구기관인 KIST, 표준연구소, 전 자통신연구소, 기계연구소, 화학연구소 등의 기관장이 초청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기계연구소 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무렵 노태우 대통령 은 출연연구소에 특별감사를 보내야 되겠소. 연구소의 성과가 불만스럽소. 라고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수출진흥확대회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데 느닷없이 말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나오면서 나는 그저 얼떨 떨해서 그 의미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데 같이 간 전자통신연구소 소 장이 이거 큰일 났네. 대통령이 연구소에 특별감사를 보낸다고 하니 이거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은 노태우 대통령이 하셨지만 그러한 말을 하시게끔 작용한 배후 는 상공부와 당시의 경제수석 김종인( 金 鍾 仁 ) 씨였던 것입니다. 후일에 알게 되었지만 상공부는 전두환 대통령 때 과기처에 빼앗긴 연구소들을 다시 찾 아오는 전략으로 우선 과기처 산하에서는 연구기관 운영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대통령의 말을 빌려 감사원의 특별감사를 하는 일 을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그때 특별감사에 걸린 출연연구기관은 상공부가 주 관했던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참석한 산업기술 분야의 5개 연구기관 이었으며 그 모두가 상공부가 가지고 싶어 했던 연구기관 이었습니다. 그때 그 5개 연 구소 소장들은 모여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하기도 하고 사표를 내 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1.4 출연연구소 통폐합의 사령탑이었던 김진현 장관과 서정욱 차관 그 즈음 과기처 장관은 과학기술계 출신이 아닌 김진현( 金 鎭 鉉 ) 장관으로 바뀌었고 그는 출연연구소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장관이었습니다
124 따라서 결국 과기처에서는 관련 소장들 전부로부터 사표를 받기로 결정했으 며 그 일을 위하여 과기처 산하 출연연구소의 과감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 다고 판단된 서정욱( 徐 廷 旭 ) 박사를 차관으로 영입하여 그 일을 맡겼습니다. 또한 김진현 장관은 그러한 개혁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 과기처의 차관보급 3명을 졸지에 해임하는 일도 단행했습니다. 서정욱 차관은 청와대 의 산업비서관과 연락을 하면서 그 일을 처리했으며 소장 다섯 명으로부터 한꺼번에 사표를 받으면 시끄러워지니까 한 사람씩 차례로 받는 전략을 택 했습니다. 1.5 첫 번째로 매를 맞은 시스템공학연구소 그 첫 번째 대상이 된 것이 KIST 부설 시스템공학연구소였습니다. 과기처 는 당시 KIST 산하의 시스템공학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성기수( 成 奇 洙 ) 박사 를 불러서 올림픽 때 전산지원을 위해 설치한 150여명의 올림픽 전산지원 팀을 전부 해체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성기수 소장은 나 그거 못해요 라고 하고 사표를 내어버렸습니다. 성기수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모시다 시피하여 유치한 과학자였으며 그 때는 이미 컴퓨터와 관련해서는 국보적인 존재였습니다. 1.6 선박연구소 폐쇄 지시와 버티기 작전 그 다음으로는 선박연구소를 없애라 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석 선박분소장하고 협의를 해서 선박연구소를 그냥 없애 버리면 기 록에도 안 남으니까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 당시 연구소장들은 과기처가 그 런 얘기를 하면 대체로 일주일 내에 사표를 내었는데 나는 6개월을 끌어 연 구소 이사회에 선박분소 폐쇄 안을 올렸어요. 기계연구소 이사회에 올리니까 모두가 반대하여 이사회가 부결해버렸어요. 그랬더니 과기처는 이사들을 해 임해버리고 감사원을 동원하여 소장인 나에 대한 감사를 약 두 달 동안 했 어요. 감사원 감사 결과, 첫째로는 연구소가 스스로 벌어들인 자체 수익 예 산이 당초에 이사회에 보고한 예산보다 초과해서 벌었는데 그 초과분에 대 해 이사회의 승인 없이 사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소장인 내가 연 구소 본부 소재지인 창원을 떠나 서울에 올라오는 날자가 너무 많아 현지를
125 지나치게 비워 두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감사원이 보고한 숫자가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압력에 굴복하여 사표를 내고 연구소를 떠났습니다. 1.7 국무조정실장의 조정 조치 그러고는 얼마 후에 나는 당시 국무조정실장 이었던 심대평( 沈 大 平 )씨를 찾아갔습니다. 심대평씨는 나와 그전부터 평소에 아는, 내가 지금도 존경하 는 분이였습니다. 심대평 실장에게 그 동안의 자초지종과 그 결과 과기부에 서 불가피하게 5개의 연구소 정리를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했 더니 아니 김 박사 그런 얘기를 진작 할 일이지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느 냐. 부처 간의 이견 조정은 내가 담당하고 있어요. 그런데 과기처에서 연 구소를 정리하겠다고 하나 상공부에서는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 라고 했습 니다. 그래서 그는 상공부와 과기처를 불러서 이견을 조정한 결과 소장인 나 의 사퇴는 일단 인정하되 연구원 자격으로 다시 복귀하도록 하고 선박연구 소는 남기는 걸로 약속을 받아 내었습니다. 그러나 과기처는 그 약속 둘을 모두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1.8 총리의 조치와 상공부의 반감 감사원 감사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로서 나와 상공부 간에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희( 李 相 曦 ) 장관 시절에 일어난 일이 었으며 당시의 총리는 신현확( 申 鉉 碻 ) 씨였습니다. 신현확 총리는 상공부 및 김성진( 金 成 鎭 ) 전임 장관과 협의하여 4개 연구소를 상공부로 이관하기로 결 정했는데 그것을 일주일 후에 발표하기로 되어 있는 때에 우리소장들은 미 리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상희 장관과 협의한 후에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 서 항의했습니다. 신 총리는 아니 내가 듣기로는 사전에 모두 다 합의해서 상공부로 보내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연구소 소장들이 찾아와서 반대하 면 어떻게 하느냐. 그럼 발표를 연기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 니까 상공부로써는 나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 전두환 대통 령 때 과기처로 넘어갔던 연구소들을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은 김훈철이가 앞장서서 설쳐서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26 1.9 자기부상 방식 고속전철에 관한 두 과기처 장관의 정 반대 입장 김진현 장관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 배경에는 자기부상열 차 사업과 연관된 사연도 있었습니다. 이상희 장관 시절인 1989년에 자기부 상열차 연구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상희 장관은 자기부상열차에 큰 관심 을 나타냈으며, 그 때 계획단계에 있었던 고속전철사업을 프랑스의 떼제베 TGV방식으로 하지 말고 자기부상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밀 고 나갔으며 나도 이상희 장관의 주장에 열심히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에 김진현 장관이 임명되고 나서는 이상희 장관과는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하 였으며 자기부상 방식을 주장한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 다 김훈철 소장의 해임과 선박연구소의 폐쇄 앞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나를 해임하는 사유가 된 것입니다. 결국 나 한 사람을 해임하는데 6개월이 걸린 것입니다. 과기처는 소장들 해임 조치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나를 해임하는 것으로 결국 마감하고 말았 어요. 나는 내가 사표를 낸 것은 감수할 수 있으나 선박연구소를 결국 폐쇄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상공부와 과기처 간의 마 찰이 원인이 되어 과기처 산하 출연연구소들이 오랜 기간 동안 괴로움을 당 해 수많은 유능한 연구원들이 연구소를 떠나게 되고 그로인해 연구 능력의 저하와 연구 성과의 부진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은 국가적 차원 의 큰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다면 차라리 상공부로 연구소를 되돌리는 방향으로 결정하는 것이 현명한 조치였을 것이라 생각합 니다. 그러나 과기처의 그 당시의 정책은 연구소의 희생 방지보다는 부처 이 기주의가 앞서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효자 산업이 된 조선공업 우리의 조선공업은 이제 세계 제1위로 발전하여 나라의 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중핵 산업이 되었습니다. 기업이 아무리 잘해도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반드시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당해 산업의 미래를 개척해 주 는 첨단 요소기술 내지는 융합기술을 개발하여 선두주자의 위치를 계속할
127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주력 산업의 위치에 있는 조선, 자 동차 등과 그와 밀접히 연관된 기계 등 몇 가지 분야는 국가가 그들 분야의 연구소를 보유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2. 선박연구소가 이루어 낸 업적 (김훈철 박사 회고) 2.1 천개가 넘는 선박 모형 시험 서비스 제공 선박연구소는 없어졌지만 있을 동안에는 많은 일을 했습니다. 과거 약 20 년 간 존속했던 기간 동안 양성된 전문 인력이 오늘의 조선공업과 조선학회 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선박연구소가 보유한 대형 수조시설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선박의 개조, 개발, 형태 변경 등에 있어 그 설계에 필요한 기본 데이터를 얻는 시험을 하는 시설입니다. 인공적으로 다양한 해양환경을 만들고 축소된 선박모형을 만들어 사전에 여러 가지 시험을 하여 데이터를 얻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로 서 1000개가 넘는 모형선을 만들어 시험결과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했습니다. 이러한 서 비스에 기초를 두고 우리의 조 선공업은 세계적인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대형 수조 시설이 없으면 외국에 나 가서 시험을 해야 하는데 그렇 <사진 9> 모형선 1000호 기념식( ) 게 될 경 우 선박의 설계 데이 터가 외국에 유출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2.2 설계기술 확보로 일본을 앞질러 우리나라 조선 산업이 세계적 선두주자가 된 것은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등이 경쟁체제를 이루어 기술개발 경쟁을 한 결과라고도 생각합 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따라오지 못할 기술 수준에 도달 했는데 그 핵심은 우리의 설계기술 수준이 높다는 거예요. 설계기술을 외국 에 의존하면 부품과 기자재를 외국에서 사와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
128 리는 설계능력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부품의 90%를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 게 되었고 나아가 코스트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설계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나라 조선공업은 현재 일본을 앞질렀 고 중국을 따돌릴 수 있고 앞으로 계속해서 세계1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 각합니다. 생산성분야에서도 우리의 조선산업은 세계 으뜸을 갖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발전과 중국에 앞선 기술력만이 세계 제1위를 유지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2.3 선박 설계ᆞ생산의 컴표터화 기술(CSDP) 개발 보급 성공 선박연구소는 조선 설계기술의 핵심 요소기술인 CSDP(Computerized Ship Design and Production)를 개발하여 국내의 모든 조선소에 전수하였 습니다. CSDP 개발연구는 학문적 기초연구도 아니고 현장 적용형 엔지니어 링도 아닌 중간 단계의 기술 개발로서 그 아이디어를 학회에도 소개하고 조 선소도 참여토록 하여 개발했습니다. CSDP 개발 연구책임자는 장석 박사로 서 10여년에 걸쳐 꾸준히 계속함으로서 한 가지 핵심기술이 국내의 모든 조 선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된 것입니다. 소장 재직 시에 조선소에 가보니까 현장 기술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것을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국가연구소가 해야 하는 일은 현장 업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러한 툴을 개발해서 전수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성진 장관이 그것을 알고서 나에게 김 박사 선박연 구소가 가지고 있는 것 다 기업에 전수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컴퓨 터 프로그램까지 넘겨주고 프로펠러 계통 설계법은 강의까지 해주었습니다. 대형조선소는 자체능력으로 모방했고 중형조선소 이하는 우리가 강의 방식 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2.4 안정적 연구 분위기 조성이 연구성과의 지름길 저는 8년간 기계연구소의 선박 분소장을 한 다음에 기계연구소 소장에 임 명되었습니다. 그 8년 동안 박승덕( 朴 勝 德 ) 박사님과 이해( 李 楷 ) 박사님이 기 계연구소 소장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8년간 안정적으로 꾸준히 일할 수 있었 다는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두 분 소장님이 연이어
129 서 중요한 사항 이외에는 별 간섭 없이 제가 소신껏 일하도록 분위기를 만 들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제가 기계연구소장이 되 어 선박 분소장을 장석 박사에게 넘겨 준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앞서 언급 한 CSDP 개발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러한 8년간의 안정기에 개발된 것 입니다. 목표를 명확히 하고나서는 연구책임자에게 맡겨서 소신껏 꾸준히 계속하여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이와 같은 성과가 나올 수 있습 니다. 이는 특히 정부가 연구행정을 수행함에 있어 필히 지켜야 할 매우 중 요한 수칙이라 생각합니다. 기업이나 정부의 구조조정과는 달리 연구기관의 통폐합이나 잦은 기관장 교체는 연구 능률이나 성과 제고에 있어 오히려 역 행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2.5 영세 어민을 위한 소형어선 근대화 제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 가진 목표중의 하나가 우리나라의 어려운 어민들 의 배를 근대화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선박분소가 한 일 중에는 소형어선사 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영세 어민들의 배를 근대화하는 사업이었 어요. 무겁고 만들기 힘들고 연료 소비량이 큰 전통적 목선을 가볍고 연비가 좋은 FRP선으로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성공함으로서 저 의 귀국 목표의 하나가 달성된 것입니다. 기술개발의 핵심은 어선의 재질을 목선에서 FRP선로 바꾸는 것인데 재질 을 FRP로 바꾸면 매우 가벼워지고 튼튼해지고 스피드를 올릴 수 있는 것은 좋으나 물위에 떠가는데 안정성이 나빠져서 배가 전복하기 쉬워지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전문가들은 그걸 조선공학적인 관점에 서 선형을 개조해서 스피드뿐만 아니라 안정성도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선 형을 디자인해 FRP선을 건조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의 소형어선 수준으로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선진국의 50% 정도 수준으로 만든 이유는 그 당시 어민들이 그러한 수준의 배를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어민들의 취향 에 맞추기 위한 배려를 했는데 예를 들면 갑판은 나무로 했는데 이는 어민 들이 고기를 잡은 후 칼로 쳐서 다듬는데 FRP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
130 다. 그 때 13척의 시험선을 건조하여 어선협회에 모두 넘겨주었어요. 그래서 어선협회가 그것을 바탕으로 소형어선 근대화를 추진했는데 이게 성공했어 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나라 소형어선의 거의 전부가 FRP선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3. 통폐합의 시련을 극복하고 재도약 (박승덕 박사 회고) 3.1 예상 밖의 기계금속시험연구소 소장 취임 저는 1980년 11월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아 시는 바와 같이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이듬해인 1980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후 정부출연연구소에는 가히 혁명적인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부출연연구소들은 예외 없이 유사한 연구소와 통폐합의 회오리를 당하게 되었고 연이여 연구소장들이 새로 임명 되는 변화가 단행되었지요. 그런데 그 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어김없이 출연연구소는 다시 또 합해지고 분리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첫 번째의 시작이 전두환 대통령 때 입니다. 그 당시 나는 육군사관학 교에서 교수부의 기계공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수부 차장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입니다. 그 즈음 전기공학과 교수로 있던 오명박사는 청와대 과학기 술보좌관으로 발탁되어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와대의 오명( 吳 明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받아보니 지금 국 보위에서는 정부출연연구소의 통폐합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 임명할 소 장후보를 물색하고 있는데 그 중 기계금속시험연구소 소장의 적임자가 나 밖에 없으니 수락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 때 나는 사실 조금만 기다리면 교수부장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별을 달고 장군이 되는데 그 기회를 놓 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무슨 소리요, 저는 안 갑니다. 라고 펄펄 뛰 었지요 그런데 이미 결정이 된 사실이고 지금 이사회가 열리고 있는데 하 여간 나와 보세요. 라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기계금속시험 연구소의 이사회가 열리고 있는 코리아나호텔에 가보니 이사회에서 저를 연 구소장으로 임명하였으니 인사나 하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때 육사교수이
131 면서 육군 대령의 신분인데 민간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니 우선 군복을 벗 어야 되겠기에 국방부로 가서 예편지원서부터 제출하였습니다. 당시 기계금속시험연구소는 이미 1년 전에 서울 구로동에 있는 정밀기기센 터(FIC)와 통합이 된 상태였고 국보위에서는 선박연구소를 기계연구소로 통 합시키기로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3.2 선박연구소를 흡수 통합하라는 갑작스런 지시 선박연구소는 원래 KIST의 부설 기관으로 설립되었고 후에 대덕으로 이전 하면서 독립된 연구소로 되었고 소장은 김훈철 박사였습니다. 그런데 느닷없 이 이 연구소도 기계연구소로 통합시키라는 얘기예요. 그러나 법적 하자 없 이 두 연구소를 통합하는 행정 절차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 선 내가 선박연구소 소장을 겸임하는 절차를 밟아 두 연구소의 소장이 된 다음 통합하면 무리가 없다는 자문을 받아 그렇게 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기계금속시험연구소 소장으로 11월에 취임한 다음 한 달 후 인 12월에 선박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또 한 달 후인 다음해 1981년 1월에 두 연구소를 통합하여 한국기계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통합된 연구소의 소장으로 다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선박연구소가 갑작스럽게 기계연구소 산하의 분소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선박연구소 소장이었던 김훈철 박사는 갑자기 소장에 서 분소장으로 격하되는 입장에 처하게 되어 난처하게 되었으나 저의 간곡 한 부탁을 어기지 못하고 결국 선박분소 소장을 맡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3 이질적 3개 연구소의 통합에 따른 갈등 봉합은 힘든일 3개 연구소를 통합한 기계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후에 운영 현황을 파악 해보니 통합에 따르는 어려움의 해결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에 있 는 정밀기기센터(FIC)는 전자산업의 진흥을 위해 UN의 도움으로 설립된 기 관이고 창원에 있는 기계금속시험연구소는 독일정부의 지원을 받아 기술감 리를 통해 산업체의 안전을 돕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대덕에 있는 선박연구소는 미국의 조선연구소 운영 시스템을 모방하고 있었 는데 이처럼 설립 목적과 운영시스템이 서로 다른 3개 기관을 통합해 놓으
132 니까 인사관리 시스템, 행정관리 시스템, 연구관리 시스템 등을 통합하는 일 이 아주 힘들었어요. 특히 기관장이 어떤 전공 분야의 인사가 되느냐가 매우 민감한 문제로 부 각되어 화합을 이루는데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니까 선박분소에서는 기계분야 출신이 통합된 연구소장이 됐 으니까 선박은 이제 죽었어. 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지요.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배려를 해야 했습니다. 궁리 끝에 제가 생각 해 낸 것은 선박분소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기위해 기계연구소 본소의 행 정부장 기획부장 심지어 비서와 소장의 운전기사까지도 선박분소 사람으로 채용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3.4 기계금속연구소의 주종 업무를 기술감리 업무에서 연구업무로 전환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쳐 통합된 기계연구소로 개편된 후 산하 분소를 방 문하여 운영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선박연구소는 KIST산하에서 발전됐기 때문에 완벽한 연구관리 체제를 갖추어 연구관리 개념이 정착되어 있는 반면에 창원에 있던 기계금속시험연구소는 연구 보다는 기술감리를 위 주로 비즈니스 경영형태로 운영되고 있음을 발견했어요. 연구소의 보고는 주 로 지난달에는 돈을 얼마 벌었고 요다음 달엔 수입이 얼마가 될 것이라는 등의 내용으로 연구소장으로 온 저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계금속시험연구소는 독일 정부의 지원으로 독일의 TUV라는 기술감리 회사와 긴밀한 기술협력을 하고 있었고 TUV에서는 창원에 상주 기술감독관 두 사람을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시험평가, 기술감리 등의 서비스 위 주로 연구소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받아 기관을 운영하는 체제로 되어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연구소는 모름지기 연구가 주 임무가 되고 기술감리는 보조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연구소의 기구개편 을 단행 기계연구부, 금속재료연구부 및 기술감리부 등 3개 연구부로 조직을 새로 짜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독일정부에서 난리가 난거예요. 자기들이 지원해서 독일식의 시험평가 감리기관으로 정착시켰는데 연구소장이 새로 오더니 그걸 다 없애고 연구 위주로 조직개편을 한데 대해 항의를 해왔습니다. 저는 독일 정부와 TUV를 차례로 방문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 했습니다. 한
133 국적인 정서에서는 연구를 하지 않고 시험만 한다고 해서는 우수한 박사급 인력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논리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는 연구와 시험감리를 병행하게 되면 시너지 효과가 있게 되지만 시험감리만 해서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논리를 그들은 결국 받아들여 연구 와 기술감리를 병행한다는 조건으로 독일정부의 양해를 받아내었습니다. 그 때 만약 독일정부의 뜻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면 기계연구소는 기술감리 시 험연구소로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3.5 연구소의 법적 소재지 결정 문제까지 발생 제가 연구소장으로 취임한 후에 3개 연구소를 통합한 한국기계연구소의 법 인소재지 즉 연구소 본부의 위치를 정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통합 되기 전에는 3개 연구소가 각각의 소재지에 본부가 있었으나 통합 후에는 이들 중 1개소에 본부를 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3개 연구소는 통합된 후에 도 3개 지역에 그대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서울에는 정밀기기센터(FIC), 창원 에는 기계금속시험연구소, 대덕에는 선박연구소가 위치하고 있었고 이 3개 분소는 거의 규모나 인원이나 예산이 비슷해서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연구소의 본부소재지 결정 문제가 나오니까 간부들은 모두 서울에 두어야 된다고 주장하고 그게 안 되면 차선책으로 대덕으로 정해야 한다고 했습니 다. 본부가 서울에 위치하면 대 정부 접촉 문제가 편리해진다는 것이고 대덕 에 위치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소가 대덕에 있는데 기계연구소 만 창원으로 본소를 정하게 되면 불리해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중히 생각해 보니까 대부분의 중요 기계관련 업체가 창원단지에 있고 그 들과의 접촉이 중요하고 또한 본부를 서울이나 대덕으로 정하면 창원연구소 에는 외국에서 스카우트해서 오는 박사급 연구원이 오기를 꺼리게 되어 창 원연구소는 큰 타격을 줄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 고민 끝에 간부들이 모두 서울 아니면 대덕으로 하자는 건의를 뿌리치고 창원을 기계연구소의 법적인 위치로 결정하고 소장은 본부인 창원에서 근무하게 되 었습니다. 입지로는 제일 불리한 곳이었으나 기계공업단지를 육성하고 지원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34 3.6 LNG 운반선 국산화 주장 관철 제가 기계연구소 소장 직에 있을 때 일인데 하루는 조선공사의 남궁 호( 南 宮 浩 - 앞에 나왔던 남궁 련 회장의 자제분) 사장이 김훈철 박사의 소개를 받아 전화를 걸어 나를 만나서 브리핑 할 일이 있으니 시간을 꼭 내어 달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시라고 해서 당시 구로동에 있던 FIC분소의 소장실 에서 만났습니다. 남궁 호 사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브리핑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당시 에너지 자원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로 에너지 수입 다변화정책을 밀고 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LNG를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 게 되었는데 동력자원부 관리들의 경험부족으로 인도네시아와의 계약 내용 이 한국에게 매우 불리하게 체결되어 막대한 국익의 손해가 예상된다는 것 이었어요. LNG를 수십 년에 걸쳐서 장기 구매 해주는 것만으로도 인도네시 아에 대단한 인센티브를 준 것인데 여기에 추가하여 한국까지의 LNG 수송 권 까지도 인도네시아에 주었다는 거예요. 또한 동력자원부는 LNG 수송을 CIF 조건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LNG를 선박으로부터 육지로 펌핑하는 고가 의 비용과 수송 위험에 따른 모든 보험료까지 우리 정부가 다 부담하게 되 어 너무나 불리한 조건의 계약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인도네시아는 LNG 판매 이권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국에 수송하는 이권까지 독식하여 벌 써 그 수송권의 프리미엄을 다른 나라에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조선공업 육성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었는데 LNG 운반선을 한국에서 건조하고 그 배로 우리가 LNG를 직접 운반하면 조 선공업도 살리고 동시에 막대한 수송에 따르는 이익도 우리가 챙길 수 있다 는 얘기예요. 그러니 저보고 이를 바로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들어 보니까 공감이 가는 주장이었어요. 남궁 호 사장이 그러한 내용의 브리핑을 했는데 그 때 저는 처음으로 슬라 이드 방식의 브리핑을 받았어요. 그 당시만 해도 차트에 기록하여 한 장 한 장 넘기며 설명하는 차트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저는 슬라이드 브리핑 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가 브리핑한 내용에 대해 확신 을 갖기 위해서 우선 선진국의 생활을 확실하게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내가 유럽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남궁 호 사장은 LNG선 건조기술 은 아주 고도의 기술로 이 기술을 가진 나라는 세계에서 프랑스와 노르웨이
135 두 나라 뿐이니 한번 방문해 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방식은 멤브레인 타 입이고 노르웨이는 모스 타입인데 모스 타입은 LNG 탱크를 공모양의 구형 으로 만들고 멤브레인 타입은 탱커형으로 만드는 기술이라 했습니다. 남궁 호 사장은 자기가 저를 동행하면 기술을 빼내 갈 가봐 잘 안보여 줄지도 모 르니까 나 혼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나는 국가 연구 소의 소장이며 선박연구소도 있으니 보여 줄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좌관과 함께 가서 보았는데 한국에서도 충분히 건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청와대에 다행히 김재익( 金 在 益 - 아웅산 사고로 희생되신 분) 경제 수석 밑에 과학기술보좌관으로 오명 박사하고 홍성원( 洪 成 源 ) 박사가 있었는 데 제가 잘 아는 오명 박사한테 찾아가서 울분을 토하면서 말했어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LNG를 사주는 것만 해도 막대한 혜택과 이익을 인도네시아 에 주게 되는데 그 수송권의 프리미엄까지 다 넘겨줬으니 이런 멍청한 짓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 모두 고쳐야 됩니다. 오명 박사가 가만히 듣더니 전적 으로 동감이라면서 전두환 대통령께 보고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인도네시아 측과 재교섭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측은 너희는 팔기 만 하고 우리가 LNG선을 건조하여 수송하겠다. 라고 하니 인도네시아 측 은 지금 와서 무슨 소리냐! 우리는 수송권 프리미엄까지 다 받고 팔았는데, 계약 위반이다 라는 등 난리가 났어요. 우리 측은 계약위반이라도 할 수 없 다. 우리가 사주는 입장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사겠다. 라고 응수하는 등 옥신각신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가지고 그게 문제가 되어 결국 당시 동력 자원부 장관까지 해임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청와대에서 강력하게 밀어붙여 결국 LNG선을 한국에서 건조하 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보니까 LNG선 관련 로비는 남궁 호 조선 공사사장이 시작했는데 LNG선을 건조는 현대조선이 따낸 것을 알게 되었습 니다. 저야 어디서 건조를 했는가는 상관이 없지만 여하튼 남궁 호 사장한테 는 상당히 미안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3.7 영세 어민을 위한 소형어선 현대화 사업 그리고 제가 선박연구소장까지 겸하고 있던 때의 일인데, 전두환 대통령께
136 우리나라 영세 어민의 현황에 관해 브리핑을 올린 일이 있어요. 브리핑의 내 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기르는 어업을 해서 영세 어민들은 먼 바다까지 나가지 않아도 가까운 연근해에서 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가까운 바다의 고기를 싹쓸이로 모두 잡아 버 려 가까운 연근해에는 고기가 없으니 점점 멀리 나가야 함으로 어선의 성능 이 좋아야 하는데 이게 문제였습니다. 우리 어민은 영세하여 조그마한 어선 에 선박전용 엔진이 아닌 경운기 엔진을 동력으로 달고 다니는 형편이었어 요. 경운기는 육상 농업용 엔진이기 때문에 전진만 하지 역회전 즉 후진을 못해요. 배는 가다가 정지를 하려면 엔진을 역회전 시켜야 하는데 경운기에 는 역회전 장치가 달려있지 않아 제동을 걸 수 없어요. 그리고 경운기는 육 상용이기 때문에 염분이나 염수에 약하여 쉽게 녹이 쓸고 고장이 나서 사고 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정부의 정책 결함과도 깊이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영 세어민을 위한 정책이 부실하여 어선 하나 만드는데도 국방부 허가를 위시 하여 상공부 도청 등 5 군데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 은 김훈철 박사가 다 일러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제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사실 그대로를 보고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앞뒤를 가리지 않은 겁 없는 보고였지요. 전두환 대통령은 보 고를 받고 나서 당신은 선박연구소 소장까지 겸하고 있는데 무얼 했기에 어민들이 그 지경이오? 라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구소장이 된 지 한두 달밖에 안됩니다. 이제부터 제가 일 년 이내에 소형어선의 현대화를 추진하여 소형어선용 엔진을 개발하여 지원하고, 잡는 어업이 아니라 기르는 어업이 되도록 하여 영세어민이 바다 멀리 안 나가도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끔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은 배석했던 김 재익 경제수석 등 보좌관들에게 당신들 뭘 했어! 하고 막 야단을 쳤습니 다. 나의 당돌한 이실직고 보고로 인해서 비서실이 한바탕 난리가 난 셈이었지 요. 그 때 대통령은 그 후속 대책을 나한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선박연구소 가 주동이 되어 연안어업 실태조사를 시작했으며 나는 그 때 우리나라 해안 을 몇 달에 걸쳐서 일일이 다녀 보면서 소형어선 현대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137 추진되었습니다. 그 때 소형어선의 재질은 목재에서 FRP로 바꾸고 엔진은 미국에서 기술도입 하여 선박용 소형엔진의 국산화를 이룩했습니다. 그 후 저는 연구소장을 그만두고 과기처의 기계연구조정관으로 전직했을 때에 있었던 일인데 기계연구소에서 건조한 FRP 소형어선을 모두 영세어민 들에게 무상양여 하는 조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또 간단하지가 않터라구요. 정부 재산을 무상으로 민간에게 넘겨주는 일이 절차상 복잡했습 니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었는데 당시 이정오 장관도 뭐 그게 그 렇게 어렵게 되어 있느냐 고 막 화를 낸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을 거쳐서 소형어선의 현대화가 이루어졌으며 기계연구소의 선박분소에서 많은 고생과 노력을 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해저 탐사용 잠수정 개발 또 하나는 제가 과기처의 기계조정관으로 재임 할 때 해저 탐사용 잠수정 개발에 관여한 일이 있습니다. 연말이 가까운 어느 날 선박분소장인 김훈철 박사가 저를 찾아와서 프로젝트를 하나 하시죠. 이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장 관님께 보고하면 장관도 점수 따고 조정관도 점수 딸 수 있을 것입니다. 라 고 했습니다. 대체로 연말이 되면 다 쓰지를 못한 연구비 몇 억 원 정도가 자투리로 남기 마련인데 그 돈을 모아 새로운 아이디어의 프로젝트를 하자 는 것이었습니다. 김 박사의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당시 우 리나라는 3면이 바다인데도 바다 밑을 살피는 해저 탐사정이 하나도 없었어 요. 그래서 해양연구소에서 수심 250미터까지 들어갈 수 있는 해저 탐사정 을 외국에서 구매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오는 값만 주면 선박연구소에서 수심 250미터까지 탐사할 수 있는 잠수정을 만들어 내겠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김 박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한 후에 이정 오 장관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연말까지 쓰지 못할 연구비 잔액이 아직 남 아 있습니다. 이 잔액으로 추진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가져왔는데. 이거 하 시면 장관님도 대통령한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없는 잠수정 을 구입하는 값으로 만들 수 있다면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개발하는 비용 은 보통 판매가의 2배 3배의 돈이 드는 것인데 구입하는 값으로 만들 수 있
138 습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장관의 허가를 받아 내어 십억 원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80년대 초에는 십억 원이 넘는 연구 비는 매우 큰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는데 그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잠수정 을 만든 후에 그것의 사용처를 사전에 확실하게 해 두는 일이었습니다. 그래 서 제작은 선박연구소가 하지만 잠수정의 운용은 해양연구소의 몫이라는 것 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 해양연구소 허형택 소장을 불러 심해저 탐사용 잠 수정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만들면 그것을 사용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 소. 그러니까 만드는 과정에 해양연구소에서 관여해 주시요. 설계조건이라든 지 제작 조건 등을 당신이 미리 제시하고 나중에 사용할 때 차질이 없도록 협조해 주시요.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허형택 소장의 답은 의외로 이 사업은 사용자가 될 해 양연구소가 주관해야지 선박연구소가 주관할 성격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해양연구소가 사업을 주관하고 선박연구소는 하청 받아 개발하는 방식을 택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십억 원은 굉장히 큰 돈이었기 때문에 누가 사업을 주관을 하느냐가 첨예한 관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 는 만드는 것은 선박연구소가 전적으로 책임질 일이고 이 과정에서 최종 운 영자인 해양연구소가 설계지침을 만들면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설득하려 했 습니다. 그러나 설득이 잘 되지 않아 옥신각신 하다가 허 소장은 나중에는 난 모른다고 그러더니 나타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잠수정이 만들어지 면 운영은 해양연구소가 하게 됨으로 관심을 갖고 제작과정에 관여를 하라 는 내용의 과기처 공문을 시달해 두었습니다. 그 후 잠수정 건조가 완료되었 는데 허 소장은 나는 모른다고 버텼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권원기( 權 元 基 ) 연구조정실장한테 보고했더니 펄펄 뛰면서 막대한 돈을 들인 사업인데 어떻게 되어 사용자가 모른다고 하는가? 라고 하면서 담당관인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게 무슨 소리요. 그때 회의록을 보시오. 제가 애초에 시작 단계에서 해양연구소가 사 용할 것이니까 미리 관여를 하라고 전달한 공문이 있습니다. 이는 장관 명령 에 불복종한 것입니다. 라고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은 해양연구소가 가져가게 됐어요
139 그런데 최후에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은 것은 실제로 250미터 심해저까지 내려가는 실증시험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연안의 바다 밑 은 고기잡이 어선이 버린 어망이 널려 있어 탐사정이 내려가기가 매우 위험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잘못 들어가서 잠수정의 스크루가 어망에 걸리면 다시 올라 올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용할 사람이 안전 문 제를 들고 나오는데 만든 사람이 심해까지 들어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선박연구소의 연구책임자가 250미 터 심해까지 들어가서 시험을 끝내고 해상으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올라와서 는 이제 살았구나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그 후에 이 잠수정은 여 러 곳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3.9 소장 임기가 2년으로 된 해프닝 제가 기계연구소장 초임 때 한국기계연구소는 상공부 소속이었어요. 그리 고 상공부 소속 연구기관의 이사회는 이사가 각 부처의 차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소장 임기는 4년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소장으로 부임한지 두 달도 안 되어 대부분의 출연연구기관의 연구소는 과학기술처로 소속이 바뀌게 됩 니다. 과기처 소속으로 된 다음 이사회가 개최되었는데 이사회에 실제로 참 석하는 사람은 차관이 아니라 국장이나 과장급이었습니다. 과기처에서는 관 례에 따라서 차관 대신 국장의 이사회 참석은 관행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과 기처가 스스로 산하 연구소를 격하시키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 다. 또한 연구소 소장 임기도 상공부와는 달리 2년으로 단축시켰습니다. 이 에 대한 과기처의 생각은 2년하고 한번 자동으로 연임하는 관례를 만들면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소장이었던 박긍식( 朴 肯 植 ) 표준연구소장, 현병구( 玄 炳 九 ) 동력자원연구소장, 백영학( 白 榮 鶴 ) 전자통신연 구소장 그리고 저는 임기 2년의 소장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관례로 두 번 연임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요 잠수정에 관한 부연 설명 (김훈철 박사 회고) 그때 잠수해 들어간 그 배는 아직까지도 한국의 심해 잠수 기록인 252미 터를 달성했습니다. 그 후에도 유인 잠수정에 의한 잠수로서는 그 기록을 깨
140 지 못한 대한민국 최고기록이에요. 그리고 그 잠수정 사업에 꼭 첨언해야 할 사건이 있는데 대통령 영부인께서 어린이 들이 그걸 타고 들어가서 고기도 좀 보고 그러는 게 좋지 않아요. 애들 좀 데리고 가서 구경 좀 시키쇼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보통의 잠수정은 2인승인데 애들을 태우고 들어가 게 하려니까 할 수 없이 3인승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잠수정 내부 스페이스 를 바꿨어요. 세계에서 3인승 잠수정은 기록이 없어요. 그리고 건조된 잠수정을 해양연구소에 넘겨줬는데 선원과 시험장비까지 모 든 걸 다 넘겨주었어요. 그런데 해양연구소에서 제대로 쓰질 않았어요. 그걸 우리가 설계했고 그것이 기초가 되어 우리도 잠수정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요즘은 무인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그 후에 선박연구소에는 6000미터까지 들어가는 무인 잠수정을 우리 기술로 개발했거든요. 뿐만이 아니라 그 후에 우리 기술로 통신장비들까지 다 개발해가지고 지금은 국제수준에 도달했습 니다. 그러니까 미국, 불란서, 일본, 러시아 등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한 것 입니다. 참고자료 1. 참고문헌 1. 한국해양연구원 30년사,한국해양연구원 발행( ) 2. 한국기계연구원 30년사,한국기계연구원 발행( ) 3. KIST 40년사,한국과학기술연구원 발행( ) 2.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김훈철 ( 金 燻 喆 1933년 생) 1956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항공공학과 졸업 1964 미국 미시건대학교 조선공학과 박사 미국 미시건대학교 조선공학과 조교,전임강사,조교수 미 해군 선박연구개발센터 조선기사 (DTNSRDC 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조선해양기술연구실장,
141 부설 선박해양연구소 연구부장,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진해기계창장) 한국선박연구소 소장,한국기계연구소 대덕선박분소 분소장 한국기계연구소 소장 한국기계연구원 연구위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정책전문위원,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민간위원 장 석 ( 張 晳 1942년 생) 196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과 졸업(학사) 1987 충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석사) (주)대한조선공사 기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선임연구원 한국선박연구소 선임연구원,책임연구원 한국기계연구소 책임연구원,부설 해사기술연구소 소장, 선박해양공학연구센터 소장, 한국해양연구원 해양시스템안전연구소 책임연구원 충남대학교 겸임교수 박승덕 ( 朴 勝 德 1933년 생) 1956 육군사관학교 졸업 1971 캐나다 Otawa대학 기계공학 박사 육군사관학교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교수 한국기계연구소 소장 과학기술처 기계연구조정관,연구개발조정실장,기술정책실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김재관( 金 在 官 1933년 생) 1956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학사 1960 독일 뮨헨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 박사 독일 뮨헨공과대학교 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부장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142 국립공업표준시험소 소장 한국표준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교수 김대석 박승덕 김훈철 강박광 장석 김재관 <사진 10> 2차 워크숍참가자 회의사진
143 3. 세계 1위의 우리나라 조선산업 현황 (자료 :산자부 htp:/blog.korea.kr/shipbld/v/ :47:29) <표 2-1> 한국의 조선산업 현황 수주 건조 잔량 선박류 부품 척 억불 척 억불 척 억불 수출(억불) 2004년 년 <표 2-2> 주요국의 선박 수주량 최근 추이 구분 2003년 2004년 2005년 천CGT 점유율(%) 천CGT 점유율(%) 천CGT 점유율(%) 한국 18, , , 일본 12, , , 중국 6, , , EU 3, , , 전세계 43, , , <표 2-3> 주요국의 선박 건조량 최근 추이 구분 2003년 2004년 2005년 천CGT 점유율(%) 천CGT 점유율(%) 천CGT 점유율(%) 한국 7, , , 일본 6, , , 중국 2, , , EU 3, , , 전세계 22, , , CGT=CompensatedGrossTon
144
145 제3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설립과 가표준제도확립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성과 분석
146
147 제1절 국가측정표준 제도 발전 과정 개요 과학기술 문명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일상생활에 있어 양적 정확도 를 요구하는 사물에 나날이 접하고 이를 편리하게 이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몸에 맞는 치수와 색깔의 의류, 원하는 성분 및 영양가를 포함한 식품 과 의약품, 원하는 구조와 크기의 주거 공간 등은 의식주와 연관되어 양적 정확도가 요구되는 사례이다. 그 외에도 인간이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물의 생산에 있어는 양적 정확도가 필수요건이다. 전류ㆍ전압ㆍ주파수 등의 값이 정확하게 조정된 모든 전기ㆍ전자ㆍ통신기기, 출력과 속도를 정확하게 조정 할 수 있는 자동차ㆍ기차ㆍ비행기ㆍ엘리베이터 등의 모든 수송수단, 발열량 을 정확하게 조정할 수 있는 모든 난방용 기기, 대기 및 수질의 오염 수준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알려주는 환경보존 시스템, 시간ㆍ질량ㆍ온도ㆍ압력ㆍ습 도ㆍ열량ㆍ음량 등과 연관된 모든 기기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물의 생산ㆍ유통ㆍ활용 과정은 특정 양의 측정과 그 양적 정확도를 요구한다. 국 가차원의 측정표준 확립은 이러한 양적 정확도를 확보하는 데 있어 가장 기 본적인 제도이다. 과학적 측정법에 근거한 현대적 의미의 측정표준 기술 개발 및 그 제도적 관리체계 확립은 산업화시대에 진입해서야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기 시작 했다. 특히 1700년대 중반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들어서 증기동력에 의한 기 계화의 발전 과정에서 측정표준 기술의 체계적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800 년대에 출현한 전동기, 발전기 등의 전력을 동력으로 하는 기계산업의 발전 과정에서 측정표준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국제적 관리체계를 형성하 게 된다. 1800년대 중반까지 국가마다 다른 단위계를 개발 사용하는 수준까지 발전 했으나, 산업 활동의 국제협력, 국가 간 교역, 국제 과학기술 정보 교환 등에 있어 혼란을 초래하는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1875년에 프랑스, 영국, 미국 등 17개국이 파리에서 미터협약에 조인하여 국제도량형국을 프랑스에 설치 하게 되었다. 이로서 측정표준에 관한 최초의 국제적 관리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사물에 관한 양적 정확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양적 정확도를 필요로 하는
148 모든 업체나 기관에서 사용하는 측정기기나 측정방법의 신뢰성이 확보되어 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정밀ㆍ정확도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 과 방법을 보급하는 표준기술의 보급(교정 체제)과,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이 발생하는 정밀ㆍ정확도 확보 수요에 대응하거나 기존의 측정표준 수준을 높 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의 새로운 개발 즉 표준기술의 연구개발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산업화를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서구 제국에 비해 약 100여년 이 뒤늦은 1960년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현대적 측정표준에 관한 국가적 관 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1년에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상공부 산하에 표 준국을 설치하고 1964년에 KS표시 허가 제도를 실시한 것이 그 효시이다. 우리나라는 해방과 6.25전쟁의 혼란이 가라앉은 1959년에 미터협약에 가입 함으로서 비로소 국제표준과 일치하는 미터법의 사용을 공식화하게 되었다. 계량법(이후 계량과 측정에 관한 법률 로 바뀌었다가, 현재 국가표준기본법 이 됨)에 의하면 1964년 1월 1일부터 국내에서 사용되는 모든 계량 단위를 미터법으로 통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는 경공업 위주의 산업 수 준에 머물렀었기 때문에 초보적인 단계의 공업표준화규격을 제정하는 정도 의 표준화 활동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1966년에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 시에 한미과학기술협력의 상징으로 길 이, 질량, 부피 등의 표준기 각 1조를 기증한 일이 있었다. 이는 한국의 산 업 현대화를 위해서는 국가표준 기반확립이 필요하다는 미국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1968년 7월에는 양국 상공장관 회의에서 한국에 표준 관련기관을 설립하고 양 기관이 협력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72년 6월 미국 국립표준국(NBS) 조사단이 내한하여 한국표준제도의 현대 화와 국가표준기관 설치를 건의하였으며, 1974년 9월 미국 조사단이 내한하 여 표준연구소 설립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후 1974년 11월 AID차관 5백만 불의 공여에 대하여 국회의 승인을 받아 표준연구소 설립이 시작되었다. 표준연구소 설립 이전에는 국립공업시험원(지금의 기술표준원 전신)과 FIC(정밀기기센터) 등이 표준기관 역할을 담당하면서 산업 활동에 쓰이는 각종 계측기기의 교정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 때 사용된 표준기와 기준기들은 일본 등 해외에서 교정을 받았으며, 일 부는 공군측정시험소를 통하여 주한 미군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149 이때의 측정표준은 주로 마이크로미터 등 길이 분야와 각종 전기량 측정 등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70년대 초반까지는 기계와 전기 등 일부 필요한 산업에 대해서는 당시의 국립공업시험원 등을 통해서 일본 등 외국의 표준에 의존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아직 국내에 측정표 준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고 이 기술의 체계적인 발전을 전담할 기관도 없었 다. 그러나 이 시기에 비로소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측정표준 제도 확립의 움직임이 태동한 것이 사실이었다. 7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발전에 착수하 게 되었고, 때마침 자주국방을 목표로 한 방위산업 육성과 맞물리면서 높은 수준의 측정표준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1975년의 한국표준연구소 설 립은 당시의 이 같은 산업발전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면서 독자적인 국가표준 제도 확립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75년에 한국표준연구소(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가 설립된 이후 1988 년까지의 기간은 우리나라의 측정표준 확립의 뿌리를 내린 시기였다. 이 당 시의 기술개발 전략은 기존의 외국 시스템을 모방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능 한 빠른 시간에 가능한 많은 분야의 측정표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는 때 마침 활발해진 정밀기계와 전자 등 기간산업의 발전에 따른 수요증가와 일 치하면서 주로 역학분야와 전기전자분야의 측정표준 기술개발에 역점이 두 어졌다. 재정 측면에서도 연구원 설립 이래로 AID, ADB, OECF 등 차관사 업과 PTB를 통한 서독의 장비 및 인력훈련의 무상지원이 거의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측정표준 확립에 필요한 기간 장비와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특히 1985년에 시작된 정부출연 사업인 국가표준 분야확대 사업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년 상당규모의 예산을 보장하기 때문에 우리의 측정표준 능력 을 새로운 측정분야로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왔다. 이 같이 확립된 측정표준을 산업계 등 실수요자에게 보급하기 위한 국가교 정검사시스템이 이 시기에 발족되어 뿌리를 내렸다. 70년대 중반에서 80년 대 중반까지의 약 10여 년 간은 우리나라 산업은 기계와 전기전자 산업 등 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따라서 측정표준 기술도 이들 산업지원과 관련된 분 야를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이외에 화학, 방사선 분야 등에 대한 기술개발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이들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는 90년대에 이루어졌다
150 1988년에 우리나라는 국제도량형위원회(CIPM) 산하의 9개 자문위원회 중 에 길이, 시간, 온도 등 세 개 자문위원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들 자문위원회는 전통적으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이에 따라 선진국 들과 대등한 자격으로 각종 국제표준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 지 주로 응용연구 수준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측정표준 기술개발 노력은 기 초단위의 개발과 정밀정확도 제고를 위한 각종 물리현상 연구 등 기초연구 영역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여타 CIPM 자문위원회 가입도 그 후 계속 추진 되어 현재에는 10개 자문위원회중 단위 정의 자문위원회를 제외한 9개 자문 위원회에 가입하였다. 1990년대 들어 사회복지 수요가 증가하면서 보건, 환경, 안전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측정표준 기술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다. 선진국형의 고령화 추세에 따른 보건의료 문제 및 산업고도화와 도시화에 따른 각종 환경문제 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새로운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에 있어서 오염원을 추적하여 감시하면서 적절한 오염 방지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정에서 정확한 측정과 분석이 뒷받 침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각종 데이터의 신뢰성과 호환성이 보 장되고, 그에 따른 체계적인 방지대책 강구와 정책수립이 가능해지는 것이 다. 이 같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1990년대 들어 분석화학 분야와 방사선 분야 에 대한 측정표준 기술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한 건물 등 각종 사회시 설물들의 안전사고가 잇따르면서 전반적인 사회 안전에 대한 우려가 크게 확산되고 이 분야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었다. 따라서 사회 기간시설물의 안 전진단을 위한 측정기술 개발에도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국 내에서 개발 중에 있거나 사용 중인 각종 소재의 특성을 정확히 평가하여 국내 연구계와 산업계의 신소재 개발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소재특성평가사 업을 90년대의 중점사업의 하나로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측정표준 기술은 1975년에 한국표준연구소가 설립 된 이후 빠른 성장을 이룩하여 세계 10위권 수준에 도달하였다. 우리나라의 측정표준 기술 발전과정에서 1988년을 한 전기로 보는 이유는 이 해에 처음 으로 국제도량형위원회 산하 분야별 자문위원회에 가입을 시작한 때문이었
151 다. 이는 우리의 측정표준 능력을 선진국들로부터 인정받은 결과로서, 당연 히 우리에게는 가입에 따르는 역할분담의 의무가 따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분야의 국제단위와 정밀정확도 제고를 위한 각종 기초연구가 활성화 되 어 그때까지 선진국 기술의 모방에 그쳤던 수준을 넘어 독자적인 기술개발 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기술개발 전략은 전통적인 측정표 준 기술에 그치지 않고 점차 확대되면서 90년대 중반 양자현상을 이용한 측 정기술과 극미세 기술 등 미래 산업을 위한 요소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또한 90년대 들어 보건의료와 환경 등 사회복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기반기술로서 분석화학과 방사선 등 과거에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였던 분야에 대한 개발이 이루어졌다. 1988년 국제도량형위원회 산하 분야별 자문위원회 가입 이전만 해도 국내 측정표준 기술은 선진국 유사 시스템의 모방 수준으로서 독자적인 기술개발 은 거의 없었다. 이는 선진국들이 100년 가까이 걸려 확립한 측정표준을 단기간 내에 확립하기 어려운 때문이었고 측정의 정밀정확도 수준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의 측정 정밀정확도 수준은 선진 국에 비하여 1/10 내지 1/100 정도 낮은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1988년 을 고비로 국제표준기구에서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기초연구가 활성화 되기 시작하고 정밀정확도 향상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한국표준연구원의 설립 발전 과정과 우리나라의 국가 표준이 정립되 는 과정 등에 대해 당시 주요 참여 인사들의 워크숍을 통하여 회고를 정리하였음. (증언자들의 3차 워크숍, , 과우회 회의실)
152 제2절 표준연구소 설립과 초창기 기반확립 과정 1. 표준연구소 설립과 킬로그램원기 1.1 존슨 대통령이 보낸 미터법 표준기 (김재관 박사 회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매우 고전을 하고 있을 때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베트남 파병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미국의 혈맹임을 행동으로 표시 했고 미국은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65년에 박 대통령을 백악관에 초청하여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때 박 대통령 의 특별 요청으로 미국은 KIST의 설립을 적극 지원할 것을 약속했으며 그 다음해인 66년에는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답방하게 됩니다. <사진 11>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 이때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 미과학기술협력의 상징으로 미 터법 표준기(길이,질량,부피) 한 벌을 기증하였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그의 과학기술담당 특별고문 호닉(Donald F. Hornig) 박사를 통해서 박정희 대통 령에게 킬로그램 표준분동을 전달했는데 박 대통령은 대단히 좋아하셨습니 다. 이 표준분동은 주먹만 한 스테인레스강 분동이었으며 박 대통령은 깨끗 하게 잘 생겼네라고 하시면서 자기한테 온 선물을 만져보려고 했더니 호닉 박사는 각하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라고하면서 만지면 표준분동이 오염 되고 질량에 변화가 온다고 설명하니 박 대통령이 그것을 만지려다가 찔끔했습니
153 다. 그 선물은 미국이 한국의 현대화에 기반이 되는 표준제도를 한국에 심어 주려는 상징적 의미로 보내온 존슨 대통령의 선물이었는데 박 대통령은 끝 내 만져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 선물은 KIST 내의 한 방에 한 세트로서 모셔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KIST에 있었으니까 그걸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표준기 세트는 표준 으로서 사용되지 못하고 단순히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표준에 관 련된 법령이나 제도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으며 일반 상거래에 사용되는 측 정기기의 교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설도 되어 있지 않아 단순히 보관 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중화학공업을 촉진하면서 표준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나는 75년 에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때 대덕은 허허벌판이었으며 대덕에 첫 번째로 입주하는 연구소로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우리가 표준연구소 자리를 정하고 건설하여 존슨 대통령이 보내 준 표준기 세트중 표준분동은 실제 측 정에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데 노후 되고 부정 확해서 새것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은 그대로 모셔져 있습 니다. 1.2 우리나라 킬로그램원기의 역사 (이충희 박사 회고) 우리나라의 킬로그램원기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년 미터협약에 의해 국제도량형국(BIPM)이 설립되었으며 이어서 미터조약이 전 세계적으로 체결되었습니다. 일본도 미터조약에 가입한 몇 개 국가에 들 어 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고종황제 때였습니다. 1902년 고종황제는 평 식원이라는 기관을 설립했는데 평식원이 지금의 표준연구소에 해당하는 기 관입니다. 따라서 그 시점으로 보아 우리가 결코 표준분야에서 뒤진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이 킬로그램원기는 한일 합방 후에 일본에 있는 계량연구소로 이관 되었었는데 2차 대전 후에 맥아더 사령관이 일본에 주재할 때에 우리 나라로 다시 반환 되었습니다. 해방을 맞아 우리나라에 설치된 미군정청은 1949년 9월에 상무부 상무국 산하에 도량형연구소를 설치하고 미국인 고문 관 로슨과 한국인 소장 이호식 씨를 선임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1947년 1월 국내 원기를 가지고 검사를 받으러 일본 도량형검정소를 방문하던 중
154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가 3조씩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중 킬로그램원기 39번과 미터원기 10C번을 한국에 이관하도록 수속하여 일본잡화수출주식회 사를 통하여 일본 돈 28만 7,028엔을 지불하고 1947년 4월 17일에 우리나 라로 이관되었습니다. 그 킬로그램원기는 39번으로서 그 번호는 파리의 국 제도량형국이 처음부터 찍어낸 순서이며 첫 번째로 1번에서부터 40번까지 찍었으며 그중에서 39번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39번이니까 우리가 매우 빠른 거죠. 1.3 킬로그램원기의 뿌리를 찾아서 (김재관 박사 회고) 그런데 저는 그것을 명확히 규명하려고 파리에까지 갔었어요. Metrologia 에는 매년 원기 제작과 교정(calibration) 현황이 게재되는데 거기 어디에도 한국에 그것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었어요. 우리나라가 1890년대에 표준 원 기와 관련되어 대외 접촉이 있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었어요. 후일에 알려 진 바로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일본이 킬로그램원기 세 세트를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알고 그중에 한 개를 우리나라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때 미군정청 을 통해서 전달되었으며 맥아더 사령부의 협조를 얻는 데에 안동혁 박사가 노력하신 것으로 압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나라에 전달되었기 때문에 파 리의 국제도량형국에는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평식원이 설립된 것은 1902년경이었는데 그 당시 새로운 시대의 도 량형제도가 필요하니까 고종황제가 도량형규칙을 제정하고 평식원을 설치했 습니다. 그 후 도량형법을 법령 제1호로 제정하여 선포하였는데 이 때는 이 미 1905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이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이 작용된 것 으로 보입니다. 그 킬로그램원기는 해방 후에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되었었는데 1950년에 6 25사변이 일어나 퇴각하게 되니까 누군가가 그것이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금고 속에 있던 것을 싸서 피난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 킬로그램 원기는 상처를 받아 분동의 표면에 긁힌 자국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됐건 그 당시 그래도 그것이 중요하다고 싸 가지고 옮긴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아주 고마운 일이에요. 그 당시 원기는 가졌으나 사용할 데가 없어 공진청의 구로 동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표준연구소가 설립된 후에 존슨 대통령이
155 기증하여 KIST에 보관하고 있던 것과 함께 대덕의 연구소로 가져간 거예요. 2. 헌법에 명시된 국가 측정표준 조항 (김재관 박사 회고) 2.1 박 대통령 서거 후의 혼란기에 착수 79년에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가 도래하고 헌 법까지 개정하게 되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이때를 계기로 어떠한 정치적 상 황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 굳건한 국가표준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 으며 이를 헌법에 명시하는 일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나는 정치적인 혼란에 의해서 국가표준제도가 무너지면 우리가 힘써 이룬 한강의 기적도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정부, 국회, 법제처 등의 관계 요로에 방문하여 적극 설득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국가표준관련 헌법 조항을 만들어서 당이란 당은 다 돌아다녔습니다. 국회에 대해서는 김종필 씨와 김영삼 씨 등을 찾아가 건 의했는데 그 두 분은 흔쾌히 승인했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정치적인 혼란기 이지만 그런 과학적으로 중요한 제도는 헌법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바람직 하다는 호의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으나 그때 종로4가에 사 무실을 가졌던 이민우 신민당 총재도 찾아갔습니다. 그때 헌법을 고친다니까 각 당마다 경쟁적으로 헌법개정안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다 반영시 키느라고 각 당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했습니다. 2.2 최규하 전 대통령의 적극적 관심 정부의 경우 최규하 대통령에게 설명했더니 매우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 다. 그 당시 헌법개정을 담당한 것은 법무부였는데 법무부 장관은 관심을 표 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에게 적극적으로 고 려하라고 지시하여 일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수 십 년 동안 외교관을 역임하셨고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을 때에 표준시보 를 알리는 버킹검궁 시계를 거의 매일 쳐다봤다고 했습니다. 최 대통령은 아 주 좋은 어드바이스를 해줬다고 하면서 반가워했어요. 나는 헌법개정위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들도 만나서 교섭을 했
156 습니다. 변호사협회 회장으로 광화문 근처에 사무실을 가졌던 전봉덕 씨, 그 당시 적십자사 총재, 부산대학 총장 등이 헌법개정위원회의 위원이었습니다. 전봉덕 씨를 만났는데 그는 표준제도가 꼭 필요하지요, 시청에 시계가 있는 데 그게 제대로 맞아야지요라고 해서 나는 아, 그렇습니다, 사실 시계가 간 단한 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것에 따라서 행동을 하고 통신을 하고 교통 해야 되는데 그 시간 하나를 제대로 전국에 전달하는 제도가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헌법개정위원회는 일주일에 두 번 개최되었는데 나는 국가표준 제도 관련 자료를 만들어 제공했습니다. 2.3 전두환 전 대통령의 1980년 헌법 개정 때 헌법 제118조에 포함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의 짧은 재임기간(79년 12월 - 80년 8월) 중에는 헌 법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 10개월 후 전두환 대통령의 헌법개정 때에는(80년 10월) 118조에 포함되어 세계최초로 헌법에 국가표준제도를 명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노태우 대통령 때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헌법개정 시에는 헌법 제127조에 포 함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최초의 국가표준제도를 명시한 헌법으로 1980년에 개정되었고 그 다음에 1987년에 개정을 했는데 127조 제1항에는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 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가경제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과 학기술조항이고, 제2항은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라고 명문화된 표 준 조항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국가표준제도에 관한 근거 조항은 헌법 에 들어가 공고된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표준제도라는 표현으로 헌법에 들어 간 세계 최초의 조항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모방하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헌 법에 포함시킨 중국보다 2년 앞선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등소평 주석이 중국 을 개혁 개방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할 때 포함시켰습니다. 우리가 세계최초 로 국가표준제도를 헌법에 포함시키는데 내가 기여한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도 아주 기분 좋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각국의 헌법에 포함된 표준 관련 조항의 표현은 표준제도, 도량형표 준, 도량형제도 등의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표준제도 유형은 우리나라 헌법뿐이며, 도량형표준 유형은 미국, 독일, 브라질 등
157 3개국이며, 도량형제도 유형은 영국, 캐나다, 호주 등 8개국입니다. 이러 한 표현 중에서 우리나라 헌법에 포함된 국가표준제도 라는 표현이 표준 측면에서 볼 때 가장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의 의미는 국가표준기본법 에서 그 실체를 볼 수 있는데, 측정표준 제도, 참조표준제도, 성문표준제도 등 국가표준제도의 3개 세부 분 야 제도를 3위1체 형태로 포괄적으로 내포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2.4 표준제도 시행 부처의 2원화는 안타까운 현실 이렇게 훌륭한 헌법의 근거 조항과 그에 따른 기본법까지 제대로 정비된 우리나라에서 표준제도의 실제 시행에 있어서는 부처 간 이기주의 때문에 혼선을 빚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은 국가 표준원기를 관리하면서 그 정밀 정확도를 유 지 발전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과기부 소속이며, 그 러한 표준을 국내의 모든 관련 업체 및 기관에 보급하는 교정업무는 산자부 소관으로 분리되어 있어 양자 간의 협력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 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산자부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 중복되는 기능을 갖는 산업자원부 기술 표준원 을 별도로 설립하여 정밀 정확도의 교정업무를 수행하면서 국가교 정증명서를 발급하고 있으나 그 정밀 정확도를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국가원 기는 보유하지 않은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나라 나 표준제도는 모든 부처의 업무와 관련되기 때문에 표준원 은 어느 한 부처 차원이 아닌 국가차원의 표준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국가표준원 의 개념을 나타내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산업자원부 기술표준 원 이라는 한 부처 차원의 표준만을 관장한다고 오인될 수 있는 기관명을 사용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모든 부처의 업무영역에 적용되어야 할 국가표준기본법은 과기부 영역에 국한해서 적용되고 있으며, 실제로 전국에 표준을 보급하고 있는 산업자원부 기술표 준원 은 그 법적 근거도 모호한 상태입니다. 나는 이러한 모순된 제도가 하 루 빨리 제대로 정리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158 2.5 최규하 전 대통령의 표준시보제 설치에 대한 지원 앞서 언급한 최규하 대통령과 관련하여 최 대통령은 표준관련 헌법 조항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표준시보제 실행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신분입니다. KBS에 원자시계를 설치하고 표준시각을 방송하는데 그때 5억 원 정도가 필 요했어요. 또한 전화를 통해 표준시각을 알리는 데는 119나 112와 같은 특 수 전화번호를 부여해야 되었는데 그 모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어요. 다행히도 최규하 대통령 재임 당시에 마침 자동전화교환 장치가 도입되어 옛날에 있던 교환수가 필요 없게 되었고 국제전화교환에 사용하던 특수 전 화번호가 남아돌게 되어 116번을 표준시보용 전화번호로 넘겨주라고 최규하 대통령이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특수 전화번호는 화재나 범죄 신고 등 의 목적으로 국가중요기관에 부여하는 전화번호인데 그러한 중요 전화번호 를 표준시보용으로 사용하도록 특별배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16번에서 는 지금도 여전히 이 전화번호만 누르면 정확한 시간을 즉시 알려주는데 요 즈음 이것을 알고 활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이와 비슷한 것이 131번의 일기예보인데 이도 아는 사람이 흔하지 않은 것 같아요. 3. 미국과의 협력과 측정표준 기반확립 (이충희 박사 회고) 표준연구소의 설립과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외화차관의 도입이었 습니다. 지원된 외화 차관은 ADB 800만 불, OECD 600만 불, IBRD 1차 600만 불, 2차 1,000만 불 등 이었는데 이러한 외환 차관을 받은 것이 굉장 한 도움이 됐어요. 우리는 그것을 정말 유효적절하게 활용해서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연구소가 되었습니다. 제가 소장 재임 시에 외자차관을 그냥 균등 분배하게 되면 소기의 효과를 얻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중점적으로 몇 분야 에 대해서 지원을 했습니다. 레이저, 극저온, 표면기술 등 분야의 연구에 집 중 투자되도록 유도했습니다. 또한 젊은 박사들, 신진 박사들의 연구 활동에 중점투자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투자가 작았던 분야에서는 많은 불평을 토로 하는 역작용도 생겼지만 결국 그게 시드가 되어 지금은 매우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습니다. 일례로 온도실에서는 우리가 외부에서 사온 표준원기를 단순히 사용하는
159 수준에 그치지 않고 자체 능력으로 광고온도계, 적외선복사온도계, PRT 등 의 원기를 개발했으며, 이들이 국제측정표준분야의 최고 전문학술지인 Metrologia에 게재되었습니다. Metrologia는 국제도량형국에서 발행하는 논 문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때 처음으로 실렸으며 지금은 상당히 많이 논 문이 투고되고 있어 우리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습 니다. 3.1 미국과의 협력 한국표준연구소가 처음 발족하게 된 것이 1975년인데 그 동기는 존슨 대 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한 미 과학기술협정을 체결하러 오셨다가 표준기 한 세트를 한국에 기증한 것입니다.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면 우선적으로 모든 산업과 각 분야의 기본이 될 수 있는 국가표준을 확립해야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그것을 기증했습니다. 선진국의 경우라면 표준연구소가 먼저 설립되 는 것이 상례인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아 KIST가 먼저 발족했기 때문에 KIST에 그 원기를 보관하다가 한국표준연구소가 발족한 후에 옮겨놓게 되 었습니다. 표준연구소 설립 후 미국의 NBS와 협력하여 길이, 질량, 시간, 온도, 전류, 광도 등 각 측정분야별로 리서치 오리엔테이션 훈련을 실시했어요. 그때 나 는 미국의 NBS에 가서 6개월 동안 리서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돌아왔는데 제가 맡은 분야는 온도였어요. 그 당시 초창기에는 한국과학기술원 그러니까 KAIST 졸업생들이 주로 입소를 해서 젊은 층을 많이 보내고 또 실장급에 해당하는 중견간부들도 파견되었는데 그때에 정낙삼 박사는 미국 NBS에서 조정관(코디네이터)으로 있으면서 그 업무를 관장 했고 그래서 저도 가서 온 도분야에 대해 6개월 동안 연구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돌아와서 온도표준연 구실을 처음으로 설립했습니다. 이런 기회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연구소에 가게 되면 체험을 못 하는데, 신설 연구기관이기 때문에 처음 가서 온도표준연구실을 설립을 해서 모든 온도 측정분야 즉 열과 온도를 측정하는데 필요한 백금저항온도계, 광고온 계, 열전대 등의 측정분야의 국가표준을 확립한 것이 제일 큰 보람이었습니 다
160 3.2 계몽활동의 전개 그 당시는 초창기이었기 때문에 한국표준연구소가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위 해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했으며 그것을 위해 우선 산업체의 기술수준이라든지 국가표준 실태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정책 부서가 신설되어 국가표준 실태조사를 2년에 한 번씩 계속 실시했는데 그 실태조사에 의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측정표준에 대한 현황을 파악을 할 수 있었어요. 측정기술 인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고 측정기기는 어떠한 종류 의 것을 보유하고 있으며 정확도는 어떠하며 실제로 그 교정검사 능력은 어 느 정도인지 등을 전부 우리가 파악했습니다. 표준연구소는 모든 산업체, 대 학, 연구기관 및 국민들에게 표준시간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처음으로 시작했 으며,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측정기기의 교정검사에 대한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한 계몽강연을 전국을 순회하면서 실시했어요. 그래서 김재관 소장님과 공업표준실장 김성수 박사와 함께 대전, 창원, 대 구 등의 공업단지를 방문하여 산업체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계몽강연을 하였 습니다. 전국을 돌았지요. 인천을 비롯하여 하여간 공업단지는 다 돌아다니 면서 강연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계몽강연을 통해서 교정검사에 대한 인식 도가 높아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업 경영자들은 교정검사가 왜 필요한지를 몰랐습니다. 외국에서 turn key base로 기술이전을 했기 때문에 모방제품을 만들어서 팔기만 하면 됐지 무엇 때문에 돈을 들여서 교정검사를 위한 자체 calibration실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밑에 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필요성을 알지만 경영자들은 몰랐거든요. 그러나 계 몽강연을 계속한 것이 상당한 효과를 나타내어 결국에는 연구소의 교정검사 업무량이 증가했습니다. 3.3 국가교정검사 제도의 확립 추진 그러다 보니까 이것을 체계적으로 모든 산업체에 전달하기 위한 국가교정 검사 제도 확립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선 일차로 국가표준 이라는 것 즉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확한 표준이면서 국제표준하고도 일치하 는 국가 차원의 표준 즉 표준원기 확보가 추진되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그 러한 국가표준이 전국적 네트워크를 이루는 일선 교정검사기관까지 전달되
161 게 하는 것입니다. 일선의 각 교정검사기관에는 기준기라는 스탠더드가 확보 되어야 하고 그것을 표준연구소가 보유하는 표준원기와 비교측정 해서 calibration을 해주지요. 일선 교정검사기관은 기준기를 가지고서 산업체에 있는 모든 정밀측정기기(일례로 calliper나 gauge block 등)에 대한 교정을 실시함으로서 국가표준 검 교정제도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교정 검사제도 확립을 하였고 그 다음에 시스템 구축이 됐습니다. 전국적으로 교 정검사망 네트워크를 만든 거죠. 이를 바탕으로 검교정본부가 표준연구소 내에 그때 처음 신설되었고 김재 관 초대 소장님이 저에게 초대 검교정본부장의 직책을 맡겼어요. 그 당시에 는 주무부처가 공업진흥청이었기 때문에 공업진흥청과 협의를 해서 이러한 전국적인 교정검사 네트워크 및 calibration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모든 규정이라든지 법제도가 제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초창기 업무를 담당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3.4 박정희 전 대통령의 표준연구소 내방 그리고 또 저의 기억에 남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9년에 처음 표준 연구소를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때 오원철 경제수석비서관과 차지철 경호실 장 등을 대동하고 오셔서 연구소 내부의 첫 방문처가 저희가 일하고 있는 온도표준연구실이었습니다. 그때 김재관 소장님이 안내하셨는데 그 당시에 500만 달러 상당의 AID차관을 가지고 처음 연구장비 구입을 시작을 했는데 <사진 12> 1979년 2월 22일 박정희 대통령 연구소 시찰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습니다. 미국 AID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와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의한 내용은 우리나라의 표준연구소 를 선진국수준의 표준연구소가 아니고 그보다 한단계 낮은 수 준의 연구기관 설립을 제안했으 며, 그 보고서에 근거하여 장비 를 전부다 발주했기 때문에 사 실 우리가 갖고 있었던 장비는
162 보잘 것이 없었어요. 가지고 있던 장비 중의 한 가지는 광고온계(optical pyrometer)와 그 부속품인 스탠더드 램프 및 레코더였는데 그것으로 설명을 해드렸는데 박 대통령의 태도가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볼 때 아무것도 아닌 장비인데 그것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설명 들으셨어요. 그 래서 설명을 들으시고 돌아서서 나가시는데 오원철 수석이 내 옆을 쿡 찌르 면서 문 앞으로 따라 나가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따라 나가니까 거기서 수 고했다고 악수를 하고 가셨는데 그 악수가 정말로 감격적이었어요. 나는 최 규하, 전두환, 노태우 등 여러 분의 대통령을 만나 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 하고 악수하던 그런 감격은 못 느꼈어요.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진 지하게 그것을 관심 있게 들으셨다고 느꼈으며, 그 분이 우리나라 과학기술 을 처음으로 꽃피게 하시고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자율성을 가지고 마음껏 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일시나마 과학자 황금시대를 열어 주신 것이 큰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년대 초의 시련기 그 후 80년 초에 국보위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 때 초대 소장이신 김 재관 박사님은 임기를 다 못 채우시고 그만 연구소를 떠나셨습니다. 그러니 까 전두환 대통령 때 이지요. 김재관 소장님은 그렇게 안타깝게 그만 두시게 되었고,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이 출연연구소 전반에 걸쳐 벌어졌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최형섭 장관님의 재임 말기에 표준연구소 뿐만 아니라 하 여튼 정부출연연구기관장들은 거의 다 교체가 됐습니다. 정치적으로 교체를 해 버린 거죠. 그래서 표준연구소가 공백상태에 있으니까 제가 6개월 동안 소장 직무대행 을 했습니다. 직무대행을 하면서 그 당시에 국보위에서 여러 가지 주문이 떨 어졌고 또 국보위로 올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그때 연구소 통 폐합이 전부다 결정되어 있었어요. 그 내용은 한국표준연구소, 전기연구소, FIC(Fine Instruments Center) 등의 3개 기관을 합치는 것이었어요. 그 당시에 국보 위에 윤덕용 박사하고 내가 아는 몇 분이 계셨는데 그 분들께 역설을 했죠. 내가 주장한 요지는 국가표준연구소는 다른 출연연구소와는 다르다. 외국의 모든 사례에서도 국가에서 국가기관으로 표준연구소를 운영을 하고 있는데
163 우리나라는 정부출연연구소라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가 해야 될 일을 반관반민 형태의 연구소가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대표적인 측 정표준 기관이기 때문에 다른 연구기관하고 이렇게 통 폐합해야 될 성격이 아니다. 이렇게 주장했더니 그게 먹혀 들어갔어요. 그래서 다른 연구소는 다 통 폐합됐는데 표준연구소하고 화학연구소만 통 폐합이 안 됐습니다. 그러한 통 폐합의 와중에서 살아남기는 했으나 소장 직 무대행으로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했습니다. 소장 직무대행 역할도 해 야 되었지만 검교정본부장 역할도 해야 되고, 표준담당부소장 및 기술담당부 소장 역할까지 겸해서 다 했으니까요. 정원 박사님이 초대 표준담당 부소장 이었으나 그 때 별세를 하셨고, 초대 기술부소장은 제가 맡아서 하고 있었는 데 소장직무대행 역할까지 맡았기 때문에 그 때 로드가 너무 많이 걸렸어요. 그러한 상태로 6개월 정도 지나니까 박긍식 박사님이 소장으로 내려오셨어 요. 박긍식 소장님이 오신 후에 저는 선임부장직을 맡아 일했는데 그 때까지는 연구소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75년 설립 이후 80년까지 5년간은 주로 연구 실을 셋업하는 것이 주 업무이었어요. 그와 함께 외부에서 의뢰하는 교정검 사 업무 즉 외부기관에서 위탁한 것에 대해 우리가 calibration 서비스를 해 주고 calibration 서비스에 따른 인증서 발급 및 업무처리 양식 개발 등의 업무가 주 업무이었어요. 김재관 소장님은 그러한 업무에 관한 일가견을 가 지고 계셨기 때문에 호주, 미국, 뉴질랜드, 독일 등 선진국의 calibration 시 스템을 전부 조사해서 우리의 고유한 것을 만들었어요. 3.6 본격적 연구업무의 착수 그런데 연구소는 R&D로 업무를 시작해야 되는데 표준연구소의 경우 이러 한 서비스업무로 시작했기 때문에 R&D를 80년대 초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과기처의 특정연구사업 발족 이전의 80년까지는 주로 국가기본연구비 형태 로 연구비가 지원되었습니다. 기본연구비만 가지고는 본격적 연구를 하는 데 는 매우 부족했습니다. 표준연구소가 처음으로 특정연구사업을 수행한 것은 제가 총괄연구책임자가 되어 추진한 측정기기의 부품기술개발로서 5개년 연 구계획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며 그때부터 연구소 내의 국책과제 R&D 시
164 스템 구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정낙삼 박사도 정밀측정자동화과제 총괄을 맡아서 연구하셨습니다. 3.7 측정자문위원회에 가입 그 다음에 88년도에 제가 연구소 제4대 소장으로 취임했는데 그 때에 파 리에 있는 국제도량형국(BIPM)이 주최하는 국제도량형총회(CGPM : General Conference on Weights and Measures)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59년 미터협약에 가입하여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CGPM산하에 국제도량형위원회(CIPM)가 있습니다. 그런데 CIPM 회원국 이 되면 그것은 말하자면 UN의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런 상임이사국 대열에 들어가려면 우선 각 측정분야 별로 설치된 측정자문 위원회(consultative committee)에 가입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었습니다. 당시 CIPM 회장은 독일 표준연구소(PTB)의 킨트(Kind) 박사이었으며 회 장직에 오래 재임한 분이었어요. 그 분을 만나 계속 몇 번 얘기를 했는데 우 리 표준연구소가 상당한 수준에 와 있기 때문에 측정자문위원회에 가입해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캐나다에서 개최된 CPEM에 갔을 때와 파리 총회에서도 얘기를 하고 편지로도 몇 번 왔다 갔다 했더니 이것이 먹혀 들어갔어요. 그 래서 1988년도에 제가 소장에 취임하고 나서 바로 온도, 광도, 길이 등의 3 개 분야의 측정자문위원회에 우리가 정회원 기관이 되었습니다. 제가 소장하 면서 그것을 처음 시도해서 3개 측정자문위원회 정회원이 됐기 때문에 무척 이나 보람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측정자문위원회의 회원국이 되었다는 의미는 우리나라가 과거에는 전부 선 진국에서 하던 측정표준만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만 했는데 이제는 우리의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고 또 길이라든지 온도라든지 시간이라든지 이런 것 들의 국가표준이 새로 개발되면 그것이 얼마만큼 국제적으로 정확한가를 미 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과 국제비교를 할 수 있게 됩니다. International comparison 이라고 해서 국제비교를 할 길을 터놓았지요. 그때까지는 우리가 국제비교를 하는 데까지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가 소장하면서 항상 강조한 것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을 모방하는 시대는 끝 났고 우리 나름대로의 창의력을 가지고 새로운 표준을 개발해야 된다는 것
165 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간에 대한 표준에 있어서는 처음에는 cesium clock을 가지고 했지만, 그 후에 laser pumping 등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발 전해 왔어요. 표준의 물질을 바꾸어서 다른 표준기로 하는 것은 많이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분야별로 그런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해서 우리 나름대로 표준기를 국제 측정자문위원회에 제안하고 그래서 우리가 제시한 표준을 국 제표준으로 채택하게 되는 그런 단계를 거쳐 가게 됩니다. 3.8 신소재평가센터의 설치 제가 표준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인 90년에 신소재특성평가센터를 처음 설립하였습니다. 신소재특성평가센터는 그때까지 표준연구소가 쌓아 올 린 기술을 기반으로 설립된 것입니다. 표준연구소는 길이, 질량, 온도 등 100여개 측정분야에 대한 국가 표준을 국제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모든 산업체를 지원 하는 기술기반을 조성하였고 그것을 기반으로 그 당시 관심 사가 된 신소재 분야의 기술지원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신소재 개발에 따 른 필수적인 기술은 새로이 개발된 신소재의 특성 확인이며 이를 위해서는 특성평가를 위한 측정기술이 필요합니다. 신소재 특성평가에는 여러 가지 물 리적인 양의 측정이 필요하며 표준연구소가 그간에 확립한 100여개 측정표 준기술을 바로 거기다 응용함으로서 신소재특성평가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 니다. 신소재특성평가센터의 설립과정은 몇 가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설립계획서를 제가 만들어 가지고 과기처 장관님께 설명 들였는데 제가 소 장되고 나서 장관님이 몇 분이나 바뀌셨기 때문에 이관 장관님으로부터 이 상희 장관님까지 장관이 바뀔 때마다 매번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때는 장관 님이 매우 자주 바뀌셨어요. 또 한 가지 문제는 신소재특성평가센터 설립과 관련하여 KIST와 경합이 벌어진 것입니다. 느닷없이 KIST에서 자기들이 특 성평가센터를 하겠다고 끼어든 것입니다. 그 당시 강박광 박사님이 연구조정 실장으로 계셨는데 두 군데 대표를 다 불러서 설명을 듣는 회의를 주제하고 최종적으로 이건은 KIST에서 하는 것보다 표준연구소가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이 표준연구소에 신소재평가센터를 처음 설치하는 일을 제가 담당한 것을 지금도 보람되게 생각합니다
166 3.9 적극적 해외 두뇌 유치 또한 제가 소장 재직 시에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으로는 해외 두뇌 유치를 적극 추진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연구소에는 정규직 연구원들이 약 200명 임시직 연구원이 약 150명 정도 재직하고 있었으나 고급인력이 별로 많지 않았어요. 박사급 연구원들이 그 당시에 30명 정도밖에 안되어서 R&D를 제대로 하려면 아무래도 고급두뇌 유치가 불가피했습니다. 미국 등 에서 박사 50여명을 새로 유치했습니다. 그 중에는 화학 분야에서 우수한 두뇌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연구소내 이론그룹 형성 시도 연구소 내에 이론그룹 형성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특히 기초연구 쪽에는 실험그룹과 이론그룹이 공존해 서 상호협력하면 논문도 많이 나오고 연구 성과가 향상되는 것이 상례입니 다. 그래서 소그룹이지만 한 10명 정도 규모의 이론그룹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두뇌 유치를 시도했습니다. 예일대학, 하버드대학 등에 있는 유능한 인재들도 가서 인터뷰를 했더니 처음에는 관심을 표시했는데 그들은 정부출연여구소보다 대학을 선호하여 다들 대학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사람도 유치하지 못 했죠. 그러나 실험그룹에는 재료분야, 화 학분야, 물리분야 등에 우수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일했는데 결국은 그 사람 들도 표준연구소에 그냥 남아있지를 않고 고려대학, 연세대학, 인하대학 등 대학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남균 박사, 강주상 박사, 김철구 박사, 유경화 박 사, 한재원 박사, 강석태 박사 등 등 우수한 두뇌들이 연구소를 떠나 대학으 로 가는 것을 보고 정부출연연구소의 내리막길을 절감했습니다. 하여튼 그렇 게 해서 표준연구소가 인재를 많이 유치해서 연구소에서 많은 일을 하고 또 한 대학으로 가서 우수인력 양성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나라 정부출연연구소 중에서는 처음으로 Post-Doc제도 를 실시하고 대학과 연구소 간의 협력연구가 촉진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과학자 간에는 협력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대덕연구단지는 원래 대학과 연구소를 같은 지역에 들어오게 하여 서로 협력해서 상부상조하도록 만든 건데, 충남대학이나 KAIST가 있지만 인근의 연구소와 연계가 잘 안
167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연구소는 대학의 교수 1인당 700만원 정도의 연 구비를 제공하여 협력연구를 처음 시도를 했습니다. 4. 초창기 NBS와의 협력과 1차 표준기 도입 과정 (정낙삼 박사 회고) 4.1 유치과학자 1호로 연구소 입소 저는 표준연구소에 1976년 7월 1일부로 입소하였는데 해외에서 유치된 과 학자로는 첫 번째였습니다.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에서 73년 박사 학위를 마치고 post-doc으로 있을 때인데, 75년말 KIST에 계셨던 정원 박 사님이 Purdue에 들리셔서 한국 소식을 들려주셨고, 76년 2월경 서신을 보 내시며, 한국표준연구소(Korea Standards Research Institute/ KSRI)가 설 립되어 정원 박사님이 표준담당 부소장으로 가시게 되었다고 저더러 귀국하 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때 사실은 두 군데와 얘기되고 있었는데 다른 하나는 서울대학교 자연대 물리학과였습니다. 정원 박사님은 서울대학교와 표준연구소를 비교하여 장단점을 상세히 말씀하시면서, 표준연구소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하니 잡무도 많고 힘들겠지만 창립 멤버로서 그만큼 보 람이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 그리고 그때는 연구소가 대우 도 꽤 좋은 편이라 표준연구소로 오기로 마음을 정했었고, 그해 76년도 5월 경에 표준연구소 초대 소장이신 김재관 박사께서 미국 국립표준국, NBS(National Bureau of Standards) 방문 중 인터뷰를 한 후에 확정을 하 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한국표준연구소의 창립은 그 시기가 여러 가지 면 에서 참 좋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로서 표준연구소 설립을 위하여 미국 국 제개발처(AID,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로부터 차관 500만 불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금이었습니다. 그 자금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한국표준연구소의 설립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 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연구소 설립의 타이밍이 좋았던 다른 이유는 그 시기 가 바로 양자물리학의 원리가 측정학에 실질적으로 응용되어 단위의 정의들
168 이 바뀌고 있는 중이라 세계 모든 표준연구소들이 새로운 일들이 많아진 것 이며, 또 하나는 76년이 NBS 창립 75주년이었던 것인데 이들을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4.2 NBS 기술조정관으로 임명되어 NBS와 협력 추진 그렇게 저는 76년 7월 1일부로 연구소에 입소하였는데, 입소와 동시에 NBS 주재 기술조정관(Technical Coordinator)으로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습 니다. 그러니까 퍼듀대학교에서 워싱턴의 NBS로 바로 간 거지요. 그 후 78 년 5월까지 근 2년 동안 기술조정관으로 있었습니다. 조정관이 두 사람 있 었는데 또 한사람은 한국에서 김창오 씨가 행정조정관으로 오셨습니다. 한 미간에 한국표준연구소 설립을 위한 AID 차관을 체결하며, 한 미 협력을 위해 한국표준연구소와 NBS가 자매 결연을 맺었고, AID 차관 500만불 중 30만 불이 이 협력사업을 위해 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NBS 는 67년과 72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의 시험, 연구 능력 및 국가표준제 도 등을 조사하기 위하여 전문가를 보냈었던 적이 있었으므로 표준연구소 설립과 이미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초창기에 유치된 과학자들은 6개월 내지 1년 정 도 NBS에서 전문 오리엔테이션(Technical Orientation) 훈련을 받을 수 있 었습니다. 저의 임무는 첫째는 새로 시작하는 연구소의 연구 장비를 선정해 서 도입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국에서 유치된 과학자들이 앞으로 한국표준연 구소에서 맡을 분야를 찾아주고 이에 대응되는 NBS의 적절한 부서에서 오 리엔테이션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NBS는 1901년에 설립되었는데 76년은 마침 NBS의 75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어요. 그래서 NBS가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했는데 제가 갔을 때는 그 러한 기념행사를 위해 만든 자료들이 많이 있었고 전시물도 그대로 있었습 니다. 또한 각종 전문 학술지에 NBS에 대한 특집이 게재되었습니다. 미국물 리학회에서 발행하는 Physics Today에도 특집이 실렸고 IEEE에서 나오는 Spectrum이라는 잡지에도 나왔습니다. 그러한 자료들은 전문가들이 이해하 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첨단 측정표준에 대한 상세한 내용들을 포함하 고 있었어요. 제가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표준이나 NBS에 대하여 아는 것은
169 일반 상식적인 수준이었는데 실제로 이들에 대해 상세한 기술적인 내용을 전반적으로 공부하는 데는 그 해설기사들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그 시기는 측정의 기준이 되는 단위의 정의와 표 준들이 대부분 양자물리학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었어요. 예로서 전압의 표준이 그 전까지 표준전지였던 것이 Josephson voltage standards로 실질적으로 바뀌어 있었고, 얼마 후 79년에 광도의 정의가 바 뀌었고, 83년에 길이의 단위인 미터의 정의가 바뀌는 등 70년대 후반이 측 정과학에서는 과학기술적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발전을 가져온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한국표준연구소가 발족했다는 것은 매우 다행 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70~80년 먼저 생긴 연구소들이 모두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해야하는데 우리는 여기에 쉽게 편승할 수 있게 된 때 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표준과학연구원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수 의 표준기관이 될 수 있었던 큰 요인의 하나였고, 이런 의미에서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4.3 초창기 연구장비 도입과 TEMPO 보고서 저의 첫 번째 임무는 한국표준연구소의 설립을 위해서 작성된 GE TEMPO의 타당성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새 연구소에 필요한 연구장비에 대 한 자료를 검토하는 것이었어요. GE TEMPO는 General Electric 회사의 전 문가로 구성된 용역팀인데 AID에서 용역을 받아서 우리나라 표준연구기관 설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해서 6권의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표준연구소 설 립과 관련하여 장비는 어떻게 해야 되고 실험분야는 어떻게 해야 되고 인력은 어떻게 해야 되는 등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제가 NBS에서 일을 시작한 얼마후인 76년 말경에 한국에서 <사진 13> TEMPO 보고서 연구원 련을 받기 위해 NBS에
170 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온 연구원은 KAIST 1회 졸업생 원종욱 박사와 2 회 졸업생 유한일 박사였는데, GE TEMPO 보고서를 근거로 한 기기목록과 이들의 스펙(specifications, 기기명세서)을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까 GE TEMPO의 관점은 국가의 최고 측정표준연구기관을 설립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우리나라 산업을 당장 지원할 수 있는 시험검사기 관을 설립한다는 데 목표를 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시험검사소 또는 2차 교정기관 급의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전자분야에서 2차 교정기관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관으로 정 밀기기센터(FIC, Fine Instrument Center)가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산업체에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고 평가해서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관을 먼저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실제는 FIC도 주한 미 8군 교정기관으로부터 기준기를 교정받아야 할 정도였고, 그것도 시간이 허락할 때에만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정도였으니까 우리나라의 교정 서비스 능 력이 매우 낮았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산업체들은 교정의 중요성을 잘 알지도 못 했던 때입니다. 그러니 GE TEMPO 보고서의 제안도 크게 잘 못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2차 교정기관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장비목록에 국가표준 기관에서 가져야만 하는 1차 표준장비는 거의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시 간 주파수 분야의 장비로는 1차 표준기인 세슘원자시계가 아니라 한 수준 낮은 수정발진기(crystal oscillator)를 구입하도록 되어있었고, 이 수정발진 기는 일본의 저주파 방송을 받아서 교정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장비 선정을 위해 NBS 전문가와 의논하고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 서 문제에 부닥친 거예요. 국가표준기관의 표준장비로 구입하려는 것이 맞느 냐, 이 장비를 도입하면 국가표준기관이 아니라 2차 시험기관이 되는데 괜찮 은가? 우리는 분명히 국가표준기관으로 국가에서 최고의 표준을 담당할 연 구소를 세우는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국에 편지를 했지요. 정원 부소장께 지금 우리 장비 목록이 온 것을 보면 그 건 국가표준기관 장비가 아니라 2차 교정기관 장비라는 것을 알려 드렸지요. 그러니 이 기기를 바꿔서라도 1차 표준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장비 목록의 꽤 많은 부분을 NBS에서 다시 작성했어요
171 4.4 시간, 길이, 광도, 힘 등의 표준을 위한 1차 표준기의 도입 앞에서 예를 든 시간표준 분야에서는 독립적으로 시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 필요한 것이 세슘원자시계 3대와 microphase stepper 1대가 필요하 고, 원자시계를 지속적으로 세계표준시와 비교하기 위해서는 Loran-C 수신 기가 있어야 해요. 그 당시 세슘원자시계는 휴렛팩커드사(HP) 등에서 나온 이미 상용화된 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GE TEMPO 보고서의 제안을 무 시하고 국가표준기관으로서 필요한 장비들을 그때 확보했습니다. 이렇게 우 리나라는 시간주파수 표준을 확립하고, 한국표준시간은 78년도부터 독립적 으로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일본 표준주파수방송국(JJY)의 방송 을 국내 방송국이 받아서 시보방송을 했거든요. 그때 방송국 시보는 지금과 같이 삐, 삐, 삐- 하고 표준시를 알렸는데, 전파사라고 불렀던 라디오 가게 앞에서 KBS, MBC 등 여러 방송국 시보를 동시에 들으면 삐- 하고 동시에 나는 게 아니라 귀로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방송국간에 시보가 차이가 났 지요. 그 이유가 수정발진기 시계를 쓰고 있었고, 일본 JJY 방송을 기준하여 교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길이 분야에서는 그 당시 미터 의 정의대로 길이 표준을 구현하려면 크 립톤 86 램프를 쓰게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이 램프가 사용하기 불편하 여 그 때 아무도 그것을 쓰고 있지 않았어요. 그 당시 이미 성능이 좋은 레 이저가 개발되어 있어서 이를 국제적으로 길이 표준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길이의 표준용으로 요오드 안정화 헬륨-네온 레이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요오드 안정화 헬륨-네온 레이저는 상용화되어 판매되는 것이 아니고 표 준연구소들이 자체로 설계하고 제작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NBS와 의논하니까 자기들이 그 장비를 몇 대 만들 계획이 있다고 해서 우리 표준 연구소 분으로 1대를 추가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또한 그 제작과정에 우리 연구소 연구원이 참여하여 기술을 습득하도록 합의가 되었었고, 그 후 에 정명세 박사와 임동건 박사가 그 요오드 안정화 헬륨-네온 레이저 기기 를 제작하는데 참여하여 길이의 국가표준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광도표준을 위해서는 흑체에서 나오는 복사선을 이용한 기기를 확보해야 되는데, 그것은 자체개발하는 것도 힘들고 아무도 쓰지 않고 있었으며, 몇 년 후가 되면 칸델라의 정의가 바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 보류하
172 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광도표준에 대한 것은 일단 보류했습니다. 그 후 79 년 광도 단위의 정의가 바뀌었고, 나중에 그것은 표준연구소 설립 후에 우리 가 자체 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 시기가 이러한 첨단 방법으로 표준 자체의 정의가 바뀌는 시기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예요. 전기 분야도 Josephson Voltage Standard라 고 해서 양자물리학 원리에 근거한 새로운 방법을 이용한 표준기로 바뀌고 있었어요. 그것도 상용으로 나온 기기가 없고 자체 개발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마침 NBS가 몇 대를 Superconducting Technology라고 하는 미국 회사에다 의뢰해서 공동개발하고 있는 중이어서 거기에 한 대를 추가 시키기로 했습니다. 이 장비는 수년이 지나서 85년에야 도입되었습니다. 세슘원자시계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어요. 정원 박사 께서 NBS 자료를 보시더니 NBS에서 지금 표준으로 쓰는 세슘원자시계는 NBS No. 4와 NBS No. 6 둘뿐이며, 현재 사용하는 것 중에서 NBS No. 5 가 빠져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틀림없이 NBS No.5 가 있을 텐데, 그것은 아마 성능이 좀 낮아서 사용하지 않는 것 같으니 알아보아 세슘원자시계 NBS No. 5 를 확보하도록 해보라고 하셨어요. 표준연구실에서 실험실형 (Laboratory type) 원자시계를 개발하게 되면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서 사용 하는데, No. 5가 빠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NBS의 대부분의 표준 분야는 워싱턴 DC 근교, Gaithersburg에 있 고, 저도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시간주파수 표준과 전자파 표준은 Colorado주의 Boulder에 있기 때문에 Boulder에 갔지요. 거기 가서 담당 부장에게 NBS No. 5를 우리 연구소에 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니까 막 웃 어요. 그 번호들은 어떤 독립된 기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개발 해 가는 단계에 붙인 번호라는 거예요. NBS No. 4와 No. 6는 완성된 시스 템으로 그 당시 가동 중인 장비이고, No. 5는 No. 6의 전신이었는데 그 성 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세슘 빔 튜브를 개조해서 새로 향상시킨 시스템이 라는 것이며, No. 5가 별개로 존재하는 장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로 NBS No. 6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니, 전에 No. 5가 설치되어 있었다 고 하는 전자파가 차폐되고 온습도가 엄밀히 조절되는 큰 실험실을 독차지 하고 있었으며 길이는 6 m 정도이고 질량은 약 3 톤 정도라고 하였고,
173 년에 완성되었는데 약 30 만불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진 14> NBS-6 세슘원자시계 이러한 정원 박사님의 아이디어는 비록 실험실형 원자시계를 얻는 데는 성 공하지 못하였으나 다른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실하중 힘표준기(Deadweight Force Standard Machine)였습니다. 우리가 제작하려면 엄두도 낼 수가 없는 것인데 다행히도 NBS에서 사용하 지 않게 된 것을 우리가 얻어 오게 된 것입니다. 이 힘 표준기는 엄청나게 무거운 추들로 만들어진 것으로 표준연구소에 가져 온 것은 최대 용량이 112,000파운드로 500 kn(킬로 뉴턴) 힘발생기입니다. NBS에서는 항공우주 산업을 위해서 우리가 얻어온 것의 열배나 되는 백만 파운드 용량의 실하중 힘표준기를 만들었으므로 우리가 가져온 것이 꼭 필요하지 않게 되어 한 미협력사업의 일환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기증한 것입니다. 참고로 일본은 우 리 것보다 약간 큰 540 kn 실하중 힘표준기를 가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기가 인천 세관으로 들어왔는데 하 역하는 사람들이 이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모르고 야적을 해두었기 때문에 비를 맞아 녹이 슬어버렸 <사진 15> 실하중 힘 표준기 어요. 한 개에 약 5톤 되
174 는 무거운 쇳덩어리들 9개와 0.5톤짜리 10개 그리고 육중한 철 구조물들이 와있으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 기기인 줄 알았겠어요? 우리는 그것을 원상 복구시키는데 엄청나게 고생을 했지요. 녹슨 부분을 전부 처리하고 하나하나 무게를 다시 재어 복원해서 우리나라가 힘 표준의 1차 표준기(primary standard)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로는 쉽지만 5톤을 잴 수 있는 저울을 새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과제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힘 분야의 표준기를 제작할 수 있 는 귀중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중공업 산업체들은 그들이 제조하 는 중량이 큰 제품의 무게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필수적이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중량 측정기인 Load cell 같은 것들을 이 실하중 힘표준기로 교정해 주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분야 산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봅니다. 물론 초기의 이러한 연구 경험들이 토대가 되어서, 그 후 90년대에 는 100 kn 실하중 힘표준기, 2 MN(메가뉴턴) 유압식 힘표준기 그리고 10 MN 빌드업 방식 힘표준기를 자체 개발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힘연구실 은 현재 독일, 미국 등과 대등한 측정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 1차표준기들은 이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확보되기 시작했습니다. GE TEMPO 보고서에는 1차표준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까 NBS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1차 표준의 기기 명세서를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연구소 설립 초기에 도입한 약 350개의 기기 중 3분의 1이나 되는 120개 정도의 기기가 NBS에서 새로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AID 차관 500만불 중에서 350만불이 연구 장비 구입비였는데 꽤 많은 부 분이 1차표준기 확보에 투입했으나 모든 분야 표준기 확보에는 불충분하여 상당한 분야에 공백이 생겼는데 다행히도 그 다음에 다른 차관들이 이어졌 어요. 그 후속으로 ADB차관 800만불, OECF 차관 600만불, IBRD 차관 등 이 거의 중단 없이 지원되면서 연구기자재들이 그 나름대로 보충이 되어 갔 던 것이지요. 초창기 연구 장비 확보에 있어 GE TEMPO 팀은 그래도 우리 나라를 타 개도국에 비해 수준 높게 보아 추천한 기자재였으나 우리는 그보 다도 한 단계 높은 국가표준기관으로 발족하기 위하여 기자재 목록을 우리 스스로 새롭게 다시 작성했던 것입니다
175 4.5 우리나라의 시간표준 확립 과정 우리나라의 시간표준이 확립된 과정에 대해 좀 더 부연하면, 76년도부터 장비를 확보하여 기기를 동작시켜 시간을 측정 분석하여 성능을 확인한 후 78년도에 국제표준시각과 동기화(synchronization)시켰습니다. 그 당시 가장 정확히 시각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이동원자시계(flying clock, 비행기타 고 나르는 시계) 방법이었는데 이것은 국제시각에 동기화된 원자시계를 비행 기로 이동해 가지고 동기화시키려는 원자시계와 나란히 놓고 두 시계를 동 기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전파로 원격 비교하게 되면 전파 상태에 따른 시 차 때문에 동기가 정확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미국에서는 이동원자시계(flying clock)를 미국해군관측소(USNO)에 서 운영하고 있었어요. 미국은 미군이 주둔하는 각 나라에 통신시설을 설치 하고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대구 근처 성서에 미군의 위성통신센터(Satellite Communication Center)가 있어요. 거기 1년에 한 번씩 미국해군관측소에서 세슘원자시계를 갖고 와서 교정을 하고 갔었습니다. 한국, 일본 등 아시아지 역의 몇 군데에 미군의 통신시설이 있는데 그 통신시설마다 원자시계를 유 지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교정하러 그 사람들이 왔었습니다. 그것을 알고서 제가 미국해군관측소에 가서 담당 책임자를 만나서 우리나라 표준연구소에 서 새로 원자시계를 도입해서 시간표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당신들이 위성통 신센터에 올 때에 우리 연구소에 들려 시각을 동기화시켜 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78년 10월 3일에 우 리나라의 표준연구소에 와서 우리나라 원자시계를 최초로 국제 표준시각에 동기화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978년 10월 3일(마침 개천절 공휴일이었음) 세계협정시(UTC)로 0시 33분 0초(한국시각 9시 33분 0초)를 기해 국가시간표준이 확립된 셈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 표준 시 간은 세계협정시(UTC, Coordinated Universal Time)와 1 μs(백만분의 1 초) 이내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미국해군관측소의 이동원자시계는 매년 우리 연구소를 방문하였 는데 그 후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이용기술이 발달되면서 GPS 를 이용한 국제 시각 비교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 방법으로도 충분하다는 결 과를 얻게 되어, 86년경부터 이동원자시계는 중단되었습니다
176 그리고 우리나라 시간주파수 표준의 데이터가 국제도량형국(BIPM)에 보내 어져 국제표준시간 생성에 기여하게 된 것은 88년부터입니다. 이렇게 확립 된 정확한 시간 주파수 표준 및 그 과정에서 습득한 기술이 우리나라 디지 털 산업 및 전자통신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반 구축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고 생각합니다. 부연하면, 세슘원자시계는 너무나 정확하기 때문에, 기술적 표현으로, 안정 도가 무척 높기 때문에 이들의 안정도를 측정한다는 자체가 아주 어렵습니 다. 물론 그들 사이의 차이를 잰다는 것도 마차가지입니다. 그래서 82년도부 터 수행된 국책과제로 개발한 것 중 하나가 이러한 원자시계급 시간주파수 표준기의 주파수 안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DMTD (Dual Mixer Time Difference)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개발된 장비와 기술의 축적이 있었기 때 문에, 그 후에 전자통신연구소에서 국산 전전자식 교환기 TDX-1 및 TDX-10를 개발할 때 우리연구소에서 그 장비들의 망동기장치의 성능평가 를 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신소재평가센터 설립과 운영관리 제도의 정착 (박승덕 박사 회고) 5.1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방일과 신소재평가센터 설립 추진 내가 과학기술처의 기술정책실장으로 재임할 때에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노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기하여 한 일간 협력의제를 제출하라는 지시가 각 부처에 하달되었습니다. 그때에도 한 일간에는 무역역조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당시 미국에 대해서 는 100억불 정도 흑자인데 반해 일본에 대해서는 70~80억불의 적자였습니 다. 그런데 그 근본원인이 일본이 한국에 대해 기술이전을 꺼리기 때문이라 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가시면 일본의 기술이전을 촉 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술이전에 대한 일본의 대응 논리는 민간이 보유한 기술을 일본 정부가 한국에 이전해 주라고 촉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제안한 대안은 일본의 공공기관 즉 국공립연구소가 보유한 기술을 이전해 줄 것을 요청하면 일본 정부도 거부를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77 그래서 그때 제출한 과학기술분야 협력의제가 바로 일본 정부산하의 금속 재료시험연구소를 통하여 한국에 신소재시험평가센터의 설립을 지원 받는 안이었습니다. 내가 기계연구소장으로 재임 시 일본의 금속재료시험연구소를 방문했는데 그들이 보유한 기술이 상당한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 실 정부가 민간기술을 이전해 달라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국 제적으로도 그러한 사례가 없습니다.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 을 때에 일본의 공공기관이 보유한 기술을 우리의 공공기관과 협력하여 이 전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 때 원자력 분야와 신소재 분야의 협력이 논의 되었고 그 결과 신소재평가센터 설립을 위해 일본이 무상으로 900만 불을 지원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 후 표준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신소재평가센터 설립을 위 한 한 일간의 협력협정에 최종 서명을 하게 되니 뿌린 씨를 거둔 결과가 된 셈입니다. 그 때 협정조인식을 성대하게 마련하였고 그 협정을 근거로 표준 과학연구소에 신소재평가센터가 들어갈 건물로 1,500평의 건축예산을 경제 기획원에 신청하였습니다. 힘든 예산투쟁 끝에 1,000평 규모의 건물예산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연구원들의 강력한 스페이스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1,000평 예산으로 1,500평의 건물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건물 은 질적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 사실에 대해 나는 지금도 후회하 고 있습니다. 그때 협력협정에 서명하면서 나는 일본 측 대표에게 한 가지 조건을 달았 습니다. 일본이 900만 불을 무상으로 한국에 지원하여 신소재평가에 필요한 첨단장비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는데 장비 구매에 있어 Made in Japan 제 품만을 구매할 수는 없다는 조건을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제 일 좋은 장비를 구매하길 원하니까 이해를 해달라고 하여 그들은 그건 이해 한다고 했어요. 나중에 그가 일본 측 고문관으로 연구소에 다시 파견되어 왔 을 때 그는 일본 금속재료연구소에 있는 장비보다 한국표준연구소 신소재평 가센터의 장비가 더 잘 구비되었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미제나 독일제의 우수한 시험장비를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장비의 구매 조건을 관철시킨 것에 대해 지금도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소재평가센터의 설립을 계기로 UN 산하의 재료연구센터를 한국에 유치
178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정부 예산지원의 어려움으로 끝내 무산된 것 을 아직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UN의 소재분야 연구센터를 유치하 게 되면 매년 몇 십억 원 정도의 유지비를 한국정부에서 지원해야 되는데 예산실을 설득하는데 역부족이었습니다. UN 소재센터가 설립되면 신소재 분 야에 있어 세계적 첨단기술의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유치라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반듯이 이 꿈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 니다. 5.2 러시아 표준연구소의 150주년 행사 내가 표준연구소 소장에 임명 된지 얼마 후의 일입니다. 세계 제일의 표준 연구소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가 러시아이고 1992년도에 이미 설립 150주년 이 되었지요. 미국이나 독일의 표준연구소 보다 러시아는 50년이나 앞서 설립된 것이지요. 그 당시 러시아의 표준연구소 소장은 타바예프 박사였는데 그 분은 수십 년간 연구소장 직에 재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준분야의 세계 적인 원로로 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타바예프 박사가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전문을 보내 중국과 한국 간 의 왕복 여비를 부담 할 테니 한국에 한번 들려 달라고 초청했더니 쾌히 승 낙하고 한국에 왔어요. 그가 방한하여 우리 연구소를 시찰했는데 우리 연구 소는 그 당시 20년밖에 안 됐으니까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자기가 한 수 가르쳐 주려고 생각한 모양인데 와 보니까 자기네 보다 장비가 월등히 훌륭 하고 젊은 연구원들의 연구내용을 들어 본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매우 정중하게 대한 결과 그 후 나와는 매우 절친한 관계 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러시아에서 표준연구소 설립 15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하였는데 나를 귀빈으로 초대했어요. 그 당시 이세경연구원(후에 표준연구원장 역임)이 나를 수행했는데 내가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놀랐지요. 그때 초대된 표준 관련 인사들 중에서 대여섯 명이 VIP 대접을 받았는데 그 중에 내가 끼었습니다. 그 후에 우리 표준연구소가 한국에서 국제유동학술대회를 개최했어요. 국 제유동학술대회는 한국에서는 처음 개최되는 행사였는데 그 때 외국에서 300 여명의 전문가가 초대되어 왔으며 물론 타바예프 박사를 이번에는 내가
179 귀빈 대우를 해서 초대했습니다. 그 회의에서 타바예프 박사는 예정에 없이 특별 아나운스멘트를 한다면서 나를 러시아의 Academy of Metrology의 외 국 아카데미션 회원으로 선임했다고 발표를 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김시중 과기부 장관도 참석한 자리였는데 전부 다 깜짝 놀라 박수를 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러시아의 외국인 표준아카데미션의 한사람이 되었고 당시에는 동양에서는 나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년대 초의 연구소 통폐합 내가 과기처에서 표준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된 후 천문우주과학연구소와 기 초과학연구지원센터가 표준연구원에 통폐합 되었습니다. 이는 과기처에서 시 행한 세 번째의 연구기관 통폐합 조치로서 노태우 대통령이 정부출연연구기 관의 재정비를 검토하라는 지시에 근거한 조치의 하나였습니다. 표준과학연 소는 위의 두 연구기관을 부설기관으로 통합한 후의 첫 번째 이사회가 열리 게 되었는데 이사장이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박승덕 소장이 천문대장을 거 느리는 연구소장이 됐는데 부설기관장은 대장이고 표준연구소장은 소장이니 어떻게 소장이 대장을 거느리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수로 해야겠는데 원수라고 할 수는 없고 원장이면 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논의가 빌미 가 되어 이사회에서 토론을 거쳐 갑자기 연구소의 명칭을 표준과학연구소에 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으로 변경을 하게 됐어요. 표준과학연구원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는 산업체를 직접 지원하는 일입니 다. 그런데 표준과학연구원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져 이미 국제적 수준에 육 박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몰라 업체들이 지원 받을 기회를 놓치고 있어 안타 깝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연구원에 오픈하우스 제도를 만들어 1 년에 한번 씩 특히 중소기업을 위주로 기업체장들을 초청하여 연구원의 업 적을 브리핑하면서 점심도 내고 연구소의 팸플릿도 돌리면서 세금 낸 사람 들은 얼마든지 연구원에 와서 보고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홍보했어요. 5.4 학ᆞ연, 산ᆞ연 석박사 과정 설치 내가 원장 재임 중에 발족한 또 하나의 제도는 한 연 간의 석박사 과정을 설치한 것입니다. 표준과학연구원에는 물리, 화학, 전기, 전자, 기계 등의 다
180 양한 전문분야의 톱클래스의 박사들이 모였기 때문에 각 분야의 연구원들이 서로 협력하여 대형국책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과거 대학에서 하 던 스타일로 자기 연구실 내부 팀끼리만 협력하지 횡적 협력에는 소홀 하였 습니다. 연구원이 한번 연구원에 입소하면 정년퇴직까지 재직해야 되는데 20~30 년 동안을 매일 밤늦게까지 한 분야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 닙니다. 그렇다고 선진국처럼 업무내용의 변화와 발전을 목적으로 매년 일부 연구원을 퇴출시키고 젊은 연구원으로 보충하는 것도 우리의 관념상 시행 하기 어려운 문제였으며 아직까지 그것이 가능한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않았 습니다. 그래서 연구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바꾸어 주는 방법의 하나로 내가 추진한 것이 연구원 학 연 석 박사 과정을 설치하는 일이었습니다. 대학의 석사 또는 박사과정 학생들을 표준연구원에 데려와서 학위과정에 필요한 논문준비를 하게 하면 연구원에는 연구비도 풍족하고 연구장비도 최고 수준이니까 좋은 논문준비에 필요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고 한편 연구원에는 열심히 연구하 는 학생들이 조교의 역할을 하게 되니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석 사 박사과정 학생들은 훌륭한 연구책임자의 지도를 받게 되어 졸업 전에 좋 은 경험을 쌓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충남대 등 여러 대학에 다니면서 이 취지를 설명하고 또 교육부에도 얘기해서 대학의 학위 수여 실링을 더 배정하도록 건의했습니다. 대학에서는 학위 수여 실링을 추가로 받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링을 내가 더 받도록 노력할 테니까 추가로 확보된 학생만큼은 표준연구원으로 보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또한 연구원에 보내지는 석박사학생의 지도는 연구원과 대학이 공동으로 하 되 표준연구원에서는 책임지고 논문지도를 하고 대학에서는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이수케 하여 졸업은 대학에서 하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기대한 만큼 협력이 이루어지지는 않아서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그것을 모델로 하여 연합 대학원대학이 설립되었는데 그것도 사실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도 연구원 석 박사 과정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 생각합니 다. 연구소로서는 박사과정을 훌륭하게 마친 학생을 신진 연구원으로 충원할
181 수 있을 것이고 학위과정 동안에는 조교로서 활용할 수 있어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제도를 앞으로 좀 더 활성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 니다. 5.5 민간 전문인 이사장제의 출범 내가 표준연구원에 취임할 때까지 표준연구원의 이사장은 당연직으로 공업 진흥청장이 맡고 있었어요. 공업진흥청장이 표준연구원의 이사장을 겸임하기 때문에 결국은 정신적으로 상공부에 예속되어야 했습니다. 나는 과기부 출신 으로 연구원장으로 취임했으니까 내가 이것을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업진흥청장을 찾아가서 이제 민영화 시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관리 가 당연직 이사장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다른 연구소는 그렇지 않은데 표준연구원만 그러니 당신이 양보를 하시라고 설득했습니다. 나는 다행히도 그때 공진청장의 친한 친구였으니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 다. 그렇게 양보를 받아내고 난 다음 삼성전자의 강진구 회장한테 내가 찾아 가서 이사장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강진구 회장은 이사장으 로 관련된 데가 수십 곳인데 더 이상 이사장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여간 저는 여기서 허락하실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강경 자세를 취했더니 결국 허락을 받아내어 억지로 강진구 회장을 표준과학연구원 이사 장으로 모셨어요. 그것이 표준연구원이 공진청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94년에 표준과학연구원장의 임기를 한번만 재임하고 그만 두게 되었 습니다. 원장직을 그만 두고 난 후에 정년이 될 때까지 연구소에 4~5년간 남아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연구소에서 월급을 받는 입장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내가 무엇인가 공헌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낸 것이 통일을 대비하여 남북의 표준연구원 간의 통합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5.6 미완의 북한과의 협력 추진 독일에서 동서독이 통일되기 전 양쪽 표준연구원이 우선적으로 통합작업을 한 선례가 있었습니다. 남측은 상당한 산업발전을 이루었는데 통일되고 난 다음에 국가표준시스템에 있어 남북 간에 차이가 나게 되면 산업 활동에 큰
182 혼란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표준연구기관하고 사전에 교류를 해서 우리 측이 미리 도와줘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세 개나 수행하면서 북한의 표준과학 관련 기관장들과 만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 만나기로 약속하는 단계까 지 진행되었고 그들과 만나기 위한 경비까지 확보되었는데 세 번 다 약속을 어기고 북 측이 안 나왔어요. 북한 측에서는 세 번 다 사전에 참석자의 명단과 토의할 의제까지도 통보 해 왔고 나는 토의할 내용을 철저히 준비했었습니다. 처음 두 번은 연변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두 번 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한 번은 독일 에 가서 독일의 표준연구소 소장과 만나 표준관련 국제 세미나를 개최하여 북한을 초청하되 북한 사람이 참석하는 경비는 내가 전액 부담하겠다는 조 건으로 개최하기를 부탁했습니다. 또한 북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참석한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는 조건도 제시했는데 독일 측은 친절하게도 그것을 승낙하여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 때에도 이북에서는 참석자 명단까지 보 내 왔어요. 그런데 내가 참석한다는 소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아무 연락도 없 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 다 무산되었지만 그러한 노력의 내용 과 북한의 표준관련기관에 대한 연구보고서는 작성되어 표준연구원에서 보 관하고 있습니다. 세 건의 연구 프로젝트를 마친 후에도 북한과 친밀히 교류하고 있었던 러 시아의 표준기관과 중국의 표준기관을 접촉하고 다녔어요. 그런 와중인데 설 상가상으로 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신문에까지 난 얘기인데 블라디 보스톡에 갔을 때 나하고 저녁식사까지 같이하고 해어진 외무부 최 영사가 테러를 당해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 끔직한 사건도 있었으 나 나는 그 때 3~4년간을 꾸준히 노력을 계속했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 어요. 그러나 그 때 연변대학의 김진경총장과 알게 된 것은 보람으로 생각하 고 있습니다
183 제3절 특정연구사업의 출범과 연구소 본연의 연구업무 착수 1. 주요 연구사업 추진 (정낙삼 박사 회고) 1.1 특정연구사업에 의한 정밀측정자동화연구사업 추진 80년대 초에 과기처에서 특정연구사업을 신설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대형 국책연구사업이 시작되었을 때입니다. 그때에 저는 연구비 3억원의 정밀측정 자동화연구사업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길이분야, 전기분야, 역학분야 등 분야 별로 분과책임자들이 선정되었고 제가 총괄책임자를 담당했습니다. 그 연구 사업은 82년도부터 5년간 계속되었으며 단위 사업으로는 그 전에 비해 몇 십 배 되는 큰 연구사업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특정연구개발사업이 구체적 으로 어떻게 운영되는 건지 잘 몰랐으나, 우리 연구소 창설 이래로 억 단위 의 연구비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그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고 수 행하는데 전 연구소가 매달릴 정도였어요. 연구비다운 연구비를 받은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때까지 분야별로 표준 연구실 기기들의 동작 상태 와 성능을 점검하는 아주 기본적인 연구에서 새로운 결과를 얻기 위한 창의 적 연구로 전환되었던 것이고 그 결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국가표준기관 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측정표준 분야에서 특정연구사업으로 정부 당국을 이해시켜 예산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정부 당국을 이해시키는데 있어 가장 어려 웠던 것은 표준을 확립하고 유지한다는 개념을 이해시키는 것이었어요. 표준 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은 신기술 개발이 아니고 만들어진 장비를 사오면 되고, 또 그것을 유지하는 데는 전기료와 운영비 정도만 필요할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실제로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 분야에 관련된 측정기술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만 새로운 실용 연구 자체가 가능하게 되는 경우가 대 부분인데 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현대 전자통신기술은 안정된 주파수원의 유지가 필수요건이고 이것은 주파수 안정도 측정기술이 있어야 가능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다른 면을 보면, 전자파분야 표준 확립에 있어 킬로헬츠, 메가헬츠, 기가헬 츠 영역의 측정기술은 그 내용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어 전혀 다른 장비 가 사용되고 있으며, 온도분야 표준 확립에 있어서도 섭씨 100도 이하의 상
184 온에서는 수은이나 알코올 온도계를 사용하나, 용광로의 섭씨 1000도 이상 을 측정하는 데는 전혀 다른 기술과 방법을 사용하는 등 측정온도 범위에 따라 기술과 방법이 다르고 그와 동시에 그 측정기술 자체도 나날이 발전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 관리들은 동일한 온도계통 확립이고 범위만 다른 것뿐인데 계속해서 연구비가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1.2 표준분야 확대 연구사업 추진 이때, 우리는 국제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표준분야들을 파악하고 외국과 비 교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NBS에서 조사연구 된 자료들을 많이 참고했어 요. 그 당시에 조사된 것으로는 선진국에서는 100여개의 분야의 표준을 유 지하고 있는데 우리는 약 70개 분야 정도이고 정확도도 낮은 수준이어서 그 당시의 산업발전 추세를 감안하면 이 수준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러니 표준분야의 영역도 대폭 늘리고 그 질적 수준 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9개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때 계획으로는 3년마다 10개 분야를 확장해서 9년 동안 30개 분야로 확장하는 표준분야확 대 연구사업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표준분야확대 연구사업계획의 내용은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 나는 그전에 사용하던 표준의 유지라는 개념에서 새로운 표준분야의 확장이 라는 개념으로 바꾼 것으로, 유지하는데 무슨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드느냐라 는 의문을 없애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산업의 첨단화 추세에 따라 필수적 으로 요구되는 표준의 정확도 향상이라는 개념이며 그것이 또한 국제적인 추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계획은 과기처나 경제기획원 관리를 이 해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계획의 내용을 듣고 사업을 인정 해준 경제기획원 예산과장이 지금의 강봉균 의원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장기계획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취해진 연구소의 조치 중의 한 가지 는 인문계 출신이 그동안 담당하던 연구기획부장을 이공계 출신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그 당시 소장은 강홍열 박사님이셨는데 연구기획 쪽의 업무를 이 공계 출신 연구원이 담당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좀더 실질적인 연구기획이 될 수 있고, 정부 당국에 설명할 때도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고 하시면서 저를 연구기획부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러한 조치의 결과로 표준분야확장 연구
185 사업을 장기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소 발전에 많은 도움 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3 전자파무반향실 및 전자파 야외시험장 설치 추진 저는 그 후에 전자파 분야 연구를 담당했었는데 그 분야는 지금도 그렇지 만 장비가 엄청나게 비싸고 특히 마이크로웨이브 분야는 기본시설이 중요하 고 고가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전자파무반향실인데 전자파를 흡수하는 고가 재료로 실험실을 설치해야 되니까 그 비용이 몇 십만 불씩 들어요. 그 당시에 전자파장해 문제가 세계적으로 처음 대두되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데 그 예산 이 없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과기처에서 표준연구소 소유의 부 지 일부를 과학재단 부지용으로 할애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그래서 연구 소에서는 이 자금을 연구소 시설보완 및 연구원 복지향상의 목적으로 사용하 게 되었는데, 그 자금 일부로 전자파무반향실을 갖추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매우 중요한 장비 하나를 연구소가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 전자 파장해 문제가 국제 교역의 비관세 무역장벽 으로 떠 오르게 되어 정통부에서도 수출용 전자제품 관계로 큰 관심을 가졌으며, 자동차 수출에 있어서도 전자파장 해 문제 해결이 초미의 관 심사가 되었어요. 예를 들 면 현대자동차의 엑셀이 처 <사진 16> 전자파 무반향실 음 미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그것들이 전자파장해 때문에 리콜이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 등입니다. 그때 이 분야 연구를 적기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전자파무반향실이 있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는 기초기술로서 전자파 장해 측정기술 확보가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또 하나의 대형 연구시설로서 전자파 야 외시험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86 야외시험장 설치비 확보를 위하여 과기처에 특정연구사업으로 신청했으나 당시의 소재평가센터하고 맞물려서 예기치 않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 다. 그 소재평가센터는 KIST와 표준연구소가 경쟁하다가 표준연구소가 담당 하도록 결정이 났기 때문에 연이어 표준연구소에 연구비가 편중되도록 하기 는 곤란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때는 한국표준연구소가 한국표준과학연구 원, KRISS(Korea Research Institute of Standards and Science)로 바뀌 었고 당시 박승덕 박사께서 원장이셨으며, 이 사업의 중요성을 금방 이해하 시고, 저하고 같이 가서 설명하기도 했으나, 이 사업의 타당성과는 전혀 관 련 없는 이유로 결국 그 연구비 전액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특정연구사업에서 일부, 정통부 지원금에서 일부, 기타 경비에서 예 산을 보충하는 등 여기저기서 변통해 가지고 지금 표준연구원 뒷산에 있는 야외시험장을 만들었지 요. 그때에 과기처에서 과감히 지원받지 못한 것 을 매우 아쉽게 생각했습 니다. 그 후 정통부 전파 연구소는 이천에 큰 야외 시험장을 만들었고, 대기 업에서도 야외시험장을 여 러 군데 설치했습니다. 그 러나 이 모든 야외시험장들 <사진 17> 전자파 야외시험장 은 표준연구소가가지고 있 는 표준야외시험장과 설비로 교정해 주어야만 그 설비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표준연구소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어서 다른 연구소나 산업체에서 전자파장해 문제를 잘 해결 해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마음고생을 하면서 동분서주했던 모든 일 들이 지금은 큰 보람으로 느껴집니다. 2. 한국표준연구소의 대표적 연구 성과 (이충희 박사 회고) 표준연구소의 임무와 관련하여, 첫째로 표준연구소는 측정표준기관이기 때
187 문에 우선 측정표준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연구 개발하여 확립하고, 둘째로 그것을 모든 산업체나 공공기관에 보급하는 차원에서 교정(calibration) 네트 워크를 형성하여 보급하고, 마지막으로 정밀측정기술을 개발하고 그 결과를 산업체에 이전하는 것입니다. 정밀측정기술의 개발 결과를 산업체에 이전한 첫 번째 경우는 온도표준 분 야이었습니다. 연구소가 기업에서 용역을 받아 기술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이 루어진 것입니다. 온도 연구실의 전문 분야가 광고온계(Optical pyrometry) 분야이었기 때문에 포항제철의 용광로 온도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었습니 다. 온도가 섭씨 1000도 이상이기 때문에 상온에서 사용하는 열전대는 사용 할 수 없고 광학적 방법으로 원격측정을 해야 합니다. 광학적으로 밝기를 측 정해서 온도로 환산하는 방법인 광고온계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시 료의 광학적 단위 면적당 빛 등의 放 射 力 (emittance)을 측정을 해서 실제 온 도로 환산하는 방법입니다. 포항제철의 용광로의 온도를 측정하는데 광고온 계를 써서 측정하는 방법을 우리가 포항제철에 전수했습니다. 초창기 포항제 철에서는 용광로의 온도 측정 장비는 일본에서 사들여왔으나 정확히 측정하 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포항제철에서 연구용역을 받아서 개발한 후에 그 결과를 기술이전 했습니다. 온도표준연구실에서는 1980년대부터 온도표준의 국제원기인 물의 삼중점 셀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의 삼중점은 얼음, 물, 수증기가 공존하여 열평형을 이루는 상태의 온도로서 K (0.01 )로 정의합니다 년에 고순도 증류수를 끓여 자연적으로 응축시키는 방법을 개발하여 10만분 의 1도(0.01mK)의 정확도를 가진 물의 삼중점 셀 제작에 성공하였습니다. 1998~2000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물의 삼중 점 셀 국제비교에 참가하여 물의 삼중점 셀 온도의 측정값이 NIST(미국), NRC(캐나다), PTB(독일) 등의 측정값과 비슷한 값을 얻었으며 일본, 중국의 표준기관의 측정값에 비해 오차가 적어 표준여구소의 우수한 온도측정 기술 력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2년에는 표준연구소에서 제작한 물의 삼중점 셀을 BIPM에 기증하였고, 프랑스 표준기관인 BNM-INM에도 제공하 였으며, 아시아의 개도국 중 베트남과 스리랑카에도 기증하여 이들 두 나라 는 이를 사용하여 자국의 온도표준 확립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188 <사진 18> 물의 삼중점 셀 실물사진 시간실에서는 116 시보 전화번호를 설정해 국민에게 시보를 전달해 주었 습니다. 또한 표준주파수국을 설치해서 전파연구소, 방위산업체 등에 정확 한 주파수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방위산업체에는 정밀한 시간과 주파수 측정 에 표준이 되는 주파수가 필요합니다. 광학실에서는 대형 반사망원경의 거울 을 가공하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대형 반사망원경의 구경은 2 m ~ 3 m인 데 이러한 매우 큰 거울의 표면을 정밀하게 연마 가공하는 것은 매우 어려 운 가공기술이며 국내에서는 표준연구소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광학실에는 과학원의 이상수 박사 제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상수 교수 밑에서 렌즈의 연마 가공기술을 배운 연구원들입니다. 이렇게 큰 1 m가 넘는 거울의 곡면 을 정밀가공 하는 기술은 관련 산업체에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그들 은 이러한 렌즈의 정밀 연마가공 기술을 바탕으로 각종 광학시스템을 만드 는 기술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광학거울의 핵심기술은 표면가공기술로서 비구면 거울표면 전체의 형상오 차가 30 nm 이하여야합니다. 초정밀 비구면 형상측정기술과 연마기술이 필 요한데 표준연구소에서는 20 nm 이하로 가공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 다. 이것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와 같은 수준입니다. 2004년에 표준연구소 는 지름 1 m급의 초정밀 비구면 광학거울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 광 학거울을 위성카메라에 장착하면 600 km 상공에서 지상의 0.7 m 크기의 물 체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189 <사진 19>대구경 광학거울 형상측정 사진 표준연구소는 또한 멀티스테이지 조셉슨(Josephson) 접합소자 즉 1,000 여개의 조셉슨 소자를 연결하는 기술도 개발했습니다. 그것은 전기 전압의 정밀측정에 사용하는 것인데 동남아 등 제3국에서 주문받아 제작해 주고 있 습니다. 한 개의 조셉슨(Josephson) 접합소자에서 0.1 mv~수mv의 전압을 얻게 됨으로 1 V의 전압표준을 만들려면 1,000개 이상의 조셉슨 접합소자를 직렬 연결한 조셉슨 어레이 소자를 만들어야합니다. 표준연구소는 1993년에 미 국,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조셉슨 어레이 소자 개발에 성공하 였습니다. 1995년 세계 10번째로 국제도량형국(BIPM)의 이동형 조셉슨 어 레이소자와 국제비교를 실시한 결과 V ± 0.2 nv의 높은 정확도를 얻 었습니다. 2002년에는 10 V 조셉슨 어레이 소자를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2 만개 수준의 Nb/Al 2 O 3 /Nb 소자로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전압표준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앞으로 차세대 초전도 수퍼컴의 핵심기술인 RSFQ 소자 응용논리연산기 개발에 활용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90 <사진 20> 2520개의 조셉슨 접합소자로 구성된 1 V 조셉슨 어레이 소자의 구조도, 크기는 16mm X 8mm이다. <사진 21> 25,000개 조셉슨 접합소자로 구성된 10 V 조셉슨 어레이소자 구조 표준연구소는 극저온, 초고온, 고진공 등의 극한기술도 개발했습니다. 극저 온에서는 헬륨을 사용해서 2 K~4 K 정도의 극저온을 달성할 수 있고 초고 온에서는 플라즈마 핵융합이 가능할 정도의 온도까지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극한기술에는 그 외에 초고압 기술과 초고자장 기술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 한 극한기술 개발은 국책과제로 3년 정도 지속되다가 김진현 장관과 서정욱 차관이 재임 할 때에 극한기술 개발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초고압, 초고진공, 초고자장 등의 극한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가 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것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하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극한기술은 미래 첨단 기술로서 특히 초고진공 및 초청정 기술 은 우주기술과 직결이 되어 있어 그것을 살리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 았어요. 특히 그 후 한국일보의 이광영 기자가 여러 번 특필을 했었는데 지
191 원이 미흡한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저온 분야만은 어느 정도 기 술개발이 추진되어 SQUID를 이용하여 뇌파 검사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1. 참고문헌 1. 과학기술30년사, 과학기술30년사 편찬위원회, 과학기술처 발행, (1997.6) 2. 한국표준과학연구원 30년사, 발행인 이세경,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발행( ) 2.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회의 사진 박승덕 ( 朴 勝 德 1933년 생) 1956 육군사관학교 졸업 1971 캐나다 Ottawa 대학 기계공학 박사 육군사관학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한국기계연구소 소장 과학기술처 기계연구조정관, 연구개발조정실장, 기술정책실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이충희 ( 李 忠 熙, 1935년 생) 1958 서울대학교 물리학 학사 1969 미국 브라운대학교 물리학 박사 미국 브라운대 연구원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한국표준연구소 온도표준실장, 검교정 본부장, 기술담당 부소장, 선임부장, 기술지원부 부장, 표준1부 부장, 연구위원 한국표준연구소 소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연구위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명예연구원 2002-현재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연구위원
192 정낙삼 ( 鄭 樂 三 1939년 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 이학사 미국 Purdue University 물리학 박사 미국 Purdue University 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책임연구원, 연구위원 시간.주파수연구실장, 전자파연구실장, 전기연구실장, 전자기연구부장, 표준연구부장, 연구기획부장, 기술지원연구부장, 기술협력실장 역임 한남대학교 객원교수 및 연구교수 현재 충남대학교 연구교수 김재관 ( 金 在 官 1933년 생) 1956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학사 1960 독일 뮨헨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 박사 독일 뮨헨공과대학교 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부장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국립공업표준시험소 소장 한국표준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교수 강박광 ( 姜 博 光 1941년 생) 1966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학사 1973 캐나다 월터루 대학 화학공학과 박사 과학기술처 심의관, 기술협력국장, 원자력국장, 연구조정관 주미대사관과학관, 연구개발조정실장 기초과학지원연구소 소장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호서대학교 교수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연구위원
193 정낙삼 이충희 김재관 이충희 김재관 박승덕 강박광 박승덕 강박광 박승덕 강박광 김대석 <사진 22> 3차 워크숍참가자 회의사진
194
195 제4장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과 한국 특유의 정부출연형 국가연구개발 체제 확립 과정 분석
196
197 제1절 특정연구기관육성법과 국가연구개발 체제 확립 개요 1. 국가연구개발 체제 확립과 KIST모델 1.1 KIST모델에 근거한 연구개발 체제 출범 7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국가연구개발체제는 연구개발비 연구인력, 그리고 연구장비 등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이를 통하여 국가 수요에 부합하는 창 의적인 연구개발을 추구하는 소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모델을 정착 발 전시킴으로써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 라도 우리나라 연구소들은 KIST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국공립시험연구기 관 형태로 운영되었고, 정부의 연구개발비 총액규모도 75억원(1970년) 정도 로 극히 영세했으며, 그에 따라 기초연구를 담당해야 할 대학의 연구활동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고 산업기술분야의 연구개발 활동 또한 매우 부진한 상태였다. 특히 국공립연구기관들은 운영의 경직화와 고급 연구인력 확보의 어려움 등 때문에 연구개발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한계성을 노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처는 산업구조의 고도화 추세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KIST를 모델로 하여 고급 연구인력과 최신 연구설비를 갖춘 재단법인 형태 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선택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정부출연 연구권역이라는 우리나라 고유 모 델 소위 KIST 모델 이라 불리는 새로운 연구권역을 창출하는데 성공하였 다. KIST 모델 또는 Choi모델(최형섭 모델)로 알려진 우리나라 정부출연연 구개발 체제는 영세한 국가 연구개발 자원을 가진 개발도상국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연구개발 정책 대안이라는 측면에서 국내뿐만 이아니라 널리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혁신적인 성격의 KIST 모델이 정착되고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당시 KIST소장을 역임한 최형 섭 과기부 장관의 노력과 지도력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평가할 수 있다. 1.2 KIST모델의 특징과 배경 철학 KIST 모델의 궁극적 목표는 고급 연구인력과 최신 연구설비 확보를 집중 적으로 지원하고 자율적이고도 창의적인 연구 추진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여
198 건을 구축함으로써 연구개발 성과를 극대화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목표 달성을 위한 첫 번째 전략은 공공기관의 안정성과 민간 재단 법인의 자율성, 유연성이라는 양쪽의 장점들을 결합한 새로운 연구기관을 설 립 운영한다 것이 모델의 핵심 철학이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공공기관 의 인사관리, 회계관리, 엄격한 감사 등의 경직성에서 오는 창의성 저하라는 단점과, 민간 기관의 안정성 부족이라는 단점 등을 동시에 극복하여 연구 효 율성을 극대화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단점 부분의 배제는 매 우 중요한 것으로 이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할 경우 KIST모델은 그 의미를 상실하는 위험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같은 KIST 모델 특성에 근거하여 높 은 수준의 봉급과 좋은 연구여건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우수한 재외 과 학자를 정부출연연구기관에 유치하여 근대적인 연구를 성공적으로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KIST 모델의 두 번째 특징은 정부의 연구비 지원에 있어 보조금이 아닌 출연금 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국공립기관이 아닌 재단법인 형태로 설립된 연구소에 지원함으로써 독자적인 기구 및 운 영방식에 따라 필요한 연구시설들이나 연구 인력을 확보하고 연구의 자율성 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출연 이라는 용어는 정부가 연구비를 지원은 하되 그 사용등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하여는 간섭은 하지 않는 다는 의미로 당시 과기처에서 처음으로 개념을 정립한 용어였다. 이러한 출연 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KIST모델은 퇴색할 수밖 에 없게 된다. KIST모델의 세 번째 특징은 Spin Off(분화) 개념이다. 이는 개발도상국처 럼 열악한 연구 하에서는 초기에 근대적 연구소로서 KIST와 같은 하나의 대규모 종합연구소를 우선 설립운영하고, 그 과정에서 제대로 성장하는 연구 부문은 독립된 전문연구소로 단계적으로 분화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여 러분야의 국가연구개발 체제를 완성한다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개도국의 한 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투입하고 선택과 집중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KIST모델의 네 번째 특징은 계약연구제의 채택이다. 이는 연구위탁자(정 부 또는 민간기업)와 경쟁 베이스로 계약을 체결하여 연구를 추진하는 제도
199 로서 보다 창의적이고 수요 지향적인 연구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장점 과 함께 연구 결과의 성패 또한 연구위탁자 즉, 수요자의 만족도에 의해 명 확하게 평가되고 판정된다는 것이다. 1.3 분화(Spin Off) 방식의 국가연구개발체제의 형성 과정 1966년에 설립된 KIST가 10여 년 간 운영되면서 민간기업의 생산과정에 적용될 기술문제의 해결이나 적정한 선진기술의 도입과, 이를 한국적 여건에 맞게 개량하여 국내에 토착화 하거나 정부의 공공기술 수요에 대응하는 과 정에서 선택적으로 집중 육성해야 할 전략기술 분야가 명확하게 들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 그러한 전문분야별로 독립된 연구기관으 로 분화(Spin Off)된 전문연구기관이 기계금속연구소, 전자기술연구소, 해양 연구소, 선박연구소, 화학연구소 등 5개 연구소였고 이후 전문분야별 정부출 연연구기관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98년에는 16개 기관에 이르게 되었 다. 이러한 전문연구기관의 계속적인 설립으로 인하여 많은 연구소들을 수용하 기 위한 부지확보가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러한 수요가 결과적으로 대덕연구 학원도시를 태동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대덕연구학원도시 조성이 현실화 되 면서 정부출연연구기관 중심의 국가연구개발체제가 실체화된 것이다. 1970년대의 기술개발 수요는 주로 민간기업의 요구에 의한 적정 기술선택 및 지도와 도입기술의 모방에서부터 소화 개량 등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 술 수요의 충족은 주로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담당하였다. 한편 KIST모델에 서 채택한 계약연구 제도와 출연연구비 개념 등이 점차 국내 대학 및 기업 연구소등으로 확산되면서 국내 연구개발제도의 전반에 걸친 새로운 발전과 연구수준의 향상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표 4-1>의 우리나라 정부연구개발비 증가에서 명확히 나 타나고 있다. 1970년의 정부연구개발비는 불과 75억원에 지나지 않아 최초 한 개의 국책연구과제 연구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세한 수준이었으나 전문 연구기관의 Spin Off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1975년과 1976년 사이에는 연 구개발비 규모가 2배 이상 증액 되었으며 이후 특정연구사업의 출범으로 국 책연구사업 개념이 도입된 80년대 초에는 1,000억원 수준에 이르렀으며 최
200 근 2005년에는 이의 약 60배에 해당하는 6조7천억원 규모에 달하여 GNP 대비로는 선진국 수준의 정부연구개발비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년도 <표 4-1> 우리나라 정부연구개발비 추이 정부 연구개발비 (억원) 정부 연구비 비중(%) GNP (조원) GNP 대비 연구개발비(%) , , , * 출처 : 과기부 과학기술지표통계DB 1.4 KIST모델이 준 교훈 우리나라는 KIST모델이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방식으로 국가연구개발 체제 를 형성했으며 그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과 교훈을 남겼다. 첫째로는 재단법인 형태의 연구기관을 설립하여 정부가 출연금 형태로 지 원함으로써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안정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보장한다 는 기본 철학인데, 초창기에는 그러한 철학이 잘 지켜져서 다수의 재외 고급 과학기술 인력 유치에 성공했으며 근대적인 정부출연 연구권역 형성에 있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KIST모델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연구결과 의 기업화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문제점 등이 발생하면서, 정부의 통 제와 간섭이 점차 확대되었고 특히 80년대 초와 90년대 초에 이루어진 2차 례의 정부의 강한 통제에 의해 자율성이 크게 축소되게 되었다. 또한 재단법 인 형태의 연구기관으로는 공무원 연금제도 적용이 불가능하고 연구비의 안 정적 지원 보장도 점점 어렵게 되는 등 안정성 보장도 어렵게 되는 문제가 현실화 되었다. 이러한 자율성과 안정성의 축소로 인하여 그간 해외에서 유 치해 왔던 유능한 많은 연구원들이 연구소를 떠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 고 이는 이공계 기피 현상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201 둘째로 KIST모델에 있어 특정연구기관 지정 방식에 의한 선택과 집중 방 식에 근거하여 우리는 선진 연구개발체제를 조기에 형성하는데 성공을 하므 로써, 많은 개도국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특정연구 기관으로 지정되지 못해 특혜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대학이나 기업에서 종 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상대적인 소외감을 유발하여 산학연 협동이 어렵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셋째로 Spin Off 방식을 택함으로써 전략산업분야의 전문연구기관이 선택 적으로 분화 발전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결국은 국가 연구개발 체제가 성공적으로 구축되는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모든 전문영역을 포괄하는 KIST와 단일 전문영역에 한정된 전문연구소 간의 영 역 마찰이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근래에는 기술의 융합 화 현상과 국가 연구개발비의 획기적인 증가에 따른 프로젝트의 대형복합화 가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세분화된 기술영역별 전문화 체제는 오히려 비 능률적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가 성장동력기술 창출에 있어 정부출연구기관의 성과가 미흡하다는 현상은 이를 뒷받침 하는 것으로 보인다. KIST모델에서 노정된 이러한 취약점들은 하나의 모델을 획일적으로 40여 년 간 고수하여 온데서 발생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기술발전 고속화, 기 술융합화, 프로젝트의 대형복합화, 기술개발 주체의 다양화 등 복잡한 발전 과정을 하나의 모델로 전부 수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이며 따라서 모델의 다양화를 신중히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된다. 2. 특정연구기관 육성법 제정 및 개정 앞서 언급한 KIST모델의 국가연구개발 체제를 법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이다. 이법에서는 정부의 출연금 지원을 받을 수 있 는 특별한 연구기관 즉 정부출연연구기관을 특정연구기관 으로 정의하고 이 법 시행령에 그 기관명을 명시하여 지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정연 구기관육성법 은 그 같은 정부출연연구소의 설립 운영을 지원하기 위한 법 적 근거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우리나라 3대 연구 권역 중의 하나 인 정부출연 연구권역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단 이 법에서 특정연
202 구기관으로 지정되면 관련된 타 법에 의하여 각종 세금의 감면, 병역혜택 등 정부의 다양한 정책적 특혜를 받도록 되어 있다. 1973년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착수와 함께 전략산업 분야별로 전문연구 소들을 Spin Off하기 시작했는데, 기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육성법 처럼 신설 연구소마다 연구소의 육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별도의 법률을 제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연구기관을 포괄하는 특정연구기관 육성법 ( 법률 제2671호)을 제정하였다. 법률 제정 당시 특정연구기관은 연구학원도시 안에만 설치하기로 했으나 우리나라 산업계의 기술수요가 점차 확대 전문화되고, 기업의 자체기술개발 을 위한 정부의 조성시책이 강화됨에 따라 특정연구기관과 관련 산업과의 유기적인 협조를 증진하기 위해 1976년 11월 특정연구기관을 연구학원도시 외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지역에도 설치할 수 있도록 개정했다. 그리고 1980 년 말 연구개발체제정비 및 운영개선방안에 근거하여 각 부처에서 분산 관 리하고 있던 과학기술관계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통폐합이 추진됨에 따라 이 를 효율적으로 운영 관리하기 위하여 1981년 3월 두 번째 개정이 이루어졌 다. 1999년 정부출연연구소가 연구회 체제로 개편되면서 정부출연연구기 관 등의 설립 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 이 별도로 제정됨에 따라 특정연 구기관육성법 의 역할은 이전에 비해 다소 축소되었다.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의 주요 내용 이 법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육성법의 체제를 많이 따랐 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KIST모델 연구기관 지정 요건) : 특정연구기관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지 역 안에 있는 재단법인인 연구기관으로 하되 그 범위는 대통령령으로 정 한다. 2 (출연 개념 도입) : 정부는 특정연구기관의 설립 운영에 필요한 인건비 시 설비 등을 출연금으로 지급할 수 있다. 또한 정부는 특정연구기관에 대 해 국유재산을 무상으로 양여 또는 대여할 수 있다. 3 (계약연구제 도입) : 중앙행정기관장과 지방자치단체장은 연구비를 출연 할 때 연구의 방법과 내용, 연구비 지급기준 등에 관해 협약을 맺을 수 있다
203 대덕연구단지조성과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을 제정하는 배경과 경위에 대 하여 당시 주요 참여자들이 워크숍을 개최하여 회고 및 증언을 청취하여 다음 페이지에 기록하였다. (증언자들의 5차 워크숍, , 과우회 회의실) 제2절 대덕연구단지 조성과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 1.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 근원은 대덕연구단지 조성 (권원기 전 과기부차관 회고)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이 제정될 당시에 본인은 종합계획관이었습니다 년에 제정된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은 그 제정된 근원을 대덕연구단지의 조성 사업에서 부터 찾아야 합니다. 연구단지 건설의 처음 아이디어는 김기형 장 관 시절에 과학기술장기종합계획에서 나온 겁니다. 그 당시에 지금은 작고한 이덕선 씨가 그 프로젝트를 맡아서 연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장관이 최형섭 박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께 연구단지 건설에 관한 브리핑을 한 것은 최형섭 장관이 오신 후에 이루어졌는데 첫해는 과학기술처 업무보고에 서 연구단지 건설을 보고하였는바, 박정희 대통령께서 특별한 언급이 없으셨 고 그다음 해 업무보고에서 박대통령께 설명을 드릴때 그 문제 한번 검토해
204 보라고 지시하셨고, 그때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은 본격적인 계획 작성 이 시작되었습니다. 1.1 KIST 분화(spin off) 계획과 대덕연구단지 계획의 맞물림 계획 입안 과정에서 우선 대두된 문제는 어떤 연구소를 대덕 연구단지에 유치할 것 인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KIST에서는 규모가 커진 연구실 은 전문연구소로 독립 발전하게 하는 소위 spin off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 니다. 그 계획의 주요 내용은 화학분야연구실, 기계분야연구실, 선박분야 연 구실 등을 KIST에서 분리 독립하여 전문연구소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KIST 주변에 집결하여 홍릉연구단지를 형성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따라서 KIST의 홍릉연구단지 계획은 과기부의 대덕연구단지 계획과 맞물 리게 되어 대덕에 유치할 연구소 문제는 그 기본방향의 가닥이 잡히게 되었 습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대덕에 유치되는 연구소가 민간기업에 대한 기술 이전 또는 기술도입의 매개체 역할을 구현한다는 개념이 정립되었으며 따라 서 연구단지에 민간기업의 연구소를 동시에 유치하는 방향으로 아이디어가 구성되어 갔습니다. 1.2 신설 연구소별 특별법 제정은 불가 대덕연구단지 계획 추진과정에 대두된 두 번째 문제는 민법에 근거를 두고 재단법인 형태로 설립되는 연구소에 국가예산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예산법 정주의 원칙 때문에 설립되는 기관 별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 습니다. KIST 설립 당시에도 이러한 예산법정주의 원칙에 의해 KIST 설립 법이라는 특별법이 선행하여 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특별법의 성격상 KIST 한 개의 연구기관 설립을 위해 특별법을 만든다는 것은 가능하나 대덕연구 단지에 유치될 모든 연구기관 하나하나에 대해서 모두 특별법을 만든다는 것은 특별법의 성격상 맞지 않다는 문제에 봉착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된 아이디어가 바로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의 제정이었습니다. 신설되는 연구소가 국립연구소 형태로 설립되었다면 국가 기관에 대한 예 산투입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립연 구소로 설립할 경우 국가기관으로서의 인사, 회계, 감사 등 운영상의 경직성
205 발생 때문에 연구소의 창의성과 자율성 침해로 이어져서 신기술 개발을 담 당할 연구소라는 설립목적 자체의 달성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문제에 봉착하 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법적으로는 국립기관이 아니지만 국 가기관과 유사한 예산투입방법 즉 정부출연 이란 방법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특별법이 필요하였던 것이고 그러한 배경이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을 탄생하게 만든 것입니다. 1.3 한 개의 특별법 아이디어 그러나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이 탄생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생 연구소별로 개별특별법을 만드는 방법을 시도했으 나 우선 법제처의 반대 의견에 봉착했습니다. 법제처의 담당 국장이 법률논 리상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또한 경제기획원 예산실에 예기하니까 그 때 담당 국장은 특별법을 만들면 그 법에 의해 국가의 예산투입 책임이 주어지는데 그러한 법을 여러 개 만드는 것은 예산 논리상으로도 맞지 않는 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이러한 반대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 도출된 아이디어가 특별법을 여러 개 만들 것이 아니라 한 개의 특별법만 만들어서 그 법에 의 해 여러 개의 연구소에 예산투입이 가능토록 하는 방법 즉 특정연구기관육 성법의 제정이었습니다. 1.4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의 두 가지 핵심 요소 : 법적 자격 부여 및 출연 그러나 하나의 특별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쉽사리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시도해 보아도 관계요로의 설득이 잘 되지 않아 상당히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 당시 과기부 장관이었던 최형섭 박사께서는 과학기술 분야 행정은 잘하셨지만 일반행정 분야의 대외적인 활동은 꺼려하셨습니다. 다행히 그 당시에 이창석 차관이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창석 차관께서는 법률 제정과 관련해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신 분이었어요. 그래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본인과는 호흡이 잘 맞아서 여러 가지 얘기도 많이 하고 큰 도움을 주셨으며 이러한 아이디어 의 형성과 실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중에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제2조에 나오는 특정연구기관에 대한 법적 자격 부여 방법 문제입니
206 다(본장 말미의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 및 개정 내용 참조). 그러니까 연 구소별로 각각 특별법을 만들어서 그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특정연 구기관육성법의 시행령에 기관명을 등재함으로서 그 자격이 부여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기관명의 법적 등재는 전술한 바와 같이 국가 예산의 출연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조세감면 혜택도 부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제처나 기획원에서는 모법이 아닌 시행령에다 등 재하게 해서는 약하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러한 논리에 대해서 대응 논 리를 만들어 설득이 가능토록 한 분이 당시의 이창석 차관이었습니다. 그 결 과 그 문제는 과기부 주장대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두 번째의 핵심 요소는 출연 이라는 법적용어의 창출과 그 개념의 정립 이었습니다. 출연 이라는 용어가 그전까지는 사용되지 않았고 그 대신 보조 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창석 차관은 출연 이라는 용어를 찾아내어 새로운 법적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가 정의한 출연 의미는 반대급부를 받지 않고 일방이 타방에게 무상으로 주는 것 이었습니다. 보조금은 보조금관리법을 적용하여 엄격한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특정연구기관에 적용할 경우 연구의 자율성 침해 우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출연 이라는 법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거기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1.5 타 부처에서도 연구소 설립 붐 일어 합세하여 목적 달성 이렇게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관하여 관련 부처와 협의를 진행할 그 당시 때마침 다른 부처에서도 대덕연구단지 건설 계획을 전해 듣고 자기 부처 산하 연구기관을 설립하여 입주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상공부 소관의 표준연구소, 체신부 소관의 전기통신연구소, 건설부 소관의 건설기술연구소 등이 그 사례인데 그들도 각각 별도의 특별법안을 만들어서 법제처에 법안 심의를 요청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부처에서 연구소 설립목적의 특별법안 심의를 한꺼번에 요청받은 법제처 에서도 일단 한 개의 특별법에 모든 연구기관을 수용하는 기본 방향에 대해서는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경제기획원에서도 여러 부처 장관들로부터 자기네 연구소 설립법을 만들면 예산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기획원도 한
207 개의 특별법 제정으로 통합하여 예산을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었 기 때문에 그 압력에 의해서 모두 같이 특정연구기관육성법 하나에 통합하 기로 하고 정부 출연예산 투입대상 연구소 즉 특정연구기관을 모두 시행령 에 열거하는 방법으로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은 1973년에 제정되었습니다. 특 정연구기관육성법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제정되었으나 그 운영과정에 서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1.6 신규 연구소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근거하여 설립 이러한 우여곡절을 그쳐 대덕연구단지에 연구소가 신설 또는 이전되는 과 정을 거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개발체제가 형성되어 갔는데 연구소별로 하나하나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의 시행령에 등재하는 절차를 거쳐 설립되었습 니다. 그러다 보니까 본인이 대덕에 입주한 모든 신설 출연연구소의 정부 대 표 설립위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1.7 특정연구기관에 대한 선심조정 특정연구기관에 예산을 배정하기 위해서는 그 전년도에 시행하는 예산 선 심조정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법적 성격상 민간 기관으로 분류 된 특정연구기관에 대한 국가예산 투입을 위해 취해지는 절차였습니다. 국립 연구기관에 대해서도 국가연구예산의 종합조정이라는 차원에서 선심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KIST 뿐이었을 때는 선심조정 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특정연구기관의 수가 증가하고 관련 부처도 다변화됨에 따라 국가연구예산의 종합조정은 꼭 시행해야 할 절차로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관련부처와 그 산하 연구기관들은 예산조정권 등 실질적인 힘이 없 는 과기처에서 시행하는 선심조정에 적극적인 협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과 기처에는 과학기술진흥법 등의 법률적으로는 국가연구예산에 대한 종합조정 권이 부여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시행에 필요한 대통령령 제정에 관계부처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국립연구기관은 관계부처에서 말 을 듣지 않았습니다. 국가 연구개발체제를 종합적으로 조정한다고 공문을 발 송하여도 회신이 오지 않는 등 과기처 힘만으로는 도저히 선심조정이 되지
208 를 않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생각해 낸 것이 기 획원 예산실의 관계관을 선심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예산총괄과장(당시 김국선 과장)을 초청하여 2년간 배석케 하여 작업 을 추진했었습니다. 김과장은 과기처가 조정한 예산에 대해서는 과기처 의견 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혀주었는데 그제야 관계부처 관계관들이 선 심조정에 참여하고 협조하게 되었습니다. 2.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의 뿌리는 분화(Spin off) 철학 (조경목 전 과기처 차관 회고)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의 근원은 최형섭 장관의 SPIN-OFF 철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최형섭 장관은 개발도상국의 공업연구 라는 대 작의 저서를 출간하셨고 그 저서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UN 기관에서도 개도 국에 대한 기술원조사업의 바이블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저서에는 KIST에 관한 사실이 많이 인용되어 있으며 정부출연 연구기관 모델은 한국 고유 형태의 국책연구기관 설립운영 모델로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저서에 따르면 개도국에서는 KIST와 유사한 산업기술 분야의 종합연구소를 처음 설립한 후에 연구소의 성장에 따라 전문 기술 분야 별로 분화 발전해 가야 한다는 소위 SPIN-OFF 모델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특정연구 기관은 그의 저서가 정책의 기조가 되어 보완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디어의 기본을 만들어서 보급한 사람은 최형섭 장관으로서 그것을 미국이나 UN 같은 해외기관에 가서 발표하고 그랬어요. 내가 미국에 최형섭 장관을 모시고 갔을 때도 그 저서의 근거로 강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저서가 우리의 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친 과학기술정책 및 행정에 기 본적인 바이블이 되었던 것입니다. 3. 특정연구기관에 대한 제세감면조항 설정으로 막대한 혜택 부여 (한기익씨 회고)
209 본인이 70년대 초 과기부 종합계획관실 사무관일 때 맡은 주요업무가 대 덕연구단지 건설과 특정연구기관 설립 육성이었습니다. 대덕연구단지에 입주 하게 될 정부출연연구소로서의 특정연구기관과 민간기업연구소 대학을 입주 시켜 오늘의 대덕연구단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법률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 는 많은 노력중 이들 연구기관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조세감면 문제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재 단법인 형태로 설립되는 특정연구기관은 국립연구기관과 달리 연구소 부지 나, 건물 시설 등에 대하여 막대한 지방세(재산세, 취득세, 등록세)와 국세 (법인세, 소득세, 특소세 등)가 부과되고 해외로부터 도입하는 연구기자재의 관세를 물어야하므로 설립초기 연구소 재정이 취약한 실정에서 위와 같은 제세를 감면 받지 않으면 연구소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KIST로부터 분화 발전된 전문연구기관으로 대덕연구단지 와 창원 등 산업기지에 입주하는 화학연구소, 기계연구소, 선박연구소, 해양 연구소, 전자기술연구소, 우주항공연구소 등이 설립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바로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의한 특정연구기관 지정과 함께 정부의 각종 조세지원 혜택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과기부에서는 KIST로부터 전문연구소를 독립시켜 대덕연구단지 등에 입주 시킬 5대전략연구소를 특정연구기관 육성법 제2조에 특정연구기관 으로 지정하고 이들 연구기관의 설립을 연차적 단계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조세감면 혜택은 관련세법(조세감면규제법, 법인세법, 소득세 법, 지방세법, 관세법 등)에 개별 법인이 명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기 부에서는 일관되게 조세감면규제법 등 관련세법에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 2조에 지정된 연구기관 으로 일괄 반영하여 전문연구소들의 세제문제를 한 꺼번에 해결하도록 제도화하게 되어 매우 보람이 있었습니다. 이를 추진하 는 과정에서 재무부 세제당국과 마찰을 빚은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 니다. 과기부에서는 특정연구기관으로 지정만 해놓고 연구소를 연차적으로 설립 하니까 재무부측에서는 법인도 없는 유령연구소에 대한 조세지원은 불가하 다는 것이고 과기부에서는 특정연구기관으로만 지정하면 자동지원이 되는 제도를 정착시켜야만 연구소 설립운용이 용이해지는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210 라 심혈을 기울여 이를 관철하려 한 것입니다. 그 핵심내용은 조세감면 규제 법등 모든 세법에서 특정연구기관은 모든 조세의 감면대상임을 명문화한 것 이었습니다. 이러한 세제상의 제도개선으로 이후 신설되는 연구기관들은 특 정연구기관 육성법에 지정된 연구기관 으로만 되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 게 된 것입니다. 3.1 재무부 설득에 혼신의 노력 그 당시 본인은 재무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재무부 소득세과장은 정부출연연구기관(특정연구기관)의 연구비 및 연구수당에 대한 소득세 감면요청에 좋아요. 연구소에 대하여 소득세를 감면해주겠어요. 그러나 연구소내 행정직이나 수위 등은 연구에 직 접 참여하지 않으니 조세감면대상에서 제외하겠어요. 라고 주장하는 등 저 를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이런 주장을 설득하기위해 계속 맞서 논쟁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그럼 수위가 없으면 밤에 고가의 연구기자재를 도둑맞아도 괜찮다는 겁 니까? 그는 맞받아서 수위의 급료까지 연구개발비라고 주장할 수 없잖 아요. 그런 비용은 제하고 실제연구에 직접 투여한 경비에 대해서만 세금 감 면해야 옳지 않아요!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논쟁으로 오전 내내 입씨름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그런 논쟁이 벌어진 근본적 원인은 재무부 측의 입장에서 보면 내국세 징수에 비하여 세출예산의 수요가 워낙 커 조세 감면 폭을 줄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며 과기처에서는 산업기술수요에 대 처할 전문연구소의 육성이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씨름하였던 당시 재무부 소득세, 관세과장은 훗날 산업은행 총재직 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들은 처음과 달리 과학기술발전과 연구개발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차차 좋아져 더욱 발전된 과학기술 세제지원에 많은 도움을 주 었습니다. 제가 그 뒤 사무관과 기술개발과장을 하는 동안 10년 이상 과학기술관련 세법의 제도화를 추진하면서 재무부와 내무부 당국자를 설득했던 일화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특히 과기처 내에서는 이응선 차관께서 그거 어떻 게 되었느냐, 세법에 구체적으로 못 박았느냐 등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주셨
211 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4. 연구활동비에 과세하겠다는 국세청 방침을 해결한 사례 (곽종선씨 회고) 그 당시 각 세무서에서는 세원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조세감면과 관련해서는 조세감면규제법 및 관련세법에 분명히 명시되어야 가능하게 되 어 있습니다. 거기에 등재가 되어야지 개별법에서 아무리 명시해봐야 통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창원의 연구소에서 조세감면 관련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 습니다. 그때 창원의 연구소에 대해서 창원 세무서에서 연구활동비까지 과세를 하 겠다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차관님께서 저를 부르더니 창원 에 갖다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창원에 가보니까 창원세무서에 이전에 과기처 에서 근무하다가 세무서로 전직한 직원이 있었는데 그에게도 세원확보를 지 시하니까 그가 출연연구소의 연구활동비가 비과세 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했 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게 국세청에 보고되어 전 출연연구소를 조사하니까 모두 비과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국세청에서는 연 구소의 주된 업무 경비도 아닌 개인 소득에 대해서는 비과세를 할 수 없다 는 논리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됐었어요. 그 당시에 저의 친구가 국세청 고위간부이었어요. 그 사람한테 가서 이럴 수 있느냐고 따지기도 하고 사정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위간부 얘기가 일선 세무서에서 보고가 들어오는데 창원에서 들어오지, 전자연구소 소재 지인 구미에서 들어오지, 대전 세무서에서 들어오는데 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척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국세 청 고위간부하고 좀 봐주라고 담판을 짓기까지 했어요. 그러다가 청와대에 가서 담당 비서관에게 이것 좀 문제가 심각하다는 보고도 드렸어요. 그러니 까 연구활동비에 과세하면 연구원의 급여가 줄어들어 소득이 적어지므로 문 제가 생긴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청와대 담당비서관의 도움을 받아서 조 세감면규제법 및 관련세법에 총 급여의 20%에 해당되는 금액을 조세감면한 다는 수준에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세감면규제법 및 관련세법에 그
212 러한 내용이 명시됨으로서 해결된 것으로서 여러 연구소에서 세금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을 막아낸 경우입니다. 참고 자료 1. 참고문헌 1. 과학기술30년사, 과학기술처 발행(1997.6) 2. 특정연구기관육성법, 국가기록포털, 2.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권원기 ( 權 原 基 1934년 생) 1958 연세대학교 학사 1977 미국 하버드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1986 한양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과학기술처 종합계획관, 과학기술심의관, 국립과학관 관장, 기획관리실 실장, 과학기술심의실 실장, 원자력 상임위원 과학기술처 차관 한국과학재단 사무총장 포항공대 교수 한국기술교육대 총장 조경목 ( 趙 庚 穆 1937년 생) 1961 서울대학교 전기공학 학사 1971 영국서섹스대학교 개발정책특별과정 수료 1975 미국코넬대학교 과학정책특별과정 수료 과학기술처 진흥국 진흥과 과장, 주미 한국대사관 과학관, 원자력안전국 국장, 과학기술심의실 실장, 과학기술처 차관 제12ㆍ13대 국회의원(민정,전국), 민자당 국회의원 데이콤 고문, 삼성건설 고문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회장 현대건설 고문 (사)한국엔지니어스클럽 부회장 (사)한국플랜트학회 회장(현 명예회장) 2004-현재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
213 한기익 ( 韓 基 益 1937년 생) 1967 경북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경제학 석사) 과학기술처 진흥국, 사무관 과학기술처 기술개발 담당관 (서기관), 기술개발과장, 기술조성과장 과학기술처 대덕단지관리소장(부이사관), 과학기술처 기술정책관, 기초연구조정관(이사관) 1996 과학기술처 명예퇴직(관리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감사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감사 1997-현재 대덕엔젤클럽 회장 곽종선 ( 郭 鍾 善 1936년 생) 1961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학사 1985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수료 전매청 경제기획원 과학기술부 대전EXPO 조직위원회 파견근무 과학기술부 복귀, 관리관 승진.퇴직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감사 대덕전문연구단지 관리본부 사무총장, 전문위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감사 권원기 조경목 한기익 곽종선 <사진 23> 5차 워크숍 참가자 회의사진
214 3.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제정 및 개정 내용 개요 제정 : 제1조 (목적) 이 법은 과학기술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정부가 출연하는 연구기관 (이하 "특정연구기관"이라 한다)의 보호육성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 다. 제2조 (특정연구기관) 특정연구기관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연구학원도시안에 있는 연구기 관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재단법인으로 한다. 제3조 (출연금등) 1정부는 특정연구기관 또는 제8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공동이용시설 의 건설비 및 운영비와 운영에 필요한 기금에 충당하게 하기 위하여 특정연구기관 또는 제 8조제2항의 규정에 의한 공동관리기구(이하 "공동관리기구"라 한다)에 출연금을 지급할 수 있다. 2제1항의 규정에 의한 출연금의 교부 사용 및 그 관리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 으로 정한다. 제4조 (국유재산의 무상양여등) 1정부는 특정연구기관 또는 제8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공동이용시설의 건설과 운영을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특정연구기관 또는 공동관리기구에 국 유재산을 무상으로 양여하거나 대부할 수 있다. 2제1항의 규정에 의한 양여 대부의 조건 및 절차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국유재산법의 규 정에 불구하고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5조 (사업계획서) 특정연구기관과 공동관리기구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매 회계연도 개시전에 사업계획서 및 예산서를 작성하여 주무부장관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개정 2조 (특정연구기관) 특정연구기관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지역안에 있는 재단법인인 연구기관 으로 하되 그 범위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전문개정 ] 개정 제1조 (목적) 이 법은 과학기술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정부가 출연하는 연구기관 의 보호육성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개정 > 제2조 (특정연구기관) 이 법에 의하여 정부의 보호육성을 받을 수 있는 연구기관은 특별 법에 의하여 설립된 연구기관과 재단법인인 연구기관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지정하는 연구기 관(이하 "특정연구기관"이라 한다)으로 한다
215 [전문개정 ] 제3조 (출연금등) 1정부는 특정연구기관 또는 제8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공동이용시설 의 설립 건설 연구 및 운영에 소요되는 경비와 운영에 필요한 기금에 충당하게 하기 위하여 특정연구기관 또는 제8조제2항의 규정에 의한 공동관리기구(이하 "공동관리기구"라 한다)에 출연금을 지급할 수 있다. <개정 > 2제1항의 규정에 의한 출연금의 교부 사용 및 그 관리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 으로 정한다. 제5조 (사업계획서등의 승인) 1특정연구기관과 공동관리기구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매 회계연도 개시전에 사업계획서 및 예산서를 작성하여 과학기술처장관에게 제출하 여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 경우, 과학기술처장관은 그 승인에 앞서 출연금을 지급하는 중 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당해 출연사업에 대하여 협의하여야 한다. 2제1항의 사업계획서 및 예산서의 내용을 변경하고자 할 때에도 제1항과 같다. [전문개정 ] 제5조의2 (연구계획서 및 연구보고서등의 제출) 1특정연구기관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 에 따라 연구계획서와 연구보고서를 출연금을 지급하는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단체 의 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다만, 수탁계약에 의한 연구에 대하여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2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제출받은 연구계획서 와 연구보고서를 심의 평가하고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그 연구계획서의 수정 보완등 필 요한 조치를 취하게 하거나 연구성과의 보급을 권고할 수 있다. [본조신설 ] 제6조 (결산) 1특정연구기관과 공동관리기구는 매 회계연도의 세입세출결산서를 과학기 술처장관이 추천하는 공인회계사의 회계검사를 받아 과학기술처장관과 출연금을 지급한 중 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개정 > 2제1항의 경우에 그 결산서의 기재사항중 국가비밀에 속하는 연구업무와 이에 직접 관련 되는 업무에 관한 사항은 공인회계사의 회계감사대상에서 이를 제외한다. 제8조 (공동이용시설등) 1특정연구기관은 합동하여 공동이용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 <개정 , > 2제1항의 규정에 의한 공동이용시설의 설치 관리 및 운영에 관한 업무와 특정연구기관상호 간의 관련사업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과학기술처장관의 승인을 얻어 공동관리기구를 설치할 수 있다. <개정 , > 3제2항의 규정에 의한 공동관리기구의 명칭 기능 조직과 운영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 통령령으로 정한다. 제8조의2 (공동연구등) 과학기술처장관은 특정과제의 공동연구를 수행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특정연구기관의 연구원으로 하여금 공동으로 연구하게 하거나 연
216 구시설을 공동으로 활용하도록 조치할 수 있다. [본조신설 ] 제8조의3 (연구협약의 체결)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특정연구기관에 연구비를 출연할 때에는 연구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하여 그 특정연구기관과 연구방법 연구내용 연구비 지급기준 및 연구보고서의 제출등에 관하여 협약을 체결할 수 있 다. [본조신설 ] 제8조의4 (업무협조등) 특정연구기관과 공동관리기구는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 단체의 장으로부터 조사연구개발이나 기술지원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우선적으로 이에 응하여야 한다. [본조신설 ]
217 제5장 특정연구개발사업 및 선도기술연구개발사업 출범과 국책연구사업 관리 체제 확립 과정
218
219 제1절 특정연구개발사업 1.개관 우리나라가 과학기술 진흥을 국가 경제발전의 일부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 은 1960년대부터이다. 당시 정부는 공업화를 통한 산업의 근대화라는 기본 목표 하에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 의 착수와 동시에 제1차 기술진 흥5개년계획 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 국과학기술연구원:KIST)를 설립하고, 1967년에는 과학기술처를 발족함으로 써 과학기술의 태동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르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우리의 기술획득 수단 은 선진국으로부터 일괄방식(turn-key base)으로 도입된 생산설비와 운전기 술의 학습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후진국형의 기술개발전략이었다. 이 기간 중 과학기술정책은 민간부문의 초보적인 연구개발 능력을 높이고, 과학기술 공 급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것으로 정부 주도의 연구개발 활동에 초점을 맞추 고 있었다. 과학기술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정부의 연구개발 활동은 그 당시 활발하게 설립되기 시작한 정부출연연구기관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수행되었 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외국기술의 도입과 소화 개량 그리고 자체 개발 과 정을 통해 산업계로 기술확산을 도모하였고, 이러한 노력들은 점차 산업계와 학계의 연구개발 활동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이하 특연사라 함)은 과학기술부가 1982년에 신설한 최 초의 국책연구개발 사업이다. 국가의 주요 연구개발 국책사업으로 80년대와 90년대의 20년간 약 5조원(정부출연금 3조4천억, 민간부담금 1조5천억)이 투입되었으며 특연사의 연간 예산은 1982년 초년도의 133억 원에서 2007 년의 4,484억 원으로 무려 34배로 증액되었다. 특연사의 정부출연 예산은 1990년에 1,000억 원대 돌파, 1995년에 2,000억 원대 돌파, 2001년에 4,000억 원대 돌파 등 매 5년마다 약 2배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으며 국가 총 연구개발비의 12~19%를 점유해온 매우 중요한 국책 연구사업이다. 1.1 국가연구개발 사업 관리체계의 변천 1980년대 초반의 정부주도 국가연구개발사업에서는 선진국 기술의 모방과
220 양적 성장 위주의 관련 사업이 시행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 와서는 선진국 의 기술을 소화 개량하는 기술개발에 초점을 두는 한편, 우리나라의 주요 기 간산업과 기술간의 연계성 확보를 추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양적 팽창보다 는 과학기술의 질적 고도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각 부처가 고유의 역할과 기능에 맞는 국가연구개발사업에 착수하게 되면서 다양한 형태와 특성을 가진 국가연구개발사업체계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 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경제구조가 기술 집약화 되고 이에 따른 기술개발 수요의 확대, 기업의 기술우위 인식 확산 및 자체기술개발 전략에 따른 민간 주도의 기술혁신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하면서 민간의 과학기술투자가 확대되 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민간의 자체 연구개발 활성화를 통한 기술 개발 역량 강화를 위해 국가연구개발사업에 민간의 기술개발 수요를 반영시 키면서 공동연구비 분담형태, 즉 민간의 매칭펀드(matching fund)를 통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게 되었다. 1.2 특정연구개발사업 태동 배경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과학기술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 변화는 국가적으 로 새로운 전략을 요구하였다. 선진국간의 기술보호주의의 확산과 첨단기술 을 가진 선진국간의 상호협력은 우리에게 있어서 산업발전을 위한 기술획득 및 기술개발에 새로운 장벽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을 포 함한 신흥 개발도상국가들의 급격한 경제성장과 시장에서의 경쟁력 향상은 우리의 생존에 중요한 위협요소로 등장 하였다. 이러한 환경하에서 국제적 경쟁력 확보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독자적 기술개발 대책이 절실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체제정비와 함께 1960~70년대에 부분적으로 구축된 과학 기술기반을 토대로 하여 국가 전략적 관점에서 연구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1982년에 정부는 그동안 정부출연연구기관별로 지원하던 연구개발 자원을 통합하여 과학기술부의 주관으로 특연사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과학기술부는 1981년 말에 기술개발촉진법을 개정하여 특정연구개발사업 근거로 제8조3항을 신설함으로써 특정연구개발사업이 태동되었다. 특정연구 개발사업의 법적 근거 마련은 특정연구기관육성법과 함께 80년대 이후 국가 연구개발 관리 체제의 법적 근거에 있어 양대 축으로 역할 해 왔다. 특연사의 80년대 초 출범 배경은 큰 틀에서 보면 1 경공업에서 중화학공
221 업으로 산업구조 개편이 추진됨에 따른 기술기반 조성의 필요성 절감, 2 당 시 기술보호주의 추세 강화에 따른 자주적 기술개발 역량 확보 필요, 3 70 년대 석유파동 이후 에너지 대책 강화 필요성 대두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 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1 제5공화국 정권 출범에 따른 대폭적인 구조조정 추진, 2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기업화 실적 미흡에 대응한 획기적 조치의 필 요성, 3 전자산업 회생 목적의 반도체 기술개발을 위한 대형 연구과제 추진 필요성 대두 등을 그 배경으로 들 수 있다. 특연사의 구체적인 목적과 역할은 첫째, 미래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지원 하기 위한 유망신기술의 개발, 둘째, 획기적인 신기술 출현에의 대응 능력 또는 창의적 연구능력의 확충, 셋째, 공공분야 또는 국가전략 추진분야에 대 한 기술개발, 넷째, 국가기술혁신시스템의 효율 증진을 위한 연구기반 조성 등을 추구하였고, 이를 통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산 학 연 기술개발 역량을 결 집하고 과학기술혁신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과학기술력을 선진국 수 준으로 제고하고자 하였다. 연구비 규모는 출범 당시 국가주도 연구개발사업과 기업주도 연구개발사 업의 2개 사업에 133억원을 투입한 이래 매년 확대되어 1990년에는 9배가 늘어난 1,200억원, 2000년에는 33배가 늘어난 4,361억원, 2006년 현재에는 42배가 늘어난 5,605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사업도 2000년에는 21세기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 국가지정연구실사업, 창의적연구진흥사업, 선도기술개 발사업, 우주기술개발사업 등 11개 유형의 사업으로 다양화되었고, 2006년 현재 미래원천기술, 우주기술, 연구기반 구축, 연구관리 등 4개 분야에서 21세기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 다목적실용위성사업, 나노팹 구축 사업 등 총 12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그림 1>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역할
222 1.3 다양한 연구사업 프로그램의 산실 역할 특연사는 한 가지 유형(프로그램)의 국책연구사업이라기 보다는 필요성이 발생함에 따라 다른 유형의 국책연구사업을 추가해 가는 공급원으로 운영되 었으며 1993년까지는 사실상 과기처 국책연구사업의 유일한 자금 소스로 운 영되었다. 특연사는 초년도에는 국가주도 연구개발사업 과 기업주도 기 술개발사업 의 두 가지 유형으로 추진되었다. 국가주도의 경우에는 공익성 이 강한 과제가 선정되어 연구비 전액을 정부가 부담하고 기업주도의 경우 에는 핵심 산업기술을 정부와 기업이 공동 부담하여 개발하는 방식을 택했 다. 그 후 1983년에는 대학의 참여를 허용하기 위해 목적기초연구사업 이 추가되었고 1985년에는 국제공동연구사업 추가, 1992년에는 선도 기술개발사업(G7사업) 추가, 1993년에는 원자력연구개발사업 과 중간 핵심기술개발사업 추가, 1994년에는 출연기관연구개발사업 과 핵심엔 지니어링기술개발사업 추가 등 과학기술계의 주장이나 장관의 교체등 정책 변화에 따라 사업이 추가 또는 폐지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일부 사업은 별도의 근거 법을 마련하여 분리 독립되기도 했는데 1993년의 기초과학연 구사업 과 1996년의 원자력연구개발사업 이 그 사례이다. 1.4 특정연구개발사업의 독특한 관리와 연구기획체계의 변천 특연사가 출범됨으로써 국가연구관리 방식의 일대 전환이 있었다. 그동안 에는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직접 예산을 확보한 후에 자체적으로 연구과제 를 수행하던 자율적 연구관리 방식이었으나 이를 정부 주도로 대형 연 구과제를 먼저 결정한 후에 연구수행기관을 공모하여 결정하는 정부 주도 연구관리 방식으로 전환하는 국책연구사업 개념이 도입되었다. 또한 대규모 정부투자기업이나 민간 대기업이 연구비를 공동으로 부담하여 대형 국책연 구사업을 추진하는 matching fund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반도체 개발 사업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는 특연사의 예산 규모가 1,000억원 미만이었기 때문에 과학기술처가 직접 관리했다. 그러나 선도기술개발사업(G7)이 출범한 1992 년에는 정부출연연구비 1,300억원, 매칭펀드 798억원으로 총 2,000억원을 초과함에 따라 과학기술정책연구소(STEPI)에 연구기획, 관리, 평가 등의 업
223 무를 위탁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기획 관리는 연구개발의 성공적 완수에 필수 불가결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국가 연구개발 목표를 설정하고 이들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결정하는 과정(process)인 연구기획과 기획된 과제를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선정, 관리 및 평가하고 성과를 활용하 는 과정인 연구관리는 연구자의 연구역량을 보완 및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 하기 때문이다. 초기인 1980년대 중기까지는 단위과제들을 상향식(Bottom-up) 방식에 의 거, 연구자들이 제안한 과제 중에서 사업목적에 부합된 과제들을 선정하는 방식을 취했다. 따라서 연구기획은 전적으로 과제수준을 연구과제 수행자들 에게 의존하는 형태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기존의 상 향식 방식과 함께 국책연구개발과 같은 목표중심적 대형과제가 추진되면서 전략개념을 도입한 과제 지정방식이 병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2년부 터는 G7사업과 같은 대형복합과제의 추진으로 체계적인 사전기획에 의한 전 략적 하향식(Top-down) 방식과 출연연구기관사업과 같은 과학기술의 시즈 (Seeds) 형성을 목적으로 한 과제의 추진으로 상향식 방식이 병행되게 되었 다. 이후, 1998년부터는 21세기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과 같은 대형 프로그램 이 기획되면서, 대형복합 연구사업의 특성에 맞는 기획의 체계화 및 정교화 가 시도되었고, 연구개발 성과의 수요자 등 다양한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획 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는 혁신기회의 탐색 및 포착과 함께 체계적 과학적 기획기법의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위 한 지식지도(Knowledge Map) 및 TRM(Technology Road Map), 사전타당 성 분석 등 기획관련 전문기법이 활용되고 있으며, 정보분석 기능이 강화되 고 있다. 1.5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주요 성과와 과제 특연사는 국가 전략 관점에서 과학기술 역량 배양과 핵심산업기술개발을 추구하는 최초의 국가연구개발사업으로 국가연구개발 추진체계를 선진화하 는 선도적 역할 및 타부처 연구개발사업 출범의 산파역을 담당하였다. 특연사 출범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공업기반기술개발사업, 대체에너지
224 기술개발사업, 기초연구지원사업 등이 출범하고, 1990년대 중에는 원자력기 술개발사업, G7사업, 정보통신연구개발사업, 환경기술개발사업, 보건의료기 술개발사업, 건설기술개발사업, 농업기술개발사업 등 각 부처별 연구개발사 업이 시작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각 부처 연구개발사업의 태동은 정부 부처간 연구개발사업의 추 진 경쟁을 유발하여 정부 연구개발 투자의 확대를 가져오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처별 연구개발 활동의 중복 및 연계 부족 등의 문제를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즉, 1987년에 출범한 상공부의 공업기반기술개발사업으로 인해 과 학기술처 특연사업과의 차별화 및 역할분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 라 산업 현장관련 소형 연구개발사업은 상공부로 이양하고 특연사는 공공기 술, 중대형 과제 및 정부출연연구기관 중심의 연구개발사업 형태로 역할을 조정하게 되었다. 한편, 1992년에는 중장기 기술예측 및 특정기술과 제품 개발을 위한 사전 기획과 동시에 산 학 연 협동연구체제 강화와 범부처적인 협력체제 구축, 그리고 10년의 한시적 기간을 설정하는 등 국가연구개발사 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G7사업이 출범하였다. 동 사업은 6개 부처가 기 획단계부터 참여하고 각 부처 협력 하에 주관 부처가 사업관리를 수행하는 획기적인 형태의 범부처 사업이였다. 특연사의 주요 연구성과로서는 산업기술 분야로서는 반도체, 대형평판표시 판(TFT-LCD), 전자교환기(TDX-1/10) 등 오늘날 우리의 주력산업의 하나 인 분야가 두드러지고, 공공기술 분야로서는 과학위성 등 우주분야와 한국형 표준원자로 설계기술 자립 등 원자력 분야가 돋보인다. 이러한 성공사례는 공공기술의 경우 분명한 실용화 목표가 있었고 산업기술의 경우 대규모 시 장개척에 도전할 확실한 여건이 구비된 경우이었다. 국책연구사업을 통해 성장동력산업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연구개발 단계와 상업화 단계 사이에 존재하는 소위 말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통과를 위한 보다 주도면밀한 기획과 검토가 필요하다. 기술적 측면 의 성공만 달성한 연구사업도 인력양성, 특허출원, 논문발표, 연구 인프라 확 보 등의 기술기반 확립에도 기여를 하였다. 성과와 특연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점 등을 거울삼아 더욱 발 전하는 특연사로써 발돋움하여야 할 것이다.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은 특연
225 사를 총괄 기획 조정 평가하는 리더쉽과 전문성을 최대로 개발 적용하고, 특 연사에 참여하는 대학 기업부설연구소, 공공연구기관 등 연구개발주체의 역 량을 극대화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한 시책을 강화하며, 21세기가 원하는 과 학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우수 인재들이 이공계에 미래의 힘과 꿈을 걸 도록 특연사 연구방향의 기획단계와 추진과정에서 각계의 폭넓은 참여를 유 도하여야 할 것이다. 각 부처가 추진하고 있는 연구개발사업들은 대부분 법적 근거를 가지고 추 진되고 있으므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조정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즉, 조정 이 기존의 사업을 토대로 제안된 차기연도 예산사업의 범위에 한정되기 때 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기부와 산자부, 정통부 등의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국가연구개발사업 구조의 개편 작업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중요한 일 일 것이다. 즉, 기존의 국가연구개발사업 구조를 새로운 기준으로 조정하는 작업들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기득권을 고려하지 않는 차원에서 기술분야 중 심의 국가중장기종합계획과 연계할 수 있는 사업구조의 재편이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국가연구개발의 적절한 역할 정립 및 기술분야 및 기능별로 동 태적인 균형을 고려한 투자 포트폴리오가 구성될 수 있으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추진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과제는 연 구기획의 강화에 관한 것이다. 현재 여러 부처에서 연구기획의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은 전문가 의존형 기획형태로 과학적 기획방법의 활용을 통한 연구기획은 미흡한 실정이다. 기획 전문가 육성 및 확보, 기획 관련 예산의 확대, 관련 D/B 및 정보시스템 구축 등을 통한 연구기획 역량 의 강화가 요구된다. 이러한 노력은 연구관리전문기관을 통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연구개발 성과의 질적 및 활용성 제고를 들 수 있다. 현재 국가 연구개발사업은 양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성과 및 활용도 측면에서 개선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업에 대한 체계적인 목표 및 성과관리를 추구하고, 성과관리시스템의 구축과 더불어 지원제도의 정비를 통해 사업의 질적 성과를 제고하고 경제사회적 성과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226 2. 주요 관계인사들의 회고 특연사업의 탄생 및 추진경위에는 많은 일화가 있으며 당시 참여했던 인사들이 회고를 통하여 그 배경 및 경위 등에 대하여 증언하였음. (증언자들의 워크숍, , 과우회 회의실) 2.1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출범과 반도체 개발 (홍성원 박사 회고)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아이디어는 국보위에서 논의 특정연구개발사업이 발족될 당시에 저는 청와대에서 근무했으며 제가 맡은 부분이 연구개발 이었고 오명 장관님께서 저의 상관이셨고 제가 그 밑에 연 구관이라는 직책으로 근무했습니다. 오명 장관의 백그라운드는 국방과학연구 소였습니다. 우리가 특정연구개발사업이나 그와 관련된 과학기술정책을 얘기하려면 국 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그 이유는 국보 위 때 변화가 시작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전부터 계속된 것 이 국보위로 연결되고 국보위에서 다시 제5공화국으로 넘어왔는데 그 전부 터 과학기술계나 산업계 등에서 원하던 것이 전부 국보위로 집결되어 걸러 내는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제5공화국은 과학기술정 책분야에서는 준비된 정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나중에 실현됐든 안됐든 간에 그 전에 각 부처에서 불만이 있던 사항도 전부 국보위에 집결되어 검 토되었습니다
227 2.1.2 국방과학연구소를 벤치마킹하여 출연(연) 연구관리 체제 개혁 구상 그 당시 정부출연연구소는 연구 성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관점에 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었어요. 사실 연구 성과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그 때까지는 국방과학연구소가 총, 대포, 미사일 등 몇 가지 무기의 국산화에 성공하여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유일한 연구소였습니다. 다른 출연연구소는 어떻게 보면 인재를 양성하는 등 기술기반의 구축에는 큰 역할을 했지만 가 시적 연구 성과라는 측면에서는 좀 미진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과학기술관련 부처 의 기획력과 평가능력이 미흡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은 주는데 제대로 된 프로젝트 기획력도 없고 예산을 투입한 후에 프로젝트가 제대로 추진되는지를 추적하는 관리체제도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획이나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인재가 있었느냐 하 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국방과학연구소를 보니까 그들은 간단명료한 목표와 평가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총을 개발하면 총을 쏘아서 나가면 성공한 것이고 안 나가면 그 건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기술개발에서 생산까지의 각 단 계의 연계와 조화가 잘되어 있었습니다. 소총을 개발할 경우를 보면 목표는 소총이고, 그것을 만들기 위한 각종 개발 대상 기술이 선정되고, 그 기술별 로 전문 기술자들이 선정 투입되고, 또한 국내 개발이 불가능한 공백 기술이 있으면, 기술도입을 하든지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하든지 하여 어떻게든 기술 이 짜 맞추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짜 맞춰 가지고 결과적으로는 소총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술을 개발해서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게 생산으로 들어가서 실전에서 평가 되고 그게 피드백이 되어 다시 연구소로 돌아오는 아주 훌륭한 목표설정-연 구개발-생산-평가 사이클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다른 연구 분야도 한번 그런 방식으로 해보는 것이 좋겠 다는 기본 방향이 잡혔으며 그것이 특정연구개발사업 발족에 있어 하나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연구개발사업은 그 당시 우리 능력이 부족 하니까 어떤 명백한 타깃을 정해가지고 한 번 실제로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
228 이 어느 정도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방향으로 추진하기로 가닥이 잡혔던 것 입니다 실효성 기준으로 모든 것을 구조조정 그런데 그때 상황으로는 정부자체가 굉장히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박 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로 인해 경제는 기 울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오일 쇼크까지 발생하는 등 모든 것들이 뒤엉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제5공화국이 탄생했는데 첫해에는 흉년까지 들었어요. 97년 IMF사태는 캐시플로우의 잘못운용으로 일어났지만 그때는 구조적으로 근본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GNP 성장률이 마이너스 5%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매사가 전부 아주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구조조정 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자동 차도 통폐합하고 중공업도 통폐합하고 조선도 통폐합하는 등 모든 부문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출연연 구소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어떤 식으로든지 구조조정을 하여야 했고 또 그 방법도 실효성을 중심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청와대에 있었던 제가 맡은 업무는 과학기술처, 상공부, 공업진흥청 등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에 관한 것은 모두 담당했어요. 국방부 소관의 국방 과학과 방위산업도 제가 담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수의 부처에 관계되는 기 술정책 업무를 전부 모아서 우리가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기술계 의 전반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보위에서 이미 많은 검토가 이루어진 사항, 또한 국가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방향으로 서 통폐합이라든지, 효율화라든지, 구조조정이라든지 등의 맥락, 성공사례가 있는 국방과학연구소를 벤치마킹할 필요성 등이 특정연구개발사업 발족의 배경이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임명된 연구소장들을 보면 국방과학연구소 출 신들이 많이 발탁되었습니다. 특정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니까 성공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대형 프로젝트의 시발점은 반도체 개발 특정연구개발사업에 있어 대형 프로젝트의 시발점은 그 당시 오명 비서관님 께서 주관하여 추진한 전자산업 육성 목적의 반도체 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
229 다. 오명 비서관은 취임 직후부터 전자산업육성방안을 기획하기 위하여 산업 자원부의 전자산업국장을 중심으로 산업계, 학계 등의 관련 인사로 구성된 태 스크포스를 구성했습니다. 그 태스크포스에서는 전자산업 분야에서 3가지 전 략산업을 도출했는데 첫째가 컴퓨터 및 반도체 산업, 둘째가 통신 산업, 셋째 가 전자부품 산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그 당시 가전 산업이 70%이고 전자부품 및 시스템 산업이 30%이었는데 이를 시스템산업 30%, 가전산업 30%, 부품산업 30%, 기타 10%의 산업비율이 되도록 육성해 나간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전자산업 위기 타개책으로 칼라TV 방영 필요 그때의 상황은 전자산업이 거의 죽어가고 있어 3대 전자업체 중의 하나인 대 한전선이 대우전자로 합병되고 삼성전자도 성장동력사업이 없고 재고의 증가 로 위기였습니다. 가전 3사의 흑백TV가 3천억 원정도 재고로 깔려 있었는데 그때 3천억 원정도 재고하면 회사를 운영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1980년 당시 전자제품의 연간 수출액은 고작 10억 달러, 내수 생산도 20억 달러대에 머물렀으며 전자부품 국산화도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자산업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칼라TV 방영을 추진하게 되었습니 다. 그 당시 우리는 칼라TV를 생산할 능력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칼라TV 방영 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장을 열어주어야 전자산업이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을 계기로 칼라TV 방영 시작 그런데 그전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칼라TV 방영은 빈부격차에 의한 사회 적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불안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칼라TV 방영을 포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명 비서관하고 같이 의논하여 칼라TV 방영이 전 자산업을 살리는 가장 급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칼라TV 방영을 푸는 방법은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을 계기로 칼라TV 방영을 하는 방 법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대통령께 건의 드렸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을 칼라TV로 방영하는 아이디어를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이로 서 1980년에 칼라TV 시대의 개막과 동시에 TV 생산업체의 극적인 회생이 이
230 루어지게 되었고 1988년에는 전자제품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칼라TV 핵심부품용으로 반도체 개발 구상, 그러나 기업과 기획원의 반대 입장에 봉착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반도체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칼라TV 생산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칼라TV 제조에 있어 핵심 부품으로 반도체 칩셋이 들어가 기 때문에 칼라TV와 반도체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칼라TV는 폭발적 수요를 보여 물건이 없어 못 파는 상황이었으나 그 반도체 칩셋은 우리가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그걸 공수 해다가 집어넣어 생 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반도체에 대한 시장 수요 급증 때문에 반도체 개발 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 되었으나 기술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스스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태스크포스에서 반도체를 우리의 전략사업으로 선정하자는 목 표에 합의된 초창기에 전자회사들에게 이를 이야기 하여 참여를 권고했는데 그들은 전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전자회사들 모 두가 경영이 악화되어 있던 중 간신히 칼라TV와 전화교환기에서 활로를 찾겠 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도체에 막대한 투자를 하라고 하니까 엄두 를 내지 못했고 기업뿐만 아니라 경제기획원에서도 정면으로 반대 입장을 취 했던 것입니다 반도체 개발 참여 미끼로 칼라TV와 전화교환기 활용 그래서 그때 반도체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두 가지 전략을 생각했는데 하나는 칼라TV와 전화교환기를 반도체 투자를 이끌어 내는 미끼로 활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때 중동의 건설 진출로 많은 돈을 번 현대를 전자산업의 부품 및 시스템 분야에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전화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환기는 돈벌이가 되는 사업 으로 인식되어 삼성, 금성 등 몇 개의 민간회사는 교환기 생산에 참여하고 있 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체신부는 교환기의 수요자 입장으로서 전화 회선 수 를 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교환기 시장을 컨트롤할 수 있었습니
231 다. 그런데 마침 체신부 장관을 최순달 박사께서 재직하고 계셔서 최 장관께 전자회사들이 반도체를 하도록 권고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따라 최순달 장관이 직접 재벌 회장들을 한분씩 만나서 반도체 사업의 투자를 고려할 것을 권고하게 되었고 기업에서는 반도체 사업을 안 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의 발 빠른 대응 그러나 최초의 64K DRAM은 마케팅 실패 이와 같은 정부의 권고를 받은 삼성의 이병철회장은 일본에 가서 도대체 반 도체가 뭔가를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했으며, LG도 일본의 히타치를 방문하여 반도체 전문가로부터 어드바이스를 들었고 대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런데 이들 회사가 나름대로 알아본 후의 반응은 각각 달랐습니다.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를 하겠다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고 LG는 구미의 전 자연구소의 반도체 공장을 인수하는 한편 주문형반도체를 하겠다고 나왔는데 주문형반도체는 비교적 소규모 투자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우는 연구만 계속하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인 삼성에서는 발 빠 르게 공장을 세워서 기록적으로 6개월 만에 64K DRAM을 생산할 수 있게 되 었습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처음에 시작할 때는 64K DRAM 값이 2불 50센 트였던 것이 시판에 들어갈 때는 48센트로 폭락했던 것입니다. 그게 브레이크 이븐이 60센트 정도였으니 손해보고 팔아야 할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때에 일본은 64K DRAM에서는 철시하고 256K DRAM으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 니다. 삼성은 DRAM 사업이 라이프사이클에 크게 좌우 된다는 사실에 경험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성반도체는 위기에 처했고 이 사실은 신문에 크 게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제5공화국은 출범하자마자 박정희 대통령 말기에 부실화 되었던 한 국중공업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제5 공화국으로 넘어오자 처음으로 착수된 반도체 사업이 또 위기라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매우 걱정된 겁니다. 그때 삼성의 반도체 사업에 3천억원 정도가 투 자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반도체 사태 타개 지시 그래서 대통령께서는 저에게 급히 반도체 사태에 대한 대책을 세워서 보고하
232 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반도체를 계속하는 방법 이외는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날 저는 두 장짜리 리포트에 다음 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한일 간에 반도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일본을 이길 승산이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미국이 일본의 반도체에 전적으로 의존 한다는 것을 미국사람이 싫 어합니다. 미국이 일본한테 메모리부분을 완전히 의존해 컨트롤 당하는 입장 에 한국에서 반도체가 나온다고 하여 크게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독점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국을 뿌리치려고 가격을 덤핑한데 대해 한국을 보호하려 할 것입니다. 둘째로 일본은 99%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1%도 되지 않아 가격 덤핑 전략에서는 일본의 손실이 절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이런 전략은 한번은 가능하지만 두 번은 시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서 우리는 당장 다음 세대인 256K에다 집중 투자 해야 됩니다. 대통령은 투 자액을 물으셨고, 저는 5000억 원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256K DRAM 개발에 대한 과감한 결정 내가 이병철 씨는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정부가 5000억 원 투자 를 결정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과감하게 결정을 하고 그룹 의 운명을 걸고 신속히 256K DRAM에 투자를 한 것입니다. 그때 정부에서는 경제기획원(EPB)은 물론 한국개발원(KDI)도 참여하고 상공부와 과기처도 참 여시켜 반도체 투자 타당성 검토를 위한 막강한 팀을 만들어서 검토하느라 시 간을 소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검토 논란은 제5공화국이 끝날 때 까지 계속 되어 실제로는 새로운 사업들에 투자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 때문 에 우리 팀의 청와대 내에서의 활동도 상당히 위축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 이 이렇게 진행되니까 삼성에서는 정부로부터는 지원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 홀로 과감한 투자를 추진한 것입니다 메가 DRAM 개발 착수와 특정연구개발사업 출범 그리고 반도체 사업은 투자는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는 미래를 대비한 연구개
233 발로 전략방향을 선회하여 4메가 D램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R&D는 미래를 대비한 기초연구니까 4메가 D램 개발에 정부가 투자하는 데는 반대할 논리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 그때 사정으로 서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다행히도 후술하는 바와 같이 4메가 D램 개발은 적절한 시기에 추진되어 성공했고 거기에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목적 지향적인 대규모 연구개발 프로젝트인 반도체기술(DRAM) 개발 등을 포함한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러나 특정연구 개발사업과 같은 대형 사업을 실행하는 데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 엇을 할 것이냐 와 어떻게 막대한 개발 자금을 마련할 것인 가 였습니다. 참 고로 그 당시 과학기술처의 연간 연구비 총액은 30억 원 수준이어서 대형 프 로젝트 추진은 불가능한 규모이었는데 비해 특정연구사업으로 추진된 반도체 연구사업비에만 약 2000억 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가진 대규모 정부투자기업의 참여를 유도하 는 방향으로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M DRAM 개발에 대규모 정부투자기업 참여 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통신(KT), KBS, 한국전력 등을 대상으로 교섭이 추 진되었습니다. KT에서는 정보통신 기술 분야, KBS는 영상기술 분야, 한국 전력은 원자력 분야 등에 연구개발 투자에 동원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습니 다. 우선 KBS에 대해서는 컬러TV 방영을 계기로 시청료를 인상하고 시청료 중 에서 10%를 자동적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하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랬더니 KBS 는 그런 조건으로는 칼라TV 방영을 못하겠다고 나온 거예요. 한쪽에서는 TV 를 생산하는 전자회사들이 죽을 지경이라고 빨리 칼라TV 방영을 해달라고 주 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KBS가 시청료에서 10% 내라면 방영을 못하겠다고 나 온 것입니다. 양자 간의 주장은 팽팽했으나 결국은 시청료에서 10% 연구개발 투자 조건은 포기하고 칼라TV 방영만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현 재의 영상 및 콘텐츠 등 소프트산업의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234 KT 설득으로 반도체 개발 목적 대형 투자 유치 성공 그 다음으로는 한국통신(KT)에 대해서 반도체와 전전자교환기 TDX 연구개 발 투자를 부담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랬더니 KT는 TDX는 이해를 하겠으나 우리가 반도체를 왜 개발하느냐고 거절했습니다. 통신장비에 반도체가 안 들 어가는 게 없으니까 투자하라고 억지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 실은 그때 KT가 막무가내로 뻗쳤으면 아마 KBS와 비슷한 상황이 됐을 겁니 다. 그런데 반도체의 경우에는 체신부에 오명 차관이 계셨고, 그때 마침 KT 사장으로 육사 선배님이신 이우재 씨가 오셨습니다. 이분들 모두가 연구개발 에는 적극적인 분들이셨기 때문에 반도체 연구개발비 투자 문제는 KT가 원하 는 것을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전화 사업은 체신부 직영형태였었는데 한국통신(KT)으로 전화사업 만 가지고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면서 우체국의 만년 적자 문제 때문에 매년 500억 원씩 보전해 주던 책임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KT가 독립 하는 대가로 우체국에 보전해주던 연 500억 원을 반도체 연구개발비로 돌리고 또한 플러스알파로 전화요금을 올려 주는 조건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사실 그때 KT는 돈을 엄청 많이 벌고 있었어요. 그때는 전화가 아주 귀했던 시대여서 전화의 사용과 매매의 편의성에 따라 청색전화, 백색전화 등으로 구 분해서 전화가입료를 등급제로 하고 매우 고가의 전화가입료를 자의적으로 받 는 독점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KT만큼 장사를 쉽게 한 기관이 없습니 다. 그때는 전화를 구매하는 고객들이 30만 원 정도의 거액의 보증금을 사전 에 지불하고 한 6개월 정도 기다려야 전화가 나오며 전화회사는 그것을 해지 할 때까지 그 보증금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이자만 해도 엄청난 거였 어요. 그때 그러한 방식으로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를 유도해서 반도체 개발을 착수하고 그 결과 전자산업을 회생시켰는데, 근래에는 반도체 한 분야만 해도 연간 1조원 단위의 연구비를 투자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참으로 감개무량함을 느낍니다 천운이 따라 4M DRAM 시판 성공 1986년 7월에 시작된 4M DRAM 연구개발 사업은 총연구비 879억 원의 투 자로 1989년 3월에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 후 4M DRAM의 시장 개척 성
235 공은 천운이 따랐다고 합니다. 전혀 예상 밖으로 4M DRAM의 라이프 사이클 은 그 이전의 경우보다 두 배나 길어져서 충분한 판매 기간의 확보가 가능했으 며 따라서 개발비와 감가상각비를 모두 회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 때 처음으로 시도된 대표적 대형 국책연구사업인 4M DRAM 개발사업은 전두환 대통령의 퇴임 직전인 1988년 초까지는 매우 성공 적으로 추진되어 과기처의 박긍식 장관은 대통령 퇴임 1개월 전에 결과 보고 를 하였습니다. 대통령은 매우 만족하여 보고서에 싸인하시고 거기에다가 16M DRAM까지 그냥 추진하라는 메모까지 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재임 시 마지막 파티인 4M DRAM 축하파티를 열어주셨는데 앞으로 추진할 16M DRAM 연구사업에 대한 투자를 당부하시려고 사공일 재무부 장관도 특별히 참석하게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16M DRAM의 개발이 성공하 면 내가 머리라도 깎아서 당신네 술 사주겠다 는 농담까지 하셨습니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성공은 첫째 우리나라에서 당장 필요한 명확한 과제를 선정, 목표를 설정하고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수요처가 주도하여 그 기술을 개발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를 상품화하여 실제 상용화까지 이끌고 갔다는 것 이며, 둘째로는 이와 같은 사업에 대한 범부처적인 합의를 위하여 대통령이 주재하고 행정, 입법, 사법부는 물론 언론과 기업이 참여하는 기술진흥확대회 의와 대통령주재 모든 행정부처의 차관들이 참여하는 기술진흥심의회를 과기 처 등 관계 기관이 효과적 효율적으로 운영하였다는 것이고 셋째로는 이 사업 에 참여하신 공무원, 연구 책임자와 연구원 모두의 소신 있고 유감없는 실력 발휘와 사명감 그리고 열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2 특정연구개발사업 창설 배경 및 경위 (조경목 전차관 회고) KIST모델의 한계성 극복을 위해 특정연구개발사업 출범 특정연구개발사업(특연사)이 출범할 당시에 저는 과기처의 연구개발조정실 장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출연연구비를 지원받는 기관은 KIST 뿐이었습 니다. 그리고 민간연구소는 거의 없었고 KIST는 주로 기술도입을 지원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상황이었는데 KIST에 출연연구비를 지원할 때에는 연구의 자율성 보장과 연구소 운영의 신축성 보장을 고려하여 개별 연구과제에 대한
236 관여는 하지 않고 출연금 형태로 하나로 묶어서 지원했습니다. KIST의 설립 목적은 산업기술을 개발하여 기업체에 이전하고 그것이 산업 화되어 경제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KIST가 기업체의 연구용역 을 산발적으로 수행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70년대 말에 오면서 외국의 자본 과 기술에 의존한 경제가 한계에 직면하면서 기술집약적인 산업구조로의 전환 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대두되었습니다 국가 연구개발 사업 집중관리와 매칭 펀드 개념 도입 그래서 그때 국보위를 중심으로 나온 아이디어 중의 하나가 국가 연구개발 행정을 집중 관리하자는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과기처에 연구개발조정실을 만 들고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신설하여 관리토록 했습니다. 그때 새로 도입된 연 구관리 기법이 기업들로부터 매칭 펀드를 투자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노하우, 특허권 등의 연구결과는 매칭 펀드를 투자한 기업으로 돌아가고 로열티는 다 시 과학기술계에 환원되어 연구의 확대 재생산 사이클 형성을 시도한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이클 형성의 원동력 창출을 위한 기초연구 촉진을 위해서 과 학재단에서 기초연구의 지원을 확대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우 리가 자력으로 기술을 개발하여 상용화 단계까지 가는 데는 투자 규모가 그 당 시 우리 기업의 능력 한계를 벗어나고 리스크도 워낙 커서 기업의 참여 유도가 매우 어려운 사정이었기 때문에 그 리스크의 상당 부분을 정부가 대신 부담해 준다는 의미에서 특정연구개발사업이 창설되었던 것입니다 연구 효율성 향상을 위한 다양한 정책 도입 이러한 배경에서 연구개발 과제의 목표가 분명해야 되니까 특정 제품을 선 정하여 집중적으로 개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KIST에 대해서는 기초연 구비를 따로 마련해서 지원함으로써 신기술 창출의 기반을 마련토록 했습니 다. 또한 제품 개발에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므로 한전, 한국통신, KBS 등이 연구비를 투자 할 수 있게끔 그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 고 그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기술개발촉진법에다가 특정연구기관 이외에 도 정부가 연구비 출연을 할 수 있도록 법 조항을 신설하였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도입한 기술을 바탕으로 소화흡수 하려 해도 선진국의
237 기술 제공선은 협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수준을 넘으면 우리가 자력 으로 기술을 개발할 수밖에 없어지는데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전략이 필요 했습니다. 그런데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모든 단계를 거쳐 가서는 속도 가 너무 느리기 때문에 징검다리식으로 거점기술을 선정하여 집중 개발하여 뛰어넘어 가는 전략 즉 leap frog strategy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는 능력이 모자라더라도 거점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따라잡는 전략이었 습니다. 과기처에서 이러한 구상을 하고 있을 때에 청와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기술 진흥확대회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거점기술을 선정한 기준은 20년 또는 30년 후에 우리나라가 먹고 살 수 있는 효자산업이었습니다. 그러한 기 준에서 도출된 것이 PC, 반도체, 원자력발전소, 정밀화학 등이었으며 이러한 목표에 출연연구비를 집중적으로 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기술개발에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하여 리스크를 부담한다는 것은 매우 획기 적인 조치였으며 이러한 기술개발에 참여한 기업으로서는 삼보, LG, 삼성 등 이 있었습니다 교육용 PC와 반도체 개발 사례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초창기의 사례로서 컴퓨터의 경우를 보면 처음에는 교 육용 PC 개발이란 목표를 세우고 약 5천여 대를 특정연구비를 투입하여 제작 보급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PC가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PC 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작된 PC의 수준도 지금 수준에서 보면 아이들 장난감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IT 강국 수준에 와있는 것을 보면 도전이 있어야 성취도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반도체 개발의 경우를 보면 삼성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이병철 회장께 보 고했더니 그분은 우선 일본에 가셔서 핵심 되는 관계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 후에 정부의 지원 없이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도 있다고 매우 적극적 으로 나왔습니다. 그 때 반도체 개발 연구사업에는 삼성, LG, 현대 등이 참여 했으며 가장 적극성을 보였던 삼성이 지금은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로 성장해 있습니다
238 2.3 반도체 개발 초창기의 사정 (강인구 박사 회고) 본인이 86년에 LG반도체에 연구소장으로 재직하던 중 어느날 과기처에서 반도체 개발 계획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때 상황은 삼성반도체 에서 64K 개발에 성공해서 일단 제품은 출시했는데 내리막 반도체 사이클 때 에 출시했기 때문에 팔수가 없어 매우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었습니다. 반도체 는 3년 주기로 용량이 더블 되는 사이클을 가져서 개발하고 있는 동안에 벌써 사이클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성반도체가 파산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제가 특정연구개발사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삼성반도체 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있어 삼성반도체의 재무제표를 보니 까 반도체에 자금을 쏟아 붓느라 재무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것으로 나 타나 있었습니다. 삼성반도체가 그런 정도로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특정연구과제에서 반도체를 4M까지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운 것입니다. 그때 제가 기업의 연구소 장 중에서는 제일 연장자였기 때문에 반도체 연구사업의 간사를 맡게 되었습 니다. 그때 제가 그 일을 담당하여 짐작한 것은 이병철 회장님이 난국 타개를 위하여 정부에 SOS를 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민간기업 3사가 중심이 되어 반도체 개발을 추진하되 종합관리는 전자통신연구소에서 담당하 여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여한 삼성, LG, 현대 등 3사는 요소기술을 각자 따로 도입해서 개발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매우 힘든 개발 과정을 거치면서 어 떻게든지 꾸려가는 방식으로 협동을 했습니다. 저는 4M DRAM 연구사업의 간사를 맡았는데 연구사업을 시작할 때 제일 고 민스러웠던 것은 4M DRAM의 생산 시작 시기가 그때의 시장 흐름으로 봐서 4M DRAM 사이클이 종료되는 시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사업을 기획하 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점이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 나라에 다행스러웠던 일은 그 때 4M DRAM의 사이클이 끝난 것이 아니라 3 년이나 더 연장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바람에 한국이 완전히 양산할 수 있는 최대 생산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은 그다음 세대인 16M DRAM에 대규모 설비투자를 해놓고도 그냥 싸구려 4M DRAM을 계속 생산할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239 2.4 특정연구개발사업의 법적 근거 마련 (한기익씨 회고) 기술개발촉진법에 근거조항 신설 본인이 특정연구개발사업(특연사)의 예산확보에 실무과장으로서 참여한 것 은 1981년이니까 이정오 장관이 취임하여 초년도 특정연구개발사업비로 133 억원을 확보하기 위한 법적 뒷받침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제가 관계부서와 협 의하면서 온갖 노력을 하였습니다. 우선 특연사 예산을 확보하려면 예산법정 주의 원칙에 의해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981년 12월 31일부로 기술개발촉진법을 개정하고 제 8조의 3에 특정연구 개발사업의 추진 이란 제목의 근거조항을 신설하였습니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의 4가지 포인트 특연사의 법적 근거 마련의 배경으로서는 몇 가지 포인트를 들 수 있는데 첫 째로는 그때까지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근거해서 정부출연연구소를 대상으 로 연구소별로 출연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우선 그 법적 틀에서 벗어나 게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출연금을 지원하되 연구소 운영상의 예산 부족분을 보전해주는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액 수 규모도 얼마 되지 않았고 정부차원에서 핵심산업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애 로 사항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특정목적의 대형 연구사업을 전략적으로 지원 하는 새로운 연구개발재원의 조성을 가능케 하는 법적 근거가 필요했던 것입 니다. 둘째 포인트는 새로운 재원을 조성함으로써 정부의 예산 배정 관행상 전년도 대비 5~10% 증액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백억 원 단위의 프로젝트 지원을 위해서는 수십억 원 규모의 연구소별 지원 출연금 제도에 의존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세 번째 포인트는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활동 지원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서 산업계, 정부출연연구소, 학계가 총동원되어 공동으로 협력하여 핵심산업기 술을 개발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기술개발촉진법 제8조의 3에는 과학기 술처장관은 핵심산업기술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특정연구개발사업계획 을 수립하고, 연도별로 연구과제를 선정하여 이를 다음 각 호의 기관과 협약을
240 맺어 연구하게 할 수 있다 라고 표현 되었으며 다음 각 호에는 5개 공동협력 주체가 열거되었습니다. 네 번째 포인트는 프로젝트 중심의 연구비 지원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 다. 따라서 과학기술처 장관은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연도별로 연구과제를 선정하여 이를 주관 연구기관과 협약을 맺어 추진하도록 한 것입니다. <표 5-1> 1981년 기술개발촉진법에 신설된 특정연구개발사업 근거조항 제8조의3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추진) 1과학기술처장관은 핵심산업기술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특정연구개 발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연도별로 연구과제를 선정하여 이를 다음 각호의 기관과 협약을 맺어 연구하게 할 수 있다. 1.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의 적용을 받는 연구기관 2.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기업부설 연구소(이하 "기업연 구소"라 한다) 3. 산업기술연구조합 4. 교육법에 의한 대학 또는 전문대학 5. 국 공립연구기관 2제1항의 규정에 의한 연구에 필요한 비용은 정부 또는 정부 이외의 자의 출연금 기타 기업의 기술개발비로 충당한다. 3제1항의 규정에 의한 협약의 체결방법, 제2항의 규정에 의한 출연금의 지급, 사용 및 관리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본조신설 ] 이러한 배경에 근거하여 특연사의 법적 근거는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즉 정부 출연연구기관만을 대상으로 하는 법에 근거를 두지 않고 모든 연구주체를 대 상으로 프로젝트 베이스로 출연금을 지원하는 취지의 조항 신설이 가능한 기 술개발촉진법에 신설 조항으로 삽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 법적 조항에 근거하여 특정연구개발사업은 1982년 이후 20년 동안 계속 발전하여 국책연구개발 사업의 정착과 대형 연구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 구축 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연사는 2001년까지 20년간 총 4조 9479억원 (정부 출연 3조 4004억원, 민간부담금 1조 5475억원)이 투자되었고 초년도 투자액
241 (민간 투자 포함) 187억 원에서 최종연도의 6500억원 규모로 발전했습니다. 2.5 특정연구개발사업 초기 주역들과 예산당국의 협조적 지원 (김석권씨 회고)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시작한 81년도에는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예산확보가 과 기부 예산의 우선 순위 NO.1으로 설정하여 예산 확보를 총괄하는 기획관리실 장으로 권원기 전 차관이 계셨으며, 과학기술심의실장으로 조경목 실장이 계 셨고 종합연구조정관으로 작고하신 장기훈 씨가 있었고 제가 그 종합연구조정 관 밑에 서기관으로 있으면서 당시 최석식 사무관과 함께 일을 하면서 권 실장 님과 조실장님의 정책적인 지원을 받으며 예산 확보에 많은 노력을 하여 1982 년 초년도의 사업예산으로 140억 원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그해 12월에 특정 연구개발사업이 기술개발촉진법에 반영되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 음해 실행연도에는 모든 정부예산을 5%절감 한다는 방침에 따라 133억 원으 로 준 것은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의 탄생에 있어 예산 확보 차원에서는 예산실장 출신인 고 김용환 차관의 지휘 하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권원기 실장과 조경목 실 장, 경제기획원 예산실의 강봉균 당시 예산 담당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제5공화국 초기에 임명된 이정오 과기처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 대측과 관계에 있어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도 좋았지만 양 실장이 이 사업을 행정적으로 풀어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그 당시 예산실장으로는 문희갑 씨였는데 양 실장은 많은 논의를 거쳐 문희갑 실장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강봉균 당시 예산과장은 신규 예산사업을 성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예산실에서는 각 담당 과장들이 자기소관의 예산을 예산실 전 체 회의에서 공개 토론하고 그 토론과정에서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어야 예산 이 결정되는 절차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강봉균 과장은 앞을 내다보는 판단이 빠를 뿐 아니라 본인이 한번 세운 정책판단과 방침은 끝까지 강력하게 밀고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242 2.6 특정연구개발사업 예산 1,000억 원 달성 경위 (곽종선씨 회고) 특정연구개발사업에 저항감을 가졌던 예산실 본인이 연구개발조정실 연구관리과장으로 보직을 받은 시기는 1984년으로 그 당시 특정연구개발사업비는 250억원 규모였습니다. 그 시기에 과기처가 해결해야 할 현안 과제중 하나가 특연사업비 규모는 1,000억원 수준으로 확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산편성권을 가진 경제기획원 예산당국의 특연사를 보 는 시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다른 일반적인 예 산사업의 경우 예산신청을 할 때는 그 해당 프로젝트의 추진배경, 개발목표, 추진과제 및 방법, 기대효과 등이 사전에 명확하게 제시되고 예산당국이 그에 대해 면밀한 사전 검토 후에 그 타당성이 인정될 때 예산에 반영하는 것이 원 칙이었으나 특정연구개발사업은 이러한 내용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는 중대형 국책사업을 주 대상으로 하는 특연사업의 경우 프로젝트에 대한 대강의 개념과 개발방향만 제시하여 총액 개념으로 예산을 편성한 후 예산이 배정되면 연구기관으로부터 구체적인 계획서를 받아 과제를 선정하여 개발사 업을 추진하는 특연사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 습니다. 또한 예산당국의 입장에서는 예산편성권을 제한받거나 그 권한의 일 부를 과기처에 넘기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특연사 사업비를 획기적으로 확대하는데는 많은 어려움 이 따랐고,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예산당국 특히 예산 실 실무자를 상대로 조직적인 설득을 통하여 특연사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넓 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예산실 사무관들과의 간담회로 분위기 반전 그래서 본인은 당시 권원기 실장께 예산실 관계자와 정책간담회를 한번 가지 자고 건의 드렸더니 좋은 아이디어라고 처음에는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그 런데 누구하고 간담회를 하느냐고 물으셔서 예산실 관련 사무관들이 참석한다 고 하니까 실장께서 내가 그래도 1급인데 어떻게 사무관하고 간담회를 하겠느 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명을 다시 드렸습니다. 지금 예산실의 예산심사
243 와 편성에는 실무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실무자가 올려야 만이 과장이나 국장 이 검토를 하지 사무관을 설득하지 못하면 절대로 예산 확보는 불가능 합니다. 그러니 과장이나 국장급은 일단 제외하고 먼저 사무관들만 초청해서 하자고 건의 드렸더니 실장은 곧 이해를 하시고 그래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다 한번 해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과기처 연구개발조성실장 초청 형식으로 예산실 실무자와의 1차 정 책간담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수준이 높고 분위기가 좋 았던 롯데호텔 37층에 있는 멤버스클럽에서 저녁을 겸한 간담회가 이루어졌 고, 이 간담회를 통해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속에서 많은 대화와 좋은 의견들 이 교환되었는데 특히 예산당국(실무자)의 이야기를 보다 많이 듣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간담회를 개최하는 소기의 목 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이미 작고하신 신만교 당시 차관께서 예산실 담당 국장과 오찬을 했는데 차관께서 오찬 시작부터 끝까지 특유의 열정으로 내내 업무 얘기 일방적으로 하셨는데 예산실 담당국장은 식사를 마친 다음에, 아니 차관님 지금 한 시간이 지났는데 저는 한마디 얘기도 못하고 혼자 다 얘기하셨 습니다. 말씀 다 끝나셨으니 이제 가시지요하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서, 모처 럼의 기회가 썰렁해졌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특정연구개발사업 예산 1,000억 원 달성 이러한 1차 정책간담회가 개최된 이후 과기처와 경제기획원간에는 자연스럽 게 정책토론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기처는 예산당국이 요구하는 특연사 사업계획을 보다 구체화 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경제기획원에서는 특연사의 특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면서 이 에 걸맞은 예산심사 및 편성시스템을 발전시키는 노력들이 착실하게 추진되었 지요. 이러한 결과로 특정연구개발사업이 정부 예산 편성상의 중점 과제로 부 각되었고 이에 힘입어 특연사 예산도 85년에는 500억원 그리고 90년에는 드 디어 1,000억원 규모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연구과제가 정해지지 않은 예산 편성 사례 특연사가 정식 태동하기 전에 예산편성에서 구체적인 연구과제가 정해지지
244 않은 항목으로 예산이 편성된 사례로서 특별연구조정비 로 5억여원이 구체 적인 연구과제가 정해지지 않은 예산으로 반영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제5공 화국 시절 중기재정계획에도 반영한 바 있다. 일련의 이러한 움직임은 구체적 인 용도가 정해지지 않는 예산을 예산당국이 인정하기 시작했다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과학기술처 입장에서는 선심조정권의 권한을 찾을 수 있는 방 안으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의 명칭탄생은 당 시 정부출연연구기관 고유연구사업으로 일반연구비 의 대칭개념으로 명명하 기 시작하고 이 용어가 관계법령 용어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제2절 선도기술연구개발사업(G7) 1. 선도기술연구개발사업 개요 1.1 사상 최대 규모의 연구사업 선도기술개발사업(G7사업)은 특정연구개발사업의 한 프로그램으로 특정제 품 및 특정기술분야에서 세계 일류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선진7 개국 과학기술 수준으로의 진입 이라는 명시적 목표를 정하여 1992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한시적으로 추진된 국책연구사업이며, 1982년부터 2000 년까지 투입된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총 연구비 5조원의 약 70%인 3조6천억 원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사실상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중점 연구 사업이었다. 김진현장관이 취임하여 일본은 미국의 기술을 창조적으로 모방하고 우리나 라는 일본의 기술을 단순 모방하는 실정에서 우리도 아닌, 우리만의 기술 을 확보하여 선진국 진입을 위한 국가발전장기전략을 마련하자는 취지의 정책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2010년 G7 선진국 진입을 위한 장기발전전략 수립 작업이며, 그 중 R&D 부문이 바로 G7 프로젝트로 추진되었다. 2001년까지 과학기술능력 G7국가 수준 진입이라는 과감하고 획기적인 목표 를 설정 하고 이를 위해 2000년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전략 제품군을 선정하여 집중 개발하는 제품기술개발 9개 과제와 이에 필요한 원천 기반 기술을 개발하는 기반기술개발 9개 과제가 추진되었다
245 투입된 총 연구비 3조 6천억 원(정부 : 1조 6천억, 민간 : 2조)은 제품기술개 발에 1조9천억원, 기반기술개발에 1조7천억 원이 사용되었다. 반도체 개발 이 후 처음으로 한 개의 프로젝트 당 1천억 원이 넘는 집중투자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광대역통신망기술 개발 과제에는 6,9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연구비 가 투입되었다. 성장동력산업 창출을 목표로 하는 제품기술개발 과제는 특히 대기업과 공동으로 추진한 초대형 과제로 우리가 과연 우리 능력으로 대형 기 술에 있어 연구개발과 상업화 사이의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통과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가 매우 큰 관심사였다. 1.2 차별화된 연구관리 및 연구기획체계 G7프로젝트가 그 이전의 연구사업과 차별화를 시도한 것은 다음 3가지 포인 트 이다. 1 5~10년 기간의 소수의 중장기 대형 프로젝트를 선정하여 범부처적 참 여와 산학연 전문가의 총동원으로 추진한다. 2 실용화 전망이 뚜렷한 대형 기술을 도출하여 철저한 연구기획 단계를 거쳐 체계적으로 추진한다. 3 연구수행기관을 공개경쟁으로 선정하고 엄정한 평가를 적용한다. 체계적 기획을 통해 수립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G7사업의 기획사례는 국가연구기획시스템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 다. G7사업은 기획의 참여주체로서 정부가 주도적으로 정부-기획추진위원 회-전문관리기관 의 추진체계를 구성하였다. 이들 참여주체 중에 특히 기획 추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관련 전문가들을 네트워킹하는 방식으로 기획 작 업이 이루어졌다. 정부의 역할은 전체 기획과정에서 정부정책에의 부합성을 모니터링하고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반해 기획추진위원회는 관련 산 학 연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사업의 기본개념 및 철학의 수립, 후보과제의 도 출 등의 과정에서 전문성을 발휘하여 기획결과물을 창출하였다. 그리고 전문 기관은 정부와 추진위원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기획방법과 절차는 기본철 학과 추진방향은 하향식으로, 각종 후보과제의 모집이나 기획기관의 공모는 상향식으로 이루어졌다. 기획연구 과제를 경쟁 공모하였다는 점에서는 과거 소규모로 사업을 수행할 때 정부지정에 의존하던 방식보다 진일보했다고 평 가할 수 있다. 또한 기획주체들에게 상세한 기획지침을 제공하여 기획목적에
246 맞는 결과를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기획내용으로 기술환경 기획, 기 술개발 목표 및 방법의 기획, 연구조직 및 관리의 기획, 사업화 및 실용화 기 획, 연구자원 소요기획으로 목표달성을 위한 모든 내용을 포함시키려고 노력 하였다. 한편 21세기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의 기획은 21세기 환경분석과 시 장예측을 전문연구기관에게 위탁함으로써 연구개발 공급자 집단만의 기획이 아닌 미래 환경전문가와 민간경제연구소 등 연구개발사업의 수요자 집단이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후보과제 도출을 위해 다양한 전문가집단을 활용하였 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기획시스템 이 지속적으로 체계화되고 목표지향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타부처 연구개발사업의 기획에도 영향을 미쳐 정통부의 정 보통신연구개발사업에서는 2005년 연구개발 기획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IT839 과제기획시 특허동향분석과 특허관리분석을 병행 추진하도록 제도화 하였고, 체계적인 과제발굴을 위해 연구기획 체계를 강화하였다. 아울러 IT 기술수준 및 혁신역량 조사를 정기적(2년)으로 실시하도록 하였고, 산 학 연 등 기술개발 주체가 전략적 합의를 형성할 수 있도록 IT기술에 대한 발전방 향 및 대응전략을 담은 IT기술예측과 기술로드맵을 수립하였다. 1.3 G7사업의 특징 (박영일 전 차관 회고) 당시까지 초기 씨앗제공 수준에 불과했던 국가 R&D 사업 규모를 획기적 으로 증대시킬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전까지 bottom-up 방식, 소 규모 과제 중심, 출연(연) 중심이었던 국가연구개발사업을 top-down 방식, 대형과제 중심, 산 학 연 경쟁 및 협동 중심으로 재편하였고 특히, 국가연구 개발사업 사상 처음으로 연구기획 제도를 도입하고 전문가 집단으로 기획단 을 구성해 운영하였다. 과기부 만의 특정연구개발사업 수행체제에서 다수 부처가 공동으로 참여해 추진하거나 또는 타 부처가 주관하고 과기부가 참 여해 지원하는 형태의 새로운 국가연구개발사업 모형을 만들었다. 최초로 10년간에 걸친 장기 연구개발사업을 일괄 계획하고 총 예산안을 확정짓는 방식으로 추진하였다. (각 년도별 예산편성은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 편성됨 으로써 애로를 겪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 확정한 총 예산안이 있었기에 보다 수월했다.)
247 1.4 G7사업 과제 내용 G7사업 연구과제는 제품기술 9개 과제, 기반ㆍ원천기술 9개 과제 등 총 18 개 과제가 선정 추진되었는데(<표 5-2>, <표 5-3> 참조) 92년에 10개 과제, 93년에 1개 과제, 95년에 6개 과제, 96년에 1개 과제가 선정되었다. <표 5-2> G7 제품기술 개발 과제 번호 사업명 사업기간 총괄주관 연구기관 1 고선명 TV 수상기 92~93 전자부품연구원 2 주문형반도체 95~99 전자부품연구원 연구비 (억원) 차세대 대형평판표시 95~00 한국디스프레이연구조합 광대역통신망 92~01 한국통신 초소형정밀기계 95~01 전자부품연구원 차세대자동차 92~01 자동차부품연구원 고속전철 96~01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의료공학 95~01 보건의료기술연구기획평가단 신의약/신농약 92~97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1500 계 19,900 <표 5-3> G7 원천ㆍ기반기술 개발 과제 번호 사업명 사업기간 총괄주관 연구기관 연구비 (억원) 1 차세대반도체 93~96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첨단생산시스템 92~01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신기능 생물소재 92~01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환경공학 92~01 한국환경기술진흥원 차세대원자로 92~01 한국전력공사 신에너지 92~01 에너지관리공단 초전도핵융합 95~01 기초과학지원연구원 첨단소재 92~01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감성공학 95~01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500 계 17,
248 1.5 G7사업의 연구사업 성과 G7사업의 연구사업이 10년간 추진되어 종료된 후에 과학기술부가 고등기술 연구원에 의뢰하여 그 성과를 분석한 보고서가 2003년 말에 제출되었는데 기 업화 성과를 간략히 요약한 결과는 <표 5-4> 및 <표 5-5>와 같다. <표 5-4> G7 제품기술개발사업 기업화 성과 요약 기술분야 투입 연구비 대분류 소분류 (조원) 정보산업 기계 바이오 매출액 (조원) 2002년 수출액 (억불) 2007년 (추정) 매출액 (조원) HDTV/주문형반도체 대형평판표시 광대역통신망 초소형정밀기계 차세대자동차 고속전철 의료공학 신의약/농약 계 <표 5-5> G7 기반기술개발사업 기업화 성과 요약 기술분야 투입 연구비 대분류 소분류 (조원) 매출액 (조원) 2002년 수출액 (억불) 2007년 (추정) 매출액 (조원) 정보산업 차세대반도체 기계 생산시스템 바이오 생물소재 환경 환경공학 차세대원자로 에너지 신에너지 핵융합 소재 첨단소재 감성 감성공학 계
249 특히 G7 제품기술개발의 경우 실용화 전망이 뚜렷한 대형 프로젝트를 선정 하여 사상 최초로 1개 연구과제 당 천억원 단위의 초대규모 투자를 하였기 때 문에 성장동력산업 창출 여부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표 5-4>에 는 G7 연구사업이 종료된 2년 후인 2003년 시점에 2007년의 매출액 추정치 를 보여주고 있는데 추진된 9개 과제 중에서 HDTV, 대형평판표시, 차세대자 동차 등 3개 제품이 성장동력산업으로 부각할 것으로 예측했으며 동 3개 제품 은 예측된대로 모두 2007년 현재 효자산업으로 성장한 결과를 보였다. 특히, 대형평판표시 기술은 현재 우리가 세계1위를 차지하여 반도체 후속 제 품으로 자리를 굳힌 대형평판 TV용 LCD 및 PDP를 개발하는 과제로서 기술 기반을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6개 과제는 2007년까지도 성장동력산업으로 출현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쉬운 결과이며, 특기할 사항은 6,900 억 원이라는 최대 규모의 연구비를 투입한 광대역통신망기술과 요즈음 기대를 모으고 있는 바이오 분야 신의약/농약 과제도 상용화 전망이 흐려 양자 모두 매출액 추정치가 제로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기술예측이란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 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IT 분야의 기술발전이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빨 리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고 있다. G7과제 선정 당시에는 선정위원 아무도 우리의 정보통신 세계가 그렇게 빨리 무선통신 쪽으로 발전할 거라고 는 예측 못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상용화 성공 불확실성이 커서 제품기술이 아닌 기반 기술과제로 분류하여 추진한 차세대반도체 개발과제는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어 당당한 성장동력산업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토대로 하여 앞으로 대형 연구사업 추진에 있어서는 주도 면밀한 계획과 철저한 사전검증이 중요하고 한번 계획을 세우면 무슨 일이 있 어도 밀고 나가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추적평가에 의해 상황에 따 라서 주기적으로 진로를 수정할 수 있는 과감하고 유연한 운영체제가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1.6 정권 교체 후의 G7프로젝트 지속과정 (박영일 전 차관 회고) 정권 교체 후 G7프로젝트를 중단시켜 중소규모의 중핵기술개발사업으로
250 개편(또는 중심이동)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G7 프로젝트의 특 성, 특히 다수부처 참여, 산 학 연 참여, 10년 연구기획 및 총예산 확정 등의 요인 때문에 과기부 임의로 중단시키지 못하였다. (특히 경제기획원 측이 중 단에 강력히 반대) 2. G7과제 선정과 그 연구 성과 (강인구 박사 회고) 2.1 G7과제 선정평가위원장이 된 경위 저는 G7연구사업이 10년 간의 장기계획으로 출범할 1992년 당시에는 금성 중앙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저는 G7사업 초기에 과제선정 평가 위 원장을 맡았지만 사실 어느 날 과기처에서 회의소집을 해서 갔더니 G7이라는 명칭에 맞추어 위원도 7명이 소집되었는데 그중에 제가 제일 나이가 많아서 위원장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은 G7과제가 어떻게 기획된 것인지 잘 몰랐으나 회의가 소집된 때에는 어느 정도 플랜들이 세워져 있었어요. 그때 전 차관인 박영일 차관이 실무자였었고 그리고 송옥환 씨가 담당 국장이었고 그 밑에 젊 은 친구들이 기초 플랜들을 세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플랜에 따라 서 과제를 최종 선정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과제를 제품과제와 기반기술 과제의 두 가지로 크게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각각 7개씩 하자고 의견 이 모아졌습니다. 2.2 선택과 집중을 과제 선정 기준으로 14개 과제 선정 그래서 그때 각 연구소에서 제출된 proposal들을 검토하면서 과제 선정에 있어 그 초점을 선택과 집중에 두었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 여 G7 과제에는 과제의 대형화와 사전 기획과 사전평가라는 개념이 본격적으 로 도입되었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제품과 기반기술에 각각 7가지 과제씩을 선정했는데 고르 다 보니까 제품과제에는 과제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고 기반기술과제에는 6 개밖에 안 나와 너무 적어서 고민스러웠어요. 그래 한 개를 더 고르는데 앞으 로 디자인 쪽이 매우 중요해질 것에 대비하여 그에 기반이 될 수 있는 과제를
251 선택하기로 하고 표준연구소에서 제출한 감성공학 과제를 선정해서 7개 : 7개 를 맞추었습니다. 이렇게 일차 선정된 과제는 세부계획서를 통하여 작성토록 하고 그것을 평가하여 최종 선정을 하였습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마지막으로 선정 된 것은 1차 심사 후의 14개 과제 중에서 3개 과제가 탈락되어 11개 과 제가 선정되었습니다. 탈락된 3개 과제는 감성공학, 뉴로컴퓨터, 전기자동차 등이었습니다. 2.3 정권 말기에 과제가 선정되어 그 지속성이 의문시 제가 G7과제 선정평가 위원장을 맡아서 하면서 제일 고민하고 걱정을 했던 것은 사업의 지속성 문제로서 다음 정권에서도 연속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 습니다. 그 이유는 G7 연구사업이 출범된 시기가 노태우 대통령의 6공화국 정 권 말기인 92년 중반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정권 말기에 이런 장기 계획을 시작해서 그 지속성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 과기처 김진현 장관도 그걸 걱정해서 그때 마침 대전에서 개최된 기술진흥확대회의에 서 이 문제를 거론하게 했습니다. 김진현 장관은 그 회의에 나를 참석하게 하 고 내가 노태우 대통령께 직접 정부에서 계속 지원해 줄 것을 다짐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회의에서 그 얘길 꺼냈더니 노대통령은 그 당시의 부 총리였던 최각규 씨를 보고 이거 그대로 계속 돈 주도록 하라고 지시 하셨습니 다. 2.2 과제 선정 방식의 갑작스런 변경에 연구소들 반발 그런데 93년에 김영삼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고 신임 김시중 과기처 장관 이 들어오시자 우려했던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정부출연연 구소에서는 G7 연구사업에 대한 불만이 대단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전까지 는 연구추진 주체인 출연연구소가 중심이 돼서 과제를 선정하던 것을 과기처 가 모든 과제의 선정과 관리방식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바 꾸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의도하는 기본 목표에는 모 두 찬성했으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관리 방식이나 운영체제 등의 세부 방 법론이 그러한 획기적 개혁을 달성하기에는 미숙했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잡 음이 굉장히 많아서 신임 김시중 장관도 G7 사업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
252 지요.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니 G7 연구사업 탄생의 주역이었던 당시 송옥환 국장도 비록 여러가지 대비는 했었으나 입지가 좁아지었다는 것입니다. 2.5 이경식 부총리의 중재로 G7과제 연명 이러한 국면 타개를 위하여 제가 일조했습니다. 마침 그때 제가 살고 있었던 논현동에 신임 이경식 부총리가 거기 살고 계셨어요. 저와는 아침 운동하러 나 가면 자주 만나는 사이였었는데 아침체조를 하면서 그 분께 그 때의 난국 상황 과 문제가 발생하여 말이 많다는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번 만나자 고 해서 그때 위원들 7명과 같이 부총리실을 방문하여 노대통령당시의 상황과 국가 연구관리 방식 개혁의 필요성과 연구 지속성의 중요성 등에 관해 설명 드 렸습니다. 그 후에 제가 들은 얘기로는 그해 8월경 경제장관회의에서 이경식 부총리가 정부가 한번 약속한 것은 그대로 해야 된다고 주장하셨다고 들었습 니다. 2.6 G7 연구사업의 최대 성과는 대형평판표시판 G7 연구사업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가 1차 계획기간 이었고 1995년에 정근모 박사께서 과기처 장관으로 오시면서 2차 계획을 세웠어요. 2차 계획에 새로 포함된 과제 중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보였던 것은 대형평판표시 기술이 었습니다. 2차 계획 과제로서 선정에 논란이 있었던 것은 초전도핵융합 기술개발 과제 였는데 위원들 간에는 많은 논의와 말이 많았으나 정근모 장관께서 강력하게 추천하셔서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1차 계획 때 탈락된 감성공학이 별다른 반 대 없이 2차 계획에서 통과된 것이 이례적이었으며, 고속전철 기술도 2차에서 선정되었습니다. G7 연구사업은 10년간 계속된 후 2001년에 종료되었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한 개의 연구프로젝트에 1000억 원 이상씩 투자하는 과감한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전에는 몇 억 원 단위였지 1000억 원 단위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정도의 큰돈이었으며 18개의 프로젝트에 3조 6천 억 원이 라는 조 단위 연구비를 투자하였던 것입니다
253 2.7 대형 과제 추진에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철저한 사전검증이 중요 제가 이제 사업이 종료된 시점에서 연구 성과 측면에서 봤을 때에 가장 성과 가 큰 과제는 대형평판표시 기술과 반도체 기술이고 자동차 기술도 상당한 성 과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실패작은 광대역통신망(ISDN) 기 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한 과제에 6,900억 원이라는 우리나라 사상 초유의 초대형 연구투자를 하여 다른 과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투 자를 했는데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1. 참고문헌 1. 과학기술30년사, 고등기술연구원, 과학기술처 발행(1997.6) 2. 특정연구개발사업 연구성과분석 및 주요성공사례에 관한 연구, 한국 과학기술기획평가원, 과학기술부 발행( ) 3. 선도기술개발사업 프로그램 종합분석연구 II, 고등기술연구원, 과학 기술부 발행( ) 4. 선도기술개발사업의 최종평가 및 활용에 관한 연구(II), 한국과학기 술기획평가원, 과학기술부 발행( ) 2.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홍성원 ( 洪 性 源 1945년 생) 1967 육군 사관학교 학사 1971 University of Utah, USA 전자공학 석사 1975 University of Colorado, USA 전자공학 박사 육군보병 7사단 8연대 소대장 육군사관학고 전자공학과 강사, 조교수 대통령 비서실 비서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 서울분원장 현대전자 부사장
254 Cisco Systems Korea 사장 2004-현재 이화여대 경영대학 겸임교수 2004-현재 LG전자 사외이사 2005-현재 전남전략산업기획단장 조경목 ( 趙 庚 穆 1937년 생) 1961 서울대학교 전기공학 학사 1971 영국서섹스대학교 개발정책특별과정 수료 1975 미국코넬대학교 과학정책특별과정 수료 과학기술처 진흥국 진흥과 과장, 주미 한국대사관 과학관, 원자력안전국 국장, 과학기술심의실 실장, 과학기술처 차관 제12ㆍ13대 국회의원(민정,전국), 민자당 국회의원 데이콤 고문, 삼성건설 고문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회장 현대건설 고문 (사)한국엔지니어스클럽 부회장 (사)한국플랜트학회 회장(현 명예회장) 2004-현재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 강인구 ( 姜 麟 求 1934년 생) 1955 해군사관학교 학사 1961 미국 해군대학원 전기공학과 석사 1967 미국 뉴멕시코대학 전자공학 박사 해군사관학교 교수 울산공대 겸직교수(학과장) 국방과학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부소장 (주)금성통신 등 LG각사 연구소장 역임 (주)금성사 부사장(중앙연구소장) 연암공업대학 학장 대한전자공학회 부회장, 감사 한국감성과학회 회장 한국과학기술원 이사
255 한기익 ( 韓 基 益 1937년 생) 1967 경북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경제학 석사) 과학기술처 진흥국, 사무관 과학기술처 기술개발 담당관 (서기관), 기술개발과장, 기술조성과장 과학기술처 대덕단지관리소장(부이사관), 과학기술처 기술정책관, 기초연구조정관(이사관) 1996 과학기술처 명예퇴직(관리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감사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감사 1997-현재 대덕엔젤클럽 회장 김석권 ( 金 石 權 1936년 생) 1958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학사 과학기술부 기술개발과 과장 과학기술부 총무과 과장 대덕연구단지관리소 소장 한국기술개발(주) 감사 곽종선 ( 郭 鍾 善 1936년 생) 1961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학사 1985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수료 전매청 경제기획원 과학기술부 대전EXPO 조직위원회 파견근무 과학기술부 복귀, 관리관 승진.퇴직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감사 대덕전문연구단지 관리본부 사무총장, 전문위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감사
256 김석권 강인구 홍성원 조경목 한기익 곽종선 <사진 24> 5차 워크숍 참가자 회의사진
257 제6장 기술개발촉진법의 제정과 민간기술연구소의 육성 발전 과정 분석
258
259 제1절 기술개발촉진법 개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이 국가 연구개발 체제 구축의 법적 뒷받침을 하였다면 민간기업의 연구개발 체제 구축 지원은 기술개발촉진법이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술개발촉진법은 1970년대 초 이후 지금까지 민간기업의 기술개발 활동 지원을 위하여 시대적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 왔다. 이러한 민간기업의 기술혁신을 유도 촉진시킨 기술개발촉진법의 제정과 시행은 산업 기술 혁신의 중요성에 대한 당시 과기처의 정책적 판단과 노력이 결정적인 역 할을 하였다. 동 촉진법 시행 초창기 10여년 간의 발전과 운영에 있어 많은 성 과를 거두게 된 것은 당시 과기처의 고위 간부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특히 기술 개발관실의 기술관료(당시 담당과장 한기익)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과학기술처는 1972년 기술개발촉진법을 제정하여 산업기술의 자주적 개발 과 선진기술의 도입을 촉진하고 이를 소화개량 하도록 지원하기 시작함으로서 산업기술개발 촉진을 위한 최초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특히 기술개발 준비금 적립 제도 는 이때 도입되었으며 준비금을 적립한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정책 금융 지원, 조세 및 관세 감면, 신기술 기업화 지원 등 각종 지원을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1977년 기술개발촉진법은 대폭 보완되었는데 국내에서 최초로 개발된 기술 및 제품에 대해서는 일정기간 그 수요창출을 지원할 수 있도록 국산 신기술 제품의 제조자에 대한 보호제도 를 설치하였으며, 기술을 수출하는 중소기업 을 지원하기 위하여 기술수출계약의 사전 신고제 를 도입하였다. 이와 함 께 중소기업의 공통애로기술 해결과 기업의 연구개발 인프라 구축 강화를 목 적으로 하는 산업기술연구조합 의 설립ㆍ지원 조항을 신설하여 독립적인 산업기술연구조합육성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민간기업 연구소의 인력 확보 난 해결을 위한 연구요원 병역특례 제도 도 신설되었다. 1981년에 핵심산업기술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특정연구개발사 업 조항이 동 법에 신설된 것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책연구사업 지원제도(funding system)로 80년대 초 이후 지금까지 약 6조원이 이 제도를 통해 지원되었는바, 1982년 초년도 사업예산
260 133억 원에서 2007년의 4,485억 원으로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이 funding system을 통해 다양한 국책연구사업 프로그램이 추진되어 왔다. 90년대 이후 의 기초과학지원사업, 국제기술협력사업, 선도기술개발사업, 중점기술개발사 업, 중간진입기술개발사업, 21세기프론티어사업, 원자력기술개발사업, 우주기 술개발사업, 바이오기술개발사업, 나노기술개발사업 등 다수의 프로그램이 특 정연구개발사업에서 지원되었다. 1989년에는 특정연구개발사업에 대학과 기 업연구소가 참여토록 문호를 개방하기 위하여 기업연구소등에 대한 지원 사 업 추진 조항이 신설되었다. 이러한 민간기술개발 지원 제도에 의해 1981년에 65개에 불과했던 기업연 구소는 91년 1,000개, 95년 2000개 등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2004년에 는 1만개를 돌파했다. 또한 1982년의 기업연구소의 기술개발투자는 1,400억 원에 불과하였으나 1987년에는 기업의 기술개발투자가 1조원을 넘어서고 민 간기업연구소의 기술개발투자가 정부출연(연)을 능가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실질적인 민간주도 기술개발시대가 개막되었다. 제2절 기술개발촉진법과 민간기업 기술개발 지원 (한기익씨 회고) 년대 여건과 민간기업 기술개발 촉진 정책 1970년대 과학기술처의 기본정책방향은 첫째, 과학기술기반구축, 둘째, 민 간기업의 기술개발촉진, 셋째, 과학기술풍토조성이었습니다. 그 중 민간기업의 기술개발촉진분야 정책추진과 관련하여 1976년도 기술개발관실 과장이었던 기술 관료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정책적 성과를 이루어 내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운 일들과 보람이 있었던 일들을 회고해 보고자 합니다. 1970년대 초는 우리나라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전반적으로 기술개발 여건 즉 연구비, 연구기자재, 연구인력 등 모든 면에서 아주 취약한 실정으로 서, 필요기술의 대부분을 기술도입 또는 KIST나 대학 등에 의존하고 자체기술 개발은 소홀한 상태였습니다. 1970년 초에 제정한 기술개발촉진법에 의한 기 술개발준비금 적립과 사용실적도 극히 저조하여 법제정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261 경제개발계획의 본격적 시행으로 중화학공업 추진에 필요한 기술을 대부분 선진기술도입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자체기술개발의 필요성이 점차 적으로 높아져 정부의 기술개발지원시책이 절실한 시점에서 과기처가 본격적 으로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과기처가 민간기업의 기술개발 촉진을 위한 조치로서 크게 고려한 사항은 첫 째 기업의 기술개발조직으로서 기업부설연구소 설립지원, 둘째 연구인력 확충, 셋째 연구개발비 지원, 넷째 자체개발한 신기술 기업화 촉진에 역점을 두고 구 체적 실천방안을 기술개발촉진법 및 관련세법, 정부구매제도, 신기술보호정책 등에 체계적으로 반영 시행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타 부처와 타 법령과의 마찰 을 해소하고 소기의 성과를 이룩해 내는데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2. 기업연구소 관장 부처가 과기처로 이관된 경위 1977년 기술개발촉진법 개정 내용에 기업부설연구소 설치 권고 조항을 신설하여 종래 공업진흥청이 관장하던 기업연구소를 과기처로 이관하는데도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1976년 10월초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의 과기처 국정감사 시 금성통신연구소 방문 중 여야의원 20여명에게 금성통신연구소장은 기업연구소 관장 부처를 공 진청에서 과기처로 이관해달라는 건의를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서 공진청이 법령에 근거하지 않고 연구용품, 관세감면 확인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연구수 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공진청이 매년 초에 연구용 품 품목고시물품이 아니면 이를 인정하지 않는 등의, 불만을 토로한바 있었습 니다. 이런 건의를 받은 국회의원들은 즉석에서 기업연구소는 과기처가 관장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동조하였습니다. 법령을 개정하여 기업부설연구소를 과기처로 일원화하는 과정에서 공업진흥 청에서 기업의 제품개발과 산업정책 등과 연계해야 된다는 이유로 그렇게도 반대하였으나 최종완 공업진흥청장이 78년도 과기처 장관으로 부임하게 된 후 과기처 관계관들은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산업계의 이러한 건의는 연 구개발을 지원하는 정부의 여러 부처 중에서 그래도 과학기술처가 가장 깨끗 하고 진취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62 3. 기술개발준비금제도 기업의 기술개발을 촉진하기 위하여 가장 강력한 유인시책의 하나가 세제상 의 지원이었습니다. 세제지원내용에 있어서는 기술개발준비금제도, 기술 및 인 력개발비 세액공제, 연구개발용품의 관세감면, 연구용품의 특별소비세 면제, 연구소 토지 및 건물의 취득세, 재산세 등 국세, 관세 및 지방세 감면제도의 확 충이야말로 오늘날 산업계의 기술혁신을 선도한 획기적 시책이라 할 수 있겠 습니다. 그중 기술개발준비금제도는 종래 소득금의 20%를 적립할 수 있게 되어 있 고 그 사용기간도 2년으로 되어있어 적립한도와 사용기간, 사용범위의 제한으 로 제도의 실효성이 없었으나 이를 전면 개정하여 적립한도를 소득금액의 20% 또는 매출액의 1%로(전략산업분야는 1.5%) 선택적으로 적립할 수 있도 록 하고 사용기간은 2년에서 4년으로 크게 확대하고 사용범위에 있어서도 자 체개발뿐만 아니라 위탁개발, 기술도입비용까지 인정함으로써 동 준비금의 실 효성을 크게 제고하였습니다. 법 개정 전 매년 30억원 규모의 적립액과 20% 미만의 사용률에서 법 재정 후에는 매년 1,000억원 이상, 90%이상의 사용률 을 나타냈으니 제도의 개선이 산업계에 미치는 효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 습니다. 기술개발준비금 적립신고와 관련하여 겪은 일화를 소개하면 1978년 최종완 장관이 부임하여 실국별 업무를 보고받는 과정에서 기술개발준비금으로 한 기 업이 30억 원 이상을 소득금액에서 적립하면 과표가 그만큼 낮아지니까 이렇 게 큰 이권업무가 과기처에 있는지 몰랐다면서 큰 관심을 나타내고 실무진이 엄청난 권한행사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조세지원에 있어서의 손비인정과 세 액공제의 개념설명으로 이해시키는데 무척 힘들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80년도 감사원 정기 감사에서도 조세유인제도를 잘 모르는 담당감사관이 기술개발준비금 신고 제도를 탈세조장으로 몰아 책임을 지우려 는 감사방향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과기처의 조세지원방향은 처음에는 조세 감면 폭을 낮추면서 단계적으 로, 연차적으로 확대하고 그 감면 범위와 기준을 확대함으로서 기업의 기술 개 발 유인을 촉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매년 조정하는 조세감면규 제법과 관세법개정시 재무부 당국자와 많은 논쟁과 협의과정에서의 마찰이 있
263 었습니다. 4. 기술개발 조세지원 제도 정착을 위해 관련 부처 설득 노력 재무부측 주장은 내국세와 관세의 징세목표의 엄청난 차질을 초래하는 무리 한 기술개발 관련 조세지원 요구로 받아들이는 반면 과기처는 기업의 기술개 발 세제 혜택은 결과적으로 기업성장을 촉진시켜 세원의 뿌리를 키워 종국적 으로 국가세수의 확대를 가져온다는 논리로 맞서 종합적인 지원제도를 확충해 나갔습니다. 연구소 토지건물에 대한 지방세 면제는 내무부 소관으로서 영리법인인 기업 의 사유재산에 대하여 취득세, 재산세, 등록세를 면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으나 끈질긴 협상으로 연구용 토지는 건물바닥면적의 7배까지로 건물은 전체면적으로 지방세를 감면키로 함으로서 기업부설연구소 설립 붐을 조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70년대 말 현대그룹에서는 수도권 (용인일대)에 대규모 연구소설립계획을 추진하겠다고 제의하는가 하면 일부 대기업에서는 공장 내 기존연구소 건물의 부지를 분할하여 재산세를 감면 받는 사례도 발생하였습니 다. 과기처가 주도한 기술개발 조세지원제도는 다른 측면에서 우리나라 기업지 원제도의 일대 변화를 유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70년대 부터 8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조세지원제도는 특정산업, 예를 들면, 중화학 공업, 중소기업 또는 수출산업 등 중요산업 지원제도였으나 기술개발지원 제도는 모든 산업분야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기술개발 즉 기능적 지원제도로 서의 특성을 가짐으로써 전반적 산업혁신을 유도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고 생 각되며 조세지원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증대한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산업계에서 기술개발관심이 높아지고 이에 부응하여 과기처에서 기술 개발촉진법이 정한 기업부설연구소의 지원이 본격화 되자 지금까지 중화학공 업 및 수출지원 정책에 몰두하던 상공부 측에서 80년대 초부터는 기술개발 중 시 정책으로 공업발전기금을 설치하는 등 과기처와 경쟁적으로 기술지원 정책 을 둘러싸고 주관부서 다툼을 하는 등 논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한때 당시 재무부 하동선 세정차관보(버마사태 희생자)가 주관한 조세감면규
264 제법 개정안 반영을 위한 각 부처 요구안을 조정하는 회의에서 상공부 관련국 장(현 국회의원 신국환, 전 이동규차관 등)들이 상공부가 주무부처인 기업의 기술개발 지원제도를 왜 과기처에서 운영하느냐, 손을 떼라고 거친 어투로 항 의함에 따라 과기처는 그동안 상공부가 하지 못했던 기업의 기술경쟁력 강화 시책을 체계적으로 법령과 예산(특정연구개발사업)을 통하여 지원제도를 확립 한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고 반박하였더니 재무부측에서 과기처가 제시한 기술개발 세제 안이 합리적이고 상공부 안은 세법을 전연 고려치 않는 황당한 요청이라면서 과기처 안을 받아들인 사례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기업부설연구소 연구용품에 대한 관세감면 확대를 위해서도 재무부 관세당 국과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며 오랜 설득 끝에 관세법 개정에 연구용 물품관세 면제를 관철시켰으나 시행령 제정을 위한 관계기관 회의에서 당시 재무부 관 계관(홍재형 관세국장, 현 국회의원)이 연구용 물품의 정의가 불분명하고 시약 같은 경우는 전 산업계로 확산 될 우려가 있으므로 동 면제조항의 폐지 법률안 을 내겠다고 주장함에 따라 본인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설득했던 일들도 있습 니다. 5. 병역특례 제도 70-80년대 대부분의 기업이 기술개발 전문연구소를 설치 운영하는 분위기가 성숙되지 못하고 외국의 기술을 모방 복제하는 수준에 있었으며, 연구요원 확 보에 애로가 많아 정부의 기술개발 유인시책으로 병영특례제도를 도입하였습 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업부설연구소 연구요원에 대한 병역특례 제도 인정 과 관련해서도 그 인정범위와 대상을 놓고 국방부와 병무청을 상대로 어려운 협의와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제도는 종래에는 KAIST졸업생에 국한된 병역특례혜택제도였으나, 그 범 위를 확대하여 과학기술처에 신고된 기업부설연구소 에 들어와 5년 이상 연구 전담요원이 되면 어느 대학을 졸업하든 4년제 이공계대학 졸업생이면 병 역특례혜택이 부여되는 제도로서 매년 일정 수의 인원을 배정받아 기업연구소 에 배정함으로써 산업계 연구인력 확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당초 병역기피 우려에 대한 염려도 있었으나 시행 초기에는 연구원에 국한하여 병역특례가 이루어졌고 또한 과기처의 철저한 감독과 통제로 특별한 부작용 없이 소기의
265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병역특례제도는 시행하는 과정에서 과기 처 출입기자들의 병역특례제도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와 지원은 큰 힘이 되었 습니다. 6. 국산신기술 및 신제품 인정과 보호조치제도 한편 기술개발촉진법에서는 기술개발지원시책 못지않게 기업이 어렵게 자체 또는 위탁 개발한 국산신기술 및 제품 에 대하여는 신기술인정과 개발제품 의 보호조치도 함께 강구함으로써 자체개발 의욕도 고취하고 개발성과를 보상 하는 법적장치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첫 사례로서 KIST(최남석 박사팀)가 개발한 폴리에스터필름 제조기 술을 선경화학(주) 이 기술개발촉진법에 의한 국산신기술제품 보호를 과기처에 요청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삼성(제일합섬)이 동종기술에 대하여 일 본 도래이 사로부터 40억 원 상당의 기술도입계약 허가서를 경제기획원에 신청함에 따라 관계 부처 간 의견은 극도로 대립되었습니다. 국산신기술보호도 중요하지만 폴리에스터필름 기술 같은 고도의 선진기 술 도입을 막는 것은 산업선진화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제기획원과 상공부에 맞서 신기술을 보호함으로서 국내 기술개발의욕을 확산시키겠다는 과기처의 확고한 의지는 마침내 약 6개월간을 걸쳐 전문가 심의와 기술개발 심의위원회 결정에 따라 4년간 기술도입에 의한 동종 및 유사제품 의 중 복제조 금지 결정을 함으로써 삼성 의 기술도입이 무산되었으며 이 결정은 당시 대통령께서도 경제수석비서관(이희일)을 통해 칭찬해온 우리나라 기술개 발사의 일대 쾌거였습니다. 이 사례는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 선진도입기술과 자체개발기술의 마찰사례 로 기록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기처의 기술개발 정책은 선진기술의 과감한 도입도 중요정책으로 추진하였기에 신기술보호정책은 아주 한시적, 선 별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으며 산업의 핵심기술이 아닌 기술보호 요청으로 기업의 기술경쟁을 저해하는 경우도 많아 이제도를 계속 운영할 수 없는 실정 이었습니다. 7. 기술개발 성공 사례에 대한 포상제도 과기처에서는 80년대 들어와 전 부처의 연구개발 정책에 대한 인식의 확대
266 와 기업의 기술개발 지원제도를 확충하기 위하여 청와대 비서관과 수차례 협 의하였으며, 81년 10월 28일 과기처가 대통령에게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 의 과학기술부문 실천계획 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보고가 끝난 후 대통령 말씀 중에서 과학기술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 앞으로 제5공화국은 기술을 가 장 중요시하는 정책을 펴 나갈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기술 입국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담당할 기술진흥확대회의 를 과기처가 주관이 되어 운영할 것 이다 라고 지시하여 국가의 기술우위정책의 일환으로 대통령이 주재하는 기 술진흥확대회의 를 분기별로 개최하여 산업계의 기술개발 애로요인을 분석하 고 대책을 보고하며 기술개발성공사례를 발표하여 포상하는 제도를 정착시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기술진흥확대회의 의 보고 안건 작성을 둘러싸고 각 부처와 협의 조정하 는 일은 정말로 어려웠으며 어떤 안건은 끝내 조정이 되지 않은 채 대통령의 결단을 유도할 수밖에 없는 사항들도 있었습니다. 기업의 기술개발 지원정책을 위한 대표적인 보고 주제로는 기술주도 새 시 대의 전개, 기업의 기술개발 현황과 정부의 지원계획 등의 보고내용을 관련 부처가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 코스닥의 선구자 역할 과기처에서는 정부출연연구소, 대학, 기업이 개발한 신기술의 기업화촉진을 위한 각종지원제도를 추진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벤처케피탈과 창업투자 회사를 활성화 하는 일에 역점을 두면서 신기술기업의 자본시장참여를 위해 벤처기업에 대한 장외시장 신설을 재무부와 협의하였으나 취약한 자본시장 을 위축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하던 사안을 동 진흥확대회의에 계속 보고하여 끝내 1990년 초 벤처기업중심의 자본시장인 오늘날 코스닥 시장을 이끌어 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9. 산업기술진흥협회 설립 및 민간 연구기관 지원 과기부의 기술개발정책은 정부주도형으로 추진하였으나 산업의 기술개발 애 로요인을 파악하고 정부에 개선책을 건의한 일은 민간연구소협회가 중심이 되 어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동 민간연구소협회는 초기 회원사 30개 기업으로 전
267 경련 산하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전경련의 김립삼 부회장과 고 김영우 박 사가 주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과기부에서는 고 신만교 당시 국장께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펴 나가게 되어 지금은 15,000개가 넘는 산업기 술진흥협회로 발전한 우리나라 민간기업의 기술발전을 선도한 중요 산업기 술 경제단체 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기술개발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일들은 앞에서도 언급 한 바와 같이 산업별 주관부서가 다른 영역에 걸쳐 있어 모든 부처와 협의추진 하고 산업계의 동의를 구해야만 실효성이 있기 때문에 업무의 특성상 부처 간 마찰과 갈등이 있었으나 근대화 이후 정부와 산업계 기술혁신의 중요성에 대 한 공감된 인식이 주효했기에 오늘날 선진국에 근접하는 산업기술 국가로 발 돋움 할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끝으로 필자는 당시 기업의 기술개발지원제도발전을 위한 업무를 10년 이상 맡아 어려움과 보람을 함께 하면서 기술혁신기업을 창출하는 등 큰 정책적 성 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이러한 성공은 1979년 11월 유엔산하 에스캅 이 주관하는 인도 뱅갈로르 기술이전 국제회의에서 전 회원국이 우리나라 민간기업기술개발 지원제도를 가장 모범사례로 인정하는 가슴 뿌듯했던 기억 도 잊을 수 없습니다. 참고자료 1. 참고문헌 1. 과학기술30년사 과학기술처 발행(1997.6) 2. 국가기록포털>과학기술>기술개발촉진법 2.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한기익 ( 韓 基 益, 1939년 생) 1962 영남대학교 경제학 학사 1966 경북대학교대학원 경제학 석사
268 과학기술처 기술개발과장, 기술정책관, 대덕단지관리소장 기상청 기획국 국장, 기초종합연구조정관, 감사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감사 권원기 조경목 한기익 곽종선 <사진 25> 5차 워크숍 참가자 회의사진 3. 기술개발촉진법 제정 및 개정 내용 제정 : 제1조 (목적) 이 법은 산업기술의 자주적 개발과 도입기술의 소화개량을 촉 진하여 그 성과를 보급하게 함으로써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고 국민 경제발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기술개발준비금의 적립) 1 다음 각호에 게기하는 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기술개발 준비금(이하 "준비금"이라 한다)을 적립할 수 있다. 1. 외자도입법의 규정에 의한 기술도입계약에 의하여 외국으로부터 기 술을 도입한 자 2. 외자도입법의 규정에 의한 자본도입계약에 부수하여 기술을 도입 한 자
269 3. 전각호 이외의 방법으로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한 자 2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준비금을 적립하고자 할 때에는 총리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미리 과학기술처장관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3정부는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준비금을 적립 신고한 자에 대 하여는 제6조 및 제7조의 규정에 의한 지원을 한다. 제6조 (자금의 지원) 정부는 제3조 및 제4조의 규정에 의하여 기술개발준비 금을 적립 사용하는 자 및 제5조의 규정에 의하여 기술개발을 행하는 수입 업자에 대하여는 산업육성을 위하여 조성된 장기저리자금 중 일부를 기술 개발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 제7조 (조세상의 지원) 정부는 이 법의 규정에 의하여 기술개발을 하는 자에 대하여 조세감면규제법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조세의 일부를 감면할 수 있 다 개정 제8조의2 (국산신기술제품의 제조자에 대한 보호) 1 국산신기술 제품에 대한 보호를 받고자 하는 자는 공업화시험완료단계 또는 시범제작단계에서 이를 과학기술처장관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2정부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신고된 국산신기술제품의 제조자에 대하 여는 연구개발에서 기업화단계까지 투자된 자본의 회수와 적정이윤이 보장되도록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일정기간 유사제품의 수입 규제 및 동일품목의 중복제조규제등 필요한 보호조치를 할 수 있다. 3정부는 제2항의 규정에 의한 보호를 받는 자에 대하여는 국산신기술제품 의 성능 품질보장에 필요한 개선을 명할 수 있다. 4정부는 국산신기술제품의 수요창출을 위한 자금지원 및 우선구매등 지원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5제1항의 신고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본조신설 ] 제10조의2 (기술수출계약의 사전신고) 1 기술수출계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자는 당해 기술수출계약을 체결하기
270 전에 미리 다음 각호의 사항을 포함한 기술수출계획을 과학기술처장관 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1. 기술의 내용 및 제공방법 2. 기술수출의 대가 및 수취방법 3. 계약기간 4. 기대효과 2과학기술처장관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신고를 받은 때에는 관계기관의 장에게 필요한 지원요청을 할 수 있다. 3제1항의 신고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본조신설 ] 제10조의3 (산업기술연구조합의 설립) 1 동일 또는 동종의 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자는 다음 각호의 사업을 협동 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산업기술연구조합(이하 "조합"이라 한다)을 설 립할 수 있다. 1. 기술향상을 위한 연구개발의 실시와 그 성과의 관리에 관한 사업 2. 동종의 선진기술의 일괄도입과 그 배분에 관한 사업 3. 도입기술의 소화개량을 위한 연구개발의 실시와 그 성과의 관리에 관한 사업 4. 조합원을 위한 기술지도사업 5. 기타 기술개발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업 2제1항의 조합은 법인으로 한다. 3제6조 제8조 제9조 및 제10조의 규정은 제1항의 조합에 이를 준용한다. 4제1항의 조합에 관하여는 이 법에 규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민법중 사단 법인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본조신설 ] 개정 제8조의3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추진) 1 과학기술처장관은 핵심산업기술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특정연구
271 개발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연도별로 연구과제를 선정하여 이를 다음 각 호의 기관과 협약을 맺어 연구하게 할 수 있다. 1.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의 적용을 받는 연구기관 2.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기업부설 연구소(이하 "기업연 구소"라 한다) 3. 산업기술연구조합 4. 교육법에 의한 대학 또는 전문대학 5. 국 공립연구기관 2제1항의 규정에 의한 연구에 필요한 비용은 정부 또는 정부 이외의 자의 출연금 기타 기업의 기술개발비로 충당한다. 3제1항의 규정에 의한 협약의 체결방법, 제2항의 규정에 의한 출연금의 지급, 사용 및 관리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본조신설 ] 제8조의4 (기업연구소등에 대한 출연) 1과학기술처장관은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기업연구소 또는 산업기술연구조합에 출연금을 지급할 수 있다. 2제8조의3제3항의 규정은 제1항의 경우에 이를 준용한다. [본조신설 ] 개정 제8조의5 (기업연구소등에 대한 지원사업추진) 1 과학기술처장관은 제8조의3제1항 각호에 규정된 기관 또는 단체의 기 술개발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다음 각호 의 사업을 실시할 수 있다. 1. 공동연구이용시설의 설치 운영 및 당해 시설의 이용알선사업 2. 기술개발에 관한 전문교육 및 연수사업 3. 국내외 기술정보의 수집 분석 및 보급사업 4. 기술개발 기술도입 및 도입기술의 개량에 관한 조사 연구 및 홍보
272 사업 5. 기업연구소등의 설립지원 및 그 운영에 관한 지도사업 6. 기술개발 성과보급 사업화촉진 및 공동연구 알선사업 7. 기타 기술개발진흥을 위하여 필요한 사업 2 과학기술처장관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사업을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관 또는 단체의 장에게 위임하거나 위탁할 수 있다. 이 경우 당해 기관 또 는 단체에 대하여는 재정지원을 할 수 있다. [본조신설 ] 제10조의3 (전략기술수출의 승인) 1 기술수출계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자는 당해 기술수출계약의 대상기술이 국제평화 및 안전유지를 저해하는 등 잘못 사용될 우려가 있다고 인정 되는 기술(이하 "전략기술"이라 한다)인 경우에는 제10조의2의 규정에 불구하고 기술수출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과학기술처장관의 승인을 얻 어야 한다. 이 경우 과학기술처장관이 기술수출계약을 승인하고자 할 때에는 미리 상공부장관과 협의하여야 한다. 2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전략기술의 범위 및 수출계약의 승인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과학기술처장관이 관계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한 후 따로 정하여 고시한다. [본조신설 ] 제16조 (권한의 위임 위탁) 과학기술처장관은 이 법의 규정에 의한 권한의 일부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의하여 관계기관 또는 단체의 장에게 위 임하거나 위탁할 수 있다.<개정 >
273 제7장 70년대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TAC)와 90년대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KTB)가 기술금융에 미친 영향 분석
274
275 제1절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TAC)와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KTB)를 통한 기술금융 사업 개요 1. 우리나라 벤처캐피탈의 태동(K-TAC) 우리나라에서 벤처캐피탈이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경 이다. 그러나 무려 20여년이나 앞선 1970년대 벤처캐피탈을 통해 신기술을 기업화하려는 시도가 과기처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66년 문을 연 KIST는 1973년까지 약 8년간의 누적 연구 투자비가 70억 원을 넘었으나 그 연구 결과의 기업화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KIST 경제분석실(실장 윤여경)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KIST의 신기술 기업화를 지원하는 벤처캐피탈 형태의 전담 기관 설립을 제안했다. 당시 최형섭 과기처 장관은 KIST가 일본 이화학여구소의 리켄 콘체른 모델이나 미국 바텔연구소의 BDC 모델을 벤치마킹하여 스스로 수익을 창출하 는 연구소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최 장관은 KIST 경제분석실이 제 안한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orea Technology Advancement Corporation, K-TAC)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윤여경 실장은 KIST 이사회의 유보적 입장에 직면하여 돌파구를 찾 기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K-TAC 설립 자본금은 2천만 원으로 하되 KIST 소유 기술을 K-TAC에 현물 출자할 수 있는 전결권을 KIST 소장에게 위임한 다고 하는 조건부 설립안으로 KIST 이사회에서 승인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974년 9월 9일 국내 최초의 벤처캐피탈 회사라고 할 수 있는 K-TAC이 자본금 2천만 원으로 설립됐다. 설립 과정에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설립 후 초창기 K-TAC의 사업은 탄탄 대로였다. 설립 후 5년여에 걸쳐 7개의 기술을 기업화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울산화학, 한정화학, 남해요업, 창성, 진흥정밀화학, 삼우특수금속, 유한화학공 업 등의 하이테크 벤처기업이 창출 되었다. 따라서 K-TAC은 벤처캐피탈 형 태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공하여 나름대로 KIST의 수익모델 창출 가
276 능성을 입증했고 윤여경 사장은 우리나라 신기술 사업화의 이론과 실제에 대 한 노하우 를 전파한 최초의 인물이며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되었다 K-TAC의 지속적인 발전이 중단된 아쉬움 그 후 K-TAC의 경영진이 바뀌어 벤처캐피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기술 을 직접 기업화고 직접 경영하는 방식 즉 투자기업 직접 경영방식으로 전환하 였으나 마케팅 실패로 결국 문을 닫는 결과로 끝을 맺었다. K-TAC은 자본금 의 부족, KIST지원의 소극성, 조직간의 마찰 등 애로사항이 많았으며, 법적 뒷 받침이 없는 단순한 주식회사로서의 정부지원의 한계 등으로 설립목적대로 회 사가 발전되지 못한 점은 크게 아쉬움으로 남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국내 신 기술 사업화 추진의 과감한 시도와 값진 경험 등은 후발 벤처산업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금융계에 벤처캐피탈과 같은 하이 리스크 금 융도 유능한 경영자를 영입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 즉 기술금융에 관한 관 심을 갖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윤여경 실장은 그 당시 국제 금융계가 주 목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2. KTDC 설립 배경 2.1 KTDC 설립과 벤처캐피탈회사로서의 선구자 역할 1970년대 말 우리나라 경제는 정부와 민간의 수출주도 성장전략에 의해 급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가격경쟁력에 힘입은 것이지 품질경쟁력에 바 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싼 노동력에 의존한 수출전략에서 벗어나 기술개발에 의한 고부가가치의 창출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신기술 기업화를 지원하는 기술금융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 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과기처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상호 협력하여 전경 련의 주요 회원사에 속해 있는 45개의 민간 연구소들로 구성되는 민간연구소 설립추진 위원회의 발족을 지원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신기술 기업화 자금 조달을 위한 기술개발회전기금을 정부와 50:50으로 조성하기로 1980년 2월 에 합의했다. 회전기금은 일부는 IBRD 차관자금으로 조달하고 나머지는 민간
277 기업 협력으로 조달하는 것으로 계획하여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 (Korea Technology Development Corporation/KTDC)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 후 1980년 8월 경제장관회의에서 KTDC 설립안이 통과되었고 이어서 국 회의 차관동의를 얻고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법이 연말에 공고되어 그 다음 해 인 1981년 초에 KTDC가 설립되었다. KTDC의 김창달 초대 사장은 IBRD와 MIT의 기술금융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KTDC의 운영의 틀을 만들었으며 그 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기술금융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특히 KTDC는 우리나라 에 미국식 벤처캐피탈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중소기업과 정부 및 국회 등의 기 술금융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인식을 바꾸어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한 투자조합 (Limited Partnership Fund)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국 벤처캐피탈의 효시가 되었다. 2.2 벤처캐피탈회사로서의 본격적 운영과 파급효과 KTDC는 80년대와 90년대 후반에 걸쳐 국내의 연구개발 결과를 근거로 신기술을 기업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국내의 열악한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과 신기술 사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기업화 성공시에 한하여 상환하는 기술 개발조건부융자재도 를 운영하고 실패시 회전기금의 손실을 정부가 보전하는 벤처캐피탈제도를 과감히 추진하여 중소기업과 신기술 사업화 지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KTDC는 설립 후 10여년이 지난 90년대 초에 진정한 벤처캐 피탈 형태로 도약하여 본격적인 종합기술금융업으로 확대개편하기 위해 KTDC법을 폐지하고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법(KTB법)을 제정하여 1992 년에 KTB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KTB법은 회사채 발행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의 10배에서 20배까지로 확대 하여 기술금융 자금의 대폭적인 확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 주요골자였다. 당시 에는 투자조합을 통한 자금조달방식이 허용되지 않아 자금조달은 주로 자본금 과 회사채 발행 등의 차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회사채 발행한도의 확대는 곧 회사의 확대개편을 의미했다. 또한 KTB법으로 개편 되면서 기술개발복권 을 발행할 수 있게 되어 KTB의 재원조달에 매우 유리한 수단이 되었다. 과학기술처는 KTB의 육성을 위하여 여러 가지 지원을 하였는데 특별법을 제정하여 자본금의 50%까지 지원하고, 과기처가 보유한 과학기술기금을 KTB
278 에 맡겨서 운영하도록 했으며, 재경부에서 지원하는 투융자 금융도 매년 국회 의 인준을 거쳐서 20여 년간 총액 1조 5천억 원 정도를 지원했다. 따라서 기 술기금과 합하면 총액 약 2조 원 정도를 민영화 전까지 융자 지원했다. 그 후 1999년에는 KTB법도 폐지되고 KTB는 완전히 민영화 되어 회사명이 KTBnetwork로 변경됨으로서 대형 민간 벤처캐피탈로 탈바꿈 하였다. 지금의 KTBnetwork사는 1,000여개 벤처기업에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자하는 대형 투자전문회사로 발전했다. 결론적으로 KTB의 성공적 모델은 민간 벤처캐피탈 산업의 활성화와 많은 창업 투자회사 설립의 촉진제가 되었으며, KTB의 성공적인 운영으로 관련 전 문 인력의 양성과 기술창업 중심의 벤처 붐 조성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과기처의 KTDC설립과 운영지원 (권갑택씨 회고) KTDC는 우리나라 최초로 처음부터 정부에서 기획하고 운영계획을 수립하 고, 설립 및 사후 지원까지 해온 정부주도의 Venture Capital Company 이었 음. 과기처는 IBRD차관 자금으로 MIT의 Center for Policy Alternative에 용역 을 주어 이들 전문가들과 많은 토의과정을 거치면서 정부와 산업계가 공동으 로 조성한 기술개발 지원 자금의 지원방법으로 개발기술의 산업화 성공 가능 성만 있으며 담보 없이 융자 해주는 제도의 마련이 관건임을 공동 인식하였음. 이와 함께 초기 일정기간(최소 5년)은 정부에서 일정 규모의 손실 보전을 해주 도록 하였음. 초기 운영계획 모델 수립과정에서 과기처와 전경련은 연간 지원자금 규모의 30%까지 무담보 지원을 하고, 점차 그 규모를 늘려나가는 것으로 운영 모델을 수립하였음. 그러나 회사 설립 후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손실을 가정한 회사운영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당초 과기처가 의 도하였던 운영방향과는 다소 차질이 있었음. KTDC 법제정 과정에서는 법률용어로 조건부융자 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 하였고 당시 금융관행상 상환면제를 전제로 한 융자를 법률로 인정하는 최초 의 시도였음. 관계부처 협의 과정에서 재무부는 당연히 반대였고 이미 내부적
279 으로 법무담당관실에 이재국으로 조건부융자 삭제 의견 공문이 나간 상태이었음. 그러나 담보능력이 없는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기업화 지원을 위해서는 조건 부융자 개념이 없는 KTDL 법은 제정의미가 없는 것임. 다행히 당시 재무부 법무담당관과 이재국 담당과장과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법무담당관실의 삭제 의견 공문을 철회시키고 부처 합의를 이루어내어 KTDC법에 조건부융자가 들 어가게 되었음. KTDC는 우리나라 Venture Capital의 최초 시도였고 그 운영과정에서 많은 VC인재를 양성하여 우리나라 VC산업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하였음. KTDC는 당시 과기처에서 설립시까지 모든 준비과정을 완료하고 그 운영을 산업계에 이관하여 일체의 정부 간섭을 하지 않는 모범적인 사례였으며, 김창 달 사장은 KTDC 설립 후 경영전문 사장으로 영입되어 KTDC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공이 크다. 제2절 주요 관계인사들의 회고 당시 참여 주요 인사들이 증언하는 워크숍 개최 (증언자들의 워크숍, , 과우회 회의실)
280 1. 우리나라 벤처캐피탈 1호 K-TAC 설립과 성공적 운영 과정 (윤여경 박사 회고) 1.1 경영학 전문가로 KIST에 입소 제가 1956년에 미국에 유학을 떠난 후, 12년만인 1968년에 KIST로 돌아 온 경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미국 Purdue대학에서 Industrial Economics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1962년에 Chicago근교에 소재한 미국회 사의 Economic Research Department에서 Economic Analyst로 첫 직장생 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다행히 주어진 일이 재미있어서 열심히 일을 했고 또 재 수가 좋아 윗사람들의 눈에 띄었었는지 4년 만에 Manager로 특진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 영원히 정착할 준비를 시작하면서 한국에 계신 어머님도 모셔오고 재산도 정리할 겸해서 한 달간 특별휴가를 받아가지고 1966년 여름 에 한국에 나왔습니다.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고국의 발전하고 변 화한 상황에 매우 감명을 받았고 그때에 한국에 나와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에서 Purdue동문인 양재현박사님을 만났는데 양박 사가 지금 한국에서는 KIST라는 아주 특수한 연구기관이 생기는데 나 보고 함께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하면서 Dr. Hornig이 작성한 KIST설립보고서를 주면서 잘 읽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한국에 진출하는 미국회사들을 대상으로 직장을 찾 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 박사님이 KIST의 Job Application Form을 보내면서 모든 것을 기재한 후 이력서와 함께 보내라는 연락을 하셨 습니다. 나는 KIST도 한국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양 박사님께 회신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이미 여러 미국회사와 Interview를 한 결과 3곳에서 나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당시 미국 내에서 굴지의 전자 회사 중의 한 회사가 한국에서 IC조립공장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공장의 General Manager자리를 제안 받고 나도 이쪽으로 갈 마음이 거의 정해진 상 태였습니다. 그런데 1968년 9월에 KIST에서 취직이 되었다는 통보와 함께 Columbus, Ohio에 있는 Battelle Memorial Institute에서 KIST가 주최하는 Seminar가
281 있는데 모든 비용을 KIST가 부담하니 꼭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그때 재미 과학자 중에서 KIST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초청을 받은 것 이었습니다. 1.2 고 최형섭 당시 KIST 소장과의 만남 나는 처음으로 최형섭 당시 KIST 소장님을 뵙게 되었고 그때 최형섭 소장님 이 한국재미과학자들을 모아 놓고 하신 말씀이 만약 여러분들 중에 일생의 목표가 Nobel상을 받는 것이라면 당분간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십시 오. GNP per Capita가 $100 겨우 넘고 있는 한국에서 그러한 훌륭한 목표를 갖고 연구하기에는 모든 여건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기에 남아서 연 구하시는 편이 훨씬 목표달성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국위선양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현재 KIST에서는 첨단연구를 할 만한 여유가 없으며 그러한 사치를 즐길 수 도 없을 것입니다. 일인당 GNP가 $100도 못되는 나라에서 지금 당장 KIST가 할 일은 정부,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 다. KIST는 산업계와 정부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합리적으로 도입하는 데에서 부터 출발하여 도입된 기술의 소화개량을 해야 하고 나아가서 자체기술 개발 을 해야 하기 때문에 KIST가 원하는 사람은 현장경험이 많은 연구원이나 Engineer들입니다. KIST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고 산업계 와 정부가 원하는 연구와 개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GNP per Capita $1,000, $5,000시대로 하루라도 빨리 진입할 수 있는 노력 의 밑거름이 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에 동의하신 분들은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십시오. 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최 박사님은 설명하고 나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나는 손을 들어 질문했습니다. 소장님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이 대게가 엔지니어나 과학자인데 나는 경영학을 한 사람입니다. 내가 KIST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 입니까? 이름도 과학기술연구소인데 나하고 무슨 상관 입니까? 그랬더니 최 박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당신에 관해선 우리가 특별 히 관심을 갖고 조사를 했어요. 지금 KIST가 필요한 것은 연구도 필요하지만
282 연구하기 전에 그 연구 결과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칠 영향이나 기업화 가능성 등을 연구하는 사업타당성 연구(feasibility study)또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산 업발전계획을 수립하는 전문가가 필요해요. 그런데 당신은 그동안에 Feasibility Study의 경험을 많이 쌓았으니 우리가 꼭 필요한 분입니다. 그날 의 최형섭 소장님의 말씀에 감동된 나는 Clumbus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을 바꾸어 KIST로 갈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결심은 옳은 결 심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3 KIST의 특색은 계약연구제 채택과 유치 과학자 위주의 연구체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특색으로는 설립당시부터 계약연구소로 출발 했습니다. 1인당 GNP가 100달러도 안 되는 소득 수준의 개발도상국에서 선 진국형인 계약연구소 운영방식으로 출범했다는 것이 한 가지 특색이고, 그다 음에 주요 간부들을 외국에서 유치했다는 것으로 소위 말하는 본국소환 (Repatriation)이 상당히 관심거리였습니다. 그 당시 개발도상국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역 두뇌유출(Counter Brain-Drain)을 성공시켰다고 하여 UN기구, 외 국 학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KIST가 계약연구라는 운영방식을 택 한 이유로서는 첫째는 연구자들이 스폰서가 없는 연구는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시장에서 요구하는 연구를 할 수밖에 없는 제도를 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아탑에 앉아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나라에 필요한 기술을 하나하나 발굴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실수요자와의 계약연 구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차피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 지원을 운영비로 받아서는 자율성이 없어지니까 어디까지나 돈을 주는 쪽에서도 연구 비로 줘야지 그 연구비를 어떻게 쓰는가는 관여하질 않고 단지 그 연구결과에 대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관리하는 체제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계약연구 제도 를 택했습니다. 1.4 리켄 콘체른과 BDC를 벤치마킹 그러나 초창기에부터 최소장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은 연구소의 생명은 연구 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며 연구소가 연구수행에 있어서 외부의 간섭을 받 지 않으려면 연구소는 경제적인 자립이 필요하고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서는
283 기술을 기업화하는 쪽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예로 서 20세기 초반 일본의 이화학연구소가 운영하던 [리껜 콘체른]과 미국의 Battelle Memorial Institute가 운영하던 Battelle Development Corporation 에 관한 자료를 나에게 주시며 연구를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리껜 콘체른]은 이화학연구소의 연구결과를 기업화하기 위해 많은 회사를 거느리고 성공적으로 운영 했던 조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일 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조직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2차 세계대 전이 끝나자마자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에 진출해서 일본의 재벌을 해체 할 때 제일 먼저 해체대상에 올랐던 기업이 미츠비시도 미츠이도 아니고 [리껜 콘체 른]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이 조직이 당시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력을 짐작할 수가 있으며 또한 이러한 막강한 경제적 뒷받침이 당시 이화학연구소 를 세계적인 연구소로 만들었었을 것이라는 것을 감히 짐작 할 수가 있습니다. Battelle Development Corporation(BDC)는 Battelle Memorial Institute 가 소유하고 있는 신기술을 기업화하는 전문회사였습니다. 이 BDC가 유명해 진 것은 1930년대에 Chaster Carlson이라는 미국사람이 건식 복사기술을 발 명했는데 BDC가 이기술을 발굴해가지고 기업화 시켰는데 이 기술이 1960년 중반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Xerox Corporation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KIST가 설립된 무렵인 1968년경에는 BDC가 소유했던 Xerox Corporation의 주식의 가치가 $1억 넘었었습니다. 따라서 Battelle Memorial Institute는 당 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연구소였고 KIST는 설립당시 이연구소를 Model 로 삼았습니다. 저는 원래 경제분석실을 담당했기 때문에 연구결과의 기업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리껜 콘체른]과 [BDC]와 같은 Model이 궁극적으로 KIST 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5 KIST에 대한 경제분석 KIST는 1966년에 설립되어 1973년까지 8년간 정부에서 출연연구비를 계 속 받았는데 그 누적 총액이 약 70억 원에 달했습니다. 그중에서 약 60% 정도 는 정부의 정책연구를 했고 나머지 약 40%가 기업을 선도할 수 있는 연구와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그 중에서 약 17억 원 상당의 연구과제는 기업화를 목
284 표로 했으나 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경제분석실의 분석 결과 였습니다. 이는 약 17억 원 상당의 재산이 사장되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화부진의 이유로서는 주로 잠재시장이 크고 유망한 기술 은 이미 대기업에서 가져갔고, 남은 17억 상당의 기술은 대개 잠재시장의 규 모로 보아 중소기업형 기술로서 대기업에서는 관심이 없는 기술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중소기업들은 국내기술로 돈을 번다는 것은 상상 도 못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얻은 결론은 신기술을 기업화하는 전 담기구 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6 함태용 장기신용은행 전무의 조언 신기술의 기업화 전담기구의 필요성은 인정이 되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기구 의 구체적인 성격, 조직, 소요예산 등을 고려하여 설립타당성을 검토해야 했습 니다. 이때 한태용 당시 장기신용은행 전무의 많은 조언을 받았습니다. 그와 의논하는 과정에서 함태용 전무는 전담기구 가 어떤 형태가 되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 하나는 필요한 자본금의 규모와 그것의 확보 방법이고, 두 번째는 그 기관을 KIST안에 둘 것인가 아니 면 독립기관으로 할 것인가의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차례 함 전무와 만나 서 의논한 결과 자본금은 약 2억 원 정도가 필요하며 그 기관을 KIST 안에 두 면 연구업무와는 매우 다른 성격이기 때문에 혼선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까 완전히 독립기구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전제 하에서 타당성 검토를 했습니 다. 1.7 K-TAC의 설립 추진 나는 이러한 모든 사항을 감안하여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orea Technology Advancement Corporation, K-TAC)의 설립계획 안을 만들어 KIST소장의 결재를 얻은 후, 당시 과학기술처 최형섭장관님께 Briefing을 해 드렸었습니다. 최형섭장관님은 매우 흡족해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KIST이사 회의 이사장이신 임석춘 당시 산업은행장님께 전화를 걸고 나를 소개 하시면 서 K-TAC설립 안을 검토해볼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임석춘 이사장님도 K-TAC설립 안에 대한 Briefing을 들어보시고 적극지원 할 것을 약속해 주셨
285 습니다. 1973년 초, KIST 이사회에 K-TAC설립 안을 상정하고 내가 KIST이사회에 서 Briefing을 하였습니다. 저는 KIST에서 2억 원을 투자해서 K-TAC을 독립 된 주식회사로 설립하고, 이 회사의 주 업무는 KIST에서 개발한 기술의 기업 화를 어떻게 추진하겠다는 내용과 성공적인 기업화추진은 결국 10년 내에 KIST의 경제적 자립에 일역을 맡을 것이라는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1.8 예기치 않은 이사회의 거부감 그러나 거기 참석했던 대부분의 이사회님들은 K-TAC설립의 취지는 좋으나 K-TAC과 같은 기업의 형태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기업을 운영해본 경험자도 없으므로 아무도 성공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에 서 2억 원이나 투자하여 그런 기업을 설립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 를 하였습니다. 결국 KIST이사회에서 K-TAC설립안이 부결될 위기에 놓였었 을 때 이석춘 이사장님이 부결 대신 보류 를 주장해 주셔서 보류가 되었습 니다. 그 후 K-TAC 설립 안건은 그 다음 이사회에 상정되었으나 또 한번 보류 조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끈질기게 또 다음 이사회에 이 안건을 상정해 서 결국 만족스럽지 않은 조건이지만 이사회에서 K-TAC설립 안에 대한 승인 을 얻어냈습니다. KIST는 자본금 2억원이 아니고 2,000만원으로 K-TAC을 설립해도 좋다는 결의였다. 1.9 자본금 2천 만 원과 기술 현물출자 조건으로 이사회 통과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한 가지 조건을 이사회에서 승인해 줄 것을 제안을 했습니다. 즉 K-TAC의 설립목적이 KIST에서 개발한 기술을 기업화 하는 것 이 때문에 KIST가 소유한 기술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K-TAC에 현물출자 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KIST 소장에게 위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까 지는 KIST 기술을 어느 제3자에게 이양하려면 KIST는 소유재산의 양도니까 이사회의 결의를 거처야 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사님들은 설마 그까짓 기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해서 그랬는지 아 그거야 얼마든지 가 져가시오, 지금 다 가져가시오! 라고 농담을 하면서 그 조건부로 K-TAC설립
286 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KIST소장 재량권으로 KIST에서 가지고 있 는 기술을 K-TAC에 현물출자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K-TAC의 출범과 초창기 애로 극복 K-TAC은 1974년 9월 9일에 자본금 2,000만원으로 KIST내에 독립된 주식 회사로 설립되었습니다. 내가 사장으로 임명 됐습니다. 여직원 한명과 KIST 경제분석실에서 차출한 직원 한명 그리고 나까지 합해서 K-TAC 직원이 셋인 데 나는 KIST의 공업경제부장을 겸직 하면서 봉급은 KIST에서 받았었습니다. K-TAC의 첫 사업은 KIST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체계적으로 Review해서 기 업화가 가능한 기술들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기 위한 Project로 4,000만원 연구 비를 KIST에서 받았습니다. 이 4,000만원이 K-TAC의 첫 수입이 된 것이었 습니다. K-TAC이 기업화를 제일 먼저 착수하기로 결정한 Project는 Freon Gas제조기술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의 기업화 시도는 프레온 가스 Freon은 형석이라는 광석에서 무수불화수소(AHF)를 만들어 거기서부터 Freon Gas를 만드는 것입니다. Freon Gas는 무색, 무취의 인체에 안전한 Gas로서 당시 우리주변에서 분무제의 원료로 상용되었을 뿐만 아니고 Air Conditioner의 냉매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화학합성원료로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제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매우 질이 좋은 형석이 나는데 그것을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에서 그것으로 만든 Freon Gas를 수입해오고 있 었어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는 Freon Gas를 연간 1,500톤 정도를 수입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돌멩이를 팔고 가스를 수입해다 쓰는 형편이 었어요. Freon Gas는 미국 Du Pont사에서 개발한 제품으로 이미 그 특허기간은 종 료되었지만 Freon Gas 생산을 하려면 Turn-Key Plant를 통한 기술도입 외 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은퇴하신 재미 과학자로 박달조 박 사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Du Pont사에서 은퇴하신 분으로 원래 Du Pont 에서 Freon Gas를 개발할 때 참여했던 Original Research Team으로 Freon Gas특허에는 박달조 박사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KIST에서는
287 박달조 박사를 연구실 고문으로 모셔 와서 Freon Gas제조기술개발을 추진했 으며 Pilot Plant Test까지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이 구 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K-TAC은 Freon Gas제조기술을 첫 기업화 프로젝트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K-TAC은 당시 국내시장에 약 1200~1300톤의 Freon Gas가 수입되고 있 었으므로 제 1차 공장규모를 년산 2000톤으로 잡아가지고 투자계획을 세워 보니까 시설비가 너무 많이 소요되어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기술에서는 결함을 찾을 수 없었으나 시장이 경제규모에 미달하고 그렇다고 해서 시설규모를 늘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해결방법은 시설투자비를 줄이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억5천만원 받은 최초의 KIST 기술이전 성공 그래서 K-TAC은 신설 Freon Gas제조공장의 개념을 바꾸어 유휴시설의 활 용방안에 초점을 맞추어 현재 가동이 중단된 기존 화학공장을 이용하여 시설 투자를 대폭 줄이는 전략으로 바꾸었습니다. 75년 당시에는 무분별하게 도입 된 기술로 건설된 공장 중에 운영불실로 부도난 화학공장들이 상당 수 있었습 니다. K-TAC은 전국을 누비면서 부도난 화학공장 중에서 우리 규모에 맞을 만 한 것을 찾아 뒤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울산에 한국알루미늄공장이 있었 는데 이 알루미늄 공장의 일부 시설로서 폐쇄되어 놀고 있는 AHF 공정을 발 견했습니다. 한국알루미늄은 경영불실로 부도가 나서 산업은행의 관리기업으 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AHF 공장을 좀 싸게 인수해서 그 공장에 추가로 AHF로부터 Freon Gas 제조시설만 추가할 목적으로 나는 산업은행에 가서 김원기 당시 총재를 만나서 AHF공장을 K-TAC에 싸게 매각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랬더니 김원기 총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거꾸로 나 보고 그러지 말고 너희 기술을 산업은행에 팔면 어떻겠느냐? 라는 역 제안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업은행에 Freon Gas 제조기술을 팔기로 결정했으며 그것이 KIST의 기술이 처음 기업에 팔린 기술이전 1호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울산화학이 바로 그 공장입니다. 그래서 K-TAC은 1억5천만 원을 받고 기술을 팔았으니까 처음의 2천만 원 자본금이 1억 7천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K-TAC은 우리는 KIST
288 에서 독립해 나와서 안국동에 사무실을 잡고 조그맣게 다시 시작 했습니다 다이아지논 중간원료 HOP 기술을 현물출자 하는데 성공 그다음에 두 번째 Project는 다이아지논(Diaginon)이라는 살충제가 있는데 그 농약의 중간원료인 HOP(Hydroxyl Pyrimidine)를 수입대체할 목적으로 채 영복 박사가 개발한 기술입니다. K-TAC은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시장이 불확실하면 기업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은 시장 상황을 조사했습니다. 전체 다이아지논시장의 약 60%를 한국농약이 장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K-TAC은 한국농약에게 HOP제조기술을 1억5천만 원에 사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농약에서는 한국농약은 다이아지논 시장은 장악하고 있지만 원료를 합성하고 제조하는 기술은 없다. 그러니 HOP제조회사를 K-TAC과 한국농약이 joint venture로 독립된 회사를 하나 만들자. K-TAC은 기술을 현물출자하고 나머지 자본금은 한국농약이 현금으로 출자하는 것이다 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HOP제조기술을 기업화하는 수단으로 K-TAC 은 처음으로 자본참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K-TAC은 30%의 한정 화학 지분을 확보하게 되었고 한정화학은 후일에 기업이 공개되어서 지금 증 권거래소에 등록되어 있으며 한국농약이 동부그룹에 흡수되는 바람에 지금은 동부한정화학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K-TAC은 자본금이 1억5천만원이 증가하는 바람에 3억2천만원회사가 되고 한정화학의 30%지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농약은 한정화학의 경영을 완전히 K-TAC이 주관할 것과 대표이사 사장은 나보고 겸직하라는 조 건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한정화학의 사장까지 겸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봉급은 KIST에서만 받았는데 그래서 제가 한때는 K-TAC관련기업 5개회사 사장을 실속도 없이 겸직하는 한심한 짓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성도 박사의 내화갑 기술로 기술+현금투자 방식으로 남해화학 설립 세 번째 기업화 Project는 또 다른 특색이 있었는데 장성도 박사가 개발한 내화갑(Refractory Saga) 제조기술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내화갑에
289 대한 시장조사를 먼저해보니까 주로 수입대체효과가 높으며 주 고객들은 타일 공장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타일공장들이 공동으로 투자해서 내화갑공장 을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해 보았으나 의견만 많이 나왔으나 실현가능성이 희 박했습니다. 결국은 몇몇 개인투자가들이 출자해서 새로운 회사로서 남해요업 을 설립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한정화학 경우에서 배 운 대로 기술을 현물출자로 1억5천만 원에 투자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개인 투자가들이 하는 말은 1억5천만 원 상당 현물출자 만으로는 안 된다. 남해요업을 설립해서 망하면 우리는 돈을 다 날리는데 KTAC은 남해 요업이 망한다고 해서 기술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별로 잃는 게 없지 않느 냐. 기술을 도로 가져 가버리면 우리만 망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조금이라 도 좋으니 현금을 내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술을 파는 수 단으로써 기술에 5000만원의 현금을 합해서 2억을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그 래서 경남 밀양에 남해요업이라는 회사가 설립된 것입니다. 남해요업은 그 후 기업화에 성공해서 한동안 경영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기업공개 압 력을 받고 주주들은 도망 다닐 정도로 한때 회사 경영이 좋았습니다 K-TAC은 내가 경영한 기간 동안은 성공한 회사 나는 K-TAC을 통해 7년 동안 82년에 회사를 그만두기까지 7개 회사를 통 해 신기술을 기업화했으며 지금도 5개 회사는 존속하고 있고 나머지2개 회사 는 다른 회사에 흡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2,000만원의 납입자본금 이 7억을 넘는 납입자본금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한국의 여건으로 보아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K-TAC이 신기술기업화에 성공사례가 늘기 시작한 70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K-TAC이 UN기구, IFC 및 ADB의 관심을 끌게 되어 이들 기관을 통해 K-TAC의 활동상황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여 많은 학자 및 전문 가들이 K-TAC을 찾아 왔으며 신기술의 기업화 문제 관련 국제 Seminar에는 항상 초청강사로 나는 초빙되었습니다. 특히 OECD Paris 본부에서 열린 Seminar와 미국상원에서 Ted Kennedy 상원의원이 주최한 Seminar에 초청 을 받았던 것이 단적으로 얼마나 [개발도상국에서도 신기술의 기업화가 가능 하며, 창업에서 출발하여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라는 사레를 만들고 있
290 었던 K-TAC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었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 준 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Venture Capital이나 Venture Business에 80년 초반에 생긴 자신감이 K-TAC의 성공 적인 운영에서 출발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운전자금 확보가 K-TAC 운영의 최대 난제 그러나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이와 같은 표면상의 화려한 K-TAC 활동의 이 면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운전자금상 문제의 심각성은 지금생각만 해도 악몽과 같습니다. 현금 2천만 원으로 신기술기업화 전문회사를 차린다는 것부터 무리한 출발 이었습니다. K-TAC의 첫 Project가 Freon Gas제조기술 의 판매로 1억5천만 원의 수입이 있어 당분간 숨통이 티는 듯하였으나, 그 후 의 Project들은 모두 현물출자가 되다보니 K-TAC의 단기적인 운전자금 문제 는 항상 심각하였습니다. 다행히 내가 K-TAC대표이사를 하면서 계속해서 KIST 경제분석실 실장, 공 업경제부 부장, 그리고 기획관리위원회 부 위원장(부소장)을 역임하고 있었으 며 당시 나는 KIST입장에서 정부용역 Project를 많이 따올 수 있는 입장이었 으므로, KIST이름으로 Project를 따서 K-TAC은 KIST로부터 일부 하청 받는 형식을 통해 K-TAC의 운영비의 대부분을 해결하곤 하였습니다. 사우디아라 비아의 SANCST(Saudi Arabia National Center for Science & Technology)로부터 신기술기업화의 Know-how 이전 Project로 K-TAC이 $80만 용역을 딴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우디 와의 용역 계약으로 연명 1977년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KIST공업경제부장 시절, Jordan의 Crown Prince가 주최한 Seminar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내 옆자리에 Dr. Obaid라는 Saudi Arabia출신 교수가 있었는데, Seminar 2일째 되던 날, 싱글 벙글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 자기가 Saudi Arabia에 새로 생기는 연구소 인 SANCST의 소장으로 임명이 되었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KIST가 설립되는 당시 KIST는 Battelle Memorial Institute로부 터 연구소 Managemnet Know-how를 배워서 오늘날의 KIST가 되었다는 이
291 야기를 시작으로, 밤낮으로 Dr. Obaid와 만나서 연구소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 덕에 KIST소장은 SANCST의 당연직 이사가 되고 계속해서 KIST는 SANCST로부터 공동연구과제 Projects를 많이 받아서 수행하고 있었을 때였 습니다. 그 때 나는 부소장으로 승격하고 SANCST Project진행 상황을 확인 하기 위하여 자주 Saudi에 출장을 갈 때였습니다. 하루는 Dr. Obaid와 저녁식 사를 하다가 K-TAC에 대해서 야기를 해주었더니 당장 신기술기업화의 Kow-how를 전수하는 용역계약을 하자고 했습니다. $80만 용역계약의 제안 을 받고 나도 처음에는 놀랐으나 Dr. Obaid는 그동안 내가 SANCST를 도와준 고마움의 표시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나서 나는 가슴이 뿌듯했었습니 다. 운전자금 없이 하루하루 용역수입으로 회사를 꾸려나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받을 잔금이 들어오기 전에 직원들의 봉급날이 다가올 때가 그 러한 경우지요. 할 수없이 나는 우리집 문서를 담보로 은행에서 단기융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잔금이 예정대로 들어오고 융자금은 상환되고 모든 것이 Happy Ending으로 끝난 줄 알고 있었을 때 이었습니다 과기처의 엉뚱한 감사결과는 지금도 가슴 아파 어느 날 갑자기 K-TAC이 MOST로부터 업무감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K-TAC이 생긴 이래 처음 있었던 일이기는 하지만 K-TAC은 별문제가 없을 것이고 만약 있다면 외부로부터 지적을 받게 되어 개선하면 그 만큼 K-TAC 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업무감사 마지막 날 MOST에서 파견되어 나온 감사원은 K-TAC업 무상의 모순이나 부조리는 지적할 것이 하나도 없지만, 단한가지 저적사항은 [회사금고에 사장의 집문서가 들어 있으니 이는 대표이사 사장이 회사금고를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라는 것 이였습니다. K-TAC총무부장은 증빙서류 를 제시하면서 사장이 직원들의 봉급을 주기위해 은행에서 자기집을 담보로 단기차입을 하였었고 3일전에 차입금을 상환하고 집문서를 회수하여 일시 보 관하고 있었는데 업무감사를 받느라고 깜박 잊고 사장에게 집문서를 돌려주지 못한 것이라는 설명을 했으나 MOST 감사관은 막 무가내로 나보고 시말서를
292 쓰라고 해서 시말서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씁쓸한 추억이었습니다 보다 진취적 주변 여건이 필요했던 아쉬움 때문에 남기고 싶은 말 현재는 이름도 없이 사라진 K-TAC을 생각하면서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났었 더라면...하면서 못내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K-TAC설립당시 KIST이사회가 내가 원했던 대로 납입자본금 2천 만 원이 아니고 2억원을 승인해서 K-TAC이 시작 했었더라면... K-TAC이 Freon Gas 제조기술, HOP제조기술, 내화갑제조기술, 등 KIST의 기술을 기업화시킨 성공사례가 나왔을 때, KIST경영진이 K-TAC의 실적을 바탕으로 다시 K-TAC의 증자안건을 이사회에 상정했더라면... K-TAC의 운영자금부족을 메워주기 위해 장기신용은행에서 K-TAC 에 투자제안을 했을 때, MOST에서 반대를 하지 않았었더라면... IFC에서 $100만 이상 K-TAC에 투자하겠다고 해서 K-TAC이 외자도 입신청을 했을 재무부가 원안대로 빨리 승인을 해 주었더라면... 재무부에서 Inflation위험(?)이 있다고 외자도입 승인을 질질 끌다가 결국은 $60만으로 축소해서 승인한 IFC의 K-TAC에 대한 증자 금 이 완전히 K-TAC구좌에 입금되기 전에 IFC의 사전승인 없이 계약 변경(대표이사 변경)을 강행한 KIST경영진의 결정 때문에 $60만 투자가 취소되지 않았더라면... 위와 같은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었더라면 내 후임 K-TAC대표이사 사장은 운전자금의 압박을 받지 않았었을 것이고, 운전자금 조달의 수단으로 KTAC 자체의 공장을 소유하지 않았을 것이며 결국은 K_TAC은 자체공장운영에서 마케팅 실패로 회사가 빚더미에 앉게 되어 기술신용보증기금의 방계회사로 전 락하면서 K-TAC이라는 이름이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건재하여 KIST의 경 제적 자립에 보탬이 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납니다 K-TAC은 과연 벤처캐피탈 이었던가 우리나라 벤처캐피탈 역사상 최초에 설립된 Venture Capital 회사를
293 K-TAC이라고들 하고 또 최초의 Venture Capital회사의 설립자로 내 이름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K-TAC이 Venture Capital 회사였는가에 대 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Venture Capital의 정의를 Webster Internationlal English Dictionary, 대사전(unabridged)에서 찾아보면 "Money invested or available for investment in stocks, especially stocks of newer and unseasoned enterprise" 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성 숙 된 기업에 대한 자본투자가 벤처캐피탈의 정의입니다. 이 기준 하에서 K-TAC를 분석해 보면 우선 K-TAC이 원래 목적은 기술을 파는 것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투자를 했던 것입니다. 돈은 아니지만 기술 을 자본형태로 투자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걸 투자해서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 기 때문에 newer and unseasoned"라는 개념에 합당하다고 생각되지만 막상 Venture Capital 회사의 운영방식을 보면 소위 limited partnership" 그러니 까 우리말로 투자조합 을 조성해서 그 돈을 가지고 투자를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연 K-TAC이 Venture Capital회사인가라는 의문도 나옵니다 K-TAC 이직 후 KDIC 설립으로 투자조합 방식의 자금조달 법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 한편 제가 82년 9월에 임기만료로 K-TAC을 그만 두고 나니까 장기신용은 행의 한태용행장이 나에게 지금 서울소재 7개단자회사들이 모여서 Venture Capital 회사설립을 생각하고 있는데 전혀 방향도 잡지 못하고 있으니 당신이 참여할 생각이 없습니까? 만약 당신이 여기에 참여한다면 IFC(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World Bank 산하 투자기관)도 투자할 것이요 라고 했 습니다. 나는 기꺼이 이 Project에 참여하였었고 1982년 12월에 KDIC를 설 립하였습니다. 그 후 IFC가 주주로서 참여함을 계기로 곧 바로 ADB에서도 투자를 했고, 그 후 Rockefeller Company Inc., DEG, JAFCO, NIF 등 쟁쟁한 국제적인 7개 투자기관들이 KDIC의 주주로서 $100만 씩 투자를 했습니다. 특히 IFC는 KDIC를 통해 Venture Capital Company의 개념을 한국에 소개한 것입니다. KDIC가 추가로 투자자금을 조달할 때 IFC는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 Venture Capital 회사들과 같이 Limited Partnership 결성을 통해서 자금을
294 조달할 것을 추천하면서 Limited Partnership의 모든 것을 나에게 상세히 가 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상법에서는 Limited Partnership이란 제도를 인정하 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재무부에서도 외환관리법을 인용하면서 Partnership 에 투자하는 자금유치에는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KDIC는 일본 JFCO의 경험을 참고로 Limited Partnership대신 투자조합이라는 새로운 자금조달방법으로 투자유치를 하므로 서 [투자조합]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 하게 된 것입니다. General Partner를 집행조합원, Performance Bonus를 성 공보수 등 투자조합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는 KDIC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 입니다 창업투자회사 시대 개막의 밀알이 된 K-TAC 결국 지금 돌이켜 보면 1974년부터 1982년 까지 내가 K-TAC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었고, IFC가 K-TAC을 잘 알고 있었기에 IFC가 KDIC에 투자해줬고 KDIC가 탄생함으로써 우리나라에 Venture Capital 회사가 처음으로 생겼습 니다. 그러니까 K-TAC의 Track Record가 결국은 KDIC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984년에는 한국기술금융주식회사(KTDC)가 KDIC를 Model로 해서 출범했고, 1986년에는 KDIC 와 KTDC의 성공을 목격한 상공 부가 중소기업 창업지원 법 을 만들어 창업투자회사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와 같이 70년대의 K-TAC의 활동이 직접, 간접적으로 기술금융에 미친 영향은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70년대에 K-TAC을 되돌아보니 많 은 추억이 떠오릅니다. 기뻤던 추억, 실망했던 추억... 그러나 이 모든 추억이 나에게는 보람이 있었던 추억이며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특히 이 러한 추억 속에는 K-TAC의 역할과 업무추진능력을 인정하시고 끝까지 지원 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나에게 신기술 기 업화의 필요성을 깨우쳐 주시고 끝까지 K-TAC을 지원해 주셨던 고 최형섭장 관님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납니다. 또 KIST 이사회에서 여러 번 부결될 뻔한 K-TAC설립 안을 끝까지 밀어붙여 통과시켜주신 고 임석춘 이사장님도 생각 이 나며, 지금도 가끔 만나고 있는 함태용 당시 장기신용은행장의 신세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295 제3절 KTDC 및 KTB 설립 운영과 우리나라 벤처캐피탈 산업 기반 확립 1. KTDC 및 KTB와 벤처캐피탈 개척 (김창달 초기 사장 회고) 1.1 IBRD 지원으로 KTDC 설립 타당성 연구 1970년대 말 우리나라 경제는 정부와 민간의 수출주도 성장전략에 의해 급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가격경쟁력에 힘입은 것이지 품질경쟁력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싼 노 동력에 의존한 수출전략에서 벗어나 기술개발에 의한 고부가가치의 창출이 필 요하다, 또 이를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기구가 있어야 되겠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IBRD의 도움으로 정부주도의 기술개발지원에 대한 타당성연구(feasibility study)를 경제계와 정부가 협력하여 하게 되었는데, 당시 타당성연구 수행책임자는 MIT 대학 Center for Policy Alternative의 라오 박사였습니다. 라오 박사의 보고서 등 을 참고하여 KTDC(Korea Technology Development Corporation) 설립에 대한 논의가 1978~79년경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에는 설립준비 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는 설립기본방향에 있어 벤처캐피 탈 회사 설립이라고 명확히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고, 기술개발 하는 기업이 원하는 방식으로 지원한다는 대원칙만 정하고 설립준비를 시작 했습니다. 1.2 초창기 외국 전문가의 자문 저는 초창기 설립준비 때부터 참여 했는데, 설립준비를 지원하기 위해서 IBRD와 MIT에서 전문가 두 분을 추천해서 우리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이스라엘 출신의 야곱 박사였는데 연세가 든 경험이 많은 분이었습니 다. 그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벤처캐피탈을 운영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특히 이 스라엘에서 개발한 기술을 미국에서 기업화 한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한국에 도움이 될 경험을 갖고 있었고 약 5개월 동안 우리 설립준비팀과 같이 일 하면서 자문을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KTDC의 발족에
296 필요한 규정작성 및 운영방식 등을 자문해 주었는데 예를 들면 조건부융자에 관한 아이디어는 이때 토론을 거쳐 탄생된 것입니다. KTDC가 벤처캐피탈이라는 것을 미리 정해두면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왜 냐 하면 그 당시에는 한국기업은 외부투자를 받아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자본에 대한 보호 습성이 발현되기 마련이고, 그러한 기업을 대상으로 투 자받기를 권하면 거의 전부 거절 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술개발 하는 기업 이 원 하는 방식으로 투자든 융자든 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래식 금융기관에서 담보만 잡고 융자하는 것보다는 좀 다른 방식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기술을 평가하여 담보로 한다든지, 조건부융자라고 해서 소위 성 공하는 경우에는 매출액대비 일정비율의 로열티를 받고 실패하는 경우에는 감 면해주는 방식 등 을 다양하게 개발해야 한다. 이를 포함한 외국인 전문가 그룹의 컨설팅 의견을 다양한 검토를 거쳐 KTDC 업무 매뉴얼에 최대한 반영 했습니다. 1.3 회사명을 기술개발주식회사로 하여 발족한 사유 1980년도에 설립준비가 끝나서 1981년 4월에 정식으로 KTDC가 발족을 하 게 되었습니다. 발족이전에 회사명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그 당시 과학 기술처의 의견은 KTDC가 기술개발금융 을 하지만 기본 설립목적이 기업의 기술개발을 지원하는데 있으므로 회사명을 기술개발금융 이 아닌 기술개발 주식회사 로 해서 발족을 하자고 했습니다. 설립준비 위원회 의견도 기술개발 금융이 주 업무엔 틀림없지만 기업기술개발 성공을 위해서는 단순한 금융 뿐 아니라 기술소스의 알선, 시장, 경영정보의 제공 등 기술개발기업의 성공을 위 한 모든 가능한 지원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금융 을 빼는 것도 좋겠다는 의 견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기술개발주식회사 라는 이름으로 과기처가 주관 부서가 되어 특별법에 의한 KTDC가 발족 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단독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회사는 한국전력과 KTDC 2개뿐이었습니다. 1.4 초창기의 애로 KTDC 초창기에는 사회적으로 기술금융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재래식 금융에 대한 개념 외에는 벤처캐피탈 등
297 새로운 개념의 금융방식에 대한 이해가 전혀 안 되어있을 때라 국회나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그들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상당한 애로를 겪 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창기의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지요. 정보통신부의 정보화특별자금이 처음 으로 금융기관에 배정 될 때의 일입니다. KTDC는 당시 설립된 지는 얼마 되 지 않았지만 기업의 기술개발자금지원이 주 업무였기 때문에 정보화특별자금 은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정보통신부에는 KTDC 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아서 정보통신부는 산업은행, 국민은행, 장기신 용은행등 3개 은행만 선정하고 KTDC는 탈락시켰습니다. 저는 바로 정보통신 부 차관을 만나 KTDC를 취급기관에 포함되어야 할 당위성에 대해 설명을 했 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보통신부 차관의 반응은 아니 당신네는 기구도 작은 데, 이건 크고 경험 많은 기관에서 취급해야지 어떻게 쪼그마한 기구가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술개발금융의 당위성을 이해 시킨 후 그러면 6개월 후의 취급실적을 보고 나쁘면 2차 배정 때 가차 없이 빼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라고 주장하여 결국 KTDC도 정보화특별자금을 취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 디스켓으로 기업의 호의적 반응 유발 이렇게 배정받은 정보화특별자금의 집행을 위해 직접 발로 뛰어보자고 결정 을 내렸습니다. 1982년경만 해도 인터넷은 일반화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PC 가 있더라도 디스켓사용마저 보편화 되지 않아 기업의 기획실 같은 곳에서만 사용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업이 특별자금 융자를 받기 위한 신청서 작성을 위해서는 관계은행에 서너 번은 뛰어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습 니다. 그런데 KTDC는 각 공단을 돌면서 기업의 기획담당 또는 자금담당 직원 에게 신청서양식이 들어있는 디스켓을 주고 신청방법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일 반적인 경우처럼 몇 번씩 찾아가서 신청하는 대신 디스켓만 한번 집어넣으면 바로 신청서가 작성 된다며 담당자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래 서 기업들은 몰려오기 시작하고 우리가 노력을 경주한 결과 6개월 후에 자금 집행 결과통계를 봤더니 KTDC가 70%, 나머지 산업은행, 장기신용은행, 국민 은행 등이 30% 이었습니다
298 이러한 특별자금을 지원받는 기업들에게는 KTDC가 어떤 기관인가를 설명 하고 기업의 기술개발은 무조건 도와주고 돈이 필요하면 담보 없이 조건부융 자, 투자 등을 받을 수도 있고, 돈 이외에도 기술소스의 알선, 경영 및 시장에 관한 정보 등 기업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 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융자와 투자를 병행 하면서 투자의 유리한 점을 3~4 년 후의 성공사례를 통해서 하나하나 인식을 시켜 나가기 시작 했지요. 이것이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나라 벤처캐피탈의 발전기반이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 고 꾸준히 노력 했습니다. 1.6 성공사례만이 투자조합 결성의 지름길 그런데 필요한 자금을 소위 투자조합(Limited Partnership Fund)의 방식으 로 조달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반투자자는 성공사례가 있어야 만 투자조합에 투자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창기 KTDC는 투자의 성공사례를 만드는데 주력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밖에서 볼 때 너무 보수적이고 깐깐하다 할 정도로 엄격한 사업타당성분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 다. 처음엔 어렵더라도 고비를 넘기고 성공사례를 많이 만들어 내면 그때부터 는 제도적으로 자금도 들어오고 투자자나 기업이나 다 같이 마음을 열 것이며 이러한 성공사례가 쌓이면 정부자금 외에 일반 투자조합의 결성도 가능할 것 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1.7 기업의 기술개발 유도 작전 신기술의 기업화 성공사례를 만드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역점을 두고 추진하 였지만 초창기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기업이 기술개발을 하도록 유도하는 일 이었습니다. 그 당시 기업의 자체 능력으로 기술개발을 시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KIST, 기계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등 국립연구소 와 전국의 공과대학 그리고 개인발명가 등의 협조를 얻어 이들이 개발한 기술 중에서 기업화 가능성이 있는 기술을 KTDC에 모아서 전시하고 기술을 필요 로 하는 기업이 직접 와서 보고 그 기술내용을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했 습니다. 그래서 KTDC 로비에 큰 전시장을 만들어 두고 필요한 기업이 와서 보고 한번 기업화 해 보겠다고 관심을 표시하면 그때부터 자금, 기술개발, 시
299 장개척 등 모든 분야의 지원을 시작 했습니다. 1.8 양산을 위한 생산기술 문제도 해결해 줘야 그러한 방식으로 기업이 기술을 선택해도 기업화까지는 또 하나의 문제를 해 결해야 했는데 그것은 연구소나 대학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응용개발 하는 단계의 생산기술 문제였습니다. 이는 연구소나 대학은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상용화 단계까지의 완벽한 생산기술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한데서 발생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상용화 개발단계의 회색지대 (Gray Area) 로서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후에 생산기술연구원이 설립되었으나 수많은 생산기술문제를 다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실례를 하나 들면 KIST에서 개발한 미강안정화기를 기업화하는 단계에서 발생했던 생산기술 문제의 해결 사례입니다. 쌀겨의 눈을 떼어 내서 쌀을 안정 화하는 기술을 KIST에서 사서 설치를 하고 가동을 시작한 기업은 기계의 심 한 발열로 정상적인 가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KTDC직원들 중에 공과 대학 나온 직원이 기계회사에 근무하는 대학동기들과 함께 그 공장에서 밤을 새우면서 원인을 찾아본 결과 결국 베어링 쪽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문 제를 해결했습니다. 이와 같이 연구소의 기술을 근거로 하여 생산현장에서 대 량생산이 가능한 생산기술로 만들기 위해 KTDC가 전문 인력을 지원하고 자 금도 지원하고 마지막 단계인 마케팅까지 지원하는데도 그 당시의 풍조로는 과감하게 기업화 하겠다고 나오는 중소기업은 많지가 않았습니다. 1.9 기업화 성공 후에도 로열티 문제 발생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기업화에 성공한 후에도 계속해서 문제는 발생 했습니다. 그 사례를 들면 개인발명가들의 기술을 기업화한 경우입니다. 개인 발명가들의 기술은 일반적으로 아주 초기 아이디어 단계의 기술이어서 기업화 까지는 산 넘어 산의 험한 개발과정을 거쳐야 할뿐 아니라 어려운 과정을 거처 기업화에 성공 한다 하더라도 경영관리, 시장개척, 지속적인 연구개발 등 기업 성장을 위한 어려움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KTDC는 개인이 기업화하 기 어렵겠다고 생각되는 품목에 대해서는 개인발명가들에게 기술을 필요로 하 는 기업에 로열티를 받고 넘겨주고 다시 다른 품목개발에 전념 하는 것이 좋지
300 않겠느냐고 설득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으로 상호이익이 되는 방식을 권유하면 준 공기업인 KTDC가 개인기술을 뺏어가서 기업에게 주려고 한다. 고 정부당국에 투서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상대로 다음과 같이 자세한 설득을 해야 했습니다. 당신의 아이디어는 훌륭하다. 그러나 당신은 매출을 일으킬 능력도 기업보다 부족하 고 기업경영도 할 줄 모르니까 그러한 능력을 가진 기업이 기업화해서 이익을 창출하면 당신은 매출액에 비례해서 로열티를 받을 수 있게 되고 당신이 직접 경영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이 받을 수도 있으며 그 돈으로 또 다른 아이템 을 개발하면 좋지 않으냐?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초기에는 정말 어려운 과정들을 거쳤습니다 성공하면 벤처캐피탈 지분 주식을 반환하라고 항의 또 하나의 사례를 들면 어떤 전자분야 기업에 투자를 했는데 그 기업이 빠르 게 성장 하였습니다. 성공을 하니까 이기업의 사장이 저를 찾아와서 심각하게 항의 하는 말이 당신네는 공기관이니까 공금리만 벌면 되지 무엇 때문에 투 자해서 투자수익을 올리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공금리만 쳐줄 테니까 주식을 반환하시지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 했습니다. 그러 면 우리나라에 벤처기업들이 새로이 생겨나고 성장해가는 것은 어렵게 된다. 다른 기업들도 투자를 받아 성장하고 투자한 사람도 같이 이득을 얻어야 또 새 로운 투자를 할 수 있고 자금이 선순환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자금이 선순환 하지 않으면 당신네들에게도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랬더니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그 후로도 관계요로에서 압력이 들어오는데 그 사람과 똑 같 은 논리로 공격해 왔습니다. 공기관에서 폭리를 취하려고 덤벼요? 지금 보기 에는 난센스 같은 논리이지만 초창기에는 이러한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 했습 니다. 우리나라의 벤처캐피탈이 발달하기 위해서 겪어야 할 필요 과정이라고 믿었지요 융자가 아닌 투자에 대한 인식 확산 KTDC는 이러한 여러 가지 경험을 축적 하면서 기업의 기술개발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 했는데 KTDC가 출범하고 약 10년이 지나니까 기업에서는 외부
301 투자받는데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기업에서 자금이 필요할 때 융자만 받을 것이 아니라 투자를 받는 것도 유용한 방법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투자를 받더라도 외부의 벤처캐피탈 같은 기관투자가가 하는 투 자는 기업의 경영에 개입하거나 경영권 간섭의 의도가 없고 기업의 성장을 여 러 면에서 도와주려는 목적으로 투자 한다는 것을 서서히 알기 시작했습니다. KTDC는 투자만을 하는 벤처캐피탈을 설립목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기업이 원 하는 방식의 지원을 하는 과정에서 벤처캐피탈의 기능을 기업에 알렸습니다. 우리나라에 미국식 벤처캐피탈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기업의 인식을 바꾸어주 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한 투자조합 (Limited Partnership Fund)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국 벤처캐피탈의 효시로서 KTDC는 서서히 진정한 벤처캐피탈 형태로 발전하여 도약하는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지요 진정한 벤처캐피탈로 도약하기 위해 KTDC에서 KTB로 변신 하지만 설립 후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KTDC법은 이러한 도약에 제약요 인이 되는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회사채 발행한도가 자본금 과 적립금의 10배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일반 금융기관만 해도 20배까 지 발행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법을 개정하여 20배까지로 확대 하였습니다. 당 시에는 투자조합을 통한 자금조달방식이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금조달은 자본금과 회사채 발행 등 차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런데 법을 개정하는 일 은 매우 힘든 것으로 국회에 가서 6개월 이상 설득하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국회 설득이 가장 어려웠던 일 KTDC가 대기업의 출자가 80%이고, 정부 출자가 20%니까 잘 못 하면 대기 업이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의 소지도 있었습니다. 국회 해당분과 위원회에 법안개정안을 제출 했을 때의 일인데 어떤 의원은 이거 올려봐야 대기업 배불리는 것이에요. 대주주가 대재벌들인데 재벌들 배불리려고 이걸 늘리는 것 아니에요? 라고 막 무가내로 우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 이 끈질기게 반복 설명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KTDC의 설립목적이 대기업 들이 돈을 내어 정부와 함께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을 돕자는 것인데 KTDC가
302 커지면 중소기업이 보다 많은 도움을 받지 어떻게 재벌의 배가 불러집니까? 재벌에 배당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재벌이 자본금을 빼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몇 달씩이나 걸려 설득하려 해도 이해를 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이 었습니다. 그래서 부분 보완개정대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KTDC법을 폐기하고 KTB 법으로 새로 출발 하게 되었습니다. KTB법으로 개편 되면서 기술개발복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KTB의 재원조달에 매우 유리한 수단 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99년에는 KTB법이 폐지되고 KTB는 완전히 민영화 되어 회사명이 KTBnetwork로 변경되고 대형 민간 벤처캐피탈로 탈바꿈 하였 습니다. 지금의 KTBnetwork사는 1,000여개 벤처기업에 1조원이 넘는 자금 을 투자하는 대형투자전문회사로 발전했습니다 KTDC와 KTB는 벤처캐피탈 산업 형성의 주춧돌 이렇게 KTDC는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한국 벤처캐피탈 산업의 형성 및 발전에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양적인 성장 외에도 KTDC가 우리나라 벤처캐피탈 발전에 기여한 것 중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유능한 인력의 배출이라 생각합니다. KTDC는 처음부터 심사역제도를 도입해서 유능한 심사 인력을 엄격히 양성했습니다. 그들은 KTDC가 KTB를 거처 민영화 된 후에 새 로 발족하는 많은 벤처캐피탈 회사에 간부로 진출하여 우리나라 벤처캐피탈 발전의 확고한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중요한 창업투자회사의 CEO들 은 KTB출신들이 많습니다. 한 일간경제신문은 KTB는 벤처캐피탈 사관학교 라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KTDC는 초창기 한국 벤처투자의 환경을 적극적으 로 개척하면서 벤처투자의 성공사례를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나라 벤처캐피탈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유능한 인재의 배출을 통해 오늘 날의 한국 벤처캐피탈 산업에도 큰 자양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큰 자부심 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벤처캐피탈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벤처캐피탈이 제일 발달한 미국에서는 벤처캐피탈 회사 자체는 주식회사가
303 아닌 유한책임회사(LLC)로서 자본금은 거의 없고, 투자조합 (Limited Partnership Fund)형태로 자금을 모집 합니다. 투자자들은 펀드 운영자들의 과거실적, 성실성, 전문성을 평가한 후 투자할 펀드를 골라서 투자하게 됩니 다. 펀드운영자들은 지속적인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투자하 고, 피 투자기업의 성장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하게 되지요.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자본금위주로 출발했고 과거실적을 평가하기에 는 역사가 아직 짧기 때문에 벤처캐피탈에서 펀드를 모집 하는 경우 펀드 운영 자의 실적이나 성실성, 전문성 평가보다는 그 벤처캐피탈회사가 어떤 기업의 자회사인가 관심을 가지는 실정입니다. 가령 A그룹의 자회사나 B그룹의 자회 사라고 하면 상당히 믿고 펀드모집이 쉽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벤처 캐피탈에 대한 기본을 이해 못하는데서 오는 현상이지요. 이제 이러한 현상이 앞으로는 개선되어 갈 것입니다. 정부에서 유한책임회사 (LLC-Limited Liability Company) 형태의 벤처캐피탈 설립을 허가하였기 때 문입니다. 앞으로 상당히 능률적인 미국식 벤처캐피탈 방식으로 바뀌어 나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의 정착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 하더 라도 바로 되는 게 아니고 반드시 시행착오를 통하여 실천해가는 과정이 필요 하고 그 과정에서 기업인들이나, 투자자들이 하나둘씩 이해해 가는 과정을 거 처 정착되어 갈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벤처캐피탈의 초창기에 심각한 시행착오가 있어서 그 결과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산업 의 성장 동력 형성측면에서 보다 큰 불이익이 초래 될 것입니다. 요즈음 막대 한 규모의 유휴 자금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엉뚱한 투기자금으로 변 질되고 있지만 언젠가는 미국처럼 명분도 찾고 돈벌이도 되고 벤처기업도 육 성하는 벤처캐피탈 쪽으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많은 수의 벤처캐피탈 회사가 벤처기업에 투자만 하고 끝나는 일반금 융기관의 역할 수준에 머물러있지만, 앞으로는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 후에 사 후 지도하고 육성하여 코스닥 등록이나 M&A가 되기까지 벤처기업을 키워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304 2. KTDC 근무를 통해 얻은 경험 (하찬호씨 회고) KTDC 설립 준비 당시에는 저는 전경련의 연구원이었고 그 후 KTDC 설립 후에 옮겨서 처음에는 과장 대리로 출발했으며 1999년도에 KTDC 회사법이 폐지되어 민영화되는 마지막까지 19년 여간 재직했으며 심사부장 직책으로 퇴 사했습니다. 저는 주로 환경 및 화학 분야의 프로젝트를 담당 했었습니다. 저 는 KTDC 설립과정에서 실무자로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주)한울테크프로 라 는 기술경영컨설팅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2.1 상품의 기술집약화를 위해 민간연구소 설립 촉진 KTDC 설립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저는 그때 전경련의 연구원으로 있었 는데 전경련에서 그 당시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사항은 어떻게 하면 기술집약 적 상품으로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제고하느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전 경련의 주요 회원사에 속해 있는 45개정도의 연구소들이 일종의 단체를 만든 것이 민간연구소설립추진 위원회였습니다. 그래서 1979년에 제가 전경련에서 그 단체로 파견되었으며 거기에 가서 제일 먼저 시작한 업무가 민간연구소 설 립운영에 관한 애로점 조사를 3개월에 걸쳐 수행했습니다. 그때 과기부에 등록된 민간연구소 45개를 방문하여 담당자를 면담하는 방식 으로 조사를 했는데,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애로점으로 나온 것은 첫째는 연 구인력 확보와 관련된 우수한 젊은 인재의 유인책으로서 젊은 연구원들의 병 역감면 문제 그리고 두 번째는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대부분 수입되고 있던 연구용 기자재의 관세감면 문제 그리고 세 번째가 기술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금융지원 문제였습니다. 2.2기술금융 자금은 IBRD 차관과 민간 자금 조성으로 해결 그래서 과기처에서는 첫 번째 두 번째 문제는 풀어갈 수 있는 여건들이 좋은 데 세 번째 기술개발금융 문제는 산업계와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에 주안점 을 두었습니다. 그 당시 이 업무의 담당자들은 전경련에서는 김영우 상무, 그 리고 과기처의 신만교 국장과 권갑택 과장 등이었으며 그들은 이 기술금융 문 제는 민간기술연구소와 협력해서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술 금융에 필요한 재원 조성 방법과 관련해서는 기술개발 회전기금 형태로 정부
305 민간 공동으로 조성해 나가는데 일부는 IBRD 차관자금으로 조달해서 공동으 로 운영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1980년 2월에 민간연구소설립추진 위원회 이사회 및 정기총회에서 정부와 공동으로 기술개발회전기금을 조성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1980 년 3월에 제가 초안을 만들어 가지고 과기처 담당 국장에게 브리핑을 하는 과 정에서 회전기금을 운영할 회사의 명칭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회사명을 처 음에는 한국기술개발금융주식회사로 생각했는데 과기처에서는 금융 자를 포함시키는데 대해서 굉장한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는 기능으 로 보면 금융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금융 자를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의아해 했습니다. 그른데 권갑택 과장은 명칭에 금융이 포함되면 신설회사의 소속 부처를 과기 처가 아닌 다른 부처로 하자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 해결책으로서 초창기의 명칭은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로 하고 10년 후에 금융을 붙여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부연해서 그 당시 KTDC가 설립되어 기술금융을 운영하더라도 자금에 대한 수요는 아직은 개인 이나 일반 민간 쪽 보다도 공공연구소에서 개발되는 프로젝트들이 많을 테니 까 그것을 감안해가지고 일단은 한국기술개발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금융업으 로서 본격적으로 정착이 되면 그때는 금융을 붙여도 상관이 없지 않느냐 라고 했습니다 년 KTDC 출범 그래서 그 명칭 문제를 전경련 쪽에서 동의해서 1980년 8월 경제장관회의에 서 KTDC 설립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어서 국회의 차관동의를 얻고 한국기술 개발주식회사법이 연말에 공고되어 그 다음 해 초에 KTDC가 설립되었습니다. 회사운영과정에서 저는 과기처에서 지적한 포인트 즉 공공연구소에서 좋은 프 로젝트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 당시 전국에 있는 많은 개인 발명가들의 문의가 특히 많아서 그들과 상담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2.4 양산화 개발 실패로 첫 프로젝트 실패
306 그런데 제일 첫 프로젝트로서 한국화학연구소와 개인발명가가 공동개발을 해서 그 결과를 기업화 시키는 것인데 폐플라스틱을 열분해 정류시켜서 그 원 래의 원료인 스티렌모노머를 재생하는 공정이었습니다. 기술은 국제 특허도 있고 그걸 개인이 연구소에 기술개발을 의뢰해서 어느 정도 1차적으로 벤치스 케일에서 성공을 했기 때문에 양산을 염두에 두고 파일럿플랜트를 만드는 단 계에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엔지니어링공정 과정에 대한 정확한 전문가들이 없었기 때문에 발명가의 확신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실 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제품 개념이 아무리 좋고 실험실적 성공을 거두었더 라도 양산화 단계에서는 실패하는 리스크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 기 때문에 제품을 출시하는 과정까지 가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는데 KTDC 초기에는 이런 프로젝트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연구소의 실험실적 성공 단계의 결과를 가지고 곧바로 주식회사를 만들지 않 고 정부가 양산화 가능성 확인 단계까지 리스크를 떠안은 후에 그것을 시도하 는 전략을 구사하였다면 KTDC 운영에 어려운 점들이 대폭 줄었을 것이라 생 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쌓으면서 20여년을 지나면서 KTDC출신들이 벤처업계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재양성에는 일조를 했다고 생각 합니다. 2.5 한번 기업화에 실패한 기술도 재차 도전할 기회가 주어져야 그리고 또 하나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기술개발의 연속성에 관심을 가질 필 요성이 있다는 것인데, 벤처는 실패라는 것을 기본으로 몇 번 실패를 거듭하여 성공에 이르는 것이니까 그 실패에 대해서 벌을 주지 않고 철저한 기록 보존과 업무 인수인계를 통하여 그다음 사람이 그 실패를 딛고 투자한 것을 뽑아내도 록 유도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좋은 프로젝트들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연구소의 기술개발 주역들이나 KTDC의 프로젝트담당자들이 실패하거나 인사이동 되면 실패한 기술내용을 그냥 묻어두거나 사장시키고 마는데 업무의 인수인계가 가능토록 하는 관리기법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6 민간 주도냐 정부 민간 공동 운영이냐의 논쟁 KTDC 설립 당시에 민간 주도로 운영하느냐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50대
307 50으로 운영하느냐가 중요한 관심사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정부주도 운영에 대한 주장은 일본의 JRDC, 이스라엘의 OCS 등과 같은 정부 주도 기관들을 모 델로 해서 보다 많은 리스크를 정부관련 연구소에서 부담해 주어야 한다는 의 견이었고, 민간 주도에 대한 주장은 프랑스의 SFLNOVA, 영국의 NRDC 등을 모델로 해서 비즈니스 측면을 강조한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논 쟁에 시간을 오래 끌지는 않았고 과기부와 전경련의 민간연구소 담당자들이 서로 호흡이 맞아서 갈등은 좀 있었지만 빨리 결론이 난 것 같습니다. KTB를 퇴사한 후에 창업투자회사를 설립하여 2년 정도 사업을 하다가 한참 벤처 붐이 일어난 2001년도에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지나치게 붐이 일어나 버 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얼마 지나서 (주)한울테크프로라는 기술 경영컨설팅회사를 다시 설립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주로 기술이전에 따른 기술평가 업무와 기업화를 위한 벤처금융 알선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특 히 요즈음은 3~4개 정도의 개인 펀드를 운영하고 있는데 한국기술을 미국이 나 중국에 수출하려는 창업초기의 회사를 주로 투자지원하고 있습니다. 2.7 기술평가 보다는 시장 평가가 훨씬 더 어려워 KTB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이제는 개인회사 프로젝트를 하고 있지만 KTB 시절에는 큰 기관이 백업했기 때문에 리스크가 비교적 큰 경우에도 투자결단 을 내릴 수 있었지만 지금의 개인펀드 같은 경우에는 철저하게 성공률을 따지 게 됩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항상 마케팅 부분의 평가가 가장 어려우며 투 자한 프로젝트들이 마케팅 부분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술 리스크 보다 마케팅 리스크가 오히려 3배 내지 4배 정도 크다고 생각하 며 그래서 우리나라 같이 좁은 시장을 가진 경우에는 오리지널 벤처가 성공하 기 매우 어려운 여건이라고 봅니다. 2.8 KTB의 성공 비결은 수출에 마케팅을 접합한 전략 그런데 KTB는 비교적 높은 성공률을 보였는데 이는 우리나라가 수출드라이 브 정책을 구사했기 때문에 수출에 마케팅을 적절히 접합하는 전략을 구사했 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출 분야의 해외시장을 예측할 수 있는 마케 팅 전문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한울테크프로 에서도 최근에 삼
308 성, LG출신의 마케팅 경험자들을 비상근 전문가로 많이 활용을 하고 있습니 다. 제가 20여 년 동안 벤처를 해오면서 겪은 것으로는 국내의 좁은 시장을 보고 시작한 것들은 실패율이 매우 높고 그래도 해외수출 쪽으로 포인트를 맞춘 것 은 상대적으로 성공률이 높았기 때문에 마케팅 쪽에서 해외시장을 보고 철저 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성공률이 상당히 낮아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저도 중국어를 배워서 중국에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그쪽 시장도 보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3. 당시 과기처 실무자로서의 회고 (노홍길씨 회고) KTDC 설립 당시(1977년-81년) 저는 과학기술처 기술개발관실에 재직하면 서 KTDC 설립에 직접 관여 하지는 안했으나, 기술개발관실은 민간 기업의 기 술개발 촉진을 위한 조세 금융상의 지원을 포함하여 기술개발 지원을 주 업무 로 하고 있었습니다. 산업기술개발 촉진에 관한 기본법이라 할 수 있는 기술개 발촉진법을 제정하고 민간연구소협회인 산업기술진흥협회설립을 기안 하였는 바, 당시 전경련 부설(김영우 부회장)로 설립되었고, KTDC설립은 그 후 기업 에서 자체적으로 기술개발을 본격화할 때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기업의 기술 개발의 가장 큰 애로사항을 듣자 기술 인력의 부족과 금융상의 지원요청 이었 는데, 이는 KTDC의 설립배경과 무관치 안타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후 기술제도과장, 기술지원과장으로 재직시절(1990년-1995년경)에 KTDC와 인 연을 갖고, 현재의 KTB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애로가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를 포함한 실무자들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러한 과정에 대해 정리함으로서 향후 유사한 정책사례에 대한 시사점과 미래 지향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고 봅니다. 3.1 KTDC의 설립 배경 우리나라의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는 경공업에서 기술집약적 중화학공 업으로 도약하는 개발연대였으며 따라서 기술수요가 급증할 때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 경제적 환경은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본격화에 따른 임
309 금의 급속한 상승, 12-15%수준의 고금리 정책의 유지, 국제기술보호주의 강 화 추세에 따른 기술도입의 어려움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러한 배경은 자 체개발기술의 기업화 촉진이 절실히 요청되는 환경 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자체기술에 의한 기업화는 능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리스크 때문에 모험에 도 전하려는 분위기는 좀처럼 조성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높은 금리와 로열티를 지불하고서도 기술도입을 선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하이테크 일수록 리스크는 보다 커지기 때문에 투자를 유인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업의 리스크를 덜어 주고 일부를 정부가 분담한다는 취지에서, 개발 한 기술은 가지고 있으나 담보능력이 없는 기업에 기술가치를 평가하여 과감 히 지원 할 수 있는 전담기관 설립이 절실히 요청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과 시중은행에서도 기술개발에 대한 지원 금융을 하 고 있었으나 기업의 자동화설비설치에 융자 지원하는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 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KTDC는 정부의 의지에 의하여 설립 되었으며 국내 벤처캐 피탈 기능을 담당하는 최초의 기술 금융기관으로서 정부와 민간이 공동 출자 하여 1981년 설립 되었습니다. KTDC는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국내 연구개발한 성과를 기업화 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바, KTDC 발족후 매년 소요자금은 증가하나 자본금 증자 및 회 사채발행등의 한계 때문에 본격적인 종합기술금융기관으로 확대 개편하였습니 다. 1992년에 한국종합기술금융(KTB)로 상호를 변경 하였으며, 2000년에는 민영화 조치가 취해져서 KTBnetwork(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KTB의 설립ㆍ운영은 특히 현재의 벤처캐피탈 제도 정착의 기반 구축과 관 련 전문가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벤처기업에 대한 벤처 캐피탙 성격의 투융자 방식은 유일 하였으며, 기술신용보증제도의 정착과 함 께, 벤처기업에 대한 직간접 투자는 국내외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 니다. 이에 따라서 KTB가 민영화 된 이후 벤처기업이 붐을 이루었을 때, 메디 슨 등 투자기업이 1세대 벤처기업으로 활성화되어 국가 전체적으로 주목을 받 았으며, 이는 KTB의 초기 투자방식의 지원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 울러 KTB가 민영화된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방식의 창업투자회사 및 조합을 결성하고, 벤처기업에 대한 투ㆍ융자를 확대하고자 했을 때에 KTB 출신 전문
310 가들이 대거 진출하여 우리나라 벤처캐피탈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했 습니다. 예로 들면 이때 창투회사의 사장을 비롯하여 투자심사 전문가 그룹이 100여명을 상회하여 KTB가 창투 사관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습 니다. 3.2 KTDC에서 KTB 체제로의 전환 과정 KTDC에서 KTB 체제로 전환의 출발은 기술개발은행 의 설립ㆍ운영 필요성에서부터 이었습니다.신기술 기업화에 대한 투융자수단이 다양화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KTDC 체제로는 많은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투자 및 융자 지원을 시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특히 자금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특별법 의 제정에 의해 기술개발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검토하는 과정에서 KTDC법 의 전면개정에 의한 기술종합금융회사(KTB)로 발전적인 개편을 하기로 결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예를 들면 그 당 시 KTDC 주식의 정부(과기처)지분은 초기 25%내외에서 유지되었으나 그 동안 증자에 제때 참여 할 수 없었던 관계로 19.39%에 머물러 있었고 (주) 유공(17.28%로 회사법상 한도7%를 많이 초과)을 비롯하여 5대 대기업의 지 분으로 자본 참여된 상태였습니다.이는 당시에 그래도 자금 여력이 있는 대 기업에서 기술개발을 돕고자하는 뜻으로 출자한 것 이라고 보았습니다. KTDC법의 전면개정을 통한 KTB법 제정은 국회의 요구조건이 특정한 기 업이 절대적 지배구조가 되지 않토록 대기업의지분을 분산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기업이 초과 보유한 지분을 지체 없이 회사법상의 7% 동일인 한 도 기준으로 초과 소유분을 매각해야 하는 이전의 KTDC법보다 더욱 엄격 해진 규정으로 KTB법이 새로 만들어 졌습니다.그러나 대기업지분을 매각 하기 에는 거래가격이 형성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장외거래도 쉽지 않았고, 특히 대기업 관계자들의 설득이 매우 지난한 상태였습니다.그리하여 매년 국회가 열리기 전에 저를 포함한 여러분들이 대기업 임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ㆍ회유했던 어려운 일들이 생각납니다. 한편 KTB의 원활한 자금조성을 위하여 재경부에서 관리하는 저리의 투융 자금 지원과 과학기술진흥기금을 위탁 관리케 하였는데,투융자 금융은 국회 의 인준을 받아 매년 1조원 내외,과학기술진흥기금은(원금 약 3000억원)매
311 월 기술복권을 발행하여 복권 수익금을 기금에 전입시키는 방식으로 매월 과기처에서 자금 결제를 하였습니다.따라서 KTB가 민영화되기 전까지 매 년 2조원 규모의 자금을 이용하여 기술개발 및 신기술기업화에 기여한 공이 크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특기할 것은 KTB가 벤처기업상 이라는 포상 제도를 한국경제신문사와 공동으로 추진하면서 매달 한 번씩 장관 초 청하여,벤처기업인을 포상함으로서 벤처기업인의 긍지를 고취시키고 벤처기 업과 신제품에 대한 홍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에 따라서 홍보 및 전시효 과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1. 참고문헌 1. KIST 40년사 ,한국과학기술원연구원 발행( ) 2. 과학기술 30년사,과학기술처 발행(1997.6) 3. KIST서 벤처캐피탈 회사를 설립하다 인터넷과학신문 사이언스타 임즈 일자 심층기획기사 2. 워크숍 참가자 약력 및 사진 윤여경 ( 尹 汝 京 1935년 생) 미국유타주립대학교 경제학 학사 미국퍼듀대학교 대학원 공업경영 석사 NothernIlinoisGasCo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경제분석실장(책임연구원) 한국기술진흥(K-TAC)대표이사 한국개발투자금융 부사장,대표이사 사장 김창달 ( 金 昌 達 ) 서울대학교상과대학 상학 학사
312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한국은행 대통령비서실 외자관리 파견,뉴욕 駐 미국 재무관실 및 한은 뉴욕사무소 아세아종합금융 부사장 한국기술개발(KTDC)및 한국종합기술금융(KTB) 대표이사사장 2000-현재 마이벤처파트너스 회장 하찬호( 河 燦 鎬 1952년 생) 1975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 졸업 1987 미국 Boston대학교 경영대학원 수학(재무관리) 전국경제인연합회(경제기술조사센터)연구원 한국기술개발 및 한국종합기술금융(현 KTB네트윅), 개발금융부 책임역(사후관리),기획관리부 책임역(기획조사), 기획관리부 수석역(인사,회계),개발금융부 화학담당부장, 부산지점장,관리역(부실기업 정리) (주)인베스트테크 부사장 -기술금융 2003-현재 (주)한울테크프로 대표 컨설턴트 -경영컨설팅 노홍길 ( 盧 弘 吉 1941년 생) 1963 한양대학교 법정대학 졸업 1988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경영학 석사) 1989 미국 남가주대학교 경영대학원 단기과정 수료 1987 미국 Boston대학교 경영대학원 수학(재무관리) 과학기술처 인력개발담당관,기술용역과장,기술진흥과장, 공보담당관,기술지원과장,정책실국장 엔지니어링공제조합 전무이사(상근대표) 엔지니어링공제조합 자문위원 방사선 동위원소협회 부설 교육연구원 연구위원
313 윤여경 노홍길 하찬호 김대석 박승덕 김창달 김창달 강박광 윤여경 하찬호 <사진 26> 4차 워크숍 참가자 회의사진
<3036C7E2BCF6C3D6C1BEBABB2E687770>
문화향수실태조사 SURVEY REPORT ON CULTURAL ENJOYMENT 2006 문화관광부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Ministry of Culture & Tourism Korea Culture & Tourism Policy Institute 서문 우리나라 국민들이 문화와 예술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를 객관적으 로 파악하기 위하여, 1988년부터
°æÁ¦Àü¸Á-µ¼º¸.PDF
www.keri.org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x xi xii xiii xiv xv 3 4 5 6 7 8 9 10 11 12 13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7 48 49 50 51 52 53
09 강제근로의 금지 폭행의 금지 공민권 행사의 보장 38 10 중간착취의 금지 41 - 대판 2008.9.25, 2006도7660 [근로기준법위반] (쌍용자동차 취업알선 사례) 11 균등대우의 원칙 43 - 대판 2003.3.14, 2002도3883 [남녀고용평등법위
01 노동법 법원으로서의 노동관행 15 - 대판 2002.4.23, 2000다50701 [퇴직금] (한국전력공사 사례) 02 노동법과 신의성실의 원칙 17 - 대판 1994.9.30, 94다9092 [고용관계존재확인등] (대한조선공사 사례) 03 퇴직금 청구권 사전 포기 약정의 효력 19 - 대판 1998.3.27, 97다49732 [퇴직금] (아시아나 항공
<BFDCB1B9C0CE20C5F5C0DAB1E2BEF7C0C720B3EBBBE7B0FCB0E82E687770>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요 약 i ii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요 약 iii iv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요 약 v vi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요 약 vii viii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요 약 ix x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요 약 xi xii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요 약 xiii xiv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28BCF6BDC320323031352D31332920B0E6B1E2B5B520C1F6BFAABAB020BFA9BCBAC0CFC0DAB8AE20C1A4C3A520C3DFC1F8C0FCB7AB5FC3D6C1BE2830312E3036292E687770>
수시과제 2015-13 경기도 지역별 여성일자리 정책 추진 전략 연구책임자 : 최 윤 선 (본원선임연구위원) : 남 승 연 (본원연구위원) 연 구 지 원 : 이 상 아 (본원위촉연구원) 연 구 기 간 : 2015. 9 ~12 2015 발 간 사 여성 일자리는 사회 내 여성과 남성간의 차이를 좁히고 개개인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중요 한 부분입니다. 이에 정부는
<C1A4C3A5BFACB1B82031312D3420C1A4BDC5C1FAC8AFC0DAC0C720C6EDB0DFC7D8BCD220B9D720C0CEBDC4B0B3BCB1C0BB20C0A7C7D120B4EBBBF3BAB020C0CEB1C720B1B3C0B020C7C1B7CEB1D7B7A520B0B3B9DF20BAB8B0EDBCAD28C7A5C1F6C0AF292E687770>
제 출 문 보건복지부장관 귀 하 이 보고서를 정신질환자의 편견 해소 및 인식 개선을 위한 대상별 인권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결과보고서로 제출합니다 주관연구기관명 서울여자간호대학 산학협력단 연 구 책 임 자 김 경 희 연 구 원 김 계 하 문 용 훈 염 형 국 오 영 아 윤 희 상 이 명 수 홍 선 미 연 구 보 조 원 임 주 리 보 조 원 이 난 희 요
untitled
Content Ⅰ. 기본방향 1. 목 적 3 2. 적용범위 3 Ⅱ. 사회복지관 운영 1. 사회복지관의 정의 7 2. 사회복지관의 목표 7 3. 사회복지관의 연혁 7 4. 사회복지관 운영의 기본원칙 8 Ⅲ. 사회복지관 사업 1. 가족복지사업 15 2. 지역사회보호사업 16 3. 지역사회조직사업 18 4. 교육 문화사업 19 5. 자활사업 20 6. 재가복지봉사서비스
00-1표지
summary _I II_ summary _III 1 1 2 2 5 5 5 8 10 12 13 14 18 24 28 29 29 33 41 45 45 45 45 47 IV_ contents 48 48 48 49 50 51 52 55 60 60 61 62 63 63 64 64 65 65 65 69 69 69 74 76 76 77 78 _V 78 79 79 81
제 출 문 중소기업청장 귀하 본 보고서를 중소기업 원부자재 구매패턴 조사를 통한 구매방식 개선 방안 연구 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07. 12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산학협력단 단 장 최 정 훈 연구책임자 : 이재광 (한국산업기술대학교 부교수) 공동연구자 : 노성호
최종보고서 중소기업 원부자재 구매패턴 조사를 통한 구매방식 개선방안 연구 2007. 12 제 출 문 중소기업청장 귀하 본 보고서를 중소기업 원부자재 구매패턴 조사를 통한 구매방식 개선 방안 연구 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07. 12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산학협력단 단 장 최 정 훈 연구책임자 : 이재광 (한국산업기술대학교 부교수) 공동연구자 : 노성호 (한국산업기술대학교
<28323129BACFC7D1B1B3C0B0C1A4C3A5B5BFC7E228B1E2BCFABAB8B0ED20545220323031342D373929202D20C6EDC1FD2035B1B32E687770>
기술보고 TR 2014-79 북한 교육정책 동향 분석 및 서지 정보 구축 연구책임자 _ 김 정 원 (한국교육개발원 ) 공동연구자 _ 김 김 한 강 지 은 승 구 수 (한국교육개발원) 주 (한국교육개발원) 대 (한국교육개발원) 섭 (한국교육개발원) 연 구 조 원 _ 이 병 희 (한국교육개발원) 머리말 최근 통일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합니다. 그에 따라
CONTENTS.HWP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x xi - 1 - - 2 - - 3 - - 4 - - 5 - - 6 - - 7 - - 8 - - 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 18 - - 19 - - 20 - - 21 - - 22 - - 23 - - 24 - - 25 -
- i - - ii - - i - - ii - - i - - ii - - iii - - iv - - v - - vi - - vii - - viii - - ix - - x - - xi - - 1 - - 2 - - 3 - - 4 - - 5 - - 6 - - 7 - - 8 - - 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INDUS-8.HWP
i iii iv v vi vii viii ix x xi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CONTENTS C U B A I C U B A 8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Part IX 9 C U B A 10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Part IX 11 C U B
세계 비지니스 정보
- i - ii - iii - iv - v - vi - vii - viii - ix - 1 - 2 - 3 - - - - - - - - - - 4 - - - - - - 5 - - - - - - - - - - - 6 - - - - - - - - - 7 - - - - 8 - 9 - 10 - - - - - - - - - - - - 11 - - - 12 - 13 -
목 차 Ⅰ. 조사개요 1 Ⅱ. 용어해설 13 Ⅲ. 조사결과 17 1. 과학기술인력 양성 및 활용에 관한 거시통계 분석 결과 9 1 가. 과학기술인의 양성 현황 19 나. 과학기술인의 취업 현황 24 다. 과학기술인의 경제활동 현황 27 라. 과학기술인의 고용 현황 28
목 차 Ⅰ. 조사개요 1 Ⅱ. 용어해설 13 Ⅲ. 조사결과 17 1. 과학기술인력 양성 및 활용에 관한 거시통계 분석 결과 9 1 가. 과학기술인의 양성 현황 19 나. 과학기술인의 취업 현황 24 다. 과학기술인의 경제활동 현황 27 라. 과학기술인의 고용 현황 28 2. 과학기술인력 활용 실태조사 분석 결과 23 가. 과학기술인의 고용 및 채용 현황 3
경제통상 내지.PS
CONTENTS I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II 38 39 40 41 42 43 III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IV 62 63 64 65 66 67 68 69 V
°æÁ¦Åë»ó³»Áö.PDF
CONTENTS I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II 38 39 40 41 42 43 III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IV 62 63 64 65 66 67 68 69 V
영암군 관광종합개발계획 제6장 관광(단)지 개발계획 제7장 관광브랜드 강화사업 1. 월출산 기( 氣 )체험촌 조성사업 167 (바둑테마파크 기본 계획 변경) 2. 성기동 관광지 명소화 사업 201 3. 마한문화공원 명소화 사업 219 4. 기찬랜드 명소화 사업 240
목 차 제1장 과업의 개요 1. 과업의 배경 및 목적 3 2. 과업의 성격 5 3. 과업의 범위 6 4. 과업수행체계 7 제2장 지역현황분석 1. 지역 일반현황 분석 11 2. 관광환경 분석 25 3. 이미지조사 분석 45 4. 이해관계자 의견조사 분석 54 제3장 사업환경분석 1. 국내 외 관광여건분석 69 2. 관련계획 및 법규 검토 78 3. 국내 외
untitled
정책연구 2006-04 기술혁신지원제도의 효과분석과 개선방안 신태영 송종국 안두현 이우성 정승일 송치웅 손수정 김현호 허현회 한기인 머리말 글로벌 경쟁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국가경제발전 및 성장 잠재력의 확충을 위 한 주요 동인으로서 기업의 기술혁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정부는 기업 의 기술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시행해 오고 있다. 과학기술부가
<313120B9DABFB5B1B82E687770>
한국민족문화 40, 2011. 7, 347~388쪽 1)중화학공업화선언과 1973년 공업교육제도 변화* 2)박 영 구** 1. 머리말 2. 1973년, 중화학공업화선언과 과학기술인력의 부족 3. 1973년 전반기의 교육제도 개편과 정비 1) 계획과 개편 2) 기술교육 개선안과 인력개발 시책 4. 1973년 후반기의 개편과 정비 5. 정비된 정규교육제도의 특징
<28C3D6C1BEC0CEBCE2BFEB29BCADBFEFBDC3B0F8B0F8C5F5C0DABBE7BEF7B0FCB8AEC7D5B8AEC8ADB9E6BEC82E687770>
서울시 공공투자사업관리 합리화 방안 -투자심사 및 민간투자사업 제도를 중심으로- Improvement on Management of Public Investment Projects in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009 서울시정개발연구원 SEOUL DEVELOPMENT INSTITUTE 연구진 연구책임 연 구 원 이 세 구 창의시정연구본부
<31302E204D43545F47535FC3D6C1BEBAB8B0EDBCAD2E687770>
2011년도 부품 소재혁신연구회 MCT Global Scoreboard 제 출 문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귀 하 본 보고서를 2011년도 부품 소재혁신연구회 MCT Global Scoreboard (지원기간: 2012. 1. 2 ~ 2012. 3. 31) 과제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12. 3. 31 연구회명 : MCT K-Star 발굴 연구회 (총괄책임자)
2005 중소기업 컨설팅 산업 백서
제 출 문 중소기업청장 귀하 본 보고서를 중소기업 컨설팅 산업 백서 에 대한 최종보고 서로 제출합니다. 2005. 12. 16 (사)한국경영기술컨설턴트협회 회장 박양호 수탁연구기관 : (사)한국경영기술컨설턴트협회 컨설팅혁신정책연구원 총괄연구책임자 : 경영학 박사 김태근(정책분과위원장) 연 구 자 : 경제학 박사 김윤종 통계학 박사 김용철 경제학 박사 변종석
iOS ÇÁ·Î±×·¡¹Ö 1205.PDF
iphone ios 5 DEVELOPMENT ESSENTIALS Copyright 2011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2011 by J-Pub. co. The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Neil Smyth through Agency-One, Seoul. i iphone ios
<BCF6BDC3323030392D31385FB0EDBCD3B5B5B7CEC8DEB0D4C5B8BFEEB5B5C0D4B1B8BBF3BFACB1B85FB1C7BFB5C0CE2E687770>
... 수시연구 2009-18.. 고속도로 휴게타운 도입구상 연구 A Study on the Concept of Service Town at the Expressway Service Area... 권영인 임재경 이창운... 서 문 우리나라는 경제성장과 함께 도시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지방 지역의 인구감소와 경기의 침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다각 적인
´ë±â-ÃѰýº¸°í¼Ł.PDF
통일시대를 향한 한반도 개발협력 핵심 프로젝트 선정 및 실천과제 Major development projects for the integrated Korean peninsula - 총괄보고서 - 이상준, 김천규, 이백진, 이건민, 배은지, 김흠 임강택, 장형수, 김경술, 나희승, 김의준 연구진 연구책임 이상준 선임연구위원 김천규 연구위원 이백진 연구위원 이건민
<BBE7B8B3B4EBC7D0B0A8BBE7B9E9BCAD28C1F8C2A5C3D6C1BE293039313232392E687770>
2008 사 립 대 학 감 사 백 서 2009. 11. 들어가는 말 2008년도 새 정부 출범 이후 구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가 하나의 부처로 통합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 힘차게 출범하였습니다. 그동안 교육과학기술부는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 등 자율화 다양화된 교육체제 구축과 맞춤형 국가장학제도 등 교육복지 기반 확충으로 교육만족 두배, 사교육비 절감
<32382DC3BBB0A2C0E5BED6C0DA2E687770>
논문접수일 : 2014.12.20 심사일 : 2015.01.06 게재확정일 : 2015.01.27 청각 장애자들을 위한 보급형 휴대폰 액세서리 디자인 프로토타입 개발 Development Prototype of Low-end Mobile Phone Accessory Design for Hearing-impaired Person 주저자 : 윤수인 서경대학교 예술대학
직업편-1(16일)
2012 특수교육대상학생을 위한 진로정보 발간사 21세기 지식기반 정보화 사회는 개인에게 변화하는 직업세계를 바로 이해하고 고용능력을 함양하는 평생학습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특히 평생직장시대에서 일생 직업을 5-6번 전환하는 평생직업시대 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지속적인 진로개발(sustainable career development)의 우선적 책무성이 개인에게
<5BC6EDC1FD5DBEEEBEF7C0CCC1D6B3EBB5BFC0DAC0CEB1C7BBF3C8B2BDC7C5C2C1B6BBE7C3D6C1BEBAB8B0EDBCAD28BAB8C0CCBDBABEC6C0CC292E687770>
어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2년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황 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를 제출합니다 2012. 10. 연구수행기관 한양대학교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책임자 오경석 연 구 원 이한숙 김사강 김민정 류성환 윤명희 정정훈 연구보조원 최상일 이 보고서는 연구용역수행기관의 결과물로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연구요약 이 연구는 연근해
<5BBFACB1B8BAB8B0ED20525220323031342D32375D20B5A5C0CCC5CD20B1E2B9DD20B1B3C0B0C1A4C3A520BAD0BCAE20BFACB1B828A5B229C1F6B9E6B4EBC7D0C0C720B1B3C0B0BDC7C5C220B9D720BCBAB0FA20BAD0BCAE5FB9DABCBAC8A320312E392D2833B1B3292E687770>
연구보고 RR 2014-27 데이터 기반 교육정책 분석 연구(Ⅲ) : 지방대학의 교육실태 및 성과 분석 연구책임자 _ 박 성 호 (한국교육개발원) 공동연구자 _ 강 영 혜 (한국교육개발원) 임 후 남 (한국교육개발원) 이 정 미 (한국교육개발원) 엄 문 영 (한국교육개발원) 김 본 영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조원_백 수 현 (한국교육개발원) 서 은 경 (한국교육개발원)
<5B33B9F8B0FAC1A65D20B9E6BCDBBDC9C0C7BDC3BDBAC5DB20B0B3BCB1B9E6BEC8BFACB1B82DC3D6C3D6C1BE2E687770>
KCSC 2015-003 방송심의시스템 개선방안 연구 시청자참여심의제 도입 가능성을 중심으로 2015. 12. 이 보고서는 2015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정책 연구개발 사업의 연구결과로서 보고서의 내용은 연구자의 견해이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공식 입장은 아닙니다. 방송심의시스템 개선방안 연구 - 시청자참여심의제 도입 가능성을 중심으로 - 연 구 진 연구수행기관
세종대 요람
Sejong University 2016 2016 Sejong University 4 SEJONG UNIVERSITY www.sejong.ac.kr 5 8 SEJONG UNIVERSITY 2016 Sejong University 10 SEJONG UNIVERSITY www.sejong.ac.kr 11 12 SEJONG UNIVERSITY www.sejong.ac.kr
<32303132B3E220C7CFB9DDB1E2BACEC5CD20C0CCB7B8B0D420B4DEB6F3C1FDB4CFB4D928706466292E687770>
법령 개정 등이 필요한 제도개선 사항은 사정에 따라 시행일자 등의 변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 록 i 목 록 분야별 달라지는 주요 제도 1. 세 제 3 1세대 1주택 비과세 보유기간 요건 단축 /3 일시적 2주택자의 대체취득기간 연장 /4 부가가치세 과세 전환 /5 면세유 공급대상 농업기계 확대 /6 국세-관세 간 과세가격 조정제도 신설/7 비거주자 외국법인에
<BEC6BFF4BCD2BDCCBAB8B0EDBCAD28C3D6C1BE29303831302E687770>
동아시아역내 일본자동차산업의 아웃소싱 시장 분석을 통한 국내자동차부품기업의 진출방안 연구 2008. 8. 29.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 참여자 책임연구자: 김도훈(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일본기업연구센터 연구위원) 연 구 자: 오재훤(메이지대학 국제일본학부 준교수) 연 구 자: 김봉길(도야마대학 경제학부 교수) 연 구 자: 정성춘(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팀장) 연
연구요약 1. 서론 연구의 목적 본 연구는 청소년 교육정책의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고, 미래지향적인 정책과제와 전략, 그리고 비전을 도출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이를 위해 지 난 15년간의 청소년 교육 환경 및 정책의 변화를 분석하고, 향후 15년간 의 청소년 교육 환경
발간등록번호 국가청소년 www.youth.go.kr 청소년 희망세상 비전 2030 연구 (교육 분야) 책임연구원 : 임천순 (세종대학교 교수) 공동연구원 : 채재은 (경원대학교 부교수) 우명숙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국 가 청 소 년 위 원 회 연구요약 1. 서론 연구의 목적 본 연구는 청소년 교육정책의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고, 미래지향적인 정책과제와 전략,
<B0F8BFB9B9AEC8ADBBEABEF720C0AFC5EB20C8B0BCBAC8ADB8A620C0A7C7D120BFDCB1B920BBE7B7CA20C1B6BBE720BFACB1B828C0CCBFF8C5C2292E687770>
연구책임: 이원태(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공동연구: 오영택(전주대 경영대 교수 전주공예품전시관장) 연구보조: 이준일(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석사) 서 문 우리나라의 공예문화 정책은 애초에 문화유산 보호 차원의 정책으로 출발하여 전승 공예의 계승과 보존에 치중되어 있어 공예문화의 발전 보다는 전통공예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집중 되어 왔다. 이런 흐름과는 달리
<32303131B3E22032BAD0B1E220C4DCC5D9C3F7BBEABEF7B5BFC7E2BAD0BCAEBAB8B0EDBCAD28C3D6C1BE292E687770>
2011년 2분기 콘텐츠산업 동향분석보고서 2011. 09 요 약 ⅰ Ⅱ. 2011년 2분기 콘텐츠업체 실태조사 분석 Ⅰ. 2011년 2분기 콘텐츠산업 추이 분석 1. 산업생산 변화 추이 3 1.1. 콘텐츠산업생산지수 변화 추이 3 1.2. 콘텐츠업체(상장사) 매출액 변화 추이 9 1.3. 콘텐츠업체(상장사) 영업이익 변화 추이20 2. 투자변화 추이 24
교육정책연구 2005-지정-52 공무원 채용시험이 대학교육,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분석 및 공무원 채용제도 개선방안 2005. 12 연구책임자 : 오 호 영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 이 정책연구는 2005년도 교육인적자원부 인적자원개발 정책연구비 지원에 의 한
교육정책연구 2005-지정-52 공무원 채용시험이 대학교육,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분석 및 공무원 채용제도 개선방안 연 구 기 관 :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책임자 : 오 호 영 교육인적자원부 교육정책연구 2005-지정-52 공무원 채용시험이 대학교육,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분석 및 공무원 채용제도 개선방안 2005. 12 연구책임자 : 오 호 영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01 2 02 5 03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S I N S A G O 정답과 해설 채움 1. 마음을 나누는 삶 02 2. 효과적인 자료, 적절한 단어 11 3. 문학을 보는 눈 19 4. 보다 쉽게, 보다 분명하게 29 5. 생각 모으기, 단어 만들기 38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01 2 02 5 03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11¹Ú´ö±Ô
A Review on Promotion of Storytelling Local Cultures - 265 - 2-266 - 3-267 - 4-268 - 5-269 - 6 7-270 - 7-271 - 8-272 - 9-273 - 10-274 - 11-275 - 12-276 - 13-277 - 14-278 - 15-279 - 16 7-280 - 17-281 -
2012회계연도 고용노동부 소관 결 산 검 토 보 고 서 세 입 세 출 결 산 일 반 회 계 농 어 촌 구 조 개 선 특 별 회 계 에 너 지 및 자 원 사 업 특 별 회 계 광 역 지 역 발 전 특 별 회 계 혁 신 도 시 건 설 특 별 회 계 기 금 결 산 고 용 보 험 기 금 산 업 재 해 보 상 보 험 및 예 방 기 금 임 금 채 권 보 장 기 금 장
- I - - II - - III - - IV - - V - - VI - - VII - - VIII - - IX - - X - - XI - - XII - - XIII - - XIV - - XV - - XVI - - XVII - - XVIII - - XIX - - XX - - XXI - - XXII - - XXIII - - 1 - - - - 3 - - - -
장애인통계-0110-최종.hwp
작성기준일 : 2013년 12월 19일 문 의 처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조사통계부 Tel:031-728-7108 Fax:031-728-7143 머 리말 우리나라 등록장애인 수는 2012년 12월 말 현재 251만 1천명으로, 2000년 12월 말 95만 8천명에서 약 162% 증가하였습니다. 장애인 인구가 이처럼 급격히 증가함에 따 라 장애인 정책에
우루과이 내지-1
U R U G U A Y U r u g u a y 1. 2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3 U r u g u a y 2. 4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5 U r u g u a
정책연구개발사업 2010-위탁 대학 등록금의 합리적 책정을 위한 실행방안 연구 연 구 책 임 자 공 동 연 구 자 송동섭(단국대학교) 이동규(충남대학교) 이창세(재능대학) 한창근(인하공업전문대학) 연 구 협 력 관 장미란(교육과학기술부) 교육과학기술부 이 연구는 201
제 출 문 교육과학기술부장관 귀하 본 보고서를 대학 등록금의 합리적 책정을 위한 실행방안 연구 최종 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10년 12월 일 주관연구기관명:단국대학교 연구기간:2010. 7. 19-2010. 12. 18 주관연구책임자:송 동 섭 참여연구원 공동연구원:이 동 규 이 창 세 한 창 근 연 구 조 원:심 재 우 정책연구개발사업 2010-위탁 대학
이용자를 위하여 1. 본 보고서의 각종 지표는 강원도, 정부 각부처, 기타 국내 주요 기관에서 생산 한 통계를 이용하여 작성한 것으로서 각 통계표마다 그 출처를 주기하였음. 2. 일부 자료수치는 세목과 합계가 각각 반올림되었으므로 세목의 합이 합계와 일 치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3. 통계표 및 도표의 내용 중에서 전년도판 수치와 일치되지 않는 것은 최근판에서
??
한국공항공사와 어린이재단이 함께하는 제2회 다문화가정 생활수기 공모전 수기집 대한민국 다문화가정의 행복과 사랑을 함께 만들어 갑니다. Contents 02 04 06 07 08 10 14 16 20 22 25 28 29 30 31 4 5 6 7 8 9 10 11 12 13 15 14 17 16 19 18 21 20 23 22 24 25 26 27 29 28
<BFACB1B85F323030352D30335FB0E6C1A6C0DAC0AFB1B8BFAA2E687770>
연구보고서 2005-03 경제자유구역에서의 보건의료시장 개방의 파급효과와 정책방향 2005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머 리 말 우리나라는 2003년 경제자유구역의지정및운영에관한법률 을 제정하여 인천, 부산-진해, 광양만 등 3개 지역에 경제자유구역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에 는 경제자유구역에 외국 의료기관이 진출할 수 있다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으
2015.08 ~ 2016.05 4 CONTENTS 19대 국회를 마치며... 사진으로 보는 의정활동... 4 6 Ⅰ. 19대 국회에서 김용익이 통과시킨 주요 법안... 25 Ⅱ. 19대 국회 대표발의 법안 & 주최 토론회 대표발의 법안 45건... 주최 토론회 91건... 36 43 Ⅲ. 보건복지위원회 2015년도 국정감사...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BAD2B9FDBAB9C1A620BAB8B0EDBCAD5FC5EBC7D55F76657230345FB9DFB0A3BBE7C6F7C7D45F33C2F720B1B3C1A428B1D7B8B22020C3DFC3E2292E687770>
2014 저작권 보호 연차보고서 nnual eport on Copyright rotection 2014 저작권 보호 연차보고서 nnual eport on Copyright rotection 발간사 올해 초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는 독특한 소재와 한류스타의 완벽한 연기로 대한민국을 넘어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에 다시금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켰습
2010회계연도 결산시정요구사항 조치결과 분석
결산분석시리즈 1 2010회계연도 결산시정요구사항 조치결과 분석 총 괄I 김춘순 예산분석실장 기획 조정I 박인화 예산분석심의관 서세욱 산업예산분석과장 김경호 경제예산분석과장 문종열 사회예산분석과장 정문종 행정예산분석과장 정영진 법안비용추계1과장 박선춘 법안비용추계2과장 작 성I 전용수, 배아형, 김효진, 표승연, 변재연, 한정수 산업예산분석과 예산분석관 최철민,
<313320205BB0E6C1A65DB0F8B0B32DC1F6BDC4C0E7BBEAC0CEB7C220BCF6B1DEC0FCB8C120BFACB1B85FC0CCC1D6BFAC28C3D6C1BE292E687770>
인프라 기초연구과제 최종보고서 지식재산 동향 및 미래전망 Intellectual Property Trends and Prospects - 지식재산인력 수급전망 연구 - 2013. 12 제 출 문 특허청장 귀하 본 보고서를 인프라사업의 기초연구활성화 연구과제 중, 지식재산 동향 및 미래전망 - 지식재산인력 수급전망 연구 과제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13년
<363034392DC1A4BAB8C8AD20BBE7C8B8BFA1BCADC0C720C0CEB1C728C3D6C1BE292E687770>
총 목 차 발제문 1 ꋯ 전자정부에서 정보프라이버시의 실현과제 1 2 ꋯ 공공기관 보유 개인전자정보의 학술적 이용에 대한 고찰 45 3 ꋯ 수사와 범죄 예방 활동에서의 감시기술의 활용과 그에 대한 통제 63 4 ꋯ 인터넷과 인권 89 토론문 1 ꋯ 公 共 機 關 의 個 人 情 報 保 護 法 改 正 案 說 明 資 料 105 2 ꋯ 정보화 사회에 있어서 개인정보보호
013년도 전주ᆞ완주 탄소산업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 최종 사업목표 및 내용 탄소 관련산업동향과 국가정책에 부응하여 탄소산업 중심의 테마형 집적화단지(Carbon Valley) 조성을 위한 탄소기업 유치 및 육성, 산업기반의 구축 등에 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함
<303230342032303134B3E220B3EBBCF7C0CE20B5EEC0C720BAB9C1F6BBE7BEF720BEC8B3BB28C3D6C1BE292E687770>
발 간 등 록 번 호 11-1352000- 000661-10 2014년 노숙인 등의 복지 사업 안내 Contents Contents 제1장 노숙인 등 복지사업 기본방향 / 1 1. 사업목적 3 2. 주요연혁 3 3. 기본방향 4 제2장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령 안내 / 7 1. 목 적 9 2. 구 성 9 3. 총 칙 9 4. 종합계획의 수립
[96_RE11]LMOs(......).HWP
- i - - ii - - iii - - iv - - v - - vi - - vii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제 출 문 노동부 장관 귀하 본 보고서를 노동부 수탁연구과제 문화 예술산업 근로실태 조사 및 근로 자 보호방안 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09.9. 한국노동연구원 원장 박 기 성
이 과제는 2009년 노동부의 정책연구용역사업의 일환으로 연구되었음 문화 예술산업 근로실태조사 및 근로자 보호방안 -최종보고서 - 2009.10. 연구기관 :한국노동연구원 노 동 부 제 출 문 노동부 장관 귀하 본 보고서를 노동부 수탁연구과제 문화 예술산업 근로실태 조사 및 근로 자 보호방안 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09.9. 한국노동연구원 원장 박
National Food & Nutrition Statistics 2011: based on 2008~2011 Korea National Health and Nutrition Examination Survey (Ⅱ)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N=33,745, 단위 : g) (N=33,745, 단위 : g) (N=33,745,
untitled
정책연구 2000-34 과학기술과 지역경제 활성화 및 과학문화 확산방안 Activation of Regional Science Economy and Diffusion of Science Culture 연구기관 단국대학교 과 학 기 술 부 제 출 문 과 학 기 술 부 장 관 귀하 본 보고서를 과학기술과 지역경제 활성화 및 과학문화 확산 방안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00내지1번2번
www.keit.re.kr 2011. 11 Technology Level Evaluation ABSTRACT The Technology Level Evaluation assesses the current level of industrial technological development in Korea and identifies areas that are underdeveloped
2010
대한민국 원자력발전과 전력산업 성장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온 한국전력기술 이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전력플랜트 분야 Global Top 5 EPC 기업을 향해 나아갑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KEPCO E&C의 기술이 세계를 움직이는 미래를! Global Power ON _ 한국전력기술, KEPCO E&C www.kepco-enc.com
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2011 361호 [별책 4] 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2012 3호 [별책 4] 고등학교 교육과정(Ⅲ) - 한문, 교양, 예술, 창의적 체험활동 - 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 2011-361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 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israel-내지-1-4
israel-내지-1-4 1904.1.1 12:49 AM 페이지1 mac2 2015. 11 Contents S T A T E O F I S R A E L 8 Part I Part II Part III Part IV Part V Part VI Part VII Part VIII 9 S T A T E O F I S R A E L 10 Part I Part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 중 일 대중문화 교류의 현황 및 증진 방안 연구 동북아 문화공동체 특별연구위원회 구 분 성 명 소 속 및 직 위 위 원 장 김 광 억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김 우 상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 준 식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전 영 평 대구대 도시행정학과 교수 위 원 정 진 곤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 정 하 미 한양대 일본언어
2013 경제발전경험모듈화사업: ICT 인력양성 2014 2013 경제발전경험모듈화사업: ICT 인력양성 2013 경제발전경험모듈화사업: ICT 인력양성 ICT Human Resource Development Policy 주관부처 미래창조과학부 연구수행기관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진 고상원,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강하연,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14강 역사영웅소설 15강 판소리계 소설 판소리계 소설 : , 등 일반적으로 판소리 사설의 영향을 받아 소설로 정착된 작품을 가리킨 판소리 : , , , , 등이 사설과 창이 전해지고 있 하층민의 예술로 시작하여 전계층을 아우르는 예술이 되었 상류층, 지배층이 향유층이 되면서 점차 작품의 주제가
<3130383035395FC0E5BCBCBFB52E687770>
문화경영관광 전문석사학위논문 문화적 도시재생을 위한 지역문화매개자의 역할 분석 -광주광역시 양림동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문화경영관광전공 장 세 영 2015년 2월 - 2 - 목 차 국문초록 ⅷ I. 서론 1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1 가. 연구 배경 1 나. 연구 목적 2 2. 연구의 방법 및 흐름도 3 가. 연구 방법 3 나. 연구 흐름도
i ii iii iv v vi vii viii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XXXXXXXX 22 24 25 26 27 28 29 30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30362E20C6EDC1FD2DB0EDBFB5B4EBB4D420BCF6C1A42E687770>
327 Journal of The Korea Institute of Information Security & Cryptology ISSN 1598-3986(Print) VOL.24, NO.2, Apr. 2014 ISSN 2288-2715(Online) http://dx.doi.org/10.13089/jkiisc.2014.24.2.327 개인정보 DB 암호화
¹ýÁ¶ 12¿ù ¼öÁ¤.PDF
논문요약 146 [ 주제어 ] 147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 157 158 159 160 161 162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171 172 173 174 175 176 177 178 179 abstract Recent Development in the Law of DPRK on the
DBPIA-NURIMEDIA
27(2), 2007, 96-121 S ij k i POP j a i SEXR j i AGER j i BEDDAT j ij i j S ij S ij POP j SEXR j AGER j BEDDAT j k i a i i i L ij = S ij - S ij ---------- S ij S ij = k i POP j a i SEXR j i AGER j i BEDDAT
<443A5CB1E8BFC144425CBAB8B0EDBCAD5CB4EBC7D0C7F5BDC5B0FAB0E6C0EFB7C228C3D6C1BE295F30353131322E2E2E>
연구보고서 2006. 1. 5. 대학혁신과 경쟁력 - 목 차 - Executive Summary 요약 Ⅰ. 문제제기...1 Ⅱ. 연구의 접근방법...9 Ⅲ. 시장환경 분석과 대학의 전략유형...16 Ⅳ. 사례대학 분석...29 Ⅴ. 성공모델의 도출...61 Ⅵ. 결론 및 시사점...150 참고문헌...158 작성 : 류지성 수석연구원(3780-8122) [email protected]
2힉년미술
제 회 Final Test 문항 수 배점 시간 개 00 점 분 다음 밑줄 친 부분의 금속 공예 가공 기법이 바르게 연결된 것은? 금, 은, 동, 알루미늄 등의 금속을 ᄀ불에 녹여 틀에 붓거나 금속판을 ᄂ구부리거나 망치로 ᄃ두들겨서 여러 가지 형태의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 ᄀ ᄂ ᄃ ᄀ ᄂ ᄃ 조금 단금 주금 주금 판금 단금 단금 판금 주금 판금 단금
À̶õ°³È²³»Áö.PDF
Islamic Republic of Iran I I S L A M I C R E P U B L I C O F I R A N 10 Part I 11 I S L A M I C R E P U B L I C O F I R A N 12 Part I 13 I S L A M I C R E P U B L I C O F I R A N 14 II I S L A M I C R
<C7D0B1B3C7F5BDC520BBE7B7CAB9DFB1BCB0FA20C8AEBBEAC0BB20C0A7C7D120B3D7C6AEBFF720B1B8C3E0B9E6BEC8BFACB1B828323030362D30362C20C0CEBCE2BABB292E687770>
정책연구 2005-06 학교혁신 사례 발굴과 확산을 위한 네트웍 구축 방안 연구 연구책임자: 서근원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 학교혁신 사례 발굴과 확산을 위한 네트웍 구축 방안 연구 2005 년 12 월 20 일 연구진 연구책임자 : 서근원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강사 ) 공동연구자 : 서길원 ( 경기도 남한산초등학교 교사 ) 안순억 ( 경기도 남한산초등학교
DBPIA-NURIMEDIA
김진주 김수연. 초등학생대상장애이해교육에활용된동화에나타난장애인관분석. 특수교육, 2013, 제12권, 제2호, 135-160... 20.,,. 4.,,.,..... 주제어 : 장애이해교육, 동화, 장애인관 1. ( 1 ) Incheon Munhak Elementary School ( )(, E-mail: [email protected]) Dept. of
연구보고서-1(PDF전환용).hwp
2005-1 연구보고서 충남 노인주거 의료복지시설의 효율적 운영방안 연구 연구책임자 : 황창연 충청남도여성정책개발원 Chungcheongnamdo Women's Policy Development Institute 발 간 사 지금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다가오는 저출산 고령사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PHI Research Paper 2015-02 PHI 연구보고서 2015-02 건강검진은 어떻게 산업 이 되었나? 출판일 2015년 9월 20일 편집인 박 유 경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공동저자 김 명 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가나다 순) 김 창 엽 (
PHI Research Report 2015-02 PHI 연구보고서 2015-02 건강검진은 어떻게 산업 이 되었나?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시민건강증진연구소 People's Health Institute PHI Research Paper 2015-02 PHI 연구보고서 2015-02 건강검진은 어떻게 산업 이 되었나? 출판일 2015년 9월 20일
- i - - ii - - iii - - iv - - v - - vi - - vii - - viii - - ix - - x - - xi - - xii - - xiii - - xiv - - xv - - xvi - - xvii - - xviii - - xix - - xx - - xxi - - xxii - - xxiii - - xxiv - - 3 - - 4 -
인니 내지-00-5
인니 내지-00-5 2016.5.10 12:49 AM 페이지3 mac2 I. I N D N E S I A 12 Part I 13 I N D N E S I A 14 Part I 15 I N D N E S I A 16 Part I 17 인니 내지-00-5 2016.5.10 12:49 AM 페이지19 mac2 II. 정치 1. 국가이념및정치정세개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기호
일본지방자치체( 都 道 府 縣 )의 웹사이트상에서 심벌마크와 캐릭터의 활용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Application of Japanese Local Self-Government's Symbol Mark and Character on Web. 나가오카조형대학( 長 岡 造 形 大 學 ) 대학원 조형연구과 김 봉 수 (Kim Bong Su) 193
연구진 연구책임 연 구 원 김운수 / 교통물류연구실 연구위원 이명화 / 교통물류연구실 초빙연구원
A Study on the Actual Analysis of Introducing Marine Special Economic Zone in Incheon 연구진 연구책임 연 구 원 김운수 / 교통물류연구실 연구위원 이명화 / 교통물류연구실 초빙연구원 요약 및 정책건의 Ⅰ. 연구개요 정부에서는 유휴화된 항만공간을 고부가가치화와 융복합 클러스터를 구현시킴 으로써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노동운동사 정 호 기 농민운동 1 목 차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07 1. 문제제기 2. 기존 연구의 검토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07 10 12 16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19 1.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조선왕조 능 원 묘 기본 사료집 -부록 : 능 원 묘의 현대적 명칭표기 기준안 차 례 서 장 : 조선왕실의 능 원 묘 제도 11 제 1부 능 원 묘 기본 사료 Ⅰ. 능호( 陵 號 ) 및 묘호( 廟 號 )를 결정한 유래 1. 건원릉( 健 元 陵 ) 21 2. 정릉( 貞 陵 ) 22 3. 헌릉( 獻 陵 )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 음운 [ㄱ] [국], [박], [부억], [안팍] 받침의 발음 [ㄷ] [곧], [믿], [낟], [빋], [옫], [갇따], [히읃] [ㅂ] [숩], [입], [무릅] [ㄴ],[ㄹ],[ㅁ],[ㅇ] [간], [말], [섬], [공] 찾아보기. 음절 끝소리 규칙 (p. 6) [ㄱ] [넉], [목], [삭] [ㄴ] [안따], [안꼬] [ㄹ] [외골], [할꼬]
E1-정답및풀이(1~24)ok
초등 2 학년 1주 2 2주 7 3주 12 4주 17 부록` 국어 능력 인증 시험 22 1주 1. 느낌을 말해요 1 ⑴ ᄂ ⑵ ᄀ 1 8~13쪽 듣기 말하기/쓰기 1 ` 2 ` 3 참고 ` 4 5 5 5 ` 6 4 ` 7 참고 ` 8 일기 ` 9 5 10 1 11, 3 [1~3] 들려줄 내용 옛날 옛날, 깊은 산골짜기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 이
cls46-06(심우영).hwp
蘇 州 원림의 景 名 연구 * 用 典 한 경명을 중심으로 1)심우영 ** 목 차 Ⅰ. 서론 Ⅱ. 기존의 경명 命 名 法 Ⅲ. 귀납적 결과에 따른 경명 분류 1. 신화전설 역사고사 2. 文 辭, 詩 句 Ⅳ. 결론 Ⅰ. 서론 景 名 이란 景 觀 題 名 (경관에 붙인 이름) 의 준말로, 볼만한 경치 지구와 경치 지 점 그리고 경치 지구 내 세워진 인공물에 붙여진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권2 동경잡기 東京雜記 동경잡기 173 권2 불우 佛宇 영묘사(靈妙寺) 부(府)의 서쪽 5리(里)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6년(632) 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인데 체제가 특이하다. 속설에 절터는 본래 큰 연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 사람들이 하룻밤 만에 메 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고 전한다. 지금은
0429bodo.hwp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이 명단은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의 후손 또는 연고자로부터 이의신청을 받기 위해 작성 되었습니다. 이 인물정보를 무단 복사하여 유포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전 파하는일체의행위는법에저촉될수있습니다. 주요 훈포상 약어 1. 병합기념장 2. 대정대례기념장 3. 소화대례기념장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진한기辰韓紀 경상도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인데, 뒤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었다. 여지승 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망 명한 진(秦)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한(韓)으로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분할 하여 주었으므로 성책(城栅)을 세웠다. 하였다. 그 언어가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다.
38--18--최우석.hwp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 崔 宇 錫 1) 1. 序 文 2.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3. 結 語 1. 序 文 沈 德 潛 (1673-1769)의 字 는 確 士 이고 號 는 歸 愚 이다. 江 南 長 洲 (현재의 江 蘇 省 蘇 州 ) 사람으로 淸 代 聖 祖, 世 宗, 高 宗 삼대를 모두 거쳤다. 특히 시를 몹 시 좋아한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해제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이 자료는 한말의 개화파 관료, 김윤식 金 允 植 (1835~1922)이 충청도 면천 沔 川 에 유배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전문 傳 聞 한 것을 일일이 기록한 일기책 이다. 수록한 부분은 속음청사 續 陰 晴 史 의 권 7로 내제 內 題 가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로 되어 있는 부분 가운데 계사년 癸 巳 年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1. 재미있는 글자 단원의 구성 의도 이 단원은 도비와 깨비가 길을 잃고 헤매다 글자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글자 공부를 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칫 지겨울 수 있는 쓰기 공부를 다양한 놀이 위주의 활동으로 구성하였고, 학습자 주변의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함으로써 학습에 대한 흥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각 단계의 학습을 마칠 때마다 도깨비 연필을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과 임제 신해진(전남대) 1. 머리말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 과정에서의 사육신을 소재로 한 작품은 남효온( 南 孝 溫 )의 (1492년 직전?), 임제( 林 悌 )의 (1576?), 김수민( 金 壽 民 )의 (1757) 등이 있다. 1) 첫 작품은 집전( 集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조 례 익산시 조례 제1220호 익산시 주민감사 청구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 1 익산시 조례 제1221호 익산시 제안제도 운영조례 일부개정조례 3 익산시 조례 제1222호 익산시 시채에 관한 조례 폐지조례 12 익산시 조례 제1223호 익산시 시세 감면 조례 전부개정조례 13 익산시 조례 제1224호 익산시 행정기구설치조례 19 익산시 조례 제1225호 익산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