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기조강연> 조선통신사, 왜 일본에 갔을까?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 (한국어 자료3 (일본어 자료11 <기조강연> 일본에서의 조선통신사의 족적 나카오 히로시 (조선통신사유네스코기록유산 일본학술위원회 위원장 (한국어 자료21 (일본어 자료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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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왜 일본에 갔을까? 손 승 철 (강원대학교 1. 오늘, 조선통신사가 우리에게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이후, 일반적 기대와는 달리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그 시작은 2005년,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와 독도 망 언에서 비롯되었다. 한국과 일본. 이 뿌리 깊은 갈등의 진원지는 어디에 있을까. 또 그 갈등의 해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한일 양국이 서로 우호교린을 해야 하는 것 은 역사적 명제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두 나라의 갈등이 서로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과거 2천년 간의 역사적 경험은 말해 준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 전 후기 500여년에 걸쳐 양국 사이를 오간 조선통 신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양국은 외교 문제 를 해결했고, 물자와 문화를 교류했으며, 그 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중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라는 불행한 역사 도 있었지만, 통신사를 통해 다시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500년간 한일양국의 갈등을 해소한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약탈의 시대에서 공존의 시대로 1 왜구의 약탈 한반도에 대한 왜구의 약탈은 1350년부터 시작되며, 이후 고려 말까지 해 안 지방은 물론 내륙 깊숙이 약탈이 자행된다. 몽고가 약해지면서 중국대륙 에서는 신흥제국 명이 건국되고, 한반도는 몽골로부터의 자주성 확립, 일본 열도는 남북조시대로 모두 정치적으로 혼란기를 격고 있었다. 이때 양 지역 간에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倭 寇 의 활동이 극심해진다. 고려말기 왜구에 의한 피해는 엄청났다. 高 麗 史 에는 1351년 왜구의 기 록이 등장한 이래 1392년까지 총 495회의 침입기사가 나오며, 그 지역도 한 3
반도 전역에 걸쳐있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한때 도읍인 개경까지 위협을 받 아 개경천도론이 주장되기도 했고, 낙동강을 따라 대구 상주까지 왜구가 출 현하자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더 깊은 예천 보문사로 옮기자는 제안이 나 오기도 했다. 왜구들은 조창을 습격하여 경제적으로 노략질을 하는 한편 사 람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거나 또는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예를 들면현 재 알려져 있는 고려불화는 총 160여점인데, 한국에는 15점밖에 없고, 일본 에 120여점이 남아있다. 또 쓰시마와 이키에는 80여구의 신라 고려 불상과 동종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왜구의 침략에 대해 고려에서는 船 軍 을 확충하고, 崔 茂 宣 으로 하여 금 화약과 화포를 제조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朴 威 로 하여금 대마 도를 정벌하고, 鄭 夢 周 등을 5차례나 사절로 보내 왜구금지를 요청하기도 했 다. 그러나 足 利 장군에게는 왜구금압 능력이 없던 시기여서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즈음 한반도에는 이성계에 의해 朝 鮮 이 건국되고, 일본에는 아시 카카 요시미츠( 足 利 義 滿 가 南 北 朝 를 통일하여 무로마치( 室 町 막부를 열게 된 다. 당시 조선왕조와 무로마치막부에서는 倭 寇 問 題 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朝 鮮 通 信 使 가 탄생되게 된다. 도쿄대학교에 소장된 왜구도권 에는 왜구 약탈의 모습이 상세하다. 이들 왜구가 한반도에 출몰하여 무엇을 어떻게 약탈했는가. 고려사 에는 왜구가 극심했던 1382년 기록에는 서너살짜리의 여자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 내고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뒤 그 쌀로 밥을 해 먹었다. 는 기록이 있다. 2 공존의 시대 : 조선통신사의 시작 1392년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왜구의 약탈은 계속되었다. 일본도 같은 시 기에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면서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과 일본은 왜구 문제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틀 안에서 해결하고자 했고, 양국 이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책봉 체제에 편입된다. 이어 1428년부터 조선통신 사사 왕래하면서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 교린 관계를 성립시키면서 공존의 시대를 열어간다. 이 과정에서 조선통신사는 믿음으로 통하는 通 信 의 의미를 지니게 되고, 교린 관계의 밑바탕에는 믿음[ 信 ]이 전제되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 에서 交 隣 의 용례를 보면, 信 道 義 禮 라는 유교적 실천규 범을 전제로 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交 隣 之 信 交 隣 之 道 交 隣 之 義 交 隣 之 禮 의 개념을 체계화했다. 즉 교린이란 信 義 道 理 義 理 禮 義 라는 유교적 가치기준을 전제로 하는 외교이며, 通 信 使 는 이러한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信 義 를 하는 사절 이다. 4
3 경상도의 재팬타운, 삼포 1426년 삼포제도가 정비되면서, 조선에 오는 모든 왜인들은 한반도 동남 해안의 세 포구(염포, 부산포, 제포에 입항했다. 각종 명목으로 조선에 왔던 일본인들은 삼포에서 무역을 하면서, 우두머리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조선국 왕을 알현했고,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삼포에 살게 되었다. 1471년 신숙주가 편찬한 해동제국기 에는 삼포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조 선왕조실록 에는 삼포 왜인들의 생활상을 기록했다. 가히 조선시대의 저팬 타운 이라고 부를 만하다. 1419년 대마도 정벌에 의해 일시 페쇄되었으나, 그들의 간청으로 1423년 에 다시 두곳을 허락하고, 이어 鹽 浦 를 추가함으로써 삼포제도를 확립했다. 포소에는 왜관을 설치하여 각기 제포(진해에 30호, 부산포(부산에 20호, 염 포(울산에 10호의 항거왜인을 거주하게 하여, 도항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허 가함으로써 통교질서를 세웠다. 이들 삼포 가운데 조선후기에는 부산포만이 남아 초량왜관으로 이어졌다. 당시 삼포를 통해 어떠한 물자의 교류가 이루어졌을까.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물품은 쌀이나 콩 등 식량류와 섬유품이었다. 섬유품은 처음에는 모 시와 마포, 명주였으나 15세기 후반부터는 면포로 바뀐다. 일본에서 면포를 선호한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목화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조선면포가 감촉이 좋은 고급의류로서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주 상품은 구리인데, 예를 들면 1428년에 는 2만 8천근의 구리를 가져왔고, 1489년에는 2만근의 구리를 가져오고, 10 만필의 면포를 가져갔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놋쇠로 만든 식기를 사용했고, 동전과 금속활자등 구리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남방산 蘇 木 과 물소뿔이, 후추등이 수입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우호교린의 교류관계도 1592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으로 단절되고, 이후 7년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3. 전쟁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1 임진왜란 1592년, 조선통신사와 삼포에 의한 200년간의 우호교린이 임진왜란에 의 해 깨진다. 임진왜란의 원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에게 돌리지만, 사실 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인 책봉 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무로마 치 막부의 외교 노선을 계승하지 않고 배신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조선통신 사를 朝 貢 使 로 취급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 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5
과거의 상경로를 통해 20일 만인 5월 2일, 한양에 입성했고, 6월 16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프로이스의 일기 에는 그의 침략 의 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의 승리도 개전 초기 2달간이었고, 이후 7년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의병과 민중의 저항, 이순신 장군의 활약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 에 29개나 되는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지만, 히데요시는 죽고,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그의 아들 히데요리는 전쟁 후, 히데요시가 쌓은 오사카 성 정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인에게 지울 수 없는 전쟁의 상흔을 남겼다. 전쟁 중에 당한 여인들의 수난을 그린 삼강행실도 와 양국의 각종 기록들 은 지금도 그 참혹함에 치를 떨게 한다. 또 조선인의 코로 만든 코무덤 등, 이후 조선 사람은 일본인을 불구대천의 원수 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7 년간의 전쟁을 통해, 조선 문화가 일본에 전달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도공 들이 빚은 도자기는 일본 국보가 되었고, 고려불화나 조선종, 많은 서적들이 지금도 일본 문화재로 전해진다. 특히 일본군은 조선여인이나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여 굴욕적인 생활을 강 요하는 가하면, 노예로 팔아 넘겼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노예전쟁으로 부르 는 학자들도 있다. 7년간의 전쟁에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납치 되었는지 정 확한 수는 알 수 없다. 학자에 따라서는 납치인원을 적게는 5만에서 많게는 20만명까지 산출해 내고 있다. 피랍조선인이 노예로 팔려가는 상황을 당시 일본에 와있던 신부 루이스 세쿠에이라(Luis Cerqueira는 다음과 같이 기록 했다. 나가사키에 인접한 곳의 많은 일본인들은 포루투깔 사람들이 노예를 사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상인들은 그들에게 조선사람을 팔기 위하여 일본의 여러지역을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잡혀 잇 는 지역에서 그들을 구매하는 한편, 조선인을 포획하기 위해 직접 조선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포획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 게 죽였고, 중국배에서 이들을 포루투깔 상인에게 팔았다. ( 1598년 9월 4일 자 기록 또한 종군승으로 왜란에 참가한 케이넨( 慶 念 은, 일본에서 수많은 상인이 왔는데, 남녀노소를 새끼줄로 묶어 뒤에서 재촉하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채 찍으로 매질했다. ( 조선일일기 다고 기록했다. 마치 로마시대의 영화속에 나오는 노예들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가리지 않고 잡아온 사람들 중에는 건장한 남자나 노약자보다는 아무래도 젊은 여인이 많았다. 일본천주교에서 조선의 성녀로 칭송받고 잇는 오다 줄리아 도 조선소녀였다. 또 어린아이들도 많았는데, 얼마 전 베스트셀 6
러가 되었던 <베니스의 개성상인>도 7세때 일본군에게 끌려 간 조선소년이 노예로 팔려 이탈리아에 가서 상인으로 대성하는 이야기였다. 이상과 같은 임진 정유왜란의 7년간의 잔혹행위는 조선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일본인상을 남겼다. 말 그대로 하늘아래 같이 살 수가 없는 不 俱 戴 天 의 원수로 각인되었다. 2 통신사의 부활, 평화의 시대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 조선에서는 도꾸가와 막부의 강화에 대한 진 의를 살피기 위해, 승려 유정(사명대사를 探 賊 使 란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했 다. 사명대사 일행은 교토에 가서 도쿠가와 장군의 강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 하고 피로인 3천여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사명대사 일행의 귀국 후, 조선에 서는 강화를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일본국왕 명의의 강화요청 서, 임란당시 왕릉도굴범의 소환, 그리고 조선피로인의 송환이었다. 이에 대 해 일본은 국왕명의의 국서를 위조하고, 왕릉도굴범은 대마도의 잡범으로 대 치했으며, 쇄환사편에 피로인들을 돌려 보냈다. 물론 조선에서는 국서가 위 조된 것이고, 도굴범도 잡범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조선의 요구가 형 식적으로는 수용되었기 때문에 1607년 강화사를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했다. 하지만 사절단의 명칭은 回 答 兼 刷 還 使 였다. 이로부터 조선후기에는 총 12회 의 조선사절이 파견되는데, 通 信 使 의 명칭이 다시 쓰여지는 것은 세 번째인 1636년부터이다. 통신사의 파견목적은 막부장군의 습직이나 양국간의 긴급한 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통신사의 편성과 인원은 각 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300명에서 500명이 넘는 대사절단이 1년에서 1년반이 나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육로로, 그리고 부산 에서 대마도를 거쳐, 오사까 까지는 해로로, 오사까에서는 다시 육로로 에도 ( 江 戶 : 東 京 까지 왕래하였다. 통신사 행렬의 장려함은 1636년 통신사를 직접 목격한 네덜란드 상관장 니콜라스의 기록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먼저 무용과 피리 북의 주악이 행해지고, 그 후에 벼를 타작할 때 쓰 는 것과 같은 큰 막대기를 가진 몇 사람이 두 명씩 지나가고, 그 양측에서 각각 금과 생사를 섞어 만든 망을 든 세 사람이 경호하고 있었다. 그 후에 약 30명의 젊은이가 말을 타고 뒤 따랐다. 그 뒤에는 5-60명이 붉은 우단을 친 가마를 메고 따라갔다. 그 안의 탁자 위에는 칠을 한 상자가 있었고, 거 기에는 조선문자로 쓰여진 일본황제에게 보내는 서한이 들어 있었다. 재차 여러종류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가 뒤따라 왔다. 가마가 몇 대 지 7
나가고, 검은 비단 옷을 입은 사절의 부관이 가마를 타고 지나갔다. 잠시 후 400명의 기사 약 15분이 지나자 200명의 호위병이 따르고, 일본 귀족일 행이 가고, 마지막으로 조선인의 화물과 선물을 운반하는 약 천 마리의 말 이들의 행렬이 전부 통과하는 데는 약 5시간이 걸렸다. "( 히라도네 델란드상관일기( 平 戶 オランタ 商 館 日 記 당시 규슈의 히라도( 平 戶 에는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상관 장이던 니콜라스가 에도에 가던 중 만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묘사한 것이 다. 조선통신사를 안내, 호위하거나 짐을 나르기 위해 평균 3,000여명이 동 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합치면 통신사행렬은 총 3-4천여 명에 이르렀다. 한사람의 거리를 1미터만 잡더라도 4키로는 족히 될 것이고, 그 행렬이 통과 하는데 5시간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신사가 조선후기 한일관계에서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정치외 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통신사가 통과하는 객사에서의 한시문과 학술교류 는 한일간의 문화상의 교류를 성대하게 했다. 1719년 통신사 수행원 신유한 은, 초사흘 임인, 식사 후, 유학자 10여명이 대청에 모였다. 나는 세 서기와 함께 나가 서로 인사하고 앉았다. 좌중의 사람들 중에는 각각 장단률( 長 短 律 및 절구( 絶 句 를 베껴와서 나에게 주며 창화( 唱 和 를 요청했다. 즉시 모든 요 청에 응하여 회답했다. 그가 부르면 나는 곧 화답하고, 혹 바꾸어서 장편이 되기도 했으며, 책상위에는 시문 화답한 종이가 수북히 쌓였다. 김세만이 옆 에 앉아서 쉴 겨를이 없이 부지런히 먹을 갈았다. 하루중 만나는 사람은 대체로 3,4편을 얻었지만 혼자서 상대했고, 왼쪽에 응하고, 오른쪽에 답하고, 요청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독창 성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거나 윤색할 여유도 없었다. 다음날에도 십수명과 만 나서 전날과 같이 창수햇으며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쳤다. ( 신유한 해유록 그렇다면 일반서민들은 어떠했을까. 통신사의 기행문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에는 통신사에 관한 많은 회화자료가 남겨져 있다. 예를 들면 풍속도화 가로서 유명한 하가와 도에이( 羽 川 藤 永 의 <조선인래조도>가 코베의 시립박 물관에 있다. 이 그림은 에도(동경의 니혼바시( 日 本 橋 를 지나고 있는 통신사일행을 그 리고 있다. 화면 중앙에서부터 좌측 뒤쪽에 후지산( 富 士 山 과 에도성( 江 戶 城 의 성곽이 보이고, 두부모를 잘라서 짜맞춘 듯이 이층집 지붕이 나란히 늘어 서 있고, 그 사이를 통신사일행이 지나간다. 2층은 문을 닫아서 격자( 格 子 만 8
이 눈에 띄지만, 1층에는 상가의 휘장 밑으로 에도의 시민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있다. 양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 술이나 차를 마시는 사람, 이린 애에게 젖을 먹이는 아낙네의 모습도 보이지만, 사람들은 통신사 행렬에 넋 을 잃고 보고 있다. 그러나 길 중앙에 무사 한사람과 개는 구경하는 사람들 을 향하고 있다. 경비를 맡은 무사인지 봉을 들고 서 있는 사람과 개, 방수 용 물통이 눈에 띄고, 통신사를 맞이하는 에도시민들의 꼼짝도 하지 않는 모 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2-30년만에 한번 오는 통신사의 장관을 놓치지 않으 려는 서민들의 모습이다. 마치 지난번 88올림픽 때나 월드컵 경기 때 서울시 민의 열광하는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겨울 연가 를 보는 현대 일본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신사는 또 하나의 한류, 즉 <조선시대의 한류>가 아니 었을까. 물론 통신사가 한일관계의 전부는 아니었다. 조선에서는 부산에 왜관을 설 치하여 한일간에 무역을 통하여 필요한 물자를 교류했으며, 또 대마도주에게 는 별도로 100명에서 150명 규모의 譯 官 使 를 51회나 파견하여 한일관계 에서 대마도의 입지를 세워주고, 한일간의 현안을 풀어갔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은 매우 적극적이며, 주체적으로 한일관계를 전개했 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조선전기와는 달리, 조선후기에는 일본에서는 장군 의 사신이 오지 않고, 조선에서만 사신이 파견되었다고 해서, 조선외교의 열 세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임진왜란때, 과거 일 본국왕사의 상경로가 일본군의 진격로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일 본인의 상경을 금지시키고, 부산 왜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통신사 파견의 비용은 부산에서부터는 모든 왕복 비용을 일본에서 부담하였는데, 그 비용이 막부의 1년 예산이었다고 한다. 3 통신에서 배신으로, 침략의 전주곡 이러한 通 信 使 行 도 1811년에 끝이 나며, 그것도 對 島 에서 약식으로 국 서를 교환하는 易 地 通 信 이었다. 물론 그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장군직을 습직 하였고, 그때마다 통신사파견이 요청되었으나, 일본 내의 사정에 의해 4차례 나 연기를 하다가 결국 1868년 명치유신을 맞게 되고,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로써 통신사로 상징되었던 조선시대의 우호교 린의 교류도 끝이 났다. 통신사로 상징되는 조 일 교린관계의 종말은, 명치유신을 알리는 일본 측 의 서계로부터 비롯되었다. 명치유신 직후, 일본에서는 天 皇 의 집권사실과 명치 외무성에서 한일관계를 전담한다는 서계를 보내왔다. 그런데 서계의 양 식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일본천황을 한 단계 위에 놓고, 天 皇 대 朝 鮮 國 王 의 9
외교를 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에서 외교관례상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조선에서는 장군이 집권하건, 천황이 집권하건, 그것은 일본 국 내의 사정이므로, 조선은 단지 일본의 최고집권자와 대등한 관계를 하면 된 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결국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1872년 부산왜관을 점령했고, 이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침략외교에 의해 교린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조선전기 통신사에 의한 200년간의 교린관계가 임진왜란에 의해 깨진 것 처럼, 조선후기 260여년간 교린관계도 일본의 일방적인 왜관점령에 의해 종 말을 고했다. 교린관계의 붕괴과정은 다르지만, 일본의 일방적인 무력침공이 라는 똑같은 형태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4.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의미 한일양국에서는 20세기의 불행을 극복하고, 21세기의 출발을 새롭게 하자 는 의미에서, 2005년을 한일우정의 해 로 정했다. 그러나 교과서 왜곡문제와 독도망언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 정부에 들어서는 3년간이나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국은 이러한 외교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하루 1만 명의 왕래시대에 접 어들었다. 김포-하네다 간에는 직항로가 개설되어,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 지 서울-동경 간을 오가고 있는 시대이다. 지난해 말에 3년간이나 양국 정상회담을 가로막았던 위안부 문제가 외교 적인 차원에서 원론적으로 합의가 되고 양국관계의 물고를 텄다. 그러나 양 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이를 파기할 것을 주장하고 있 다. 이러한 행위는 한일관계를 다시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모두 지 나간 한일관계의 역사적 경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바보같은 짓이다. 왜구의 약탈을 삼포의 공존으로 바꾸고, 전쟁의 시대를 다시 평화의 시대 로 바꾸어간 통신사에 다시 주목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점에서 한 일간에 진정한 의미의 우호교린이 무엇인가, 다시 한번 <조선통신사>가 일 본에 간 이유를 되새기며, 그 역사적 메시지를 들어보자. (끝 10
朝 鮮 通 信 使 はなぜ 日 本 に 行 ったのか ソンスンチョル ( 江 原 大 学 校 1. 今 日 朝 鮮 通 信 使 が 我 々に 与 える 歴 史 的 意 味 とは 2002 年 W 杯 の 韓 日 共 同 開 催 以 降 人 々の 期 待 とは 裏 腹 に 韓 日 関 係 は 悪 化 の 途 をたどっている その 始 まりは 2005 年 の 歴 史 教 科 書 歪 曲 問 題 と 独 島 (トクト 関 連 の 妄 言 であった 韓 国 と 日 本 この 根 深 い 葛 藤 の 震 源 はどこなのだろうか また その 葛 藤 を 解 決 する 方 法 はどこから 探 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韓 日 両 国 が 友 好 交 隣 ( 善 隣 友 好 誠 心 交 隣 の 関 係 を 築 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 歴 史 的 命 題 である いか なる 理 由 でも 両 国 の 葛 藤 はお 互 いに 何 の 得 にもならないということを 過 去 の 2 千 年 にわたる 歴 史 的 経 験 が 物 語 っている その 意 味 で 朝 鮮 時 代 前 後 期 の 約 500 年 にわたり 両 国 を 行 き 来 した 朝 鮮 通 信 使 が 持 つ 歴 史 的 意 味 は 大 変 大 きい 朝 鮮 通 信 使 を 通 じて 両 国 は 外 交 問 題 を 解 決 し 物 資 と 文 化 の 交 流 を 行 い その 結 果 友 好 的 な 関 係 を 保 つことができた 無 論 その 間 に 豊 臣 秀 吉 による 朝 鮮 侵 略 という 不 幸 な 歴 史 もあったが 通 信 使 を 通 じて 再 び 友 好 的 な 関 係 を 回 復 することができた 本 稿 では 朝 鮮 時 代 500 年 にわたり 韓 日 両 国 の 葛 藤 を 解 消 した 朝 鮮 通 信 使 の 歴 史 的 意 味 について 再 考 する 2. 略 奪 の 時 代 から 共 存 の 時 代 へ 1 倭 寇 による 略 奪 朝 鮮 半 島 に 対 する 倭 寇 の 略 奪 は 1350 年 から 始 まり その 後 高 麗 時 代 末 まで 海 岸 地 域 はもちろん 内 陸 深 くまで 略 奪 行 為 が 行 われた モンゴルの 勢 力 が 弱 くな り 中 国 大 陸 では 新 興 帝 国 の 明 が 成 立 し 朝 鮮 半 島 はモンゴルからの 自 主 性 の 回 復 日 本 列 島 は 南 北 朝 時 代 と いずれも 政 治 的 混 乱 期 にあった この 時 両 地 域 では 海 を 挟 んで 倭 寇 の 活 動 が 活 発 になった 高 麗 末 期 倭 寇 による 被 害 はひどいものであった 高 麗 史 には 1351 年 に 倭 寇 に 関 する 記 録 が 初 めて 登 場 して 以 来 1392 年 まで 計 495 回 侵 入 に 関 する 記 11
述 があり その 地 域 も 朝 鮮 半 島 全 域 にわたっている そのため 高 麗 では 時 都 の 開 京 (ケギョンまでも 脅 かされ 開 京 遷 都 論 が 主 張 された また 洛 東 江 (ナ クトンガンに 沿 って 大 邱 (テグ 尚 州 (サンジュにまで 倭 寇 が 出 没 すると 海 印 寺 (ヘインサの 萬 大 蔵 経 をより 山 奥 の 醴 泉 (イェチョンの 普 門 寺 (ポムンサ に 移 そうという 提 案 もなされた 倭 寇 は 漕 倉 ( 漕 運 すべき 穀 物 を 保 管 するため 川 辺 や 海 辺 に 建 てた 倉 庫 を 襲 撃 して 経 済 的 な 略 奪 行 為 を 行 うだけでなく 人 を 拉 致 して 奴 隷 として 売 り 払 ったり 多 くの 文 化 財 を 略 奪 した たとえば 現 在 確 認 されている 高 麗 仏 画 は 計 約 160 点 だが 韓 国 には 15 点 しかなく 日 本 に 約 120 点 が 残 っている また 対 と 壱 岐 には 新 羅 高 麗 の 仏 像 と 銅 鐘 が 約 80 点 残 っている このような 倭 寇 の 侵 略 に 対 して 高 麗 は 船 軍 を 拡 大 し 崔 茂 宣 (チェムソン に 火 薬 と 火 砲 を 作 らせるなど 積 極 的 に 対 すると 同 時 に 朴 威 (パクウィに 対 を 征 伐 させ 鄭 夢 周 (チョンモンジュらを 5 回 も 使 節 として 送 り 倭 寇 禁 圧 を 要 請 した しかし 当 時 の 足 利 将 軍 にはそれに える 力 がなかったため そ れほど 効 果 はなかった この 時 期 朝 鮮 半 島 は 李 成 桂 (イソンゲによる 朝 鮮 が 成 立 し 日 本 は 足 利 義 満 が 南 北 朝 を 統 室 町 幕 府 が 幕 開 けした 当 時 朝 鮮 王 朝 と 室 町 幕 府 は 倭 寇 問 題 を 解 決 するため 共 同 の 努 力 を 行 った この 過 程 で 朝 鮮 通 信 使 が 誕 生 した 東 京 大 学 に 所 蔵 されている 倭 寇 図 巻 には 倭 寇 による 略 奪 の 様 子 が 詳 し く 描 かれている 倭 寇 が 朝 鮮 半 島 に 出 没 し 何 をどのように 略 奪 したのか 高 麗 史 には 倭 寇 による 被 害 がひどかった 1382 年 の 記 録 に 3 4 歳 の 女 の 子 の 腹 を 裂 いて 内 臓 を 取 り 出 し 米 を 詰 め 込 んで 告 祀 ( 祭 祀 を 行 った 後 その 米 で ご 飯 を 炊 いて 食 べた とある 2 共 存 の 時 代 : 朝 鮮 通 信 使 の 始 まり 1392 年 朝 鮮 が 建 国 された 後 も 倭 寇 による 略 奪 は 続 いた 日 本 も 同 時 期 に 室 町 幕 府 が 成 立 し 同 じ 悩 みを 抱 えることになる そこで 朝 鮮 と 日 本 は 倭 寇 問 題 を 東 アジアにおける 国 際 秩 序 の 枠 内 で 解 決 しようと 努 力 し 両 国 はほぼ 同 じ 時 期 に 中 国 の 冊 封 体 制 に 編 入 される その 後 1428 年 から 朝 鮮 通 信 使 が 往 来 し て 倭 寇 問 題 を 解 決 交 隣 関 係 が 成 立 し 共 存 の 時 代 を 開 いていった この 過 程 で 朝 鮮 通 信 使 は 信 (よしみを 通 じる 通 信 の 意 味 を 持 つようにな り 交 隣 関 係 のベースには 信 が 前 提 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朝 鮮 王 朝 実 録 で 交 隣 の 用 例 を 見 ると 信 道 義 礼 という 儒 教 的 実 践 規 範 を 前 提 としていたことが 分 かり これをもとに 交 隣 之 信 交 隣 之 道 交 隣 之 義 交 隣 之 礼 の 概 念 を 体 系 化 した すなわち 交 隣 とは 信 義 道 理 義 12
理 礼 義 という 儒 教 的 価 値 基 準 を 前 提 とする 外 交 であり 通 信 使 はこのような 理 念 を 実 践 するため 信 義 を 行 う 使 節 であった 3 慶 尚 道 のジャパンタウン 三 浦 (サムポ 1426 年 三 浦 制 度 が 整 備 されたことで 朝 鮮 に 来 るすべての 倭 人 は 朝 鮮 半 島 の 東 南 海 岸 にある 三 つの 浦 ( 塩 浦 (ヨムポ 富 山 浦 (プサンポ 薺 浦 (チェポに 入 港 した 様 々な 目 的 で 朝 鮮 に 来 た 日 本 人 は 三 浦 で 貿 易 をし その 頭 はソウルに 上 京 して 朝 鮮 国 王 を 謁 見 した 部 は 日 本 に 帰 らず 三 浦 で 暮 らした 1471 年 申 叔 舟 (シンスクチュが 編 纂 した 海 東 諸 国 記 には 三 浦 の 様 子 が 詳 しく 描 かれ ており 朝 鮮 王 朝 実 録 には 三 浦 倭 人 の 暮 らしぶりが 記 録 されている まさに 朝 鮮 時 代 の ジャパンタウン と 呼 ぶに 値 する 1419 年 対 征 伐 によって 時 閉 鎖 したが 彼 らの 懇 請 により 1423 年 に 再 び 2 ヵ 所 を 許 可 続 いて 塩 浦 を 追 加 し 三 浦 制 度 が 確 立 した 浦 所 には 倭 館 を 設 け 薺 浦 ( 鎮 海 に 30 戸 富 山 浦 ( 釜 山 に 20 戸 塩 浦 ( 蔚 山 に 10 戸 それぞれ 恒 居 倭 人 を 住 まわせ 渡 航 倭 人 の 接 待 と 交 易 を 許 可 することで 通 交 秩 序 を 立 てた 朝 鮮 後 期 には 三 浦 のうち 富 山 浦 だけが 残 り のちの 草 梁 倭 館 となった 当 時 三 浦 を 通 じてどのような 物 資 の 交 流 があったのだろうか 朝 鮮 から 日 本 へ 輸 出 された 品 は 米 や 豆 などの 穀 物 や 繊 維 品 であった 繊 維 品 は 最 初 は 苧 麻 布 絹 織 物 だったが 15 世 紀 後 半 からは 綿 布 に 変 わる 日 本 で 綿 布 が 人 気 だ ったのは 当 時 日 本 では 綿 の 栽 培 が 行 われておらず 朝 鮮 の 綿 布 が 手 触 りの 良 い 高 級 衣 類 として 人 気 だったからである 方 日 本 から 朝 鮮 への 主 な 輸 出 品 は 銅 であった 1428 年 には 2 万 8 千 斤 1489 年 には 2 万 斤 が 朝 鮮 に 輸 出 され 代 わりに 10 万 反 の 綿 布 を 輸 入 した そ の 頃 朝 鮮 では 真 鍮 の 食 器 が 使 われ コインや 金 属 活 字 など 銅 の 需 要 が 多 かっ た その 他 にも 南 方 の 蘇 木 や 犀 角 胡 椒 などが 朝 鮮 に 輸 出 された しかし 朝 鮮 前 期 の 友 好 交 隣 関 係 も 1592 年 豊 臣 秀 吉 による 朝 鮮 侵 略 で 断 絶 その 後 7 年 間 にわたり 戦 争 が 続 いた 3. 戦 争 の 時 代 から 平 和 の 時 代 へ 1 壬 辰 倭 乱 朝 鮮 通 信 使 と 三 浦 を 通 じた 200 年 に 及 ぶ 友 好 交 隣 関 係 が 1592 年 の 壬 辰 倭 乱 ( 文 禄 の 役 によって 崩 壊 する 壬 辰 倭 乱 の 原 因 を 豊 臣 秀 吉 個 人 に 向 けてしまい がちだが 実 は 東 アジアにおける 国 際 秩 序 である 冊 封 体 制 が 崩 壊 してしまった 13
からだと 言 える それは 日 本 が 室 町 幕 府 の 外 交 路 線 を 継 承 せず 裏 切 ったこと にある 秀 吉 は 朝 鮮 通 信 使 を 朝 貢 使 扱 いした 1592 年 4 月 13 日 釜 山 東 莱 城 (トンネソンを 攻 め 落 とした 日 本 軍 は 過 去 の 上 京 ルートを 通 じて 20 日 後 の 5 月 2 日 漢 陽 (ハニャン 入 りし 6 月 16 日 には 平 壌 (ピョンヤンを 占 領 した 当 時 の 状 況 を 記 録 した フロイスの 日 記 には 秀 吉 の 侵 略 の 意 図 が 詳 しく 記 さ れている しかし 日 本 軍 の 勝 利 も 開 戦 当 初 の 2 ヵ 月 間 だけで その 後 7 年 間 苦 戦 を 強 いられた 義 兵 と 民 衆 の 抵 抗 李 舜 臣 (イスンシン 将 軍 の 活 躍 があったからで ある 日 本 軍 は 朝 鮮 半 島 南 部 に 29 もの 倭 城 を 築 き 長 期 戦 態 勢 に 入 ったが 秀 吉 が 亡 くなり 朝 鮮 の 勝 利 で 終 わった 秀 吉 の 息 子 秀 頼 は 戦 争 後 秀 吉 が 築 いた 大 阪 城 の 庭 園 で 自 ら 命 を 絶 った しかし 7 年 に 及 ぶ 戦 争 は 朝 鮮 の 人 々に 忘 れられない 戦 争 の 傷 跡 を 残 した 戦 争 中 に 女 性 が 経 験 した 受 難 を 描 いた 三 綱 行 実 図 や 両 国 に 伝 わる 記 録 を 読 むと 今 でもその 残 虐 さに 憤 慨 せざるを 得 ない また 朝 鮮 人 の 鼻 が 埋 められ ている 鼻 塚 など 戦 争 以 降 朝 鮮 の 人 々は 日 本 人 を 不 倶 戴 天 の 敵 と 思 うよう になった 方 で 7 年 間 の 戦 争 は 朝 鮮 の 文 化 が 日 本 に 伝 わる 契 機 にもなった 朝 鮮 の 陶 工 が 作 った 陶 磁 器 は 日 本 の 国 宝 となり 高 麗 仏 画 や 朝 鮮 の 鐘 数 多 く の 書 が 今 も 日 本 の 文 化 財 として 伝 わる 特 に 日 本 軍 は 朝 鮮 の 女 性 やこどもを 拉 致 して 屈 辱 的 な 生 き 方 を 強 要 し 奴 隷 として 売 り 払 った そのため 壬 辰 倭 乱 を 奴 隷 戦 争 と 呼 ぶ 学 者 もいる 7 年 間 の 戦 争 でどれだけ 多 くの 朝 鮮 人 が 拉 致 されたか 正 確 な 数 字 は 分 からない 学 者 によって 異 なるが その 数 を 少 ない 人 で 5 万 人 多 い 人 は 20 万 人 まで 算 出 し ている 拉 致 された 朝 鮮 人 が 奴 隷 として 売 られる 状 況 を 当 時 日 本 にいた 司 教 のルイスセルケイラ(Luis Cerqueiraは 次 のように 記 録 している 長 崎 帯 の 多 くの 日 本 人 はポルトガル 人 が 奴 隷 を 買 いたがっていることを 知 っていた そのため 彼 らに 転 売 し 巨 利 をあげるために 日 本 各 地 を 廻 って 朝 鮮 人 を 買 い 集 め また 朝 鮮 の 戦 場 にも 渡 って 自 ら 朝 鮮 人 を 略 奪 した 日 本 人 は 朝 鮮 人 を 捕 らえる 際 に 多 くの 人 を 残 酷 に 殺 し 中 国 船 にて 彼 らをポルトガル 商 人 に 売 り 払 った (1598 年 9 月 4 日 付 記 録 また 従 軍 僧 として 壬 辰 倭 乱 に 従 軍 した 慶 念 は 日 本 よりもよろつ( 万 のあ き 人 ( 商 人 もきたりしなかに 人 あきなひせる 物 ( 者 来 り 奥 陣 よりあとにつき あるき 男 女 老 若 かい 取 て なわにてくひ( 首 をくゝりあつめ さきへおひたて ( 追 立 あゆひ 候 ハねハ あとよりつへ( 杖 にておつたて うちはし( 打 走 らか す ( 朝 鮮 日 々 記 と 記 した まるでローマ 時 代 の 映 画 に 登 場 する 奴 隷 と 違 わ ない このようにして 連 行 された 人 の 中 には 体 の 丈 夫 な 男 性 や 体 の 弱 い 老 人 より 14
若 い 女 性 が 多 かった 日 本 カトリックで 朝 鮮 の 聖 女 として 称 えられる おたあ ジュリア も 朝 鮮 出 身 の 少 女 であった また 幼 いこどもも 多 く ベストセラ ーになった ヴェニスの 開 城 (ケソン 商 人 も 7 歳 の 頃 日 本 軍 に 連 行 された 朝 鮮 の 少 年 が 奴 隷 として 売 られ イタリアへ 渡 り 商 人 として 大 きな 成 功 を 収 め るという 話 である 以 上 のような 壬 辰 倭 乱 丁 酉 再 乱 ( 慶 長 の 役 の 7 年 間 にわたる 残 虐 行 為 は 朝 鮮 人 に 忘 れられない 日 本 人 像 を 残 した 言 葉 の 通 り ともに 天 をいただくこと はできない 不 俱 戴 天 の 敵 として 刻 まれた 2 通 信 使 の 復 活 平 和 の 時 代 へ 壬 辰 倭 乱 が 終 結 してから 1604 年 朝 鮮 は 徳 川 幕 府 の 講 和 に 対 する 真 意 を 探 る ため 僧 の 惟 政 ( 溟 大 師 を 探 賊 使 という 名 で 日 本 に 派 遣 した 溟 大 師 行 は 京 都 に 行 き 徳 川 将 軍 の 講 和 に 対 する 意 思 を 確 認 し 被 虜 人 ( 捕 虜 約 3 千 人 を 連 れて 帰 国 した 溟 大 師 行 の 帰 国 後 朝 鮮 は 講 和 に 向 けて 3 つの 条 件 を 提 示 した すなわち 日 本 国 王 名 義 の 講 和 を 願 う 国 書 壬 辰 倭 乱 において 朝 鮮 王 族 の 陵 墓 を 荒 らした 賊 徒 の 差 し 出 し そして 朝 鮮 被 虜 人 の 送 還 であった これに 対 して 日 本 は 国 王 名 義 の 国 書 を 偽 造 し 陵 墓 を 荒 らした 犯 人 は 対 の 罪 人 を 送 り 刷 還 使 のもとに 被 虜 人 を 返 還 した もちろん 朝 鮮 は 国 書 が 偽 造 された もので 盗 掘 犯 も 真 犯 人 ではないことを 知 っていた しかし 朝 鮮 の 要 求 が 形 式 的 には 受 け 入 れられたため 1607 年 講 和 使 を 派 遣 して 国 交 を 再 開 した しか し 使 節 団 の 名 称 は 回 答 兼 刷 還 使 が 使 われた この 時 から 朝 鮮 後 期 まで 計 12 回 の 朝 鮮 使 節 が 派 遣 されたが 通 信 使 の 名 称 が 再 び 使 われたのは 3 回 目 の 1636 年 以 降 である 通 信 使 派 遣 の 目 的 は 幕 府 将 軍 の 襲 職 であったが 両 国 における 喫 緊 の 外 交 問 題 を 解 決 するためでもあった 通 信 使 の 編 成 と 人 数 は 各 回 ごとに 少 しずつ 違 っ たが およそ 300 人 から 500 人 を 超 える 大 規 模 な 使 節 団 が 1 年 から 1 年 半 も かけて 行 き 来 した 長 い 道 のりであった 彼 らはソウルから 釜 山 までは 陸 路 で 釜 山 から 対 を 経 て 大 阪 までは 海 路 で そして 大 阪 から 江 戸 ( 東 京 までは 再 び 陸 路 で 行 き 来 した 通 信 使 行 列 の 壮 麗 さは 1636 年 実 際 にこれを 見 たオランダ 商 館 長 ニコラスの 記 録 に 詳 しく 描 かれている まず 舞 踏 笛 太 鼓 の 演 奏 があり その 後 脱 穀 するときに 使 うような 大 きな 棒 を 手 にした 人 が 2 人 ずつ 通 り 過 ぎた その 両 側 で 金 と 生 糸 で 作 った 網 袋 を 持 った 3 人 が 警 護 に 当 たっている その 後 約 30 人 の 若 者 が に 乗 って 続 い た その 後 を 5 60 人 に 担 がれ 内 側 に 赤 いビロードを 張 った 駕 籠 が 続 いた こ 15
の 中 の 卓 子 の 上 には 漆 塗 の 箱 があり ここに 朝 鮮 文 字 で 書 かれた 日 本 将 軍 への 書 簡 が 入 っていた 再 びあらゆる 種 類 の 楽 器 の 奏 楽 が 来 た 駕 籠 が 数 台 通 り 過 ぎ 黒 の 絹 衣 を 身 にまとった 副 使 が 駕 籠 に 乗 って 通 り 過 ぎた しばら くして 400 人 の 騎 士 約 15 分 後 200 人 の 護 衛 武 士 が 付 き 従 い 日 本 の 貴 族 行 が 通 り 過 ぎ 最 後 に 朝 鮮 人 の 荷 物 と 贈 り 物 を 運 ぶ 駄 が 約 千 頭 続 いた これらの 行 列 が 通 り 過 ぎるのに 約 5 時 間 かかった ( 平 戸 オランダ 商 館 日 記 当 時 九 州 の 平 戸 にはオランダ 商 館 が 設 けられており 商 館 長 のニコラスが 江 戸 に 向 かう 道 中 で 遭 遇 した 朝 鮮 通 信 使 の 行 列 を 描 写 したものである 朝 鮮 通 信 使 の 案 内 役 護 衛 荷 物 持 ちに 平 均 約 3,000 人 が 動 員 されたとされ 彼 らを 合 わせると 通 信 使 の 行 列 は 3 4 千 人 にのぼった 人 の 距 離 を 1m としても 4km はあったはずで その 行 列 が 通 り 過 ぎるのに 5 時 間 かかるのも 無 理 はない 通 信 使 が 朝 鮮 後 期 の 韓 日 関 係 において 持 つ 意 味 は 大 変 大 きい 政 治 外 交 的 な 意 味 だけでなく 通 信 使 が 通 り 過 ぎる 宿 舎 で 披 露 された 漢 詩 文 や 学 術 交 流 は 韓 日 の 文 化 交 流 を 盛 んにさせた 1719 年 通 信 使 に 随 行 した 申 維 翰 (シンユハン は 初 三 口 壬 寅 食 後 儒 官 十 余 人 が 大 庁 に 来 会 した 余 は 三 書 記 とともに 出 て 接 し 相 揖 して 坐 した 坐 中 の 人 は それぞれ 長 短 律 および 絶 句 を 写 して 余 に 贈 り 唱 和 を 求 めた ただちにそのすべてに 和 した 彼 が 更 めて 唱 すればす ぐに 和 し あるいは 変 じて 長 篇 各 体 となり すすむほどにいよいよ 多 く 簿 牒 の 如 くに 堆 積 した 金 世 万 を 側 に 坐 らせて 墨 を 磨 らせたが しかもなお 墨 を 補 給 するのに 遑 がない それ 日 のうちに 会 する 人 々はそれぞれ 三 篇 を 得 たが 独 挙 をもってこ れを 支 え 左 に じ 右 に 答 え もって 諸 人 の 望 みを 満 たすために 独 創 のわ くのを 待 ったり 潤 色 したりすることのできなかったのはいうまでもない 翌 日 もまた 数 十 人 が 来 会 し 唱 酬 することまたかくの 如 く すなわち 夜 にいたっ て 罷 めた ( 申 維 翰 海 游 録 と 記 している ならば 般 の 民 衆 はどうだっただろうか 通 信 使 の 紀 行 文 と 同 様 に 現 在 日 本 には 通 信 使 に 関 する 多 くの 絵 画 資 料 が 残 っている たとえば 浮 世 絵 師 とし て 有 名 な 羽 川 藤 永 の 朝 鮮 通 信 使 来 朝 図 が 神 戸 市 立 博 物 館 にある この 絵 は 江 戸 ( 東 京 の 日 本 橋 を 渡 る 通 信 使 行 を 描 いている 画 面 中 央 から 左 後 ろに 富 士 山 と 江 戸 城 の 城 郭 が 見 え まるで 綺 麗 に 切 りそろえられた 豆 腐 の ように 階 建 て 家 屋 の 屋 根 が 並 んでおり その 間 を 通 信 使 行 が 通 り 過 ぎる 2 16
階 は 締 め 切 られ 格 子 しか 目 に 入 らないが 1 階 は 幕 の 下 に 江 戸 の 人 々が 整 然 と 座 っている 両 手 を 挙 げて 万 歳 する 人 お 酒 やお 茶 を 飲 む 人 赤 ちゃんに 乳 を 飲 ませる 女 性 もいるが 大 半 の 人 は 通 信 使 の 行 列 に 見 入 っている しかし 道 の 真 ん 中 にいる 武 士 と 犬 は 見 物 人 を 見 ている 警 備 に 当 たっているのか 棒 を 持 って 立 っており そばに 犬 放 水 用 水 槽 がある 通 信 使 を 迎 える 江 戸 の 人 々の じっとしている 様 子 が 見 事 に 表 現 されている 2 30 年 に 度 訪 れる 通 信 使 の 行 列 を 見 逃 すまいとする 人 々の 姿 である まるで 1988 年 のソウル 輪 やW 杯 の 際 にソウル 市 民 が 熱 狂 する 様 子 と 少 しも 変 わらない そして このような 様 子 はドラマ 冬 のソナタ に 対 する 今 の 日 本 人 の 姿 と 大 差 ないと 言 えるだろう こうした 意 味 から 通 信 使 はもう つの 韓 流 すなわち 朝 鮮 時 代 の 韓 流 と 言 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もちろん 通 信 使 が 韓 日 関 係 のすべてではなかった 朝 鮮 では 釜 山 に 倭 館 を 設 置 して 韓 日 間 の 貿 易 を 通 じて 必 要 な 物 資 の 交 流 を 行 い また 対 藩 主 には 別 途 100 人 から 150 人 ほどの 訳 官 使 を 51 回 も 派 遣 韓 日 関 係 において 対 の 立 場 を 強 化 し 韓 日 間 の 懸 案 を 解 決 していった こうした 観 点 から 朝 鮮 は 大 変 積 極 的 かつ 主 体 的 に 韓 日 関 係 を 展 開 していたと 言 える 或 る 人 は 朝 鮮 前 期 とは 違 い 朝 鮮 後 期 には 日 本 からは 将 軍 の 使 臣 が 来 ず 朝 鮮 からしか 使 臣 が 派 遣 されていないとして 朝 鮮 外 交 の 劣 勢 を 主 張 するこ ともあるが それは 違 う なぜかというと 壬 辰 倭 乱 の 際 日 本 国 王 使 の 上 京 ルートが 日 本 軍 の 進 撃 ルートとして 使 われたため 朝 鮮 は 日 本 人 の 上 京 を 禁 じ 釜 山 の 倭 館 を 使 わせたからである さらに 通 信 使 派 遣 の 費 用 は 釜 山 からは 往 復 費 用 をすべて 日 本 側 が 負 担 したが それは 幕 府 の 1 年 間 の 予 算 に 匹 敵 した という 3 通 信 から 裏 切 りへ 侵 略 の 前 奏 曲 このような 通 信 使 も 1811 年 に 終 焉 した しかも 対 において 略 式 で 国 書 を 交 換 する 易 地 通 信 であった もちろん その 後 数 回 にわたり 将 軍 襲 職 があり そのたびに 通 信 使 派 遣 の 要 請 があったが 日 本 国 内 の 事 情 により 4 回 も 延 期 さ れるうちに 1868 年 明 治 維 新 が 起 こり 韓 日 関 係 は 新 たな 局 面 に 入 ることにな った これをもって 通 信 使 に 象 徴 される 朝 鮮 時 代 の 友 好 交 隣 関 係 も 幕 を 閉 じ た 通 信 使 に 象 徴 される 朝 日 交 隣 関 係 の 終 焉 は 明 治 維 新 を 知 らせる 日 本 からの 書 契 に 始 まった 明 治 維 新 の 直 後 日 本 から 天 皇 の 執 権 と 明 治 の 外 務 省 が 韓 日 関 係 を 担 うという 内 容 の 書 契 が 送 られた ところが 書 契 の 様 式 がそれまでと は 違 い 日 本 の 天 皇 を 1 つ 上 に 置 いて 天 皇 対 朝 鮮 国 王 で 外 交 を 執 り 行 うことを 求 めた 外 交 慣 例 上 朝 鮮 がこれを 拒 否 するのは 当 然 のことであった 将 軍 が 17
執 権 しようが 天 皇 が 執 権 しようが それは 日 本 国 内 の 事 情 であり 朝 鮮 として はただ 日 本 の 最 高 執 権 者 と 対 等 な 関 係 を 持 てば 良 いと 主 張 した これに 対 して 結 局 日 本 は 武 力 を 行 使 して 1872 年 釜 山 倭 館 を 占 領 し その 後 方 的 に 押 し 付 け る 侵 略 外 交 により 交 隣 関 係 は 崩 壊 してしまった 朝 鮮 前 期 の 通 信 使 による 200 年 間 の 交 隣 関 係 が 壬 辰 倭 乱 によって 崩 れたよう に 朝 鮮 後 期 の 約 260 年 に 及 ぶ 交 隣 関 係 も 日 本 の 方 的 な 倭 館 占 領 によって 終 焉 した 交 隣 関 係 の 崩 壊 過 程 は 異 なるものの 日 本 による 方 的 な 武 力 侵 攻 と いう 同 じやり 方 が 繰 り 返 されたのである 4. 朝 鮮 通 信 使 の 歴 史 的 意 味 韓 日 両 国 は 20 世 紀 の 不 幸 な 歴 史 を 乗 り 越 え 21 世 紀 を 新 たにスタートさせ ようという 意 味 から 2005 年 を 韓 日 友 情 年 と 定 めた しかし 歴 史 教 科 書 歪 曲 問 題 や 独 島 関 連 の 妄 言 により 水 の 泡 と 化 した そして 現 政 権 になって からは 3 年 も 首 脳 会 談 が 行 われなかった こうした 外 交 的 な 葛 藤 にもかかわらず 両 国 は 1 日 1 万 人 が 往 来 する 時 代 を 迎 えている 金 浦 (キムポ- 羽 田 間 では 朝 8 時 から 夜 10 時 まで 直 行 便 がソウル - 東 京 間 をひっきりなしに 飛 んでいる 昨 年 末 3 年 もの 間 両 国 の 首 脳 会 談 を 開 催 できない 理 由 であった 慰 安 婦 問 題 が 外 交 レベルで 原 論 的 な 合 意 がなされ 関 係 改 善 に 向 けて 歩 み 始 めた しかし 両 国 の 部 の 政 治 家 は 合 意 の 無 効 を 主 張 破 棄 することを 訴 えている こうし た 行 為 は 韓 日 関 係 を 再 び 不 幸 にさせるかもしれない これらはすべて 韓 日 関 係 の 過 去 の 歴 史 的 経 験 を 無 意 味 にしてしまう 愚 かな 行 為 である 倭 寇 の 略 奪 を 三 浦 の 共 存 に 変 え 戦 争 の 時 代 を 再 び 平 和 の 時 代 に 変 えた 通 信 使 に 改 めて 注 目 する 理 由 がここにある 現 時 点 で 韓 日 間 における 真 の 意 味 で の 友 好 交 隣 とは 何 か 今 度 朝 鮮 通 信 使 が 日 本 に 行 った 理 由 を 顧 みて そ の 歴 史 的 メッセージに 耳 を 傾 けてみてはどうだろうか 18
일본에서의 조선통신사의 족적 나카오 히로시 들어가기 조선통신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회답겸쇄환사( 回 答 兼 刷 還 使 에서 통신사( 通 信 使 로(1636 년 2 통신 의 의의 의를 통하다( 誼 を 通 じる, 신뢰관계를 유지하다 1.국교회복기(제 1 회~제 3 회 1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가 일으킨 침략전쟁의 종전처리 와 도쿠가와 정권 도쿠가와 이에야스( 徳 川 家 康 는 국교회복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통상관계의 안정과 확대를 추구하였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주인선무역의 확대, 중국과 감합 무역의 재개, 그리고 그 안정화를 위한 대조선 국교회복. 조선왕조의 대일정책 국교회복에는 사죄의 의사표명을. 포로 송환(귀국 실현에 성의를. 2송운대사( 松 雲 大 師 (사명당( 溟 堂 - 탐적사( 探 賊 使 파견과 이에야스와의 직접 회담(1605 년, 후시미성( 伏 見 城 을 통하여 도쿠가와 정권의 국교회복 의사를 확인하였다. 대마도( 対 도주( 島 主 가 이에야스의 국서를 개찬하여 한성에 보내진다. 조선측의 두 가지 조건 중 하나. 3제 1 회 회답겸쇄환사 파견(1607 년 에도. 이에야스와는 슨부( 駿 府 에서 회견. 4제 2 회 회답겸쇄환사 파견(1617 년 후시미성에서 국서교환 빙례를 실시. 5제 3 회 회답겸쇄환사 파견(1624 년 3 대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장군 습직( 襲 職 을 축하.에도에서. 2.국교쇄신의 전기와 통신사 명의사용(1636 년 제 4 회(이후 11 회차까지 에도 1야나가와사건( 柳 川 事 件 - 개찬국서 폭로에 의한 재판 후 새로운 체제로- 조선측에서는 북방위기가 격화됨. 2대마도의 소씨는 무죄 -이후, 조일외교의 사무담당의 위치가 됨. 3대마도에 막부가 임명한 윤번승( 輪 番 僧 (대주 수문직( 対 州 修 文 職 을 파견(교토 오산승 ( 京 都 山 僧 2 명-외교서류 검열기안전달역. 4도쿠가와장군의 타칭은 국왕 에서 대군( 大 君 으로 고정. 5부산의 왜관무역의 안정화(기유약조( 己 酉 約 条 -1609 년부터 6사절단의 명칭변경 배경에는 포로 중 귀국희망자 감소 재일화 21
3.도쿠가와정권 안정기의 통신사 초빙(내빙사(제 5 회~제 7 회 1제 5 회(1624 년 4 대 이에쓰나( 家 綱 출생 축하 2제 6 회(1655 년 4 대 이에쓰나 습직 축하 3제 7 회(1682 년 5 대 쓰나요시( 綱 吉 습직 축하 4제 4 회~제 6 회는 닛코( 日 光 유람 또는 신사 부근에서 이에미쓰의 유교식 장례의식에 참가 4.빙례대개혁의 제 8 회 사절의 초빙(1711 년 6 대 이에노부( 家 宣 습직시의 아라이 하쿠세키( 新 井 白 石 의 개혁 1철저한 대등 - 서로 국왕 이라 칭할 것. 외에 의식 개혁도 포함. 2간소화 5.구관묵수( 旧 慣 墨 守 로 일관하였던 에도중기(제 9 회~제 11 회 1제 9 회(1719 년 기슈( 紀 州 의 도쿠가와가 요시무네( 吉 宗 습직과 아라이 하쿠세키 등의 실각. 대군 칭호로 복귀 2제 10 회(1748 년 9 대 이에시게( 家 重 의 습직 축하 3제 11 회(1764 년 10 대 이에하루( 家 治 의 습직 축하 6.전환기의 시작과 마지막 통신사 1811 년(제 12 회 11 대 이에나리( 家 斉 습직 축하 1대마도에서 빙례(국서교환의식- 통신사의 규모축소로 인한 경비절감. 2기근,농민봉기, 도시소요, 조세미수금 등 국내 위기가 배경이 되었음. 3이후 장군 습직시에 초빙이 계획되어 조선측에서도 동의하였으나 실시되지는 못함. 4구미 제국의 개국요구 가 빈번해짐. 통신은 조선류큐( 琉 球, 통상은 중국네덜란드 원칙의 붕괴가 목전으로. 7.일본내 조선통신사 연구의 족적 1전전( 戦 前 의 연구 다보하시 기요시( 田 保 橋 潔 근대 조일관계의 연구 (1940 년, 나카무라 히데타카( 中 村 栄 孝 조일관계사의 연구 (간행은 1969 년, 마쓰다 고( 松 田 甲 시데하라 다이라( 幣 原 坦 등. 모두 총독부 관계자 등. 2전후( 戦 後 의 연구 미야케 히데토시( 三 宅 英 利 조일관계사의 연구 (1986 년, 이원식 조선통신사의 연구 (1997 년등 이진희, 신기수, 강재언 등 재일연구자의 계몽적 저작 신기수가 연출한 영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 상영운동 우에다 마사아키( 上 田 正 昭 의 아메노모리 호슈( 雨 森 芳 洲 교린제성( 交 隣 提 醒 자료소개 신기수나카오 히로시( 仲 尾 宏 선린우호의 사절대계 조선통신사 전 8 권 3조선통신사 연지련 연구부회의 활동으로 각 지역의 자료 발굴 22
8.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의 행동과 사상 1쓰시마번의 조선관련 실무의 고문으로 활동(좌역( 佐 役 통신사 내빙시의 진문역( 真 文 役 2조선측의 실무담당자로서 성실한 협상과 타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설을 굽히지 않은 협상태도 3 교린제성( 交 隣 提 醒 에서 보이는 그 사상 1. 다문화 공생론, 2. 역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 3. 외교는 성신 의 교환 23
어휘설명 1 의를 통하다 誼 を 通 じる 일본과 조선이 친밀한 관계를 위해 일을 함께 도모하는 것. 2 피로인 被 虜 人 민간인으로서 포로로 연행된 사람. 3 탐적사 探 賊 使 일본의 정세 및 군사준비 등을 탐지하는 사신. 참고:대마도로부터 여러 번의 사신파견 요청에 대하여, 도쿠가와 정권의 국교회복에 대한 진의를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민간인인 송운(사명당 대사를 파견. 4 빙례 聘 礼 교린관계의 기록으로서 양국의 국서를 교환하는 의식. 5 습직 襲 職 여기서는 일본의 도쿠가와 정권이 차기 장군에게 그 직무를 양도한 것을 말함. 6 야나가와사건 柳 川 事 件 에도시대 초기에 쓰시마번주 소 요시나리( 宗 義 成 와 중신 야나가와 시게오키( 柳 川 調 興 가 일본과 이씨 조선사이에서 교환한 국서 위조를 둘러싸고 대립한 사건. 7 대주 対 州 대마도에 있던 구국( 旧 国 의 별칭. 8 윤번승(대주 수문직 輪 番 僧 ( 対 州 修 文 職 에도막부의 명령으로 쓰시마번의 이정암( 以 酊 庵 으로 파견된 선승. 이씨조선과의 외교문서 해독 및 작성과 사절에 대한 응대, 무역 감시 등을 행하였다. 직무는 수문직이라 하며, 교토 오산(선종인 임제종의 4 대 절에서 막부의 명령에 따라 윤번제로 승려를 파견하였다. 9 기유조약 己 酉 約 条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사신의 자격 등에 대하여 정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래 단절되었던 대마도와 조선과의 무역이 재개되었다. 10 사토 社 頭 신전(신사의 신체를 모신 건물의 앞. 11 구관묵수 旧 慣 墨 守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여 해오던 대로 해 가는 것. 12 도시소요 都 市 騒 擾 도시에 사는 민중이 일으킨 소란, 투쟁. 13 교린제성 交 隣 提 醒 1728 년, 아메노모리 호슈가 61 세 때 집필한 외교지남서. 쓰시마번주에게 조선외교에 대한 마음가짐을 52 항목에 걸쳐 서술하였다. 국제관계에서는 호혜평등을 취지로 하고, 외교의 기본은 성심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14 좌역 佐 役 조선관계실무의 고문 및 보좌역의 직명. 15 진문역 真 文 役 외교문서 해독 및 기안, 초빙시의 수행 등을 담당하던 직무의 직함. 한자를 진명(마나 真 名, 히라가나를 가명(가나 仮 名 로 표현하였던 시대에 한문 을 진문( 真 文 으로 불렀다. 24
江 戸 時 代 朝 鮮 通 信 使 聘 礼 年 表 1607~1624 年 の 訪 日 名 目 は 回 答 兼 刷 還 使 1636 年 以 降 は 通 信 使 という 名 目 で 派 遣 されてきた また1636 年 以 降 朝 鮮 国 王 日 本 国 大 君 称 号 による 国 書 交 換 が 恒 例 となった 九 三 三 西 暦 年 代 純 祖 文 化 英 祖 宝 暦 英 祖 延 享 粛 宗 享 保 粛 宗 三 正 徳 元 粛 宗 天 和 孝 宗 明 暦 元 仁 祖 寛 永 仁 祖 寛 永 三 仁 祖 寛 永 元 光 海 君 九 元 和 三 宣 祖 慶 長 朝 鮮 日 本 辛 未 甲 申 戊 辰 巳 亥 辛 卯 壬 戌 乙 未 癸 未 丙 子 甲 子 丁 巳 丁 未 干 支 金 履 喬 ( 竹 里 趙 曮 ( 済 谷 洪 啓 禧 ( 澹 窩 洪 致 中 ( 北 谷 趙 泰 億 ( 平 泉 尹 趾 完 ( 東 山 趙 珩 ( 翠 屏 尹 順 之 ( 涬 溟 任 絖 ( 白 麓 鄭 岦 呉 允 謙 ( 楸 灘 呂 裕 吉 ( 擬 湲 正 使 李 勉 求 ( 南 霞 李 仁 培 ( 吉 菴 南 泰 耆 ( 竹 裏 黄 璿 ( 鷺 汀 任 守 幹 ( 靖 菴 李 彦 綱 ( 鷺 湖 愈 瑒 ( 秋 潭 趙 絧 ( 龍 洲 金 世 濂 ( 東 溟 姜 弘 重 ( 道 村 朴 梓 ( 雲 渓 慶 暹 ( 松 副 使 廃 止 金 相 翊 ( 弦 庵 曹 命 采 ( 蘭 谷 李 明 彦 ( 雲 山 李 邦 彦 ( 南 岡 朴 慶 後 ( 竹 菴 南 龍 翼 ( 壷 谷 申 濡 ( 竹 堂 黄 ( 漫 浪 辛 啓 栄 ( 仙 石 李 景 稷 ( 石 門 丁 好 寛 ( 翠 従 事 官 家 斉 襲 職 ( 上 使 小 笠 原 忠 臣 副 使 脇 坂 安 菫 家 治 襲 職 家 重 襲 職 吉 宗 襲 職 家 宣 襲 職 綱 吉 襲 職 家 綱 襲 職 日 光 山 致 祭 世 子 家 綱 誕 生 ( 倭 情 探 索 泰 平 ( 倭 情 探 索 新 通 交 体 制 確 認 家 光 襲 職 ( 同 右 大 坂 平 定 ( 同 右 国 交 回 復 ( 倭 情 探 索 被 虜 人 刷 還 聘 礼 名 目 ( 朝 鮮 側 意 図 大 御 所 吉 宗 聘 礼 ( 不 予 中 止 世 子 家 治 聘 礼 世 子 別 幅 進 呈 日 光 東 照 宮 お よ び 大 猷 院 廟 到 祭 献 物 日 光 東 照 宮 致 祭 献 物 世 子 別 幅 進 呈 日 光 新 造 替 東 照 宮 遊 覧 大 御 所 秀 忠 聘 礼 帰 途 駿 府 大 御 所 家 康 表 敬 付 属 聘 礼 他 両 使 紀 水 世 子 相 伴 ( 田 安 橋 両 は 不 参 紀 尾 両 卿 相 伴 紀 水 卿 相 伴 高 家 両 長 老 宗 対 守 接 待 ( 別 日 [ 十 種 舞 楽 ] 紀 水 卿 甲 府 綱 豊 相 伴 紀 尾 水 卿 相 伴 [ 演 能 ( 式 三 番 ] 尾 紀 水 卿 相 伴 [ 演 能 ( 式 三 番 ] 尾 水 卿 相 伴 駿 水 卿 相 伴 尾 駿 卿 相 伴 本 多 正 信 大 久 保 忠 隣 酒 井 忠 世 膳 奉 行 [ 祝 奏 演 ] 対 府 中 聘 礼 国 役 金 カ 年 賦 上 才 は な し 上 才 ( 田 安 門 内 弓 射 芸 ( 上 野 下 寺 町 崔 天 宗 刺 殺 事 件 朝 鮮 人 国 役 金 御 免 越 訴 所 司 代 問 慰 才 上 ( 田 安 門 内 弓 射 芸 ( 上 野 下 寺 町 所 司 代 問 慰 才 上 ( 田 安 門 内 弓 射 芸 ( 上 野 車 坂 下 所 司 代 問 慰 上 才 ( 田 安 門 内 路 中 カ 所 指 定 上 使 問 慰 時 儀 礼 変 更 所 司 代 問 慰 上 才 ( 代 洲 河 岸 上 才 は な し 上 才 ( 薬 畑 御 殿 朝 鮮 国 王 宛 将 軍 別 幅 の は じ め 上 才 ( 対 藩 邸 被 虜 人 説 諭 官 巡 回 鳥 銃 購 入 伏 見 城 聘 礼 被 虜 人 説 諭 官 巡 回 鎌 倉 遊 覧 駿 河 湾 遊 覧 洛 中 遊 覧 特 記 事 項 三 ( ( 九 ( 九 ( 九 三 ( 三 ( ( 不 明 ( 不 明 [ ] ( [ ] 総 人 員 ( 大 阪 留 [ 京 都 留 ] ( 仲 尾 宏 作 成
총인원 (오사카체류 됴토체류 504 100 428 78 478 (불명 477 (불명 485 (100 473 (113 사행록 비고 해사록 (경 섬 동사상일록 (오윤겸 동사일기 (박 재 부상록 (이경직 동사록 (강홍중 동사록 (조 형 해사록 (신 유 계미동사일기 (불상 부상일기 (조 행 부상록 (남용익 동사일기 (김지남 동사록 (홍우재 가마쿠라쓰루가만 교토 유람 교토 후시미 빙례 피로인 설유관( 説 諭 官 순회 피로인 설유관 순회 조총 구입 닛코산 도쇼구 다이유 인 영묘 치제 미상재 닛코산 도쇼구 다이유 인 영묘 치제 미상재 없음 미상재 [야요스( 代 洲 강기슭] 조선통신사 일람표 서력 1607 연대 조선 일본 선조 40 게이초 12 간지 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 서기 역관 사자관 화원 양의 의원 접반승 사명 정미 여우길 경 섬 정호관 학 관 양만세 김효무 박대근 한덕남 서사원 변주수 이홍규 박인기 신춘남 게이데쓰 겐소 수호 회답겸쇄환 1617 광해군 9 겐와 3 정사 오윤겸 박 재 이경직 박대근 최의길 강우성 정순방 한덕남 송효남 엄대인 유성업 정종례 문현남 오사카 평정 회답겸쇄 1624 인조 2 간에이 원년 갑자 정 림 강홍중 신계영 박대근 이언서 홍희남 강우성 이성국 김신남 이언홍 정 금 황덕업 기쿠하쿠 겐보 이에미쓰 습직 회답겸쇄 460 114 1636 인조 14 간에이 13 병자 임 통 김세렴 황 호 이문학관 권 식 문홍적 문 필 홍희남 강위빈 강우성 이장생 박지영 능서관 전 영 조정현 김명국 하 담 백토립 한언협 교쿠호고린 (도후쿠지 도인 겐소 (도후쿠지 태평축하 병자일본일기 (임 광 해사록 (김세렴 동사록 (황 형 일본국 대군호 제정 닛코산 유람 강우성 저 첩해신어 ( 捷 解 新 語 마상재(쓰시마 번저 1643 인조 21 간에이 20 계미 윤순지 조 경 신 유 독축관 박안기 홍희남 이장생 김의신 김명국 이기룡 釣 天 永 浩 (겐닌지 周 南 円 旦 (도후쿠지 이에쓰나 탄생 1655 효종 6 메이레이 원년 을미 조 형 유 창 남용익 경축관 이명빈 배 욱 김자휘 박문원 홍희남 김근행 홍여우 김의신 유응발 곽 심 윤덕용 한시각 한형국 최 곤 이계훈 모겐 쇼하쿠 (겐닌지 九 岩 中 達 (겐닌지 이에쓰나 습직 1682 숙종 8 덴와 2 임술 윤지완 이언강 박경후 성 완 임 재 이담령 박재흥 변승업 홍우재 이삼석 이화립 함제건 정두준 이수번 주 백 太 虚 顯 靈 (쇼호쿠지 南 宗 祖 辰 (도후쿠지 쓰나요시 습직
500 (129 475 (129 475 (109 477 (110 동사록 (조태억 동사록 (임수간이방언 동사록 (김현문 해사일록 (홍치중 해유록 (신유한 부상기행 (정후교 부상록 (김 흡 봉사일본시문견록 (조명채 수사일록 (홍경해 사상부 (남태기 해사일록(조 엄 계미사행일기 (오대령 계미수사록 (불상 일본록사상기 (성대중 선사만랑집 (성대중 승사록화국지 (원중거 일동장유가 (김인겸 산미통신일록 (김이교 동사록 (유상필 도유록 (김선신 아라이 하쿠세키의 개혁 마상재(다야스몬 내 소사대 위문 마상재(다야스몬 내 궁사예(우에노쿠루마 자카시타 소사대 위문 마상재(다야스몬 내 궁사예(우에노시타데 라정 소사대 위문 교토 대불전 연희 분쟁 마상재(다야스몬 내 궁사예(우에노시타데 라정 최천종 척살 사건 조선인 국역금 면재 소청 소사대 위문 쓰시마 부중 빙례 미상재 없음 1711 숙종 37 쇼토쿠 원년 신묘 조태억 임수간 이방언 이 현 홍무영 엄한중 남성중 최상집 이석린 이송년 김시남 이수장 이이방 박동보 기두문 현만규 이 위 벳슈 소엔 (쇼코쿠지 雲 壑 永 集 (겐닌지 이에노부 습직 1719 숙종 45 교호 4 기해 홍치중 황 선 이명언 신유한 장응두 성몽량 강 백 박재창 한후원 김경석 정세영 함세휘 권도 백흥전 김광사 月 心 性 湛 (덴류지 세키소 류쇼 (도후쿠지 요시무네 습직 1748 영조 24 엔쿄 5 (간엔 원년 술신 홍계희 남태기 조명채 박경행 이봉환 유 후 이명계 박상량 현덕연 홍성귀 김천수 현문귀 이성린 최 북 조숭수 조덕조 김덕륜 스이간 쇼켄 (덴류지 교쿠레이 슈에이 (도후쿠지 이에시게 습직 1764 영조 40 호레키 14 (메이와 원년 갑신 조 엄 이인배 김상익 남 옥 성대중 원중거 김인겸 최학령 이명윤 현태익 홍성원 이언우 김유성 이좌국 남두민 성 호 이소라 쇼탄 (쇼토쿠지 이에하루 습직 1811 순조 11 분카 8 신미 김이교 이면구 폐 지 이현상 김선신 이영오 현의순 현 식 최 석 피종정 이의양 박경욱 김진주 게이간 류호 (도후쿠지 이에나리 습직 328
日 本 での 朝 鮮 通 信 使 の 足 跡 仲 尾 宏 はじめに 朝 鮮 通 信 使 をどうみるか 1 回 答 兼 刷 還 使 から 通 信 使 へ(1636 年 2 通 信 の 意 義 誼 を 通 じる 信 頼 関 係 を 維 持 する 1. 国 交 回 復 期 ( 第 1 回 ~ 第 3 回 1 豊 臣 秀 吉 の 発 動 した 侵 略 戦 争 の 終 戦 処 理 と 徳 川 政 権 徳 川 家 康 は 国 交 回 復 により 東 アジアの 通 商 関 係 の 安 定 と 拡 大 を 求 めていた 東 南 アジアへの 朱 印 船 貿 易 の 拡 大 中 国 との 勘 合 貿 易 の 再 開 そしてその 安 定 化 のための 対 朝 鮮 国 交 回 復 朝 鮮 王 朝 の 対 日 政 策 国 交 回 復 には 謝 罪 の 意 思 表 明 を 被 虜 人 の 送 還 ( 帰 国 の 実 現 に 誠 意 を 2 松 雲 大 師 ( 溟 堂 - 探 賊 使 の 派 遣 と 家 康 との 直 接 会 談 (1605 年 伏 見 城 により 徳 川 政 権 の 国 交 回 復 の 意 志 を 確 認 した 対 島 主 により 家 康 国 書 を 改 ざんしたものが 漢 城 に 届 けられる 朝 鮮 側 の2 条 件 のうちの1つ 3 第 1 回 回 答 兼 刷 還 使 の 派 遣 (1607 年 江 戸 へ 家 康 とは 駿 府 で 会 見 4 第 2 回 回 答 兼 刷 還 使 の 派 遣 (1617 年 伏 見 城 で 国 書 交 換 の 聘 礼 を 行 う 5 第 3 回 回 答 兼 刷 還 使 の 派 遣 (1624 年 三 代 徳 川 家 光 の 将 軍 襲 職 祝 江 戸 で 2. 国 交 刷 新 の 転 機 と 通 信 使 名 義 使 用 (1636 年 第 4 回 ( 以 降 11 回 目 まで 江 戸 へ 1 柳 川 事 件 - 改 ざん 国 書 暴 露 による 裁 判 後 の 新 体 制 へ - 朝 鮮 側 では 北 方 危 機 が 激 化 2 対 の 宋 氏 は 無 罪 - 以 後 日 朝 外 交 の 事 務 方 と 位 置 づけられる 3 対 に 幕 府 が 任 命 した 輪 番 僧 ( 対 州 修 文 職 を 派 遣 ( 京 都 山 僧 2 名 - 外 交 書 類 の 検 閲 起 草 伝 達 役 4 徳 川 将 軍 の 他 称 は 国 王 から 大 君 へ 固 定 5 釜 山 での 和 ( 倭 館 貿 易 の 安 定 化 ( 己 酉 約 条 -1609 年 より 6 使 節 団 の 名 称 変 更 背 景 に 被 虜 人 の 帰 国 希 望 者 の 減 少 在 日 化 29
3. 徳 川 政 権 安 定 期 の 通 信 使 の 招 聘 ( 来 聘 使 ( 第 5 回 ~ 第 7 回 1 第 5 回 (1624 年 代 家 綱 誕 生 祝 2 第 6 回 (1655 年 代 家 綱 襲 職 祝 3 第 7 回 (1682 年 代 綱 吉 襲 職 祝 4 第 4 回 ~ 第 6 回 は 日 光 遊 覧 または 社 頭 での 家 光 の 儒 教 式 弔 礼 儀 式 に 参 加 4. 聘 礼 大 改 革 の 第 8 回 使 節 の 招 聘 (1711 年 代 家 宣 襲 職 時 の 新 井 白 石 の 改 革 1 対 等 の 徹 底 - お 互 いに 国 王 と 称 すること ほかに 儀 式 の 改 革 も 2 簡 素 化 5. 旧 慣 墨 守 に 徹 した 江 戸 中 期 ( 第 9 回 ~ 第 11 回 1 第 9 回 (1719 年 紀 州 徳 川 家 の 吉 宗 襲 職 と 新 井 白 石 らの 失 脚 大 君 号 への 復 帰 2 第 10 回 (1748 年 九 代 家 重 の 襲 職 祝 3 第 11 回 (1764 年 十 代 家 治 の 襲 職 祝 6. 転 換 期 のはじまりと 最 後 の 通 信 使 1811 年 ( 第 12 回 十 代 家 斉 襲 職 祝 1 対 での 聘 礼 ( 国 書 交 換 儀 式 - 通 信 使 の 規 模 縮 小 による 経 費 節 減 2 飢 饉 農 民 揆 都 市 騒 擾 年 貢 未 収 など 国 内 危 機 が 背 景 にあった 3 以 後 将 軍 襲 職 時 に 招 聘 が 計 画 され 朝 鮮 側 も 同 意 するが 実 施 に 至 らず 4 欧 米 諸 国 の 開 国 要 求 しきり 通 信 は 朝 鮮 琉 球 通 商 は 中 国 オランダ 原 則 の 崩 壊 が 目 前 に 7. 日 本 での 朝 鮮 通 信 使 研 究 の 足 跡 1 戦 前 の 研 究 田 保 橋 潔 近 代 日 鮮 関 係 の 研 究 (1940 年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刊 行 は1969 年 松 田 甲 幣 原 坦 など いずれも 総 督 府 関 係 者 など 2 戦 後 の 研 究 三 宅 英 利 日 朝 関 係 史 の 研 究 (1986 年 李 元 植 朝 鮮 通 信 使 の 研 究 (1997 年 など 李 進 熙 辛 基 秀 姜 在 彦 など 在 日 研 究 者 の 啓 蒙 的 著 作 辛 基 秀 プロデュースの 映 画 江 戸 時 代 の 朝 鮮 通 信 使 の 上 映 運 動 上 田 正 昭 による 雨 森 芳 洲 交 隣 提 醒 の 資 料 紹 介 辛 基 秀 仲 尾 宏 善 隣 友 好 の 使 節 大 系 朝 鮮 通 信 使 全 8 巻 3 朝 鮮 通 信 使 縁 地 連 研 究 部 会 の 活 動 による 各 地 域 資 料 の 発 掘 30
8. 雨 森 芳 洲 (1668~1755の 行 動 と 思 想 1 対 藩 の 朝 鮮 関 係 実 務 の 顧 問 としての 活 動 ( 佐 役 通 信 使 来 聘 時 の 真 文 役 2 朝 鮮 方 の 実 務 担 当 者 としての 誠 実 な 交 渉 と 他 者 の 意 見 を 尊 重 しつつ 自 説 を 曲 げない 交 渉 態 度 3 交 隣 提 醒 にみるその 思 想 多 文 化 共 生 論 歴 史 に 対 する 真 摯 な 反 省 三 外 交 は 誠 信 の 交 わり 31
語 彙 説 明 1 誼 を 通 じる 日 本 と 朝 鮮 国 とが 親 しい 関 係 をしようと 働 きかけること 2 被 虜 人 民 間 人 で 捕 虜 とされて 連 行 された 人 3 探 賊 使 日 本 の 政 情 軍 事 の 準 備 などを 探 る 目 的 の 使 者 参 考 : 対 からのたびたびの 使 者 派 遣 の 要 請 に 対 して 徳 川 政 権 の 国 交 回 復 に 対 する 真 意 を 探 る 目 的 で 民 間 人 である 松 雲 ( 溟 堂 大 師 を 派 遣 4 聘 礼 交 隣 関 係 のしるしとして 両 国 の 国 書 を 交 換 する 儀 式 5 襲 職 ここでは 日 本 の 徳 川 政 権 が 次 の 将 軍 にその 職 を 譲 ったことを 指 す 6 柳 川 事 件 江 戸 時 代 初 期 に 対 藩 主 宗 義 成 と 家 老 柳 川 調 興 が 日 本 と 李 氏 朝 鮮 の 間 で 交 わされた 国 書 の 偽 造 を 巡 って 対 立 した 事 件 7 対 州 対 にあった 旧 国 の 別 称 8 輪 番 僧 ( 対 州 修 文 職 江 戸 幕 府 の 命 によって 対 藩 の 以 酊 庵 へ 派 遣 された 禅 僧 の 事 李 氏 朝 鮮 との 外 交 文 書 の 解 読 作 成 や 使 節 への 対 貿 易 の 監 視 などを 行 った 役 職 を 修 文 職 といい 京 都 山 ( 禅 宗 である 臨 済 宗 の4つの 寺 から 幕 府 の 命 令 で 輪 番 制 で 僧 侶 を 派 遣 した 9 己 酉 約 条 朝 鮮 に 日 本 から 渡 航 する 使 者 の 資 格 などについて 定 めたもので これにより 文 禄 慶 長 の 役 のあとに 断 絶 していた 対 と 朝 鮮 との 貿 易 が 再 開 された 10 社 頭 社 殿 の 前 のこと 11 旧 慣 墨 守 従 来 のやり 方 を 踏 襲 し しきたり 通 りにやっていくこと 12 都 市 騒 擾 都 市 に 住 む 民 衆 が 起 こす 騒 乱 闘 争 13 交 隣 提 醒 1728 年 雨 森 芳 洲 が 61 歳 の 時 に 執 筆 した 外 交 指 南 書 対 藩 主 に 対 して 朝 鮮 外 交 の 心 得 を 52 項 目 にわたって 述 べている 国 際 関 係 においては 平 等 互 恵 を 旨 とし 外 交 の 基 本 は 誠 信 にあると 説 いた 14 佐 役 朝 鮮 関 係 実 務 の 顧 問 補 佐 役 の 職 名 15 真 文 役 外 交 文 書 の 解 読 起 草 招 聘 時 の 随 行 等 を 行 う 役 職 の 職 名 漢 字 のことを 真 名 ひらがなのことを 仮 名 と 表 現 した 時 代 に 漢 文 のことを 真 文 といっていた 32
江 戸 時 代 朝 鮮 通 信 使 聘 礼 年 表 1607~1624 年 の 訪 日 名 目 は 回 答 兼 刷 還 使 1636 年 以 降 は 通 信 使 という 名 目 で 派 遣 されてきた また1636 年 以 降 朝 鮮 国 王 日 本 国 大 君 称 号 による 国 書 交 換 が 恒 例 となった 九 三 三 西 暦 年 代 純 祖 文 化 英 祖 宝 暦 英 祖 延 享 粛 宗 享 保 粛 宗 三 正 徳 元 粛 宗 天 和 孝 宗 明 暦 元 仁 祖 寛 永 仁 祖 寛 永 三 仁 祖 寛 永 元 光 海 君 九 元 和 三 宣 祖 慶 長 朝 鮮 日 本 辛 未 甲 申 戊 辰 巳 亥 辛 卯 壬 戌 乙 未 癸 未 丙 子 甲 子 丁 巳 丁 未 干 支 金 履 喬 ( 竹 里 趙 曮 ( 済 谷 洪 啓 禧 ( 澹 窩 洪 致 中 ( 北 谷 趙 泰 億 ( 平 泉 尹 趾 完 ( 東 山 趙 珩 ( 翠 屏 尹 順 之 ( 涬 溟 任 絖 ( 白 麓 鄭 岦 呉 允 謙 ( 楸 灘 呂 裕 吉 ( 擬 湲 正 使 李 勉 求 ( 南 霞 李 仁 培 ( 吉 菴 南 泰 耆 ( 竹 裏 黄 璿 ( 鷺 汀 任 守 幹 ( 靖 菴 李 彦 綱 ( 鷺 湖 愈 瑒 ( 秋 潭 趙 絧 ( 龍 洲 金 世 濂 ( 東 溟 姜 弘 重 ( 道 村 朴 梓 ( 雲 渓 慶 暹 ( 松 副 使 廃 止 金 相 翊 ( 弦 庵 曹 命 采 ( 蘭 谷 李 明 彦 ( 雲 山 李 邦 彦 ( 南 岡 朴 慶 後 ( 竹 菴 南 龍 翼 ( 壷 谷 申 濡 ( 竹 堂 黄 ( 漫 浪 辛 啓 栄 ( 仙 石 李 景 稷 ( 石 門 丁 好 寛 ( 翠 従 事 官 家 斉 襲 職 ( 上 使 小 笠 原 忠 臣 副 使 脇 坂 安 菫 家 治 襲 職 家 重 襲 職 吉 宗 襲 職 家 宣 襲 職 綱 吉 襲 職 家 綱 襲 職 日 光 山 致 祭 世 子 家 綱 誕 生 ( 倭 情 探 索 泰 平 ( 倭 情 探 索 新 通 交 体 制 確 認 家 光 襲 職 ( 同 右 大 坂 平 定 ( 同 右 国 交 回 復 ( 倭 情 探 索 被 虜 人 刷 還 聘 礼 名 目 ( 朝 鮮 側 意 図 大 御 所 吉 宗 聘 礼 ( 不 予 中 止 世 子 家 治 聘 礼 世 子 別 幅 進 呈 日 光 東 照 宮 お よ び 大 猷 院 廟 到 祭 献 物 日 光 東 照 宮 致 祭 献 物 世 子 別 幅 進 呈 日 光 新 造 替 東 照 宮 遊 覧 大 御 所 秀 忠 聘 礼 帰 途 駿 府 大 御 所 家 康 表 敬 付 属 聘 礼 他 両 使 紀 水 世 子 相 伴 ( 田 安 橋 両 は 不 参 紀 尾 両 卿 相 伴 紀 水 卿 相 伴 高 家 両 長 老 宗 対 守 接 待 ( 別 日 [ 十 種 舞 楽 ] 紀 水 卿 甲 府 綱 豊 相 伴 紀 尾 水 卿 相 伴 [ 演 能 ( 式 三 番 ] 尾 紀 水 卿 相 伴 [ 演 能 ( 式 三 番 ] 尾 水 卿 相 伴 駿 水 卿 相 伴 尾 駿 卿 相 伴 本 多 正 信 大 久 保 忠 隣 酒 井 忠 世 膳 奉 行 [ 祝 奏 演 ] 対 府 中 聘 礼 国 役 金 カ 年 賦 上 才 は な し 上 才 ( 田 安 門 内 弓 射 芸 ( 上 野 下 寺 町 崔 天 宗 刺 殺 事 件 朝 鮮 人 国 役 金 御 免 越 訴 所 司 代 問 慰 才 上 ( 田 安 門 内 弓 射 芸 ( 上 野 下 寺 町 所 司 代 問 慰 才 上 ( 田 安 門 内 弓 射 芸 ( 上 野 車 坂 下 所 司 代 問 慰 上 才 ( 田 安 門 内 路 中 カ 所 指 定 上 使 問 慰 時 儀 礼 変 更 所 司 代 問 慰 上 才 ( 代 洲 河 岸 上 才 は な し 上 才 ( 薬 畑 御 殿 朝 鮮 国 王 宛 将 軍 別 幅 の は じ め 上 才 ( 対 藩 邸 被 虜 人 説 諭 官 巡 回 鳥 銃 購 入 伏 見 城 聘 礼 被 虜 人 説 諭 官 巡 回 鎌 倉 遊 覧 駿 河 湾 遊 覧 洛 中 遊 覧 特 記 事 項 三 ( ( 九 ( 九 ( 九 三 ( 三 ( ( 不 明 ( 不 明 [ ] ( [ ] 総 人 員 ( 大 阪 留 [ 京 都 留 ] ( 仲 尾 宏 作 成
총인원 (오사카체류 됴토체류 504 100 428 78 478 (불명 477 (불명 485 (100 473 (113 사행록 비고 해사록 (경 섬 동사상일록 (오윤겸 동사일기 (박 재 부상록 (이경직 동사록 (강홍중 동사록 (조 형 해사록 (신 유 계미동사일기 (불상 부상일기 (조 행 부상록 (남용익 동사일기 (김지남 동사록 (홍우재 가마쿠라쓰루가만 교토 유람 교토 후시미 빙례 피로인 설유관( 説 諭 官 순회 피로인 설유관 순회 조총 구입 닛코산 도쇼구 다이유 인 영묘 치제 미상재 닛코산 도쇼구 다이유 인 영묘 치제 미상재 없음 미상재 [야요스( 代 洲 강기슭] 조선통신사 일람표 서력 1607 연대 조선 일본 선조 40 게이초 12 간지 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 서기 역관 사자관 화원 양의 의원 접반승 사명 정미 여우길 경 섬 정호관 학 관 양만세 김효무 박대근 한덕남 서사원 변주수 이홍규 박인기 신춘남 게이데쓰 겐소 수호 회답겸쇄환 1617 광해군 9 겐와 3 정사 오윤겸 박 재 이경직 박대근 최의길 강우성 정순방 한덕남 송효남 엄대인 유성업 정종례 문현남 오사카 평정 회답겸쇄 1624 인조 2 간에이 원년 갑자 정 림 강홍중 신계영 박대근 이언서 홍희남 강우성 이성국 김신남 이언홍 정 금 황덕업 기쿠하쿠 겐보 이에미쓰 습직 회답겸쇄 460 114 1636 인조 14 간에이 13 병자 임 통 김세렴 황 호 이문학관 권 식 문홍적 문 필 홍희남 강위빈 강우성 이장생 박지영 능서관 전 영 조정현 김명국 하 담 백토립 한언협 교쿠호고린 (도후쿠지 도인 겐소 (도후쿠지 태평축하 병자일본일기 (임 광 해사록 (김세렴 동사록 (황 형 일본국 대군호 제정 닛코산 유람 강우성 저 첩해신어 ( 捷 解 新 語 마상재(쓰시마 번저 1643 인조 21 간에이 20 계미 윤순지 조 경 신 유 독축관 박안기 홍희남 이장생 김의신 김명국 이기룡 釣 天 永 浩 (겐닌지 周 南 円 旦 (도후쿠지 이에쓰나 탄생 1655 효종 6 메이레이 원년 을미 조 형 유 창 남용익 경축관 이명빈 배 욱 김자휘 박문원 홍희남 김근행 홍여우 김의신 유응발 곽 심 윤덕용 한시각 한형국 최 곤 이계훈 모겐 쇼하쿠 (겐닌지 九 岩 中 達 (겐닌지 이에쓰나 습직 1682 숙종 8 덴와 2 임술 윤지완 이언강 박경후 성 완 임 재 이담령 박재흥 변승업 홍우재 이삼석 이화립 함제건 정두준 이수번 주 백 太 虚 顯 靈 (쇼호쿠지 南 宗 祖 辰 (도후쿠지 쓰나요시 습직
500 (129 475 (129 475 (109 477 (110 동사록 (조태억 동사록 (임수간이방언 동사록 (김현문 해사일록 (홍치중 해유록 (신유한 부상기행 (정후교 부상록 (김 흡 봉사일본시문견록 (조명채 수사일록 (홍경해 사상부 (남태기 해사일록(조 엄 계미사행일기 (오대령 계미수사록 (불상 일본록사상기 (성대중 선사만랑집 (성대중 승사록화국지 (원중거 일동장유가 (김인겸 산미통신일록 (김이교 동사록 (유상필 도유록 (김선신 아라이 하쿠세키의 개혁 마상재(다야스몬 내 소사대 위문 마상재(다야스몬 내 궁사예(우에노쿠루마 자카시타 소사대 위문 마상재(다야스몬 내 궁사예(우에노시타데 라정 소사대 위문 교토 대불전 연희 분쟁 마상재(다야스몬 내 궁사예(우에노시타데 라정 최천종 척살 사건 조선인 국역금 면재 소청 소사대 위문 쓰시마 부중 빙례 미상재 없음 1711 숙종 37 쇼토쿠 원년 신묘 조태억 임수간 이방언 이 현 홍무영 엄한중 남성중 최상집 이석린 이송년 김시남 이수장 이이방 박동보 기두문 현만규 이 위 벳슈 소엔 (쇼코쿠지 雲 壑 永 集 (겐닌지 이에노부 습직 1719 숙종 45 교호 4 기해 홍치중 황 선 이명언 신유한 장응두 성몽량 강 백 박재창 한후원 김경석 정세영 함세휘 권도 백흥전 김광사 月 心 性 湛 (덴류지 세키소 류쇼 (도후쿠지 요시무네 습직 1748 영조 24 엔쿄 5 (간엔 원년 술신 홍계희 남태기 조명채 박경행 이봉환 유 후 이명계 박상량 현덕연 홍성귀 김천수 현문귀 이성린 최 북 조숭수 조덕조 김덕륜 스이간 쇼켄 (덴류지 교쿠레이 슈에이 (도후쿠지 이에시게 습직 1764 영조 40 호레키 14 (메이와 원년 갑신 조 엄 이인배 김상익 남 옥 성대중 원중거 김인겸 최학령 이명윤 현태익 홍성원 이언우 김유성 이좌국 남두민 성 호 이소라 쇼탄 (쇼토쿠지 이에하루 습직 1811 순조 11 분카 8 신미 김이교 이면구 폐 지 이현상 김선신 이영오 현의순 현 식 최 석 피종정 이의양 박경욱 김진주 게이간 류호 (도후쿠지 이에나리 습직 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