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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Transcription:

개 회 사 안녕하십니까? 먼저 2006년 국민적 관심 속에 출범한 동북아역사재단과, 우리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함께 국제학술회의를 조직하게 된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영광 스럽게 생각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정재정 이사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인 하대학교 박춘배 총장님께서 특별히 귀중한 시간을 내어 환영사를 해주시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동아시아의 역사화해와 평화번영을 위해 2008년부터 5 개년 계획으로 전쟁과 관련 있는 유적이나 기념시설, 그리고 동북아 평화를 주제 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해 왔습니다. 그동안 중국, 일본, 대만 등지의 전문가들을 초청한 국제학술회의에 저도 참석한 바 있었고, 이제 마지막 결산의 무대를 [동아 시아의 전쟁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인천에서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천에서 동아시아의 전쟁기억에 대해 학술회의를 갖는 것은 상당한 이유가 있 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은 개항장에서 시작된 근대도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인천지역, 경기만 일대에서는 역사적으로 전쟁이 참 많이 일어났습니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저항했고, 조선시대에는 壬 辰 倭 亂 (1592)과 丁 卯 胡 亂 (1627) 때 경기도의 주민들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戰 禍 를 면했습니다. 丙 子 胡 亂 (1636) 때는 강화도마저 쑥대밭 이 되어 수많은 부녀자들이 투신자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굴비 묶이듯이 묶여 만주의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래도 강화도만한 피난처가 없다 하여 그 후 100여년에 걸쳐 강화도를 요새화했습니다. 內 城, 中 城, 外 城 을 쌓고, 강화도 둘레 를 지키는 외성에 12개 鎭 堡 와 53개 墩 臺 를 구축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프랑 스 함대(1866)와 미국 함대(1871)가 침공하여 강화도를 점령한 사건이 발생하고, 덕적도 앞바다에서 최초로 청일전쟁(1894)이 개시되었고, 팔미도 해상에서 터진 제물포해전이 러일전쟁(1904)의 시작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6 25전쟁(1950) 때 는 인천상륙작전이 월미도를 거쳐 그 양쪽 해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최근에는

서해교전, 연평도 포격사건, 천안함 사건 등이 인천해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천지역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중요한 전쟁이 인천해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전쟁의 기억을 더듬고 트라우마를 넘어서기 위한 학술회의를 열게 된 것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뜻 있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동북아역사재단의 목표가 동아시아 국가간의 역사분쟁을 상생적으로 조정하 는 연구기관이고, 한국학연구소는 동아시아 상생과 소통의 한국학 이라는 아젠다 를 가지고 2007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지원사업의 연구소로 선 정되었기 때문에, 아젠다의 공통성을 가지고 두 기관이 동아시아의 여러 전문가들 을 모시고 학술회의를 공동 개최하는 것은 아젠다 확산에 큰 기여가 될 것입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근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세계가 경험한 전 쟁에 관한 상이한 기억들을 재구성하여 평화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모색 하려고 합니다. 동아시아 각국에 각인된 서로 다른 전쟁 상처를 재확인하는 작업 을 넘어서, 전쟁의 과정을 통해 대두한 소통과 연대의 흔적도 찾아보려 합니다. 동아시아 각국과 국내 각 대학에서 참여해주신 교수님, 연구자 여러분, 대회 개 최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오늘 참석한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7년 12일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소장 이영호( 李 榮 昊 )

開 会 の 辞 皆 様 こんにちは まず 2006 年 国 民 的 関 心 の 中 で 発 足 した 北 東 亜 歴 史 財 団 と 仁 荷 大 学 校 韓 国 学 研 究 所 が 力 をあわせて 国 際 学 術 会 議 を 組 織 するようになったことを 大 変 嬉 しく ま た 光 栄 に 思 います 北 東 亜 歴 史 財 団 の 鄭 在 貞 理 事 長 のご 配 慮 に 感 謝 いたします また 貴 重 な 時 間 を 割 いて 歓 迎 の 言 葉 をしてくださる 仁 荷 大 学 校 の 朴 瑃 培 総 長 に 感 謝 いたします 北 東 亜 歴 史 財 団 では 東 アジアの 歴 史 和 解 と 平 和 繁 栄 のために2008 年 から5 年 計 画 で 戦 争 にかかわる 遺 跡 や 記 念 施 設 そして 北 東 アジアの 平 和 をテーマに 国 際 学 術 会 議 を 開 催 してきました これまでの 中 国 日 本 台 湾 等 の 専 門 家 を 招 いた 国 際 学 術 会 議 には 私 も 参 加 したことありますが 東 アジアの 戦 争 記 憶 トラウマを 越 えて をテーマにその 最 終 決 算 を 仁 川 を 舞 台 にして 行 うことになりました 仁 川 において 東 アジアの 戦 争 記 憶 にかんする 学 術 会 議 を 行 うことには 相 当 な 理 由 があると 思 います 仁 川 を 開 港 場 から 始 まった 近 代 都 市 と 思 っている 方 々も 少 なくあり ませんが 仁 川 地 域 京 畿 湾 一 帯 は 歴 史 的 にみて 戦 争 が 多 発 したところでありま す 高 麗 時 代 にはモンゴルの 侵 略 を 避 けて 江 華 島 に 都 を 移 し 40 年 という 長 い 時 期 にわたって 抵 抗 をつづけたことがあり 朝 鮮 時 代 には 壬 辰 倭 乱 (1592)と 丁 卯 胡 乱 (1627)の 際 京 畿 道 の 住 民 が 江 華 島 に 避 難 して 战 祸 を 免 れたこともありま す また 丙 子 胡 乱 (1636)の 時 には 江 華 島 まで 廃 墟 のようになり 数 多 くの 婦 女 子 が 飛 び 降 り 自 殺 し 生 き 残 った 人 々は 縄 で 縛 られて 一 列 に 立 たされ 満 州 の 瀋 陽 に 連 れ 去 られてしまいました それでも 江 華 島 に 勝 る 避 難 所 はないとし その 後 100 年 以 上 にわたって 江 華 島 を 要 塞 化 しました 内 城 中 城 外 城 を 築 き 江 華 島 の 周 囲 を 守 る 外 城 に12の 鎭 堡 と53の 墩 台 を 構 築 しました 19 世 紀 後 半 にはフランスの 艦 隊 (1866)と 米 国 の 艦 隊 (1871)が 侵 攻 して 江 華 島 を 占 領 した 事 件 が 発 生 し 徳 積 島 沖 では 日 清 戦 争 (1894)の 最 初 の 戦 闘 が 行 われ 八 尾 島 の 海 上 で 起 き た 済 物 浦 海 戦 は 日 露 戦 争 (1904)の 始 まりでした ご 周 知 のように6 25 戦 争 (1950)では 仁 川 上 陸 作 戦 が 月 尾 島 を 経 てその 両 岸 において 行 われました

最 近 では 西 海 交 戦 延 坪 島 砲 撃 事 件 天 安 艦 事 件 等 が 仁 川 の 海 域 で 起 こりまし た 仁 川 地 域 ではまだまだ 戦 争 が 続 いているのです. このように 東 アジアの 主 要 な 戦 争 が 起 こりつづけてきた 仁 川 において 戦 争 の 記 憶 をたどってトラウマを 乗 り 越 えるための 学 術 会 議 を 開 くことになったことは 地 政 学 的 にみて 非 常 に 意 味 深 いことと 思 います また 北 東 亜 歴 史 財 団 は 東 アジア 諸 国 間 の 歴 史 紛 争 を 相 生 的 に 調 整 する 研 究 機 関 を 目 指 しており 韓 国 学 研 究 所 は 東 アジアの 相 生 と 疎 通 の 韓 国 学 というア ジェンダをかかげて2007 年 から10 年 間 韓 国 研 究 財 団 人 文 韓 国 支 援 事 業 の 研 究 所 に 選 定 されまた 両 機 関 がアジェンダの 共 通 性 を 踏 まえ 東 アジアの 多 くの 専 門 家 をお 招 いて 共 同 で 学 術 会 議 を 開 催 することは アジェンダの 拡 散 に 大 いに 貢 献 す ると 期 待 します 今 回 の 学 術 会 議 では 近 世 以 降 現 代 に 至 るまで 東 アジア 世 界 が 経 験 した 戦 争 の 異 なる 記 憶 を 再 構 成 し 平 和 と 相 生 へ 進 む 可 能 性 を 模 索 しようとしています 東 ア ジア 各 国 に 刻 印 されたあい 異 なる 戦 争 の 傷 を 再 確 認 する 作 業 を 越 え 戦 争 の 過 程 で 台 頭 した 疎 通 と 連 帯 の 痕 跡 も 探 ってみようと 思 います 東 アジアの 各 国 及 び 国 内 の 各 大 学 から 参 加 してくださった 研 究 者 の 皆 様 大 会 開 催 のために 努 力 してくださった 関 係 者 の 皆 様 そして 今 日 の 会 議 に 参 加 してくだ さったすべて 方 々に 心 より 感 謝 申 し 上 げます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2012 年 7 年 12 日 仁 荷 大 学 校 韓 国 学 研 究 所 所 長 李 榮 昊

开 幕 词 各 位 教 授 和 专 家, 大 家 好 这 次 仁 荷 大 学 韩 国 学 研 究 所 能 够 和 东 北 亚 历 史 财 团 一 起 举 办 国 际 学 术 会 议, 我 们 为 此 倍 感 荣 幸 感 谢 东 北 亚 历 史 财 团 鄭 在 貞 理 事 长 的 关 心 和 支 持, 也 感 谢 仁 荷 大 学 朴 瑃 培 校 长 先 生 特 地 挤 出 宝 贵 的 时 间 到 此 致 欢 迎 词 东 北 亚 历 史 财 团 从 2008 年 开 始 实 施 了 五 年 计 划, 并 多 次 举 办 了 以 战 争 遗 址 纪 念 设 施 以 及 东 北 亚 和 平 为 主 题 的 国 际 学 术 会 议 这 期 间 我 也 参 加 过 邀 请 中 国 大 陆 日 本 台 湾 等 地 的 专 家 们 召 开 的 国 际 学 术 会 议, 这 次 作 为 最 后 的 总 结, 以 东 亚 战 争 的 记 忆, 超 越 创 伤 为 主 题 的 学 术 会 议 在 此 地 仁 川 召 开 了 在 仁 川 举 办 关 于 东 亚 战 争 记 忆 的 学 术 会 议, 我 认 为 是 十 分 有 意 义 的 很 多 人 认 为 仁 川 是 从 开 港 开 始 发 展 的 近 代 都 市, 实 际 历 史 上 仁 川 地 区 和 京 畿 湾 一 带 发 生 过 多 次 战 争 高 丽 时 代 为 了 避 开 蒙 古 的 侵 略 还 曾 迁 都 到 江 华 岛 并 战 斗 了 40 年, 朝 鲜 时 代 的 壬 辰 倭 乱 (1592) 和 丁 卯 胡 乱 (1627) 时, 京 畿 道 的 居 民 们 为 了 躲 避 战 乱 也 纷 纷 逃 到 江 华 岛 丙 子 胡 乱 (1636) 时, 江 华 岛 也 陷 入 了 战 乱, 无 数 的 妇 女 和 孩 童 投 身 自 杀, 存 活 下 来 的 人 们 则 被 遣 送 到 了 满 洲 沈 阳 不 过 江 华 岛 依 然 是 个 绝 好 的 避 难 处, 之 后 的 百 年 间 江 华 岛 的 要 塞 性 不 断 地 被 强 化 着 不 但 建 设 了 内 城 中 城 和 外 城, 还 在 环 绕 江 华 岛 的 外 城 上 构 筑 了 12 个 镇 堡 和 53 个 墩 台 19 世 纪 后 半 发 生 了 法 国 舰 队 (1866) 和 美 国 舰 队 (1871) 侵 占 江 华 岛 的 事 件, 在 德 积 岛 附 近 海 域 爆 发 了 甲 午 战 争 (1894), 在 八 尾 岛 附 近 海 域 爆 发 的 济 物 浦 海 战 则 是 日 俄 战 争 (1904) 的 开 始 众 所 周 知 6.25 战 争 (1950) 时 的 仁 川 登 陆 作 战 是 经 由 月 尾 岛 在 其 附 近 海 岸 上 展 开 的, 最 近 的 西 海 交 战 延 坪 岛 炮 击 事 件 和 天 安 舰 事 件 等 也 是 在 仁 川 海 域 发 生 的 仁 川 地 区 的 战 争 还 在 进 行 中 如 上 所 述 东 亚 有 很 多 重 要 的 战 争 都 是 在 仁 川 海 域 上 发 生 的 为 了 梳 理 战 争 的 记 忆, 为 了 超 越 创 伤 而 举 办 的 这 次 学 术 会 议 从 地 政 学 角 度 上 来 看 也 是 非 常 有 意 义 的

东 北 亚 历 史 财 团 是 从 相 生 的 角 度 调 整 东 亚 各 国 历 史 纷 争 的 研 究 机 关, 韩 国 学 研 究 所 是 在 2007 年 被 选 定 为 韩 国 研 究 财 团 人 文 韩 国 支 援 事 业 的 研 究 所, 十 年 期 间 都 将 以 东 亚 相 生 和 疏 通 的 韩 国 学 为 议 题 拥 有 相 似 议 题 的 两 个 机 关 邀 请 东 亚 各 地 的 专 家 共 同 举 办 学 术 会 议 定 会 给 议 题 扩 大 带 来 巨 大 的 贡 献 这 次 学 术 会 议 将 重 组 近 代 到 现 代 与 东 亚 世 界 经 历 的 战 争 相 关 的 各 种 不 同 记 忆, 并 探 索 和 平 共 处 的 可 能 性 这 次 会 议 不 仅 仅 局 限 于 再 次 确 认 深 刻 于 东 亚 各 国 的 来 自 战 争 的 创 伤, 更 要 寻 找 战 争 带 来 的 疏 通 和 年 代 的 痕 迹 与 会 的 来 自 东 亚 各 国 和 国 内 各 大 学 的 教 授 研 究 员 各 位, 为 了 大 会 举 办 而 费 心 的 各 位 工 作 人 员 们, 还 有 今 天 到 场 的 所 有 人, 在 这 里 我 向 大 家 致 以 深 深 的 谢 意 谢 谢 大 家 2012 年 7 月 12 日 仁 荷 大 学 韩 国 学 研 究 所 所 长 李 荣 昊

환영사 안녕하십니까? 인하대학교의 한국학연구소가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국제학술회 의가 우리대학에서 열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참석하신 여러분들을 환 영합니다. 특히 동북아역사재단 정재정 이사장님과 한국학연구소장 이영호 소장 님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드립니다. 중국 베이징 대학의 쉬용( 徐 勇 ) 교수님, 일본의 도미야마 이찌로( 富 山 一 郞 ) 교 수님, 대만의 리청지( 李 承 機 ) 교수님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 대만, 그리고 국내 여러 대학에서 오신 저명하신 교수님과 연구자 여러분, 여름휴가를 할애하여 본 대학에서 개최되는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주신데 대해 인하대학교 총장으로써 환영의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올해 창학 58년을 넘어 이제 곧 회갑을 맞는 우리 인하대학교는 110년 전 인천 을 떠나 하와이로 이주해간 우리 교민들이 조국 근대화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뿌 린 씨앗이 개화하여, 6 25전쟁의 폐허에서 공업입국 을 목표로 설립된 민족의 대 학입니다. 하와이 교민의 지원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정부의 막대한 자금과 설비 지원, 유력 기업체의 지원, 초등학생에서 군인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지원과 성 원에 힘입어 1954년 인하공과대학으로 출발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공과대학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71년부터 종합대학교로서 승격된 후 각종 연구시설의 확장, 우수 교수진의 확보 등을 통해 전국 대학 톱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대학은 세계 100대 대학으로의 진입을 목표 로 오늘도 매진하고 있습니다. 한국학의 국제화 를 목표로 1986년에 출범한 우리 대학의 한국학연구소는 인천 으로부터 동아시아와 세계로 이어지는 한국학 연구의 중핵을 담당하는 연구기관 으로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특히 한국학연구소가 동아시아 상생과 소통의 한국학 을 핵심의제로 내걸어 2007년부터 정부로부터 인문한국 (Humanities Korea) 연구소 로 선정되었습니다. 우수 연구 인력을 육성하고, 핵

심의제를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 확산하는데 기여하는 연구소가 될 것으로 믿 고 있습니다. 오늘 학술회의의 주제는 [동아시아의 전쟁기억]으로 여러 국가끼리 민감한 감정 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과 관련된 전쟁만 하더라도 병자호란,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베트남전쟁 등 수많은 전쟁의 기억이 남아있지만 이제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넘어서서 화합으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동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노력과 경험들이 논의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우리 대학이 위치한 인천도 여러 전쟁의 중심무대로 가슴 아픈 전쟁의 상흔과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외국에 열려있었기에 전쟁의 무대가 되었지만 이제 인천은 개방성을 바탕으로 국제도시로 발돋움했고, 동아시아의 허브 도시로 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과 인하대학교의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국제학술회의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열려 있는 도시, 인 천에 위치한 인하대학교에서 열리게 되어 학문과 지혜의 장이 마련될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인천에 대한 애정과 함께 인하대학교에 대해 더욱 더 많은 관심과 성 원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학자들께서 많이 참석하셨습니다. 부 디 학술회의 기간 중에는 한국의 전통문화, 특히 음식문화를 즐기시면서 동아시 아의 전쟁기억에 대해 국경을 초월한 상생과 소통의 장이 열릴 수 있도록 활발한 토론을 이끌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끝으로 학술회의 기간 내내 건강과 지혜와 즐거움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7년 12일 인하대학교 총장 박 춘 배

歓 迎 辞 皆 様 こんにちは 我 々の 仁 荷 大 学 校 において 北 東 亜 歴 史 財 団 と 韓 国 学 研 究 所 が 共 同 で 主 催 する 国 際 学 術 会 議 が 開 かれるようになったことを 心 からお 祝 い 申 し 上 げます また 参 加 者 の 皆 様 に 歓 迎 の 意 を 表 したいと 思 います 北 東 亜 歴 史 財 団 の 鄭 在 貞 理 事 長 及 び 韓 国 学 研 究 所 の 李 榮 昊 所 長 には これまでの 労 をねぎらい 感 謝 いたします 中 国 北 京 大 学 の 徐 勇 教 授 日 本 同 志 社 大 学 の 冨 山 一 郞 教 授 台 湾 成 功 大 学 の 李 承 機 教 授 をはじめ 中 国 日 本 台 湾 そして 国 内 の 様 々な 大 学 から 来 場 した 著 名 な 教 授 や 研 究 者 の 皆 様 に 夏 休 を 割 いて 本 学 で 開 催 される 国 際 学 術 会 議 に ご 参 加 いただきましたことに 対 し 仁 荷 大 学 校 総 長 として 歓 迎 の 言 葉 を 述 べる 機 会 を 得 ましたことを 大 変 嬉 しく 思 います 今 年 開 校 58 年 でまもなく 還 暦 を 迎 える 仁 荷 大 学 校 は 110 年 前 仁 川 を 後 にして ハワイに 移 住 した 僑 民 の 方 々が 祖 国 近 代 化 の 切 実 な 願 いを 込 めて 蒔 いた 種 が 開 花 し 6 25 戦 争 の 廃 墟 から 工 業 立 国 を 目 指 して 設 立 された 民 族 の 大 学 で す 本 学 はハワイ 僑 民 の 支 援 金 を 元 手 として 政 府 の 莫 大 な 資 金 や 設 備 の 援 助 有 力 な 企 業 の 支 援 そして 小 学 生 から 兵 士 に 至 る 全 国 民 の 支 援 と 声 援 に 支 えられ 1954 年 仁 荷 工 科 大 学 として 発 足 し 現 在 は 韓 国 の 代 表 的 な 工 科 大 学 に 成 長 しまし た 1971 年 から 総 合 大 学 に 昇 格 した 後 各 種 研 究 施 設 の 拡 張 優 秀 な 教 授 陣 の 確 保 などを 通 じ 全 国 大 学 評 価 で10 位 圏 内 に 入 る 成 果 をあげました このような 努 力 と 成 果 を 踏 まえ 我 々の 大 学 は 世 界 のトップ100 大 学 に 躍 進 することを 目 標 に 今 日 も 邁 進 しております 1986 年 韓 国 学 の 国 際 化 を 目 標 に 発 足 した 本 学 の 韓 国 学 研 究 所 は 仁 川 から 東 アジアと 世 界 へつながる 韓 国 学 研 究 の 中 核 を 担 う 研 究 機 関 として 発 展 を 重 ね てまいりました 特 に2007 年 からは 東 アジアの 相 生 と 疎 通 の 韓 国 学 をアジェンダ に 掲 げ 政 府 から 人 文 韓 国 (Humanities Korea) 研 究 所 に 選 ばれました 優 秀 な 研 究 人 材 を 育 成 し アジェンダの 学 問 的 大 衆 的 な 普 及 に 寄 与 する 研 究 所 に なることを 信 じております

今 日 の 学 術 会 議 の 主 題 は 東 アジアの 戦 争 記 憶 であり 多 くの 国 家 どうし 敏 感 な 感 情 の 問 題 が 含 まれてあると 思 います 韓 国 と 係 わる 戦 争 だけ 言 っても 丙 子 胡 乱 壬 辰 の 乱 清 日 戦 争 露 日 戦 争 太 平 洋 戦 争 ベトナム 戦 争 など 幾 多 の 戦 争 の 記 憶 が 残 っていますが これからは 戦 争 のトラウマを 越 して 和 合 で 未 来 を 開 け て 行 くための 東 アジア 各 国 の 様 々な 努 力 と 経 験 を 話 し 合 うことが 期 待 されます 本 校 が 位 置 する 仁 川 も 様 々な 戦 争 の 中 心 舞 台 で 非 常 に 胸 の 痛 む 戦 争 記 憶 を 持 っています 過 去 には 外 国 に 開 かれていたので 戦 争 の 舞 台 になりましたが もう 仁 川 は 開 放 性 を 土 台 で 国 際 都 市 へと 成 長 し 東 アジアのハブとしての 役 割 を 果 たして います 東 北 亞 歴 史 財 団 と 本 校 の 韓 国 学 研 究 所 が 共 同 に 主 催 する 国 際 学 術 会 議 が 東 アジアを 越 えて 世 界 に 開 かれた 都 市 仁 川 に 位 置 している 仁 荷 大 学 校 で 開 催 されて 学 問 と 知 恵 の 場 が 設 けられていると 自 負 しております 仁 川 へのご 愛 情 ととも に 私 どもの 大 学 にもご 関 心 とご 声 援 をお 願 い 申 し 上 げます 今 回 の 国 際 学 術 会 議 には 東 アジアの 各 国 から 多 くの 学 者 の 方 々にご 参 加 いただ きました なにとぞ 学 術 会 議 の 期 間 の 中 に 韓 国 の 伝 統 文 化 特 に 飲 食 文 化 を 楽 しみ ながら 東 アジアの 戦 争 記 憶 に 対 し 国 境 を 越 えた 相 生 と 疎 通 の 場 が 開 かれることを 心 より 期 待 しております 最 後 に 学 術 大 会 の 期 間 中 皆 様 に 常 に 健 康 と 知 恵 と 平 和 が 共 にありますようにお 祈 り 申 しあげます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2012 年 7 月 12 日 仁 荷 大 学 校 総 長 朴 瑃 培

欢 迎 词 大 家 好! 首 先, 对 此 次 东 北 亚 历 史 财 团 和 韩 国 学 研 究 所 共 同 召 开 的 国 际 学 术 大 会 在 我 们 仁 荷 大 学 召 开, 我 表 示 衷 心 的 祝 贺 和 热 烈 的 欢 迎! 同 时, 对 东 北 亚 历 史 财 团 的 郑 在 贞 理 事 长 和 韩 国 学 研 究 所 所 长 李 荣 昊 在 过 去 这 一 段 时 间 的 辛 苦 致 以 最 诚 挚 的 慰 问 和 感 谢 来 自 中 国 北 京 大 学 的 徐 勇 教 授 日 本 同 志 社 大 学 的 富 山 一 郎 教 授 台 湾 成 功 大 学 的 李 承 机 教 授 以 及 国 内 外 的 各 位 著 名 教 授 和 研 究 学 者 们, 不 惜 牺 牲 假 期 休 息 时 间, 来 本 校 参 加 此 次 国 际 学 术 大 会, 我 很 高 兴 作 为 仁 荷 大 学 校 长 能 在 此 对 各 位 的 到 来 致 欢 迎 词 仁 荷 大 学 建 校 至 今 已 有 58 个 年 头, 马 上 就 要 迎 接 花 甲 的 到 来 了 仁 荷 大 学 是 110 年 前 离 开 仁 川 移 居 到 夏 威 夷 的 同 胞 们 对 祖 国 近 代 化 建 设 的 深 切 恋 念 与 期 待 播 下 的 种 子, 并 开 花 结 果, 在 6 25 战 争 的 废 墟 上 以 工 业 立 国 为 目 标 而 创 建 的 以 夏 威 夷 同 胞 捐 助 的 资 金 作 为 基 础, 在 政 府 的 大 力 资 金 支 持 和 设 备 的 支 援 下, 借 助 各 大 企 业 和 从 小 学 生 到 军 人 的 全 国 人 民 的 共 同 声 援 下, 本 校 在 1954 年 由 仁 荷 工 业 大 学 发 展 成 为 韩 国 代 表 性 的 工 科 大 学 1971 年 发 展 为 综 合 大 学 之 后, 通 过 各 种 研 究 设 施 的 扩 建 和 优 秀 教 授 队 伍 的 扩 大 等 努 力, 现 在 我 们 已 经 跻 身 成 为 全 国 排 名 前 十 的 大 学 在 过 去 的 努 力 和 成 就 的 基 础 上, 我 们 现 在 正 朝 着 跻 身 世 界 百 强 大 学 而 努 力 1986 年 以 韩 国 学 国 际 化 为 目 标 而 创 建 的 仁 荷 大 学 韩 国 学 研 究 所 作 为 研 究 机 关 肩 负 着 连 系 仁 川 和 东 亚 以 及 整 个 世 界 的 重 要 角 色, 并 取 得 了 不 断 的 发 展 特 别 是 从 2007 年 开 始, 以 东 亚 发 展 和 沟 通 的 韩 国 学 为 主 题, 被 政 府 选 定 为 人 文 韩 国 研 究 所 我 们 相 信 我 们 研 究 所 是 一 个 为 培 养 优 秀 人 才 和 提 高 东 亚 发 展 和 沟 通 的 韩 国 学 这 一 主 题 的 学 问 性 和 大 众 性 而 做 出 贡 献 的 研 究 所 这 次 大 会 的 主 题 是 东 亚 的 战 争 回 忆, 在 这 里 大 家 讨 论 的 内 容 很 有 可 能 会 包 含 一 些 敏 感 的 问 题 单 说 韩 国 涉 及 到 的 战 争 就 有 丙 子 胡 乱 壬 辰 倭 乱 甲 午

战 争 日 俄 战 争 太 平 洋 战 争 和 越 南 战 争 等 等, 这 些 战 争 为 我 们 留 下 了 无 数 的 战 争 回 忆, 现 在 为 了 恢 复 战 争 的 创 伤, 为 了 以 和 平 开 启 未 来, 东 亚 各 国 各 地 区 的 努 力 和 经 验 将 要 被 谈 起, 为 此 我 表 示 无 限 的 期 待 仁 荷 大 学 的 所 在 地 - 仁 川 作 为 多 场 战 争 的 中 心 舞 台 也 有 着 非 常 大 的 战 争 伤 痛 和 回 忆 过 去 虽 然 因 向 外 国 开 放 了 门 户 而 沦 为 战 争 舞 台, 但 现 在 的 仁 川 则 以 开 放 性 发 展 成 为 了 国 际 都 市, 并 肩 负 着 作 为 东 亚 枢 纽 城 市 的 任 务 东 北 亚 财 团 和 仁 荷 大 学 韩 国 学 研 究 所 共 同 举 办 的 国 际 学 术 会 议 能 在 位 于 超 越 东 亚 面 向 世 界 的 都 市 - 仁 川 的 仁 荷 大 学 召 开, 我 坚 信 这 里 一 定 能 成 为 学 问 和 智 慧 的 交 流 地 希 望 大 家 对 仁 川 倾 注 爱 的 同 时, 也 能 多 多 关 心 和 声 援 我 们 学 校 此 次 国 际 学 术 大 会 有 东 亚 各 国 的 学 者 们 参 加, 期 待 各 位 在 学 术 会 议 期 间 体 验 韩 国 传 统 文 化 和 饮 食 文 化 的 同 时, 能 够 以 热 烈 的 讨 论 为 东 亚 的 战 争 回 忆 这 一 主 题 拉 开 超 越 国 境 的 发 展 和 沟 通 的 一 幕 最 后, 祝 愿 此 次 大 会 期 间, 大 家 身 体 健 康, 智 慧 涌 发, 一 切 顺 利! 谢 谢! 2012 年 7 月 12 日 仁 荷 大 学 校 长 朴 瑃 培

축 사 안녕하십니까?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재정( 鄭 在 貞 )입니다. 오늘 동북아역사재단과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란 주제하에 공동으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을 대 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먼저 바쁘신 가운데서도 이 학술회의에 참석하여 주신 국내외의 저명한 석학과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귀중한 주제발표와 토론을 위해 일본, 중국, 대만 등 해외에서 오신 학자 여러분께는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와 환영의 인 사를 드립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수년간에 걸쳐 동북아시아에서 해양평화벨트를 구축하 자 는 취지하에 동북아에서의 전쟁과 교류 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공동의 역사인 식을 구축하기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함으로써, 동아시아 각국의 상호이해를 도모함은 물론 미래의 평화공동체에 대한 구축방안을 모색해 왔습니다. 그러한 여정을 반추해 보면, 2008년 한중일의 전쟁유적을 평화의 초석으로 란 주제로 부산에서 첫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 이래, 2009년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 의 전쟁기억 을 주제로 일본에서, 2010년 근현대 전쟁의 기억과 동북아 미래의 평화 란 주제로 중국에서, 2011년 해전과 동아세계 란 주제로 대만에서, 매년 국 제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해는 동북아해양평화벨트 구축을 위한 5년차 회의로서 동아시아의 전쟁 기 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란 주제로 근대전환기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격 전지이자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 25전쟁에서 유엔군이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 킨 인천상륙작전의 전적지인 인천에서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 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인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에서 연유 하는 트라우마에 대한 극복 방안의 검토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전망을 모색할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저희 재단은 오늘 이 회의를 통해 지난 5개년간 수행했던 동북아해양평화벨트 구축사업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아가서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역사인프라의 구축 이라는 새로운 중장기 계획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동아시아 각국은 상호 이해와 교류 협력을 통해 진정한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에 남아 있는 전쟁의 기억과 상흔에서 기인하는 역사 갈등은 우리의 나아갈 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저희 동북아역사재단은 그러한 역사 갈등을 극복 하고 역사화해를 이룩할 수 있는데 진력하고자 합니다. 오늘 동아시아에서의 전쟁과 그 트라우마의 극복이라는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넓고 깊게 조명하는 이번 국제학술회의가 저희 재단이 하는 일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어려운 주제에 대해 고견을 들려주시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 하신 발표자, 사회자, 토론자 여러분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 이번 국제학술회의를 성대하게 준비해 주신 인하대학교 박춘배 총장님과 한 국학연구소 이영호 소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 니다. 아울러 폭염 속에서도 이번 국제학술회의를 방청하기 위해 왕림해 주신 여 러분께는 동아시아의 전쟁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개척하는 교훈과 지혜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7월 12일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정재정

祝 辞 こんにちは 東北亜歴史財団の理事長を勤めております 鄭在貞でございます 本日は 東北亜歴史財団と仁荷大学校韓国学研究所共同で 東アジアの戦争 記憶 トラウマを乗り越えて という主題のもと 国際学術会議を開催する運びとなり ましたこと 誠に嬉しく思っております 最初に ご多忙の中 この学術会議に参席いただきました国内外の著名な碩学 と貴賓の皆様に心より感謝申上げます 特に貴重な主題発表と討論のため 日 本 中国 台湾など 海外からお越しいただいた研究者の皆様にはこの席をお借り しまして感謝と歓迎のご挨拶とさせていただきます 東北亜歴史財団は数年にわたり 東北アジアの海洋平和ベルトを構築しよう と いう趣旨で 東北亜における戦争と交流 という主題を中心に共同の歴史認識を構 築するための国際学術会議を開催し それにより東アジア各国の相互理解を図るの は勿論 未来の平和共同体を構築する案を模索して参りました このような旅程を振り返ると 2008年 釜山にて 韓中日の戦争遺跡を平和の 礎石に というテーマで最初の国際学術会議を開催して以来 2009年には日本に て 東アジアに対する日本の戦争記憶 2010年には中国にて 近現代戦争の 記憶と北東アジアの未来の平和 2011年には台湾にて 海戦と東亜世界 と いったテーマで 毎年行われた国際学術会議をどれも成功裏に収めることができた と言えます 今年は 東北亜海洋平和ベルト 構築のための5年目の会議として 東アジア の戦争記憶 トラウマを乗り越えて というテーマを 近代転換期の韓国 中国 日本 ロシアなどの激戦地であり また我が民族最大の悲劇でもある6 25戦争 の戦跡地 仁川にて開催する運びとなりましたこと 非常に意義深く感じております 今回の国際学術会議をきっかけに仁川を含め 東アジアの戦争記憶によるトラウマ の克服方案の検討だけでなく 未来指向的な展望を模索できるようにと 期待せず にはおれません

当 財 団 は 今 日 この 会 議 をもって5 年 間 遂 行 してきた 東 北 亜 海 洋 平 和 ベルト 構 築 事 業 の 総 仕 上 げにしたく 存 じております これからは また 東 北 亜 の 平 和 のた めの 歴 史 インフラの 構 築 という 新 しい 中 長 期 計 画 を 構 想 しております 21 世 紀 の 東 アジア 各 国 は 相 互 理 解 と 交 流 協 力 を 通 じ 真 の 平 和 と 繁 栄 の 東 ア ジア 時 代 をともに 作 り 上 げて 行 くべきです にもかかわらず 東 アジア 各 国 の 歴 史 に 残 されている 戦 争 の 記 憶 と 傷 痕 から 生 まれた 歴 史 的 葛 藤 は 我 々の 進 む 道 の 妨 げ となっています 我 々 東 北 亜 歴 史 財 団 はそのような 歴 史 的 葛 藤 を 克 服 し 歴 史 和 解 を 成 し 遂 げることに 尽 力 していく 所 存 でこざいます 今 日 東 アジアにおける 戦 争 とそのトラウマの 克 服 という 主 題 をあらゆる 角 度 から 広 く 深 く 照 明 する 今 回 の 国 際 学 術 会 議 が 当 財 団 の 仕 事 のよい 導 き 手 になると 期 待 しております 難 しいテーマに 対 し ご 高 見 をお 寄 せ 下 さるべく 御 参 席 頂 きました 発 表 者 司 会 者 そして 討 論 者 の 皆 様 には 重 ねて 感 謝 申 上 げます また 今 回 の 国 際 学 術 会 議 の 準 備 にご 尽 力 下 さいました 仁 荷 大 学 校 の 朴 瑃 培 総 長 及 び 韓 国 学 研 究 所 の 李 榮 昊 所 長 を 始 め 関 係 者 の 皆 様 の 御 助 力 に 心 から 感 謝 いたします また 酷 暑 のなか 今 回 の 国 際 学 術 会 議 に 傍 聴 しようと 遠 くよりお 越 しく ださいました 皆 様 には 東 アジアの 戦 争 の 歴 史 から 新 たな 未 来 のビジョンを 開 拓 す る 教 訓 と 知 恵 を 共 有 できる 貴 重 な 機 会 になることを 願 ってやみません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2012 年 7 月 12 日 東 北 亜 歴 史 財 団 理 事 長 鄭 在 貞

祝 词 大 家 好! 我 是 东 北 亚 历 史 财 团 理 事 长 郑 在 贞 今 天, 东 北 亚 历 史 财 团 和 仁 荷 大 学 韩 国 学 研 究 所, 在 穿 越 东 亚 战 争 的 记 忆 与 创 伤 的 主 题 下, 共 同 举 办 本 次 国 际 学 术 会 议, 我 感 到 非 常 高 兴 首 先, 对 在 百 忙 之 中, 前 来 参 加 会 议 的 国 内 外 著 名 学 者 及 贵 宾, 表 示 衷 心 地 感 谢! 特 别 是, 将 在 学 术 会 议 上 发 表 论 文 和 参 加 讨 论 的 日 本 中 国 台 湾 等 海 外 学 者, 我 在 此 谨 表 示 诚 挚 地 谢 意 和 热 烈 地 欢 迎 东 北 亚 财 团 在 过 去 的 几 年 当 中, 为 建 立 共 同 的 历 史 观, 以 构 建 东 北 亚 海 洋 和 平 纽 带 为 主 旨, 以 东 北 亚 的 战 争 与 交 流 为 中 心, 举 办 了 多 次 学 术 会 议 我 们 期 望 以 此 来 促 进 东 亚 各 国 间 的 相 互 理 解, 并 建 立 起 和 平 共 同 体 回 想 过 去 几 年 的 历 程, 自 2008 年, 以 让 韩 中 日 的 战 争 遗 迹 成 为 和 平 的 基 石 为 主 题, 在 釜 山 举 办 首 次 国 际 学 术 会 议 以 来,2009 年 在 日 本 以 日 本 对 东 亚 的 战 争 记 忆 为 主 题,2010 年 在 中 国 以 近 现 代 战 争 记 忆 与 东 北 亚 的 未 来 和 平 为 主 题,2011 年 在 台 湾 以 海 战 与 东 亚 世 界 为 主 题, 我 们 每 年 都 成 功 举 办 了 一 次 国 际 学 术 会 议 今 年, 为 建 构 东 北 亚 海 洋 和 平 纽 带, 以 穿 越 东 亚 战 争 的 记 忆 与 创 伤 为 主 题, 在 仁 川 召 开 第 五 次 国 际 学 术 会 议 在 近 代 转 型 期, 仁 川 既 是 韩 国 中 国 日 本 俄 国 等 国 参 战 的 战 争 现 场, 也 是 我 们 民 族 最 大 的 悲 剧 6 25 战 争 期 间, 联 合 国 一 举 扭 转 战 局 的 仁 川 登 陆 战 役 的 作 战 地 所 以, 我 认 为 本 次 会 议 在 仁 川 召 开, 具 有 非 常 深 远 的 意 义 通 过 这 次 国 际 学 术 会 议, 我 们 不 仅 要 讨 论 如 何 除 去 仁 川 乃 至 东 亚 的 战 争 记 忆 的 创 伤, 还 要 共 同 展 望 未 来 我 们 财 团 希 望 今 天 这 次 会 议, 能 够 为 过 去 5 年 间 实 行 的 建 构 东 北 亚 海 洋 和 平 纽 带 事 业, 划 上 完 满 的 句 号 我 们 正 在 策 划, 以 为 东 北 亚 和 平 打 造 历 史 基 础 建 设 为 主 题 的 新 的 中 长 期 计 划

21 世 纪 的 东 亚 各 国, 应 该 通 过 相 互 理 解 交 流 与 合 作, 共 同 创 建 真 正 和 平 繁 荣 的 东 亚 时 代 不 过, 东 亚 各 国 的 历 史 中, 存 留 的 战 争 记 忆 与 伤 痕, 给 各 国 之 间 带 来 了 历 史 矛 盾, 这 些 矛 盾 成 为 我 们 前 进 道 路 上 的 绊 脚 石 我 们 东 北 亚 财 团, 将 为 解 决 历 史 矛 盾 达 成 历 史 和 解 竭 尽 全 力 我 们 期 望, 今 天 这 次 学 术 会 议, 对 穿 越 东 北 亚 战 争 的 记 忆 与 创 伤 这 一 主 题, 从 各 个 角 度 进 行 广 泛 深 入 地 探 讨, 并 通 过 这 次 会 议 为 我 们 财 团 事 业 的 发 展 指 明 方 向 对 于 如 此 复 杂 的 问 题, 将 发 表 论 文 的 学 者 主 持 人 讨 论 者, 齐 聚 於 此, 各 抒 己 见, 对 此, 本 人 再 次 表 示 衷 心 地 感 谢! 另 外, 向 为 筹 备 本 次 国 际 学 术 会 议, 付 出 辛 劳 工 作 的 仁 荷 大 学 朴 瑃 培 校 长 韩 国 学 研 究 所 李 荣 昊 所 长, 以 及 所 有 相 关 人 员, 表 示 诚 挚 地 感 谢! 同 时 希 望, 不 顾 夏 日 酷 热, 前 来 旁 听 这 次 会 议 的 各 位 来 宾, 和 我 们 共 同 分 享, 在 东 亚 战 争 的 历 史 中 开 拓 美 好 未 来 的 教 训 与 智 慧 谢 谢! 2012 年 7 月 12 日 东 北 亚 历 史 财 团 理 事 长 郑 在 贞

목 차 Session Ⅰ 임진 전쟁의 기억 1-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 김시덕 (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再 造 藩 邦 에서 非 禮 不 動 으로 : 명나라에 대한 기억의 흐름 21 / 우경섭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Session Ⅱ 서양함대의 강화도 점령과 기억의 정치 43 / 이영호 (인하대학교 교수) 운요호사건 을 서막으로 한 일제강점의 기억 69 /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러일전쟁과 한국주둔 일본군에 대한 기억 91 /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ession Ⅲ 노구교 사건에 대한 연구와 사고 111 / 쉬용 (중국 북경대 교수) 방법으로서의 일본시대 117 - 회의록 과 구술역사 가 만든 식민지 대만의 역사기억 - / 이승기 (대만 성공대학교 교수) 식민지 여성의 제국( 帝 國 ) 경험과 역사 기억 129 -조선인 매춘부의 대만에서의 체험을 중심으로- / 진정원 (대만 중앙연구원 조연구원) Session Ⅳ 일제말기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에 대한 기억 153 / 배영미 (일본 리츠메이칸대 전임연구원) 동아시아의 냉전과 기억이라는 물음 : 오키나와 전쟁을 중심으로 171 / 도미야마 이치로 (일본 도시샤대 교수) 베트남 전쟁과 동아시아 체제의 변화 185 / 박태균 (서울대학교 부교수)

임진 전쟁의 기억 - 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김시덕 (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임진 전쟁의 기억 - 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3 임진 전쟁의 기억 - 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김시덕(고려대) <목 차> 1. 들어가며 2. 징비록 은봉야사별록 과 근세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사 2-1. 두 문헌의 성립 배경과 일본으로의 유출 2-2. 근세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사와 징비록 은봉야사별록 의 수용 양상 3. 19세기 전기에 임진 전쟁 문헌을 출간하는 두 가지 목적 : 조선 이야기 와 다치바나 조선기 3-1. 내셔널리즘의 관점에서 간행된 조선 이야기 3-2. 야나가와 번의 입장에서 간행된 다치바나 조선기 4. 나가며 1. 들어가며 전근대 일본이 경험한 최대의 대외전쟁이었던 임진 전쟁은, 17세기에서 19세기 중기 까지 지속된 근세 일본에서 풍부한 담론과 문헌을 산출했다. 이 발표에서는 조 일 양국 의 임진 전쟁 참전자들이 17세기에 집필한 뒤에 일본 내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다가 19 세기 전기에 출간된 문헌들에 주목하여, 이들 문헌이 19세기 전기에 간행되었다는 사실 이 임진 전쟁의 담론사에서 갖는 의미를 검토한다. 대상이 되는 문헌은 조선 측의 은봉 야사별록( 隱 峰 野 史 別 錄 ) 과 일본측의 조선 이야기( 朝 鮮 物 語 ) 다치바나 조선기( 立 花 朝 鮮 記 ) 이다. 2. 징비록 은봉야사별록 과 근세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사 징비록( 懲 毖 錄 ) 과 은봉야사별록 은 임진 전쟁을 체험한 류성룡과 조헌 안방준에 대한 귀중한 증언임과 동시에, 전쟁당시 조선 측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중요한 전쟁사

4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문헌이다. 이러한 문헌이 임진 전쟁 당시 일본군의 약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 후에 일 본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두 문헌이 일본으로 유출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 나, 1683년에 작성된 쓰시마번( 対 馬 藩 )의 장서목록인 덴나 삼년 목록( 天 和 三 年 目 録 ) 에 이 두 문헌이 나란히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 유출 시기는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유출된 지역은 아마도 왜관으로 생각된다. 일본측은 왜관을 통해 끊임없이 조선의 정보를 입수했 다. 그 일례로, 당시 일본측은 조선 인삼의 수입으로 인한 무역 적자를 해소하고자 인삼 국산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동 식물 표본을 수집하고 기록했는데, 이 과정에서 도 왜관 주변의 조선인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2). 2-1. 두 문헌의 성립 배경과 일본으로의 유출 100년 이상 이어지던 일본의 분열상태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 1537-98) 는 중국 명나라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가 이 야망을 이루기 위 해서는 우선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선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조선 과는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자리한 쓰시마 섬의 지배자인 소씨( 宗 氏 )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에게 항복하러 온 소 요시시게( 宗 義 調 : 1532-89) 등에게, 조선 국왕이 직접 자신에게 항 복하러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 국왕이 순순히 항복을 하면 조선과는 전쟁을 하지 않 고 조선군을 앞세워 명나라를 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먼저 조선국을 공격하겠 다는 것이었다. 물론, 쓰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히데요시가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만일 반도와 열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쓰시마로서는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래서 쓰시마 측은 조선 국왕 대신 조선 측 의 사절단을 오도록 하겠다고 히데요시에게 아뢴 뒤, 이번에는 조선 조정측에 사절단의 파견을 간청했다. 사절단만 보내주면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큰 나라 사이에 낀 작은 지역의 고단함이라 하겠다. 한편, 사절단을 파견해달라는 쓰시마 측의 요청을 받은 조선 조정의 의견은 갈라졌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거부했지만 쓰시마 측은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매 달렸다. 당시 대제학이었던 류성룡(1542-1607)은 속히 결론을 내려서 두 나라 사이에 틈 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임진 전쟁 당시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1) 藤 本 幸 夫 宗 家 文 庫 蔵 朝 鮮 本 に 就 いて- 天 和 三 年 目 録 と 現 存 本 を 対 照 しつつ- 朝 鮮 学 報 99 100 ( 朝 鮮 学 会, 1981 7)에 의함. 2) 田 代 和 生 江 戸 時 代 朝 鮮 薬 材 調 査 の 研 究 ( 慶 應 義 塾 大 学 出 版 会, 1999) 참조.

임진 전쟁의 기억 - 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5 현장에서 동분서주한 실무가였다. 그러나 그는 임진 전쟁이라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도 불 구하고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대 정책을 펴서는 안되며, 국내적으로는 전쟁 을 대비하고 대외적으로는 능숙한 외교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날의 잘 못을 징계해서 뒤의 어려움을 대비한다 는 뜻을 제목에 담은 징비록 의 첫머리에 성종 ( 成 宗 )에게 신숙주(1417-75)가 남긴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마소서 라는 유언을 실은 것 이나(권1), 징비록 에서 왜 라는 호칭과 함께 일본 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한 데에서 도 실무가( 實 務 家 ) 류성룡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조헌(1544-92)은 쓰시마 측의 사절단 파견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상황을 히데요시가 선왕( 先 王 )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헌은 신하의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불의 를 저지른 히데요시가 통치하는 일본과는 절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에 파 견되었다가 1591년에 귀국한 황윤길(1536-?) 김성일(1538-93) 등이 가져온 히데요시의 국서의 내용에 분개한 조헌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여러 나라에 보임으로써 불의의 일본을 정벌할 연합군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이처럼 전쟁 발발 목전의 조선 조정에서는 비둘기파와 매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발표자 개인적으로는 이 러한 대립 상황이 붕당의 폐해이고 이로 인해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 는다. 이러한 대립은 전쟁의 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어떤 나라에서든 보이는 자연스러 운 현상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류성룡 조헌 모두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 다는 사실이 아닐까. 아뭏든, 두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조헌은 전쟁이 일어난 1592년에 고경명(1533-92) 영규(?-1592) 등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금산 전투에서 전사 했고, 류성룡은 전쟁이 끝난 1598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게 하회로 낙향했다. 전쟁을 막고 자 한 두 사람은 전쟁 중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비슷하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 다. 그래도 류성룡은 징비록 을 집필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 는 점에서는 조헌보다는 행운이었다. 그 대신, 조헌은 비장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세 에 변호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은봉야사별록 을 쓴 안방준(1573-1654)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하늘이 조헌으로 하여금 살아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죽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며 슬퍼했다. 그것이 이 책을 엮은 동기라 하였으니, 실로 조헌을 대신하여 그의 변론문을 썼다고 하겠다. 3) 김상헌(1570-1652) 청음집( 淸 陰 集 ) 권28 고 의병장 증이조판서 중봉 조선생 신도비명( 故 義 兵 將 贈 吏 曹 判 書 重 峯 趙 先 生 神 道 碑 銘 ).

6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2-2. 근세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사와 징비록 은봉야사별록 의 수용 양상 발표자는 근세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사를 아래와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제1기 임진 전쟁 ~ 다이코기( 太 閤 記 ) (1637년 3월 이전에 간행) 성립까지 : 전쟁 의 상대국이었던 중국 명조와 조선의 문헌이 들어오기 이전 단계. 일본측의 문헌들에 만 의거하여 전쟁의 기억이 1차로 형성되었다. 제2기 다이코기 이후 ~ 조선정벌기( 朝 鮮 征 伐 記 ) (1659년 간행) 도요토미 히데 요시보( 豊 臣 秀 吉 譜 ) (1658년 간행) 성립까지 : 중국 명조( 明 朝 )의 양조평양록( 兩 朝 平 攘 錄 ) (1606년 서문) 무비지( 武 備 志 ) (1607년 기고( 起 稿 ), 1621년 완성) 등이 17세기 전기에 유입되면서, 이들 문헌에 실린 중국측의 전쟁 기억이 일본측의 담론에 영향을 미쳤다. 제3기 조선정벌기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이후 ~ 조선군기대전( 朝 鮮 軍 記 大 全 ) 조선태평기( 朝 鮮 太 平 記 ) (둘 다 1705년 간행) 성립까지 : 류성룡의 징비록 (1642년 간행) 서애선생문집( 西 厓 先 生 文 集 ) (1632년 간행) 등이 17세기 후기에 유입 되면서, 한중일 삼국의 임진 전쟁 담론이 일본에서 집대성되었다. 제4기 조선군기대전 조선태평기 이후 ~ 에혼 다이코기( 絵 本 太 閤 記 ) (1797-1802년 간행) 에혼 조선군기( 絵 本 朝 鮮 軍 記 ) (1800년 간행)까지 : 한중일 삼국 의 임진 전쟁 담론이 집대성된 뒤에 역사 문예 등 각 분야에서 다루어지면서 일본 사 회에서 확산되다가, 에도시대 후기에 번성한 역사소설 장르인 요미혼( 読 本 ) 장르의 두 문헌에 의해 결정적으로 대중화된 시기. 제5기 에혼 다이코기 에혼 조선군기 이후 ~ 19세기 말까지. 4) 제1기에는 일본인들이 집필한 문헌들에만 의거하여 임진 전쟁 담론이 형성되었다. 제 2-3기에 각각 중국과 한국의 문헌들이 유입되면서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이 다면적 성격 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발표의 대상이 된 문헌들은 그 이전 단계에서는 필사본으로 유통되다가 제5기, 즉 근세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사에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시기에 판본으로 정착하였다. 은봉야사별록 은 조선의 목판본이 일본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나, 4) 金 時 徳 異 国 征 伐 戦 記 の 世 界 ー 韓 半 島 琉 球 列 島 蝦 夷 地 ー ( 笠 間 書 院, 2010) 23쪽. 단, 여기에는 이 를 수정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임진 전쟁의 기억 - 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7 19세기의 일본 간행본 서문에 따르면 그 저본은 필사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5). 제1기의 문헌들은 임진 전쟁에 참전한 당사자나 그 주변인이 남긴 증언과 문헌에 의 거한 것으로, 여기에는 오로지 일본측의 시각만이 담겨있다. 그러다가 17세기 초기에 중국 명나라에서 제작된 양조평양록 과 같은 문헌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일본인들은 임진 전쟁 때 자신들과 싸웠던 적국의 상황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측의 문헌 에는 자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단계인 1592년의 전황을 비롯하여 조선측 의 상황이 소략했고, 조선측에 대한 명측의 편견 역시 상당했다. 그 결과, 일본과 명나 라의 문헌을 종합해서 편찬된 조선정벌기 등의 문헌에서는, 임진 전쟁은 일본과 명나 라 사이의 전쟁이고 조선은 전쟁의 무대이자 수동적인 역할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식으 로 기록된다. 그 후, 17세기 중기에 조선의 임진 전쟁 문헌 몇 점이 일본에 유입된다. 그 가운데 일본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 이었다. 징비록 을 통해 명측 문헌에 서 보이는 조선측에 대한 편견 몇 가지가 수정되고, 조선측에도 전쟁 영웅들이 다수 존 재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일본측에 알려졌다. 이순신이 일본에서 영웅 으로 인식된 것 도 징비록 의 영향이었다 6). 비록 임진 전쟁을 명과의 일대 결전으로 바라보고 싶어한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을 징비록 하나가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징비록 이 근세 일본 사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긴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예컨대, 근세 중기의 저명 한 유학자인 가이바라 엣켄( 貝 原 益 軒 : 1630-1714)은 1695년에 교토에서 출간된 일본 판 징비록 의 서문에서, 당시까지 일본에 존재하던 임진 전쟁의 기록 가운데 징비록 과 조선정벌기 만이 실록( 實 錄 ) 이며 다른 것들은 번잡하여 볼 것이 없다고 평하였 다 7).[자료 1, 2 : 일본판 조선 징비록 의 가이바라 엣켄 서문과 한반도 지도] 물론, 인기를 끌면 반발도 생기는 법. 18세기 후기가 되면 징비록 의 기사를 폄하하 는 문헌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관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는 쓰시마번의 야마 자키 히사나가( 山 崎 尚 長 )가 1796년에 집필한 조선정토시말기 의 필사본이 1854년에 간 행되었을 때 수록한 서문에서, 아사카와 도사이( 朝 川 同 斎 : 1814-57)라는 유학자는 류성 룡이 당시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에게 해를 입힌 죄를 스스로 깨 달았기 때문에 거짓을 적어 사람들을 속였다 8) 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5) 朝 鮮 安 邦 俊 隠 峰 野 史 別 録 一 巻, 伝 写 已 久. 頗 有 訛 欠. 頃 友 人 渡 辺 氏, 於 某 坊 購 善 本, 讐 之 於 余 所 蔵, 参 互 攷 訂 以 鋟 梓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6) 김시덕 그들이 본 임진왜란 (학고재, 2012) 180-192쪽 참조. 7) 此 書, 記 事 簡 要, 為 辞 質 直, 非 世 之 著 書 者 誇 多 闘 靡 之 比. 談 朝 鮮 戦 伐 之 事 者, 可 以 是 為 的 拠. 其 他, 如 朝 鮮 征 伐 記, 雖 書 以 国 字, 亦 足 以 為 佐 拠. 二 書 亶 可 称 実 録 也 (개인 소장본).

8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징비록 을 실록 이라고 칭송한 가이바라 엣켄을 비판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징비록 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이 시기의 일본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사카와는 1849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은봉야사별록 에도 서문을 실었다. [자료 3 : 일본판 은봉야사별록 의 아사카와 도사이 서문] 여기서 그는 임진 전쟁 직전 에 조선 국왕 선조는 음락했고 조정에서는 류성룡 이덕형 등의 간신이 발호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도움을 기다려서 간신히 나라를 되살릴 수 있었다 9) 고 주장하는 양조평양록 권4상의 기사를 끌어와 류성룡과 징비록 을 비판한 다. 은봉야사별록 를 간행한 것은 미토학( 水 戸 学 )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이바라키현에 있던 미토번에서 발달한 근세의 학문적 경향에 속한 학자들이었다. 미토학은 전기와 후기 의 양대 흐름으로 나누어진다. 제2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 徳 川 光 圀 : 1628-1701)의 시대에 전개된 전기 미토학은 중국 명나라의 망명학자 주순수( 朱 舜 水 : 1600-82)의 사상 적 영향 아래 대일본사( 大 日 本 史 ) 를 편찬하면서 형성된 주자학적 정통론 명분론을 중 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후기 미토학은 제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 徳 川 斉 昭 : 1800-60) 시대에 전개된 후기 미토학은 존왕양이( 尊 皇 攘 夷 ) 라는 말로 대표되는 강렬한 내셔널리즘적 경향을 보인다. 10) 근린 외국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진 미토학자들은 이들 지역과 일본의 관계사에 대한 저술을 다수 집필했다. 11) 그 가운데 임진 전쟁에 관한 문 헌으로는 가와구치 조주( 川 口 長 孺 : 1773?-1834)의 정한위략( 征 韓 偉 略 ) (1831년 간행), 아오야마 노부미쓰( 青 山 延 光 )의 정한잡지( 征 韓 雑 志 ) (1839년 저자 서문, 1852년 발문) 등이 있다. 아사카와 도사이와 교류가 있던 후기 미토학자들은 아사카와 도사이처럼 징비록 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임진 전쟁을 기술할 때 은봉야사별록 을 함께 이용함으로써 징비록 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가와구치 조주는 임진 전쟁 관련 문헌을 종합하여 임진 전쟁을 연대순으로 편찬한 정한위략 을 간행하면서, 서술의 기본 흐름을 잡기 위해 징비록 의 서술에 크게 의존 하면서도 이이 조헌과 대립한 류성룡을 비판하는 은봉야사별록 의 구절을 여럿 가져와 8) 世 人 謂, 柳 成 竜 懲 毖 録, 蓋 其 実 記 也. 余 独 恠 焉. ( 中 略 ) 知 成 竜 有 詐 偽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9) 朝 鮮 国 王 李 昖, 在 位 日 久, 政 務 廃 弛, 邪 臣 柳 承 寵 李 徳 馨 等, 諛 佞 逢 合, 忠 直 見 疎, 且 国 中 久 不 被 兵, 民 不 習 戦 ( 明 代 史 籍 彙 刊 国 立 中 央 図 書 館 蔵 本 5 両 朝 平 攘 録 ( 明 万 暦 三 四 年 刻 本 : 台 湾 学 生 書 局, 1969) 참 조). 10) 미토학에 대한 이상의 개요는 染 谷 智 幸 冒 険 淫 風 怪 異 ー 東 アジア 古 典 小 説 の 世 界 ー ( 笠 間 書 院, 2012) 24쪽을 참조. 11) 이에 대해서는 秋 山 高 志 水 戸 の 文 人 十 二 水 戸 藩 士 の 東 洋 史 研 究 (ぺりかん 社, 2009) 참조.

임진 전쟁의 기억 - 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9 서 징비록 과 류성룡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류성룡이 간신이었다는 양조평양록 의 기 사에 대해 은봉야사별록 에서도 류성룡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 걸 보니 이는 사 실이었던 것 같지만, 징비록 에서 우국충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니 류성 룡은 처음에는 나라를 그르쳤으나 전쟁이 일어난 뒤에 반성했음을 알겠으나, 이를 확증할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결론은 내리지 않겠다 12) 고 적고 있다. 이처럼, 류성룡과 조헌의 갈등은 징비록 과 은봉야사별록 이라는 조선시대의 대표 적인 임진 전쟁 문헌에 실려 일본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편을 들 필요가 없던 일본 학자들은 두 문헌을 비교하며 냉정한 눈으로 임진 전쟁 당시의 조선측 상황을 서술했다. 조선 내부의 갈등이 근세 일본에서 재현되어 저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된 씁쓸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3. 19세기 전기에 임진 전쟁 문헌을 출간하는 두 가지 목적: 조선 이야기 와 다치바나 조선기 한편, 근세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에서 제1기에 해당하는 조선 이야기 다치바나 조선기 는 1592년의 임진 전쟁 발발당시 각각 제1군과 제6군에 속한 무장들에 관한 문헌 이다. 이들은 모두 필사본으로 유통되다가 제5기에 비로소 목판본으로 간행된다. 조선 이야기 는 정유재란에 참전한 무장이 남긴 기록을 그 아들이 정리한 것으로, 1597-8년 사이에 발생한 남원 울산 전투 등의 양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치바 나 조선기 는 1593년에 일어난 벽제관 전투에 참전한 주군의 활약을 부하가 기록한 것이 다. 이처럼, 두 문헌은 임진 전쟁 참전자의 아들이나 부하와 같이 그 근친자가 집필했다 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문헌이 19세기 전기에 간행된 목적은 서 로 달랐다. 12) 本 書 曰, 邪 臣 柳 承 寵 李 徳 馨. 秉 燭 談 曰, 或 云, 武 備 志 亦 載 柳 承 寵 李 徳 馨 惑 李 昖. 柳 承 寵 即 柳 成 竜 也. 承 成, 音 相 近. 竜 寵, 字 相 似. 故 転 訛 耳. 今 按, 拠 成 竜 所 著 西 厓 文 集, 其 人 当 崩 壊 艱 難 之 日, 罄 心 国 事. 其 所 作 歌 詩, 歎 時 悲 乱, 有 杜 甫 之 風. 而 拠 野 史 別 録, 抑 李 珥 養 兵 之 論, 以 太 平 無 事 軍 旅 非 急 務. 蓋 無 事 之 日 阿 附 時 世. 至 有 事 而 始 慷 慨 奮 発 者 乎. 目 之 以 二 邪 臣 不 可 謂 無 其 謂. 然 無 他 書 可 徴 其 行 状 者, 故 存 注 文, 以 備 他 日 考 焉. 李 徳 馨 為 阿 諛 迎 合 小 人. 懲 毖 録 野 史 別 録 往 々 散 見. 無 復 可 疑 也. (이 바라키 대학 소장본).

10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3-1. 내셔널리즘의 관점에서 간행된 조선 이야기 이 문헌은 1592년의 개전 당시 제1군에 속했던 오타 가즈요시( 太 田 一 吉 :?-1617)의 가신( 家 臣 )이었던 오코치 히데모토( 大 河 内 秀 元 )가 기록하였다. 1662년에 저자의 발문이 작성되었고 1849년에 간행되었다. 이 문헌의 성립 배경에 대해 다른 곳에서 적은 바 있 으므로, 이를 인용한다. 이 문헌의 성립 배경에는 저자의 주군인 오타 가즈요시에 대한 불리한 처분이라는 사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울산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 내부에 서는 울산 순천을 포기하고 서생포 사천 고성으로 전선을 축소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 에 대해 가토 기요마사( 加 藤 清 正 : 1562-1611) 오타 가즈요시 등이 제시한 반대 의견은 이시다 미쓰나리( 石 田 三 成 : 1563-1600)에 의해 묵살되었다. 이 시기, 역시 출진하고 있 던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宇 都 宮 国 綱 : 1568-1608)도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그 기록 우 쓰노미야 고려 귀진 이야기( 宇 都 宮 高 麗 買 帰 陣 物 語 ) 는 그 변명을 위해 조선에서의 전공 을 서술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코치의 조선기 역시, 1597년 정유년 3월 18일이라고 하는 서문의 날짜가 맞다고 한다면, 조선에서의 오타 가즈요시군의 전공( 戦 功 )의 증거로 서 급하게 작성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13)14). 이처럼 조선 이야기 는 어디까지나 주군의 행적을 옹호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집필되 었으며, 일본국이라는 국가 차원에서 임진 전쟁을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19세기 전기에 간행된 조선 이야기 간행본에는, 임진 전쟁이 일본 백성을 피로케 하였기 때문 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몰락했다고 평하면서도, 이 전쟁에서 일본의 무위를 떨쳤기 때문에 지금까지 서구 세력들이 일본을 넘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후지모리 고안 ( 藤 森 弘 庵 : 1799-1862)의 서문이 실려 있다. [자료 4 : 조선 이야기 간행본 서문] 미토 학의 거점인 미토번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쓰치우라번( 土 浦 藩 )의 번교( 藩 校 ) 욱문관( 郁 文 館 )을 설립하기도 한 후지모리 고안은 행정가임과 동시에 서구 열강의 접근에 대비하 여 일본의 해안방위를 주장한 해방론( 海 防 論 ) 논자였다. 정한잡지 의 저자인 아오야마 노부미쓰가 자신의 또 다른 저서 육웅팔장론( 六 雄 八 将 論 ) 에서, 임진 전쟁 때 보여준 일본의 무위로 인해 청나라 세력이 일본을 넘보지 못했다 15) 고 주장하는 것 역시 후지모 13) 朝 鮮 日 々 記 研 究 会 朝 鮮 日 々 記 を 読 む 真 宗 僧 が 見 た 秀 吉 の 朝 鮮 侵 略 ( 法 蔵 館, 2000) 174-5쪽. 14) 최관 김시덕 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편 (도서출판문, 2010) 91쪽. 15) 当 是 時, 明 国 視 我 猶 蕃 国, 足 利 氏 視 明 主 猶 君 上, 而 天 朝 之 尊 則 天 下 不 敢 復 問, 衰 弱 之 極 至 此. ( 中 略 ) 太 閤 一 怒, 明 国 震 駭, 不 可 謂 不 雪 祖 宗 之 耻 也. 皇 威 於 是 乎 赫 然, 震 於 絶 域 矣. 異 日 愛 新 覚 羅 氏 之 併 呑 明 国, 威 毒 亦 甚, 彼 豈 不 垂 涎 於 我, 然 畏 懾 歛 手 不 敢 噬 囓 者 太 閤 之 力 也. 孰 謂 征 韓 一 役 無 功 於 神 国 乎. (이바라

임진 전쟁의 기억 - 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11 리의 주장과 상통하며, 임진 전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미토학자와 그 주변에서 공유되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세력의 접근에 따른 위기의식이 고조되던 19세기 전기에 간 행된 조선 이야기 는 원저자의 집필 목적을 초월하여 미토학적 내셔널리즘으로 재해석 되어 간행되었으며, 편찬에 간여한 사람들은 일본국이라는 국가의 대외 위기 상황을 타개 하기 위한 실마리로서 임진 전쟁을 회고하고 있다. 3-2. 야나가와 번의 입장에서 간행된 다치바나 조선기 이처럼 애초에는 주군의 공훈을 증명하기 위해 집필된 조선 이야기 는, 19세기 전기 에 일본이 처한 대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미토학자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에 반해, 역시 주군의 공훈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에서 가신이 집필한 다치바나 조선기 는 집필 당초의 목적 그대로 간행된 경우이다. 다치바나 조선기 는 임진 전쟁 당시 제 6군에 속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 花 宗 茂 : 1569-1643)가 벽제관 전투 등에서 활약한 내용을 그 부하 아마노 겐에몬 사다나리( 天 野 源 右 衛 門 貞 成 )가 기록한 것이다. 이 문헌 역 시 필사본으로 유통되다가 무네시게의 후손이 지배하던 규슈 야나가와번( 柳 河 藩 )에서 1831년에 간행되었다. 이 간행은 야나가와번의 번주들이 조상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임진 전쟁 당시 훈공을 선전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벽제관 전투의 승리 이후에 참전 장수들 은 서로 자신이 승리의 주역이라 주장했다. 이 때, 무네시게 측에서는 자신들이 부당하게 훈공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분개한 무네시게의 부하가 주군 그리고 자기 자신의 훈공을 주장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이 문헌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집필 목적을 밝힌다. 요즈음 임진 전쟁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이야기들에는 허( 虛 )가 많고 실( 實 )이 적다. 이는 모두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무네시게를 따라 바다를 건너가 여러 장군의 행적을 대략 보았는데, 요즈음 이야기되는 바와는 크게 다르다. 이번에 데라사와 히로타카( 寺 沢 志 摩 守 広 高 ) 님의 부탁에 따라, 다른 집안의 일에 대하여는 모르겠고,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활약에 대해 적은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어떻 게 이야기하든, 하치만( 八 幡 )과 부처님을 걸고 나의 이야기에는 더하거나 뺌이 없다. 16) 다치바나 조선기 는 근세 시기에 필사본으로 널리 유통된 것으로 보이나, 야나가와 번 측에서는 여전히 무네시게의 훈공이 일본 사회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 한 것 같다. [자료 5 : 다치바나 조선기 간행본 서문] 야나가와번의 번교( 藩 校 )인 전습관 키 대학 소장본) 16) 주14 전게서 173쪽에서 재인용.

12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 伝 習 館 )의 선생이었던 마키조노 보잔( 牧 園 茅 山 : 1767-1836)이 쓴 서문에는, 정한역 에서 번조의 훈공이 위대하고 발군이었으나 여러 서적들은 이를 싣지 않았으니 매우 적 막하고 혼란스러웠다. 매번 이야기가 이에 이르면 일찍이 한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17) 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근세 일본에서 그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던 출판의 힘에 의 존하기로 한 것이다. 18) 이처럼 출판의 힘에 의존하여 자기 조상 주군 번을 선전하고자 한 또 다른 사례로는 이와쿠니번( 岩 国 藩 )의 깃카와( 吉 川 ) 가문이 작성한 음덕태평기( 陰 徳 太 平 記 ) 가 있다. 이와쿠니번의 깃카와 가문은 자신들의 주장을 유포시키기 위하여 출 판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이와쿠니번은 모리씨의 방계인 깃카와 씨의 영지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関 ヶ 原 の 戦 い : 1600) 당시 이시다 미쓰나리( 石 田 三 成 : 1563-1600)의 서군에 참가한 모리 가문 본류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徳 川 家 康 : 1542-1616)의 동군에 참가한 깃카와 가문간에는 갈등이 존재하였다. 깃카와씨는 세키가 하라 전투 때 깃카와 히로이에( 吉 川 広 家 : 1561-1625)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속했기 때문에 모리씨도 단절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선전하기 위해 음덕태평기 을 간행하는 등, 출판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19) "이 와쿠니번의 자금 제공에 의한 음덕태평기 의 간행은, 1663년에 하기번이 간사이기( 関 西 記 ) 와 비게이기( 備 芸 記 ) 를 소각한 사건을 알면서도 이러한 방침에 일부러 거슬러 간행한 것이었으며, 이는 하기번에 대한 암묵적 항의였다고도 볼 수 있다" 20). 음덕태평 기 을 간행코자 한 이와쿠니번과 다치바나 조선기 을 간행코자 한 야나가와번의 목적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의식이 근세 일본에서 전쟁의 기억을 담은 문헌이 간행되는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임진 전쟁 문헌의 전개사에서 제1-3기에 해 당하는 시기에 간행된 주요한 임진 전쟁 문헌인 다이코기 조선정벌기 구로다 가 보 등은 각자의 저자가 섬기는 주군 가문의 훈공을 선전하기 위해 집필되고 간행되었 다 21). 그러나 1705년 조선군기대전 조선태평기 가 간행되면서 시작된 제4기에 임진 전쟁 문헌이 집필 간행된 주요한 목적은 널리 독자 대중에게 상품 으로서의 책을 판매 17) 征 韓 之 役 藩 祖 勲 績 最 偉 抜 而 諸 書 不 具 載 甚 寥 々 冺 々 毎 語 及 此 未 曾 不 噫 嗚 喟 嗟 也 (쓰쿠바대학 소장본). 이 문헌을 사진촬영하여 발표자에게 제공해 주신 쓰쿠바대학 박사과정의 류정훈 선생에게 이 자리를 빌 어 감사드린다. 18)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倉 員 正 江 本 朝 武 家 高 名 記 感 状 巻 と 安 東 省 菴 著 立 花 戦 功 録 江 戸 文 学 41 (ぺりかん 社, 2009 11)에 상세하다. 19) 주14 전게서 196-7쪽. 20) 布 引 敏 雄 毛 利 関 係 戦 国 軍 記 の 成 立 事 情 日 本 史 研 究 373 ( 日 本 史 研 究 会, 1993 9) 52쪽. 21) 주4 전게서 제1부 제1장, 제2장 참조.

임진 전쟁의 기억 - 19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번각된 조 일 양국 임진전쟁 문헌을 중심으로 - 13 하기 위함이었다. 18세기 전기의 통속군담( 通 俗 軍 談 )이나 19세기 초기의 요미혼과 같이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문헌들의 경우에는, 이전 시대에 비하여 점점 더 극적인 전개 를 갖춘 스토리를 원하는 독자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이와 같은 사실의 왜곡을 행하 였다. 이와 같이 대외 전쟁 문헌군들의 전개와 상업출판의 추이가 연동한다는 사실은 근 세 이전과 근세의 대외전쟁 문헌군 사이의 큰 차이로, 이른바 상업출판에 의한 쇼비니즘 이 이 시기에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22). 그리고, 19세기 전기(제5기)는 서양 세력의 일본 접근에 따라 후기 미토학과 같이 내셔널리즘의 색채가 짙은 학문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 에 집필된 문헌, 또는 이 발표문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이전 시기에 필사본으로 유통되다 가 이 시기에 목판인쇄된 문헌들은 이러한 사조를 반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다 치바나 조선기 의 간행은 시대착오적인 느낌마저 준다. 4. 나가며 이상과 같이, 조 일 양국에서 집필되어 필사본으로 유통되던 임진 전쟁 문헌들 가운 데 몇몇이 근세 일본의 임진 전쟁 담론에서 제5기에 해당하는 19세기 전기에 번각 출판 되었다. 이들 출판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당시 현실화된 서구 세력의 접근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위기 의식이고, 또 하나는 임진 전쟁 당시 조상의 훈공이 인정받지 못한 데 대한 번 차원의 위기 의식과 불만이었다. 이들 번각 문헌은 단순히 필 사본으로 유통되던 임진 전쟁 문헌을 번각한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일본이라는 국가 차원 에서였든 번의 차원에서였든) 19세기 전기의 당시 상황을 위기로 느낀 주체들이 현상을 타파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의 결과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전자의 경우에는 후기 미토학의 내셔널리즘이 투영된 사례이자 동시에, 근세 말기에서 근대 초기에 목판 활자로 간행된 수많은 임진 전쟁 문헌의 선구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22) 주14 전게서 74쪽.

14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壬 辰 戦 争 ( 文 禄 慶 長 の 役 )の 記 憶 -19 世 紀 前 半 に 日 本 で 復 刻 された 朝 日 両 国 の 壬 辰 戦 争 に 関 する 文 献 を 中 心 に- 金 時 德 ( 高 麗 大 ) 今 回 の 発 表 では 朝 日 両 国 の 壬 辰 戦 争 の 参 戦 者 が 執 筆 し 筆 写 本 の 形 で 流 通 するも ののうち 19 世 紀 前 半 に 日 本 で 出 版 された 文 献 に 注 目 し 近 世 の 日 本 で 記 録 され 伝 承 さ れた 壬 辰 戦 争 の 談 論 史 に 於 ける 意 味 を 検 討 する 対 象 の 文 献 は 朝 鮮 側 の 隱 峯 野 史 別 錄 と 日 本 側 の 朝 鮮 物 語 立 花 朝 鮮 記 である 筆 者 は 近 世 における 日 本 の 壬 辰 戦 争 の 談 論 史 を 次 のように 整 理 した 第 一 期 壬 辰 倭 乱 ( 文 禄 慶 長 の 役 ) ~ 太 閤 記 (1637 年 3 月 以 前 刊 行 )の 成 立 まで : 戦 争 の 相 手 であった 中 国 の 明 朝 及 び 朝 鮮 の 文 献 が 輸 入 される 以 前 の 段 階 日 本 側 の 文 献 にだけ 依 拠 して 戦 争 の 記 憶 が 一 次 的 に 形 成 された 第 二 期 太 閤 記 以 後 ~ 朝 鮮 征 伐 記 (1659 年 刊 行 ) 豊 臣 秀 吉 譜 (1658 年 刊 行 )の 成 立 まで : 中 国 の 明 朝 の 兩 朝 平 攘 錄 (Liang Chao Ping Rang Lu) (1606 年 序 文 ) 武 備 志 (Wubei Zhi) (1607 年 起 稿, 1621 年 完 成 ) 等 が17 世 紀 の 前 期 に 流 入 し これらの 文 献 に 載 せられた 中 国 側 の 戦 争 の 記 憶 が 日 本 側 の 談 論 に 影 響 を 及 ぼした 第 三 期 朝 鮮 征 伐 記 豊 臣 秀 吉 譜 以 後 ~ 朝 鮮 軍 記 大 全 朝 鮮 太 平 記 ( 両 者 とも1705 年 に 刊 行 )の 成 立 まで : 柳 成 龍 の 懲 毖 錄 (Jingbirok) (1642 年 刊 行 ) 西 厓 先 生 文 集 (Seoae Seonsaeng Munjib) (1632 年 に 刊 行 ) 等 が17 世 紀 の 後 期 に 日 本 へ 流 入 し 韓 中 日 の 三 国 の 壬 辰 戦 争 の 談 論 が 日 本 で 集 大 成 された 第 四 期 朝 鮮 軍 記 大 全 朝 鮮 太 平 記 以 後 ~ 絵 本 太 閤 記 (1797 年 1802 年 に 刊 行 ) 絵 本 朝 鮮 軍 記 (1800 年 刊 行 )まで : 韓 中 日 の 三 国 の 壬 辰 戦 争 の 談 論 が 集 大 成 された 後 に 歴 史 文 芸 など 各 分 野 で 扱 われ 日 本 社 会 に 拡 散 する 中 で 江 戸 時 代 後 期 に 盛 んとなった 歴 史 小 説 ジャンルの 読 本 類 である 両 文 献 により 決 定 的 に 大 衆 化 した 時 期 第 五 期 絵 本 太 閤 記 絵 本 朝 鮮 軍 記 以 後 ~ 19 世 紀 末 まで 以 上 の 整 理 によれば 第 一 期 には 日 本 人 が 執 筆 した 文 献 だけに 依 拠 して 壬 辰 戦 争 の 談 論 が 形 成 され 第 二 期 と 第 三 期 のそれぞれの 時 期 に 中 国 と 韓 国 の 文 献 が 流 入 されてから

壬 辰 戦 争 ( 文 禄 慶 長 の 役 )の 記 憶 -19 世 紀 前 半 に 日 本 で 復 刻 された 朝 日 両 国 の 壬 辰 戦 争 に 関 する 文 献 を 中 心 に- 15 は 日 本 の 壬 辰 戦 争 談 論 が 多 面 的 な 性 格 をもつようになった そして 今 回 の 発 表 の 対 象 となる 文 献 はそれ 以 前 まで 筆 写 本 の 形 で 流 通 したが 第 五 期 すなわち 近 世 日 本 の 壬 辰 戦 争 談 論 史 の 最 後 の 段 階 に 該 当 する 時 期 に 板 本 として 定 着 した 朝 鮮 から 流 入 した 柳 成 龍 の 著 述 は 第 三 期 以 後 に 壬 辰 戦 争 の 談 論 に 大 きな 影 響 を 及 ぼし た しかし 一 方 では 朝 鮮 に 対 する 日 本 側 の 優 越 意 識 と 反 感 から 柳 成 龍 が 懲 毖 錄 で 叙 述 した 内 容 の 信 憑 性 を 疑 う 傾 向 もあらわれた こうした 傾 向 がみられる 早 い 時 期 の 文 献 は 両 国 壬 辰 実 記 (1796 年 成 立 )である 特 に 近 世 日 本 の 国 粋 主 義 的 な 学 派 である 水 戸 学 の 学 者 が 執 筆 した 征 韓 偉 略 (1831 年 刊 行 )では 壬 辰 戦 争 の 直 前 に 柳 成 龍 と 政 治 的 に 対 立 した 趙 憲 を 崇 めた 安 邦 俊 が 執 筆 した 隱 峯 野 史 別 錄 を 引 用 して 懲 毖 錄 の 信 憑 性 を 攻 撃 する 傾 向 が 著 しかった こうした 作 業 によって 近 世 日 本 で 壬 辰 戦 争 に 対 する 朝 鮮 側 の 見 方 を 代 表 するものであると 認 められていた 懲 毖 錄 を 相 対 化 して 壬 辰 戦 争 に 対 する 日 本 中 心 的 な 観 点 を 強 調 したのである 一 方 近 世 日 本 の 壬 辰 戦 争 談 論 で 第 一 期 に 該 当 する 朝 鮮 物 語 立 花 朝 鮮 記 は1592 年 の 壬 辰 戦 争 勃 発 の 当 時 それぞれ 第 一 軍 と 第 六 軍 に 属 した 武 将 に 関 する 文 献 であ る これらは 両 方 とも 筆 写 本 が 流 通 したが 第 五 期 に 初 めて 木 版 本 で 刊 行 された 朝 鮮 物 語 は 丁 酉 再 乱 ( 慶 長 の 役 )に 参 戦 した 武 将 が 残 した 記 録 をその 息 子 が 整 理 したもので 1597 8 年 の 間 に 発 生 した 南 原 の 戦 い 蔚 山 の 戦 いなどの 様 相 を 生 き 生 きと 記 録 したこと で 有 名 である 立 花 朝 鮮 記 は1593 年 に 起 こった 碧 蹄 館 の 戦 いに 参 戦 した 主 君 の 活 躍 をその 部 下 が 記 録 したものである このように 両 文 献 は 壬 辰 戦 争 参 戦 者 の 子 や 部 下 のように 近 親 者 が 執 筆 したという 点 で 共 通 性 をもっている しかしこの 両 文 献 が19 世 紀 前 期 に 刊 行 さ れた 目 的 は 違 った 1849 年 に 出 版 された 朝 鮮 物 語 の 板 本 には 水 戸 学 の 発 生 地 の 水 戸 藩 と 地 理 的 に 近 い 土 浦 藩 の 学 者 であった 藤 森 弘 庵 の 序 文 が 載 せられている 藤 森 弘 庵 は 行 政 家 である 同 時 に 西 欧 列 強 の 接 近 に 備 えて 日 本 の 海 岸 防 衛 を 主 張 した 海 防 論 者 (a theorist of coastal defense)であった 朝 鮮 物 語 の 序 文 で 彼 は 壬 辰 戦 争 が 日 本 の 民 を 疲 弊 させたため 豊 臣 秀 吉 の 家 が 没 落 したと 評 価 しつつも この 戦 争 で 日 本 の 武 威 を 振 るったため(raise military prestige) 今 まで 西 欧 の 勢 力 が 日 本 を 狙 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あると 主 張 し た 藤 森 のこの 主 張 は 壬 辰 戦 争 の 時 に 見 られた 日 本 の 武 威 により 清 国 や 西 洋 勢 力 が 日 本 を 狙 えないという 水 戸 学 の 主 張 と 通 ずるものである 藤 森 の 序 文 を 通 して 西 洋 勢 力 の 接 近 による 危 機 意 識 が 高 調 していた19 世 紀 前 期 にこの 文 献 を 刊 行 した 目 的 をうかがい 知 ることが できる 朝 鮮 物 語 の 刊 行 は 日 本 という 国 家 の 危 機 意 識 を 反 映 して 現 在 の 難 局 を 打 開 す るいとぐちとして 壬 辰 戦 争 を 回 顧 した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ができる このように 朝 鮮 物 語 が 日 本 という 国 家 が 直 面 した 問 題 を 解 決 しようとする 意 思 から

16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刊 行 されることになったものであるが 立 花 朝 鮮 記 が 刊 行 された 目 的 はこの 文 献 の 主 人 公 である 立 花 宗 茂 の 子 孫 が 支 配 した 柳 川 藩 の 問 題 を 解 決 するためであった 戦 闘 で 勝 利 することで 勲 功 を 奪 い 合 う 中 世 日 本 の 慣 習 により 碧 蹄 館 の 戦 いの 勝 利 以 後 に 参 戦 した 将 帥 たちは 互 いに 自 分 が 勝 利 の 主 役 であると 主 張 した この 時 宗 茂 側 は 自 分 たちが 不 当 に 勲 功 を 認 められなかったと 思 い これに 憤 慨 した 宗 茂 の 部 下 が 主 君 および 自 分 自 身 の 勲 功 を 主 張 するため 記 録 したものがこの 文 献 である この 文 献 は 近 世 時 期 に 筆 写 本 が 広 く 流 通 したが 柳 川 藩 側 は 依 然 として 宗 茂 の 勲 功 が 日 本 社 会 で 認 められていないと 判 断 してこの 状 況 を 打 開 するためには 近 世 日 本 でその 影 響 力 を 認 められていた 出 版 の 力 に 頼 ることにした のである 以 上 のように 朝 日 両 国 で 執 筆 され 筆 写 本 の 形 で 流 通 した 壬 辰 戦 争 に 関 する 文 献 の 中 のいくつかが 近 世 日 本 の 壬 辰 戦 争 の 談 論 で 第 五 期 に 当 たる19 世 紀 前 期 に 復 刻 出 版 され た 出 版 の 理 由 は 二 つに 大 別 できる 一 つは 当 時 に 現 実 化 していた 西 欧 勢 力 の 接 近 に 対 する 日 本 の 知 識 人 たちの 危 機 意 識 であり また 一 つは 壬 辰 戦 争 の 当 時 に 先 祖 の 勲 功 が 認 められなかったことに 対 する 藩 レベルの 危 機 意 識 と 不 満 であった この 復 刻 文 献 は 単 に 筆 写 本 の 形 で 流 通 した 壬 辰 戦 争 に 関 する 文 献 を 復 刻 したレベルにとどまるのではなく ( 日 本 とい う 国 家 レベルと 藩 レベルの 両 方 ともにおいて)19 世 紀 前 期 の 当 時 の 状 況 を 危 機 だと 感 じた 主 体 たちが 現 状 を 打 破 しようとした 明 らかな 目 的 意 識 の 結 果 であることに 注 目 すべきである 特 に 前 者 の 場 合 は 水 戸 学 の 日 本 中 心 的 な 歴 史 観 が 分 かる 事 例 であり それと 同 時 に 近 世 末 期 から 近 代 初 期 に 木 版 活 字 で 刊 行 された 数 ある 壬 辰 戦 争 の 文 献 の 先 駆 的 な 事 例 であ るという 点 で 重 要 である

壬 辰 战 争 的 记 忆 - 以 19 世 纪 前 期 日 本 翻 刻 的 朝 日 两 国 壬 辰 战 争 文 献 为 中 心 - 17 壬 辰 战 争 的 记 忆 - 以 19 世 纪 前 期 日 本 翻 刻 的 朝 日 两 国 壬 辰 战 争 文 献 为 中 心 - 金 時 德 ( 高 麗 大 ) 本 发 表 着 眼 于 由 朝 日 两 国 的 壬 辰 战 争 参 战 者 们 执 笔 以 抄 写 本 形 式 流 通 后 来 于 19 世 纪 前 期 在 日 本 出 刊 的 文 献, 分 析 其 在 近 世 日 本 记 录 并 传 承 的 壬 辰 战 争 论 谈 史 上 的 意 义 本 文 的 研 究 对 象 是 朝 鲜 的 隐 峰 野 史 别 录 和 日 本 的 朝 鲜 物 语 (Chosen Monogatari) 立 花 朝 鲜 记 (Tachibana Chosenki) 发 表 者 曾 把 近 世 日 本 的 壬 辰 战 争 论 谈 史 做 过 如 下 整 理 第 1 期 壬 辰 倭 乱 ~ 太 合 记 (Taikou Ki) (1637 年 之 前 刊 行 ) 成 立 : 是 作 为 战 争 对 象 的 中 国 明 朝 及 朝 鲜 的 文 献 被 引 进 日 本 之 前 的 阶 段, 只 根 据 日 方 文 献 形 成 了 战 争 的 一 期 记 忆 第 2 期 太 合 记 以 后 ~ 朝 鲜 征 伐 记 (Chosen Seibatsu Ki) (1659 年 刊 行 ) 丰 臣 秀 吉 谱 (Toyotomi Hideyosi Fu) (1658 年 刊 行 ) 成 立 : 中 国 明 朝 的 两 朝 平 壤 录 (Liang Chao Ping Rang Lu) (1606 年 序 言 ) 武 备 志 (Wubei Zhi) (1607 年 起 稿,1621 年 完 成 ) 等 在 17 世 纪 前 期 被 引 进, 这 些 文 献 里 记 载 的 中 方 的 战 争 记 忆 对 日 方 的 论 谈 产 生 影 响 第 3 期 朝 鲜 征 伐 记 丰 臣 秀 吉 谱 以 后 ~ 朝 鲜 军 记 大 全 (Chosen Gunki Taizen) 朝 鲜 太 平 记 (Chosen Taiheiki) ( 两 者 都 于 1705 年 刊 行 ) 成 立 : 柳 成 龙 的 惩 毖 录 (Jingbirok) (1642 年 刊 行 ) 西 厓 先 生 文 集 (1632 年 刊 行 ) 等 17 世 纪 后 期 流 入 日 本, 韩 中 日 三 国 的 壬 辰 战 争 论 谈 在 日 本 集 大 成 第 4 期 朝 鲜 军 记 大 全 朝 鲜 太 平 记 以 后 ~ 絵 本 太 合 记 (Ehon Taikou Ki) (1797-1802 年 刊 行 ) 絵 本 朝 鲜 军 记 (Ehon Chosen Gunki) (1800 年 刊 行 ): 韩 中 日 三 国 的 壬 辰 倭 乱 论 谈 集 大 成 之 后, 在 日 本 的 历 史 文 艺 等 各 领 域 扩 散, 最 终 通 过 这 两 本 江 户 时 代 后 期 兴 盛 的 历 史 小 说 体 裁 - 读 本 (Yomihon) 得 以 决 定 性 地 实 现 大 众 化 第 5 期 絵 本 太 合 记 絵 本 朝 鲜 军 记 以 后 ~19 世 纪 末 根 据 以 上 的 整 理, 在 第 1 期 只 是 依 据 日 本 人 执 笔 的 文 献 形 成 了 壬 辰 战 争 论 谈, 在 第 2 期 和 第 3 期 中 国 和 韩 国 的 文 献 各 自 被 引 进, 日 本 的 壬 辰 倭 乱 论 谈 具 有 了 多 重 性 格 本 发 表 研 究 的 文 献 是 在 那 之 前 以 抄 写 本 形 式 流 通 后 来 在 第 5 期, 即 近 世 日 本 的 壬 辰 战 争 论 谈

18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史 的 最 后 阶 段, 以 版 本 形 式 固 定 下 来 从 朝 鲜 流 入 的 柳 成 龙 的 著 述 在 第 3 期 以 后 对 壬 辰 战 争 论 谈 产 生 了 很 大 的 影 响 但 是 另 一 方 面, 由 于 日 方 对 朝 鲜 的 优 越 意 识 和 反 感, 出 现 了 怀 疑 柳 成 龙 在 惩 毖 录 里 所 述 内 容 的 可 信 性 的 倾 向 呈 现 这 种 倾 向 的 早 期 文 献 是 两 国 壬 辰 实 记 (Ryogoku Jinshin Zikki) (1796 年 成 立 ) 尤 其 是, 在 由 近 世 日 本 的 国 粹 主 义 学 派 水 户 学 (Mitogaku) 的 学 者 执 笔 的 征 韩 伟 略 (Seikan Iryaku) (1831 年 刊 行 ) 里, 引 用 了 由 崇 仰 赵 宪 ( 壬 辰 战 争 之 前 与 柳 成 龙 政 治 上 对 立 ) 的 安 邦 俊 执 笔 的 隐 峰 野 史 别 录, 突 出 了 攻 击 惩 毖 录 可 信 性 的 倾 向 通 过 这 种 作 业, 把 在 近 世 日 本 代 表 朝 鲜 对 壬 辰 战 争 看 法 的 惩 毖 录 对 立 化, 强 调 以 日 本 为 中 心 的 观 点 同 时, 在 近 世 日 本 的 壬 辰 战 争 论 谈 中, 相 当 于 第 1 期 的 朝 鲜 物 语 立 花 朝 鲜 记 各 是 关 于 1592 年 壬 辰 战 争 当 时 第 1 军 和 第 6 军 武 将 的 文 献 它 们 都 是 以 抄 写 本 流 通, 后 来 到 第 5 期 才 以 木 版 本 刊 行 朝 鲜 物 语 是 参 加 丁 酉 再 乱 的 武 将 留 下 的 记 录, 由 其 儿 子 进 行 整 理, 以 鲜 活 地 记 录 1597-1598 年 发 生 的 南 原 战 役 蔚 山 战 役 等 的 状 况 而 闻 名 立 花 朝 鲜 记 是 由 部 下 记 录 了 参 加 1593 年 发 生 的 碧 蹄 馆 之 战 的 主 君 的 活 跃 性 两 文 献 在 由 壬 辰 战 争 参 战 者 的 亲 信 ( 儿 子 或 部 下 ) 执 笔 这 方 面 具 有 共 同 性 但 是 这 两 本 文 献 在 19 世 纪 前 期 刊 行 的 目 的 有 所 不 同 1849 年 出 刊 的 朝 鲜 物 语 版 本 里, 登 载 了 与 水 户 学 的 发 生 地 水 户 藩 (Mito Han) 地 理 位 置 上 相 近 的 土 浦 藩 (Tsuchiura Han) 学 者 藤 森 口 岸 (Fujimori Kouan) 的 序 言 藤 森 口 岸 是 行 政 家, 同 时 也 是 主 张 进 行 海 岸 防 卫 以 应 对 西 欧 列 强 迫 近 的 海 防 论 者 在 朝 鲜 物 语 的 序 言 里 他 评 论 说, 壬 辰 战 争 使 日 本 百 姓 们 疲 乏, 所 以 丰 臣 秀 吉 家 门 没 落 了, 同 时 还 主 张, 由 于 在 这 场 战 争 里 宣 扬 了 日 本 的 武 威, 所 以 西 欧 势 力 至 今 不 敢 轻 视 日 本 藤 森 的 这 种 主 张 与 水 户 学 的 主 张 相 通, 水 户 学 也 主 张 壬 辰 战 争 时 日 本 表 现 出 的 武 威 致 使 清 朝 和 西 洋 势 力 不 敢 轻 视 日 本 通 过 藤 森 的 序 言, 我 们 可 以 看 出 在 西 洋 势 力 迫 近 的 危 机 意 识 高 潮 的 19 世 纪 前 期 刊 行 此 文 献 的 目 的 朝 鲜 物 语 的 刊 行 反 映 了 日 本 的 国 家 危 机 意 识, 是 为 了 寻 找 克 服 现 在 困 难 局 面 的 端 绪 而 回 顾 壬 辰 倭 乱 朝 鲜 物 语 是 为 了 解 决 日 本 所 面 临 的 问 题 而 刊 行 的, 与 此 相 反,1831 年 刊 行 的 立 花 朝 鲜 记 是 为 了 解 决 此 文 献 的 主 人 公 立 花 宗 茂 (Tachibana Muneshige) 的 后 代 们 统 治 的 柳 河 藩 (Yanagawa Han) 的 问 题 而 刊 行 的 出 于 中 世 日 本 在 战 争 中 胜 利 后 互 相 争 抢 功 勋 的 习 惯, 碧 蹄 馆 之 战 胜 利 以 后 参 战 将 领 们 互 相 主 张 自 己 才 是 胜 利 的 主 角 此 时, 立 花 宗 茂 方 面 认 为 自 己 的 功 勋 不 公 正 地 没 被 认 可, 对 此 感 到 愤 慨 的 宗 茂 的 部 下 们 为 了 主 张 主 君 和 自 己 的 功 勋 而 写 了 这 本 文 献 虽 然 此 文 献 在 近 世 以 抄 写 本 形 式 广 泛 流 通, 但 柳 河 藩 方 面 依 然 认 为 宗 茂 的 功 勋 在 日 本 社 会 没 有 得 到 认 可, 为 了 摆 脱 这 种 状 况 而 依 靠 了 在 近 世 日 本 影 响 力 得 到 认 可 的 出 版 的 力 量

壬 辰 战 争 的 记 忆 - 以 19 世 纪 前 期 日 本 翻 刻 的 朝 日 两 国 壬 辰 战 争 文 献 为 中 心 - 19 如 上 所 述, 在 由 朝 日 两 国 执 笔 以 抄 写 本 形 式 流 通 的 壬 辰 倭 乱 文 献 中, 有 几 本 在 近 世 日 本 壬 辰 倭 乱 论 谈 史 第 5 期 的 19 世 纪 前 期 翻 刻 出 版 它 们 得 以 出 版 的 理 由 大 致 分 为 两 种, 一 种 是 日 本 文 人 对 当 时 西 欧 势 力 接 近 的 危 机 意 识, 另 一 种 是 藩 (Han) 方 对 壬 辰 倭 乱 时 祖 先 的 功 勋 没 被 认 可 的 危 机 意 识 和 不 满 这 些 翻 刻 文 献 不 是 单 纯 地 翻 刻 以 抄 写 本 流 通 的 壬 辰 倭 乱 文 献, 而 是 19 世 纪 前 期 感 觉 到 当 时 危 机 的 主 体 们 ( 无 论 是 日 本 国 家 方 面 的, 还 是 藩 方 面 的 ) 为 克 服 这 种 现 象 的 明 确 目 的 意 识 的 产 物 尤 其 是 前 者, 既 可 以 看 出 水 户 学 的 以 日 本 为 中 心 的 历 史 观, 也 是 从 近 世 末 期 到 近 代 初 期 木 版 活 字 刊 行 的 无 数 壬 辰 倭 乱 文 献 的 先 驱, 非 常 重 要

再 造 藩 邦 에서 非 禮 不 動 으로 : 명나라에 대한 기억의 흐름 우경섭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再造藩邦 에서 非禮不動 으로 : 명나라에 대한 기억의 흐름 23 再造藩邦 에서 非禮不動 으로 : 명나라에 대한 기억의 흐름 우경섭(인하대) <목 차> Ⅰ. Ⅱ. Ⅲ. Ⅳ. 머리말 조 명 관계의 특수성과 再造藩邦 중화문명의 보편성과 非禮不動 맺음말 (1) (2) (1) 京畿道 加平郡 朝宗巖의 朝鮮 宣祖 御筆: 再造藩邦 (2) 忠淸北道 槐山郡 華陽洞의 明 毅宗 御筆: 非禮不動 Ⅰ. 머리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1644년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기까지 50년 동안, 조선 왕조는 전란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명나라의 참전에 힘입어 7년 간에 걸친 왜란을 끝마 칠 수 있었던 조선왕조는 곧바로 후금 정벌을 위한 군대 파견을 요구하는 명의 압력에

24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시달렸다. 그리고 명 청(후금) 간 충돌이 격화된 이후 한반도 북부를 두 세력 간의 전쟁터 로 제공해야 했으며, 1637년 병자호란 패전 뒤에는 청의 강요에 굴복하여 명나라 침공을 위해 군사들을 징발해 보내야만 했다. 中 華 文 明 의 실현을 이상으로 삼아 온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은 이 과정 속에서 심각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했다. 명실상부한 중화문명의 계승자 명나라의 몰락은 그 누구도 예 상할 수 없는 바였기에, 명 청교체는 그야말로 天 崩 地 解 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644년 이후에도 명나라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숭배는 지속되었다. 20세기 초반 조선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親 明 事 大 主 義 로 개념화하고, 조선왕조 의 他 律 性 과 停 滯 性 을 상징하는 징표로 삼았다. 최근까지도 조선후기의 역사는 그 시계 가 1644년의 시점에서 멈춰버린 정지된 시간 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1) 이미 멸망해 버린 명나라에 대한 기억을 19세기 말까지 놓지 못했던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사고 양식은 분 명 현재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해명 되어야 할 본질적인 과제가 남아있다. 그들은 정말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금도 변하 지 않은 단일한 기억을 부여잡고 살았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저술을 통해 명나라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 그것 을 후대에 전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바위에 새겨진 명나라 의 흔적들이다. 바위에 글자를 새긴 행위 자체가 강렬한 전승 의지를 함축할 뿐 아니라 그 내용 또한 대단히 집약적이고 상징적이기에, 그 글자들은 당대인들의 사고와 인식을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글귀의 내용과 돌에 새긴 경위 등에 대한 검 토를 통해, 명나라에 대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기억의 변화 양상, 그리고 그것이 내포하 고 있는 현실적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Ⅱ. 조 명 관계의 특수성과 再 造 藩 邦 1592년 6월,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두 달만에 명나라 만력제는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 였다. 그리고 1598년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명나라 장수 邢 玠 의 生 祠 堂 을 세우고 친히 再 造 藩 邦 네 글자를 써서 걸어 놓도록 명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원군을 보내어 오랑캐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제후국 조선을 다시 건설해 주었다 는 관념을 집약한 위의 네 글자 는 이후 조선왕조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상징적인 문구였다. 1) 계승범, 정지된 시간-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1.

再 造 藩 邦 에서 非 禮 不 動 으로 : 명나라에 대한 기억의 흐름 25 임란의 경험 속에 형성된 재조번방의 기억이 17세기 전반 만주족의 후금이 발흥하던 상황에서 조선왕조의 향배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은 임란 때와 같이 명나라가 오랑캐 후금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再 造 해 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1637년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꿇은 남한산성의 패전 이후에도 명에 대한 기대는 사라 지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단지 조선인들의 뼛속깊이 새겨진 사대주의 때 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현실적 판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1630년대 조선을 제압한 청조가 1644년 북경을 차지하고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동아시아 문명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강희 옹정 건륭의 盛 世 를 이룩 하였음은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1630-40년대의 시점에서 본다면, 지난 200년 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명나라의 멸망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이다. 더구나 한족의 1/350에 불과하던 만주족이 향후 300년 간 중원을 통치한 것은, 郭 沫 若 의 표현대로 일종의 기적이었다. 2) 따라서 1620년대 이후 1644년에 이르는 명청교체의 전야에, 조선 지식인들이 임란 때 再 造 의 기억을 회상하며 명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 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명나라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두려움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斥 和 派 의 중심 인물 金 尙 憲 (1570-1652)은 정묘호란 직후 후금과의 교역에 신중을 기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단순히 숭명사대의 의리론적 명분이 아 니라 명나라에 대한 두려움이 개재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논하는 자 대부분이 흉적은 가까이 있고 그 위세가 두려우며, 天 朝 는 관대하여 우 리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하가 임 금을 섬김은 아들이 아비를 섬김과 같은데, 어찌 부모의 자애로움을 믿어 공경함을 태만 히 해서야 되겠으며, 도적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大 義 를 돌아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옛날 속담에 이르기를, 비록 아버지가 있지만 호랑이로 변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3) 또한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청나라에서 征 明 戰 수행을 위한 군사 파견을 조선에 요청해 왔을 때, 청나라의 요구에 응하지 말 것을 청한 상소문 역시 동일한 맥락이었다. 2) 마크 C. 엘리엇(이훈 김선민 옮김), 만주족의 청제국, 2009, 푸른역사, 34-35쪽. 3) 청음집 請 勿 以 中 國 物 貨 與 虜 箚 - 同 年 ( 丁 卯 ) 十 二 月 今 之 議 者 多 言, 兇 賊 密 邇, 其 勢 可 畏, 天 朝 寬 大, 必 不 我 責, 臣 以 爲 不 然. 臣 之 事 君, 猶 子 事 父, 豈 可 恃 父 母 之 慈 愛 而 怠 於 敬 謹, 畏 盜 賊 之 侵 凌 而 不 顧 大 義 乎? 古 諺 曰, 雖 有 父, 安 知 不 爲 虎?

26 동북아역사재단,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 전쟁의 동아시아적 연쇄와 연대의 가능성 지금 계획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禮 義 를 지킬 만하지 못하다고 하니, 신 역 시 예의에 의거하여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利 害 로써 논하더라도, 힘센 이웃의 한 나절 강포함만을 두려워하여 천자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산해관 아래 줄지어 주둔한 군사들과 바다 위 군함들의 병졸들이 비록 오랑캐를 쓸 어 내고 요동 땅을 회복하게에 부족하지만, 우리나라의 잘못을 금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랑이 앞의 倀 鬼 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 죄를 물으려 는 군사가 천둥번개처럼 달려와 배를 띄운 지 하루 만에 황해도와 경기도 지역에 당도할 것이니, 두려움의 대상이 오직 瀋 陽 에만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4) 1639년의 윗 글에서 느낄 수 있듯이, 조선이 만약 청나라 편에 섰다가 명이 부활할 경우 그 보복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우려는 단순히 친명사대주의자의 공허한 외침으로 만 들리지 않는다. 적어도 강희제 즉위 이전까지는 중원의 향배를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명나라의 부활을 꿈꾸며 혹은 두려워하며 재조번방의 기억을 부여 잡고 있었던 조선 유학자들의 사유는, 분명 華 夷 의 분별이라는 유학적 담론에 토대를 두 고 있었지만,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 몽상에 불과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 면, 재조번방의 기억 속에는 중화문명의 계승자로서 명나라에 대한 존숭의 관념과 더불 어, 임란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경험했던 명나라의 현실적 권위에 대한 기대감 내지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조번방이라는 특수한 현실논리에 입각했던 명에 대한 기억은 결국 17세기 중후반 이후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점차 안정되어 가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선택의 기로 에 설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가 계속 중원을 지배한다면 조선왕조는 어떠한 입장을 취해 야 할 것인가? 이같은 물음에 대한 해답은 둘 중의 하나였다. 첫째는 청나라를 이제 천자 의 나라로 섬기며 그동안 명에 대하여 행했던 바와 같이 사대의 예로써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 지식인들이 신봉해 온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폐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째는 임란 이후 해오던 대로 명나라의 再 造 之 恩 을 내세워 尊 華 攘 夷 의 이상을 유지 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수반되었다. 우선 명나라가 부흥하여 조선을 再 造 해 줄 가능성이 사라진 마당에, 그러한 구호가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 4) 淸 陰 集 卷 21, 請 勿 助 兵 瀋 陽 疏 - 己 卯 十 二 月 今 之 謀 者 以 爲 禮 義 不 足 守, 臣 未 暇 據 禮 義 以 辨, 雖 以 利 害 論 之, 徒 畏 強 隣 一 朝 之 暴, 而 不 懼 天 子 六 師 之 移, 非 遠 計 也. 關 下 列 屯 之 兵, 海 上 樓 舡 之 卒, 雖 不 足 於 掃 氈 裘 復 遼 疆, 而 其 於 禁 我 國 之 爲 梗 則 有 餘 也. 若 聞 我 國 之 人 爲 倀 鬼 於 虎 前, 問 罪 之 師, 雷 奔 霆 擊, 帆 風 一 日, 直 到 海 西 圻 島 之 間, 毋 謂 可 畏 者 獨 在 於 瀋 陽 也.

再 造 藩 邦 에서 非 禮 不 動 으로 : 명나라에 대한 기억의 흐름 27 는가 하는 문제였다. 더구나 그것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합리화하는 논리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대의 명분이 再 造 라는 현실적 이유에 있다 면, 그 대상이 꼭 정통왕조(명)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조는 남한산성의 함락 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왕위를 보전해 준 청 태종의 행위를 재조지은 이라 표현한 바 있 었다. 조선국왕 신 某 는 삼가 大 淸 國 寬 溫 仁 聖 皇 帝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지난 해(1636 년) 봄 이후 大 國 은 한결같은 情 意 로써 小 邦 을 대하였지만, 小 邦 이 大 國 에 죄를 저지른 것 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大 軍 이 오게 됨은 실로 자초한 결과입니다. 군신 상하가 두려움 에 떨며 날을 보내며 오직 죽음만을 기다렸는데, 뜻밖에 하늘같은 聖 德 이 불쌍히 여기시 어 宗 社 를 보전하게 되었습니다. 동방의 백성들이 자자손손 모두 폐하의 공덕을 칭 송하리니, 하물며 직접 재조( 再 造 )의 은혜를 입은 신의 경우야 어떠하겠습니까? 5) 요컨대, 임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현실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재조번방의 기억은 17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尊 華 攘 夷 라는 유학적 이상을 담아내기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 었다. 이에 따라 철학적 보편성의 기반 위에서 명나라로 상징되는 중화 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일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불가 결한 과제였다. 이러한 작업은 17세기 후반 宋 時 烈 (1607-1689)로부터 시작되었다. Ⅲ. 중화문명의 보편성과 非 禮 不 動 주자학을 광신하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친명사대주의자 로 평가받는 송시열이 17세기 중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명에 대한 의리를 고수했던 사실은 크게 이상할 바 없 을 듯하다. 6) 특히 명나라 숭정제의 유필 非 禮 不 動 네 글자를 중국에서 구해 와 화양동 바위에 새긴 뒤 글씨 원본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한 煥 章 菴 은 그의 친명사대 사상을 상 징하는 증거로 지목되어 왔다. 다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송시열이 좀처럼 再 造 藩 邦 혹은 再 造 之 恩 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송시열에게 재조 란 조선 국왕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5) 仁 祖 實 錄 卷 34, 仁 祖 15 年 正 月 癸 亥 (23). 6) 三 浦 國 雄, 朱 子 大 全 箚 疑 おめぐって- 朝 鮮 朱 子 學 の 一 側 面, 森 三 樹 三 郞 博 士 頌 壽 紀 念 東 洋 學 論 叢, 1979 ; 十 七 世 紀 朝 鮮 における 正 統 と 異 端 - 宋 時 烈 と 尹 鑴 -, 朝 鮮 學 報 102,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