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092 5328 第 32 輯 2014. 12. 30
第 32 輯 차 례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1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他 者 >と< 言 葉 > 奈 良 勝 司 23 七 支 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47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67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85 신라화랑 가무( 歌 舞 )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 稚 児 舞 )의 현황 고찰 전금선 103 동아시아 애정 전기소설 서사비교 김경희 129 두 개의 차이: 구니키다 돗포의 두 노인 과 비평의 관점 김미경 147 박화성 초기소설의 民 族 읽기 박경수 165 야카모치( 家 持 ) 망첩비상가( 亡 妾 悲 傷 歌 )에 있어서 죽음의 실재와 관념 朴 一 昊 187 연애( 戀 愛 )에 의한 죄의식( 罪 意 識 )과 죽음으로 인한 속죄( 贖 罪 ) 矢 野 尊 義 205 1940년대 초 잡지 국민시가( 國 民 詩 歌 ) 의 시( 詩 ) 연구 엄인경 223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 求 安 録 ) 윤복희 249 石 川 啄 木 の 白 羊 会 詠 草 考 察 尹 在 石 269 日 ㆍ 韓 両 語 の 移 動 の 目 的 を 表 す 表 現 の 分 析 金 玉 英 289 한일 양국어의 모음 무성화 대조연구 高 秀 晩 309 不 満 表 明 の 日 韓 言 語 行 動 について 國 生 和 美 ㆍ 鄭 秀 賢 323 <べし>의 대역어 < 可 하다>에 대하여 閔 丙 燦 339 人 情 本 の おまへ の 使 用 様 相 分 析 閔 丞 希 357 共 感 覚 的 観 点 から 見 た 日 本 語 ㆍ 韓 国 語 の 触 覚 を 表 す 擬 態 語 澤 田 信 恵 379 중국연변지역 조선족노년층일본어의 부정표현 황영희 401 휘보 425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회칙 401 연구윤리 규정 405 발행 규정 409 심사 규정 411 투고 지침 413
1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 이 원 덕 ** Abstract The history conflict issue is the greatest factor that is hindering further relational improvement between South Korea and Japan. In order for the improvement to take place, the overcoming of spreading and deepening history conflict and establishing of the futuristic vision based on cooperation and common prosperity of the two nations are required.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diplomatic friction and conflict between Korea and Japan over the history perception issue will continue for some time. Nevertheless, an important fact to keep in mind is that the frequency and depth of the history conflict issue between the two nations can be modified by the leadership of the leaders, strategical thinking based efforts, and the roles of the media and intellects. In the macroscopic view, the 21st century is a complex new age that differs from the previous cold war periods. Korea and Japan s constructing of a common composition network in hopes of pursuing peace and prosperity for East Asia is a strategical choice for the two nations symbiosis. The new age Korea Japan relations require the two nations to fully cooperate in all areas with a common basis of values and regulations in Northeast Asia where the U.S. and China are taking a strong hold of. 1) Keywords : South Korea Japan Relation, history conflict, Northeast Asia, history perception Ⅰ. 한일관계의 현주소 2012년 이래 한일관계는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 니다. 양국의 정상은 서로 대면조차 꺼리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으며 양국 국 민의 서로에 대한 호감도도 거의 밑바닥에 와 있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대립 은 역사쟁점을 넘어서 안보, 외교, 경제, 문화의 영역으로까지 겉잡을 수없는 속도로 점차 확산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2015년은 한일국교가 정상화 된지 5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로서 한 편으로 반세기 한일관계사를 성찰하고 향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한일관계 * 본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중점연구사업(수행번호: NRF 2011 413 B00007)을 지원받아 진행 되었다. **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의 미래의 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2015년은 일본의 조선통치에서 해 방된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한국의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최근 불거진 일본과의 역사마찰에 주목하면서 2015년의 의미를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의 탈 식민 해방 70주년에 초점을 맞추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과 연 2015년은 한일 50주년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해방 70주년이 될 것인가? 지 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한일관계에서 역사(영토) 마찰 문제는 여전히 미래지향적 양국관계의 발전 을 저해하고 옥죄는 최대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 서는 점차 확산, 심화되고 있는 역사/영토 마찰 문제를 어떻게 다뤄나갈 것인 지를 따져보는 것이야말로 급무가 되고 있다. 당분간 한일관계에서 역사(영 토)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마찰과 갈등은 반복되고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한일 간의 역사/영토 마찰은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략적 대응 노력 그 리고 지식인이나 미디어의 역할 여하에 따라서 어느 정도 그 빈도와 심도가 조절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일 간 역사마찰의 발생 원인은 한일 양측에 공히 존재한다. 먼저 일본 측의 원인은 한일관계에서 과거사, 영토 문제가 갖는 이슈의 중요성이나 민 감성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 무신경 한데서 찾을 수 있는 반면, 한국 측은 지나치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고 과잉 대응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은 과거사 문제나 독도 관련 움직임이 한국의 대일관계나 대일정서에 얼마나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과연 어느 정도 진지하게 고려하 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독도 문제나 과거사 문제가 지닌 폭발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아니면 심각성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안 이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도문제나 과거사 문제가 가져올 한 일관계의 파장에 대해 일본 지도층은 무신경하거나 무관심한 대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일부 지도자들은 헌법문제, 자위대문제, 대북정책, 중국 정책 등을 계기로 심화되고 있는 일본 우경적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과 거사 갈등이나 영토문제를 부채질 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인다. 일부 우익단체 나 보수적 색채의 미디어는 한국과의 역사마찰을 선동하고 자극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 이후 일본의 우익세력이나 우익적 성향의 각종 미디어는 공공연하게 한국에 대한 악의적인 언행을 일삼 고 있다. 이른바 코리안 타운에서의 재특회(재일교포의 특권을 저지하는 모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3 임)의 활동은 헤이트 스피치를 넘어 위험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역사마찰 격화의 한국 측 요인으로는 과잉 대응의 구조와 대중 영합주의 를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신문, 방송 등 한국의 미디어는 일본의 역사인식, 안 전보장, 영토분쟁, 헌법 개정 문제와 관련된 움직임을 아베 정권의 위험한 우 경화 노선이라는 단순한 틀로 재단하여 대대적으로 비난 보도하고 있다. 사 실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 역사교과서 문제 등의 과거사 갈등은 지속적 이고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외교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과거 사나 독도와 관련된 이슈는 늘 한국에서는 매우 민감한 이슈가 되고 초강경 대일정책을 불러일으킨다. 정권에 따라서 다소의 강약 차이는 존재하지만 어 느 정권도 일본과의 역사마찰이 발생하면 강경한 대응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 한일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근본적 차이나 독도문제에 관한 상반된 입장과 최근 아베 정부의 박근혜 정부의 갈등상황을 고려할 때 당분간 양국 간의 외 교적 대립과 마찰의 빈발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이러한 마찰 을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나 해법은 단기적으로 볼 때 존재하지 않는다. 독 도, 역사 마찰이 격화되면 될수록 실효성 있는 해법이 제시되기는커녕 양국 간 국민감정의 충돌만을 초래하여 양국관계 전반에 악영향이 파급되는 사태 를 막을 수 없게 될 것은 자명하다. 역사마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인 일본의 겸허한 태도와 피해자인 한국의 역사적 화해를 위한 관용적 태도가 요청된다. 더불어 한일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미래지향적인 관점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인 가 치와 보편적 규범을 공유하는 국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가 치와 규범의 공유야 말로 한일간계와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공동번 영을 지향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서서 본고에서는 한일 간 역사/영토 마찰의 빈발 배경 을 구조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후, 이어서 2012년 말 아베 정권의 출범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가고 있는 한일관계의 악화 현상에 대한 원인진단을 시 도한다. 또 현재의 한일관계를 타개하고 개선하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고 있 는지를 실천적인 입장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4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Ⅱ. 한일관계 65년 체제 50년의 총괄 1. 한일회담과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한일회담은 양국 간에 존재하는 과거사 인식의 깊은 괴리를 극복하고 새 로운 우호협력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교섭이었다. 그러나 14년간의 마라톤 교섭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과거사 인식의 근본적인 차이는 좁혀질 수가 없었 다. 35년간의 식민통치를 원천적으로 불법, 부당한 것으로 보는 한국 측의 인 식과 그것을 적법하고 합당한 것으로 보는 일본 측의 인식이 외교협상을 통해 근접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처럼 과거 일 본의 조선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현격한 인식 차 로 말미암아 이 교섭은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겪은 후에야 타결될 수밖에 없었다. 1) 14년간의 회담 전개과정에는 다음의 두 가지의 상반된 힘이 지속적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회담을 타결로 이끌어 가는 힘은 안보 논리와 경제 논리에 의해 주어졌다. 안보 논리와 경제 논리가 한일관 계의 구심력으로 작용하여 교섭의 타결을 촉진시켰다. 반면 과거사 청산 논 리는 회담을 대립과 갈등으로 끌고 가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교섭을 결렬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원심적인 힘의 원천은 과거사 청산의 논리에 의해 주어 졌다. 냉전체제와 연계된 안보논리는 한편으로 전후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의 아 시아 전략이라는 형태로 작용해 왔다. 즉, 미국은 회담의 개시 단계에부터 타 결 시점에 이르기까지 한일회담의 타결을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노력 을 기울여왔다. 애당초 한일 양국을 회담의 테이블에 앉힌 것이 다름 아닌 미국이었으며 나아가 반복되는 회담의 중단과 결렬사태를 회담재개와 타결로 이끌어가기 위해 때로는 배후에서, 때로는 표면적인 압력을 가한 것도 미국 이었다. 일본 측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회담타결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 것 은 안보적 고려였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조선은 일본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1) 한일회담에 관한 실증적 분석은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서울대출판부, 1996) 다 카사키 소지( 高 崎 宗 司 )( 検 証 日 韓 会 談, 1996), 오타 오사무( 太 田 修 )( 日 韓 交 渉 請 求 権 問 題 の 研 究 (2003), 요시자와 후미토시( 吉 澤 文 壽 )( 戦 後 日 韓 関 係 ー 国 交 正 常 化 交 渉 をめぐってー (2005) 장박진 식민지 관계 청산은 왜 이루어질 수 없었는가 (2009)의 등의 연구에 의해 이뤄졌다.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5 비수 라는 인식은 명치유신 이래 일본의 한반도 정책에 흐르고 있는 일관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박 정권 또한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확 보하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이 희구하는 한 일국교 정상화를 달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안보논리와 더불어 두 번째의 에너지 공급원은 경제논리였다고 생각된다. 경제논리가 회담타결의 주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1950년대에 답 보를 면치 못하던 한일교섭이 1960년대 들어서 급격하게 타협을 모색하는 방 향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명백하다. 사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일 경제관계는 미국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상대를 경제적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만큼 긴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양국의 경제적 여건은 크게 달라졌다. 특히 한국의 경우 1950년대 말부터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양적으로 크게 삭감되 는 한편 질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면서 그로 인한 경제적 침체와 불황 이 심각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미국은 전후 대소전략의 일환으로 천문학적인 숫자의 경제 원조를 서유럽을 비롯한 동맹국에 쏟아 넣은 결과 달러의 과도 한 방출로 인한 후유증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달러방 위라는 명목 하에 동맹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대폭으로 감축하는 정책을 추 진하게 되었는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또 케네디 정 권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원조의 성격이 소비재 위주의 무상 원조방식에서 개 발을 지원하는 차관 형 원조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으로서는 대미 의존 형 경제체질을 탈피하여 자립적인 산업화의 기반을 구축하여 본격적인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 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1961년 5월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정권의 제일목표로서 조국의 근대화와 경제개발을 내걸고 야심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본과 기술의 부족에 직면하여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곤경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박 정권이 구상한 것이 다름 아닌 대일 관계의 타결노선이었다. 박 정권은 만약 대일회담이 타결된다면 상당한 액수의 청구권 자금이 들어올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정상화된다면 다량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개발에 활용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더욱이 미국은 박 정권에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스스로의 경제개발 계획을
6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추진하도록 권유하는 한편, 대일회담의 타결을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 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도록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미국은 박 정권이 대일회담의 타결에 나서지 않을 경우 경제 원조를 중단 내지 삭감할 것이라는 압박을 가했다. 한편 일본의 경우도 회담타결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한 1960년대로 접어 들면서 한일관계를 경제적인 각도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안보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물러난 기시 정권의 뒤를 이어 등장한 이케다 정권은 될 수 있으면 국내의 혼란을 야기시 킬 수 있는 안보 정치적 쟁점을 회피하고 그 대신 정치의 중심축을 경제로 옮겨놓는 쪽으로 정치노선을 설정했다. 이케다 수상이 야심적인 정책으로 내 놓은 소득배증계획 이야말로 이케다 정치노선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일회담의 최대 난제였던 재산청구권 문제가 이케다 정권하에서 경제협 력방식에 의해 타결되었다는 점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케다 수상 은 한일회담의 본질을 경제문제라고 인식하고 대한관계를 경제외교의 일환으 로 풀어 나가려고 시도하였다. 즉, 이케다 정권은 청구권 문제의 본질이 과거 사의 청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제적 이해의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이케다 정권이 청구권의 해결방안으로 고안해낸 것이 경제협력방식이었다. 경제협력방식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한국의 청구 권 요구를 명목과 지불의 둘로 나누어 지불 액수에서는 한국의 요구에 최대 한 접근하고 명목에 관해서는 사죄와 보상의 의미를 배제하는 대신 경제협력 의 의미를 부여한다. 둘째, 한국에 일본의 공업제품과 역무를 제공함으로써 이를 장래 한국에 대한 경제 진출의 토대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경제협력방식의 요체는 지불의 방식을 자본이 아닌 공업제품과 용역으로 한다는 데 있었다. 경제협력방식은 전후 일본이 인도네시아, 버마, 필리핀, 베 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전후처리에도 적용했던 방식이었다. 일본 은 이러한 전후처리의 방식을 오히려 동남아지역에 대한 경제 진출을 적극화 하는 토대로 활용해 왔다. 일본은 한국에게도 이 방식을 적용시키고자 의도 했던 것이다. 경제협력방식이 채용된다면 일본으로서도 결코 경제적으로 손 해 볼 것이 없으며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일본의 계산이었다. 이처럼 한일회담의 타결은 냉전적 상황과 그에 기반을 둔 안보논리 및 경 제논리에 의해서 촉진되었을 뿐 정작 회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사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7 청산의 논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일회담의 타결과 한일조약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정상적인 한일관계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남 아있는 것은 회담타결에 있어서 과거사 처리문제가 유보된 채 안보와 경제논 리에 입각한 편의적인 해결만이 도모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루하고도 긴 교섭을 통해 양국 정부가 도달한 해법은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한 정면 돌파 를 회피하고 유보하는 선에서 타협을 모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타협은 한일기본조약의 비준국회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즉, 한일 양국 정부 는 비준국회에서 한일회담의 최대 초점이 되었던 청구권 문제와 과거인식 문 제에 관해서 전혀 상반된 해석을 내놓았다. 한국병합 조약에 관해서 한국정부는 이미 무효이다 라는 규정을 당초부 터 원천적으로 무효였다 라고 해석한데 대하여 일본정부는 지금은 무효이나 당시는 유효하고 합법적이었다 고 해석하였다. 또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기 로 약속한 유상, 무상의 자금의 지불명목에 대해 한국정부는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정당한 보상 으로서 해석한 데 반해서, 일본정부는 어디까지나 청구권과는 관계없이 한국의 경제재건을 지원하기 위한 경제협력 이라고 해 석하였다. 과거 청산이라는 핵심문제에 관해서 한일 양국의 이와 같은 상반 된 해석은 한일조약이 얼마나 본래의 모습과 괴리된 일그러진 전후 처리였는 가를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2. 한일수교 50년의 조망 1965년 국교가 정상화된 이래 한일관계의 역사를 조망해보면 시대 변천에 따라 한일관계의 성격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론적 인 차원에서 한일관계의 존재방식을 종속변수로 놓고 생각해 보면, 그에 영 향을 미치는 독립변수로 고려할 수 있는 요소는 대체로 동북아시아 국제시스 템과 양국의 파워 관계 그리고 양국의 국내체제가 될 것이다. 2) 물론 한일관계의 존재방식은 이러한 구조적 변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 2) 전후 한일관계에 대한 분석 틀에 관한 기존 논의는 이하를 참고. 이원덕, 구조전환기의 한일 관계: 쟁점과 과제 장달중ㆍ오코노기마사오, 전후 한일관계의 전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 제연구소, 2005); 최상용ㆍ이원덕ㆍ이면우, 탈냉전기 한일관계의 쟁점 (집문당, 1998);Koh, Byung Chul, Between Discord And Cooperation:Japan and The Two Koreas(Yonsei University Press, 2007); 木 宮 正 史 日 韓 関 係 の 力 学 と 展 望 : 冷 戦 期 のダイナミズムと 脱 冷 戦 期 における 構 造 変 容 金 慶 珠 ㆍ 李 元 徳 編 日 韓 の 共 通 認 識 : 日 本 は 韓 国 にとって 何 なのか? ( 東 海 大 学 出 版 会 2007)
8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은 아니다. 즉, 구조적 변수와 더불어 한일 양국 정부 지도자의 리더십의 발 휘 양상과 리더십의 발휘를 가능케 하는 국내정치의 역학(여론 포함) 또한 한일관계의 성격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된다. 이렇게 보면 한일관계 의 존재방식은 한편으로 국제시스템, 양국의 파워 관계, 양국의 국내체제라 는 각 수준의 구조적 요소에 의해 제약을 받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양국정 부 지도자의 리더십이라는 행동적 요소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된 1965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한일관계사 를 대별하면 3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제1시기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한일관계가 냉전체제의 강력한 영향권 속 에 존재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 안 보, 경제적 결속을 강화시켜 나갔다. 소련 중국 북한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공산진영의 북방 삼각동맹과 대결하기 위해 한일 양국은 자유주의 진영의 안 전과 평화를 지키려는 미국과의 긴밀한 우호협력 관계를 추구했다. 이 시기 는 한일관계에서 반공 연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양국 간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 대립은 최대한 억제되었고 수면 하에 잠복될 수밖에 없었다. 4) 제2시기는 1990년 이후의 시기로 이 기간 동안 한일관계는 냉전질서의 해 체로 인해 반공에 기반 한 결속력이 급속도로 이완되었다. 그 동안 잠복되었 던 역사 영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표면 위로 분출됨으로써 양국 간의 역사 마찰이 격화되었다. 한국의 정치사회 민주화와 한일 간 파워 격차의 축소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의 강경한 대일정책을 추동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역 사마찰을 심화시켰다. 한편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일 양국 간에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양국 관계 라는 인식도 강화되었으며 개방적이고 자율적인 시민사회 간 교류는 더욱 활 성화 되었다. 3) 한일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요소 이외의 정치 리더십의 역할에 주목한 연구로는 김호 섭, 한일관계 형성에 있어서 정치 리더십의 역할 일본연구논총 Vol.29(2009년 여름)를 참조. 4) 냉전시기 한일관계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Lee, Chong Sik Japan and Korea: the Political Deimension(Stanford Hoover Institution Press, 1885);Cha, Victor, D., Alignment Despite Antagonism: the United States Korea Japan Security Triangle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9 제3시기는 대체로 2010년 이후의 시기로 이 시기를 통해 한일관계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2010년을 전후하여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구조적인 요소에 커다란 변화가 도래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경우에 따라서는 수 년 동안 급격하게 단기적으로 진행 되었다기보다는 냉전체제의 붕괴 이래 1990년대부터 장기적인 시간 축 속에 서 지속되어 온 추세적인 변화로도 볼 수 있다. 21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바야흐로 미중 양강 구도로 급속도로 재편되 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즉, 21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대적인 힘의 저하 속에서도 여전히 초강대국의 지위 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과 빠른 속도로 강대국으로 대두하는 있는 중국, 양국 중심으로 새롭게 짜여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의 2분기 통계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중국이 일본을 앞지르는 역전 현상이 벌어졌고 5) 이후 중일 간 격차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는 거시적으로 보면 중국이 120년 전 청일전쟁에 패배한 이래 일본을 경제 규모에서 앞지른 매우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장기적인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걸친 150년이라는 기간은 어쩌면 예 외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이 예외의 시대 150년 간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 하여 세계 열강국가에게 굴종을 강요당하며 강대국의 지위를 박탈당한 반면, 일본은 20세기의 전반기에는 군사대국으로, 그 후반기에는 경제대국으로서 위용을 떨쳤다. 6)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 일본은 심각한 재정적자, 성장 동 력의 상대적 상실, 고령화 저출산으로 상징되는 인구구조의 변화 속에서 힘 의 상대적 저하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본은 예 외의 150년을 경과하여 본래의 정상적인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7) 5) 2010년 2분기(4 6월),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이 처음으로 중국에 역전돼 세계 2위 경제대 국 자리를 중국에게 내줬다. 이는 일본이 1968년 독일(당시 서독)을 제치고 세계 2위에 오른 지 42년 만이다. 6) 앵거스 메디슨의 역사통계에 따르면 구매력 기준으로 보았을 때 1820년 당시에도 중국은 세 계 GDP의 32.9%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계하고 있다. 한편 2030년에는 중국이 23.8% 의 지분을 갖게 될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일본은 3.6%만을 갖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Angus Maddison, Shares of the Rich and the Rest in the World Economy: Income Divergence Between Nations 1820 2030 Asian Economy Policy Review, 2008(3); 田 中 明 彦 지음 이원덕 역, 포스트 크라이스의 세계 (일조각 2010) pp.76 79 7) 2010년을 계기로 중국이 국내총생산액 규모에서 일본을 능가하게 된 현상을 두고 일본이 주 도한 동북아의 근대사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중국이 군림하는 새로운 동북아의 현대사가 개 막되었다고 진단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전개를 동북아시아의 복원 혹은 전근대
10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1990년대 이후 한일 이국 간 관계가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점차 이동하게 된 점 또한 양국관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권위주의적인 정권이 한국을 지배하던 80년대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한일관계는 전형적인 약소국과 강대국 간의 비대칭적인 성격을 지 니고 있었다. 가령 과거사 문제만 하더라도 이 시기 한국정부는 대일관계 악화가 초래 할 악영향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과거사 쟁점이 핫 이슈로 부각되는 것을 꺼 려하여 일본에 문제제기 자체를 억제하거나 혹시 문제가 되더라도 이를 조기 에 수습하고자 노력했었다. 당시 한국정부는 과거사 문제보다 일본과의 안보 적 협력이나 경제협력을 획득하는 일에 외교적 우선순위를 두는 경향이 강했 다. 또한 당시 한국정부는 북한과의 첨예한 군사적 대결구도 하에서 주요우 방국인 일본과의 우호 협력관계를 해칠 수 있는 대일행동을 자제하는 자세를 취했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의존 하는 바도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 한국은 꾸준한 고도경제 성장을 추진한 결과 마침 내 선진경제국으로 도약했으며 한편으로 80년대 후반 이래 정치사회적 민주 화의 성과도 착실하게 달성하였다. 특히 1990년대 한국의 OECD가입은 한국 이 비로소 선진국의 일원으로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여 겨졌다. 이후 한국은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정착시 키는 한편 경제적으로도 명실 공히 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은 더욱 가속화 되어 2010 년 마침내 G20의 일원이 됨으로써 세계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이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함에 따라 한국 국민 들은 국력신장을 바탕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 이 강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일 양국 간 관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가치를 공유하는 양국관계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향후 한일관계의 기본성격을 규정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8)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은 군 부 권위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민주화를 착실하게 달성시킨 결과, 선거에 의 국제질서로의 복귀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8) 오코노기 마사오,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 체제마찰에서 의식공유로 장달중ㆍ 오코노기 마 사오, 전후 한일관계의 전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5)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11 한 수차례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함으로써 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안 착시켰다. 기본적인 인권은 놀라울 정도로 신장되었으며 사회경제적인 다원 화, 자유화도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기본적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와 규범 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선진 민주국가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뤄 진 한일의 가치체계 및 규범의 수렴 현상은 양국의 긴밀한 우호협력 관계의 굳건한 토대가 되고 있다. 안보적 차원에서 보면 양국은 전후 줄곧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안전보장 정책의 중핵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미국 의 입장에서 보면 냉전체제 하에서 한국과 일본은 공히 아시아에서 가장 중 요한 동맹 국가로 취급되었으며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미국에게 있어 한국 과 일본이 지니는 군사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미국과의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각국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시스템의 담보를 보장하는 체제 안전판으로서 간주되고 있으며 대외적 군사위협으로부터 평화와 안전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벽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일 양국은 경제,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양국은 전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경제 질서 속에서 국가주도형 발전 국가 모델을 지향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양국 은 부존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조업 분야의 경쟁력을 키움으로써 공산품 의 해외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을 꾀하는 국가발전 전략을 취해 왔다는 유사성 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양국은 급속하게 글로벌화 하는 세계경제에 적응하기 위해 개방과 경쟁을 통한 경쟁력 제고에 박차를 가하는 국가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도 큰 차이는 없다. 민주와 자율의 가치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또한 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이 지니는 중요한 유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양국의 시민사회는 정부 간 관계 못지않게 90년대 이후 매우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양국 간 시민사회의 교류 기반은 국익을 넘어선 인권, 평화, 환경, 인간 안전보장 등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근년 들어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 간 교류는 엄청난 폭과 속도로 발전되 고 있는데 이는 향후 한일양국의 국익을 넘어선 보편적 규범과 가치의 공유 기반이 획기적으로 넓어지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1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한일양국은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이라는 기본 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안전보장, 경제체제, 시민사회 등 제반 영역에서의 체제 수렴현상 또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왔음이 확인된다. 이는 향후에도 한일관계의 지속적인 우호 협력적 발전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기능 과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은 규모와 질적 수준 이라는 양면에서 볼 때 정치적 민주주의와 선진적인 시장경제, 자유로운 시 민사회를 지니고 있는 동아시아의 핵심적인 양국 관계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Ⅲ. 한일 역사마찰의 구조적 배경 한일관계의 최대 갈등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독도, 역사인식을 둘러싼 마찰 은 경험적으로 볼 때, 그 빈도와 심도의 양 측면에서 1990년대 이후 한층 격 화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증폭되고 있는 양상 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일관계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보다 크게 작용하 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냉전종결에 따라 한일관계의 갈등 요소는 오히려 증폭되었다. 냉전 시기 한일 간의 결속을 강화시켰던 요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하에서의 반공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냉전체제 하에서 한국과 일본의 긴밀한 협력을 기반으로 하여 대 공산권 봉쇄전략을 추진해왔다.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서 한일 간의 독도 및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은 잠복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붕괴로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민족주의적 갈등 요소는 여과 없이 표면으로 분출하게 되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동북아 지역의 국제체제는 큰 지각변동을 맞이하게 되 었다. 이른바 국제정치이론에서 말하는 힘의 전이(Power Transition)가 급속하 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강대국으로서의 급부상과 일본의 상대적 힘의 쇠퇴 그리고 한국의 미들 파워로서의 등장이 그것이다. 바야흐로 동북 아지역에는 미중 양강 구도가 서서히 등장하고 있고 이는 한일관계의 성격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2012년 이후 격심한 한일, 중일 간의 대립과 마찰이 벌어진 것은 동북아지역의 세력전이 현상과 더불어 한중이 각국에서 일어난 정권교체가 동시 진행하면서 나타난 이른바 세력균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13 형의 유동화에서 그 구조적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일 양국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한일 간에는 정치인, 경제인의 인적 채널 및 네트워크에서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90년대 이 후 양국의 잦은 정권 변동과 정치인의 세대교체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특 히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형성 유지되어 왔던 정치인 간의 비공식 인 맥관계는 단절되었다. 1965년 국교수립 후 한일 정치인 간에는 수많은 공식, 비공식적 채널이 잦은 회합이나 긴밀한 의견교환을 통해 민감한 정치현안이 나 갈등 사안은 막후에서 조정, 타협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는 점차 약화되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거나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정치인 간의 교류나 접 촉기회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갈등 발생 시 문제해결 능력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한일관계는 더 이상 특수한 관계가 아닌 보통의 이국 간 관계로 변화되었고 이에 따라 양국 간 현안은 정치인들보다는 외무 관료의 손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정치인의 네트워크가 약 화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민사회, 지방자치체, 기업 차원의 교류는 폭발적으 로 증대했다. 이처럼 한일관계가 보통의 관계로 변화되면서 갈등을 수습하고 완화시켜 줄 수 있는 정치적 메카니즘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셋째, 한일 간의 이국 간 관계가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점차 이동하고 있다는 점 또한 양국관계를 이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1960년대 이래 한국은 꾸준한 고도경제 성장을 추진한 결과 마침내 선진경제 로 도약했으며 한편으로 80년대 후반 이래 정치사회적 민주화의 성과도 착실 하게 달성하였다. 1990년대 한국의 OECD가입은 한국이 선진국의 일원으로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이 상대적으로 단시일 내에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함에 따라 국민들은 국력신장을 바탕으로 한 보다 당당한 외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강화되었다. 권위주의적인 정권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대만 하더라도 한일 간의 역사문제가 뜨거운 외교 쟁점으로 등장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대일관계 악화가 초래할 악영향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과거사 문제가 핫 이슈로 부각되는 것을 꺼려하여 문제제기 자체를 억제하거나 혹시 문제가 되더라도 이를 조기에 수습하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정 부는 북한과의 첨예한 군사적 대결구조 하에서 주요한 우방인 일본과의 우호 협력관계를 해칠 수 있는 대일행동을 자제하는 자세를 취했다. 산업화와 고
14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도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일본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최소화 하려고자 노력했던 것이 다. 일본의 보수정치세력과 한국의 집권층이 밀접한 인적 유착관계를 유지하 고 있었다는 점 또한 관용적인 대일태도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한국 국력의 신장과 사회 정치의 민주화가 동시 진행되면서 대일 자세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부는 폭발적으로 표출되 는 국민들의 대일 감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의 대 일감정을 활용한 강성 대일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특히 민주화와 정치권의 세대교체에 따라 그 영향력이 강화된 한국의 젊은 세대는 인터넷 매체를 통 해 강렬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표출하며 대일정책에 있어서 강경 여론을 주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넷째, 일본국내적 요인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일본 의 정치적 지형은 보수 내셔널리즘이 날로 강화되는 일로를 걸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에서는 이제 평화헌법 개정론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으며 자 위대의 보통 군대화 움직임 또한 당연한 변화로 인식되고 있다. 수상 및 각 료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비판 움직임도 상당히 무뎌졌다. 국민의 역사인 식도 2000년대 이후 점차 보수적인 방향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현 주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마디로 평화국가로부터 군사적 보통 국가론의 탈바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일본국민은 큰 저항 없이 이를 받 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보수우경화 경향은 세대교체에 의해서 영향 받은 바 큰 것으로 이 해된다. 전후세대 정치인들은 미일동맹 중심의 강성 외교안보 정책의 추진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 중국 등에 대한 근린 외교는 그 비중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독도문제나 역사마찰 로 인한 한일관계 의 악화는 이들에게 그다지 심각한 외교현안이 되지 못한다. 전후세대 일본 인들은 과거 역사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일반적으로 과거 식민통치와 침략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역사에 대한 속죄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 서 영토문제나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을 취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당 정권 초기 2년간 잠시 주춤했으나 2012년 아베 정 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정점에 달한 느낌이다. 2012년의 가을 중의원 선거 에서의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의 압승과 2013년 여름 참의원에서의 자민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15 당의 승리는 일본정계를 사실상 우파 보수 세력 일색으로 변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간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견제 역할을 담당했던 이른 바 진보 리버설 세력은 고령화, 약체화되었고 야당은 지리멸렬하였다. 게다 가 정계의 이러한 우경화 추세에 대해 일정한 비판과 자정기능을 수행해 왔 던 시민사회 세력도 매우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우익적인 성 향의 정치지도자들이 정계의 전면에 등장하여 역사 퇴행적인 언행의 릴레이 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이 이에 대해 극단적인 경계와 우려를 지니게 되 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Ⅳ. 역사마찰의 원인 진단 최근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는 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필자는 한마디로 양국 지도층 간의 소통 부재와 양국의 미디어 보도를 경유하여 나타난 국민 레벨 의 극단적인 상호인식의 확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 자면 필자가 보기에 한일관계의 극단적인 악화는 존재론적인 차원의 문제라 기보다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여기에 더욱 우려 스러운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인식론의 횡행 속에서 양국의 외교정책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인 관점이 무시되거나 전략적인 사고 그 자체의 영 역이 점차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한마디로 아베 총리가 지배하는 일본이 위험한 우경화의 길로 치 닫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한국인의 이러한 인식에 불을 당긴 것은 2012년 의 자민당 총재 선거와 중의원 선거에서의 아베 자신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 다. 아베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고노담화 철회 가능성을 언급하였 고 일본 정부의 반성 사죄론적인 자세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무라야마 담화 를 수정하여 2015년 새로운 역사담화를 내놓겠다고 발언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일본의 전후 정치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져 왔던 헌법개정, 안전보장 정 책의 전환을 선거 공약으로 내놓고 이른바 전후 체제로부의 탈각, 일본을 되 찾자는 슬로건을 속속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의 미디어는 일제히 아베 정권 등장 그 자체를 매우 위험한 조짐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아베가 이끄는
16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부추기는 언설 을 쏟아내었다. 마치 이러한 인식을 확인이라도 해 주듯이 2013년 일본의 정계에서는 문 제발언이 속출하였다. 아베 총리의 침략전쟁 정의 발언, 하시모토 시장의 위 안부 발언, 아소 부총리의 나치식 개헌 발언 등이 이어졌고 마침내 12월에는 내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단행하였다. 더욱이 2014년 6월 고노담화의 검증결과 발표는, 그렇지 않아도 아베정권의 역사인식에 대한 불만과 우려가 컸던 한국 국민을 더더욱 격분시키기에 충분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베 정부는 일본국민의 과반수에 가까운 반대와 우려에 도 불구하고 헌법해석의 변경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일련의 조치 를 서두르고 있다. 일본판 NSC의 창설에 이은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가능 케 하는 일련의 정책 전환 움직임이 가속화됨에 따라 9) 한국의 아베 정부에 대한 인식은 경계론을 넘어 위협론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 수 정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아베정부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에 대해 한국 국민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한국의 일본 인식에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특히 한국 의 대일인식의 배경에는 식민통치의 암울했던 기억이 여전히 큰 부분을 차지 하고 있어 여전히 편견과 선입견이 앞서게 되는 측면이 존재한다. 한국의 일 본 인식에는 아베 총리의 정치적인 DNA를 우익적인 것으로 지나치게 단순 화하여 파악하고 있는 특징이 보인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는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역사관련 행보,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 안전보장 정책 의 전환 시도 그리고 영토정책을 우경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하나의 위험한 패키지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 베 수상과의 정상회담을 꺼리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한국 미디어 및 국민들의 일본 인식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일본의 한국인식에도 지나친 단순화와 객관성의 결여라는 문제가 존 재한다. 일본의 한국인식이 최근 급속하게 부정적으로 기울게 된 것은 아마 도 2012년 여름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방문과 천황사죄 발언 그리고 9) 이러한 움직임은 기본적으로 전후 보수적 정치세력이 일관되게 추진해 왔던 이른바 군사적 보통국가로의 행보로 이해된다. 또 한편으로는 급부상하는 중국과의 센카쿠 충돌,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에 대한 나름의 대응의 측면과 더불어 힘의 상대적 쇠퇴 속에서 아시아로의 회 귀를 추구하는 미국과의 동맹관계의 재조정이라는 틀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라 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17 일본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저평가 발언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고 생각 된다. 이와 더불어 헌법재판소 위헌 판결(2011년8월) 대법원의 판결(2012년 5 월)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압박이 가중되고 징용징병 피해자의 잇따 른 보상 요구 움직임이 한국 국내에서 표면화되면서 일본사회 일각에서는 일 종의 한국에 대한 사죄피로 현상 내지 혐한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인식의 이면에는 최근 한국이 경제, 산업, 문화, 스포츠 등 몇몇 분야에서 일 본의 강력한 경쟁국, 경합 상대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과거 수직적이었던 양 국관계가 수평적인 것으로 바뀐 것에 대한 인식의 부적응 상태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일본사회에는 바야흐로 미들 파워 한국의 대두를 막연하게 두려 워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정서가 서서히 표면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본의 부정적 한국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하는 있는 것은 아마도 한국의 중국 경사론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인식이 강화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박 정부 수뇌부의 일련의 외교행보 및 대일발언에서 비롯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의 올바른 역사인식이 전제 되지 않은 한,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곤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에 걸쳐 발언한 바 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이 미국, 중국, 유럽의 주요 국가 와이 정상 외교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일본의 역사인식을 비판한 것에 대한 불쾌감이 확산되었다. 또한 역대 대통령과는 달리 박 대통령은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고 더욱이 일본보다는 중국을 중시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이 른바 일본경시 내지 일본 이탈을 의도적으로 꾀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본사회 전체에 만연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미디어와 우익계 잡지는 한국의 이러한 대중 경사 경향을 마치 한국이 과거의 사대주의 외교로 회귀하고 있는 것인 양 묘사하는 논조로 보도하는 경향조차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박근혜의 대 중외교를 한국이 중국에 달라붙어 일본을 사사건건 비난하는 모양새로 비아 냥거리는 인식조차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대중인식은 한 마디로 중국 위협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은 그 위험한 중국을 너무도 모르고 순진하게 보고 있다는 사고방식이 일본사회에 횡행하고 있다. 최근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갈등이 첨예화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일본인들은 중국을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 국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고도 경제성장과 정치군사 대국화를 달성했지만 그 내면에는 사회경제적 격차, 정치적 독재와 부정부패, 민족문제, 버블경제
18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등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한국은 그러한 중국에 대한 경계는커 녕 역사인식 문제 등에서 일종의 반일연대를 추진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본의 혐한 정서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10) 이러한 일본의 우려는 2014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 및 정상 간의 역 사인식에 문제에 관한 공감 형성 및 언급에 의해 더욱 첨예화되었다고 생각 된다. 이와 같이 최근 1년 반 사이에 극단적인 경향으로 치닫고 있는 양국 간의 상호인식은 상당부분 상대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양국의 뒤틀린 상호인식이 점차 수그러들기는 커녕 시간이 경과하면서 더욱 악순환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양국 미디어의 편향적인 보도 경향과 더불어 양국 정치지 도자 간의 의사소통과 직접 대화의 부재가 그것이다. Ⅴ. 역사마찰을 넘어 한일신시대로 최근의 비정상적인 한일관계 악화를 극복하고 관계 개선을 위한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조기에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 각된다. 당장 공식방문에 의한 정상회담 개최가 어렵다면 지난 북경 APEC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한중일 정상회담의 장을 빌어서라도 양국 정상이 대면하는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만약 이렇게 해서라도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이 자리에서 양 정상 은 1아베 정부의 기존의 역사인식 및 역사 정책의 계승 입장의 명백한 확인 2양국 관계의 긴급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징용공 보상 문제에 대한 해결 원칙에 대한 합의 도출 3한일 간 미래 협력의 방향 설정에 합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 정상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양국 정부는 주요 현안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차원의 협상에 박차를 가하여 한일 10) 박근혜 정부의 중국 중시 외교는 실제로 대외경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의 체질이나 북한 과 연관된 안보적 현실, 역사적, 지정학적인 요소를 고려할 때 오히려 당연하고도 실용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 중시 외교는 반드시 일본 경시를 의미하지 않으며 한국 의 대중, 대일외교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한국의 외교 전략에서 보면 한미동맹 과 더불어 한중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 한일 우호협력 관계는 필수불가결한 대외관계라고 할 수 있다.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19 국교정상화 50년을 맞이하는 2015년 중에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1998>을 한층 업그레이드 한 형태로 <21세기 한일 신시대 선언 2015>을 채택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최근 한일관계의 최대 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위안부 문제 및 전후 보상 문제의 두 현안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접근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현재 진행 중인 외교부 국장급 협의를 통해 두 문제에 관한 정부 차 원의 대체적인 타결 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협상을 통해 타결 안을 만 드는 과정에서 양국 정부는 공히 각각 국내에서 야당과 시민사회를 포함한 국민의 합의를 도출하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어느 정도의 합의가 도출되면 이 합의 성과를 바탕으로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최종적으로 이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다. 둘째, 양국의 합의 하에 가칭 <한일 역사 화해를 위한 추진하는 새로운 공 동기구>를 조직하여 2015년 6월까지 두 가지 핵심 문제의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공동 연구를 추진하는 방안이다. 기존의 한일 역사공동위원회가 역사학 자들에 의한 공동의 역사연구 조직이었다면 여기서 제안하는 공동기구는 보 다 확장된 분야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정책 입안 적 성격을 띤 기구가 될 것이다. 이 기구에는 한국의 경우 역사학, 정치학, 한 일관계 등 분야의 전문가는 물론, 정대협과 관련 시민단체의 대표 그리고 변 호사 단체, 헌재, 대법원이 추천하는 법조계 인사 등이 포함되도록 하고 일본 의 경우에도 각계각층의 관계자, 전문가가 골고루 광범위하게 포함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국장급 협의를 통한 타결안 도출 방식이든 공동기구에 의한 합의안 도출방식이든 기한 내에 양국 정부와 국민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낼 수 있는 해법이 출현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결론이 나 오든 나오지 않든, 좁은 국익이나 국내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양국 및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와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입장에 서서 민간, 시민사회, 학계의 인사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지혜와 총의를 모으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 은 그 자체로도 여러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된다. 양국의 역사마찰을 합리적으로 관리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국 최고 지도자 간의 암묵적인 합의와 공동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즉, 양국의 지도자 스스로가 역사 마찰로 인해 양국관계가 훼손되고 국민감정이 악화되 는 것이 양국의 국가 이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20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확고할 때 역사마찰을 진정시키기 위한 공동 노력에 나서게 될 것이다. 이를 위 해서는 양국 지도자 간의 신뢰와 그에 기반 한 대화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한일 양국이 맞이하고 21세기 신시대는 냉전시기의 양 극화나 탈냉전 시기의 다극화 시대가 아닌 복합화의 시대이다. 한일 양국이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 공동으로 복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공생을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다. 신시대 한일관계는 미중 양강 구도로 재편되는 동아시아 국제체제 속에서 양국이 기본적 가치와 규범의 공유를 기 반으로 하여 전 분야에 걸쳐 모든 행위자가 전면적인 협력의 추구를 요구하 고 있다. 신시대 복합공생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한일 양국은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는 한편 향후 새로운 비전과 가치를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첫째, 신시대의 한일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양국은 미래지향적 자세로 임해야 하 지만 또 한편으로 양국의 역사에 대한 공동의 인식기반의 확립을 위해 세심 한 배려가 필요하다. 즉, 한일관계에서 과거와 미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다. 과거를 완전히 망각한 미래 설계도 있을 수 없고 과거에만 집 착하는 미래 설계도 안 된다. 따라서 한일 신시대는 역사에 대한 직시와 깊 은 성찰에서 출발하여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한일 신시대는 동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를 국익 경쟁이나 세력균형 의 전통적인 구도를 넘어서 보다 네트워크적인 세계정치의 시각에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일 양국의 긴밀한 협력관계 구축은 기존의 한미일 관계를 강화함은 물론 한중일의 우호협력 관계와도 배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 방향 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한일 협력의 심화야말로 점차 도래하고 있는 미중 양 강 시대의 생존 전략일 수밖에 없다. 즉, 한일관계의 심화, 발전은 대미, 대중 관계의 강화와 선순환 관계에 있고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셋째, 한일 신시대는 한일협력의 방향을 기존의 양자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고에서 탈피하여 양자는 물론이고 한반도, 동아시아지역, 글로벌 영역에 걸 친 한일협력이 매우 중요하다. 한일 신시대는 공간적으로 한반도, 동아시아, 글로벌 질서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관점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미래의 한일 관계는 과거에 비해 훨씬 확장된 공간에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일 신시대의 협력은 한일 양국관계는 물론이고 한반도 차원, 동아시아 지역차원, 글로벌 영역의 네 공간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이뤄져야 한다. 11) 11) 한일신시대의 비래비전에 관해서는 이원덕, 신시대 한일관계의 구축을 향하여 하영선, 오
위기의 한일관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원덕) 21 <참고문헌>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2008), 신 한일관계 파트너십 공동선언 10주년 기념 심포지움 회상, 현안 그리고 비전,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김호섭(2009), 한일관계 형성에 있어서 정치 리더십의 역할, 일본연구논총 Vol.29, 2009년, 여름 오코노기 마사오(2005),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 체제마찰에서 의식공유로, 오코노기 마사 오ㆍ장달중, 전후한일관계의 전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이원덕(2006), 한일과거사 갈등의 구조와 해법모색, 김영작, 이원덕 엮음, 일본은 한국에게 무엇인가, 한울아카데미 (2005), 구조전환기의 한일관계: 쟁점과 과제, 오코노기 마사오ㆍ장달중, 전후한일관 계의 전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10), 한일관계 새로운 100년을 향해, 이원덕, 정재정, 남기정, 하영선 4인 대담, 일본공간 제8호,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2), 신시대 한일관계의 구축을 향하여, 한일신시대 공동연구 논문집: 한일신시대 와 공생복합 네트워크, 한울 외교통상부(1998), 김대중 대통령 일본 공식방문 결과(공동선언, 연설문 등 주요기록) 정재정(2010), 한일여론 지도자 심포지움, 한일관계의 과거와 미래 100년의 성찰, 동북아 역사재단 최상용ㆍ이원덕ㆍ이면우(1998), 탈냉전기 한일관계의 쟁점, 집문당 한일신시대 공동연구 프로젝트(2010), 한일신시대 를 위한 제언: 공생을 위한 복합네트워크 의 구축 田 中 明 彦 지음 이원덕 역(2010), 포스트 크라이스의 세계, 일조각 木 宮 正 史 (2007) 日 韓 関 係 の 力 学 と 展 望 : 冷 戦 期 のダイナミズムと 脱 冷 戦 期 における 構 造 変 容 金 慶 珠 ㆍ 李 元 徳 編 日 韓 の 共 通 認 識 : 日 本 は 韓 国 にとって 何 なのか?, 東 海 大 学 出 版 会 木 宮 正 史 (2010), 東 アジア 共 同 体 と 日 韓 関 係, 東 京 大 學 校 現 代 韓 国 研 究 センタ 主 催, 国 際 会 議 : 東 アジア 共 同 体 と 日 韓 の 知 的 交 流 Cha, Victor(1999), D., Alignment Despite Antagonism: the United States Korea Japan Security Triangles, Stanford University Press. Koh, Byung Chul(2007), Between Discord And Cooperation:Japan and The Two Koreas, Yonsei University Press, Lee, Chong Sik(1885), Japan and Korea: the Political Deimension(Stanford Hoover Institution Press, 1885); Maddison, Angus(2008) Shares of the Rich and the Rest in the World Economy: Income Divergence Between Nations 1820 2030 Asian Economy Policy Review, 2008. 3 코노기 마사오 역음 한일신시대와 공생복합 네트워크 (한울, 2012) pp, 30 31 및 한일신 시대 공동연구 프로젝트 한일 신시대를 위한 제언: 공생을 위한 복합네트워크의 구축 (한 울, 2010) pp.10 13 참조.
2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논문투고일: 2014. 10. 30 논문심사일: 2014. 11. 05 심사확정일: 2014. 12. 15 인적 사항 성명 : (한글) 이원덕, (한자) 李 元 德, (영어) LEE WON DEOG 소속 : 국민대학 국제학부 논문영문제목 : Korea Japan Relation of Crisis: How to break the Deadlock? 주소 : (137 811)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1049 반포타운빌라 102호 E mail : wdlee@kookmin.ac.kr <국문요지> 한일관계에서 역사마찰 문제는 미래지향적 양국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최대 요인이 되고 있 다.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서는 점차 확산, 심화되고 있는 역사마찰 문제를 극복하 고 양국의 협력과 공동번영의 비래 비전을 수립하는 것이 요구된다. 당분간 한일관계에서 역사 문 제를 둘러싼 외교적 마찰과 갈등은 반복되고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한일 간의 역사 마 찰은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략적 대응 노력 그리고 지식인이나 미디어의 역할 여하에 따라서 빈도 와 심도가 조절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거시적으로 볼 때 한일 양국이 맞이하고 21세기 신 시대는 냉전시기와 탈냉전 시기와는 다른 복합화의 시대이다. 한일 양국이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 을 추구하기 위해 공동으로 복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공생을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다. 신시 대 한일관계는 미중 양강 구도로 재편되는 동북아 국제환경 속에서 양국이 기본적 가치와 규범의 공유를 기반으로 하여 전 분야에 걸친 전면적인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주제어: 한일관계, 역사마찰, 동북아시아, 역사인식
23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 漫 画 ナウシカ から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を 中 心 に - * 奈 良 勝 司 Abstract In this article, the author analyzed Miyazaki Hayao s thoughts especially concerning the structure of his world view. I used Miyazaki s animation movies, interview reports of him and others, model sheets from the official guidebooks, and so on as materials. Generally, the main image of Miyazaki s animation is bright, popular. He often uses topics like humanism, ecology, Japanese tradition, and so on. But through the 1980 s, while Miyazaki made his masterpieces such as Totoro and Kiki s delivery service, he had continued writing the comic version of Kaze no tani no Nausicaa. The comic version s Nausicaa included a variety of tragedies and serious and tough battle scenes. The core of Miyazaki s thought can been found within it. When the comic version s Nausicaa was finished in the early 1990 s, Miyazaki had started to include the essence of Nausicaa in his following works. In other words, Miyazaki started to include not only the light side of the world, but also the shadow side of the world. Spirited Away was one of the best representation of the new demands he imposed on himself. In this movie, the importance of words is particularly obvious. Words and promise made by it, ware not just a tool of communication, but also the public order in the world of light and shadow. Words based on the reality gave power to the promises and contracts shown in the movie. Key words : Miyazaki Hayao, world view, light and shadow, words, contract, reality 12) 1. はじめに 本 稿 は アニメ 映 画 監 督 宮 崎 駿 の 作 品 における 世 界 観 の 構 造 を 特 に 他 者 との 関 わりで 明 らかにしようとするものである そもそも 宮 崎 アニメの 一 般 イ メージとはどのようなものだろうか たとえば となりのトトロ 風 の 谷 のナウシ カ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には エコロジーや 自 然 ㆍ 伝 統 世 界 への 憧 憬 それ らに 付 随 した 安 心 感 が 感 じられる 魔 女 の 宅 急 便 天 空 の 城 ラピュタ * 漢 陽 大 学 校 国 際 文 化 大 学 日 本 言 語 文 化 学 科 助 教 授. 明 治 維 新 史 (19 世 紀 日 本 史 ).
24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紅 の 豚 ハウルの 動 く 城 には わくわくする 冒 険 譚 やロマン および 異 国 情 緒 が 見 られる 全 体 的 には 子 ども 向 けであり 環 境 保 護 を 訴 え 中 期 以 降 の 作 品 では 日 本 古 来 の 風 俗 文 化 (あるいはアニミズム)を 高 く 評 価 する こうした 点 こそが 誰 もが 楽 しめる 秘 密 であり 逆 にいえば 宮 崎 アニメはあまりにもうまく 出 来 すぎていて 観 客 から 現 実 への 批 判 力 や 現 実 を 変 えようとする 意 思 を 奪 ってし まっている 1) 理 由 でもある 周 知 のように 宮 崎 駿 は 日 本 映 画 界 を 象 徴 する1 人 である 特 にアニメ 映 画 では 唯 一 無 二 の 存 在 といってよく 世 界 的 にもその 評 価 はすでに 確 立 している また 近 年 では 宮 崎 とは 別 個 の 作 風 を 武 器 に 新 たな 境 地 を 切 り 開 いてきた 新 世 代 の 映 像 作 家 たちが 活 動 を 成 熟 させるなかで 宮 崎 アニメに 回 帰 ㆍ 再 接 近 する という 現 象 も 起 こっている 2) 加 えて 宮 崎 は 文 章 で 自 分 の 考 えを 表 明 したり 作 品 解 説 をすることにも 精 力 的 であり これまでにもインタビュー 記 事 を 始 めとする 多 数 の 記 録 が 公 開 されてきた 3) ならば 宮 崎 が 長 編 映 画 からの 引 退 を 表 明 した 4) 現 在 のタイミングは 彼 を 一 人 の 思 想 家 として 本 格 的 に 位 置 づけ その 世 界 観 の 特 質 を 考 察 する 絶 好 の 機 会 といえるのではないか 実 は 宮 崎 アニメには わかりやすい 娯 楽 性 の 裏 に 強 烈 な 作 家 性 も 込 められている インタビューなどを 読 んでもわかるように 彼 の 社 会 に 対 する 問 題 意 識 およびそれとの 知 的 格 闘 は 作 品 を 通 した 巨 大 な 影 響 力 と 相 俟 って 十 分 人 文 学 からの 検 討 に 値 するものなのである もちろん かかる 試 みは 筆 者 が 初 めてなわけではない 宮 崎 アニメに 対 して は これまでにも 様 々な 立 場 から 数 え 切 れないほどの 言 及 がなされてきた 5) し 1) 切 通 理 作 (2001) 宮 崎 駿 の 世 界 筑 摩 書 房 p276. 2) たとえば ポスト 宮 崎 世 代 の 象 徴 ともいえる 庵 野 秀 明 は 元 々は 風 の 谷 のナウシカ の 作 画 ス タッフで 宮 崎 とは 当 初 から 切 っても 切 れない 関 係 にあったが 宮 崎 の 最 新 作 風 立 ちぬ では 主 人 公 二 郎 の 声 優 を 担 当 するなど ここに 来 て 二 人 の 関 係 は 再 び 密 接 なものになっている また 監 督 ㆍ 作 画 ㆍ 編 集 などをすべて 一 人 でこなした ほしのこえ で 新 世 代 の 鮮 烈 な 感 性 を 提 示 した 新 海 誠 は 2011 年 公 開 の 星 を 追 う 子 ども ではジブリの 新 作 かと 間 違 うほどのキャラクターㆍ 描 写 ㆍ 設 定 を 提 示 して 話 題 になったが 新 海 自 身 がWeb 上 のインタビューで 自 覚 的 に 行 った 宮 崎 作 品 へのオマージュであったことを 明 かしている(http://www.anikore.jp/features/shinkai_2_6/) 3) 今 では 作 品 の 製 作 中 から 公 開 後 にかけた 一 連 の 関 連 書 籍 の 刊 行 ㆍ 発 信 の 方 針 は よく 計 算 さ れた 販 売 ㆍブランド 戦 略 とも 相 俟 って プロデューサーの 鈴 木 敏 夫 やスタジオジブリ 全 体 にも 共 有 されている 4) 2014 年 冬 時 点 彼 はこれまでにも 何 回 か 引 退 を 表 明 しては 撤 回 という 経 緯 を 経 てきたが 年 齢 的 な 事 情 からも 今 回 は 本 当 ということである 5) 全 てを 紹 介 するのは 到 底 不 可 能 だが 本 稿 で 直 接 触 れたもの 以 外 では 彼 の 思 想 を 包 括 的 に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25 かしながら そのなかには 映 画 の 公 開 にあわせて 自 身 の 感 想 やイデオロギーを 吐 露 しただけのものも 少 なくないし また 学 術 的 側 面 から 本 格 的 に 考 察 を 加 えた ものにしても 少 なくとも 問 題 設 定 の 次 元 においては 環 境 問 題 や 伝 統 風 俗 な ど 冒 頭 に 挙 げた 宮 崎 の パブリックイメージ に 規 定 されていることが 多 いよう に 思 われる 6) これに 対 し 筆 者 は 宮 崎 アニメを (たとえ 理 想 化 されたものであれ) 日 本 的 伝 統 への 憧 憬 や 回 帰 を 図 るものではなく むしろ 暗 黒 面 をも 含 む 自 身 の 理 想 を 過 激 に 反 映 させた 闘 争 であると 見 る その 上 で いっけん 伝 統 的 な 日 本 の 美 的 感 覚 とは 相 容 れないかに 見 える ドライでシビアな 契 約 概 念 と 絡 めて 彼 の 思 想 を とらえたい 予 め 結 論 を 先 取 りしていえば そこに 見 出 されるのは ニヒリズムを 土 台 にしながらもそれを 反 転 させたところに 誕 生 する 理 想 主 義 であり 近 現 代 日 本 への 批 判 精 神 とその 裏 返 しとしての 未 発 の 可 能 性 ㆍ 代 案 の 提 示 である なか でも 本 稿 が 注 目 するのが 言 葉 へのこだわりである これは 約 束 の 重 視 と 言 い 換 えてもよい この 傾 向 は 初 期 の 作 品 にも 見 られるが どちらかといえば 漫 画 ナウシカ 7) 完 結 後 の 後 期 作 品 に 顕 著 な 傾 向 であり 特 に21 世 紀 以 降 の 作 品 には 必 ず 登 場 しているといっても 過 言 ではない 国 民 的 作 品 として 幅 広 い 人 気 を 誇 る 宮 崎 アニメに 対 し こうした 理 解 は ある いは 奇 妙 に 聞 こえるかもしれない しかしながら 宮 崎 は 当 初 は 社 会 に 対 する 怒 りや 虚 無 感 から 出 発 して それを 自 覚 的 に 理 想 主 義 に 転 化 させるという 経 験 を 青 年 期 に 経 ていた 8) また 天 空 の 城 ラピュタ となりのトトロ 魔 女 の 宅 急 便 といった 陽 性 イメージを 決 定 づけた 作 品 群 を 発 表 した 時 期 にも 裏 では 陰 扱 ったものとして 久 美 薫 (2008) 宮 崎 駿 の 時 代 :1941~2008 鳥 影 社 野 村 幸 一 郎 (2010) 宮 崎 駿 の 地 平 白 地 社 などを 参 考 にした 6) 他 には 平 和 問 題 ㆍ 宗 教 問 題 からのアプローチなどが 主 なところであろう 7) 周 知 のように 風 の 谷 のナウシカ には 1982 年 から1994 年 まで 雑 誌 アニメージュ で 連 載 された 漫 画 版 と コミックの 第 2 巻 までの 筋 を 大 枠 でなぞりながらも オリジナルの 作 品 となった 映 画 版 がある 以 下 本 稿 では 漫 画 版 を 漫 画 ナウシカ と 表 現 し 映 画 版 を 映 画 ナ ウシカ と 表 現 して 区 別 する 8) 宮 崎 は 高 校 三 年 の 時 に 東 映 映 画 白 蛇 伝 を 観 て それまでの 観 念 先 行 の 冷 笑 主 義 や 醒 め た 割 り 切 りを 根 本 から 覆 された 衝 撃 を 一 番 バカにしてたはずのメロドラマを 観 てガ~ンとなっ た ( 宮 崎 駿 2002 風 の 帰 る 場 所 ロッキングㆍオン p345. 本 書 は 音 楽 評 論 家 渋 谷 陽 一 氏 とのインタビュー 集 である) 流 行 の 不 条 理 劇 でも 描 こうとしていた 自 分 の 愚 かさを 思 い 知 らさ れた( 中 略 ) 口 をつく 不 信 の 言 葉 と 裏 腹 に 本 心 は あの 三 文 メロドラマの 安 っぽくても ひたむき で 純 粋 な 世 界 に 憧 れている 自 分 に 気 づかされてしまった 世 界 を 肯 定 したくてたまらない 自 分 が いるのをもう 否 定 できなくなっていた ( 宮 崎 駿 1996 日 本 のアニメーションについて 同 出 発 点 徳 間 書 店 p101. 初 出 1988)と 語 っている
26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鬱 で 苛 酷 な 漫 画 ナウシカ を 書 き 続 けていた 彼 は 欺 瞞 に 満 ちた 現 実 社 会 を 前 にニヒリズムに 引 きつけられる 衝 動 を 幾 度 も 告 白 しているし 子 どもが 楽 しめ る 作 品 を 作 るという 強 固 な 主 義 を 持 ちながらも 稀 にそのルールを 脱 した 時 に は 非 常 に 個 人 的 で 反 社 会 的 ですらある 問 題 作 を 発 表 している 9) 生 身 の 人 間 としての 彼 が 気 難 しい 側 面 をもち 時 に 周 囲 への 苛 立 ちや 攻 撃 性 を 漏 らすさま は インタビューやテレビのドキュメンタリー 番 組 でも 生 々しく 記 されてきた 10) 以 上 が 筆 者 が 宮 崎 アニメとそれが 向 き 合 う 現 実 の 日 本 社 会 の 両 者 を 親 和 ㆍ 調 和 的 にではなく 逆 に 緊 張 関 係 として 捉 える 理 由 である 11) そして 本 論 で 詳 述 する 通 り 彼 の 作 品 特 に 後 期 作 品 では 主 体 と 異 質 な 他 者 との 関 わ り 方 という 問 題 が 一 貫 して 意 識 されるのである 12) 以 下 本 論 では 第 1 章 で 漫 画 ナウシカ の 連 載 が 終 了 してから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の 制 作 に 至 るま での 軌 跡 を 第 2 章 で 彼 が 考 える 世 界 の 有 り 様 とその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への 反 映 を 明 らかにした 上 で 第 3 章 では そうした 世 界 と 主 人 公 をつなぐ 鎹 と しての 言 葉 が 持 つ 意 義 を 考 察 する 第 1 章 漫 画 ナウシカ から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へ 第 1 節 漫 画 ナウシカ 以 後 の 課 題 宮 崎 は 映 画 監 督 デビューのころから 同 時 並 行 で 漫 画 ナウシカ の 連 載 を 続 けていた ライフワークという 言 葉 を 嫌 う 彼 だが もともと 漫 画 家 を 目 指 していた 宮 崎 にとって 映 画 と 違 って 社 会 的 な 制 約 が 少 なかった 13) 本 作 は 結 果 的 にそ 9) 少 年 少 女 以 外 を 主 人 公 にした 紅 の 豚 と 風 立 ちぬ はそれに 該 当 するといえる 両 作 品 の 関 係 性 と 意 義 については 稿 を 改 めて 検 討 したい 10) たとえば 映 画 監 督 で 宮 崎 とも 関 係 の 深 い 高 畑 勲 は 彼 の こんなスタジオ 燃 えてしまえ! ( 高 畑 勲 エロスの 火 花 出 発 点 p575. 以 下 同 じ) 人 間 は 度 し 難 い (p580)といった 発 言 を 紹 介 している また 宮 崎 のことを 平 気 で 暴 言 を 吐 く しばしば 破 壊 的 虚 無 的 なことばを 周 囲 に 撒 きちらす (p574) 彼 が 大 衆 不 信 におちいり 破 壊 的 虚 無 的 なことを 叫 んだり とき に 独 裁 願 望 ととられかねないことを 口 走 ったりすることがあった (p577) などとも 評 している 11) もとより 彼 は 思 想 的 ではあっても 本 職 はあくまで 映 画 監 督 であり したがって 本 稿 がどれだけ 彼 の 文 章 やインタビュー 記 事 を 引 用 しても それはあくまで 筆 者 が 全 責 任 を 負 う 主 観 的 な 営 為 であることは 断 っ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 12) 筆 者 はすでに 日 本 史 研 究 の 立 場 から 明 治 維 新 を 対 象 にこの 問 題 を 検 討 したことがある( 拙 著 2010 明 治 維 新 と 世 界 認 識 体 系 有 志 舎 )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27 の 思 想 を 長 い 時 期 的 スパンのもとで 試 行 錯 誤 を 経 ながら 熟 成 ㆍ 展 開 させていく 実 験 場 となった もっとも それは 以 下 に 述 べるように 決 して 楽 しいだけの 作 業 ではなく むしろ 心 情 的 には 正 反 対 の 様 相 を 帯 びた 苦 行 のごときものになっ ていくのだが そして 映 画 ナウシカ で 途 中 経 過 を 提 示 した 後 は 漫 画 ナウ シカ が 凄 惨 な 地 獄 絵 図 を 展 開 させていく 一 方 で 映 画 では となりのトトロ な どの 今 日 の 彼 のイメージを 決 定 づけるような 名 作 が 生 み 出 されていくこととなる つまり いうなれば 思 想 の 表 出 回 路 が 顕 教 的 な 映 画 と 密 教 的 な 漫 画 という 二 つの 手 段 に 分 化 したのであり 映 画 では 明 るく 前 向 きな 陽 性 の 物 語 が 示 される 一 方 で 漫 画 ナウシカ では 重 く 陰 鬱 な 世 界 が 示 されるという ある 種 の 分 業 が 生 じたのである 14) 従 って80~90 年 代 前 半 に 作 られた 映 画 は その 背 後 に 漫 画 ナウシカ あってのものであり 一 般 的 な 陽 性 のイメージは 一 面 に 過 ぎず これらはあくまで 両 方 合 わさることで 当 時 の 彼 の 思 想 を 体 現 した 宮 崎 はこの 間 の 事 情 について 次 のように 発 言 している 正 直 な 話 次 の 映 画 のために( 漫 画 ナウシカ の) 連 載 を 中 断 する 時 は 内 心 ホッとして 机 から 逃 げ 出 したといった 方 が 正 確 でした あまり 大 きな 声 でいえること じゃないんです 次 の 映 画 が 終 わって しばらく 休 んでも ナウシカの 所 へもどるの はつらかった 結 果 的 に 四 回 も 中 断 しちゃった( 中 略 )だから 先 にもいったけれど ナウシカ から 逃 げるために 映 画 をやるみたいなところが 正 直 いってあったんで す 一 方 で 重 いものがあるから こっちで 軽 いのをやるというふうにしたわけではな いけれども たぶん ナウシカ を 書 き 続 けていなかったら 映 画 の 中 にもう 少 し 重 いものを 込 めようとしてジタバタしたのじゃないかと 思 うんです 15) このように 映 画 監 督 としての 華 々しいキャリアの 裏 面 で 密 教 のように あた かも 地 を 這 うがごとくに 続 けられていた 漫 画 ナウシカ が 終 わると それまで 二 13) 宮 崎 は 連 載 終 了 時 のインタビューで 書 き 始 めた 時 の 状 況 を いつでもやめていいと 決 め ていたので 先 のことを 何 も 考 えないで 書 くことができた そのうちなんとかなるだろう その 前 に 雑 誌 がつぶれてくれるだろう( 笑 )とか そういうふうに 言 いながら だましだましやってい た と 語 っている( 同 風 の 谷 のナウシカ 完 結 の いま 出 発 点 pp521 522. 初 出 1994) 14) 五 味 洋 子 は 漫 画 ナウシカ の 世 界 を トトロ 等 の 宮 崎 ブランドのイメージしかない 人 達 が 見 れば 目 をむきそうな 酸 鼻 を 極 めた 地 獄 絵 図 と 表 現 するが 本 質 を 衝 いた 極 めて 重 要 な 指 摘 であるといえる( 1995 浄 化 されてゆく 宮 崎 世 界 の 闇 コミックㆍボックス 98 ふゅー じょんぷろだくと p39) 15) 風 の 谷 のナウシカ 完 結 の いま p522ㆍ534.
28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つの 回 路 で 表 出 していた 思 想 を 彼 は 映 画 単 体 で 表 現 しなければならなくなっ た この 瞬 間 に 彼 にとっての 映 画 は 漫 画 ナウシカ の 苦 しさからの 一 時 的 な 逃 避 ㆍ 開 放 の 手 段 としての 意 味 を 失 い 16) 漫 画 ナウシカ で 格 闘 してきた 世 界 の 闇 の 側 面 を 以 後 は 映 画 にも 取 り 込 んでいく 必 要 が 生 まれた 漫 画 ナウ シカ 以 降 の 彼 の 映 画 は 善 と 悪 正 と 負 明 と 暗 といった 物 事 のポシティブな 部 分 とネガティブな 部 分 の 両 方 を 押 さえた 総 合 的 な 叙 述 にならざるを 得 ないこ とが 運 命 づけられたのである 総 合 的 な 叙 述 とは すなわち 世 界 を 描 くことであり 主 人 公 と 主 人 公 を 取 り 巻 く 世 界 との 関 係 性 を 描 くことである そして 通 常 我 々はその 関 係 性 の 体 系 化 さ れたかたちを 秩 序 とよぶ かくして90 年 代 以 降 の 宮 崎 アニメは いかに 子 ども 向 けや 娯 楽 性 を 標 榜 していても 否 応 なしに 世 界 構 造 や 秩 序 の 側 面 をその 内 部 に 組 み 込 まざるを 得 なくなった 17) あわせて スタジオジブリという 組 織 の 経 営 者 と しての 活 動 がこの 頃 から 本 格 化 したという 現 実 世 界 における 環 境 も もはや 宮 崎 に 単 なる 個 人 としての 発 想 ㆍ 活 動 にのみ 耽 溺 することを 許 さなくなった 18) 紅 の 豚 という 一 種 のモラトリアム 19) を 経 て 自 己 を 取 り 戻 した 彼 が かかる 状 況 下 で 本 格 的 に 難 問 に 取 り 組 んだのが もののけ 姫 であった 16) 宮 崎 は 別 のインタビューでも 次 のように 述 べている( 稲 葉 振 一 郎 1996 ナウシカ 解 読 ユー トピアの 臨 界 窓 社 p197 初 出 1994) 80 年 代 に 作 られた 映 画 群 と 漫 画 ナウシカ が 不 可 分 の 関 係 にあり むしろ 地 味 な 後 者 の 方 が 中 心 だったことがわかる 映 画 をやっている 時 は 肉 体 的 にも 精 神 的 にもきわめて 辛 いんですけど ナウシカ を 書 いているより 楽 ですね ナウシカ を 書 いていたおかげで 脳 天 気 な 映 画 を 作 れた んじゃないかなと 思 っているんですけどね 17) 叶 精 二 氏 によれば 宮 崎 は1994 年 のインタビューでこう 述 べていた 丸 ごと 知 りたい というようなところが( 高 畑 勲 監 督 と)どこか 似 ていましたよ 一 つの 街 の 成 り 立 ちとかね こういう 店 の 建 物 もそれから 住 んでいる 人 間 も 何 を 食 べているのかも どう いう 商 品 が 並 んでいるのか どういう 風 にそれを 仕 入 れるのか どういう 風 に 支 払 いをする のかとか そういうことまで 含 めて 分 からないと 分 かったことにはならないんじゃないかな 叶 氏 はこれを 文 化 人 類 学 的 視 点 で 作 品 世 界 を 構 築 するという 作 風 と 言 い 表 している ( 以 上 同 2001 イメージボードからの 飛 翔 p49からの 引 用 ) 18) 宮 崎 は 組 織 経 営 の 側 面 について 次 のように 述 べる( 風 の 帰 る 場 所 p129) 経 営 のことは 知 りません とか 組 織 のことは 関 係 ありません って 言 うわけにはいかな いです それはしょうがないことですよね そういう 面 倒 くさいことに 付 きあっていかな きゃ アニメーションって 作 れないんですから 作 りたいときだけ 山 から 降 りてきて 作 った らまた 風 のように 去 っていくっていうのはカッコいいですけど そうはいかないですから( 中 略 )そういうことはどっかで 面 倒 くさいと 思 うと 同 時 に 案 外 嫌 いじゃない 19) インタビュアーの 渋 谷 陽 一 氏 は 本 作 を 宮 崎 が 自 分 の 問 題 意 識 を 整 理 するために 撮 った 映 画 だと 指 摘 しているが 宮 崎 はこれを 肯 定 している( 同 前 p108)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29 第 2 節 もののけ 姫 の 問 題 構 造 しかしながら 独 自 の 世 界 をしっかりと 描 きながら そこに 生 きる 主 体 を 綺 麗 な 起 承 転 結 のシナリオに 従 わせることは 容 易 ではない なぜなら 精 度 を 増 した 架 空 世 界 は もはやただの 操 作 対 象 には 留 まり 得 ず それ 自 体 の 規 範 で 動 き 始 め るからである 宮 崎 の 盟 友 で 彼 の 軌 跡 を 旁 らで 見 続 けてきた 高 畑 勲 は 同 作 の 公 開 直 前 に 次 のように 指 摘 していた 最 近 の 作 品 では 啓 示 的 象 徴 的 な 世 界 構 造 を 具 体 的 現 実 的 に 描 出 することに 力 点 がかかり ますます 緻 密 の 度 を 加 えている このまま 行 くと アニメーション 作 品 で も 人 物 像 やその 行 為 はともかく ストーリーに 関 しては その 世 界 構 造 に 足 を 取 ら れて いままでの 彼 の 理 想 主 義 や 平 衡 感 覚 を 突 破 せざるを 得 なくなる 20) 理 想 主 義 が 注 がれる 場 所 は ハッピーエンドに 至 る 物 語 の 展 開 ではなく 構 造 的 な 物 語 世 界 それ 自 体 の 方 に 移 ってきているのである だから たとえあらす じが 破 綻 しているように 見 えても それは 決 して 世 界 観 の 破 綻 を 意 味 せず むし ろその 逆 ( 精 緻 化 ゆえ)なのである 21) ならば 作 品 の 軸 は 構 造 的 世 界 における 主 体 の 歩 みそれ 自 体 となり 焦 点 はそこでの 主 体 が 十 分 に 活 力 と 魅 力 に 溢 れた 存 在 であるか 否 かにかかってくることになるだろう その 点 で しかし もののけ 姫 は 未 だ 完 璧 ではなかった 本 作 品 は 漫 画 ナウシカ の 主 題 を 一 本 の 映 画 で 示 すという 難 問 に 挑 んだ 大 作 であったが あの 複 雑 で 長 大 な 物 語 を 同 じ 方 法 で2 時 間 余 の 映 像 に 収 めるのは やはり 聊 か 無 理 があったようである 実 際 のところ 本 作 は 壮 大 な 叙 事 詩 として 絶 賛 されな がらも その 一 方 ではどこか 消 化 不 良 で 血 の 通 わない 不 完 全 燃 焼 感 も 残 すことと なった 世 界 の 構 造 を 描 こうとした 結 果 本 作 にすでに 主 人 公 中 心 主 義 からの 決 別 が 生 じていた 点 は 批 評 家 の 切 通 理 作 氏 が タタラ 場 ともののけの 仲 裁 役 に 回 ったアシタカの 存 在 感 は 次 第 に 薄 れ 森 の 神 ㆍシシ 神 の 描 写 が 誰 の 主 観 で もない 映 像 としてえんえんと 続 く 22) と 指 摘 する 通 りである もののけ 姫 は 20) エロスの 火 花 ( 出 発 点 p578) 21) 宮 崎 の 後 期 作 品 に 対 する 少 なくない 批 評 が この 点 を 混 同 しているように 思 われる つまり ス トーリー 至 上 主 義 の 観 点 から その 展 開 がわかりやすい 起 承 転 結 の 型 を 外 れていることをもっ て あたかも 映 画 自 体 が 破 綻 しているかのように 受 けとめてしまっているのである 22) 同 宮 崎 駿 の 世 界 p290.
30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雑 多 な 他 者 が 並 存 する 世 界 をリアルに 描 いたがために 皮 肉 にもかえって 主 人 公 の 主 体 性 や 位 置 づけを 弱 めてしまったのである 当 初 は アシタカせっ 記 であった 本 作 の 標 題 は 興 業 に 責 任 を 負 う 鈴 木 敏 夫 プロデューサーによって 宮 崎 に 無 断 で もののけ 姫 に 変 えられた 23) こ れも アシタカとサン(もののけ 姫 )のどちらが 物 語 の 軸 かという 点 に 関 係 者 間 の 明 確 な 共 通 理 解 がなかったことを 意 味 しており 主 人 公 の 位 置 づけの 不 確 かさを 示 唆 していると 言 えよう よって 本 作 では 主 体 と 世 界 が 正 面 から 絡 み 合 う 様 とそこ に 表 れる 秩 序 をいかに 描 くかという 課 題 は まだ 未 解 決 であった 24) では なぜそのようなことが 起 こったのか 原 因 は 主 人 公 の 貴 種 性 にあったと 考 えられる これは しばしば 社 会 階 層 的 な 貴 族 性 と 身 体 的 な 卓 越 性 として 表 れ るものである 宮 崎 アニメの 主 人 公 は 特 別 な 地 位 や 能 力 を 備 えていることが 多 く 25) もののけ 姫 の 主 人 公 アシタカもエミシの 末 裔 という 血 統 と 強 い 戦 闘 力 を 併 せ 持 つ 存 在 であり 漫 画 ナウシカ の 設 定 を 忠 実 に 継 いでいたといえ る 26) しかし 漫 画 ナウシカ のような 壮 大 な 叙 事 詩 とは 異 なり 一 本 の 映 画 においてはこの 点 は 逆 に 主 人 公 の 魅 力 を 減 ずる 皮 肉 をもたらした なぜか? 主 人 公 が 強 すぎて 死 ぬ 可 能 性 が 想 像 できないため どんな 危 機 でも どうせ 大 丈 夫 だろう というある 種 の 安 心 感 が 働 き 観 客 から 良 質 の 緊 張 感 を 奪 ってしまう からである アシタカは 並 み 外 れた 戦 闘 力 をもっているので 生 身 の 人 間 の 視 23) 鈴 木 敏 夫 (2013) 風 に 吹 かれて 中 央 公 論 新 社 p145. 1995 年 の 企 画 書 の 時 点 では 宮 崎 自 身 は 題 名 を もののけ 姫 あるいは アシタカせっ 記 としている( 同 出 発 点 p419) せっ 記 の せっ の 部 分 は 草 冠 の 下 に 耳 を 横 に2つ 並 べた 字 である 24) 鈴 木 敏 夫 は もののけ 姫 と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の 関 係 性 について 次 のように 述 べる ( 風 に 吹 かれて pp195 196) もののけ 姫 は 宮 崎 駿 の 集 大 成 とかって 嘘 ばっかりですよね だって とてつもない 大 きなテーマを 抱 えて それを 処 理 しきれない まるで 新 人 監 督 のようなつくり 方 そのいら 立 ちが 全 編 から 漂 っているでしょう いわゆる 作 劇 としては 熟 練 した 人 のつくるやり 方 じゃ ない いら 立 ちが 観 客 をも 巻 き 込 んだような 作 品 だと 僕 は 思 うんですよ 集 大 成 は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のほう( 中 略 )だから もののけ 姫 は 本 当 繰 り 返 しいいますけれど 集 大 成 じゃない あれは とてつもないテーマを 抱 えて それを 具 体 化 できない 新 人 監 督 のあ がきみたいなものがそのまま 映 画 になって それを 観 客 が 共 有 してくれた そんな 映 画 じゃないかなっていう 気 がしています 25) 権 力 への 反 発 を 表 明 しながら 一 方 では 学 習 院 大 学 卒 業 という 経 歴 ももつ 宮 崎 は 漫 画 ナウ シカ を 書 き 進 めていくなかで 統 治 者 だから 悪 被 支 配 層 だから 善 という 前 提 は 捨 てたと 語 っている( 風 の 谷 のナウシカ 完 結 の いま p530) 26) ナウシカは 風 の 谷 の 族 長 ジルの 娘 であり その 戦 闘 力 が 秀 でていたことも 漫 画 版 で 展 開 され る 土 鬼 連 合 軍 との 熾 烈 な 戦 闘 その 他 で 描 かれる 通 りである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31 点 に 支 えられていない 描 写 は 焦 点 を 結 ば ず 作 品 自 体 が 世 界 も 自 分 も 汚 れ ており かといって 切 迫 感 もないという なんともメリハリの 欠 いた 映 画 になって しまう 27) というわけである では 中 心 性 の 喪 失 は 世 界 自 体 を 色 褪 せさせてしまうのか 主 人 公 の 主 観 か ら 世 界 構 造 の 叙 述 への 意 識 の 力 点 のシフトは 主 人 公 の 魅 力 そのものを 失 わせ てしまうのか そうではない それがわかるのは 主 人 公 が 万 能 ではなく 逆 に 微 力 な 存 在 であった 場 合 である そして その 設 定 が 実 現 した 作 品 こそが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であった 28) アシタカの 場 合 キーワードの 生 きろ に 象 徴 的 なように 彼 のメッセージ はあくまで 調 停 者 から 周 囲 への 呼 びかけであった 事 実 彼 は 曇 りなき 眼 で 目 の 前 に 起 こっていることを 見 届 けはするものの 実 際 に 愛 憎 渦 巻 く 現 実 世 界 を 主 体 として 生 きるわけではなく 彼 自 身 はどこまでいっても 余 所 者 であり 客 人 なのであり 厳 密 には 世 界 の 中 をあくまで 潜 り 抜 けているだけなのであ る もちろん 彼 自 身 にも 深 刻 な 苦 しみはあるのだが それはむしろ 世 俗 や 共 同 体 から 弾 き 出 されてあてどなく 彷 徨 う 羽 目 になった 点 にこそある ならば 本 当 に 世 界 の 中 で 生 きることの 喜 びと 苦 悩 は 実 はこの 段 階 ではまだ 現 れておらず 彼 の 呼 びかけに 応 じて 実 際 に 生 きる 主 体 の 営 為 の 在 りようこそが 未 発 の 課 題 と して 残 されていたということになるだろう 五 味 洋 子 氏 はこの 関 係 性 について もののけ 姫 が 発 した 生 きろ の 言 葉 の 先 にある ではどう 生 きるかを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は 示 していると 思 う 自 分 なりに 懸 命 に 一 途 に 簡 単 だけれ ど 難 しい 道 と 述 べている 29)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の 主 人 公 である 荻 野 千 尋 は 平 凡 な 一 人 の 少 女 であ る 宮 崎 はその 設 定 について 美 人 とか 特 に 才 能 があるとか 族 長 の 娘 に 生 まれ るとかね 空 を 飛 べるとかそんなのがなくても そのくらいの 力 をみんな 持 って るっていう そういう 映 画 を 作 りたかった と 語 っている 30) つまり 本 作 は 族 長 (ナウシカㆍもののけ 姫 )や 王 族 (ラピュタ)や 魔 法 使 い( 魔 女 の 宅 急 便 )や 撃 墜 王 ( 紅 27) 切 通 理 作 宮 崎 駿 の 世 界 p290. 28) インタビュアーの 渋 谷 陽 一 氏 は 本 作 を より 一 層 ナウシカ の 最 後 の 世 界 観 を 進 め た 作 品 で もののけ 的 なる 世 界 観 をより 進 化 させつつ より 大 衆 性 を 持 った と 表 現 している ( 風 の 帰 る 場 所 p223ㆍ341) 29) 五 味 洋 子 (2001) 愛 しい 小 さな 友 へ 別 冊 COMIC BOX vol.6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千 尋 の 大 冒 険 ふゅーじょんぷろだくと p25. 30) 風 の 帰 る 場 所 p223.
3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の 豚 )といった 特 殊 な 属 性 を 一 切 もたない 特 権 化 されておらずしかしそれゆえ に 普 遍 的 な 主 体 が 自 身 を 取 り 囲 む 世 界 にいかに 対 峙 していくかというテーマを 描 いた 作 品 であったといえよう 第 2 章 善 悪 の 混 濁 する 世 界 第 1 節 悪 を 消 し 去 ることの 不 可 能 性 : 1 空 間 的 に では 宮 崎 駿 が 漫 画 ナウシカ から 継 承 し もののけ 姫 を 経 て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で 結 実 させた 世 界 は いかなる 特 徴 を 持 っていたのか 結 論 から いうと それは 勧 善 懲 悪 の 否 定 であった 宮 崎 は 映 画 の 趣 旨 説 明 で 本 作 の 骨 子 と 舞 台 について 正 邪 の 対 決 が 主 題 ではなく 善 人 も 悪 人 もみな 混 じり 合 っ て 存 在 する 世 の 中 だと 述 べる 31) 善 悪 がはっきり 分 かれた 単 純 な 筋 書 きに 安 心 して 身 を 委 ねるような 話 ではない という 宣 言 である こうした 感 覚 が 本 作 で 初 めて 登 場 した 思 いつきではなく 彼 の 歴 史 観 を 背 景 に 以 前 から 熟 成 されてきた テーゼであったことは かつて もののけ 姫 に 関 して 僕 は 侍 と 農 民 だけの 支 配 と 非 支 配 っていう そういった 歴 史 観 だけで 映 画 を 作 ることに 我 慢 ならなかっ た と 述 べていた 点 にも 明 らかであろう 32) しかも 宮 崎 は 紅 の 豚 公 開 直 前 インタビューでは 次 のようにも 語 っていた 確 かに 善 いことと 悪 いことがある 善 いことをするということもある だけど 善 いことを した 人 が 善 い 人 ではない 善 いことをした というだけなんです 次 の 瞬 間 には 悪 いこともする それが 人 間 だと 思 わないと あらゆる 判 断 を 間 違 える 33) 善 人 と 悪 人 は ただ 混 在 しているだけではない 混 在 しているだけなら 両 者 を 丹 念 に 選 り 分 ければいいのかもしれないが 問 題 はそう 単 純 ではない 実 は 一 人 の 人 間 が 善 と 悪 のどちらであるかすら 固 定 的 ではなく 同 じ 人 物 が 場 合 によって 善 にも 悪 にもなる 私 もあなたも 時 には 善 人 であり 時 には 悪 人 であ 31) 不 思 議 の 町 の 千 尋 この 映 画 のねらい 本 稿 では 斎 藤 良 一 ㆍ 今 西 千 鶴 子 ㆍ 加 藤 ちた かㆍ 鈴 木 隆 詩 ㆍ 徳 木 吉 春 (2001) ロマンアルバム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徳 間 書 店 p74から 引 用 した( 初 出 は1999) 32) 風 の 帰 る 場 所 p158. 33) 風 の 谷 のナウシカ 完 結 の いま p528.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33 る それが 人 間 だというのである 宮 崎 はまた 生 き 物 っていうのは 動 態 だか ら と 述 べた 上 で 同 じ 人 間 でもね ものすごく 愚 劣 な 瞬 間 があったり それか らなんかやたらに 高 揚 してね あるいは 実 に 思 いやりに 満 ちたり そういうふうに 揺 れ 動 いてる とも 表 現 している 34) よって 彼 は 属 性 だけを 根 拠 に 登 場 人 物 35)の 評 価 を 固 定 したり ポジティブ な 側 面 ( 表 )とネガティブな 側 面 ( 裏 )を 独 立 した 別 個 のものと 捉 えることを 嫌 う す なわち 究 極 的 には2つの 要 素 は 切 り 離 すことが 可 能 だという 考 え 方 を 否 定 す る そのことは 本 音 と 建 前 という 命 題 に 対 して 本 音 と 建 前 とかっていう 論 争 の 不 毛 さはね 動 態 なのに 本 音 と 建 前 っていう 固 定 化 したものに 分 けるか ら 36) と 述 べていることからも 窺 える 善 と 悪 は 社 会 に 混 在 しているし 同 一 主 体 の 中 ですら 両 要 素 は 同 居 しており 場 合 に 応 じてどちらが 表 出 するかはわから ない 勧 善 懲 悪 のドラマや 小 説 のように 善 悪 を 固 定 して 安 定 した 正 義 の 立 ち 位 置 に 浸 ることは 二 重 の 意 味 で 否 定 されるのだ 第 2 節 悪 を 消 し 去 ることの 不 可 能 性 : 2 時 間 的 に 悪 を 消 し 去 ることができないのは 空 間 的 な 意 味 だけの 話 ではなかった もし 時 間 さえかければ 悪 を 善 に 変 えることが 不 可 能 ではないのならば たとえ 今 は 善 悪 が 混 在 していたとしても これから 徐 々に 善 が 領 域 を 広 げていくことによって いずれは 一 元 的 なユートピアが 実 現 できるかもしれない しかし 宮 崎 駿 は 将 来 の 展 望 としても 悪 の 廃 絶 には 懐 疑 的 であった 本 人 によれば 1990 年 代 前 半 に 現 実 の 世 界 情 勢 に 関 して 彼 が 最 もショックを 受 けたのは ユーゴスラビア 内 戦 の 推 移 であった 彼 はその 時 の 様 子 を 次 のように 述 べている あれだけひどいことをやってきた 場 所 だから もう 飽 きているだろうと 思 ったら 飽 き てないんですね 人 間 というものは 飽 きないものだということがわかって 自 分 の 考 えの 甘 さを 教 えられました( 中 略 )どうもちょっと 自 分 の 歴 史 認 識 が 決 定 的 に 甘 かっ たとは 思 い 知 らされました 37) 34) 風 の 帰 る 場 所 p61. 35) ただし 人 間 でない 場 合 も 多 い 36) 風 の 帰 る 場 所 p69. 37) 風 の 谷 のナウシカ 完 結 の いま pp528 529.
34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もう 懲 りてんじゃないかって 思 ってたんですよね つまり 僕 らが 戦 争 に 懲 りてるよう に でも やっぱり 懲 りてないんですね 懲 りてるんだけど 懲 りてない それについ ては 懲 りてるけども 新 しい 憎 悪 もちゃんと 生 産 されるわけだから 我 々も 同 じような ことすぐやるなっていう 感 じも 含 めて ちょっとうんざりしたですね 38) 東 西 冷 戦 がようやく 終 わった 直 後 に 民 族 対 立 から 凄 惨 な 内 戦 が 生 じて 泥 沼 化 したことに 宮 崎 は 深 い 絶 望 感 を 味 わったのである そして これが 単 にユー ゴスラビアの 人 々だけの 問 題 ではなかったことは 彼 が 自 分 も 含 めて 人 って いうのは 愚 かなんだなあっていう 人 間 が 考 えてるより 人 間 は 複 雑 で 同 時 にそ んなに 賢 くないんだなっていうことをうんざりするほど 思 い 知 りました と 言 ってい ることからも 明 らかである 39) 要 するに 彼 の 嘆 きは 人 類 自 体 に 向 けられたもの であった 冷 戦 を 生 き 延 びた 人 類 は 昔 から 繰 り 返 されてきたはずの 愚 かな 民 族 対 立 にまた 陥 るのか と しかしながら こうした 絶 望 に 直 面 しながらも 重 要 なのは 宮 崎 が 将 来 も 悪 が なくならないという 事 実 を むしろある 意 味 では 肯 定 的 に 解 釈 していたことであ る 彼 は 自 身 の 思 想 が ニヒリズムの 理 想 主 義 ではないかと 指 摘 された 際 に なんかから 開 放 されて 開 放 されきったときに 人 が 自 立 的 になにかをやってい けるのか 白 昼 の 倦 怠 しか 待 ってないんじゃないかっていうね その 物 理 的 な 迫 害 とか 物 質 的 な 窮 乏 がないと 人 というのは 結 局 は 健 康 に 生 きられないのかっ ていうね などと 答 えている 40) 悪 はなくならないと 諦 めつつ しかし 実 はむしろ その 方 が 人 間 は 健 康 に 生 きていけるのではないか 逆 にいえば 障 害 や 困 難 が 全 くない 世 界 では 人 間 は 人 間 でなくなるのではないか と 思 考 が 展 開 し ている つまり 宮 崎 は 発 展 段 階 的 に 人 間 社 会 が 一 方 向 に 良 くなっていくことは ないと 判 断 した 上 で 41) しかしそれをある 種 の 真 理 として 冷 徹 に 受 けとめたといえ よう 人 間 存 在 自 体 が そうした 制 約 性 のもとに 成 り 立 っているという 理 解 であ る 42) この 世 界 で 悪 は 善 と 並 存 しているし それはたぶんこの 先 も 変 わらない 38) 風 の 帰 る 場 所 p102. 39) 同 前 pp100 101. 40) 同 前 p67ㆍ68. 41) これは 発 展 段 階 説 の 否 定 であり 宮 崎 は 漫 画 ナウシカ の 連 載 の 最 後 のあたりで かつて 信 奉 していたマルクス 主 義 を はっきり 捨 てました と 明 言 している( 風 の 谷 のナウシカ 完 結 の いま p529) 42) 影 を 取 り 去 った 世 界 は 世 界 ではないという 理 解 は 人 間 自 身 にも 当 てはまる 宮 崎 は 漫 画 ナ ウシカ の 最 終 盤 で 人 類 を 私 達 のように 凶 暴 ではなく おだやかでかしこい 存 在 へと 作 り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35 周 囲 や 未 来 から 負 の 側 面 を 閉 め 出 すことは 恐 らくは 原 理 的 に 不 可 能 なのである こうした 観 点 に 立 つことで 世 界 や 時 代 を 安 易 に 善 と 悪 に2 分 する あるいは 自 己 ( 主 役 )と 他 人 ( 脇 役 )に2 分 することが 不 可 能 になり 善 悪 が 並 存 する 状 況 を 正 面 から 受 けとめる 素 地 ができる そして 実 はこれこそ 漫 画 ナウシカ か ら 受 け 継 がれた 哲 学 の 核 心 部 分 エッセンスであった なぜなら 同 作 の 最 終 盤 でナウシカは 生 命 は 光 だ と 述 べる 墓 所 の 主 ( 旧 人 類 の 創 造 したスーパー コンピューター)に 対 し 生 命 は 闇 の 中 のまたたく 光 だと 言 い 直 して 人 類 を 改 造 することで 予 定 調 和 的 にユートピアを 実 現 する 計 画 を 破 壊 するのだから 43) 光 は 光 だけでは 光 たり 得 ず 闇 というもう1つの 対 照 的 な 要 素 と 一 対 の 関 係 をな すことによって 初 めてその 存 在 は 本 当 の 意 味 を 持 つのである 第 3 節 スタジオジブリとしての 湯 屋 そして こうした 世 界 観 は 机 上 の 空 論 ではなく 現 実 世 界 の 反 映 と 見 なされて いた 宮 崎 は 映 画 は 誰 かのために 作 るんだけど それだけじゃなくて 自 分 も 納 得 しなきゃ 駄 目 なんだって 思 ったんですよ だから ジブリで 働 くっていう 話 だと 自 分 でも 納 得 する と 述 べて 44)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の 舞 台 である 湯 屋 をスタジオジブリに 見 立 てている またそこの 女 主 人 の 湯 婆 婆 は 作 中 世 界 の 秩 序 を 形 作 っている 人 物 であるが 宮 崎 は 彼 女 を 自 らと 重 ね 合 わせて 次 のように 述 べている ジブリというのは 僕 は 狭 いスタジオだな って 言 ってるんだけど 中 は 映 画 の 湯 屋 のように 複 雑 になってますし 鈴 木 敏 夫 プロデューサーはでかい 声 出 します し そういう 僕 も 何 甘 い 夢 見 てんだよ ってでかい 声 出 す そういう 所 ですね そ こで 働 かないことにはどうしようもない 立 場 の 子 が 現 れたら どういう 目 に 遭 うんだろう とリアルに 考 えてみた 時 に この 物 語 が 出 来 てきたんです 45) 悪 役 の 湯 婆 婆 という 経 営 者 ですね お 風 呂 屋 さんの それも 本 当 は 悪 役 という 訳 替 える 計 画 の 存 在 をナウシカから 聞 かされたヴ 王 (トルメキア 国 王 )に そんなものは 人 間 とはい えん と 言 わしめている( 同 1995 風 の 谷 のナウシカ 7 徳 間 書 店 p211) 43) 同 前 p201. 44) 宮 崎 駿 制 作 報 告 会 (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につき 2001 年 3 月 26 日 ) 別 冊 COMIC BOX vol.6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千 尋 の 大 冒 険 p35. 45) 同 前 p33.
36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じゃなくて 経 営 は 大 変 だし 子 育 ての 悩 みも 抱 えてるし 自 分 の 欲 望 もあって そういうものに 苦 しめられる そういうお 婆 ちゃんなんです まあジブリで 言 うと プ ロデューサーの 鈴 木 さんがそれにぴったりかどうかね 僕 の 方 が 顔 がでかいですか ら おまえに 似 ている という 話 もあるんですけど( 中 略 ) 鈴 木 プロデューサーを 初 め 僕 も 凶 暴 になることはしょっちゅうありますし わめき 散 らすし 頭 も 湯 婆 婆 のよう にでかいですし 若 いスタッフにとってはそういう 自 分 の 爺 さんの 年 の 人 間 が 血 相 変 えて 怒 鳴 ったら 恐 いですからね で それだけで 十 分 な 悪 役 になると 思 うの で こういう ジブリをモデルにした 映 画 を 作 りつつある 訳 です 46) このように スタッフが 権 力 者 としての 宮 崎 ㆍ 鈴 木 = 湯 婆 婆 を 恐 れるという 状 況 は しかし 時 間 さえ 経 てば 改 善 するというようなものでもなかった 47) スタッフの 中 には むしろ 入 社 後 数 年 を 経 た 後 に 困 難 に 直 面 するケースも 発 生 していた 宮 崎 は 次 のようにも 述 べて ジブリという 現 実 の 職 場 でも 前 述 した 発 展 段 階 は 存 在 しないことを 認 めている 精 神 的 に 極 めて 不 安 定 になったりして 辞 めていく 子 も 随 分 いる 訳 ですよ そういう のを 見 ると 結 構 こんな 狭 い 世 界 でも ここで 自 分 の 存 在 を 他 人 に 認 めさせて 自 分 の 存 在 意 義 を 感 じて 生 きていくのは 手 強 いことなんだっていうのは 感 じざるを 得 ない( 中 略 ) 健 気 で 生 真 面 目 で 優 しい 子 たちが 来 てくれるんだけど それが3 年 5 年 経 っていくうちになんか 辛 くなってたりですね 色 々 起 こる それを 見 てると やっぱりスタジオの 中 に 問 題 があると 言 って 簡 単 に 切 り 捨 てるより この 世 の 中 で 生 きていくということがただ 事 じゃなくて 自 分 の 中 から 相 当 の 力 を 出 していかなけれ ばならない 部 分 があるというふうに 思 い 立 ったのです だから 悪 役 を 倒 すとかい う 話 じゃなくて 悪 役 にしても 普 通 の 人 間 なんです 48) 重 要 なのは 宮 崎 が 他 者 に 対 する 自 らの 悪 の 側 面 あるいは 自 分 自 身 が 他 者 でもある 点 を 自 覚 していることである( 主 観 ではどれほど 善 き 人 たろうと しても 相 手 の 身 からすれば 抑 圧 的 な 存 在 になっていることはある) しかし 同 時 に それを 自 分 の 努 力 次 第 でなくせる 一 種 の 逸 脱 にすぎないとも 考 えていな いことである これを 単 なる 自 己 弁 護 と 解 釈 してはならないだろう 問 題 を 自 らの 46) 同 前 p34ㆍ38. 47) 時 間 が 問 題 を 解 決 するなら それは 通 過 点 となり 構 造 とは 見 なされない 48) 宮 崎 駿 制 作 報 告 会 (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につき 2001 年 3 月 26 日 ) p35ㆍ38. 2001 年 6 月 18 日 に 行 われた 別 のインタビューも 参 照 ( 別 冊 COMIC BOX vol.6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千 尋 の 大 冒 険 p138)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37 道 徳 性 の 次 元 のみに 矮 小 化 させて 論 じることは いっけん 個 人 的 責 任 感 の 表 れ であるようで 実 は 社 会 の 構 造 自 体 から 目 を 逸 らす 免 罪 符 として 機 能 する 可 能 性 がある そこでは 問 題 の 構 造 的 根 深 さが 個 人 や 組 織 に 求 められる 反 省 の 深 さへと 誤 変 換 されてしまう それではいけないというのが 宮 崎 の 判 断 である スタジオの 経 営 者 として 湯 婆 婆 と 同 じ 立 場 にいる 自 分 (やプロデューサー)は 組 織 の 維 持 や 経 営 にも 配 慮 せねばならず 人 間 的 良 心 だけを 意 識 していればい いわけではない 49) 彼 はあるインタビューで 商 業 的 成 功 という 要 請 にも 配 慮 せ ねばならないことが 逆 に 生 き 甲 斐 でも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 問 われた 際 に それ を 認 めた 上 で いかに 職 場 を 健 康 な 状 態 に 保 つかってことで 怒 鳴 る 奴 には 怒 鳴 ったし チャンスを 与 える 奴 にはチャンスを 与 えたし 追 い 出 す 奴 は 追 い 出 すってね 可 哀 相 なこともずいぶんやってきました 50) と スタッフの 解 雇 なども 行 ってきたことを 告 白 している こうした 事 実 は たとえ1つの 集 団 に 所 属 していても 成 員 同 士 が 完 全 に 一 体 化 することは 不 可 能 で どうしても 一 定 の 軋 轢 や 矛 盾 は 存 在 し 続 けることを 意 味 する 51) それも 状 況 的 ㆍ 偶 然 的 にではなく 構 造 的 ㆍ 必 然 的 にである つま り どれだけ 親 密 で 家 族 のような 集 団 でも 内 部 のアイデンティティは100%は 統 合 できない 文 化 人 類 学 の 概 念 を 援 用 すれば どれほど ハイコンテクスト に 見 える 集 団 にも 必 ず ローコンテクスト の 側 面 は 残 り 続 けるのである 52) 組 織 の 経 営 者 として 非 情 な 判 断 も 下 してきた 宮 崎 は 同 じ 会 社 の 人 間 も 仲 間 ではあるけれども 見 知 らぬ 異 人 のような 存 在 になってしまうことがあるわけで それといかにつきあうか を 課 題 にしていた 53) ジブリという 組 織 では 自 分 も 49) 宮 崎 はこうした 事 情 について 湯 婆 婆 には 湯 婆 婆 のストーリーというか 大 人 の 生 活 がある はずですから プロデューサーはね 夜 な 夜 ななにをやってるか 知 りませんけども なんか 出 か けていくしね なんか 難 しい 作 業 をしていたらしくて グッタリ 疲 れて 帰 ってくるし と 述 べている ( 風 の 帰 る 場 所 p211) 50) 風 の 帰 る 場 所 p149. 51) 会 社 の 構 成 員 同 士 が 疑 似 家 族 となり 100%の 忠 誠 と 引 き 替 えに 事 実 上 の 運 命 共 同 体 として 身 分 保 障 や 生 活 保 障 を 行 ってきたのが 戦 後 日 本 経 済 の 核 をなした 終 身 雇 用 制 度 であろう 宮 崎 がここで 述 べているのは その 動 揺 ( 不 可 能 性 )についてともいえる 52) 日 本 社 会 を 例 にとれば 以 心 伝 心 を 根 拠 に 風 呂 ㆍ 飯 ㆍ 寝 る の 単 語 だけで 動 く 家 庭 は 家 父 長 制 の 遺 構 に 依 拠 した ハイコンテクスト の 小 社 会 といえるだろう こうした 環 境 では 言 葉 の 持 つウェイトは 最 小 化 されるが 言 うまでもなく 宮 崎 が 望 む 社 会 の 有 り 様 はこれとは 正 反 対 の 地 平 にある 53) 万 物 生 命 教 の 世 界 再 び ( 宮 崎 駿 2008 折 り 返 し 点 岩 波 書 店 初 出 2002) p289. これは 宮 崎 と 対 談 した 宗 教 学 者 の 山 折 哲 雄 氏 の 発 言 である
38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悪 なのかもしれない 同 時 に 世 間 で 悪 人 と 言 われる 人 も 実 は 自 分 たちと 同 じ く 一 方 では 世 界 の 主 役 だったり 善 人 でもあるのではないか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は このように 善 と 悪 の 空 間 ㆍ 時 間 両 面 での 未 分 化 という 真 理 を スタジ オジブリをモデルに 反 映 させたことで リアルだけど 白 黒 のつかない 曖 昧 なグ レーゾーンを 作 中 世 界 の 最 も 基 本 的 な 前 提 に 抱 えこむこととなった 第 3 章 千 尋 と 契 約 の 世 界 第 1 節 グレーゾーンへのこだわり ここまでの 考 察 で 明 らかにしてきたように 漫 画 ナウシカ 以 後 の 宮 崎 が 映 画 作 りの 際 にジブリブランドを 単 純 化 した 陽 性 イメージからの 脱 却 を これまで 以 上 に 強 く 意 識 したことは 間 違 いない それは 僕 の 映 画 がやっぱりヒューマ ニズムだと 思 ってる 人 がいるんですけどね( 笑 ) それは 勝 手 にしろと 思 うしかな い だけど 僕 自 身 はヒューマニズムでは 作 った 記 憶 がないです という 発 言 54) からも 容 易 に 読 みとれる 彼 は そういう 居 心 地 のよいところに 余 計 なことは 忘 れて 引 きずり 込 みたいと 思 っている 人 が 多 いことは 確 か とした 上 で だい ぶ それで 商 売 やってきましたからね とまで 述 べている 55) しかし 注 意 すべきは 世 界 から 負 ( 悪 )の 要 素 を 消 すことはできないことを 認 め たとしても そのことによって 正 ( 善 )の 要 素 やそこに 向 かおうとする 意 思 までもが 否 定 されるべきではないことを 宮 崎 がかなり 執 拗 に 訴 えている 点 である 彼 は 世 界 に 陰 影 が 存 在 することを 認 めつつも くだらないだけになっちゃう ことに 対 しては それじゃいけない と 明 確 に 拒 絶 している 56) 宮 崎 は 次 のように 言 う ただ あんまりくだらないから くだらなくても 本 来 はこうじゃなきゃいけないな と 思 ってるのをなくしちゃうと( 中 略 ) 分 けた 途 端 にねえ それは 最 低 になりますよ だって 俺 はスケベだ って 言 った 途 端 になにが 始 まるかっていったら 人 類 は みんなスケベだ っていう なにが 起 こる? なにも 起 こらないよね( 笑 ) 57) 54) 風 の 帰 る 場 所 p76. 55) 同 前 p173ㆍ172. 56) 同 前 p69. 57) 同 前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39 ここで 述 べられているのは 世 の 中 には 綺 麗 事 では 済 まないくだらなさが 厳 然 と 存 在 することを 認 めた 上 で しかしそれを 根 拠 にただちに 綺 麗 事 を 全 否 定 したり 汚 濁 のみが 世 界 の 絶 対 的 な 真 理 なのだと 鬼 の 首 を 取 ったみたい に 声 高 に 叫 ぶような 振 る 舞 いは 論 理 の 飛 躍 だし 最 低 だということである 上 の 文 章 は 前 に 述 べた 本 音 と 建 前 について 述 べられたものだが この 関 係 は 理 想 と 現 実 という 言 葉 に 置 き 換 えてもいいだろう 両 者 の 関 係 において も 宮 崎 は 僕 は 理 想 のない 現 実 主 義 者 になりたいと 思 ってる 人 間 じゃないです から そういうふうになるつもりは 毛 頭 ありません と 述 べている 58) また 彼 は 別 のTVの 取 材 に 対 しても 理 想 を 欠 いた 現 実 主 義 を それは 最 低 ってことだか らね と 吐 き 捨 てるような 口 調 で 否 定 している 59) ここには 宮 崎 のリアリズム 観 が 見 える 彼 は 思 想 としてのリアリズムを 現 状 追 認 主 義 と 区 別 した 上 で 次 のように 冷 徹 な 現 実 感 覚 とより 良 い 現 実 を 目 指 す 理 想 主 義 の2つを 共 に 同 居 させるよう 訴 えている リアリズムっていうのは 僕 らが 一 番 不 得 手 な 部 分 なんですよ 観 念 的 に 見 てくのは ね 自 民 党 も 観 念 的 に 見 てるわけで そういうことについては この 民 族 は 比 較 的 簡 単 に 手 に 入 れるんだけど 人 間 に 対 する 見 方 も 含 めて 本 当 のリアリズムを 手 に 入 れるのは そう 簡 単 にはいかないだろうと 思 うんだけど そういうリアリズムの 方 向 で やっていこうっていう ただ 何 度 も 言 いましたように 理 想 のない 現 実 主 義 ってい うのはもううんざりだから その 点 ですね 60) 宮 崎 は 上 っ 面 の 観 念 主 義 を 否 定 した 上 で 理 想 のない 現 実 主 義 も 本 当 のリアリズム ではないと 考 える 観 念 を 追 求 すべき 理 想 ( 善 ) 現 実 を 世 界 にお ける 陰 影 の 側 面 ( 悪 ) と 言 い 換 えれば 2つが 密 接 不 可 分 で 1 後 者 を 欠 く 前 者 が 絵 空 事 に 過 ぎないのと 同 様 2 前 者 を 欠 く 後 者 もまたいびつで 不 完 全 なこと は 第 2 章 で 確 認 した 彼 の 発 言 からも 明 らかである 我 々はとかく 1には 敏 感 でいながら2を 具 体 的 に 実 感 ㆍイメージすることに 鈍 感 になりがちだが 上 記 の 対 構 造 を 土 台 に 宮 崎 がまさにこの 点 に 執 着 していることは 特 筆 すべきである 繰 り 返 しになるが 千 と 千 尋 制 作 時 点 での 宮 崎 の 世 界 観 は 善 ( 光 )と 悪 58) 同 前 pp100 101. 59) (2009) 宮 崎 駿 の 仕 事 (NHKエンタープライズ DVD 作 品 )での 発 言 本 作 は2007 年 と2008 年 にNHKで 放 送 された 番 組 を 映 像 作 品 化 したもの 60) 風 の 帰 る 場 所 pp111 112.
40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 影 )を 共 に 世 界 を 形 作 る 本 質 的 要 素 と 認 めた 上 で ジブリという 現 実 体 験 を 踏 ま えながら 2つをあくまで 対 等 の 両 存 関 係 に 置 き 続 けることを 軸 としており 焦 点 は そうした 曖 昧 さの 下 で 主 体 がいかに 倫 理 を 保 ち 続 けられるかという 点 にあっ た つまり 一 言 でいえばグレーゾーンへの 執 着 であり グレーを 純 白 に 浄 化 ( 漂 白 )することができない 中 そのリアルな 認 識 を 通 して 主 体 としての 意 思 や 規 範 意 識 をどう 維 持 するかという 問 題 であった そして 以 上 の 点 は 千 と 千 尋 の 中 で 様 々な 形 で 示 され 作 品 を 貫 く 通 奏 低 音 をなしていた たとえば 主 題 歌 の いつでも 何 度 でも ( 作 詞 / 覚 和 歌 子 作 曲 ㆍ 歌 / 木 村 弓 )の 歌 詞 を 見 てみよう このなかでも かなしみは 数 えき れないけれど その 向 こうできっと あなたに 会 える 繰 り 返 すあやまちの そ のたび ひとは ただ 青 い 空 の 青 さを 知 る 果 てしなく 道 は 続 いて 見 える けれど この 両 手 は 光 を 抱 ける かなしみの 数 を 言 い 尽 くすより 同 じくち びるで そっとうたおう 61) といった 具 合 に 負 の 要 素 の 存 在 ㆍ 継 続 と それに も 拘 わらず 喜 びや 希 望 を 見 出 していけることに 対 する 期 待 ( 意 思 )が 繰 り 返 し 何 度 も 表 れていることがわかるだろう このように 本 作 には ネガティブな 側 面 が 厳 然 と 存 在 し 今 後 も 無 くなりそうに ない 62) 中 で それでもポシティブな 側 面 が 対 をなす 形 で 果 敢 に 主 体 の 希 望 を 支 え る 構 図 が 非 常 にわかりやすい 形 で 示 されている これは 渋 谷 陽 一 氏 の 言 葉 を 借 りれば 全 然 ハッピーじゃないけど 肯 定 的 なところに 立 つ 63) ことを 意 味 し だからこそ 宮 崎 は 特 別 な 背 景 をもたない 平 凡 な 少 女 である 主 人 公 千 尋 の 最 大 の 武 器 を 64) 実 は 喰 い 尽 くされない 力 にある と 位 置 づけたのである 言 うまでもなく これは 宙 ぶらりん の 認 識 であり 割 り 切 ることのできない 苦 しさを 伴 う かかる 認 識 を 安 易 に 絶 望 に 直 結 させることなく ニヒリズムに 陥 らな かった 時 に 初 めて 到 達 するのが グチャグチャになりながら それでも 生 きてい くしかない 65) という 覚 悟 である 宮 崎 は 先 述 のユーゴ 内 戦 を 意 識 しつつ 二 61) ロマンアルバム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pp150 151. 62) 宮 崎 は 油 屋 で 働 く 労 働 者 向 けの 労 働 歌 のなかで 若 い 娘 や 青 年 もすぐに 老 人 となり の こるのは 人 生 だけさ 重 くてだるい 人 生 だけだ と 述 べている ただし 興 味 深 いことに その 口 調 は グッタリと 時 には 快 活 に と ここでも 両 義 性 を 帯 びている(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イメージアルバム のためのメモ 折 り 返 し 点 p238) 63) 風 の 帰 る 場 所 p180. 64) 不 思 議 の 町 の 千 尋 この 映 画 のねらい p74. 65) 紅 の 豚 公 開 直 前 インタビュー ( 出 発 点 初 出 1992) p519.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41 十 一 世 紀 というのはケリがつかない 全 部 引 きずって 同 じばかなことを 繰 り 返 し ながら それで 生 きていくしかない そういう 見 極 めがついた 66) と 述 べてい た そしてそれは 次 のように 個 人 に 限 らず 国 家 同 士 の 関 係 にも 当 てはまること であった 日 本 だけ 鎖 国 して 世 界 と 離 れて 生 きていくことができない 以 上 人 口 は 増 えつづ けていく 世 界 のなかでヒステリックにあいつらが 悪 いんだといって 簡 単 に 鎖 国 をや るとか 人 種 間 戦 争 をやるとかそういうのじゃなくて いろいろ 抵 抗 もあるけど まあ しょうがない 一 緒 に 生 活 しようよ 頭 に 来 ることがあっても 我 慢 しあって 暮 らそ う そういうふうになっていくしかないという 見 極 めなんです 67) 規 模 に 違 いはあれ これは 個 とそれを 取 り 巻 く 他 者 の 関 係 をどう 構 築 する かという 問 題 であり その 意 味 で 宮 崎 の 描 く 世 界 観 は 普 遍 的 なものであった で は グレーゾーンを 律 するには 具 体 的 にどうすれば 良 いのか 曖 昧 さの 承 認 を 野 放 図 な 好 き 勝 手 の 氾 濫 に 帰 結 させることなく 本 当 のリアリズム はいか にして 明 確 な 輪 郭 を 得 られるのか 第 2 節 規 範 としての 言 葉 善 と 悪 が 混 在 する 世 界 で それでもやけっぱちにならずに 秩 序 を 追 求 しようと すれば いったいどうすればいいのか 動 態 を 動 態 のままで 無 秩 序 な 現 状 追 認 や 強 者 への 一 方 的 な 阿 り あるいは 世 界 そのものからの 隠 遁 などに 結 果 させる ことなく 1つの 規 範 へと 昇 華 して 維 持 させるには どうすればよいのか 宮 崎 にとってのその 答 えは 言 葉 であった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の 制 作 にあ たり 映 画 の 趣 旨 説 明 の 文 章 のなかで 彼 はこの 点 を 明 言 している 言 葉 は 力 である 千 尋 の 迷 い 込 んだ 世 界 では 言 葉 を 発 することはとり 返 しのつか ない 重 さを 持 っている 湯 婆 婆 が 支 配 する 湯 屋 では いやだ 帰 りたい と 一 言 でも 口 にしたら 魔 女 はたちまち 千 尋 を 放 り 出 し 彼 女 は 何 処 にも 行 くあてのない ままさまよい 消 滅 するか ニワトリにされて 食 われるまで 玉 子 を 産 みつづけるかの 道 しかなくなる 逆 に ここで 働 く と 千 尋 が 言 葉 を 発 すれば 魔 女 といえども 無 視 す 66) 同 前 p520. 67) 同 前 p521.
4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ることができない 今 日 言 葉 はかぎりなく 軽 く どうとでも 言 えるアブクのようなもの と 受 けとられているが それは 現 実 がうつろになっている 反 映 にすぎない 言 葉 は 力 であることは 今 も 真 実 である( 中 略 ) 言 葉 は 意 思 であり 自 分 であり 力 なのだと いうことを この 映 画 は 説 得 力 を 持 って 訴 えるつもりである 68) ここでは 言 葉 はただの 一 般 名 詞 ではない 単 なる 意 思 疎 通 の 手 段 とい う 次 元 を 越 えて 特 別 な 価 値 を 持 った ある 種 の 魔 力 的 な 存 在 69)として 位 置 づけ られ 物 語 世 界 の 基 本 的 な 秩 序 を 形 成 していることがわかるだろう そしてそのことは 作 品 のストーリー 展 開 にもわかりやすく 表 れていた 本 作 は 実 質 的 に 前 半 と 後 半 の2 部 構 成 で 70) 元 々の 中 心 は 前 半 にあった 71) そし てプロデューサーが いきなり 設 定 を40 分 もかけて 見 せるという 前 代 未 聞 の 映 画 と 述 べるように 72) そこでは 作 品 の 世 界 観 の 提 示 に 全 力 が 注 がれた で は 肝 心 の 世 界 観 の 核 になったものは 何 か それは 第 1 部 は 何 しろ 千 尋 が 紛 れ 込 んで 湯 婆 婆 の 所 に 行 くまで と 言 われるように 73) 千 尋 と 湯 婆 婆 との 出 会 い および 両 者 の 取 り 決 め( 契 約 の 締 結 )であった 本 作 の 前 半 は 異 世 界 に 迷 い 込 んだ 主 人 公 の 千 尋 が 未 知 の 恐 怖 に 翻 弄 される 中 でハクの 助 けを 受 け ながら なんとか 湯 婆 婆 のもとまで 辿 り 着 いて そこで 自 分 の 言 葉 を 使 って 労 働 契 約 を 勝 ち 取 るまでの 話 だからである 恐 怖 に 怯 える 千 尋 に 対 して ハクは 湯 婆 婆 に 何 を 言 われてもここで 働 きたいと 言 い 張 れば 彼 女 も 手 を 出 せないとアドバイスし 千 尋 はそれを 実 行 するのだが その 労 働 契 約 の 性 質 は 解 説 本 では 次 のように 述 べられている 68) 不 思 議 の 町 の 千 尋 この 映 画 のねらい p74. 69) 言 葉 や それと 関 連 する 人 物 の 名 前 に 特 別 な 意 味 を 付 与 する 思 想 自 体 は 宮 崎 が 影 響 を 受 け た 西 洋 の 伝 承 や 民 話 にもしばしば 登 場 する たとえば 息 子 の 吾 朗 氏 が 監 督 としてアニメ 映 画 化 しただけでなく 宮 崎 自 身 熱 心 なファンで ハウルの 動 く 城 の 公 開 キャンペーンでの 渡 米 時 には 原 作 者 のル=グウィンにまで 会 いに 行 った( 折 り 返 し 点 p515) ファンタジーの 傑 作 ゲド 戦 記 でも 言 葉 は 特 別 な 意 味 を 持 っていた 70) 鈴 木 敏 夫 は インタビューの 中 で 第 1 部 と 第 2 部 は 僕 に 言 わせると 話 のテンポがあまり にも 違 いすぎるし 内 容 も 違 う と 述 べている( 別 冊 COMIC BOX vol.6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千 尋 の 大 冒 険 p148) 71) 宮 崎 は 初 めは 湯 婆 婆 に 会 いに 行 くっていうのがメインの 話 でしたから と 述 べている( 風 の 帰 る 場 所 p211) 72) 鈴 木 敏 夫 インタビュー(2001 年 6 月 20 日 ) 別 冊 COMIC BOX vol.6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千 尋 の 大 冒 険 p148. 73) 同 前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43 霊 々の 世 界 において 契 約 が 持 つ 意 味 は 大 きい たとえどんなに 気 に 入 らなくて も 一 度 契 約 を 交 わしたら 守 らなくてはならず それは 巨 大 な 力 をもつ 魔 女 ㆍ 湯 婆 婆 もまた 例 外 ではない 湯 婆 婆 は ここで 働 きたい という 千 尋 と 契 約 書 を 交 わす ことで 千 尋 の 名 前 を 奪 い 支 配 するが 逆 に 湯 婆 婆 は 千 尋 が 働 きつづける 限 り そ の 生 命 を 奪 うことはできないのである 74) 千 尋 は 契 約 により 逃 げ 回 るだけであった 世 界 を 職 場 に 変 えたのである 注 意 しておきたいのは 湯 婆 婆 の 力 がいかに 強 大 なものであったとはいえ 千 尋 は 湯 婆 婆 の 意 向 そのものではなく あくまで 彼 女 との 間 に 結 んだ 契 約 によってこ の 世 界 に 受 け 入 れられたということである この 点 は ハクが 他 の 従 業 員 に 千 尋 を 紹 介 した 際 に 彼 らが 最 初 は いくら 湯 婆 婆 様 のおっしゃりでもそれは 人 間 は 困 ります と 受 け 入 れを 渋 ったにも 拘 わらず ハクが すでに 契 約 されたの だ と 告 げると なんと と 絶 句 し 人 間 臭 くてかなわんわ と 愚 痴 りなが らもしぶしぶ 承 諾 する という 経 緯 に 端 的 に 表 れている 75) 各 々が 有 する 力 の 大 小 に 関 わらず 言 葉 は 決 定 的 な 位 置 を 占 めていた ジャーナリストの 筑 紫 哲 也 氏 は 宮 崎 との 対 談 のなかで キーワードは あの 子 の 場 合 は 簡 単 で ここで 働 くと 言 い 続 ける 言 葉 の 力 がいかに 大 きいかということ をあそこで 出 そうとしたんだと 思 って 見 ました と 述 べている 76) また 湯 婆 婆 のも とに 向 かう 道 中 でも 言 葉 の 重 要 性 は 象 徴 的 に 示 されていた たとえばボイ ラー 室 で 釜 爺 に 助 けてもらった 千 尋 に 対 して 従 業 員 のリンは あんたねえ ハイ とかお 世 話 になりますとか 言 えないの? あんた! 釜 爺 にお 礼 言 ったの? 世 話 になったんだろ? と 叱 責 している また 湯 婆 婆 の 部 屋 の 扉 を 開 けようとする 千 尋 に 対 し 湯 婆 婆 は ノックもしないのかい? とたしなめている 77) ここでは 言 葉 の 重 要 性 と 共 に ただ 口 を 開 けばいいのではなく その ことによって 礼 儀 に 即 したコミュニケーションや 人 間 (を 含 む 様 々な 主 体 同 士 の) 関 係 を 作 ることができているかが1つの 尺 度 になっている 気 を 付 けたいのは たとえば 衣 食 足 りて 礼 節 を 知 る という 言 葉 に 象 徴 されるように ややもすれば 生 活 が 安 定 した 上 での 余 興 や 付 加 価 値 のようにとらえられがちな( 言 葉 を 介 した) 礼 儀 というものが ここでは 生 きるか 死 ぬかの 瀬 戸 際 状 況 をくぐり 抜 けるための 74) 契 約 書 の 語 句 説 明 ( ロマンアルバム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p66) 75) 作 品 の 開 始 42 分 あたりの 箇 所 76) しんどいけれどこんなに 面 白 い 時 代 はない ( 折 り 返 し 点 p285. 初 出 2002) 77) それぞれ 作 品 の 開 始 30 分 ㆍ35 分 あたりの 箇 所
44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文 字 通 りの 実 践 的 な 武 器 として 位 置 づけられていることである 78) 言 い 換 えれ ば 本 作 において 礼 儀 を 形 作 る 言 葉 は 甘 ったれた 非 現 実 的 な 絵 空 事 で はなく 逆 にリアリズムの 地 平 から 登 場 しているのだといえよう おわりに 以 上 本 稿 ではアニメ 映 画 監 督 宮 崎 駿 を 一 人 の 思 想 家 としてとらえ なかでも 彼 が 作 品 で 展 開 させた 世 界 観 の 構 造 に 注 目 して 他 者 との 関 係 性 という 観 点 から 考 察 を 加 えてきた 他 者 とは ただ 単 に 物 理 的 な 意 味 のみで 用 いて いるのではない 自 らの 思 い 通 りに 行 動 しない 邪 魔 な 存 在 自 らの 価 値 感 に 従 って 動 いてくれない 忌 々しい 存 在 はすべて 他 者 なのである いうなれ ば これは 当 事 者 から 見 た 悪 であり 善 たる 自 分 とは 相 容 れない 存 在 で ある この 悪 を 空 間 的 にも 自 分 の 周 囲 から 追 い 出 せず 時 間 的 ( 将 来 的 ) にもその 駆 逐 が 見 込 めない 時 果 たして 人 や 国 家 は 強 者 や 状 況 への 追 随 や 冷 笑 主 義 に 逃 避 することなく 善 と 悪 の 混 在 状 況 を 正 面 から 受 けとめ 曖 昧 さㆍグレーゾーンを 秩 序 づけ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特 に1990 年 代 以 降 の 宮 崎 は 常 にこの 課 題 と 格 闘 してきたといっても 過 言 ではなかった 90 年 代 の 宮 崎 作 品 は 80 年 代 には 漫 画 ナウシカ の 執 筆 が 担 っていた 上 記 の 苦 行 を 同 作 の 完 結 を 受 けて 映 画 単 体 で 体 現 する 必 要 に 迫 られた そ の 意 味 では 大 作 もののけ 姫 はまだ 課 題 達 成 の 途 上 にあり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が 集 大 成 の 役 割 を 果 たした そして 同 作 の 核 をなしたのが 言 葉 で あった 言 葉 を 介 した 約 束 や 礼 儀 や 契 約 を 積 み 重 ねることで 一 定 の 規 範 に 基 づく 他 者 との 関 係 を 築 き 苛 酷 な 世 界 を 生 き 抜 く 実 学 として 機 能 させる こと これこそが 同 作 の 世 界 観 の 骨 子 であり 上 記 の 課 題 に 対 して 宮 崎 が 辿 り 着 いた1つの 回 答 であったといえる このような 言 葉 (を 介 した 約 束 ㆍ 礼 儀 ㆍ 契 約 )の 位 置 づけは 以 後 の 宮 崎 作 品 にも 繰 り 返 し 登 場 することとなる ハウルの 動 く 城 では ハウルが 個 人 的 に は 戦 争 を 嫌 いながらもサリマンとの 約 束 79)を 根 拠 に 動 員 されるし 強 大 な 力 をもつ 78) こうした 考 え 方 は 日 本 の 歴 史 上 にも 根 拠 を 持 っている 筆 者 は かつて 日 本 史 研 究 者 の 立 場 から 幕 末 外 交 における 徳 川 政 権 ( 幕 府 )の 動 向 を 素 材 にそのことを 論 証 した( 拙 著 明 治 維 新 と 世 界 認 識 体 系 )
宮 崎 駿 の 世 界 観 における < 他 者 > と < 言 葉 >( 奈 良 勝 司 ) 45 火 の 精 カルシュファーも その 契 約 ゆえに 事 実 上 ハウルに 扱 き 使 われながら 城 の 動 燃 機 関 に 甘 んじている 崖 の 上 のポニョ では 宗 介 とポニョはお 互 いを 好 き だという 意 志 表 明 だけで 種 族 の 差 を 飛 び 越 え 悲 観 主 義 者 のメタファーとしてのフ ジモトと 好 対 照 をなしている 風 立 ちぬ に 至 っては 基 本 的 には 口 下 手 な 二 郎 が 約 束 ( 契 約 )の 存 在 を 根 拠 に 軍 事 情 報 の 開 示 を 渋 るドイツ 人 に 対 して 堂 々たる 口 上 を 展 開 している これらは 全 て 他 者 との 関 係 における 言 葉 の 力 を 様 々な 形 で 示 唆 している 本 稿 の 問 題 意 識 に 即 していえば 千 尋 以 降 の 宮 崎 作 品 は 同 作 で 一 通 りの 完 成 をみた 宮 崎 思 想 のテーゼを 舞 台 と 登 場 人 物 を 変 え ながら 何 度 も 繰 り 返 しているだけといっても 言 いすぎではないのである 本 稿 では 漫 画 ナウシカ から 続 く 宮 崎 作 品 に 見 られる 特 質 を 一 つの 流 れとして 提 示 することに 主 眼 を 置 いたため 1つ1つの 作 品 を 十 分 に 掘 り 下 げて 検 討 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特 に 宮 崎 の 思 想 展 開 において1つのヤマ 場 を なしたと 考 えられる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については 作 品 内 容 そのものをより 包 括 的 に 検 討 し 他 の 制 作 スタッフの 関 与 も 含 めて 多 角 的 に 分 析 することが 必 要 になってくるだろう 私 見 では そこには 契 約 概 念 にまで 昇 華 された 言 葉 の 活 用 が 全 編 を 通 して 現 れているはずである しかしもはや 紙 面 も 尽 きた 上 記 の 課 題 については 別 稿 で 改 めて 検 討 することとしたい < 参 考 文 献 > 稲 葉 振 一 郎 (1996) ナウシカ 解 読 ユートピアの 臨 界 窓 社 叶 精 二 (2001) イメージボードからの 飛 翔 別 冊 COMIC BOX vol.6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千 尋 の 大 冒 険 ふゅーじょんぷろだくと 切 通 理 作 (2001) 宮 崎 駿 の 世 界 筑 摩 書 房 久 美 薫 (2008) 宮 崎 駿 の 時 代 :1941~2008 鳥 影 社 五 味 洋 子 (1995) 浄 化 されてゆく 宮 崎 世 界 の 闇 コミックㆍボックス 98 ふゅーじょんぷろだくと 五 味 洋 子 (2001) 愛 しい 小 さな 友 へ 別 冊 COMIC BOX vol.6 千 と 千 尋 の 神 隠 し 千 尋 の 大 冒 険 ふゅーじょんぷろだくと 鈴 木 敏 夫 (2013) 風 に 吹 かれて 中 央 公 論 新 社 奈 良 勝 司 (2010) 明 治 維 新 と 世 界 認 識 体 系 有 志 舎 79) 正 確 には 魔 法 学 校 に 入 学 する 時 にたてさせられた 誓 い であり 証 書 としてハウルが 保 管 している 証 書 はナイフやダーツの 的 にされ 酷 い 状 態 に 置 かれているのだが このこ とが 逆 説 的 に 主 観 的 にはどれほど 下 らない 厭 わしいと 思 っていても 最 終 的 には 守 らざるを 得 ない 拘 束 を 受 けざるを 得 ないという 約 束 の 持 つ 魔 力 的 な 力 を 暗 示 している
46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野村幸一郎(2010) 宮崎駿の地平 白地社 宮崎駿(1984~1995) 風の谷のナウシカ 1~7 徳間書店 宮崎駿(1996) 出発点 1979~1996 徳間書店 宮崎駿(2002) 風の帰る場所 ロッキングㆍオン 宮崎駿(2008) 折り返し点 1997~2008 岩波書店 斎藤良一ㆍ今西千鶴子ㆍ加藤ちたかㆍ鈴木隆詩ㆍ徳木吉春(2001) ロマンアルバム 千と千尋の 神隠し 徳間書店 논문투고일: 2014. 10. 30 논문심사일: 2014. 11. 05 심사확정일: 2014. 12. 15 인적 사항 성명 : (한글) 나라 카쓰지, (한자) 奈良 勝司, (영어) Nara Katsuji 소속 : 한양대학교 논문영문제목 : Others and Words in Miyazaki Hayao's cosmology Ⅱ 703호 주소 : (425-807)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718 1 동남레이크빌 E mail : knara@hanyang.ac.kr / dasboat80@gmail.com <국문요지> 이 논문에서, 저자는, 특히 세계관의 구조적 관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사상을 분석 했다. 본고에서는 그것을 재료로 하고,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 영화, 그나 다른 사람의 인터뷰 기 사, 및 공식 가이드 북의 설정 자료 등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주요한 이미지는 밝고, 대중적이며, 휴머니즘과, 자연보호, 일본의 전통 등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야자키가 이웃집 토토로 나 마녀 배 달부 키키 와 같은 걸작을 만들고 있었던 1980년대에도, 그는 다른 방면으로, 만화판 바람의 산골 짜기의 나우시카 를 계속 쓰고 있었다. 만화판 나우시카 는 비극이나 심각하고 터프한 전투 씬 등 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야자키의 사상 핵심은 그 안에 있었다. 그 때문에, 만화판 나우시카 가 1990년대전반에 끝난후,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은, 나우시카 의 본질을 그후의 작품 안에 포함하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은, 세계의 밝은 측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측면도 그 안에 포함하게 되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은, 그러한 요청에 대한 최선의 대답 중하나이다. 이 영화 에서는, 말 이 가지는 의미가 중시되었다. 말 이나 그것에 의해서 구성된 약속은,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며, 밝음과 어두음이 혼재한 세계에 있어서의 사회적 질서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진다. 리얼리티에 근거 한 말 은, 약속과 계약에 실제적인 힘을 부여한 것이다. 주제어: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관, 선 과 악, 말, 계약, 현실주의
47 七 支 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 정 효 운 ** Abstract The Chijido( 七 支 刀 ) is currently preserved in the Isonokamijingu( 石 上 神 宮 ) of Japan. Since the Chiljido was discovered in 1874, it has long been a controversial issue between the academic world of two countries; Korea and Japan. This is a product of diplomatic relations with ancient Korea and Japan. However, the primary cause of the dispute is a lot of remaining chracters carved in Chiljido are difficult to read because of corrosion. For this problem, there are many previous studies. The results are as follows: At first, this is a theory which the Chijido bestowed upon Ancient Japan( 倭 ) from Kudara( 百 濟 ). Secondly, this is a theory which the Chijido granted in Ancient Japan from Kudara. Thirdly, this is a theory which the Chijido granted from Chinese Donjin( 東 晋 ) dynasty. The change of such a theory is related to Ancient Korea Japan Relations. As for this, the claim that North Korean Seak hyoung Kim( 金 錫 亨 ) announced in 1963 was a chance. Seeing from such a point of view, I doubt whether a historian could free before a person of country and the ideology. It is thought that we must be troubled for such a basic question. This is not a problem only for merely Japanese. Keywords : Chijido, Isonokamijingu, Ancient Korea Japan Relations, Kudara, Ancient Japan 1) 1. 서론 일본의 奈 良 縣 天 理 市 石 上 神 宮 에 소장되어 있는 七 支 刀 는 1874년에 조 사되어 1892년에 도쿄제국대학의 星 野 恒 교수에 의해서 공개된 이후, 오늘의 고대한일관계사상을 구성하는 중요 자료의 하나로서 활용되고 있다. 이 칠지 도는 1873년부터 1876년간에 석상신궁의 대궁사로서 재임한 菅 政 友 이 발견 하여 판독한 이래 다양한 연구와 해석이 제기되어 왔다. 그 원인의 주된 이 유는 표면에 새겨진 명문이 긴 시간을 경과하는 동안 부식되어 판독되지 않 는 글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과 일본 양국의 국가와 민족이라 * 이 논문은 2014학년도 동의대학교 교내일반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과제번호 2014AA405). ** 동의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48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고 하는 이데올로기와 시대적 역사 인식의 변화란 점도 관여되어 왔기 때문 이라고 생각된다. 칠지도를 둘러싼 종래의 주된 쟁점은 제작 시기와 목적, 역 사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종래, 많은 선행연구에서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어 있 기 때문에 구체적인 논점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들 연구1)에 미루기로 하고, 본고에서는 칠지도의 연대 문제라든지 제작 의도 등의 미시적인 해석보다 고 대한일관계사의 형성과 전개 가운데에서 칠지도의 연구가 어떻게 수용되어 왔고 변용되어 왔는가라고 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역사가에게 있어서 역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가가 민족 과 국가 앞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 기로 한다. 2. 고대한일관계사의 형성과 전개 1) 고대한일관계사와 자료 우선, 고대한일관계사의 형성과 전개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2). 오늘날 고대한일관계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자료들이 활용되고 있지만, 기 본 사료로 활용되고 있는 자료는 日本書紀 와 宋書 왜국전, 三國史記, 三國遺事 등의 문헌과 광개토왕비와 칠지도등의 금석문 등이라 할 수 있 다. 이들 자료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일본서기 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자료들은 각 시기의 단편적인 역사상을 기록하고 있기 에 상호 연관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서기 의 기록은 7세기 1) 관련 선행연구에 대해서는 神保公子(1981), 七支刀銘文の解釈をめぐって, 東アジア世界に 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學生社; 김영심(1992), 七支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권, 가락 국사적개발연구원; 吉田晶(2001), 七支刀の謎を解く, 新日本出版社; 홍성화(2009), 石上神 宮 七支刀에 대한 일고찰, 한일관계사연구 34.;주보돈(2011), 백제 칠지도의 의미, 한 국고대사연구 62 등의 연구사에 소개된 논문들과 최근의 연구인 김영심(2013), 七支刀의 성격과 제작배경, 한국고대사연구 69, 한국고대사학회 등에서 제시되어 있는 참고문헌을 참조할 것. 2) 이 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졸저(1995), 고대 한일 정치교섭사 연구 학연문화사, 9~21쪽; 졸고(2010), 한ㆍ일 양국의 국가와 민족 속의 100년 고대한일관계사의 형성과 전 개를 중심으로, 일어일문학 47, 14ㆍ15쪽; 졸고(2012), 韓國史와 日本史의 遭遇 古代 韓日關係史의 觀點에서, 일어일문학 53, 423~433쪽 등을 참조할 것.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49 이전의 고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일관되게 전하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사서는 역사적 사실이란 측면에 있어서는 특히, 7 세기 이전의 한일관계의 역사적 기록은 고대 한국 국가들에 대한 왜왕권의 우월의식을 일방적이고 왜곡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고, 사실의 신빙성 문제와 더불어 연차의 괴리도 문제점으로 인식되고 있 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日本書紀 의 기록을 바탕으로 초기의 고대한 일관계사가 구축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통시적이고 비교 가능한 주변국의 자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 뼈대를 이루는 내용은 神功皇后紀 에 기록된 신공황후 원년(201)의 삼한정벌설화와 49년(249)의 가라 7국 평정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설화는 근세 일본의 조선 멸시관과 征韓論 사상 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기록은 주지하다시피 3세기 대의 고대 일본의 국가였던 왜가 고대 한국의 지역을 지배 내지 영향을 미쳤다는 비교 근거 자료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오히려 당시의 고대 한 반도가 일본열도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있었고, 고대 국가의 형성 단계를 보아도 바다를 사이에 둔 양 지역의 정치세력권에 대해 정치적, 군사 적 영향권을 상정하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 서 이 시기의 양 지역의 관계를 정치적 복속이나 지배, 피지배 등으로 해석 하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후 1887년(明治 20)에 東京帝國大學에 사학과가 개설되고 1889년 국사 과가 증설됨으로서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에 의한 역사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에 즈음하여 조선사는 동양사의 일부로서 연구되었는데, 이는 1894년과 95 년에 일어난 청ㆍ일전쟁의 승리로 인한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관심의 증대도 일조를 하였다고 본다. 이 시기의 조선사연구의 특색3)은 우선, 연구가 고대 사에 한정되었다는 점과 문헌적 고증을 통한 전통적 독단에의 비판, 그리고 언어연구가 접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근대 초기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그 범위나 시기에 있 어서는 국학이나 한학의 전통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연구방향에 있 3) 이 부분에 대해서는 旗田巍(1969), 日本における朝鮮史研究の伝統, 日本人の朝鮮観, 勁 草書房, 226 248쪽을 참고할 것.
50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어서는 서양의 실증적, 합리주의적 역사연구 방법론을 접목하려 하였다고 평 가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연구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적어도 당시로서는 방법론에 있어서 진일보적인 성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4). 주목할 점은 이전 시기의 관련 고대사 연구가 日本書紀 와 古事記 등 일본고전에서 추출한 편향된 역사상을 기초로 하여 고대 한일 관계를 이해하 였던 방법론과는 달리 한국과 중국 문헌, 금석문 등에 보이는 고대 한국 관 련 기사를 뽑아내어, 비교 검토함으로서 연대의 오류를 지적하는 등 이전의 독단적 해석을 극복하려 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정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구의 목적을 일본민족 기원의 형성과 일본민족 의 독자성 추구에 두었기 때문에, 국학 전통의 조선사관이었던 日鮮同祖論 이나 日韓日域論 등으로 불리는 사상이 저변을 형성하고, 근대일본의 한국 병합이란 국가 정책의 필요성과 연동되어 확산되었던 점은 문제점으로 작용 하였다 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의 고대한일관계사는 러ㆍ일전쟁 중인 1906년 대일본제국 육 군의 滿洲國 野戰鐵道提理部가 중심이 되어 만든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1908년 동경지사에 朝鮮地理歷史調査室를 설치함으로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권력에 의한 반관반민이란 요소와 제국주의란 시대적 상황이란 문 제점은 내포하고 있었지만, 이 기관 자금으로 연구된 고대사연구가 작금의 고대한일관계사의 기본적 틀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연구에 많은 영향 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5). 이 시기에 구축된 고대한일고대사 연구는 喜田貞吉로 대표되는 日鮮同祖 論 6)과 津田左右吉와 池内宏로 대표되는 滿鮮史硏究 로 대별할 수 있지만, 이들 연구는 고대 한국사의 특징을 타율성과 정체성으로 규정 지우려고 한 오류를 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자는 한국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일 본에 종속시켜 이해하려 하였고, 후자는 한국의 역사를 만주를 포함한 대륙 사의 일부로 편입시킴으로서 한민족의 주체적 발전을 부정하려 하였던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방법론은 사료비판과 객관주의를 표방하였기 4) 졸고(2012), 앞의 논문 419쪽. 5) 긍정적 측면은 고대한일관계사의 틀을 제공했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측면은 이후의 관련 연 구를 제약하였다는 점이다. 6) 喜田貞吉(1929), 日鮮兩民族同源論, 民族と歴史 6 1.; 金澤庄三郞(1929), 日鮮同祖論, 刀江書院 등.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51 때문에 오늘날의 일본의 고대한일관계사 연구에 계승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부언하자면, 후자의 연구는 일본서기 의 神功皇后의 三韓征伐 을 학문 적으로 검토, 비판에서 시작7)한다고 할 수 있다. 양 연구자의 공통성은 부동 의 근거를 廣開土王碑文에서 구하고 있는 점과 일본서기 인용의 百濟三 書 즉, 百濟記, 百濟新撰, 百濟本記 를 백제 편찬의 역사서로 이해하 였다는 점에 있었다. 차이점은 이들 사서에 대한 평가로 津田의 경우는 백제 修史家의 수식과 윤색, 조작이 가해졌다고 보았는데 비해 池内의 경우, 부분 적 윤색은 인정하지만 원문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8). 또한 그 기록들은 고대 일본의 일방적인 견해가 아니며 객관성도 풍부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池内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일본서기 의 본문 중에서 백제계 사적과 조선계 사료에 근거를 가진 기록을 객관적으로 추출하여 확정 할 수 있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고대한일관계사를 구성하는 것에 역점을 두 려는 방법론으로 전개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고대사 연구에 계승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9). 이러한 과정에서 구축된 고대한일관계사는 일본서기 신공황후의 삼한정 벌과 가라 7국 평정 기사와 광개토왕 비문의 신묘년조 기사, 奈良縣 天理市 石上神宮 소장의 七支刀 명문, 宋書 왜국전의 한반도 지명 기사 등이 기본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들 자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관련 시기와 비교 활용 자료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고대한일관계사 기본 자료와 관련 시기 시기 쟁점 3ㆍ4世紀 5世紀 6世紀 가라 7국 평정 임나 일본부 임나조 7世紀 백강전투 한국 文獻 金石文 廣開土王碑 三國史記 일본 文獻 金石文 日本書紀 日本書紀 日本書紀 日本書紀 중국 文獻 金石文 七支刀 비고 紀年問題 宋書 隋書 新唐書 舊唐書 紀年問題 7) 이 점에 대해서는 津田左右吉(1966), 古事記および日本書紀の研究, 神代史の研究, 津田 左右吉 全集 別卷 1, 岩波書店, 초출은 1919; 池内宏(1947), 日鮮の交渉と日本書紀の研究, 日本上代史の一研究, 近藤書店을 참조할 것. 8) 津田는 日本書紀 에 기록된 百濟三書 를 후대의 조작된 사료로 보았다. 이러한 역사인식 하에서는 日本書紀 사료를 통한 고대한일관계사의 복원은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이후 津田 說이 계승되지 아니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9) 졸고(2012), 앞의 논문, 420쪽.
52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2) 고대한일관계사의 전개 그런데, 이러한 자료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온 고대한일관계사는 임나일본 부 와 임나조, 백강전투 문제라고 하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서로 관련 성을 가지면서 해석되어 왔다고 생각된다10).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근대 일본의 연구자 통설적 고대한일관계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4세기 무렵의 大和王權이 한반도에 침입하여 임나(지금의 가야지역) 를 직할지배지로 하고, 그 곳에 임나일본부 를 설치하여 562년 신라에 의해 임나가 멸망당할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서 임나 및 신라ㆍ백제 지역을 지배했 다고 생각했던 것이다11). 둘째, 임나의 조 에 대해서는, 영토 문제로서의 임 나는 562년에 끝났지만, 명목적인 지위와 지배는 646년까지 계속되었다고 보 았다. 셋째, 백제의 멸망 후에 전개된 663년의 백강전투 에 있어서의 왜병의 파견 목적12)을 임나의 조 내지 그 명목적인 지위의 부활과 유지를 위해서였 다고 한다. 따라서, 야마토왕권에 의한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의 지배의 실체 화라고 하는 가공의 역사상은 임나일본부설 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상이 어떠한 연구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전개되었는지 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신묘년의 기사가 고대 한일관계사를 해석하고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부동의 근거 자료가 되어, 일 본서기 의 神功皇后 46년(246)조부터 52년(252) 조에 서술되고 있는 삼한정 벌과 가라 7국 평정 설화와 관련시켜, 역사적인 사실로서 포장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경우, 제기되는 연대적 괴리의 문제는 2주갑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또한 칠지도의 명문에 보이는 泰 4年 이란 연호를 東晋(317~420년)의 太和4년(369) 으로 판독함과 동시에 백제왕이 왜국에 바쳤다고 보았기 때문 10) 이들 쟁점의 문제점과 이 항의 서술 내용은 주 2)에 언급한 논문들에서도 관련 부분을 일부 언급하고 있다. 11) 임나일본부 문제에 대한 종래 연구의 문제점 검토와 개인적 견해에 대해서는 이미 발표한 바 있기 때문에 관련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졸고(2007),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임나일본 부, 동북아연구 13, 481~508쪽; 졸고(2009), 6세기 한ㆍ일관계사의 재구축 왜와 임나 관계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56, 337~365쪽. 12) 임나의 조 와 백강전투 문제에 대한 검토와 견해는 졸저(1995), 앞의 책을 각각 참조할 것. 후자에 대한 최근의 관련 연구사는 김현구(2010), 백촌강싸움의 성격에 관한 일고찰, 한일역사쟁점논집, 동북아역사재단, 내부자료, 131 136쪽을 참조할 것.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53 에, 양국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교류라고 하는 관점보다 복속과 지배의 결과 로서 해석하였던 것이다. 또, 송서 왜국전의 都督諸軍事號 에 포함되어 있 는 고대한국의 관련 지명과 국명을 왜국왕의 지배 영역의 근거로서 왜곡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상의 문제점은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외교적 필요성을 달리하 는 집단에서 편찬 또는 제작된 이질적인 자료를 고대한국에 대한 야마토왕권 의 우월이란 인식을 전제로 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한 점에 있었다고 생각된 다. 즉, 시대를 달리하는 편찬 주체의 사상이나 제작 주체의 정치적 의도는 철저하게 무시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라고 하는 시대적인 상황과 제국일 본의 정치적인 필요성이 학문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明治維新이라고 하는 시대적인 변혁을 배경으로 새롭게 등장한 메이지정 부는 천황 중심의 단일 일본민족에 의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천황 통치 의 정당성을 부여 받을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필요성은 고대 천 황을 천신의 자손으로 미화하고, 그 통치 신화를 전승하고 있는 일본서기 와 古事記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천황제의 근원과 회귀로의 정 당성의 근거를 확립하려고 하는 노력은 양서의 연구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서 작용하였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일본서기 에 기록되고 있는 神功紀의 삼한정벌 의 이야기는 19세기 무력으로 병탄한 조선의 통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로서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치적인 목적도 내재 되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근대 역사학은 천황주권국가의 국가 목적에의 봉사,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주체적인 문제의식의 배제, 개별 사실의 고증에 대해서도 객관 적인 사료 조작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다고 하는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근 대학문의 형성이 국가권력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달하여 왔기 때문에 역사학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역사관이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日鮮同祖論, 滿鮮一家論 13)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江戶시대의 국학의 전통과 실증과 합리성이라고 하 는 근대적인 학문방법론을 취하고 있지만, 고대한국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 의 강조라고 하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다른 점은 전자가 고대한국의 역사를 일본역사에 포함시켜 파악했다고 한다면, 후자는 중국역사의 일부로서 해석 하려고 한 점뿐이다. 13) 滿鮮史硏究라고도 한다.
54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이러한 역사관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 보이는 신라 정벌과 가라 7국 의 정벌 이야기, 고구려와 백제의 복속기사를 역사적인 사실로서 가공하여 허구성과 기년의 괴리성이라고 하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南鮮經營論 으로 불 리는 왜곡된 고대한일관계사상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 학설은 末松保和가 1949년에 任那興亡史 라고 하는 저서14)를 발표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일 본학계에서는 고대한일관계사의 통설로서 자리매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는 이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본연구자는 없 었다. 이 설을 토대로서 石母田正의 東夷小帝國論 15)과 西嶋定生의 冊封體 制論 16) 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 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중국과 일본의 문헌 자료에 포함되어 있는 자국중심적인 사상과 의식을 국가 간의 대외관계에 실 체로서 적용하여 해석하려고 한 점이다. 둘째는 상대국인 고대한국의 제 국 가의 이념이나 논리는 철저하게 배제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종래의 고대한일관계사의 연구가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영역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종래의 연구가 임나일본부 에 의한 4세기부 터 6세기까지의 야마토왕권의 고대한국지배를 증명하기 위해서 시간적 제약 을 받을 수 없었지만, 이 설로 인해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역학과 질서 의 구조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7, 8세기, 공간적으로는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세계에로의 연구영역의 확대를 가져왔던 것이다 한편, 일본학계의 이러한 고대한일관계사 연구의 흐름 가운데, 북한의 김 석형이 1963년에 삼한ㆍ삼국의 일본 열도분국론 이라고 하는 학설을 주장17) 하였다. 이 설의 주된 내용은 삼한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주민의 이주가 진행되어 그 결과, 이러한 이주민 세력에 의해서 일본 열도의 각지에 정치적인 독자성을 가진 소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이 소국가들은 독립된 국가 는 아니고 한반도의 본국과 정치적인 관계를 유지한 분국으로서 존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례가 없는 주장에 대해서 일본학계에서는 사실의 인식이 결 여된 견해이며 관련 사료에 대한 비판 의식의 부족, 대세론과 정세론적인 관 14) 末松保和(1949), 任那興亡史, 大八洲書院. 15) 이 설에 대해서는 石母田正(1971), 日本の古代国家, 岩波書店를 참조할 것. 16) 이 설에 대해서는 西嶋定生(1985), 日本歴史の国際環境, 東京大学出版会를 참조할 것. 17) 김석형(1966),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55 점에서의 접근, 조선인민공화국가의 민족의식의 영향 등 다양한 비판이 제기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래의 일본연구자가 일본서기 의 주술과 속박 에서 기인한 무의식적인 선입관의 영향으로 인해 학문과 俗說의 경계를 왕래 하였던 연구에 대한 경계와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이후의 일본 고대연구자의 고대한일관계사의 인식을 반성시키고, 재검토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 학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삼한ㆍ삼국의 일본열도 분국론 의 제기 이후의 일본학계의 고대한일관계 사의 동향은 1960년대의 冊封體制論 과 東夷小帝國論 의 연구를 계승하여 심화하는 방향과 이것을 비판하면서 극복해 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공통되는 연구경향은 고대한일관계사를 한국과 일본 양국의 대 외관계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하였다는 점과 일본 서기 의 사료 및 관련 사료를 보다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하는 움직임과 더 불어 임나일본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가야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한국 측의 정치적 이념이나 논리를 일부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학계 주도의 고대한일관계사 연구는 明治維新 이후의 서구 근 대사학의 수용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관련연 구는, 제국일본의 식민지라고 하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초기의 연구는 오 로지 일본학자에 의해서만 행해졌다고 보아도 무관할 것이다. 관련 사료와 자료의 부족, 연구자와 연구방법론의 부재에 따른 초기의 고대한일관계사의 연구는 근대 일본사학이 만들어 놓은 역사상과 그 영향의 아래에서 교육된 역사관이 저변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태생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고대한일관계사의 연구는 시간적으로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1960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방법론 으로서는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식민사관의 극복이라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고대한일관계사의 본격적인 연구는 좀 더 시간이 필요 하였다. 천관우의 연구18)를 시작하여 1970년대 말부터 가야사 연구를 중심으 로 고대한일관계사의 연구가 본격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 본서기 의 사료적인 비판과 임나일본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 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한국고대사 내부로부터의 연구동향과는 달리 1980년 18) 천관우(1991), 가야사연구, 일조각.
56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대부터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고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간 신진연구자들이 1980년대 말부터 귀국함으로서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가 보다 활성화 되었다19)고 말할 수 있다. 3. 칠지도와 한일관계사 단철로 만들어진 칠지도는 전체 길이가 74.9 이고 刀身의 길이는 66.5 인 칼로 양면에는 금상감 기법으로 60여 글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림 1] 칠지도의 사진과 모사20) 앞장의 모사를 참고로 하면, 전면에 34글자, 후면에 27글자 모두 61자21)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판독되고 있는 글자를 제시22)해 19) 한일관계사 관련 연구자 현황에 대해서는 이병로(2007), 한국에서의 일본사연구의 현황과 전망, 일본문화연구 22, 동아시아일본학회, 148 152쪽을 참조할 것. 20) 山尾幸久(1989), 앞의 책, 170ㆍ171쪽 인용. 21) 다만, 月 을 十一 月이나 十二 月로 해석하는 주장에 따르면 62자가 된다. 22) 연구자에 따라 보다 많은 글자를 판독하여 제시하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논의가 되고 있는 부분은 로 표시하였다. 보다 적극적으로 판독하는 경우에는 泰和四年五[十一]月十六日 丙午正陽造百練銕[剛]七支刀生[出]辟百兵宜供供侯王 作[祥], 先世以来未有此刀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57 보면 다음과 같다. 前面 : 泰 四年 月十 日丙午正陽造百練 七支刀 辟百兵宜供供侯 作 裏面 : 先世 来未有此刀百濟 世 奇生聖音故為倭王旨造傳 世 그동안 많은 관련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판독이 일치하는 문자가 많 아지게 되었지만, 와 같이 해석할 수 없는 글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 며, 연구자에 따라 여러 해석문이 제시되어 있고, 그 해석을 기초로 칠지도의 역사적인 의미를 복원하고 있다. 문제는 확정할 수 없는 문자를 연구자 개인 의 관점에서 판독하여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칠지도가 만들어졌던 시기와 제작 의도를 둘러싸고 다양한 주장이 제시되고 실정이다. 우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작 시기와 관련된 연호 문제라 할 수 있다.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泰 연호의 뒤 문자가 불명하여, 이 점을 둘 러싸고 초기에는 泰 初 나 泰 始 라고 판독하고, 중국의 연호 가운데에서 관 련성이 있는 西晉의 太始ㆍ泰始(265~274), 前秦의 太初(386~394), 南宋의 泰 始(465~471) 등이 후보로 거론될 수 있었지만, 이후 대부분의 연구자가 泰 和 로서 판독하여, 魏의 太和(227~233), 東晉의 太和(366~371), 北魏의 太和 (477~499) 등의 연호와 관련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이것은 泰 라고 하는 한자가 太 와 大 의 문자와 음이 통용되는 경우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 이다23). 이 경우, 太和 4년은 230년, 369년, 480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아지 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泰和 를 중국의 연호가 아니고, 백제의 독자 연호 로서 보는 주장24)도 있다. 이와 같이 제작 시기에 있어도 많은 논의가 제기 되는 원인은 우선, 연호로 보이는 두 번째 문자가 판독하기 어렵기 때문이라 는 점과 함께 관련이 있는 시기의 중국 연호에 泰和 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百濟王世子奇生聖音[晉]故為倭王旨造傳示後世 와 같이 된다. 단, [ ] 안의 글자는 달리 읽는 경우이다. 23) 그 외 泰 를 奉 으로 판독하여 武寧王 4년(504)의 백제연호로 보는 설도 있고[연민수 (1998), 칠지도 명문의 재검토,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백제연호 太和 4년(408) 설도 있다[손영종(1983), 백제 7지도의 명문 해석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1), 력사과학 4.]. 24) 이 설은 김석형[(1963), 삼한 삼국의 일본렬도 내 분국(分國)들에 대하여, 력사과학 1] 이 제기한 이후 대부분의 한국 연구자들이 지지하는 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설은 백제 하사설이 제기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58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한편, 칠지도를 제작한 주체와 그 목적을 둘러싸고도 많은 주장이 제기되 고 있지만, 이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백제왕이 야마토왕에게 바쳤다고 해석하는 백제헌상설이 있다. 이것은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 (252) 조에 보이는 백제의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 와서 七支刀 한 개와 七子鏡 한 개, 또 여러 가지 보물을 바쳤다. 라고 하는 기록25)과 관련시켜 해 석하려고 하는 입장의 주장이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서기 의 기록의 신빙성과 연대의 불일치, 명문의 내용과의 차이가 문제점으로서 지적 되고 있다. 둘째는 백제왕이 야마토왕에게 하사하였다고 보는 백제하사설이 있다. 이 것은 주로 한국학계에서 지지를 얻고 있는 설로, 日干支의 해석에 중점을 두 고 있는 점과 백제가 동진과 통교했던 시기가 근초고왕 27년(372)이기 때문 에, 이보다 4년 전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점, 주변국 인 고구려와 신라가 독자적인 자국 연호를 사용26)하고 있었다고 하는 점, 명 문 말미의 傳示後世 라고 하는 문장이 상위자로부터 하위자에게 내리는 하 행 문서의 형식이라고 하는 점 등에서 백제왕이 후왕인 야마토왕에게 하사했 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백제의 금석문에서는 아직 연호가 사용된 예가 발견되어 있지 않은 점27)과 翰苑 인용의 括地志 百濟傳에 백제는 독자 적인 연호가 아니라 간지를 사용했다고 하는 기록28)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되 25)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 久氐等從千熊長彥詣之. 則獻七枝刀一口ㆍ七子鏡一面, 及種 種重寶. 26) 고구려의 경우, 廣開土王碑의 永樂(391 412년) 외에도 建興五年銘金銅釋迦三尊佛, 延嘉 七年銘金銅佛像, 永康七年銘舟形光背 등의 불상자료를 통해 볼 때 영락, 건흥, 연가, 영강 등의 연호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도 三國史記 에 따르면, 536년(法興王 23)에 建元을, 眞興王 때에는 開國, 大昌, 鴻濟를, 眞平王 때에는 建福, 善德王 때 仁平, 眞德王 때 太和를 사용한 예가 있다. 고대 한국 삼국의 연호 사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졸고 (2011), 古代 韓ㆍ日의 年號 使用에 관한 研究, 일어일문학 51, 287~290쪽을 참고할 것. 27) 현재 발견된 백제의 금석문 자료에서도 간지를 사용 예가 많이 보이고 있다. 武寧王陵誌 石 의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 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과 부여 능산리 사지 출토 昌王銘石造舍利 龕 의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 妹公主供養舍利 사용예와 彌勒寺 西塔舍利記의 乙亥 年, 王興寺 舍利莊嚴具의 丁酉年, 砂宅智積碑미의 甲寅年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翰苑 括地誌, 周書, 隋書, 北史 등의 중국 사료에 백제가 宋의 元嘉曆을 사용하여 간지를 썼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원가력 채용 이전에는 연호를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사용례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는 확정하기 어렵다. 28) 用宋元嘉歷 其紀年無別號 但數六甲次第. 한편, 元嘉歷은 南朝 宋文帝 元嘉 20년(443) 何承天이 편집한 것으로, 周書 異域傳 百濟條의 又解陰陽五行 用宋元嘉歷 以建寅月爲 歲首 亦解醫藥卜筮占相之術 란 내용을 참고하면 6세기대에 백제에 수용되었을 개연성이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59 고 있다. 셋째, 동진왕이 백제를 통해서 야마토왕에게 하사하였다고 보는 동진하사 설29) 등이 있다. 백제가 동진의 명에 의해서 칠지도를 후왕에게 하사하였다 고 하는 주장은 최근 일본학계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설이다. 이 설은 전면 과 후면의 명문이 독립적이고 이질적이라고 하는 전제에서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인 廢帝(海西公)가 백제를 통해서 야마토왕에게 보내었다고 보았 던 것이다. 즉, 백제가 372년 동진에 조공했을 때에 하사한 原七支刀를 흉내 내어 만들어 왜국에게 주었다고 해석함으로서 백제하사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의 문제는 현재 聖音 으로 해독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聖晋 으로 해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과 백제가 왜 太和 4년(369)에 제작한 칠지도를 372년에 왜국에 모조하여 보냈는가 하는 점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외에 칠지도의 일 본위작설 등도 있다. 이처럼 종래 연호를 둘러싸고 논의된 주요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 과 같다. 백제헌상설 (중국 연호설) 연호 泰 四年 백제하사설 (백제 연호설) 동진하사설 (중국 연호설) 비고 西晉 泰始四年(268) 泰初 日本書紀 神功紀 52年條 七枝刀 기록 연계 東晋 太和四年(372) 日本書紀 2주갑 인하 泰 四年 近肖古王二十四年(372) 日本書紀 2주갑 인하 百濟年號 東晋 太和四年(372) 日本書紀 2주갑 인하 聖 音 을 聖 晉 으로 판독 한편, 연호의 문제 이외에도 명문의 글자의 판독을 둘러싸고도 많은 논의 가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면의 月十六日 의 부분에 대해 서는 종래 六月十一日 로 해석한 경우도 있었고, 현재에는 五月十六日 이나 十一月十六日 로 판독하는 연구자30)들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泰和四 높다. 29) 栗原明信(1966), 七支刀銘文についての一解釈, 日本歴史 265.; 山尾幸久(1989), 앞의 책; 東野治之(2004), 七支刀銘文の 聖音 と 聖晉, 日本古代金石文の研究, 岩波書店; 濱田耕作(2010), 古代王権의 성장과 日韓關係 4~6세기, 제1장 제2절, 제2기 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제1권(제1분과편) 271~286쪽. 30) 후자의 경우, 홍성화(2009), 앞의 논문. 同(2010), 5세기 백제의 정국변동과 倭 5왕의 작호,
60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年五月十六日 의 간지가 乙未 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丙午正陽 을 일반적으로는 길상구로 보아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辟百兵 의 경우, 를 生, 世, 出 등으로 판독하고 있고, 宜供供侯 의 경우도 供供 혹은 復供 으로, 侯 는 侯王 으로 판독하고 있지만, 후 왕 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의가 많이 제기되고 있다. 作 의 부분에 대 해서는 판독할 수 없는 문자가 많지만 마지막 문자를 作 이라고 보아 제작자 라고 보는 설도 있고, 길상구로 보아 永年大吉祥 으로 해석 하는 설도 있다. 뒷면의 先世 来 는 先世以来 로 해독하고, 世 은 王世子 로 판독하 는 연구자가 많다. 奇生 에 대해서는 인명설과 서술적인 표현설로 나뉘고, 聖音 의 경우, 聖晋 이라고도 해독하기도 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故為倭王旨造 문구 가운데 爲 에 대해서는 한국학계의 백제하사설과 일본학계의 동진하사설의 사이에 해석을 달리하고 있고, 旨 의 경우도 인명 혹은 敎旨 와 같이 해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傳 世 는 傳示後世 라고 판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것 역시 한국학계에서 는 하행 형식의 명령문으로 보고 있고, 일본학계에서는 길상구와 같이 해석 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해석에 있어서도 한국학계의 경우, 하행 형식의 명 령문으로, 일본학계의 경우에는 상행 형식으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위의 검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년에는 백제헌상설에 대해서는 부 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근거로 해서 제시 된 백제하사설과 동진하사설의 입장에서의 칠지도 관련 해석을 비교하여 살 펴보기로 보자 泰和 4年 5月 16日 丙午 正陽에 백번 鍛鍊한 鋼鐵로 七支刀를 만들었는데, 모든 兵害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侯王으로 나아가는 게 마땅하다. (아무 개가 이 칼을) 製作하였다. 先世 以來 이 칼이 없었는데, 百濟王 治世에 奇妙하게 얻은(得) 聖스러운 소 식(聖音)이 생겼으므로[奇妙하게 얻었음을 聖스럽게 고하는 까닭에], 倭王을 위해 만든 뜻을 後世에 전하여 보여라.31) 太和(泰和) 4年 5月 16日 丙午日의 正陽 時刻에 백번 단련한 의 七支刀를 만들었다. 이 칼은 나아가서는 百兵을 피할 수가 있다. 정말로 공손한 侯王이 한국고대사연구 60. 조경철(2010), 백제 칠지도의 제작 연대 재론: 丙午正陽을 중심으로, 백제문화 42. 등을 들 수 있다. 31) 이도학(1990), 百濟 七支刀 銘文의 재해석, 한국학보 60.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61 지니는 것이 좋다. 永年에 걸쳐 大吉祥하라. 先世 以来 아직 이러한(形의 또는 그 때문에 百兵을 피할 수가 있는 呪力이 강하다) 칼은 百済에게는 없었다. 百済王과 世子는 일생을 聖스러운 晋의 皇 帝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그 이유로 東晋 皇帝가 百済王에게 사여한 旨 을 倭王과 함께 共有시키려고 이 칼을 造 했다. 後世에도 영원히 이 칼(과 여기 에 감춰진 東晋 皇帝의 뜻)을 전하여 보여라.32) 이처럼 같은 칠지도의 명문을 두고 한국학계와 일본학계에서, 백제하사설 과 동진하사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해석이 다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왜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선행 칠지도 관련 연구사를 검토해 보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칠지도의 연구사는 대체로 4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33). 1기에 해당 하는 1950년대의 초반까지의 연구는 한국의 경우,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시 대적인 상황 때문에 일본인 학자의 주도하에서 행해졌다. 주된 관심과 연구 의 방향은 연호가 泰始 인가 泰初 인가에 두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칠지도의 내용을 파악하기 보다는 일본서기 기록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데 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기는 1950년대의 초반부터 1960년대의 초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는 칠지도의 정밀한 조사가 행해져서 명문의 판독에 대해서 많은 성과를 올 렸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으로 인해 일본서기 의 고대한국 관련 기록을 2주갑 인하하여 해석하는 방법론이 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 한 기년의 조정 방법에 의해서 칠지도 연호의 東晋太和說과 함께 백제헌상 설이 일본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기는 1960년대의 중반부터 1970년대의 후반까지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계기는 이 시기에 김석형의 삼한ㆍ삼국 일본 열도분국론 이라는 학설이 제 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설에서 씨는 泰 는 중국의 연호가 아니라 백제의 32) 太和(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の日の正陽の時刻に百たび練った の七支刀を造った この 刀は出でては百兵を避けることが出来る まことに恭恭たる侯王が佩びるに宜しい 永年にわた り大吉祥であれ 先世以来 未だこのような(形の また それ故にも百兵を避けることの出来 る呪力が強い)刀は 百済には無かった 百済王と世子は生を聖なる晋の皇帝に寄せることとし た それ故に 東晋皇帝が百済王に賜われた 旨 を倭王とも共有しようとこの刀を 造 った 後世にも永くこの刀(とこれに秘められた東晋皇帝の旨)を伝え示されんことを [濱田耕作(2010), 앞의 논문.] 33) 시기를 나누어 검토한 연구로는 神保公子(1981), 앞의 논문; 吉田晶(2001), 앞의 논문; 김영 심(1992), 앞의 논문; 주보돈(2011), 앞의 논문 등을 들 수 있다.
6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독자 연호라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서 종래 일본학계의 백제헌상설과는 정반대 되는 백제하사설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주장의 제기로 인해 칠지도는 일 본서기 와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 다. 또한 이 설로 인한 일본학계의 충격은 칠지도의 백제헌상설에 대한 반성 으로 나타났고, 재검토를 통해 양국대등설이나 동진하사설을 탄생시키는 기 반을 제공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은 고대한일관계사상을 구축하여 온 주된 기본사료였던 일본서기 의 고대한국 관련기사도 재검토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4기는 197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의 연구자만이 아니라, 한국의 연구자들도 칠지도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가담하 여 보다 천착되고 다양한 연구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문헌 연구 뿐만 아니라 고고학, 사상사 등의 분야에서의 많은 연구가 진행 34) 되어 성과 를 올리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칠지도 연구는 시기적으로는 4세기에 한 정된 문제가 아니라, 5세기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위한 시기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이러한 칠지도의 연구사를 볼 때, 그 연구가 백제헌상설로부터 백제하사설, 동진하사설로 변화, 발전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설 도 각각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어느 설이 확정적 이라 결론 지울 수 없다. 그러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칠지도의 명문에 아직도 판독에 있어 주장이 엇갈 리는 문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점은 연구의 출발시점과 연구 과정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 양국의 국가와 민 족의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부언하자면, 19세기 칠지도 해석의 출발점에 있어서 일본서기 란 사서가 강력한 입론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근거로 지배와 피지배로 해석한 것 이 근대 일본의 역사학의 도입과 고대사 학문의 구축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4, 5세기의 백제와 왜의 관계를 정치적 상하 34) 村 山 正 雄 의 연구[1996, 石 上 神 宮 七 支 刀 銘 文 圖 錄, 吉 川 弘 文 館 ]와 같이 X 레이 사진을 통 한 고고학적 방법이라든지, 칠지도를 도교사상과 연관하여 해석하려는 주장[ 王 仲 殊 (1992), 石 上 神 宮 の 七 支 刀, 中 国 から 見 た 古 代 日 本, 学 生 社 ; 김영심(2013), 앞의 논문.]도 있다. 그러나 백제에 도가사상은 전래되었지만, 도교사상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도가사상과 도교사상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졸고(2006), 일본서기 와 고대사상, 일어일 문학 29를 참조할 것.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63 관계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주변국 특히 바다나 자연적 환경으로 인해 떨어진 지역의 국가간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혹은 우월, 월등 하다고 보는 관념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아가 사료로 인용되고 있는 일본서기 편찬기의 신라와 왜의 관계도 마찬가지라 본다. 당시의 백제와 왜의 어느 한 쪽이 정치적으로 지배, 피지배 관계에 있었다 거나 군사적 우월을 전제로 한 조공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객관적 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전쟁을 통한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당사국들이 정치적, 군사적 우위와 열세를 상호 인정하지 않는 예는 역사상 에 수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칠지도의 문제를 헌상이라든지 하사라는 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하 려는 방법론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칠지도가 백제에서 왜로 보내어졌다는 사실을 헌상과 하사라고 해석하는 것은 당시의 국제관계에서 타당한 것인지? 보내는 자와 받는 자의 관념과 외교적 수사의 인식의 문제를 도외시 한 것은 아닌지? 즉, 백제가 칠지도를 하사하였다고 하더라도 왜는 이를 헌상하였다 고 받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35). 결국, 칠지도 문제의 연 구 과정에서 형성된 양국의 역사관이 오늘날의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관의 형성에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점은 칠지도의 명문이 상당 부분이 판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해 석에 있어서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4. 결론 이상으로 칠지도의 연구가 고대한일관계사와 어떻게 관련지어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칠지도는 고대한일관계사의 연구와 상호 연관성을 가지면서 연구되어 왔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백제헌상설의 경우, 일본서기 의 내용으로부터 만들어진 야마토왕권에 의한 고대한국남부 지역 지배설을 실체화하는 임나일본부설 을 보강하는 유력한 근거로서 이용 35) 칠지도가 백제왕의 왜왕에 대한 臣屬도, 백제왕에 의한 왜왕의 봉건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지적[山尾幸久(1989), 앞의 논문 173쪽; 王仲殊(1992), 앞의 논문, 3쪽.]은 이와 연관성이 있 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김영심(2010), 앞의 논문, 108쪽.]. 이러한 관점은 향후 일본서기 를 이해하는 관점이 되기도 한다. 자세한 고증은 후일의 연구에 맡기기로 한다.
64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 중반 이후, 김석형의 삼한ㆍ삼 국 일본 열도분국론 을 계기로 백제하사설이 제기되면서, 동진하사설에로의 해석 변화가 일어났다. 이후 일본의 연구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의 고대 한국의 정세 즉, 고구려의 남하에 의한 백제의 對倭 외교의 필요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 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들 연구는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 대립 이란 동아시아의 정세가 야마토왕권의 고대한국의 제 국가에 대한 정치적 우 위권의 유지를 합리화 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주장이라 생각된다. 이 점은 종 래 칠지도 문제에 있어서 왜왕권 우위의 해석은 임나일본부설 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한일관계사가 책봉체제론 과 동이소제국론 으로 변용되어 왔던 시 대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삼한ㆍ삼국 일본열도 분국 론 이란 학설의 주장을 계기로 역사의 해석에 있어서 시공간의 확대와 상대국 인 고대한국의 정치적인 논리와 이념을 수용하려는 일시적 움직임을 보이기 도 하였지만, 동진하사설의 배경에는 아직도 일본의 고대한일관계사학계에서 는 여전히 야마토정권 우위의 역사관 이란 관념과 인식은 변함없이 계승, 유 지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8세기 일본서기 의 율령사관과 20세기 초두의 제국일본 시기 에 형성된 민족적 역사관이 저변을 형성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백제하사설의 주장의 배경에도 일본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주의란 역 사인식이 고대사 해석에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한일관계사 연구에서 그려 지고 있는 고대의 한국과 일본 양국의 지배, 피지배의 관념은 당시의 사실이 아니라 8세기 율령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관념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학의 목적이 자료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事實의 규명에 있다고 한다면, 비교 사료가 부족하고 불확실한 고대의 경우 국가 간 의 교류를 지배와 피지배라는 일방적인 관념으로 접근하려는 방법은 배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국가와 민족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의 앞에서 역사가가 얼마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근본적인 의문 에 대한 고민과 연관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본인만 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국민국가 간의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4, 5세기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를 정치적, 군사적 상하관계로 해석하고 연동하여 구별 지우려는 역
七支刀 와 고대한일관계사 (정효운) 65 사 해석 방법론은 향후의 역사연구에 있어서 지양되어야 할 점이라고 생각된 다. 칠지도 교류 단계의 동아시아의 역사도 그러한 상하관념으로 해석하는 방법론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더 이상 고대의 역사를 현대 국가 적 관념의 틀 속에서 해석하려는 방법론은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문헌> 김석형[(1963), 삼한 삼국의 일본렬도 내 분국(分國)들에 대하여, 력사과학 1. 김석형(1966),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김영심(1992), 七支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김영심(2013), 七支刀의 성격과 제작배경, 한국고대사연구 69, 한국고대사학회. 김현구(2010), 백촌강싸움의 성격에 관한 일고찰, 한일역사쟁점논집, 동북아역사재단. 손영종(1983), 백제 7지도의 명문 해석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1), 력사과학 4. 연민수(1998), 칠지도 명문의 재검토,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이도학(1990), 百濟 七支刀 銘文의 재해석, 한국학보 60. 이병로(2007), 한국에서의 일본사연구의 현황과 전망, 일본문화연구 22. 정효운(1995), 고대 한일 정치교섭사 연구 학연문화사. 정효운(2006), 일본서기 와 고대사상, 일어일문학 29. 정효운(2007),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임나일본부, 동북아연구 13. 정효운(2009), 6세기 한ㆍ일관계사의 재구축 왜와 임나 관계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연구 56. 정효운(2010), 한ㆍ일 양국의 국가와 민족 속의 100년 고대한일관계사의 형성과 전개를 중 심으로, 일어일문학 47. 정효운(2011), 古代 韓ㆍ日의 年號 使用에 관한 研究, 일어일문학 51. 정효운(2012), 韓國史와 日本史의 遭遇 古代韓日關係史의 觀點에서, 일어일문학 53. 조경철(2010), 백제 칠지도의 제작 연대 재론: 丙午正陽을 중심으로, 백제문화 42. 주보돈(2011), 백제 칠지도의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62. 천관우(1991), 가야사연구, 일조각. 홍성화(2009), 石上神宮 七支刀에 대한 일고찰, 한일관계사연구 34. 홍성화(2010), 5세기 백제의 정국변동과 倭 5왕의 작호, 한국고대사연구 60. 池内宏(1947), 日鮮の交渉と日本書紀の研究, 日本上代史の一研究, 近藤書店. 石母田正(1971), 日本の古代国家, 岩波書店. 王仲殊(1992), 石上神宮の七支刀, 中国から見た古代日本, 学生社. 金澤庄三郞(1929), 日鮮同祖論, 刀江書院. 喜田貞吉(1929), 日鮮兩民族同源論, 民族と歴史 6 1. 栗原明信(1966), 七支刀銘文についての一解釈, 日本歴史 265. 神保公子(1981), 七支刀銘文の解釈をめぐって, 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學生社. 津田左右吉(1966), 古事記および日本書紀の研究, 神代史の研究, 津田左右吉 全集 別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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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 용 의* Abstract This research paid attention to the point that there are tales regarding sexual intercourse between men and pigs in Okinawa, differently from the mainland of Japan. This research investigated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tale based on the concrete case analysis of tale included in Okinawa tale collection book. First, this research pointed out that the existing research method is not meaningful, which discussed by classifying into the type of two species marriage story, e.g. <Receiving pig son in law> and <Pig wife>. The two types did not show remarkable difference in their narrative structure, rather there was a necessity to pay attention to the point why such marriage relationship between human and pig is not valid. Second, in this regard, based on the existing theoretical outcome of the characteristic of Japanese two species marriage story, this research explained from the viewpoint of the daily aspect of pig, as the livestock which lives with human, and the lack of absolute divineness, due to this. Third, pig of Okinawa in the tale was recognized as the spiritual being which can partly change, while its absolute divinness was not acknowledged. Due to this point, it was concluded that the pig was killed at the end in most of the tales related to sexual relationship between human and pig. Keywords : Okinawa folktales, pig, sexual intercourse, negotiation, spiritual being 36) Ⅰ. 머리말 오키나와에서 돼지는 일본 본토와는 달리 각별한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돼지는 오키나와 방언으로 와(ワー) 라고 부른다. 오키나와의 돼지에 관한 기록으로는 류큐왕부(琉球王府)에서 편찬한 지지(地誌)인 유구국유래 기(琉球國由來記) (1713)에 이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1)라고 * 전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일본문화학 전공. 1) 外間守善ㆍ波照間永吉 編, 琉球國由來記, 1997, 角川書店, p.133. 琉球國由來記 는 류 큐왕부에서 최초로 편찬한 체계적인 지지이다. 서문에 1713년 왕이 상람하였다는 기록이 있
68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적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늦어도 18세기 초에는 이미 오키나와에서 돼지 를 길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본토에서 본격적으로 돼지고기를 소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오키나와의 돼지 사육은 전국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2) 오키나와에서 돼지가 얼마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가는 떡 설날, 돼지 설날(餅正月, 豚正月) 이라는 일본어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본 본토에서는 설날을 맞이하여 떡을 장만하여 차려 놓는데 비 해서, 오키나와에서는 돼지를 잡아 설날을 맞이하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 다.3) 오키나와 방언으로는 설날 전에 돼지를 잡는 날을 가리켜서 특별히 와 쿠루시(ワークルシー) 라고 부른다. 오키나와의 시인 다카라 벤(高良勉)의 오 키나와 생활지(沖縄生活誌) 에는 본인이 어려서 체험했던 돼지 잡는 날 에 관한 풍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4)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방언으로 후 루(フール) 라고 부르는 일명 돼지변소(豚便所) 는 변소 바로 밑에 돼지를 사 육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를 보아도 오키나와 에서 인간과 돼지가 다른 가 축에 비해서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오키나와문화에서 돼지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만큼, 돼지 와 관련한 속신도 적지 않게 전해진다. 예를 들면 오키나와 출신의 민속학자 시마부쿠로 겐시치(島袋源七)가 편찬한 얀바루의 토속(山原の土俗) 에는 오 키나와 북부지역에 전하는 돼지 관련 속신이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5) 이 다. 돼지에 관해서는 권4 <生類門>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 일본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是和漢ノ間ヨリ渡り来ル物ナラン 이하 본고에서 인용한 일본어 자료의 한국어 번역은 필자 의 졸역이다. 2) 예를 들면 1880년 당시 오키나와에서 사육하던 돼지는 5만 마리 정도로 이는 일본에서 전국 1위였다고 한다. 沖縄タイムス社 編(1983), 沖縄大百科事典 下, 沖縄タイムス社, p.797. 3)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 赤嶺政信(1998), シマの見る夢, ボーダーインク, pp.78 80. 渡邊欣雄(1993), 世界のなかの沖縄文化, 沖縄タイムス社, pp.108 113. 4) 高良勉(2005), 沖縄生活誌, 岩波書店, pp.16 18. 참고로 일부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 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60년대까지 오키나와의 마을 대부분이 음력으로 설날을 축하했 습니다. 어렸을 때의 가장 큰 즐거움은 설날이 되면 세뱃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돼 지고기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30일과 섣달그믐에는 시마(シマ)라고 부르 는 마을의 곳곳에서 돼지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띠로 지붕을 이은 집에 살며, 평균적으 로 모두 가난했던 마을에서는 친척 혹은 이웃끼리 돈을 조금씩 내서 공동으로 돼지를 잡았습 니다. 설날 쓸 것을 비롯해서 반년 동안 먹을 돼지고기를 서로 나누어가졌습니다. 먼저 반년 간 정성껏 돼지를 길러온 집의 부엌 근처에 돼지를 묶어놓고, 경동맥을 잘라서 도살합니다. 목에서 흐르는 피는 한 방울도 헛되이 흘러가지 않도록 세숫대야에 잘 받아냅니다. 그리고 재빨리 소금을 넣고 저어가며 피를 굳힙니다. 이것은 귀중한 지이리차(チーイリチャー, 피와 야채를 섞어 볶은 것) 의 재료로 사용합니다. 5) 島袋源七(1974), 山原の土俗 <日本民俗誌大系>第1卷, 角川書店, pp.365 370. 초판은 1929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69 속신들을 종합해 보면, 일찍이 오키나와 사람들은 돼지의 행동을 보고 날씨 를 점쳤고, 돼지를 의례의 제물로 바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돼지를 일종의 영적인 존재로까지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오키나와문화에서 인간과 돼지의 관계는 설화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된다. 일반적으로 일본 본토에는 인간과 돼지의 교섭에 관한 설화가 그다지 전 해지지 않는다.6) 인간과 돼지의 교섭 중에서도 특히 성적 교섭에 관한 이야 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비해서 오키나와 설화에는 돼지가 인간으로 둔갑하여 인간과 성적 교섭을 갖는 이야기가 곧잘 전해진다. 이 경우에 돼지 는 여성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남성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키나와 설화에 등장하는 돼지는 인간을 유혹하여 성적 교섭을 갖더라도 혼인에는 이 르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설화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이류혼인(異類婚姻)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파 탄을 맞이한다. 본고에서는 특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 는 인간과 돼지의 교섭 양상 및 그 민속적 배경에 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Ⅱ. 인간과 돼지에 관한 오키나와 설화의 유형 앞서 언급한 대로, 일본 본토에는 인간과 돼지의 교섭에 관한 설화가 매우 드물다. 이 점에 관해서는 민간에 전하는 설화를 집대성한 민담자료집을 확 인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이른 시기에 일본의 민담을 모아서 체계적인 년 鄕土硏究社에서 간행되었다. 본고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으므로, 이 자료에 기록된 얀바루 지역의 속신 중에서 돼지에 관한 속신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돼지가 소굴을 만들어도 우 천(雨天), 돼지가 부엌 또는 집안으로 들어오면 재액이 생긴다.(하마오리[浜降り]를 해야만 한 다), 돼지우리에 침을 뱉어서는 안 된다.(돼지는 장님 신[盲神]이라 하므로 만약 침을 뱉으면 가난뱅이 신[貧乏神]이 되고 만다), 재채기를 했을 때에 똥 먹어라 라고 말해야만 한다.(둔갑 한 돼지가 대나무로 코를 건드린다), 돼지우리에서 놀래서는 안 된다.(반드시 혼령이 빠져나 가 버린다), 돼지우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반드시 소인이 된다. 아니면 석녀 또는 석남이 된다), 돼지우리에서 도깨비불(妖怪火)을 보거나 혼령을 보았을 때에는 소원을 빈다.(거기서 본 것은 전부 자신의 혼령이라고 여긴다), 물에 빠져죽은 사람의 시체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 는 돼지머리를 바다에 집어던진다.(돼지 대신에 시체가 떠오른다) 6) 예를 들면 김용의는 日本の民話 전집(전 26권)에 수록된 동물설화 187편을 대상으로 20위 까지 등장동물의 빈도 순위를 조사하였다. 이를 보면 돼지는 20위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김용의(2001), 한일 동물설화의 비교연구(1) 일본어문학 제10집, 한국일본어문학회, p.112.
70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분류를 시도한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의 일본민담명휘(日本昔 話名彙) 에서 확인하기로 한다. 야나기타 구니오는 민담을 크게 <완형민담 (完形昔話)>과 <파생민담(派生昔話)>으로 이분하였다.7) 이어서 각각의 유형 밑에 하위유형을 설정하여 분류하였다.8) 그렇지만 <완형민담>이나 <파생민 담> 어디에도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에 관한 이야기는 수록되지 않았다. 물론 해당 사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형 분류도 시도되지 않았다. 이 점에 관해서 세키 게이고(關敬吾)가 펴낸 일본의 대표적인 민담자료집 인 일본민담대성(日本昔話大成) (전 12권)에서 확인하기로 한다. 세키는 일본민담대성 에서 민담을 크게 <동물민담(動物昔話)>, <본격민담(本格昔 話)>, <소화(笑話)>로 나누어 삼분하였다. 말하자면 세키는 야나기타 의 이분 법에 대해서 삼분법을 채택한 셈이다. 세키의 <본격민담>은 야나기타의 <완 형민담>에 대응한다. 일본민담대성 에는 인간과 동물의 성적 결합에 관한 다양한 유형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일본민담대성 에도 인간 과 돼지의 성적 교섭에 관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면 <본격민담> 의 하위유형으로 분류된 <혼인ㆍ이류 사위(婚姻ㆍ異類聟)>, <혼인ㆍ이류 아 내(婚姻ㆍ異類女房)>, <혼인ㆍ난제 사위(婚姻ㆍ難題聟)> 그 어느 유형에도 인간과 돼지의 교섭에 관한 사례가 포함되지 않았다.9) 일본의 설화에는 왜 돼지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하였다. 예를 들면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 는 구승문예사고(口承文藝史考) 라는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7) 야나기타 구니오는 영웅의 일생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본래 민담의 의의였다고 보고 이 를 가리켜 <완형민담>이라고 불렀다. 이 <완형민담>에서 일부가 독립하여 떨어져 나온 이야 기를 가리켜 <파생민담>이라고 불러서 구별하였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 논저를 참고. 小 澤俊夫(1994), 昔話のコスモロジ, 講談社, pp.13 14. 8) 참고로 <완형민담>의 하위유형에는 <탄생과 기서(誕生と奇瑞)>, <불가사의한 성장(不思議な 成長)>, <행복한 혼인(幸福なる婚姻)>, <의붓자식 이야기(まま子話)>, <형제의 우열(兄弟の優 劣)>, <재보 발견(財宝發見)>, <액난 극복(厄難克服)>, <동물의 원조(動物の援助)>, <말의 힘(言葉の力)>, <지혜의 작용(知恵のはたらき)> 등을 설정하였다. <파생민담>의 하위유형에 는 <인연 이야기(因緣話)>, <요괴 이야기(化物話)>, <소화(笑話)>, <조수초목담(鳥獸草木 譚)>, <기타(その他)> 등을 설정하였다. 柳田國男 監修(1948), 日本昔話名彙, 日本放送出 版協會. 9) 예를 들어 동물이 여자로 둔갑하여 남자와 교섭을 갖는 <혼인ㆍ이류 아내> 유형에는 뱀, 개 구리, 대합, 물고기, 용궁여자, 학, 여우, 고양이, 천녀 등이 아내로 등장하지만 돼지와 관련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關敬吾(1978), 日本昔話大成 2, 角川書店, pp.157 262.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71 그 동물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짐승 이야기가 많은 것은 몸집이 커서 가장 인 간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주의해서 보면 등장동물이 또한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멧돼지가 좀처럼 등장하지 않고, 서양에서도 옛날부터 기른 가축이었던 돼지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10) 야나기타는 동물 중에서도 짐승이 벌레 등에 비해서 몸집이 커서 인간과 가깝기 때문에 설화에 자주 등장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돼지(멧돼지)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 특징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 점과 관 련하여 사쿠라이 도쿠타로(櫻井徳太郎)는 야나기타가 지적한 내용을 더욱 구 체적으로 전개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였다. 첫째 일상생활에 비근한 동물이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닭, 개, 고양이, 돼 지, 소, 말 등과 같이 순치된 가축들은 거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가령 등장 하더라도 주로 조역을 맡는 데에 불과하다. 둘째 심상(尋常)한 생태, 말하자면 단순한 행동이나 성향을 보이는 동물도 그다지 포함되지 않는다. 이상행동이 나 비인간적인 습성이 주목되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인간에게 공포감이나 외 포(畏怖)를 느끼게 하는 동물이 주로 등장한다. 때로는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 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맹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넷째 그 초월적 영 력(靈力)이 인정되어 신과 교섭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는 동물이다.11) 사쿠라이는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비근한 위치에 있는 동물, 단순한 성 향이나 행동을 보이는 동물, 인간에게 위협적인 공포감을 주지 않는 동물, 초 월적 영력이 인정되지 않는 동물이 설화에 등장하기 어렵다고 파악하였다. 사쿠라이가 설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서 지적한 네 가지 점은 오키나와의 설화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오키나와의 설 화에서 그 예외적인 사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돼지는 그 예외적인 사례에 속하는 동물 중의 하나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키나와의 돼지는 변소라는 공간을 공유할 정도로 인간과 일상생활을 같이 하는 단순한 성향의 가축이다. 뿐만 아니라 산속에 서식하는 맹수와 비교할 때에 인간에게 공포감이나 외포(畏怖)를 느 10) 柳田国男(1963), 口承文藝史考 定本柳田国男集 第六卷, 筑摩書房, pp.99 100. 11) 櫻井徳太郎(1972), 動物昔話の類型 人獣交渉史の視点 文学 40, 岩波書店, p.97.
72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끼게 하는 동물이 아니며, 초월적 영력을 발휘한다는 측면에서도 이들 산속 의 맹수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설화에는 돼지가 등장하여 인간과 교섭을 갖는다. 앞서 인용한 사쿠라이의 해석은 비 록 오키나와 설화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지만, 오키나와 설화에서 인간과 돼지 사이에 혼인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점에 관해서는 본고의 3장에서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일본의 민담자료집 중에서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에 관한 이야기가 다 수 수록된 것은 이나다 고지(稻田浩二)와 오자와 도시오(小澤俊夫)가 책임편 집을 맡은 일본민담통관(日本昔話通觀) (전 31권)이다. 이 일본민담통관 은 전체적으로 모든 민담을 <옛이야기(むかし語り)>, <소화(笑い話)>, <동물 민담(動物昔話)>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다시 각각의 유형에 하위유형을 설 정하여 분류하였다. 일본민담통관 의 <옛이야기>는 야나기타의 <완형민담>, 세키의 <본격민담>에 해당한다. 이 자료집은 민담을 지역에 따라서 각 권별 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그 중에서 제26권은 오키나와에 전해지는 민담을 수 록한 자료집이다. 여기서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에 관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민담통관 에는 돼지가 여자로 둔갑하여 남자를 유혹하는 이야기 를 <돼지가 둔갑한 미녀(豚化け美女)>라는 제목을 붙여 유형 분류하였다. 여 기에는 전형적인 유형의 이야기를 요약하여 1편 수록하고 유사한 이야기(類 話)를 모두 13편, 그리고 참고 이야기(參考話)를 1편 수록하였다.12) 그런데 여기 수록된 총 15편에 이르는 이야기를 유의해서 읽어보면, 그 중 에서 <유화3> 및 마지막의 <참고 이야기>는 돼지가 여자로 둔갑하여 남자를 유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돼지가 남자로 둔갑하여 여자를 유혹하는 이야기 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돼지가 둔갑한 미녀>라는 제목에 들어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는 이 부분의 편집자가 착각을 하여 잘못 분류한 결과이다. 한편으로는 그 만큼 오키나와에서 돼지가 여자로 둔갑하여 남자를 유혹하는 이야기가, 남자로 둔갑하여 여자를 유혹하는 이야기보다도 일반적 인 유형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일찍이 다하타 지아키(田畑千秋)는 오키나와의 설화에 나타난 인간과 돼지 사이의 교섭에 관한 이야기를 <돼지사위 맞이하기(豚聟入)>와 <돼지 아내(豚 女房)>라는 두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한 바가 있다. 여기서 <돼지사위 맞이하 기>는 돼지가 잘 생긴 남자로 변해서 여자와 관계를 갖는 이야기를 의미하 12) 稲田浩二ㆍ小沢俊夫責任編集(1983), 日本昔話通觀 第26卷, 同朋舍出版, pp.262 264.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73 며, 반대로 <돼지 아내>는 돼지가 여자로 변해서 남자와 관계를 갖는 이야기 를 가리킨다. 13)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오키나와에 전하 는 인간과 돼지의 교섭에 관한 설화를 검토하면, 인간과 돼지 사이에 성적 교섭은 가능했지만 돼지의 정체가 인간에게 발각되어 혼인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류혼인의 단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한다. 앞 서 다하타가 유형을 분류한 <돼지사위 맞이하기>와 <돼지 아내>는 설화 연 구자들 사이에서 어디까지나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이류혼인을 전제로 하는 유 형 분류이다. 따라서 오키나와의 인간과 동물에 관한 설화를 <돼지사위 맞이 하기>와 <돼지 아내>라는 이름으로 이류혼인담에 포함시켜 분류하기에는 무 리가 있다. 물론 다하타도 이 점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후속 연 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정하여 언급하였다. <돼지 아내( 豚 女 房 )>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약간 주저되는 이야기이다. <여 우 아내( 狐 女 房 )><대합 아내( 蛤 女 房 )> 등의 이류혼인담과는 두드러지게 차이 가 있어서 혼인이 성립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돼지 요괴에게 홀린 이야기>이 다. 물론 앞서 소개한 <미남으로 둔갑한 돼지( 美 男 に 化 ける 豚 )>도 <돼지사위 맞이하기( 豚 聟 入 )>라고 말하기에는 주저된다. 다른 이류혼인담과 달라서 민담 으로서는 역시 미성숙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유형 모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민담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4) 다하타는 자신이 시도한 <돼지사위 맞이하기>와 <돼지 아내>라는 이름의 유형이 애초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 한계란 이류혼인담에 포함시켜 분류하기에는 혼인이라는 모티브를 확인할 수 없는 데서 발생하는 한계이다. 따라서 다하타처럼 애초에 <돼지사위 맞이하기>와 <돼지 아내>라 는 두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오키나와 설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돼지의 관계에 있어서 확인되는 두드러진 특징인, 양자 사이에 구체적인 혼인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검토하는 편이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 같다. 본고에서는 일본민담통관 을 비롯한 오 키나와의 설화자료집에 수록된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이 점을 검토하고자 한 다. 13) 田 畑 千 秋 (1978), 豚 聟 入 とその 周 辺 沖 縄 文 化 研 究 5, 法 政 大 学 沖 縄 文 化 研 究 所, p.339. 14) 田 畑 千 秋 (1995), 美 女 に 化 ける 豚 昔 話 伝 説 研 究 の 展 開, 三 弥 井 書 店, p.97.
74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Ⅲ.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오키나와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교섭 이야기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유형은 돼지가 아름다운 여자로 둔갑하여 남자를 유혹하였다가 후에 그 정체 가 탄로 난다는 이야기이다. 먼저 관련 사례를 보기로 한다. [사례1] 청년들이 어울려 놀고 있는 곳에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났다. 한 청년이 여 자를 쫓아가서 말을 걸고 친해져, 한번 놀 때 마다 돈을 삼 관(貫)씩 주었다. 청년은 여자가 아단(アダン) 잎으로 엮은 신발이 아니라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이상케 여겨서 한쪽 신발을 감추었다. 여자는 발을 질질 끌며 돌아갔다. 다음날 청년이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보니 돼지 발굽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돼지를 조사하니, 마을에서 떨어진 돼지우리에 사는 늙은 돼지 의 우리에 돈이 쌓여 있고 그 한쪽에서 돼지가 자고 있었다. 그 돼지를 죽였 다.15)(밑줄, 필자) [사례1]은 일본민담통관 에 요약된 이야기이다. 여기서 청년들이 어울려 놀고 있는 곳 이란 오키나와 방언으로 모아시비(毛遊び) 라고 부르는, 젊은 남녀가 밤에 함께 어울려 놀던 풍습을 의미한다.16) 이 모아시비에 나타난 아 름다운 여자는 평민들이 주로 신었던 아단나무 잎으로 엮은 신발이나 짚신이 아닌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이를 이상케 여긴 청년이 그 가죽신을 감추었는 데 알고 보니 가죽신이 아니라 돼지 발굽이었다. 이로 인해 돼지의 정체가 탄로 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돼지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신 고 있었던 가죽신으로 인해서 정체가 탄로 난다. [사례1]에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청년이 여자와 한 번 어울릴 때마다 돈을 3관씩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이 돼지우리에 그대로 쌓여있었다는 대목이다. 이 대목에 관해서 는 다음의 [사례2]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5) 稻田浩二ㆍ小澤俊夫 編(1983), 日本昔話通觀 第26卷, 同朋舍出版, p.262. 16) 모(モー) 는 오키나와말로 들판 을 의미한다. 남녀가 둥글게 둘러앉아서 샤미센(三味線)을 잘 다루는 남자와 노래를 잘하는 여자를 가운데 두고 함께 가무를 즐겼다. 이 모아시비에서 마음이 맞은 남녀는 성관계를 갖고, 이어서 남자가 여자 집을 방문하여 자는 기간을 거쳐 혼 인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渡邊欣雄 他編(2008), 沖縄民俗辭典, 吉川弘文館, p.515.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75 [사례2] 옛날 어느 곳에 가죽신을 신고서 고개를 숙인 채 추파를 던지며 지나가는 미녀가 있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젊은 남자 중에서 이 여자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젊은 남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 미녀를 칭찬했다. 그런데 도 그 여자는 잠자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여자에게 돈을 6전(3 관) 주기만하면 하룻밤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어느 날, 이 말없는 여자가 사는 곳이나 이름을 알고자 하여 여러모로 장난을 걸었지 만, 여자는 그저 웃기만 할뿐으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그 여자 가 신고 있던 가죽신을 벗겨서 빼앗았다. 여자는 발을 끌며 어디론지 사라졌 다. 다음날 아침에 젊은이들은 그 가죽신을 확인해 보고서 너무 놀랐다. 그것 은 무엇이었을까. 기괴하게도 그것은 돼지의 발톱이었다. 젊은이들이 모여서 각 집을 돌며 돼지우리를 조사하였다. 그랬더니 어느 집에서 수 십 년이 지난 돼지가 발톱이 빠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비로소 그 돼지가 둔갑했다는 사실 을 알게 되었고, 또한 매일 아침마다 돼지 주인이 돼지우리에서 돈 6전씩을 주었던 수수께끼도 풀렸다. 이때부터 매음을 하는 여자를 가리켜 3관 여자 라 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창기나 매음부를 3관 여자 라고 부르고 있 다.17)(밑줄, 필자) [사례2]는 앞의 [사례1]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다. [사례1]과 [사례2]는 기본 적으로 정체모를 미녀의 출현, 돈 3관을 주고 미녀와 성적인 관계를 맺기, 미 녀가 신고 있던 가죽신 감추기, 둔갑한 돼지의 정체가 발각이라는 서사구조 로 되어 있다. [사례2]에는 정체가 탄로 난 돼지를 살해하는 대목이 서술되지 않았으나, [사례1의 경우에 비추어볼 때에 [사례2]에서도 살해되었을 것이다. [사례1]과 [사례2]에서는 여자가 신고 있던 신발을 감추어 둔 것이 계기가 되 어 여자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이 모티브는 오키나와의 인간과 돼지의 교섭 이야기에서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다음 사례를 참고하기로 한다. [사례3] 달밤에 남녀가 어울려 놀고 있는데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나타나서 바람 부는 방향 쪽에 앉는다. 여자는 새가 울 무렵이 되면 돌아가므로 남자 한 사 람이 이를 이상케 여겨서 짚신을 감추었다. 여자가 짚신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짚신이 돼지발톱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에 있는 돼지를 모두 조사하였더니, 백년을 산 돼지가 발톱이 빠 17) 島袋源七(1974), 山原の土俗 日本民俗誌大系 第1卷, 角川書店, pp.345 346.
76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진 채로 죽어 있었다. 동물은 오랫동안 기르면 둔갑하기 때문에 오래 기르면 안 된다.18)(밑줄, 필자) [사례3] 또한 둔갑한 여자 돼지가 달밤에 남녀가 어울려 노는 모아시비 장 소에 나타났다가 자취를 감춘 이야기이다. 어울려 놀았던 남자 한 사람이 여 자가 신고 있던 짚신을 감추어 둔 것을 계기로 여자의 정체가 탄로 난다. [사 례3]에서는 백년을 산 돼지 가 등장하여, 돼지가 오래 살면 인간으로 둔갑한 다는 돼지의 요괴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그 요괴성으로 말미암아 동물은 오 랫동안 기르면 둔갑하기 때문에 오래 기르면 안 된다. 라는 일종의 교훈담에 가까운 형태로 전해진다. 오키나와 설화에서 여자로 둔갑한 돼지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신발을 감추는 행위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때로는 돼지 본연의 이상한 냄새 때문에 정체가 탄로 나기도 한다. [사례4] 아름다운 여자가 젊은이들이 어울려 노는 곳에 나타났다. 한 남자가 이 여 자를 좋아하여 어울려 놀았다. 남자는 여자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났으므로 여 자 뒤를 밟았다. 여자는 돼지우리로 들어갔다. 그 후로 돼지를 오래 기르면 인 간으로 둔갑한다고 해서 오래 기르지 않았다.19)(밑줄, 필자) [사례4]의 도입부는 이제까지 보아온 다른 사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젊 은이들이 모여 노는 곳, 다시 말하자면 모아시비에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 서 함께 어울려 놀았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뒤를 밟 았더니 돼지였다는 이야기이다. [사례4]에서도 이야기의 말미에 그 후로 돼 지를 오래 기르면 인간으로 둔갑한다고 해서 오래 기르지 않았다. 라고 하여, 돼지를 오랫동안 길러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미녀로 둔 갑한 돼지는 때때로 돼지의 본성을 감추지 못했다가 그 정체가 탄로 나기도 한다. [사례5] 몇 십 년이나 기른 어미 돼지가 미녀로 둔갑하여 모아시비(野遊び)에 나가 18) 稻田浩二ㆍ小澤俊夫 編(1983), 日本昔話通觀 第26卷, 同朋舍出版, p.262. 19) 稻田浩二ㆍ小澤俊夫 編(1983), 日本昔話通觀 第26卷, 同朋舍出版, p.263.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77 사람들 틈에 끼어서 떠들썩하게 놀았다. 그 미녀는 남녀가 손으로 박자를 맞 출 때에 꿀꿀, 꿀꿀 하고 박자를 맞추었다. 어떤 사람이 이상한 여자라고 생 각하고 뒤를 밟았더니 돼지로 변해 있었다. 20) (밑줄, 필자) [사례5]에 등장하는 돼지는 매우 해학적으로 묘사되었다. 둔갑한 돼지가 모아시비에 나가서 함께 어울려 노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다른 남녀들과 박 자를 맞추지 못했다가 그 정체가 탄로 나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인간들의 유희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로 정체가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설화 속의 오키나와 돼지는 여자로 둔갑하는 능력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남자로 둔갑하여 여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오키나와 의 돼지는 설화 속에 남녀 양성의 인간으로 둔갑하는 능력을 지닌 동물로 등 장한다. 이 경우에도 대개는 앞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그 정체가 탄로 나기 마련이다. [사례6] 옛날, 어느 곳에 검은 머리띠( 黑 長 布 )를 두른 사내가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조리( 皮 裏 草 履 )를 신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며칠이고 젊은 여자 무리 에 섞여서 이들을 유혹하려 하였다. 어느 날, 언제나처럼 한 처녀를 손에 넣으 려고 열심히 구애하였다. 그 처녀는 사내의 정체를 몰랐지만, 처녀의 친구는 이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녀의 친구는 이를 그 처녀에게 알리고자 똥냄새 가 나는데, 뭐지? 라고 놀려댔다. 사내는 이미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을 깨닫고 돼지로 변해서 맥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21) (밑줄, 필자) [사례6]은 법률가이자 민속학자인 사키마 고에이( 佐 喜 眞 興 英 )가 편찬한 남도설화( 南 島 説 話 ) (1922)에 수록된 사례이다. 22) 사키마의 남도설화 에는 인간과 돼지의 교섭에 관한 민담이 3편 수록되어 있다. 23) 20) 稻 田 浩 二 ㆍ 小 澤 俊 夫 編 (1983), 日 本 昔 話 通 觀 第 26 卷, 同 朋 舍 出 版, p.263. 21) 佐 喜 眞 興 英 (1922), 南 島 說 話, 鄕 土 硏 究 社, p.13. 22) 오키나와 기노완( 宜 野 湾 ) 출신의 민속학자 사키마 고에이( 佐 喜 眞 興 英 )가 20여 년 동안 구술 자를 찾아다니며 직접 채록한 설화 중에서 100편을 골라서 수록한 민담설화집이다. 여기 수 록된 민담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각 민담의 채집지역 및 구술자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23) 참고로 제14화 <아사토( 安 里 ) 위쪽의 돼지>의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머지 1편은 본문에서 [사례8]로 제시하였다. 옛날, 아사토( 安 里 ) 위쪽의 무덤 앞에서 몇 대에 걸쳐 오래 산 늙은 돼지와 어떤 사내가 교
78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사례6]은 돼지가 남자로 둔갑하여 여자들을 유혹하려고 한 대목을 제외하 면 대체적으로 앞서 고찰한 사례들과 유사하다. 특히 [사례6]은 [사례1]의 유 형과 [사례4]의 유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티브를 혼합하여 조합해놓은 것 같은 서사구조로 이루어졌다. [사례1]과는 둔갑한 돼지가 가죽신을 신고 있었 다는 점이 유사하며, [사례4]와는 냄새로 인해서 그 정체가 발각된다는 점이 유사하다. 돼지가 남자로 둔갑하는 사례를 하나 더 참고하기로 한다. [사례7] 정체불명의 남자가 아름다운 처녀의 처소로 찾아왔다. 처녀는 옆집 노파에 게 상의하였다. 노파는 남자가 어떤 신발을 신고 있었느냐? 고 물었다. 처녀 는 가죽처럼 생겼다. 라고 대답했다. 노파는 그 가죽신을 감춰두고 다음날 아침 변소를 뒤져보아라. 라고 가르쳐주었다. 처녀가 다음날 아침에 그대로 따 라했더니 가죽신은 돼지발톱으로 변해 있고, 변소에 가보았더니 커다란 돼지 가 발톱이 빠진 채로 괴로워하고 있었다.24)(밑줄, 필자) [사례7]은 앞서 살펴본 사례들과는 그 서사구조가 약간 다르다. 도입부의 정체불명의 남자가 아름다운 처녀의 처소로 찾아왔다 라는 대목만을 읽으 면, 얼핏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야래자(夜來者)설화를 연상케 한다.25) 그렇지 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야래자설화와는 달리, 여자가 자신을 찾아온 남 자가 신었던 가죽신을 감추어두었다가 후에 그것이 돼지발톱이었음을 확인하 는 쪽으로 서사구조가 전개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보아온 오키나와의 돼지설화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서사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오키나와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에 관한 7편의 설화 를 살펴보았다. 이들 사례는 돼지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는 모티브에 조금씩 차이가 인정될 뿐으로, 대체적으로 유사한 서사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첫째 돼지가 여자 혹은 남자로 둔갑하여 인간을 유혹하였지만 곧장 돼지의 정체가 탄로 나고야 만다. 그 때문인지 일본의 이류혼인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류 사이의 혼인 모티브를 찾아볼 수 없었다. 둘째 둔갑한 돼지의 정 접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돼지는 인간과 함께 밤놀이도 함께 했다고 한다. 佐喜眞興 英(1922), 南島說話, 鄕土硏究社, p.14. 24) 稻田浩二ㆍ小澤俊夫 編(1983), 日本昔話通觀 第26卷, 同朋舍出版p.264. 25) 참고로 오키나와 설화집에서도 야래자 설화를 확인할 수 있다. 遺老說傳 제68화, 佐喜眞 興英가 편찬한 南島說話 (1922) 제9화가 이 유형의 설화이다.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79 체가 확인되면 대부분 인간에 의해 살해된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 점에 대해서 검토하기로 한다. 먼저 돼지의 정체가 탄로 나서 인간과 돼지 사이에 이류혼인이 성립하지 않는 점에 대한 고찰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고의 2장에서 인용한 사쿠라 이의 지적을 다시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26) 돼지는 닭, 개, 고양이 등과 마찬 가지로 인간세계에서 인간과 생활을 함께 하며 일상적으로 늘 접촉하는 가축 이다. 그 중에서도 오키나와의 돼지는 인간과 변소라는 공간을 공유할 정도 로 친근한 존재이다. 따라서 돼지는 평소부터 인간에게 그 습성이 잘 알려져 있는 관계로, 인간 쪽에서 여자나 남자로 둔갑한 돼지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앞의 사례 중에서 인간으로 둔갑한 돼지가 이상한 냄새를 풍기거나 꿀꿀거리는 소리를 내어 정체가 드러나는 모티브가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돼지의 정체가 발각된 이상 인간과 혼인을 맺는 것은 불 가능하다. 말하자면 돼지는 산속에 거주하는 맹수 등과 비교할 때에 현저하 게 민속적 신성(神性)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키나와의 돼지가 전적으로 신성이 결핍된 동물은 아니었 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언급한 오키나와의 돼지 관련 속신을 분석하 면 분명해진다. 돼지우리에 침을 뱉어서는 안 된다.(돼지는 장님 신[盲神]이 라 하므로 만약 침을 뱉으면 가난뱅이 신[貧乏神]이 되고 만다), 돼지우리 에서 놀래서는 안 된다.(반드시 혼령이 빠져나가 버린다), 돼지우리에 떨어 져서는 안 된다.(반드시 소인이 된다. 아니면 석녀 또는 석남이 된다), 돼지 우리에서 도깨비불(妖怪火)을 보거나 혼령을 보았을 때에는 소원을 빈다.(거 기서 본 것은 전부 자신의 혼령이라고 여긴다) 27) 등의 속신으로 미루어 볼 때에, 적어도 오키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돼지가 일정 부분 영성을 띠고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 사례에서 돼지의 요괴적 영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사례8] 기노완(宜野灣) 가네코(我如古)에 있는 길에 청년 모습을 한 요괴가 매일 밤 나타났다. 슈리(首里)에서 봉공(奉公)하던 관리가 밤늦게 그 길을 지나는데, 역시 청년 모습을 한 요괴가 서 있었다. 그는 기가 센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26) 본고의 각주 11번 참조. 27) 島袋源七(1974), 山原の土俗 日本民俗誌大系 第1卷, 角川書店, pp.365 370.
80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공무로 이렇게 밤늦게 다니는 것이다. 너는 대체 누구를 바보로 만들려고 이 곳에 있는 것이냐, 이놈! 하며 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즉시 흰 돼 지로 변하였다. 그래도 그는 태연하였다. 뭐야, 이놈 하며 이번에는 가지고 있던 횃불로 지졌다. 요괴 돼지는 곧바로 다시 청년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둘은 격투를 시작하였다. 그 관리는 점차 집 쪽으로 물러섰다. 요괴는 계속 그 의 뒤를 쫓아 왔다. (중략) 새벽이 되었다. 이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할머니도 이제 곧 날이 밝을 테니 괴물도 돌아 갔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집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서 몰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요괴는 이를 알아차린 듯 집요하게도 여전히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요괴에게 살해당하여 다음 날 아침에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었다. 요괴는 이런 식이다. 요괴를 괴롭히면 때때로 이렇게 심한 일을 당하는 법이다.28)(밑줄, 필자) [사례8]은 청년으로 둔갑한 요괴가 매일 밤 출현하여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정체를 알고 보니 돼지였다는 이야기이다. 즉 [사례8]의 돼지는 남성으로 인 식되었다. 여기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돼지의 정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 례8]에 의하면, 슈리(首里)에서 봉공(奉公)하던 관리가 청년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침을 내뱉자, 청년이 흰 돼지로 변해서 정체를 드러냈다고 한다. 흥 미롭게도 앞에서 언급한 돼지 관련 속신 중에는 돼지우리에 침을 뱉어서는 안 된다. 라는 속신이 있다. 침을 뱉어서는 안 되는 이유로는 돼지는 장님 신[盲神]이라 하므로 만약 침을 뱉으면 가난뱅이 신[貧乏神]이 되고 말기 때 문이라고 한다. 이 속신이 [사례8]에서 돼지에게 침을 뱉는 대목과 바로 문맥 이 연결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양쪽 모두 돼지의 영성과 관련이 있다는 점만 은 분명해 보인다. [사례8]에 등장하는 돼지는 매우 집요하다. 자신의 정체를 간파한 관리를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끝내 죽이고야 만다. 다시 말하자면 원한을 품은 인간에게 끝내 위해를 가하는 위협적인 요괴인 셈이다. 이 점은 앞서 검토한 여러 사례에서, 정체가 발각된 돼지를 인간들이 죽이는 이유와 관련이 있겠 다. 앞의 사례들에서 인간이 정체가 발각된 돼지를 죽였던 이유는, 무업보다 도 정체가 발각된 돼지가 인간들에게 위해를 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일본의 이류혼인담에서도 보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특성이기도 28) 佐喜眞興英(1922), 南島說話, 鄕土硏究社, pp.56 57.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81 하다. 일본의 이류혼인담은 대개 등장동물이 자연 속에서 인간세계로 내방하 여 인간과 무언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첫째 스스로 퇴거하 거나, 둘째 인간에게 추방되어 자연 속으로 돌아가거나, 셋째 인간에게 살해 당하는 세 유형으로 전개된다.29) 말하자면 혼인의 단계를 거친 후에 퇴거, 추 방, 살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혼인이 파탄을 맞이하는 셈이다. 그런데 자연 속에서 인간세계를 방문하는 동물의 성별이 남성인가 여성인가에 따라서 혼 인이 파탄에 이르는 세 가지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이 점에 관해서 오자와 도시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일본의 이류혼인담에서 내방한 파트너가 여성일 경우에는 파트너가 스스로 퇴 거하든지 추방당하든지 하여 이야기가 그대로 끝난다. 이는 이들 파트너가 인 간세계에서 사라졌지만 자연 속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여 성이므로 위험시되지 않아 그대로 방치된다. 파트너가 남성일 경우에는 인간 세계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 다시 내습할 위험이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해하고 이야기는 끝난다. 위험한 파트너는 이로 인해서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30) 오자와의 해석에 따르자면 이류혼인담에 등장하는 동물이 여성일 경우에 는 향후 인간사회를 위협할 위험성이 낮아서 자연 속에 방치하지만, 등장동 물이 남성일 경우에는 다시 위해를 가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살해하게 된다 는 결론이다. 비록 [사례8]을 이류혼인담 으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이 해석을 적용하기에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돼지가 여자로 둔갑한 사례에서 도, 정체가 발각된 돼지가 위해를 가할 것을 두려워하여 돼지를 살해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특히 그 중에서도 오랫동안 기른 돼지는 요괴적 영성을 발휘하여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여러 사 례에서 돼지를 오래 길러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돼지는 인간과 일상적으로 늘 접촉하는 가축이었다는 점에서 설화적인 신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존재였다. 그리고 오래 살도록 방치해두 면 언젠가 요괴적 영성을 발휘하여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점이 작용하여 오키나와 설화 속의 인간과 돼 지는 이류혼인의 단계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29) 小澤俊夫(1994), 昔話のコスモロジ, 講談社, p.235. 30) 小澤俊夫(1994), 昔話のコスモロジ, 講談社, pp.242 243.
8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Ⅳ. 맺음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물이 설화에 주역으로 등장하여 활약하는 이른바 동물설화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일본설화에도 다양한 동물들이 등 장하는데, 이들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들은 인간사회와의 공간적 거리, 신성의 유무, 인간에 대한 위해성 등의 기준에 따라서 일정한 유형화가 가능 하다. 돼지는 결코 일본의 동물설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물이 아니다. 그 럼에도 오키나와에는 돼지가 둔갑하여 인간과 성적 교섭을 갖는 설화가 적지 않게 전해진다. 본고에서는 인간과 돼지의 교섭에 관한 오키나와 설화를 오키나와 문화에 서 돼지가 차지하는 민속적 의미를 조명하는 데서 출발하여, 구체적인 사례 분석에 근거하여 그 양상을 고찰하였다.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오키나와의 돼지 관련 설화를 <돼지사위 맞이하기>와 <돼지 아내>라 는 이류혼인담의 유형으로 분류하여 고찰하는 기존의 연구방법이 그다지 중 요한 의미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보다는 왜 인간과 돼지 사이에 혼인관계 가 성립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주목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둘째 이 점에 관해서 인간과 동물의 이류혼인담의 특징에 대한 기존의 이 론적 성과를 참고로 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과 생활 을 같이 하는 가축으로서의 돼지의 일상적 측면이 작용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 점과도 관련이 있는 신성의 결핍이라는 측면 때문이다. 물론 수명이 오래 된 돼지의 경우에 일정 부분 신성이 인정되지만, 그 신성이란 결코 인간세계 에서 수용할 수 공샌적 성격의 신성이 아니었다. 그 신성은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는 요괴적 영성에 불과했다. 셋째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에 관한 설화는 대부분 마지막에 돼지를 살 해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그 이유에 관해서 요괴적 영성을 지닌 돼지의 위해성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본고에서는 주로 설화의 서사구조 및 민속문화적 배경을 주목하는 방법으 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때문에 본고에서 거론한 설화들이 언제 어디서 발 생하여 전파하였는지를 밝히기 위한, 다시 말하자면 전파론적 관점에서의 규 명을 시도할 수 없었다. 본고에서 거론한 사례들은 지역적으로 오키나와에만 한정된 설화가 아니다. 중국에도 유사한 모티브 및 서사구조를 지닌 이야기
오키나와 설화에 전하는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의 양상 (김용의) 83 가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수신기(搜神記) 제18권에 유사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키나와는 역사적으로 일본 본토보다도 중국 문화권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앞으로 문화사적 관점에서 중국의 사례를 포함 한 비교연구가 필요하겠다. <참고문헌> 김용의(2001), 한일 동물설화의 비교연구(1) 일본어문학 제10집, 한국일본어문학회, p.112. 임동석 역주(2011), 수신기, 동서문화사, p.1307. 赤嶺政信(1998), シマの見る夢, ボーダーインク, pp.78 80. 稲田浩二ㆍ小沢俊夫 責任編集(1983), 日本昔話通觀 第26卷, 同朋舍出版 稻田浩二ㆍ小澤俊夫 編(1983), 日本昔話通觀 第26卷, 同朋舍出版, pp.262 263. 沖縄タイムス社 編(1983), 沖縄大百科事典 下, 沖縄タイムス社, p.797. 小澤俊夫(1994), 昔話のコスモロジ, 講談社, pp.13 14. 佐喜眞興英(1922), 南島說話, 鄕土硏究社, p.13. pp.56 57. 櫻井徳太郎(1972), 動物昔話の類型 人獣交渉史の視点 文学 40, 岩波書店, p.97. 島袋源七(1974), 山原の土俗 日本民俗誌大系, 角川書店, pp.345 346. 關敬吾(1978), 日本昔話大成 2, 角川書店, pp.157 262. 高良勉(2005), 沖縄生活誌, 岩波書店, pp.16 18. 竹田晃 訳(1964), 搜神記, 平凡社, p.356. 田畑千秋(1978), 豚聟入 とその周辺 沖縄文化研究 5, 法政大学沖縄文化研究所, p.339. 田畑千秋(1995), 美女に化ける豚 昔話伝説研究の展開, 三弥井書店, p.97. 外間守善ㆍ波照間永吉 編, 琉球國由來記, 1997, 角川書店, p.133. 柳田國男 監修(1948), 日本昔話名彙, 日本放送出版協會. 柳田国男(1963), 口承文藝史考 定本柳田国男集 第六卷, 筑摩書房, pp.99 100. 渡邊欣雄(1993), 世界のなかの沖縄文化, 沖縄タイムス社, pp.108 113. 渡邊欣雄 他編(2008), 沖縄民俗辭典, 吉川弘文館, p.515. 논문투고일: 2014. 10. 30 논문심사일: 2014. 11. 05 심사확정일: 2014. 12. 15
84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인적사항 성명 : (한글) 김용의, (한자) 金 容 儀, (영어) Kim, Yongui 소속 : 전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일본문화학 영문제목 : A Study on Sexul Intercourse of Humans and Figs in Okinawa Folktales 주소 : (500 757)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 전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E mail : yukim@jnu.ac.kr <국문요지> 일본의 동물설화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들은 유형화가 가능할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동물들이 거주하는 세계와 인간사회와의 공간적 거리, 등 장동물의 신격화 가능 여부, 인간에 대한 위해성 등에 따라서 등장동물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들 설화에 등장하는 특정한 동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교섭을 한다. 이른바 이류혼인이라 부 르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혼인관계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본고에서는 일본 본토와는 달리 오키나와에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관계에 관한 설화가 전해 지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오키나와설화집에 수록된 설화의 구체적인 사례 분석에 근거하여 그 설 화적 전개과정을 고찰하였다. 첫째 <돼지사위 맞이하기>와 <돼지 아내>라는 이류혼인담의 유형으로 분류하여 논의하는 기 존의 연구방법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두 유형은 그 서사구조에 있어서 두드 러진 차이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왜 인간과 돼지 사이에 혼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지를 주목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점에 관해서 일본의 이류혼인담의 특징에 대한 기존의 이론적 성과를 참고로 하여, 인 간과 같이 생활하는 가축으로서의 돼지의 일상적 측면, 이로 인한 절대적인 신성의 결핍이라는 관 점에서 설명하였다. 셋째 설화에 등장하는 오키나와의 돼지는 절대적인 신성이 인정되지 않으나, 부분적으로 둔갑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영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 점으로 인해서 인간과 돼지의 성적 교섭에 관한 설화에서 대부분 마지막에 돼지를 살해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본고에서는 그 이유를 영성 을 지닌 돼지의 위해성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주제어: 오키나와 설화, 돼지, 서사구조, 이류혼인, 요괴성
85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 영 실 * Abstract Gyun woo and Jik nyo folk tale in Japan and Korean, which originated in China is called Chilseok, and has been settled as one of customs. It is now performed on July 7th in lunar calendar in Korea and in solar calender in Japan. This is a typical tale that exists in both Korea and Japan and concerned with the stars. Chilseok in the figure was about Gyun woo and Jik nyo's heart rending love and parting. But now in addition to the story, they identify Chilseok with Obong in Japan and Chilseong in Korea by region. I will study Korea and Japan have any thoughts about this aspect to the stars and what had influenced. Keywords : Chilseok, star, Obong, Chilseong 31) Ⅰ. 서론 오늘날은 과학의 발달로 인해 우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시대를 맞았 지만, 아직도 그 신비는 다 풀리지 않은 상태다. 인간에게 우주는 많은 공상 과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며, 탐험의 대상이다. 하루의 일 과를 크게 둘로 나누면 밤과 낮이 되고, 셋으로 나누면 아침과 점심과 저녁 또는 밤이 될 것이다. 이것을 천체에 적용해 본다면, 둘로 나누면 해와 달이 되고, 셋으로 나누면 해와 달과 별이 될 것이다. 해는 하루에 동쪽으로부터 떠올라 서쪽으로 기울고, 낮과 밤을 나눈다. 낮에는 볼 수 있지만, 밤에는 보 이지 않는다. 달은 28일 동안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며, 매일 매일 여러 모습 으로 변화한다. 이 두 개의 천체는 각각 하나씩이며, 보였다 안 보였다는 하 지만,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별은 수 백 수 천만 개로 육안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 중에서도 항상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있으며, 계 절에 따라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하는 것도 있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형상(예를 들면 혜성)도 있고, 유난히 빛이 나는 것도 있고, 어두운 것도 있 * 한양대학교 석박사 통합과정7기
86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다. 때로는 하늘과 땅을 오고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예를 들면 유성)도 있으 며,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있다. 이처럼 별은 하늘에 떠 있는 천체 중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고 여러 모 습으로 존재하기에 다양성이 존재한다.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 있듯이 이 세 상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별들끼리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며 시간과 계 절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이 세상의 어두움 속의 하나의 질서를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별들의 삶은 인간과 닮아 있어서, 인간은 별을 통해 인간의 삶 을 이야기했다. 별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며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칠석설 화 이다. 지금으로부터 약3, 000년 전에 중국에서 유래된 견우와 직녀의 애틋 한 사랑에 관한 설화이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지금도 존재하고 있 으며, 세시풍속으로도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음력 7월7일을 칠월칠석 이라 고 해서 칠석제를 지내고, 일본에서는 지금은 양력 7월 7일에 다나바타 라는 칠석제를 지낸다. 지금까지의 한국과 일본의 칠석설화에 관한 연구에는 설화를 한국어 교육 에 적용한 논문 1), 세시풍속에 관한 논문 2), 칠석 시가에 관한 논문 3), 한반도 로부터 일본으로의 칠석 전래설에 관한 논문 4) 들이 있으며, 별에 관한 신앙에 대한 연구는 없는 것 같다. 중국에서 유래한 칠석설화가 한국과 일본에 정착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나라의 사상이나 풍습 등에 영향을 받아 칠석의 모습이 변화되어 왔다. 일본에서는 칠석을 오봉(일본의 추석)으로 동일시하는 지역도 있고, 한국에서 는 칠성과 동일시하는 곳도 있다. 본 논문은 한국과 일본의 칠석설화 속에 나타난 별에 관한 신앙이 현재까지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친 사상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1) 안미영(2008), 한국어 교육에서 설화 문학을 활용한 문화교육 선녀와 나무꾼 을 통해 본 한국의 문화 정신문화연구 2008겨울호 제31권 제4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지영(2011), 일본연중행사 칠석연구 기원과 행사의 전모고찰을 중심으로 일본문화연구 Vol.38 No., 동아시아일본학회 3) 윤영수(2006), 한ㆍ중ㆍ일 칠석시가의 비교연구 동아시고대학, Vol.14 827 864, 동아시 아고대학회 4) 노성환(2008), 고구려 고분벽화와 일본의 칠석설화 일어일문학연구, Vol.64 No.2, 한국일 어 일문학회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87 Ⅱ. 별에 관한 신앙 1. 한일의 점성학의 유형 역성혁명과 원령신앙 별을 뜻하는 한자는 상형문자로, 일( 日 ) 과 생( 生 ) 을 합한 성( 星 ) 이라는 글자이다. 이 星 의 옛날 글자는 日 3개와 生 을 합한 성( 曐 ) 또는 白 3 개와 生 을 합친 성( 皨 ) 이다. 여기에서의 3 이라는 것은 세 개라는 숫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무수히 많다는 의미이다. 日 이나 白 은 밝음을 의 미한다. 生 은 나타나다 또는 한자의 음을 나타내기 위해 쓴 글자이다. 그러 므로 星 이라는 한자는 무수히 밝음을 의미한다. 星 의 사전적 의미에는 별, 별이름, 천문, 천체의 현상, 세월, 점( 占 ), 밤, 저울의 눈금, 희끗희끗하다 따위 가 있다. 하룻밤 동안 별자리는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 남쪽 하늘의 별자리는 태양의 이동 방향과 같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며 북쪽 하늘의 별자리 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룻밤 동안 별자리가 움직이는 이유는 지 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 기 때문에 별자리는 계절마다 바뀌게 된다. 모든 별자리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매일 하루에 한 번씩 하늘에 나타난다. 단지 낮 에는 태양 빛이 너무 밝아서 볼 수 없을 뿐이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별자리의 움직임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알았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규칙성과 불 규칙성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과 적용시켜 이해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별 이 계절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농사의 시기나 날씨 등을 예측하기도 했고, 사람이 태어나면 별이 하나 태어나고, 사람이 죽으면 별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또한 북극성 같은 별은 인간에게 올바로 길을 찾아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아주 고마운 별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별에 관한 생각이 별에 대한 관측으로 이어졌고, 천체를 관측하여 인간의 운명이나 장래를 점치는 점성술 로 발전해 나갔으며, 더 나아가서 점성학 이라는 학문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천문학 으로 변화되어 왔다. 오늘날의 별자리는 주로 서양의 별자리를 이야기한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자신의 생일 달에 따라 찾아 운세를 찾아보는 그 별자리이다. 별자리의 유래 는 지금으로부터 약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비문이나 점토판 등의
88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해, 달, 별, 전갈, 염소 등과 관련된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페니키아인 들의 지중해 무역에 의해 그리스로 전해졌고, 그리스에서는 그들의 신화 속 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별자리에 많이 투영시켰다. 별자리는 중국으로 도 전해졌다. 하지만 서양과 동양의 풍습이나 신화가 다르듯이 별자리에 대 한 용어와 관념에도 차이가 있다. 천문 이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이미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역 5) <단( 彖 ) > <분( 賁 )>에는 하늘의 무늬를 보고 계절의 변화를 살피 며, 사람의 무늬를 보고 온 세상을 교화시킨다( 觀 乎 天 文, 以 察 時 変, 觀 乎 人 文, 以 化 成 天 下 ) 는 구절이 있다. 또한 <계사상( 繫 辭 上 )>에는 우러러 하늘의 무늬를 보고, 허리 굽혀 땅의 결을 살핀다.( 仰 以 觀 於 天 文, 俯 以 察 於 地 理 ) 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천문 의 뜻은 모두 천문 현상, 즉 각종 천체들이 뒤섞여 운행하면 서 하늘에 나타내는 풍경을 가리키는데, 이런 풍경을 무늬( 文 ) 라고 한 것이 다. 옛사람들이 천문현상을 우러러 관찰한 목적은 천문현상으로부터 인간세 상의 길흉과 재앙, 복을 알아내려는데 있었다. 이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 천 문 이라는 말은 대개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학문, 즉 점성학을 가리켰다. 6) 점성학의 유형은 크게 국가적인 유형과 개인적인 유형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가적인 유형은 별자리의 모양을 근거로 전쟁의 승부나 풍년여 부, 수해나 가뭄 같은 재해, 제왕의 안위 등 국가와 군사 분야의 큰일을 예언 하는 것이다. 점성학은 일명 제왕학 이라고도 한다. 고대의 왕은 신의 대리 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제왕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모든 천문 현상, 예를 들면 해, 달, 혜성, 유성, 구름 등 의 형태나 색깔, 기상현상 등 광범위하다. 그것에 비해 개인적인 유형은 개인 의 출생시각의 천문현상을 근거로 평생 운명을 예언하는 점성학이므로 천문 형상의 범위는 좁다. 고대 중국인들은 천문현상이 천명이나 하늘의 뜻을 반영할 수는 있지만, 5) 유교의 경전. 六 經 의 한 가지. 본디 占 書 로서, 經 과 傳 의 두 부분으로 됨. 경은 陽 爻 와 陰 爻 를 맞춘 여섯 개의 선으로 된 그림에 설명이 붙은 것. 그 그림을 卦 라하여 64개, 筮 竹 과 算 木 을 써서 그림을 구하여 길흉을 판단. 음양ㆍ 四 象 ㆍ 八 卦 등 우주관은 후에 철학ㆍ윤리ㆍ정 치에 영향을 끼친 바가 큼. 공자가 대성. 주자가 易 經 이라 부름. 신콘사이스 국어사전 (1982), 동아출판사 6) 쟝사오위앤 지음, 홍상훈 옮김(2008), 별과 우주의 문화사, 바다 출판사, pp.9 10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89 천명이나 하늘의 뜻은 고정 불변하는 것은 아니라, 수시로 변할 수 있으며, 그 변화는 인간세상에서 제왕이 시행하는 통치가 덕이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점성가들이 천문현상을 살피는 것은 제왕에게 천명 또 는 하늘의 뜻을 예고하거나 해석해 줌으로써 제왕으로 하여금 인간세상에서 그의 통치에 대해 하늘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려는데 목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상 이변이 있게 되거나, 전쟁에 지는 등 안 좋 은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하늘이 제왕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기 위해 벌을 내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을 해결하기위해 신을 달래는 제사 를 드리거나 수도를 천도하는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유일한 방법은 신의 노 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기존의 제왕을 바꾸고 새로운 제왕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존재했기에 역성혁명( 易 姓 革 命 )이 가능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는 왕이 성을 갖고 있었다. 역성혁명 이라는 것은 성씨( 姓 氏 )를 바꿔 천명( 天 命 )을 혁신( 革 新 )한다는 뜻으로, 덕 있는 사람은 천명( 天 命 )에 의해 왕위에 오르고, 하늘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왕위를 잃는다는 고대 중국의 정치사상 이다. 이러한 사상은 주( 周 )나라가 은( 殷 )나라를 무너뜨린 때부터 비롯된 것 으로 보이며, 맹자( 孟 子 )에 이르러 사상으로 정비되었으며, 신왕조가 구왕조 를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로써 작용을 했다. 고대에 한국의 점성학은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기상을 예측하고 다스리 는 자가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첨성대이다.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이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첨성대는 선덕여왕(27대 632 647) 때에 세워진 건축 물로서 당시에는 별을 관측하여 천체 운행을 파악하려 했다. 이는 왕과 국가 의 길흉화복을 예측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 다른 견해로는 땅과 하늘을 잇 는 통로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 첨성대의 전체 기단은 31단이고, 하늘과 땅 을 합하면 33개의 기단으로 도리천의 33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도리천의 천신이 되고자 한 것과 관련 있다고 추측한다. 7) 선덕여왕의 예에 서 알 수 있듯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점성학은 중요시되었고 이러한 생각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의 역사에 대표적인 역성혁명의 예가 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李 成 桂, 1335 1408)로, 그는 왕족 출신은 아니었다. 7) 김용희(2009), 상처입은 봉황 선덕여왕, 다산호당, p275
90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이성계의 조상은 전주 출신으로, 함경도 지방에서 기반을 잡았다.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가 그곳에 설치한 쌍성총관부의 다루가치(총독)를 지냈다. 그 는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발 빠르게 동조하여, 공민왕의 신임을 얻으면서 아들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8) 그 당시 고려 말의 정세는 어지러웠고, 원나라를 지지하는 권문세가인 친원파와 새로이 일 어서는 명나라를 지지하는 친명파인 신진사대부가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이 성계의 정치적 기반은 신진사대부들로써 유교를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조선 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이다. 유교는 인, 의, 예, 지, 덕을 중요시 했다. 고려시대 동안의 끊이지 않는 전란과 역병, 백성들의 궁핍함, 천재지변 등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수 있었던 명분이 되어 주었다. 하늘의 천제가 통치자에 대한 벌로 이 모든 고난을 주었으니, 이것을 해결하려면 단 하나 통치자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고려의 왕씨 왕조를 무너뜨 리고 조선의 이씨 왕조로 바꾸는 역성혁명이었다. 성서 마태복음 2장에는 동방박사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의 이야기 가 나온다. 한국의 삼국유사 에 김유신의 탄생에도 별에 관한 이야기가 있 다. 별은 귀한 사람의 탄생을 알리는 표시이다. 그런데 일본신화에는 별과 관 련된 탄생 이야기가 없고, 별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못하다. 고사기 (712 년)에는 태양( 天 照 大 御 神 )과 달( 月 讀 命 )에 관한 이야기는 볼 수 있지만, 별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서기 (720년)의 천손강림 신화 속에서 단지 별의 신 카가세오(カガ セオ) 한명만이 천신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도리( 倭 文 )의 신 타케 하츠치(タケハツチ)가 이를 쳐서 따르게 했다고 하며, 또 다른 일전에서는 후 츠누시(フツヌシ)와 타케미카츠치(タケミカツチ) 두신이 악신 아마츠미카보시 (アマツミカボシ), 일명 아메노카가세오(アメノカガセオ)를 주살했다고 한다. 9) 일본서기 에서는 별의 신은 천신의 명을 따르지 않는 악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의 왕조에서는 역성혁명의 시도는 있었을지 몰라도 중국과 한국과 같 은 성공의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맹자의 사상 또한 발달하지 못했다. 일본의 천황은 성도 없고 이름뿐이며,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만세일계로 왕조가 바뀐 적도 없다. 천재지변이나 역병 등은 하늘이 제왕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나타 8) 김용만(2007),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역사 수수께끼100, p152 9) 松 前 健 (1985), 日 本 の 神 話 の 謎, 大 和 書 房, p94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91 내기 위해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원령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즉 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이 해코지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 은 원령을 달래주면 되는 것이다. 천황을 바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천황에 게는 아무 책임도 없고, 모든 것은 원령이 지는 것이다. 간무천황의 교토 천 도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菅 原 道 眞 )를 천신( 天 神 )으로 모신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점성학의 유형에서 보면 한국은 국가적인 유형에 일본은 개인적 인 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일본에서의 점성학의 발달은 한국보다 는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2. 한국과 일본의 칠석 불교와 신도 중국에서는 음양오행에 입각하여 홀수를 길한 수로 여겼고, 홀수가 두 개 겹치는 1월1일, 3월3일, 5월5일, 7월7일, 9월9일에 여러 행사를 가졌다. 그 중 7월7일은 칠석이라고 하여 별에 관한 설화가 있다. 칠석전설은 고대 중국의 한중( 漢 中 )지역에서 전승된 베 짜는 처녀(직녀)와 소를 끌며 밭을 가는 농부(견우)간의 한수( 漢 水 )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러브 스토리가 초가을 밤하늘을 동부에서 남서로 흐르는 은하수에 투영된 것이 원 형이고, 본래는 우랑직녀전설 이었다. 칠석전설의 성립은 여러 가지 근거로 보아 늦어도 전한시대 전까지는 민간설화로서의 형태는 갖추어져 있었고, 민 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칠석전설이 서기 3세기 이전에 작품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보여 진다. 10) 칠석의 유래는 중국의 제해기( 薺 諧 記 ) 11) 에 처음 나타난다. 주( 周 : 중국 의 고대 왕조 BC 1046 BC 771)에서 한대( 漢 代 : BC 206 220)에 걸쳐 우 리나라에 유입되기까지 윤색을 거듭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12) 우리나라의 칠 석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에는 이미 견우 직녀 설화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덕흥리 벽화(408년 제작, 평안남도 소재, 1903년 확인, 1976 77발굴)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10) 윤영수(2006), 한ㆍ중ㆍ일 칠석시가의 비교연구, 동아시아고대학, Vol.14 No, p864, 동아시아고대학회 11) 제해기 는 위진남북조 시대 유송의 동양무의가 찬한, 기괴한 일들을 적은 짧은 이야기인 지괴소설집이다. 12) 국립민속박물관(2006), 한국세시풍속사전 가을편,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한국세시풍 속사전 편찬팀, p44
9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고려 공민왕 때 칠석에 대한 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설화의 내용은 옥황상제에게는 베를 짜는 예쁜 딸 직녀가 있었다. 어느 날 은하수 건너편에서 열심히 일하는 목동 견우를 보고 그 둘을 맺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만 하고 일을 하지 않게 되자, 옥황상제는 화가 난 나머 지 그 둘을 갈라놓았다. 이 둘을 딱하게 여긴 까마귀와 까치가 1년에 딱 한번 은하수를 건널 수 있게 다리가 되어주어 둘은 만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설화의 배경은 독수리 별자리( 鷲 星 座 )의 알타이르(Altair)별과 거문고 별자리( 琴 星 座 )의 베가(Vega)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별이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서 유래한 듯하다. 이 두 별은 황도 상 운행할 때 가 을 초저녁에서 서쪽 하늘에 보이고, 겨울에는 태양과 함께 낮에 떠 있으며, 봄날 초저녁에서 동쪽 하늘에 나타나고, 칠석 무렵이면 천장 부근에서 보이 게 되므로 마치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견우성과 직 녀성이 일 년에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천문 현상은 중국의 周 나라 때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며, 漢 나라에 이르러서 칠석설화가 형성되고 여러 가지 풍속 으로 발전해 왔다. 13)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 중 음력 7월 7일쯤에 쉽게 찾을 수 있는 별자리 중 하나가 견우성과 직녀성이다. 이 두 별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은하수는 말 그대로 밤하늘에 강처럼 보이기에 쉽게 눈에 뜨인다. 실재로 이 두 별은 16광년이나 떨어져 있어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옛 사람들의 눈에 칠석의 시기에 천장의 위치에 있어 잘 보여서 두 별의 만남을 상상했다. 일본의 칠석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직녀이야기와 중국에서 전해진 전설이 습합되어 전래되었다. 일본에서는 칠석을 시치세키(しちせき) 또는 다나바 타(たなばた) 라고 한다. 시치세키 는 칠석의 음독이지만, 다나바타 는 훈독 하고는 연관이 없다. 베를 짜는 여인인 직녀를 다나바타쓰메( 機 織 つ 女 ) 라고 한다. 다나바타 는 다나바타쓰메 에서 온 것이다. 일본의 직녀 이야기는 마을의 재앙을 없애기 위해 베 짜는 처녀를 강가의 베틀 집에 머물게 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며 신의 아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중국의 전설이 나라 시대에 전해졌으며 일본의 예로부터 전해오던 직녀 이야기와 합해 지금의 다나바타가 되었다. 다나바타 다음날에 축제에 사용된 조릿대나 장식 등을 강이나 바다에 흘려보내 부정을 13) 국립민속박물관(2006), 한국세시풍속사전 가을편,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한국세시풍 속사전 편찬팀, p44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93 쫓는 다나바타오쿠리( 七 夕 送 り), 다나바타나가시( 七 夕 流 し), 나가시비나( 流 しびな) 와 같이 인형을 띄워 보내는 지역도 있다. 14) 견우직녀 설화가 일본으로 전해진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7세기 때 중 국에 갔다 온 견당사들에 의해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한반도 도래인인 하타 씨에 의해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8세기 나라 시대말기의 만엽집( 萬 葉 集 ) 에는 견우와 직녀를 노래한 와카( 和 歌 )가 많다. 한일 양국의 공통된 세시풍속으로는 결교전( 乞 巧 奠 )과 옷이나 책을 말리는 것 등이 있다. 걸교전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밤하늘 아래에 서 바늘에 실을 꿰는 행위로 직녀성에게 바느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비는 행 사이다. 이것이 나중에 남자 아이들이 글쓰기나 글짓기를 잘하게 해달라는 것으로도 확장되었다. 지금의 일본에서는 단자쿠( 短 冊 )라고 해서 자신의 소 원을 적은 종이를 대나무에 매달아 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나무가 쑥쑥 잘 자라는 것처럼 자신의 실력이 향상될 수 있도록 염원을 담은 것이다. 또 한 칠석이 되면 장마가 끝난 시기라서 습해져 있던 옷이나 책을 말리는 풍습 도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칠석의 행사는 궁중, 민간에 이르기까지 행해졌지만, 일본은 주로 신사에서, 한국은 사찰에서 행해졌다. 일본의 칠석행사는 신도행 사라 하여 절에서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15)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전제로 그들이 직조와 재봉의 기술을 늘리는 신으로 모셔지고 있고, 그들이 신이기 때문에 불교보다는 신도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교토의 기타노 덴만구 ( 北 野 天 滿 宮 )나 지누시신사( 地 主 神 社 ), 후쿠오카 칠석신사( 福 岡 七 夕 神 社 ) 등 이 그 예이다. 16) 한국의 칠석의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칠성고사, 칠석고사, 칠성맞 이, 칠석맞이, 칠성제, 칠석제, 칠성기도, 칠성공, 칠성위하기, 칠성맞이 고사 등 칠성과 칠석을 통용하여 쓰고 있다. 칠성은 북두칠성 의 칠성 을 말하는 것으로, 칠석 과는 별에 관한 것이라는 것과 7 이라는 숫자가 같다는 공통 점은 가지고 있지만, 칠석과 칠성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곳에 따라 한국에서 는 이 둘을 동일시하고 민간과 사찰에서 행사를 주관한다. 14) 이이쿠라 하루타케 편저, 허인순ㆍ이한정ㆍ박성태 옮김(2009), 일본인의 생활과 관습, 어 문학사, p75 15) 노성환(2006), 현대 일본 칠석에 관한 현장론적 일고찰 일어일문학 Vol.32 No p151, 대한일어일문학회 16) 같은 논문, p165
94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일본에서는 칠석과 칠성을 동일시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지역에 따라 칠석을 나누카봉( 七 日 盆 )이라고 해서 오봉을 맞는 준비를 한다. 3. 한국의 칠성신앙과 일본의 오봉 1 한국의 칠성신앙 북쪽 하늘의 가장 중심이 되는 별은 북극성이다. 옛 사람들이 밤에 길을 잃었을 때 북극성을 나침반 삼아 길을 찾았다. 하지만 북극성은 밝은 별은 아니다. 북극성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국자 모양의 밝은 북두칠성을 찾으면 된다. 북두칠성의 손잡이를 지나 국자 모양의 바닥을 지나 그 위쪽으 로 연결해 다섯 배를 하면 북극성 자리이다. 북두칠성의 두병( 斗 柄 )은 하룻밤 사이에 뚜렷하게 위치와 방향이 변함으로 써 옛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고대 중국의 좌표 체계에서는 북극성을 향하는 별의 특징이 매우 중요한데, 북두칠성은 바로 북쪽 하늘의 북극성을 향하는 별 천구의 북극에 가깝기 때문에 밤중에 그 별들이 지평선 위에서 북극성을 둘 러싸고 돌아가는 모습이 목격되는 별 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성관이다. 17) 고대에 중국인들은 북극성을 하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별은 북극 성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극성은 천제를 상징했고, 북두칠성 은 천제가 타고 다니는 수레라고 생각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성신이다. 도교와 유교의 천체 숭배사상과 영 부( 靈 符 )신앙이 조화된 신격이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맡았다고 하여 칠성여래, 칠아성군( 七 牙 星 君 )이라고 한다. 주로 수명장수, 소원성취, 자 녀성장, 평안무사 등을 비는 신이다. 특히 아이들의 수명장수를 비는 대상신 이다. 불가에서는 사찰 칠성각의 칠성신에게 공을 드리기도 한다. 사찰내의 칠성신은 약사 신앙이 조화되어 완전히 불교적으로 토착화된 신이다. 칠성신 은 불교에서 중생들의 내세에 대한 믿음을 주려는 것이고, 도교에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하는 것이어서 민속신앙에서 중요한 신명으로 모셔질 수밖에 없었다. 사찰에 칠성신을 모시는 칠성각을 배치한 것은 불교가 유입된 당시 에 가장 중요하게 숭배한 신앙이 산신 신앙과 칠성신앙이었기 때문이다. 칠 성신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격이어서 불교의 토착화를 꾀하기 위해서 는 무엇보다 칠성신앙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민 17) 같은 책 쟝사오위앤 지음, 홍상훈 옮김(2008), 별과 우주의 문화사, 바다 출판사, p424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95 속신앙을 수용하여 불교의 토착화를 꾀하기 위해 사찰의 가람배치를 전략적 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사찰의 중심공간인 대웅전 뒤에 칠성각을 배치한 것 은 배불자들이 대웅전 앞을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에 동화되기를 바란 의도이다. 이처럼 칠성신앙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숭배하는 신앙이다. 18) 한국에서의 칠성신앙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삼국유사 의 김 유신의 탄생이야기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년(595)생으로 북두칠성 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북두칠성의 무늬가 있었고, 또 신기하 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되어 있다. 칠성은 곧 인간의 탄생과 관련된 신임을 알 수 있고, 나중에 다양한 기능 을 수행한 대상신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칠성신을 숭배하는 공간을 기준으로 보면 가정에서 모시는 칠성신, 가정 밖에서 모시는 칠성신, 사찰에서 모시는 칠성신, 의례와 관련된 칠성신으로 나눌 수 있다. 가정에서 모시는 칠성신은 장독대에 대나무를 세워 정화수 그 릇을 올려놓거나 장독대 곁 큰 돌 위에 정화수 그릇을 올려놓고 매달 7일, 17 일, 27일에 주부가 목욕재계하고 자손들을 위해 칠성님께 비손하는 등의 형 태이며, 물은 칠성신의 신체이다. 가정 밖에서 모시는 칠성신은 마을 밖 일곱 개의 바위를 칠성신의 신체로 삼고 그곳에서 칠성고사를 지내는 경우 이처럼 암석을 칠성신의 신체로 활용하는 것은 암석이 지니는 항구성과 별이 지닌 생명성이 결합되어 칠성바위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칠성바위 는 주로 아이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기 위한 숭배의 대상이지만 한 생명을 점지해 준다는 생각에서 기자의 대신이다. 사찰에서 모시는 칠성신은 농가에 서는 간단히 떡과 나물을 준비하여 칠성신에게 가족의 명과 복을 빌었다. 명 과 복을 비는 까닭은 칠성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인간 은 칠성신의 품에서 태어난 이승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다가 다시 칠성신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여겨서 인간이 운명하는 것을 돌아가셨다 고 표현한다. 죽음의례에서 사람이 운명하여 임종이 확인되면 코와 입을 솜으로 막고 양쪽 엄지발가락을 삼끈으로 묶어 주검을 바르게 하고 양쪽 엄지손가락을 묶어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서로 연결시켜서 시신을 바르게 한다. 그런 다음 시신을 일곱 매듭으로 묶어서 칠성판 위에 올려놓는다. 칠성판은 대개 대나무로 만 18) 국립민속박물관(2006), 한국세시풍속사전 가을편,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한국세시풍 속사전 편찬팀, p680
96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들며, 대나무 대신 부엌문을 활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일곱 매듭으로 묶는 것 은 칠성신, 칠성판이나 칠성틀의 칠성은 칠성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 간은 죽어서 칠성신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의식을 의례로 표현한 것이다. 19) 이처럼 한국인에게 있어 칠성신앙은 생활 곳곳에 뿌리박혀 있다. 고대로부 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와서 많은 의례가 미신이라고 치부되어 간소화되거나 생략되었지만, 죽음에 관한 의례로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서양에서는 7 이라는 숫자는 행운의 상징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6일 동 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로 잡으셨다. 중국에서는 음과 양, 오행을 합치면 7이 되는 이 수를 완성된 수라고 생각했다. 달도 7일을 주 기로 모습을 바꾼다. 사람의 얼굴도 7개의 구멍이 있다. 북두칠성도 7개의 별 로 이루어져 있다. 7월은 1년 중 반이 끝나고 나머지 반년이 시작되는 달이 다. 칠석과 칠성의 발음은 닮아 있고, 7이라는 숫자의 공통점이 있으며, 별에 관한 신앙이라는 점도 닮아 있다. 한국에서의 불교의 형태는 산신 신앙과 칠 성신앙이 습합된 형태이다. 불교에서는 북두칠성을 칠성여래라 하여 수명장 수, 소원성취, 자녀성장, 평안무사 등을 비는 신이다. 특히 아이들의 수명장수 를 비는 대상신이다. 일본에서는 북두칠성을 묘켄보살( 妙 見 菩 薩 )로 보았고, 한국인이 생각하는 칠성여래보다는 뛰어난 시력은 가진, 선과 악을 잘 구별할 줄 아는 보살이라 고 생각했다. 한국인의 칠성신앙은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신앙이었다. 한국에서는 사찰 에 북두칠성을 모시는 칠성각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사찰에서 칠석제를 지낸 다. 한국의 칠석의 이름이 다양한 것은 칠석과 칠성신앙의 결합된 한 단면이 라고 할 수 있겠다. 2 일본의 오봉 오늘날의 한국의 추석은 음력 8월15일이고, 일본은 양력 8월15일이다. 명 치시대 들어와서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어 8월 15일이지, 실제로 일본의 오봉 은 음력 7월15일이다. 일본의 오봉의 유래는 불교의 우란분에서 왔다. 석가의 제자인 목련이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석가의 가르침을 받아 19) 같은 책, p682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97 모든 중에게 공양을 하게 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음력 7월을 盆 月 이라고 도 한다. 음력 7월은 오봉과 관계가 깊은 달이다. 오봉의 준비 20) 는 다음과 같다. 1일 7일 12일 13일 카마부타( 釜 蓋 ) 朔 日 나누카봉( 七 日 盆 ) 이날에 지옥 가마의 뚜껑 이 열리고, 정령이 저 세상 을 출발한다고 여긴다. a. 물에 관련되는 의례 우물 물 바꾸기 여성이 머리를 감는다. 말을 씻긴다. 7회 목욕을 하고 7회 밥을 먹는다. b. 오봉을 맞는 준비 묘의 청소 불전에 공물을 바친다. 불구를 닦는다. 盆 市 (오봉의 시장이 열림) 盆 花 取 り(불전에 바치 기 위해서 꽃을 따옴) 오봉을 맞이할 때까지의 사람들의 움직임( 靑 森 縣 남부지방의 사례) : 오봉 의 준비는 7일에 집중하고, 이 날을 오봉의 시작으로 하는 곳도 많다. 이와 같이 일본의 오봉은 시기적으로 칠석과 날짜 상으로 아주 가깝다. 7 월1일에 정령은 지옥을 출발하고, 후손들은 7일에 오봉을 맞을 준비를 한다. 칠석과 오봉이 겹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음력 7월15일은 백종일, 백중절, 망혼일 이라고 한다. 이 날 승 려들은 사원에서 제를 올려 부처에게 공양을 한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우란 분회를 벌여 속인들도 공양을 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주로 승려들만의 행사가 되었다. 백종일에 사람들은 조상의 사당에 천신( 薦 新 )을 드리며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긴다. 망혼일이라고 하는 것은 백 종일 밤에 술과 고기, 밥, 떡, 과실 등 많은 것을 차려놓고 망친의 혼을 불러 들여 제를 지내는 까닭이다. 백종이란 말도 이 무렵에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기 때문에 백가지를 차림다고 해서 나온 것이다. 21) 한국에서의 음력 7월15일인 백종일은 일반인들이 모두 하는 행사가 아니 라, 사찰에서 주로 행하는 행사였다. 칠석하고 날짜 상으로 가깝기는 하나, 20) 福 田 アジオㆍ 內 山 大 介 ㆍ 小 林 光 一 郞 ㆍ 鈴 木 英 惠 ㆍ 萩 谷 良 太 ㆍ 吉 村 風 (2012), 圖 解 案 內 日 本 の 民 俗, 吉 川 弘 文 館, p181 21) 임동권(1999), 한국세시풍속, 서문문고, p164
98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한국의 추석은 음력 8월15일이기에 조상을 모시는 행사는 그날에 행해졌다. Ⅲ. 결론 일본에서는 베를 짜는 여인인 직녀를 가리켜 다나바타쓰메( 機 織 つ 女 ) 라 고 한다. 칠석은 시치세키(しちせき) 또는 다나바타(たなばた) 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칠석은 다나바타쓰메( 機 織 つ 女 ) 와 연관성이 있다. 칠석의 중심은 직녀이다. 칠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일본의 칠석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직녀 이야기와 습합된 것이다. 직녀 이야기의 직녀 는 물가에 사당을 만들어 놓고 베를 짜며 하늘로부터 신의 강림을 기다리는 여인이다. 마을 사람들은 하룻밤을 직녀와 함께 보낸 신이 마을의 모든 더러 움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했다. 여기서의 더러움은 죄, 부정한 것, 죽음 등을 가리키며, 이러한 제례의식을 통해 깨끗함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미소기(재계) 의식이며, 물의 청정성과도 통한다. 칠석 설화의 내용은 중국의 한중( 漢 中 )지역에서의 러브스토리가 밤하늘의 별자리에 투영된 것이다. 일 년에 딱 한번만 만날 수밖에 없는 애틋한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지만, 실제적으로 견우성과 직녀성이 직접 만날 수는 없다. 1 년 중 여름철 밤하늘에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성과 직녀성이 있는 모습 을 보고 사람들은 그와 같이 생각했던 것이다. 칠석설화의 은하수와 예로부 터 일본에 전해져 온 직녀설화의 물가는 물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물은 만물을 깨끗이 하고 흘러 보내는 것이다. 일본의 칠석의 풍습을 보면 물에 관한 것이 많다. 우물 물 바꾸기, 여성의 머리 감기, 말 씻기기, 7회 목 욕을 하고 7회 밥 먹기 등 이외에도 칠석이 끝나고 나서 다나바타 나가시( 七 夕 流 し), 다나바타 오쿠리( 七 夕 送 り), 나가시비나( 流 しびな) 라 해서 사용했 던 도구들을 물에 모두 흘려보낸다. 고대 일본에서의 점성학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한국이었지만, 일본에 서의 점성학의 발달에는 제한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국가적인 유형의 점성학 이라고 본다면 일본은 개인적인 유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천재지변이나 기 근, 가뭄, 역병들이 발생하는 것은 하늘이 노해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고, 이 것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다면 왕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상이 중국에 존재했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주왕조가, 한국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99 에서는 조선왕조가 그러한 사상에 의해 건국되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러 한 맹자의 역성혁명이 성공한 사례는 없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원령신앙의 탓으로 돌렸다. 음력 칠월칠석은 시기적으로 일본의 추석(음력 7월15일)과 굉장히 가깝 다. 일본의 추석은 조상과 관련된 불교행사로 지역에 따라서는 7월7일부터 그 준비를 하는 곳이 많다. 그러다 보니 지역에 따라서는 칠석제와 오봉이 습합된 모습이다. 한국의 칠석은 추석(음력 8월15일)과는 한 달 이상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 며, 음력 7월15일은 백종일이라고 해서 사찰에서 주로 행사를 한다. 칠성신앙 은 북두칠성을 신격한 것으로 불교보다도 빨리 한국에 토착화되었기 때문에, 불교를 정착시키는데 있어 가교 역할을 했으며, 생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 쳤다. 지금도 한국의 사찰 내에는 칠성신을 모시는 칠성각이 있는 곳이 많고, 죽음에 관련된 의례에도 칠성신앙이 남아 있다. 한국인의 별에 대한 관념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 돌아가셨다 는 표현이다. 이것은 칠성신의 품으로, 즉 별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칠석의 발음과 칠성의 발음이 닮아 있고, 두개 모두 별을 모시는 신앙의 형태이다 보니 자연스레 습합되어 왔다. 한국의 칠성신앙은 인간의 수명장수, 길흉화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신앙의 대상으로 믿어왔다. 한일 양국의 칠석은 별에 관한 신앙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세시풍속의 형 태를 보면 일본은 오봉과 한국은 칠성신앙과 습합된 부분이 많다. 오봉은 별 과는 상관이 없지만, 칠성은 북두칠성에 관한 것으로 별과 연관이 있다. 한국 인의 별에 관한 신앙은 바로 삶과 죽음 자체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강현모(2006), 한국 민속과 문화, 비움과 채움 강판권(2009), 사치와 애욕의 동아시아적 기원 중국을 낳은 뽕나무, 글항아리 김용만(2007)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역사 수수께끼100, 바른사 김용희(2009), 상처입은 봉황 선덕여왕, 다산호당 국립민속박물관(2006), 한국세시풍속사전 가을편,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한국세시풍속 사전 편찬팀 모로 미야 지음(2007), 김택규 옮김, 닌자와 하이쿠 문화의 나라 이야기 일본, 일빛 이이쿠라 하루타케 편저(2009), 허인순ㆍ이한정ㆍ박성태 옮김, 일본인의 생활과 관습, 어문
100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학사 임동권(1999), 한국세시풍속, 서문문고 쟝사오위앤 지음(2008), 홍상훈 옮김, 별과 우주의 문화사, 바다 출판사 한미라ㆍ전경숙 공저(2008), 한국인의 생활사, 일진사 홍석보 지음(2009), 정승모 풀어씀, 동국세시기, 풀빛 홍윤기(2000), 일본 사회와 문화의 집중 이해 일본 문화백과, 서문당 편수원ㆍ김창일ㆍ이성권ㆍ김태우ㆍ김혜경ㆍ변혜민ㆍ백민영ㆍ조선영ㆍ이유나(2011), 한국민속 신앙사전 가정신앙2, 국립민속박물관 飯 倉 晴 武 (2007), 日 本 人 數 のしきたり, 靑 春 出 版 社 松 前 健 (1985), 日 本 の 神 話 の 謎, 大 和 書 房 福 田 アジオㆍ 內 山 大 介 ㆍ 小 林 光 一 郞 ㆍ 鈴 木 英 惠 ㆍ 萩 谷 良 太 ㆍ 吉 村 風 (2012), 圖 解 案 內 日 本 の 民 俗, 吉 川 弘 文 館 김지영(2011), 일본연중행사 칠석연구 기원과 행사의 전모고찰을 중심으로 일본문화연구 Vol.38 No., 동아시아일본학회 노성환(2006), 현대 일본 칠석에 관한 현장론적 일고찰, 일어일문학, Vol.32, 149 165, 대 한일어일문학회 노성환(2008), 고구려 고분벽화와 일본의 칠석설화 일어일문학연구, Vol.64 No.2, 한국일 어 일문학회 안미영(2008), 한국어 교육에서 설화 문학을 활용한 문화교육 선녀와 나무꾼 을 통해 본 한국의 문화 정신문화연구 2008겨울호 제31권 제4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영수(2006), 한ㆍ중ㆍ일 칠석시가의 비교연구, 동아시아고대학, Vol.14, 827 864, 동아 시아고대학회 논문투고일: 2014. 10. 30 논문심사일: 2014. 11. 05 심사확정일: 2014. 12. 15 인적사항 성명 : (한글) 문영실, (한자) 文 永 實, (영어) MUN YOUNG SIL 소속 : 한양대학교 일본언어 문화학과 논문영문제목 : A Comparative Study between Korea and Japan on Chilseok folk tale 주소 : (425 173)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3동 1271 한양대학교 일본언어 문화학과 E mail : freshmys@naver.com
칠석설화의 한일비교 (문영실) 101 <국문요지> 중국에서 유래된 견우와 직녀 설화는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칠석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하 나의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아 왔다. 지금은 한국에서는 음력 7월7일에, 일본에서는 양력 7월7일 에 행해진다. 이것은 한일 양국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설화이며, 별에 관련된 대표적인 설화라 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칠석의 모습은 견우와 직녀의 애틋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 외 에 일본에서는 칠석을 오봉(일본의 추석)과 동일시하는 지역이 있고, 한국에서는 칠성과 동일시 하는 곳이 있다. 천문학의 원류는 점성술에서 시작된다. 별의 운행을 보고 인간의 삶을 점치는 점성술은 더 나아 가 하나의 학문으로서 자리 잡게 된다. 중국에서는 천재지변, 가뭄, 기근, 전염병, 전쟁 등이 끊이 지 않으면, 이 원인은 하늘의 천제가 통치자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인간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 고 생각했다. 이것을 해결하기위한 방법은 통치자를 바꾸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이다. 한국에서의 조선왕조가 바로 역성혁명의 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러한 역성혁명이 성공한 적 은 없었다. 천황에게 책임을 전가시킨 것이 아니라, 원령의 탓으로 돌렸다. 원령(원한을 품고 죽은 영)을 달래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점성학이 국가적인 유형이라고 한다면 일본은 개인적 유형이라서, 점성학의 발달에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오봉은 불교의 우란분에서 유래했다.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목련존자가 100명의 승려들에게 공양을 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추석보다는 백종일(음력 7월15일)에 해당된다. 일본은 오봉을 맞는 준비를 하는 날이 7월7일이다. 오봉과 칠석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칠석제는 한일양국에서 왕실과 민간에서 두루 행해졌지만, 지금에 와서는 주로 일본에서는 견 우와 직녀가 하나의 신으로 받들어져서 신사에서 행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사찰에서 행하 고 있다. 한국에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신신앙과 칠성신앙이 발달되어 있었다. 불교를 정 착시키기 위해 칠성신앙을 이용했다. 대웅전 뒤에 칠성각을 두어 자연스럽게 융화시켰다. 칠성신 은 북두칠성을 의미하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삶과 죽음, 길흉화복, 기자신앙 등 폭넓 게 인간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우르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칠성과 칠석 발음도 비슷하고, 별에 관한 신앙이며, 칠 이라는 숫자의 공통점 등이 칠석과 칠성을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주제어: 칠석, 별, 오봉(일본의 추석), 칠성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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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신라화랑 가무(歌舞)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稚児舞)의 현황 고찰 - 도래인 하타씨(秦氏)를 매개로 하여 - 전 금 선*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tudy Japan's Chigomai which is similar to the nature and functions of Hwarang as part of providing data on how the prototype of of Shilla Hwarang's dances looked like. To conduct this study, Chigomai is targeted since it is related to the Hata clan who was widely regarded as the Silla people from Gaya. First of all, the functions of Hwarang are classified as martial, musical affairs and ancestral rites and then Hwarang's dances and songs and Chigomai are examined accordingly, The case study is performed in Samuraiodri of Kagoshima prefecture, Chigomai of Gionmatsuri in Kyoto and Chigobugaku of Shimomuragamo shrine in Hokuriku areas. It turned out that many similar characteristics of Hwarang's singing and dancing are found in Chigobugaku of Hokuriku areas and therefore, this place is highly regarded as one of the most suitable ones for the future comparative research on Hwarang's Keywords : chigomai(稚児舞), hatashi(秦氏), bugaku(舞樂), hwarang(花郞), shilla(新羅) 1) Ⅰ. 들어가는 말 본고는 신라화랑의 가무(歌舞)1)연구를 위한 자료제공의 일환으로서, 화랑 가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는 일본의 치고마이(稚児舞)를 도래인 하타씨(秦 氏)를 매개로 하여 고찰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나아가 향후 진행될 화랑가무 와의 사례 비교연구 대상으로 적합한 치고마이를 찾는 것에도 있다. 치고마이는 성년전의 남아(男兒)인 치고(稚児)가 추는 춤을 뜻하며, 현재 기가쿠伎楽)나 부가쿠(舞楽), 엔넨(延年), 사루가쿠(猿楽), 노(能) 등의 다양한 장르에서 연행되고 있다. 치고가 백색화장을 하고 행렬을 진두지휘하거나 춤 * 한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박사과정 1) 넓은 의미로는 악(樂)과 무(舞), 좁은 의미로는 악을 동반한 무용을 의미하나, 본고에서는 가 무(歌舞)라는 용어로 통칭하도록 하겠다.
104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을 추는 모습은 신라화랑의 그것과 유사하다. 일본예능에서 치고마이가 중요 한 위치에 있는 이유는 신성한 존재라고 하는 치고가 가지는 종교적인 상징 성 때문이다. 하지만 제례의식인 가구라( 神 樂 )가 아니라, 도래계의 부가쿠나 산악신앙과 관련된 예능에서 치고마이의 연행 빈도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종 교적 신성함만이 아닌, 다른 여러 복합 요소의 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 단된다. 한편 신라의 가무는 우수한 가야의 문화를 흡수하여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처용이 아내와 동침한 역신을 감복시킨 것도 바로 노래와 춤이었다. 일본서 기 권13에 의하면 신라왕이 80인의 악인을 보내어 인교천황( 允 恭 天 皇 :412 452)의 장례행렬을 따르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 하는 외래악에 관한 기사로, 당시 신라 사회에는 대규모 악인을 파견할 정도 의 가무의례체계가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진흥왕은 화랑 도의 교육 이념으로서 가무를 장려하였으므로, 화랑의 수련에서 가무는 중요 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화랑이 행한 가무의 연행 형태에 대하여는 구체 적인 언급이 없고, 후대에 쓰인 진연의궤 나 정재무도홀기 에 등장하는 사선랑의 사선무, 삼국사기 동경잡기 문헌비고 에서의 황창랑의 검 무, 화랑을 주제로 창작된 안성향당무 등에서 그 유래만이 전해질 뿐이다. 이러한 화랑의 가무에 대하여 미시나 쇼에이( 三 品 彰 英 :1902 1971)는 신라화 랑의 연구 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화랑집회의 기능 중 가무가 매우 중시된 것은 화랑에 관한 대부분의 약전( 略 傳 )에 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중세 이후에 전해진 화랑의 유풍 중 이 가무 의 잔재가 가장 현저하게 또는 장기간 존속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화랑제도가 퇴폐하여 최초의 기능을 잃은 신라 말기에 팔관회 제의에 참가한 이른바 사선악부( 四 仙 樂 部 ) 등이 화랑가무의 변질이며, 이 행사는 고려 시대에 와서 지나친 성대함이 정치문제화 될 정도였다. 나아가 부족의 계절제 나 무격( 巫 覡 )이 행하는 행사에서도 화랑( 花 郞 ) 또는 화낭( 花 娘 ) 의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변질되어 남아 있다. 말하자면 가무는 화랑의 유풍으로서 가장 오 랫동안 유지되어온 부분이며, 게다가 화랑 집회에서는 빠질 수 없는 기본적인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2) 미시나 쇼에이의 지적과 같이, 화랑은 후대에 박수무당이나 무당서방, 광 2) 三 品 彰 英 (1971) 新 羅 花 郞 の 硏 究 平 凡 社, pp.86 87
신라화랑 가무( 歌 舞 )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 稚 児 舞 )의 현황 고찰 (전금선) 105 대, 유녀, 무동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그 실체가 사라지거나 변질되었다. 정약용은 아언각비 에서 화랑은 신라의 귀유( 貴 遊 )의 이름이다. 지금 무당 이나 창우와 같은 미천한 무리를 화랑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한 뒤, 화랑의 복식이 화려한데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고 했다 3). 하지만 일제시 기 화랑을 연구한 이마무라토모( 今 村 鞆 ), 아유카이후사노신( 鮎 貝 房 之 進 ), 이 케우치히로시( 池 内 宏 ) 등은 화랑집단이 무속 제의적 기능과 성적 유희 기능 을 가지는 것으로 한정지으려 했다. 이에 대해 박균섭은 일본 사학자들은 화 랑의 본질을 왜곡하는 모험을 감행하였지만 적어도 상열가악( 相 悅 歌 樂 )과 유 오산수( 遊 娛 山 水 )의 본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이 모여 함께 가무를 즐겼던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에 주목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4). 화랑의 본질 적 가치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라도, 화랑 가무에 관한 연구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실증적 사료의 한계에 놓인 고대 화랑 가무의 원형을 복원한 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다각적인 연구방법을 통하여 그 실체에 조금씩 근접해 가려는 시도는 이루어져야 함에 마땅하다. 이를 위해 고대 일 본으로 건너간 신라인의 예능을 역추적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고에서는 화랑가무의 역추적 대상으로서 치고마이 ( 稚 兒 舞 )를 선정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성년전의 소년이라는 가무의 주체에 관한 유사성이고, 둘째는 제사( 祭 事 ), 악사( 樂 事 ), 무사( 武 事 )라는 춤의 성격 의 유사성이며, 셋째는 한국에서 전래된 부가쿠( 舞 樂 )와 기가쿠( 伎 樂 )에서 치 고의 역할이 현저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물론 체계적인 국가조직의 일부로 서의 화랑과 치고마이의 치고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어, 비교 대상으로 삼 는 것에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본고는 비교연구가 아니라 화랑 가무의 일본전파 가능성에 무게를 둔 실태 조사이며, 춤추는 주체는 크게 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고마이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 큰 무리가 없다고 판 단된다. 본고에서는 양자의 연결고리로써 가야계 신라인이라는 설 5) 이 가장 유력한 일본 최대의 도래족인 하타씨를 매개체로 이용하였다. 예능이라는 것은 인간 3) 정약용, 정해렴 역(2005) 아언각비, 이담속찬 현대실학사, p.159 4) 박균섭(2006) 화랑제도에 대한 일본인 연구자들의 시각 비판 교육학연구44 2, p.41 5) 박규태(2009) 교토와 도래인: 하타씨와 신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문화연구45, pp.258 265 하타씨의 가야계 신라인설에 대하여는 이 논문에 상세히 논술되어 있다.
106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의 신체와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도래인에 의해 예능이 전파될 가능성이 높 다. 특히 하타노가와가쓰( 秦 河 勝 :6C말 7C중반)가 쇼토쿠태자( 聖 德 太 子 :574 622)로부터 일본예능 전수를 위임받은 시기는 진흥왕(534 576)에 의해 화랑 제도가 정비된 후, 가무가 체계화 된 시점이므로 교류를 통한 도입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 그 후손들이 일본 악소( 樂 所 )를 담당하면서, 신라화랑의 가무를 답습했을 가능성 또한 상당히 높다. 예능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표현수단으로서 한없이 큰 시간과 공간을 형성하므로, 장구한 역사 속에서 장소를 초월하며 전승되기 때문이다. 치고마이에 관한 선행연구가 부족한 관계로 본고에서는 현지조사와 영상 물을 많이 활용하였다. 먼저 치고마이에 관한 현황조사를 하고, 화랑의 기능 을 제사, 악사, 무사로 분류한 후, 이것을 기준으로 화랑가무와 치고마이에 대해 비교적 관점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이해를 돕고 논점을 분명히 하 기 위해 분류한 형태에 부합되는 하타씨 관련의 치고마이를 선정하여 연행형 태를 관찰한 후, 도표로 제시하였다. 다소 주관적인 해석이 개입될 수 있으므 로, 동작 분석표를 사진과 함께 작성하여 첨부하였다. Ⅱ. 치고마이 치고마이는 치고( 稚 児 ) 6) 에 의해 행해지는 춤으로, 절이나 신사의 치고가구 라( 神 楽 )나 치고부가쿠( 舞 楽 ), 치고엔넨( 延 年 )뿐만 아니라, 덴가쿠( 田 楽 )와 후 류( 風 流 ), 사루가쿠, 노 등의 다양한 민속예능에서 존재한다. 일본 문화청이 지정한 286개의 중요민속무형문화재 중에서 치고마이와 관련된 예능이 14개 나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그 보존적 가치가 높다. 치고마이가 중요시되는 이 유는 신성하고 정화된 신체를 가진 치고가 추는 춤이기 때문이다 7). 어린이는 신령이 들기 쉬운 신의 매개자로서 사사( 社 寺 )의 제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다. 치고마이의 일본 내 현황 분석을 위하여, 혼다야스지의 일본의 전통예능 전권 8) 과 문화청의 문화유산 온라인 9) 에 수록되어 있는 각 지역의 민속예능을 6) 치고는 성인식 이전의 소년, 어린이, 전근대의 사원이나 무가에서의 남색의 소년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본고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성년전의 소년을 지칭하도록 하겠다. 7) 神 田 より 子, 俵 木 悟 (2010) 民 俗 小 事 典 神 事 と 芸 能 吉 川 弘 文 館, pp.165 167
신라화랑 가무( 歌 舞 )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 稚 児 舞 )의 현황 고찰 (전금선) 107 일일이 검토하여, 대표적인 치고마이를 <표. 1>로 정리하였다. <표. 1> 민속 예능 장르별 대표적인 치고마이 현황(필자 작성) 민속예능 세부 장르 대표적인 치고마이 현황 巫 女 神 楽, 採 物 神 楽, 湯 立 神 이야히코( 弥 彦 )신사치고마이, 미쓰하시( 三 都 가구라( 神 楽 ) 楽, 囃 子 神 楽 ( 山 伏 神 楽 ), 番 橋 )산조로마쓰리( 参 候 祭 ), 하쿠산츄쿄( 白 山 中 楽, 大 神 楽 居 )신사고단가구라( 五 段 神 楽 ), 기타시타라 하 나마쓰리 하나노마이 덴가쿠( 田 楽 ) 田 舞 と 田 楽 躍, 囃 し 田, 田 遊 고보덴( 御 宝 殿 )치고덴가쿠( 稚 児 田 楽 )후류( 風 び, 田 植 踊 流 ), 무쓰키진지( 睦 月 神 事 ) やすらい 花, 太 鼓 踊, 鹿 躍, 念 노모노봉오도리( 野 母 の 盆 踊 )우라마쓰리( 浦 후류( 風 流 ) 仏 踊, 盆 踊, 小 歌 踊, つくりも 祭 )치고마이, 소가시진쟈가미오도리( 曽 我 氏 神 の 風 流, 綾 踊, 奴 踊, 動 物 仮 社 神 踊 ), 오야다노힌코코( 大 矢 田 のヒンココ), 갓 装 の 踊 코치고마이 14지역 축복예 ( 祝 福 藝 ) 祝 福 藝 하카타마쓰바야시( 博 多 松 ばやし) 이토이가와노우노무악( 糸 魚 川 ㆍ 能 生 の 舞 楽 ), 야히코신사무악( 弥 彦 神 社 の 舞 楽 ), 하쿠산신사 무악( 白 山 神 社 舞 楽 ), 아마쓰신사무악( 天 津 神 社 도래계( 渡 來 伎 楽, 舞 楽, 散 楽, 延 年, 能, 舞 楽 ), 엣츄의 치고무악( 加 茂 神 社 の 稚 児 舞, 宇 奈 系 )와 무대계 狂 言, 人 形 まわし, 歌 舞 伎 月 町 の 法 福 寺 婦 中 町 の 熊 野 神 社 ), 니이야마의 ( 舞 臺 系 ) 엔넨( 新 山 の 延 年 ), 네치야마데라의 엔넨( 根 知 山 寺 の 延 年 ), 와라비오카엔넨( 蕨 岡 延 年 ), 다카오 카데라핫코( 高 寺 八 講 ) 기타 지역 오도리( 踊 ), 창작무용 가라코오도리다치오도리( 唐 子 踊 と 太 刀 踊 ), 헤 코니세( 兵 児 二 才 )사무라이오도리( 士 踊 り) <표. 1>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치고마이는 도래계 예능인 부가쿠와 엔넨 에서 높은 비율로 분포하고 있었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14개의 치고마 이중에서 11개가 부가쿠와 엔넨이었고, 지역적으로는 니이가타( 新 潟 )와 도야 마( 富 山 )현이 가장 많았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의문은 민속예능에서 가구라 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음에도 불구하고, 치고마이는 도래계 예능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가구라는 미혼 여성 미코( 巫 女 )가 추는 미코마이( 巫 女 舞 )의 형태가 많았다. 치고마이가 중시되는 이유가 치고의 신성한 존재적인 가치 때문이라고 한다면, 신의 제례의식인 가구라에 8) 本 田 安 次 (1998) 日 本 の 傳 統 藝 能 (1 20 卷 ), 錦 正 社 전권이용 9) http://bunka.nii.ac.jp/index.do
108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서의 비율이 높아야 하며 춤의 주체를 굳이 씨자( 氏 子 )에서 선출된 남아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치고의 종교적인 상징성만으로는 설명 되기 힘든 부분인데, 이외에 다른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며, 그 중 하나가 도래계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우선 연행 빈도가 높은 엔넨과 부가쿠에서의 치고마이에 관해 살펴보자면, 엔넨은 대사원에서 빈객을 접대하거나 법회가 끝난 후에 승려나 치고가 중심 이 되어 행하는 예능을 뜻한다. 흥복사나 동대사, 법륭사, 약사사 등에서 행 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10), 후류나 치고부가쿠, 가구라, 만자이( 万 才 ), 시시마이 ( 獅 子 舞 ), 가면무( 仮 面 舞 ), 오마이( 翁 舞 ) 등의 여러 장르가 복합된 예능형태 다. 이중에서 치고에 의해 연희되는 춤을 치고엔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 에 춤의 형태를 어느 하나로 특정 짓기는 어려는 면이 있다. 이에 비해 치고가 연희하는 부가쿠를 뜻하는 치고부가쿠는 비교적 전형화 되어 있으며, 고대의 원형이 어느 정도 유지된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가장 체계적인 전수 역사를 거쳤다는 것이다. 부가쿠의 전래 시기는 확실 치 않으나, 속일본기 다이호2년(702)의 기사에 고죠타이헤이라쿠( 五 常 太 平 樂 )가 연주된 예가 보이므로 율령국가체제가 정비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 으로 보인다. 이때는 이미 한반도에서 도입된 시라기노가쿠( 新 羅 楽 )와 구다 라노가쿠( 百 済 楽 ), 고마가쿠( 高 麗 楽 )도 포함되었으며 11), 이 중에서 시라기노 가쿠는 체계적인 중앙의 예능으로, 귀족의 비호를 받았다는 점에서 화랑의 가무와 동질의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후 일본 율령국가의 정비와 함께 가가 쿠료( 雅 楽 寮 )가 설치되면서 도래계 무용인 부가쿠는 체계화된다. 료노슈게 ( 令 集 解 ) 에 의하면 가가쿠료에서는 도래계의 음악과 무용, 악기가 전수되었 다고 하며, 신라, 백제, 고려악은 각각 악사4명과 악생 20명을 두고 있었다. 12) 헤이안시대 말기, 고대국가가 해체되면서 가가쿠료의 궁중부가쿠는 쇠퇴하 게 되고 악인도 분산되었지만, 다행히 삼방악소에 의해 활동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삼방악소는 교토의 악소와 더불어, 나라ㆍ헤이안 시대에 흥행한 흥복사와 약사사, 동대사 등을 중심으로 한 남도악소( 南 都 楽 所 )와 오사카사 천왕사악소( 四 天 王 寺 楽 所 )를 지칭한다. 이 중 사천왕사의 부가쿠는 하타노가 와가쓰의 자손이 악가( 樂 家 )의 선조가 되었고 그 때 전해진 가무가 원류가 10) 安 田 次 郎 (2009) 寺 社 と 芸 能 の 中 世 山 川 出 版 社, pp.36 42 11) 古 岡 英 明 (1982) 下 村 加 茂 神 社 稚 児 舞 調 査 報 告 書 富 山 県 射 水 郡 下 村, p.82 12) 今 岡 謙 太 郞 (2008) 日 本 古 典 藝 能 史 武 藏 野 美 術 大 學 出 版 局, pp.26 27
신라화랑 가무( 歌 舞 )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 稚 児 舞 )의 현황 고찰 (전금선) 109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13). 특히 민중예능발전에 기여하여 도시 문화 를 지방으로 전파시킴으로써, 지방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지 방의 치고마이로, 현재 부가부의 영향을 받은 치고부가쿠가 전국에서 행해지 게 된 요인이 되었다. 중앙의 부가쿠를 광범위하게 지방으로 분포시킨 역할 을 한 것은 전문 예능자와 산악신앙관계의 야마부시이다 14). 이러한 이유에서 인지 치고마이의 분포도가 높은 곳은 도호쿠( 東 北 )와 호쿠리쿠( 北 陸 ), 츄부 ( 中 部 ) 등의 산이 많은 지역이다. 특히 엣츄( 越 中 )에서 에치고( 越 後 )에서는 치 고부가쿠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치고부가쿠와 더불어 유명한 것이 갓코( 羯 鼓 )를 매고 추는 갓코치고마이이 다. 교토를 비롯하여, 시즈오카현과 아이치현, 기후현, 니가타현, 미에현, 와카 야마현, 도쿠시마현 등의 14개 지역에서 연행되고 있다. 시시마이( 獅 子 舞 )와 함께 연행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토 기온마쓰리의 나기나타보코의 갓코치고마이이다. 그렇다면 치고마이는 언제부터 가무의 정식형태로 자리하게 되었을까. 그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도래계의 기가쿠와 부가쿠가 전래되면부터라고 여겨 진다. 일본서기 스이코천황20년(612)의 기사에 의하면 백제인 미마지가 구 레( 吳 )에서 기가쿠( 伎 樂 )를 배워와 소년들을 모아 가르쳤다고 한다 15). 그 후 쇼토쿠태자( 聖 德 太 子 )는 야마토( 大 和 )의 사쿠라이( 桜 井 邑 )에 갓코( 楽 戸 )를 설 치하여 소년들에게 교습시키고, 기가쿠를 사원의 법악으로 정하여 하타노가 와가쓰에게 기가쿠의 전수를 위임했다. 쇼토쿠타이시덴키( 聖 徳 太 子 伝 記 ) 에 는 18인의 악사가 미마지로부터 기가쿠를 배웠는데 이들은 하타노가와가쓰 와 그의 자식 5인과 손자 3인, 하타노가와미쓰( 秦 川 満 )와 그의 자식 2인과 손 자 3인 등 총 15인이 하타씨라고 기술되어 있다. 기가쿠 전수에 하타씨가 상 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마지가 춤을 배웠다는 구레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는데, 이영식은 고대에 낙동강 중하류유역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례( 久 禮 )라는 지역으로 보았고, 무라가미 쇼코( 村 上 祥 子 ) 도 여기에 동조하며 쇼토쿠태자가 기가쿠 전습에 힘쓴 것은 한반도계 불교의 영향을 받은 하타씨 때문이라고 했다 16). 또한 최재석은 752년 동대사대불개 13) 南 国 美 保 (2008) 四 天 王 寺 聖 霊 会 の 舞 楽 東 方 出 版, p.122 14) 전문예능집단과 하타씨, 야마부시와 화랑과의 유사관계에 관해 언급되기도 한다. 15) 성은구역주(1993) 日 本 書 紀, 고려원, p.350 16) 村 上 祥 子 (1991) 韓 国 仮 面 劇 と 日 本 伎 楽 の 比 較 研 究 比 較 民 俗 研 究 3, pp.91 92
110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안식에서의 기가쿠 복식이 신라 복식임을 밝혀, 미마지 이후 연행된 기가쿠 는 신라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17). 일본서기 에 의하면 덴무천황4년 (685) 신라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츠쿠시의 관세음사( 觀 世 音 寺 )에 서 기가쿠를 행했다고 한다. 신라 사신을 위해 행한 이때의 기가쿠는 백제식 이 아니라 신라식으로 추정된다 18). 하타씨에 의해 전수된 기가쿠는 그들의 조국의 양식을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화랑도를 제도화한 진흥왕이 가무를 중시하여 화랑에게 전수를 명했듯이 쇼토쿠태자도 소년들에게 교습시킬 것을 명했다. 그 주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쇼토쿠태자의 측근인 하타씨였다. 부가쿠의 경우에도 동무( 童 舞 ) 파트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필자는 가무로 서의 치고마이라는 관념이 기가쿠와 부가쿠가 도입되면서 도래계의 영향을 받아 확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신라 화랑 무용의 성격은 어떠하였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화 랑의 성격과 수련방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미시나 쇼에이는 화 랑의 성격을 1가무유오를 하는 청년사교클럽과 같은 것. 2국가 유사시에 미소년을 받들어 전장에 나가는 청년 전사단. 3 국가적 사회적 교육을 받는 청년 집회. 4 신령과 통하여 제의를 행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19).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화랑도의 성격이 거론되었는데, 대부분 이종욱이 정의 한 무사( 武 事 )ㆍ악사( 樂 事 )ㆍ제사( 祭 事 ) 20) 로 요약되는 듯하다. 화랑의 성격은 수련과정에도 반영되어, 상마도의( 相 磨 道 義 ), 상열가악( 相 悅 歌 樂 ), 유오산수( 遊 娛 山 水 )와 같은 교육을 행하였다. 상마도의는 가무와 신체 수련을 통해 화랑도의 조화로운 전인적 인격 수련을 목적으로 충( 忠 )의 사상 을 실현하자는 것이고 상열가악은 가악으로써 서로 즐기며 조화롭고 성숙된 인간성을 형성해 가는 것으로 제의적( 祭 儀 的 ) 기능에서 그 시원( 始 原 )을 찾기 도 한다. 유오산수라는 것은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기며 명산대천을 찾아 도 의를 닦는 것을 뜻한다 21). 화랑의 가무는 이와 같은 화랑도의 성격과 수련방 식을 포함했을 것이며, 치고마이에서도 유사한 성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무사( 武 事 )ㆍ악사( 樂 事 )ㆍ제사( 祭 事 )로 구분하여 화랑 17) 최재석(1994) 일본정창원의 가면 기악에 대하여 한국외대일본연구, pp.49 54 18) 전금선(2012) 도래인 하타씨의 고대 예능 연구 비교일본학 27집, pp.78 82 19) 三 品 彰 英, 이원호역(1995) 新 羅 花 郎 의 研 究 集 文 堂, p.53 20) 이종욱(2003) 화랑 휴머니스트, pp.248 251 21) 박균섭(2002) 화랑의 교육구상과 수련활동 한국청소년연구13 1, pp.79 106
신라화랑 가무( 歌 舞 )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 稚 児 舞 )의 현황 고찰 (전금선) 111 무용과 치고마이에 관하여 논하기로 하겠다. Ⅲ. 무사ㆍ악사ㆍ제사로서의 화랑가무와 치고마이( 稚 児 舞 ) 1. 무사( 武 事 )로서의 가무 상마도의( 相 磨 道 義 ) 화랑은 국가유사시에 대비하여, 무예를 연마하고 신체수련을 행했다. 화 랑세기( 花 郞 世 記 ) 22) 에는 검술( 劍 術 )이나 말타기( 馬 術 ), 활쏘기( 弓 術 ), 격검 ( 擊 劍 ) 등의 기사가 보이고,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나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에는 창술( 槍 術 )도 언급되고 있다 23). 이 밖에 택껸도 행해졌었다 24). 화랑세 기 에 의하면 신라는 가야 검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예 가 문노(537 606)와 김유신(595 673)으로, 이들은 모두 가야계 풍월주로서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가야의 금속관련 기술과 무예 가 신라에 흡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25). 무예를 무용으로 발전시킨 무무(( 武 舞 )의 대표적인 예가 황창랑무 라는 검무 이다. 동경잡기 에는 검무 의 유 래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황창랑은 신라 사람이다. 전설에 따르면 나이 일곱 살에 백제의 저잣거리에 들어가서 칼춤을 추니 구경꾼이 담장처럼 둘러쌌다고 한다. 백제왕이 이를 듣 고 불러서 보았는데 당 위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라고 명령했다. 황창랑이 그 리하여 칼춤을 추다가 왕을 찔렀다. 백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 람들이 이를 슬프게 여겨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 칼춤 추는 형상의 가면을 만 들었는데, 지금도 그것이 전해진다.(동경잡기) 26) 황창랑이라는 인물과 살해된 백제왕이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라 화랑인 관창의 충용담이 와전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27). 화랑에 의해 22) 사료로서의 진위여부에 시비가 있지만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술에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 고, 기존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사건 등이 새롭게 등장하는 등 진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본고에서는 화랑세기의 기사를 이용하도록 하겠다. 23) 김권택, 오주성(2011) 화랑세기에 기록된 신라화랑의 무도 무예연구5 2, p.3 24) 전덕재(2005) 신라 화랑도의 무예와 수박 한국고대사연구38, pp.135 168 25) 김진범, 이인희외(2000) 신라화랑의 신체활동에 관한 연구 대한무도학회지, pp.86 87 26) 민주면 외 역(2009) 동경잡기 지식을 만드는 지식, p.52
11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검무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뜻하며, 당시의 화랑들이 신체수련을 위해 무기를 이용한 무예무를 추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야와 신라인의 뛰어난 무예술이 하타씨 일족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8). 곤파루젠치구( 金 春 禪 竹 )의 메이슈쿠슈( 明 宿 集 ) 에는 하타노가와가 쓰의 자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타노가와가쓰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한명에게는 무( 武 )를 전하고 한 명은 레이진( 伶 人 ), 악( 樂 )을 전하고 한명에게는 사루가쿠( 猿 楽 )를 전했다. 무 를 전한 것은 야마토의 하세가와토( 長 谷 川 党 )이고, 악을 전한 것은 가와치의 사천왕사의 악사이다. 그리고 사루가쿠를 전한 것이 엔만이( 円 満 井 )의 곤파루 다유( 金 春 大 夫 )이다.( 明 宿 集 29) 부가쿠와 사루가쿠 이외에 무( 武 ) 또한 하타씨에 의해 전수되었다는 내용 으로, 이러한 무는 하타씨가 담당하는 부가쿠에서 무구( 武 具 )와 무예동작의 형태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치고마이는 악사와 제사에 비해 무사의 성격이 강하지 않지만 치고에 의 해 행해지는 무예무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치고부가쿠( 稚 児 舞 楽 ) 는 활이나 창, 검, 방패 등의 무구( 武 具 )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타씨 ( 波 多 志 )신사로 유명한 야마나시현 가와구치아사마( 河 口 浅 間 )신사의 치고마 이는 오른손에는 방울을 왼손에는 검을 들고 추는 동작이 한국의 검무와 유 사하다. 또 하타씨의 씨사( 氏 寺 )인 다쿄지( 建 穂 寺 )에 봉납되던 시즈오카현아 사마( 静 岡 縣 浅 間 )신사의 치고마이도 한국의 택껸 동작과 유사한 동작들이 많 아 연관성 연구가 요구된다. 한편 유사시에 대비한 무사로서의 수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가고시 마 헤코니세( 兵 児 二 才 )의 사무라이오도리( 士 踊 り)이다. 가고시마는 하타씨계 도래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요로4년(720)에 일어난 하야토의 반란에서 동족 을 구하기 위해 후젠( 豊 前 )지역으로부터 하타씨 집단이 대거 이주한 곳으로 27) 이병옥(2014) 한국무용통사 고대편 민속원, p.290 28) 6세기 진흥왕의 화랑제도 성립 이전에 이미 가야의 영향을 받은 무예가 발달해 있었음을 의 미한다. 화랑제도가 정비된 6세기 말과 하타씨족이 대거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인 5 6세기의 시간차를 신라의 가야문화 흡수로 설명할 수 있다. 29) 梅 原 猛 (2002) 翁 と 河 勝 角 川 學 藝 出 版, pp.22 23
신라화랑 가무(歌舞)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稚児舞)의 현황 고찰 (전금선) 113 도 알려져 있다30). 헤코니세의 기원은 이즈미(水出)지역의 헤코니세이다31). 이곳은 하타씨와 관련된 가라쿠니다케(韓国岳)와 한국우두봉신사(韓國宇豆峰 神社), 하치만신궁과 근접해 있다. 미시나 쇼에이는 헤코니세와 신라화랑과의 유사성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화랑집회의 연구에 임해서 청년전사들이 장식한 미소년을 받들었다는 특이한 점에 관해, 이와 거의 흡사한 일본 사쓰마(薩摩藩)의 헤코니세(兵児二才)제도 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헤코니세 란 봉건시대 사츠마 각지에서 행해졌던 사족(士族)의 젊은이조합이다.(중략) 2, 3명의 명문출신의 미소년에게 긴 명주옷을 입혀 아름답게 화장한 자를 도리모치고 로 부르며 이를 받들었 던 것이다32). 이에 대해 오오와 이와오(大和岩雄)는 헤코니세의 원류는 신라화랑이고 그 직접적 연관관계는 하타씨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33). 헤코니세가 추었 던 사무라이오도리는 시마즈타다요시(島津忠良:1492 1568)의 창작이라고는 하지만 그 기원은 확실치 않다34). 예능에서의 창조라는 것은 전통에 기인하 기 때문에 원래 이지역에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마즈(島津)가도 하타씨의 후손(하타씨 고레무네우지(惟宗氏) 시마즈타다시하(島津忠久))으 로 알려져 있으므로, 헤코니세의 사무라이오도리와 하타씨예능, 그리고 화랑 가무는 충분히 연결해 볼 가치가 있다. 사례: 사무라이오도리(士踊り)의 연행 형태 사무라이오도리는 매년 7월23일 가세다시다케다(加世田市竹田)신사에 봉 납되는 가고시마의 무형민속문화재로, 청년이 추는 니세오도리(二才踊り)와 소년이 추는 치고오도리로 구성되어 있다. 30) 大和岩雄(2009) 日本にあった朝鮮王國 謎の秦王國と古代信仰 白水社, pp.89 90 31) 西中研二(2012) 薩摩兵児二才と新羅花郎徒の比較研究 筑波大学博士学位論文, pp.29 33 32) 三品彰英, 이원호역(1995) 新羅花郎의研究 集文堂, pp.106 107 33) 大和岩雄(2009) 日本にあった朝鮮王國 謎の秦王國と古代信仰 白水社, pp.91 96 34) 東元ろか(2007) 士踊の伝承と保存について お茶の水音楽論集第9号, pp.2 4
114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표. 2> 사례: 사무라이오도리(士踊り)의 연행 형태(필자 작성)35) 1. 헤코오도리4명의무인 이한발씩천천히내밀며 배전으로행진한후왼발 오른손을붙여배례한다. 2. 제위치에서면나머지 사람들은이중의원을만 들고안쪽은우측으로바 깥은좌측으로한발씩밟 으며돈다. 3. 일시정지하고손을위 로올려앞으로한발뒤 4. 세번제자리에서높이 뛰며 6열종대에서기마자 로한발씩내고위에서박 수를치며양쪽으로한걸 세를한다. 팔을앞으로하 여무릎을굽히고앞뒤로 음씩옮긴다. 바꾸며뛴다. 5. 한발씩차례대로천천 히 들면서 발을 구른다. 6. 니세가 배전에 배례하 고퇴장하면치고가다이 방향을바꾸며뒤로뛰며 다시좌우로발을높이들 며구른다. 코와가네를치며일열로 등장한다. 3열로 좌측 원 을돈다. 7. 기수를선두로하여미 8. 북을앞으로내밀고, 양 치유키를 연주하면서 원 을만들며걷는다. 다이코 발을차례로앞쪽으로내 면서원을그리며돈다. 북 모치가1열로선후선두에 서북을친다. 을 두번친후같은동작 반복한다. 9. 경내를 5 6번 돌고 난 후, 다이코와가네를연주 하면서춤의진을바꾼다. 10. 일렬로북을친다. 차 례로북을내리고, 좌측에 서가네를연주한후, 인사 하고퇴장한다. 논자가 관찰한 춤의 특징은 6열이나 3열, 원진 등의 다양한 춤의 진이 나타나고, 비교적 간단한 동작이지만 스모동작을 이용한 단체 수련무의 성격이 강하며, 다 이코와 가네를 조화롭게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행연구들에 의해 헤코니세와 화랑과의 연관성이 거론은 되었지만, 가무 35) 2010년7월23일 여름마쓰리(夏祭り) 영상 http://video.search.yahoo.co.jp/search?ei=utf 8&fr= top_ga1_sa&p=%e5%a3%ab%e8%b8%8a%e3%82%8a
신라화랑 가무( 歌 舞 )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 稚 児 舞 )의 현황 고찰 (전금선) 115 의 연행형태면에서 볼 때 화랑가무와의 직접적인 연결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판단된다. 단 화랑가무의 단체 수련무, 전투시의 용고를 이용한 춤의 연행가능성에 대하여는 참고가 될 만하다. 오히려 무사로서의 가무는 부가쿠 에서 연행되는 무예무에 연구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2. 악사( 樂 事 )로서의 가무 상열가악( 相 悅 歌 樂 ) 화랑도가 제도화된 진흥왕대에 이르러 신라의 가무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진흥왕은 재위12년(551)에 가야에서 망명한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수용하 여 음악을 제작하게 했고 다음 해에는 게고와 법지, 만덕 세 사람을 우륵의 제자로 삼아 가야금과 노래, 춤을 전수하게 하였다. 또 팔관회를 육성하고, 가야문화를 수용하여 전문 예술가를 양성하는 등 예술을 장려했다 36). 화랑 중에서 특히 10세 풍월주 미생랑은 춤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화랑세기 의 미생랑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미생은)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는데 말에 오를 수 없었다. 미진부공이 쫒 아내려 하자 미실이 말하기를 어찌 나의 아우를 한 번에 내칩니까. 하였다. 사다함 또한 부득이 받아들였다. 문노가 꾸짖어 무릇 낭도란 자의 힘이 말에 오를 수 없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일을 당한다면 어디에 쓸 것인가 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 니 이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문노가 다시 따지지 않았다. 37) 미생랑은 진흥왕이 총애했던 미실의 아우로, 비록 말과 검을 다루지는 못 했지만 춤에는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낭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랑도에서의 가무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또한 미생랑은 왕 이 여러 번 불러 입궁하여 동태자, 금태자와 함께 춤을 배우게 하였다. 미생 랑은 만덕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38) 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화랑가무와 신라궁정가무는 동질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신라궁정가무는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부가쿠의 일부로 편입된다. 초기에는 36) 김효분(2004) 신라무용의 발달과정 대한무용학회논문집39호. pp.32 34 37) 김대문, 조기영 역(1997) 화랑세기 : 화랑세기 및 화랑외사 장락, pp.112 113 38) 이종욱(2002) 신라화랑도의 활동 서강인문논집제16집, p.71
116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궁정부가쿠로 형태로 재정비되어 주로 궁정이나 대사원에서 연희되었고, 후 에 지방으로 확산되어 지역 민속예능으로 발달했는데 그 중 하나가 치고부가 쿠이다. 39). 한편 궁중부가쿠는 우방( 右 方 )과 좌방( 左 方 )으로 체계화되었고, 그 중 한국 계의 악은 우방이 담당하였다. 악가록( 樂 家 錄 ) 에 의하면 교토의 무( 舞 )는 오오가( 多 家 )가, 사천왕사의 우무( 右 舞 )는 하야시가( 林 家 )와 도기가( 東 儀 ( 太 秦 ) 家 )가 담당하고 있었다 40). 이들은 모두 하타씨 관련 악인들로, 교토의 오 오가( 多 家 )의 선조인 오오노시넨마로( 多 自 然 麻 呂 )는 하타씨가 오오씨의 성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1). 또한 사천왕사의 악가는 도기( 東 儀 ), 하야시( 林 ), 소노( 薗 ), 오카( 岡 )의 4가문으로 구분되는데 이들도 하타노가와가츠를 선조로 하고 있다. 도기( 東 儀 )가는 하타노가와가쓰의 4남을 계승하여 우무와 좌무를, 소노가는 차남으로 좌무를, 하야시가는 3남으로 우무를, 오카가는 8남으로 좌 무를 담당한다 42). 현재 부가쿠는 명치3년(1871) 삼방악소가 해체되고 궁내청 악부에 흡수되었지만, 관문5년(1665)부터 실시된 자격시험제도로 인해, 악인 들에게는 가무를 보존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원형이 유지된 채 전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하타씨 악인들에 의해 체계화되고 하타씨 계 통을 주장하는 악인들의 의해 고대의 형이 유지되어 온 부가쿠에 신라의 가 무가 일부 전수될 법도 하다. 한편, 악사의 기능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전술했던 갓코치고마 이이며, 그 대표격은 기온마쓰리( 祇 園 祭 )이다. 기온마쓰리가 열리는 야사카신 사는 야사카향진좌대신기( 八 坂 鄕 鎭 座 大 神 記 ) 에 의하면 스이메이2년(656) 에 한국( 韓 國 )의 조진부사 이리시오미( 伊 利 之 使 主 ) 43) 가 신라국우두산( 新 羅 国 牛 頭 山 )에 진좌한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모셔와 창건했다고 전한다 44). 에이가 쿠요키( 叡 岳 要 記 ) 에는 엔랴쿠13년(794)의 엔랴쿠지( 延 暦 寺 ) 초도공양의식에 참가한 악인 66인이 모두 하타씨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나라ㆍ헤 이안 시대에는 하타씨가 악인으로서 의례를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39) 神 田 より 子, 俵 木 悟 (2010) 民 俗 小 事 典 神 事 と 芸 能 吉 川 弘 文 館, p.335 40) 今 岡 謙 太 郞 (2008) 日 本 古 典 藝 能 史 武 藏 野 美 術 大 學 出 版 局, pp.26 29 41) 大 和 岩 雄 (2006) 秦 氏 の 研 究 大 和 書 房, pp.480 481 42) 南 国 美 保 (2008) 四 天 王 寺 聖 霊 会 の 舞 楽 東 方 出 版, p.122, p.132 43) 이리시오미는 고구려인( 狛 人 )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감신원우두천왕고( 感 神 院 牛 頭 天 王 考 ) 에는 666년 가야인이 고구려 조진사로 내조하였다고도 전한다.(박규태, 2010. 44쪽) 44) 紀 繁 継 (1870) 八 坂 社 旧 記 集 録 上 近 代 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p.9
신라화랑 가무( 歌 舞 )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 稚 児 舞 )의 현황 고찰 (전금선) 117 데 45), 엔랴쿠지의 말사였던 야사카신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기온마쓰리 의 기원은 조간11년(869) 역병퇴치를 위해 행해진 기온어령회이며, 당시 교 토의 가장 유력한 호족이었던 하타씨의 경제적 후원 하에 하타씨 악인에 의 해 의례 예능이 진행되었고, 마쓰리가 열리는 야마보코쵸는 하타씨 주거지의 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하타씨 상인들이 역할도 상당했다 46). 갓코치고마이( 羯 鼓 稚 児 舞 )는 야마보코 순행시 선두에 서는 나기나타보코 ( 長 刀 鉾 )의 치고가 피로하는 춤이다. 원래는 부채를 들고 노래를 읊으며 허리 에 찬 갓코를 두드리며 추는 치고구세마이( 稚 児 曲 舞 )의 형태였는데 이후에 야마보코에 올라타서 추게 되었다. 15세기 중반에 그려진 월차제례도모본( 月 次 祭 礼 図 模 本 )에는 니시진( 西 陣 )의 오오도네리자( 大 舎 人 座 )가 조진한 가사사 기보코( 笠 鷺 鉾 )에서 행해지는 갓코치고마이가 그려져 있다 47). 이 그림에 등 장하는 오오도네리좌는 하타씨계의 직물직인집단을 뜻하는데, 갓코마이를 추 는 사람들도 동족계로 추정된다. 타이류이치( 田 井 竜 一 )는 이들을 하층의 전 문예능집단인 산소( 散 所 )의 예능자로 보았다. 16세기 후반부터 춤의 주체가 유력씨자의 자제로 바뀌면서, 춤이 단순화되고 신성화되었지만 원래는 산소 의 예능인이 갓코치고마이를 담당했다는 것이다 48). 이러한 산소예능은 하타 씨가 신봉하는 하치만신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도래계일 가능성이 있다 49). 또 한 이들이 모시는 하쿠다유( 白 太 夫 )신이 하타씨가 모시는 시라야마( 白 山 )신 앙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고대 일본으로 도래한 한국계 재인( 才 人 )집단이 하타씨의 통제하에 들어가거나, 스스로 하타씨와 결탁한 형태로 한국의 예능 을 도입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50). 이후 기온마쓰리의 갓코치고마이는 산소의 예능자나 하타씨 상인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국 의식의례에서 시작된 치고마이는 하층 예인집단의 영향을 받으면서 갓코치고 마이의 형태로 변형되었고, 이후에 다시 야마보코쵸의 유력 집안 소년이 추 게 되면서 현재와 같은 신성화된 춤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45) 井 上 滿 郞 (2011) 秦 河 勝 吉 川 弘 文 館, p.229 46) 전금선(2011) 처용무와 기온마쓰리의 연관성 고찰 비교일본학제25집, pp.178 181 47) http://webarchives.tnm.jp/imgsearch/show/e0027373 東 京 国 立 博 物 館 画 像 検 索 48) 植 木 行 宣, 田 井 竜 一 (2010) 祇 園 囃 子 の 源 流 岩 田 書 院, pp.46 47 49) 윤광봉(2009) 일본의 신도와 가구라 태학사, p.105 50) 大 和 岩 雄 (2006) 秦 氏 の 研 究 大 和 書 房, p.426
118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사례: 기온마쓰리의 치고마이 현재의 연행형태에 관하여는 2014년의 7월의 현지조사51)를 토대로 간략히 언급하겠다. 치고마이는 7월5일 나기나타쵸회관(長刀町會所)과 7월17일 야마 보코 순행시에 행해진다. 일명 태평의 춤(太平の舞) 으로 마쓰리의 무사진행 과 오곡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52) 이 춤은 야마보코 순행에서 선두에 서는 나기나타보코(長刀鉾)의 치고가 추는데, 매년 씨자에서 10세 전후의 소 년 중에 선택되며, 춤 이외에도 다양한 제의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7월 1일에는 야사카신사 참배하는 나가나타쵸오센도(長刀鉾町お千度)를, 5일에는 깃부이리의례(吉符入の儀)를, 13일에는 헌상품을 실은 백마(白馬)를 대동하 여 야사카신사에서 대명의 직위를 받는 의례를 행한다. 이때부터 치고에게는 야마보코 순행이 끝날 때까지 땅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주어진다. 17 일의 야마보코 순행은 선두에 선 나기나타보코 치고가 치고마이를 춘 후, 시 메나와(注連縄)를 자르면서 시작된다. 이외에 구세고마가타(久世駒形)치고, 우마오사(馬長稚児)치고53)가 있는데, 구세고마가타치고는 신코사이(神幸祭) 와 칸고사이(還幸祭)에서 미코시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치고이다54). 2014년의 춤의 연행 형태는 <표. 3>과 같다. <표. 3> 사례: 기온마쓰리의 치고마이(필자 작성) 1. 치고, 양쪽에는 가무로(禿) 2명, 뒤에는 보조인이 위치한다. 정 례를 하고, 채를 X자로 하여 왼쪽 앞으로 몸을 힘있게 내민다. 이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다. 이때 어른이 잡아주며, 오른쪽 가무로 가 부채로 동작을 같이 한다. 2.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몸을 옮긴다. 오른쪽 가무로의 부채도 동선을 같이 따라서 반원을 그린다. 51) 현지조사일: 2014년 7월 17일, 23 24일. 사진: 2014년 7월 5일 52) 中田昭 (2011) 京都祇園祭 京都新聞出版センター, p.25 53) 24일의 하나가사순행(花傘巡行)시 화려한 복장으로 말을 타고 행렬을 이루는 치고이다. 54) 八木透(2002) 京都の夏祭りと民俗信仰 昭和堂, pp.96 99
신라화랑 가무(歌舞)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稚児舞)의 현황 고찰 (전금선) 119 3. 몸을 정 가운데로 옮기고 양팔을 벌려 원을 그리며 천천히 내 린다. 이어 양손을 갓코가 있는 쪽으로 옮긴다. 4. 갓코를 두 번 친다. 다시 채를 X자로 하고 이번에는 오른쪽으 로 몸을 앞으로 내민다. 왼쪽 가무로의 부채도 따라간다. 오른쪽 으로 몸을 옮기며 동작을 반복한다. 아주 단순하지만 신성한 요 소가 있는 춤이다. 갓코를 매고 채를 든 치고와 부채를 든 가무로(禿)가 단순한 동작을 하지 만, 신성하고 제의적 요소가 강한 춤이었다. 궁정예능인에 의해 행해진 의례 가무가 이후에 서민화되어 하층 예능의 복합요소와 결합했지만, 치고가 추게 되면서 신성함을 되찾았던 것이다. 특히 하타씨 관련 직인과 산소 예능인의 영향을 받으며, 초기 치고마이에서 많은 변형을 거쳐 오늘날의 형태로 발달 해 왔다. 백색화장을 한 치고가 이끄는 제례의식은 화랑의 형태와 아주 흡사 하다. 그러나 춤의 경우에는 발생초기의 연행 형태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연행형태와 화랑가무와의 연광성을 언급하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 어 보인다. 그러나 갓코와 요고(腰鼓)와의 상관관계 또는 화랑의 요고춤에 관 하여는 타진해 볼 필요가 있겠다. 3. 제사(祭事)로서의 가무 유오산수(遊娛山水) 신라는 삼산오악으로 대표되는 산악신앙이 발달한 나라이다. 이러한 점에 서, 신라화랑의 유오산수 는 단순히 가무를 행하고 산을 즐긴 것이 아니라 산악신앙과 관련된 가무의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채호가 화랑을 솟대제단의 무사라고 정의한 것도 이들이 산악신앙을 신 봉하는 무격신앙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55). 미시나 쇼에이는 화 랑의 유오산수 에 대하여 고대인의 놀이 라는 말이 단지 오락적 행위만을 지칭한 것이 아닌 넓게는 주술적 종교적 행위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화랑이 산수에 유오하는 행사는 종교적 의의가 있었다고 쉽게 추측된다. 고 하였 55) 손인수(1996) 앞의 책, pp.257 277
120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다56). 그 대표적인 것이 산신제이며, 고대 문헌에서 상염무와 옥도령, 지백급 간, 산해정령 등과 같은 산신제와 관련된 신라 춤을 볼 수 있다57). 특히 사선 무(四仙舞)는 신라 효소왕 때 사선랑(四仙朗)이었던 영랑과 안상, 술랑, 남랑 의 춤으로, 진연의궤 에 기록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신라 때에 영랑(永郞)ㆍ안상(安祥)ㆍ술랑(述郞)ㆍ남석행(南石行)이라는 화랑이 있었는데, 함께 산수를 오유(滶遊)하여 사선(四仙)이라 불렸다. 금강산에 무선 대가 있는데, 전하는 말에는 네 사람이 여기서 취해 춤추었다고 한다.(진연의 궤)58) 화랑의 유오산수에 관한 내용으로, 사선무는 단절되어 한 때 추어지지 않 았으나 순조29년(1829)에 효명세자가 이 내용을 근거로 다시 창제하였다59). 그러므로 신라당대의 원형은 알 수 없으나, 선(仙) 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이 춤은 산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하타씨도 산을 숭배하여, 그들이 거주했던 곳에는 시라야마(白山)나 히코산(彦山), 가라쿠니다케(韓国岳)와 같은 성산이 있었다. 특히 하타씨는 시라야마(白山)신앙을 숭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규슈와 가가(加賀:이 시카와현)의 시라야마이다. 가가의 시라야마 신앙은 현재의 하쿠산(白山:구명 칭 시라야마)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단군신앙이나 화랑신앙과 관련된 태백 산과 소백산과의 관련성이 언급되기도 한다60). 이곳은 요로원년(717)에 하타 노타이쵸(秦泰澄)가 개산(開山)한 이래 산악수험의 영산이 되었다. 타이쵸의 부친인 미가미노야스즈미(三神安角)는 하타씨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호쿠리쿠(北陸)지역은 한국과 일본의 해역교류의 최적의 장소이며 한국 동해 안을 남하한 문물이 유입되기 쉬인 곳이다61). 신라와의 교류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산악신앙과 일본의 수험도(修験道), 화랑과 야마부시(山伏)에도 유사성이 있다62). 일본 산악신앙인 수험도는 규슈에 있 56) 三品彰英, 이원호역(1995) 新羅花郎의研究 集文堂, p.128 57) 이송(2008) 신라춤과 산신신앙 연구 우리춤연구제7집, pp.24 25 58)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2001 2002) 高宗辛丑進宴儀軌 한국예술종합학교, p.199 59) 아훙구, 손경순(2010) 한국궁중무용총서12 보고사, p.263 60) 中野幡能((1987) 英彦山と九州の修験道 名著出版, p.23 61) 前田速夫(2010) 渡来の原郷 現代書館, pp.42 43 62) 박선수(2010) 韓國과 日本의 祭天文化 比較 선도문화제8집, pp.31 53
신라화랑 가무( 歌 舞 )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 稚 児 舞 )의 현황 고찰 (전금선) 121 는 히코산( 彦 山 )에 전래된 후 구마노( 熊 野 )를 비롯한 영산으로 전해졌다. 히 코산에 처음 수험도가 들어온 이유는 이 산이 하타씨의 성산이기 때문이 다 63). 즉 하타씨가 신라계이기 때문에 화랑의 산악신앙을 이곳에 열었다는 해석이다. 또한 수험도의 조신( 祖 神 )으로 알려진 엔노오즈누( 役 小 角 )는 하타씨와 관 련된 씨족인 가모씨( 賀 茂 氏 ) 64) 로 알려져 있다. 니혼료이키( 日 本 霊 異 記 ) 에 는 엔노오즈누에 관한 재미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백제계 도래 고승인 도쇼 ( 道 昭 )가 당에서 귀국할 때 일부러 신라에 들려, 산에서 수행하고 있는 엔노 오즈누를 만났다고 한다. 도쇼는 백제계로서 스이메이조는 백제와 동맹관계 에 있었지만 굳이 신라에서 만났다는 것은 수험도의 개조가 신라 산악에 있 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65). 히코잔류키( 彦 山 流 記 ) 에는 미륵의 화신은 천동( 天 童 )의 모습을 하고 있 다. 미륵신앙은 산악신앙과 더불어 신라의 대표적인 신앙이었다. 신라의 미륵 신앙은 토속신앙인 용왕신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신라에 서 미륵신앙이 유행하였다는 것은 진지왕대 국선인 미시랑이 하생한 미륵으 로 간주되었다는 삼국유사 의 기록과, 김유신의 무리를 용화향도라고 불렀 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미륵신앙은 화랑 제정과 함께 정치에 적용되어 국 정의 정신적 지주로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원동력이 된 미륵정토화 라는 이념으로 발전하였다 66). 하타씨는 특히 미륵신앙을 신봉하였다. 쇼토쿠 태자로부터 명받은 한국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모시기 위해 고류지( 広 隆 寺 ) 를 창건한 것도 하타노가와가쓰( 秦 河 勝 )이다 67). 한편 행렬을 이끌며 의례를 행하는 치고는 고대풍의 백색화장을 하는데, 이것은 화랑에게도 발견된다. 혜공왕4년(768) 당의 사신으로 신라에 왔던 고 음( 顧 愔 )의 관찰 기록인 신라국기( 新 羅 國 記 ) 에 의하면 귀인의 자제 중에 서 아름다운 사람을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이름하여 사 람들이 모두 높이 섬긴다. 라고 했다. 이처럼 화랑이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 63) 大 和 岩 雄 (2006) 秦 氏 の 研 究 大 和 書 房, pp.136 141 64) 엔노오즈누는 가모엔노키미오즈누( 賀 茂 役 君 小 角 )로 가모씨이며, 가츠라기잔( 葛 城 山 )계통의 가모씨( 賀 茂 氏 )이다. 계보에 의하면 이 가모씨는 후에 다카카모씨( 高 賀 茂 氏 )의 성을 가져서 음양도의 종가인 가모씨로 계승되었다. 65) 大 和 岩 雄 (2006) 앞의 책, pp.138 140 66) 김혜완(1978) 신라의 화랑과 미륵신앙의 관계에 대한 연구 수선사학회, p.101 67) 박규태(2010) 고대 교토의 한반도계 신사와 사원 연구 비교일본학제23집, pp.181 183
122 比 較 日 本 學 第 32 輯 (2014.12) 하는 것은 미륵불의 우미장엄한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여, 국토 인민의 면목 을 도화처럼 아름답기 위해서라는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68). 이상에서 시라야마신앙이나 수험도, 미륵신앙에 나타나는 하타씨나 신라화 랑과의 관련성에 관하여 언급하였는데, 호쿠리쿠 지역은 비교적 이러한 조건 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엣츄( 越 中 )지역은 하쿠산( 白 山 )을 비롯한 다테야마 연봉이 위치한 곳으로, 치고마이가 가장 많이 남아있 는 곳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이 것이 시모무라가모( 下 村 加 茂 )신사, 우나즈키 쵸아케(( 宇 奈 月 町 明 日 ), 구마노신사( 熊 野 神 社 )의 치고마이이다 69). 대부분 치 고부가쿠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데 기가쿠를 전제로 한 가미가타( 上 方 )계의 부가쿠가 수험가구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야마부시 신앙과의 관계 속에서 전 승되어 왔다 70). 이 중에서 시모가모무라신사( 下 村 加 茂 神 社 )는 도야마 공항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이미즈시( 射 水 市 )에 위치해 있다.(현지조사:2010년 9월 4일, 2014년 11월 10일). 신사 입구의 안내판에는 1066년 현재 위치에 세워졌으며 교토의 가모미오야( 賀 茂 御 祖 : 下 鴨 )신사의 어신영이었던 구라가키노쇼( 倉 垣 庄 )의 총사였던 곳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교토의 가모신사의 가모씨는 하타 씨와 관련된 성으로 하타씨혼케이쵸( 秦 氏 本 系 帳 ) 에 의하면 하타씨 여성이 화살에 감응하여 가미가모신사의 제신인 와케이카즈치노카미( 賀 茂 別 雷 神 )를 낳았고 그녀 자신은 시모가모신사의 제신 미오야노카미( 御 祖 神 )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가모 신사의 제사를 하타씨가 관장해 왔는데 가모씨를 사위로 맞이하면서 양도했다는 것이다. 71) 엄밀히 말하면 이 신사도 하타씨와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례: 시모무라모신사( 下 村 加 茂 神 社 )의 치고마이 시모무라가모신사 치고마이의 연행 방식에 관하여는 현재 전수스승인 이 가라시 키요시( 五 十 嵐 清 )씨의 인터뷰내용을 참조하도록 하겠다 72). 68) 박균섭(2006) 화랑제도에 대한 일본인연구자들의 시각비판 교육학연구44 2, pp.49 50 69) 国 指 定 文 化 財 等 データベース( 文 化 庁 ) 70) 富 山 県 教 育 議 員 会 (2006) 中 部 地 方 の 民 俗 芸 能 1 4 海 路 書 院, p.293 71) 박규태(2009) 앞의 논문, pp.252 254, pp.272 274 72) 인터뷰: 1014년 11월 10일
신라화랑 가무(歌舞)연구를 위한 일본 치고마이(稚児舞)의 현황 고찰 (전금선) 123 제가 사는 도야마현이미즈시(富山県射水市)는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가 계승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치고마이로서, 매년 9월3일과 4일의 아키 마쓰리(秋のお祭り)때 전통방식으로 새로 설치한 특별무대에서 행해집니다. 저는 올해부터 치고마이 전수스승(師匠)이 되었는데 이 지역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 4명을 선정하여, 오오치고(大稚児) 2명과 고치고(小稚児) 2명로 삼은 후, 8월20 일 신사에서 의식을 치른 후 2주간 매일 6시간 연습을 시킵니다. 당사의 치고마 이는 약 950년 전에 교토의 시모가모(下鴨神社)신사로부터 전해져 왔다고 알려 져 있습니다. 다른 곳의 치고마이와 차별되는 점은 전수스승으로부터 전수스승 에게 직접 전수되어 옛 춤이 전승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의상은 곡목마다 전 부 바뀌기 때문에 아주 아름다운 춤으로 부가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체를 통한 전수과정을 거치며 옛 원형을 유지한 춤이 지금 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의 치고마이는 땅을 밟지 않고 어른의 목 말을 타고 이동하거나, 나라시대 풍의 연지를 찍는 백색화장을 하는 등 옛 전통의 전형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다73). 이 지역의 산악신앙의 영향도 강 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74). 이미즈시(射水市)의 문화재 담당 마쓰야마 미쓰히로(松山充宏)씨로부터 입 수한 시모무라가모신사의 연중행사(下村加茂神社の年中行事)75)의 영상과 현 지조사를 참고하여 연행 형태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먼저 오전 1시에 제전에 봉제를 거행한 후 어른 어깨에 타고 신사로 향한다. 이때 다음해 치고로 선 정된 장대 잡이 소년이 선두에서 길을 인도한다. 2시부터 호코노마이(鉾の舞) 에서 고쵸노마이(胡蝶の舞)까지 6곡을 춘 후, 나카이리(中入り)하고 연달아 3 곡을 춘다. 짧게는 5분 길게는 9분으로 총 3시간 30분동안 치고들은 의상을 바꾸며 9곡을 피로한다. <표. 4> 사례: 시모무라모신사(下村加茂神社)의 치고마이(필자 작성) ① 창춤(鉾の舞) 소치고2명 첫 연목으로 무대를 정화하는 춤. 나무로 된 창을 들고 악귀를 퇴치하는 춤이다. 창을 휘두르는 모양을 천지인을 상징, 9곡 중 가장 길다. (관찰: 창을 세워 원을 크게 3번 그린다. 창을 위아래로 3번 그린다. 갑자기 빨라 지며 창을 들고 왼쪽 오른쪽 옆으로 뛴다.) 73)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文化庁) 74) 富山県教育議員会(2006) 中部地方の民俗芸能1 4 海路書院, pp.293 294 75) 地域伝統芸能等保存事業(2008), 下村加茂神社の年中行事DVD, 有限会社ビデオワーク
124 比較日本學 第32輯 (2014.12) ② 린가(林歌) 대치고2명 소치고 2명 총 4명 가장 짧은 연목으로 무악의 린가의 영향을 받은 춤이다. (관찰: 달려서 무대 하고 원을 그리며 뛴다. 일렬로 서서 오른팔로 원을 그리고 왼쪽에서 반복한 다. 뒤꿈치 들었다 놓으면서 춤을 추며 앉아서도 춘다.) ③ 고나소리(小奈曽利) 소치고2명 나소리에서 만들어진 춤으로 우아하고 무게감이 있으며 동작은 활발하며 부 드럽다.(관찰: 두명이 마주 보고 앉는다. 부채 들고 서서 두 명이 서로 잡아 당 기는 동작, 튕겨나가는 동작, 부채 잡고 돌기 등을 하며 원을 그리며 뛰다가 퇴장한다.) ④ 가코노마이(賀古の舞) 대치고 2명 칼과 활을 들고 힘차게 추는 춤으로 악령을 퇴치하는 춤으로 알려져 있다.. (관찰: 칼을차고활을어깨에매고춤 한발을세게밟는동작 활을쏘는동작 앞뒤로 한 번씩 발을 힘차게 구르는 동작이 많음) ⑤ 덴노마이(天の舞) 대치고 1명 유일한 독무로, 가면을 쓰고 춘다. 리드미컬한 변화가 많은 춤이다.. (관찰:: 오른손무구를들고원을그림 상체를숙이는동작이많음 숙이고앞으로나 갔다가 원을 도는 동작 많음 상체 숙여 앞으로 뛰었다가 양팔을 돌리며 위로 가는 동작 반복 ⑥ 고쵸노마이(胡蝶の舞) 대치고2명 소치고2명 무악의 고쵸에서 발생한 춤으로 가장 유명하다. 등에 날개를 달고 국화관을 쓰고 모란꽃을 들고 춘다. (관찰: 우아한 앞으로 뛰어서 나가서 한발씩 뒤로 물러나는 형태가 많음 나비를 형상화 함 어린이다운 춤) ⑦ 오오나소리(大奈曽利) 대치고 2명 소나소리에 대비하여 대나소리라고 부른다. 가면과 붉은 색 가발을 쓰고 춤 춘다. 활달한 동작이 많은 해학적인 춤이다.. (관찰 한발을 까딱까딱 하는 것 이 특징이다. 원을 그리며 뛰면서 퇴장한다. 두 마리의 용이 같이 노는 듯한 해학적인 춤) ⑧ 에비스노마이(蛭子の舞) 소치고2명 에비스신이 낚시를 하는 춤으로, 피리 반주에 맞추어 천천히 바다에 근접하 는 동작이나 낚아 올렸을 때 기뻐하는 동작 등을 한다. (관찰: 뛰는 동작과 모 방 동작이 많고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가장 어린이다운 춤이다.) ⑨ 바이로(陪臚) 대치고2명, 소치고2명 무악에서 발생한 곡으로 칼과 방패를 이용한 용맹스러운 춤이다. 마지막 동 작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관찰 네 명이 모였다 퍼졌다 하며 양손의 무구로 원을 그리거나 왼쪽 오른쪽으로 돌린다. 제자리에서 돌 고 한발 올리는 동작이 한국과 유사하다.)