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2013) : 93~134 아편, 주석, 고무: 페낭 화인사회의 형성과 전개, 1786-1941* 1) 강 희 정** Ⅰ. 들어가며 말라카해협(Malacca Straits) 1) 북단의 작은 섬 페낭은 영국이 동아 시아로 제국을 확장하는 교두보였다. 1786년 8월 11일 프랜시스 라 이트(Francis Light)의 페낭 상륙은 영국의 무역 거점이 만들어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2) 영국의 페낭 거점지배는 동남아시아 일대 가 유럽 산업혁명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편입됐음을 의미한다. 세계 시장의 재편에 따라 자본과 노동 및 인력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었 는데,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말레이반도이고, 그 변화 * 이 논문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2013년 전략지역 심층연구 사업의 지원과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 구임(NRF-362-2008-1-B00018).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조교수. esvara@sogang.ac.kr 1) 본 논문의 심사 평가자 3분께 감사드린다. 다만 고유명사 표기에 관한 평가자들의 입장이 일치하지 않아서 표기법에 대한 각기 다른 의견으로 인해 본고는 다음의 원칙에 따름을 밝힌다. 말레이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지명과 인명은 영어식 발음으 로 표기한다. 단, 중국인 인명과 지명은 우리말 한자 발음으로 적되, 페낭 화인의 이름은 기록상의 현지 발음으로 표기한다. 현재의 중국식 만다린 표기는 현지에서 통용되는 발음과 차이가 있어 혼동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2) 프랜시스 라이트(Francis Light)는 1786년 페낭 섬을 말레이 반도 케다(Kedah) 주의 술탄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조차했다고 주장했으나, 케다 술탄이 영국의 무력에 밀려 1791년 동인도회사와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영국의 페낭 점령은 불법이었다(Tan 2009: 9).
94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의 출발점이자 축도( 縮 圖 )가 바로 페낭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페 낭은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다. 영국 해협식민지의 하나로, 혹은 또 다른 싱가포르의 취급을 받았다. 서구의 시각에서 중계무역항의 역 할에만 초점이 맞춰졌을 뿐, 페낭을 페낭답게 만든 주역인 화인사회 의 형성과 특성, 전개 과정이 세계사의 맥락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동남아시아의 화인사회에 대한 기존 연구 관점은 서양 식민정책 대 화인, 토착사회 대 화인, 중국 대 화인의 세 가지로 대별된다. 서양의 동남아 식민지배에서 화인의 역할, 토착사회와 화인의 관계, 화인의 문화적 동화 여부, 화인의 중국적인 정체성 등에 초점이 맞 춰져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동남아시아의 화인사회를 일반화함으로써 지역적 특성이 부각되지 못하거나 화인사회를 하나 의 덩어리로 간주함으로써 내부 계층화의 문제를 간과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아울러 이러한 관점에서는 중상주의에서 제국주의로 이 행하는 세계사적 흐름에 화인사회가 어떻게 대처하고 변용했는가에 대한 역동성도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786년 영국의 점령에서 1941년 일본 점령까지 155년에 걸친 페낭 화인사회의 형성과 전개 를 페낭의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페낭 역시 여느 동남아 화인 사회처럼 화인 자신의 1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오히려 현 지 거주 외국인들의 저술이 유용한 1차 사료라는 점은 페낭 화인사 회 연구의 한계를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2008년 페낭 조지타운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전후로 활발해진 최근 페낭 지역 연구 성과를 참고하여 페낭 화인사회의 전개과정을 재구 성하고자 한다. 페낭 155년의 역사는 길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구성하기 위해 크게 19세기 중엽 이전과 이후, 20세기 초로 나누어 각각 아편,
아편, 주석, 고무 95 주석, 고무를 주제로 화인사회의 전개 양상을 다루고자 한다. 이는 19세기 전반, 아편과 징세청부제를 통한 화상들의 자본축적과 화인 사회의 계층화, 후반에는 주석 광산의 대두로 페낭 5대 가문의 거상 들이 경제력을 키운 과정을 그 내용으로 한다. 다음으로는 20세기 초에 서양 자본의 고무 농원 개발로 인해 페낭의 화인 경제권과 경 제력에 생긴 급격한 변화를 다룰 것이다. 이들은 현재 페낭 조지타 운에 남아있는 저택, 회관, 사원의 건립과 운영에 미친 화인 사회의 영향력과 문화의 근원을 살펴보는데 필요한 토대가 되리라 생각한 다. 본고는 페낭의 페라나칸(Peranakan) 문화 연구를 위한 기초 작 업에 해당함을 밝힌다. Ⅱ. 아편과 화인의 자본축적 페낭은 15세기 정화( 鄭 和 )의 남해원정 당시 항해지도에 빈랑서 ( 檳 榔 嶼 ) 로 표기되어 있다. 3) 라이트가 조차할 때까지 당시 페낭에 는 소수의 토착민이 소규모 교역이나 어업으로 생계를 꾸리며 정주 해 있었고, 영국의 페낭 점령 이후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말레이인 등 아시아계 이민의 물결이 이어졌다. 페낭은 유럽과 아시아는 물론 동아시아의 지역교역을 잇는 역외 및 역내 교역 중심지로 번성했다. 라이트가 페낭 점령 두 달 뒤인 1876년 10월 영국 동인도회사에 상 황을 보고하면서 이민자 사이에 토지 분쟁이 벌어지고, 저마다 앞 다퉈 건물을 짓고 있다 고 했을 정도였다 (Tan 2009:10). 페낭의 첫 아시아계 이민은 말레이반도의 케다에서 건너왔다. 애초 약속과 달 3) 페낭섬은 말레이어로 피낭 섬을 뜻하는 Pulau Pinang 이다. 피낭은 베텔에 싸서 씹는 빈랑자(areca-nut)를 말한다. 영국이 페낭을 점령한 뒤 조성한 페낭의 중심시가 조지타운(George Town)에 대해 영어를 모르는 말레이인들은 곶이나 갑을 뜻하는 탄종(Tanjong)으로 불렀다.
96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리 영국 동인도회사로부터 아무런 군사적 보호를 받지 못한 케다가 태국의 공격을 받으면서 말레이인 난민이 페낭으로 유입된 것이다. 아울러 해협의 해운과 상권을 쥐고 있던 인도인 상인들이 뒤를 이었 고, 페낭의 요새와 도시 건설에는 인도인 죄수들이 투입되었다. 인 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아체, 태국과 버마 남부에서도 페낭 이주에 동 참했다. 기록상 페낭의 최초 화인 이민자도 케다에서 해협을 건넜다. 라이 트가 접수한 지 며칠 뒤 페낭으로 이주해 이듬해인 1787년 페낭의 초대 화인 지도자(Capitan Cina)로 임명된 코라이환(Koh Lay Huan, 辜 禮 歡 ) 4) 은 중국 복건성에서 케다로 이주한 무역상이었다(Turnbull 2009: 35). 후술하겠지만 코라이환이 페낭에서 가장 먼저 손 댄 사업 은 아편이었다. 이후 말라카를 비롯해 태국 남부에 정착했 있던 화 인 상인들도 페낭으로 이주했다. 5) 말레이 반도가 전통적으로 복건 출신 이민 지역(Skinner 1957: 215)이었기에 페낭의 초기 화인 이민 자는 복건 출신이 다수였다. 이들 가운데 페낭 점령 이전부터 해협 일대에서 상업과 교역을 통해 현지에 정착했던 화상( 華 商 )들이 이주 해 빠르게 상권을 장악하며 19세기 전반까지 페낭에 화인 경제권 을 구축했다(Chuleeporn 2009: 113). 그렇다면 페낭 이주 화인들이 이처럼 빠르게 경제력을 장악하게 된 동력은 무엇일까. 화인 특유의 근면성과 타고난 축재술, 전통적 인 지역 교역 네트워크에 대한 탁월한 접근성이나 복건 출신이라는 지역연고와 꽌시 ( 關 係 ) 만으로는 페낭의 화인 경제권 구축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페낭 화인의 자본축적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 4) 코라이환의 아들은 1819년 스탬퍼드 래플스가 싱가포르 건설에 나설 때 그와 동행 했을 정도로 코 가문은 일찍부터 영국 식민당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5) 영국 동인도회사는 페낭 점령 이후 동인도회사는 프랑스와의 전쟁기간 위탁했던 네덜란드령 말라카가 영국의 동남아시아 교역을 장악하는데 방해물로 여겨 말라카 를 폐쇄할 요량으로 요새를 철거하고 도시를 파괴한 뒤 모든 주민을 페낭으로 이주 시킬 계획을 세운 바 있다.(Turnbull 2009: 31)
아편, 주석, 고무 97 이다. 엔칭황(Yen Ching-hwang, 顔 淸 湟 )은 화인 자본주의를 봉건주 의와의 관련성에 주목해 화인의 자본축적 과정이 비교적 수월했고 단순했다 고 분석했지만(Yen 2008: 290-291), 페낭의 화인 엘리트가 새롭게 건설된 영국 식민지에서 소상인에서 자본가로 성장한 자본 축적 과정은 결코 수월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다. 화인의 자본축적 은 화인의 화인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가능했다. 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징세청부제(revenue farm)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 중심 에 아편이 있었다. 처음부터 페낭은 아편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페낭은 인도산 아 편을 중국에 팔던 영국 아편상들에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1809-1819년의 10년간 아편 수입과 수출이 페낭의 연간 교역 규모 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에 달했다. 비록 아편 교역이 19세기 페낭의 교역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니지만, 아편의 중 요성은 줄지 않았다. 1828-29년 페낭 주요 교역품 가운데 수입 비중 이 가장 컸던 것은 인도산 의류(34%)였고 아편(14%)이 그 다음이었 다. (Kamamura 2011). 1880년대와 1890년대 해협식민지는 영국령 인도에서 수출된 아편의 20%를 수입했다(Trocki 2009: 214). 페낭에 서 아편은 단순한 교역 품목이 아니었다. 해협식민지 당국은 물론 페낭의 화인사회가 굴러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1911년 아편 징세청부제(opium farm, 이하 아편팜 으로 표기)가 공식적으 로 폐지되기 이전까지 페낭의 식민당국의 재정은 아편 수입으로 유 지됐다. 페낭의 화인사회도 아편을 중심으로 수탈하는 자와 착취당 하는 자로 나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편은 식민당국의 주요한 조세수입의 원천이었다. 페낭은 애초 영국의 자유무역 정책에 따라 1786년 개항 이래 19세기 초반 13년 간(1803-1826년) 무역관세가 부과되었을 뿐, 1941년 일본군 점령까 지 자유항의 지위를 누렸다. 자유항 정책은 교역을 확대했지만, 식
98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민당국에게는 식민지 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세원을 없애 만성적인 재정적자의 원인이 됐다. 1850년대 페낭 해협식민지 정부의 세수는 행정비용의 절반에 불과했다. 캘커타의 영국 동인도회사의 재정 지 원에 매달려야 했던 해협식민지 정부는 사실상 무늬만 정부 (skeleton organization) 에 지나지 않았다(Turnbull 2009: 37). 페낭 식민당국은 세수를 마련하기 위해 출범 초기부터 18세기 유 럽은 물론 동남아시아에서 조세 징수의 방식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징세청부제를 시행했다. 페낭의 아편 교역이 전체 교역에서 차지하 는 비중은 줄었지만, 아편팜의 세수 규모는 20세기 초까지 확대됐 다. 6) 징세청부제는 정부가 행정력으로 세금을 직접 걷는 것이 아니 라 민간 도급업자에게 징세 독점권을 부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집세 처럼 징세 도급업자는 도급 계약기간 약속한 일정한 금액을 정부에 매달 납부하는 조건으로 특정 지역과 특정 품목에 대한 세금 징수의 배타적인 권리를 받는 제도다. 도급업자는 독점권을 바탕으로 정부 에 지급할 금액 이상을 걷어 수입으로 챙긴다. 식민당국은 다양한 품목에 이 제도를 활용했지만 가장 중요한 징세 품목은 아편이었다. 아편팜의 도급업자는 아편의 수입과 판매는 물론 아편굴의 운영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를 행사한다(Butcher 1983: 387). 아편팜은 아편 과 밀접한 도박장과 술, 전당포와 매음굴 등에 대한 징세청부권에도 관련된다는 점에서 막대한 이권이 개입됐다. 도급업자는 주로 화인 거상으로 결성된 신디케이트였고, 신디케이트는 징세권을 소형 업 주들에게 재하청하는 방식이었다(Butcher 1983: 388). 7) 6) 페낭 식민당국의 아편팜 수입은 1895년 60만 해협달러에서 1904년에 150만 해협달 러로 늘었다. 1914년 페낭에서 식민정부의 아편팜 수입은 135만5205 해협달러를 기록했다. 1914년 당시 싱가포르의 아편팜 수입 520만 혀협달러를 합칠 경우 페낭 과 싱가포르의 아편팜 징세수입은 영국령 말라야 전체의 아편 징세수입(1401만6882 해협달러)의 3분의2에 해당한다.(Trocki 2009: 214) 7) 징세 도급계약은 통상 3년 단위였다. 계약기간 만료 1년 전 식민당국은 새로운 도급 업자를 정하기 위해 경쟁 입찰을 실시하지만, 입찰 금액을 많이 쓴다고 선정되는
아편, 주석, 고무 99 페낭 식민당국이 행정과 징세업무를 분리한 징세청부제를 120여 년간 지속한 것은 단순히 세금 징수 자체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식민당국은 세금을 걷는데 따른 행정비용이 전혀 들지 않기도 했지 만, 재산도 없고 주거지도 고정되지 않은 화인 노동자에게 아편과 도박장, 술, 전당포 등을 통해 소비세 방식으로 과세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는 판단에서 징세청부제를 활용했다. 그러나 식민당국이 특 히 화인을 대상으로 한 아편 징세도급제를 장려한 데에는 더 큰 목 적이 숨겨져 있다. 당시 주석광산과 대형 농원은 화인 자본에 의해 노동집약적으로 주도되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필수적인 화인 노동력 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확보하려는 속셈에서 화인 엘리트에 의한 아편팜을 허용했던 것이다(Butcher 1983: 395). 페낭 식민당국에게 아편이 산수의 문제였다면, 페낭 화인사회에 서 아편은 훨씬 복잡한 고등수학에 비견된다. 아편팜은 단순한 독점 권의 문제가 아니라 페낭 화인 경제권의 사활과 관련된 거대한 신디 케이트의 일부였기 때문이다(Trocki 2009: 218). 아편팜의 신디케이 트는 화인 노동자를 대거 고용해 농원이나 주석광산을 경영하는 화 인 거상이 주도하고, 아편굴의 치안과 밀매를 단속하는 화인 비밀결 사와 노예무역처럼 화인 노동자를 거래하는 쿨리 무역(coolie trade) 네트워크가 포함된다. 거대한 화인 아편팜 신디케이트는 아 편의 주소비자인 동향이나 종친의 화인 노동자를 중독시켜 직접적 으로 수입을 늘리며 자본을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화인 노동력을 광산과 농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수탈했던 것이다. 페낭의 첫 화인 이주자 코라이환도 이주 이듬해에 식민당국으로 부터 아편팜을 도급 받았다. 코라이환은 1824년 영국이 버마로 침공 것이 아니라 식민당국이 다각도로 고려해 선정했다. 요컨대 최고입찰 방식이 아니 라 식민당국의 정무적 판단 이 고려됐다는 의미다.
100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할 당시 페낭의 다른 유력 화인들과 함께 선단을 조직해 영국군에 식량 등을 지원하며 식민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사업을 확 장했다(Wong 2007). 그의 가문은 이후 페낭의 경제계의 거물로 성 장했다. 코라이환의 증손인 코성탓(Koh Seang Tat, 辜 上 達 )은 페낭 의 아편팜 신디케이트를 이끌고 1890년 싱가포르의 아편팜 독점권 을 확보하기도 했다(Trocki 2009: 213-216). 코 가문에서 보이듯이 아편팜 도급업자들은 비밀결사의 지도자이거나, 그들과 연합한 세 력이었다. 그들이 노동자 대중을 통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자본가들이 비밀결사를 수하에 거느리게 되고, 그들의 치 안을 통제하게 되면서 아편팜 신디케이트에 참여한 도급업자들은 지역에 투자하는 자본가가 되었다. 1890년까지 도시화가 빠르게 진 행되고, 식민지 경찰력이 보다 실효성을 발휘하게 되면서 도급업자 들은 금융가로 변신했다(Trocki 2009: 219). 아편팜은 그 자체로도 이문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다. 영국 식민당 국은 페낭의 아편에 대한 일체의 공식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아 실 상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페낭 총독대행을 맡았던 아치볼드 앤슨(Sir Archibald Anson)이 1920년에 펴낸 회고록은 1870년 페낭의 아편팜 에 대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앤슨은 1870년 페낭에서 코성탓을 만 나 아편제조 공장을 둘러보고 페낭의 아편 징세업자(코성탓)가 내 게 알려준 바에 따르며, 당시 생아편 한 상자(chest, 1 chest=50kg) 값은 500 해협달러(100파운드)로, 한 상자에는 40 묶음(ball)이 들어 있다. 생아편 한 상자를 흡입할 수 있는 아편(chandu)로 만들어 팔면 1800 해협달러(360파운드)어치가 된다. 고 했다. 8) 8) Archibald Anson. 1920. About Other and Myself, 1745-1920. London: John Murry. 365 (Trocki 2009: 215) 재인용. 1870년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페낭의 2배 가량인 생아편 기준 45-50상자가 판매된 것으로 앤슨은 추정했다. 페낭의 아편 소비는 한 달에 25-27상자로 추정되었다. 1870년 페낭에서만 한 달에 1250~1350kg, 4만 5000~4만8600 해협달러 어치의 아편이 소비된 셈이다.
아편, 주석, 고무 101 아편팜 도급업자들이 남긴 이윤과 관련해 1901-1903년 페낭에서 아편과 주류의 징세 도급권(opium and spirit farm, 연주( 煙 酒 )팜)을 확보했던 페낭의 거부 간오베(Gan Ngoh Bee, 顔 五 美 )의 사례가 있 다. 9) 이 기간 페낭의 연주팜을 통해 화인 신디케이트가 거둔 총이윤 은 70만 해협달러였으며, 간오베는 이 신디케이트에 25%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이는 간이 연주팜에서 3년간 약 15만 해협달러의 이윤 을 얻었고, 연평균 5만 해협달러를 챙겼음을 의미한다(Yen 1987: 422). 아편팜을 통해 사업가와 자본가로 성장한 화인 거상들이 거액 을 벌어들이던 것에 비해, 당시 아편에 중독되었던 화인 노동자들의 수입은 보잘 것 없었다. 19세기 중반 화인 농업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3~4 해협달러로, 연간 임금소득이 50 해협달러를 넘지 못했 다. 임금도 별로 오르지 않았다. 19세기말 페낭 화인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7~9 해협달러였고, 1911년 페낭의 농업노동자 평균 임금은 6~12 해협달러에 불과했다(Yen 1987: 421). 아편팜이 초기에는 화인 상인을 자본가로 만드는 자본축적의 원 천이었지만, 1850년 이후 페락에서 주석광산 개발붐이 일면서 안정 적인 노동력 확보 수단이라는 의미가 더 커졌다. 말라야 주석과 농 원의 고용주들은 화인 노동자의 이탈을 막기 위해 노동자를 빚의 수렁에 빠뜨리는 수단으로 도박장과 아편굴을 이용했다(Butcher 1983: 395). 코성탓은 1886년 동부 수마트라에서 담배 농원을 운영 하면서 담배 수확이 끝나 임금을 지급한 뒤 화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현지에 임시 도박장을 열도록 했다. 코성탓은 빚이 노동자 쿨리들 을 농원에 머물게 한다. 이들은 빚 때문에 마음대로 떠나지도 못한 다. 고 했다(Trocki 2009: 218). 아편팜은 금의환향을 꿈꾸며 고된 9) 징세 도급권은 항목 별로 계약되기도 했지만, 1880년대 중반부터 술집과 전당포, 도박장 등 관련 품목을 묶어 계약되는 종합징세청부제(general farm)가 시행됐는데, 아편과 술의 도급권이 하나로 묶여 계약되곤 했다.(Butcher 1983: 389)
102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노동을 하던 화인 노동자들을 빚의 수렁에 빠뜨려 채무노동을 강요 하는 노동 착취 장치였던 셈이다. 아편팜은 19세기 중반 이후 화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쿨리 무 역 이나 외상배삯제(credit-ticket system)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 가난한 화인 노동자는 동남아로 이주할 때 여행경비를 일해서 갚는 조건으로 하는 외상배삯제를 이용했다. 배삯을 외상으로 하는 대신 1년간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일종의 채무노동계약이다. 쿨리 중개업은 수익성이 매우 높아 화인 노동자 이민을 전문적으로 중개 하는 객두( 客 頭 ) 신디케이트도 결성되었다. 이들은 쿨리의 모집, 운 송, 분배를 통제하기 위해 중국의 조계지와 해협식민지의 비밀결사 를 이용했다. 1년간 임금 없이 음식, 옷 기타 간단한 필수품만 제공 받고 노동을 한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Purcell 1967: 58). 아편팜은 화인 노동자가 배삯으로 진 빚을 1년 뒤 갚고 자유롭게 떠나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였다. 식민당국은 식민지 발전은 물론 화 인사회의 번영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아편팜을 옹호했다. 19세 기 페낭의 화인사회는 화인 노동자에게 아편 권하는 사회 였다. 페 낭의 노동자들은 아내를 고향에 두고 단신 이주하기도 했지만 대부 분이 미혼 남성이었다. 이들은 도박과 아편에 빠졌고, 매음굴을 전 전했다. 1905년의 경우, 페낭에 144개의 매음굴에 1201명의 매매춘 여성이 있었다(Yen 1987: 425). 19세기 중반 얼마간의 돈을 모아 고 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화인 노동자는 열 명중 한 명에 불과했 다. 10) 나머지 90%는 돈도 없이 구걸로 연명하거나, 질병과 아편 중 10) Siah U Chin(Seah Eu Chin). 1848. General Sketch of the Number, Tribes, and Avocations of the Chinese in Singapore. in Journal of the Indian Archipelago and Eastern Asia 2: 285(Yen 1987: 426) 재인용. 페낭의 화인 인구는 1794년에 3000명 으로 늘어난 이후 1851년 1만5457에서 1860년 2만8018명으로 크게 늘면서 전체 페낭 인구의 46.73%를 차지했다. 1891년 화인 인구는 6만4327명으로 화인의 비중 이 51.92%로 상승했다. 이후 20세기 초 인구 증가율은 감소했지만, 페낭의 화인 인구는 일본점령 이전까지 꾸준히 증가했다(Loh 2009: 96).
아편, 주석, 고무 103 독으로 더욱 절망에 빠졌다. 페낭의 화인사회는 중국의 전통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계층화되 었다. 옌칭황은 페낭의 화인사회가 중국과 달리 지배-피지배의 계급 으로 분화되지 않았고, 이민을 통해 도시를 중심으로 상인과 노동자 로 나뉘었다는 점을 들어 화인사회가 종속적이기는 했지만 계급사 회로 분화되지는 못했다고 했다. 따라서 중국의 전통적인 사농공상 ( 士 農 工 商 )의 위계적 신분서열이 아닌 재산의 다과에 의한 상사공 ( 商 士 工 )의 계층구성을 이루었다고 분석했다. 11) 요컨대 페낭 화인사 회의 계층 피라미드는 근대식 자본가로 변신한 소수의 부자가 꼭짓 점을 이루고, 화인 노동자가 거대한 밑변을 이루는 구조였다. 20세 기 초 해협식민지에는 앞서 살핀 간오베나 코성탓과 같은 화인 거부 가 2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Wong 2007: 106). 아편팜으로 자본을 축적한 화인 거상( 巨 商 )들은 19세기 중반부터 는 아편팜-자본-쿨리무역-비밀결사를 아우르는 거대한 신디케이트 를 통해 부를 확대했다. 이는 페낭 화인의 문제만도 아니다. 18세기 중국 광동( 廣 東 )에서 네덜란드령 자바로 이주해 거부가 되고 페낭에 정주한 뒤, 청조로부터 말라야 총영사에 임명된 청팟쯔(Cheong Fatt Tze, 張 弼 士 )도 자바의 아편팜을 통해 소상인에서 자본가로 성장했 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도 1). 지금은 규모가 축소되어 건물 한 채 11) 옌칭황은 상, 사, 공을 다시 각각 상하( 上 下 )의 두 범주로 구분하고 있는데, 화인사 회의 피라미드에서 최상층부를 차지하는 상상( 上 商 )은 자본가 계층으로 수출입 무 역상, 거대 농원주, 주석광산 개발업자, 대형 징세청부업자, 부동산 소유자, 금융가 등이다. 다수의 일반 상인 들이 하상( 下 商 )에 해당한다. 사 계층의 경우 전문직, 식민정부 하급관리, 서양기업의 통역사 및 직원 등의 상사( 上 士 )와 중국어학교 교 사나 화인 회사의 직원이 하사( 下 士 )로 구분된다. 공 계층의 경우 목수, 대장장이, 금세공사, 요리사, 재단사, 건설기술자 등의 장인과 광산이나 농원의 노동자로 나 뉜다. 화인사회의 피라미드는 소수의 상상이 꼭짓점을 이루고 하상과 상사, 하사와 상공의 중간 계층을 거쳐 하공( 下 工 ) 즉 광산과 농원 노동자들이 밑변을 받치는 형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공과 하상 사이에 비교적 활발한 계층 이동이 있었 다고 옌은 분석했다. (Yen 1987: 417-420)
104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정도를 공개하는 청팟쯔의 맨션은 기존 페낭 화인 거상들의 주택과 는 다른 모던한 취향을 보여준다. 그의 저택은 조지타운 중심가로부 터도 떨어져있어서 먼저 정착한 화인 기득권층과 거리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19세기 페낭의 화인 노동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 계층화의 정도와 계급의식을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아편을 통해 본 페낭의 화 인사회는 두 가지 점에서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나는 계층화를 배제 한 채 경제적 성취만으로 페낭의 화인사회를 재단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페낭 화인의 자본축적이 아편팜이라 는 장치를 통해 화인 노동자를 비인간적으로 착취한 순탄하지 않 은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19세기 페낭은 화인의 자본과 화인의 노동력을 결합시켜 국부를 키우려던 영국 제국주의의 장려 아래 화 인이 화인에 아편 권하는 사회, 또는 화인의 화인에 의한 착취의 시 대였다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할지 모른다. (도1) 청팟쯔 맨션 전경, 19세기말
아편, 주석, 고무 105 Ⅲ. 주석과 화인 거상( 巨 商 )의 시대 아편으로 자본을 축적한 페낭의 화상들은 19세기 후반 주석광산 개발을 통해 서양 자본에 필적하는 거상( 巨 商 )으로 성장했다. 아편 팜을 통해 광범하고도 복잡한 경제구조를 만든 페낭의 화인은 1840 년대 이후 주석광산 개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페낭은 20세기 초 서양의 자본과 기술이 압도하기 이전까지 말레이반도 북서부와 태 국 남부에 자본을 공급하는 중심지였으며, 이를 페낭의 화인 거상이 주도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영국 식민당국은 일찍부터 말레이 반도와 태국 남부의 주석에 주목했다. 1816-1818년 페낭 총독 존 배 너먼(John Bannerman)과 측근 존 앤더슨(John Anderson)은 페낭 주 석 계획(Penang Tin Scheme) 을 세웠다. 말레이 반도와 태국 남부의 주석광을 개발하고, 주석 생산 지역의 교역망을 확대해 페낭을 지역 해상무역의 거점이자 동방의 거대한 장터(the great mart of the east) 로 바꾸려했다. 12) 배너먼 페낭 총독의 계획은 구상으로 끝났 고, 오히려 페낭의 화인 거상들이 이를 실현했다. 19세기 중반 서양 에서 양철과 통조림 등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면서 주석에 대한 원자 재 수요가 증가하자, 페낭의 화인 거상들은 자본과 화인 특유의 네 트워크를 가동해 페락과 푸켓 등에서 주석광산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페낭의 경제는 1848년 이후 말레이반도의 페락(Perak) 주 라룻 12) 존 앤더슨은 인근 주석 경제에서 페낭이 차지하는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확신하 고, 동인도회사를 설득해 1820년대 초 타보이(Tavoy,현재 미얀마 남부 테나세림주 의 도시)와 메르귀(Mergui, 현 미얀마 남부 안다만해 연안 항구도시)를 샴에 주고 대신 페낭 인근의 푸켓과 말레이 지역을 영국이 관할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당 시 페낭의 중계항 지위는 수마트라 북부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앤더슨은 지리 적 영역을 초월하는 하나의 지역경제체를 건설하려했던 것이다. C.D. Cowan. 1950. Governor Bannerman and the Penang Tin Scheme, 1818-1919. JMBRAS 23: 1.(King 2009: 133)에서 재인용.
106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Larut) 강 유역에서 대규모 주석광이 개발되면서 비약적으로 확장 됐다. 중국 남부에서 화인 노동자가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조지타운의 거상들이 주석광 개발에 자본을 공급하면서 중계무역항 페낭은 말레이반도의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게 됐 다(Turnbull 2009: 35-36). 하지만 주석 개발을 통해 19세기 후반의 페낭의 화인 거상은 영국 식민지 내 화인만의 경제권(enclave) 을 구축했다. 이로써 페낭 경제권에서 화인이 주역이 되고 서양 자본은 조연으로 밀려났다. 이는 화인이 서양자본의 중개인이었다는 일반 화와 대치된다. 20세기 초까지 페낭의 서양 무역상들은 장거리 대양 간 교역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화인이 만들고 장악한 교역 시스템 에 단지 참여했을 뿐, 교역의 주도권을 쥐거나 시장의 확장에 앞장 서지 못했다. 화인 거상들은 무역업자이자 기업가, 금융가, 해운업 자, 징세 도급업자였으며 페낭 교역권의 역내에 확실한 근거를 구축 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의 페낭은 화인 거상의 시대 였다 (Chuleeporn 2009: 112-113). 페낭을 화인 경제권으로 만들며 거상의 시대를 이끈 주역으로 중 국 복건성 출신 화인 5대 가문이 꼽힌다. 탄(Tan, 陳 ), 예(Yeoh, 楊 ), 림(Lim, 林 ), 체아(Cheah, 謝 ), 옹(Ong, 王 )씨 가문이 상업과 무역, 농업과 광업에서 주역을 담당했다(Wong 2007: 106). 13) 19세기 주석 개발에서 페낭 5대 가문의 거상들이 가장 역동적이었다. 페락 주석 광산 개발에 자본을 공급하며 주도한 것도 이들이다. 라룻강 지역은 1848년 클리안 파우(Klian Pauh)에서 대규모 주석 매장량이 확인되 면서 페낭의 화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페낭 화인들에게 13) 페낭의 5대성으로 옹씨 대신 쿠( 邱, Khoo)씨가 언급되기도 한다(오명석 2000: 225). 하지만 웡예투안(Wong Yee Tuan)은 특별한 설명 없이 쿠씨를 제외했다. 이는 자본 과 경제적 활동에 중심을 두고 5대 가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페낭의 대표적인 비밀결사 건덕회를 주도했던 쿠씨 가문을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웡은 건덕회가 이들 5대 가문이 의사결정권을 지닌 조직이라고 설명한다.
아편, 주석, 고무 107 (도2-1) 체아콩시, 19세기 엘도라도(eldorado)였다(Khoo 2009: 58). 라룻강 유역의 화인 인구는 1862년 2만~2만5000명에서 10년 뒤 3만~4만명으로 늘었다. 지금은 규모가 축소되고, 찾는 사람도 많지 않으나 체아콩시는 여전히 명맥 (도2-2) 체아콩시 건물들의 지붕
108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을 유지하고 있다(도 2-1). 체아씨들의 공동회관 역할을 했던 체아콩 시(Cheah Kongsi, 謝 公 司 )는 건물 전면을 붉은 색으로 칠해 확실하 게 중국색을 드러낸다. 용마루 없이 이어지는 지붕들의 선은 독특한 중국 남방계 건물의 맥을 잇고 있다(도 2-2). 페락 라룻강 유역의 주석광산 개발권과 징세 도급권을 두고 술탄 승계 분쟁으로까지 비화된 라룻전쟁(1867-1873)에서 5대 가문은 이 브라힘(Che Nga Ibrahim)의 뒤를 밀었다. 이브라힘은 페락의 광상 ( 鑛 商, 광산개발업자)이자 객가( 客 家 )출신 화인 비밀결사 해산회( 海 山 會 ) 14) 의 지도자인 청컹키(Chung Keng Kwee, 鄭 景 貴 ) 15) 와 협력했 다. 당시 청컹키는 라룻 지역에서 주석광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1만 5000명의 화인 광부를 통제하고 있던 페락 주석광업계의 거물이었 다. 페낭의 5대 가문은 청컹키와 이브라힘에게 6만 해협달러어치의 돈과 현물, 무기를 지원했다. 당시 청컹키는 라룻강 유역 주석광산 개발권을 쟁취하기 위해 광동출신 비밀결사 의흥회( 義 興 會 ) 16) 와 무 력 분쟁을 벌였다. 술탄승계 분쟁과 주석광산 개발권을 둘러싼 화인 의 방파( 幇 派 ) 갈등이 맞물린 라룻전쟁은 급기야 영국 식민당국이 중재하기에 이르렀고, 1874년 팡코르조약(Treaty of Pangkor) 체결 로 마무리됐다. 협약을 통해 라룻강 유역의 클리안 파우 지역은 지 명을 타이핑(Taiping, 太 平 )으로 바꿔 해산회가 장악하고, 클리안 바 14) 해산회( 海 山 會, Hai San hui)는 객가인들의 비밀결사로, 페낭의 해산회는 1820년 푸켓에서 이주한 객가인들에 의해 설립됐다. 15) 청컹키가 페낭에 세운 해기관( 海 記 館 )은 오늘날 페낭 조지타운의 가장 아름다운 역사유적의 하나로 꼽히며, 페라나칸 맨션 이란 이름으로 페낭을 대표하는 관광 지가 됐다. 청컹키는 타이핑과 고펑에 1895년 증룡회관( 增 龍 會 館 )을 세운데 이어 이듬해에는 페낭에도 이 회관( 檳 城 增 龍 會 館 )을 열었다. 청은 1886년 페낭의 복건, 광동 출신이 협력해 세운 화인회관인 평창회관( 平 章 會 館, Penang Town Hall)의 기 부자이기도 하다. 16) 의흥회(Ghee Hin hui, 義 興 會 )는 중국의 천지회 또는 삼합회( 三 合 會, Triad)의 전통 을 잇는 광동성 출신 비밀결사로, 영국이 점령한 지 13년 뒤인 1799년 페낭에 설립 된 페낭 최초의 비밀결사이다.
아편, 주석, 고무 109 루(Klian Bharu, Kamuntin) 지역의 관할권은 의흥회에 넘어갔다. 페 낭 5대 가문은 원조의 대가로 청컹키 관할 지역에서 생산되는 주석 의 70%를 현물로 받았다. 이들의 라룻전쟁 지원금은 일종의 주석광 산에 대한 투자였던 셈이다. 페낭의 5대 거상은 1880년대 페락의 킨타(Kinta) 지역 주석광 개 발에도 관여했다. 1901년 당시 페락은 말레이반도 전체 주석 생산량 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말레이 최대의 주석 생산지였으며, 킨타 지역은 페락에서 가장 중요한 주석광산이었다(Penrose Jr. 1903: 137). 킨타 지역 주석광은 거대 자본의 직접 지배 방식이 아니라 중 소 광상들이 라룻 지역의 화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며 시작됐다. 이 지역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객가나 광동 화인이었지만, 광상들은 대 부분 복건이 고향인 페낭 출신의 화인이었다(Khoo 2009: 62). 페낭 의 5대 가문은 풍부한 자본과 복잡한 사업망을 활용해 킨타 지역 주석광에도 투자했고, 생산된 주석을 자신들의 해운회사를 통해 도 맡아 운송했다. 이들 5대 거상은 태국 남부 푸켓의 주석광산 개발에 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탄가익탐(Tan Gaik Tam)은 18세기 후반 페 낭에 이주한 뒤 1820년대 초 푸켓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주석 개발의 큰손이 됐다. 탄은 1850~60년대 푸켓 주석 수출에 대한 독점권은 물론 아편팜 등 징세도급권도 독점했다. 탄이 페낭의 5대 가문의 일 원임은 물론이다. 1880년 당시 페낭의 5대 가문 소유의 푸켓지역 광산에 고용된 화인 노동자의 수는 이 지역 전체 광산 노동자 5만명 중 3분의 2에 달했다(Wong 2007: 107-8). 페낭의 5대 가문은 주석광 개발 과정에서 자본-노동-교역을 아우 르는 거대하고도 복잡한 화인 신디케이트를 활용했다. 이들은 쿨리 무역을 장악하고 주석광산의 화인 광부를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페 낭의 복건출신 비밀결사 건덕회의 지도자 쿠텐텍(Khoo Thean Teck, 邱 天 德 )은 페낭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인 노동력 공급자이자, 쿨리
110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무역의 대부였다. 쿠 일가의 결속은 쿠콩시[ 龍 山 堂 邱 公 司 ]를 통해 공공연하게 유지됐다(도 3-1, 2). 17) 이들 콩씨(Kongsi, 公 司 ) 건물들 은 이들 5대 가문이 번성했을 때, 건축되어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 고 있다. 페낭에 남아있는 이들 콩씨가 대부분 5대 가문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콩씨 건립이 이들 가문의 신디케이 트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도3-1) 쿠콩시 입구의 객사, 20세기초 페낭의 5대 가문은 투자 지역의 징세도급권도 장악했다. 이들은 페낭은 물론 수마트라 동안, 말레이반도 북동부, 태국 남서부 지역 에서 광산개발권과 쿨리무역, 아편팜을 아우르는 거대한 화인 신디 케이트를 구축했다. 5대 가문은 1880-1897년의 17년간 청컹키와 손 17) 쿠텐텍은 복건출신 화인 비밀결사이자 페낭의 주요 상인들을 아우르는 조직인 건 덕회( 建 德 會 )를 창설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1867년 페낭의 광동출신 비 밀결사 의흥회와의 유혈분쟁을 주도했다. 1835년 설립된 페낭의 복건성 장주부 해징현( 海 澄 縣 ) 신강촌( 新 江 村 ) 출신 구씨 종친회 용산당구공사( 龍 山 堂 邱 公 司 )의 위원장이었다.
아편, 주석, 고무 111 (도3-2) 쿠콩시 메인홀, 1906년경 잡고 페락의 징세 도급권을 확보했고, 이 기간 도급 계약금으로 이 들이 페낭 당국에 지급한 금액이 280만 해협달러에 달했다. 케다에 서는 5대 가문 화상의 일원인 림렁척(Lim leng Cheak)이 1886-1891 의 6년간 광동출신 세력과 손잡고 징세 도급권을 장악했다(Wong 2007: 110). 이들 5대 가문은 주석만이 아니라 주요 수출상품의 교역 과 해운업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푸켓, 페락, 델 리(수마트라 동안) 등에 쌀, 설탕, 코코넛, 중국산 의류, 중국산 염장 채소를 수출했다. 인도인 해운업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인도-페낭 해 운의 주도권도 19세기 중반 이들에 의해 페낭의 화인 수중으로 넘어 왔다. 18) 하지만 무엇보다도 거상의 시대를 가능케 한 것은 화인 특유의 18) 초기 페낭의 상권은 인도인 무슬림 상인들이었다. 1821년 페낭의 선박 톤수를 비교 하면, 유럽 선박이 1095톤, 화인이 105톤인데 비해 무슬림의 톤수는 2580톤에 달했 다. 주석 개발이 페낭 화인의 경제적 영향력을 키웠던 것이다.(Loh 2009: 94)
112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복잡한 교역구조 였고, 그 요체는 인적 네트워크였다. 페낭 화인 경 제에서도 꽌시( 關 係 )와 신용( 信 用 )이 중시됐다(Tong & Yong 1998: 75). 문제는 화인 인적 네트워크에서 화인 마피아 를 연상하게 하는 비밀결사 가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중국의 천지회 ( 天 地 會 )에 뿌리를 둔 화인의 결사체가 비밀결사로 통칭되면서, 이 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화상 신디케이트에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 씌우게 됐다. 천지회 전통의 화인 결사체가 애초부터 폭력집단의 부 정적 이미지의 비밀결사로 인식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과 달리 천지 회에 뿌리를 둔 페낭의 화인 비밀결사는 정치적 결사체가 아니었을 뿐더러, 치안과 징세 능력도 없는 페낭 식민당국도 19세기 후반까지 천지회 전통의 비밀결사를 식민지 경영의 협력자로 여겼다(Turnbull 2009: 35). 1840년 인도 마드라스 주둔 영국군 장교가 작성한 천지회 보고서는 천지회의 복잡한 의식과 형제애 서약의 비밀스러운 속성 을 상세하게 밝힐 뿐, 없애야 할 결사체라는 뉘앙스는 담겨있지 않 다(Wilson&Newbold 1841) 페낭 식민당국과 서양 상인들이 화인 비밀결사에 의혹과 반감을 갖게 된 배경에 주석이 자리한다. 1850년대 페락의 주석광산이 본격 개발되면서 비밀결사 사이에 분쟁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게 됐다. 화 인 거상들 사이의 주석 이권 다툼이 비밀결사 간 무력충돌로 나타난 것이다. 달리 말해 화인 비밀결사들의 폭력 충돌은 이권을 노린 화 인 거상들의 대리전이었던 셈이고, 주석으로 촉발된 거상의 시대 의 치부였다. 페낭 화인 거상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동원 하고, 비밀결사가 화인 거상의 시대를 떠받친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는 점은 페낭 화인사회가 구축한 경제구조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 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페낭의 화인 비밀결사는 하층 이민자의 상호 부조를 위한 공동체의 성격보다 상인과 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영리적 이익집단의 특성이 두드러진다(오명석 2000: 215). 그런데
아편, 주석, 고무 113 이는 19세기 페낭에서 비밀결사가 거상들이 구축한 복잡한 화인 경 제권을 가동시킨 화인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자본 (social capital) 19) 이자, 식민당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화인사회의 자경 조직이 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아가 19세기 후반 이후 전개된 화인 거상 과 서양 자본의 경합 양상에 초점을 맞출 경우, 비밀결사는 서양 자 본에 맞서 화인의 경제적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게 한 자원적 결사 일 뿐 아니라 화인 경제권의 핵심 요소였다는 평가도 가능해진다. 자본의 경합이란 측면에서, 서양 상인과 자본가들이 19세기 후반 법과 질서를 앞세워 집요하게 화인 비밀결사의 해체를 주장한 속셈 과 1889년 비밀결사 해체 이후 화인 거상의 시대가 서양의 자본 공 세에 무력해진 까닭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사회 통제 를 대행하고 경제 과정 전반에 관여한 페낭의 화인결사는 19세기 화인사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기능했던 시대의 산물이었 다. 20) 5대 가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페낭의 화상 신디케이트는 광범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5대 가문은 방언이나 지역, 혈통이 다른 객가와 광동출신, 인도-말레이 혼혈, 유럽-아시아 혼혈, 태국인 및 영국인 집단과 다양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21) 이러한 협력은 기업 19) 피에르 부르디외(Piere Bourdieu)는 사회적 자본이란 지속적인 네트워크 혹은 상 호 면식이나 인정이 제도화된 관계 즉,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획득되는 실제적인 혹은 잠재적인 자원의 총합 으로 규정한다. (부르디외 2006: 75). 사회적 자본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와 해석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사회적 자본을 경제적 자본(economic capital), 인적 자본(human capital), 문화적 자본(cultural capital) 등 여러 형태로 구분되는 자본이지만, 궁극적으로 축적된 인간의 노동 으로 정의되는 경제적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본으로 보는 부르디외의 정의에 따른다. 20) 의흥, 해산, 건덕 등 비밀결사 이외에도 19세기 초 화인 이민이 늘면서 친족, 지역, 방언, 직업에 따라 다양한 결사체가 생겨났다. 친족 결사체 가운데에도 같은 지역 과 방언을 공유하는 국지적 조직과 보다 개방적인 비국지적 집단으로 나뉘었다. 국지적 친족단체로 예콩시(Yeoh Seh Sit Teik Tong, 楊 氏 植 德 堂 ), 쿠콩시(Khoo Seh Leong San Tong, 邱 氏 龍 山 堂 ), 체아콩시(Cheah Seh Sek Tong Shi Teik Tong, 謝 氏 石 塘 世 德 堂 ) 등이 대표적이고, 비국지적 친족집단으로는 총콩시(Chong Seh Cheng Hoe Tong, 张 氏 清 河 堂 ), 황콩시(Huang Seh Koong Har Tong, 黄 氏 江 夏 堂 ), 쿠콩시 (Koo Saing Wooi Koon, 古 城 会 馆 ) 등이 있다.
114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을 통한 상업상의 동업관계나 비밀결사의 방식으로 연결됐다. 페락 에선 복건출신 건덕회가 객가출신 해산회와 주석광 개발을 위해 손 잡고, 케다에선 건덕회가 견원지간으로 알려진 의흥회와 아편팜 도 급권을 따내기 위해 동맹을 맺었던 게 이를 잘 보여준다. 페낭의 건덕회는 비밀결사의 서약을 맺은 5대 가문과 밀접하게 연관됐다. 실상 건덕회는 5대 가문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고 확보 하기 위한 거상의 조직이었다. 5대 가문은 건덕회의 출범 이래 핵심 집단이었고, 사업기반을 보호하기 위해 건덕회를 동원했다(Wong 2007: 113). 건덕회는 페낭에 본부를 두고 태국(사툰, 트랑, 크라비, 푸켓), 버마 남부(마울메인, 메르귀, 타보이, 페구, 랑군), 수마트라 북동연안(아체, 델리, 랑캇, 아사한), 말레이반도 서부(케다, 페락) 등 동남아 전역에 지부를 뒀다. 지부 지도자는 5대 가문과 밀접하게 관 련된 현지 화인사회의 지도자이자 거상이었다. 페낭의 화인 거상들 은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비밀결사를 효과적으로 동원했고, 조 직의 공식적인 활동이 일어난 공간 이 콩시였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주석 호황은 페낭 화인에 의한 거상의 시대 를 열었 지만, 역설적으로 화상 신디케이트가 영국 식민정책에 의해 해체되 는 계기이기도 했다. 영국은 주석광산 개발권을 둘러싼 말레이 술탄 의 권력다툼과 화인 비밀결사의 개입을 빌미로 1874년 팡코르 조약 을 맺고 해협식민지를 통한 거점지배에서 말레이반도를 식민지화하 는 영역지배로 식민정책을 전환했다. 1877년 화인 문제를 전담하는 21) 화인 부자들은 말레이인 여성을 첩으로 두거나 사업상의 이유로 인도인이나 말레 이인과 정략적 통혼을 한 사례는 있다. 페낭 쿠씨의 지도자인 쿠티안포(Khoo Tian Poh)는 딸을 당시 아랍 상인이자 적십자사 리더였던 시에드 알라타스(Syed Alatas) 의 둘째 부인으로 삼게 했다. 페낭 의흥회 지도자였던 리힌(Lee Hin)의 아내는 말 레이계였다(Tan 2009: 13-14). 페낭의 무역업자 체아텍수(Cheah Tek Swee, 謝 德 水 ) 는 페낭의 해운업 거물인 인도 출신 무슬림 니나 메리칸 누르딘(Nina Merican Noordin)과 사돈을 맺었다. 체아의 딸을 누르딘의 아들과 혼인시킨 것이다. 체아는 혼맥을 이용해 인도양 해운업에 진출했다(Wong 2011).
아편, 주석, 고무 115 식민관료로 화인호민관제를 신설하고, 1889년 비밀결사법(Societies Ordinance)을 제정해 페낭의 의흥회, 해산회, 건덕회 등 핵심 비밀결 사를 해산시켰다. 22) 비밀결사 해산 이후 화인의 결사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화인사회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됐다. 무엇보다 비밀 결사의 해산은 페낭 거상의 중요한 사회적 자본 의 상실을 의미했 다. 페낭의 식민당국이 19세기 후반 화인 비밀결사의 폭력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23) 식민정부는 20세기 들어서는 화인 자본축적의 수단 이자 부를 증식하는 핵심 장치였던 징세청부제를 폐지하고 자유이 민을 규제했다. 식민당국과 서양 자본가들은 화인 비밀결사를 제국 속의 제국 (imperium in imperio) 이라며 비난의 표적으로 삼았다. 제국 속의 제국 은 사실상 국가 행세를 했던 영국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영국 의회가 비판할 때 쓰던 표현이었다. 19세기 후반 페낭의 거상 들은 서양 무역상과 지역 시장을 잇는 중간상 으로서의 화상이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을 뛰어넘어 서양의 자본과 경합할만한 경제 력을 확보했다. 화인 비밀결사를 제국 속의 제국 이라고 비난한 것 은 식민당국과 서양 자본이 주석개발을 통해 한층 공고해진 영국 22) 화인호민관(Protector of Chinese)을 화인들은 대인( 大 人 )으로 부르며 존중했다. 주 로 화인사회의 소소한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민 노동자의 임금과 계약 조건에 대한 호민관의 결정은 법적 효력을 지녔다. 초대 호민관을 지낸 피커링(W. Pickering)은 중국어와 복건어에 능통하고 1874년 팡코르조약 협상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피커링은 화인 분쟁을 중재하던 도중 비밀결사 의흥회의 사주를 받은 조주 인 목수가 던진 도끼에 맞아 불구가 되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Purcell 1967: 161) 23) 페락 라룻의 주석광 개발 이후 식민당국은 경찰력과 법을 동원해 비밀결사를 압박 하면서 당국과 화인 간 대결구도가 전개됐다. 1857년 3월 조지타운의 와양 극장에 서 경찰이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승강이가 벌어져 화인 1명이 죽고 인도인 세포이가 소총을 분실하며 부상하는 일이 사고가 났다. 식민당국은 화인 비밀결사가 경찰의 소총을 탈취해 중국에 선물로 보냈다며 과민 반응했고, 유럽 상인들은 차제에 비밀결사를 응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벌어졌다. 식 민당국은 화인사회의 탄원도 거부함으로써 화인 비밀결사들이 더 과감하게 행동 하도록 부추긴 꼴이 됐다. 이후 5년간 페낭에서 비밀결사와 식민정부의 대결구도 가 전개됐다.(Turnbull 2009: 40)
116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식민지 속의 화인 경제권 을 깨뜨리려는 속셈을 드러낸다. 비밀결 사=폭력집단 의 등식으로 화인 신디케이트의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약한 고리인 혈연 지연 방언 결사의 사회적 자본을 공략한 것이다. Ⅳ. 고무와 화인의 정체성 논쟁 19세기 아편과 주석의 만남으로 구축된 페낭 화인 거상의 시대 는 20세기 고무를 만나면서 와해됐다. 화인 거상들이 장악하고 있던 페낭 경제권은 말레이반도에서 서양 자본에 의한 대규모 고무나무 농원 경영으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무역업과 현대식 주식회사 경 영 기법을 결합한 유럽 자본은 해운회사와 세계고무시장의 연계를 통해 고무의 생산과 교역을 화인의 복잡한 교역망을 거치지 않고 국제 무역시장에 직접 연결하는 자신들의 교역망을 만들어냈다. 20 세기 고무 농원의 출현은 화인과 서양 자본의 대등한 경합관계에서 서양 자본의 압도적 우세로 역전됨을 의미했다. 달리 말해 고무로 대표되는 20세기 서양 제국주의의 전면적 공세로 페낭의 화인 경제 권은 기존의 경제적 자본은 물론 사회적 자본까지 무력해지는 파국 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주석광 개발이나 여느 농업 농원과 달리, 고무 농원은 처음부터 서양 자본이 시장을 만들고 투자와 경영을 주도했다. 원래 고무나무 의 원산지는 남미 아마존 지역으로, 1876년 영국인 헨리 위컴(Henry Wickham)이 고무나무 씨앗을 런던으로 가져와 이듬해 싱가포르와 말레이에서 시험 재배했다. 1895년 말레이에서 고무나무의 상업 재 배가 시작됐지만, 유럽 자본에 의한 대규모 고무 농원개발은 20세기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하면서부터였다.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유 럽 자본의 말레이반도 고무 농원 투자 규모는 해마다 7만 에이커
아편, 주석, 고무 117 이상 증가했다. 유럽 자본의 말레이 고무 농원 투자는 이전과는 전 혀 달랐다. 영국과 서양 자본가들이 런던 주식시장에서 자본을 조달 하고 인도인 노동자를 끌어들여 직접 경영하는 기업형 농원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에서 고무 나무 농원을 개발했다. 특히 말레이반도는 고무 채취를 위한 기후조 건이나 값싼 노동력을 유치하기 위한 조건이 브라질보다 뛰어나 이 내 세계 최대의 고무 원료 생산지가 됐다. 24) 페낭 화인 거상의 시대가 정점에 이르렀던 1890년대부터 주석광 업에서도 화인 거상들은 서양 자본의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영 국이 전진 운동(Forward Movement) 이란 이름으로 말레이반도에 대한 직접적 영역지배를 가속하고, 서양 자본이 기계식 주석 채광 등 기술 경쟁력과 우세한 자본을 앞세워 진출하면서 화인 거상의 경제적 기반은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19세기말 서양 자본 의 화인 주석광업 시장 잠식은 20세기 고무 농원 공세의 예고편에 불과했다(Chuleeporn 2009: 118). 서양 자본이 자본력과 식민당국의 지원을 업고 급속히 영향력을 키우면서 페낭의 지역 중계항의 역할 은 위축되고 화인의 영향력도 축소되었다. 페낭은 동서 해상교역로 의 독립적인 중계무역 중심에서 말레이반도의 항구로 변모했다. 페 낭과 말레이반도와의 교역 비중이 커지면서 페낭의 자율성이 줄어 든 것이다. 25) 아울러 서양 상인들의 영향력이 화인 거상을 압도하게 24) 19세기 말까지 고무의 용도는 벨트나 개스킷과 같은 산업용 부품, 골프 공와 신발 창 따위의 소비재이거나 자전거 타이어에 국한됐고, 브라질이 고무원료의 공급을 독점했다. 그러나 자동차의 타이어 수요가 급증하면서 유럽 자본은 동남아의 대규 모 고무나무 농원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Frank, Zephyr and Aldo Musacchio. "The International Natural Rubber Market, 1870-1930 " EH.Net Encyclopedia. http://eh.net/encyclopedia/article/frank.international.rubber.market (검색일: 2013. 09.30) 25) 페낭의 전체 교역 가운데 수입의 경우 말라야의 주에서의 수입 무역 비중은 1890년 18.5%에서 1902년 35.5%로 급증했고, 이후 1917년까지 30-40%의 비중을 유지했다. 이는 이 기간 서양 시장을 향한 말레이 수출상품과 말레이 시장을 향한 서양 수입상품
118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됐다. 20세기 고무나무 농원으로 대표되는 서양 자본의 직접 지배로 페낭과 화인사회는 19세기의 상대적 자율성을 잃고 거대한 대영제 국과 국제 교역체제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서양 자본에 의한 고무농원의 파급력은 전방위적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말레이반도에 대한 영역지배로 전환한 영국은 화인의 자 본-노동-교역 네트워크를 지탱해준 각종 장치들을 차례차례 해체했 다. 비밀결사의 해산과 아편팜 등 징세청구의 폐지가 결정적으로 식민정부와 화인 사회 간의 기존 틀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페낭의 화인 거상들은 서양 자본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화상 신디케이트의 원천을 상실했다. 화인 거상의 손발이 묶인 셈이다. 19세기에 식민당국은 화인의 자본과 노동력이 식민지 경영과 대영 제국의 국부 증진에 필수적인 요소라며 화인사회에 상대적 자율성 을 부여했었다. 이러한 식민당국과 화인의 관계가 20세기 들어 역전 된 것이다(Loh, 2009:84-88). 1890년 후반에 시작된 이런 흐름은 20 세기 들어 페낭 경제권을 서양 자본의 압도적 우세로 급격하게 바꿔 놓았다. 장거리 대양간 해운에만 주력해온 서양 자본은 화인이 주도 해온 연안 해운까지 파고들며 역내 상권까지 잠식할 정도로 화인들 을 압박했다. 서양 자본의 압박에 대해 페낭의 화인사회가 받은 충격은 싱가포 르보다 심각했다(Chuleeporn 2009: 110). 이는 페낭과 싱가포르가 같은 영국의 해협식민지였지만 태생적으로 달랐던 탓이다. 조지타 운 거리가 보여주듯, 페낭은 각지에서 몰려든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 들이 어울려 건설됐다. 이민자의 자율성이 인정된 식민지였다. 반면 영국은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페낭보다 싱가포르 경영에 훨씬 더 비중을 뒀다. 싱가포르는 애초 도시 설계에서부터 페낭과 달리 이 페낭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뜻한다.(Chuleeporn 2009: 103)
아편, 주석, 고무 119 인종에 따라 주거지역을 구획했다. 식민당국의 통치 강도도 싱가포 르가 페낭보다 강했고, 당연히 서구 자본의 이해도 싱가포르에 집중 됐다. 19세기 초 싱가포르에 진출한 서양 기업들이 페낭에 지점을 개설한 것은 주석 붐이 인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싱가포르가 일찌 감치 서양 자본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면 페낭은 서양 자본의 지배에 서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 직접지배와 서양 자본의 경제권 잠식에 대한 페낭 화상의 대응은 응전과 순응의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일부 전통적인 거상들은 축적한 자본과 교역기반을 바탕으로 서양의 자본집약적 방식으로 서양 자본에 맞섰지만 결과는 대체로 파국이었다. 해운 회 사의 덩치를 키우고 주석 제련 등에 투자하며 대항했지만 서양의 자본과 기술력을 당하지 못했다. 다른 갈래는 대세를 받아들여 순응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페낭 점령 초기처럼 서양 자본의 중 간상으로 역할을 축소하거나 서양 자본이 눈독을 들이지 않는 벼 농원, 식용유 정유 등의 사업영역으로 눈을 돌렸다. 또는 고무 농원 으로 인한 교역 방식의 변화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하기도 하고, 서구 공장제 수입품 거래로 신흥 부자의 반열에 오른 중소 무 역상도 있다. 20세기 초 페낭 경제권의 지각변동으로 화인의 경제적 영향력은 위축됐고, 화인 경제계 내부의 세력균형도 무너지게 됐다. 거상의 시대를 구가했던 기존의 화상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부 상하는 신흥 화상에게 밀려났다(Chuleeporn 2009: 110-112). 요컨대 20세기 초 페낭의 화상과 서양 상인의 관계 변화는 화인중심으로 짜인 페낭의 기존 교역 질서에 서양 자본이 침투하면서 생긴 결과였 다. 서양 자본은 기존 화인의 경제적 근거지에서 화인을 몰아냈다. 자율적인 화인의 경제권(enclave)을 해체하고 그들이 새로 장악한 경제 질서의 틀 안에 화인들을 강제로 편입시킨 것이다. 고무 농원으로 촉발된 변화는 페낭 화인사회에 경제적 영향 못지않
120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은 정치적, 사회적 파급력을 발휘했다. 전통적인 화인 거상들이 서양 자본의 압박으로 영향력을 잃으면서 새로운 세력이 떠올랐다. 이는 20세기 초 중화 민족주의의 확산과 맞물리면서 페낭 태생의 해협화인 (Straits Chinese) 또는 토생화인(peranakan cina, Baba-Nyonya)과 중국 태생의 신객화인(Sinkeh, 新 客 )의 갈등 양상으로 표출됐다. 20세기 초 페낭의 화인사회는 이 둘로 갈라지는 분열상을 보였다. 통상 해협 화인은 일찍이 페낭에 정착해 영어를 구사하고 말레이 문화를 받아들 였으며 1852년 영국 국적법에 따라 왕의 신민 이 되고, 친영적 정체성 을 지닌 페낭의 전통적 엘리트 화인을 지칭한다. 후자는 중국에서 태어나 페낭에서 기반을 다진 이민자들로 중국어를 구사하고 중국문 화를 고수하며 중국인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로 분류된다. 해협화인의 분류 기준으로 말레이와의 혼혈을 포함시키기도 한 다. 이는 페낭으로 온 화인 여성의 이민이 19세기 후반에야 허용됐 고, 남녀 성비가 극심한 불균형을 이룬 점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페낭 화인사회는 페낭 건설 이전 동남아에 정착했던 해협화인이 먼저 자리를 잡고 일시 체류 목적의 화인 노동 자 이민이 유입되며 형성됐다는 점에서 여느 동남아 지역의 화인사 회와 차이를 보인다. 더구나 양자의 갈등이 첨예해진 20세기의 해협 화인 가운데 실제 말레이인 혼혈은 그리 흔치 않았으며, 혼혈보다는 페낭에 오래 머물면서 말레이 문화를 수용하고 현지화한 화인을 해 협화인이라 보아야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Hirschman 1986: 338-339). 사실 신객을 해협화인과 대비하는 것도 20세기 초의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페낭에서 신객의 상 대어는 노객(Laokeh, 老 客 )이였다. 통상 신객은 막 페낭 땅을 밟은 화인 노동자나 일이 익숙하지 않은 신참 노동자를 가리켰다.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있던 페낭에서는 신객을 문화적으로 촌스럽다 는 뜻 으로 쓰기도 했다. 예컨대 페낭 토생화인들은 신객을 가리켜 세련
아편, 주석, 고무 121 되지 못한 자(tak halus) 라고 했고, 심지어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더 러 신커 빈 (sinkeh bin, 신객의 얼굴)이라고 놀리기도 했다(Khoo 2009: 73-74). 현지 문화의 동화 정도에 따라 구분되던 해협화인과 신객화인이 20세기 초에는 화인사회를 양분하는 별개의 두 집단으로 분류되며 정체성 갈등의 주체로 된 것은 당시의 경제적 격변과 떨어뜨려 보기 힘들다. 19세기 화인 노동자를 지칭하던 신객은 20세기 경제적 정치 적 격변의 와중에서 새롭게 부상하던 중국 출생의 신흥 상인과 자본 가를 대변하게 됐다. 해협화인에 대비되는 20세기의 신객은 19세기 의 노동자가 아니라 페낭 화인사회의 계층구조에서 상층부를 차지 하는 상인으로 대표된다고 보는 편이 더 온당할 것이다. 이들 두 화상 집단은 화인 경제권의 주도권을 놓고 편이 갈렸다. 20세기 초 페낭의 전통적 경제 엘리트였던 해협화인은 해협화영협 회(Straits Chinese British Association)로 집결했다. 이들은 당시 페 낭의 화인사회에서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식민당국은 영어로 말 이 통하는 이들을 여전히 화인사회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었다. 해협 화인들은 해협화영협회를 식민당국에 대한 압력집단으로 삼으려 했 으나 실패했다. 반면 신흥 화상 세력인 신객화인은 1903년 설립된 페낭화인상공회의소(Penang Chinese Chamber of Commerce, 檳 城 華 人 總 商 會 )를 장악했다. 화인상공회의소의 설립에는 자바에서 기반 을 닦아 페낭으로 진출한 신객 거상 청파쯔가 관여했고, 오늘날에도 페낭 경영인들의 핵심적인 단체로 기능하고 있다(Wong 2012). 중국 청왕조에서 관직도 받고 페낭의 중국 영사를 지낸 청파쯔의 행적을 통해서도 화인상공회의소가 친영적 정체성을 보인 해협화영협회보 다 친중적이었을 것임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해협화인과 신객화인의 갈등이 부각된 데는 정치적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화인사회 내부의 기득권
122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층과 신흥 세력 사이에 새로운 균형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1911년 신해혁명을 전후해 페낭도 중화 민족주의의 영향이 있었다. 손문( 孫 文 )은 1910년 싱가포르의 동맹회 지부를 페낭으로 옮겨 중국 혁명운 동의 동남아 본부로 삼으면서 중화 민족주의의 불을 댕겼다. 26) 현지 에는 여러 곳에 손문을 기념하는 상업화 된 사적지가 있고, 이를 관광과 결부시키고 있다(도 4-1,2). 두 화인 집단 간 갈등의 요인으로 영국 식민당국의 인종주의도 무시할 수 없다. 페낭 화인사회 내부에 친영과 친중의 구별이야 있었겠지만, 식민당국이 이를 과도하게 증 폭시켰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영국 식민당국은 중화 민족주의로 촉 발된 페낭 화인사회의 친중적 정체성을 과대 포장함으로써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종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던 말레이인에게 반화인 인종주의를 전파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27) 윌리엄 스키너도 유럽인들의 반중국적 인종주의가 현지의 반중국적 민족주 의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Skinner 1957: 161-161). 그러나 20세기 초 페낭 화인 상인계층 내부의 경제적 이해 관계를 배제한 채, 화인사회의 친영-친중 정체성 갈등에만 주목하는 것은 영국이 설정한 인종주의의 틀에 갇힐 개연성이 다분하다. 28) 26) 손문이 1910년 11월 페낭에서 개최한 집회에서 8000 해협달러의 성금이 모였다. 적지 않은 해협화인들도 손문을 지지했다. 이 집회에서 무심코 영국 정부가 싱가포 르와 페낭의 화인들을 몰아내려 한다고 말한 손문의 발언 내용이 그해 12월 페낭의 영어신문 <스트레이트 에코(Strait Echo)>에 보도되는 바람에 손문은 페낭에서 추 방됐고 해협화인의 지지도 잃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몰락했을 때 페낭 의 화인사회는 1000여명이 모여 혁명 축하 모임을 열기도 했다(Turnbull 2009: 47) 27) 찰스 허쉬만은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과 인종주의(racial ideology)를 구분 하며 영국의 말레이 식민정책은 후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Hirschman 1986: 337) 28) 20세기 초 페낭 화인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20세기 후반 세계화의 확산과 중국의 개방을 계기로 관심이 집중됐던 동남아 화인의 중화 정체성 논란의 미로에 빠질 수 있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동남아 화인의 경제력의 결합할 가능 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동남아 화인의 정체성에 대해, 한번 중국인이면 영원 히 중국인이라는 의미의 낙엽귀근( 落 葉 歸 根 ) 이니, 현지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 사 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뜻의 낙지생근( 落 地 生 根 ) 이니 하는 4자성어가 유행했
아편, 주석, 고무 123 페낭의 화인들은 1957년 말레이시아 독립 이후 자의든 타의든 중국 계 말레이시아인(Chinese Malaysian) 이 됐다. 29) (도4-1) 손문 기념관 내부, 20세기 초 교육 문제도 갈등의 한 축을 차지한다. 1904년 말레이반도에서 최초로 페낭에 신식 중국어학교가 문을 열었고, 1917년부터는 중국 다. 심지어 화인의 현지 문화 동화와 관련해 참초제근( 斬 草 除 根 ) 이란 말도 나왔 다. 민족 정체성도 문화적 유산도 모조리 사라진다는 뜻이다.(Wang 2003: ix-xi) 그러나 화인 대 중국, 화인 대 토착사회의 잣대로 규정한 화인의 정체성이 실제 화인들의 삶과 얼마나 부합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29) 국적과 출신 인종을 올바르게 표현한다면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이 바르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의 종족정치 구도는 여전히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뜻하는 말레이 화인(Malay Chinese) 이란 표현이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있다. 2차 대전 이 후 만들어진 국가 라는 점과 화인문제에서도 말레이시아와 공통점을 지닌 인도네 시아에서는 1998년 수하르토 체제 붕괴 이후 인종으로 구분하던 토착과 비토착 (pribumi- non pribumi)의 구분을 없앴다(신윤환 2000). 그러나 말레이시아에선 말 레이인, 말레이 화인, 말레이 인도인으로 구분한다. 이에 따라 화인 연구자 가운데 에는 중국 국적의 해외 거주민 즉 화교( 華 僑 )의 의미를 지닌 Overseas Chinese 대신 외국 국적의 화인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자는 뜻에서 Chinese Overseas 를 쓰기도 한다.
124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의 만다린운동과 더불 어 화인 공립학교에서 만다린이 공식언어로 채택됐다. 하지만 중국 어학교에는 영국 식민 정부의 입장에 맞게 가 르칠 교사와 교재가 없 었다. 중국어학교의 교 사는 모두 중국에서 교 육받은 신객이었고, 교 과서 또한 중국에서 본 토 학생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었다. 교과서에 페낭과 말레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 은 당연했다. 게다가 중 화 민족주의와 혁명을 (도4-2) 손문 사적순례 안내판 고취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렸다. 페낭 교육당국은 별도의 중국어 교 재를 만들려고 했으나 인쇄소가 없었다(Purcell 1965: 154-156). 하지만 영어교육이나 중국 전통문화의 이탈 여부로 해협화인과 신객화인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도식적인 해석일 수 있다. 19세기 초부터 영어 학교가 운영된 페낭에서 영어 교육은 해협화인과 신객 화인의 구분을 떠나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겨졌다. 신객화인도 자녀 를 영어 학교에 보내곤 했다. 페낭에서 발행된 중국어 신문 <빈성신 보( 檳 城 新 報 )> 1895년 9월26일자에 따르면, 1895년 페낭의 영어 학 교 재학생 총 600여명 가운데 화인 학생이 500명에 달했다( 李 恒 俊, 2009). 이는 화인들의 교육열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
아편, 주석, 고무 125 어교육이 친중과 친영의 정체성 문제와 반드시 결부할 필요는 없음 을 드러낸다. 페낭에서 태어나 영어교육을 받고 1920년대 페낭 식민 정부의 통역관이었던 해협화인은 여전히 중국식 음력절기를 지켰으 며, 심지어 그의 집에 페낭의 기후와는 무관한 대한( 大 寒 ) 이 표기 된 달력이 걸려 있었다(Purcell 1965: 175-176). 해협화인들은 자녀 의 혼사에서 사위를 맞을 때는 출신 지역이나 재산의 과다에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며느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출신 지 역을 살폈는데, 집안의 여자는 관습과 전통의 수호자라는 인식 때문 이었다(Khoo 2009: 72-73). 출생지나 교육, 문화적 동화를 기준으로 친중과 친영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20세기 초 페낭 화인사회를 갈라놓았던 해협화인과 신객화인 간 정체성의 원인을 친영-친중, 영어-중국어의 정치적 문화적 요인보다 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요인에서 찾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두 집단 은 고무 산업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자본과 기술의 급속한 팽창으로 기존 화인 경제권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전통적인 거상 과 새로운 기회를 포착한 신흥 화상 세력의 이해를 대변한다. 화인 사회 내부의 상인 집단 사이에서 친영과 친중의 정체성 구분은 부차 적일 수 있다. 당시 경제의 틀이 바뀌는 격변기에 화인 상인과 자본 가의 주요 관심사는 경제적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페낭 화인사회 계 층 피라미드의 상층부에서 경제적 이해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부 갈 등이 정치적 정체성 논란의 형태로 표출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Ⅴ. 맺음말 페낭주립박물관 입구에는 그들은 전 세계에서 왔다 는 현판이
126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걸려있다. 현판이 말하는 것처럼 페낭의 역사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이주와 합류( 合 流 )의 과정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모여 오늘의 페낭을 만들었다. 페낭 사람들은 스스로 지 구상의 독특한 곳에 일궈낸 다문화적 유산의 계승자 로 여긴다고 한다. 페낭에 모여든 것은 단지 사람만이 아니며, 그들의 문화가 복 잡하게 얽혀서 새로이 창조되고, 교차됐다. 화인들의 이주는 전근대 와 근대, 서양과 동양의 교차로 페낭에서 갈등하고 조화를 이루며 역사의 조류를 탔다. 본고는 이러한 페낭 화인사회의 역동적인 전개 과정을 아편과 주석, 고무라는 세 가지 필터로 들여다본 것이다. 이 는 페낭 화인사회의 자본축적 과정, 신분질서와 교묘하게 결합된 화 상과 비밀결사의 관계, 새로 유입된 2차 이주의 물결과 신객 화인의 정체성 및 화인 간의 갈등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필요성을 제 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인의 경제적 성취 뒤편에는 19세기 초 화인이 화인에게 아편을 권하며 수탈한 과거가 숨어 있다. 소수의 화상이 아편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절대 다수의 화인 노동자는 그 대가로 아편에 중독되어 노동의 악순환을 이어갔다. 이는 영국 식민당국이 페낭 지배를 가능 하게 했던 징세제도와 밀접하게 관련이 된다. 화인사회의 경제적 영 향력은 아편으로 대표되는 폭력적인 원시적 자본축적 과정을 빼놓 고는 설명될 수 없다. 이러한 구조는 주석광 개발과 맞물려 돌아갔 다. 화상은 서양 식민주의자에 봉사하는 중간상이나 중개상이라는 소극적 이미지로 알려졌으나 19세기 중후반의 페낭 화인사회는 이 와 달랐다. 그들은 왜곡된 방법이지만 거상의 시대를 열고 동등한 입장에서 서양 자본과 경합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서양 자본에 맞선 화인 거상의 입장에서 보면 화인 비밀결사도 19세기 페낭 화인의 경제력 확장을 위한 불가피한 장치 내지 필요악으로 볼 수 있다. 페 낭 화인의 콩시와 방파적 속성 또한 화인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자
아편, 주석, 고무 127 본 이자 자원적 결사로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페낭의 화상들이 한 세기에 걸쳐 아편을 팔아 자본을 모으고 비밀 결사를 동원해 구축한 거상의 시대도 고무농원의 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의 산업자본과 제국주의의 압박에 무기력해졌다. 에릭 홉스봄은 1914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까지의 세계사를 극단의 시대 로 향하는 파국의 시대 로 규정한 바 있지만(홉스봄 1997: 19), 이 시기 페낭의 화인사회야말로 한 세기에 걸쳐 복잡한 경제권을 구축한 화인 거상의 시대 가 와해되는 파국의 시간이었 다. 여기서 파국은 화인 경제권과 경제적 영향력이 붕괴되었다는 의 미가 아니다. 지역 교역권을 주도하며 서양 자본과 경합하던 전통적 인 화인 거상의 영향력이 위축되고, 서양 자본과 경합하지 않는 사 업영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뜻이며, 19세기 에 구축된 화인 경제권의 틀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파국의 시대는 한편으로 신흥 화상에게는 기회였다. 본고는 20세기 초 페낭에서 토 생화인과 신객화인 사이에 벌어졌던 정체성 논란도 기존 화인 경제 권이 와해되는 파국의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정체 성 논란이 복잡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층위를 갖고 있지만, 전통 거상과 신흥 화상의 갈등이 친영 대 친중의 외피를 두르고 표출되었 다고 본 것이다. 아편과 주석, 고무로 살펴본 페낭 화인사회의 역동성은 21세기의 화인사회를 이해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20세기 후반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세계화(globalization)의 흐름을 타고 페낭의 화인사회도 새 롭게 주목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3국 정부가 주도 하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 성장 삼각지(IMT-GT) 구상에 서 페낭은 중심을 차지한다. 이러한 소지역주의의 담론에서 페낭과 태국 남부 송클라, 파타니의 도로 건설이 본격화하면서 이전에 페낭 화인사회가 건설했던 말라카해협 북단의 지역 교역망이 재구축될
128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조짐을 보이고 있다(King 2009: 131). 30) 아울러 페낭 조지타운의 세 계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페낭과 싱가포르 등 말라카해협의 화인 사회를 중심으로 페라나칸 문화 에 대한 재조명도 활발하다. 155년 에 걸친 페낭 화인사회에 대한 시론적 검토는 이후 일본군점령기와 말레이시아 독립 이후 화인사회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새로 운 전망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주제어: 페낭, 화인, 아편, 주석, 고무, 페라나칸, 신객 <참고문헌> 신윤환. 2000. 인도네시아의 화인: 경제적 지배와 정치적 배제 사이 에서. 박사명 박은경 신윤환 오명석 전경수 조흥국. 동남 아의 화인사회. 전통과 현대. 424-474. 에릭 홉스봄 저, 이용우 역. 1997.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상권. 까치. 오명석. 2000. 말레이시아 화인사회: 다종족국가 내에서의 공존과 갈등.. 박사명 박은경 신윤환 오명석 전경수 조흥국, 동남 아의 화인사회. 전통과 현대. 186-312. 피에르 부르디외. 2006. 자본의 형태. 유석춘 장미혜 정병은 배영 공편역, 사회자본:이론과 쟁점. 도서출판 그린. 61-88. 30) 1990년대 초 태국 말레이시아 국경 개발의 신시대가 열렸다. 이 지역은 낙후된 지역에서 역동적인 교역 경제구역으로 재개념화됐다. 말레이시아 북부 주와 말레 이인이 많이 거주하는 태국 남부의 주들이 양국 정부 차원에서 전통적인 경제관계 를 재구축하게 된 것이다. 1996년 오마에 겐이치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관점에 서 IMT-GT 프로젝트는 점증하는 국경없는 세계에서 3국의 주변부가 보다 중심적 인 위상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마에 겐이치는 당시 마하티르 말레 이시아 총리의 자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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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주석, 고무 133 <Abstract> Opium, Tin, and Rubber: The Formation of Chinese Society in Penang, 1786-1941 Kang, Heejung (Sogang University) This paper examines the formation and evolution of Chinese society in Penang over 155 years. Since it was ruled by the British in 1786, many immigrants gathered in Penang. Among them, much of the population was Chinese. It could be offered to clarify the historical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Chinese society in Penang by paying attention to the three items - opium, tin, and rubber. All the conflict and friction over these products were main causes of prosperity and decay for the Chinese society in Penang. In the early 19th century, the Chinese colossus could get their capital accumulation by taking advantage of opium farm. They amassed their fortune through development of tin mines newly discovered in Perak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It was the age of Chinese Colossuses deeply connected with Chinese secret societies. After the rubber plantations were developed by the Western capital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age of Chinese Colossuses was gradually fallen down. From this point of view one can be provided a new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Penang and the Chinese society of its own. The three scopes for history enable us to make
134 동남아시아연구 23권 3호 a new interpretation about the issue of stratification within Chinese society in Penang. Especially this research focused on the economic characteristics of Chinese secret societies as social capital, and on the identity conflicts between traditional Strait Chinese(peranakan) elite and emerging sinkeh Chinese merchants. The identity problem between Laokeh and Sinkeh in the early 20th century was intentionally exaggerated by modern researchers. Their conflicts seems to be caused by different economic interests rather than identity. We need to consider again the rise and fall of Chinese society in Penang with flexible thinking. Key word: Penang, Chinese, opium, tin, rubber, peranakan, sink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